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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6일 08시 11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루스 베네딕트 Ruth Fulton Benedict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188765일 미국 뉴욕 출생

1948917일 뉴욕에서 사망

 

 

1909년 배서(Vassar) 여자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우수 학생으로 뽑혀 독지가의 후원을 받아 1년 간 프랑스, 스위스, 독일, 영국 등을 여행했다.

미국에 돌아와서는 캘리포니아주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캘리포니아 거주 경험이 추후 그녀의 연구 방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스탠리 베네딕트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져

1914년 결혼, 여러 가명으로 시를 출간하기도 하고 더 알려져야 할 사람들에 대한 전기를 쓰기도 하는 등 글쓰기 프로젝트를 받아서 하며 지내다가

1919(31) 교육철학을 배우러 간 곳에서 훗날 지도교수가 된 프란츠 보아스의 제자를 통해 우연히 인류학 강의를 접하고 매료되어

1921(33) 컬럼비아대학에 입학, 저명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 아래서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1923년 현지를 답사하며 아메리카인디언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0년 모교 컬럼비아대학교 인류학 조교수로 재직

1934 <문화의 패턴>을 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1940 <민족>으로도 화제를 불러모았다.

1943년 전쟁공보청에서 해외정보책임자로 일했고,

1944년 일본인들의 행동양식에 대한 연구에 착수해

1946년 만년의 역작인 <국화와 칼>을 내놓았다.

 

 

출생과 성장배경

 

두 살 무렵에 외과의사이던 아버지가 급사하는 바람에 외할아버지 집인 뉴욕 주 섀턱 농장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교사와 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면서 힘겹게 두 딸을 키웠는데,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깊은 우울에 빠져들었으며, 남편이 죽은 3월에는 늘 교회에 가서 울며 지낼 정도였다. 때문에 베네딕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내면적으로 깊은 고뇌를 느끼며 성장했다. 과부 생활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호소하던 어머니에게 심한 염증을 느꼈고, 발작 비슷한 격심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어린 베네딕트에게는 가장 보호받아야 할 부모 양 쪽이 모두 없었던 셈이다.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동시에 죽음에 대한 환상도 가지게 되었는데,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덤불 사이에 누워 자신이 마치 관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신체적 장애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성격이 우울해졌는데, 두 살 아래 여동생 마저리는 성격이 밝고 예쁘고 활달한 아이여서 더욱 대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우울한 성격을 혐오하여 심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눈물 없는 외양을 꾸며야 했기 때문에 더욱 자기 혐오감이 깊어졌다. 베네딕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썼고 1909년 배서 대학 영문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한때 문필업에 전념할 생각도 있었으나 문화인류학에 입문하면서 시 쓰기는 중단했다.

 

 

결혼과 학문

 

1914년 여름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이 무렵 남편은 코넬대 의대에서 생화학자로 근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를 두고 남편과 갈등을 빚었다. 그녀는 그런 갈등을 해결해줄 촉매제로 아이의 출생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1919년 결정적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 해에 그녀는 아주 위험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남편이 그 수술에 반대하면서 부부관계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다.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베네딕트는 더욱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고 각오하게 되었다.

 

그녀는 31세가 되던 1919년 일반인을 위한 인류학 강의를 들으면서 그것이 아주 흥미로운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평소 늘 갖고 있던 질문들, 가령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가'” “나는 왜 인생에 많은 두려움을 느끼는가'” “나는 왜 현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문화인류학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학문에 매진했다.

 

루스 베네딕트의 삶은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다. 절반쯤 청각장애인이 된 아이, 조울증 기질을 가진 소녀, 결혼에 실패하여 별거한 여자, 성 정체성에 심한 혼란과 갈등을 느낀 여자, 남성 주도의 대학 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으며 경쟁해야 하는 여성 학자 등 온갖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 인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성 정체성, 그리고 여성으로 산다는 것

 

베네딕트 생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의 성 정체성 또한 독특한 인생의 에피소드이다.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마거렛 미드가 루스 베네딕트에 관한 책을 집필했던 1974년 당시만 해도 미국 내에서 동성애는 반드시 숨겨야 할 혐오 사항이었다.

 

베네딕트는 이런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변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런 만큼 그녀의 글에는 자기 지칭성(베네딕트 자신의 문제를 문화의 분석에 원용하는 것)의 경향이 강하다.

