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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2일 11시 36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아놀드 하우저는 1892년에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인이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자유대학에서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강의하며 ‘일요모임’에 참석하였던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파리로 간다. 그 곳에서 서구 문학의 원전을 읽었으며 딜레탕티즘(Dilettantism)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미술사에 탐닉한 진지한 예술학도가 되기도 하였다. 미술에 대한 보다 풍부한 경험을 위해 그는 로마로 갔다가, 독일 역사학과 사회학의 연구에 관심이 끌려 베를린으로 갔는데 그때가 그의 나이 29세인 1921년이었다.

 

1969년 영국 BBC 방송국과 헝가리 방송국은 런던의 아놀드 하우저와 부다페스트의 루카치 사이의 방송 대담을 중계하였는데 하우저에게 있어서 루카치는 동료이자 선배이자 정신적 은사이기도 했다. 이들은 1916년 부다페스트에서 ‘일요모임’의 회원으로 만났다. 자유주의자들의 좌파적 분위기가 있었던 이 모임에는 사회학자 칼 만하임, 시인 벨라 바라즈 등이 함께 하고 있었으며 루카치가 정신적 지도자였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한창인 20대를 이러한 예리한 지성들이 함께 보냈다는 것은 모두의 행복이고 평생의 자산이었으며, 모두가 각 분야에서 대성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루카치와의 대담에서 스스로 회상하기를 이 방랑의 세월 속에서 그는 처음에는 뵐플린의 미술에 대한 형식적 분석에 이끌렸으나 나중에는 드보르작의 정신사적 해석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양식의 변화와 취미의 변화는 단순히 현실적 변화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 영향과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진보적 신념이 거기에 없음을 발견하고 “역사의 필연성과 역사의 내재적 논리는 현실과 부닥치는 저항 여하에 따라 판가름 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변증법적 인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독일에서 출판사 일을 하며 틈틈이 베를린 대학 강좌를 청강하던 그는 1928년 아내의 요청으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했고, 거기에서 구한 직업은 허름한 영화사의 홍보과 직원이었다. 이 직장은 “10년 동안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오후 6시 까지 꼬박 일해 준 지겨운 곳”이긴 했지만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새롭게 탄생한 예술, 즉 영화의 자기발전 과정과 성공한 영화·실패한 영화의 유형을 분석하면서 예술의 소통 방식을 마치 ‘임상실험’처럼 경험했다. 그의 뛰어난 사회학적 통찰력은 이처럼 ‘책’ 보다는 ‘경험’에서 얻은 것이 더욱 컸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유대인인 그는 런던으로 피신했다. 아내와도 사별한 고독한 40대 후반의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친구 만하임만은 그를 알아주어 『예술사회학의 선집』에 부칠 서문을 1백 쪽 정도 쓰도록 주선해 주었고, 그는 진심으로 이 글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예술과 사회에 관해 쓴 글들이 ‘논문제목 이상의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 거의 관심표명 정도였음을 확인하고는 차라리 이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연구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 글 대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부터 50년까지,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창조적 열정의 정점이 지나가버린 48세부터 58세까지 10년간의 세월을 이 책을 쓰는데 바쳤다. 책의 총 분략은 1천여 쪽. 그러나 이 방대한 저술의 가치를 보증해줄 후견인이 그에게는 없었다. 벗 만하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허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명망 높은 보수적 미술 평론가인 허버트 리드의 출판보증으로 1951년에 영어본이 먼저 출간되었고 이듬해 독일어 판이 나왔다.

 

하우저의 이 저서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들의 높은 평가와 함께 진보적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필독의 저술로 평가되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독일 곳곳에서 초청 강연을 갖게 되었고, 또 이 저술 덕분으로 런던 교외에 있는 리즈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하우저는 생애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는데 이미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대학 밖에서만 살던 노교수 하우저에게 이 대학 학생들은 큰 실망을 주었다. 그는 학생들이 너무 한심해서 가르치기보다는 저술에 정열을 쏟았다. 그 첫 번째 책이 『예술사의 철학』(황지우 옮김, 돌베게, 1958)이며 이 책의 내용은 사실상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서문에 해당한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이끌어간 주된 원리는 “역사의 모든 것은 여러 개인이 이룩한 것이지만 그 개인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상으로 어느 특정한 상황에 갖혀 있게 마련이며, 따라서 그 행동은 생래적인 능력과 상황, 양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역사적 산물의 변증법적 성격을 강조하는 학설의 핵심이기도 하다고 그는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예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 보다 더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도 하였는데 이처럼 단호하게 자신의 예술관을 제시하게 되기까지는 이미 그가 순수예술론자들의 해석 방식을 경험하였기에 누구보다 예술 작품을 폭넓고 예리하게, 거시적으로 분석하는 통찰력을 갖추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에 초청되어 그의 전공이라 할 『매너리즘』(1965)을 집필했고, 또 필생의 과제 『예술 사회학』(최성만 옮김, 한길사, 1974)을 펴냈다. 다만 그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영화 미학’만은 끝내 출간되지 못했다. 1978 86세의 하우저는 60년 만에 헝가리로 돌아가 과학원 아카데미 회원으로 대접받았다. 그리고 1년 뒤 ‘기나긴 지적 역정’을 마치고 고국 땅에 묻혔다. 하우저의 저작, 특히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우리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은 별도의 장으로 말해야 할 정도로 지대한 것이었다. 우리 지식인들이 서구 좌파 지식인의 진보적 예술관뿐만 아니라 세계관까지도 직접 경험한 것은 1966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처음 소개된 이 저작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문학·예술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분야에 걸친 것이다. 국내에선 1981년 창비신서 4권으로 무려 15년 만에 완역됐는데 세계에서 14번째 번역본인 셈이다

