- 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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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에 대해서
빈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럽과 미국의 여러대학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많은 전문 연구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현대과학의 철학적 의미를 주제로 폭넓게 글을 쓰고 강의와 강연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신과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The Taoof Physics」「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TheTurning Point」「탁월한 지혜 Uncommonwisdom」, 그리고 1992년 아메리칸 북 어워드를 수상한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Belonging tothe Universe」(이상 범양사출판부 펴냄)의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서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내가 저자라면
인류의 사상사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사상의 조류가 만나느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풍요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말로 시작되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은 책의 제목이 제시하듯이 동양과 서양의 사상의 차이와 공통점 그리고 두 사상이 만났을 때의 이상향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이 만남을 정체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으로의 요소로서 보고 있는데 그것은 동양의 노자가 말하는 “끊임없는 변화”만이 이 세계의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의 매력은 서양에서 교육받은 물리학자가 현대 물리학의 관찰방법으로 동양사상정수를 관찰해 보고, 그 공통점을 찾아가는 데 있다.
이 책은 동양사상과 비슷한 현대 물리학이 일어난 새로운 자연관을 상세히 서술하며, 그 새로운 세계관이 동양의 고대 사상속에 담겨있는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비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자는 동양 고대 사상의 자연관을 지적인 면에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실천에 있어서도 동양의 가치관에 깊이 동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세계관은 서양의 주도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산업 문명의 중병을 지적하며 서양학계의 맹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가장 뛰어난 경제원리를 만들어 냈었던 그들의 서구문화가 벼랑끝에 몰려 있다고 보는 것일까? 조금 이른감은 있으나 저자는 서구세계가 동양의 정신을 바로 이해하고 더 나은 장래를 펼쳐나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에서 저자 오경웅은 동양의 사상에 대한 연구가 서구에서 더 활발해 지고 있고, 더 나은 사상이 서구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책의 저자를 통해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책은 동양사상과 비슷한 현대물리학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는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자연관은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과는 극히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세세하게 증명해 보여준다.
오랜 시간동안 서양의 정신을 지배해 온 고전 물리학의 이론과 현대물리학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들의 사고가 어떻게 발전해 왔고, 고전 물리학의 정신적 지배구조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큰 흐름 그것이 물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또한 저자는 동양사상을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 해박함에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힌두교, 불교, 도교, 역사상등 동양사상을 통틀어 신비주의로 명명하며 각 종교관의 특성들을 알기 쉽게 풀어준다. 아마도 동양사상을 잘 모르는 서양인들을 위한 책으로 쓰여졌기에 좀 더 쉬운 풀이가 필요했을 것이기도 하겠다.
저자는 현대 물리하고가 동양사상을 집필하면서 때로은 내가 글을 쓴다기 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신비적 동양사상은 적어도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막연하고 불가사의하며 대단히 비과학적인 것과 잘못 연관되어 왔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개념과 신비주의 개념 사이에서 발견되는 심오한 유사상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데 현대 물리학자는 저자를 통해서 서양과 동양의 사상의 유사점을 찾아냄으로써 서구사회에 동양사상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주체가 된 것이니 그로 인해 서양과 동양이 통하게 되었다고도 볼 일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자연관적 철학관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동양의 사상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저자는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고 보았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며, 한 길은 부처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그들의 연구 성과에 지성과 도덕적인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하며 오늘날의 세계가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를 고민하는 듯하다.
그는 이 책의 한계를 동양의 경험적인 지혜에 있다고 한다. 동양의 종교적 철학자들은 추론적인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말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무시간적이며 신비적인 인식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이러한 인식과 현대 물리학의 관계는 다른 어떤 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주용 이론들과 모델들이 동양 신비주의의 견해들과 내용이 일치하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독자로 하여금 수시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물리학자들과 신비가들의 견해 사이의 유사성은 서로 다른 연구 방법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다른 유사성들을 상기할 때, 한층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동양의 연구 방법은 철저하게 경험적이다. 물리학자는 그의 지식을 실험으로부터 유도해 내고, 신비가는 명상적 통찰로부터 끌어낸다. 둘 다 관찰 행위인데, 이 두 영역에 있어서 이런한 양자의 관찰이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실험 아니며 경험이 그것이다. 서양과 동양의 큰 차이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가 찾은 동양의 신비주의는 서양의 세계관의 대안이라 볼 수 있겠다. 실험을 토대로 한 객관성, 기계주의에 입각한 발전이 오늘날의 이기적인 병패로서 인류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동양의 세계관은 관계를 기본 전제로 하기에 새로운 대안적 관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두개의 다른 관점들이 접하는 부분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음을 주장한다. 현대 물리학의 지혜가 동양의 그것과 가까워 지고 있는 이때, 동양은 서양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 보고 있는가? 중국의 고언으로 부연하자면 신비가들은 도의 가지가 아니라 도의 뿌리를 이해하고 있고, 과학자들은 뿌리가 아니라 그 가지를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학은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신비주의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둘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신비주의적 경험은 사물의 가장 깊은 본성을 이해하는 데 불가결하고 과학은 현대 생활에 긴요한 것이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바로 신비주의적 직관과 과학적 분석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저자는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그의 이상향으로 독자들을 유도한다.
