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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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자에 대하여
내가 만난 첫 여성 문화인류학자:
마가릿 미드에 대해서는 얼핏 알고 있지만, 아직 그녀의 책을 읽지는 못했으니, 루스 베네딕트는 내가 만난 첫 여성 문화인류학자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책 “국화와 칼”은 굉장히 유명한 책이지만,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올 해 처음 읽는 책 중의 하나였다.
나 역시 당연히 책을 읽기 전, 그녀의 삶과 행적을 쫓으며 이 여인의 삶 또한 얼마나 힘겨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 배경이 그러하고, 성 정체성 이슈와 결혼 생활이 또한 그러하고.
하지만 책을 덮은 뒤 나의 느낌은 이런 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에겐 그 나름의 주어진 몫이랄까, 환경이 있다. 그녀가 믿었던 선불교에 의하면 각자의 카르마로 풀이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새롭지 않지만 정말 중요한 확신을 또 한번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아무리 서구 사회라하지만 분명 힘겹고 불리한 상황에서 삶을 펼쳐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그녀에게 끊임없는 의구심을 심어주었을테고, 그녀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의구심들과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답하려 그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변한다. 오늘도 난 이 변화의 힘을 믿고, 또 한 권의 북리뷰를 시작한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저자의 책 주제 Vs 내가 책을 읽는 관점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오늘날로 따지면 태국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전통적 일본인의 성격에 깊이 뿌리박힌 것이었다. 그 성격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113).
이상은 저자, 즉 서양인이 이 책을 읽는 관점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1946년에 쓰여진, 일본에 의해 놀란 서구 사회가 일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연구한 연구 자료에 그 바탕을 둔 책인 거다.
그렇다면, 한국인인 나는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할까?
우리 모두에게 일본은 늘 가깝고도 먼 나라였고, 현대에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라고 피어오르는 그 생각, 바로 그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째서 일본은 우리에게 있어 가깝고도 먼 나라인지, 그 이유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싶었다.
전쟁의 원인: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객관적으로 살펴볼 주제
그러므로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전제를 바탕으로 뒤쳐진 동생인 중국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이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알맞은 위치를 주고 하나의 세계로 통일해야 하는 것이다 (45).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 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서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71).
일본인은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 관계도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아왔다 (71).
한국과 일본 사이에 뿌리 깊은 거리감의 가장 큰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일제 침략기에 대한 어딘가 석연찮은 일본의 태도일 것이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독일과 전후 처리 및 태도에 있어 비교되며 일본은 더욱 성토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만약 우리가 일본의 전쟁 및 전후 처리에 대한 태도에 있어 루스 베네딕트의 위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객관적으로는 지금까지보다 일본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일본은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국제적 계층 구조상 우리나라와 중국을 동생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진정한 믿음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조 정래 선생의 “아리랑”에서 일본인들이 흔히 말하던 “우리는 형님 국가로서 조센징~”어쩌고 하던 표현이, 선생이 지어낸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그네들의 관점이었단 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일본인들의 사상이 또 다른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적 개념과 관습이 바뀌지 않는 한, 지난 과거를 대하는 그네들의 태도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고, 한일간의 시각 차이는 여전히 좁혀질 수 없는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이 진정 그네들의 “계층적 구조”에 따른 사고가 전부였을까? 당연히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설명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무리가 있다. 독일의 침공 이유를 단 한가지로 설명할 수 없듯이 말이다.
1930년대 중반, 그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방법 또한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의 방향을 내면에서 다시 밖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를 전체주의적으로 침략함으로써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불쾌한 기분에서 벗어나 자기 속에 새로이 큰 힘을 느꼈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나 정복 민족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229).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원인들은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일본의 이웃 나라 침략은 경제적 이유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야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모든 전쟁은 사실 경제적 이유와 정치적 야욕,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원인을 이루고, 일본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임진왜란이나 근대 침략이나 또한 별반 구분이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풀이하고 받아들이냐는 그네들의 “사회적 관습이나 사상”에 의해 얼마든지 변곡되고 달리 해석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주제에서부터, 일본인들은 어쩐지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나의 느낌은 결국 책을 덮을 때까지, 아니 책을 덮은 지금까지 가장 강렬하게 전해져 오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천황, 일본인들의 이중성의 근원이자 계층구조의 최고 꼭대기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
일본 역사를 잠시 들여다보면, 천황이란 존재는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쿠카와 이에야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당대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통일을 이룬 토요토미 히데요시야 스스로의 출신이 비천하니까 명분상 그러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통일을 이룩하고 전 일본에 평화의 시기를 열어 준, 더군다나 그 자신 격조 높은 가문 출신인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천황을 그대로 존속시킨 것은 내겐 언제나 의문점이었다.
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그리고 현대 일본 경영자들 사이에서 덕치주의 경영으로 가장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도쿠카와 이에야스. 한국인에게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가려 그 다음에 오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전 일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불 같은 성정의 오다 노부나가도 아니고, 가장 밑바닥에서 용으로까지 승천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아닌 덕치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도쿠카와 이에야스이다.
그런 그가 천황을 살려 두었다. 왜? 덕이 있는 인물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린 그가 왜 덕치주의를 표방할 수 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주목하여야만 21세기까지도 일본의 천황이 유유히 그 존재를 이어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만, 일본의 3대 스타인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역사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스토리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들 세사람의 성격에 따라 하늘이 맞는 시기에 맞는 인물을 적절히 내려 놓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성격은 시대와 어우러져 일본의 강대국의 역사로 가는 길문을 활짝 열어준다.