<유럽 좌파 지식인의 진보적 예술관유홍준>

 

내가 저자라면

 

역사 연구의 목적이 현재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한 하우저의 말을 되내어 보면서 문학과 예술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소통되며 탄생과 소멸이 진행되는지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족하게도 하우저의 통찰적 사고를 이해하는 데에는 내 자신의 문학적,예술적 이해관이 턱없이 부족해 깊은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과 조금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전집을 파고들고 싶은 욕심을 얻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려 한다.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문화적, 예술적 상식이 부족하더라 하더라도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고리를 하우저의 눈으로 추적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문학 또는 예술의 탄생이 사회의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즉 어떻게 개연성을 갖게 되는지 이해된다는 데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력한 매력인 것 같다. 그는 과거의 문학을 이해하자면 우리 쪽에서 특별한 입장을 견지하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오로지 심미적으로만, 간접적이고 이해상관이 없는 상태에서, 즉 그것이 허구이고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스스로를 집어넣는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읽는다고 하였다. 결국 당시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전반적으로 통달한 상태에서나 가능한 경지에서의 입장을 의미한다. 그것이 하우저가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10년간 연구한 이 저서를 그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에 나의 독법은 그가 문학의 탄생을 어떤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지, 또는 예술작품의 탄생배경은 무엇이고, 사회적인 욕구 또는 어떤 사회적 구조에서 성장하였는지에 대해서 그의 눈을 따라가 보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내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을 선택한 이유는 오늘날의 문학과 예술이 리얼리즘을 얻는 즉 인간에 대한 탐색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고 인간에 관심을 갖게 된 르네상스의 시대에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사회적 현상들의 리얼리티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활, 우리 자신의 인생문제를 다룬 최초의 문학작품들이 발자크에 의해서 쓰여졌던 시기이며, 이러한 정신적 전개가 지금의 시대에서 매우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방가르드적인 사고를 지향한다. 아방가르드는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한 신 예술운동을 말하는데 아방가르드적인 사고 즉 어떠한 리즘이나 운동에 구속되지 않고 신사고적 세계관이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따라서 고전주의적, 자연주의적 사회구조가 무엇이고 수없이 생선된 ~ism의 세기인 19세기의 특징이 무엇이었고 왜 아방가르드의 탄생의 배경이 되었는지 이해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4권을 선택하게 된 것 이다.

 

문확과 예술을 바라보는 것 그 관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바로 누가 참여의 대상인가? 누구의 눈으로 보는 것인가? 일 것 같다.

귀족과 시민계급의 관점에서, 진보와 보수의 관점에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부르즈와와 사회적인 관점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점에서 문학과 예술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그러나 그 극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 양자의 대립된 상호보완적 요소들을 통해 성장을 한다. 비인간적일수록 인간적으로, 인간적일수록 비인간적으로 세상은 멈추지 않고 변화해 가며 사회를 이루고 있다. 정의내리는 순간 정체된 것이라는 니체의 통찰을 이 책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들간의 충돌 그리고 새로운 리즘의 탄생, 그 리즘 19세기는 수없이 많은 혼돈과 사회적 갈망의 세기였다. 근대적 소설이 탄생한 시기, 인간의 삶을 처절하리만치 극명하게 보여준 시기, 고전속에서의 권위의 예술을 기분전환의 예술로 전환시킨 시기,부르즈와층에서 고전예술에서 서민의 즉 대중을 우선시 하는 상업예술이 싹을 튼 시기, 허무주의가 탄생하고, 심미적 쾌락주의가 시작되며, 실용주의가 탄생하였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내 자신의 문화예술적 사회사로서 리즘을 정의내려 본다면 그것은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한 낭만주의적 형태가 될 것이다. 이 두 대립성이 아방가르드적 사고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지극히 신적인 인간성을 갖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인간적으로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우저는 예술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강제와 독재 아래 창조된 것들이 허다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였다. 가장 극명한 인자들의 충돌이 문화와 예술을 창조적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우저는 이 책의 말미에 다수의 대중이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힘쓰기를 바라고 있다. 참된 예술이해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밖에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역사연구의 목적이 현재를 이해하는 데 있다면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검토하고자 하는 것들은 특히 이 목적과 밀착되어 있다.[13]

 

과거의 문학을 이해하자면 우리 쪽에서 특별한 입장을 견지하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러면서도 자칫하면 잘못 해석하거나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문학작품을 현대의 작품을 대할 때와는 다른 눈으로 읽는다. 오로지 심미적으로만, 간접적이고 이해상관이 없는 상태에서, 즉 그것이 허구이고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스스로를 접어넣는다는 것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읽는다.[14]

 

19세기 혹은 ‘19세기라는 말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시대는 1830년경에 시작한다. 19세기의 토대와 윤곽 즉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질서 , 그 여러 원리와 모순이 여전히 계속되는 경제체제, 그리고 대체로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이 형성된 것은 겨우 7월왕정 기간중이다.[14]

