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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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초프 카프라 (Fritjof Capra)
1966년 비엔나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대학교(1966-1968) 등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 선형가속기 센터(1970), 런던대학교(1971-1974)에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했으며,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직에 있으면서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소립자 연구를 계속했다(1975-1988). 버클리대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 등에서도 강의했다.
그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물리학에 대한 연구 이외에 지난 30여 년 동안 현대과학의 철학적.사회적 연관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동양사상과 물리학을 비교하는 많은 강연과 논문을 발표했고, 그 스스로 동양적 명상 수련을 실천했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그의 저서들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 등지에서 수많은 강연을 진행했다. 유럽과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본 등에서 수많은 TV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토크쇼 등에 화제의 인물로 출연한 바 있다.
그가 1975년에 펴낸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과 1982년에 펴낸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 두 저서는 구미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신과학 운동과 신생활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운동이 가열되어 감에 따라 그는 세계 각처의 요청에 의해 순화 강연을 하는데 주력했다.
1988년에 펴낸 <탁월한 지혜(Uncommon Wisdom)>는 그의 사상 형성 과정에서 만난 비범한 사람들과 나눈 의견 교환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1984년 스프레트낵과 공저로 펴낸 <녹색 정치 (Green Politics)>는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던 녹색 운동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독일 의회의 당당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녹색당의 이념 정강 및 그 현황과 문제점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녹색 운동이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정치 세력으로 결집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 외에도 <생명의 그물(The Web of Life)> <히든 커넥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미국의 버클리에 살고 있는 카프라 박사는 국제적인 생태문제 연구 조직인 엘름우드 연구소를 창설, 새로운 생태과학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사회 경제 및 환경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부 물리학의 길
1. 현대 물리학 - 마음을 담은 길?
이 책의 목적은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과 극동의 철학적, 종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기본 이데아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이 어찌하여 힌두교도나 불교도, 도가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게끔 우리에게 강요하는가, 또한 미시 세계의 현상, 즉 모든 물질을 생성하고 있는 아원자들의 속성과 그 상호 작용을 기술하기 위하여 두 이론을 결합하려는 최근의 시도를 살펴보면 이 유사성이 얼마나 더 두렷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적 신비주의의 유사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것이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어느 쪽에서 한 말인지 모를 지경에까지 종종 이르게 될 것이다. (35/36)
내가 ‘동양적 신비주의’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와 도교의 종교적 철학을 뜻한다. 그들은 정묘하게 짜여진 수많은 계율과 철학 체계를 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세계관의 기본 특성은 다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점은 동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신비적 성향을 가진 철학에서 어느 정도씩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논점을 대범하게 일반화하자면, 현대 물리학이야말로 이제까지 모든 시대와 전통이 신비주의자들이 지녀 왔던 관점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종교 속에는 신비적 전통이 담겨 있으며 서양 철학의 많은 학파 가운데서도 신비적 요소는 찾아질 수 있다. (36)
신비주의가 서양에서는 언제나 방계적인 역할을 한 데 불과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철학적, 종교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는 데 동, 서양 신비주의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36)
모든 서양 철학이 다 그런 것처럼 물리학도 그 근원은 기원전 6세기의 초기 그리스 철학, 곧 과학과 종교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문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오이아의 밀레토스 학파의 현인들은 이러한 구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피지스(physis, 자연)라고 불었던 사물의 본질, 즉 진정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물리학’이라는 용어도 이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것은 원래 모든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노력을 뜻했던 것이다. (37)
서양의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교회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시작하고 자연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이게 된 르네상스에 와서야 비로소 더 발전하게 된다. 15세기 후기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과학적 정신에 의한 자연의 연구에 접근하게 되었으며, 사변적인 아이디어를 실증하기 위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39)
기계적인 서양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세계관은 ‘유기적인 것’이다. 동양의 신비론에 있어서는 감각에 비치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으며 다 같은 궁극적인 실재의 다른 양상 내지 현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1)
마음이 흔들리면 잡다한 사물이 생기지만
마음이 고요하면 잡다한 사물이 사라진다.
동양의 신비주의는 각각의 종파에 따라 세세한 면에서는 다른 점도 많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을 강조하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중심적 교의가 되는 것이다. 힌두교도건, 불교도건, 도가건 간에 그들의 지상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전일성과 상호 연관성을 깨달아 고립된 개별아라는 관념을 초극하여 궁극적 실재와 합일 시키는 일이다. (42)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는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43)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 - 도 - 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44)
2. 아는 것과 보는 것
허망한 것에서부터 진실한 것으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어둠으로부터 밝음에로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죽음에서 영생으로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브리하드 아라냐카 우파니샤드> (45)
사람의 마음엔 추론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의 두 가지 지식 또는 의식의 양태가 있으며, 그것들이 각기 과학과 종교에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인정되어 왔다. 서양에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편애 때문에 직관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지식이 자주 평가절하 되었고, 반면에 동양의 전통적인 태도는 일반적으로 이와는 정반대이다. 서양과 동양의 위대한 두 사람의 지식에 관한 다음의 진술은 이 두 가지 입장을 전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고, 중국의 노자는 “알아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46)
고기를 잡으려고 망을 치지만
고기를 잡고 나면 망을 잊는다.