과학적 지식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데 그치고 만다. 오늘날의 물리학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이론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깨닫기를 희망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계론적이고 단편적인 세계관에 여전히 근거를 두고 있는 사회를 지지하고 있다. 과학은 그런 견해를 넘어서서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료인 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우주의 통일성을 내다 보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그런 사회 경제적 문화혁명이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자연의 전체성을 경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역량이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있는가에 그 희망이 달려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사상의 summery book 이라고 칭하고 싶다.
왜냐하면 변경의 연구원 과정속에서 접했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들과 신화속에서의 관념들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거쳐 강의라는 책에 이르기까지 접한 수없이 많은 동양 사상들
저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물리학적인 관찰능력으로 양대사상의 발상과 기원을 연구해 나아갔다.
그 세심한 관찰의 결과물은 서양과 동양을 이어주는 어떤 끈이 되어 주었다.
3월부터 서양과 동양의 세계들을 책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이 서로 오묘하게 엮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느꼈다.
잘 짜여진 요약서를 본 기분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구교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로능ㄹ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뚜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35]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의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36]
만약 오늘날 물리학이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세계관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2,500년 전의 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겠지만 서구 과학의 나선상식 발달 자취를 따라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의 신비적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주지주의적 사고의 인상적인 발전을 통해 융성하고 개화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점차 그 신비적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극동의 세계관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서구 과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고 다시 초기 그리스나 동양 철학의 관점으로 되돌아오고 있다.[37]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37]
물리학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37]
헤라클레이토스에 세차게 맞선 엘라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방향으로 과감히 나아갔다. 그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38]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심히 대립적인 관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의 개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39]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 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란느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39]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라는 아이디어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과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원전4,5세기 그리스 과학과 문화의 전성 시기 이래 2,000년 이상이나 서양사상을 사로잡는다.[39]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은 인간 영혼에 대한 문제와 신의 완전성에 대한 상념은 물질 세계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분명 물질 세계에 대한 흥미의 결여와 증세를 일관해서 그리스고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떄문이었다.[39]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싲가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이후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사변적인 아이디어를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졌다.[40]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그것은 신성한 법을 펄쳐 천상으로부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제적인 신의 이미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법으로서 보인 것이다.[40]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조냊한다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첫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인 본능 사이에 갈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그의 활동이나, 재능, 감정, 신앙 등에 따라서 수없이 쪼개진 많은 분야로 더욱 분열되어 갔고, 이것은 한없는 갈등을 일으켜 형이상학적 혼란과 좌절을 끝없이 유발시키는 것이다.[41]
오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일너 다른 조각들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를 자연과 인류 동포로부터 소외시켰다.[41]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42]
동양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며 시간과 변화를 본래부터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란 영겁토록 움직이고, 살아 있고, 유기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하나의 불가분의 실재로서 보이는 것이다.[42]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재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휠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44]
현대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 사상 사이의 유사성을 규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현대 수학의 고도로 정교한 언어로 표명된 정밀 과학과, 주로 명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들의 직관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신적 수련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45]