 

예술을 위한 예술은 그 최초의 위기를 겪게 되고, 그리하여 이제부터 예술지상주의는 고전주의의 이상주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르즈와적사회적예술의 공리주의에 대해서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5]

 

18세기 까지는 작가란 단지 자기 독자층의 대변인에 불과했다.하인과 관리들이 그들의 물질적 재산을 관리하듯이 작가들은 독자의 정신적 재산을 관리했다. 그들은 당대에 통용되던 일반적 도덕원리와 취미표준을 받아들이고 이를 확인했을 뿐 그런 것들은 새로 만들어내거나 개혁하지는 않았다.[17]

 

작가는 상이한 주관적 가능성들 가운데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알지 못했고 여러 다른 사회계층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도덕적 문제와도 무관했다.[17]

 

르네상쓰 이래 점차 드러나는 근대 자본주의 근본적 경향은 이제 어떤 전통에 의해서도 완화되지 않는 그 뚜렷하고 비타협적인 명료성 속에 나타난다. 가장 두르러지는 것은 비인격화의 경향, 즉 경제기업의 전 메터니즘에서 개인의 환경에 대해서 고려하는 모든 직접적,인간적 영향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은 자체의 이해와 목적을 추구하고 자체의 논리법칙에 따라가는 하나의 자율적 유기체가 되며,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폭군이 된다.[23]

 

1836년 라 프레스를 창간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획기적인 혁신은 그가 신문의 연간 구독료를 다른 것들의 반인 4프랑으로 고정시키고 결손분을 선전광고의 수입으로 메우려고 생각한 점에 있다.[26]

 

엄청난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인기작가들은 이제 규격화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주는 대리필자들을 고용한다.말하자면 문학공장이 설립되고 소설은 거의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27]

 

문학작품은 이제 문자 그대로 상품이 된 것이다. 가격표가 있고, 표본에 따라 생산되며, 정해진 날짜에 배달된다.[28]

 

극적 서스펜스의 대가인 알렉쌍드르 뒤마는 또한 연재소설 테크닉의 명수이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전개가 극적일수록 독자들에 대한 효과는 그만큼 더 강력해지기 때문이다.[29]

 

1843년 부르즈와지는 예술에서 감동이 아니라 즐거움을 기대하며, 문학자에게서 예언자가 아니라 위안물을 찾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만족과 안식이며, 비정치적인 순수한 예술을 보는 입장에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난다.[32]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한 수단을 대변한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이론의 결과이며 어느정도는 그 결산이기도 하다.[33]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는 사실 한편으로는 산업주의와 보조를 같이하여 진행된 분업화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기계화된 생활에 먹혀들어갈 위험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예술의 방파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술의 합리와, 탈미술화, 협소화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생활의 일반적인 기계화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독자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34]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학상의 가장 복잡한 문제를 이룬다. 미학적 입장에 내재하는 이원적 속성을 그처럼 날카롭게 나타내는 것은 없다.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따름인가? 이 질문은 자기가 처한 역사적,사회적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의 복합적 구조의 어떤 요소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34]

 

예술작품의 이미는 줄곧 이 두 관점 사이를 생활과 모든 작품외적 현실에서 단절된 하나의 존재라는 관점과, 생활과 사회와 실제에 의해서 제약된 하나의 기능이라는 관점 사이를 왕래한다.[34]

 

가장 위대한 작품이란 그 자체로서 완결된 미학적 세계의 기만적인 환간주의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멀리 손짓한다. 그것은 자기 시대의 커다란 인생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언제나 인간존재에서 어떻게 하나의 의미를 얻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의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35]

 

예술작품의 가장 불가사의한 역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또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그리고 역사적,사회학적 ㅈ[약을 받는 구체적인 감상자층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도대체 대중을 안중에 두려고 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는 데에 있다.[35]

 

소설의 역사는 중세이 기사들에 서사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근대소설과 별 관련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 누가적 구조, 모험과 에피소드가 중첩되어 얽히고 설키는 서술방법은 삐카레스끄 소설이나 르네쌍스와 바로끄의 영웅,목가 이야기에서뿐 아니라 19세기의 모험소설과 프로스투나 조이스의 삶과 체험의 흐름의 서술에서도 지속되는 한 전통의 기원을 이룬다.[37]

 

17세기 영웅소설 및 목가소설은 아직도 눈덩이가 굴러가며 커지듯이 에피소드가 중첩되는 중세기 모험소설의 부류에 속해 있었다.[38]

 

모험소설은 이제 제 2급 문학을 대변하게 되고, 대표적 예술의 경계에서 벗어나서 비 중요성과 무책임이라는 핸디캡을 감수한다.[38]

 

소설은 18세기 주도적 문학장르가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그 시대의 문화적 문제, 즉 개인주의와 사회 사이의 대립을 가장 포괄적으로 깊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형태에서도 부르즈와 사회의 모순이 그렇게 강력히 작용한 형식이나, 어디에서도 개인의 투쟁과 패배가 그렇게 박력있게 묘사된 곳은 없다.[40]

 