토끼를 잡으려고 덫을 놓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는다.
뜻을 전하려고 말을 하지만
뜻이 통한 다음에는 말을 잊는다.
- 도가의 현자 장주 - (48)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궁극적인 실재는 추론, 즉 드러낼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나 개념의 근원이 되는 감각이나 지성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써 적절하게 기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 점에 관하여 말한다. (49)
거기엔 눈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 미치지 못하고, 마음이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며,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그것을 누가 어찌 가르칠 수 있으랴. (49/50)
이 실재를 도라고 부른 노자는 <도덕경>의 첫 줄에서 똑 같은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50)
동양의 예술 양식들 역시 명상의 양식이다. 그것들은 예술가의 이념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의식의 직관적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자기실현의 방도인 것이다. (61)
명상에 침잠하면 마음은 모든 이념과 개념을 텅 비우고 오랫동안 그 직관적 형태를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노자는 학구와 명상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한다. (61)
학문을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늘고
도를 닦으면 지식이나 욕구가 나날이 준다.
헤아리는 마음이 숨을 죽이면 직관적 형태가 비상한 깨달음을 가져온다. … 장주의 말에, “성인의 고요한 마음은 천지와 만물의 거울이다”는 것이 있다. 주위 환경과 합일하는 체험은 이러한 명상 상태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모든 분별이 정지되고 분별이 없는 통일체로 사라져 가는 의식의 상태인 것이다. (62)
언어란 언제나 추상적이고 실재의 근사한 지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적 실험이나 신비적 직관을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애매하고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현대 물리학자들과 동양의 신비 사상가들은 피차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63)
3. 언어를 초월하여
그 본질에 있어서 어의를 초월하고 있는 우리의 내적 경험을
전달하는 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범상한 사고 방식을 그처럼 당혹시키는 모순이 생겨나는 것이다.
- 스즈키 다이세쓰 - (69)
현대 물리학의 두 기반인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은 이 실체가 고전적 논리를 초월하며, 그것은 일상 언어를 통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70)
동양의 신비 사상이 부딪친 언어의 문제는 현대 물리학이 당면한 문제와 똑같다. (70)
동양의 신비 사상은 실재의 역설적인 면을 다루어 내는 몇 가지의 유별난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힌두교에서는 신화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우회한 반면에 불교와 도교는 그 역설을 감추느니보다 차라리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했다. 도가의 주요한 경전인 노자의 <도덕경>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극단적인 난문이다. 그것은 당황스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단단하고 강력하고 지극히 시적인 언어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논리적인 추론의 낯익은 상궤에서 떨쳐내 버린다. (72)
우리가 자연의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우리는 일상 언어의 이미지와 개념을 더욱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77)
4. 새로운 물리학
현대 물리학의 제 발견에 의하며 변화된 세계관은 뉴턴의 기계론적인 우주 모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모델은 고전 물리학의 확고한 체계를 구축했다. (81)
모든 물리적 현상이 일어났던, 뉴턴식 우주의 무대는 고전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의 3차원적 공간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정지하여 있고 변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82)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에 의하여 묘사되었는데, 그것 또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82)
현대 물리학의 초기에 비범한 지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이 곧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05년에 간행된 두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사고의 두 혁명적인 추세를 창도했다. 그 하나는 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적 복사에 대한 새로운 고찰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그 후 원자 현상에 관한 이론인 양자론의 특성이 되었다. 완전한 양자론은 25년 후에 물리학자들의 전체 팀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의 경우엔 거의 전적으로 아인슈타인 자신에 의하여 완전한 형태로 수립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논문들은 20세기 초에 세워진 당당한 지적 기념비 - 현대 문명의 파리미드였다. (90)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공간은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4차원의 ‘시공’ 연속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상대성 이론에서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 언급함이 없이 공간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거기에는 뉴턴 모델에서처럼 시간의 전일적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90)
상대성 이론에서 물리적 현상의 토대가 되는 뉴턴의 절대 공간의 개념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 시간의 개념도 그러하다. 시간과 공간은 둘 다 단지, 어떤 특정한 관찰자가 그 현상의 기술을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적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다. (91)
2부. 동양 신비주의의 길
5. 힌두교
인도의 경우 거의 모든 사상이 어느 의미에서는 종교적 사상이며, 힌두교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인도의 지적 생활에 영향을 끼쳐왔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 문화적 생활까지도 거의 전반적으로 결정지어 왔다고 말해지고 있다. (117)
힌두교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불릴 수도 없고, 또한 잘 정의된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종파와 의식과 철학적 체계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하고도 복합적인 사회 종교적 유기체이며,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잡다한 남신과 여신을 경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 의식과 예식 및 정신적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117)
힌두교는 신화적인 영역과 심원한 개념들을 지닌 고도의 지적인 철학에서부터 일반 대중들의 단순 소박한 의식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18)
