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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2일 11시 53분 등록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 지음

한길사

  Ⅰ. 저자에 대하여

지은이 이부영 선생은 서울대 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 뒤 스위스 취리히에 가서 1966년에 융연구소를 수료하여 융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독일 및 스위스 등 각지 정신병원에서 수련 및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신경정신과장 등을 지냈다.

그 밖에 미국 하와이 동서센터 '문화와 정신건강연구계획' 초빙 연구원,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정신의학과 종교 강좌' 석좌교수를 지냈다. 1997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분석심리학의 전문수련기관인 한국융연구원(http://www.jung.re.kr)을 설립 운영 중이다. 대한의학회에서 주는 순수의학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이부영은 한국 융학파의 태두로서 한국에 분석심리학의 씨앗을 뿌리고 분석심리학이 하나의 분과 학문이자 정통한 정신치료술의 하나로 인식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1차적으로는 당연히 환자의 치료에 있겠으나, 학문적 성취가 깊어짐에 따라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징체계를 해석하고 그를 통해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세계를 해명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다.

이부영 선생은 융의 이론들 중 '그림자', '페르조나', '아니마-아니무스'와 '원형론', '자기와 자기실현'의 개념을 바탕으로, <그림자>에서는 의식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무의식의 세계,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에게로 초대하며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는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자기와 자기실현>에서는 이렇게 우리의 삶에 동화된 무의식을 통한 마지막 여정인 '자기실현'의 과정을 소개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동안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단행본 중에서는 분석심리학을 통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심층을 밝혀보려는 의도를 가진 '분석심리학 3부작'이 유명하며, 그 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외 한국의 민담을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을 탐구한 『한국 민담의 심층분석』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

저서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비롯해 <분석심리학>, <한국민담의 심층분석>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칼 융의 기본저작집 <정신요법의 기본문제>, <원형과 무의식>, <꿈에 나타난 개성화의 상징>, <인간의 무의식의 상징>(이상 감수 공역)과 , <현대의 신화> 등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이 있다.

Ⅱ. 내 맘에 무찔러든 글귀

이 책에서 우리는 심혼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융이 아니마, 아니무스라고 부르는 심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볼 수 있고 어떻게 경험되는가. 그 역할은 무엇이며 그 작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p.24

아니마 ․ 아니무스 이론은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의 성향에 관한 학설이다. p.25

인간은 남성이기만 하거나 여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각자 개성을 가진 존재이다. 자기실현은 그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정신이며 진정한 의미의 개성 실현이다. 진정의 의미의 개성이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은 보편적 특성을 모두 통합한 그 사람 전체를 말한다. p.25

집단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집단에 의해 요구되는 태도, 생각, 행동규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 또는 외적인격이라 부른다. p.30

페르소나는 자아가 바깥세계에 적응할 때 필요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삶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바깥세계뿐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세계인 내면세계, 즉 무의식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 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p.30

내적 인격은 자아가 내면세계와 관계를 맺는 징검다리와 같은 것으로서, ‘나’와 무의식의 더 깊은 층을 이어주는 매개자이다. 외적인격이 외부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것처럼 내적인격은 하나의 맺음의 기능이다. p.31

원형Archetype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의 여러 조건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인류가 되풀이하여 경험해온 모든 경험의 침전이며 신화적 주데의 최소공약수, 신화소Mythologem이다. 인종과 문화의 차이, 지리적 차이, 시대적 차이 등 시공의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행태를 일어나게 하는 선험적인 틀이다. p.32 

'자아‘가 페르소나를 구분하고 이 전체정신의 중심이 ’자기‘로 향해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심성의 원초적 조건이다. ’자아‘가 ’자기‘로 향해 가는 것, 다시 말해 전체가 되는 것은 자아가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융은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라 불렀다. p.33

자기실현의 과정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선험적 조건이다. 특히 아니마 ․ 아니무스는 남녀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한다. p.33

아니마 ․ 아니무스는 남성으로서 또는 여성으로서의 페르소나에 대응하는 무의식의 내적인격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 인류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상상하고 체험한 모든 것에서 우러나온 원형의 조건을 토대로 하는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인류공통의 보편성을 지닌다. p.35

