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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7일 23시 52분 등록

북리뷰 36 : 빅터 프랑클 - 안나 레드샌드

       책:<빅터 프랑클-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안나 S. 레드샌드. 황의방역. 두레. 2008.
             원제: <VIKTOR FRANKL : A Life worth living>  Anna S. Redsand.  2006

                                     



***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을 쓴 안나 레드샌드는 고등학교에서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청소년 상담교사로 오랫동안 일했다. 몇 년 전부터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데 로고테라피의 원리를 이용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첫 번째 저서이며 지금은 어른들을 위한 단편소설이나 시를 쓰고 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대학원에서 카운슬링을 공부하다가 빅터 프랑클과 그의 저작들을 알게 되었고 로고테라피에 대한 교재에서 역설적 의도와 같은 빅터 프랑클의 치료기술에 대한 설명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중고등학교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다. 마치 우리의 젊은이들이 6.25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를 다룬 사실적인 영화 <밤과 안개>를 보고난 후 홀로코스트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졌고 그때 접하게 된 책이 프랑클의 <인간의 의미 탐구>였다. 그리고 프랑클의 책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접했고 그를 그녀의 삶을 바꾼 영웅으로 아끼고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절망에 빠진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자주 프랑클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빅터의 이야기가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듯이 그의 내담자들에게도 영감을 불러 일으켜주기를 바랐다. 그런 동기로 그녀는 젊은이들을 위한 빅터 프랑클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세권의 책을 골랐다.

1. 인간의 의미 탐구
2. 회상
3. 삶이 우리에게 큰소리로 외칠 때 이다.

먼저 <인간의 의미 탐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요한 교과서로 읽혀오는 로고테라피에 관한 책이다. 그 기원과 철학적 배경과 역설적 의도와 몇가지 기술들과 사례들이 적혀있다. 이 책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이후 대체로 일찍 나온 아우슈비츠의 기록이었다. 이때의 체험을 프랑클은 단 9일 만에 회상해냈고 다른 사람이 받아적은 기록으로 출판을 하였다. 이후 이 책은 40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비교적 빠른 시간에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두 번째 책 <회상>은 대화체의 얇은 자서전으로 빅터 프랑클의 어릴 적 기억과 홀로코스트이후에 빈에서 다시 꾸려가는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빅터의 인간적인 면,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직업외적인 일들에 대한 빅터의 광범위한 관심을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 책은 1962-63년에 빅터 프랑클의 수업을 들은바 있는 미국의 해던 클링베르그 교수가 쓴 <삶이 우리에게 큰 소리로 외칠 때>이다. 이 책은 클링베르그 교수가 프랑클 부부를 7년에 걸쳐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녹음하고 철저한 자료조사를 한 끝에 써낸 프랑클의 전기이다.

이 세권의 책 이외에도 엘리와 빅터가 50년 동안 함께 살았던 마리아넨가의 집을 방문하여 저자가 직접 엘리 프랑클에게 전해 들었던 일화들도 있고 그때 둘러본 빅터 프랑클 문헌 전시실의 자료도 참고로 했다. 특히 유대의 관습과 가치관에 관한 자료는 따로 공부를 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 나가면서 그녀는 프랑클의 <인간의 의미 탐구>가 책을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며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는지 새삼 감탄을 하였고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며 이 책이 미국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놀라운 파동효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시선으로 빅터 프랑클을 소개하고 있다.  책 전편을 흐르는 인간적인 향기가 훈훈했다.



***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들

차례
감사하는 말

서문 : 사랑을 통한 구원
1. 공부 잘하는 장난꾸러기
2. 거인의 어깨 위에 서다
3. 히틀러가 권력을 잡다
4.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
5. 비극 속에서 의미를 찾다
6. 살아야 할 때
7. 세상의 반응
8. 마지막까지 “예”라고 말하다

지은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서문 사랑을 통한 구원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수감자들의 등에 휘몰아쳐, 수감자들이 걸치고 있는 올이 다 드러난 누더기를 뚫고 들어갔다. 그들을 가두고 있는 자들은 그 누더기를 옷이라고 했다.