힌두교는 그 정신적 원천을 <베다 경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베다의 ‘예언자들’인 무명의 현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고대의 성전을 집대성한 것이다. (118)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마지막 부분은 베다의 철학적 실천적 내용을 완성한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힌두교의 정신적 메시지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 (118)
그러나 인도의 일반 대중들은 <우파니샤드>를 통하지 않고 웅대한 서사시에 수집되어 있는 수많은 민간 설화 - 이것은 방대하고 다채로운 인도 신화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 를 통하여 힌두교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 (119)
대부분 힌두교가 그렇듯이 크리슈나의 정신적 교시의 기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물이나 사건들이 다 같은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실일 뿐이라는 사상에 있다. ‘브라만’이라고 불리는 이 실재는 힌두교가 수많은 남신과 여신들을 경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일원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통일 개념이다. (120)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은 만물의 영혼 또는 내적 정수로 이해된다. (120)
사람들은 이 실재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특히 신화를 좋아하는 힌두 현자들은 브라만을 신성하게 그렸고 신화적 언어 속에 담아 얘기한다. 그 신성의 제각기 다른 여러 모습에 맞추어 힌두교도의 숭배를 받는 다종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주어줬으나 이런 모든 신들은 하나의 궁극적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경전은 분명히 하고 있다. (120)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 (Atman, 自我)’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120)
가장 순수한 정수 - 온 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아트만이다. 그것은 당신이다. (121)
마야라는 말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꾸어 왔다. 애초엔 신선한 행위자와 마술가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에 걸려 있는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신성한 릴라의 무수한 형태를 혼동하고 이들 모든 형태 아래 놓여 있는 브라만의 통일체를 지각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마야의 주술에 걸려 있는 것이다. (121)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이다. (121)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화하는 마야며, 위대한 마술사의 신성한 유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22)
이 유희의 역동적인 힘은 ‘카르마’인데, 이것은 인도의 사상에서 또 다른 주요 개념이다. 이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 유희, 즉 활동하고 있는 전우주의 실천원리인데, 여기에서 만물이 다른 만물과 역동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기타>경전의 말로 표현하자면, “카르마는 창조의 힘이며, 거기서부터 만물이 생명을 얻는다.” (122)
우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돼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카르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카르마의 속박에서 해방된다 함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전일성과 조화를 깨달아 그것에 맞추어 행동함을 뜻한다. (122)
모든 움직임은 자연의 힘이 교직하는 대로 다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미망에 사로잡혀 그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의 힘과 행위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자연의 어떤 힘이 다른 자연의 힘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122)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는 것, 카르마의 속박을 부서 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 체험이 ‘모크샤’, 즉 인도 철학에서 ‘해탈’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의 바로 그 정수다. (123)
힌두교는 해탈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힌두교는 그 모든 교도들이 같은 방식으로 신성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으며, 따라서 제각기 다른 깨달음의 양태에 맞추어 상이한 개념과 의식과 정신적 수련을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과 의식 중에 많은 것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에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브라만이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로부터 힌두교의 특성인 대자 대비한 관용과 포용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123)
6. 불교
힌두교와는 달리 불교는 소위 ‘역사상’ 부처인 싯다르타 고타마라는 단일한 창시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기원전 6세기 중엽 중국의 공자와 노자,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헤라이클레이토스 등 수많은 정신적, 철학적 천재들의 탄생을 보았던 그 범상치 않은 시기에 인도에서 생을 누렸다. (127)
힌두교가 신화적이고 의식적인 풍미를 띠고 있다면 불교는 분명히 심리학적 취향을 띤다. 부처는…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요법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인간적 좌절의 기원과 그 극복 방법을 교시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마야, 카르마, 니르바나 등과 같은 인도의 전통적 개념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에 새롭고 생동하는, 막바로 들어맞는 심리학적 해석을 가하였다. (128)
부처가 입멸한 후 불교는 히나야나(소승불교)와 마하야나(대승불교)라는 두 주류로 발전돼 나갔다. 히나야나, 즉 소승은 부처가 가르친 교리에 집착하는 정통파이고, 마하야나, 즉 대승은 교리의 정신이 원래의 문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보다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128)
이들 철학이 그 높은 지적 수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승 불교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상 속에 결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동양적 신비 사상 안에서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성은 직접적 신비체험 - 불가에서는 ‘각’이라고 부른다 - 에의 길을 밝혀 주는 한가지 수단으로 비쳤을 뿐이다. (128)
불가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깨우친 직후 그의 교리를 설법하기 위해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유명한 사성제의 형태로써 그의 핵심적인 교리를 밀도 있게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맨 먼저 질병의 원인을 검진하고, 다음으로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법을 처방하는 의사의 화법과 드리지 않다. (129)
