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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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자에 대하여
기대보다 가벼운 책, 저자는 과연?:
“클로테르 라파이유 박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마케팅 구루이기도 하다. 창의력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탁월한 강의와 저술 활동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책을 펼치며 바로 등장하는 저자 소개이다. 뭔가 있을 것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저자 소개와는 달리, 책은 그다지 깊지 않다. ㅋㅋ 그저 흥미롭게 풀어놓은 미국 문화라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미국 문화를 보게 해 준 점은 인정한다.
그들의 문화가 청년기적 문화라는 거부터 시작하면, 여지껏 이해되지 않았던, 가볍던, 너무도 가벼웠던 미국 문화가 비로서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석연찮다. 아니 흡족하지 못하다. 세계적인 정신 분석학자와 문화인류학자가 이 정도밖에는 파고들지 못했나 싶은 생각에 말이다. 지난 주에 접했던 루스 베네딕트에 비해 한참 뒤쳐진다.
확실히 자기 통찰을 치열하게 겪지 않은 책들은 가을 바람의 낙엽만큼이나 가볍다.
3부 내가 저자라면
미국은 한국 문화의 비아그라?
점잖은 북리뷰에 왠 비아그라가 등장하냐고 의문을 다신다면, 당신은 아직 인간이 파충류 뇌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지배당하고 있는 동물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ㅋㅋ
미국 문화는 젊은 청년기의 문화라고 한다. 끓어 오르고, 실수하고, 그 실수가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더 발전하고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고. 이와 같은 뜨거운 열정이 미국으로 하여금 오늘날 수많은 노회한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전 세계가 미국에 열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한다.
지난 주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이어, 이번 주는 프랑스 작가가 쓴 미국인에 대한 <컬처 코드>이다. 난 이 책들을 읽으며, 일본과 한국의 문화관계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한국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우리 부모님 세대의 경우 일본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다. 일본이 감정적으로 무지하게 싫지만, 가령 일본 전자 제품은 여전히 한국 상품보다 우위에 있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젊은 세대로 넘어오면서 일본이 차지하는 자리는 당연히 미국으로 대치되었고, 미국이 우리를 물리적으로 지배하지 않아서인지, 일본과는 달리 전 세계를 리딩하는 초강대국 역할을 맡고 있어서인지, 미국에 대한 요즘 세대들의 빨려 들어감은 거의 광적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당연히 사회적 반동으로 미국에 대한 안티 감정이 오히려 부모 세대보다 더 강하고 솔직하게 표출되는 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의 미국 영향력은 가히 식민시대의 일제 시대가 무색할 정도라 할 수 있다).
왜일까??
도대체 왜 유구한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이 이제 겨우 2백년 역사를 지닌 이 청년의 나라에 이다지도 혼과 넋이 다 빠져있는걸까?
그들의 젊은 열기가 부러워서? 우리도 그들처럼 다시 젊어지고 싶어서?
가만히 우리 역사를 고조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짚어보면, 과연 언제를 우리 문화의 청년 시대로 정의내려야 할지 약간 곤혹스럽다. 광개토대왕 시절? 통일 신라 시대의 찬란한 불교 문화? 고려 시대야 문화적으로 놓고 보면, 사실 처참하리만치 징기스칸의 무력 앞에 숨죽인 시대이고, 조선 시대 역시 청년의 문화기라 하기에는 점잖아도 너무 점잖은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모자라는 지식의 한계로 인해 놓치는 시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전성기, 통일 신라 (그 중에서도 장보고의 시대) 등이 우리 문화가 그나마 역동성을 지니며 주변 세력에 눌리지 않고 그 기운을 오히려 한반도 땅 밖으로 분출했던 시기들이 아닐까 싶다.
근대로 넘어오면 어떨까? 한강의 기적 시대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시기로, 우리 민족의 최대 강점인 “파충류의 뇌”만이 작동한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니, 문화라는 단어를 들이대기조차 민망한 시대였고, 배고픔이 가시기 시작한 80년대에는 문화 부흥이 아닌 3S 정책으로 중산층의 관심사를 감각적 쾌락으로 돌려버리는 정권 시대가 이어졌고. 20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에는 IMF라는 괴상한 글로벌 조직에 대해 뼈아프게 되풀이해서 들어야 할 만큼 온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몰려 다시금 파충류 뇌가 요란하게 작동해야 하는 시기를 거치게 되고.