 

베네딕트가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파격적 성 정체성이라는 자기 인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녀는 1930년대 초반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새로운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방황과 고뇌의 세월을 청산하고 '문화의 패턴'을 썼다. 1934년 출간된 이 책은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 책으로 이를 통해 베네딕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40 <민족>을 출간하며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또한, 선불교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베네딕트에게 하나의 해결안을 제시했다. 베네딕트는 복음주의적 침례교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어릴 적 신앙을 버렸고, 꾸준히 대안을 찾아왔는데 선불교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선불교는지금 여기’라는 현재성, 개인의 자아, 내세와 신비주의의 거부, 선정(禪定)과 명상, 공안(公案)이라는 화두, 무술의 정진 등을 통해 개인의 극기를 유도하고 또 행위자와 관찰자라는 분열된 자아의 치유와 화해를 강조한다. 이런 선불교의 훈련을 통해 통합된 자아를 성취한 개인은 그 어떤 긴장이나 구속, 수치심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가르침은 인생의 의미와 관련하여 깊은 고민과 갈등을 되풀이 해온 베네딕트에게 분명 하나의 빛이 되었다.

 

 

학자로서

 

젊은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 보수적인 가문과 20세기 초반 미국 사회의 요구사항으로부터 심한 소외감을 느낀 베네딕트, 결국 그녀는 인류학이라는 분야에 헌신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현대의 정치적ㆍ윤리적 문제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발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녀는 지성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 학자였고 1930년대에는 활발하게 반() 파시즘 운동을 벌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공보청에 들어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는 등 인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녀의 학문적 입장은 인간의 사상·행동의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으로서 O.슈펭글러나 W.딜타이의 문화유형학과 게슈탈트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문화양식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장은 문화와 퍼스낼리티 연구나 국민성 연구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2008년 나온 <루스 베네딕트 -인류학의 휴머니스트>을 참고함.)

 

 

주요 저서로

《문화의 유형 Patterns of Culture(1934)

《민족-과학과 정치성 Race: Science and Politics(1940)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등이 있다.




내가 저자라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일본에 대해 알려주는 책

무려 36년 간의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과 일본인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 한국인들. 일본인의 행동양식의 배경을 제대로 짚어 주는 책을 만나 많이도 읽은 것 같다. 내가 읽은 을유문화사 간 <국화와 칼> 1974 2 11쇄가 발행되어 2009 6 5 4쇄가 나올 정도였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미 국무부의 당시 적국에 대한 민족성 분석 보고서이면 기밀로 부쳐지는 기간이 꽤 길었을 법도 한데, 이 책은 전후 오래지 않아 일반에 공개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생각보다 빨라서였겠지만, 덕분에 당시 지식인들은 일본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진 소중한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의 저서를 처음 접하다

루스 베네딕트는 그의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위시한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문화상대주의를 열어간 저명한 문화인류학자로 기억된다. 그의 저서도, 그 학파의 저서도 처음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를 꿈꾸었던 사람답게 그의 문체는 따뜻하다.

 

서문을 쓴 이안 부루마는 이 책이 고전인 것은 저자의 지적인 명확함, 그리고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난해한 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한 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지닌 작가였다. 문체는 그의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베네딕트는 훌륭한 인간성과 영혼의 관대함을 지닌 작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서술하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지식과 깊은 분석으로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노년의 역작이라더니, 정말 그녀의 혼이 제대로 꽃을 피우고 가려는 노력을 이 책 집필에 쏟아 부은 것이 아닌가 한다.

 

, 유독 한국은 빠져 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일본과 아시아의 다른 국가를 비교할 때 중국, 인도, 태국은 나오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어 기분이 상한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944, 우리나라가 아직 일본의 강제 점령기에서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런 것이구나를 책을 중반 이상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나라로 다루어지지도 못한 우리나라의 역사가 새삼 슬퍼졌다.