제1성제는 인간 상황의 두드러진 특성인 ‘두카(duhkha)’ 즉 고뇌 또는 좌절이다. 이러한 좌절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다는 생의 근본적인 실상에 직면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부처는 말했는데, 이 유전과 변화가 자연의 근본 모습이라는 사상은 불교의 근저를 이룬다. 고란 불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생의 그 유전에 저항하여 온통 마야인 고정된 형태에 ? 그것이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간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그것들에 집착하려 할 때 생겨나는 괴로움이다. 이러한 무상의 교리에는 자아, 즉 변화무쌍한 체험의 지속적 주체로서의 자기도 없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불교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은 하나의 환상, 즉 ‘마야’의 또 다른 형태고 실체가 없는 지적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30)
제2성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트리슈나(trishna)’, 즉 집착 또는 탐욕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불교 철학에서 ‘아비댜(avidya)’ 즉 무명이라고 불리는 잘못된 관점에 근거하고 있는 무익한 욕심이다. 이 무명 탓으로 우리는 지각된 세계를 개별적이고 분열된 사물로 쪼개고, 이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낳은 이 고착된 범주에다가 실재의 유동하는 형태를 붙잡아 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지배하는 한 우리는 좌절에 좌절을 거듭 겪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는 무상하고 영원히 변전하는 것임에도 우리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물들에 집착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든 행위가 행위를 낳고 매 질문에 대한 해답이 새로운 질문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이 불교에서는 삼사라, 즉 윤회전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인과응보의 끝없는 사슬인 카르마 (karma, 業)에 의해서 몰아쳐진다. (130)
제3성제는 괴로움과 좌절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삼사라의 악순환을 초탈해서 카르마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마침내 니르바나라고 불리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경지에서는 개별적 자아라는 잘못된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생명이 전일하다는 감정이 지속된다. 니르바나는 힌두교의 모크샤(moksha)와 동일어로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넘어선 의식 상태며, 그것은 그 이상의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니르바나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 즉 불성을 얻는다는 뜻이다. (130)
제4성제는 일체고를 여의는 부처의 처방으로 불성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자기 계발의 팔정도다. (131)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가 이 세계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131)
임종 때 부처가 한 마지막 말은 그의 세계관과 교사로서의 자세의 특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쇠퇴는 모든 복합적 사물에 고유한 것이다 (生者必滅)”라고 그는 입멸 직전에 말했다. “그러하니 정근 정진(正勤精進)하라.” (131)
불교 사상의 절정은 동명의 수트라(sutra)에 기초를 둔 아바탐사카파(Avatamsaka)에서 달성되었다. 이 수트란느 대승불교의 정수로 간주되고 있는데, 스즈키 다이세스는 다음과 같은 열광적인 말로써 이것을 칭송하고 있다. (134)
아바탐사카 수트라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실로 불교사상과 불교감정, 불교체험의 극치다. 내 생각으로는 이 세상의 어떠한 종교 문헌도 이 수트라에서 달성된 것과 같은 개념과 장엄함과 감정의 깊이, 웅대한 스케일의 구성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의 영원한 샘이며, 이 샘은 그 어떠한 종교인도 부분적으로만 만족하여 목마름을 그대로 지닌채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135)
대승 불교가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될 때 중국인과 한국인, 일본인의 마음을 고취시킨 경전은 무엇보다는 이 <화엄경>이었다. 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한편으로 하고 인도인을 다른 한편으로 한 대조는 너무나 커서 가히 인간 정신의 두 극점을 나타낸다고 말해질 정도다. 전자는 실제적, 실용적, 사회적인 정신인 반면에 후자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월적이다. (135)
아바탐사카의 중심 주제는 모든 사물과 물건의 통일과 상호 작용으로서 이 개념은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기본 요소의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 (135)
7. 중국 사상
기원전 6세기 동안 중국 철학의 이 두 측면은 유교와 도교라는 뚜렷한 두 철학 유파로 발전되었다. 유교는 사회 조직과 상식과 실천적 지식의 철학이다. … 반면에 도교는 자연을 관조하여 그 길, 즉 ‘도’를 찾아내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도가에 따르면 인간적 행복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138)
유교는 대체로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규율과 관습을 익혀야만 하는 아동 교육에서 강조되었고, 반면에 도교는 사회적 관습에 짓눌려 파괴되어 버린 원래의 자발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년층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11, 12세기에 와서 신유학자들이 유교, 불교, 도교의 종합을 꾀했는데, 이것은 중국의 모든 사상가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인 주희의 철학에서 절정에 달한다. (138)
유교(Confucianism)란 명칭은 공부자에서 유래하였다. 공자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승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함에 있어 그는 자신의 도덕 개념에 따라 전통적인 사상을 해석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지식의 전승을 넘어서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른바 육경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고 대의 철학적 사상서인 <예>, <악>, <시>,<서>,<역>, <춘추>로, 이것들은 중국 고대의 ‘성스런 현자’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그 자신의 사상은 <논어>, 즉 공자 어록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몇 제자에 의하여 편찬된 금언집이다. (139)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다. 그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노대가’를 의미하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공자보다 연상인 동시대인이었다. 중국에서는 그것이 대체로 그냥 <노자>라고 불리는데 서양에서는 <도덕경>, 즉 <길과 힘의 경전 Classic of the Way and Power>이라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39)
두 번째로 중요한 도가의 책은 <도덕경>보다 훨씬 장문인 <장자>로서, 이 책의 저자인 장주는 노자보다 약 200년 이후 사람이다. (140)
