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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1일 13시 27분 등록

  

2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들

<저자의 말>

u       우파니샤드는 1~2년 동안에 쓰인 것도 아니고 한 두 사람에 의해 쓰인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고대 인도에서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성자들이 유사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집적한 결과가 우파니샤드이다 (6).

 

<이 책을 읽기 전에>

u       일찍이 독일 철학자인 쇼펜하우어 (1788~1860)는 우파니샤드를 읽고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고 극찬하면서 평생 동안 계속해서 애독했다고 한다 (11).

u       우파니샤드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자아에 대한 탐구로 그득하며, 인간 정신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역에 대해 설파한다. 우파니샤드는 정신의 보편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고전인 것이다 (12).

u       우파니샤드는 붓다 이전에 성립된 것부터 16세기에 성립된 것까지 인도의 전 역사에 걸쳐 산출되어 왔다. 이러한 우파니샤드는 크게 베단따 사상과 관련된 것, 요가 사상과 관련된 것, 비싀누 교파 사상과 관련된 것, 쉬와 교파 사상과 관련된 것, 출가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우파니샤드라고 부르는 것은 베단따 사상과 관련된 우파니샤드를 말하는데, 이를 고전 우파니샤드라고 이른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요가 우파니샤드들은 기원후 14~5세기경에 쓰인 것으로서 고전 우파니샤드와 시기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상당히 거리가 멀다 (13).

u       고전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700년경부터 기원전 200년경까지 성립된 것으로 10여 종이 있다. 이 고전 우파니샤드는 다른 이름으로 베단따라고 불린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베다의 끝부분을 이루는 것이 베단따이고, 이 베단따가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14).

u       오늘날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거의 독립적인 문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문헌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14).

u       넓은 의미의 베다 문헌들 가운데 브라흐마나와 우파니샤드는 인도 정통 사상의 두 중심축을 형성한다. 브라흐마나 문헌은 행위를 다루고, 우파니샤드 문헌은 지식을 다룬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자는 제의, 의례, 규범, 윤리를 다루고, 후자는 지혜, 해탈을 다룬다. 전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파가 미맘사이고, 후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학파가 베단따이다. 이 두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행위 중심적인 브라흐마나- 미맘사전통은 인도인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지식 중심적인 우파니샤드- 베단따전통은 인도인에게 탈속적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이처럼 지식 중심주의 전통을 최초로 확립한 우파니샤드는 인도인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14).

u       우파니샤드- 베단따전통은 인도 사상의 적통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출발하여 베단따 학파에서 완성된 어떤 가르침이 인도 사상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전통을 형성했다는 말이다 (15).

u       우파니샤드에서 다뤄지는 철학적 주제는 베단따 학파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쉽게 말해서 베단따 학파의 임무는 우파니샤드를 해석하거나 또는 재해석하는 것이다 (15).

u       베단따 학파의 경전은 기원후 5세기경에 완결된 <브라흐마 수뜨라>이다. 이 경전은 우파니샤드를 요약한 것이다. … 베단따 학파가 여러 하위 학파들로 나뉘는 까닭은, 바로 이 <브라흐마 수뜨라>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전을 비이원적 관점, 즉 현상이 허구이고 실재만이 일원적으로 존재한다는 관점으로 해석한 하위 학파가 비이원적 베단따이다 (15).

u       이 학파가 우파니샤드이 전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우파니샤드- 베단따전통이라고 함은 우파니샤드- 비이원적 베단따전통을 가리킨다 (15).

u       우파니샤드는 다른 어떤 문헌에도 의존함이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권위를 가진다 (16).

u       거꾸로 선 나무라는 상징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작은 시도이다 (17).

u       이 경우에 두 가지 전제가 숨어 있다. 그 중 하나는 10여 종의 고전 우파니샤드들을 꿰뚫고 있는 일관적인 사상이 있다는 점이다. … 또 하나의 전제는, ‘우파니샤드 베단따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꾸준하게 계승된다는 점이다 (18).

u       , 지금 여기, 우파니샤드인가? (18)

n        첫째로, 우파니샤드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원초적 물음이 소중ㅎ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n        둘째로, 우파니샤드는 외면으로부터 내면의 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 내면적인 것들이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살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는 끝없이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기를 권유한다. 외면적인 것들이 만들어내는 힘은 무상할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내면의 무한한 힘을 찾기 위한 사려 깊은 길을 안내한다. 자신의 외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외부의 구원자인 신도 위대한 영웅도 훌륭한 이념도,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앎이 없이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19).

n        셋째로, 우파니샤드는 아주 단순 명쾌한 지혜를 통해서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단언한다. … 우파니샤드에서는 지식이 많을수록 자유로부터 그만큼 멀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를 얻는 데는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지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역설한다.

n        넷째로, 우파니샤드는 운명적인 것들에 저항하는 운명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운명적인 것들이란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모든 부정적 조건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조건들에 저항하기를 운명적으로 마음먹는다면, 바로 그 저항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저항하는 정신에 대해 자기 운명애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자유에 가깝게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20).

 

<1. 거꾸로 선 나무를 만나다>

거꾸로 선 우주나무로부터:

u       이 우주나무는 영원한 보리수이다. 보리수는 인도에서 가장 신성한 나무이다. … 그런데 현실의 무수한 보리수들로부터 단 한 그루인 이 보리수는 차별화된다. 현실의 보리수들이 똑바로 선 나무라면, 이 보리수는 거꾸로 선 나무이기 때문이다. … 거꾸로 서 있음으로써, 이 보리수는 영원한 우주나무이다. 이는 압도적인 상상이다 (24).

u       나무의 위아래를 전도시킨 상상은, 우주적 상상의 끝에까지 미친다. 거꾸로 서 있기 때문에, 이 보리수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우주나무가 되는 것이다 (24).

u       우주 나무에 대한 상상은 거의 대부분의 신화에서 또 예사로운 일상에서 발견된다. … 단군신화의 신단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수이자 우주나무이다. 한국의 민간신앙에서도 우주나무가 나타난다. 긴 장대 위에 새의 형상을 얹은 솟대는 우주나무에 다름 아니다. 방방곡곡의 마을들에는 당 숲, 당산 등으로 불리는 신성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어김없이 당나무 (당산나무) 즉 우주나무가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나무들은 우파니샤드의 우주나무와 전적으로 다르다. 여러 신화와 일상에서 발견되는 우주나무는 어떤 역할을 하든지 간에 우주 자체에 대한 상징은 아니다. 반면에 우파니샤드의 우주나무는 우주 자체에 대한 상징이다 (25).

u       우파니샤드의 거꾸로 선 나무와 가장 유사한 것은 유대고 신비주의인 카발라의 생명의 나무이다. 이 생명의 나무도 우파니샤드의 나무처럼 거꾸로 서 있다. 또한 우파니샤드의 나무처럼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는 열쇠이다 (25).

u       그렇다면 거꾸로 선 우주나무는 왜 똑바로 선 우주나무로부터 차별화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거꾸로 선 나무가 우주의 근원, 우주의 창조 과정, 우주의 존재 방식 등을 상징화하는 데 아주 적합하기 때문이다. … 초일상의 차원에서는 거꾸로 선 나무가 더 자연스럽다. 성스러운 것은 위에서 아래로 퍼져 내려온다. 하나인 위쪽에서 무수한 것들이 있는 아래쪽으로 퍼져 내려온다 (26). 

 

거꾸로 선 나무의 뿌리와 가지

u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현상적인 것들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분별해서 알고자 하는 데 있는 한, 뿌리는 본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가지는 현상적인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28).

u       뿌리가 위를 향하는 나무를 알림으로써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임을 새롭게 일깨운다. 본질적인 것이 사실은 숨겨져 있었음을, 본질적인 것이 언제나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거꾸로 선 나무를 통해 확고하게 선언한다. 중요한 것이나 본질적인 것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에는, 중요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다. 그렇다. 뿌리가 중요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우파니샤드는 바로 이 점을 알리기 위한 노래이다. 모든 우파니샤드는 거꾸로 선 나무의 뿌리에 대한 변주곡인 것이다 (29).

u       우파니샤드에서는 뿌리를 순수라고 하고 불멸이라고 한다. … 그 뿌리를 부르는 이름은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브라흐만은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용어이다. … 이 말은 인도의 카스트 가운데 최상위를 차지하는 사제 계급인 브라흐만 (브라흐마나, 브라흐민)과 관련된다 (29~30).

u       카스트: 인도에서는 네 개의 카스트 (바르나)는 브라흐마나, 끄샤뜨리야 (끄샤뜨라), 바이샤, 슈드라이다. 브라흐마나는 사제나 학자이고, 끄샤뜨리야는 무사이며, 바이샤는 상공인이나 농민이고, 슈드라는 잡역을 하는 최하위 계급이다 (30).

u       베다 시대 (BC 1200~BC 700 년 경)에 브라흐만은, 성스러운 브라흐만 사제가 가지고 있는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언어의 힘이다. 브라흐만 사제가 신을 찬양하고 제의를 집행할 적에 사용하는 고귀한 언어가 가진 어떤 힘을, 또한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브라흐만은 점차적으로 그 의미의 영역이 확대된다. 브라흐만은 언어의 바탕에 깔린 힘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우주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어떤 궁극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된다. 마침내 우파니샤드 시대 (BC 700~ BC 200 년경)에 이르러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에 편재해 있는 유일한 원리가 된다. 대우주에서 가장 본질적인 어떤 것을 브라흐만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30).

u       이는 브라흐만의 어원에서도 알 수 있다. … 곧 무한하고 광대하고 탁월한 그 무엇이 브라흐만이다. 그 브라흐만이 성장하고 팽창하여 이 우주가 만들어진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성장하고 팽창하여 나무의 가지가 되듯이, 브라흐만이 펼쳐지고 전개된 것이 바로 이 우주이다. 이렇게 브라흐만은, 그 자체가 이 우주의 전부이지만, 또 그 자체가 자라서 우주의 삼라만상으로 나타난다 (30).

u       베다: ‘지식을 전하는 베다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스러운 문헌으로서 계시서, 성전 등으로 불린다. <르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아타르와 베다>라는 네 가지 베다가 있고오늘날에는 신에 대한 찬가나 기도, 주문을 내용으로 하는 상히따만을 베다라고 부르는 편이다 (31).

u       뿌리인 브라흐만에 거꾸로 매달린 온 세상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브라흐만을 넘어서지 못한다. 곧 브라흐만을 초월하지 못한다. 어떻게 아래에 매달려 있는 가지들이 위에 있는 뿌리를 초월하겠는가! (31).