그러므로, 한국인으로서는 이 세 인물의 적절한 출현이 천추의 한이 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만약 그 순서를 뒤바꿔 태어나기만 했어도, 일본이 그처럼 역사상 한국을 앞질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 세 사람은 근대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패권국으로 만드는 그 반석을 철저하게 이루는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다.
우선 오다 노부나가 시대 이전의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의 기틀을 채 갖추지 못한, 국가적 정비나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체 그야말로 각 영주들이 밤낮으로 전쟁을 치르는 내전으로 인한 혈전 상태였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전 일본에 거쳐 거의 통일제국의 기틀을 다지지만, 통일의 문 앞에서 부하에게 암살당한다. 이어 뒤를 이어,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명민한 머리를 활용하여 권력을 손에 쥐지만, 출신 성분의 한계로 인해 성장과 발전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국 내부 분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결론에까지 도달한다. 이에 결국 희생은 고스란히 명나라가 아닌 그 길목에 있는 우리나라의 몫이었음이다.
뒤를 이어 패권을 차지한 도쿠카와 이에야스 시기에 이르러 드디어 일본은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에야스는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상인들을 결탁하고 경제 개발에 집중하기도 하며, 전 일본에 걸쳐 제도를 갖추고 학문을 수용하는 등 일본이 후세대에 이르러 동아시아에서 패권국이 될 모든 기틀이 이 시대에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은 민족이 다름아닌 일본이다. 국가적 경비 체제도 갖추지 못하고, 내전에 내전을 거듭한 일본인들을 이에야스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시스템에 꿰어 맞추기 시작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 자신의 손으로 천황을 죽일 수 있을까? 그건, 누군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명분을 또 다시 제공하는 것이고, 어렵사리 이루어낸 평화의 기틀과 모든 국가적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다.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덕이 있어 덕치주의를 표방한 것이 아니라, 덕치주의를 표방한 계층 구조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정치 전략이었다 (일본 소설들은 이에야스를 덕의 화신처럼 미화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리고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이 때 다져진 기틀이 아직까지도 일본인들 사이에 깊이 박혀 있는 사상이자 뿌리이다. 너무나도 처절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시기를 거친 일본이기에, 개인들의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평화를 유지하고 싶은 그네들의 간절함이, 오늘날 일본의 이중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누구보다 호전적이지만, 또한 그 어떤 민족보다 평화를 지향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 한가지 인성이 강하게 강요되면, 그 반대 급부에 대한 열망이 강하듯이, 일본 역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경험이 뼈 속 깊이 스며들면 스며드는 만큼, 세상 그 어떤 민족보다 평화에의 열망이 강한, 서양인들의 눈에는 묘한 이중성을 지닌 민족으로 비춰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가지, 우리는 과연 어땠을까? 우리네 역사 또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기는 비슷한데, 만약 우리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근대화의 문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조선 왕조를 지금까지 이어왔을까?
일본 천황 Vs 한국의 임금님
아마도 우리가 만약 내적 혁명에 의해 조선 왕조를 폐위시켰다면, 우린 그 자리에서 임금님의 목을 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로 넘어오는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내전에 휘둘린 것이 아니고, 늘 외세에 시달려온 민족이다. 여기에 바로 한국인에게 뿌리깊은 “순수 혈통”에의 집착이 있는 것이다. 주변 강대국인 중국인의 피가 섞여도 안되고, 야만인이지만 어딘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본의 피가 섞여도 안되는 “순수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가는 일이 우리에겐 절대절명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절한 민족적 이슈로서, 이 역시 아직까지도 현대 한국인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이해 할 수 있겠다.
한편, 일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우린 비교적 일찍 중국 문명을 받아들여서 국가적 기반은 훨씬 더 빨리 갖추고 있었고, 그 맨 꼭대기에 임금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있은들 무엇하리. 우린 늘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것을. 엄청난 계급 사회에서 민초들이 숨 죽이고 살고 있었지만, 임진 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자,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 백성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만약 우리가 자체적으로 혁명에 의해 조선 왕조를 폐위시켰으면, 그 역시도 이씨 왕조는 끝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라도, 현대 일본은 천황이 있고, 현대 한국은 임금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임금님의 위치에 무엇을 올려 놓았을까? 어떤 민족이든지 국가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숭배할 그 무언가 하나는 필요하다. 일본의 천황에 버금가는 것이 한국에서는 과연 무엇일까?
신불로서의 천황 Vs 미국에 역수출되는 한국의 예수님
꽉 짜여진 사회적 구조 안에서, 현실에서의 평화가 절대절명인 일본에서 사후 세계를 논하는 종교가 파고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저 인간에게 있어 형이상학의 맨 꼭대기에 종교가 놓여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어떻게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비종교적으로 지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이 맨 꼭대기에 천황을 거의 신격화하여 신불처럼 대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선천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한국인의 피를 타고 난 나로서는 사실 굉장히 의아한 부분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놀라우리만치 비종교적인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인들은 반면 놀라우리만치 종교적이다. 종교적이다 못해 우리는 광신자들을 양산함에 있어 세계에서 상위 랭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이건 또 왜일까?
