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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2일 02시 23분 등록

선비답게 산다는 것” – 안대회 지음/ 푸른역사

 

 

저자에 대하여

 

안대회 교수는 19613 8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와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있다. 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고전 읽기를 계속하여 다양한 저서를 저술해 왔다. 특히 조선후기 한문학이 온축해온 감성과 사유의 세계를 대중적인 필치로 풀어냄으로써 역사 속 우리 선조들의 삶과 지향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바꿔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서로는『부족해도 넉넉하다』『조선의 프로페셔널』『선비답게 산다는 것』『조선후기 시화사 연구』『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7일간의 한자여행』『고전 산문 산책』『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윤춘년과 시화문화』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산수간에 집을 짓고』『소화시평』『궁핍한 날의 벗』『북학의』『선집 한서열전』『나를 돌려다오』『연경, 담배의 모든 것』등이 있다.

 

안대회교수는 작년 2월 조선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가 정적인 노론 벽파 수장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비밀편지(어찰)의 입수, 해독, 공개 작업을 주도하였고, 계간 <역사비평> 87(여름호)에 ‘어찰의 정치학: 정조와 심환지’란 논고를 실으면서 어찰 등에서 발굴한 새 사료들을 근거로 독살설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발표해서 주목을 받았다. 안 교수는 이 논고에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이 제기한 노론 벽파 독살설은 정황과 추정만 제시한 허구에 불과하다”며 “정조는 명백히 병사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독살설 의혹에 대해 기존 학계에서 본격적 근거를 제시하며 처음으로 반박 글을 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선비 살해사건의 저자로 유명한 이덕일 소장은 즉시 반박하면서 "정조 어찰이 발견되었다고 노론 벽파의 정조 독살 의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둘 사이에 비밀 편지가 오갔다고 해서 심환지가 정조와 가까운 사이였거나 정조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조 어찰 발견 후 둘이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심환지가 정조독살에 가담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정조독살설이 힘을 잃게 되었다는 보도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박정희와 카이사르의 예를 들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기 때문에 독살했을 리 없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측근에게 암살됐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편지가 발견된 것만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측근이므로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이 소장은 '독살설 허구'란 주장은 "억지 해석"이라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노론 벽파와 조선사편수회의 후손이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하고 다른 해석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 "심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은 것은 뭔가?" - 오마이뉴스

이러한 양쪽의 두 주장이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입증해 갈지 주목된다.

출처 : "환지가 정조 측근이라 독살 아니라면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은 것은 뭔가?" - 오마이뉴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옛글을 읽고 옛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요 취미다. 그런 점에서 호고벽에 빠진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하다. 새로우면서 현재에도 큰 의미를 던져주는 글과 삶은 없을까 늘 찾아다닌다.[5]

 

그런 생각으로 옛글을 읽다가 선비들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찾게 되면 메모하고 또 글을 썼다. 한 편 한 편 축적해 놓고 보니 조선시대 선비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던 모습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틀에 박히고 화석화된 존재가 아니라, 펄펄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연출해 내는 삶의 진정성이 글이라는 낡은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었다.[5]

 

 

1부  인생과 내면

 

무덤 가는 이 길도 나쁘지 않군 스스로 쓴 선비들의 묘지명

 

미리 유서를 쓰는 일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런 일은 자만시와 자찬묘지명을 창작하던 오랜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자만시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시요, 자찬묘지명이란 자신의 무덤에 스스로 쓴 묘지명이다.[15]

 

시인 묵객들은 종종 직접 시를 지어 스스로 죽음을 애도했다. 마음에도 없이 애도의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타인의 만시보다는 저승 가는 길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 애달프다 못해 참으로 아름답다. 때로 자만시는 시인의 절필로 이어지기도 했다.[16]

 

자찬묘지명! 그것은 죽음에 직면해 남의 시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길이다. 죽음의 공표에 떨기보다는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자기 죽음을 그려 보는 일이다. 죽음에 앞서 자신의 죽음을 타자의 죽음처럼 차분하게 응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23]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써 놓았다고 한다. 짧은 한 문장에 독설과 자학이 유머러스하게 녹아 있다. 우리도 자신의 묘지명을 한 번 써봐야 하지 않을까?[23]

 

일기는 이 한 몸의 역사다 – 13년 동안 써 내려간 일기 <<흠영>>

 

옛 문인 가운데 유만주(1755~1788)라는 문필가는 24책이나 되는 방대한 일기 <<흠영>>을 남기고 34세에 요절한 불운한 문인인데 그 일기가 근래에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일기는 유만주가 스물한 살 되던 1775년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한다. 새해의 출발과 더불어 그는 계획적으로 일기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 이후 죽음이 그를 데려간 13년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26]

 

일어난 일을 날마다 기록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 무릇 사람의 일이란 가까우면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멀어지면 헷갈리며,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일기를 쓴다면 가까운 일은 더욱 자세하게 기억하고, 조금 먼 일을 헷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도 잊지 않는다. …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흘히 할 수 있으랴. - <<흠영>>의 서문[27]

 

유만주는 단조로운 신변잡기에서부터 날마다 목도하고 경험한 세상사, 사람들과의 대화, 눈여겨 살핀 서책과 문서, 생각하고 고민한 모든 것을 일기에 기록했다. 다시 말하면, 이 일기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과 사회의 전모를 담아내려 한 야심찬 저작이다.[30]

 

하지만 <<흠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은 무엇보다 독서 경험과 사유의 기록이다. 그는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책을 수없이 되풀이 해 읽고 그에 관한 소감을 기록했다.[32]

 

<<흠영>>은 한 개인의 역사를 철저하게 기록하려는 정신을 제대로 구현해 냈다.[34]

 

진정한 즐거움은 한가한 삶에 있다 이경전과 김정국 식 여유

 