수감자 번호 119104는 가끔 눈을 들어 지평선의 분홍빛 속으로 흐려져 가는 별들을 흘끗 보았다. 문득 옆에 있는 남자가 속삭였다.

“우리 아내들이 우리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우리 아내들의 수용소가 우리들보다 더 나았으면 좋겠어. 우리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잇는지도 모르길 바라고.”

10. 그 말을 듣는 순간 수감자번호 119104, 빅터 프랑클은 더 이상 사라져가는 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목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는 스페인의 무용수를 떠올리게 하는 아내 틸리의 이글거리는 검은 눈과 고수머리가 보였다. 틸리가 미소 짓는 모습, 격려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를 걱정하는 틸리의 시선이 그에게는 이제 막 하늘을 밝히기 시작한 태양보다 더 밝게 비추는 것 같았다.

빅터는 사랑이 사람의 가장 좋은 것들을 표현한다는 노래와 시 수천 편을 떠 올렸다.

그러자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강제 수용소의 막사에서 그와 다른 수감자들이 작업장으로 가는 진흙탕 길에서 빅터 프랑클은 생애 처음으로 사랑의 엄청난 힘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12.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하여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순간 그에게 사랑은 구원이었다. 1944년 10월과 1945년 3월 사이의 어느 땐가 카우페링 수용소에서 깨달았다.

15. 1945년 4월 27일 , 그가 거친 마지막 수용소인 튀르크하임에서 석방되고 몇 달 뒤 빅터는 나치 수용소에서 보낸 시절에 대한 책을 썼다. 그는 강제수용소의 경험을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살아야할 이유를 찾는 것이 수감자들이 살아남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했다. 독일어로 쓴 책 <인간의 의미탐구>는 전세계 27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어판만도 400만부 이상 팔렸다.

빅터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의 그 끔찍한 경험을 처음부터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치에게 끌려가기 몇 년 전에 그는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다. 1941년 미국대사관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비자를 찾아가라고 통보했다.

16.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나야 할까? 부모님과 작별하고 그분들이 운명에 따르도록 남겨두어야 하나?”

18.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모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 것이 그가 그 결정을 내릴 때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점에서 필생의 작업을 한층 더 깊이 있게 해주었다.

1. 공부 잘하는 장난꾸러기

20. 빅터의 부모는 모두 당시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난한 제책공이었던 가브리엘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뒤에 돈 때문에 의사대신 공무원이 되는 갈을 택했고 그래서 결국 사회봉사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가브리엘과 엘사는 신앙 때문에 서로에게 이끌렸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매우 달랐지만 신앙심으로 세자녀들에게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21. 셰마 이스라엘

“들어라, 오 이스라엘이여. 주님이신 우리의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너희는 모든 마음, 모든 영혼, 모든 힘을 다 바쳐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아버지가 외우는 기도문은 빅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기억을 빅터는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26. 프랑클 가족은 체코슬로바키아 포롤리츠를 자주 찾아갔다. 포틀리츠는 빅터의 아버지가 태어난 작은 도시였다. 그곳 농장에서 형과 함께 코미디<망나니 3인조>를 연출하며 놀았다.

28. 당시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제국의 두 인종은 독일인과 헝가리 인이었지만, 그밖에도 서로 다른 15개의 인종이 섞여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과 슬라브족(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의 주민)도 많았다.

34. 프로이트는 정신병 환자들이 아직 정신병원에 갇혀있고 정신과 의사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더욱 악화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정신분석을 개발했다. 당시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정신분석의 주된 기술은 환자들이 무엇이든 생각나는 것을 말하도록 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환자들의 말을 듣고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은 대부분 무의식적인 성적 욕구와 욕망에 의해 유발된다고 믿게 되었다.

36. 1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무렵, 빈에 산다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현대의 탄생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도시에서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많은 사람들이 미술, 음악, 건축, 경제학, 의학, 물리학, 문학, 심리학, 철학의 새로운 이론들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38. 빅터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까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생리학 또는 의학” 부문의 노벨상 후보로 두 번이니 지명되었다. 빅터는 이미 프로이트의 저서를 많이 읽은 뒤라 프로이트의 명성에 주눅 들지 않고 이 정신분석학자에게 편지와, 또 자기 생각에 그가 흥미를 느낄 곳 같은 논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프로이트는 빅터에게 답례로 엽서를 보냈다.

