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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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35: 노년 - 시몬느 보봐르
책: <노년.> 시몬느 드 보부아르. 홍상희 박혜영 공역. 책세상. 1994
원제: La Viellesse. Simone de Beauvoir.
***저자에 대하여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
파리 출생. 소르본대학교 졸업. 1929년에 철학교수의 자격을 얻었다. 그때부터 사귄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 철학을 익혔으며, 이를 사상과 행동의 기조로 삼았다. 교사생활을 몇 년 계속한 다음 작가생활에 들어갔으며, 1943년에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내고, 1944년에 에세이 『피뤼스와 시네아』발표하였다. 이어『타인의 피(1944)』,『사람은 모두 죽는다(1947)』,『레 망다랭(1954, 공쿠르상(賞) 수상)』 등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그녀의 왕성한 활동은 사르트르 못지 않았다. 그 후에는 자전적 작품인 『처녀시대(1958)』,『여자의 한창때(1960)』,『어떤 전후(1964)』를 썼는데, 이들 작품은 프랑스문학에서 문제가 많던 시기의 귀중한 기록으로서 소설작품 이상의 재미를 지니고 있다. 에세이와 기행문도 많으며, 특히 개성적인 여성론 『제2의 성(性)(2권, 1949)』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르트르의 경우처럼, 보부아르의 집요한 논리 추구는 일관된 강점이며,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 역시, 그녀의 문학활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50세를 지나서부터 쓴 작품에 자기반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것도 사르트르의 경우와 공통된다. 만년의 저작으로는 『아름다운 영상(映像)(1966)』,『위기의 여자(1968)』,『노년(1969)』등이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와 넬슨 앤그렌(Nelson Algren)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이자 철학가, 지적이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더 유명하다. 실존주의가 시대를 풍미한 1947년,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미국 강연 여행에 초청을 받는다. 그리고 이 여행은 대서양을 넘나든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사랑의 시발점이 된다. 그녀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기 기적과도 같은 사랑의 주인공은 미국의 소설가 넬슨 앨그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던 그들에게 대서양은 아무런 장애도 될 수 없었다.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시문 드 보부아르는 수백 통의 사랑의 편지를 넬슨 앨그렌과 주고받았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넬슨을 위해 영어로 편지를 쓴 보부아르는 그동안의 실존주의와 페미니즘의 여전사의 모습보다는 정열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다정다감한 여인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책읽고 글쓰는 일 외의 것들은 혐오했던 그녀인 만큼 그녀의 편지에는 수많은 독서 편력과 문학은 물론 연극, 영화, 음악, 미술계의 인물들과의 교류, 세계 곳곳을 보고자 했던 여행에 대한 열망과 그 경험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성공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르트르와의 관계이다. 우리는 30년이 넘게 단 하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고 잠든 적이 없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낸 것이 우리가 대화를 통해서 갖게 되는 관심을 결코 줄어들게 하지는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1908년 1월9일생인 보부아르는 철학가, 소설가로 특히 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의 평생 동반자로 더 유명하다. 1930년대,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맺어 시대를 앞서갔던 여인.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운명을 생각해볼 수 없는 시대에 결혼과 출산, 여성에게 주어진 가사를 과감히 거부했던 여인. 각자 호텔의 다른 방에서 독립적으로 살면서 자유로운 연애활동을 벌였지만 항상 서로에게 되돌아왔던 전설적인 커플이었다. 단순한 성적 파트너가 아닌,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적 가치들, 자유, 사랑, 독립, 실존을 함께 고민하고 숙성시켰던 지적 친구라는 지적이 합당할 것이다. 항상 곁에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의 감정, 생활, 사상, 작업에서 중요한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의 했고, 조언과 행동으로써 변함없이 서로를 후원해 주었다. 그들은 공동의 가사 및 자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지냈으며, 자신들의 독립적 지적 영역에 대한 자유를 철저히 추구했다. 상대방을 존칭으로 부르는 일을 단 한번도 중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신뢰와 친밀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두터워 졌고, 결국 그들은 곳곳에서 단숨에 자신들만의 학문적 가치와 인정 그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서론
7.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9.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런 침묵의 음모를 깨버리기 위해서이다. 마르쿠제는, 소비 사회는 불행의 의식을 행복의 의식으로 대체시켰고, 모든 죄의식의 감정을 비난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비 사회의 행복 의식, 그 태평함을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그러한 태평함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도 하다. 팽창과 풍요의 여러 신화 뒤에 몸을 숨기는 그 무사태평한 의식은 노인들을 천민 계급으로 취급한다.
10. 모든 차원에서 사람들은 노인들을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결정할 때 보면, 사람들은 노인들을 이질적인 종류에 속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도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인간들과 똑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 안 되는 보잘것없는 적선을 하고는 스스로 그들에 대한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느낀다. 편리한 환상이다.
11. 노인들은 청년의 연장이며, 그렇기에 예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여론은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과 똑 같은 욕망, 감정, 요구 등을 표명하는 노인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들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행위는 혐오스러우며, 폭력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들은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은 그들에게 평정함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평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노인들의 불행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들 자신의 승화된 이미지, 그것은 백발의 후광에 싸인 경험이 풍부하고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 조건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현자이다.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되면 노인들은 형편없이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14. 이제 속임수는 그만두자.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그때의 우리 인생의 방향이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인간일 것인가를 모른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도 알지 못한다. 이 늙은 남자, 이 늙은 여자. 이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자.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짊어지고자 한다면 그래야 한다. 그러면 단번에 우리는 말년의 불행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우리의 일이다. 말년의 불행,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착취 체제를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스스로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과 같다.
15. 자본주의 세계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이익이란 이제 더 이상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중의 운명을 결정하는 특혜를 받은 자들은 그 장기적인 이익을 분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은 개입되지 않는다. 경제는 이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모든 문명 또한 바로 이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일 뿐 한계를 넘어서면 버려진다.
‘폐물’ 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퇴직 생활이란 자유와 여가의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시인들은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려 예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치 없는 거짓말들이다.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 수준은 너무나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 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하다.
16. 한 인간이 인생의 마지막 15년 또는 20년 동안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서양 문명의 실패를 나타낸다. 우리가 노인들을 거리에 돌아다니는 시체로 볼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온 과거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이런 자명한 사실은 우리의 목을 메게 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절단해버리는 우리의 사회 체제를 비난하는 자들은 이런 파렴치한 행위를 백일하에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 사회를 뒤흔들어 동요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데에 노력을 집중시켜야만 성공한다.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된 노년기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여러 가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불문에 부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침묵을 깨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침묵을 깨는 것을 도와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머리말
18. 노년에 관한 연구가 여러 면에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시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본질적인 목표는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연로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20. 늙는다는 개념은 변화의 개념과 직결되어 있다. 태아, 신생아, 어린아이의 삶도 연속적인 변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정의 내렸듯이 느릿느릿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결론 지어야 할까? 분명 그렇지 않다. 그러한 역설은 삶의 본질적인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매 순간 평형을 잃고 다시 정상을 회복하는 불안정한 체계, 그것이 삶이다. 죽음의 동의어, 그것은 부동의 상태이다. 변화야말로 삶의 법칙이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그것을 우리는 노쇠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의 노인학 의사인 랜싱Lansing 씨는 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노화란 보통 시간의 흐름과 관계가 깊으며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죽음에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23. 노년은 그 총체성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년은 단지 생물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32. 슈탈 Stahl은 '생기론 Vitalisme'이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것은 인간 속에는 어떤 생명의 원칙, 하나의 실체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약해지면 노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사라자면 죽게 된다는 이론이다.
