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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8일 23시 46분 등록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제임스 매클렐란 3, 해럴드 도른 지음/ 전대호 역/ 모티브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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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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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E. McClellan(1946~) 1968년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1973년과 1975년에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7년부터 계속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역사학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연구 분야는 과학사, 앙시앙 레짐 시대의 프랑스, 과학과 식민지 주의, 과학적 언론, 과학의 사회사 등이다. 미국철학학회의 논문상을 위시하여 총 13개의 유수한 Honors & Award를 수여했다. 본서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2000년 세계역사학회 최고도서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식민지주의와 과학”, “재구성된 과학:18세기의 과학적 사회등이 있다.

 

그의 프로필 정보를 담고 있는  홈페이지는 스티븐스 대학의 교수 홈페이지 중의 하나인 http://www.stevens.edu/cal/people/faculty_profile.php?faculty_id=910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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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old Dorn은 현재 스티븐스 공과대학 역사학부 명예교수이다. 뉴욕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과학, 정치학, 종교학, 20세기 문화 및 정치사를 연구하고 강의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며

 

20세기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가 운명적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과학자들은 모두 징집되어 참호 속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과학자들은 국가의 소중한 재원으로 징집을 면제받고 후방에 모여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이는 정부측에서 이론적인 연구가 실용적인 진보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발견, 핵물리학을 응용한 원자 무기 생산 등은 그 믿음을 강화했다. 과학은 실용적인 이득과 거의 동일시되었고, 따라서 기술이 과학에 의존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현상이라는 생각은 상식이 되었다.[6]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믿음은 역사적인 근거 없이 20세기의 문화적 태도에 의해 강요된 인위적인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자연에 관한 지식이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이 체계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세기까지도 과학은 지식인의 일거리로서 그 결과들을 과학적 출판물에 기록한 반면, 기술은 교육을 받지 않은 장인들이 지닌 솜씨로 여겨졌다.[7]

 

기술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는 많은 경우에는 과학이 기술을 지휘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음을 보여 줄 것이다. 20세기 이전의 역사적 상황 대부분에서는 오히려 과학과 기술이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분리된 채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8]

 

1부  : 유인원에서 알렉산더까지

 

1장  인류의 탄생 : 도구와 도구 제작자

 

기술은 구석기 사회의 떠돌이 채집 경제와 신석기 정착지의 식량 생산 활동 모두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던 반면, 자연에 대한 추상적인 관심인 과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16]

 

도구 사용과 기술의 문화적 전수는 인간적인 존재 양태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인간이 진화 속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많은 부분 도구 제작 및 사용 기술의 터득과 전승 덕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화 역사는 기술의 역사에 기반을 둔다.[20]

 

불의 통제는 인간이 터득한 핵심적인 신기술을 대표한다. 초기 인류는 불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 덕분에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21]

 

연구자들은 200만 년 전부터 마지막 빙하기의 끝 무렵인 약 1 2천 년 전까지를 단일 시대로 구분해서 구석기 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은 식량 채집이었다. 이러한 생활은 잉여를 거의 산출하지 못했고, 따라서 사회적 지위 분화나 지배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공출하고 재분배하는 계급화된 사회에 필요한 종류의 강제적인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구석기 사회는 본질적으로 평등사회였으을 보여 준다.[22]

 

해부학적인 현대인들은 3만 년 동안 큰 변화나 쇠퇴 없이 구석기 시대의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그것은 특히 그 이후의 빠른 변화와 비교할 때 기록적으로 느리고 안정적인 기간이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과거와의 연속선 상에서 비교적 변화 없이 살았다. 상당량의 고기를 포함한 다양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고되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털옷과 집 안에서 아늑함을 느끼고, 따뜻한 불 주변에서 만족했던 구석기 시대 조상들의 삶이 행복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25]

 

수천 년 동안 느린 팽창이 있은 후, 구석기인들은 세계를 식량 채집자들로 가득 채웠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인구 압력이 채집 가능한 자원에 미치는 효과로 인해 식량 채집에서 농업이나 목축 형태의 식량 생산으로 이행하는 혁명적인 변화가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27]

 

구석기 사회와 생활양식이 예외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복잡하게 연관된 기술과 솜씨를 숙달했기 때문이다. 기술로 구현되는 실용적인 지식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에서 도출되는 지식과 다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떤 이론적/과학적 지식을 기술에 이용했다기 보다 그냥 실용적인 솜씨를 발휘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구석기 시대 기술은 확실히 과학에 선행했고 독립적이었다.[28]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농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또 가끔은 농사를 지었겠지만 - 자신의 삶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꿀 절박한 동기가 없었다. 결국 인구 밀도 증가를 이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없게 되면서 자원의 수요와 공급 균형이 깨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식물과 동물을 기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채택될 수 있었다. 인간의 조상들은 구석기 시대의 생존 방식을 자발적으로 버린 것이 아니다. 환경 악화의 압력 아래에서 떠돌이 식량 채집 생활 양식을 버리고 식량 생산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마지못해 에덴 동산을 떠나 신석기 시대로 들어섰다.[32]

 

2장  농부의 지배

 

마지막 빙하기 말인 1 2천 년 전 무렵에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었다. 최초이며 가장 중요한 사회 경제적, 기술적 변화인 신석기 혁명은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 전이함을 의미했다. 혁명은 소수의 지역에서 기원하여 지구 전체로 퍼졌다. 유목과 농업 및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33]

 

선사시대에 관한 놀랍고도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다. 길들인 짐승과 재배용 식물에 기반을 둔 신석기 사회가 기원전 1만 년 이후 근동, 인도, 아프리카, 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아메리카 등 전세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34]

 

신석기 시대는 연쇄된 일련의 사건과 과정의 결과였다.[34]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길들이면서 자기 자신도 길들인 것이다![34]

 

돌이켜보면, 구석기 시대라는 엄청나게 긴 시간에 비해 신석기 시대는 한 순간에 불과했다. [35]

 

신석기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농업과 사육에 관련된 많은 기술과 솜씨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수적인 기술이 등장했다. 그 중 첫번째는 방직 기술이다. 직물 생산에는 서로 연관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기 역시 신석기 혁명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신기술이다. 도기 기술은 다름 아니라 불 조작 기술을 의미한다. 이는 훗날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야금 기술을 가능케 했다. [40]

 

신석기 혁명은 사회적 혁명이기도 했으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0~20 가구와 수백 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족적으로 분산된 정착촌이 신석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집단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정착생활은 가족들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도록 도왔다. 신석기 시대에 집은 당연히 사회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 생산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40]

 

