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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8일 10시 53분 등록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역/ 을유문화사

 

 

저자에 대하여

 

루스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1948)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서 1887년 6월5일 미국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두 살 무렵에 외과 의사이던 아버지가 급사하는 바람에 뉴욕주에 위치한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아주 어릴 적에 열병을 앓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신체적 장애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성격이 우울해졌으며, 이러한 자신의 우울한 성격을 혐오하여 심적으로 대혼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배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만나 결혼했다. 34세의 늦은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문화 상대론의 대표 주자로서 미국 문화인류학의 터전을 닦은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모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3년 워싱턴 전쟁 공보청에 해외정보 책임자로 파견되어 전쟁 지원 업무, 우방국가, 적성국가, 적국에 의해 점령된 국가들 등 전시 미국과 관련 있는 나라들의 문화를 연구했다. 미국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에는 컬럼비아대학에 현대문화연구소를 설치, 대규모 연구 과제를 추진하다가 안타깝게도 61세의 나이로 1948년 9월17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문화의 유형>(1934), <종족>(1940), <국화와 칼>(1946) 등이 있다. <문화의 패턴>은 문화의 상대성과 문화가 개인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 책으로 이를 통해 그녀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1940년 <종족>을 출간하며 미국 인류학계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서문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눈에 거슬리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냉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6]

 

세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감성적 형제애가 지배하는 곳이다. 세계 속 각 개인은 특정한 관심과 역사, 경험에 의해 형성된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각 개인에 대해 진실이라면 국가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네딕트가 말한 이른바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다른 나라의 문화가 지닌 관점이 비록 자신의 견해와 충돌하더라도, 그것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6]

 

특히 극심하게 충돌하는 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비상한 관대함이 요구된다. 이런 관대함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적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만이 사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7]

 

인종과 국가에 대한 준 과학적 이론들이 제시되면서 민족 집단의 고유한 특성을 추출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이제 이론가들은 한 국가의 단일문화적 정체성보다 문화가 갖는 다문화적 특성, 혹은 교접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8]

 

일본 사회는 서구 사회보다 절대적인 윤리 기준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좋은 행위에 대한 외부의 인정’에 더 의존한다. 일본인들은 타인의 의견에 매우 민감하다고 베네딕트는 말한다.[10]

 

수치심이란 실화적인 의무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생긴다. 죄책감은 발각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 느끼지만,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여 생긴다.[10]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중의 하나는, 죽음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던 일본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고 우호적으로 변한 사실이었다.[10]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견해에 조건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일신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절대 기준이 없는 일본인들에게, 윤리나 삶의 목적 등 모든 것이 상황의존적일 뿐이다. 따라서 그렇게 호전적이던 민족이 쉽사리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11]

 

베네딕트는 난해한 용어를 쓰지 않고 복잡한 사상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을 가진 작가였다. 문체는 그이 사람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베네딕트는 훌륭한 인간성과 영혼의 관대함을 지닌 작가였다.[13]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본 문화의 틀을 탐구하고 있다. 미국에서 크게 발달한 문화인류학의 방법론에 의거한 저자의 연구는, 따라서 매우 전문적이다.[14]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것이다. 원래 이런 문화인류학적 방법은 역사주의 방법과는 다르고, 그런 역자주의 방법은 주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이 책의 방법론은 그런 주관성을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학문적 객관성을 얻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정수는 계층제도의 분석에 있다. 그 계층제도가 근대사회로 넘어올 때 어떠한 질서와 충동을 일으키는가에 대한 고찰은 제3장 ‘메이지 유신’ 속에 선명히 드러나 있다.[15]

 

역자 서문

저자가 목적으로 삼은 것은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지(수치, 부끄러움)’의 인식에 놓인 문화다.[14]

 

1장 연구 과제 : 일본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아래 75년간 일본인에 대해 쓴 저작에는, 일찍이 세계 어느 국민에게도 쓰인 적이 없는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20]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에 관한 책을 쓸 경우,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을 기술한 또 다른 책이 그 국민의 성격을 보충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없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20,21]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얌전하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21]

 

인류학자가 연구하려는 부족의 생활양식 속에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예상한 것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인류학자는 평범한 사실을 연구하는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30]

 