그들은 이 실재를 ‘도’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원래 ‘길’을 의미했다. 이것은 우주의 길이요, 도정이요, 자연의 질서였다. (141)
원래의 우주적 의미에서 도는 궁극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실재로서, 이런 점에서 그것은 힌두교의 브라만과 불교의 다르마카야 (법신불)와 가까운 것이다. 도는 만물이 거기에 포함되는 우주의 진행 과정이며, 따라서 이 세계는 부단한 유전과 변화로 보이는 것이다. (141)
도의 주요한 특성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다.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옴을 뜻한다.”라고 노자는 말했다. 이 사상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 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 패턴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142)
도의 운동에 있어서 순환 양식이란 아이디어는 두 정반대 극인 ‘음양’의 도입에 의해 명확한 구조가 주어지게 된다. 그것은 변화의 주기를 한정시켜 주는 두 극이다. (143)
양이 그 절정에 도달하면 음을 위해서 물러나고
음이 그 절정에 이르면 양을 위해 물러난다. (143)
중국적 관점에서는 도의 모든 현현은 이러한 두 극력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고, 한 쌍의 원형인 음양의 상징에 대해 여러 세대에 걸쳐 연구가 가해져 그것은 마침내 중국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143)
지금 어둡게 하는 것이 이제 밝음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도다. (144)
오랜 옛적부터 자연의 원형적인 두 극은 명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남/여, 강/약, 상/하에 의해서도 표상되었다. 양상,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창조적인 힘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음, 즉 어둡고 수동적이고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요소는 ‘땅’으로 대표되었다. 하늘은 위에 있고 움직임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땅은 - 고대의 지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 아래에 있고 휴지하고 있다. 따라서 양은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남성적인 지성을, 음은 복합적이고 여성적이고 직관적인 마음을 나타낸다. (144)
음양의 역학적인 특성은 태극도라고 불리는 고대 중국의 상징으로써 도해되고 있다. 이 도표는 어두운 음과 밝은 양이 대칭적으로 배열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 대칭이 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부단한 순환 운동을 강하게 암시하는 회전적인 대칭이다. (144)
양은 주기적으로 시발점으로 돌아가고, 음이 그 극에 달하면 양에게 자리를 내준다. (144)
음양론은 중국 문화에 두루 퍼져서 전통적인 중국 생활양식의 모든 특성들을 결정지은 주요한 중심 사상이다. “삶은 음과 양이 고루 섞인 조화다”라고 장주는 말하고 있다. (145)
<번역의 서>는 유가의 육경 가운데서도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며,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핵심에 놓인 저작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146)
저명한 중국학자인 리하르트 빌헬름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그가 번역한 <역경>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146)
이 <번역의 서>, 즉 중국의 <역경>은 의심할 바 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문헌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다. 이 책의 기원은 고대의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내에서는 오늘날까지 가장 탁월한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왔다. 3천년을 헤아리는 중국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의미심장한 책이라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 책에서부터 그 영감을 취했거나, 아니면 거꾸로 이 책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수천 년의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지혜가 <역경>을 만드는 데에 다 녹아 들어갔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146)
<역경>에 의탁하는 목적은 단순히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의 소인을 찾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려는 것이다. (148)
실제에 있어서도 <역경>이 지혜의 책으로서 쓰이는 바가 예언서로 쓰이는 것보다 그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 (148)
공자 주석의 중심에는 <역경> 전체가 그런 것처럼 모든 현상의 역학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의 쉼 없는 변용은 이 <변역의 서>의 핵심을 이루는 메시지다. (148)
천변만화가 한 권의 책일지니
그것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네.
그 도는 영원히 변하나니 -
쉼 없는 변화, 움직임,
공허한 여섯 장소 속을 흐르나니,
고착된 법도 없이 생하고 멸하며, 강약이 서로 바뀌며,
하나의 법률 아래 얽매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은 오직 변역일 뿐이어라. (149)
8. 도교
도가에서는 논리적 추론을 사회적 예절 및 도덕적 규범과 아울러 작위적인 인간 세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이런 세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의 특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관조에 그들의 관심을 온통 집중시켰다. (156)
도가의 현자들은 강한 신비적인 직관과 결합된 주의 깊은 자연 관찰로써 현대의 과학 이론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는 깊은 통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6)
도가에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통찰 중의 하나는 변용과 변화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157)
만물이 변용하고 성장함에 있어서 그 모든 싹과 생김새는 각기 본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안에서 각기 성숙과 쇠잔이 있고, 변화와 변용의 분단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157)
도가들은 자연 속의 모든 변화를 음양 양극 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빚어 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은 어떤 대립하는 쌍도 그 극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역동적으로 연관돼 있는 극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믿게 되었다. (157)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 ‘저것’과 ‘이것’이 대립자임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도의 본령이다. 오직 이 본령만이 말하자면 하나의 축으로서 가없는 변화에 응답하는 원궤의 중심인 것이다. - 장주 - (157/158)
어떤 것을 달성하려고 할 때 그 반대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좁히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고
약화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강화해 주고
때려 눕히려면 반드시 먼저 치켜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오묘한 지혜라고 한다. (158)
당신이 무언가를 지니려 하면 그 반대되는 무엇을 그 안에 허용해야 한다.
