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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30일 11시 5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저자이다.
193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프리초프 카프라는 1966년 비엔나 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대학교, 캘리포니아 대학교,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센터, 런던대학교 등에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했으며, 버클리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마치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것처럼, 그는 어느 날 해변가에 앉아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자연과 물질의 원리’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이를 동양사상과 결부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카프라는 그때의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책이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이다. 불과 그의 나이  36세의 일이다. 이 책은 카프라의 이름을 전 세계로 알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이론’을 넘어 ‘사유체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동양의 사고방식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며, 이것은 곧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가 과학에서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프라는 그의 첫 번째 책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동양 사상에 들어 있는 전일적이며 역동적인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를 상세히 비교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두 번째 책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을 통해 현대 물리학에서 깨달은 그 새로운 세계관이 다른 학분 분야에로 확산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전일적 또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뿌리 박은 시스템적 접근이 생물학, 심리학, 생의학, 경제학 등 여러 가지 자연 과학 및 사회 과학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음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데카르트-뉴턴적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아직도 넘어서지 못한 견해들이 그들 학문의 발전을 얼마나 저해하고 있는가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최근 지구의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카프라는 《생명의 그물 (The Web of Life)》 책에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 전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중심으로 생명의 구조와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도 카프라 박사는 지난 30여년 동안 현대과학의 철학적.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왔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등에서 수많은 TV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토크쇼 등에 출연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서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8] 제 2판 역자 서문
서구 문명을 과거 300여 년간 주도해 온 과학적 방법은 주로 공간적 분할과 분석의 방법으로 一에서 多를 보는 것이었지만, 동양의 철인들은 주로 명상과 직관의 방법으로 多에서 一을 보려 했던 것이며, 시간의 축에서 생멸하는 자연을 창조적인 생명의 원리(즉 유기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와 코스몰로지(cosmology)의 세계를 다루게 된 현대 물리학은 물질 세계가 극미로부터 극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하나 생성과 소멸의 연속임을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자연은 기계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의 원리로 자연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1] 제 1판 역자 서문
고전 물리학은 인간이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합리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전지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고전 물리학을 키워 온 기본 개념들, 즉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인과율, 질량적 물질 등등의 고전 물리학적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하여 모조리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그 허구성이 드러났으며, 고전 물리학의 철칙이었던 인과율은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양자 역학을 수립함으로써 원자의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전락하였고, 고전 물리학에서 생각했던 단순한 질량적 물질은 양자 물리학에서는 물리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기 모순에 가득 찬,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11] 불교 등의 동양 사상은 주관주의에 입각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마음이 인식의 주체이므로 객관적 존재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고전 물리학이 그 사변적 방법으로 一에서 多를 보려 하고 물체를 3차원 공간에 현존하는 것으로만 보는 데 반해서 동양사상은 그 직관적 방법으로 多에서 一을 보려 하고 일체를 생멸하는 변화로서 초월적으로 보는, 즉 4차원적 시공의 차원에서 보려 한다.

[12] 19세기 말경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자장 현상의 이론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관찰의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를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란 다른 위치에 있는 각기의 관찰자에 따라서 동시성과 흐름을 달리하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모든 관찰자에 공통되는 절대 시간이란 없는 것이 상대성 이론을 입증했다. 또한 물체를 담고 있는 각기의 공간은 각각 다른 곡률에 의하여 왜곡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 동질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 즉 절대 공간은 없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물리학적 관측은 그 관측의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관측차에 차가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 관측차의 문제를 해소하고 모든 관측에 통용될 수 있는 공변식을 마련했으며, 또한 고전 물리학에서 독립된 두 법칙이었단 ‘질량 불변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하나의 등식으로 묶었고, 이 등식이 그 후 원자력 발전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순수 객관주의의 물리학에 처음으로 관찰자의 입장, 즉 주관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은 더 깊고 더 넓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 물리학은 여기에서 한발 더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원자와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는 그 입자들을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로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에너지의 일시적 형태, 또는 에너지 장의 변화의 ‘과정’이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관찰자의 설문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주고, 어떠한 대답과 대답 사이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따라서 양자물리학은 그 관찰의 대상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그 ‘존재’의 기술로써 양자 물리학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관찰의 경험을 정리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관찰자는 그 설문의 방식을 통하여 관찰 대상의 현상에 참여하게 되므로 관찰자는 자연의 연극에 있어서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객관적 존재의 문제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와 밀착하게 되며, 주관과 객관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서 작용한다.

[13] 많은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인 등이 현대 물리학의 혁신적 의의에 대하여 여러 저서를 냈지만 그 중에 더러는 아전인수적 속단을 내린 것도 있으며, 아직도 현대 물리학을 뒷받침할 만한 사상적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고전 물리학이 데카르트나 칸트를 가졌다면 현대 물리학은 새로운 데카르트나 칸트를 찾고 있으며, 이 책의 저자 카프라 박사는 이것을 동양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찾아본 것이다.