 

진실과 빛과 불멸을 향해

u       거꾸로 선 나무라는 상징을 담은 우파니샤드는 인도 사상의 무궁한 원천이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가까이 내려앉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약간 높은 좌대에 스승이 앉고 제자들이 스승의 앞에 내려앉아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듣는 것을 일컫는다. 그렇게 분명히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의 지식은 아무에게나 전승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극소수가 선택된 극소수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 이는 전 세계의 모든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쉽게 발견되는 점이다. (32).

u       우파니샤드의 목적이란진실과 빛과 불멸에 닿는 것! (33).

u       거짓으로부터 진실로 저를 인도하소서 /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 죽음으로부터 불멸로 저를 인도하소서 (브르 1.3.28).

u       진실과 빛은 모두 불멸을 다르게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은 죽음이고 진실이 불멸이며, 어둠은 죽음이고 빛이 불멸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이 목적은 불멸성의 획득이다 (33).

u       아뜨만: 아뜨만이란 육체와도 다른 것이고, 마음이나 지성 등과도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경우에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모두 사라지지만 (윤회를 위해 남는 것이 있기는 하다), 아뜨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뜨만은 불멸이라고 말들 한다. 불멸하는 아뜨만이 진정한 의 모습이라고 우파니샤드에서는 가르친다 (34).

u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앎이란 곧 아뜨만에 대한 앎이다 (35).

u       이 대화에서 나찌께따는 재물이나 장수 따위가 거짓이고 어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이 사멸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나찌께따는 참된 앎이 진실이고 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것임을 알고 있다 (35).

u       우파니샤드는 죽음을 문제 삼는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문제 삼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을 거리낌 없이 노출한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가르치지 않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알려줌으로써 두려움 자체가 무의미함을 가르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바로 불멸의 상태이다. 쉽게 말하자면,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불멸의 존재임을 깨닫기만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35).

u       우파니샤드이 불멸은, 바로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상태에서 획득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우파니샤드이 불멸이 특별한 까닭은 이 점에 있다 (36).

u       우파니샤드에서 가르치는 본질적인 것이란 불멸 자체이다. 그리하여 불멸을 찾아가는 여정을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거꾸로 선 나무를 통해서 말한다면, 뿌리가 아닌 것들로부터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결코 짧지 않다. 우파니샤드이 가르침이 단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을지라도, 그 한 줄의 요약이 있기까지 그 과정은 길디길다.  뿌리에 도달하기 위해 저 다종다양한 우파니샤드이 가르침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 (36).

u       이 모든 창조물들은 존재를 근원으로 하고/ 존재를 처소로 하며/ 존재를 지지대 (귀의처)로 한다 <찬도 6.8.4> (37)

u       이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것처럼, 뿌리를 향하는 여정도 복합적이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우파니샤드의 가르침도, 때로는 미로 같고 때로는 탄탄대로 같다. 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가깝고, 아주 가까운 것 같으면서 멀기만 한 그 여정. 뿌리에 도달함을 위해, 어쩌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길고 지루할지도 모른다 (37).

 

<2. 뿌리에 대해서 알기>

브라흐만, 나무의 뿌리

u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상가들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것을 여러 이름으로 불러 왔다. 브라흐만도 그 중 하나이다. 그리고 브라흐만과 꽤 쉽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도라고 할 수 있다 (41).

u       브라흐만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통합되어 있고 통합될 수 있는 장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정신 (의식)의 전체이다 (41).

u       이 모든 것은 실로 브라흐만이다 <찬도 3.14.1> 42

u       이리하여 브라흐만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42).

n        사랑하는 이여/ 태초에 이것 (세계)은 단지 존재였다/ 유일무이한 것 <천도 6.2.1>

u       세계의 창조와 유지와 소멸도 모두 브라흐만의 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렇게 변화를 겪는 것과 달리 브라흐만은 영원히 불변하는 상태로 있을 뿐이다 (42).

u       불가촉천민의 이와 같은 도발적인 말에 샹까라는 상당히 충격을 받는다. 그 천민은 샹까라 자신의 사상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자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천민이라도 브라흐만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만인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바로 그 천민이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 그 천민은 진짜 천민이 아니었고, 사실은 쉬와 신이었다. 신이 샹까라를 시험에 들게 한 것이었다. 아무튼, 브라흐만은 이런 것이다 (43~4).

u       브라흐만은 존재, 지식, 무한이다 <따잇 2.1> 44

u       지식, 환희로서의 브라흐만 <브르 3.9.28> 44

u       첫째, 브라흐만은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를 겪는 것들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변화를 겪는 것들은 비존재이고, 브라흐만은 존재이다. 둘째, 브라흐만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과는 구별된다. … 셋째, 브라흐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들과는 구별된다. 그래서 무상한 것들은 유한이고, 브라흐만은 무한이다 (440.

u       게다가 브라흐만은 환히이다. 브라흐만이 환희라는 것도 브라흐만에 대한 본질적 정의에 포함될 수 있다 (45).

u       비이원적 베단따 학파: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이원적 베단따 학파는 샹까라에 의해 체계화된다. 우파니샤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이 학파에서는 브라흐만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세계는 허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원론의 형태가 아닌 비이원론 즉 일원론의 형태를 보인다 (45).

u       비이원론 베단따란, 브라흐만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다른 그 무엇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가장 잘 부합하는 학파이다. … 따라서 브라흐만을 우파니샤드에서 존재, 지식, 무한이라고 정의한 것은 비이원적 베단따에서 존재, 의식, 환희라고 정의한 것으로 이어진다 (45).

u       무한을 경험하는 깨달음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황홀경이 환희이고, 그 환희로서 황홀경 자체가 또 무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5).

u       브라흐만의 역사는 인도 정통 사상의 역사이다. 우파니샤드 이래로 브라흐만은 인도 정통 사상의 역사에서 끝없이 경배와 찬탄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46).

u       베단따란 베다의 끝또는 베다의 결론이라는 뜻이다 (46).

u       베다의 끝 베단따: 넓은 의미에서 베다란 상히따’ ‘브라흐마나’ ‘아란야까’ ‘우파니샤드라는 문헌들을 총괄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 이 네 문헌들 가운데 우파니샤드가 가장 늦게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우파니샤드를 베다의 끝 즉 베단따라고 부른다 (46).

u       일반적으로 베단따라는 말은 우파니샤드 (베단따)를 가장 권위 있는 문헌으로 인정하고 우파니샤드의 주요 사상을 따르는 후대의 베단따 학파들을 가리킨다. 우파니샤드이 중심어도 브라흐만이고, 베단따 학파들의 중심어도 브라흐만이고, 베단따 학파들의 중심어도 브라흐만이다. 따라서 베단따 학파를 베단따 학파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이다 (46).

u       후대에 베단따 학파는 여러 분파로 나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브라흐만의 성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6).

 

높은 브라흐만과 낮은 브라흐만

u       흔히 고전 우파니샤드라고 불리는 우파니샤드들은 10여 종류 남짓인데, 그 각각의 우파니샤드가 다른 목소리를 낼 뿐더러, 하나의 우파니샤드에서도 때로는 일관적이지 않은 주중이 들어 있곤 한다 (48).

u       비이원적 베단따 학파에서 우파니샤드란, 기독교에서의 <성경>과 같다. … <성경>이 기독교도들에게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우파니샤드는 비이원적 베단따 학자들에게 성언 그 자체이다 (49).

u       이 우파니샤드라는 특별한 종류의 계시는, 그들에게 영원에서부터 영원에까지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 그 자체이다 (49).

u       높은 브라흐만이란 아무런 속성도 가지지 않는 순수한 브라흐만이고, 낮은 브라흐만이란 여러 속성들을 가진 브라흐만이다. 비이원적 베단따 할파에서는 전자를 무 속성 브라흐만이라고, 후자를 유 속성 브라흐만이라고 부른다 (50).

u       보기 어렵고 / 비밀스러운 곳에 들어가 있으며, / 공동에 놓여 있고 / 심연에 존재하는 그 태고의 것을, / 현자는 자기관조의 달성을 통해 신격으로 숙고한 후에/ 기쁨과 슬픔을 떠난다 <까타 2. 12> 51

u       저 신비한 브라흐만 또는 아뜨만을, 현자는 자기관조라는 것을 통해서 신격으로 숙고한다. 즉 신격으로 명상한다 (51).

u       자기관조: 자기관조 즉 아드야뜨마 요가란 아뜨만에 관한 요가이다. 외적인 대상들을 향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그 마음을 아뜨만에 집중하는 것 (요가)’ 이 자기관조의 의미로서 아드야뜨마 요가이다. 아드야뜨마 요가는 비이원적 베단따 학파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51).

u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은 결코 신이 아니다 (51).

u       결국 신은 인간이 브라흐만에 대해 알고자 할 때에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 자신을 닮은 어떤 완전한 존재를 생각한 것이 신이지만, 신은 결코 브라흐만이 아니다. 신은 다만 인간이 아주 친근하게 생각할 수 있는, 브라흐만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51~2).

u       쁘라나: 쁘라나라는 말은 숨, 기관, 공기, 생명 원리, 생명력, 영혼, 긍극적 영혼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모든 의미들을 다소 포괄할 수 있는 용어가 바로 생기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생기는 종종 아뜨만과 유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52).

u       하나의 브라흐만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거나 여러 형태로 보일 뿐, 궁극적으로 유일한 브라흐만만이 존재한다 (52).