1장 아니마 ․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페르소나는 집단적 태도에서 빌려온 것일 뿐 그 사람의 개성은 아니다. 페르소나는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또는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말썽을 빚지 않기 위해 생긴 콤플렉스로서 그 사람의 참다운 개성이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외부객체와 관계를 맺고 이에 적응하며 살지만 동시에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살기도 한다. p.40

주체는 ‘내적 객체’이기도 한데 이것은 바로 무의식을 말한다. p.40

집단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만드는 일은 진정한 자기희생과도 같은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페르소나와의 동일시로 말미암은 ‘심혼의 상실’을 무의식은 견디지 못한다. 탁월한 페르소나는 내적으로는 사생활로 보상되고 있다. p.47

서로 ‘이유없이 끌리고’, ‘첫눈에 반한’ 남녀 사이에서는 아니마 ․ 아니무스상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고 있고 내적 과정과 의식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심혼을 의식하지 못하므로 투사를 통해서만 이를 경험하고 있다. p.52

여성의 심리학은 맺는 자이자 푸는 자인 위대한 에로스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예부터 남성에게는 로고스가 가장 높은 원리라고 생각되어 왔다. 우리는 현대적 언어로 에로스 개념을 심적관계, 로고스를 사실에 대한 관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p.59

인간관계는 객관적인 대결과 합의와는 달리 감관적-정감세계와 정신에 걸쳐 있고 그럼으로써 그의 주목할 만한 특이성을 상실함이 없이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중간세계인 심혼적인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p.60 

오늘날 여성은 오직 사랑만이 그녀에게 더 완전한 모습을 부여한다는 것을 더 절실히 알게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성은 정신만이 그의 삶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함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둘은 근본적으로 심적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심의 사랑과 사랑의 정신은 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63 

아니마 기분은 감상적 기분, 우수, 음산한 예감, 허무함, 쓸쓸함에 서 폭풍 같은 분노, 격렬한 열정, 대환희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여신들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또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현란하다고 한다. 그 기분의 동요가 심하다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변덕스럽게 보인다. p.65 

아니마 원형과 함께 우리는 신들의 세계, 혹은 형이상학이 예약해 놓은 영역으로 들어선다. 아니마가 접촉하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 된다. 즉 절대적이며, 위험하고, 금지된 마술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무의식과의 작업에 대해 확신을 주는 이유들을 제공하며 도덕적 억제를 파괴하고 막았던 힘을 풀어놓는다. 차라리 무의식에 두어야 했을 것들을 아니마가 삶을 원하므로 그녀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원한다. p.65

남성에게서 에로스, 즉 관계를 맺는 기능은 로고스보다 덜 발달되어 있다. 반대로 여성의 진정한 성질은 에로스로 표현되며 구별하고 인식하는 로고스는 ‘유감스러운 우발사건’을 의미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융은 말한다. p.68

융은 이 모든 것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차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아니마 ․ 아니무스는 질투심 많은 연인과 같다는 말과 통한다. p.73

그러면 아니마 ․ 아니무스의 관계는 항상 이렇게 긴장과 적대관계만을 불러일으키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니마 ․ 아니무스가 덜 분화되어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 때만 그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무의식의 내적인격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다. p.73

아니마가 본래 개인적인 섬세한 감정, 자아의식을 넘어선 예감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아니무스도 또한 창조적 싹을 지니고 있다. 융은 그것이 곧 ‘영감 있는 여인’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p.73

그래서 아니무스도 마찬가지로 영혼의 인도자, 의식과 무의식의 중개자이며 무의식의 인격화이다. 아니마가 분화됨으로써 의식의 에로스가 되듯, 아니무스는 로고스가 되며 전자가 남성의 의식에 관계형성을 마련하듯, 후자는 여성의 의식에 성찰, 숙고와 인식을 마련한다. p.74