종교적 교리와 경제적 관습과 정치는 결코 명료하게 격리된 작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넘어 흘러간다. 그래서 그 물은 서로 섞여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모르게 합쳐진다. 이 사실은 항상 진리이므로 연구자는 그 연구가 경제, 성생활, 종교 또는 어린아이 양육 등 여러 가지 사실 속에 분산된 것처럼 보일수록, 사회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을 더욱 잘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33]

 

민족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강인한 신념과 그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성을 함께 필요로 한다.[34]

 

차이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심한다. 그들은 차이를 존중한다.[35]

 

이 책에 기술된 사항의 이상적인 전형은 이른바 서민이다. 서민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각각 특수한 경우에 행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조건 아래서는 그런 행위를 한다고 인정할만한 사항을 기술했다. 이런 연구의 목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상과 행동의 태도를 기술하는 데에 있다.[37]

 

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이 연구의 목적은 일본인의 문화와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데 있다.[43]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자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44]

 

일본은 승리의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바탕 위에 놓고 있었다. 정신력이 반드시 물질력을 이긴다고 부르짖었다.[45]

 

이런 태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층제도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신뢰. 그것은 평등을 사랑하는 미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층제도가 일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그 제도에 어떠한 장점이 있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45]

 

그들의 군대용 교과서 첫머리에는 큰 활자로 ‘필독필승’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소형 비행기로 미군의 군함에 뛰어들어 자폭하는 조종사들은 물질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교훈이 되었다. 이 조종사들을 가미카제 특공대라 한다. 가미카제는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일본을 침략했을 때, 그 수송선을 전복시켜 일본을 구한 성스러운 바람을 가리킨다.[48]

 

일본인이 전쟁 중 끊임없이 되풀이한 또 하나의 주제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매우 잘 나타내준다. 그들은 계속 “세계의 눈이 우리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문구를 입에 올렸다. 따라서 일본인은 일본 정신을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54]

 

독일군 포로들은 휘하의 장군이나 최고 사령부가 히틀러를 배신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재오가 전쟁 준비의 책임은 최고 선동자인 히틀러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군 포로들은 황실 숭배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과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58]

 

그들에게 천황은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이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진정한 일본이 아니다.” “천황이 없는 일본이란 생각할 수 없다.” “일본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이며, 국민의 종교 생활의 중심이다. 천황은 초 종교적 대상이다.” 설령 일본이 전쟁에 패하였다 하더라도 패전의 책임은 천황에게 없다. “국민은 천황이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패전이 되더라도 책임은 내각과 군 지휘관이 져야 하며, 천황에게는 책임이 없다.”“설령 일본이 지더라도 일본인은 열명이면 열명 다 천황을 계속 숭배할 것이다.”[58]

 

일본인의 병력 소모 이론을 극단적인 수준까지 이르게 한 것은 무항복주의였다. 서양의 군인들은 최선을 다해 싸운 후에 도저히 대적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항복. 그들은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명예로운 군인이라 생각하며, 그들이 살아 있음을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명단을 본국으로 통보해주기를 원함.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국민으로서도 또 자신의 가정에서도 모욕을 받지 않음. 그렇지만 일본은 이런 상황을 전혀 다른 식으로 규정.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65]

 

많은 미국인이 포로수용소에서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또 그 웃음이 교도관을 얼마나 자극하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일본인의 관점에서 보면 포로란 치욕을 입은 자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66]

 

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계층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71]

 

미국에서는 가족에게는 형식적 예의를 벗어 버린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예의범절을 배우고 세심하게 이행하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77]


그것은 머리를 수그리는 사람이 사실은 자기 뜻대로 처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상대방이 자기 뜻대로 행동할 권리를 승인하는 것이며, 절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 지위에 당연히 돌아가는 어떤 책임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성별과 세대의 구별과 장자 상속권에게 입각한 계층 제도가 가정생활의 근간이다.[78]

 

알맞은 위치라는 것은 단지 세대 차이만이 아니라 연령의 차이에도 적용되다. 일본인은 극단적인 무질서 혼란 상태를 표현할 때, 어떤 일이 “난형난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니다”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실제 일본인의 사고로는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남은 맏형으로서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81]

 

일본에는 세대와 성별과 연령에서 오는 특권이 이처럼 크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 받은 사람들은 멋대로 하는 독재자로서가 아니라 중대한 책무를 위탁 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한다.[84]