 

진위가 의심되는 문장

생후 3, 4개월 된 아이에게 용변훈련을 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낳고 키워보지 않은 그녀가) 조금 잘못 조사를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겨우 몸을 뒤집고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가 용변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감사의 말-루스 베네딕트

 

서문-이안 브루마

 

일본 전문가도 아니고 일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베네딕트는 오직 문서 자료(학술 서적과 영어로 번역된 일본 소설 등)와 영화, 일본계 미국인들과의 인터뷰에만 의존했다. (8)

 

베네딕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이런 인종적 문화적 편견에 철저히 저항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연구에 임했다. (8)

 

만약 국가적 나르시시즘에 입각했다면 그녀의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베네딕트는 진정으로 타자에 관심을 기울였다. (9)

 

문화 분석의 위험성은, 그것이 세계를 너무나 정적이고 단일한 것으로 가정한다는 점이다. 베네딕트는 이러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9)

 

일본인들은 타인의 의견에 매우 민감하다고 베네딕트는 말한다. 수치심이란 사회적인 의무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 죄책감은 발각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 느끼지만,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여 생긴다. (10)

 

베네딕트가 부여받은 임무의 성격 때문에 작업은 더욱 어려웠다. , 그녀가 일본인의 국민성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의 향후 행동을 미국 정부가 예측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10)

 

베네딕트는 대중의 태도가 얼마나 쉽게 변화할 수 있는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녀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일본인들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로 보았으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썼다. (11)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견해에 조건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일신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 절대 기준이 없는 일본인들에게, 윤리나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은 상황의존적일 뿐이다. (11~12)

 

이 책이 고전인 것은 저자의 지적인 명확함, 그리고 유려한 문체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난해한 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한 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지닌 작가였다. 문체는 그의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베네딕트는 훌륭한 인간성과 영혼의 관대함을 지닌 작가였다.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전쟁 시기에 쓰여진, 가공할 만한 적에 대한 묘사인 이 책을 오늘날 읽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과 일본인들에게 불어 닥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진실인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13)

 

 

역자 서문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에 의거한 저자의 연구는, 따라서 매우 전문적이다. (14)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것이다. (14)

 

특히 이 책의 정수는 계층제도 분석에 있다. 그 계층제도가 근대사회로 넘어올 때 어떠한 질서와 충동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고찰은 제3메이지유신속에 선명히 드러나 있다. (15)

 

만년의 명작인<국화와 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 6월 미국무부의 위촉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은 일본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책은 입증하고 있다. 부분적 체험은 전체적 방법론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15)

 

역자들은 1970년대 초 일본 도쿄대학에서 같은 시기에 연수하며 만난 것을 계기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16)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고, 가끔 출판된 사사로운 인상기나 체험기는 주관성 때문에 오히려 일본에 대한 이해를 그르칠 수 있었다. (16)

 

우리는 애써 일본을 외면해왔을 뿐 아니라 일본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해왔다. 과연 우리는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16)

 

 

 

 

제1장     연구 과제일본

 

일본인은 미국이 지금까지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가운데 가장 낯선 적이었다. 대국과의 전쟁에서 이처럼 현격히 이질적 행동과 사상적 특성을 고려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중략) 따라서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섬 해안의 일련의 상륙작전이나 수송과 보급 등의 어려움보다도 그 이상의 것, 즉 적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19)

 

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21)

 

1944 6, 나는 일본에 대한 연구를 위촉받았다. 일본인이 어떤 국민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나는 문화인류학자로서 모든 연구 방법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다. (22)

 

싸우고 있는 일본의 전력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비단 도쿄에 있는 통치자들의 목적이나 동기, 일본의 긴 역사, 경제나 정치상의 통계만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일본인의 사상이나 감정의 특성과 그런 특성에 배어 있는 문화의 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또한 이런 행동이나 의견의 배후에 있는 강제력을 알아야 했다. (23)

 

나의 연구 과제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다. 미국과 일본은 교전 중이었다. 전쟁 중에는 적을 나쁘게 깎아내리는 것은 쉽지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보는가를 적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해야만 할 임무였다. 문제는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지, 만일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있지 않았다. (중략) 나는 그들의 전쟁 수행 방식을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문제로 바라보았다. 평시와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일본인은 그들답게 행동했다. (24)

 

그러나 두 나라가 교전 중이라는 사실은 연구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것은 문화인류학자의 가장 중요한 연구 방법인 현지 조사를 단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4)

 