39. 빅터가 열일곱 살 때 학교 숙제로 쓴 논문이 그가 열아홉 살 때인 1924년에 <정신분석 국제 저널>에 발표되었다.

2. 거인의 어깨 위에 서다.

47. ‘우리 생애의 중요한 고비에 다른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한 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의과대학 동료의 말을 듣고 정신과를 지원하다.

48. 고전적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환자는 흔히 일주일에 몇 시간을 정신분석학자와 보냈다. “몇 년 동안 긴 의자에 누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49. 알프레드 아들러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게 된 안과의사로 초기 프로이트의 추종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1년에 프로이트와 갈라섰다. 사회적 요인이 무의식적 충동보다 인격 형성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50. 아들러는 정신과 의사들이 할 일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그들의 열등감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믿었다.

51. 프로이트의 잡지에 첫 논문이 발표되고 1년 뒤에 빅터는 정신분석을 버리고 사회심리학(개인 심리학이라고도 알려졌다)을 택했다.

52. 프로이트나 아들러나 모두 인간의 행동을 정서적 건강보다는 정서적 문제라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꼭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빅터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개인 심리학 국제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해 달라고 초대받는 영예를 얻었다. 그 연설에서 빅터는 모든 인간의 행동이 병에 의해 유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우울증이 병처럼 보이지만 이 경우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그의 진정한 자아, 또는 자신을 더욱 충분히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빅터는 주장했다.

53. 그 기조연설을 하고 1년 뒤 빅터는 개인심리학협회에서 쫓겨났다.

54. 거인의 어깨위에 서면 난쟁이라도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는 그들의 어깨위에 올라서서 정신치료 분야를 언뜻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빅터가 거기서 더욱 나아가서 자신만의 치료원리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56. 어렸을 적부터 빅터는 삶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에 매료되었으며 그가 아직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이미 로고테라피의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logotherapy란 말은 그리스어인 logos(의미)와 therapeia(치료)가 합쳐진 말이다.

로고 테라피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에 내재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는 힘이다.”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빅터는 이미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켜놓고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행동이나 창조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경험, 인간과의 만남, 즉 사랑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방법은 ‘고난을 통해서 의미를 찾는 것’ 인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또는 운명적인 상황에 반응할 때 나타날 수 있다. 빅터는 이것을 “고난을 인간 승리로 바꾸는 능력” 이라고 했다.

58. 빅터 프랑클의 로고테라피는 뒤에 심리치료사들 사이에 ‘인간 잠재력 운동’이라고 알려진 것의 시작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모두 사람들의 결점이 그들의 행동의 유인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로고테라피는 인간이 현실에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인간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61. 빅터는 6년 동안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뒤 1930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몇몇 병원과 진료소를 전전하며 신경과와 정신과 인턴 및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그가 레지던트 마지막 과정을 마친 병원은 유명한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매우 현대적인 슈타인호프 정신병원이었다.

64. 그는 비합리적이고 망상적인 두려움을 대하는 다소 우스우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접근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이 접근법을 역설적 의도 paradoxical intention 라는 이름을 붙였다.

3. 히틀러가 권력을 잡다.

78.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반유대주의법이 제정되었다. 빈의 유대인들은 공공연히 모욕을 당했다.

80. 1938년 10월 6일, 빈의 유대교회 세 군데가 화재로 파괴되었다. 11월 9일과 10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반유대 파괴행위가 극성을 부렸다. 빈의 유대교회와 유대인 기도소 100개 이상이 파괴되었다. 폭도들은 창문을 부수고, 사업체와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이틀 밤을 “수정의 밤”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깨진 유리조각들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마치 수정조각들 같았기 때문이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한 뒤, 유대인 어린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유대인 전문 직업인들-교사, 의사, 변호사-은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모든 유대인들은 뾰죽한 끝이 6개인 노란색 별을 옷에 꿰매 붙여야했다. 그것이 유대인이라는 표시였다. 유대인들은 공공 교통기관을 사용할 수 없었다. 유대인 남자들은 공식문서에 기재하는 이름에 이스라엘을 추가해야 했고, 여자들은 사라를 추가해야 했다.