과학적 추상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우리의 개념 체계를 더 정확히 정의하고, 그것을 더욱 능률화시키며, 그 연결을 더욱 엄밀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54]
수학적 모형과 그 언어적 대응물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전자는 그 내적 구조에 있어서는 엄밀하고 일관성이 있지만, 그 기호들이 우리의 경험에 곧바로 와 닿지는 않는다. 반면에 언어적 모형은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지만 늘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하다. 이점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의 철학적 모형과 다를 바 없으며, 그래서 이 양자는 잘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55]
동양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체험의 기반 위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은 그 지지자들이 항상 강조하듯이 강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55]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는 계절과 인과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56]
경험의 반복이야말로 실제로 모든 신비한 수련에 필수적인 것이며, 신비가들의 정신적 지도의 목표인 것이다.[58]
직접적이고 비개념적인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마음의 준비야말로 모든 유파를 초월한 동양 신비주의와 동양적 생활 양식의 많은 국면에 걸친 주목적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오랜 문화사는 엄청나게 다양한 가계와 의식과 예술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말의 가장 넓은 뜻에서 명상이라고 불리 수도 있을 것이다.[60]
깊은 명상 속에서 마음은 완전히 깨어 있다. 실재에 대한 비감각적인 인지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와 모든 풍경, 기타 주위 환견의 인상들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분석 또는 해석할 수 있는 감각적 영상으로 취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결코 주의를 분산시키도록 허용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렇게 깨어 있는 상태는 습격을 예기하고 있는 전사가 잠시도 한눈 팔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극도의 기민한 상태와 다를 바 없다.[62]
‘시칸타자’는 긴장되거나 조급하지 않으며 분명 이완도 되지 않은 집중된 자각의 고양상태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 보고 있는 자의 마음이다. [63]
물리학에 있어 모든 기술의 근사한 본질은 계수화된 것이고, 여러 성공적인 단계를 거처 근사치가 개량됨으로써 진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65]
신화는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가장 가까운 것을 구현한다.[66]
깊이 있는 혜안을 지닌 힌두교도들은 이런 모든 신들이 마음의 산물이란 것과 신화적 이미지는 실재의 여러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66]
뉴턴 역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상호의 인력, 즉 중력에 의해서 야기되는 공간에서의 물리적 점들의 운동윽로 환원된다. 질점에 대한 이 힘의 효과를 정확한 수학적 형식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뉴턴은 미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들과 수학적 기술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이것은 대단한 지적인 업적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것에 대해 ‘아마도 지금까지 한 개인이 이룰 수 있었던 사고의 최대 진전이었을 것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뉴턴의 운동에 관한 방정식은 고전 물리학의 기초다.[83]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자연에서 작용하고 있는 모든 힘을,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 지성은, 만일 이 지성이 이러한 자료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풍부하면 가장 거대한 것들과 가장 미세한 원자들의 운동을 똑 같은 공식으로 파악할 것이다. 즉 그것에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미래도 과거와 같이 그 눈앞에 보일 것이다.[84]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고 마찬가지다.[90]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91]
공간과 시간의 개념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데 매우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것들의 수정은 우리가 자연을 기술하는 데 이용하는 전체계의 수정을 초래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다.[91]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전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빈 공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93]
리더퍼드가 원자들에 이 알파 입자들을 발사하였을 때, 그는 놀랍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고대로부터 믿어 왔듯이 원자는 딱딱하고 견고한 입자들이 아니라 극도로 미세한 입자인 전자들이 전기력에 의해 핵에 묶여져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광대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94]
전자와 원자핵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든 고체, 액체와 기체, 그리고 또한 모든 생명을 지는 유기체와 그와 관련된 생물학적 작용들의 근본을 이룬다.[102]
그리하여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는 본질적으로 항상 관찰자를 포함하는 역동적이며 불가분의 전체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공간과 시간, 독립된 대상, 원인과 결과라는 식의 전통적 개념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은 동양 신비가의 그거소가 매우 유사하다. 그 유사성은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 분명해지며 이 두 이론이 통합된 아원자적 물리학의 양자-상대론적 모델에서는 한층 더 강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따.[113]
서양인들은 힌두교의 신화를 다양한 모습과 육화를 통해 꽃피게한 남신과 여신의 그 황당무계할 정도의 엄청난 숫자에 그만 혼란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힌두교도들이 이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125]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127]
대승 불교가 아시아 전약으로 전파될 때 중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의 마음을 고취시킨 경전은 무엇보다도 이 화엄경이었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일을 한편으로 하고 인도인을 한편으로 한 대조는 너무나 커서 가히 인간 정신의 두 극점을 나타낸다고 말해질 정도이다.[135]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141]
