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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2일 11시 17분 등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Ⅰ 백낙청 옮김

창작과 비평사

Ⅰ. 저자에 대하여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파리의 대학에서 예술과 문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부다페스트에서 하우저는 부다페스트 일요일 서클의 멤버가 되었다. 부다페스트 일요일 서클의 멤버는 평론가와 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그룹은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작가 Béla Balazs, 음악가인Béla Bartók와 졸탄 Kodály를 포함하였다. 칼 만하임은 사상을 이해하는데 사회학이 유용함을 거부했으나 생각을 바꾸게 된다. Frigyes Antal도 예술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였다.

1 차 세계 대전 후 하우저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고전 미술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1921년 베를린으로 옮겼다. 이 무렵 하우저는 예술과 문학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회적 문제라는 자신의 견해를 개발하였다. 3 년 후 그는 비엔나에 정착했고 1938년에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하우저는 연구 미술의 사회사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미술의 사회사 연구를 끝마치는데 10년이 걸렸다. 이 10년 동안 하우저는 오늘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영화와 시력 및 사운드에 관한 수 많은 에세이를 썼다. 영국에 머문 1950년대에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문학·미술·음악·건축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를 썼다. 그는 예술 작품이란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사회적 힘의 산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사를 고차원적 이념에 매이거나 단일한 예술 양식으로 압축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이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더라도, 온전히 사회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는 리즈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객원 교수를 했다. 1959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Hornsey미술대학의 교사가 되었다. 하우저는 1977년에 헝가리로 이주했다. 헝가리에서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되었다. 그는 1978년 1월 28 일 헝가리에서 사망한다.

하우저의 마지막 책, 예술의 사회학(1974)은 예술의 사회적 경제적 결정요인을 조사했다. 이 책에서 하우저는 예술은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전제를 단순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함을 주장하였다. 예술의 사회사는 학자로서 30년 연구의 산물이었다. 이 책은 예술의 생산을 변화하는 사회역사적 세력들의 프레임으로 Lascaux에서 영화 시대에까지를 추적했다.

하우저의 주제는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과 문화적 발전 사이에서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형태와 내용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우저에 따르면 신성과 세속적인 예술의 분리는 신석기시대에 발생했다. 수공예에 국한된 Profane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의 손에 의존하였다. 영웅과 호머 시대는 그들 군주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에 의존하는 사회 시스템을 향한 결정적 전환을 의미한다.

하우저는 80생애를 살았지만 젊음과 중년시절 대부분을 가난하고 힘들게 지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었던 과정이지만, 약소국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더욱 힘든 시기였다. 그의 첫 책이자 대표저작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출간된 때는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하우저는 중년을 넘긴 노년에야 비로서 그의 진가를 세상에 알렸다. 이때서야 망명지인 영국에서 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고, 후에는 미국의 교환교수로써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Ⅱ. 마음에 무찔러든 글귀

제1장 선사시대

1. 구석기 시대 : 마술과 자연주의

예술을 현실지배 및 현실통어의 한 수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에 순응하는 하나의 방도로 보느냐에 따라 한편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재현하는 자연주의적 작품이 예술활동의 최초 형태였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삶을 양식화하고 이상화하는 엄격한 형식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p.13

순전히 실용적 활동이 삶의 전부였던 이 시대에는 만사가 생존을 위한 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음이 분명하며, 예술이라고 해서 식량조달과 무관한 어떤 다른 목적에 이바지했으리라고 가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흔적을 놓고 보더라도 예술은 주술적 행위의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수단으로서 철두철미 실용적이고 순전히 경제적인 목표와 직결된 기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p.16

이 시대의 그림은 이러한 마술의 도구였던 것이다. 즉 그림은 짐승이 그 속에 걸려들게 되어 있는 ‘함정’이었다. 아니, 이미 짐승이 걸려든 함정이었다고 말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자 대상 그 자체이며, 소망의 표현임과 동시에 소망의 달성이었기 때문이다. p.17

이러한 모든 예에서 우리는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사라짐을 본다. 하지만 역사시대에 들어선 이후의 작품에서는 두 세계간의 이러한 연속성이란 어디까지나 허구 속의 허구임에 반해, 구석기시대의 회화에서는 그것이 명명백백한 하나의 사실이며 예술이 아직 전적으로 실생활에 봉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p.18