빅터는 어렵사리 얻은 의사자격을 상실했다. 그의 사무실과 특별히 맞춘 책상이 있던 누이의 아파트는 어느 “아리안 족” 가정에 제공되었다. 그는 병원을 부모님 집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고, 그 집에는 “의사 빅터 에밀 이스라엘 프랑클, 유대인 신경병 및 정신병 치료자”라고 쓰인 푸른 간판을 달아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유대인 환자들만 치료할 수 있었고, 의사 취급도 받지 못했다.

82. 오스트리아를 쉽사리 합병한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처음으로 설명한 바 있는 레벤스라움 Lebensraum (삶의 공간) 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게르만 민족은 더 넓은 삶의 공간이 필요하고, 게르만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독일의 다음번 영토 병탄의 구실이 되었다.

86. 하인리히 히믈러가 그의 휘하에 있던 친위대 SS 를 이용해서 최종 해결방안을 창안했다. 280명의 엘리트 경호대로 출발한 친위대는 점점 그 수가 늘어나서 25만명 이상되는 보조정부 같은 기관이 되었다. 친위대는 강제 수용소를 만들고 운영한 기관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또한 경찰, 군부, 농공단지, 연구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88. 결국 홀로코스트 Holocaust 라고 불리게 되는 이 엄청난 살육으로 600만 명의 유대인-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3분의 2-과 유대인이 아닌 500만 명이 살해되었다.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전체를 뜻하는 그리스 어 올로스 olos와 태웠다 burnt를 뜻하는 그리스어 카우스토스 kaustos 로 이루어진 말이다. 원래는 불로 태운 제물을 뜻하는 말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작가들이 자연이나 다른 인간들에 의한 대규모 인명 살상을 홀로코스트라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대문자 H를 쓴 홀로코스트는 나치스가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을 살육한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89. 빅터 프랑클은 1940년에, 이제 의사 대접을 받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유대인 병원 가운데 하나인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 되었다.

95. “당신 친구에게 걱정이 일어나면 일부러 산책을 나가서 발작을 일으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그는 지금 당신이 그러는 것처럼 미소를 짓기 시작할 겁니다. 걱정을 피하려고 애쓰는 대신, 걱정과 자기자신 사이에 거리를 둠으로써 그는 걱정을 극복하게 될 겁니다.”

100. 서른 다섯 살 때 빅터는 세 번째 여자 틸리 그로서를 만났다. 그 여자는 로스차일드 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는 그녀의 직관과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사랑했다.

4.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

104. 1942년 9월 하순의 어느날, 그들은 가방과 모자상자, 보따리 등 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된 10킬로그램의 짐을 들고 있었다.

105. 나치는 슈페를 김니지움을 수감자들을 조사하는 센터로 바꾸어 놓았다. 빅터는 어느 방으로 끌려가서 머리를 빡빡 깎였다.

9월24일 , 프랑클 가족과 다른 유대인들 1300명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려 아스팡 역으로 갔다.

106. 그들이 실려간 곳은 체코슬로바키아 북부에 잇는 작은 도시 바우쇼비츠였다. 그들은 짐을 들고 한 시간을 걸어서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도착했다.

109. 테레지엔슈타트에 감금된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 지도자, 의사, 변호사, 화가, 음악가 등 유명인사들도 많았다.

112. 테레지엔슈타트에서 6개월을 보내고 가브리엘은 여든 한 살의 나이에 굶주림과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빅터는 마음이 편안했다. 빈에 살 때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을 뿐 아니라 돌아가시기 몇시간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4. 이송되는 날 새벽이 밝아오자, 빅터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그는 이렇게 부탁했다. “어머니 저를 축복해 주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래, 그래! 너를 축복하마!” 뒤에 빅터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어머니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던 그 외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15. 서로 떨어지기 전에 빅터는 틸리에게 작별의 말을 했다. “여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아야 하오. 내 말 들려요? 어딴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말은 경비병들에게 몸을 허락해야만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경우에 그녀의 목숨이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틸 리가 알았다는 몸짓을 했다.