속도를 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많은 것이 소외되고 잊혀졌다. 느림과 여유를 되찾자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힘을 얻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한 요구가 퇴영적이라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난날의 느린 생황에 대한 부러움이 솟구칠 때가 적지 않다. 옛선비는 날씨가 궂으면 궂은 대로, 재물과 권세가 없으면 없는 대로, 넉넉한 시선으로 살아가려 노력했다. 그런 옛사람의 여유로운 삶이 때때로 부럽다.[38]

 

눈 내리는 밤, 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 정자로 나갔다. 정자에는 벌써 어느 일행이 앉아 술잔을 데우고 있다.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진 한밤, 오로지 눈 구경을 위해 그것도 서호 한복판에 있는 정자에 올랐다. 그런데 거기에 자신과 똑 같은 바보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간도 공간도 멈추어버릴 것만 같은 누세계에서 겨자씨 같은 내 배, 배 안에 좁쌀 같은 두세 사람의 존재감은 오로지 저런 바보들만의 것이다. 수백 년 전에도 이러한 경계는 극소수 고독한 사람들만의 것이었다.[39]

 

뜬구름 같은 인생에서 우연히 반나절 한가함을 얻는다.”[41]

 

청복이란 깨끗한 행복이니 재물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에 매이지 않은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자연에서 얻는 행복, 청빈한 삶에서 얻어지는 만족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청복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42]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맞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 사재 김정국(후에 호를 팔여로 고침) [43]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이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다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내 자네를 따라서 여덟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속물을 따라서 부족함을 걱정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네 그려. – 팔여 김정국의 친구의 답신 [44]

 

이렇게 팔여라는 호에는 불우한 시절을 원망과 증오로 보내지 않고, 여유와 청빈을 즐기며 인생의 위의(威儀:위엄과 자세)를 지키려 했던 사재의 지혜가 빛난다.[45]

 

그대는 살림살이가 나보다 백 배나 넉넉한데 어째서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기야 하지.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라네. 이 열 가지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데 이외에 필요한 게 뭐가 있겠나. – 사재 김정국[46]

 

그가 욕심내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속물적인 탐욕과는 거리가 멀고, 청복을 누리기에 마땅한 것이다. 친구가 부린 욕심이 노탐이라면 사재가 부린 욕심을 청탐이라고 해야겠다. 욕심이라 할 수 없는 욕심을 힘주어 말하는, 따뜻하면서도 여유로운 노년의 사재를 생각하면 조선조 선비의 꼿꼿한 모습이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중년에 고생하며 어렵게 세운 생활 철학을 고수하였다.[46]

 

진정한 즐거움은 하가한 삶에 있다는 사재의 말이 인상적이다. 갑작스러운 불행과 빈곤은 대게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사재는 그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편안히 받아들여 오히려 이제부터 진정으로 즐거울 수 있다고 하였다. 시련조차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재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뿌리다.[47]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성호 이익의 절식 철학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이 먹기론 천하 제일이라는 성호의 비판은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53]

 

성호는 자신을 천지간의 좀벌레 한 마리라고 표현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생각을 가진 성호는 양심적인 선비였다. 그런 그에게 최선의 경륜과 양책은 다름 아닌 절식이었다. 안 먹을 수는 없지만 줄여 먹을 수는 있기에, 그는 한 그릇에서 한 홉의 쌀을 덜어내는 절약을 실천했다.[54]

 

적당하게 먹으면 편안하고

지나치게 먹으면 편치 않다.

의젓한 너 천군이여!

입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천군은 몸의 주재자인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55]

 

권세가와 선비의 갈림길 역사가 심판한 김안로, 역사가 평가한 유몽인

 

처형 당시의 법률적 판단보다 더 매서운 것이 뒷사람의 평가다.[57]

 

과부는 곧 유몽인 자신이다. 오랜 세월 수절하여 늙은 마당에 새삼스레 인생을 바꿔보겠다고 변절할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당연히 광해군을 배반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훗날 유몽인은 광해군의 신하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를 지킨 신하라는 평을 들었다. 유몽인의 이런 처신은 한평생 굳게 지켜온 신념의 결과였다.[63]

 

진흙탕에 뒹굴어도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결백한 행동이고, 먹을 것이 있다고 마구 달려드는 것은 비루한 짓이오. 내가 어디에 처해야 하겠소? 아무래도 재와 부재, 현과 불현, 지와 우, 귀와 천의 사이인가 보오. – 유몽인 [64]

 

천지가 뒤집힌 세상을 만나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그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중립에 서려 했다. 유몽인은 어디에도 빌붙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64]

 

나는 혼자다. 그들의 냉혹함이 얼음장 같다 해도 나는 떨지 않고, 그 뜨거움이 대지를 불태운다 해도 나는 타지 않는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이, 오직 내 마음 가는 대로 쫓아갈 것이다. 내 마음이 찾아가는 곳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다. 그러니 거취가 느긋하여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 유몽인

 

편을 가르는 짓거리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과감히 밝혔다.[65]

 

 

2부  취미와 열정

 

나의 희한한 수집벽이 제대로 평가 받기를 서화 소장가 김광수와 장서가 이하곤

 

조선 전기 이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축적되어 온 결과, 18세기에는 열정과 집념을 지닌 예술가와 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여러 분야에서 마니아들이 출현해 문화계에는 활력이 넘쳤다. 그 무렵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사대부상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인이 출현하였다. 그러한 지식인상을 대표하는 것이 장서가와 수집가다.[71]

 