단테의 신곡에서 주인공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 괴테의 파우스트의 헬레나 등이 인도자로서의 아니마를 표현한다. 아니마 ․ 아니무스는 앞에서 기술된 것처럼 열등한 양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화가능한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p.74

에로스나 로고스니 하는 것은 단순히 개념적인 보조수단에 불과하고 실제의 의미는 에로스의 맺는 기능과 로고스의 구별하는 기능을 지칭한다. p.82

우리가 무엇을 경험한다고 할 때 경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융은 “주관적 준비태세의 개입 없이 경험이란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그 경험을 하게끔 하는 선천적 ․ 정신적 구조가 전체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그것이 있음으로써 어떤 것을 경험하도록 하는 마음의 준비태세가 생긴다. 남성이 여성을 경험하고 여성이 남성을 경험하는 데에는 그렇게 경험하도록 하는 내적인 구조가 있고 반응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p.83

그래서 남성의 전 존재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성을 전제로 한다. 그의 체계는 선험적으로 여성을 향하고 있다. p.83

무의식적 요소는 사회의 집단적 의식보다도 강력한 작용으로 삶을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의식에서 나에게 밀려드는 것과 나의 의지를 구별하고 나의 직책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p.85

심혼상의 가장 최초의 운반자는 언제나 어머니일 것이다. 나중에 심혼상을 운반하는 것은 남성들의 감정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극한 여성들이다. 어머니가 심혼상의 가장 처음 운반자인 만큼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분리하는 일은 최고의 교육적 의미를 지닌 가장 까다롭고도 중요한 일이다. p.85

현대인에게는 그런 교육적으로 효과적인 통과의례가 없다. 따라서 어머니 이마고의 형태를 취한 아니마가 아내에게 옮겨진다. 그 결과 남성이 결혼하기만 하면 어린애 같아지고 감상적이며 의존적인 사람이 되거나 반항적 ․ 폭군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언제나 자기의 우월한 남성성이 이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된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 p.86

무의식의 어둠은 외부세계를 향한 페르소나에 기울이는 노력과 꼭 같은 집중력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관찰함으로써 밝혀낼 수 있다. 외적인격과 마찬가지로 내적인격이 그저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p.86

아니마의 의식화는 아니무스의 의식화와 마찬가지로 중년 이후의 과제로서 특히 중요하다. 내면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는 중년 이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p.89

아니마 ․ 아니무스 원형은 비극적일 정도로 숙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융은 말한다. 그들은 진정 온갖 운명이 얽힌 실타래의 근원인 아버지요 어머니로서 오래 전부터 세상에 알려졌던 신의 짝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는 그의 로고스-성질 덕분에 프노이마Pneuma와 누스Nous에 의해 다양하게 변하는 헤르메스 신의 특징을 가지며, 다른 것은 에로스-성질 덕분에 아프로디테, 헬레나, 페르세포네, 그리고 헤카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융은 말한다. p.95

아니마 ․ 아니무스의 네 가지 발달단계

1. 하와(Chawwa)

2. 헬레네(Helene)

3. 마리아(Maria)

4. 소피아(Sophia) p.97

가령 중세 기사의 여성숭배는 밖에 있는 여성과의 관계뿐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와의 관계서도 남성의 여성적 측면을 분화시키는데 기여했다. 한편 볼프람 폰 에센바흐 판의 성배의 전설에서 성배를 가진 사람의 이름이 ‘사랑의 안내자’라고 되어 있는 점은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p.99

남성이 아니마의 분화와 통합을 통해서 육체적 ․ 낭만적 애욕의 수준으로부터 종교적으로 승화된 자비로운 사랑을 거쳐 지혜의 경지에 도달하듯이 여성은 아니무스의 통합을 통하여 본능적인 힘의 충동에서 진취적인 행동과 의미있는 말의 힘을 계발하며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지혜를 매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 다시 말해서 아니마 ․ 아니무스는 무의식의 내적인격으로서 열등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원형적 측면을 인식하고 그 개인적 측면을 의식화함으로써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p.102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남녀간에 서로 투사할 때 상대방에 대해 강박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아니마 ․ 아니무스 원형상은 결코 그 투사, 혹은 전이된 상대와 같을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의식면에서 개인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119