 

브라흐만은 묘사될 수 없다?

u       그것은 불멸이고, 두려움이 없음이다/ 그것은 브라흐만이다 <찬도 8.11.1> 53

u       (불멸체는) 보일 수 없고, 파악될 수 없으며/ 근원이 없고, 특색이 없는 것/ 눈과 귀가 없고, 손과 발이 없는 것/ 영원하고 편만하며 편재하고/ 지극히 미소하며 소실되지 않는 것/ 현자들이 존재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문다 1.1.6> 53

u       황금으로 이루어진 지고한 덮개에 / 더러움이 없고 부분이 없는 브라흐만/ 그것은 순수하고, 빛들의 빛이다/ 그것은 아뜨만을 아는 자들이 아는 것이다 <문다 2.2.10> 54

u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언어를 초월해 있는 것을 언어로써 전달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54).

u       그 무엇은 언어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으며/ 그 무엇에 의해 언어가 표현되는 / 바로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그대는 알도록 하라/ <사람들이> ‘이것이라고 명상하는 것은 / <브라흐만이> 아니다. <깨나 1.5> 54~5

u       브라흐만은 항상 그것을 붙잡는 언어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55).

 

그래서 진리의 진리를 말하다

u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에 대한 최종적인 지시 (교훈)이러한 것도 아니고 그러한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58).

u       이제, / <브라흐만에 대한> 명칭이다: / 진리의 진리 <브르 2.3.6> 59

u       진리란 인간이 경험적으로 얻는 지식들이고, 진리의 진리란 초경험적인 실제에 대한 지식이다 (60).

u       진리의 진리: ‘존재의 존재라고 읽을 수도 있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진리 자체이고, 진리로서 알려지는 것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존재일 경우에, 앞의 존재는 경험적 존재를 가리키고 뒤의 존재는 실재적 존재를 가리킨다 (60).

u       단번에 높은 지식을 통해 높은 브라흐만에 도달할 수 없기에, 낮은 지식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단번에 진리의 진리에 이를 수 없기에, 진리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낮은 지식이나 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높은 지식이나 진리의 진리에 이를 수 없다 (60).

 

단계적으로 알아가기

u       사제가 이렇게 거듭 가짜 아룬다띠를 진짜 아룬다띠라고 가리키고 또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아룬다띠가 아주 작고 희미한 별이기 때문이다. 눈에 잘 띠는 별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작고 희미한 아룬다띠 별을 찾아가야 쉽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흐만에 대해서도, 일상에서 잘 알려지고 언어로 표현된 것부터 알기 시작해야만, 종국적으로 일상을 넘어서고 언어를 넘어선 높은 브라흐만을 알 수 있다 (62).

u       스승은 두 제자로 하여금 물 속에 그들의 모습을 비추게끔 하고 나서, 물에 비친 육체의 모습이 아뜨만이라고 가르쳐 준다 (63).

u       오늘날에도 겉으로 드러난 육체만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악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드라는 돌아가는 중에 의심을 한다. … 스승은 이제 꿈속에서 떠도는 자가 아뜨만이라고 가르쳐 준다. … 마침내 스승은 깊은 잠에 빠져 적정을 이룬 상태에 있는 자가 아뜨만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인드라를 5년 더 머물게 하여, 101년 동안 금욕 생활을 하게끔 한 뒤, 아뜨만에 대한 최종적인 가르침을 베푼다 (64).

u       그 적정은 이 육체로부터 솟아 오른 후/ 지고한 빛에 도달하고 나서/ 자체의 형태로서 현시한다/ 그것 (적정)은 최상의 뿌루샤이다 <찬도 8.12.3> 64

u       이 이야기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자아보다 꿈 속에서의 자아가 더 고귀하고, 꿈속에서의 자아보다 깊은 잠 속에서의 자아가 더 고귀함을 가르친다. 쁘라자빠띠는 한 번에 하나의 자아만을 가르침으로써 제자인 인드라가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더 집중하도록 만들면서 단계적으로 아뜨만에 대한 지식을 전한다 (64).

u       아룬다띠 별을 찾는 과정처럼, 점진적으로 마치 사닥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저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방법이다 (65).

 

아뜨만, 또 하나의 뿌리

u       거꾸로 선 나무의 뿌리는 브라흐만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뜨만이다. 거꾸로 선 나무를 대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뿌리에 해당되는 것이 브라흐만이다. 거꾸로 선 나무를 소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뿌리에 해당되는 것이 아뜨만이다 (66).

u       흔히 한 송이 꽃에도 모든 우주가 어김없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한다. 이는 소우주인 한 송이 꽃에서 대우주인 모든 자연 현상들이 발견된다는 말이다 (66).

u       물론 우파니샤드에서 대우주는 세계를, 소우주는 인간을 가리킨다. 세계가 끝없이 창조되고 유지되고 파괴되는 순환을 겪듯이, 인간도 끝없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윤회를 겪는다 (67).

u       아뜨만이라는 말은 우파니샤드 이전의 문헌들에서 인간의 숨을 지칭한다. 그 다음에는 인간의 자아나 우주적 자아를 지칭하게 된다 (67).

u       인간에게 숨이 그처럼 중요하듯이, 우주에도 마치 기처럼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무언가 내밀한 숨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결국 아뜨만은 소우주와 대우주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내재적인 미세한 그 무엇을 가리킨다 (67).

u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파니샤드에서 아뜨만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은, 아뜨만이 자아가 아닌 것자아인 것을 통일하는 어떤 내재적 원리로 간주된다는 점에 있다. 물질과 정신, 대상과 주관, 너와 나를 하나로 꿰뚫는 어떤 내밀한 원리라는 것이다 (68).

u       힌두교에서 대부분 아뜨만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불교에서는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는 우파니샤드의 아뜨만을 부정함으로써 힌두교의 전통 안에서 혁신적인 종교를 만든 셈이다 (68).

u       아뜨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 모든 것들을 지켜보는 자, 즉 관조자, 관찰자이다 (68).

u       하나의 신격은 모든 존재들에 숨겨져 있다/ 편재하며/ 모든 존재들의 내재적 아뜨만/ 행위의 주시자이고/ 모든 존재들에 체재한다/ 관조자이며, 의식체이고, / 독존이며, - 속성 <쉬웨 6.11> 69

u       힌두교에서도 불교에서도 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저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점을 잘 안다. 다만 불교에서는 라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하고 무상하다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힌두교에서는 라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하고 무상할지라도 그것과는 다른 영원 불변의 아뜨만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69).

u       아뜨만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아뜨만이 인간의 심장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뜨만이 머리에 머문다는 견해도 있었다고 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분명히 아뜨만이 심장에 머무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69).

u       아뜨만이 심장에 머문다는, 또는 심장 자체라는 견해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70).

n        첫째, 심장이 인간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듯이, 아뜨만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n        둘째, 심장이 인간의 육체에서 중앙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듯이, 아뜨만은 인간에게 가장 내적이고 은밀한 것이다.

n        셋째, 심장이 뛰고 멈추는 것이 육체의 삶과 죽음이듯이, 아뜨만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신비한 불멸이다. 하지만 아뜨만이어디에 머무느냐의 문제보다 실제로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고,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느냐의 문제보다 그러하다고 믿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70).

 

초월이 아닌 내재의 승리

u       아무래도 대우주의 정수인 브라흐만은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반면에 소우주의 정수인 아뜨만은 아주 가깝다 (72).

u       의식을 가진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한, 자신의 가장 내부에 존재하는 아뜨만은 얼마나 가깝게 또 즉시 알려지겠는가! 이 세계의 궁극적 실재를, 이 세계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바로 인간 자신에게 찾을 수 있다는 신념.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안으로만 시선을 돌려도 자기 완성을, 삶의 완성을 너끈히 이룰 수 있다는 신념. 아뜨만은 그렇게 인도 사상의 여명기에 인도 사상을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72).

u       아뜨만은 외재하지 않고 내재한다. … 아뜨만은 분명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3).

u       비록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아뜨만을 알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73).

u       브라흐만이 된다는 것은 아뜨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74).

u       이처럼 우파니샤드에서 인간은 지극히 고귀한 존재로 비춰진다. … 스스로가 아뜨만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삶과 죽음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74).

u       라마크르슈나: 라마크르슈나 (1836~1886)는 인도를 대표하는 성자로서 평생을 신에 대한 명상으로 일관했다. 특정한 시대, 장소, 사람과 관계없이 신성이 현시하고 또 신성에 몰두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신성의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설파했는데, 이러한 그의 정신은 제자인 비베카난다에 의해 계승되었다 (74).

u       아뜨만은 세상사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보다 더 순수한 것이다. … 아뜨만은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기적인 양 놀랍게 하고 그 어떤 신비보다도 더 신비인 양 들뜨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의 안에 있는 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한다 (74).

u       여보게, / 실로 만물에 대한 사랑에서/ 만물이 소중하게 되지 않고/ 그와 달리/ 아뜨만에 대한 사람에서 / 만물이 소중하게 된다 <브러 2.4.5> 75

u       불가사의이고 경이이며 수수께끼인 아뜨만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 모든 것들이 아뜨만의 맑고 깨끗한 화폭 안으로 들어온다 (75).

 

나는 누구인가?’와 그 대답

u       라마나 마하르쉬: 침묵의 현자, 아루나찰라의 성자로 잘 알려진 라마나 마하르쉬 (1879~ 1950)는 베단따 전통을 실제로 구현한 위대한 성인이었다. 사후에도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두고 있는 그의 가르침은 자기 탐구로 요약될 수 있다. 마하르쉬는 각 개인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영적 수행을 통해 참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76).

u       라마나 마하르쉬의 평생 가르침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아뜨만이다라는 대답으로 요약된다 (76).

u       그와 같은 죽음의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어떤 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 모든 과정을 의식하고 있지 않는가!... 라마나 마하르쉬의 이 체험은 로 있게끔 하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인가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그 진정한 는 죽음에 대해서도 사라지지 않는 아뜨만에 다름 아니라는 대답이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우파니샤드의 유산이다. 라마나 마하르쉬는 우파니샤드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이다 (77).

u       이것은 / 브라흐만의 마을에 연꽃인 작은 거처/ 그 안에는 작은 허공이 있다/ 추구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또 탐구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그 곳에서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찬도 8.1.2> 77

u       아뜨만은 인격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아뜨만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적인 어떤 원리이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나는 무엇인가?”에서 만 참으로 존재하고 와는 다른 것이 이 세상에 없으므로, 모든 누구라든가 모든 무엇이 사라진다. 그러면 나는 존재한다만 남는다. 그게 끝이다 (79).