[15]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와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16] 현대 물리학은 별들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우주의 불인 핵융합의 열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은 인간들에 의하여 대량 학살을 초래할 수 있는 핵무기로 발전되었고, 이에 물리학의 태두들은 많은 회의와 양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문명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모순에 그 죄가 있는 것이지, 이 천상의 불을 지상에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16] 고전 물리학을 뒤따른 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에 수반한 결정론적, 세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경시하는 풍조를 일게 하였으며,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심화되는 이 물심의 불균형은 드디어 현대 문명에 난치의 중병을 초래한 것이다. 동양의 현인들이 정적을 시간을 찾아 스스로의 마음의 수련에 주력한데 반하여 현대인들은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인 고독을 두려워하며, 매스컴과 광고의 홍수 속에 불어만 가는 물욕과 갈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길 없고, 공간적 시간적 사회의 분열과 단층은 갈수록 심화되어 불안과 고독감은 가중되며,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져서 진정제와 수면제의 판매량과 정신 분석의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가고 있다.

[19]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집필하면서 때로는 내가 글을 쓴다기보다는 나를 통하여 글이 쓰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20] 그 흐름은 서양문화- 서양사상과 감정, 가치관과 태도, 사회와 정치 구조-의 심각한 불균형을 중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서양문화는 꾸준히 陽 또는 남성적 가치와 태도를 선호해 왔고, 그와는 상보적으로 대립하는 陰을 가벼이 보았다. 서양인들은 융합보다는 자기 주장, 종합보다는 분석,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 종교보다는 과학, 협동보다는 경재, 보전보다는 확장에 편중해 왔다. 이 같은 일방적인 발전은 이제 극히 위험한 단계, 즉 사회적, 생태계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 차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을 위하여 물러난다”는 중국의 옛 격언을 예증하는 거대한 진화 운동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21] 현대 물리학의 세계관과 동양 신비주의의 세계관 사이의 심오한 조화를 깨닫는 것이 곧 보다 큰 문화적 전환의 뗄 수 없는 일부며, 거기서 우리들의 사상, 지각과 가치관을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게 될 새로운 실재관이 출현하게 된다. 나는 나의 두 번째 저서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황(The Turning Point)>에서 이와 같은 문화적 전환의 다양한 측면과 함축을 탐색했다.

[21]과학자들이 자연에서 관찰하는 패턴은 그들의 정신 패턴, 즉 그들의 개념, 사상과 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이룩하는 과학적 성과와 그들이 연구하는 기술 응용법은 그들의 정신 형태에 따라 조건지워진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지성과 도덕 양면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 현대 물리학의 성과는 과학자들이 가야 할 전혀 다른 두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한 길은 부처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폭탄으로 이어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것은 과학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시대에 부처의 길, ‘가슴이 있는길 (path with a heart)’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24] 제 1판 저자 머리말
늦여름의 어느 날 오후, 나는 해변에 앉아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며 내 숨결의 리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또한 원소들의 원자와 내 신체의 원자들이 에너지의 우주적 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리듬을 느꼈고, 그 소리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이 바로 힌두교도들이 숭배하는 춤의 신인 ‘시바의 춤(Dance of Shiva)’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5] 시초에는 마음이란 게 어찌하여 자유롭게 유동하는가, 또 정신적인 직관이 어떤 작위적인 노력 없이 의식의 저 깊은 심연으로부터 어떻게 떠오르는가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준 ‘정신적인 씨앗(power plant)’이 내 사색의 실마리를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첫 경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수년간의 정밀한 분석적인 사고 끝에 정신적 직관이 나에게 떠오르자 그 압도적인 감격에 나는 눈물을 흘렸으며 그 순간 나는 카스타네다(Castaneda)처럼 그 인상을 종이 쪽지에 황급히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   

제 1부. 물리학의 길

1.현대물리학 – 마음으로 가는 길

[33]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 무례한 일이 아니다.
모든 길을 가까이, 세밀하게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없는 것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환(Don Juan)의 가르침>

[35]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36] 서구 과학의 나선상식 발전 자취
초기 그리스의 신비적 철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주지주의적 사고의 인상적인 발전을 통해 융성하고 개화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점차 그 신비적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극동의 세계관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 자연)’라고 불렀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physics)’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38]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우주를 부단히 변화하고 영원히 ‘생성’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세계 내의 모든 변화는 대립자들의 역학적이며 주기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가르쳤으며, 대립자의 쌍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았다. 이 대립하는 힘들을 내포하면서 초월하는 통일체를 그는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이 통일체의 분열은 엘레아(Elea)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학파는 제신과 인간의 위에 신성한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 원리는 처음에는 우주의 통일체와 동일시되었으나 후에 와서는 이 세계의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지적이요, 인간적인 신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끝내는 정신과 물질의 분열, 즉 서양 철학의 특성이 된 이원론으로 이끌어 간 사조가 시작된 것이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그의 기본 원리를 ‘존재’라고 부르고 그것을 유일 불변의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세상에서 보는 듯한 변화란 단지 감각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철학으로부터 모든 변화하는 속성의 주체로서 불멸의 실체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서양사상의 기본 개념의 하나가 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존재라는 이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생성 이념을 융화시키기 위하여 불변의 실체를 갖는 어떠한 것 속에 ‘존재’가 현시된다고 보고 이것의 결합과 분리가 이 세계 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물질은 몇 개의 ‘기본적 구성체’로 만들어져 있다고 보아싿. 이것들은 빈 공간 속에 떠돌고 있는 완전히 피동적이며 근본적으로 죽은 입자인 것이다. 그 운동의 원인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물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적인 근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외부의 힘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곤 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서양사상의 기본 요소가 되는 마음과 물질,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을 이루게 된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라는 아이디어에 일단 접하게 되자, 철학자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세계, 즉 인간의 영혼과 윤리의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고대의 과학적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조직화 되었는데, 그는 그 이래 2000년 동안이나 서구 우주관의 기초가 된 한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이 그토록 오랫동안 도전을 받지 않고 내려온 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갈릴레오는 실험적 지식을 수학과 결부시킨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신 물질 이원론의 극단적인 공식화를 초래한 철학 사상의 발전이 근대 과학의 탄생을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 공식화는 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는 자연을 마음과 물질이란 두 개의 분할되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근본적으로 구분한 입각점 위에 섰다. 이 ‘데카르트적’인 분할은 물질을 즉은 것으로, 자신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고,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조립된 제각기 다른 객체의 군집으로 보도록 허용했다. 아이작 뉴턴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의 기계론적 역학을 구축함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기반을 다졌다. 뉴턴의 이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모든 과학 사상을 지배했다. 이리하여 자연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자연의 기본 법칙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원 불변한 신의 법으로서 보인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은 서양의 일반적 사고 방식에 끼친 영향도 지대한 바 있다.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말은 서양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전체적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동일시하게 이끌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분할의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육체 속에 내재하는 고립된 자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은 육체 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그 육체를 통어해야 한다는 헛된 과업이 주어지게 되고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조각난 관점은 나아가 사회에까지 확장되어 저마다 다른 국가, 인종, 종교, 정치 집단으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이 정말 다른 조각들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일련의 사회적, 생태적, 문화적 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여겨진다.