영조 때 사람인 호고당 김광수(1699-1770)은 호고 취미가 있어 오래된 서화나 청동기 같은 골동품을 수집하고 수장하는 벽이 있었다. 옛것을 숭상한다는 상고당이란 호에 그의 관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어떤 이가 집을 사려는데, 뜰에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자 제값보다 많은 돈을 치르고 그 집을 사기도 하였다. 그가 소장한 서화와 골동은 천하의 명품이고 명품이고, 시문집과 패관 잡기는 천하의 기서였다. 그처럼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서화와 골돌을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감상한 사람은 전에는 거의 없었다. 그가 조선에 미술품 소장의 붐을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광수는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기 취미에 몰두한,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마니아였다.[72,73]

 

그는 나를 위해 늘 좋은 술을 차려 놓았다. 흥이 나면 바로 나를 생각했고, 생각하면 바로 말을 보내서 나를 찾았다. 나 또한 흔쾌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문에 들어서면 손을 잡고 웃고 나서 마주볼 뿐 다른 말이 없다. 책상 위의 책을 가져다 몇 구절 쓱 읽고, 옛 종이를 펼쳐본다. 그러면 그는 벌써 향을 사르고 두건을 뒤로 젖혀 차를 달였다. 차를 권하며 시간을 보내다 땅거미가 져서야 돌아왔다.

 

회심우(마음 맞는 벗) 끼리의 다정다감한 우정이 글의 여백에 가득하다.[77]

 

새로운 조류가 풍미한 18세기, 자기만의 세계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벽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 대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에 비해 성숙했던 때라 가능한 일이다.[81]

 

조선 정조 시대에 설립된 규장각은 많은 서적을 갖추고 있었으나 국가 기관이어서 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개인이 서적을 모아 지식을 얻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애썼다. 그러한 결과 사설 도서관의 구실을 겸한 장서를 가진 장서가들이 출현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서재를 개방하기도 했다. 담헌 이하곤(1677~1724) 같은 이는 초기의 장서가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충북 진천에 완위각이란 서재를 열었다. 이곳은 희귀도서를 구비했기 때문에 여러 벗들이 이곳을 찾아와 독서에 몰두하며 지식을 교류했다. 이하곤은 책거간꾼만 보면 옷을 벗어서라도 책을 구입할 정도로 애서가였다. 그렇게 모은 서적이 만 권을 넘어, 완위각은 만권루가 불렸다.[82]

 

가난한 집에 가진 거라곤 책 다섯 수레뿐 그것을 제외하면 남길 물건이 전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서책을 못 떠나니 전생에는 틀림없이 좀벌레였나 보다.[84]

 

그림을 아는 선비, 제발을 남기다 의원 김광국, 고증학자 성해응

 

품격과 위의를 갖춘 선비라면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빠져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격이 높은 사대부에게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겸비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좋은 작품을 구하면 입수 경위, 예술가에 대한 견문 그리고 감상을 기록하는 것이 안목 있는 선비가 해야 할 일이었다. 서화 작품에 덧붙인 이러한 글을 제발이라고 한다. 제발은 그림에 대한 지식을 담는 차원을 넘어 예술적 품위를 한껏 발휘하는 문예작품으로 승화한 경우가 많다. 현물이 사라진 옛 그림에 간한 일화 또는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는 사실이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런 제발을 전문적으로 남긴 감상가나 문사들이 종종 있었다.[87]

 

석농 김광국(1727~1797)은 내의원이었지만 서화를 열심히 수집했고, 그렇게 모은 그림에 많은 제발을 남겼다. [90]

 

우아하고 점잖은 사치 벼루와 시전지 이야기

 

검소하고 소박하게 욕심 없이 살려는 것이 많은 선비들의 바람이었다. 따져보면 삶의 여건이 그렇기도 했다. 이처럼 의식주를 최대한 절제할 수 밖에 없는 선비들이지만 마냥 거칠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영위한 것만은 아니다. 선비의 사랑에 놓인 물건들에서 배어나는 절제된 아름다움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아하다. 사치라도 우아하고 점잖은 사치이고 기꺼이 따라하고 싶은 호사이다. 특히 문방구에서 그들은 호사스런 사치를 부렸다.[99]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신체에 해를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아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오로지 문방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은 호사를 부리면 부릴수록 고아하다. 귀신도 너그러이 눈감아줄 일이요, 신체도 편안하고 깨끗하다. – 유만주의 일기 중에서 [100]

 

벼루는 문인들에게 깊은 애정의 대상이었다. 문인의 일용품인 문방사우 중 종이에서 멋을 부린게 시전지라면, 벼루도 그것 못지않게 우아한 사치의 대상이었다.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다는 정철조 같은 사람도 있다. 문인들은 벼루를 얻고서는 그에 대해 품는 애정을 명리란 문체의 글로 표현하기 좋아했다. 이른바 연명이다.[104]

 

벼루야! 벼루야!

네가 작은 것은 네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너는 한 치의 웅덩이에 불과해도 내 끝없는 생각을 펼쳐주지만

나는 여섯자 큰 키에도 네 힘을 빌려 사업을 이루잖니! [105]

 

시전지란 시를 쓰기 위한 작은 종이로서 꽃무늬를 많이 사용했기에 화전, 금전이라고도 불렸다(전은 폭이 좁은 종이를 의미한다). 시를 쓰기 위한 원고지에 그치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시전지가 사용되었다. 시를 쓰고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은 옛 선비들의 일상 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사람들 사이의 고아하고 운치 있는 행위였기에 문사들에게는 평범한 종이를 피해 멋들어진 종이를 사용하고픈 욕구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109]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문사들은 자신의 예술적 취향에 따라 독특한 시전지를 개발했다.[112]

 

남몰래 예술가를 키운 명망가들 서평군 이요와 이정보

 