구석기 시대의 경제나 생활 양식과 비교할 때, 신석기 시대로 이행하면서 삶의 질은 더 낮아졌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저밀도 농업은 더 많은 노동을 요구했지만, 식량은 다양하지 않았고 영양가도 적었다. 여가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신석기 경제는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고, 따라서 구석기 시대의 떠돌이 경제보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높은 인구 밀도를 지탱할 수 있었다.[42]

 

신석기 경제 속에서 인구는 팽창했고 환경이 적합한 지역들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사회 구조는 더욱 부유하고 복잡하게 발전했으며, 국지적인 도로망과 교역 중심지가 생기고, 후기 신석기 시대에는 진정한의미의 도시들이 등장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최초로 잉여 식량과 함께 빼앗거나 지킬 가치가 있는 부를 산출해 냈다.[42]

 

신석기 혁명은 어떤 독립적인 과학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기술/경제적 과정이었다. [44]

 

과학적으로 신석기 농부들이 천체들의 파노라마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전세계의 신석기인들은 태양과 달의 찰을 통해 수평선 상의 천체 위치를 표시하는 표시물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태양과 달이라는 두 천체의 주기적 운동을 확인하고 계절의 변화를 추적하여 농업 사회에 매우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53]

 

3장  파라오와 기술자

 

신석기 사회는 왕국 수준의 복잡함에는 이르지 못했다. 신석기인들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었고, 고급 지식이나 제도화된 과학의 전통을 확립하지 못했다. 이러한 발전된 특징은 신석기 사회가 연합하여 문명을 형성하면서 등장했다. 그것은 인류의 사회적 진화에서 두번째로 찾아온 거대한 변화인데 그것은 흔히 도시혁명이라 불린다.[55]

 

이러한 변화는 계속되는 증가로 거주지의 수용력에 압박을 가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고밀도 농업이 필요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인류 역사와 기술사의 중대한 사건인 도시 혁명은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 전까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큰 여파를 불러왔다.[56]

 

신석기 농업이나 목축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고밀도 농업은 최초 문명들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 경작지 농업은 국가가 고용한 기술자들의 감독 아래에서 징집된 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되고 유지된 대규모 물 관리 시스템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전까지 행해지던 단순한 원시 농업을 밀어냈다. 또 많은 잉여 곡물을 생산하여 공출하고 저장하고 재분배하는 경제가 새롭게 자리잡음에 따라, 이처럼 복잡한 농업 생산 시스템을 관리하기 위해 파라오나 왕이 지배하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권력이 발생했다. 이런 관료 중심적인 조직 사회에서 글을 아는 지식인 계급이 수학과 의학과 천문학을 발전시켰다.[56]

 

신석기 정착촌들이 고밀도 농업에 기반을 두고 연합하여 왕국을 형성하는 변화는 세계적으로 최소한 여섯 곳에서 총 여섯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같은 문명의 발전은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일한 중심 문화가 확산된 결과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원초문명이라 불린다.[57]

 

물과 환경 관리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대규모 물 관리 사업에 기초한 고밀도 농업이 중앙집권적인 대규모 관료 국가가 생성되는데 핵심 요인이라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내용이다.[57]

 

모든 문명은 관개 농업에 기반을 두었다. [61]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문명이 발생한 것은 인류의 사회적/문화적 발전 속에서 어떤 큰 실험이 보편적으로 행해졌음을 반영한다.[65]

 

문명의 출현과 함께 수많은 부수적인 기술이 등장했다. 그 중 하나는 청동 야금술이었다.[71]

 

교역의 증가와 확대된 경제 활동은 초기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또 직업의 분화와 명확한 노동 분업도 문명화 된 삶의 특징이었다.[71]

 

국가 수준에 도달한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에너지원과 노동력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72]

 

피라미드, 신전, 궁전 등과 같은 기념비적 건축물은 고도의 문명을 진단하게 해 주는 증거이자, 기술사에서 특별한 기술적 성취로서뿐 아니라 건축에 필요한 제도와 실행력과 관련 교역을 보여주는 지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73]

 

고대 이집트의 기술자와 건축가들은 수학을 알았고 완벽한 피라미드의 아름다움을 중시했다.[73]

 

피라미드 건축은 그 자체로 국가의 기술을 훈련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초기 피라미드들은 농한기에 군중을 동원하여 국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거대 건축사업의 결과물이었으며, 하나 이상의 피라미드가 동시에 건축된 이유는, 노동력이 남아 돌았고, 또 피라미드의 구조상 꼭대기로 갈수록 노동력 수요가 적어지므로 잉여 노동력을 새로운 건설에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념비적인 건축은 초기 이집트 국가의 제도적인 근육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오늘날의 무기 산업처럼 말이다.[76]

 

최초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고급 지식 문자, 기록 보존, 문학, 과학 의 개발과 제도화였다. 최초 문명들 모두에서 산술, 기하학, 천문학 등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최초 문명의 지식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것들이었다. 국가와 종교 권력은 실용적인 유용성이 있는 고급 지식을 꾸준히 지원하고, 그것을 국가와 농업 경제를 유지하는 데 이용했다.[78,79]

 

최초의 과학적 전통의 또 다른 특징은 지식을 일반회된 정리를 이용하여 분석적/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 사실을 목록 형태로 기록하는 경향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이나 추상성, 일반성 같은 특징은 훗날 그리스인들에 의해 강조되었다.[79]

 

글과 수학적 계산은 초기 문명의 실용적인 필요에서 기원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80]

 

모든 농업 문명은 천문학적 관찰에 기반을 둔 달력 체계를 개발했고, 최초 문명의 일부에서는 고도의 천문학적 연구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 확인된다.[86]

 

달력, 천문학, 점성술, 기상학, 마술 등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아메리카 등지에서 반복돈 보편적인 패턴에 따라 발전했다.[87]

 

그러나 최초 문명은 우주 전체에 관한 이론적 모형을 발전시키지 못해 추상적이거나 기계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모형은 없었다. 그들의 문화 속에는 자연세계에 대한 독립적/자연주의적 탐구 또는 추상적으로 연구할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다.[91]

 

4장  천재적인 그리스인

 

고대사에는 놀라운 특이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때로 그리스의 기적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근동 문명의 서쪽, 에게 해의 해안에 둘러 싸인 곳에서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은 고유한 문명을 창조했다. [93]

 

그리스의 선 제국기, 즉 기원전 600년에서 300년까지의 시기는 헬레나 시대라 불리며, 알렉산더 정복 이후의 시기는 헬레니즘 시대라 불린다. 헬레나 시대에 그리스 과학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으며 유용한 지식에 매달리지 않았던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세계에 관한 일련의 추상적 사변을 발전시키면서 전례없는 전환을 맞았다. 그 후 알렉산더가 동방의 부유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리스 과학은 이론적인 정신과 관료적/제도적 지원의 결합 속에서 황금기를 맞았다.[94]

 