이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화인유학자로서 나는 이용할 수 있는 특정한 연구 방법과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중략) 미국에는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경험한 구체적인 사실을 묻고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알아내어, 연구의 많은 결함을 그들의 설명으로 보충했다. 당시 일본을 연구하고 있던 다른 사회과학자들은 도서관을 이용하여 과거의 사건이나 통계를 분석하고, 글이나 말로 행해진 일본인의 선전 문구에 나타난 변화를 추적하고 있었다. 나는 사회과학자들이 추구하는 해답의 대부분은 일본 문화의 규범과 가치 속에 깊이 배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실제로 그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탐구하는 편이 더 만족스러운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5)

 

유럽이나 미국인이 그들의 생생한 체험을 기록해놓았고, 또 일보인도 실로 놀랄 만큼 기록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많은 다른 동양인과는 달리 일본인은 자기 자신을 기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 확장 계획은 물론 일상의 사소한 일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일본인은 놀랄 만큼 솔직했다. (26)

 

인류학자는 평범한 사실을 연구하는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30)

 

나는 문화인류학자로서 고립된 어떠한 행동도 서로 체계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나는 수백 개의 개별적 사실들이 어떤 식으로 종합적인 유형으로 분류되어 있는가를 중요시했다. 인간 사회는 스스로를 위해 어떤 생활 유형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는 여러 가지 상화에 대처하는 일정한 방식과 그런 상황을 평가하는 일정한 방식을 승인한다. 그 사회의 사람들은 이런 해결 방법을 전 세계의 본질로서 이해한다. (31)

 

모든 나라의 문필가는 자신들의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국민이 자기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다른 국민이 사용하는 렌즈와는 다르다. (34)

 

그리하여 어떤 국민에게 공통의 인생관초점을 맞추는 법, 원근을 취하는 요령은 신에게 부여받은 풍경과도 같이 생각된다. 안경의 경우, 안경을 쓴 당사자가 렌즈의 처방을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국민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분석하는 데 기대를 걸 수가 없다. (34)

 

국민적 차이의 체계적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신념과 함께 어느 정도의 관용이 필요하다. (36)

 

이 책은 일본에서 예기되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습관에 관해 기술했다. 일본인은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고 또 지키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 수치를 느끼고, 어떤 경우에 당혹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에 관해 기술했다. 이 책에 기술된 사항의 이상적 전형은 이른바 서민이다. 서민은 평범한 사람이다. (37)

 

이런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 (37)

 

이런 연구에서는 아무리 많은 자료를 추가해도 객관성을 더해주지는 않는다. (37)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는 세상 여론이나 행동의 분포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 통계적 방법을 연구에 이용한다. 그들은 방대한 조사 자료, 질문서나 면접 조사자의 수많은 회답, 심리학적 측정 등을 통계적 분석에 맡긴다. 그리고는 거기서 어떤 요인의 독립성이나 상호의존 관계를 끌어낸다. (38)

 

여론조사 결과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를 이해하려 할 때는, 그 나라 사람의 습관이나 가정에 관한 질적 연구를 조직적으로 행한 뒤에야 비로소 여론조사를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다. (39)

 

나는 일본인과 함께 작업을 할 때, 처음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어구나 관념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감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과 악덕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체계는 매우 독특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도 유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40~41)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인의 문화와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다. (43~44)

 

우리는 일본인의 특성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했으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44)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44)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알맞은 위치를 주고 하나의 세계로 통일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그것은 일본이 만들어내기에 알맞은 하나의 환상이었다. (중략) 그리고 이런 태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층제도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신뢰이다. (45)

 

일본은 정신력이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 (45)

 

가미카제는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시켜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 (48)

 

일본인은 정반대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주의적인 방법이라고 일본인은 생각한다. (49)

 

기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연히 부딪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면 반드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52~53)

 

미국인은 생활양식을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세계에 맞게 조정하고, 그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반면 일본인은 미리 계획되고 진로가 정해진 생활양식에서만 안심을 얻을 수 있으며, 예견하지 못한 일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54)

 

일본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나 공공연한 공격만큼 일본인을 노엽게 하고 전의를 선동하는 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56)

 

수많은 포로 진술서 중 온건한 비난을 포함해서 반 천황적인 진술서는 단 세 통뿐이었다. 더구나 그 세 통 가운데 천황 제도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쓴 것은 단 한 통뿐이었다. (59)

 