구부려라, 그러면 당신은 곧게 되고,
텅 비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가득 찰 것이며,
다 닳고 해지면 새로울 것이니. (158)
이것은 높은 관점에, 즉 모든 대립자들의 상대성과 극관계가 명료하게 지각되는 어떤 조망에 도달한 현자의 생활방식이다. 이런 유의 대립자 가운데에는 음양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 연관된 선악의 개념이 맨 먼저 포함된다. 선악의 상대성과 나아가 모든 도덕적 규범의 상대성을 깨달은 도가의 현자들은 선을 위해 분투 노력하지 않고 선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장주는 이 점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다. (159)
옛말에 “옳은 것을 따라 섬기면 그른 것과 관계되지 않고, 안정된 선정을 따라 섬기면 혼란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게 아닌가?”하니 이것은 천지의 이치와 사물의 제각기 다른 성질은 심득치 못한 소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음을 따르고 섬기면서 양을 고려치 않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길은 가히 따를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분명치 않은가. (159)
그리스의 ‘도가’는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표현한 것처럼 부단한 변화를 강조한 점에서 노자와 궤를 같이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변화가 순환적이라는 개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계질서를 “얼마 동안 타오르고 얼마 동안 꺼져 있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에 비유하였는데, 이것은 음과 양의 주기적 상호 작용 속에 그 자신을 드러내는 도의 중국적 개념과 참으로 유사한 이미지다. (159)
그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립하는 쌍도 하나의 통일체로 보았고, 이러한 모든 개념들의 상대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160)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이 두 현자의 세계관 사이에 보이는 이 커다란 유사성이 일반적으로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은 놀랍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현대 물리학과 연관해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도교와 연관해서는 좀체 얘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연관 아래에서 보아야만 그의 세계관이 신비적인 것이며, 그의 사상과 현대 물리학 사이의 유사성이 올바른 조망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60)
우리가 도가의 변화 개념을 두고 얘기할 때, 그 변화가 어떤 힘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상황 속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도는 강요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발성은 도의 행동 원리며, 인간의 행위가 도의 작용을 본뜨는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모든 인간 행위의 특성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조화하는 행위란 자발적인 행위, 곧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에 합치되는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 속에 변화의 법칙이 내재하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는 직관적 지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161)
자연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 회남자 -
이러한 행동 방식을 도교 철학에서는 ‘무위’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글자 뜻대로 하자면 ‘비행동’을 뜻하는데, 조지프 니덤은 이것을 ‘자연에 어긋나는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 번역하고 이 해석을 <장자>에서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와 정당화하고 있다. (161)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 (161/162)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혹은 니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으면’ 그는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처럼 당혹스럽게 보이는 노자의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라는 말이 뜻한 것이다. (162)
노자는 말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다. 현자는 행함이 없이 그의 일을 수행하고 말함이 없이 그의 가르침을 준다.” 도가들은 인간성의 여성적인, 순응하는 성질을 펼쳐 보이는 것이야말로 도와 조화된 완전히 균형잡힌 삶으로 이끌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고 믿었다. (162)
9. 선
기원후 1세기경 중국 정신이 불교 형태의 인도 사상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두 가지 발전이 나란히 일어났다. 한편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이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하여 그들 자신의 철학적 조명 아래서 인도 부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 중국 정신의 실용적인 면을 인도 불교의 실제적인 상에 집중하여 보통 명상으로 번역되는 찬 (선)이란 이름의 특별한 정신적 수련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인도 불교의 영향에 대응했다. 이 찬 철학은 기원후 약 1200년경 결국 일본에서 채택돼 젠이란 명칭 아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전통으로서 그곳에서 꾸준히 계발되어 왔다. (165)
선은 이처럼 상이한 세 문화의 철학과 특질이 독특하게 융합된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일본적인 하나의 생활 방식이지만 여전히 인도의 신비주의, 도가의 자연성과 자발성에 대한 사랑, 유교 정신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165/166)
다소 특수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불교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목적이 부처 자체, 즉 선에서 사토리로 알려진 체험적 개오의 얻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오의 체험은 동양 철학의 모든 학파의 핵심이지만 특히 선은 오직 이 체험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의 해석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166)
선의 체험은 따라서 깨달음의 체험이며, 이러한 체험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고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은 어떠한 추상화나 개념화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교리나 철학, 형식적 강령이나 독단적 교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고착된 신조로부터의 해방이 진실로 정신적이게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166)
동양 신비 사상의 다른 어떤 학파보다도 선은 언어로써 궁극적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역시 완고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도교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게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장주는 말했다. (166)
선 체험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전해질 수 있으며, 또 실제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선에 적합한 특수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네 글귀를 통해 선은 요약 기술되고 있다.