헬레나 과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학적 이론, 자연철학의 발명이다. 우주에 관한 초기 그리스인의 사변과 헬레나 시대의 실용적 욕심 없는 추상적인 지식 탐구는 전례가 없는 것들이었다. 두번째 특징은 제도적인 지위에 관한 것으로서 적어도 알렉산더 대왕 이전에는 그리스 과학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없었다. 국가의 지원을 받은 근동의 과학자들과 달리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독립적인 개인이었다.[94]

 

실용적인 패턴의 과학은 원초문명 모두에서 발생했지만, 헬레나의 자연철학은 오직 그리스에서 단 한 번만, 독특한 역사적 조건의 귀결로서 발생했다. 다시 말해, 헬레나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유형의 과학, 의도적인 이론적 자연 탐구였던 것이다.[95]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비록 추상적인 자연 탐구를 시작했지만, 그들의 노력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또 그들의 전통에 지속적인 과학적인 연구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4세기, 위대한 종합가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서 바뀌었다.[109]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에 자연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자연에 관한 연구에서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그는 인간의 경험과 좋은 삶을 탐구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고 한다.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가 처형된 뒤에 철학의 지휘봉은 플라톤에게 넘어왔다. 플라톤은 자신이 스승과 달리 자연 세계에 관해 직접적인 저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아테네에 사립학교 아카데메이아를 세워 철학과 자연철학 연구를 공식화 했다. 아카데메이아 정문 위에는 이런 경구가 붙어 있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 들어오지 말라.’[111]

 

기하학은 플라톤에게 지적인 훈련으로서, 그리고 추상적이며 완벽한 모든 것의 모범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또 기하학은 플라톤 물질 이론의 열쇠였다.[111]

 

플라톤에서 시작된 천문학의 패러다임은 자명한 현상에 대한 단순한 조사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원과 형상에 대한 플라톤의 선행적인 철학적(이론적) 신념이 탐구할 현상을 지정했다. 그렇게 플라톤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철학의 문제를 던져 놓았던 것이다.[114]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사의 분수령이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 그의 연구는 헬레나 계몽시대의 정점인 동시에 이후 2천 년 동안 유지된 과학과 고급 지식의 원천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말기와 중세 이슬람 문화권, 근대 유럽의 과학 전통을 지배했다. 그의 과학과 세계관은 불과 몇 세기 전까지도 우리의 과학적 방법론과 연구 과제를 결정했다.[118]

 

과학과 기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인류가 실용적으로 필요한 기술을 획득한 후에 여유로운 지식인들이 순수과학을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모든 (실용적인) 것이 이미 마련된 후에 삶의 즐거움이나 필요를 다루지 않는 과학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발견은 인간이 여유롭게 사는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순수과학이 발전하게 된 계기는 호기심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철학을 택했다면, 과학 추구는 유용한 응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위해서였다는 것이 명백하다.”[120]

 

아리스토텔레스의 힘과 아름다움은 주로 그의 세계관이 지닌 통일성과 포괄성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세계와 그 속에서 인간의 자리에 대한 포괄적이고 일관적이며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그림을 제공했다.[120]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인 유산은 그리스를 계승한 문명의 과학 사상사를 지배했다. 그의 분석이 가지는 명료함과 시각의 우주적인 포괄성은 헬레나 계몽시대의 뒤를 이은 과학적 문화의 표준이 되었다.[129]

 

알렉산더는 고대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확대된 그리스 세계는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 크게 재편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제국 이전의 헬레나문명과 구별하기 위해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은 고대 과학사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과학의 황금기 에는 새로운 연구 조직과 사회적 지원이 시작되었다. 순수과학과 자연철학의 제도화의 예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이다.[131]

 

헬레니즘 과학은 헬레나 자연철학, 그리고 동방 왕국들에서 기원한 국가 지원 과학 패턴의 역사적 융합 혹은 잡종이다.[131]

 

고대의 기술은 과학과 별개인 영역으로 볼 필요가 있다. 고대의 과학은 도시의 문명화된 삶의 일부였던 반면에, 기술은 고대 세계 어느 곳에나 있었다.[147]

 

로마인들은 고대 세계 최고의 기술자이며 공학자였다. 로마 문명 자체가 거대한 기술적 성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47]

 

로마 제국은 여러 기술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군사와 항해 기술, 방대한 수로망과 도로망, 접합제(시멘트)의 발명 등이 대표적이다.[147]

 

그리스-로마 시대 말기에 과학과 자연철학이 명백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과학적 활동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고, 새로운 지식의 발견 보다는 옛 지식의 보존 쪽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 이유에 대한 해석 중 하나는 우선 과학과 과학자에게 분명한 사회적 역할이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 다른 해석은 고대의 경제,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분리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고대 말기의 다양한 종교와 교파가 고대 과학 전통의 권위와 활기를 크게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내놓았다.[152]

 

기술사가들은 왜 고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간단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생산 양식과 노예 경제는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산업혁명 따위는 고대에 정말 말 그대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155]

 

라틴화 된 서방은 그리스 과학의 부스러기 정도 밖에 계승하지 못했다.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강조해야 할 사실은 중세 초기 유럽의 기독교 야만인들과 라틴화된 서방의 지식이 비참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 멸망 후 문자 해독 인구는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어에 대한 짓기은 어느 모로 보나 자취를 감추었다.[157]

 

 

2부  세계인들의 사상과 행동

 

5장  꺼지지 않은 동방의 빛

 

476년 로마가 멸망한 후 제국의 동부는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점차 그리스어를 쓰는 비잔틴 제국으로 변신했는데,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될 때까지 1천년 동안 유지도었다. 비잔틴 제국은 많은 학문 기관을 계속해서 지원했다. 그리스어를 쓴 비잔틴 학자들은 정밀과학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 지식의 많은 부분을 계승했다.[161]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에서는 사산 왕조가 과거의 관개 시설을 보수하고 관리하면서 전형적인 근동 관개 농업 경제에 기반을 두고 근동식의 제도화된 과학 체계를 만들었다. 사산 문명은 관개 농업 경제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과학기관을 육성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165]

 

중동은 이슬람의 보호 아래 또 다른 과학 문명을 낳았다.622년 선지자 모하메드가 메카를 떠나 도피한 일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시대의 개막이라 여겨진다. 이슬람의 성공은 신앙심이 투철한 농부들뿐만 아니라 군대의 공로이기도 했다. 농부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범람원을 접수했고, 농업혁명이라 할 만한 혁신을 이루어 지중해 생테계에 새롭고 다양한 작물을 도입했다. 이슬람 농업은 관개 시스템을 재건하고 확장함으로써 경작 가능 기간과 생산성을 증가시켰다.[167]

 