 

일본인은 가정 생활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존중하도록 배우지 않는다. 도한 쉽사리 권위에 굴복하는 습성을 기르지도 않는다. 가족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은, 그 요구가 부당하더라도 가족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라는 명분으로 요구한다. 즉,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한다.[85]

 

일본인은 누구나 우선 가정 내부에서 계층 제도의 습관을 배우고 그것을 경제활동이나 정치 생활 등 넓은 영역에 적용한다. 그가 실제로 집단 속에서 지배력을 가진 인물이든 아니든, 자기보다 위의 ‘분수에 맞는 위치’를 갖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경의를 표하도록 배운다.[85]

 

세계사에서 어떤 주권국가도 일본만큼 계획적으로 문명을 훌륭하게 수입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87]

 

일본의 봉건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눠지고, 각자의 신분은 세습적으로 정해졌다. 도쿠가와는 이 제도를 고정시켜 각 스타마다의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정하였다.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신분 순으로 무사, 농민, 상인의 네 가지가 일본의 카스트였다.[91]

 

상인계급은 천민계급의 바로 위에 놓였다. 미국인은 이런 사실이 의외라고 느끼겠지만 봉건사회의 실정에는 매우 적합한 일이었다. 상인계급은 늘 봉건제도의 파괴자였다.실업자가 존경 받고 번영하면 봉건제도는 쇠퇴한다.[92]

 

사무라이와 다른 세 계급, 즉 농, 공, 상인과의 사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 세 계급은 ‘서민’이었지만, 사무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사무라이가 그들의 특권으로서, 또 그 카스트의 표시로서 허리에 찬 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는 도쿠가와 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서민에 대해 칼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94]

 

일본에서 이중통치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2세게 이래 대원수(쇼군)가 실권을 박탈당한 천황의 이름을 가지고 이 나라를 통치했던 것이다.[99]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개인은 각각 정해진 사회적 지위 속에서 생활하도록 제약 되었다.[102]

 

일본에는 만일 현행의 행동지도에서 허락 받지 못한 일탈 행위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 있다.사람들은 이 지도를 신뢰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든가 저항하는 대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자신의 용기와 고결함을 드러냈다. 여기에 명기된 범위는 이미 아는 세계이며, 따라서 일본인의 눈으로 본다면 신뢰할 수 있는 세계였다.[103]

 

일본은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이용하여 - 그것은 서양의 장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 높은 지위에 있는 일군의 유력인사도 일반민중의 이론도 결코 요구하지 않는 목표를 이루어냈다.[107]

 

4장 메이지 유신

 

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손노조이 즉 ‘왕정을 복고하고 오랑캐를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세에 짓밟히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109]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오늘날로 따지면 태국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를 배출. 그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전통적 일본인의 성격에 깊이 뿌리 박힌 것. 그 성격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113]

 

메이지 유신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는 일본을 세계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상파괴자가 아니었다.[113]

 

일본의 정치 형태와 이와 유사한 서양의 사례의 차이는, 형식에 있지 않고 기능적인 면에 있다. 일본인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만들어 냈고, 그들이 윤리 체계와 예절 속에 격식화되어 있는 낡은 복종의 관습에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각하’들이 ‘알맞은 위치’에 있어 직분을 다하며 반드시 그의 특권이 존중해 준다. 그것은 해당 정책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특권의 경계선을 넘는 것 자체가 괘씸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정의 최상층에서는 ‘국민의 여론’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는 단지 ‘국민의 지지’만을 요구할 따름이다.[121]

 

‘모든 것을 알맞은 장소에 둔다.’  이것이 일본의 좌우명이다.[122]

 

이와 같이 일본인은 끊임없이 계층제도를 고려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다듬어나갔다. 가정이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는 연령, 세대, 성별, 계급 등이 알맞은 행동을 지정한다. 정치, 종교, 군대, 산업에서는 각각의 영역이 신중하게 계층으로 나뉘어 있어,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자신들의 특권의 범위를 넘어서면 반드시 처벌 받는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 일본인은 불만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최대의 행복이 보호되는가 하는 의미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경구가 종종 있지만, 그럼에도 계층제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 안전하다.[133]

 