영조 때 이요(1684~?)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요라는 이름보다는 서평군으로 더 알려졌는데, 왕실의 종친이면서 영조의 신임이 유달리 두터운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다. 조선시대에는 서평군과 같이 문예를 후원한 종실이 많았다. 종실 사람은 원칙적으로 정치 참여가 허용되지 않는 대신 경제적으로는 매우 넉넉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겠지만 예슬 작품을 수집, 감상하고 악사나 화가를 지원하며, 바둑과 같은 유흥 문화에 탐닉하는 이들이 많았다. 본디 재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예술가 후원에 나설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세상원리다. 또한 당시에는 재력과 지위를 확보한 명망가는 휘하에 탁월한 예술가와 기능인을 거느리는 것을 명예로 아는 풍조가 있었다.[120]

 

당대의 가객들이 모두 서평군의 보호 아래 활약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종을 10여 인이나 데리고 있고, 그의 희첩들까지 노래와 춤에 능했다니 그야말로 음악 애호가라고 평해도 좋을 듯 하다. 서평군의 저택은 음악가와 무용가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예술을 논하는 살롱이었다. 서평군은 넉넉한 재산, 타고난 예술가적 천분을 바탕으로 많은 재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예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123]

 

서평군이나 이정보의 행적을 보면 후원자와 예술가들 사이에는 제삼자가 알 수 없는 끈끈하고 인간적인 유대감이 흐른다. 후원자는 경제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도록 교육하고 신뢰하였다. 예술가는 그런 후원자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들이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후원한 진정성은 시대를 넘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131]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하는 것과 같다 산수의 멋을 즐긴 선비들

 

예전에는 세상사와 인연을 끊고 무사로 보내는 것이 최상의 피서라 했다. 한여름 시원한 창가에 누워서 <산수기>를 읽는 것, 이름하여 와유산수면 피서로는 그만이다. 실제 여행은 봄과 가을에 하고 여름에는 산수기를 읽으며 상상의 여행을 즐기는 것이 전통이라면 전통이다.[134]

 

옛 선비들의 산수기는 여행지 안내 이상의 의미와 재미를 제공했다. 정보뿐 아니라 여행자의 독특한 체험, 인생, 철학, 예술을 담은 멋진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산수기에는 여행자의 깊고 진지한 사색이 배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수 체험에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큰 열정을 가진 이가 적지 않았다. 산수의 외형적 아름다움도 찾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게 다반사였다.[135]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와 같다.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실은 충분히 익히고 또 익히는 데 핵심이 있다. 굽이굽이 환하게 파악하고, 그 자태를 또렷하게 간직하고, 그 정신과 통해야만 비로소 터득하는 것이 있다. 서둘러 대충 섭렵하고서야 무슨 수로 오묘한 경지를 얻을 수 있으랴? – 어유봉의 <동유기> 중에서

 

독서와 마찬가지로 산을 설렁설렁 보아서는 산의 오묘한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독서에서도 섭렵이 아니라 숙독을 강조했고 산을 보는 데도 역시 깊숙한 수련을 요구했다.[135]

 

낭떠러지와 정상을 뒤져 오르고 구름과 달을 뒤쫓아 가노라면, 절로 마음에 맞을 뿐만 아니라 내게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되오. 내게는 산천이 진실로 좋은 벗이자, 훌륭한 의원이오. – 김창흡의 편지 중에서[136]

 

명산 탐방은 일종의 구도 행위였다. 시나 산문은 그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실례로 조선시대 명산 탐방의 정점에 있던 금강산의 경우 금강산 문학이라고 할 만큼 각양각색의 수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137]

 

그러나 이상하게도 민족의 성산이라는 백두산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작품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2~300년 전만 해도 백두산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탐승이라기 보다는 탐험의 대상이었다. [137]

 

무릇 유람이란 아취가 중요하다. 날짜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아름다운 데를 만나면 바로 멈추고, 지기지우를 이끌고 회심처(마음에 맞는 곳)를 찾아야 한다. 복잡하고 떠들썩 거리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 나는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을 들었노라고 대답했다. – 박제가의 <묘향산소기> 중에서

 

신분의 벼을 뛰어넘은 문인들 시인 삼대와 시인 홍세태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학문과 예술 분야도 양반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아닌 사람들이 문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귀족이 독차지한 고급 문화의 창작에 낮은 신분의 문사들이 동참함으로써 문화계 저변이 크게 넓혀졌다.[149]

 

서얼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대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전문적인 능력을 배양했다. 시의 창작도 그런 능력의 하나였다. 양반은 시를 교양의 일부, 학문의 여기로 여겼지만, 서얼들 문인들은 시 창작을 인생을 건 직업으로 삼았다. 특히 이봉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전문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봉환(1710~1770), 그 아들 이명오(1750~1836), 손자 이만용(1792~1863), 그들의 시는 천분과 가학의 산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으레 유산이라면 재산과 벼슬을 떠올리던 시절 이 집안은 시 짓는 능력을 유산으로 물려줬다. 삼대 시인은 시재를 인정받아 장안의 명문가를 비롯한 당대 최고 시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150]

 

홍세태(1653~1725)는 숙종 때의 여항시인이다. 조선 후기에는 중인 이하의 평민과 천민들이 모여 시회를 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러한 부류의 문인을 세상에서는 여항문인이라고 했다.[155]

 

홍세태의 노력으로 인해 도회지 골목에 사는 서민들이 모두 책을 끼고 독서에 매달렸다고 한다. 학문을 연마하고 독서하는 것이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는데 서민들도 거기에 참여하는 현상이 18세기에 일어났고 홍세태가 그런 움직임에 촉매제가 되었다는 주장이다.[157]

 

 

3부  글과 영혼

 

편지로 운명을 위로하다 이규보의 <나에게 부치는 편지>와 선비들의 척독

 

예전에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인편이 이용되었다. 도는 다른 사무를 보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에게 부탁해 편지를 보냈다. 공간을 초월해 무제한의 속도로 재빨리 오가는 이메일에 비해 느리게 전달되는 그와 같은 편지를 달팽이 편지라 부른다.[165]

 