초기 이슬람 지배자들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외국 문화 전통에 대한 학습을 장려했다.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이슬람교의 논리적/수사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문화적으로 헬레니즘화되었고, 헬레니즘 특유의 관료체제가 장연철학이 가미된 유용한 지식을 장려하는 부유한 지배자들 밑에서 발전했다. 중세 이슬람은 그리스 과학의 주요 계승자가 되었고, 이슬람 문명은 적어도 800년에서 1300년까지 사실상 과학의 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였다. 이슬람 과학자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인 과학 공동체를 건설했다.[169]

 

이슬람 과학 문화는 더 발달된 문명의 지식을 흡수하려는 노력 속에서 발생했다. 그 노력의 첫 단계는 문서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먼저 인도의 천문학 및 수학 서적의 번역에 주력했지만 다음 세기에 번역의 초점은 그리스 과학 저술에 맞추어졌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슬람 이론 과학의 지성적인 대부가 되었고, 누대에 걸쳐 주석가와 비평가들을 양산했다.[171]

 

이슬람 세계에서 세속적인 과학은 일반적으로 그 자체로 인정되기 보다 효용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았다. 각 지역의 모스크(이슬람교 사원)는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짙긴 했지만 학문과 지식의 중심이었다.[172]

 

이슬람 과학의 제도화 정도가 이미 그것의 성취와 특징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학자와 고학자들은 학교, 도서관, 모스크, 병원, 그리고 특히 관측소에 소속되었다. 이 기관들이 제공한 기회와 후원은 과학 활동의 급증을 가져왔다. 1100년 전의 이슬람 과학자는 당대의 보잘 것 없는 유럽 과학자 보다 10배 이상 많았다.[181]

 

중세 이슬람의 기술과 산업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기술이나 공학과 거의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슬람 과학은 고대 그리스 지식을 많이 흡수했지만, 이슬람 기술은 로마와 동방 왕국들과 유사한 상태를 유지했다.[181]

 

그러나 이슬람 과학과 의학은 1000년 전후에 역사적 황금기를 맞았고 그 후에 창조적 독창성의 수준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주장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신 알라 앞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문화적 가치관과 합법적 신념은 세속적 철학과 학문이 항상 의심을 받고 이슬람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변방에 머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182]

 

6장  중앙의 왕국

 

 

 

7장  인더스, 갠지스, 그리고 그 너머

 

 

 

8장  신세계

 

 

 

3부  유럽

 

1000년 경의 유럽은 동방이나 중세 이슬람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공백이었다. 당대 유럽은 이슬람, 비잔틴, 인도, 중국,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활발한 문명 중심지들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는 문화적, 지성적, 경제적, 기술적, 인구통계적 낙후 지역이었다. 기원 후 천년 내내 기독교 유럽인은 농촌적인 정착지들에 분산되어 있었고, 글을 읽고 쓰는 문화는 천박한 수준에 머물렀다. 중세 초기의 서유럽은 사실상 신석기 경제를 꾸리는 부족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9세기 이후 거듭된 바이킹의 침입은 그나마 유지해 나가던 약한 사회적/제도적 결합력마저 위협했다. ‘12세기의 르네상스가 있기 이전의 알프스 이북 유럽의 지식 수준은 비참했다. 유럽은 당대와 과거의 다른 문명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었다.[271]

 

도시화된 문명은 독특한 고밀도 농업 방식이 발견되어 유럽이 도시 문명으로 변신하기 시작하는 10세기까지 사실상 발생하지 않았다. 새로운 고밀도 농업의 발견으로 유럽은 전혀 달라졌다. 인구는 인도와 중국에 맞먹는 수준으로 급증했고, 기술적/경제적/정치적으로도 유럽이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유럽인은 15세기부터 화약무기 기술과 대양 항해 기술에 기반을 두고 밖으로 진출하여 세계를 변화시킨 해외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서유럽은 또 과학 지식과 연구의 세계적 중심이 되었다. 실제로 근대 과학은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에서 비롯되었다.[271]

 

9장  쟁기, 등자, 총포, 페스트

 

서로 연관된 일련의 기술적 혁신 농업혁명, 새로운 군사 기술, 바람과 물을 이용한 에너지 생산 이 중세 유럽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런 기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럽이 문화적 낙후 지역에서 어떻게 이후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서 세계를 선도한, 활력 있고 독특한 문명으로 발전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273]

 

중세의 농업 혁명은 인구 증가와 농토 부족으로 인한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유럽은농업 발전은 인공적인 관개작업이 기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었던 고대 동방과는 다른 패턴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은 봄과 여름에 내리는 충분하 비 덕분에 이미 자연적으로 관개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대신에 유럽 농부들은 땅 표면을 긁는 수준인 지중해권의 가벼운 쟁기로는 일굴 수 없었던 지역의 척박한 토양을 깊게 쟁기질함으로써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북유럽의 환경 조건에 맞는 독특한 기술적 혁신이 유럽의 농업 혁명을 낳았다.[273]

 

첫번째 혁신은 무거운 쟁기의 도입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혁신은 견인 동물로 소 대신에 속도와 지구력이 더 뛰어난 말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중세 농업 혁명을 촉발한 또 하나의 요소는 3단계 윤작 체계의 도입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다양한 사회적 결과를 낳았다. 중세 유럽의 농업이 북쪽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무거운 쟁기와 여러 마리의 소는 농부 개인이 마련할 수 없는 비싼 도구였으므로,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 공동 가축 사육의 패턴이 등장했고, 따라서 중세 마을의 단결력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정착된 장원 체계는 유럽 사회의 기반이 되어 최소한 프랑스 대혁명 시기까지 유지되었다.[275]

 

중세 농업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예외적인 식량 잉여는 중세 전성기의 유럽과 유럽 도시의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 중세 농업 혁명은 더 부유하고 생산적이며 도시화된 유럽을, 근대 과학을 창조하고 기술적 진보에서 세계를 이끌 소임을 맡을 유럽을 낳았다.[276]

 

군사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 역시 훗날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인이다. 이는 유럽 봉건체제의 결정적인 특징 중 하나인, 장갑을 갖춘 말을 탄 갑옷 입은 기사는 등자라는 핵심적인 장치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277]

 

기마 돌격전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농업혁명이 낳은 장원 체계와 쉽게 융합했다. 기사는 봉신으로서 영주에게 충성하고 그 대가로 장원의 일부를 영주의 이름으로 관리하며 소작료를 챙기는 참된 봉건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지역적인 관계는 중세 유럽 사회의 지방 분권적 성격에 특히 적합했다. 관개 기반 설비가 불필요한 농업경제에서는 강력한 중앙 정부는 필요하지 않았다. 장원 체계는 유럽의 환경과 잘 어울렸다.[277]

 