116. 빅터가 앞으로 나가자 장갑 낀 그 사람은 왼쪽을 가리켰다. 왼쪽 줄에 선 사람 중에는 빅터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장교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오른쪽으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빅터가 엉겹 결에 내린 결정이나 우연히 작은 사건에 의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여러 차례의 일 가운데 첫 번째에 불과했다.

119. 자기자식처럼 아끼던 원고를 잃은 빅터는 얇고 헤진 외투 하나를 무더기에서 골라 입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구겨진 종잇조각이 잡혔다. 그것을 꺼내서 무엇인가 보았다. 유대의 기도서에서 찢어낸 한페이지였다. 그 종이에는 ‘셰마 이스라엘’ 이라는 기도문이 인쇄되어 있었다.

빅터는 뒤에 그의 “새”코트에서 이기도문을 발견했다는 것은 “내가 썼던대로 ‘살고’ 내가 가르쳤던 대로 실천하라는 하느님이 내게 내린 계시”였다고 썼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그 종이조각을 간직했다.

123. “인간의 고통의 크기는 분명히 상대적이다. 매우 하잘 것 없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을 일으킬 수 있다.”

126. 시간이 지나면서 빅터는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 이 끔찍한 경험을 개인의 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고 결론 지었다.

삶의 의미와 목표는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가장 어려운 시련에 처했을 때도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은 희망과 기대이다.

129.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는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136. 1945년 4월 27일, 텍사스에서 온 미군부대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진주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수용소에 있던 빅터와 다른 수감자들은 마침내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쯤 그들은 너무나 감정이 메말라서 처음에는 새로 얻은 자유를 기뻐할 수조차 없었다. 우리는 꽃들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의 몸무게는 37.5 킬로그램이나 되었다.

138. 빅터 프랑클은 2년 반 이상의 세월을 수용소 한군데가 아니라 무려 네 군데를 전전하면서 견디며 살아남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

5. 비극 속에서 의미를 찾다.

139. 빅터는 아내 틸리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과 형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빈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이 폐쇄되어 있었다.

142. 그해 8월에 빈에 도착한 빅터는 그 도시를 자기의 고향으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145. 틸 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빅터는 지하실의 방 몇 개를 세내고 그곳에서 몇주일을 머물렀다. 지하실의 방에 혼자 앉아서 빅터는 자기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자기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찾아간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너무나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으므로 친구들은 그가 자실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것, 그가 그렇게 혹독하게 시험을 당한다는 것은...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분명히 있을 거야. 나는 내가 어떤일을 할 운명이라는 느낌이 들어.”

146.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이 끔찍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깊은 실망과 비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수용소에 있을 때, 빅터는 그에게 희망을 주는 미래에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그의 첫 번째 희망은 가족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새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희망은 그의 일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그가 수용소에서 알게 된 것을 그 작업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살아야 할 이유의 절반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147. 그는 여전히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최소한 책이 완성될 때까지 죽음을 미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 가장 보람있는 순간은 완성된 원고를 나의 첫 출판사에 전해주던 순간이었던 듯하다.”

148. 불과 9일 동안에 그는 자기의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며 쓴 원고 전량을 불러 주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쓰게 했다. 이 책의 초판 겉표지에는 그의 이름이 실리지 않고 속표지에만 이름이 들어간 채 출판되었다. 이 책의 독일어 제목은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기>였고, 영어판 제목은 <인간의 의미탐구>였다.

149. 이 책은 그의 31권에 이르는 다른 저서들 가운데 그 어느 책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미국 전역의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실에서 읽혔고, 1984년까지 5개 미국 대학에서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1991년에는 미국 의회도서관과 Book of Month Club이 공동사업으로 <인간의 의미 탐구>를 미국에서 나온 10권의 가장 영향력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로 뽑았다.

158.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싸움에서 영혼이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였다.”

160. “자기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아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누구를 심판해서는 안된다.”