천황에 대한 무조건 무제한적 충성은, 천황 이외의 다른 모든 인물과 집단에는 여러 비판이 가해진다는 사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60)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65)

 

만일 부상당했거나 기절하여 포로가 된 경우조차도, “일본에 돌아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여긴다. 그는 명예를 잃었다. 그 이전의 생활에서 본다면 그는 죽은 자였다. (65)

 

많은 미국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또 그 웃음이 교도관을 얼마나 자극하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포로란 치욕을 입은 자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66)

 

일본인은 모든 것을 건 어떤 행동방침이 실패할 경우,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 같았다. (69)

 

  

 

 

제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은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도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아왔다. 최근 10년 동안 일본인은 일본이 국제적 계층제도의 피라미드에서 차츰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71~72)

 

1940년에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체결한 3국동맹의 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대일본제국 정부, 독일 정부, 이탈리아 정부는 세계만방이 각자 알맞은 위치를 갖는 것이 항구적 평화의 선결 요건임을 인정하므로……” (72)

 

젊은 프랑스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1830년대 초기에 미국을 방문한 후 평등 문제에 대해 쓴 책을 들 수 있다. 총명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관찰자였던 토크빌은 별천지인 미국에서 뛰어난 점을 많이 발견했다. 정말로 그것은 별천지였다. (중략)

토크빌은 신세계를 상세히 보고했다. 신세계 사람들은 서로를 평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74)

 

일본에서는 예의범절을 배우고 세심하게 이행하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77)

 

19세기 중반까지 성은 귀족과 사무라인 집안에만 허용되었다. (79)

 

일본은 봉건적 국가였다. 충성을 바치는 상대는 씨족이 아니라 봉건 영주였다. (중략) 어떤 사람의 고삐는 그의 영지에 매여 있었다. (80)

 

일본의 가족적인 유대는 서양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프랑스의 가족이 가장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효도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한정된 가족 사이의 문제이다. (81)

 

일본에서는 부인이 살림을 책임지고 쇼핑을 하며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있다. (83)

 

세계사에서 어떤 주권국가도 일본만큼 계획적으로 문명을 훌륭하게 수입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87)

 

중국에서는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88)

 

상인계급은 늘 봉건제도의 파괴자였다. 실업가가 존경받고 번영하면 봉건제도가 쇠퇴한다. (92)

 

상인들이 엄중한 신분 제약에도 불구하고 도시생활이나 예능과 오락에 높은 가치를 두는 생활양식을 발달시킨 것처럼, 사무라이들도 늘 칼을 뽑을 준비를 하면서도 평화의 기술을 발달시켰다. (95)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102)

 

일본에서는 각각의 카스트가 절대로 동일한 카스트 안에서만 혼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카스트와의 통혼을 가능하게 하는 공인된 절차가 있었다. (중략) 상인이나 돈놀이꾼은 공인된 방법으로 상류계급의 신분을 샀다. 상인과 하층 사무라이는 동맹자가 되었다. (중략)

이 두 계급이 제휴한 것은 일본에서는 그렇게 하는 편이 두 계급 모두에게 이로웠기 때문이었다. (105)

 

국민은 쇄국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는 정책 강령을 지지했다. (107)

 

혁명을 싫어하던 일본이 갑자기 방침을 바꾸어 서양의 모범에 따르기로 하고, 그로부터 겨우 50년 후 서양을 본령으로 하는 분야에서 서양과 경쟁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107)

 

뒤떨어지고 계층제도에 얽매였던 일본의 민중은 급선회하여 새로운 진로로 행진해 나아갔다. (107)

 

 

 

제4장     메이지유신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1871년에서 1873년에 걸친 조선침략론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는 방침을 결코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침략 계획을 묵살했다. (111)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시대부터 육성한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계급의 특수한 연합세력이었다. (112)

 

중요한 문제는 이 정치가들이 어느 계급 출신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유능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일 수 있었는가에 있다.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오늘날로 따지면 태국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113)

 

메이지유신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는 일본을 세계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113)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종교 분야에서 정치에 비해 훨씬 기묘한 형식적 제도를 만들어냈다. (122)

 

국가신토는 미국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국가신토는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서양의 신앙의 자유 원칙에 조금도 저촉되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국가신토를 요구할 수 있었다. (123)