양이 그 절절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143]
이처럼 대립자의 원초적인 한 쌍인 음과 양의 상호 작용은 도의 모든 운동을 인도해 주는 원리로서 나타난다.[146]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황의 소인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세가 역경을 보통 점술서의 차원을 넘어 지혜의 서로 끌어올린 것이다.[148]
인습적 지식과 이성에 대한 불신은 서양 철학의 다른 어느 학파에 있어서보다 도교에 있어서 한결 강하다.[155]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157]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161]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느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162]
혼돈의 상태가 아직 개발되지 못했을 때의 옛 사람들은 이 전세계에 속하고 있었던 평정한 정온을 함께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음과 양이 조화되어 평온스러웠고, 쉼과 움직임이 요란하지 않게 나아가고, 네 계절이 제작기 절기를 가지고, 단 하나의 사물도 해를 입지 않고, 요절하는 생물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지식을 가졌어도 사용할 경우가 없었다. 이런 것을 이른바 완전한 지일의 상태라 한다. 이때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런 행위도 없었고 끊임없는 자발성의 표현뿐이었다.[163]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대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169]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 그 본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이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흰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법신’, 도교에서는’도라’라 불린다.[176]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177]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한느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아원자 물리학의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의 물질의 구성 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번적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단지 전체의 와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동일한 견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177]
원자론은 세계를 독립적을 존재하는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184]
만물은 서로 의존하는 데에서 그 존재의 본서을 얻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185]
한 소립자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석 불능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상, 밖으로 다른 것들에 미치는 일련의 관계다.[185]
현대 물리학은 매우 다른 체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만물의 통일성에 대한 경험에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원자론에서는 동양적 신비가의 세계관으로 향하는 커다란 진전을 보여 왔다. 양자론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대상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관찰자의 개념을 참여자로써 대치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세계를 기술 하는 데 인간의 의식을 포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깨닫고 있다.[190]
동양의 신비주의에서는 이 여성적 잉태가 계발되었으며, 또한 인간성의 두 국면간에 하나의 통일성이 추구되었다. 노자의 말에 의하면 완전히 깨달은 인간이란 “남성적인 것을 알고서도 여전히 여성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197]
고차원적인 경험은 각기 그 중심과 단계가 다른 의식들의 체험을 통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3차원적인 의식의 단계에서 이루어진 어떤 명상의 경험은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더군다나 그것이 논리의 체계 속에 들어가면 사고 과정에 한계를 더 부여함으로써 그 표현의 가능성을 더욱 감소시켜 버리게 된다.[200]
상대성 원리가 만족스러운 것인지 어떤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즉 이 이론의 방정식이 모든 좌표계에서 똑같이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이론은 어떤 좌표계, 또는 ‘관계 구조’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내용이 다른 좌표계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의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 혹은 ‘변형’이라고 불리는 것은 고전 물리학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224]
동양의 신비주의에는 그 어느 곳에나 실재의 ‘시공 특성’에 관한 강한 직관력이 일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과 시간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것은 상대성 물리학의 놀라운 특성으로, 재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229]
화엄의 중신사상은, 우주는 그 본성이 언제나 계혹하여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영원히 운동의 상태에 있는 것, 즉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250]
오늘날에 있어서 우주론의 발전은 멀리 떨어진 우주의 부분들이 없다면 이상적인 상황들은 지속될 수가 없다는 것을, 즉 만일 멀리 잇는 우주의 부분들이 제거된다면 공간과 가하학에 관한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완전히 소용없게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규모적인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274]
신유학파들은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자장의 개념과 가장 놀랄 만한 유사성을 갖고 있는 기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양자장처럼 기는 공간의 도처에 미만해 있으며 견고한 물체로 응축될 수 있는, 묽으며 감지될 수 없는 형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가 응축될 때 그것은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때에는 개별적인 것들의 형체가 된다. 거것이 분산될 때에는 불가시적인 것이 되고 형체들도 없어진다. 이럴진대 그것이 응축되었을 때 그것이 다닞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흩어져 있을 때 성급히 그것이 존재하니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279]
태허가 기로 가득하 있다는 것을 알 때 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290]
직관에 포함되어 앎은 완전한 것이지만 말로 소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2,000여 년 전에 노자가 아래와 같이 말하였을 때 마음속에 품었던 앎일 것이다.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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