유럽 기술자들은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동력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은 인간의 근력을 주요 동력으로 하지 않은 최초의 거대 문명이 되었다. 주된 예는 수력과 풍력이었다.[278]

 

유럽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킨 일련의 인상적인 기술 혁신은 이론적인 과학에 아무 것도 빚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발달은 과학과 자연철학을 위한 새로운 외적인 환경을 마련했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학문과 교육의 문화가 유럽에서 발생할 터전을 닦았다. 이른다 ‘12세기 르네상스속에서 유럽 학자들은 고대와 이슬람의 철학 및 과학 전통을 접하고 발전시키기 시작했다.[279]

 

12세기에 등장하여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된 유럽 대학들은 과학과 지식 제도화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을 이룬다. 유럽 대학의 발생은 농업 혁명으로 인한 부의 증가와 도시의 성장과 시기가 일치한다.[282]

 

1200년경 유럽인들은 고대 과학 대부분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과학적, 철학적 성과를 확보했다. 12세기가 번역의 시대였다면 13세기는 유럽 지식인들이 고대와 중세 이슬람의 과학적, 철학적 전통을 흡수한 동화의 시대였다. 동화 과정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이교도 전통을 조화시키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위대한 지적 종합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동화 과정을 상당 부분 완성했다.[284]

 

동화 과정에서 13세기 내내 신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일련의 지적인 충돌이 있었다. 충돌의 절정은 1277년 내려진 판결이었는데, 교황을 등에 업은 파리 주교들이 몇몇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가 범한 오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그 같은 오류를 주장하거나 가르친 자를 파문했다. 표면적으로는 이 판결이 보수적인 신학의 결정적인 승리로 보였지만, 교양학부의 선생들에게 모든 과학적 가능성을 살펴볼 길을 열어주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288]

 

14세기에 일련의 혼란이 유럽 대부분을 휩쓸었고, 중세 후기에 수백 년 동안 번창한 유럽은 환경적으로나 인구적으로 단절을 맞았다. 유럽의 기후는 더 춥고 습해져 농업 생산성과 수확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며 인구의 1/4 또는 1/3을 없애 버렸다. 사회적으로는 교황청이 거의 14세기 내내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있는 동안 기독교의 통일성이 깨지고 가톨릭이 여러 유파로 분열되었다. 1388년에 발발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은 1450년대까지 프랑스의 중심부를 거듭 초토화했다.[295]

 

15세기에 화약과 화기들은 유럽의 전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15세기 말에는 전쟁의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을 바꾸어 놓았다. ‘화약혁명은 봉건적인 기사와 영주의 군사적 역할을 그들을 중앙 정부의 엄청난 비용으로 운영되는 화약 육군과 해군으로 대체했다. 새로운 무기는 기사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포는 영주나 지역의 우두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오직 왕만이 그 비용을 댈 수 있었다.[300]

 

잔 다르크의 활약은 전쟁 기술의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17세의 문맹인 농노 소녀 잔 다르크가 노련한 영국 장군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대포라는 신기술이 워낙 새로와서 과거의 군사적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잔 다르크의 동료들은 그녀가 전장에 포를 설치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고 칭찬했다.[300]

 

사실 축적된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닌 신기술이 등장하면 젊은이가 늙은이를 제치고 중요한 업적을 남기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를 잔 다르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300]

 

오직 규모가 큰 정치적 통일체만이, 특히 세금 조달력이나 기타 상업적 부를 확보한 중앙집권적인 민족 국가들만이 새로운 무기와 요새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사혁명은 권력을 지역의 봉건적 권력자들에게서 중앙집권적인 왕국과 민족국가들로 이동시켰다. 예컨데 프랑스 왕국은 15세기의 백년전쟁 이후에 통일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1550년대 이후의 소총과 상비군의 발전은 그런 추세를 더욱 강화했다.[302]

 

역사적으로 독특한 이 같은 군사 기술은 정부의 개입과 지원을 요구했으므로 유럽 사회는 중앙집권화를 향해 나아갔다. 군사혁명은 국가 간 경쟁과 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선호하는 사회적 역동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유럽은 수천 년 전의 이집트와 중국처럼 문명화된 제도 전체를 갖추게 되었다.[303]

 

유럽은 군사 혁명의 결과로 점점 더 중앙집권화 되었지만, 지리적/환경적 조건 때문에 제국이 형성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속에서 다양한 인종적, 언어적, 지리적 요속가 종합되어 민족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경쟁을 벌였으며, 어떤 국가도 전체를 지배하기에 충분한 힘을 얻지 못했다. 이들 사이의 상호 견제는 유럽을 분쟁의 온상으로 만들었으며, 또 기술적으로 세계사를 이끌 역량을 갖추게 만들었다.[303]

 

군사혁명이 정치적 중앙 집권화와 더불어 산출한 또 하나의 결과는 유럽인의 식민지 정복 물결이었다. 해전 혁명은 유럽의 세계 정복 과정의 기술적인 토대였다.[304]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유럽의 발전에서 과학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본질적으로 아무 역할이 없었다는 것이 정답이다. [306]

 

10장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시작하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임종을 맞는 자리에서 자신이 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초판본을 받았다. 그 위대한 작품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매일 한 바퀴씩 자전하고 매년 한 바귀씩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태양 중심 우주론을 주장했다. 전통적인 천문학적 지혜이며 성경이 보증하는 전통인 지구 중심론과 그렇게 완전히 결별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과학 혁명에 불을 댕기고 근대적인 과학적 세계관의 형성을 향상 첫 발을 내디뎠다.[309]

 

16세기와 17세기 유럽 과학의 사회적 맥락은 여러 면에서 중세에 비해 극적으로 달라졌다. 군사혁명, 유럽인들의 탐험 항해, 신세계의 발견은 과학혁명이 전개되는 맥락을 바꾸어 놓았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중세 말기의 폐쇄적인 유럽 중심적 세계관 전체를 흔들어 놓았고, 과학적 지리학은 그 자체로 과학혁명의 계기를 제공했다. 지도 제작술을 세계에 관한 지식의 새로운 모범이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이 의사소통 혁명을 일으켜 가용한 정보의 양과 정확도가 향상 되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인쇄술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다. 인쇄술과 인본주의 학자들의 등장은 과학과 관련해서 또 한 번 고대 문헌들의 부활을 가져왔다.[311]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업적에 관하여 핵심적으로 지적할 사항은 그가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라기 보다 최후의 고대 천문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케플러와 뉴턴의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로서 연구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 천문학을 뒤짚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318]

 

코페르니쿠스는 어떤 새로운 관찰에 의거하여 자신의 천문학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는 천구의 호전에 관하여에서 태양 중심론을 증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태양 중심론을 다만 가설로서 제시했고 그 가설에 근거하여 자신의 천문학을 구성했다. 그가 그처럼 과감한 전제들을 채택한 것은 본질적으로 미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였다. 그가 보기에 태양 중심 체계는 비율적으로 더 단순하고 조화로웠다.[319]