일본인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을 다른 나라에도 요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 그들은 ‘각자 알맞은 지위를 받아들이는’ 일본의 도덕체계가,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국가에는 그런 도덕률이 없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일본만의 산물이었다. 일본의 저술가들은 이 윤리체계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것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체계를 이해해야 한다.[134,135]

 

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동양 여러 국민은 완전히 반대이다. 그들은 과거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137]

 

조상 숭배라 하더라도 전적으로 조상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일체의 과거에 지고 있는 큰 채무를 인정하는 하나의 의식이다.[137,138]

 

일본에서 의란 조상과 동시대인을 포함하는 거대한 채무의 망상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138]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윗사람이 아니거나, 적어도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 행위는 불쾌한 열등감을 준다.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들은 채권자나 은혜를 베푼 사람을 온진이라고 부른다. [139]

 

일본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누리며 자기 신변의 크고 작은 일이 잘 되어간다고 느낄 때, 언제나 그것을 한 사람이 내려준 은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오늘날엔 그것이 천황이다.[141]

 

일본인은 조상숭배의 대상을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최근의 조상만으로 한정한다. 이런 사실은 일본인에게, 자신이 유년시절 조상에게 현실적인 신세를 졌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142]

 

비교적 인연이 먼 사람에게 뜻밖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일본인은 가장 불쾌하게 생각한다. 일본의 거리에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모인 군중이 수수방관하는 것은 단지 자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경찰이 아닌 민간인이 제멋대로 참견하면, 그 사람에게 온을 입히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분명한 권한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무언가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 받는다.[145]

 

당신은 예의 바르게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마음속의 괴로움을 고백해야 한다.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온을 베풀었지만,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이 사람을 만난 일이 없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쪽에서도 온을 제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은혜를 받아서 꺼림칙하지만 사죄하면 약간은 마음이 편해진다. 감사를 나타내는 말 중 스미마센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리라. 내가 이 사람에게서 온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은 모자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자. 그 이상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147]

 

사람은 끊임없이 상반된 감정을 품으면서 온을 입는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관계구조에서, 온이 내포하는 커다란 채무는 때로는 사람들을 자극시켜 전력을 다해 은혜를 갚게 만든다.[148]

 

사소한 일에 관한 신경과민이나 쉽게 상처 받는 현상은, 미국에서는 젊은 폭력배들의 기록이나 신경쇠약증 환자의 병력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이것은 미덕이다.[150]

 

사랑, 친절, 너그러운 마음 등은 미국에서는 부수적인 대가가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 받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은 채무자가 된다. 일본인이 잘 쓰는 속담이 있다. “온을 받은 데에는 더없이 타고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157]

 

6장 만 분의 일의 은혜 갚음

 

일본인에게 온은 중요하고도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채무다.[159]

 

채무에 대한 한없는 변제는 기무라고 불린다. 이에 관해 일본인은, “받은 온의 만분의 일도 결코 갚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무는 부모에 대한 보은인 고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161]

 

모든 기무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가중되며, 또 일체의 우발적 사정을 초월한다. 이 두 종류의 기무는 모두 무조건적이다.[161]

 

일본인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앞서기 때문에 이것을 ‘외부’의 간섭으로 보지 않는다. [169]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조상 이외에는 효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에 집중한다. 많은 저서가 일본인은 추상적 사색이나 현존하지 않는 사물을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에 흥미가 없다고 논한다.[169]

 

일본 효행의 특징은 가족 구성원간에 뚜렷한 원한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72]

 

일본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 변천을 거쳤지만, 그 어떤 변혁에서도 결코 사회조직이 지리멸렬하게 파괴된 일 없이 항상 불변의 형태로 지켜져 온 나라였다.[175]

 

일본처럼 완전히 개인적 유대 위에 입각한 문화에서는, 천황은 국기 따위는 감히 미치지 못하는 충성의 상징이었다.[177]

 

미국에서는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한다는 태도에 의존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179]

 

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기리는 기무와는 종류가 다른 일련의 의무이다. 기리는 인류학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찾아낸 여러 가지 별난 도덕적 의무의 범주에서도 가장 드문 것에 속한다. 그것은 특히 일본적인 것이다.[183]

 

기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방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인은 누구나 행위의 동기나 명성, 혹은 본국에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딜레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기리를 입에 담는다.[184]

 