낭만주의는 소설에서 개인과 세계, 꿈과 생활, 시와 산문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의 가장 적합한 서술방법을 발견하고, 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처럼 보이는 체념의 가장 깊이있는 표현을 찾아냈다. 빌헬픔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는 낭만주의와 정반대되는 해결책을 찾는데, 이 작품은 18세기 소설사의 정점을 이루고 스땅달의 적과 흑, 발자끄의 잃어버린 환상,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켈러의 녹색 옷의 하인리히등 교양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으로서의 낭만주의적 현실도피가 완전히 헛된 것임을 지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교훈인 것이다.[40]

 

사람은 내면적으로 세계와 결합해 있을때에만 그 세계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는 세계 속에 뛰어듦으로써만 세계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을 괴테는 강조한다. 그는 결코 내적 정신과 외적 세계, 영적인 자아와 인습적 현실 사이의 부조화를 감추거나 얼버무리는 일이 없이 낭만주의적 세계모멸이 진정한 문제로부터의 회피하는 것을 인식하고 증명한다.[41]

 

스땅달과 발자끄는 괴테보다 팽배한 긴장을 휠씬 더 날카롭게 보았고 더욱 현실감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했다. 그들의 태도는 낭만파의 현실모멸과 괴테식의 낭만주의 비판을 모두 극복한 것이다. 사회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관해서 일체의 환상을 허락 치 않는 냉철한 현실사회 분석에서 그들의 비관주의가 생겨난다.[41]

 

스땅달과 발자크에 이르러 사회소설은 본격적인 근대소설의 면모를 갖춘다. 이제 인물을 사회에서 분리시켜 묘사하고 그를 일정한 사회환경 바깥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41]

 

스딸달, 발자크, 프로베르, 디킨즈, 똘스토이 및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같은 19세기의 위대한 문학적 창조들은 설령 어떤 다른 범주에 편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소설인 것이다.[42]

 

인물이 사회에 얼마나 뿌리박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인물의 리얼이키오 ㅏ신뢰도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며, 그의 존재가 사회적 문제성을 제기하는 데서 비로소 그 인물은 새로운 자연주의 소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회학적 인간 개념이야말로 1830년 세대의 작가들이 소설을 위해서 발견했던 것이며, 맑스 같은 사상가가 발자끄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이다. 스땅달과 발자끄는 두 사람 다 당대 사회의 엄격하고 때로는 악의적인 비평가이다.스땅달은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발자끄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42]

 

역사의 진보에 바치는 예술가의 봉사란,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확신하고 어디에 동조하느냐 하는 데 있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 현실의 문제와 모순을 얼마나 힘차게 제시하느냐에 있다는 사실을 이처럼 뚜렷이 부각시킨 것은 예술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42]

 

스땅달의 정치적 연대기

그는 자문한다-모든 사람이 속이고 위선을 하는 이와 같은 세상에서 성공에 이르는 방법이라면 무엇인들 옳지 않겠는가? 그 비결이란 요컨대 남에게 속지 않는 것이며, 다시 말하면 남보다 더 잘 속이고 꾸며대야 한다는 것이다.[44]

 

스땅달은 엄격한 합리주의자요 실증주의자이다. 모든 형이상학, 모든 단순한 사변, 독일적인 애매한 관념론은 그에게 생소할뿐더러 증오의 대상이기조차 하다.[51]

 

고전주의 시대에는 가장 완벽하고 명석하며 가장 완전하게 불쾌한 요소들을 제거한 작품의 작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로 여겨졌으나, 우리 현대인은 이와 달리 작가에게서 무엇보다 자극을, 즉 작가와 함께 꿈꾸고 함께 창작할 소재를 찾는다고 생뜨-뵈브는 지적한 바 있다.[56]

 

우리 현대인에게 가장 인기있는 작가란 많은 것을 다만 암시하는 데 그치고 입을 다물어, 독자가 스스로 짐작하고 설명하고 부충하도록 남겨두는 사람이다. 설명의 여지가 많고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불완전한 작품이 우리에게는 가장 매력적이고 의미심장하며 표현적이다.[56]

 

고전주의 시대에는 인물의 통일성과 단일성이 그의 신뢰성에 대한 평가기준이었는데, 이제 작중인물은 더 복잡하고 단편적일수록, 그리하여 독자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뭔가 더 보충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을수록 더욱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57]

 

자잘한 진실들을 나열하는 스땅달적 수법은 정신생활이 하찮고 일시적이며 본래적으로 불합리한 현상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성이란 변덕스럽고 정의될 수 없으며 본성을 바꾸고 통일성을 깨뜨리기 쉬운 무수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57]

 

발자끄는 뛰어난 문학적 초상화가로 지칭되어왔으며, 그의 예술의 위대한 효과는 그의 인물묘사력에 기인한다고 생각되어왔다.[59]

 

발자끄에게 한 인물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사회적 그룹의 대표자로서, 상반된 계급적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의 대변자로서야 비로소 흥미가 있고 중요성을 띤다. 발자끄 자신이 항상 마치 자연현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듯이 자기의 인물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59]

 

발자끄이 사회학

사회적 인과관계가 모든 작품의 지배원칙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인간극이 실제로 단 하나의 거대한 소설 즉 근대 프랑스 사회의 역사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60]

 

발자끄는 18새기 후반 이래 주제가 되어온 자전적 기록이라든가 단순한 심리묘사의 한계에서 서사문학을 해방시켰다.[60]

 