참으로 5천 년 역사를 두루마리처럼 길게 펼쳐 보아도 어느 한 시기, 문화의 시대를 꽃피운 시기를 찾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보단 차라리 “우리 민족은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도 파충류 뇌의 생존력만큼은 1등이다!”라고 정의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애처로운 나의 조국이다. 그렇게 긴 역사를 흘러 오면서, 아직까지도 자주적인 문화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기는커녕, 늘 생존이 전부였던 시간들이 더 많았으니…
“목숨이 노다지다” 혹은 “식사 하셨습니까?”가 인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배고프고 처절한 역사가 새삼 내 마음을 적신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가슴 아픈 건, 제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총알받이로 내세워진 이들 중 수많은 이들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난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영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닌, 그야말로 너무도 낯선 독일인들 사이에서 우리들 조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하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진정 한국인의 코드는 ‘생존 survival’ 이 아닐 수 없는 역사라 생각된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처절한 역사를 지닌 유태인에 비해 우리는 왜 아직도 물질로도 세계를 재패하지 못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질로 세계를 재패하다. 나 개인적 철학과는 한참 거리가 먼 얘기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의구심은 든다. 여기에는 또 어떤 문화적 인자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원인을 저력 혹은 끈기의 부족이라 생각한다.
한국인은 농경 사회의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치고는 상당히 성격들이 급하다. 성격이 급해서 변화, 발전에 역동적이라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저력과 끈기가 부족한 사람들치고 장기간 성공하는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는 걸 난 아직까지 보지도 못했고, 지식으로도 알지 못한다.
이 부분은 근, 현대로 넘어오며 사회에서 부정, 부패가 만연하면서 생긴 아주 병패적 사회 현상으로 심화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인의 명민함이 전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창의성과 함께 끈기이다.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저력. 미래 한국인에게 꼭 필요한 코드라 생각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이토록 미국 문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바다 건너 젊은 청년 문화가 그리도 매력적인걸까?
그건 전통적으로 우리 주변의 강대국들에 비해 미국 문화가 자유를 부르짖고 있고, 거기에 늙고 지친 한국 문화가, 그러나 가슴 속 깊이에는 늘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지니고 억눌려 왔던 오래된 한국 문화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거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우리를 힘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지배했던 민족이라면 중국인과 일본을 들 수 있는데,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체계화되어 있고 구속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
반면, 근, 현대 역사부터 등장한 미국의 경우는 거칠 것이 없다. 교묘한 금융 시스템과도 같은 물질 문명으로 뒤에서 조정은 할지언정, 일반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그들의 지배를 구속으로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록 음악을 통해, 코카콜라를 통해, 나이키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전해져오는 그네들의 문화는 그 동안 억눌리게만 살아왔던, 그래서 늘 터뜨리고 싶은 그 무언가를 지닌 한국인에게는 아주 좋은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 아니었다. 그야말로 대리만족이라고나 할까.
힘으로도 미국의 착한 동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일본이란 나라를 제치고 한국이 어째서 미국과 문화적으로 더 밀착된 동맹 관계를 맺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다.
어느 한 순간 젊음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했던 한국 문화가, 배고픔이 어느 정도 해결된 현대로 넘어오면서 자유롭고, 거칠 것 없는 미국 문화를 마음껏 받아들이며 IT나 첨단 기술 분야에선 미국조차 뛰어넘으려 용트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단지 그놈의 영어가 걸린다. 그러니 당연히 전 국민이 영어를 배우려 광분할 수 밖에.
우리는 피가 뜨거운 민족이다. 우리의 피가 뜨겁지 못했다면, 그 오랜 수난의 역사 동안 살아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뜨거움에 무엇을 접목시키면, 단순히 젊기만한 미국 청년 문화보다 더 깊고 그윽한 울림을 자아내는 우리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생성되고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을 뿐…
그렇다면, 일단 한국인의 문화 코드를 정의내리기에 앞서, 나의 문화를 살펴보자. 감히 한국의 문화코드를 논하기에는 지금의 나로서는 역부족이기에, 일단은 나부터 돌아보자..
나의 문화 코드:
사랑:
미국인의 사랑에 대한 코드는 ‘헛된 기대 (false expectation)’ (64).
내게 사랑은 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고 삶 그 자체이다.
이건 비단 남녀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인연 닿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난 충만한 사랑을 나무며 살고 싶다.
사랑이 결여된 삶이 얼마나 삭막한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서도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 그 절대절명의 고독감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사랑은 인간이 주고 받을 수 있는 것 중 지상 최대의 아름다움이다.
섹스:
섹스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폭력 (violence)’이다 (81).