2. 신석기 시대 : 애니미즘과 기하학 양식

예술사에서 최초의 양식변화를 이루는 전환점이 나타나는 것은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이행하면서였다. 이때 비로소 체험과 경험에 대해 개방적인 자연주의적 경향이 물러나고, 경험세계의 풍성함을 등진 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무늬로 양식화하려는 경향이 지배하게 된다. 자연에 충실하며 그때그때 모델의 특징들을 애정과 인내로써 묘사하려는 그림 대신에 사물을 충실히 그려낸다기보다는 상형문자처럼 가리키는 데 그치는, 획일적이고 인습화된 기호가 나타난다. 예술은 이제 삶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보다 사물의 이념이나 개념 내지는 본질을 포착하려 하고, 대상의 묘사보다 상징의 창조에 주력한다. p.22

선사시대 인류의 물질적 환경과 정신구조에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어서, 돌이켜보건대 그 이전의 생활은 모두 단순히 동물적 본능이었던 데 비해 그 이후의 모든 변화는 목적의식을 지닌 하나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다. 이러한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점을 이룬 계기는 바로, 인간이 식량을 채집하거나 수렵하는 식으로 자연의 혜택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대신 이제부터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동물과 식물을 길들이게 되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목축업 및 농업의 발견과 더불어 인간은 이제 자연에 대한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며 어느 정도는 운이라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운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p.23

마술과 주술 대신 종교적 의식과 예배행위가 등장한다. 구석기시대는 종교가 없는 시대였다. 인간은 죽음에의 공포와 굶주림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고 외부의 적이나 식량의 결핍, 고통 또는 죽음으로부터 마술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지만, 그에게 닥쳐오는 행운이나 불행을 현상의 배후에서 점지해주는 어떤 힘과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p.25

구석기시대의 예술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실물에 충실하게 그려 내는 데 반해 신석기시대 예술은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와 양식화되고 이상화된 초현실세계를 대립시키는데, 그 근본 원인은 바로 그러한 세계관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p.26

예술작품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일 뿐 아니라 사유의 표현이며, 기억의 소산만이 아니고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감각적이 아닌 개념적인 요소가 감성적 · 비합리적 요소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p.26

이것은 애니미즘 신앙과 더불어 발생하여 이후 수백 가지의 철학체계 속에 그때 그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이원론으로서 관념과 현실, 정신과 육체, 영혼과 형식 등의 대립으로 표현되며 이제는 예술의 개념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p.27

3. 마술사 또는 성직자로서의 예술가, 전문직업 또는 가내수공예로서의 예술

‘화가 겸 마술사’인 이들이야 말로 전문화 및 직업분화를 이룬 최초의 본보기인 셈이다. 어쨌든 이제 화가가 아닌 여타의 마술사 내지 주술사와 더불어 일반대중과 구분되는 그들은, 특수한 재능의 소유자로서 훗날 특별한 능력과 지식 뿐 아니라 일종의 지배자로서의 권위까지 내세우며 모든 일상적인 노동과 절연하게 될 본격적인 사제계층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p.34

제2장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1. 고대 오리엔트 예술의 동적 요소와 정적 요소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고루한 전통적 형식의 배후에서 실험적인 개인주의와 탐구적인 자연주의의 생동감을, 도시의 생활감정에서 우러나와 신석기시대의 정체적 문화를 와해시키고 있는 힘들을 느껴야만 한다. p.47

압박이 가장 심했던 고대 오리엔트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 중 상당수가 탄생했다. 이들 작품은 예술가의 개인적 자유와 작품의 미적 가치 사이에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증명해준다. 예술적인 의지란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장애물을 뚫고 나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예술작품은 일련의 목표설정과 이에 대립되는 일련의 장애들-부적합한 제재라든가 사회적인 편견이라든가 대중의 미흡한 판단력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장애와, 혹은 이러한 장애를 이미 자체 내에 받아들여 동화시켰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 공공연하고 완강한 대립관계에 서 있는 목표설정-사이의 긴장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p.48

3. 중제국시대 예술의 유형화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예술에서 보이는 모든 합리주의적 형식원리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면성’(Frontalitat)의 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면성’의 원리란 랑에(J. Lange) 및 에르만(A. Erman)이 발견한 인체묘사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면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든 간에 가슴의 표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을 향하도록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61

고대 오리엔트의 예술은 감상자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한다. 그것은 권위를 상징하는 예술이며 존경을 강요하는 예술인 동시에 존경을 아끼지 않는 예술이기도 했다. 감상자를 의식하는 그런 태도는 일종의 존경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예의이고 범절이었다. 왕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 덕을 칭송하고자 했던 궁정예술은 모두가 어떤 원리에서든 정면성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감상자 또는 발주자에게 위안과 봉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고 대면하는 예술인 것이다. p.62