예전부터 우리네 어머니들은 물을 떠놓고 달님에게라도 빌고 또 빌었다. 무엇을? 전쟁터로 끌려간 아들의 무사함을 빌었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시집간 딸을 위해 빌었고. 여하간 우리는 인간의 힘을 믿기보다는 자연의 힘 혹은 나보다 강한 외적인 그 무언가에 의지하는 타력 신앙이 민간 신앙에서부터 종교적 차원에까지 고루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온 삶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성향이 근대를 거쳐 현대에까지도 이어져, 이제는 한국 목사님들이 미국 본토에 기독교 사상을 역수출하는 상황에 이르고, 불교 또한 원래의 교리와는 달리 자력의 수행 방편이 아닌 타력 신앙으로 줄기차게 발전되어 오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도대체 우리 피 안의 그 어떤 인자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걸까?
한 마디로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빌고 또 빌기 때문이다. 절에가보면 가장 히트 상품이 “수능 100일기도”이다. 그 다음이 “남편 승진 기도”. 부모님의 건강 혹은 무병장수를 위한 100일기도 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랑하는 남편의 정신적 행복을 위한 기도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랑하는 자식이 스스로 행복한 길을 찾게 해달라는 기도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직 수능 100일 기도이자, 그 자식들 공부 잘 시키기 위한 원천인 남편 승진을 위해 우리네 여인들은 빌고 또 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졸업하면, 이번엔 아이들이 좋은 짝을 만나게 해달라고, 혹은 좋은 회사에 취직하게 해달라고 무릎이 깨지도록 또 빈다. 참으로 어머니들은 위대하시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자식 잘되기는 도대체 어디에까지 그 근원이 닿아 있는 걸까? 다름 아닌 조선 시대가 낳은 최대의 병적인 사회 현상인 “폐쇄적 계급사회”에까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인들한테 빌붙은 힘있는 것들은 편히 살았다. 해방이 되어 한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일본 앞잡이들이 청산되기는커녕, 권력층은 고스란히 미국 정부로 이양되다시피 했다. 그들이 유일하게 교육받은 인구라는 원인 하나로, 우린 자구적으로 식민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리고 산업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또한 정부와 재벌의 결탁에 힘입어 부정한 세력이 사회 권력층을 유지하는 현상은 우리 역사에서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 온다. 어머니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식들이 물불을 가리지 말고 출세해야 한다. 금쪽 같은 내 새끼가 남들한테서 부당한 취급을 당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조건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오직 그 뿐이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은 오늘도 자식들을 위해 이번에는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자산을 물려주기 위해 애태우는 어머니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신들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기무와 의무: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공통점- 효 사상
기무는 부모에 대한 보은인 고 (효)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 (충)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두 개의 기무는 모두 강제성이 있어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161).
유사한 듯 다른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3개국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사상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효” 사상일터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 “효”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없다라는 점이다. 처음 외국에 갔을 때 “효도해야 한다”를 영어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던 기억이 지금도 떠오른다.
왜일까? 어째서 서양에는 “효도”라는 단어가 없는데, 유독 동양에선 그것도 동북아시아 3개국에선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일까? 그것은 아마도 농경 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동북아 3개국 남성들에게는 “대를 잇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절대절명의 일이었고, 대를 잇지 못하는, 즉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은 죄인 중에도 큰 죄인에 속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왜 대를 이어야 할까? 그건 당연히 토지에 근본을 둔 재산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동력 확보의 원리이다. 그런데 문화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닌 현대에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여전히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와 같은 대를 잇는다는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가장 최근 약 10년 정도의 한구 사회는 급격히 딸을 선호하는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보이고는 있다).
그러다보니까 대개 가정에서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어머니들의 삶의 의미는 그 자식들이 얼마나 성공했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 일반화된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난제가 숨어 있다. 다름 아닌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맹목적인 희생이다.
나의 목소리를 좀 더 마키아벨리 톤으로 옮겨가 보도록 하자. 부모가 자식을 위해 (대개 경우, 어머니들이) 전폭적으로 당신들의 인생을 희생한 경우, 부모와 자식간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될까?
안타깝게도 희생의 폭이 크면 클수록 자식들은 과도한 의무를 넘어서 때로는 죄의식에 시달려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한계이다.
부모, 자식간에 이러한 등식이 성립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부모는 내가 선택한 사랑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내가 열망한 사랑이 아니었고, 내가 간절히 바래서 얻은 관계가 아니라, 그야말로 자연 발생적으로 맺어진 관계이기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인 희생이 따르는 관계는 자식들로 하여금 일생 벗어던지기 어려운 짐을 지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아니다. 비록 부모는 그러한 일을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조율할 수 없는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상대의 엄청난 희생은 받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할 수도 있다.
어떤가? 당신이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효자나 효녀로 불리우는 사람이라면, 내 말이 좀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걸음만 들어가 보면, 우리네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장남이 심리적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모녀관계가 갈등 속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숨을 쉴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원인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된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부모, 자식 관계일수록 부모의 사랑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희생이나 책임이란 단어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참으로 반대한다. 모든 인
간 관계가 그러하듯, 부모, 자식간이라 해도 이 책에서 언급하듯 부모, 자식간에도 말로 주
고받지는 않지만 심리적 채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건강한 행복과 사랑의 관계에서 벗어나
도 한참 벗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에 놓이는 자식들이야말로, 부모가 그토록
원하던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일생을 허덕여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희생인지 정말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난 감히 간청하고 싶다. 부디, 당신들의 삶을 먼저 찾으시라고. 그런 후, 자식들을 사랑해도 충분하다고. 부모와 자식은 핏줄로 연결된 혈연 관계이기에 더욱, 그토록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으며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을..