[41]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2] 운동과 변화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이기 때문에 그 운동을 일으키는 힘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처럼 객체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의 본원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신성에 대한 동양의 이미지는 이 세계를 위에서부터 지배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내부에서 통어하는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2. 아는 것과 보는 것
[48]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라는 말에서처럼 특히 우리를 가르쳐 온 현대 물리학에서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실재 그 자체보다 훨씬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 개념과 상징들을 실재 그 자체로 곧잘 혼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미혹을 떨쳐 버리게 하는 일이 바로 동양 신비 사상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달과 손가락 비유)

서양에서는 어의론자인 알프레드 코지프스키(Alfred Korzybski)가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힘찬 슬로건으로서 똑 같은 견해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50] 이 실재를 道라고 부른 노자는 <도덕경>의 첫 줄에서 똑 같은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 사실은 일상의 신문을 읽어 봐도 분명한데 – 인류는 근 2,000년 동안 그 합리적 지식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더 현명해지지 못했다는 사실로 절대적 지식은 언어로써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54] 과학적 추상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리는 그 대가도 치러야 한다. 우리의 개념 체계를 더 정확히 정의하고 그것을 더욱 능률화시키면, 그 연결을 더욱 엄밀히 한다면 그것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코지프스키의 지도와 영토의 비유를 다시 한 번 쓴다면 일상 언어는 그 본래의 부정확성 때문에 영토의 구부러진 모양을 어느 정도 따를 수 있는 어떤 융통성을 가진 지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그것을 더욱 엄격하게 한다면 그 융통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며 수학언어는 실재와의 연결이 희박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그 기호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관계가 불명하게 된다. 약간 모호하고 부정확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언어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수학적 모형과 이론들을 보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5] 다음과 같은 선의 명구가 있다.
‘네가 그것을 말하는 순간 그 표적을 잃어버린다.’

[57] 불교의 모든 종파에서는 본다[見]는 것을 안다[識]는 것의 기초로 여겼다. 자아 실현을 위한 불교적 처방전인 팔정도의 첫 항목이 正見이고 그 다음 正識이 뒤따른다.

[59] 선불교의 학도들은 그네들의 ‘본래 면목’을 되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이 본래 면목을 돌연히 ‘기억해 내는 일’이 곧 개오인 것이다.

[60]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통찰은 보통 지극히 짧은 순간에 한한다. 동양적 신비주의에서는 그렇지 않고 그것이 긴 기간으로 연장되어서 궁극적으로 부단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위한 마음의 준비야말로 모든 유파를 초월한 동양 신비주의와 동양적 생활 양식의 많은 국면에 걸친 주목적이 되고 있다.

[62]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 노자

[62] 선의 대가 야수타니 – 선의 명상법 ‘시칸타자(Shikan-taza)’
‘시칸타자’는 긴장되거나 조급하지 않으며 분명 이완도 되지 않은 집중된 자각의 고양상태이다. 그것은 죽음을 마주 보고 있는 자의 마음이다. 고대 일본에서 곧잘 있었던 것과 같은 검도의 칼 겨룸을 당신이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상대방과 마주 섰을 때 당신은 한치의 틈도 없이 노려 보면서 심신을 다잡아 조일 것이다. 만약 일순이나마 방심하면 당신은 즉각 베일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이 감각적인 인상에 홀리지는 않는다.

[68] 동양적 신비가들이 그들의 지식을 말 속에 담아 표현할 때마다 그것이 신화나 상징이나 시적 이미지나 역설적인 표현의 도움을 입더라도 그들은 언어와 그 ‘직선적’사유에 의해 야기된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현대 물리학도 그 언어적 모형과 이론에 관한 한 똑 같은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들 또한 단지 근사치일 따름이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부정확한 것이다.