34. 노인병학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사람은 미국인 네이셔 Naschere이다.노인병학을 geriatrie 라고 명명했다. 노인학은 gerontologie이라고 부른다.
38. 릴케의 말처럼 ‘마치 과일이 그 씨를 품고 있듯이 우리들 각자가 우리 내면에 품고 있는’ 죽음과 같이, 모든 신체 조직은 애초부터 그 완성의 피할 수 없는 경과로서 노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2. 질병은 사고이다. 그러나 노화는 생명의 법칙 그 자체이다.
51.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인간은 노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노쇠란 불가항력의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노화는 어김없이 죽음에 이른다.
53.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관계에 있다. 경제적인 요인 자체를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상부 구조들에서 따로 떼어낼 수는 없다.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59. 많은 신화들은 인류에게 영속적인 힘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순간 젊음을 다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즉 예사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70. 유목민뿐 아니라 18개의 정착 부족에서도 노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유기가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한다.
71. 많은 집단들에서 맑고 강건한 노인들은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늙고 노망든 노인은 짐스러워하며 회피한다.
114. 가장 중요한 사실은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된다’는 것이다. <제2의 성>에서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마술적인 힘으로 큰 위세를 누리는 경우 실제로 그 위세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준 것임을 증명한 바 있다.
116. 인간은 자기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전체적인 가치 체계이다. 반대로 한 사회가 노인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원칙과 목표에 대한 진실-흔히 조심스럽게 갖추어져 있는-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117. 노년의 이미지란 불확실하고, 선명하지 않으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증거들은 통해 볼 때 노년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아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 노년이란 어떤 사회적 범주를 가리키며, 그 범주는 상황에 따라 다소 가치가 인정된다. 둘째, 노년은 각 개인의 특이한 운명, 즉 자기자신의 운명을 가리킨다. 첫 번째 것은 입법자들, 도덕가들의 관점이며, 두 번째 것은 시인들의 관점이다.
118. 인간의 모험 속에서 여성은 한번도 주체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구실이고 원동력이었다. 여성의 조건은 변덕스러운 , 그러나 의미있는 곡선을 그리며 발전되어 왔다. 사회적 범주로서의 노인은 한 번도 이세상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았다.
노인의 지위는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러므로 노인 자신은 결코 자신의 지위 문제에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흑인의 문제는 백인들의 문제이며, 여성의 문제는 남성들의 문제라고 사람들은 말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는 평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흑인들은 억압에 대항해 싸운다. 한데 노인들은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인들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의 문제이다. 활동하고 있는 성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이익과 이데올로기적인 이익에 따라, 그들보다 앞서 활동했던 퇴역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결정해버린다.
노년의 지병들에 대한 이 서글픈 열거, 우리는 이것이 매세기마다 반복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신체적으로 노년은 명약관화하게 쇠퇴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쇠퇴로서의 노년을 두려워했다.
130. 그리스인들은 지옥의 뱃사공인 샤론을 추악한 혹은 적어도 음울한 노인으로 그리고 있다.
132. 의미론에 따르면 아주 먼 고대에는 명예라는 개념이 노년이라는 개념에 결부되어 있었던 것 같다. 노령을 가리키는 두 단어 Gera, geron 은 나이가 가져다 주는 이점, 고참의 권리, 대표라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138. 기나긴 원정 끝에
이젠 재정 능력도 없이 남겨진 우리는
낡은 육신,
어린애 같은 기력의
지팡이를 길잡이 삼아 우리는 살아가네.
가슴 가득히 젊은 수액이 들끓으나
샘솟자마자 그 수액은 늙어버리는 듯하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자리는 여기에 없네. 늙은이란 무엇인가?
그의 나뭇잎들은 바싹 말라가고
고되고 긴 길을 세 발로 걸어가네.
대낮의 꿈처럼, 이리저리 헤매네.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에 나오는 합창대장의 대사이다.
139.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이성의 불이 꺼지고, 행동은 쓸모없게 되며, 헛된 근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는 이러한 노년의 비탄에 영혼의 위대함이 수반됨을 멋지게 보여 주었다. 소포클레스는 그의 나이 89세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오이디푸스를 인생의 종착역에 이른 불쌍한 떠돌이 장님으로 그려놓고 있다.
150. 노인들은 희망보다는 추억의 힘으로 산다.
152. 서기 1세기의 플루타르코스는 노년을 서글픈 가을에 비유한다. 그는 ‘가을은 한해의 운행을 마치는 노년과도 같다. 습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으나 열기는 사라졌거나 약해졌으니 추위와 메마름의 신호인 가을은 육신을 쉽게 병들게 한다.’
161. 키케로의 <노경론 De Senectute>, 63세의 나이많은 원로원 의원인 키케로가 오래전부터 약화된 원로원의 권위는 강화되어야 한다고 노년에 대한 변호문을 쓴것.
162. 가장 위대한 일들이 성취되는 것은 ‘충고와 권위와 현명한 성숙함에 의해서다. 노년에는 이러한 자질들이 사라지기는 커녕, 반대로 가장 풍부하게 갖추어진다. 국가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패망했고, 노인들에 의해 구출되고 복원되었다.’
166. 오비디우스는 시간과 노년이란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힘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 오 시간이여, 위대한 유린자여, 오 그대, 샘많은 노년이여, 그대들은 함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대들의 이빨로 야금야금 갉아먹어 마침내 모든 것을 서서히 죽음 속에서 소멸시켜 버린다.’
167. 늙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것이며, 초상과 슬픔이라는 형을 선고받는 개념이다. - 유베날리스 Juvenal
182. 젊은이의 우세와 특히 아버지로부터 아들로의 권력 이양-르 시드의 전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은 권력이양-은 중세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즉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83. 교회는 예수의 육신이다. 성찬 속에 현존하는 것은 예수의 살이요, 피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은 성체배령을 하는 것이다. 카타콤의 그림들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예수이다. 거기서 에수는 선한 목자, 지옥에 내려간 오르페우스이며 어린 양이며 불사조이자 물고기로 표현되어 있다.
185. 그림 형제가 수집하여 옮겨 적은 한 동화는 인생의 여러 연령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신께서는 인간과 모든 동물들에게 30년간의 삶을 정해놓았다. 당나귀나 개, 원숭이는 30년이라는 오랜 삶이 너무 고통스럽게 여겨져 각각 자신의 삶에서 당나귀는 18년, 개는 12년, 원숭이는 10년을 빼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동물들보다 현명하지 못했다.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은 전래 동화가 즐겨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장수의 대가로 노쇠라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은 30년보다 더 연장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당나귀가 포기한 18년, 개가 포기한 12년, 원숭이가 포기한 10년을 얻어내어 자기 삶에 보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70년의 인생을 갖게 되었다. 처음 30년은 애초부터 정해진 인간의 삶이요, 또 그 30년은 빨리 흘러간다…… 그 후에는 당나귀의 18년이 오니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무거운 짐에 또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밀을 방앗간에 가져다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다…… 그 다음에는 개의 12년이 온다. 이 기간 내내 인간은 이 구석 저 구석 기어 다니며 으르렁거린다. 왜냐하면 물려고 해도 이젠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시절이 지나면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이라고는 마지막 원숭이의 10년밖에 없다. 이제 그는 정신이 없고 약간 우스꽝스러워져, 아이들이 보면 웃고 조롱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 이렇게 인간의 노년이 동물들의 노년보다 더 길고 더 고통스러운 것은 모두 인간의 책임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솔한 탐욕 탓에 그런 선고를 받은 것이다.