 

<3. 우주의 뿌리와 나의 뿌리는 하나다>

 오직 한 그루인 거꾸로 선 나무

u       우파니샤드에서 최고의 존재 또는 궁극적 실재는 단연코 하나이다. 그 하나를 브라흐만이라고도 부르고 아뜨만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주로 그 하나가 대상적인 측면에서 브라흐만이고 주관적인 측면에서 아뜨만이라고 한다. 브라흐만은 대우주의 원리이고 아뜨만이 소우주의 원리라는 의미에서이다 (84).

u       어쨌거나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하나이다. 대우주의 뿌리와 소우주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브라흐만도 아뜨만도 오직 순수의식이기 때문이다 (84).

u       바로 이러한 브라흐만과 아뜨만의 동일성을 범아일여라고 부른다. ‘은 브라흐만을, ‘는 아뜨만을 각각 뜻한다 (85).

 

<범아일여, 우파니샤드의 정수>

u       범아일여의 가르침이 우파니샤드의 정수라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범아일여 사상은 우파니샤드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우파니샤드 이전의 문헌들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이 사상이 형성되다가 우파니샤드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범아일여의 오래된 흔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르그 베다 10.90>뿌루샤 찬가이다 (86).

u       뿌루샤 찬가란 우주적 원인, 즉 우주적 거인에게 바치는 찬송이다 (86).

u       우주적 원인: … 유일하게 존재하는 우주적 원인이 분할되면서 우주의 여러 현상이 창조된다는 이야기이다. 인도의 네 카스트 역시 바로 이 우주적 원인의 자기 분화로부터 만들어진다 (86).

u       원초적 인간과 우주적 양상 사이의 대응 관계이다 (87).

u       창조에 관한 이러한 두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범아일여의 한 단면이다. ‘우주적 거인이나 물로부터 만들어진 인간의 형상은 그것이 아무리 대우주적 인간임에도 여전히 인간의 형태를 한 소우주이다 (87).

u       범아일여는 좁은 의미에서 브라흐만과 아뜨만의 동일성을 지시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대우주와 소우주의 대응 관계 즉 상동 관계를 지시한다 (88).

u       대우주와 소우주의 상동 관계는 인도 사상의 유구한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대우주의 순환과 소우주의 윤회를 보라! (89).

u       인도 사상에서 비교적 후대에 전개되는 딴뜨라 사상에서도, 궁극적인 목적은 대우주의 주재자인 신에게로 소우주의 주인인 인간이 합일되는 것이다 (89).

 

아뜨만은 브라흐만이다

u       마음은 브라흐만이다라고/ 명상해야 한다 <찬도 3.18.1> 90

u       또 다시/ 세 개의 요소로 이루어진 이라는 바로 이 음절로써 / 그 지고한 뿌루샤를 명상한다면/ 그는 빛의 태양에 결합된다 <쁘라 5.5> 91

u       : 옴이라는 말은 ‘A + U + M (모든 소리의 총화)’의 형태이다. 모든 상징 가운데 가장 탁월한 상징으로서 우파니샤드에서는 브라흐만에 대한 <요가 수뜨라>에서는 신에 대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옴이라는 소리를 반복함으로써 집중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옴은 절대, 절대자에 대한 상징인 동시에 수행의 수단이기도 하다 (91).

u       우파니샤드이 초기에는 브라흐만과 아뜨만이 편재하고 이 모든 세계가 브라흐만이거나 아뜨만이라고 하는 등 범신론의 경향이 강했지만, 범아일여가 확립됨으로써 곧장 관념적 일원론으로 전이된다 (93).

u       흔히 네 가지가 있다고 알려지는 대문구들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문구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들이다 (94).

n        지성 (의식)은 브라흐만이다 (아이 3.3)

n        나는 브라흐만이다 (브르 1.4.10)

n        그것이 너이다 (찬도 6.8.7)

n        이 아뜨만은 브라흐만이다 (만두 2)

u       결과적으로 대문구들은 윤회를 거듭하는 이 미약한 개별적 영혼이 사실은 절대적인 아뜨만이고 브라흐만이라는 선언이다 (94).

u       대문구들은 우파니샤드의 성자들이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에 대해 체험한 것을 집약적으로 단순화시켜 계시한 것들이다 (95).

 

개별적 영혼이 브라흐만이다

u       우파니샤드에 있는 위대한 무기인 활을 잡은 채/ 명상으로 날카로워진 화살을 재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 불멸체의 현존을 향한 마음으로 (시위를) 당긴 채/ 바로 그 불멸체라는 과녁을 명중하도록 하라/ 음절 이 활이고, 영혼이 화살이며/ 브라흐만이 그 과녁이라고 불린다/ 주의 깊은 자에 의해 (과녁은) 명중되어야만 한다/ 화살처럼 그것 (브라흐만)에 합일되어야 한다 <문다 2.2.3~4> 99

u       <바가와드 기따>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의 여섯 장은 에 대한 설명이고, 중간 부분의 여섯 장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고, 끝 부분의 여섯 장은 이다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 (100).

u       위대한 전사로 알려져 있는 그가 무력감에 빠진 것은 바로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무력함이란 개별적 영혼이 가진 한계이다 (100).

u       <바가와드 기따>의 가르침은 전체가 그것은 너이다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각각 차례대로, 잘 알려진 세 가지 요가 (삶의 길), 행위의 요가’, ‘신애의 요가’, ‘지혜의 요가라고 부를 수 있다 (101).

 

그것이 너이다를 이해하기

u       그것이 너이다라는 문구는 범아일여가 다른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103).

u       우파니샤드가 진실과 빛과 불멸을 목적으로 한다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거리이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그 인간의 유일한 본질이 바로 브라흐만이라고 가르친다. 바로 아뜨만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이 거대한 우주의 전부이다 (104).

u       그것이 너이다에서 가 지칭하는 것들 가운데 저 브라흐만, 아뜨만과 닮은 (동일한) 것을 구별해서 찾아내야만 문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104).

u       도 사실은 순수의식 (아뜨만)이고, ‘도 사실은 순수의식이기 때문이다. ‘도 모두 무지 때문에 순수의식이 아닌 것이 양 알려질 뿐이지, 둘 모두 똑 같은 순수의식이다 (105).

u       대문구를 해석하는 일은 대문구를 직접 경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105).

u       우파니샤드의 대문구는 거꾸로 선 나무에 하나의 뿌리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106).

u       소우주는, 그야말로 대우주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으로서, 대우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아뜨만이 너이고, 브라흐만이 너이다. 나는 아뜨만이고, 나는 브라흐만이다. 뿌리는 역시, 하나! (106).

u       우주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 하나의 눈. 그 크고 깊고 맑고 즐거운 눈이 하나의 뿌리이다 (107).

 

<4. 진짜인 뿌리와 가짜인 가지들>

뿌리로부터 가지들에게

u       나무에는 하나의 뿌리가 있고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 이야기의 출발점에는 하나만 있었으나, 가고 또 가다 보니, 수많은 이야기들이 부채꼴마냥 더해진 모양새이다 (111).

u       뿌리를 대우주적 관점과 소우주적 관점으로 이해하듯이, 가지들도 대우주적 관점과 소우주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112).

u       향유주체: 브라흐만이 아닌 것들을 세계라고 말한다면, 아뜨만이 아닌 것들을 향유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개별적 인간은 육체나 감관을 통해 대상을 향유하고 또 마음이나 지성을 통해 대상을 향유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개별적 인간은 한 마디로 향유주체이다. 아뜨만이 육체, 기관, 정신과 연계된 것이 향유주체이다 (112).

u       브라흐만은 창조된 모든 것들로 들어가 아뜨만이 된다. 그래서 아뜨만은 브라흐만인 것이다. 아뜨만 역시 브라흐만처럼 몸과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개별적 인간의 육체, 감관 등이 의식인 아뜨만을 둘러싼다. 숙명처럼, 브라흐만도 아뜨만도 몸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숙명처럼, 뿌리는 가지들을 가지고 있다 (113).

u       (연장) : … 이 세계는 절대, 절대자가 연장된 것에 다름 아니다. 더 정교하게 말하면, 브라흐만과 세계는 실체와 연장의 관계이다. 그래서 소우주의 관점에서 향유주체를 아뜨만의 몸 또는 연장이라고 할 수 있듯이, 대우주의 관점에서도 세계를 브라흐만의 몸 또는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때 몸은 미시적인 형태이거나 현시적인 형태이다 (113).

u       가지인 이 세계에서 살면서 가지로 존재한다고 믿는 개별적 인간들은, 어렴풋이 뿌리가 존재함을 기억하면서, 뿌리에 대한 외경 때문에 살아간다 (113).

u       무엇이든지 간에 이 모든 세계는 / (생기로부터) 나와서 생기에서 떤다/ 치켜들린 번개와 (같이) 거대한 두려움인/ 그것을 아는 자들은 불멸이 된다 <까타 6.2> 114

u       그것의 두려움을 통해 바람이 분다/ 두려움을 통해 태양이 떠오른다/ 그것의 두려움을 통해/ 불과 인드라가/ 그리고 제5의 것인 죽음이 달린다 <따잇 2.8> 114

u       두려움만큼 고대인들을 설레게 한 감정이 있었으랴. 두려움은 가장 진폭이 큰 감정이었으리라. 슬픔이나 외로움 같은 것들도 두려움의 일종이고,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것들도 두려움의 변종이다. … 모든 두려움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두려움은 영원불멸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 이 두려움은 외경이다 (114).

u       세상 만물은,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도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근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정해진 바대로 각각의 운행을 거듭할 뿐인 것이다. … 하지만 이 두려움을 아는 자는 불멸이 된다. 뿌리의 위대함을 아는 자는, 뿌리의 두려움을 아는 자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인 불멸 자체가 된다 (115).