3. 언어를 초월하여
[77] 무한히 작은 세계로의 이 여행에서 철학적 견지에서 보아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그 첫걸음, 즉 원자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였던 것이다. 원자의 내부를 조사하고 그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과학이 우리가 가진 감각적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논리와 상식에 그의 절대적 확실성을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현대 물리학의 모형과 이미지가 동양 철학의 그것과 동류가 되기에 이른다.

4. 새로운 물리학
[82] 절대적 공간(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 절대적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뉴턴의 세계의 요소들은 물질적 입자들이었다. 뉴턴은 그것들을 모든 물질을 만드는 작고 견고하며, 파괴할 수 없는 대상물이라고 간주했다. 데모크리토스와 뉴턴적 원자론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후자가 물질적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은 매우 단순하며, 오직 입자들의 질량과 상호거리에만 의존한다. 그것이 중력인데, 그것은 그 작용을 받는 물체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거리에 상관없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뉴턴은 보았다.

[84] 자연의 기계론적 견해는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거대한 우주 기계는 완전히 인과적인 것, 결정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이 엄격한 결정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된 나와 세계의 근본적인 구별에 그 철학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의 결과로 세계는 객관적으로, 즉 인간이라는 관찰자에 관해 전혀 언급함이 없이 기술될 수 있다고 믿어졌고, 자연에 대한 그러한 객관적인 기술이야말로 모든 과학의 이상이 되었던 것이다.

[85]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는 <천체 역학>이라 불리는 5권으로 된 방대한 저술을 적어 뉴턴의 운동 법칙이 태양계의 안정성을 확실히 하고 우주를 완전한 자율적인 기계로서 취급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그가 그 책의 초판을 나폴레옹에게 증정했을 때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라플라스씨 당신은 우주의 체계에 관해서 이 방대한 책을 썼는데, 그 창조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들 말하던데”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라플라스는 “저는 그런 가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라고 무뚝뚝하게 응답하였다고 한다.

[86] 뉴턴이론의 반전
1) 전기 및 자기적 현상의 발견과 탐구 – 패러데이 (Faraday, Michael)와 맥스웰(Maxwell, Clerk)
뉴턴적 견지에서는 힘이 그 작용하는 물체와 단단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힘의 개념이 그 자체의 실재를 갖고 물질적인 것들과 아무런 관계 없이도 연구될 수 있는 훨씬 미묘한 장의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빛이 파동의 형태로 공간을 통과하는 급속히 교체하는 전자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 전기 역학이라 불리는 이 이론의 정점을 이룬다. (뉴턴 역학의 기반에서) 맥스웰 자신은 전자기파를 에테르의 탄성파로 해석하려고 했다.
: 근본적 실체는 場이지 역학적 모델이 아닌 것을 최초로 인지한 사람은 아인슈타인

[90] 상대성 이론과 원자 물리학이 각각 발전하게 되자 뉴턴적 세계관의 모든 주요 개념들, 즉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기본적인 고체 입자, 물리 현상의 엄격한 인과성, 자연의 객관적 기술이라는 이상 등은 산산이 부서졌다.

[90] 아인슈타인은 자연 본래의 조화를 굳게 믿었고, 그의 과학적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가장 깊은 관심은 물리학의 통일된 바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전 물리학에서는 별개의 두 이론인 전기 역학과 역학의 공동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이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다.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연속체를 형성한다… 이 수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정지해 있는 물체라 할지라도 그 질량 속에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유명한 등식 E=mc2에 의해 주어진다. 이때 C는 빛의 속도이다.

[92]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3차원 공간이 실제로 휘어져 있고, 그 만곡이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장에 의해 야기됨을 말해준다. ..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는 모든 측정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전 구조가 우주 안에서의 물질의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빈 공간’의 개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96] 양자론적 개념들은 물리학자들의 상상력에 대해서 실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양자론은 이제 이러한 입자들조차 고전 물리학적인 견고한 물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물질의 아원자적 단위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때때로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성은 또한 전자기파 혹은 입자의 형태를 취하는 빛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98] 양자론은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이 세계를 분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물질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 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난다.

[99] 물체에 견고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원자 속에는 대항하는 두가지 힘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가능하면 가까이 묶어 두려는 전기력에 의해 전자들이 핵에 매여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주위를 맴돎으로써 그 제한에 반작용을 하는 것인데 그것들이 핵에 단단히 묶이면 묶일 수록 그 속도는 더 높아진다. 마치 빨리 회전하는 프로펠러가 원판처럼 나타나듯이 원자를 고정된 구처럼 나타나게 한다.