 

케플러는 행성들이 원이 아니라 타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발견은 경이로운 전환점을 이룬다. 1609년에 출간된 새로운 천문학에서 케플러는 행성 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 중 두 가지를 발표했다. 그 둘은 다음과 같다 : (1) 행성들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며 운동한다. (2)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은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한 면적을 휩쓸고 지나간다. [335]

 

11장             갈릴레오의 죄와 벌

 

갈릴레오 갈리레이는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우뚝 서 있다. 그의 위대한 명성과 중요성은 여러 원인과 성취에서 나온다. 그의 망원경 개량, 천문학적 발견들, 그리고 운동 및 낙하하는 물체에 관한 연구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과 과학사 속의 불멸을 안겨 주었다. 그의 생애 역시 파란만장 했으며, 16, 17세기에 일어난 과학의 사회적 성격 변화를 반영한다.[339]

 

갈릴레오의 명성은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을 감히 하늘로 돌려 신비로운 천상의 세계를 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610년 소책자 별들의 소식을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지금껏 아무도 보지 못한 무수한 별들이 은하수 속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달이 거대한 산과 분화구와 계곡으로 뒤덮여 있고 대기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목성의 위성 네 개였다. 새롭게 발견된 목성의 위성들은 다른 천체들이 운동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지구와 태양 뿐이 아님을 시사했다.[341]

 

대학은 과학혁명기에 주도적인 변화의 온상이 아니었고, 과학을 위한 결정적인 무대를 제공한 것은 르네상스 궁정과 그 안에서의 삶이었다. 특히 르네상스 이탈리아 궁정들에서 전폭적인 후원 체계가 발생했고, 그것이 새롭고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과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수단이 되었다. 메디치 궁정의 후원은 갈릴레오의 경력과 과학을 형성하였다. 특히 후원자들은 유명한 인물을 지원함으로써 명세를 얻고 명성을 강화했다.[344]

 

그가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내용들은 곧 코패르니쿠스 체계에 관한 질문을 논쟁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순식간에 신학적 반론이 제기되었고, 갈릴레오는 전혀 새로운 종유의 적수들 신학자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347]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616년 종교 재판소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오류이며 공식적으로 이단이라 못박고 금서 판정 회의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금서 목록에 올리자 갈릴레오는 입지를 잃었다.[348]

 

두 개의 주요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 1632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여러 이유에서 그야말로 폭탄이었다. 첫번째 이유는 이 책은 그때까지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명쾌하고 완벽하고 설득력있는 논변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고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자연철학을 반박했다는 점이다. [351]

 

갈릴레오의 재판과 처벌은 때때로 과학은 민주주의 속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이 주장은 명백한 오류이다.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몇몇 사회는 성공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켰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오히려 중요한 사안은 과학자 사회의 독립성이다. 정치적 권력의 개입은 과학의 발달을 방해했다. [357]

 

1633 12월에 갈릴레오는 70번째 생일을 맞았다. 신념을 포기하는 치욕을 겪었고 여전히 종교 재판소의 수인 신분인 그는 이미 반쯤 실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혼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릴레오는 많은 이들이 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하는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의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두 가지 놀라운 발견을 발표했다. 하중이 실린 들보 혹은 외팔보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낙하하는 물체에 관한 법칙이 그것이다. 이 두 발견은 그가 16세기와 17세기에 진행된 과학혁명과 물리학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이다.[358]

 

르네 데카르트는 새로운 과학의 선구자 역할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의 과학과 철학에 맞서 철저히 기계적인 세계관을 주창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와 그 속의 모든 것은 역학과 충돌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연결되어 거대한 기계로서 작동한다. 그의 자연철학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100년 동안 제기된 모든 논쟁을 망라했고 새로운 과학의 모든 발견을 종합했는데 따라서 그는 과학혁명에 쐐기를 박은 인물이라 부를 만하다.[373]

 

과학의 사회적 유용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17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과학이 유용한 지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인물은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그는 화약, 나침반, 비단, 인쇄술을 체계적인 연구와 발견에서 산출된 유용한 발명품의 예로 들었다. 데카르트도 이른바 실용철학, 그리고 지식이 만인의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응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함으로써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심지어 아이작 뉴턴도 프린키피아’ 2권에서 과학의 유용성을 주장했다.[377]

 

17세기의 사상가들도 자연과 자연에 대한 착취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자연과 세계의 천연자원은 인류의 이익을 위해 가차없이 착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하에 있다는 생각은 이미 중세에도 성경의 권위와 연합하여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을 강제로 약탈하고 고문하는 모양새가 과학적 활동의 한 측면으로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은 17세기의 사상에서였다.[378]

 

과학이 유용하다는 생각, 과학이 공공의 재산이라는 생각, 지식이 힘이라는 생각은 17세기 이후 서양에서, 그리고 19세기 이후 모든 곳에서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다. 이 원리의 귀결은 두 가지이다. 첫째, 과학과 과학자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 둘째, 과학과 과학이 산출하는 힘은 공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과학의 유용성을 부르짖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새로운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상업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더 적합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378]

 

12장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하시니

 

아이작 뉴턴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의 지성계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의 생애는 한 시대의 종말과 또 한 시대의 시작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해 준다.[379]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데카르트, 갈릴레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를 거처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주론과 세계의 기반에 놓인 물리학에 관한 이론적 탐구의 전통을 사실상 완성했다. 중력과 운동 법칙을 앞세운 뉴턴의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천상과 지상을 마침내 통일했다. 뉴턴은 또 수학자로, 그리고 미적분학의 공동 발명자로 칭송된다. 그는 광학에서도 근본적인 업적을 남겼다.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각각의 업적이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뉴턴은 천재라는 칭송을 받는다.[379]

 

그가 수학 교수에서 왕립 조폐국의 관료로, 런던 왕립 학회장으로, 결국엔 아이작 뉴턴 경으로 변신한 것은 17세기 유럽 과학의 사회적, 제도적 변화의 패턴을 반영하며 과학의 사회사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준다.[380]

 

17세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과학이 유용해야 하며 응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했다. 그렇다면 과학혁명기에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실제로 어떠했을까? 전체적으로 볼 떄,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에 수반된 기술적 혹은 산업적 혁명은 없었다. 몇몇 중요한 기술 개발은 과학이나 자연철학의 응용 없이 이루어졌다.[406]

 

 

4부  용감한 신세계

 