교통이 발달하기 이전에 편지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다. 의사소통과 학문적 교류, 생활 정보 전달은 대부분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보내는 사람의 독특한 필체로 표현된 마음과 정서를 주고 받았다. 사연과 용건을 실어나르는 도구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편지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편지 중에는 유달리 사람 향기가 물씬 배어나는 글들이 많다.[166]

 

불과 수십 개의 단어로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전하는 척독이라는 편지는 어떤가? 재치 있는 비약과 압축이 선사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재미있다. 우리가 보통 편지라 부르는 것은 구구절절 상세한 내용을 담은 서간과 극히 짧은 내용을 적은 척독 두 종류로 구별된다. 서간은 사실을 상세히 알리거나 상대를 설득할 목적으로 쓴 장황한 편지인 반면, 척독은 보낸 이의 심경과 감정의 토로를 특징으로 한다.[171]

 

충청도에서 제주도까지 그 먼 바닷길을 여행하고 한라산을 오르는 일은 당시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자식의 중병에도 홀연히 길을 떠나는 토정의 성품과 상대방의 준비 여부를 배려하지 않고 내일 당장 떠나자고 밑도 끝도 없이 몇 마디로 표현해 버리는 그 마음 씀씀이 대단하다. 그도 그렇지만 이렇다 저렇다 구질구질하게 따지지 않고 친구 따라 당장 떠난 고청의 행동도 범인의 그것은 아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예절과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여 좌고우면하는 범인과 대비하면 두 선비는 정말 어려운 결단을 쉽게도 내리는 사람이다.[173]

 

이렇게 짧은 글에서 인간미를 발견하는 즐거움, 그것이 척독을 읽는 재미이다.[174]

 

제사를 올려 내 정신에게 사죄하다 문학의 신에게 바친 이옥의 제문

 

매사에 전기라는 것이 있다. 좋지 않은 상홍에 처했거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상황을 반전할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려 사람들은 좋은 날을 가려 전기로 삼는다. 옛사람들의 글에서도 심기일전의 기회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자주 발견된다. 동짓날과 제야에 쓴 시문이 특히 그러하다. 이 세시명절은 모두 묵은 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179]

 

지난날 동짓날은 가장 큰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음기가 극에 달한 순간 양기가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세 또는 작은설이라고도 불린 동짓날부터 다음 해가 시작된다고 여겼을 정도다.[180]

 

문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 글쓰기를 관장하는 신령이 있다고 생각한 문인들은 그 신령을 문신이라고 했다.[180]

 

왜 문학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을까? 제사를 받는 문학의 신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일컫는 다른 이름으로, 글을 짓느라 갉아먹은 자기 정신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제사를 올린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뇌력을 몹시 손상시킨 작가가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제사를 올렸다.[180]

 

그리운 이에게 바치는 오마주 박제가와 조희룡의 회인시

 

문학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기 좋은 그릇이다. 옛 시인들은 회인시라 하여 적게는 수십 수에서 많게는 100여 수가 넘는 연작시를 지었다. ‘그리운 사람의 시라는 뜻을 지닌 회인시를 쓴 대표 시인은 박제가로, 그로부터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188]

 

회인시는 작게는 한 시인의 교유록이고, 넓게는 한 시대의 명사록이다. 지식인들의 개성과 지적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시대의 문화사라고 말해도 어긋나지 않는다. 인간을 향한 따뜻한 사모의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회인시의 매력이다. 옛사람은 가고 없어도 따스한 정감은 아직 살아 있다.[192]

 

어린이라면 누구나 좋을 시를 쓸 수 있다 박엽과 목만중의 동몽시

 

어린이가 쓴 한시를 동몽시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시를 쓰는 것이 교양의 하나였기에 조선시대의 동몽시는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아이들에게는 한시의 엄격한 격식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최대한 자유롭게 쓰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인지 동몽시에는 성장한 이후의 시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재치가 반짝인다.[197]

 

뜻밖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동몽시의 느낌을 살려 한시를 지었다. 현실에 묻혀 사는 생활인에 비해 시인은 동심을 많이 간직한 존재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시인이란 어린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 시의 오묘함은 모두 어린아이의 말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200]

 

도덕적 기준으로 남의 글을 재단하다 조선시대의 필화 사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검열은 존재한다. 더구나 조선 사회는 유학과 윤리 도덕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출판과 독서에 그 이념을 강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학 외의 신념을 선전하거나 비윤리적인 사실을 미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203]

 

당시 사람들은 문집이란 한 개인으 글 가운데서도 올바르고 뛰어난 정수를 담아 후세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악한 내용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문집을 간행할 때 편집자가 개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는 원전을 개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개선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205]

 

역사는 천하의 공언이다 역사 바로잡기와 뒤집어 보기

 

안타깝게도 역사의 기술은 객관적이지 않다.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담론은 나란간의 이해 관계와 정세에 따라 변형, 가감되기 일쑤고, 최악의 경우 왜곡되기까지 한다.[215]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의해 왜곡된 역사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외교적 수단까지 동원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216]

 

역사 바로잡기는 국내에서도 진행되었다. 조선에서는 조정이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중국 책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책은 소지한 것 자체로도 반역죄에 해당되었다.[220]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야사의 저술을 엄금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는 야사가 적지 않게 출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려(1766~1821)이다. 김려는 야사 정리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전래하는 사본을 전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용의 오류를 찾아 바로잡고, 주석을 꼼꼼히 다는 등 정밀한 텍스트 비평을 가했다. 우리 야사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하고 정리한 그의 작업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학술 작업 중 하나라고 평가하고 싶다.[223]

 

 

4부  공부와 서책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이와 벗 삼으리 박지원과 박규수의 옛글 읽기

 

사업상 만나는 지인과 다르게 친구라면 그 무언가를 가지고 내 인생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래서 형제와 다름없다는 비기지제非氣之弟라는 옛말은 가까운 친구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 말이 낯설지 않을만큼 옛사람은 벗을 소중하게 여겼다.[231]