[108] 상대성 이론은 질량은 어떤 실체 같은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그러나 에너지는 활동 또는 작용과 관련된 동적인 양이다. 입자의 질량이 일정한 양의 에너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은 입자가 이제는 정지된 물체로서 이해될 수 없고, 역동적 모형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입자의 질량으로 나타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120]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Atman)’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121] 힌두 신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의 자기 희생에 의한 세계 창조라는 주제가 반복하여 나온다. – ‘거룩하게 하다’는 원래 의미에서의 희생에 의해서 – 신은 이 세계가 되고, 종국에 가서는 또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 이 신성의 창조적인 활동은 ‘릴라(lila)’, 즉 신의 유희라고 불리며, 이 세계는 그 성스런 유희의 무대로 간주되는 것이다. 브라만은 스스로를 세계의 형상으로 변용시키는 가장 위대한 마술사이며, <리그 베다>에서는 ‘마야(maya)’의 본래 의미인 ‘창조적인 마력’으로써 이 공업을 수행한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들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122]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거룩한 ‘릴라’는 율동적이고 힘찬 유희인 까닭에 이 마야의 세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다.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Karma)’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개념이다.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우리가 단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마야의 그 주술 아래 놓여,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에 사로잡혀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기타 경전

[123]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moksha)’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이다.

[124]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숭배되는 세 신은 시바(Shiva)와 비슈누(Vishunu)와 성모이다. 시바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인도 최고의 신들 중 하나다. 그가 브라만으로 충만된 인격신으로 현신할 때 ‘마헤스바라(Mahesvara)’, 즉 상제신으로 불린다. 그는 또한 하나하나 별개의 모습으로 신성을 체현시킬 수 있는데, 그 가장 유명한 시현은 ‘나타라자(Nataraja)’, 즉 무도자의 왕이다. 우주의 무도자로서의 시바는 춤을 추어 우주의 끝없는 율동을 유지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이다.

비슈누 또한 여러 가지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가바드 기타>의 크리슈나 신이다. 대체로 비슈누의 역할은 이 우주를 보존하는데 있다.

이 삼위 중 세 번째 신이 샤크티(Shakti), 즉 성모로서 자신의 여러 많은 형태를 가지고 이 우주의 여성적인 에너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여신이다.

[127]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이 세계의 기운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해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nirvana)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막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

[129] 제1성제는 인간 상황의 두드러진 특성인 ‘두카(duhkha)’, 즉 고뇌 또는 좌절이다.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에 유래한다.
제2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trishna)’,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제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라(윤회)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제4성제는 일체고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다.

[133] 공 자체는 단순한 無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이다.

[134]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불교 사상의 절정은 동명의 수트라에 기초를 둔 아바탐사카파(Avatamsaka, 화엄종)에서 달성되었다. …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한편으로 하고 인도인을 다른 한편으로 한 대조는 너무나 커서 가히 인간 정신의 두 극점을 나타낸다고 말해질 정도다. 전자는 실제적, 실용적, 사회적인 정신인 반면에 후자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월적이다. 중국과 일본의 철학자들이 인도의 종교적 천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경전 중의 하나인 아바탐사카를 번역하고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 이 양극은 새로운 역학적인 통일체로 결합하여, 그 결과 중국에서는 화엄사상이 나왔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화엄철학이 나와 스즈키 다이세쓰에 의하면 “그 이후 2000년 동안 극동에서 발전된 불교 사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138] 유교, 도교는 중국철학에서 정반대의 두 극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다 같은 인간성의 양극으로서 그래서 상호보완하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되어 왔다. 유교는 대체로 사회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은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주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

[141] 노자는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후대에 와서 유가들은 여기에 다른 해석을 가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도, 인간의 사회의 도에 관해서 말하였으며, 그래서 그것을 도덕적 의미에서 생활의 올바른 길로 이해했다.

[142] 인간이 깨달아야 하는 우주의 길의 유형은 무엇인가?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145]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 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

[146] 전통적인 한의학 역시 인체 내에 있는 음양의 균형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떠한 질환도 이 균형이 무너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체는 음과 양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득 각 부분 사이의 균형은 ‘氣’, 즉 활력 있는 에너지의 흐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이 기는 경혈을 간직한 경락의 계통을 따라서 흐르는 것이다.

[165] 무한히 풍요한 사상의 교류가 일어나는데, 중국의 화엄종과 일본의 게곤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66] 스즈키 다이세쓰의 말에 의하면 “선은 개오의 수련이다.” 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처의 깨달음과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정수다. 선의 체험 = 깨달음의 체험

[168] 중국의 선사들은 마조가 선언했던 바와 같이 찬, 또는 젠이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이며 평상심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일상사의 한복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데 그들의 역점이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생활을 개오로 나아가는 도정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오 그 자체로서 보았던 점을 분명히 했다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을 뜻한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78] 코펜하겐 해석의 출발점은 물리적 세계를 관찰되는 체계(대상)와 관찰하는 체계로 나누는 것이다.

[179] 아원자적 입자들은 일정한 시간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리고 원자적 사건들은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식으로 확실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187] 동양의 신비주의에서 이 우주적 상호 연결성은 언제나 관찰자와 그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점은 원자 물리학도 마찬가지이다. 원자의 단계에서, ‘대상들’은 준비와 측정의 과정 사이에 있는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187]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따라 도출된 자연이다.”