발자끄는 모든 자연스러운 생활감정이 자기 계급에 뿌리박고 있는 철두철미 부르지와적인 작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르즈와지의 가장 성공적인 변호자로서, 이 계급의 업적에 대한 감탄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63]

 

발자끄에 의하면 평등이란 한갓 망상으로서, 일찍이 세계 어디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 무엇보다 권위에 기반을 둔 가정이 그렇듯이 사회 전체가 지배의 원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자유와 평등을 믿을 뿐 아니라 대중과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절제하게 이상화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세상 모르는 몽상가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똑같으며, 누구나 자기의 편의를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63]

 

모든 권력은 자기보존을 추구하며 모든 피압박계급은 압제자의 파멸을 꾀한다.[63]

 

발자끄는 맑스보다 먼저, 그리고 맑스가 승복할 수 있는 형태로 사고의 이데올로기성을 발견했다. 그는 고기 낚는 여인에서 덕은 생활의 여유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며, 잃어버린 환상에서 보트랭은 사람은 바람직한 지위와 그에 어울리는 재산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정직 따위의 사치를 부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64]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물질계와 이해관계에서 일어나며, 다음에 관념으로 확대되고, 마지막으로 원칙이 된다.[64]

 

그 자신이 공상적 경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발자끄는 낭만주의의 사회적 신비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특히 농부들이 도덕적으로 순수하다느니 하는 데에 관해서도 그는 결코 헛된 환상을 갖지 않는다. 그는 귀족의 장단점을 판단하는 것과 똑 같은 객관성으로 일반대중의 선악을 판단한다. 대중에 대한 그의 관계는 부르즈와지에 대한 애증과 똑같이 비독단적이며 모순에 가득 차 있다.[66]

 

그가 진정으로 공감을 느끼는 것은 반항아와 허무주의자들이다. 그의 동 시대인들은 대부분 그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가 근본적으로 탈선자, 뜨내기 같은 사회의 적들에게 항상 동류의식을 느끼는일종의 아나키스트임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66]

 

발자끄의 현실묘사는 대부분의 자연주의자들보다 휠씬 더 자의적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실감을 주는 것은 주로 자신의 기분에 독자를 예속시키는 독단과, 경험적 실제 현실과의 경계을 처음부터 배제한 그의 소설세계의 소우주적 전체성을 통해서이다. 또한 그의 인물과 장면이 그렇게 진짜처럼 보이는 것은 서술된 개개의 모습들이 실제 경험에 대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마치 실제로 관찰되고  현실에서 본뜬 것같이 정밀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소우주의 개개 요소들이 불가분의 통일체로 결합해 있기 때문에 즉 인물과 환경, 성격과 신체적 조건, 신체와 주위의 사물들이 서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밀착된 현실 앞에 마주서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69]

 

예술작품이 하나의 완전한 전체라는 관념음 엄격히 말해서 언제나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72]

 

발자끄의 소설은 그야말로 모든 미학적 규범을 무시하고도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72]

 

자제라든가 모든 일을 우아하고 재치있게 넘기는 저 18새기 문화의 유산이 그에게는 이미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의 취미는 신문소설 독자층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 모든 것을 지나치게 꾸며대고 과장하며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것, 강조와 최상급 없이는 조금도 자기 심중에 있는 바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 항상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허풍을 치고 속임수를 부린다는 것, 남에게 학자나 철학가의 인상을 보이려고 하는 순간에 역겨운 사기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을 가장 적게 의식하면서 자기의 개인적 이해관계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논의할 때 그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73]

 

그의 악취미 중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그의 문체에서 드러난다. 종잡기 힘든 장광설, 과장된 비장조, 부자연스럽고 요란스러운 비유들, 항상 용솟음치는 열광과 짐짓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거짓 감동 등등[73]

 

모든 예술의 최고 목적, 즉 삐그말리온(그리스 신화의 인물, 자기가 만든 상에 반한 결과 여신이 그 조상에 생명을 부여했음)의 비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10년 이래 한 작품에, 한 여자의 그림에 몰두해왔다.[75]

 

예술적인 스타일로서의 자연주의와 철학적 입장으로서의 리얼리즘의 개념은 각기 명료한 것이지만 예술에서 자여주의와 리얼리즘의 구별은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며 아무 내용 없는 문제를 야기시킨다.[81]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주의적 예술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관념론과 전통주의의 정신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 및 합리주의적.기술중심적 사고방식의 승리에 따른 한 징후일 따름이다.[81]

 

자연주의는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을 거의 전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가져온다.[81]

 

자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의 운동에서 시작된다.[83]

 

인생을 아무 편견이나 거리낌 없이 그리는 모든 예술은 그것 자체로서 혁명적인 예술이라는 매우 정확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85]

 

새로운 예술의 사회적 성격은 화가들 자신이 좀더 긴밀히 뭉치고 예술가촌을 만들고 생활양식 면에서 서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경향에서도 드러난다. ‘퐁뗀느블로파는 사실 무슨 학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룹을 이룬 것도 아니며, 그 구성원들은 예술적 정열 외에는 다른 특별한 유대도 없이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산만한 집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새로운 시대의 집단적 정신을 나타내준다.[88]

 

19세기의 여러 공동적 개혁운동이나 아방가르드 집단들은 모두 이러한 연맹과 협동의 경향을 표현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와 함께 탄생한 시대의식, 이 순간의 도전과 중요성에 관한 의식이 이제 모든 예술가들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88]