192.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는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는 난쟁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인들보다도 더 멀리 볼 수 있다.’ 고 말했다.
크노로스의 로마 이름인 사튀르느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느린 별, 토성에 부여되었다. 사람들은 그 별을 차갑고 메마를 것으로 간주한다. 토성은 궁핍과 노쇠와 죽음을 말한다. 점성술 저서들 속에서 토성은 일반적으로 낫이나 삽, 곡괭이를 들고, 노쇠의 표시인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잇는 노인으로 그려져 있다.
193. 15세기에 많은 부수로 발행된 <죽음의 승리>라는 책 속에서, 죽음은 낫과 모래 시계를 들고 있는 해골로 나타나며, 시간 또한 낫을 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낫은 이제는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 파르크가 생명의 실을 끊듯 단숨에 삶을 베어버리는 낫인 것이다
194. 단테는 고령의 노인을 육지를 보고 가만히 돛을 내리며 항구에 서서히 다가가는 항해자에 비유한다. 인간의 진실은 내세에 있으므로, 인간은 단지 짧은 여행에 불과했던 이 지상의 삶의 종말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217. 인간의 진정한 보석은 푸르른 젊음, 나머지 시간들은 겨울일 뿐.
220. 몽테뉴의 <수상록>이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더 풍요하고 내밀하며 독창적이고 심오해졌다는 점이다. 노년에 대한 환상이 전혀없이 신랄하게 써 내려간 이 명문들은 30세 때에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몽테뉴의 위대함은 그가 능력이 감소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순간 최고에 달한다.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 없었더라면 이런 위대함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자기 만족은 능력을 감퇴시킨다. 몽테뉴는 늙어가면서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가 발전을 했다면 그것은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그의 태도가 점점 더 비판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221. 그 시대의 저명인사들의 초상화를 보는 것만으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노년에 대한 생각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227. 노년은 겨울, 청춘의 모든 풍요가 묻혀버린 황혼이다. 우리는 자기 천재성으로 불멸의 삶을 획득해야만 노년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229. “인간이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치장하지 않은 인간은 너와같이 벌거벗은 동물, 두 갈래로 갈라진 동물,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자! 빌려온 것들일랑 모두 던져 버리자! 자! 우리 여기서 의상을 벗어 던지자!” -리어왕
237. 이런 치욕을 위해서 내가 여태 살았단 말인가?
그 많은 월계수들이 또 하루 만에 시들어 버리는 것을 보려고
많은 전쟁을 치르며 내가 백발이 되었던가?
충성스런 행위로 가득찬 삶, 노년은 그 삶의 정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육신의 쇠약으로 말미암아 노년의 모든 영광이 허물어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단 하나의 위안처는 아들이다.
240. 나 같은 사람에게 사랑이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
조금만 자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곧 스스로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는 것을.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의 병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숨기는 편이 더욱더 힘든 법.
……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질투에 사로잡히기는 마찬가지.
…… 조금만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불편한 마음에 씁쓸함만이 번진다!
…… 기억은 사랑을 죽인다. 오로지 일종의 분노로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말해야 하리.
…… 슬그머니 불길에 사로잡힌 내 영혼이
사랑을 알아챈 것은 오로지 질투에 의해서였던 것을.
…… 사랑스러운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연적들 중에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지 못함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형벌인가. -코르네유
242. “내 나이에 가장 서글픈 것은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희망은 가장 달콤한 열정이며 우리가 유쾌하게 사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열정이다.” -생테브르몽-
“노인에게 남아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그들에게 삶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아주 생생한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 젊은 시절의 욕망을 회상하고 때로는 아직도 젊다는 상상에 빠지기까지 하지요.” -생테브르몽-
263. 문제는 다시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젊어질 수 있다는 것, 즉 한계에서 벗어나서 결코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지 않는 모험처럼 삶을 다시 사는 것이다.
19세기들어 유럽은 변모한다.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267. 법은 노인들을 자식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274. "이 세상에서 노인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움직이는 무덤일 뿐이다. 군중은 말을 건다. 묘비명을 읽기 위해 다가서는 것이다.“ -라므네-
275.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에게서 살려는 의지를 근절시켜 더 이상 후손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완전한 무(無)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자기 안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은 지혜와 더욱 더 멀어진다. -쇼펜하우어-
어린아이는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심미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보편적인 형태로 대상들을 본다. 어린아이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일종의 직감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은 표상이지,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276. 노년의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르기 때문에 더 이상 권태를 느끼지 못한다. 정열은 잠잠해지고, 뜨거운 피는 식는다. 성적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이 나이의 인간은 이성을 되찾는다. 이때 “우리는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의 허무에 대해 다소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러한 진리의 발견은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이며 본질인 지적 평온을 준다.
“인간이, ‘감탄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호라티우스의 말,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됨과 허식의 덧없음에 대한 진실되고 견고한 확신에 이르는 것은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이다. 이제 환상은 없다. 노인은 완전히 환상에서 벗어난다.”
278. “노년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일종의 실명이다…… 노인이 더 이상 기원하지 않는 모든 소망, 그에게서 없어져버린 모든 열정을 신이 물려받아 신은 노인에게 항상 더욱 더 큰 내면 세계를 열어준다.” -스웨친부인-
에머슨은 노인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선 노인은 다양한 위험을 모면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제 삶은 등 뒤에 발자취로 남아 있다. 아무것도 그들에게서 그 삶을 빼앗지 못한다.
281. “은총이 주름 사이사이에 섞일 때 노년은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것. 만개한 노년에는 뭔지 모를 새벽의 빛이 있다.” -<레 미제라블>
292.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지배를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노년에 가치가 부여된다. 철학자들과 수필가들은 노인의 개념을 도덕의 개념과 연결시켰고, 노년이 이루어온 경험을 찬양했다. 노년은 이중적 의미에서 삶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노년은 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노년은 인생 최고의 성취이다. 연륜을 쌓아온 자는 누구나 살아 있는 자들 중 최상의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노년은 존재의 농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년은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품위나 지위에 오르려면 나이는 일종의 자격이 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빈번하게 음악가나 철학자의 70주년, 80주년 기념일에 화려한 축제가 벌어진다. 그 축제의 의미는 바로 노인에 대한 경의이다.