인생 맨 끝자락에서 그 때서야 후회하는 모습 보여주시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식은 어찌 해드려야 하는건지… 물론 그 후회조차도 그저 지나가는 넋두리요, 한숨인 거 잘 알고 있지만, 자식이기에 어머니의 한숨 앞에 가슴이 조여오는 아픔을 느끼며, 당신 또한 당신의 삶을 사셨더라면 하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만 원망할 뿐이다.. 내게 시간과 애정 좀 덜 쏟고 당신의 삶을 찾아 사셨다한들, 어머니에 대한 내 사랑이 어찌 지금보다 못할 수 있었을까…
이 땅 위의 모든 부모님들, 특히 어머니들께 간절히 바라오니, 그저 따듯한 사랑으로만 보살펴 주셔도 자식들은 그 나름대로 건강히 잘 커나갈 테니, 자식들을 위한 과도한 책임이나 희생은 이제 그만 내려 놓을 수 없을런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뿌리 깊은 병적인 교육 제도를 바로 잡아가는 첫 걸음이 아닐런지… 자식들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과연 당신들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희생을 하고 계시는건지…
개인이든 사회든 과한 절제나 구속은 또 다른 극을 부른다. 여기 지금까지와는 달리 현대 한국 사회에서 급등하는 자살에 대해 잠시 양국의 차이를 살펴보자.
자살을 바라보는 두 민족의 시각 차이:
미학의 극치로서의 자살, 일본 Vs 신체발부수지부모, 한국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225).
일본 소설을 푸르른 서늘함으로 이끌어가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미학의 극치로서 자살”을 그리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가 사상에 입각해 “신체발부수지부모”라며 자살을 기피시해왔다. 근대로 넘어와서도 종교색채가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자살은 절대자에 대한 죄 혹은 씻을 수 없는 현생의 죄라 여기며 터부시해왔는데, 아주 최근에 이르러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에서도 자살률이 급등하고 있는 것 또한 새로운 사회 현상 중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일본처럼 미학의 극치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나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학적 행위라기 보다는 생활고에 따른 경제적 요인이 몰고오는 과대 경쟁의 결과로서의 사회적 현상에 그 원인이 닿아 있다고 여겨지는 바, 여전히 양국 간에 있어 자살을 바라보는 혹은 그 원인에는 문화만큼이나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자살은 전통적으로 문화적 요인에까지 닿아 있다고 치고, 상대적으로 자살을 터부시하던 한국 문화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자살율이 급등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무래도 사회적인 과다 경쟁에서 오는 경제적 원인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하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 정신적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건지…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 사회는 얼마나 숨통이 막히는 사회일까?
사회 경직도 순서: 일본 최고, 그 다음 한국, 보다 융통성 있는 중국:
“중국의 여성은 대개의 일본 여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함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상류의 중국 여성은 한결같이 여왕과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세계의 참다운 지배자인 것 같은 취향이 있어서, 나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위대한 기계 문명과 속도 속에 있으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겁내지 않는 태도와 당당한 침착성은, 끊임없이 겁에 질리고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일본 여성의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배경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00).
외국에 나가면 영어를 가장 늦게 습득하는 대표적인 민족 중의 하나가 한국인인데, 그 한국인을 유일하게 앞지르는 민족이 일본이다. 흥미로운 건, 일본이나 한국의 남성들이 각국 여성들보다 특히 더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체면이다. 그런 면에서 중국은 여성들의 지위가 한국이나 일본보다 존중되고 있고, 중국 남성들 또한 대인의 습성을 견지하려고는 할지언정 일본이나 한국남자들보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훨씬 앞선다고 할 수 있겠다. 국제 결혼에 있어 한국 남자들이 서구 여성들과의 결혼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난 한국 남성들이 측은하다. 그 무거운 체면이란 짐을 지고 살아가자니 정작 본인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중국에선 현대로 넘어오면서, 공산주의 라는 커다란 사상적 혁명을 거치며 정작 공자 사상을 보다 실용적으로 변용하여 적용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국은 유가 사상을 그다지도 철통같이 끌어안고 있는것일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결국 자생적인 사상의 뿌리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이나 기독교 사상 모두 우리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중국 문화권이니 서구의 정신적 식민지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다.
이제쯤이면 진정 중국으로부터 유입하는 동양 사상이 아닌, 한반도 땅에서 태동한 우리만의 사상이 출현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곳간이 차야 예를 차린다는 관중의 말대로라면, 이미 우리의 곳간은 차고 넘치는데도, 어째서 우리의 사상은 넘치지를 못하는걸까…
지금까지는 대체로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유사한 점은 무엇일까? 분명 우리에겐 아주 큰 유사점이 있다.
일본과 한국의 최대 유사점: 경제 발전의 행로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는 국가나 정치체제에 관계없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아래로 미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밑에서 올라오는 지방자치제의 힘과 마주친다. 국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민주적 책임이 위로 어디까지 미치는가, 지방자치 제도의 책임은 어느 정도인가, 지방의 지도력 지방공동체 전체의 요망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 지방 세력가에게 농락당한 주민의 불이익은 어느 정도인가 등에 불과하다 (117).