투사된 이미지와 실제 그 사람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괴롭고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투사를 거두고 자기 마음속의 남성적 ․ 지성적 요소를 인격 속에 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현대여성의 과제일 것이다. 지적이며 객체적인 남성적 활동을 한다고 해서 아니무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p.120

진실로 필요한 것은 여성적 지성, 여성 속의 로고스가 여성의 본성과 삶에 잘 어울려서 여성적 요소들과 남성적 요소들 사이의 조화로운 협동이 계속 일어나 어느 편도 그늘진 존재로 선고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니무스 투사를 거두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성공하면 아니무스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남자’이며, 밖의 남자와 안의 남자를 구별할 줄 알게 된다. 그런데 아니무스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면, 즉 무의식의 남자를 의식하지 못하면 어느덧 이것에 사로잡히는 결과가 된다. 안에 있는 아니무스에 사로잡히면 여성은 남성화된다. 아니무스-사로잡힘Aminus Possession이 일어나고 여성성은 아니무스에 지배된 의식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아니무스상을 투사할 만한 남성이 없는 경우에 잘 일어난다. 반드시 독신여성이라야 할 이유는 없으나 지적 활동과 사회활동에만 전심하고 본능적인 여성성의 매력을 거부하는 여성 가운데 발견된다. 아니무스와 동일시하거나 그것에 사로잡히면 우울, 전반적인 불만, 인생에 대한 관심의 상실 등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며 여성성이라는 인격의 반이 아니무스에 의해서 생명을 빼앗기고 질식되는 것이다. p.120

일반적으로 여성의 사유방식은 발달되지 않고 유치하며, 혹은 원시적 성격을 띤다. 지식에 대한 목마름 대신에 호기심을, 판단 대신에 편견을, 사고하는 대신에 상상 또는 몽상을, 의지대신에 욕구를 나타낸다. p.122

남성이 아니마를 볼 경우 그는 여성성을 열등시하는 남성의 집단적 의식의 태도를 극복하고 마음속의 여성성, 아니마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남성이 마음속의 아니마와 관계를 가지려면 여성성에 대한 저항을 버리고 지세를 낮추어야 한다. 여성의 경우 다르다. 여성은 먼저 여성으로서 자신을 높이고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여성이 아니무스와 관계를 맺을 때 극복해야 하는 것은 남성에 대한 열등감과 무력감이다. p.128

남성의 자아의식은 아니마의 예감적 능력을 매개로 무의식의 깊은 층의 이미지를 지각한다. 그러나 여성의 아니무스는 이미지의 지각이라는 형태로 매개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부여하는 형태로 기능한다. p.129

음악은 심혼의 객관화라고 이해된다. 그것은 통상적인 논리적 ․ 지적 의미의 지식을 표현하지 않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연상과 가장 변함없는 법칙에 대한 감각적 표현을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은 심혼,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밖의 알 수 없는 거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p.129

음악의 내용을 말로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이상스럽게도 감정과 감각과 함께 수로서 파악된다. 음악은 심혼과 자연이 하나인 그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음악은 여성이 심혼을 경험하는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인 형태이다. 음악과 무용이 여성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30

인간의 성적 욕구의 근원과 목적은 하나됨에 있다. 이때의 대환희는 하나됨의 환희이다. 무의식은 분열과 유리된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욕구충족은 결핍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고 성숙과 발전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꿈은 단순한 생리적 욕구충족일 뿐 아니라 인간이 달성하기를 희구하는 궁극적인 대극합일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p.155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자신 속에 이성異性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으로는 스스로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자아와 무의식의 심혼과의 융합은 지극한 평화와 희열을 일으킨다. 그것은 전일의 경지, 삼매경의 말할 수 없는 해탈감, 깊은 기도 끝에 찾아오는 일치감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의 접촉이나 성적행위 없이도 대환희와 통일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p.156