 

브라흐만은 우주 창조의 원인

u       세계와 관계하는 한, 이제 브라흐만은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는 원인이다 (116).

u       그 무엇으로부터 실로 이러한 존재들이 태어난다/ 그 무엇에 의해서 태어난 것들이 살아간다/ 그 무엇에로 (태어난 것들이) 나아가고 되돌아 간다/ 그것을 탐구하고자 욕구하라/ 그것이 브라흐만이다 <따잇 3.1> 116

u       신이라는 것은 브라흐만의 우연적인 한 모습일 뿐이다. 무지로 말미암아 브라흐만을 신으로 잘못 알고 있을 뿐이다 (117).

u       실제로 브라흐만은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지 않는다. 브라흐만은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세계의 원인일 수 있겠는가 (117).

u       어떻게 비- 존재로부터/ 존재가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이여/ 태초에 이것 (세계)은 단지 존재였다/ 유일무이한 것/ 그는 / “나는 다수가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날 것이다라고 / 일견했다/ 그는 불을 창조했다 <찬도 6.2.2.~3> 118

u       우파니샤드 전체의 맥락으로 통해 본다면, 브라하만으로부터 에테르가, 에테르로부터 공기가, 공기로부터 불이, 불로부터 물이, 물로부터 흙이 창조된다. 그리고 허공, 공기, , , 흙이라는 아주 미세한 다섯 가지 원소들의 결합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창조된다 (118).

u       브라흐만으로부터 창조된 세계는 명칭과 형태의 총체이다. … 브라흐만은 목재 (질료인)인 동시에 목수 (동작인)이다. 브라흐만으로부터 명칭과 형태를 가진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창조된다 (119).

u       실로 그 때에/ 이것 (세계)은 전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명칭과 형태로서 전개되었다 <브르 1.4.7>

u       마야는 일종의 대우주적인 무지이다. … 마야가 브라흐만을 더럽힘으로써 뿌리로부터 가지들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120).

 

세계는 환영일 수 있다

u       마야라는 말이 환영을 뜻한다. 곧 세계가 환영이라는 주장이다 (121).

u       브라흐만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 뿌리에 존재하는 것들이 자라서 가지들로 존재한다. 이것은 분명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다 (122).

u       이 세계는 모두가 브라흐만이다. 세계는 단지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브라흐만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 다양하다고 보이는 세계는 환영이다. 오직 하나인 브라흐만만이 환영이 아니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 세계는 모조리 환영이다 (122).

u       힌두 철학에서 궁극적 원리와 그것으로부터 전개된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 하나는 전변설이고, 하나는 가현설이다. 전변설도 가현설도 결과가 미리 원인에 존재해 있다가 나중에 드러난다고 간주한다. 나무는 이미 그 씨앗에 죄다 존재해 있다가 나중에 자라난다는 사고방식이다 (123).

u       비이원적 베단따 학자들은 세계 환영설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세 가지 이유에서 세계가 환영이라고 말한다 (124).

n        첫째로, 세계는 허구라고 보이기 때문에 환영이다. 불교 사상처럼 대부분의 정통 힌두 사상도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n        둘째로, 세계는 비지각적이기 때문에 환영이다. … 의식 자체인 브라흐만은 스스로 존재하지만, 의식이 없는 세계는 브라흐만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허상일 수 밖에 없다.

n        셋째로 세계는 제한된 것이기 때문에 환영이다.

 

아뜨만이란 뿌리와 그 가지들

u       향유주체란 인간의 육체와 기관과 정신의 복합체이다 (129).

u       향유주체는 곧 경험주체이다. 그런데 또 향유 즉 경험은 지식과 행위를 통해 대부분 가능하다. 향유주체를 지식 주체, 행위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29).

u       아뜨만을 마차로 탄 자로/ 또한 육체를 한갓 마차로 알도록 하라/ 그리고 지성을 마차꾼으로/ 또한 마음을 한갓 고삐로 알도록 하라/ 감관들을 그들은 말들이라고 이른다/ 그것들의 대상들을 반경들로 (알도록 하라)/ , 감관, 마음과 연계된 것을/ 식자들은 향유주체라고 이른다 <까타 3.3.~4> 129~130

u       개별적 인간의 육체는 마차이고, 감관들은 말이다. 말이 마차를 끌듯이, 감관들을 통해 육체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고삐이다. 고삐로써 말을 조정하듯이, 마음으로써 감관들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마차꾼이다. 마차꾼이 고삐를 제어하듯이, 지성이 마음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대상들은 이 마차 전체가 움직이는 반경이다. 마지막으로 아뜨만은 마차를 탄 자로서 마차의 실제 주인이다. 마차의 실제 주인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마차는 달리고 또 목적리를 향해 간다 (130).

u       지성체인 아뜨만이 올라앉은 / 이 육화된 아뜨만은/ 신음하면서 간다 <브르 4.3.35> 130

u       인도에서는 인간의 내면을 여러 단계로 나눠서 설명한다. … 가장 낮은 단계의 내적기관은 마음이다. 마음은 그저 외적기관이 가져오는 정보를 결집하는 역할만 한다. … 지성은 경험된 모든 것들을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성은 가장 높은 단계의 내적 기관이다 (131).

u       감관들보다 대상들이 실로 더 지고하고/ 또한 대상들보다 마음이 더 지고하다/ 그리고 마음보다 지성이 더 지고하고/ 지성보다 위대한 영혼이 더 지고하다/ 위대한 것보다 미현현자가 더 지고하고/ 미현현자보다 뿌루샤가 더 지고하다/ 그 어떤 것도 뿌루샤보다 더 지고하지 않다/ 그것은 정점이다/ 그것은 궁극적 목적지이다 <까타 3.10~11>

 

아뜨만을 덮고 있는 것들

u       아뜨만은 육체, 기관, 정신 등의 복합체인 향유주체에 의해 가려져 있다. 버드나무처럼 무수한 가지들이 축 늘어져 뿌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형국이다 (134).

u       인간의 육체는 음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음에 숨으로 이루어진 것,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 ㅇ니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미시적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136).

u       마지막 덮개인환희로 이루어진 덮개는 가장 미세한 것으로서 원인적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덮개는 아뜨만과 가장 가까움으로 말미암아 아뜨만의 본질인 환희와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환희 자체는 아니고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에 지나지 않는다 (136).

u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란 인식으로 이루어진 덮개가 숙면 상태에서 브라흐만의 본질인 환희의 반사를 포착한 채로 숨게 된 것을 가리킨다. 달리 말해서, 인식으로 이루어진 덮개가 여러 기관들과 결별하면서 내부로 들어가, 브라흐만의 반사된 환희를 포착하고 보존하는 잠재적 상태가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이다 (136).

u       이상의 다섯 가지 덮개는 인간이 경험하는 의식의 세 가지 상태 (생시, , 숙면 상태)와 관계한다. 현시적인 신체는 깨어 있는 상태와 관계하고, 미시적인 신체는 꿈을 꾸는 상태와 관계하며, 원인적인 신체는 꿈 없이 깊은 잠을 자는 상태와 관계한다 (136).

u       잠자는 자가 그 어떤 꿈도 꾸지 않고서/ 오직 그 생기와 하나인 것이 되는 경우에/ 언어 기관이 모든 명칭들과 함께 그것 (생기)에로 들어간다/ 눈이 모든 형태들과 함께 (그것에로) 들어간다/ 귀가 모든 소리들과 함께 (그것에로) 들어간다/ 마음이 모든 생각들과 함께 (그것에로) 들어간다/ 그가 깨어날 때/ 타오르는 불로부터 불꽃들이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듯이/ 바로 그와 같이 / 이 아뜨만으로부터 (모든) 생기들이 처소를 향해 움직인다/ 생기들로부터 신격들이/ 신격들로부터 세상들이 움직인다 <까우 3.3> 137

u       의식의 세 상태: 의식의 세 상태와 신체 덮개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시적 신체=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 생시 상태. 2) 미시적 신체= 숨으로 이루어진 덮개 + 마음으로 이루어진 덮개 + 인식으로 이루어진 덮개 = 꿈 상태. 3) 원인적 신체=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 = 숙면 상태 (137).

u       이 다섯 가지 덮개들은 아뜨만의 본질을 가리는 것들로서, 아뜨만에 대한 지식을 얻을 때까지 영혼에 붙어 있다. … 그래서 아뜨만을 찾고자 하는 이는 이러한 덮개들을 통제해야 한다. 현시적인 것에서 점점 미시적인 것에로 나아가야 한다 (138).

u       지적인 자는/ 언어 기관 (등을) 마음에서 제어해야 한다/ 그것 (마음)을 인식의 아뜨만에서 제어해야 한다/ 인식의 (아뜨만을) 위대한 아뜨만에서 제어해야 한다/ 그것 (위대한 아뜨만) / 평온한 아뜨만에서 제어해야 한다 <까타 3.13> 138

 

그래도 소중한 가지들을 위해

u       브라흐만의 입장에서 보면 세계가 환영이고, 아뜨만의 입장에서 보면 육체와 정신이 환영이다. … 세계가 없이도 브라흐만은 존재하지만, 브라흐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논리. 육체와 정신이 없이도 아뜨만은 존재하지만, 아뜨만이 없으면 육체와 정신도 없다는 논리. 모든 초점은 뿌리인 브라흐만과 아뜨만에로 모아진다 (139).

u       뿌리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모르는 동안에 실상이라고 믿는 것은, 아는 순간에 허상이라고 밝혀진다 (140).

u       세계를 환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이 세계는 분명히 경험되기 때문에 환영이 아니다. 그럼에도 환영이라고 간주하는 까닭은, 이 세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140).

u       중요한 것은 세계를 환영이라고 가정했을 때에 가능한 가치의 변화이다. 세계가 환영임을 자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더 높은 의의를 부여하기. 결코 환영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삶의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는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기. 세계에 관한 모든 질문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곳인 자기 자신을 더 진지하게 성찰하기 (140).

u       다른 것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듣지 않고/ 다른 것을 알지 않는 경우에/ 그것이 극대이다/ 그리고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것을 아는 경우에 / 그것이 극소이다/ 실로 극대인 것은 불멸이다/ 그리고 극소인 것은 사멸이다 <찬도 7.24.1> 141

u       이렇게 본질로 찾아 떠나는 길은, 얼핏 보기에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는 듯하지만, 사실 극소 (사멸)에서 극대 (불멸)로 가는 여행이다. 이 여행에서 주변의 세계나 육체와 정신은 여전히 소중하다. … 다만 목적지에 도달하면 모든 것들과 냉혹한 절연이다 (141~2).