 

살아있는 예술을 만든다는 꾸르베의 격언이나 도미에가 신조로 삼았다는 자기 시대에 속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 똑 같은 생각, 즉 낭만주의자들의 소외상태를 극복하고 예술가를 개인주의에서 건져내려는 욕망을 나타낸것이다. 석판인쇄가 하나의 예술로 등장한 것 역시 이러한 사회적 포주의 한 징후이다.[88]

 

그것은 문학에서 연재소설을 통해 이루어진 예술감상의 민주화와 일치하는 경향일 뿐 아니라 대중성과 저널리즘이 예술적으로 휠씬 높은 차원에서 거둔 승리를 의미한다.[88]

 

플로베르가 문학은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문학의 순수성뿐 아니라 감정의 순수성도 동시에 지키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99]

 

플로베르는 관념과 육신의 구별이나 예술을 위해 삶을 버리는 결단자체가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고,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비낭만적인 해결은 오직 삶 자체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99]

 

낭만주의적 분석은 그 시대의 모든 질병에 대한 진단으로 발전했고 현대인의 정신병, 그 병에 한번 걸리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항상 남의 처지에 서 있고 싶어하며, 한마디로 말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랬으면 하는 식으로 보는, 그 정신병의 정체를 밝히는 데 이른것이다.[106]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시간을 발견한 것이 낭만주의라면, 삶의 토대를 깍아먹고 인간을 텅 비게 하는 퇴폐적 시간은 낭만주의와의 투쟁에서 발견된 것이다. 플로베르의 말대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큰 재난이 아니라 작은 재난들이다라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 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는 인식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서글픈 사실이다.[107]

비극 형식의 근저에는 인간을 단 한번의 결정타로 파멸시키는 초시간적 운명의 개념이 있듯이, 소설 형식의 원리는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나온다.[107]

 

자연주의 대표자들은 과학을 예술의 심부름꾼으로 여겨왔으나, 졸라는 예술을 과학의 시녀로 본다. 플로베르 역시 예술이 과학의 발전단계에 이르렀다고 믿고, 현실을 가장 치밀한 관찰에 의해 묘사하려고 힘쓸 뿐만 아니라, 그 관찰자체의 과학적이고 특히 의학적인 성격을 강조했다.[110]

 

대부르지와지와 고도 자본주의가 판을 친 이 시기에 냉정하고 비낭만적인 것은 실상 자연주의가 아니라 부르즈와지의 이상주의적인 오락문학이다. 기분전환으로서의 예술은 이 시기의 발명인데, 그것은 모든 창작형태를 지배하지만 특히 가장 거침없고 과감한 대중예술인 연극에서 그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다.[113]

 

시민계급의 삶을 이상화하는 작업의 기초로서 결혼과 가족이란 제도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116]

 

대단원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다. 해답이 틀리다면 계산 전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뒤마2세는 말한다. 그로므로 애초부터 결론, 해결, 그 마지막에 맞추어 작품을 꾸며야 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즉 극작가는 한걸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동시에 두 걸음 물러서야 한다. 모든 착상, 모든 새로운 모티프, 모든 새로운 작품진행을 그는 이미 확정된 모티프와 진행과 비교하여 그것과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연극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앞뒤를 재고 살펴서 자꾸 정리를 거듭함을 뜻하며, 층층마다 바닥을 다지고 견고성을 시험하면서 단계적으로 건물을 지어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120]

 

에머슨이 즐겨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마지막 장면부터 거꾸로 읽고, 온전히 그 시적 내용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일부러 무대극으로서의 효과를 단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120]

 

뒤마2세는 도대체 예술이란 극적인 상황을 창안하고 갈등을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오히려 예술은 사건이 절정에 달하는 장면을 적당히 미리 준비하고 뒤얽힌 매듭을 매끈하게 푸는 데 있다는 것이다.[121]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식으로 잘 짜여진 작품의 골격을 아찔하리만큼 드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사다리로 볼 수도 있고, 혹은 진정한 예술이나 인간성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계적 절차의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121]

 

오늘날의 모든 연극작품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프랑스의 잘 만들어진 각본에 연원을 둔다. 갈등과 긴장을 만들어내는 기술, 매듭을 엮어서 풀기를 미루는 방식, 미리 사건의 전환을 준비하면서도 그것으로 관객에게 경악을 일으키는 기술, 극적 반전들을 적당한 곳에 알맞은 때에 배치하는 여러 규칙, 거창한 논쟁과 마지막 결말의 작위성, 막이 내리면서 최종 순간에 이르러 문제를 해결하는 갑작스러운 충격 이 모든 것을 그들은 스크리브와 뒤마2세와 오지에와 라비슈와 싸르두에게서 배웠던 것이다.[122]

 

2제정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여러모로 가장 의미심장한 예술적 창작은 오페레타이다.[122]

 

오페레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기이하게 느껴지는 점은 그 완전한 비현실성이요, 잇따라 지나가는 장면들의 가공적,환상적인 성격이다. 오페레타가 19세기에서 갖는 의미는 전원극이 18새기에서 가졌던 의미와 마찬가지다. 그 내용의 허구성, 갈등과 결말의 상투성은 현실과 전혀 관련되지 않는 순수한 유희형태인 것이다.[123]