여성의 자아의식이 그녀 내면의 아니무스를 주의 깊게 인식하기보다 아니무스에 사로잡힐 때, 혹은 자기의 남성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지나치게 남성화될 때 오히려 여성 본래의 본성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는 무의식에 있는 여성성이 남성적인 측면의 공격에 의해 핍박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합일을 통한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방해하는 것이다. p.178

상대방에게서 보고 느끼는 황홀함, 이상적이 여성상, 또는 남성상이 사실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가 생각했던 이상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실망은 환멸로, 환멸은 공허감으로, 공허감은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넘기고 싶어지며 나중에는 ‘너 때문’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싶어진다. p.198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자기가 상대방에서 본 것이 최소한 ‘허상’이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의 투사상임을 알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즉 현실의 그 남자, 그 여자를 보게 된다. 그 실패를 통해서 사랑이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사랑이란 내 욕심을 채우고 상대를 자기의 이상상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 ‘나’의 자아중심성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p.199

한국여성의 아니무스는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에서 발휘된다. 그러나 공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충족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오히려 한국여성들은 정신적으로 더 높은 곳, 더 좋은 곳을 지향하는 아니무스(심혼)의 무한한 희구를 발휘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중년 이후가 되면 자기자신의 계발을 위해서 바쁘다. 여자들의 모임은 많은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이들의 참여를 자극한다. 각종 문화교실, 고전강좌, 박물관강좌, 문화기행, 봉사활동, 종교집회, 시민단체, 상담활동 등이 그 예이다. p.208

폰 프란츠가 말한 ‘행복한 꿈의 나라’-금남禁男의 장에서 이들은 조요한 혁명을 기다린다. 역사적으로는 선덕여왕, 신사임당, 황진이, 논개, 허난설헌, 전설에서는 춘향과 심청, 바리데기 등이 있고 가깝게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여자 큰손들, 무기 로비스트들, 흘러간 시대의 가수들, 앵커우먼, 여류시인, 연주가, 스포츠의 영웅들, 여류작가들, 시민운동의 기수들이다. p.208

이들은 남성들에게 때로는 대담하고 분명한 현실판단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현모의 채찍질로, 혹은 요염한 유혹과 결연한 정절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남성사회에 에로스의 접합체로서, 그들의 아니마의 대변자로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때로는 나르시스적 독백과 투명한 소리로 남성들의 심혼을 울렸다.

더 나아가서 창조적인 자극으로 남성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파멸과 공멸의 나락으로 남성과 함께 떨어진다. 퇴행은 여성의 의식이 무의식의 원시적 아니무스, 권력과 돈에 지배될 때 일어난다. 그러나 아니무스가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영적인 지혜를 지향한다면 그것은 창조적 효과를 자기 자신과 사회에게 주게 될 것이다. 한국의 여성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가능성 뒤에 한국의 남성이 있다. 이들의 발전을 뒷받침하려면 한국남성의 아니마가 분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내적 인격을 일깨우고 의식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동반자이다. p.209

경직되고 고루한 남성들의 의식세계에 대항하여 자유를 추구하는 아니마는 먼저 정비석의 1950년대 신문소설 ‘자유부인’에서 매우 큰 반항을 일으켰다. 1980년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모래시계’는 이념과 물질, 폭력의 갈망에 멍들고 상처입은 아니마의 이야기로 낭만적 남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 ‘백치 아다다’에서 1970년대의 ‘영자의 전성시대’에 이르는 백치와 창녀로 대변되는 열등한 아니마의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시도가 근대화의 와중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래에 ‘로마인 이야기’, ‘혼불’의 성공도 그것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니무스와 아니마 심혼의 불을 당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p.211