 

불교는 지금도 국민 대다수의 종교인데, 각기 다른 가르침과 다른 개조를 가진 여러 종파가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25)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은 즐겨 먼 곳의 신사나 절에 참배하러 가지만, 이것 역시 휴일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127)

 

일본의 인과응보는 그 안전의 신조를 외국에 수출하려 했을 때 찾아왔다. (중략) 계층제도는 도저히 수출할 수 없는 상품이다. 다른 국가는 일본의 일방적 주장을 건방진 것으로,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기고 분개했다. (134)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일본의 도덕체계가,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134)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135)

 

 

 

제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동양 여러 국민은 완전히 반대이다. 그들은 과거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137)

 

조상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일체의 과거에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137~138)

 

그들이 이렇게 소중히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나, 이 세상에 태어난 단순한 사실까지도 모두 세상의 덕이기 때문이다. (138)

 

일본에서 의란 조상과 동시대인을 포함하는 거대한 채무의 망상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138)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139)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중략)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 (141)

 

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에게 뜻밖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일본인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145)

 

일본의 거리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 제멋대로 참견하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략) 분명한 권한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받는다. (145)

 

당신은 예의바르게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마음속의 괴로움을 고백해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온을 베풀었지만,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 사람을 만난 일이 없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쪽에서도 온을 제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은혜를 받아서 꺼림칙하지만 사죄하면 약간은 마음이 편해진다. 감사를 나타내는 말 중 스미마센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리라. 내가 이 사람에게서 온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은 모자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자. 그 이상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147)

 

이 치욕을 의미하는 하지는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147)

 

이처럼 사소한 일에 관한 신경과민이나 쉽게 상처받는 현상은, 미국에서는 젊은 폭력배들의 기록이나 신경쇠약증 환자의 병력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것은 미덕이다. (150)

 

 

제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일본인에게 온은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다. (159)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義務라고 불린다. 이에 관해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부모에 대한 보은인 고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중략) 모든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중되며, 또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한다.

이 두 종류의 기무는 모두 무조건적이다. (161)

 

진을 행한다’, 혹은 그 변형인 진기仁義를 행한다는 것은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 결코 덕목으로 요구되지 않았다. (164)

 

일본인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앞서기 때문에 이것을 외부의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169)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 이외에는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에 집중한다. 많은 저서가 일본인은 추상적 사색이나 현존하지 않는 사물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에 흥미가 없다고 논한다. (169)

 

일본 효행의 특징은 가족 구성원간에 뚜렷한 원한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172)

 

미국에서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179)

 

 

 

제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義理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중략)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중략) 기리는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낸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에 속한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 (183)

 

기리를 안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 주군에게 충절을 다한다는 것이다. (190)

 

인생의 모든 접촉은 반드시 이런저런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기분으로 하는 사소한 말이나 행동까지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

 

기리는 정확히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기리는 기무와 구별된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193)

 

일본인은 가능하면 노력이든 물건이든 서로 주고받은 복잡한 관계를 기록한 장부를 만든다. (194)

 

기리에 몰린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당한다. (196)

 

 

 

 

제8장     오명을 씻는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 (199)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자신의 명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00)

 

훌륭한 사람은 모욕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 (200)

 

중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소인’, 즉 도덕적으로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들은 상대방이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상대방에게 져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02)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여자는 분만할 때 큰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해야 한다. (203)

 

그들은 굶주림에 굴복해서는 안 되었는데, 이것은 일부러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굶주려 있을 때에도 식사를 마친 시늉을 해야 한다고 명령받았다. (203)

 

빚을 깨끗이 갚아야 하는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위해 자살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섣달 그믐에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207)

 

이 실험을 실시했던 몇몇 일본인 학자는 경쟁 상태에 놓였을 때, 이처럼 성적이 나쁜 이유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문제를 경쟁으로 해결하려 하면 피험자들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겨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경쟁을 자신에 대한 외부의 공격이라고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210)

 

일본인은 예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했다. (211)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이런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전반에서 나타난다. (211)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 (212)

 

미국인은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욕을 한다. 그것은 일종의 유희 같은 것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인이 왜 아무것도 아닌 말을 그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15)

 

복수는 누군가에게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때의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의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18)

 