‘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세상에 대한 기리’-글자 그대로는 ‘기리를 갚는 것’-는 동년배에게 온을 갚는 의무이다. 또 ‘이름에 대한 기리’는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같은 것으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비난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다. 기무가 태어나자마자 생기는 친밀한 의무의 수행이라면, 세상에 대한 기리는 계약 관계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185]

 

기리는 아주 괴로운 일이자 ‘본의 아닌 일’이다. 따라서 ‘기리 때문’이라는 표현은 일본인에게는 번거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말이다.[187]

 

‘기리를 안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 주군에게 충절을 다한다는 것이다.[190]

 

일본인은 복수의 주제를, 죽음을 건 충절과 마찬가지로 흔쾌히 찬양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리였다. 충절은 주군에 대한 기리였고, 모욕에 대한 복수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기리였다. 일본에서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191]

 

기리의 규칙은 엄밀히 말해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하는 갚음의 규칙이다.[192]

 

인생의 모든 접촉은 반드시 이런저런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국인의 입장에서 기리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기분으로 하는 사소한 말이나 행동까지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방심하지 말고 걸어 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93]

 

기리는 정확히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기리는 기무와 구별된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193]

 

기리는 정확히 같은 양으로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기리는 기무와 구별된다. 기무는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완전하게는, 아니 완전에 가까운 정도까지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리는 무한정한 것이 아니다.[194]

 

기리에 몰린 인간은 때때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커진 부채의 변제를 강요 당한다.[196]

 

8장 오명을 씻는다

 

이름에 대한 기리는 자신의 명성에 오점이 없도록 하는 의무이다.[199]

 

또한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방은 자신의 명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200]

 

훌륭한 사람은 모욕도 그가 받은 은혜만큼이나 강하게 느낀다.[200]

 

사람이 기리를 지키고 오명을 씻는 한, 결코 침해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빚을 갚아 셈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201]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여자는 분만할 때 큰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남자는 고통이나 위험에 직면하여 초연해야 한다.[203]

 

사무라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고통스런 표정을 보여서는 안 되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204]

 

진정한 존엄성이란 항상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자기에게 알맞은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왕이나 백성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토크빌이라면 계급 차별은 그 자체로는 결코 굴욕적이지 않다는 일본인의 태도를 이해하였을 것이다.[205]

 

빚을 깨끗이 갚아야 하는 기한인 설날이 다가오면,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살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섣달 그믐에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한다.[207]

 

기리의 모든 용법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인간과 그가 하는 일을 극단적으로 동일시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의 행위나 능력에 대한 비판은 자동적으로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된다.[208]

 

일본에서는 자기 방어가 대단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 직업상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예의이며 또한 현명한 태도라고 여긴다.[209]

 

우리는 경쟁을 ‘바람직한 일’로 생각하고 크게 의지한다. 심리 테스트는 경쟁이 우리를 자극시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다.[209]

 

일본인은 예부터 늘 무엇인가 교묘한 방법을 궁리하여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려 했다.[211]

 

직접적 경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이런 노력은 일본인의 생활 전반에서 나타난다.[211]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개자 제도는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이다.[212]

 

일본에서는 어떠한 계획이건 성공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될 수 잇는 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예절이다.[213]

 

그들은 모욕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더없이 성공의 자극제로 삼고 있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태는 제안하고 있다.[215]

 

복수는 누군가에게 모욕이나 패배를 당했을 때의 ‘바람직한 대응’으로, 일본의 전통 속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218]

 

일본인은 실패나 비방, 배척 때문에 상처 받기 쉽다. 따라서 타인을 괴롭히기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최근 수십 년간 일본소설에는 교양 있는 일본인이 빈번히 자아를 잃고 분노를 폭발 시키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우울에 빠져드는 모습이 거듭 묘사되고 있다.[223]

 

이런 일본인 특유의 권태는 과도하게 상처 받기 쉬운 국민 공통의 병이다. 그들은 배척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부로 돌려 스스로를 괴롭힌다.[223]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시 하여 절망에의 자포자기적인 굴복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해지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225]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보다 자신을 죽이는 사건을 화제에 올리기를 좋아한다. 베이컨의 말을 빌리면, 일본인은 자살을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flagrant case(중대한 사건)’로 친다. 그것은 다른 행위를 논해서는 충족되지 않는 어떤 요구를 충족시킨다.[226]