 

<5. 나무의 밑동을 자르기 위해>

잘려야 하는 운명에 대하여

u       마침내 거꾸로 선 나무를 잘라야 할 때이다. 뿌리만 있어야 하는 이 나무에 가지들이 달려 아래로 뻗어 있기 때문에, 이 나무는 윤회의 나무이다 (145).

u       대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가지로서 세계는 한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므로 순환을 겪는다. 소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가지로서 향유주체는 한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므로 윤회를 겪는다. 그래서 가지를 가진 이 거꾸로 선 나무는 순환의 나무이고 윤회의 나무인 것이다. 뿌리에서부터 자라고 떠 자라는 그러한 반복을 멈추게 해야 하는 나무인 것이다. 윤회는 고통 그 자체이다 (145).

u       윤회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윤회의 나무를 지금 이 생애에서 잘라야만 한다. 그러면 오직 윤회를 겪지 않는 불멸의 아뜨만만이 남는다 (145).

u       우주는 오늘 존재하지만 내일 존재하지 않을 운명이다. 오늘 온전한 나무로 남아 있지만, 내일 온전한 나무로 남아 있지 못할 운명이다. 왜냐하면 뿌리가 아닌 것들이 헛것임을 아는 순간에 그 나무에는 뿌리만이 남기 때문이다 (146).

u       나무의 아랫부분에 있는 세계의 좌표와 나의 좌표가 허구임을 알고 난 후에, 당최 나무를 자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나무를 자르는 순간은, 불멸로 진입하는 순간은, 거룩하도다 (146).

 

밑동을 자르는 두 가지 수단

u       샹까라는 거꾸로 선 나무를 브라흐만, 아뜨만에 대한 지혜와 무집착이라는 수단으로써 자른다고 말한다. 샹까라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파니샤드는 분명히 지식 중심주의와 금욕주의를 설파한다. 지식과 금욕은 우파니샤드 이후로도 인도 사상의 실천적 측면에서 두 중심축을 이룬다. 지식이란 결코 학문적 지식을 말함이 아니다.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직관적이고 직각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금욕이란 브라흐만이 아닌 것들과 아뜨만이 아닌 것들에 집착하지 않음이다. 쉽게 말해서, 지식은 실재를 탐구하고 분별함이요, 금욕은 감각과 함께 마음을 제어함이다 (148).

u       지식과 금욕 또는 지혜와 무집착은, 베단따 사상에 입문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들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 네 가지 조건들은 이러하다 (148).

n        첫째,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을 분별하기이다.

n        둘째, 현세와 내세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기이다.

n        셋째, 마음과 감관을 제어하고 인내와 집중을 행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n        넷째, 해탈을 강하게 열망하는 것이다.

u       금욕보다는 지식이 더 중요한 칼이다. 인도 사상에서 기본 전제로 깔고 있는 윤회는 씨앗- 행위, - 결과라는 구조이다. … 마치 나무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어 또 자라는 모습과 같다 (149).

u       (각각의) 행위 ()에 따라 식견에 따라/ 어떤 영혼들은/ 육화되기 위해 자궁으로 나아가고/ 어떤 영혼들은/ 정물을 좇아간다 <까타 5.7> (149~150).

u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씨앗을 태워 없애버리면 된다 (150)

u       이러한 가운데 씨앗을 더 상세하게 알 필요가 있다. 씨앗은 무지와 욕망이다. 그래서 무지- 욕망- 행위/- 결과 (무지)’라는 새로운 구조가 나온다 (150).

u       이번에는 무지가 첫 번째 원인이기 때문에 무지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무지를 없애버리면 된다 (150).

u       지식은 바로 이 무지를 없애기 위해 필요하다. 무지가 욕망보다 앞에 있는 원인이기 때문에, 무지를 없애는 지식이 욕망을 없애는 금욕보다 더 중요하다. 금욕을 아무리 앞세워도 지식이 없으면 근본 원인인 무지를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금욕보다는 지식이 더 중요한 칼이다. … 마음의 정화나 명상 등과 같은 금욕적인 방법들은 지식을 위한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 금욕을 해야만 지식이 생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다 (150).

u       악행을 그치지 않으며/ 평정되지 않고, 진정되지 않으며/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자는/ 지식을 통해/ 이것 (아뜨만)을 전혀 얻을 수 없다 <까타 2.24> 150

u       첫 번째 고리인 무지를 끊으면 연쇄적으로 모든 고리들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기 위해 다른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다 (151).

 

지식이라는 이름의 칼

u       지식, 그것도 뿌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가지들을 버릴 수 있다. 가지들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한, 어찌 가지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식은 항상 브라흐만에 대한 지식이고 아뜨만에 대한 지식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브라흐만이 아니고 아뜨만이 아닌 가지들이 헛것이라는 지식이다 (152).

u       무지, 그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 지식의 빛이 밝혀지면 무지는 한꺼번에 완전하게 사라진다. … 그런데 사람들은 무지 속에 있으면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 불필요한 지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지의 첩첩산중에 놓여 있음이다 (154).

u       무지의 안에 있는 채로/ 스스로 현자이고 식자라고 생각하면서/ 장님 자신에 의해 이끌리는 장님들처럼/ 바보들은 악전고투하며 헤맨다 <문다 1.2.8> 154

u       단순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지이다. 따라서 무지는 앎의 부재가 아니라, 허위적인 앎이다 (154).

u       이 세상의 모든 지식들 가운데 가장 성스러운 지식은 자기 구원에 대한 지식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지식은 신성하기 때문에, 스승은 그 전달의 역할을 마치기 전에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제자는 지식을 모두 전달받은 후에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남김없이 스승에게 바칠 수 있다. 구원에 대한 성스러운 지식이 아니라면, 누가 과연 자기 자신까지 내놓겠다고 말하겠는가! (156).

u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에 대한 지식을 가르친 자는, 지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가진 다른 사람이다. … 결국 이 말은, 직관적 지식을 얻은 스승은 바로 그 지식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의 완전한 앎을 단순 명쾌하고 자신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158).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안다

u       존자시여/ 과연 무엇이 알려질 때/ 이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됩니까? <문다 1.1.3>

u       아뜨만이 알려질 때 이 모든 것이 알려진다.’ (161)

u       이렇게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이 지점에서 엄청난 도약을 감행한다. 하나를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하나에 대한 지식을 통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라고 샹까라는 정리한다 (161).

u       브라흐만이 모든 것의 원천이므로, 브라흐만을 알면 모든 세계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뜨만을 알면 모든 현상을 알 수 있다 (161).

u       <브르 2.4>, <브르 4.5>에서 아즈냐왈끄야의 가르침 가운데 주목해야 하는 것은 듣기, 숙고하기, 명상하기라는 세 단계의 수행법이다. 듣기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직접 들음을 이른다. 숙고하기란 그렇게 들은 것을 깊게 탐구하여 확정함을 이른다. 명상하기란 그렇게 확정한 것을 직접 체험함을 이른다. 그래서 이 세 단계는 차례로 계시의 단계, 이성 (사유)의 단계, 경험의 단계이다 (163).

u       계시된 진리를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운 후에 사유를 통해 확고한 믿음으로 전환하고 나서 마지막에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구현하는 것이, 듣기와 숙고하기와 명상하기이다 (163).

u       지고한 것 (원인)이고 지고하지 않은 것 (결과)/ 그것 (아뜨만)이 보일 때/ 마음의 매듭이 끊기고/ 모든 의심들이 풀리며/ 또한 그의 행위들이 소멸된다 <문다 2.2.9> 164

 

금욕이라는 이름의 칼

u       뿌리를 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은 금욕이다. 물론 금욕은 자유의 직접적인 수단이 아니다. 자유의 직접적인 수단은 오직 지식이다. 하지만 금욕을 행하지 않는 자는 결코 지식을 얻지 못하기에, 금욕은 지식의 수단이 되는 셈이다. 금욕이 지식에로 이끌고, 지식이 자유로 이끈다. 불순한 욕망을 정화한 자에게 스승은, 무지 (무명)의 건너편에 있는 지식의 찬란한 광명을 보여주는 것이다 (166).

u       더러움을 닦아낸 그에게/ 존자 사나뜨꾸마라는 / 무명의 피안을 보여주었다 <찬도 7.26.2> 166

u       따라서 금욕은 자유의 보조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6).

u       극단적인 욕망 부정적인 태도,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또 인도 정통 사상의 가장 큰 물줄기이다 (168).

u       <까타 2.1~2>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두 가지 삶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지선이다. 성공이란 현재의 삶과 다음 생에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이고, 지선이란 구원이나 자유로 이끄는 것이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성공의 길을 선택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선의 길을 선택한다고 한다 (170).

u       지선이란 순간적인 행복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영원한 행복을 목적으로 나아감이다 (170).

u       감각이 원하고 생각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소박한 삶이 향유의 길이라면, 그러함 향유를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이 요가의 길이다. 요가의 길이 곧 지고선의 길이다.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마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것에 특정한 형태로 개입하는 것이 요가이다. 따라서 금욕적 성격이 강한 요가의 길은 부작위의 길이나 지선의 길과 궁합이 잘 맞는다 (171).

u       , , , 공기, 에테르라는/ 다섯 가지로 이루어진 <육체가> 소생할 때/ 요가의 특성이 작용할 때/ 요가의 불로 만들어진 육체를 얻은 자에게는/ 병이 없고, 노쇠함이 없으며/ 죽음이 없다 <싀웨 2.12> 171

u       우파니샤드에서 요가는 불멸에 이르는 하나의 길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요가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수용되는 경우로 한정된다 (171).