경전 바깥의 특별한 전승,
언어나 문제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 보고 불성을 얻는다. (167)
이 ‘곧바로 가리킨다’는 기법이 선에 독특한 풍미를 주고 있다. 지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동양적 마음의 전형이다. 선사들은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일체의 이론화와 공론을 경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갑작스럽게 무의식적인 행동이나 말로써 진리를 곧바로 가리키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내가 언급한 공안처럼 개념적 사고의 역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 체험에 대비시키기 위하여 사고 과정을 정지시키는 것을 뜻했다. (167)
선에 있어서 깨달음은 만물의 불성을 직접 체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섞여 드는 대상과 범사와 사람들이다. 이처럼 생활의 실제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깊은 신비성을 여전히 띠고 있다. 현재에 전심 전력으로 살고 일상사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면서 개오를 얻은 사람이면 그 어떤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생의 경이와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169)
선의 완성은 일상 생활을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사는 데 있다. 백장이 선을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잠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이 말은 많은 선어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명백하게 들리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본서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오랜 훈련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정신적 위업을 이루는 것이다. 유명한 선가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69)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170)
오늘날 일본에는 교시의 방법을 제각기 달리하는 선의 두 주류가 있다. 임제종, 즉 돈오파는 이 앞의 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은 공안법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산젠 (참선)이라고 부르는 스승과의 주기적이고 공식적인 문답에 중점을 두어, 이 자리에서 제자는 그가 풀려고 하는 공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요구받는다. 공안을 푸는 것은 치열한 정신 집중의 오랜 기간을 거쳐서 돌연히 개오의 통찰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스스로 증득한) 스승이라면 제자가 돌연한 개오의 벼랑 끝까지 다다른 때를 알고 죽비로 내리치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것과 같은 예상 밖의 행동으로 그 제자를 개오의 체험 속으로 들도록 충격을 가할 수 있다. (170)
선시에 이르기를
고요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 (171)
깨달음은 나날의 범사에 나타나 보인다는 선문의 주장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회화와 서도, 원예 등의 다양한 기예뿐만 아니라 다도, 꽃꽂이와 같은 의식적인 행위, 궁도와 검도, 유도와 같은 무예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제각기 한국과 일본에서 하나의 도, 즉 개오에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선 체험의 다양한 특성들을 탐구하는 것이며, 마음을 수련시켜 궁극적인 실재와 접할 수 있게끔 해준다. (171)
3부 대비
10. 만물의 통일성
동양적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통일성과 공동의 상호 관계에 대한 깨달음, 곧 세계의 모든 현상을 기본적으로 전일성의 현시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우주 전체의 상호 의존적이며 불가분의 부분들로서, 다시 말하면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다른 현현으로서 이해된다. 동양의 전통들은 그 자신을 만물에서 나타내며, 만물은 그의 부분들인 이 궁극적이고도 불가분의 실재에 관해 끝없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힌두교에서는 ‘범’, 불교에서는 ‘법신’, 도교에서는 ‘도’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은 그것을 일어 또한 ‘진여’라고도 부른다. (175/176)
우주의 근본적인 전일성은 신비적 체험의 중심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의 하나다. 그것은 원자의 단계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영역에까지 물질을 더 깊이 투시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통일성은 현대 물리학과 동양 철학에 관한 우리의 대비를 일관하는 하나의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아원자 물리학의 다양한 모델들을 연구해 감에 따라 그것들이 물질의 구성 요소들과 그에 관련된 근본적 현상들이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그리고 그것들이 고립된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전체의 완전한 부분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동일한 견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177)
우주적 망의 이미지는 불교에서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승 불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인 <화엄경>은 그 핵심 부문에서 이 세계를 완벽한 상호 관계의 망으로서 그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은 무한히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작용을 주고 받고 있다. (186)
11.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
대립자란 것은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요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개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바로 그 우리의 행위 때문에 그 개념의 대립자가 생겨난다. 노자는 이르기를 “세상에서 미를 모두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추가 존재하며, 선을 모두 선한 것이라고만 이해할 때 사악한 것이 존재한다”라고 하였다. 신비가는 지성적인 개념의 영역을 초월하며, 그것을 초월하는 가운데 그는 모든 대립적인 것들의 상대성과 양극 관계를 알게 된다. 그는 선과 악, 쾌락과 고통,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절대적인 경험이 아니라 단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이라는 것, 즉 단일한 전체의 양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대립자는 양극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보는 것이 동양의 정신적인 전통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목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194)
모든 대립적인 것이 양극적인 것이라는 개념- 즉 광명과 암흑, 득과 실, 선과 악 등이 동일한 현상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동양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다. 따라서 일체의 대립적인 것은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투쟁은 결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날 수 없고 항상 양자 간의 상호 작용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선을 위해 분투하고 악을 소멸시키는 불가능한 과업을 떠맡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악 사이에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195)