섹스는 내게 힌두교에서 말하는 영육이 하나되어 사랑을 완성하는 마침표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사랑을 시작할 때 본능적 끌림에 이끌려 서로를 찾게 된다. 본능적 끌림으로 시작하여, 감정이 싹트고, 영혼과 마음이 일치하여 육체적으로 하나되는 사랑. 육신의 사랑이 결코 폄하되거나 값싸게 취급될 이유가 없음이다.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남자의 구원 (men’s salvation)’이다 (94).
내게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밖으로 표현됨이다.
제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라 하더라도, 제 아무리 고상하게 외모를 가꾼 여인이라 할지라도, 내면이 아름답지 못하면 하루를 함께 하기 어렵다.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은 나도 모르게 자꾸 피하게 된다.
더 신기한 건, 외적인 아름다움은 몇 번 보다보면 무덤덤해지는데, 내면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과는 만남의 횟수가 반복될수록 만남 자체가 괴로워진다.
수희향이란 이름을 쫓아 살고 싶다…
비만:
비만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도피 (checking out)다 (105).
내게 비만은 과도한 자기 절제의 결과물이다.
유학 초기 한때 맥도널드와 피자 그리고 아이스크림과 쵸코렛을 입에 달고 산 적이 있었다. 꽉 짜여진 생활을 하며 너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나날이었는데 도무지 스트레스를 분출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 음식 중에서는 분식을, 서양 음식 중에서는 정크 푸드를 좋아하는 입맛 덕분에 한 순간에 갑자기 체중이 불어난 적이 있었다. 스스로 당혹스러울 만큼. 그 때 당시 교내 피트니스 센터에서 열심히 운동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로 체중이 불었을 때가 컨설턴트로 일했을 때. 본사 상사한테 새벽 7시부터 밤 11시까지 거의 매일 밀착으로 매여 있을 때였다. 이 때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로 한 순간에 체중이 불어났었다. 역시나 새벽 5시에 회사 앞 피트니스에서 구슬 땀으로 해결했었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체중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사이클로 접어 들었다. 통찰의 길로 한 걸음 접어들면서부터, 엄격한 채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고기와 해산물이 없으면 한끼도 밥을 먹지 않던 나였는데, 한 순간에 생각이 바뀌면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동시에 거의 모든 인스턴트 식품도 끊었다. 가능한 자연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살고 싶어서.
이제는 예전처럼 엄격한 채식을 하지는 않지만, 건강하고 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점점 더 가까이 하려 하고 있다. 생선과 해산물까지는 다시 즐겨 먹고 있지만, 인스턴트 식품은 오히려 점점 더 멀리하고 있는 것도 그 하나이다.
아주 바쁜 시기가 지나가면, 내 손으로 직접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갖고 각종 드레싱을 만들어 나만의 맛있는 샐러드 요리와 두부 요리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 하하 (언젠가 한번 사과 드레싱을 얹은 고구마 샐러드를 먹어보았는데 무쟈게 맛있었다. 두부 샌드위치도 기가 막혔고. 꼭 해먹어야쥥~ ㅋㅋㅋ).
건강:
건강과 행복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활동 movement’이다 (121).
내게 건강은 건강한 정신의 결과물이다.
이틀이 멀다하고 술을 마시고, 줄 담배를 피우고, 매일 기름진 음식에 인스턴트 식품만 섭취하는 사람이 건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신이 우선 맑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몸을 돌보게 된다. 몸도 나란 우주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되고,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는 마음이 인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결국 노년에는 병고가 찾아올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의 하나로 노화 역시 막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보다는 확률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시기가 길 수 있음이다.
젊음:
젊음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가면Mask이다
내게 젊음은 한 순간의 바람이다.
내가 한 순간의 바람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젊음이 왜 좋은건지를 알 때쯤이면 사람은 누구나 이미 젊음을 어느 정도 비껴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세월 흐름에 나를 맞추는 일”이다.
난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가 줄어들었으면 싶다. 대신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난 나이를 먹을수록 웃음 주름이 많은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내 주름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면 싶다…
난 나이를 먹을수록 자아가 점점 사라졌으면 싶다. 그래서 세월과 함께 나도 점점 그 흔적이 옅어졌으면 싶다…
가정:
가정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접두사 ‘재 Re-‘이다
내게 가정은 따듯함이다. 비단 가정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러하다.
서로에게 따듯함을 느낄 수 없는 관계. 난 그런 관계는 싫다. 추워서…
직업:
직업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정체성 who you are’이다 (175).
직업은 내게 내 꿈의 표현 경로이다. 그래서 내게 업은 놀이이다.
직업이 정체성이라니,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무서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품질:
품질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작동한다 it works’이다 (200).
(품질을 미래 나의 클라이언트에게 제공하는 나의 서비스라 정의한다면)
품질은 나의 진심이고, 나의 최선이다.