 

욕망을 막으면 죽음을 막는다

u       우파니샤드의 목적이 불멸이라면,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남이다. 그렇다면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윤회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173).

u       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윤회 자체가 가짜라는 지식을 얻는 방법이 선양된다. 하지만 금욕은 여전히 유효한 방법이다. 욕망을 막으면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173).

u       그의 가슴에 머무는 모든 욕망들이 멈출 때/ 그러면 (그의) 사멸은 불멸이 되고/ 그는 그곳에서/ 브라흐만을 획득한다 <브르 4.4.7> 174

u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은 유일하게 순수한 욕망이다. 다른 욕망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만, 이 욕망만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 아뜨만을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고, 숙고하고자 하고, 명상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진실한 욕망이다. 다른 욕망들은 거부한 채로 이 욕망만을 좇는다면, 아뜨만에 대한 지식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174).

u       아뜨만을 알고 나면 다른 그 어떤 욕망도 솟구치지 않는다. 아뜨만을 알고 나면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기 때문에 다른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이 완전한 충족으로 말미암아 다른 욕망들은 모두 얻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뜨거운 태양열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람이 물가를 향해 달려가듯이, 아뜨만을 찾고자 해야 한다. 그렇게 해탈을 얻고자 해야 한다. … 이 하나의 욕망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만 불멸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욕망의 물줄기들을 죄다 막고서, 이 하나의 욕망에 물꼬를 튼다면, 죽음이 끝내 불멸로 바뀔 수 있다 (175).

 

다시 자라지 않는 나무

u       지식이라는 칼과 금욕이라는 칼로 나무를 자른다. 그러면 이 나무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칼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스승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도에서 지식과 금욕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통해 전해진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통의 지혜를 몸소 구현하고 있는 스승만이 제자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스승은 계시 그 자체이며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리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76).

u       잘 배우고 지적인 자가/ 실로 간다라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와 같이/ 이 세상에서 대스승을 가진 사람은/ 지식을 얻는다 <찬도 6.14.2> 176

u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대스승으로부터 아뜨만에 대한 지식을 배움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 (177).

 

<6. 뿌리에 머무르는 환희>

뿌리로 시선을 돌리다

u       여전히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다.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은 본디부터 전체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고 있다가 이제야 전체를 전체로 인식하게 되었으니,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늘 그대로 있었고, 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우파니샤드의 기나긴 전략이 끝나는 지점에 바로 이 인식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똑바로 선 나무가 아니라 거꾸로 선 나무에서부터 출발할 때에, 이미 이 인식의 전환을 눈치 채지 않았는가. 결국 뿌리에 머문다는 것도, 가지에서 뿌리로 존재가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저, 시선이 가지에서 뿌리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182).

u       시선을 옮김으로써 즉 인식을 전환함으로써 단숨에 고통이 극복된다 (183).

u       꿈도 없이 깊디깊은 잠을 잘 때에 경험하는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이고 아뜨만이다. 매일매일 깊은 잠을 자면서도, 매일매일 브라하만이나 아뜨만을 만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185).

u       이러한 모든 창조물들은/ 매일 그 브라하만 세상에로 가면서도/ (그것을) 찾지 못한다 <찬도 8.3.2> 185

u       이러한 모든 창조물들은/ ‘존재에 융합하면서/ ‘우리는 존재에 융합한다라고/ 알지 못한다 <찬도 6.9.2> 185

u       그것은 모든 존재들에 숨어 있고/ 아뜨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묘한 주시자들은/ 예리하고 미묘한 지력으로써 / (그것을) 본다 <까타 3.12> 185~6

u       하지만 우파니샤드이 성자들은 그것을, 그 뿌리를 보았다. 단지 드러나있지 않은 그것을 보았고, 한 번 그것을 본 이후에는 배경 화면이 확 바뀐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가상현실이 되고 전혀 알지 못했던 현실이 새로 발견되기라도 하듯, 허상과 실상이 확실하게 구분된 채로 실상의 배경 화면이 그윽하게 깔린다. 배경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뿌리 (186).

u       거꾸로 선 나무가 잘려 뿌리만 남은 상태를 해탈이라고 부른다 (187).

u       해탈이란 업의 고리가 끊어진 것이고 윤회 (고통)의 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187).

u       이러한 해탈을 비이원적 베단따에서는, 다시 생해탈과 탈신해탈로 나눈다. 생해탈이란 살아 있으면서 해탈을 얻음이고, 탈신해탈이란 육체를 떠난 후 즉 죽음 이후에 온전한 해탈에 도달함이다. 또 다시 해탈을, 그것을 획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따라, 즉각적 해탈과 점진적 해탈로 나누기도 한다 (187~8).

u       그런데 육화된 상태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 육신을 벗어난다는 것은 육신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세계가 사라진다는 의미도 아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다. 그저 육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릴 뿐이고, 물질적인 세계와의 관계를 끊어버릴 뿐이다 (188).

u       실로/ 육화된 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호감과 반감의 제거가 있을 수 없지만/ 호감 (즐거움)과 반감 (괴로움) / - 육화로 존재하는 자에게 / 결코 접촉하지 않는다 <찬도 8.12.1> 189

u       육신은 그대로 있고, 오로지 육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육체나 외적 기관들이나 내적 기관들이 아뜨만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아는 것. 즐거움이나 괴로움 따위가 아뜨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육화된 상태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이다 (189).

u       뿌리에 머무른다는 것은, 겉으로 가지에 머무르지만 실제로 뿌리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 (190).

u       생해탈을 얻은 사람은 관성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듯, 일반 사람들처럼 산다. 먹고 마시고 걷고 잠잔다. 라마나 마하르쉬의 예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 하지만 그는 좋은 욕망만을 가지고 있으며 지혜로 충만한 빛을 뿜어 낸다 (190).

 

말의 성찬이 없는 곳에

u       침묵의 성자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비적인 절대자나 절대가 말이 없는 것이라는 데 사람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신으로서 절대자이든지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처럼 중성적인 원리로서 절대이든지, 그것은 침묵 속에서 주어지고 침묵 속에서 취해진다. 말은 신비적 절대자나 절대에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만 할 뿐이지,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191).

u       침묵의 성자로 잘 알려진 메헤르 바바 (1894~1969) 44년 동안 침묵했다. 처음에 그는 종이와 연필 또는 제스처를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했으나, 곧 그마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 메헤르 바바는, 신은 말을 하지 않지만 세상 모든 것과 소통을 하며, 타인과의 소통에서도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좋아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이해하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1).

u       우파니샤드의 전통을 구현한 라마나 마하르쉬는 또 어떠한가. 그는 말과 생각을 초월한 상태가 침묵이라고 한다. … 그래서 침묵은 오히려 말보다 더 강하고 훌륭한 언어이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홀로 있음을 제대로 실천한 성자이다. 홀로 있는 자에게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유일무이한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은 말을 하지 않는다 (192).

u       진리는 말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진리의 진리는 침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192).

u       말을 통해 브라흐만, 아뜨만에 대한 지식을 들은 자는, 이제부터 그 지식을 직접 행해야 한다. 듣기 이후에 숙고하기를 통해 발 빠르게 들은 것을 확정해야 한다. 말이 필요한 과정은 이 지점까지이다. 진리에 대한 무한한 신념과 믿음이 형성되면, 이제 명상하기를 통해 브라흐만, 아뜨만에 집중해야 한다. 말을 묵상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 말에 얽매여 있으면 언어의 기만에 빠지게 된다. 말과 관계하는 진리의 과정은 끝났으므로, 말이 아니라 말하는 자를 알려고 해야 한다. 말의 배후에 있으면서 말을 가능케 했던 그 말하는 자는, 항상 침묵하는 자로서 말의 궁극적 목적이다 (193).

u       명상하기란 침묵과 묵상에서 이와 같이 몰입함이다 (193).

u       존자시여/ 그것은 어디에서 확립됩니까? 스스로의 영광에서 <찬도 7.24.1> 194

 

홀로 있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u       브라흐만, 아뜨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다. 그리고 혼자일 경우에는 두려움이 없다. 홀로 있는 자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 자신이 위대한 영광이다 (195).

u       그는 두려워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혼자 있는 자는 두려워한다/ , 그는 그 (자신)를 생각했다/ ‘ (이외에) 다른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부터 두려워하는가?/ 바로 이로부터 그의 두려움이 사라졌으니/ 과연 무엇으로부터 두려워했던가/ 실로 제2자로부터 / 두려움이 생긴다 <브르 1.4.2> 196

u       실제로 모든 두려움은 이외에 제2, 3, 4자 등등이 존재할 경우에 발생한다. ‘이외에 타자 (타인), 관계, 시간, 공간 등등이 존재할 경우에 발생한다. 두려움은 항상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이 브라흐만, 아뜨만으로 유일무이하게 존재하고 있다면, 도대체 그 어디로부터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겠는가.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깨닫게 되면 모든 두려움이 그 근본에서부터 사라지고 만다. 오직 만이, 널리 존재할 경우에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197).

u       두려움 가운데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음이란, 죽음을 극복한 상태 즉 불멸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불멸이라는 말과 두려움이 없음이란 말이 자주 함께 나열되는 것은 이 까닭에서이다. 홀로 있음을 깨달으면 두려움이 없으므로 곧 죽음이 극복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된다. 아뜨만만이 홀로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을 직각적으로 깨달으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무화되고 만다. 저 삶과 죽음의 끝없는 고리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 그러한 윤회란 미풍에 살짝 흔들리는 가느다란 가지 끝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뿌리는 맹렬한 폭풍이 몰아쳐도 조금의 미동도 없다는 것. 그렇게 홀로 두려움 없이 영원히 있음이, 독존하고 있음이, 완전한 불멸이다 (198).

u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 자신이 바로 그와 같음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또 체험적으로 직시하면, 불멸은 누구라도 얻을 수 있다 (198).

u       브라흐만, 아뜨만에서 간극을 만드는 순간에 두려움이 생긴다. 자기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고 있는 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199).