 

현대에 들어 항의를 위한 자살은, 협상이 아니라 자기 주장에 대한 순교적 행위이다.[227]

 

1930년대 중반, 그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방법 또한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의 방향을 내면에서 다시 밖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를 전체주의적으로 침략함으로써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228]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231]

 

일본인은 침략의 근거를 다른 데서 구한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강대국이 존경을 받는 것은 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강대국에 필적하는 나라가 되기 위한 방침을 취했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도 낙후되었기 때문에 서양 여러 나라 이상의 악랄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비상한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233]

 

9장 인정의 세계

 

일본의 도덕률은 뜻밖에도 그처럼 관대하게 오관의 쾌락을 허용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239]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239]

 

일본에서는 의무와 마찬가지로 쾌락을 배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쾌락 그 자체를 가르치는 일은 없다.[240]

 

일본인은 육체적 쾌락을 일부러 함양한 후에, 엄숙한 생활양식에서는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을 제정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마치 예술처럼 연마하고, 쾌락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의무를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240]

 

현대의 초등학교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이들의 신체를 단련하고, 장래 인생의 갖가지 난관에 견뎌낼 수 있게 한다는 이유에서 매우 좋은 일로 치부된다.[242]

 

일본인의 생각에 따르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단식하는 것은 얼마나 ‘단련’이 잘 되어 있는 가를 알 수 있는 뛰어난 감별 법이다. 따뜻함을 멀리하고 수면을 줄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식 또는 고난을 참고, 사무라이와 마찬가지로 ‘(먹지 않았으면서도) 이쑤시개를 입에 물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이다. [245]

 

그들은 아내에 속하는 영역과 성적 향락에 속하는 영역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그 둘을 명확하게 구별한다. 두 영역은 모두 공공연히 인정된다.[247]

 

일본에서 동성애는 사무라이나 승려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공인된 즐거움이었다.[251]


일본인의 철학에서 육체는 악이 아니다. 가능한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우주의 대립하는 2대 세력이 아니다.[253]

 

일본인은 항상 덕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255]

 

행복 추구를 인생의 최대 목표로 하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부도덕한 가르침이다. 행복은 사람이 그것을 탐닉하여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다.[256]

 

10장 덕의 딜레마

 

일본인의 인생관은 주, 고, 기리, 진 인정 등의 표현에 나타난 그대로이다. 일본인은 ‘인간의 의무’가 마치 지도 위의 여러 지역처럼 몇 개의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261]

 

일본인은 다른 사람을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판단 하지 않고, ‘ 고를 모른다. 기리를 모른다” 등의 말로 표현한다.[261]

 

그들이 곧잘 말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 칼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녹술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사 독이 슨다 하더라도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아내기만 하면 된다.[265]

 

사무라이는 춤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칼로 쇼군을 찌르도록 명령 받고 있었다. 다이묘에 대한 기리로 사무라이는 군명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는 쇼군에게 대항하는 것을 금했다. 장막에 비친 칼춤은 이 갈등을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는 해야 하는 동시에 해서는 안 된다.[275]

 

그들은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277]

 

그들은 주를 단순히 지도 위의 하나의 영역이 아니라 도덕의 근본 원리로 삼으려 했다.[278]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 보통 ‘성실’을 선택한다.[283]

 

감정을 입 밖으로 낸다는 것은 수치다. 그것은 자기를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287]

 

‘성실’이 미국인이 생각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모든 일본어 문헌에서 주의해야 할 극히 유용한 말임을 알 수 있다.[289]

 

현재 일본인은 때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청교도 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일본인은 죄의 중요성보다도 수치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295]

 

참다운 죄의 문화가 내면적 죄의 자각에 의거해 선행을 하는 데 비해, 참다운 수치의 문화는 외면적 강제력에 의거해 선행을 한다. 수치는 타인의 비평에 대한 반응이다.[296]

 

“일본인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도 나의 행동을 전혀 흠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랑스러움은 무참히도 상처 받았다. 나는 이 나라에서는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해, 또 내가 이때까지 받아온 예절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이 막연한 그러나 뿌리 깊은 분노의 감정 외에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나에게 남지 않게 되었다.” <나의 좁은 섬나라>[299]

 