293. 지배 계층은 이러한 비극들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난한 노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항상 보잘 것 없었다. 19세기부터 노인들의 수가 증가했다. 지배 계층은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무관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지배 계층은 노인들을 과소 평가해야 했다. 게다가 노년이라는 개념에 반대 감정의 양립을 가져온 것은 세대간의 갈등보다도 계층간의 투쟁이었다.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294. 일반적으로 사회는 사회의 균형을 뒤흔들지 않을 정도의 악습과 추문, 참극 같은 것에는 눈을 감는다. 사회는 노인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고아들, 비행 청소년들, 신체 장애자들의 운명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은 언뜻 보기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각 집단 구성원들은 노인의 운명은 곧 자신의 미래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95. 한 사회는 분산화된 총체이다. 각자는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297. 성인들이 노인을 대하는 실제 태도에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까지 공식적인 윤리에 순응한다. 공식 윤리란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지난 몇 세기간에 강화되어왔으며, 성인에게 노인들에 대한 존경을 강요한다. 그러나 노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또 노인들에게 그들이 쇠약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 성인들에게는 유리했다.
298. 사람들은 노인들이 사회가 노인들에게 품고 있는 이미지에 복종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노인은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고, 단정하게 예의를 갖추며, 외모에 주의하도록 강요받는다. 특히 성적인 면에서는 더욱 억압이 가해진다.
299. 오늘날 성인은 다른 방식으로 노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특히 미국에서는 병원들, 양로원들, 심지어 도시나 마을들이 많이 생기고 있으며 이러한 곳에서는 재산있는 노인들에게 흔히 불충분한 것이기는 하지만 안락함과 보살핌을 위해 가능한 한 가장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
305. 국가는 노동자가 퇴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연령을 정한다. 이 연령은 또한 공공 기업이나 사기업의 고용주들이 직원들을 해고하기 위해 택하는 연령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개인이 현역의 범주에서 퇴역의 범주로 가는 연령이다. 이러한 교체는 어떤 순간에 찾아올까? 불입한 수입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 사회는 두 가지 요인을 참작해야 한다. 즉 사회 자체의 이익과 연금 수령자의 이익이다.
306. 노동 시장에서 일찍 탈락된 퇴직자들은 이익을 기초로 하는 사회가 인색하게 떠맡는 짐일 뿐이다.
부르주아 민주 국가들이 개인으로부터 노동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대부분 그들에게 빈곤을 언도하는 것이 된다.
312. 1947년에 65세 이상의 11,154명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국의 한 보고서는-광부 같은 매우 힘든 직업을 제외하고-50세의 노동자들과 59세의 노동자들, 그리고 60세와 69세의 노동자들의 작업 능률에 거의 차이가 없음을 확증했다. 작업능률은 매우 높았다.
313. 일반적으로 고령자들에게 어렵다고 인정되는 것은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이다. 1950년에 실시된 영국의 한 설문 조사는 그들이 이미 습관화된 것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잘 해내지만 변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333. 비인격적이고 무력한 관료 정치 체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원조해주지도 않으면서 그들에게 모욕감만 준다. 복지 국가라른 것은 대부분 이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호, 보장, 원조들은 약자에게가 아니라 강자와 조직화된 자들에게 배당된다.
334. 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다. 결과적으로 시골에는 구식 방법으로 땅을 경작하고, 자신들의 고립을 고통스러워하는 노인들만이 살고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생겨나게 된다.
346. 노인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이주든 이주는 죽음을 초래한다. 슬퍼해야 할 것은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353. 활동하는 개인의 범주에서 갑자기 비활동적인 개인의 범주로 떨어져 늙은이로 분류되는 것, 재원의 놀랄 만한 감소와 생활 수준의 격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대다수의 경우 심리적,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하나의 비극이다.
전체적으로 고령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주어진 삶의 조건에 더 잘 적응한다. 살림을 잘하는 가정 주부의 상황은 옛날의 농부와 예술가의 상황과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일과 생활은 하나로 혼동되어 있다.
355. 우리는 헤밍웨이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자살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죽음을 선택했다. 우리가 자유롭게 자기 일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일이 자기 자신을 성취했을 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사실 일종의 죽음과도 같다. 일이 일종의 제약이었을 경우,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해방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에는 거의 언제나 양면성이 있다.
363. 퇴직자에게는 이제 살림을 꾸려 나가기에 충분한 돈이 없다. 그는 아내에게 의존하고 자식들에게 의존한다.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고 왜소해졌다고 느낀다.
371. 현재의 상황에 따라 사회는 수백만의 젊은이를 희생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의 늙은이를 비참하게 살아가게 내버려둘 것인지, 기괴한 선택을 강요한다. 첫 번째 해결책이 옳지 못하다는 것에는 모든 사람들의 동의한다. 자연히 두 번째 해결책이 남게 된다. 그것은 단지 노인에게 '사망 대기실' 역할을 하는 병원이나 양로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문제이다.
372. 오늘날 우리는 ‘늙고 가난하다’라는 말은 거의 같은 말의 반복임을 알고있다. 비록 노년이 우리를 정열에서 해방시킨다고해도,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채우지 못하는 무력감에 의해 가난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즉, 노인들은 배고프고 춥고, 그로인해 죽게된다.
374. 노인이 처하게 되는 상황에서 가장 절망적인 측면 중 하나는 그가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다. 250만의 가난한 프랑스 노인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연대 관계나 압력 수단도 없이 산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11. “사람들이 들것으로 운반하는 이 여자, 그사람이 바로 나다.”
노년은 운명이다. 노년은 우리 자신의 삶을 휘어잡고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삶, 그리고 나는 늙었다."라고 아라공Aragon은 쓰고 있다.
12. 우주의 시간 흐름이 개인에게 변화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성인들은 자신의 나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성인들은 나이라는 개념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듯 여긴다. 나이라는 개념은 과거를 뒤돌아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또 생을 중단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미래를 향하여 돌진하는 우리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조금씩, 하루 또 하루, 일 년 또 일 년 미끄러져간다. 노년은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이다.
‘나는 여전히 나인데,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노년의 진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존재와 그것을 통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자의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이다.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은 타자, 즉 타인들에게 보여지는 나이다. 그 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노화는 당사자에게보다 남에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3. 우리의 몸은 나이에 따른 변화를 언제나 내면적으로 인식시켜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류머티즘이나 관절염은 노화로 인한 퇴행성 질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새로운 상태를 발견해내지 못한다. 우리는 예전 그대로이고 거기에 류머티즘만이 덧붙여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7.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같은 경우, 60세에 병을 앓은 후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게 되었다. 그 때까지 그녀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18. ‘처음으로 노인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소스라쳐 놀라기 마련이다’라고 홈즈 O.W.Holmes는 지적한다.
22. 싫든 좋든, 우리는 끝내는 타인의 관점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23. 노년의 그것에 대해 어떤 충만한 경험을 쌓을 수 없는, 나의 삶 밖에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나의 에고ego란 초월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나의 의식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서만 겨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대상으로서의 나의 에고는 이미지를 통해 겨냥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머릿속에 떠올려보려 한다.
24. 정신분석학자 마르탱 그로티앙이 강조하듯, 우리의 무의식은 노년을 모르며, 젊음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다. 그 환상이 깨질 때 당사자들에게는 병적인 나르시시즘 증세가 생기고, 이것은 또다시 우울증적 정신 이상을 낳는다.
25.보들레르는 젊었을 때 나이에 대한 거부감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천 살을 먹은 것보다도 더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33. 노인이 자신의 노년을 싫어하면 자기 모습을 대하면서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정치적으로 실추하고, 명성도 사라져버린 샤토브리앙은 자신의 노년을 증오했다. 그는 “노년이란 일종의 파산이다.”라고 말했다.