 

이덕무의 글에 암시된 대로 친구와의 만남에는 필연보다 우연이 작용한다. 그런 기막히게 소중한 우연을 허락해 주었으니 천지신명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233]

 

자주 만나다 보면 친구를 만나도 무료해질 수가 있다. 그런 구차함이 느껴질 땐 차라리 천년 전 벗과 사귀어보라고 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지금 살아있는 현명한 사람을 벗 삼아 지내는 것이 정녕 옳지만 같은 세상을 사는 친구라면 구차한 일, 무료한 일이 있기가 쉽다. 그럴 때에는 책 속에 살아 있는 천 년 벗과 대화를 나누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옛사람과 만나다 보면 공부가 되는 것은 물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일 것이다.[235]

 

박규수는 약관의 나이에 <<상고도회문의례>>라는 저서를 편찬했다. 이 책은 본받고 싶고, 친구 삼고 싶은 옛사람을 옛 전적에서 골고루 뽑아 그들만의 개성과 특징을 보여주는 행적과 일화를 소개하였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 인물과 그 일화에 대해 생각하고 평가한 바를 자유롭게 펼쳐냈다. 책 제목에 이미 옛사람과 대화하고, 동시대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은 소망이 뚜렷히 담겨 있다. 대화와 어울림의 매개가 되는 것은 글이고 책이다.[237]

 

옛사람은 한가로울 때도 바쁜 순간이 있듯이 바쁠 때도 한가로운 한 순간이 있다라고 하였다. 어찌 독서만이 그러랴? 무릇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말을 자신을 반성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리라. 이 이야기를 적어두어 옛일을 본받고자 한다.- 박규수[238]

 

박규수의 <<상고도>>가 특별한 이유는 또 다른 데 있다. 책을 읽는 방법이 독특한데, 골패를 던져 읽을 글을 고르고 연습할 문투까지 지정했다. 9*9=81개의 숫자를 숨은 그림 찾기처럼 배열하고 정중간에는 공란을 넣어서 총 80개의 숫자를 만들었다. 골패를 던져 한 숫자를 얻으면, 그 숫자에 속한 글을 찾아가 읽도록 고안했다. 기획 의도와 편집 방향도 참신하지만 유희성을 가미한 독특한 서적 활용법이 더욱 흥미롭다. [241]

 

가을비 내리고 낙엽 지는 아침 또는 큰 눈이 내리는 밤에 대숲을 향해 난 창가에 앉아 쓸쓸하고 무료한 시간에 손에 잡히는대로 한 구절씩 뽑아 읽으면 거기에는 벗을 삼고 싶은 옛사람이 있고, 본보기로 삼을 행위와 격언이 있다. 굳이 문을 벗어나지 않아고 사귀고 싶은 인간이 많다. 그들과 더불어 노니는 즐거움, 그것은 현세의 장삼이사를 만나 억지로 비위 맞추느라 웃는 얼굴을 꾸미는 괴로움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245]

 

선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조선시대의 베스트셀러

 

조선에서는 책을 간행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종이 값이 너무 비쌌다. 따라서 더 저렴하게 책을 출판할 수 있는 중국에 가서 만든 후 되가져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256]

 

조선시대에는 서적 출판을 기본적으로 국가가 관할했다. 그렇다보니 정확도와 선명도를 비롯한 편집/인쇄 수준은 매우 높았으나 보급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서적이라도 그것을 출간하거나 소유하는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필사본이다.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개인들이 책을 빌려 베끼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편으로는 필사 자체가 매우 강도 높은 공부 방법으로 이용되었다.[260]

 

그 가운데 서체가 아름다운 필사본이 눈길을 끈다. 베낀 사람의 독특한 서체와 개성이 드러나 있는 필사본은 열람할 때 느낌이 색다르다. 특히 저명 문인들이 남긴 자필원고 중에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 있어 책을 펼치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261]

 

끊임없이 읽고 기록하라 공부하는 법, 글쓰는 법

 

소리내어 글을 읽는 것, 글을 통째로 암송하는 것이야말로 옛사람들의 독서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주로 초학자를 위한 방법이었다.[266]

 

실학자로 널리 알려진 홍대용은 전통적인 방법과 새로운 방법을 조화시킨 공부법을 제시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집중이다. 정신을 집중해 내용을 파악하고 채득하여 글의 뜻을 조용히 음미하는 것이 그가 제시한 독서법의 핵심이다.[268]

 

글을 송독하고 사유해야 한다. 글을 송독하면 나의 지식을 풍부히 쌓게 되고, 그 의미를 사유하면 내가 습득한 지식을 견고하게 만든다. 송독하되 사유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고, 사유하되 송독하지 않으면 지식이 고갈된다.” [271]

 

글을 배우는 세상 사람은 여러 차례 글을 읽지 않으면 외울 수 없고, 능숙하게 외우지 않으면 그 맛을 터득할 수 없으며, 깊이있게 생각하지 않으면 깨우칠 수 없고, 널리 보지 않으면 취할 만한 소재가 없다.”[272]

 

이처럼 독서론이 풍부하게 나온 것은 선비들의 삶에서 독서가 그만큼 큰 의미가 있어서다. 이들에게 책이란 경건하게 다루어야 할 대상이고, 독서는 경건하고도 신비스런 체험이었다. 그렇기에 독서 문화에는 과거 선비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272]

 

독서십법

l  기사 : 자기에게 필요한 중요한 사건의 대강을 기록해 둔다.

l  찬언 : 내 마음에 드는 글이 있으며 한 구절이든 두 구절이든 따로 기록해 둔다.

l  음의 : 알기 어려운 어휘를 분류해 써 놓는다.