산업발전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서양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길을 걸었다. 여기에서도 ‘각하’들이 계략을 세우고 순서를 정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산업을 정부의 돈으로 건설하고 자금을 공급했다. 정부 관료가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129).
정부는 이런 산업을 선택된 소수의 자본가, 특히 미쓰이나 미쓰비시 같은 저명한 재벌에게 ‘형편없이 싼값’에 팔아넘겼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산업 개발이란 일본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므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나 자유 기업의 원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신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재벌들이었다. 일본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의 확립을 이루었다 (130).
이런 방법으로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에서 시작하는 대신 먼저 중공업에 손을 댔다 (130).
긴 말이 필요없는 부분으로서,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일본에서 이와 같은 정부 주도 아래 계획 경제를 수립하여 단기간에 기적을 이루는 것을 답습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어느 정도 앞서서 장기 불황의 경제 문제나 고령화 문제 등의 사회적 이슈를 겪고 있는 일본인들은 오늘날 어떤 생각을 하며 살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일본인의 생각이 궁금하다: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 일본인은 불만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 이것이 일본인이 인생에 대해 판단하는 특징을 이룬다. 이는 평등과 자유 기업에 대한 신뢰가 미국인의 생활 양식의 특징인 것 같다 (133).
이것은 현대로 넘어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생 고용보장”이라는 제도로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드러커 교수의 말처럼 사실 이 제도는 일본만의 고유한 아웃풋이라기보다는 미국이나 독일에서 시작되어 일본에서 그 꽃이 피웠다는 게 더 맞는 말일 수 있겠다.
하여간, 이제는 일본도 글로벌 경기 불황과 인구 고령화 현상 등을 피해갈 수 없어 10년 장기 불황을 겪으며, 평생 고용제도가 그 근간부터 도전 받고 흔들리는 시기를 거쳐왔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2009년 오늘날 일본인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장인 정신, 반드시 일본에서 수입하고 싶은 최고의 것:
내가 일본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소니도 아니고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덕치주의에 기반을 둔 메이지 유신도 아니다. 난 그들의 “장인정신”이 가장 부럽다.
일본에 가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의 하나가 저마다 개성을 달리하고 전통의 맥을 이어오는 “수공예 숍들”이고, 여기에는 동경 대학을 나와 아버지의 대를 잇는 “우동가게”도 포함된다. 일본을 중국이나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어디에 내놓아도 가장 일본답게 만드는 것. 그것을 다름아닌 수공예 사업을 통해 표현되는 그들의 빳빳한 자존심이라 믿고 있다. 그 프로의 세계, 그 깊이의 세계, 그 섬세함. 정말 세계 그 어느 민족도 손쉽게 따라갈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이다.
예전에 내가 하던 일이 리테일 숍들의 컨셉 개발이었다. 이제 다시 과거의 경험들을 토대로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 예술 분야를 접목시키는 일을 하려는 이 즈음, 일본이란 나라는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은 나라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은 내게…: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의 결론은 무엇일까? 일본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왜? 다른 건 다 그렇다치더라도 타인의 눈을 의식하다못해 통찰의 길까지도 막아버린 그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나란 사람의 이번 생이 꼼짝없이 현실이란 시간대에 묶여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하고 또 한번의 생을 허무하게 보낼 뻔 했기 때문이다.
현각 스님께서 어쩐지 일본의 젠 센터는 본능적으로 거부하였다는 말씀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은 내게 인위적인 사회 시스템의 최고봉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당연히 프리 섹스가 그렇게도 만연할 수 밖에 없고, 자살이 미학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어디에선가는 숨통을 틔워야 살 수 있다. 정신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이나 문학 작품들이 일본에서 태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그들이 어째서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리뷰를 끝내기 전에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 여기서 바로 인간이 공간에 지배받는 종족임이 드러나는데, 다름 아닌 그들이 섬나라 민족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거나 봉기를 일으켜도 최후의 보루로 만주 땅으로 도망칠 수 있는 하나의 마지노선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인만큼 나라 안에서 생과 사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지형적 여건 속에서 살아야 하는 민족이다.
그런 그들이 오랜 기간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쳤고, 영혼까지 핍박해졌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다시는 그와 같은 시기로 돌아가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틀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전쟁을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인 스스로는 너무도 진지하게도 말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인간들이 바로 자칫 눈 뜬 장님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바깥 세상 혹은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우리 또한 오늘도 변함없이 무지몽매한 일로 또 하루를 허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깨어있고 싶으나, 아직 눈 뜨지 못한 나. 이번 생애를 통해, 단 한 걸음이라도 진여의 길로 들어서고 싶다. 다행히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번에 말이다…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서문>
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루스 베네딕트가 말했듯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눈에 거슬리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냉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6).
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 ‘어느 정도의 관대함’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다른 나라의 문화가 지닌 관점이 비록 자신의 견해와 충돌하더라도, 그것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6).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ü 어떤 문화든 전통적인 전쟁의 관행이 있다 (43).
ü 일본은 계층제도를 수립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 질서의 지도자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계층적으로 조직된 유일한 나라이며, 따라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44).
ü 그러므로 계층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전제를 바탕으로 뒤쳐진 동생인 중국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 여러 나라와 동일한 인종이므로, 이 지역에서 먼저 미국을, 다음엔 영국과 소련을 쫓아내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세계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알맞은 위치를 주고 하나의 세계로 통일해야 하는 것이다 (45).