사실 아니마 ․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현상에는 동과 서의 차이가 없다. 다소 상업적으로 부추겨서 마치 그래야만 하는 듯 사람들에게 암시를 주어 일정한 의식으로 정착된 서양의 풍습(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유행은 늘 대중들의 아니마 ․ 아니무스를 겨냥하고 있다. 오빠부대의 열광, 외국의 가수를 맞이하는 열광적인 청소년 팬이 생기는가 하면 멋진 축구선수, 농구선수의 팬이 만들어진다. 유명연예인과 함께 이들은 이들을 둘러싼 남성들, 여성들의 아니마 ․ 아니무스상을 짊어지는 사람이 된다. 이들 유명인이나 인기 그룹에게는 자유가 없다. 팬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비난을 받거나 축출되기 때문이다. 긍정적 아니마, 긍정적 아니마의 투사가 충족되지 않으면 즉시 부정적 아니마 ․ 아니무스의 투사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p.212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직적 대면이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으로 대체되어 가는 시대에 인간의 심혼은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나라보다 일찍 전국적인 초고속 전산망을 놓았다고 자랑하는 한국에서 인간의 기계화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p.212

과학기술의 발달이 자연스러운 정서의 발달을 앞질러가고 인간의 의식의 뿌리인 본능과 신화의 세계에서 단절된 될 때 단절된 신화는 어디선가 재현되기를 요구한다. 212

근대화의 목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모든 평범한 사람의 소원일 것이다. 부와 명예와 건강, 한국의 남성들은 그것들에게 자신들의 심혼을 위탁하고 밤낮없이 일했다. 남성들은 한마디고 공장과 기업에 그들의 아니마를 바쳤다. 그들은 잃어버린 아니마의 자리를 술로 달래고 때로는 어줍잖은 애정행각으로 채웠다. 그것으로는 아니마를 얻을 수 없다. 근대화를 위한 남성들의 희생 속에서 버려졌던 아내와 아이들은 그래도 잡초처럼 살아남아 내일의 한국을 준비하고 있다. 1997년 우리가 겪은 경제위기는 우리 삶의 목표를 반성할 귀중한 기회를 주었다. 그렇건만 한국인의 의식이 달라졌다는 징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서구사회에서 빌려온 ‘삶의 질’을 거론하지만 그 삶의 질이란 여전히 자동차, TV 시청 등을 포함한 물질적인 풍요를 전제로 하고 있다. p.213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가 잃어버린 심혼을 찾아 우리 마음속에서 통합해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희망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아니마 ․ 아니무스를 밖에서만 찾아 헤맨다면 우리는 영원한 우주의 미아로 떠돌게 될 것이다. 트릭스터 원형은 비합리적인 실체이다. 그것은 도덕적이지도 예의바르지도 않다. 이해할 수 없는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존재이다. 그는 파괴를 위해, 무질서를 위해 태어난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장해를 통해 우리에게 삶에 대한 보다 성숙한 통찰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p.214

우울증은 자아의식의 탈진상태, 즉 의식에서 에너지가 빠져나간 상태이다. 그것은 의식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자기고백이다. 마치 괴테의 희곡에서 파우스트가 평생의 연구로 많은 지식을 얻고도 한계에 부딪치자 죽으려고 독배를 든 심정과도 같다. 그런데 의식은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의식의 한계에서 홀연히 열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의식의 저편,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그것이다. p.223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에 이끌려 경험하는 환상적인 세계는 사실 권위적 ․ 과학적 경건주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에로스의 세계, 자유분방하고 이교적인, 비합리적인 세계상들이다. 파우스트는 그곳에서 첫 번째 아니마 그레트헨을 만나 사랑의 즐거움과 아픔을 함께 맛본 뒤 우여곡절 끝에 고귀한 아니마 헬레나에 귀의한다. 악마에게 이끌려 경험한 세계의 여정은 결국 파멸이 아니고 그를 통한 지성의 이니시에이션, 성인화 과정, 융의 표현으로 보자면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이다. 우울증 환자도 때로는 그런 무의식으로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우울증은 자아의식의 재생을 목적으로 하는 고통이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잃어버린 것들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p.224

한국문화에 나타난 아니마 ․ 아니무스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꽃은 가장 사랑스럽고 값진 것, 때론 전체를 개현한 상태이다. 꽃이 된다 함은 자기실현을 한다는 것에 견줄 수 있다. 그러자면 이름 없는 것에서 이름 있는 것으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된 존재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 변환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너와 나의 만남의 과정이다.