난 여전히 내가 맡은 일에 있어서만큼은 프로답게 처리하고 싶다. 그러나 형식에의 프로가 아닌, 내용물에서 진정한 프로이고 싶다.
완벽함:
완벽함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죽음 death’이다 (201).
내게 완벽이란 단어는 없는 단어이다.
한때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완벽을 추구했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조차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고 있다. 도대체 완벽이란 것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가 알기는 하고 있는걸까? 이 우주 자체의 모든 에너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이란 상태를 추구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않는다.
술:
술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권총 gun’이다 (228).
내게 술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맥주는 크로아티아에서 마신 흑맥주가 아니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다 (이름 까먹었다).
와인 역시 레드보다는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좋다 (역시나 이름 기억 못한다).
양주는 잭 대니엘을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 좋다 (아쉽게도 아직 블루는 경험하지 못했다).
소주는 돼지고기와의 어울림을 모르기에, 그다지 안 땡긴다.
동동주는 찔레꽃의 얼음 동동주가 좋다.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술은 입에 대지 않았을게다. 이젠 그들과 하나되는 그 느낌,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 너무 좋다. 언젠가는 진짜 마니 취해서 업혀 들어올까 생각 중이다. 하하.
쇼핑:
쇼핑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세상과의 재결합 Reconnecting with life’이다 (238).
내게 쇼핑은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그 필요 안에서 나의 스타일을 표현할 뿐이다.
예전에 나는 “필요”가 아닌 “원함”에 따라 쇼핑을 했었다.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세상 흐름을 쫓아 계절마다, 시간 날 때마다 중요한 의식인양 행했었다.
지금은 필요한 부분만 채우려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필요없어진 것 들 중의 하나가 수많은 정장이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었는데! 더군다나 정장은 유행이 지나면 캐주얼 옷같지가 않아서 여성복은 특히나 입을 수가 없다.
이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재질, 디자인을 어느 정도 알아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사회적 포지셔닝에 따라 외모를 갖출 수 밖에 없는 거, 인정한다. 필요 이상으로 궁색을 떠는 것도 싫고, 필요 이상으로 치장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다.
나의 한계 내에서, 나의 필요한 부분 내에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센스를 갖춘 사람이고 싶다.
사치품:
사치품에 대한 미국인의 코드는 ‘군대 계급장 Military Stripes’이다 (247).
내게 사치품은, “나를 컨트롤해서는 안되고, 내가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다.
그야말로 사치품에 온 마음이 빼앗겨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명품을 휘감으면 사람도 명품이 되나? 그리고, 인간 명품의 정의는 과연 무엇일는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난 자린고비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물질의 노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Again, 사치품 역시 쇼핑의 연장선상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 내 기호에 따라, 내가 표현하고 싶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의 코드는:
미국에 대한 미국인의 문화 코드는 “꿈dream”이다
나의 코드는 “초지일관”이다.
난 좀 미련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래서 내가 목표한 하나를 이룰 때까지 중도에 포기하거나 목표를 바꾸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이번 생에 내게 있어 일관되게 가고 싶은 그 하나는 “우주와의 합일”이다.
수억 년에 걸쳐 겨우 이룰 수 있다는 해탈의 길에, 억겁의 산 앞에 아마 난 호미 한 자루 쥐고 서 있는 형상일 게다.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아니 그래도 좋다. 이 길로 접어들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기쁘다.
그 인연으로 연구원까지 인도되고, 등불 같은 스승에 사랑하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믿는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모든 것은 이 궤적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지독한 올빼미 체질이지만, 지난 번 수행에서 나와서는 가능한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기를 애쓰고 있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기 전, 우주와 먼저 만나 조용히 기도하고 싶어서.
조용한 새벽. 내 안으로 들어가 만나는 거기에는 평온이 흐르고 있어 좋다. 늘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인연 닿는 사람들을 품고, 세상을 그러안고 살아가고 싶다. 생명 주심을 감사드리며, 그렇게…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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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0 |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 효인 | 2009.12.08 | 2934 |
2159 | [33]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 수희향 | 2009.12.08 | 2806 |
2158 | '국화와 칼' - 루스 베네딕트 | 희산 | 2009.12.08 | 26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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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6 |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 정야 | 2009.12.07 | 2826 |
2155 | 북리뷰 33 : Grief Therapy - 윌리엄 워든 [1] [1] | 범해 좌경숙 | 2009.12.07 | 6215 |
2154 | 국화와 칼 | 혁산 | 2009.12.07 | 3116 |
2153 | 인지과학과 무의식 [3] | 백산 | 2009.12.07 | 45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