대립 개념 너머에 있는 실재에 직면해서 물리학자와 신비가들은 특별한 사유 방법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마음이 고전 논리의 완고한 틀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그 생각하는 관점이 살아 움직이고 끊임없이 전환되도록 해야 한다. (205)
13. 역동적인 우주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부동적이고 비활성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율동의 패턴이 분자, 원자, 핵의 구조에 따라서 결정되는 연속적인 율동과 진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또한 동양의 신비가가 물질세계를 보는 방식과 같다. (256)
14. 공과 형상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289)
15. 우주적 무도
우주적 무도라는 이런 은유는 그것의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힌두교의 무도 신 시바의 이미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여러 화신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인도 신중의 하나인 시바는 무도자들의 왕으로 나타난다. 힌두교의 신앙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생성과 소멸, 죽음과 재생의 거대한 율동적인 과정의 한 부분이며, 시바의 춤은 끊임없이 윤회를 계속하는 이 영원한 생사의 율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310)
18. 상호 관통
하나가 다른 모든 것에 맞대여 놓여 있을 때 그 하나는 그것들 모두에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서, 또한 동시에 그 자체 속에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374)
3. 내가 저자라면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제목만으로도 나를 압박해 오는 수위가 만만치 않은 책이다. 과학, 더군다나 물리학에 관한 역사나 기초지식이 전무한 나에게는 정말 어렵고 어려운 책이었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난이도에 대해 경고하셨고 조금씩 읽어두라고 미리 일러주셨거늘 스승님 말씀을 새겨듣지 않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괴로운 한 주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동양 사상에 들어 있는 전일적이며 역동적인 세계관과 얼마나 유사한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서양과학과 동양적 지혜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함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하는 노력과 함께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도’,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실현의 도정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의 물리학과 그 세월의 무게만큼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동양의 철학 및 종교적 사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우파니샤드는 제자가 스승과 무릎을 맞대고 가까이 앉아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찾아 대화한 기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힌두교의 정신적 원천 베다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성립된 후,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면서 베다의 실천적 내용을 완성한 우파니샤드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수행자로서 명상을 하며 해탈을 위해 사는, 깊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가 존재한다.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 (Atman, 自我)’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P120)
가장 순수한 정수 - 온 세상의 영혼, 그것은 실재다.
그것은 아트만이다. 그것은 당신이다. (P121)
개인적 자아를 가리키는 아트만과 영원한 진리인 브라만은 결국 하나다. 인도 철학에 있어서 인간 개체의 호흡을 지시하는 아트만과 우주적 호흡을 의미하는 브라만의 합일에서 범아 일어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 저자는 이러한 신비적 세계상은 현대 물리학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원자의 세계상은 고대 철학의 세계상과 상통하고 있으며, 모두 인간과 세계, 정신과 물질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피력하며 원자나 전자와 같은 관찰되는 대상적인 체계와 실험 장치나 관찰자와 같은 관찰하는 주체적인 체계 사이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신비적인 국면이 있다고 한다. 인식되는 대상으로서의 물질과 인식하는 주관으로서의 정신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부처는 그의 교시를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것을 단지 개오를 얻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가 이 세계에 관해서 말하는 것도 모든 ‘사물’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불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따름이며,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각자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적 권위에서 자유로울 것을 주장했다. (P131)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특별한 점은 절대적인 신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신을 믿고 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수행을 하고 마지막에 개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불교를 믿음의 종교가 아닌 수행의 종교라고 하나 보다.
부처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가르쳐 준 훌륭한 스승이었다. 저마다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하여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으라는 신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저자는 불교도들이 이러한 그들 자신에 대한 신비적 체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현대 물리학에서 실험과 수학적 이론을 통해서 재발견되고 있으며, 원자핵에 있어 가장 중요시하는 강입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불교나 역의 철학, 중국 철학에서 유사점을 많이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등 동양 사상은 인류의 지혜로 피어났다. 인간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하기도 한다. 사람의 가장 깊은 마음을 열어주고 우리의 삶과 그 의미를 탐구하게 한다. 사회,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 준다.
이러한 동양사상이 혼자서 개별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사상이나 민간 신앙과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었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온 만큼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삶,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호 작용에 의한 그 영향이 미치는 힘은 대단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결국 서양의 과학은 근사치의 이해를 가지고 자연의 상이한 국면들을 부분적으로 이해해 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확대시켜 가면서 궁극적으로는 물리학에 인간의 의식을 포함시킴으로써 물리학과 동양의 신비주의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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