일본인의 이른바 심리 특이성의 대부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점과, 그것과 뗄 수 없는 불결한 것을 미워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오카쿠라 요시사부로, 219)

 

공격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공격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것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223)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최근 수십 년간 일본소설에는 교양 있는 일본인이 빈번히 자아를 잃고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우울에 빠져드는 모습이 거듭 묘사되고 있다. (223)

 

이런 일본인 특유의 권태는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국민 공통의 병이다. 그들은 배척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부로 돌려 스스로를 괴롭힌다. (223)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보다 자신을 죽이는 사건을 화제에 올리기를 좋아한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면, 일본인은 자살을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flagrant case(중대한 사건)’로 친다. 그것은 다른 행위를 논해서는 충족되지 않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킨다. (226)

 

최근 오륙십 년간, 일본인은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느꼈을 때, ‘방정식의 양변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아침목욕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타인을 해치는 대신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227)

 

그러나 일본인은 결코 무기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기력에서 벗어나자”, “다른 사람을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하자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끊임없니 쓰이는 좋은 생활 구호이다. (231)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231)

 

일본인은 낡은 주의를 고수할 도덕적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232)

 

패전 후 일본인의 이런 갑작스런 전향은 미국인으로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중략) 포로들은 자기들이 일본인으로서는 죽은 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인간이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232)

 

일본인은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강대국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대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방침을 취했다. (중략) 그들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233)

 

이와 같이 상황에 따른 현실주의는 일본인의 이름에 대한 기리의 밝은 면이다. (235)

 

 

 

제9장     인정의 세계

 

일본의 도덕률은 뜻밖에도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239)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39)

 

일본에서는 의무와 마찬가지로 쾌락을 배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쾌락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일은 없다. (240)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쾌락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240)

 

어쨌든 일본인은 어떻게든 목욕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241)

 

잠 또한 일본인이 애호하는 즐거움이다. (243)

 

그들은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 동양의 국가 중에서 이렇게 빨리 자는 국민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243)

 

그들은 잠을 즐기고 방해하는 것이 없으면 기꺼이 잠을 잔다. (244)

 

여가 생활로 일본인은 잇따라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즐긴다. (245)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 (253)

 

일본인은 항상 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255)

 

행복 추구를 인생의 최대 목표로 하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부도덕한 가르침이다. 행복은 사람이 그것을 탐닉하여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다. (256)

 

이와 같은 일본인의 견해를 반영하듯,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은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이 극히 드물다. (257)

 

 

 

제10장   덕의 딜레마

 

그들은 미국인처럼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난하는 대신, 그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261)

 

이 사무라이는 춤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칼로 쇼군을 찌르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다이묘에 대한 기리로 사무라이는 군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는 쇼군에게 대항하는 것을 금했다. 장막에 비친 칼춤은 이 갈등을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는 해야 하는 동시에 해서는 안 된다. (275)

 

그들은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277)

 

일본인의 가르침은 주를 최고의 덕으로 삼는 데 두어졌다. (중략) 그들은 도덕의 영역에서도 하위의 덕을 모조리 주의 범주 아래 둠으로써 의무 체계를 단순화했다. (278)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 보통 성실을 선택한다. (283)

 

성실이 미국인이 생각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모든 일본어 문헌에서 주의해야 할 극히 유용한 말임을 알 수 있다. (289)

 

마코토는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끊임없이 사용된다. (289)

 

마코토는 항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도 쓰인다. (289)

 

이런 모든 자중의 의미는, 인생을 세심하게 주의하며 호일에 따라서(규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세계로 보는 일본인의 인생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294)

 

현재 일본인은 때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청교도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략) 일본인은 죄의 중요성보다도 수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295)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해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 (296)

 

미국에 이주한 초기 청교도들은 일체의 도덕을 죄책감의 기초 위에 두려고 노력했다. (296)

 

일본인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도 나의 행동을 전혀 흠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랑스러움은 무참히도 상처받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는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해, 또 내가 이때까지 받아온 예절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이 막연한 그러나 뿌리 깊은 분노의 감정 외에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나에게 남지 않게 되었다.” (299)

 

중국의 여성은 대개의 일본 여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함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위대한 기계 문명과 속도 속에 있으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겁내지 않는 태도와 당당한 침착성은, 끊임없이 겁에 질리고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일본 여성의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배경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00)