ü 일본인의 태도에 관한 문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황에 대한 태도이다 (54).
ü 끝까지 완강히 저항한 일본군 포로들은 극단적인 군국주의의 원천을 천황에 두고 있었다 (57).
ü 그들에게 천황은 일본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다 (58).
ü 일본인에게 명예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65).
<3장: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ü 계층 제도에 대한 일본인의 신뢰는 인간 상호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국가의 관계에서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 우리는 가족, 국가, 종교, 경제 생활 등 국민적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비로서 그들의 인생관을 이해할 수가 있다 (71).
ü 일본인은 국내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 관계도 계층제도의 관점에서 보아왔다 (71).
ü 일본은 또 중국의 세속적 황제 사상을 채용하지 않았다. … 중국에서는 빈번히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일본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천황은 불가침이며 천황의 몸은 신성하다 (88).
ü 16세기에는 내란이 풍토병처럼 퍼져나갔다. 수십 년간의 동란 끝에 위대한 무장 이에야스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1603년 도쿠카와 가문의 초대 쇼군이 되었다. 쇼군의 지위는 그 후 2세기 반 동안 이에야스의 혈통 속에 머물렀다. 1868년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가 폐지되고 근대의 막이 오르자 도쿠가와 바쿠후는 비로소 종말을 고했다. 이렇게 긴 도쿠가와 시대는 여러가지 점에서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시대이다. 도쿠가와 시대는 최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무장 평화를 유지하면서 도쿠가와 가족의 목적에 도움이 된 중앙집권제를 실시했다 (90).
ü 도쿠가와 바쿠후는 봉건제도를 폐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평화와 도쿠가와 가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한층 견고하게 강화했다 (91).
ü 일본의 봉건 사회는 복잡한 계층으로 나눠지고, 개개인의 신분은 세습으로 정해졌다. 도쿠가와는 이 제도를 고정시켜 각 카스트별로 일상 행동을 세밀히 규제했다 (91).
ü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규정된 형태로 실현된 봉건시대의 일본 계층제도는 근대 일본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봉건제도가 법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은 겨우 75년 전에 불과하다. 그 뿌리 깊은 국민적 습성이 인간의 일생에 불과한 7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소멸할 수는 없는 일이다 (102).
ü 일본인은 다른 어떤 주권국보다도 그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어 있다 (102).
ü 쇠약해진 바쿠후를 전복시킨 것은 상인과 돈놀이꾼, 사무라이 계급의 동맹이었다 (105).
ü 일본인이 상세한 행동 지도를 좋아하고 신뢰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지도의 규칙에 따르는 한 반드시 보증을 받았던 것이다. … 19세기 후반에 도쿠가와 바쿠후가 붕괴되었을 때에도, 국민 중에 이 지도를 없애버리자는 의견을 제시한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프랑스 혁명 같은 것은 일본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106).
<제 4장. 메이지 유신>
ü 일본 근대화 초기의 구호는 ‘손조노이’ 즉 ‘왕정을 복고하고 오랑캐를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을 외세에 짓밟히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천황과 쇼군의 ‘이중통치’ 속에 있었던 10세기의 황금시대로 복귀하려는 슬로건이었다 (109).
ü 갓 태어난 메이지 정부의 이 같은 괄목할 만한 개혁은 대중의 뜻이 아니었다 (111).
ü 그러면 이토록 철저하고 평판 나쁜 개혁을 단행한 ‘정부’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특수한 일본의 여러 제도가 이미 봉건 시대부터 육성한 하층 사무라이 계급과 상인 계급의 ‘특수한 연합’ 세력이었다. 즉 그들은 다이묘의 어용인이자 가로로서 정치적 수완을 익혀 공산업, 직물업, 판지 제도 등 번의 독점 사업을 경영해 온 사무라이들과, 사무라이 사서 사무라이 계급 속에 생산 기술의 지식을 보급한 상인들이었다. 사무라이와 상인의 동맹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작성하고 실행을 계획한, 유능하고도 자신에 가득 찬 위정자들을 급속히 무대 앞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정치가들이 어느 계급 출신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유능하면서도 현실주의적일 수 있었는가에 있다 (113).
ü 19세기 전반에 겨우 중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오늘날로 따지면 태국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그런 일본이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비범한 정치적 수완을 필요로 하는, 더군다나 놀라운 성공을 거둔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사업을 계획하고 수행할 능력을 가진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지도자들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전통적 일본인의 성격에 깊이 뿌리박힌 것이었다. 그 성격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113).
ü 메이저 유신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사업으로 취급했다. 그들이 머릿 속에 그리고 있던 목표는 일본을 세계 열강의 대열에 서게 하는 것이었다. … 그들은 봉건 계급을 욕하지 않았고 무일푼의 상태로 몰아넣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에게 많은 질록을 주어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113).
ü 메이지 정부를 운영한 정력적이고 기략이 풍부한 정치가들은 일본의 계층제를 없애려는 모든 사상을 배척했다. 왕정복고는 천황을 계층제의 정점에 두고 쇼군을 제거함으로써 계층 질서를 단순화했다. .. 새로이 일본의 지도자가 된 각하들은 계층제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치밀하게 조직한 정강을 국민에게 강제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지배를 한층 강화했다 (114).