4. 아메노피스 4세 시대의 자연주의

위대한 정신적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아메노피스 4세는 일반적으로는 일신론(一神論)의 이념을 발견한 교조로 알려져 있고 또 세계사에서 ‘최초의 예언자’ 혹은 ‘최초의 개인주의자’ 식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는 또한 예술을 의식적으로 개혁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즉 그는 예술의 목표로서 자연주의를 내세워 의고풍 예술양식에 맞서는 새로운 업적을 이룩한 최초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p.64

5. 메소포타미아

구석기시대의 인간이 인간보다는 동물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것은 그들의 생활이 동물 중심이었던 탓인 데 반해 후대에 오면서는 동물은 양식화할 가치가 없다고 보아 동물 그림이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p.75

6. 끄리띠

끄리띠 예술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예술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궁정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끄리띠에서는 로꼬꼬적인 요소, 즉 세련되고 경묘한 것이나 섬세하고 우아한 것에 대한 취미가 좀더 강하게 대두한다. 회르네스는 축제 행렬이나 축제극, 공공의 투기(鬪技)나 공개시합, 부인들과 그 요염한 행동거지 등이 끄리띠 사람의 생활 속에서 차지한 비중을 지적하면서 끄리띠 문명에 내포된 기사적(騎士的) 요소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견해 임에 틀림없다. 중세에 와서도 그러했듯이 이런 유의 궁적적?기사적 요소는 정복에 의하여 토지 소유자가 된 향사(鄕士)들의 구태의연한 생활양식을 누르고 좀더 자유분방하고 융통성 있는 생활양식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또 이러한 생활양식에 부응하여 좀더 개성적이고 양식 면에서 자유로우며 자연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한 예술을 생산했던 것이다. p.77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

1. 영웅시대와 호메로스 시대

모든 원시시대의 문학이 그렇듯이 선사시대의 그리스 문학도 주문이나 신탁의 일종이요 축복이나 기원을 위한 격식에 맞춘 문장들이거나 군가 또는 노동요였다고 생각된다. 이들 장르에 공통된 하나의 특색은 그 모두가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집단적 문학이었다는 사실이다. p.86

영웅시대가 시작되면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과 시인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의 상층을 차지하게 된 무사계급의 세속적 · 개인주의적 세계관은 문학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은 동시에 시인의 역할까지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이제 사제층과는 달리 범접할 수 없는 익명의 권위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문학은 집단의 권위를 대변하는 신성함을 잃게 되었다. 기원전 12세기의 아카이아(Achaea)의 왕이나 귀족들, 즉 이 시대에 ‘영웅시대’라는 명칭을 붙이게 해준 ‘영웅’들은 스스로를 ‘뭇 도시의 약탈자’라고 자랑스럽게 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강도요 해적들이었다. p.87

유동적인 생활을 하는 호전적인 민족에게는 보고 듣는 것 전부가 모든 전통과 법에 맞서는 자유분방한 개인주의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쟁탈의 대상이요 개인적 모험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완력과 용기, 숙련과 지략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p.88

농민의 생활권에 자리잡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인 성격을 띤 최초의 문학은 헤씨오도스(Hesiodos, Hesiod)의 작품이다. 그의 문학도 흔히 말하는 민중문학은 아니다. 즉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문학도 아니요 서민들이 모이는 주막 같은 데서 항간의 음탕한 이야기들과 겨룰 수 있는 문학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취급되고 있는 소재와 가치관, 인생목표 등은 농민층, 즉 귀족지주들에게 억압받는 민중의 그것이었다. 헤씨오도스 작품의 세계사적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긴장과 계급간 대립의 최초의 문학적 표현이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물론 화해를 말하고 대립의 해소와 위무(慰撫)를 시도하는 것이지만--계급투쟁과 혁명의 시대는 아직 요원하였다--여하간 처음으로 문학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들려주었고 사회정의를 주장하며 자의(恣意)와 폭력을 규탄한 최초의 목소리가 되었다. 이제까지 시인에게 맡겨졌던 종교와 예배, 궁정생활과 지배자 찬송의 임무를 처음으로 버리고 정치적 · 교육적 사명을 떠맡아 피압박계급의 스승이요 충고자요 대변자가 된 것이다. p.98