18세기에 인간의 실존을 바꾸어 놓는 움직임이 영국에서 전개되었다. 그것은 산업화였다. 역사적인 산업화 과정-혹은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주요 활동이던 농업이 전면에서 물러나고 공장에서의 기계화된 제품 생산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행의 귀결은 과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초기의 신석기 및 도시혁명과 대등할 정도로 근본적이었다.[418]

 

13장             산업 혁명

 

산업혁명은 인구를 전통적인 농업과 교역으로부터 기계화된 생산으로 이동시켰고, 공장 시스템을 발전시켰으며, 공업 생산을 지탱하는 국제적인 시장을 발전시켰다. 철과 석탄, 그리고 증기가 상징적인 자원으로 부상했다. 산업화는 기술적 혁신과 경제 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의 과정도 촉발시켰다.[422]

 

16, 17세기에 영국의 도시와 교역과 산업은 성장했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결정적인 병목이 형성되면서 성장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18세기 동안 그런 제약들이 기술 혁신에 의해 여러 차례 극복되었고, 영국 경제는 다시 전례 없는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제출과 방직, 광업, 운송이 모두 신기술에 의해 발전되었다. 많은 혁신은 전통적인 방법으로부터의 극단적이 단절이었다.[423]

 

중기기관은 산업 발달의 진로를 변경시킨 기술적 혁신이었다.[427]

 

그렇게 구경거리로 탄생한 철도와 기관차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발명품이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의 공장이 되어가고 있었고, 호물 운송의 필요성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트레비식의 고압 증기기관은 철도를 가능케 함으로써 운송의 경제학을 바꾸어 놓았다.[431]

 

178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된 과정은 주요 산업이 함께 혹은 개별적으로 발달하면서 일으킨 상호 보강 효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철을 석탄으로 녹이기 시작하면서 제철 산업을 석탄 산업의 발달을 촉진하고, 석탄 산업의 발달로 인해 광업을 위한 증기기고나이 탄생했고, 석탄을 대량으로 운송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철도가 만들어지며, 철도의 필요성 때문에 다시 철 생산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식으로 상승적인 공생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이, 그리고 결국엔 세계가 바뀌었다. 과거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에서 그랬듯이 이런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이 일단 시작되자, 과거의 사회적 혹은 경제적 양식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했다.[433]

 

우리는 산업혁명의 네 가지 특징적인 측면에 주모할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을 지탱한 새로운 에너지원, 공장 생산 체계 속에서 새롭게 조직화된 노동, 산업발달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새로운 수단, 산업화에 수반된 이데올로기적 변화가 그것이다.[433]

 

18세기말과 19세기는 또 낭만주의 운동의 번창을 목격했다. 예술가들은 과거의 고전적인 양식에 등을 돌리고 자연의 소박함, 가족, 인간의 마음 등에 관련된 주제로 눈을 돌렸다. 낭만주의 운동은 파괴적인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436]

 

1850년에 영구의 도시 인구가 처음으로 50퍼센트를 넘어섰다. 최초의 세계 박람회가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되었다.[437]

 

18세기와 19세기 전반기의 산업혁명에 기초를 제공한 기술적 혁신은 모두 기술자나 장인이라 부를 수밖에 업슨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 중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이는 극소수였고, 그들은 모두 과학적 이론에 기대지 않고 성취에 도달했다. 과학 활동 자체는 여전히 헬레나 풍으로, 사회의 실용적인 사안과 대체로 상관없이 이루어졌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과학 분야만 예외였다. 기술자들은 과학적 지식의 지팡이 없이 나아갔다.[439]

 

14장             현대 과학으로 가는 길 :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과학혁명 이후 두 개의 과학적 전통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고전 과학이라 불리는 하나의 전통은 천문학, 역학, 수학, 그리고 광학을 아우른다. 이 분야는 고대에 발생하여 고대 세계의 연구 노력 속에서 성숙했다. 과학혁명에 의해 혁명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 바로 이 분야이다. 또 다른 부류인 베이컨 과학은 고전 과학과 나란히 그러나 별개로 과학혁명기와 그 이후에 발생했다. 베이컨 과학-일차적으로 전기, 자기, 열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의미한다-은 고대의 과학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과학혁명을 둘러싸고 들끓던 환경의 산물로, 경험적 연구의 영역으로서 탄생했다. 다시 말해서, 과학혁명기에 고전 과학이 변화했다면, 베이컨 과학은 일반적인 지적 흥분 속에서 형성되었다.[447]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고전 과학에 물리학의 전문적인 세부사항과 일반적인 방법론과 18세기 내내 과학자 사회가 추구한 연구 과제들의 모범을 제공했다.[448]

 

뉴턴의 광학 18세기에 베이컨 과학들이 발전할 수 있는 개념적인 발판을 제공했다.[449]

 

2과학혁명은 19세기 벽두에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획기적인 과학사의 변화는 두 가지 핵심적인 경향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하나는 과거에 정성적이던 베이컨 과학이 수학화되는 경향성이며, 다른 하나는 고전 과학과 베이컨 과학이 이론적/개념적으로 통합되는 경향성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별개였던 전통들이 과학적으로 통합되어 오늘날 우리가 물리학이란 부르는 것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2의 과학혁명이 전개되고 수학화와 통합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단일한 보편적 법칙 체계와 매우 일관적인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고전전 세계관이라 불리는 그 세계관은 물리과학의 전 분야를 아우르는 듯이 보였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약속하면서 물리학 자체를 종결시키는 듯이 보였다.[456]

 

열역학은 19세기에 등장하여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과학의 두 분야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진화론이었다. 에너지 개념과 열역학의 원ㄹ는 물리과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심층적인 수준에서 통합했고 19세기 말에 종합된 통일적인 세계관의 토대를 마련했다.[462]

 

뉴턴과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게서 근본적인 토대를 얻은 고전적 세계관은 균일하며 유클리드적인 절대공간과 필연적으로 일정하게 흐르는 절대시간의 개념을 기초로 삼았다. 이어서 맥스웨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여 세 개의 존재자가 고전적 세계관에 가세했다. 물질, 보편적인 에테르, 에너지가 그것이었다.[463]

 

지금까지 언급한 고전적 세계관은 1888년대에 종합되었다. 고전적 세계관은 강력하고 일관적이었으며, 우주의 물리적 측면과 자연 현상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수학적으로 정확한 이해였다. 고전적 세계관이 종합됨으로써 까마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자연철학의 모험은, 적어도 물리학과 관련해서는 거의 막을 내린 듯이 보였다.[464]

 

현대적인 과학자가 확실한 사회적 유형으로 등장한 데는 19세기에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새롭게 마련된 것, 즉 첫 과학혁명 당시의 새로운 조직화에 비길만한 제2조직화 혁명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독일의 대학 시스템 개혁은 19세기 과학의 새로운 제도적 기반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이 같은 새로운 맥락에서 과학 연구가 전례 없이 강조되면서 과학교육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467]