ü 정치, 종교, 경제 등 모든 활동 분야에서,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국가와 국민간의 ‘알맞은 위치’의 의무를 세밀히 규정했다 (116).
ü 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는 국가나 정치체제에 관계없이, 위로부터의 권력이 아래로 미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밑에서 올라오는 지방자치제의 힘과 마주친다. 국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단지 민주적 책임이 위로 어디까지 미치는가, 지방자치 제도의 책임은 어느 정도인가, 지방의 지도력이 지방공동체 전체의 요망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 지방 세력가에게 농락당한 주민의 불이익은 어느 정도인가 등에 불과하다 (117).
ü 산업발전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서양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길을 걸었다. 여기에서도 ‘각하’들이 계략을 세우고 순서를 정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산업을 정부의 돈으로 건설하고 자금을 공급했다. 정부 관료가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했다 (129).
ü 정부는 이런 산업을 선택된 소수의 자본가, 특히 미쓰이나 미쓰비시 같은 저명한 재벌에게 ‘형편없이 싼값’에 팔아넘겼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산업 개발이란 일본에 너무나 중요한 사업이므로, 수요 공급의 법칙이나 자유 기업의 원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신조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은 재벌들이었다. 일본은 실수와 헛된 소모를 최소한도로 줄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의 확립을 이루었다 (130).
ü 이런 방법으로 일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출발점과 그 후 여러 단계의 일반적 순서’를 수정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에서 시작하는 대신 먼저 중공업에 손을 댔다 (130).
ü ‘알맞은 위치’가 보장되어 있는 동안 일본인은 불만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 이것이 일본인이 인생에 대해 판단하는 특징을 이룬다. 이는 평등과 자유 기업에 대한 신뢰가 미국인의 생활 양식의 특징인 것 같다 (133).
<제 5장: 과거와 세상에 빚을 진 사람>
ü 덕이 있는 일본인은 미국인처럼 그 누구의 은혜도 입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를 도외시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의란 조상과 동시대인을 포함하는 거대한 채무의 망상 조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138).
ü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사람은 윗사람으로부터 온을 받는다 (139).
ü 일본의 모든 역사 시대에 일본인이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그들이 소속하는 세계의 최고 윗사람이었다. … 그러나 윗사람이 누구인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몇 세기에 걸쳐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의 습성 속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41).
ü 부모로부터 받은 온이 있다. 이는 동양의 유명한 효행사상의 기초가 된다 (142).
<제 6장. 만분의 일의 은혜 갚음>
ü 기무는 부모에 대한 보은인 고 (효)와 천황에 대한 보은인 주 (충)라는, 두 종류의 의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두 개의 기무는 모두 강제성이 있어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161).
<제 7장. 기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
ü 일본인이 잘 쓰는 말에 “기리 (의리)처럼 쓰라린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기무를 갚아야 하는 것처럼 기리도 갚아야 한다 (183).
ü 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세상에 대한 기리는 동년배에게 온을 갚은 의무이다. 또 이름에 대한 기리는 대체로 독일인의 명예와 같은 것으로, 자신의 이름과 명성이 비난으로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이다 (184~5).
ü 일본인은 가끔 “나는 기리 때문에 기를 지킬 수 없었다”고 말한다 (192).
<제 8장: 오명을 씻는다>
ü 이름에 대한 기리는 비방이나 모욕을 제거하는 행위를 요구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명예를 훼손시킨 자에게 복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200).
ü 중국인은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소인’, 즉 도덕적으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처럼 그것은 고결한 이상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202).
ü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스토이시즘, 즉 자제는 이름에 대한 기리의 일부분이다. … 일본인의 자제는 ‘신분이 높아질수록 책임이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다 (203).
ü 오늘날에도 일본인은 부자는 물론 가난한 사람까지 계층제의 관례를 준수함으로써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205).
ü 일본에서는 자기방어가 대단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209).
ü 일본인들은 그 반대로 예의바름의 모범이다 (215).
ü “복수에는 무엇인가 우리의 정의감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있다. 우리의 복수 관념은 수학적 능력처럼 엄밀한 것으로서, 방정식의 양변이 만족되지 않는 한 무언가 못다 한 것이 남은 듯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219).”
ü 수십 년간 일본 소설에는 교양 있는 일본인이 빈번히 자아를 잃고 분노를 폭발키시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우울에 빠져드는 모습이 거듭 묘사되고 있다. 이런 소설의 주요 인물을 권태를 느낀다. 매일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가정에 싫증을 느끼고 도시에 싫증을 느끼고 시골에 싫증을 느낀다 (223).
ü 일본인은 러시아인처럼 소설 속에 곧잘 권태를 묘사하는 국민이다 (224).
ü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 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225).
ü 내면을 향한 공격이 단지 우울과 무기력, 교육받은 계급의 일반적 풍조였던 일본인 특유의 권태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왜 이 계급 사이에 널리 퍼졌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회학적 이유가 있다. 지식 계급이 과잉 배출되자 그들은 계층제 속에서 매우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 중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욱이 1930년대에 당국이 인텔리계급을 ‘위험 사상자’로 의심하고 감시하자 그들은 이중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228).
ü 1930년대 중반, 그들의 대다수가 그런 상태에서 벗어난 방법 또한 전통적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 목표를 세우고 공격의 방향을 내면에서 다시 밖으로 돌렸다. 다른 나라를 전체주의적으로 침략함으로써 그들은 다시금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불쾌한 기분에서 벗어나 자기 속에 새로이 큰 힘을 느꼈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나 정복 민족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229).