 

 

 

제11장   자기 수양

 

미국은 자기 훈련을 위한 특별한 방법이 비교적 발달되지 않았다. (303)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즉 슈요修養)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309~310)

 

일본인은 이와 같은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310)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 외에 그 이상의 것으로서 숙달이 있다. (311)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일종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observing self)’, ‘방해하는 나(interfering self)’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으로 이 장벽을 제거하면,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 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행위는 노력 없이 행해진다. (312)

 

일본의 수행법이 대개 인도의 요가 수행에서 유래한 만큼 더욱 흥미롭다. 일본의 자기 최면, 정신 집중, 오관 제어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의 관행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314)

 

그들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조차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누구라도, 심지어 신분이 낮은 농부조차도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했다. 각 가정의 불단에 모신 가족의 위패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불교 국가는 일찍이 없었다. (315)

 

무슨 일을 하든 어차피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굳이 한평생 육체를 괴롭히고 절대적 정지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315)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한다는 교리이다. 요가 수행은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315)

 

이런 생각은 일본인이 자기 감시와 자기 감독에 얼마나 중압감을 느끼는가를 말해준다. 그들은 이런 제약이 없어졌을 때 자유로워지고 마음껏 일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329)

 

일본인은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을 말없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로 쓴다. (330)

 

육아법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어떤 나라의 국민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33)

 

 

 

제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서양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다. (335)

 

그것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가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자유는 최저에 달한다. (336)

 

태어난 뒤 3일간은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는다. 일본인은 산모의 모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339)

 

갓난아이가 3, 4개월이 되면 어머니는 용변 훈련을 시작한다. (341~342)

 

일본의 갓난아이는 보통 걷기보다는 말을 먼저 한다. (중략) 갓난아이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는 서거나 걷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있어서, 어머니는 그 이전에 갓난아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 (342)

 

세 번째로 늘 쓰이는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의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록 배운다. (344)

 

싸움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곧잘 ‘nob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에 호소하여, 큰아이에게 작은아이가 하는 말을 들어주라고 말한다. (351)

 

뜸은 화를 내기 쉬운 성격이나 고집 센 아이를 고칠 수 있다. (352)

 

일본인은 (중략) 나체로 목욕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사내아이는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곧바로 편 채 자야 한다. (353)

 

경쟁은 돌연 닥쳐오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에 더욱 걱정거리가 된다. 석차 경쟁과 함께 시기질투가 성행한다. (363)

 

예를 들면, 폴란드에서는 새로운 도제나 젊은 일꾼을 심하게 학대하는데, 그 원한을 학대한 당사자가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도제나 일꾼에게 갚는다. (365)

 

어린 소녀기에는 빨간색 옷을 즐겨 입는다. 어른이 되면 그런 색깔의 옷은 제2의 특권적 시기가 시작되는 60세까지는 입을 수 없다. (366)

 

음주와 같은 자유로운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생활의 중요한 면에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사용하는 가장 심한 악담이다. (375)

 

서양인을 놀라게 하는 일본 남성의 행동적 모순은, 그들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훈육의 불연속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380)

 

그들은 세상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 (384)

 

그들이 그렇게 공격적 행동을 취하는 경우는 미국인처럼 자신의 주의주장이나 자유가 도전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방당했다고 느꼈을 때이다. (384)

 

우리는 순진하게, 또한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일본인을 미치도록 기쁘게 하는 것인가를 상기해야 한다. (384)

 

이 위장된 자연은 그녀에게는, 그녀가 그때까지 교육받아왔던 위장된 의지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386)

 

이제 일본인은 정신적 자유를 증대할 수 있는 과도기에 서 있다. (387)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 (396)

 

일본인은 일정한 행동방침을 취하고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그는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 (400)

 

일본은 일찍이 강대국을 이긴 바 있다. 일본은 전승국이 되었을 때 항복한 적이 일본을 조소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패배한 적에게 모욕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403)

 

그러나 일본인같이 극단적으로 기회주의적 윤리를 가진 국민에게 그런 결론은 바람직하지 않다. (405)

 

일본인은 궁극적 패배에 직면하여 그들의 생활 관습에 따라 여태껏 취해온 방침을 포기했다. (405)

 

일본인은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나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최초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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