11장 자기 수양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자기 수양의 습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인의 ‘자기훈련 ’ 개념에 일종의 외과적 수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서 이 관념의 주위에 달라붙어 잇는 ‘자기희생’과 ‘억압’이라는 부산물을 잘라내야만 한다. 일본에서는 훌륭한 경기자가 되기 위해 자기 훈련을 한다. 희생 의식을 수반하지 않고 훈련을 받는다.[309]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행복하지만 ‘인생을 맛보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정신적 훈련(혹은 자기 훈련, 즉 슈요을 쌓아야 비로소 사람은 충실한 생활을 하고 인생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이 표현은 통상 “이리하여 비로소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번역된다. 자기훈련은 “배(자제력이 깃드는 곳) - 배짱 - 를 만든다. 그것은 인생을 확대한다.[309,310]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어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 예리한 칼로 만든다.[310]

 

일본인은 이와 같은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310]

 

‘능력’을 기르는 자기 훈련 외에 그 이상의 것으로서 ‘숙달’이 있다.[311]

 

숙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일종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일본인은 이 장벽을 ‘보는 나’, ‘방해하는 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별한 훈련으로 이 장벽을 제거하면, 달인은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회로는 열려 있고 전류는 자유로이 흐른다. 행위는 노력 없이 행해진다.[312]

 

일본의 수행법이 대개 인도의 요가 수행에서 유래한 만큼 더욱 흥미롭다. 일본의 자기 최면, 정신 집중, 오관 제어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인도의 관행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314]

 

그들은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조차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누구라도, 심지어 신분이 낮은 농부조차도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했다. 각 가정의 불단에 모신 가족의 위패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불교 국가는 일찍이 없었다.[315]

 

무슨 일을 하든 어차피 부처가 되는 것이라면, 굳이 한평생 육체를 괴롭히고 절대적 정지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315]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대립한다는 교리이다. 요가 수행은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이다.[315]

 

일본인은 ‘죽은 셈치고 산다’는 표현을 말없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의미로 쓴다.[330]

 

무가의 밑바탕에 있는 철학이 ‘죽은 셈치고 산다’는 태도의 밑바탕에도 숨어 있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일체의 자기 감시, 일체의 공포심과 경계심을 버린다. 그는 죽은 자, 즉 이미 올바른 행동방침에 대해 걱정할 필요를 초월한 사람이 된다.[331]

 

그는 ‘숙달’의 수행을 쌓아 하지의 자기 감시를 배제하려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그의 ‘육관’은 장애가 제거된다. 그것은 자의식과 모순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다.[332]

 

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일본의 갓난아이는 서양인이 상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양육되고 있다.[335]

 

그것은 큰 U자형 곡선으로, 갓난아이와 노인에게 최대의 자유가 허락된다.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구속이 커지고, 결혼 전후의 시기에 이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자유는 최저에 달한다.[336]

 

일본의 갓난아이는 보통 걷기보다는 말을 먼저 한다. 기어 다니는 것은 보통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갓난아이는 만 한 살이 될 때까지는 서거나 걷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있어서, 어머니는 그 이전에 갓난아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342]

 

늘 쓰이는 훈계의 말은 ‘더럽다’는 말이다. 일본의 집은 정연하게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어린아이는 그것을 존중하도록 배운다.[344]

 

나체로 목욕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사내아이는 아무렇게나 잠을 자도 괜찮지만, 여자아이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곧바로 편 채 자야 한다.[353]

 

음주와 같은 ‘자유로운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생활의 중요한 면에서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말은, ‘바보’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사용하는 가장 심한 악담이다.[375]

 

일본인이 사용하는 두세 개의 상징적 물건은 자녀 훈육의 불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들의 양면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가장 빠른 시기에 형성된 ‘부끄러움 없는 자아’이다. 그들은 그 ‘부끄러움 없는 자아’를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377]

 

그들은 자제에 의해 자아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된다는 생각을 도덕률의 중요한 신조로 여겨왔다.[379]

 

그들은 세상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포기한다.[384]

 

그들이 그렇게 공격적 행동을 취하는 경우는 미국인처럼 자신의 주의주장이나 자유가 도전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모욕당했거나 비방 당했다고 느꼈을 때이다.[384]

 