[189] 측정은 전자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우주는 그 후 결코 동일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관찰자’라는 낡은 말을 지워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참여자’라는 새로운 말을 집어 넣어야 한다. 좀 이상한 의미지만,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다 – John Wheeler

[195]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라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213] 닐스 보어는 자신의 상보성의 개념과 중국 사상 사이의 유사성에 관하여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과학분야에서의 그의 뛰어난 업적과 덴마크 문화 생활에 미친 중요한 공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때 자신의 귀족 예복에 적절한 의장을 결정해야만 했는데, 그는 ‘음양’이란 전형적인 대립자의 상보 관계를 표상해 주는 중국의 기호인 태극도를 선택했다. 닐스 보어는 그의 예복에 이러한 중국의 기호를 선택함과 더불어 ‘Contraria sunt compleneta(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문구를 그의 예복에 새겨 넣었다. 이렇듯 그는 고대 동양의 지혜와 현대 서양의 과학 사이의 두터운 조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216]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정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진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기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수학적 정리가 실재의 세계에 대한 영원하고도 정확한 진리를 표현해 주며, 기하학적 형상들은 절대적인 미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기하학은 논리와 미가 완전히 일치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신성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신은 기하학자다”라고까지 단언하였다.

[225] 공간과 시간 간의 긴밀한 연결은, 관계 상황은 다르지만 천문학에서 잘 알려져 있다. 천문학자는 결코 우주를 그 현재의 상태에서 바라볼 수 없으며 언제나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빛이 태영으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순간에 보는 태양은 8분 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227] 쌍둥이 역설 : 만일 쌍둥이 중 어느 한 사람이 외계 공간으로 매우 빠른 일주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면, 그는 그의 형제보다 훨씬 더 젊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시계-그의 맥박, 혈액 순환, 뇌파 등등-는 지구 상에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여행하는 동안 느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228] 이들 모든 상대론적 결과들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단지 3차원적인 상들을 관찰할 수 있을 뿐 우리의 감각으로는 4차원 시공의 세계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1] 특수상대성 이론 :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과 그것들의 4차원적인 시공으로의 통합
일반상대성 이론 : 특수상대성 이론의 체계가 확대되어 중력을 포함하게 된 것.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의 영향으로 시-공은 만곡된다는 것이다.

[234]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공간의 만곡은 질량체의 중력장에 의해서 일어난다. 질량을 가진 물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물체 주변의 공간은 휘어져 있으며 그리고 그 휘어진 정도는 즉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정도는 그 물체의 질량에 달려있다.

[235]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은 시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만곡은 3차원 공간에만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4차원 시공에도 확대되어야 한다. … 시간간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평면적인 시공’에서 처럼 동일한 비율로 흐르지 않으며, 따라서 질량체들의 분포에 따라서 곡률이 이리저리 변하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변화한다.

[236] 블랙홀의 원리
항성이 붕괴되어 더욱 조밀해짐에 따라 그 표면 위에 미치는 중력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결과적으로는 그 주변의 시공은 점점 더 휘어지게 된다. 별의 표면에 미치는 중력의 힘이 점점 더 증가하기 때문에 점점 더 그로부터 이탈하기가 어려워진다. 종국에 가서는 그 별의 어떠한 것도 – 심지어는 빛조차도 – 그 표면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그 별 주변의 공간이 매우 심하게 휘어지기 때문에 모든 빛은 그 함정 속에 흡수되어 도저히 도망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물론 그와 같은 별을 보지는 못한다. 그 빛이 우리에게까지 결코 도달할 수 없기때문인데, 이러한 연유에서 그런 별은 블랙홀(black hole, 암흑의 함정)이라고 불린다.

[238] 절대적 평정은 바로 현재의 이 순간, 비록 그것이 순간이라지만 그것은 무한히 열려있고, 바로 이 순간 속에 영원의 희열이 깃들어 있네 – 혜능

이 정신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현재의 단 한순간 속에 스스로를 수렵시켰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이 휘황한 현재의 순간 속에 돌돌 감겨 있으며, 현재의 이 순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알맹이를 그대로 지닌 채 계속 머물러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 스즈키 다이세쓰

[247]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은 흐른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현재 있는 그 곳에 머물러 있다. 지나간다고 하는 이 생각이 아마도 시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지나가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시간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선사 도원

[250] 화엄의 중심사상은 우주는 그 본성이 언제나 계속하여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영원히 운동의 상태에 있는 것, 즉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역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262] 힌두교의 성인들은 이 율동적이고 신성한 유희를 전체로서의 우주의 진화와 동일시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를 주기적으로 팽창, 수축하는 것으로 묘사했으며, 한 창조의 시작과 끝 사이의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겁(kalpa)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고대 신화의 스케일은 실로 망연할 정도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와 비슷한 생각이 또다시 일기까지는 무려 2,000년 이상이나 걸렸다.

[269] 조지프 니덤은 “유럽 철학이 실체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했던 반면에 중국 철학은 그것을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272] 상대성 이론은 전하와 전류, 전기장과 자기장의 개념들을 통일시킴으로써 전기 역학의 구조를 한층 더 훌륭하게 만들어 주었다.

[273] 물리적 대상들은 주위 공간의 구조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주위 환경에 의해 본질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에 의하면 물체의 관성-가속되는 것에 대한 물체의 저항-은 물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다른 것과의 상호작용의 척도라고 한다.