 

갈 수 있는 명랑함의 나라

u       절대적 자유로서 해탈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슬픔이 없는 상태이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다. 한 마디로 말해,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인도에서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모두 포괄하는 이 고통이라는 말. 삶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런 까닭에, 인도 사상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몸부림이다 (200).

u       고통: 고통이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을 포함하는 모든 악, 인간의 형이상학적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삶에서 겪는 모든 부정적 감정들을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이다. 세계가 이러한 고통의 무대라는 것은 인도인의 염세적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간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낙천적 세계 전망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결국 염세적 세계 인식은 세계에 대한 낙천적 전망을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200).

u       고통에서부터 출발하는 인도 사상은 삶의 전부를 고통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즐거움이나 행복 따위는 지속적이지 않다. 잠깐의 즐거움이나 잠깐의 행복은 고통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201).

u       고통의 차안으로부터 피안으로 건너는 것. 모든 인도 사상이 공통적으로 목적하는 바이다. 어떻게 이쪽 강둑에서 저쪽 강둑으로 건널까? 그 건너는 방법의 다양성이 인도 사상의 다양성이다 (201).

u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여 있는 이 가지에서의 삶은 전체가 고통이다. 그리하여 가지(극소)에도 즐거움은 있지만 즐거움이 없다고 단정해버린다. 진정한 즐거움은 제3의 영역에 있다 (202).

u       3의 영역에서 새로 맞이하는 지속적 즐거움을 명랑함이라고 불러본다. 마치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의 본질인 환희와 같은 그 명랑함.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을 깨달았을 때에 맛보는 그 명랑한 환희 (202).

u       환희 (명랑함)는 뿌리에 머무르는 사람의 현존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말이다 (203).

u       저 뿌리의 넘치는 희열, 융융한 희열, 고요한 희열. 그것은 존재가 본래 머무르던 고향이자 어머니이다. 그것은 시간보다 더 먼저 존재하고 공간의 바깥에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쉬와 신이 추는 우주 창조와 우주 파괴의 춤과 닮아 있다 (203).

u       쉬와 신: 쉬와 교파에서는 쉬와 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말한다. 쉬와 신은 우주적 유희인 환희의 춤을 추는데, 이는 잠에서 깨어남과 잠을 잠, 인간의 탄생과 죽음, 우주의 창조와 파괴라는 순환을 상징한다 (203).

u       이것이 그것의 궁극적 환희이다/ 바로 이러한 환희의 편린에서/ 다른 존재들이 살아간다 <브르 4.3.32> 203

u       언어가 마음과 함께 도달하지 못하여/ 그것으로부터 돌아서고 만다/ () 브라흐만의 환희를 아는 자는 /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따잇 2.9> 203

u       세계를 모든 존재들은 브라흐만의 환희에서 나온 조각 (편린)들이다. 모든 향유주체들은 아뜨만의 환희에서 나온 조각들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환희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 이 원형적 환희는 너무도 광대하고 심오하여 언어나 마음을 통해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 환희를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환희는 괴로움의 세상과 즐거움의 세상으로 나눠지기 이전에 존재하던, 원초적인 우주적 감수성의 결정이다.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 무한한 우주적 감수성의 진상이다 (204).

u       명랑성이란 맑음이고 밝음이고 활기참이고 여유로움이다 (204).

u       명랑성이란 환희를 경험한 정신에서 넘쳐나는 건강성이다. 고통이라고 알려지는 모든 것들이 뿌리가 아닌 가지에 속함을 알고 나서, 뿌리로 시선을 옮긴 사람은, 바로 이 정신의 건강성에로 솟구친다. 음지를 떠나고 양지를 떠나서, 태양 자체의 빛으로 머문다. 괴로움을 떠나고 즐거움을 떠나서, 환희 자체의 명랑함을 뿜어낸다 (204~5).

 

<7. 거꾸로 선 나무를 떠나다>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죽이고

u       깨달음의 상태는 깨어 있으면서 동시에 깊은 잠을 자는 상태와 같다. 말하자면, 생시 상태에서 숙면 상태를 경험하는 제4상태이다 (2110.

u       4상태: “뚜리야라고 불리는 제4상태는 의식의 네 번째 상태이다. 1상태는 생시이고, 2상태는 꿈이고, 3상태는 숙면이다. 4상태는 아뜨만 자체이다. 따라서 깨어 있으면서 순수의식 그 자체가 되는 이 상태는, 개별적 영혼이 겪는 나머지 세 상태를 모두 초월하는 의식의 최고 상태이다 (211).

 

잊고 있는 것을 되찾기

u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그대로 있는 것을 알아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214).

u       태곳적에 완전한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순수와 불멸의 유토피아와 같았다 (215).

u       흐르는 강들이 명칭과 형태를 버린 채로/ 바다에서 소멸되듯이/ 마찬가지로/ 지식을 가진 자는 명칭과 형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지고한 것보다 더 지고한/ 신성의 뿌루샤에 도달한다 <문다 3.2.8> 215

u       유토피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언제나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기에, 거꾸로 선 나무도 자기 자신의 안에 있다 (215).

u       망각과 회복이라든가 상실과 복구라는 구도는 인도인의 사유에서 아주 중요하다. 인도 신화에서 이 우주는 신의 창조 이래로 순수의 시대에서 불순의 시대로 나아간다. 창조 이후의 초기에는 인간이 신성에 가깝기 때문에 순수의 시대이다 (216).

u       인도 문헌사에서 끝없이 주석과 복주석 (주석에 대한 주석)과 복복주석 (복주석에 대한 주석)이 등장하는 것은, 마치 가지가 여러 잔가지로 갈라지는 모습이다 (216).

u       산스크리트어와 다른 언어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수천 년 동안 변화를 겪지 않은 이 완전하고 순수한 언어는 모든 인도어의 모태어로서, 마치 뿌리처럼 버티고 서 있다. 나머지 언어들은 속된 언어, 즉 속어로서 가지들처럼 갈라져 나온다 (216).

u       순수를 망각하고 상실함으로써 오염되거나 훼손된 현재의 것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회복과 복구를 위한 자각이 시작된다 (217).

u       인간을 무한히 긍정하는 인도인들은, 유독 인간만은 단숨에 그 과정을 파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217).

u       만약 우파니샤드에서 인간의 급진적 도약을 설파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식을 수단으로 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무엇을 알면 그 무엇이 된다는 이 논리야말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긍정적인 비약이다 (217).

u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 브라흐만 자체가 된다 <문다 3.2.9> 217

u       이러한 논리는, 알아야 하는 대상인 그 무엇이 자기 자신의 바깥에 있을 경우에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알아야 하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217).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u       거꾸로 선 나무의 목적이기도 한 그 목적은 불멸이다. 불멸이란 윤회로부터 해방이고 해탈이다. 불멸이란 인간의 순환에로 되돌아오지 않음이다 (220).

u       5 2도설: 사후 세계에 관한 우파니샤드의 이론을 5 2도설이라고 한다. 5화는 사후에 영혼이 겪게 되는 다섯 가지 변형 과정을 말한다. 2도란 조도와 신도인데, 조상 세계로 가는 영혼은 다시 태어나고 신격 세계 (진리 세계, 브라흐만 세계)로가는 영혼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220).

u       이제, 고행을 통해 금욕을 통해/ 믿음을 통해 지식 명상을 통해/ 아뜨만을 추구함으로써 북쪽을 따라 태양을 정복한다/ 실로 그것은 생기들의 거주지이다/ 그것은 불멸이고 두려움이 없음이다/ 그것은 궁극적 목적지이다/ 그것으로부터/ ‘그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쁘라 1.10> 221

u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고, 그것은 마치 윤회처럼, 시작되고 또 끝난다. … 결국 삶이란 습관적인 반복의 연속이고, 이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소리가 바로 되돌아오지 않음일 수 있다 (222).

u       우파니샤드가 죽은 자를 위한 노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되돌아오지 않음이라는 것도 이 하나뿐인 삶을 위한 철저한 긍정이라고 풀이해야 한다 (223).

u       어쨋거나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함은 되돌아올 곳이 없기 때문에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223).

u       불멸이란, 지금 여기에서, 진실과 빛으로 충만한 투명한 의식으로써 세상 만물의 존재를 함께 공감하고 그 무한한 환희를 함께 발산하는 것이다.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려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모든 것들을, 소멸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들을, 뚫고 들어가 박차고 솟는 길밖에 없다 (223).

u       삶의 결핍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을 때에, 역설적으로 쉽게 사라지거나 채워진다. 하지만 쉽지 않다. 확신이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곳으로 가는 길에 더 많은 결핍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발걸음을 항상 주춤거리게 만든다. … 낯익지 않으면 두려움이 배가 된다. 낯익지 않으면 첫 발자국을 떼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이다 (224).

u       우파니샤드의 성자들은 단지 고개를 이쪽에만 고정시키지 말고 저쪽을 한 번쯤이라도 쳐다보라고 말한다. 그들이 먼저 그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오지 않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되돌아와 이렇게 보일 뿐이다. 물 잔에 물이 가득차면 흘러넘치듯이, 그들은 넘치는 충만감을 그렇게 보여 주었고, 그것이 넘쳐서 여기까지 흘러 왔다 (224).

u       우파니샤드는 바꾸려고 하지 않고 단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는 그저 삶에서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보이지 않는 실재가 실은 더 잘 보이는 것임을 알리면서, 넌지시 주의를 끌 뿐이다 (225).

u       생각되지 않은 자에게 생각되고/ 생각된 자는/ 알지 못한다/ 아는 자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 알려진다 <깨나 2.3>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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