 

오페레타는 철저한 자유방임의 세계, 즉 경제적,사회적 도덕적 자유주의의 세계, 누구나 체제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세계의 산물이었다.[124]

 

오페레타의 성장은 음악에 대한 저널리즘(시사성)의 침투를 뜻한다. 소설, 연극, 미술에 뒤이어 이제 음악이 일상의 사건에 논평을 하게 된 것이다.[126]

 

써커스와 버라이어티 쇼와 르뷔가 본격적인 연극을 밀어내리라는 공꾸르 예언은 옳았다. 그 회화적 성격과 화려하고 전시적인 면에서 이 세가지 쇼 형식과 동렬에 서는 영화를 여기에 덧붙인다면 공꾸르 형제의 예언은 완벽해지는 셈이다.[128]

 

벼락부자의 문화였던 7월왕정과 제2제정기의 부르즈와 문화는 연극에서도 거대하고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을 찾았으며, 스스로의 정신적 위대성이 결핍될수록 더욱 표면적이 위대성을 과장하였다.[129]

 

당대의 모든 중요한 대표자들 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양식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다. 그것은 다만 그가 자기 작품을 살아있는 예술전통과 연결시키고자 해서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성공이라는 데에 민감했기 때문이다.[130]

 

바그너는 마이어베어나 졸라와 마찬가지로 장대한 거소가 군중적인 것을 몹시 좋아하며, 위고와 뒤마 2세에 못지않게 타고난 연극장이요,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배우이고 모방광이다.[131]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가졌다. 둘 다 계몽주의의 성과로 나타났으며 논리적으로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134]

 

빅토리아 시대의 독서층은 이미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써클로 나누어졌으며, 디킨즈는 상류계급의 독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받지 못한 마구잡이 대중들의 작가로 통했다. [158]

 

영국 소설사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죠지 엘리어트의 작품과 함께 완수된다. 그녀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정신적 및 도덕적 본성에 관한 것이며, 거대한 운명적 투쟁의 무대는 인간의 영혼, 내면세계, 도덕의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심리소설인 것이다.[160]

 

죠지 엘리어트처럼 당대의 지적 생활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던 작가의 작품에서만 사색적 인간들의 운명, 그들이 지닌 문제와 모순, 그들의 비극과 패배가 소설 '마들마치'에 구현된 직접성과 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161]

 

러시아 소설의 놀라운 점은 그 연천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 소설의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아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생기있는 문학형식을 이룬다는 사실이다.[174]

 

근대 심리학은 영혼의 분열상을-어떤 구체적인 내적 갈등으로 선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부조화를-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안띠고네도 이미 의무와 감정 사이에서 흔들림을 맛보고, 꼬르네유의 주인공들은 거의 그 문제밖에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주인공의 우유부단을 희곡의 주제로까지 삼는다.[175]

 

심리관찰이 날카롭기로 말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연주의 소설의 가장 발달된 형태를 대표하지만, 정상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그리는 것이 자연주의라고 할 때 꿈처럼 과장된 상황과 환상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을 즐겨 쓰는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이 그의 문학적 위치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는 "나를 심리학자라고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밀이다. 나는 더욱 높은 차원의 리얼리스트 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심층을 속속들이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187]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인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두 경향을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양식의 변화가 점진적이었던 것은 그 시대의 경제적 발전이 연속적이었고 사회적 권력관계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에 부합되는 현상이다.[199]

 

현대의 기술은 유례없이 생활감정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거니와, 인상주의에 표현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동적인 감정인 것이다.[201]

 

19세기 후반에는 회화가 주도적 예술이 된다. 문학분야에서는 아직 자연주의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시기에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하나의 독립된 양식으로 발전한다.[207]

 

인상주의는 단지 그 시대의 모든 예술장르를 지배한 하나의 시대양식일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유럽적' 양식으로서도 최후의 것-취미의 전반적 합의에 근거를 둔 마자막 예술경향이다. 인상주의가 해체된 이래 여러 다른 예술장르들 또는 여러 다른 국가와 문화들을 양식상으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208]

 

문학의 역사는 회사의 역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인상주의는 원래 윤곽이 별로 뚜렷하지 않은 연상인데, 자연주의라는 복합적 현상 전체에서 인상주의의 발단을 식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후기의 발전형태는 상징주의의 여러 현상들과 완전히 뒤엉켜 있다.[215]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경쟁무대를 떠나 좀 멸시당하긴 해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맨 뒷줄의 의자'에 남아 있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토마스 만의 세계관 전체는 단 하나의 중심적 문제, 즉 부르즈와 세계에서의 예술가의 위치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가에게 있어서 이런 명확히 무해해 보이는 언급조차도 예술가의 생활방식에 대한 그의 판단과 결부되지 않았다면 이상할 것이다.[227]

 

1890년 이후 '데까당스'란 말은 암시적인 느낌을 잃어버리고 '상징주의'가 주도적 예술경향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모레아스는 이 말을 도입하여, 시에서 현실을 '관념'으로 대체시키려는 노력이라고 그 개념을 정의했다.[233]

 

상징주의는 시의 임무가 명확한 형태의 틀에 박을 수 없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235]

 