2. 아케이즘과 참주제하의 예술

경제적 개인주의의 대두와 함께 서사시 편찬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등장하는 서정시인과 더불어 문학의 영역에서도 주관주의가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단 소재의 관점, 즉 원래 서정시는 서사시보다 개인적인 소재를 취급한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시인이 자기 작품의 저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새로운 요구라는 면에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이제 정신적인 것에 관해서도 개인 재산권의 관념이 등장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p.107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예술이념과 마주치게 되는 셈이다. 이제 예술은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예술뿐 아니라 모든 정신적 형식이 처음에는 오직 실용적 목적과의 관련에서 결정된다. 실용적인 지식은 특수한 목적을 지니지 않은 순수한 연구가 되고,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은 추상적 진리탐구를 위한 방법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원래는 마술이나 종교의 부속품, 선전과 자기찬미를 위한 도구, 또는 신과 악령과 인간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예술도 순수하고 자율적인, 즉 ‘이해타산을 떠난’ 형식, 예술 그 자체와 아름다움을 위한 예술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본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만 생겨난 명령이나 금지, 의무나 터부 등이 마침내 ‘순수’ 윤리의 규범이 되고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 실현을 위한 지침으로 변했던 것이다. 실용형식에서 이념형식으로, 구체적인 형식에서 추상적인 형식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학문의 세계에서나 예술 ·도덕의 영역에서나 그리스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p.112-113

예술을 생존투쟁의 무기로만 보고 그러한 예술에만 의미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예술이란 것은 모든 실용적 목적과 효용, 모든 미학 외적 이해관계에서는 독립되어 있는 단순한 선과 색의 유희, 리듬과 조화, 현실의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으로의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아마도 예술사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예술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113

3. 고전주의 예술과 민주정치

예술작품의 가치와 사회적 조건을 일 대 일로 간단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다.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가지가지의 요소를 그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것뿐이며, 이러한 요소들이 동일할 경우에 거기서 생기는 예술작품의 질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p.130

4. 그리스의 계몽사조

기원전 5세기가 끝나가면서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적 · 개인주의적 요소, 주관적 · 감정적 요소들이 점점 그 범위와 비중을 더해갔다. 전형보다는 개성이, 모티프의 집중보다는 확산이, 절제보다는 풍성함이 갈수록 더 우세하게 되었다. p.130

쏘피스뜨들은 의식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언변이 좋은 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교육의 기초를 세웠으며, 소위 지식인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러한 지식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설정된 것은 인류사상 처음이었다. 소피스뜨들에 이르러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식의 개념과 마주치게 되는데, 선사시대 및 역사시대 초기의 사제층이나 호메로스 시대의 음유시인들과 같은 일정한 직업이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층에 항시 인력을 수급할 수 있을 만큼 폭넓은 일종의 인간 수원지(水源池)로서의 지식층이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었다. p.131

쏘피스뜨 철학의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및 동시대 예술의 환각주의와 주관주의는 양자 모두가 경제적 자유주의 및 민주사상의 표현이며, 모든 것을 선조들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얻었기 때문에 낡은 귀족적인 태도나 그들의 위엄 있고 거창한 행동거지에 한푼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은려는 세대, 즉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신조를 지녔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이나 정열을 아무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발산하는 세대의 정신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p.134

5. 헬레니즘 시대

학문연구가 이와 같이 전문화되고 비인격화된 사실의 필연적 결과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만을 중시하는 풍조와 절충주의의 위험이었다. 이 두 가지 특색은 서양문화사에서 처음으로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것이자, 헬레니즘의 모든 특색 중 아마 가장 현대정신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절충주의는 헬레니즘 시대 학문적 업적의 근본적 특징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예술작품의 근본적 특색이기도 하다. 역사를 존중하며 고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지녔고 과거 여러 형태의 예술유파에도 폭넓은 태도로 임했던 이 시대는, 필연적으로 모든 자극에 대하여 무차별하게 반응을 보인 시대이기도 했다. p.147

6. 제정시대와 고대 후기

그리스의 영향이 아직 지배적이었던 아우구스뚜스 시대에는 예술분야에서 조각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회화가 점차로 세력을 뻗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건축조각과 기념비 조각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다시피 하게 된다. 3세기에 이르면 그리스 조각의 복제품 제조는 중지되고, 그 뒤 200년 동안은 모든 실내장식을 회화가 거의 독점해 버렸다. 그리스 고전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조각이었던 것처럼 로마시대 후기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예술은 회화였다. 동시에 그것은 로마의 민중예술, 즉 모든 사람을 향해 모든 사람의 말로 이야기하는 예술이기도 했다. p.154