35. 나이든 인간으로서 가장 잔인하게 자기 모습을 묘사했던 사람은 미켈란젤로이다.
“장시간의 작업으로 나는 지치고 푹 꺼지고 축 늘어졌다. 내가 걸어가는 곳, 공동으로 먹고 살기 위해 가는 숙소, 그것은 죽음이다. 뼈와 신경이 가득 든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한 마리 말벌이 윙윙거리고, 혈관에는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세 개 있다. 내 얼굴도 흡사 밭에서 까마귀 떼에게 충분히 겁을 줄 수도 있을, 건조한 날 널어놓은 넝마 조각과도 같다. 내 한쪽 귀에서는 거미 한 마리가 기어 다니며, 또 한쪽 귀에서는 귀뚜라미가 밤새도록 노래를 한다. 독감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서 잠을 이룰 수도, 코를 골 수도 없다.”
40. 노년이 불러익으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노년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리는 태도를 정신과 의사들은 그리부이즘 이라고 한다.
43. 16세기 베네치아의 귀족 코르나르의 경우가 그렇다. 65세에 놀라운 건강을 누렸던 그는 그 당시에 “매우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에 대한 개론서를 써서 후대에 본보기로 남겼다. 그는 쾌락을 즐김에 있어서는 중도를, 시간 사용을 조절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그리고 식이 요법으로 소식을 강조한다.
47. “대양으로 흘러가며 점점 더 웅장해지고 넓어지는 강어귀를 나는 네게서 본다.”
- 휘트먼 의 <노년에게>
“노년이란 온갖 건전치 못한 물이 다 모여들며, 죽음 이외에는 다른 흐름이 없는 늪이다.”
- 뤼장트의 시
51. 톨스토이의 정력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원기를 유지하려는 그의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67세에 자전거를 배웠고, 그 후 몇 년 동안 자전거나 말, 또는 긴 도보 산책을 계속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고 강에서 냉수욕을 했다. 여름에는 3시간 동안 연이어 풀을 베었다. 그는 <부활>을 집필했고,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썼으며, 방문객들을 접대하고 책을 읽고 세계의 흐름을 주시했다. 1895년 러시아 황제가 오래된 종교 분파인 두코보르에 대항하여 카자크 기병을 파견했을 때, 그는 이 탄압을 반대하는 격렬한 기사를 런던에서 발표했다. 그는 박해를 고발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것을 유포했다. 그는 외국에 알리기 위한 조직적 홍보 활동에 앞장섰으며, 대중의 동정심에 호소했고 ‘구조 위원회’ 에 돈을 대주기 위해 저작권 수익금을 받을 것에 동의했다. 그는 70세 생일을 즐겁게 자축했다. 러시아 교회 성무원에 의해 파문당한 그는 엄청난 항의 시위를 했다.
53. 르누아르는 60세 때부터 반신 불수였다. 걸을 수 없었고 손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78세에 죽을 때까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팔레트에 물감을 짜주었고 손목에 붓을 붙잡아 매주었다. 그러면 그는 그 붓을 골무로 지탱하고 팔로 붓을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데 손만 필요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곤 했다.
55. 르누아르와 파피니의 고집은 그들을 온통 삼켜버리는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헤밍웨이의 소설≪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늙은 어부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낚으러 혼자서 바다로 나간다. 고기를 잡는 일은 그를 완전히 지치게 만든다. 그는 물고기를 육지로 끌고 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상어들에 대항하여 그 고기를 지켜내는 데는 실패한다. 그리하여 바닷가 모래사장에 나타난 것은 살 없는 뼈대뿐인 물고기였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다. 그의 목적은 모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노인으로서 대부분의 동료 어부들처럼 목숨만 부지하는 생활을 거부하고 끝까지 용기와 인내라는 남성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라고 늙은 어부는 말한다.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헤밍웨이는 소설을 통해 그를 괴롭히던 강박 관념들을 쫓아버리고자 했다.
59. 모럴리스트들은, 노인은 정숙하다고 규정하면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일지 않기에 쾌락을 열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근시안적인 관점이다. 사실 정상적으로 욕망은 단지 욕망으로서만, 욕망 그 자체로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쾌락에 대한 욕망, 특정한 육체에 대한 욕망이다. 어쨌든 그 욕망이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욕망의 사라짐에 대해 아주 애석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노인에게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60. 노인은 욕망을 통해서 빛 바랜 에로틱한 세계의 색깔들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어한다. 또한 그는 욕망을 통해 자신의 완전성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기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 청년기는 리비도의 존속을 암시한다.
68. 상대와의 친숙함은 상대의 판단을 그리 두려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성생활은 생활이 부유할수록, 행복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연장된다.
83. 위고의 눈에 늙음이라는 것은 결함이라기보다 명예였다. 늙음이란 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 숭고한 것, 그리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에 결합되는 것이다. 위고는 확실히 어떠한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99. 생물학적으로 여자의 성욕은 남자에 비해 노화로 인한 타격이 덜하다.
104. 늙은 여자들의 성욕에 관한 근거 있는 자료는 역사에도 문학에도 없다. 문제는 연로한 나이에서 여자의 성욕은 남자의 성욕보다 금기시된다는 것이다.
버나드 쇼는 여자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서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나는 삽시간에 늙었다. 여자들이 내게 쏟는 배가된 관심이 나를 괴롭힌다. 아마도 내가 죽으려나 보다.’
106. 성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하나의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질투심이다. 라가슈Lagache는 질투심이 흔히 애정과의 자리바꿈의 결과임을 증명한 바 있다. 사업이 잘 안 되는 이발사는 아내가 자기를 속인다고 확신하여 말다툼으로 아내를 괴롭힌다. 노년은 전반적으로 욕구 불만의 시기이다. 그래서 노년은 막연한 원한들을 질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하게 한다. 한편 성욕의 감퇴는 많은 노년의 부부들에 있어서 일방적인 또는 상호적인 원한들을 불러일으키며, 그 원한은 질투로 표현될 수 있다.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119.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넘어서는 계획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겨냥한다. 우리의 활동들은 무기력한 요구들로 가득 찬 채 응고되어 과거로 되돌아간다. 나이는 우리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에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120. “그들은 희망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추억으로 살아간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했다. “늙은 남자는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비밀스레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러보는 기쁨을 즐긴다.” - 모리악
121.그들은 시간을 거부한다. 쇠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옛 자아가 현재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규정한다. 그들은 자기 청춘과의 연대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추억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확신을 정당화한다. 노쇠에 따른 여러 가지 지위 하락에 맞서 그들은 변함없는 본질을 내세운다. 그들은 지치지 않고 자신들 안에 계속 살아 남아 있는 과거의 자기 존재를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때로 그들은 과거의 자신 중에서 가장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인물을 택해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한다. 그들은 영원히 옛 전사이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인이며 존경할 만한 어머니인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청춘기 최초의 신선함을 머릿속에 되살린다. 특히 그들은 모리악처럼 그들에게 있어 세계가 결정적으로 형성된 시기, 즉 어린 시절을 되돌아본다. 그래서 그들은 - 30세에건 50세에건 ?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어린애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과거의 자기 모습을 되찾아 그때 모습과 하나가 되는 순간, 그들은 80세이면서 동시에 30세 혹은 50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나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29.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래는 결코 만나지지 않은 채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때 미래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다…… 매번 미래의 출구에서 대자를 기다리는 데서 오는 존재론적 실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령 나의 현재가 존재를 넘어서 내가 스스로를 투사했던 미래와 내용상으로 동일할지라도, 내가 스스로를 투사하던 것은 지금의 이 현재가 아니다. 그 까닭은 나는 미래로서의 미래를 향해, 다시 말해서 내 존재를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미래를 향해 나 스스로를 투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132. 78세의 톨스토이 일기장 - “하루 종일 슬프고도 어리석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녁쯤, 이 마음 상태는 애무와 애정의 열망으로 변했다. 나는 어릴 때처럼 사랑을 베풀어주는 관대한 존재에게 바싹 다가가 온순하게 울며 위로 받고 싶다…… 아주 어린아이가 되어 내가 마음속에 그리는 모습 그대로의 어머니 곁에 가까이 가고 싶다…… 어머니, 나를 안아주세요. 귀여워해주세요…… 이 모두 다 미친 짓이다. 그러나 모두 진실이다.”