[274] 오늘날에 있어서 우주론의 발전은 멀리 떨어진 우주의 부분들이 없다면 일상적인 상황들은 지속될 수가 없다는 것을, 즉 만일 멀리 있는 우주의 부분들이 제거된다면 공간과 기하학에 관한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완전히 소용없게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은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규모적인 현상과 매우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278] 헤르만 바일
‘물질의 장 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같은 물질적인 입자란 단지 장력이 엄청나게 높이 집중되어 있는 전기장의 한 좁은 영역에 불과하며 이것은 비교적 큰 장 에너지가 매우 좁은 공간에 결집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279] 장재
기가 응축될 때 그것은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때에는 개별적인 것들의 형체가 된다. 그것이 분산될 때에는 불가시적인 것이 되고 형체들도 없어진다. 이럴진대 그것이 응축되었을 때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외에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흩어져 있을 때 성급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289] 물질과 빈 공간 사이의 구별은 버려져야 한다.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잇다.

[290] 동양의 허와 같이 ‘물리적 진공’ – 장 이론에서 이렇게 불림 – 은 단순히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독립된 물리적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근본적인 허의 일시적 출현이다. 불경에서 말하듯이 “색이 공이요, 공이 독 색이다.” 진공은 진실로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리듬으로 고동치는 ‘살아있는 허’다.

[313] 시바의 무도는 – 쿠마라스와미의 말을 빌리면 – “어느 예술이나 종교가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신의 행위에 관한 가장 명확한 이미지다” 신은 브라만의 인격화이므로 그의 행위는 이 세계에 있어서의 수많은 브라만의 현현이다. 시바의 무도는 춤추는 우주 (dancing universe), 즉 서로서로 용해되는 모형들의 무한한 다양성을 거쳐가는 에너지의 끊임없는 흐름이다.

[349] 현대 물리학은 동양의 성인들과 함께 물리적 세계의 구조들은 마야, 즉 유심(mind only)이라는 것에 동의하기 위하여 머나먼 길을 온 셈이 될 것이다.  … S행렬 이론은 아원자적 입자의 세계를 사건들의 동적인 그물 조직으로서 기술하며, 근본적 구조나 실체로서보다는 변화와 전환을 강조한다.

[349] 라다크리슈난 (Radhakrishnan)
어떻게 하여 우리는 이 절대적인 유전 속에서의 변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눈이 연속적인 사건들을 보기를 거절함으로써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절단된 부분을 만들고 그것을 사물이라 부르는 것은 인위적인 태도다. … 우리가 사물들의 진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변화의 끊임없는 연속에서 떼내어진 소산물들을 마치 영원하고 실재적인 것인 양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은 사물도 아니요, 사물의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요, 변화다.

[353] 변화와 변역에 의하여 생성되는 그 역동적인 모형들의 개념으로 인하여 <역경>은 어쩌면 동양사상에서는 S행렬 이론에 가장 가까운 비유가 된다. 두 체계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상물보다 작용면에 있다. S행렬 이론에서 이러한 작용들은 강입자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현상들을 일으키는 입자 반응이다. <역경>에서는 기본이 되는 작용들이 ‘易, the change’이라고 불리며, 모든 자연 현상의 이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여겨진다.

[358] 부트스트랩(bootstrap : 구두끈) – 제프리 추(Geffrey Chew)
부트 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는 없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 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364] 물리학자들이나 신비가들은 모두 어느 현상이건 충분히 설명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근사적인 이해에 만족한다. 그러나 동양의 신비가들은 근사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인생 전체의 이해를 위한 ‘절대적’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365] 동양의 현인들은 대체로 사물을 설명하는 데 흥미를 가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물의 통일성에 관한 직접적이고 비지성적인 경험을 체득하는 데에 더욱 흥미를 두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인생의 의미, 세계의 기원, 열반의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고귀한 침묵’으로 대답을 해주었던 부처의 태도다.

[366] 말과 설명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이 동양 신비주의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다.

[374] 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하나의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만약 시인이 한 개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본다면, 현대의 물리학자는 세계를 하나의 강입자에서 본다.

[379] 부트스트랩 아이디어는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자연에 관한 부트스트랩 ‘이론’ 대신에 사고와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자연에 대한 부트스트랩 직관이 될 것이다. 과학을 넘어서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아친탸(acintya, 無思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380]
참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참 알고 있지 않다. – 노자

[412] 과학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
1.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연관되고 통일되어 있다는 것의 자각과 모든 현상들에 대한 경험을 근본적인 일자(oneness)가 드러나는 것으로 자각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 구조(Structure)를 통한 사고에서 과정(Process)을 통한 사고로의 변화
3. 객관적 과학으로부터 인식론적 과학으로의 전환
: 옛날의 패러다임에서는 과학적 기술들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관찰하는 사람과 자식의 과정이 별개의 독립된 것으로 믿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인식론, 즉 지식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자연 현상에 대한 기술 속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4. 건물의 비유 -> 그물의 비유
우리는 우리 주변의 실재를 연관 관계의 그물로 보듯이, 우리의 기술들도 관찰된 현상들을 나타내는 상호 연관된 그물을 형성할 것이다. 그런 그물에는 일차적인 것도 이차적인 것도 없으며 어떤 토대들도 없을 것이다.
5. 진리로부터 근사적인 기술로의 전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모든 과학적 개념과 이론들이 한계를 가지며 근사적이라는 것이 인정된다

[419] 나의 마지막 기준은 관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장(advocacy)에 관한 것이다. 나는 핵파괴의 위협과 자연 환경의 황폐화에 직면해 있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바탕을 이루는 방법들과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로부터 협조와 비폭력의 태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3. 내가 저자라면

- <엔트로피>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나는 앞서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에서 인류의 사고의 발전사와 우주의 발전방향에 대해 읽은 바가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책에서 열역학 제2법칙,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 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라는 이론을 통해  우주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이 책에서 '뉴턴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역사는 완벽을 향한 발전'이라는 보편적인 인류의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보는 '우주의 숙명'은 다음과 같다

"결국 우주는 궁극적인 혼돈을 향해 가고, 이때 신들이 다시 나타나 태초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시킨다. 그러면 모든 과정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따라서 역사는 완벽을 향한 발전이 아니라 질서에서 혼돈으로 움직여가는 사이클의 영원한 반복인 것이다."
 