제4장 중세

1.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이 세 시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 가지 변동들-즉 공로에 따라 귀족이 될 수 있었던 기사계급의 탄생이라든가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로의 전환,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 자연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의 맹아-은 근대적 생활감정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르네쌍쓰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할 만큼 중요한 것이다. p.177

5. 영웅가요의 작자와 청중

음유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추었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미 결코 시인이나 가인만이 아니고 악사 겸 무용사, 극작가 겸 배우, 광대 겸 곡예사, 요술쟁이 겸 곰재주 놀리는 쇼꾼, 한마디로 당대의 만능연예인이요 ‘메트르 드 쁠레지르’(maitre de plaisir, 여흥진행 담당자)였다. p.231

문학작품은 그 자체의 전설과 그 스스로의 영웅적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그것은 시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만이 아니라 후세에 의해 주어진 형태로도 존속해간다. 문학의 각 시기는 그 자신의 호메로스와 그 자신의 『니벨룽엔의 노래』『롤랑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시기는 이들 작품에 자기 유의 해석을 내림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해석들은 작품에 대한 직선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품 주위를 천천히 맴도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대가 내리는 해석이 언제나 전보다 더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의 정신에서 출발한 모든 진지한 해석 노력은 작품이 갖는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게 마련이다. 역사적 현실의 기반 위에 영웅서사시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이론도 모두 적극적인 의의를 띤다. 왜냐하면 중요한 문제는 역사의 진실이라든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라는 것보다는 대상의 핵심에 닿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접근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32

7. 봉건제도와 로마네스끄 양식

봉건제도는 9세기의 국가가 이러한 난제들, 특히 중장비의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 메로빙어 왕조 시대와 달리 새로운 것은 이렇게 주어진 토지가 봉토(封土)로서의 성격을 띠고 토지를 받은 사람이 토지를 준 사람에 대하여 가신(家臣, 從士)의 관계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말을 바꾸면 이제까지의 단순한 종속관계 대신에 이제는 계약에 의한 의리관계, 상호봉사와 상호책임의 관계, 쌍방이 서로 의리와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관계가 봉건제도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p.244

봉건시대의 국가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한 점을 정점으로 가진 피라미드형의 복합사회였다. 왕은 전쟁의 주관자이긴 하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대지주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관리나 용병, 총신(寵臣)이나 벼락감투를 쓴 사람, 식읍(食邑)을 받았거나 녹(祿)을 먹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영주의 자격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들의 특권은 법의 근원으로서의 군주가 부여한 공식적인 권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실상으로 장악하고 있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권력에 의거한 것이었다. p.245

오로지 육체적으로 아름다운 것, 감각적으로 생동하는 것, 형태적으로 정상적인 것을 묘사했을 뿐이며 영혼이라든가 정신적인 것에 대한 암시를 일체 회피했던 고전적인 고대에 비하면, 로마네스끄 양식은 영적인 표현만을 노리는 예술이요 감각적 경험의 논리가 아닌 내면적인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르는 예술로 보인다. p.259

영웅이나 왕처럼 그려지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직 모든 지상적인 것, 무상한 것에 대해 승리자의 용모를 갖추고 있는 이들 그리스도상에 상응하는 것이 당시의 성모상인데, 그것은 고딕시대 이래 우리들에게 친숙해진 사랑과 고뇌를 나타낸 성모상과는 달리 인간적인 모든 것을 추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그려진 마돈나인 것이다. p.260

8. 궁정적 · 기사적 낭만주의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p.263

기사계급의 낭만적 이상주의와 의식적이고 감상적인 영웅주의는 실은 재탕된 이상주의요 영웅주의였으며, 그것은 기사계급의 명예라는 개념을 형성해나간 신흥귀족의 자의식과 야심에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p.277

고귀한 인격이 고귀한 출생가문보다 가치가 높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봉건적 군인계층이 이미 완전히 그리스도교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민족대이동 시대의 거칠고 품위 없는 직업군인으로부터 중세 최성기의 ‘하느님의 기사’에 이르는 긴 발전의 결과였다. p.278

기사계급의 새로운 생활감정이 가장 순수하게, 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이 시대의 특색인 ‘기사도의 덕목’과 좁은 의미에서의 ‘귀족적인 덕목’이다. 즉 한편으로는 패배자에 대한 관용, 약자의 보호와 부인에 대한 존경, 훌륭한 범절(courtoisie)과 여인에 대한 멋스러운 예우(galanterie) 등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신사’(gentleman)에게 남아 있는 특성들, 예컨대 너그러움, 돈이나 이해관계에 대한 초연함,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경우 바르고 체면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는 태도 등이다. p.279