남성은 여성의 무의식에 잠자는 남성상을 일깨우고 여성은 남성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여성성을 일깨우고 의식화한다. 그리하면 인간은 정말 모두 무엇이 될 수 있다. 김춘수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p.247

맺음말

그림자나 아니마 ․ 아니무스나 궁극적으로 전체정신의 중심핵인 ‘자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만나는 무의식의 요소들이다. 그림자가 의식화되고 아니마 ․ 아니무스가 의식화되어 의식의 내용으로 동화될 때 우리는 거의 우리 전체인격의 중심, ‘자기’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p.313

사람들은 자기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 사람을 가지고 있음을 모른다. 내가 어떤 아니마 ․ 아니무스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이 언제 어디서 자아를 사로잡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적 앎을 넘어선 깨달음에 접근한다. p.314

 

Ⅲ. 내가 저자라면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질까?’

‘사람들은 왜 로맨틱한 사랑의 환영을 좇아가는 걸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나름 올바른 이해를 위한 앎을 시도하던 중 융이 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란 개념을 접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남녀가 왜 사랑에 빠지는 지에 대한 이유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길로 안내해 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의 심혼을 살펴보고자 한다. 융이 아니마 ․ 아니무스라고 부르는 심혼이 무엇이며, 어디서 볼 수 있으며, 어떻게 경험하는 가를 살펴본다. 저자는 아니마 ․ 아니무스는 인간 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가 의식화된 후 그 다음 단계로 아니마, 아니무스를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을 자기, 즉 마음의 전체를 실현하는 마무리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본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우리 마음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심령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다. 아니마 ․ 아니무스는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처럼 보인다. 이는 내적인격으로 외적인격인 페르소나에 대응되는 무의식적 인격이다. 외적 인격이 타고난 성을 나타내듯 내적 인격도 남성과 여성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띄게 되는데 이 경우 여성적, 남성적 속성이란 집단사회의 전통적 여성관, 남성관과 다르다.

이러한 아니마 ․ 아니무스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된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상대에게 자신의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상을 투사하여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게 된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도 기쁨을 얻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식적인 선별과정을 통하여 상대를 선택하였다고 믿지만, 심층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자신도 잘 모르는 무의식적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술작품에서는 흔히 '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 ' 한번은 만나야 했을 것 같은 사람, '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 ' 벗어날 수 없는 매력 '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남녀가 서로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심리현상을 융은' 아니마' 와 ' 아니무스 '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무스는 여자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상이다, 아니무스도 여러 발달단계를 취하는데, 원시적인 아니무스는 육체적인 힘을 자랑하는 남성상으로 나타나고, 그 인격이 발달 될수록 소녀를 여성을 성숙하게 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원형이지만 무의식 원형 중에서 특수한 원형이다. 자아의식을 무의식의 심층에 있는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을 통한 인격의 통합과 분화는 자기실현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의 발달을 앞질러가고 있다. 이는 인간을 자신의 의식의 뿌리인 본능과 신화의 세계로터 단절을 의미한다. 이렇게 단절된 신화는 어디선가 재현되기를 요구한다.

앞으로 사회에서 한국의 여성은 우리 미래의 가능성이라고 한다. 여성성 안에 내재하고 있는 아니무스가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영적인 지혜를 지향할 때 창조적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그 열매를 자기 자신과 사회에게 주게 된다. 오늘날 한국의 남성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근대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잃어버린 심혼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하다. 남성들이 자신이 잃어버린 아니마를 마음속에서 통합해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여성들의 이러한 남성들의 발전을 뒷받침하려면 한국남성들이 아니마를 의식화하고 정신에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내적 인격을 일깨우고 의식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꽃은 자신을 활짝 피우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자기 꽃을 피운다는 것은 자기실현을 한다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대한 이해와 적용은 우리에게 변환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너와 나의 만남의 과정에 깊은 의미를 주고 있다. 남성은 여성의 무의식에 잠자는 남성상을 일깨우고 여성은 남성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여성성을 일깨우고 의식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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