162. 빅터는 너무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 빵 한덩어리가 고마워서라기 보다는 “그 사람이 빵과 함께 준 인간적인 ‘그 무엇’, 즉 그 선물을 주면서 그가 한 말과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 너무나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163. <인간의 의미 탐구>에서 빅터가 분명하고 강력하게 반복해서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 즉 고결한 사람이 되느냐, 인간의 존엄을 잃고 동물들과 같이 되느냐하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시련과 죽음도 인간에게 남은 단 한가지의 마지막 자유, 즉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정신의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빅터는 체험했다.

선택에 따라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시킬 기회로 만들기도 한다고 빅터는 말했다.

6. 살아야 할 때

168. 1946년 2월 빅터는 마리아넨가세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병원인 빈 폴리클리닉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다.

170. 빅터는 자신이 집필한 책 두 권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면서 뿌듯한 보람을 맛보았고, 또 자기가 하는 일도 만족스럽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우울했고, 그래서 병원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평을 얻었다. 우울증과는 별도로 빅터는 자기에게 분명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언성을 높여 날카로운 어조로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174. 빅터는 처음 엘리의 검은 눈을 들여다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엘리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엘 리가 빅터에게 끌린 것은 그가 끔찍한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도 “쓰라림과 복수심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빅터는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던 반면, 엘리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176. 1947년 7월 16일 빅터는 틸리의 사망 통보를 받앗고 그해 7월 18일 엘리 슈빈트와 빅터 프랑클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이 끝난지 2년이 넘었지만 빅터와 엘리는 아직도 매우 가난했다.

177. 엘리와 결혼하고 가비(가브리엘라)가 태어나자 이제 마흔 두 살이 된 빅터 프랑클은 새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난하다는 사실이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184. 가비는 자라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녀에게는 유명한 아버지와 다소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했다. 1969년 가비는 당시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고있던 프란츠 비슬리와 결혼했다. 가비와 프란츠는 카타리나와 알렉산더 두 자녀를 두었다.

187. 빅터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 그런 관심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188. 빅터는 사람들의 서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7. 세상의 반응

192. 프랑클 박사의 환자들은 가끔 박사의 요구가 불편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박사는 변화를 요구했고 변화하자면 힘든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 <인간의 의미 탐구>가 더욱 널리 영향력을 갖게되자, 빅터는 세계각지로부터 와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199. 빅터는 등산을 하면서 얻은 생각을 그의 강연에 삽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에순 일곱 살 때 첫 비행 레슨을 받았다. 조종사 자격을 딴 뒤, 그는 비행의 경험을 자기 이야기에 포함시키곤 했다.

200. 더욱 높은 곳을 지향할 때,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능력 범위안의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우리 능력 이하의 경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이 학자는 가끔 로고테라피를 “높이의 심리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이것을 사람들의 무의식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깊이의 심리학과 비교하곤 했다.

깊이의 심리학과는 달리 높이의 심리학은 사람들에게 자신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 가장 높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의 이상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집단적 죄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빅터의 주장에 몹시 분개했다.

205. 빅터는 <인간의 의미탐구>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다. “많은 운좋은 우연 또는 기적-두가지 중 어느 것으로 불러도 좋다-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208. 빅터는 <의사와 영혼>을 출판한 뒤 빈 대학의 강사가 되었지만 영영 정식 교수로 승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하버드, 예일, UCLA 등 세계 각지의 대학들로부터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빅터가 그의 고향에서보다 빈 밖의 세계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듯 보이는 이유는 분명치않다. 학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그가 대학에서 승진을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자로서 그는 “역설적으로 독단적아고 개방적이며 불쾌하고 상냥하며” 권위주의적이고 관대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210. 현재 31개국에 로고테라피 훈련 및 치료 연구소와 전문 도서관이 있다. 로고테라피는 특히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잘 받아들여졌다. 그곳에는 10개국에 모두 27개소의 로고테라피 연구소가 있다.

빅터 프랑클과 로고테라피에 관한 새로운 논문과 책, 영화가 계속해서 출판 제작되고 있다. 2003년 이후로 17개국에서 51종의 서적이 출판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빅터 자신의 저서를 재인쇄한 것이다. 다른 책은 그의 발자취를 쫓는 학자들의 저서이다.