이제 일본인은 정신적 자유를 증대할 수 있는 과도기에 서 있다. 그 하나는 그들이 ‘몸에서 나온 녹’은 그들 자신이 처리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자기책임의 태도이다. 이 비유는 신체와 칼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칼을 찬 사람에게 칼이 녹슬지 않고 번쩍이게 할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각자 자기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 지속성의 결여, 실패 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를 승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387]

 

이런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고도 훌륭하게 자기 행동을 책임지는 사람의 비유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시대에서 이 덕은 가장 평형의 역할을 한다.[387,388]

 

오늘날 일본은 서양적 의미에서 ‘칼을 버리고 항복할’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일본적 의미에서 일본인은 여전히 자칫하면 녹이 슬기 쉬운 마음속의 칼을 녹슬지 않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다.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388]

 

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일본인은 그들의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396]

 

일본인은 사리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는 되지 않는다.[398]

 

일본인은 양자 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여태껏 받아온 일체의 훈련이 그들을 방향 전화에 응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399]

 

일본인은 일정한 행동방침을 취하고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그는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400]

 

일본은 일찍이 강대국을 이긴 바 있다. 일본은 전승국이 되었을 때 항복한 적이 일본을 조소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패배한 적에게 모욕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403]

 

일본인은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나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최초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평화로운 나라 사이에서 존경 받는 지위를 회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413]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할 것이다.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얼마나 뼈저리게 체득하였는가를 증명할 것이다.[413,414]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목적으로 객관적으로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 문화의 가장 일반적인 틀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책이다. 이를 위해 평균적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의 틀을 탐구하고 있다. 보통 일본 문화를 ‘혼네(본심)’와 ‘다테마에(표면상의 방침)’의 두 축으로 분석하고는 하는데, 이는 일본인은 겉으로 하는 말과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중성과 그 바탕에 깔린 모순적 속성을 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와의 오버랩

 

책을 읽으면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가 생각났다. 이 책이 일본인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학문적인 탐구를 통해 일본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면, ‘라스트 사무라이’는 점차 일본에 동화되어 가는 주인공 알그렌 대위(탐 크루즈)를 통해 일본의 사회와 풍경을 비추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감성적 이해를 시도한다는 점이 공통점이자 차이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메이지 유신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세력, 그들에 둘러 쌓인 천황, 그리고 천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마지막 사무라이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동화 과정을 주요 테마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한 명의 무장으로서의 마지막 사무라이들의 수장 가츠모토(켄 와타나베)의 행위에 매료된 기억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바로 ‘칼’과 ‘벚꽃’이었다고 생각된다. 영화 내내 사무라이들과 신군부 사이의 전쟁 장면이 펼쳐지면서 동시에 서로 물러나 자신의 고향에서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연과 ‘벚꽃’을 즐기는 장면이 대비되면서 나타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영화 역시 이러한 일본의 이중성을 화면을 통해서 대비시켜 보이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계층 구조의 힘 – 자신의 위치를 갖고 넘지 않는 것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키워드로서 ‘계층 구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질서와 계층제도를 신뢰하는 일본인과, 자유와 평등을 신뢰하는 미국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계층제도를 하나의 가능한 사회기구로서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71]

 

일본의 봉건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눠지고, 각자의 신분은 세습적으로 정해졌다. 도쿠가와는 이 제도를 고정시켜 각 스타마다의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정하였다.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신분 순으로 무사, 농민, 상인의 네 가지가 일본의 카스트였다.[91]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개인은 각각 정해진 사회적 지위 속에서 생활하도록 제약 되었다.[102]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을 처음 볼 때 느껴지는 특성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예절 바르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그것을 본받아야 할 덕성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일본을 알게 되면서 그 이면에 깔린 사회문화적 구조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게 된 기억이 있다. 철저하게 계층화 되어 있어 자신만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을 금기시 하며 또한 그럴 경우 언제든지 사무라이들의 칼에 목숨이 날라갈 수 있는 살벌한 사회문화적 구조였다면 누구도 조심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만의 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이고 또한 지역 행정 단위 사이마다 높은 산들이 가로 막혀 있어 이동과 탈출이 힘들다는 지형적 특성까지 감안하면 이것은 장단점의 문제가 아니며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이 책이 말하는 ‘비록 눈에 거슬리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냉철한 인식’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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