134. 왜 노인들이 그렇게 쉽사리 어린 시절로 향하게 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노인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무시하고 싶을 때조차도 그 시간이 노인들의 뇌리를 결코 떠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존재는 스스로를 초월하면서 확립되어간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나이가 아주 많아지면 초월은 죽음에 부딪치게 된다. 노인은 자신의 출생, 또는 적어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존재의 기반을 다지려고 시도한다.
우리가 사회학적 측면에서 확인한 바 있는 유아기와 노년기의 결합이 개인에 의해 내면화되는 것이다. 삶을 떠나야 할 노인은 이제 막 혼돈 상태에서 빠져 나온 어린 아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136. 미래는 짧기 때문에 더욱더 닫혀 있다. 그리고 갇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짧게 느껴진다. 노인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비참할 정도로 짧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마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늙어갈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137. 어린아이들에게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어린아이는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은 강조된 시간, 어른의 시간이다. 어린아이는 시간을 측정하지도 예측할 줄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되는 사건 가운데서 헤맨다. 내가 계획을 짜서 시간에 활기를 불어넣고, 나의 학업 일정에 따라 시간을 배분했을 때 나는 시간을 제어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지적했다. ‘어린 시절에는 사물과 사건들에 새로움이 있어 모든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새겨진다. 또한 하루하루가 까마득히 길게 느껴진다. 마찬가지 이유로 어른인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행을 할 때이다. 여행을 하면서 보내는 한 달은 집에서 지내는 넉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140. 이오네스코 역시 어린 시절의 느낌으로 시간의 지속을 회복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매일 나는 무언가 안정된 것에 몰두해 절망적으로 현재를 회복하고 했으며 그 현재를 정착시켜 확대하려고 애썼다.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 손상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되찾으려고 나는 여행을 한다. 사실 여행으로 이틀을 보내며 새로운 마을을 알게 되는 것은 사건들의 빠른 흐름을 늦추어준다.
170. 철학은 개념으로서의 인간을 고찰한다. 철학은 인간과 우주와의 전체적인 관계를 알아내고자 한다. 작가 역시 보편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의 개별성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지식의 입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앎이라고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겪는 자기 존재의 산 체험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는 그것을 개별적인 보편성을 통해 즉 그의 작품을 통해 전달한다. 보편적인 것은 개별화되지 않는다. 작품은 오로지 문체를 통해서, 어조를 통해서, 그의 특성을 지닌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작품 속에 드러낼 때만 문학적인 차원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기록일 뿐이다.
171. 작가가 먼저 전달하기를 선택하고 그 후 상상력을 이용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글쓰기라는 천직을 결정하는 것은 상상의 세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선택의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이 선택은 언제나 문학 작품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문학작품이란 종이 위에 새겨진 기호들을 통해 주체가 유희와 몽상에 의해 창조해낸 비현실적 세계의 물질화이다. 비현실적 세계가 안정성을 갖고 경험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현실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서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부와 인간들에 대한 눈물의 호소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 작가는 인간들에게 저항하는 동시에 그들과 더불어 있다. 이것은 지탱하기 어려운 태도이며 강렬한 열정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것을 오랫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힘이 요구된다.
192. 특권층의 영역에서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는 전쟁의 선포와 런던의 폭격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58세의 나이에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자 살아갈 의욕을 잃었다. 한 노인이 의욕을 잃으면 그는 스스로 이미 게임에 진 것이며, 싸우는 것조차 허망한 일이니 최상의 길은 끝장을 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216. 세상이 변화하거나 혹은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때, 젊은 사람은 변화의 희망을 간직한다. 노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나톨 프랑스, 웰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죽음만을 원한다. 다시 말하면 노인은 자기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그 상황을 초월하고자 하는 희망을 감히 품을 수 없는 것이다.
223. 내가 수집한 증거 자료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이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르트르는 유년 시절을 말하며 “죽음은 나의 현기증이다. 왜냐하면 나는 삶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불안해하는 부모나 마찬가지로 항상 불안해하는 배우자들은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 속에서 어떤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가장 심하게 끊임없이 죽음을 되새기는 사람들은 자기 삶 속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라마르틴과 같이 요란하게 죽음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죽음을 원하고 있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들은 단지 죽음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241. 나이는 우리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앗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순간 속에서 배우기 위해 배우길 원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즉 우리는 어떤 전망에 따라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계획의 부재는 알고자 하는 욕망을 죽여버린다.
242. 노인들의 지적, 정서적 무관심은 노인들을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가기도 한다. 노년의 스위프트는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세계에서 그리고 나의 좁은 원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한 상태 속에 나는 잠을 깬다. 그 무관심이 너무나도 강하여…… 아마도 품위, 질병에 대한 공포가 없다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252. 만약 노인이 자신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줄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설사 노인이 자기 주위의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목표의 부재는 그의 삶을 어둡게 만든다.
253. “삶이 아직도 내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더 이상 큰 호기심이 없다…… 하루하루에 진절머리가 난다. 이 지상에서 내게 남아 있는 이 시간들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이젠 잘 알 수 없다. 지독하게 무표정한 권태의 얼굴.” -지드 <아멘>
260. 습관, 그것은 과거이다. 그것은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태도와 행동의 형태로 우리가 경험한 과거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몽타주와 기계적인 동작의 총체로서, 이것에 의해 우리는 걷고 말하고 글을 쓰고 기타 등등의 행동을 한다. 정상적인 노년기에 있어 이것은 약화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역할이 커지기까지 하는데, 그것이 인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하는 행동이 어제의 행동을 모델로 취하고, 어제의 행동은 그저께의 행동을 본보기로 삼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곳에 인습이 있다.