기사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러한 태도 즉, 여자가 남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궁정적인 예절에 어긋나고 부적당하다고 생각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쌀쌀하고 남자는 사랑에 몸이 달아 있는 것이 오히려 궁정적인 예절이고, 남성이 끝없이 참고 끝없이 수그리며 여성의 의지와 더욱 훌륭한 본질 앞에서 자기의 의지, 자기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궁정적이요 기사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연모의 대상인 여성이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이며 사람의 쓰라림에 스스로 탐닉하는 일종의 감정적 노출증과 자학증이 곧 궁정적인 예법이었다. 근대 낭만적 연애관의 근간을 이루는 이러한 갖가지 특색은 모두가 이 기사문학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사랑하고 애태우며 단념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상대의 응답이나 사랑의 성취와 관계없이 바로 그 부정적 성격에 의해 더욱 타오르는 사랑, 손에 잡히는 대상이나 심지어 분명히 규정할 수 있는 대상조차 가지지 않는 이른바 ‘먼 것에 대한 사랑’--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근대문학사의 막이 열리는 것이다. p.285-286

궁정적 · 기사적 연애의 드러난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잠재해 있는 관능적 요소를 간과할 수 없으며, 그것이 실은 교회의 금욕적인 계명에 대한 반항의 산물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p.292

새 시대의 연애 이야기나 모험 이야기는 이제 주로 부인들의 독서를 위해 만들어졌다. 문학작품의 감상자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점하게 된 사실이 서양문학사에서 최대의 변화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감상하는 방법의 새로운 형식이 된 것도 장래를 위해 그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학감상이 열렬한 취미가 되고 매일의 요구가 되고 습관이 된 것은 문학이 ‘독서’가 된 이 시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장엄한 행사 때나 특별한 계기만이 아니라 마음내킬 때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문학’(Literatur, literature)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p.301

9. 고딕 예술의 이원성

“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러한 정신적 변혁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말에는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일체의 신학적 변호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계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표현하며, 따라서 예술의 관점에서도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마련인 것이다. p.308

Ⅲ. 내가 저자라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선사시대부터 영화의 시대까지 서구 문학과 예술의 역사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서술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하우저는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면서 문학예술 작품이 한 시대의 생생한 산물이라는 것을 폭넓은 역사적 안목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탁월한 심미안으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우저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풍부한 해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한 시대의 주도적 양식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탄생하는가.’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양식의 변화와 교체가 이루어지는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러한 변수가 어떻게 작품의 미적 특성으로 구현되는가.’ 하우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문학과 예술의 역사 속에서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며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수 천 년을 가로지르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중세까지이다. 이 시기 예술의 기본 성격은 “실용적 목적과 미적 관심의 직접적 일치”이다.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가치는 자연의 지배나 종교적 제의 같은 예술의 외적 목적에 종속된다. 선사 시대의 예술이 생존을 위한 주술이 목적이었다면, 철기를 바탕으로 농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국가가 형성된 뒤에는 화려하고 거대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선사 시대를 지나면서 예술은 다양해졌다. 곧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행위가 생존 문제 자체에서 분리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예술은 지배 계급의 권위와 사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 뒤 중세로 넘어 오면서 다양한 예술 양식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는 크게 자연 경제를 바탕으로 한 봉건 제도 초기, 궁정 기사들이 주축이 된 중기, 도시 시민 계급이 문화의 중심이 된 말기로 나뉜다. 시대가 바뀔수록 예술 양식이 다양해지기는 했어도 공통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처럼 선사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예술은 예술 자체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하거나 지배 계급의 권위와 부 그리고 기독교라는 정신적 가치의 절대성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두 번째 시기는 르네상스 이래의 근대 예술의 시기로써 이 시기에는 차츰 실용적 목적에서 벗어나 나름의 자율성을 추구한다. 근대 예술의 자율성은 종교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인간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과 인간의 보편적 가치 추구가 이제는 예술의 몫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근대 예술은 실용적 목적을 위하여 자연과 신의 섭리를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창조성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이 책은 문학과 예술의 변모양상을 사회적인 변화 내지는 변모의 과정을 밝히는 잣대로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려는 방법도 다양하고 그 자체의 개념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이 지닌 장점과 단점은 다음과 같다. 장점은 하나의 관점에 의거하여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단점으로는 세부적인 각각의 항목을 간결한 진술을 통해 언급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사실을 자칫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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