l  문필 : 외워두면 좋을 문장을 따로 기록해 놓는다.

l  범례 : 옛 작가가 쓴 독특한 문투를 사례별로 기록해 둔다.

l  제서관섭인용 : 많은 작품들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고 그 본문을 적어 둔다.

l  취칙 : 인생과 사회 생활에 쓸모 있을 옛사람의 행위 가운데 본받고 싶은 것을 따로 기록해 둔다.

l  시재 : 시를 쓸 때 이용할 일화나 말을 분류하여 기록해 둔다.

l  지론 : 선배의 주장과 논리에 불만스러운 것이 있으면 자신의 견해를 첨가해 둔다.

l  궐문 : 내가 모르는 어휘나 옛 일 등을 모두 따로 기록해 둔다.[276]

 

지식에 앞서 학문하는 자세를 배우다 참스승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교육이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간적 유대감이 무엇보다 앞서는 것임을 나이가 들수록 인정하게 된다.[279]

 

그저 책을 읽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 책에 담긴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요, 스승의 삶을 배우는 것이 큰 공부인 것이다.[280]

 

예부터 직접 목도한 스승의 언행을 선비들이 기록으로 남긴 이유가 여기 있다.[281]

 

거처하신 곳은 반드시 조용했고, 책상 주변은 반드시 깔끔하게 청소하셨다. 벽에는 도서가 가득했으나 늘 정리되어 어지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셔서는 반드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보셨다.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뵐 수 없었다. 평상시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신 다음, 날마다 <소학>으로 자신을 조율하셨다. - <<퇴계선생언행록>>

 

스승과 제자 모두 행동으로 드러나는 학문 자세를 중시했다. ‘말로 이치를 떠드는 자는 마음으로 얻은 자가 아니다는 성리학이 강조하는 공부법의 특징이다.[283]

 

퇴계 사후 200년이 지난 1795년 다산은 충청도 청양의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후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글 한 편을 읽고 그 독후감을 써서 모아 두었다. 이 글들은 나중에 <<도산사숙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였다. 수백 년의 시간을 초월해 옛 스승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으며 다산은 마치 자신이 친절한 가르침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283]

 

다산은 성급하게 글을 쓰고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신의 성향을 퇴계의 편지글을 읽고서 반성하고 있다. 다산은 오히려 퇴계를 직접 대면하고 배운 제자들보다 그의 가르침을 더욱 절실하게 받은 것 같다. 200년 전의 스승에게서 잘 배운 제자라 해도 좋겠다.[285]

 

다산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는 소년에게 그 무능이 공부에 지장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돌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공부의 방법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려면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 재능을 믿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보다 남에게 뒤쳐지는 재주를 근면과 열성과 끈기로 극복하는 것이 참된 공부법이라고 다산은 힘주어 강조했다.[288]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을 통해서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의 내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을호고벽好古癖에 빠진 사람이라 말했는데,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것처럼 옛글을 읽다가 발견한 선비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모아 엮은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던 틀에 박히고 화석화된 존재가 아니라, 펄펄 살아 움직이는존재로서의 선비를 만날 수 있다. 정사에 드러난 서로간의 얽히고 얽힌 정치적 당쟁 관계가 아닌 인간미가 흐르는 삶의 진정성과 진솔함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글과 영혼", "공부와 서책"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조선 문인들의 인생관과 취미, 글쓰기와 공부 방법 등에 대해서 넘겨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만시와 자찬묘지명, 문필가인 유만주의 13년간의 일기 <<흠영>>, 장서, 서화, 문방사우의 수집 등 수집벽을 가진 선비들, 산수유람 이야기, 척독(짧은 편지), 다양한 문집과 제문과 시문, 공부 방법론 등 다양한 소재는 조선 선비의 자기계발 방안을 엿볼 수 있는 좋은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나를 돌아 보기

 

자찬묘지명! 그것은 죽음에 직면해 남의 시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길이다. 죽음의 공표에 떨기보다는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자기 죽음을 그려 보는 일이다. 죽음에 앞서 자신의 죽음을 타자의 죽음처럼 차분하게 응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23]

 

è  이미 연구원 수업 첫날 나의 장례식을 통해 나의 죽음을 가정한 조문을 써 보았었다. 하지만 나의 비석이라고 하는 제한된 공간에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짧은 묘지명을 써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만주는 단조로운 신변잡기에서부터 날마다 목도하고 경험한 세상사, 사람들과의 대화, 눈여겨 살핀 서책과 문서, 생각하고 고민한 모든 것을 일기에 기록했다. 다시 말하면, 이 일기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과 사회의 전모를 담아내려 한 야심찬 저작이다. 하지만 <<흠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은 무엇보다 독서 경험과 사유의 기록이다. 그는 놀라우리만큼 다양한 책을 수없이 되풀이 해 읽고 그에 관한 소감을 기록했다.[32]

 

è  지난 주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지속적인 자기 훈련으로서의 글쓰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껴보면서 자기 수련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13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서 이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 유만주, 그의 일기문집 <<흠영>>… 기억할 일이다.

 

천지가 뒤집힌 세상을 만나 선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그는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중립에 서려 했다. 유몽인은 어디에도 빌붙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64]

 

나는 혼자다. 그들의 냉혹함이 얼음장 같다 해도 나는 떨지 않고, 그 뜨거움이 대지를 불태운다 해도 나는 타지 않는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이, 오직 내 마음 가는 대로 쫓아갈 것이다. 내 마음이 찾아가는 곳은 오직 나 자신일 뿐이다. 그러니 거취가 느긋하여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 유몽인

 

è  광해군 시대의 유몽인의 삶에서는 고집과 지조를 읽는다. 광해군 시절에는 누구보다 날선 비판을 내놓았지만 광해군 사후에는 인조반종에 참여치 않고 충절을 지켰다. 희산, 너도 그럴 수 있는가?