걷기 위해 나는 옛 몽타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여정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습관, 그것은 매일매일 똑 같은 산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습관의 몫이 일반적으로 나이와 더불어 커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습관에는 절약의 원칙이 작용한다. 모든 연령에서 일에 매인 사람들은 습관에 자신의 몫을 나누어준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261. 사람들은 어떤 일정, 어떤 공간 배치, 어떤 단골가게, 어떤 레스토랑을 단번에 영원히 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젊을 때에는 규칙이 느슨하여 즉흥적인 변덕에 새로운 선택의 여지를 남겨둔다. 노인은 새로운 것을 걱정스럽게 받아들인다. 선택하는 것은 노인을 두렵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망설임, 의심으로 나타난다. 노인에게는 신뢰할 수 있는 명령에 의지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몽타주, 기계적인 동작은 반복적 행동에 사용된다. 즉 걷기의 메커니즘은 똑 같은 산책을 빗나가지 않고 다시 하기 위해 사용된다. 습관들은 까다로운 적응을 면하게 해주고 질문을 하기 이전에 대답을 제공한다. 늙어가면서 사람들은 습관들을 예전보다 더욱 엄밀하게 지켜나간다. 칸트는 항상 엄격한 규율을 따랐다. 노년에 그는 그 규율을 의무로 만들었다. 노년의 톨스토이는 정확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계획하곤 했다 역설적으로 습관은 활동적인 사람들보다 한가한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 불가결하다. 만약 하루하루의 나태한 침체상태로 빠져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침체 상태에 맞서 잘 규정된 엄격한 시간표를 대립 시켜야 한다. 이때 삶은 준필연성의 양상을 띠게 된다.
노인은 지나친 여가에서 오는 역겨움을 의무로 표현되는 임무, 요구들로 가득 채움으로써 피한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노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불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매 순간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규칙적으로 일을 했던가를 기억한다. 신문 읽기, 장미나무 손보기, 식사, 낮잠, 산책들이 움직일 수 없는 순서로 이어지곤 했다.
263. 습관은 노인에게 있어서 일종의 존재론적인 안정을 보장한다. 그것을 통해서 노인은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습관은 내일이 오늘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써 노인들을 산만한 근심에서 보호한다.
272. 특히 여자들에게 있어 말년은 하나의 해방이다. 평생 동안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식들에게 헌신한 여자들은 마침내 자신을 염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도 엄격하게 정돈된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때때로 원기 왕성한 노년을 보낸다.
278.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환자의 성격이 완전히 변화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구조를 취하게 되었을 때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인들에게서 가장 보편적인 정신병은 바로 ‘퇴행성 우울증’이다.
제8장 노년의 실례들
312. 한 사람의 말년은 대부분 그의 장년기에 달려 있다. 샤토브리앙이 음울한 최후를 준비했던 반면에 볼테르의 개방적인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노년을 가져다 주었다. 스위프트와 휘트먼은 둘 다 노년에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다했다. 인간 혐오자였던 스위프트와 삶을 사랑했던 휘트먼은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의 불행을 악화시켰으며, 휘트먼의 낙천주의는 그로 하여금 시련을 극복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내재적인 정의란 없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질병이나 사회적 상황이 활동적이고 관대한 존재의 말년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과거의 선택들, 그리고 현재의 사건들은 서로 간섭 효과를 일으키면서 개개인의 노년에 그 나름의 얼굴을 빚어놓는다.
335. 프로이트는 존스에게 이렇게 썼다.
“그가 내게 심어준 절대적인 신뢰는 우리 모두에게 그랬듯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지요. 우리는 계속 일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어야 합니다…… 이 작업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작업에 비교하면 우리 모두는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정신분석이 부딪히는 저항을 염려하고 있었다. “세계는 나의 일에 대해 일종의 존경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신분석은 분석자들에게만 받아들여졌습니다.”
결론
360.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마침내 영원은 그를 그의 내면에서처럼 바꾸어놓는다.”
죽음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우리가 매장하는 이 사람, 그의 마지막 나날들에 다른 날들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의 삶은 그 부분 부분이 모두 죽음에 차압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동등하게 존재하고 하나의 총체를 이룬다.
361. “노년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끊임없는 희극이다. 그것이 희극적인 것은 특히 그가 연기를 잘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게Faguet의 이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윤리는 과학과 기술이 제거할 수 없는 고통이나 질병, 노년과 같은 악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라고 설교한다. 우리 자신을 축소시키는 이런 상태 자체를 용감하게 견디어나간다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윤리는 주장한다. 다른 계획이 없기에 나이 든 사람은 이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계획이란 단지 우리의 활동에만 관계될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계획에 들지 않는다. 성장하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숙명일 뿐이다.
노년이 우리의 이전 삶의 우스꽝스러운 하찮은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든, 집단이든, 대의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도덕주의자들의 충고와는 반대로, 우리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 열정들은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그 덕분에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362.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의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살아오면서 겪은 손상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은퇴한 사람은 현재의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절망한다. 그는 항상 삶의 의미를 도둑질 당했기 때문이다. 강철법과 같은 가차없는 법이라도 법은 단지 삶의 모방만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삶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가능성의 고안도 거절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해도, 이제 주위에는 사막만이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을 목표들, 가치들, 존재 이유들로 가득 채울 만한 계획들에 착수할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죄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 정책’은 수치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더욱더 수치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가 대부분의 청년기와 장년기의 인간에게 하는 대우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말년의 몫인 훼손된 비참한 조건을 미리부터 만들고 있다. 노쇠가 때이르게 시작되고, 빨리 진전되며,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끔직한 것은 사회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빈손으로 노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착취당한 사람들은 기력이 사라지면 숙명적으로 ‘폐품’과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364.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항상 인간으로 대우받는 사회여야 한다. 사회가 비활동 인구에게 지정해주는 운명을 통해서, 그 사회의 이면의 베일은 벗겨진다. 사회는 항상 그들에게 상품 취급을 해왔던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윤만이 중요하며, 사회가 내거는 ‘휴머니즘’이란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회는 고백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지배 계층은 무산 계급을 대놓고 야만, 무지와 동일시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을 인류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가 생산력이 있을 때에만 인류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늙으면, 사회는 마치 낯선 인간을 보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모적인 침묵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 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65. 사회는 개인이 생산성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만 그에 대해 염려한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사회 생활에 접근하는 순간 느끼는 불안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제외되는 순간 느끼는 고뇌와 대칭되는 것이다. 이 두 순간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일상의 반복되는 삶이 문제들을 은폐한다. 젊은이는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게 될 사회라는 기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보도블록을 던지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밀려난, 이제 지치고 헐벗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눈물밖에 없다.
이 둘 사이에서 기계는 돌아간다. 그 기계는 인간을 빻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으깨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망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단지 좀더 전반적인 ‘노인 정책’, 노인연금의 인상, 위생적인 양로원, 노인들을 위한 조직적인 여가 등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체제 전체가 이 문제에 맞물려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구는 근본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나는 1994년판의 책을 가지고 있어서 상 하 두권으로 읽었다. 이 책을 읽는데 두 달이 걸렸다. 책의 두께는 두 권을 합하여 770페이지가 넘는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과 미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더하면 백명은 숫자도 아닐만큼 무수한 사람이 등장한다. 자,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시몬느 보봐르는 솔본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던 해, 1929년에, 21세의 나이로 메를로 퐁티, 레비 스트로스, 레이몽 아롱과 나란히 교수자격증을 취득하고 사르트르와 계약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마르세이유, 루앙, 파리 등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그러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서 교직을 떠난다. 그리고 35세에 처음으로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발표하고 곧이어 <레 망다랭>으로 1954년 콩쿠르 상-1903년 창설된 프랑스의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는다.