8. 마지막까지 “예”라고 말하다.

213.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빅터 프랑클은 빈의 한 유대교 교회당에서 유대인 성인식인 바르 미츠바를 올렸다. 여든세 살 때, 그는 예루살렘 서쪽 벽에서 두 번째 바르 미츠바를 기념하기로 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열세 살 때 성인식을 치르고 나서 70년을 더 산 뒤 유대의 법과 생활에 헌신하기로 다시한번 다짐하는 식을 올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탈리스를 걸치고 아버지가 쓰던 성구함을 든 빅터가 랍비가 읽는 성구를 듣고 따라서 외웠다. 랍비가 성구를 계속 읽어 나가는 동안, 빅터는 혼자서 자꾸 이렇게 말했다. “참 아름답구나. 참 아름답구나.”

215. 어느 날 저녁 빅터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엘리가 거실로 달려가자 빅터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다. “엘리, 나 장님이 됐어.” 그 뒤 7년동안, 빅터는 한쪽 눈으로 희미한 모양만을 볼 수 있었고, 다른 쪽 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는 계속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217. 1993년, 시카고에 있는 노스파크 대학에서 빅터와 엘리 두 사람 모두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어떤 기관이 엘리의 공로를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래서 빅터는 자신에 대한 학위는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엘 리가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고있는 동안, 빅터는 프로그램에 들어있지 않은 일을 했다. 그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무대 뒤에서 엘리를 향해 걸어나갔던 것이다. 그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엘리가 울기 시작했다. 엘리에게 다가간 빅터는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키스로 눈물을 닦아 냈다.

빈 태생의 미국 로고테라피 치료사 조지프 패브리가 그의 아내 주디스와 함께 빅터의 자서전 <회상>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또 미국 최초의 로고테라피 연구소도 창설했다.

220. “나는 모든 중요한 결정을 거의 예외 없이 산에서 했다.”

예언자의 다른 이름은 '보는 사람 seer' 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과업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본 것에 대하여 세상에 경고하는 것이다.

빅터 프랑클은 자기 일생의 상당한 부분을 “의미 없는 삶, 공허하거나 좌절된 삶의 끔찍함을 경고하는데”썼다.
“박사님의 삶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군요.”

221. 1996년 10월 빅터가 자기 서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가 전화를 끊은 뒤, 엘리는 그의 방에서 비명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방금 그의 여동생 슈텔라가 오스트렐일리아에서 사망했다고 알리는 전화였다. 그날 저녁 빅터는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그는 아흔 두 살에 심장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빅터는 수술을 받은 뒤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1997년 9월 22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222. “그는 태어날 때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아주 소박하게 묻히고 싶어했다.” 빅터의 묘는 그의 외할머니가 묻힌 묘비아래에 있다. 그의 부모 엘사와 가브리엘, 그의 형 발테르와 형수 엘제의 이름이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그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묘비에 추가되었다. 그 밑에 “빅터 에밀 프랑클, 1905년 3월 26일~1997년 9월 2일”이라는 그의 묘비명이 새겨져있다.

223. 빅터가 세상을 떠난 뒤, 엘리는 그가 죽기 전에 숨겨놓았다고 말한 그 책을 찾으려고 아파트안을 뒤졌다. 책을 발견했다. <호모 파티엔스,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이라는 책이었다. 빅터가 글씨를 남겼다.

“고통에 시달리는 한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바꿔놓는데 성공한 엘리에게    
빅터가.”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이 책은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이다. 이미 31권의 책을 냈고 “로고테라피 ”라는 생의 의미를 주제로 한 치료법은 너무나 유명해서 빅터 프랑클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유슈비츠에서 살아온 의사로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전설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빅터 프랑클을 개인적인 일화들을 따라가며 우리에게 전해주는 작가의 시선이 우선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오직 치료와 인간적인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쉬운 문장으로 쉽게 써내려간 글이다.