ü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이다. 타인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해 쓰이는 수단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일 뿐이다. 일본인은 태도의 변경을 서양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31).
<제9장. 인정의 세계>
ü 일본인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교도적이지 않다 (239).
<제10장. 덕의 딜레마>
ü 47명의 로닌은 명성, 아버지, 아내, 누이동생, 정의 (기) 등을 기리를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최후에 그들은 자살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주에 바친다 (267).
ü 일본은 어떤 종교에도 경전을 용인하고 있지 않다. … 일본 불교의 여러 종파도 교외별전이나 불립문자를 교의로 하거나, 경전 대신에 ‘나무아미타불’ 또는 ‘나무묘볍연화경’이라는 문구를 되풀이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279).
ü 근대 일본인은 모든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한 가지 덕목을 들 때 보통 ‘성실’을 선택한다 (283).
ü 일본인이 ‘성실’이라는 말을 쓸 때의 근본적인 의미는, 일본의 도덕률이나 ‘일본 정신’에 의해 지도상에 그려진 ‘길’을 따르는 열정을 말한다 (289).
ü 마코토는 항상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도 쓰인다. 이것은 일본인의 자기 수양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289).
ü 어떤 국민이 어떤 말이나 문장에서 자존을 잃거나 획득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그 국민의 인생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 일본에서 자중, 곧 self-respect한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묵직한 자아’라는 것이다. 그 반대는 ‘경박한 자아’이다 (291).
ü 일본인은 치욕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다. 분명히 정해진 선행의 도표에 따를 수 없는 것, 여러 의무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발생할 우연을 예견할 수가 없는 것 등이 치욕 (하지)이다 (297).
ü 일본인의 생활에서 수치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심각하게 느끼는 부족 또는 국민이 모두 그러하듯이, 각자가 자기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마음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를 추측하고, 그 판단을 기준으로 행동방침을 정한다 (297).
ü “중국의 여성은 대개의 일본 여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차분함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상류의 중국 여성은 한결같이 여왕과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세계의 참다운 지배자인 것 같은 취향이 있어서, 나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위대한 기계 문명과 속도 속에 있으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겁내지 않는 태도와 당당한 침착성은, 끊임없이 겁에 질리고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일본 여성의 태도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적 배경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00).
<제11장: 자기 수양>
ü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면, 수양은 ‘자기 몸에서 나온 녹’을 갈아 떨어내는 것이다. 수양은 사람을 잘 갈아 예리한 칼로 만든다. … 일본인은 이와 같은 자기 훈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310).
ü 일본은 불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윤회와 열반 사상이 국민의 불교적 신앙의 일부분이 된 일이 없다. … 윤회설은 일본적 사상의 틀이 아니다. 열반 사상 또한 일반 민중은 전혀 알지 못했고, 승려들이 이에 손질을 가하여 결국 없애버렸다 (315).
ü 일본의 성자들은 우아한 시가를 짓고, 다도를 즐기고, 달맞이나 꽃구경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316).
ü 요가 수행의 마지막 신조, 즉 요가 수행이 가르치는 신비주의적 수행법이 수행자를 망아입신의 경지로 인도하여 우주와 합일시킨다는 신조 또한 일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317).
<제 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ü 일본인은 가장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에 도달한 남녀에게 최대의 속박을 가하는데, 이것은 속박이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가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년기와 노년기는 ‘자유로운 영역’이다 (337).
ü ‘외부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다른 어떤 사회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361).
ü 성격의 이원성은 긴장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이 긴장에 대해 일본인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동일하다. 그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졌던 유아기의 경험과, 그 후 성년기의 속박에 제각기 반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 (381).
ü 이렇게 하여 빚어지는 긴장은 대단히 커서, 일본을 동양의 지도자이자 세계의 일대 강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고상한 대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긴장은 개인에게는 무거운 부담이다 (384).
ü 이런 일본적인 의미에서 칼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고도 훌륭하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의 비유이다 (387).
ü 그들의 도덕적인 어법에 의하면, 칼은 더욱 자유롭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에서도 그들이 보존할 수 있는 상징이다 (388).
<제13장. 패전 후의 일본인>
ü 일본이 평화 국가로 재출발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참된 장점은, 어떤 행동방침이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한 뒤부터는 다른 방향으로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일본인은 양자택일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다 (399).
ü 서양인은 그들의 안목으로 보면 주의의 변경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런 변화에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관계에서나 국제적 관계에서나 일본인의 처세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일본인은 일정한 행동방침을 취하고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지면 ‘잘못’을 범했다고 판단한다. 그는 어떤 행동이 실패로 끝나면 실패한 주장을 버린다. 실패로 끝난 주장을 집요하게 계속 고수하지는 않는다 (400).
ü 일본인은 침략 전쟁을 하나의 오류나 실패한 주장으로 간주함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최초의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평화로운 나라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회복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413).
ü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장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것이다 (413).
ü 현재 일본인은 군국주의를 실패로 끝난 한 줄기의 광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과연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도 실패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의 동정을 주시할 것이다. 만일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일본은 스스로의 호전적 정열을 다시 불태워 일본이 얼마나 전쟁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일 것이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도 군국주의가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기도는 결코 명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체득했는가를 증명할 것이다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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