보봐르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두가지의 중요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일을 통해 독자성을 쟁취하고자 한다는 것과 둘째, 관습과 정신의 구조분석을 통하여 “변화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고, 그 일을 통하여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일이 어떠한 확고한 초월적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유한한 삶을 사랑하고 또 그 삶을 무의미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생각들이 보편적인 사회통념이 되었지만 그녀가 시작할 때에는 시대보다 조금 앞서가는 생각이었다.
사르트르와의 삶과 불가분 맺어져있는 그녀의 삶이어서 ‘사르트르의 그늘과 영향력의 반향이 크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실존주의 철학에 끈임없이 “윤리성”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기여한 바가 크다. <모호성의 윤리>와 같은 글을 통하여 자유를 위한 열정적인 변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는 방심한 상태의 자유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윤리 속에서 항상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자유” 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 그녀는 자유 그 자체를 원하지만 그 자유는 이 세상 속에서의 자유이며 각 개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유라는 것이다.
그녀가 사회적 소수자 를 다룬 두 개의 책 <제 2의 성>과 <노년>은 신화의 분석과 방대한 사실들을 분석함으로써 독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또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제 2의 성>은 41세에, <노년>은 62세에 발표된 책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제 2의 성>의 핵심주제는 글을 읽는 여성들에게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 <노년>에서는 “노인의 지위는 결코 자신이 정복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며 “인간의 말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인들의 지위는 소외된 주체인 노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성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한번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노년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첫 단계는 성인 각자가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데 대한 자각, 즉 인간의 조건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하고, 곧 그 피할 수 없는 인생여정이 내게도 곧 닥쳐온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직 젊은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노인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이런 성향은 노인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회피하는 “사회적 금기”를 만들어 낸다. 보봐르는 <노년>이라는 책은 바로 이러한 “침묵의 공모”를 깨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생산능력이 없는 고령의 비활동 인구를 폐물 취급하는 소비사회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파헤치고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1969년 작품이니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프랑스의 상황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는 어떠한가?
이 책의 구성은 1부에서는 외부에서 본 노년을 다룬다. 과학적으로 의학과 생물학을 말하고 사회적으로 신화와 역사를 분석해 놓았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의 노년을 다룬다. 수많은 책을 인용하였고, 신문의 기사들과 현존인물들과 사례들을 백과사전적으로 분석해두었다. 그래서 사실 핵심줄기를, 줄기세포를 찾아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녀의 삶과 닿아있는 것은 겨우 사르트르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과 그녀의 가족, 곧 어머니의 예를 조금 들어놓고 있을 뿐이다. 제 2부에서는 세계 속의 존재로서의 노인이라는 제목 하에 “노인이 스스로 노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 가는가?”를 말하고 있다. 육체의 산 경험으로 유명한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삶을 그려놓고 있다. 때로는 처음듣는 에피소드들도 있어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괴테, 톨스토이. 카잘스, 빅톨 위고, 헤밍웨이를 깊이 분석하고 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수많은 시인들이 등장하고 있고 인용된 시와 글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노년이 그 사회의 성격과 사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밀접하게 종속되어 있음을 논증하기 위해 사회 경제적 분석도 해두었고 특히 정치적 해석과 행정처리, 기관과 복지시설에 대한 정밀한 관찰, 퇴직연금의 분석등, 정말 혼자서 해내기에는 무척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다. 아마 요즈음 같은 상황이면 리서치 센터에서 프로젝트로 수행해야 할 만큼 내용이 방대하다. 그러니 글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녀의 노력은 가상했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노인들의 말년의 운명에 미친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면 지금 우리니라의 현실과 같은 장면도 많이 보인다. 그처럼 변화는 매우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고 지성으로 깨어 있을 때 바로 글로써 생각으로써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매우 안타까운 일은 노년이 되면 노인들 자신이 능동적으로 처해진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불행은 “내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가 일치하지 않는 비애를 근원을 두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내면적으로 30세 때와 같은 존재이나 남들은 나에게 70세 노인을 보고 그 연령층의 행동거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만약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연기해 내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정한 세계에서 뒷걸음을 쳐서 과거의 세계에 안주하기도 하고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유배된 이방인으로 남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헛된 명예욕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는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그러나 80세에는 현재가 과거를 마멸시킨다.” 는 보봐르의 결론은 사실 노년에 이른 그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비장하게 말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쓴 책의 첫 수혜자는 자기자신 입니다” 라는 말을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노년이 우리의 그 이전 삶의 하찮고 우스꽝스런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위한 해결책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들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다른 사람에게든, 집단이든, 대의 명분이든, 사회적 혹은 정치적인 일이든, 지적-창조적 일이든 그 무엇에 헌신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상당히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강렬한 열정들을 오래 보존하가를 바라야 한다. 사랑을 통하여, 우정을 통하여, 분노를 통하여, 연민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덕분에 우리의 삶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보봐르는 이렇게 말을 하며 장장 770쪽이 넘는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만약 내가 글을 써야 한다면 따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생각났다.
1. 너무 길다. 전권에 들었던 예가 다시 나온다. 이런 경우는 중언부언이 된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미 읽은 것을 잊어 “음, 좀 익숙한 표현이군...”이라고 반응을 하겠지만 몇몇 독자는 페이지까지 정확하게 다시 찾아내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니 글의몸무게를 좀 빼야 할 것 같다. 지방은 빼고 근육질만 남기자. 그래야 동맥경화 없이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2. 작가가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물론 인용한 것은 그녀의 독서량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은 지적 유희처럼 보인다. 내놓고 싶어서. 아니면 친절하게 이해시킨 후에 공통의 주제로 소통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어지러웠다. 게다가 체계적인 분류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녀가 어질러 놓은 장롱 속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조금 체계적인 구성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떤 인용문들은 불필요한 정보처럼 생각되었기에 단정하게 정리하여 뼈를 좀 가볍게 하면 좋겠다.
3. 번역문이 매끄러웠다. 사르트르의 책은 진도를 내지 못하고 앞부분만 읽다만 책들이 많다. 그러나 보봐르의 책은 잘 읽혀진다. 번역자가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글을 진솔하게 잘 쓰고 있기도 한 것 같다. 어쨌든 그녀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렵지 않았다. 장점이다.
4. 그녀가 몇해 앞서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 과정을 주-욱 써놓은 책이 <부드러운 죽음 Une mort tres douce>이다. 1964년 발표했다. 자그마하고 잔잔한 책이다. 78세라는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고 또 지난날을 회상하며 삶과 죽음을 묵상한 글이다. 이 책이 그녀의 <노년>을 선택한 이유가 되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드높은 필명의 작가가 보통사람이 되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그런 마음을 장식없이 써 내려간 그 책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제는 북리뷰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래서 조금 더 무거운 심정으로 이 고갯길을 힘을 더하며 오르고 있다. 곧 자신의 책을 써야하는 초보 작가의 입장에서 남의 책을 비판적 시선으로 다시 한번 훝어보며 드는 생각이 좀 유치하지만 “어디 두고보자...너는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말을 하기가 좀 겁이 난다. 부머랑이 되어 다시 돌아올까봐.....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선행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한편 위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숙제를 위한 노력의 끝에 책이 있을 것”이라는, 그리고 5기 동료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는 것이 희망이기도 하다. 끝까지 이 걸음으로 뚜벅 뚜벅 가야 할텐데...그래,...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잘 걸어가며 반듯한 발자욱을 남겨야 한다.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하여!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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