즉 엔트로피 증가로 가는 우주의 방향성을 바꾸지는 못하며, 현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저엔트로피 사회'로 만들어 엔트로피 증가 속도를 줄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레미 리프킨이 '인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라는 맥락에서 '엔트로피 세계관'을 만들었다면,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물리학, 더 넓게 이야기하여 우주에 대해 '동양사상'과 결부시켜 '道 와 空의 세계관'을 만들었다.
 
프리초프 카프라의 '우주관'은 제레미 리프킨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우주는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을 가지고 있으며 일단 생성된 이상, 팽창을 하다가 소멸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프리초프 카프라가 이야기 하는 주제는 제레미 리프킨의 그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심오하다.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서의 인류', '문명과 자연의 조화', '살아 있는 空의 의미', '절대적인 지식의 상대적인 지식으로의 탈바꿈'... 등과 같이 말이다.

그는 '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연결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로 인해, 후대 지식인들에게 '學의 여백'을 만들어주었다.
카프라는 이 책을 통해 단지 물리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 그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의 생각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으며, 한 권의 책이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진화를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동양고전의 중심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 언젠가 한번 TV의 동양철학 강의를 듣는데 물리학과 교수가 나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했지만 도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단순히 동양의 옛 현자들이 이 시대에 새로이 조명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관심이 있었던 현대물리학과 동양고전의 관계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고 '동양사상'에 대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던 '空卽生 生卽空' 도 그러하고 '道可道 非常道' 도 그러하다. 또한 선불교(화엄종)의 의미가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이것은 내게 큰 소득이었다.

- 참된 지식에서 위대한 생각의 탄생까지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읽고 '과연 지식이란 무엇인가? 위대한 생각의 탄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라는 주제가 머릿 속을 스쳐갔다.  
  
희랍에서 뉴턴까지 2천여년간의 서양 사고의 발전사를 읽으면서, 나는 내 머릿속의 사고방식과 지식습득 방법이 서구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친 긴 학창시절동안 나도 모르게 분석적, 단계별 지식 체계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학문을 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마치 미개척지의 영토를 개척하듯 이제껏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법칙'을 발견하려 했다. 그것은 매우 좁은 니치마켓일 수도 있고, 블루오션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가 바로 '자연과학'분야일 것이다. 생물학, 물리학 등에서 후대의 지식인들은 뉴턴을 넘고, 아인슈타인을 넘는 놀라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저자가 이야기했다시피, 들여다 보면 들여다 볼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법칙으로 정형화시킬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2천여년 전의 동양의 옛 현인들이 이미 이야기했던 것이었다. 즉, 같은 깨달음이되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깨달음을 위해 동양과 서양은 2000여년간 다른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책을 읽고 문득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세상에 정말로 새로운 것은 없다"
 
동양의 사고체계와 서양의 사고체계는 양 극단에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하나로 맞닥뜨려지고 결국 하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내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동시에 허무한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인류가 자연법칙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그것이 수천년전 아무런 논리적 데이터도 없이 개념적으로 깨달은 옛 성인들이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연 '지식'이란 무엇이고, '지식'은 어떻게 습득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쌓고 있는 지식은 과연 의미있는 지식일까?
단지 데이터와 데이터를 끊임 없이 머리 속에 집어넣어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은 아닐까?
지식의 물리적 합이 과연 나를 더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나는 학습을 할 때 새로운 것을 계속 습득하려고 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존재하되,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질문들 속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도 이미 누군가가 먼저 깨달았겠지만, 즉 세상에 이미 있었겠지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현재 있는 지식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다른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들 사이의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른 의미'와 '관계성'이 새로운 지식으로 이름지워질 것이다.

이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는 방법 역시 밖에서만 찾으려고 할 것도 아니다. 책의 저자 역시 어느날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의 깨달음을 얻고 글을 쓰지 않았던가. 지식의 습득 역시 내가 늘 익숙했던 '단계별 학습'이 아닌 어느날 깨닫는 '개오', '돈오'에서 올 수도 있다. 즉, 밖에서 새로움을 찾지 말고,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새로운 지식의 유형이 주요 맥락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물론 '개오'를 위한 전제조건이 있을 것이다. 바로  '다른 의미'와 '관계성'에 대해 수많은 고민과 성찰이다. 다른 말로 하면 '學' 이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위대한 생각의 탄생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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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9.11.30 19:13:25 *.160.33.244

쎄이야 춤을 추거라.  겨울은 춤추기 좋은 계절이 아니냐 ? 
프로필 이미지
2009.12.01 09:33:33 *.244.197.254
네 스승님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열심히 뛰고, 놀며, 춤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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