 

옛사람은 한가로울 때도 바쁜 순간이 있듯이 바쁠 때도 한가로운 한 순간이 있다라고 하였다. 어찌 독서만이 그러랴? 무릇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말을 자신을 반성하는 도구로 삼아야 하리라. 이 이야기를 적어두어 옛일을 본받고자 한다.- 박규수[238]

 

è  입에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바쁘다는 말은 그 일에 시간을 낼 마음이 없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바쁜 중에도 마음을 써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스스로 만들어 낼 일이다.

 

거처하신 곳은 반드시 조용했고, 책상 주변은 반드시 깔끔하게 청소하셨다. 벽에는 도서가 가득했으나 늘 정리되어 어지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셔서는 반드시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하루 종일 책을 보셨다. 한 번도 나태한 모습을 뵐 수 없었다. 평상시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신 다음, 날마다 <소학>으로 자신을 조율하셨다. - <<퇴계선생언행록>>

 

스승과 제자 모두 행동으로 드러나는 학문 자세를 중시했다. ‘말로 이치를 떠드는 자는 마음으로 얻은 자가 아니다는 성리학이 강조하는 공부법의 특징이다.[283]

 

è  학문의 바른 자세와 이의 실행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사례이다. 무릇 책을 읽고 정진하는 학자라면 귀감으로 삼고 매일 돌아보아야 할 자세라는 생각이다.

 

 

회심우(마음 맞는 벗)의 소중함

 

이 책에서는 마음 맞는 벗, 후원자와 예술가, 혹은 스승/제자 사이의 훈훈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사례들을 몇 가지 다시 옮겨 적어 복기하고자 한다.

 

그는 나를 위해 늘 좋은 술을 차려 놓았다. 흥이 나면 바로 나를 생각했고, 생각하면 바로 말을 보내서 나를 찾았다. 나 또한 흔쾌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문에 들어서면 손을 잡고 웃고 나서 마주볼 뿐 다른 말이 없다. 책상 위의 책을 가져다 몇 구절 쓱 읽고, 옛 종이를 펼쳐본다. 그러면 그는 벌써 향을 사르고 두건을 뒤로 젖혀 차를 달였다. 차를 권하며 시간을 보내다 땅거미가 져서야 돌아왔다.

회심우(마음 맞는 벗) 끼리의 다정다감한 우정이 글의 여백에 가득하다.[77]

 

서평군이나 이정보의 행적을 보면 후원자와 예술가들 사이에는 제삼자가 알 수 없는 끈끈하고 인간적인 유대감이 흐른다. 후원자는 경제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도록 교육하고 신뢰하였다. 예술가는 그런 후원자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들이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를 후원한 진정성은 시대를 넘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한다.[131]

 

충청도에서 제주도까지 그 먼 바닷길을 여행하고 한라산을 오르는 일은 당시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자식의 중병에도 홀연히 길을 떠나는 토정의 성품과 상대방의 준비 여부를 배려하지 않고 내일 당장 떠나자고 밑도 끝도 없이 몇 마디로 표현해 버리는 그 마음 씀씀이 대단하다. 그도 그렇지만 이렇다 저렇다 구질구질하게 따지지 않고 친구 따라 당장 떠난 고청의 행동도 범인의 그것은 아니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예절과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여 좌고우면하는 범인과 대비하면 두 선비는 정말 어려운 결단을 쉽게도 내리는 사람이다.[173]

 

퇴계 사후 200년이 지난 1795년 다산은 충청도 청양의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후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퇴계의 편지글 한 편을 읽고 그 독후감을 써서 모아 두었다. 이 글들은 나중에 <<도산사숙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였다. 수백 년의 시간을 초월해 옛 스승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으며 다산은 마치 자신이 친절한 가르침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283]

 

청복과 넉넉함의 추구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고 재차 다시 돌아본 선비의 사례가 바로 후에 팔여로 호를바꾸었다는 사재 김정국이다. 그의 말과 삶은 내가 닮고 싶은 바로 그 삶이었다.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 뜻을 좇아 살아보려 한다.

 

청복이란 깨끗한 행복이니 재물이나 권력 같은 세속적 욕망에 매이지 않은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이다. 자연에서 얻는 행복, 청빈한 삶에서 얻어지는 만족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청복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42]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맞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 사재 김정국(후에 호를 팔여로 고침) [43]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이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다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내 자네를 따라서 여덟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속물을 따라서 부족함을 걱정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네 그려. – 팔여 김정국의 친구의 답신 [44]

 

이렇게 팔여라는 호에는 불우한 시절을 원망과 증오로 보내지 않고, 여유와 청빈을 즐기며 인생의 위의(威儀:위엄과 자세)를 지키려 했던 사재의 지혜가 빛난다.[45]

 

그대는 살림살이가 나보다 백 배나 넉넉한데 어째서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기야 하지.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라네. 이 열 가지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데 이외에 필요한 게 뭐가 있겠나. – 사재 김정국[46]

 

이런 청복한 삶을 나의 삶의 나침반으로 삼고자 한다. 끊임없이 정진하고 회심우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청빈하면서도 행복한 삶내가 가치관으로 삼는 나의 길이다.

 

가을비 내리고 낙엽 지는 아침 또는 큰 눈이 내리는 밤에 대숲을 향해 난 창가에 앉아 쓸쓸하고 무료한 시간에 손에 잡히는대로 한 구절씩 뽑아 읽으면 거기에는 벗을 삼고 싶은 옛사람이 있고, 본보기로 삼을 행위와 격언이 있다. 굳이 문을 벗어나지 않아고 사귀고 싶은 인간이 많다. 그들과 더불어 노니는 즐거움, 그것은 현세의 장삼이사를 만나 억지로 비위 맞추느라 웃는 얼굴을 꾸미는 괴로움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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