간간이 삽입된 사진들도 작가의 표현에 감각적 이해를 돕고 있다. 적당한 자리에 놓여있는 빛바랜 사진들이 가슴 아프다. 부모님과 작별하는 장면과 생존여부를 알지 못한 채 오래 기다린 첫 번째 아내 틸리에 대한 사랑이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쉽게 씌여진 글은 소통하기에 우선 좋고 책장을 덮고도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흘러가는 옛날 이야기처럼 다른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겠다. 대학생일 때부터 책으로 읽어 알았던 빅터 프랑클을 살과 뼈를 갖추고 있는 피가 통하는 사람으로 다시 보여준 작가가 고맙다. 상담 장면에서 함께 일하던 나의 동료 중의 한사람은 하버드대학에서 직접 그의 워크샵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매우 열정적이고 신념에 차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책 속에서도 그의 성격이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그의 전성기가 눈에 선하다.

이 책이 내 책의 서문을 쓰기위해서 골라온 몇 권의 책 중 하나이기에 가볍게 북리뷰를 해두려고 따로 넘버링을 하다가 좋은 모델이 될 것 같아서 책의 구성을 살피며 다시 세심하게 읽어보았다.

이 책의 서문은 “사랑을 통한 구원”이란 제목으로 시작한다.

빅터 프랑클이 수감자 번호 119104가 되어 얼음같이 차거운 바람이 부는 진흙탕 길 빙판 위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걷고 있었다. 그때 수감자들은 행진하면서 몸서리를 쳤고, 돌에 걸려 비틀거렸으며, 막 얼고 있는 웅덩이의 흙탕물을 튀겼다. 희망도 태양도 자취를 감추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그는 아내 틸리의 검은 눈동자를 생각했고 사랑이 사람의 가장 좋은 것을 표현한다는 노래와 시 수천 편을 떠 올렸다. 그가 삶의 의미와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 불운한 노예적 삶의 시작에 수천편의 노래와 시를 떠올리고 생애 처음 사랑의 힘을 온 가슴으로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었다. 인간성의 승리이다. 어떻게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그의 삶에 대한 의미와 사랑이 찾아왔는지... 신 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메시지다.  진정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첫 페이지와 둘째 페이지에 쓰인 이 글 만으로도 빅터 프랑클의 이야기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에피소드는 그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아내가 기품있게 다른 수감자들을 진정시키던 일을 기억했고 또 나치스가 갖지 못하도록 그녀가 금시계를 부숴 버린 일, 그리고 두사람이 자신들의 결혼 기념 금팔찌를 내던져버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빅터에게는 아내가 살아있든 죽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물리적으로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하여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그에게 사랑은 구원이었다.

그 다음의 에피소드들은 로고테라피에 괸한 치료 원리와 히틀러가 득세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남았던 프랑클의 선택의 기로에 대한 요약이다.
 
특히 재미있는 장면은 그가 프로이트와 알프렛 아들러에게 접속했을 때였다. 잘 나가는 열정이 넘치는 비엔나 의대생 시절에 독자적으로 공부를 해서 쓴 논문을 프로이트에게 보내고 결국 전문적인 국제 저널에 그의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병을 치료한다는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병이 아니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우다가 그런 생각의 차이가  비판으로 받아들여져서 배척을 당하기도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귀환한 후의 기록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학생시절부터 로고테라피를 개척해왔다는 것은 치료자로서의 그의 기본 입장을 알 수 있다. 결국 네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그는 삶의 의미를 전제로 한 로고테라피의 긍정적인 사례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물론 실패의 사례도 함께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그런 실패의 사례들이 그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 같았다.
 
이 책의 서문은 전편을 흐르는 사랑의 의미를 에피소드와 함께 잘 설명해두어서 독자에게 깊이 각인을 시키고 있다. 그 다음 책의 각 장을 요약하는 내용들이 불필요한 설명없이 씌여졌다. 그리고 다시 비엔나 시절로 되돌아가서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운명적으로 엮어졌는가를 설명해두고 있다. 서문만 읽어도 이미 빅터 프랑클의 모습이 윤곽 지어져 있고 우리를 주욱 이끌어 갈 이 책의 분위기가 자유롭게 연상이 된다. 지식 정보의 나열로 촛점을 흐리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지금 나의 수준에 맞는 서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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