현실로부터의 시인의 이러한 소외와 고립에 표현된 귀족적 초연성은 표현의 고의적인 불명료성과 시적 사상의 의도적인 난해성에 의해서 더욱 강조된다.[238]

 

예술가의 언사나 사고방식뿐 아니라 옷차림이나 생활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특이성과 매너리즘은 예술의 멋을 모르고 공상을 모르며 거짓말 잘하고 위선적인 속물적 세계관에 대한 항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의 극단적인 댄디즘은 인상주의 스타일의 모든 매력적인 요소를 과시하는 그들의 현란한 말솜씨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항의의 일부를 이룬다.[242]
 
체험의 결실이 아니라 체험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다.이 황홀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성공을 의미한다
.[244]
 
프랑스 문학에 있어 강력한 직관주의적 흐름이 개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적 경향을 이루는 지성주의는 영국에서도 새로운 문학의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246]
 
사람들은 찰나적이고 거의 포착할 수 없는 느낌의 서정시, 불명확하고 정의할 수 없는 감각적 자극, 연한 색깔과 피로한 음성 등을 노래하는 서정시들을 이리저리 되씹는다. 애매하고 막연한 것, 우리의 감관으로 겨우 잡힐까말까 하는 것들이 시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247]
 
체호프의 희곡형식은 아마도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연극적이지 않은, 아마도극적인 고비라든가 돌발사건이나 긴장이 가장 미미한 역할을 하는 형식일 것이다. 그의 연극처럼 사건이 적고 극적인 갈등이 적은 연극은 없다. 등장인물들은 싸우지도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으며 누구에게 정복되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들 스스로 몰락하고 서서히 망해가며 아무 사건도 희망도 없는 삶의 일상성 속에 휩쓸려들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인생을 고스란히 내맡기는데, 이 운명은 파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환멸을 통해 완성된다
.[251]
 
인간이란 그때그때의 경우, 즉 유전, 환경, 교육, 천성, 장소, 계절, 우연 등 여려 영향의 소산으로서 인간의 행위는 어느 한가지 동기에서가 아니라 수많은 일련의 동기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253]
 
세기전환기에 있어 세계관의 기본 방향을 규정해주는 심리학은 '폭로의 심리학'이다. 니체와 프로이트(S. Freud)는 둘 다 인간의 정신생활의 표면,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동의 동기에 관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의 감정 및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은폐 혹은 왜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262]
 
정신의 자율성이란 하나의 허구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 때로는 우리 자신의 적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힘의 노예라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264]
 
지성의 목소리는 희미한 소리이다라고 그는 말한다.하지만 그것은 남이 귀를 기울여줄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리고 수없이 거듭 거절을 당한 끝에 결국 지성의 소리는 듣는 사람을 찾고야 만다
.[266]
 
진리가 어떤 절대의 팔에 매달려 있던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라고 니체는 말한다. 자기 목적으로서의 학문, ()전제의 진리, 이해를 초월한 미, 무아의 도덕 등은 니체 및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267]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 본연의 삶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그렇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시간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269]

 

현대예술은 모두 즐겁고 기분 좋은 것, 모든 순전히 장식적이고 쾌락적인 요소를 한사코 기피하는 것이다.[290]

 

다다이즘 그리고 그런 면에서 다다이즘과 완전히 일치하는 초현실주의는 표현의 직접성을 위한 투쟁이다. 즉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인 움직임인 것이다.[293]

 

프랑스의 비평가 장 뽈랑은 언어에 대한 관계를 기준으로 작가들을 뚜렷한 두 부류로 구별했다. 그는 낭만주의지,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 등 범속하고 인습적인 형식과 상투구를 언어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고 언어의 함정을 피하여 순수하고 신선하고 시원적인 영감에 호소하는 언어파괴자들을 '테러리스트'들이라 부른다.[293]

 

연극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영화와 닮은 장르이다. 특히 시간적 형식과 공간적 형식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부는 시간적일 따름이다. 대개는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나란히 병존할 뿐이지 영화에서처럼 양자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와 다른 예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즉 영화에서는 공간이 시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시간은 또 어느정도 공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302]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플롯의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 그것을 연속적 사건의 진행 도중에, 그러니까 연극적 현재에 직접 끌어넣는 것을 희곡의 수법은 허용하지 않는다. 아니, 최근에와서야 비로소 허용하게 되었는데, 아마 영화의 직접적인 영향 때문이거나 현대소설에서도 익히 보는 새로운 시간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304]

 

만성병으로 진행되어가고 있는 듯한 오늘날 영화의 정신적 위기는 무엇보다도 영화가 작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니, 작가들이 영화로 길을 찾아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타당한 말일 것이다.[310]

 

어떤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형식과 내용의 적절한 결합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예술이 젊은 동안에는 그 내용과 표현 형식 사이의 관계가 자연스럽고 단순하다. 즉 주제에서 형식으로 직통하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형식들은 소재에서 독립하게 되며 점점 공허해져서 특별한 교양을 쌓은 소수의 계층밖에 이해할 수 없게 된다.[315]

 

전 세계의 영화감독들은 국적과 세계관의 차이에 구애됨이 없이 러시아 영화의 기성 형식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술에서 어떤 내용이 어떤 형식을 이루는 순간 형식은 그것이 생겨난 세계관의 배경을 떠나서 채택될 수 있고 순전히 하나의 기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번 입증해주었다[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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