 

과학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scientist’ 1840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시의 과학과 과학 연구자들을 둘러싼 사회적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469]

 

과학과 산업, 그리고 과학 문화와 기술은 대체로 19세기에 융합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장은 19세기 이전에는 응용과학이 미미한 정도로만 존재했다는 것이다.[469]

 

15장             생명 그 자체

 

과학은 대개 점진적으로 느리게 발전한다. 가끔 나타나는 새로운 발견은 과학의 이론적인 틀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이론적인 틀을 강화하곤 한다. 하지만 가끔 커다란 격변이 일어나며, 격변의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과거의 틀을 밀어낸 새로운 틀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같은 격변-과학혁명-은 오래 유지되어 온 과거의 관념을 명료한 새 개념으로 대체할 뿐 아니라 연구의 경계선을 변경시키고 과거의 과학은 제기하지도 못한 새로운 연구 문제를 창출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16세기에 전개된 과학혁명이었다. 그와 유사하게 19세기와 20세기에는 다윈 혁명이 과학의 지형을 재편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1859년에 출간되어 유럽 과학사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476]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다윈 혁명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2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천문학적 믿음에서 이탈했다. 다윈 혁명은 종이 고정되어 있다는 해묵은 믿음에서 이탈했다. 이 믿음 역시 성경적인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두 혁명의 결과로 하늘과 땅이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르며 인간과 짐승은 생물학적인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과학적 세계관이 탄생했다.[478]

 

오늘날엔 대부분의 과학자와 신학자가 자연에 대한 연구에서는 갈릴레오가 충고한 대로 성경의 권위가 과학적 탐구에 주도권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과학사가들은 과학과 종교가 본성적으로 영원히 대립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실제로 17세기 과학혁명의 결과 중 하나는 과학과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 사이의 동맹 관계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자연신학, 즉 신의 작품인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신적인 계획을 통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특히 영국에서 튼튼한 기반을 확보했다.[478]

 

1831년부터 1836년까지 5년 동안 지속된 항해는 다윈과 과학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다윈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발휘했고 부지런히 식물과 동물의 표본을 수집했다. 다윈은 결국 오로지 엄청난 지적인 노력만으로, 지구의 물리적 특징이 변화하면 식물과 동물도 그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는 한 한때 잘 적응했던 존재라도 잘못 적응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485]

 

인구가 자원을 압박하고 그 결과 종들의 전쟁이 일어난다는 멜서스의 통찰은 다윈에게 수수께끼를 푸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했다. 멜서스는 자신의 통찰을 사회에 적용했지만, 다윈은 이를 식물과 동물에 적용했다. 1838년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이 위대한 작품의 공표를 꺼렸다. 그로서는 확신이 있었지만,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이론으로는 확실히 증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윈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후 20년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자신의 생각을 발표했다.[488,489]

 

다윈주의는 결국 1940년대에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들이 매우 복잡한 패턴으로 조합되어 작은 변이들을 산출하고 변이에 자연선택이 작용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생물학적 다양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채택되었다.[500]

 

16장             도구 제작자, 지휘봉을 잡다

 

산업혁명에 의한 발전은 187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올려 놓았다. 새로운 식민지 개척의 시대가 열렸고, 이른바 19세기 신제국주의의 막이 올랐다. 여기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럽과 미국이 덜 발달한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산업화를 독점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산업화의 확산은 유럽 식민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507]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의 지배력과 더 큰 세계,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는 여러 신기술에서 기초를 얻었다. 핵심적인 것은 이른바 전쟁의 산업화’, 즉 전쟁물자의 생산에 산업적 방법을 적용한 것이었다.[509]

 

미국은 20세기에 세계최강의 산업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어마어마한 농업적 잠재력과 풍부한 천연자원이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미국을 산업문명의 선두 주자로 올려놓은 일등 공신은 헨리 포드가 개척한 미국의 자동차 공업과 대량 생산 기술이었다.[512]

 

대량생산된 자동차들은 다른 어떤 기술보다 강력하게 20세기 문화를 지배했다. 자동차 산업은 전세계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자동차라는 기술적 시스템이 사회에 미친 충격은 어마어마했다.[517]

 

기술적 혁신은 20세기 산업문명을 계속해서 변화시켰다. 전기가 매우 다재다능한 에너지원으로서 산업과 가정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핵심적인 혁신 중 하나이다.[517]

 

산업문명은 20세기에 불평등하게 확산되었다. 덜 발단된 나라들은 지금도 산업화된 국가들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이다. [518]

 

소비주의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지배적인 가치관이다.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적 문제들은 어마어마하며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가 산업화에 동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종 결론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세계가 산업을 더 강화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 자연을 숙고하는 사상가들은 또 다른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520]

 

17장             새로운 이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

 

20세기 과학 사상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19세기 물리학의 고전적 세계관을 뒤엎고 물리적 세계의 이해에 혁명적으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 것에 있다. 흔히 아인슈타인 혁명이라 불리는 이 혁명은 현재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22]

 

2000년 동안 유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과 달리 고전적 세계관은 거의 구성되자마자 해체되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치명적인 문제들이 발생해 당대 물리학을 허물기 시작했고, 20세기 벽두에 이르면 물리과학들이 연달아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522]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현대 물리학의 진로를 바꾸어놓은 일련의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가장 극적인 논문은 특수상대성이론, 혹은 서로에 대해 일정하게 움직이는 물체들의 물리학을 다루었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런 속도 제한이 없는 뉴턴의 역학을 본질적으로 재편했다. 이 이론은 뉴턴의 물리학과 고전적 세계관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절대공간 및 절대시간을 동원하지 않고 운동을 해석했다.[525]

 

특수상대성이론은 등속운동에만 관여했다. 그는 1915년에 가속운동의 물리학인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중력과 가속도를 등치시켰다.[526]

 

1920년대에 이른바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나와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양자이론은 원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결정론적 역학 모형을 버리고, 원자를 비롯한 모든 물질적 대상을 경계가 선명한 존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파동/입자 이중성을 지니며 그것의 실체를 확률 함수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자로 본다. , 양자역학적 파동은 대상을 특정 구역 안에서 발견할 확률을 말해 준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확률함수 뿐이다.[528]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그 원리는 양자이론의 개념적인 기반을 놀라울 정도로 확장시켰다. 그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혹은 운동량)를 동시에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529]

 

양자역학은 자연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비결정성을 드러낸 것이다. 우연과 무작위성은 자연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사실이 양자역학을 통해서 드러났다. 우리는 그 무엇도 확실히 말할 수 없으며, 다만 확률적인 예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529]

 

18장             오늘날의 응용 과학과 기술

 

과학과 기술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통합을 어떻게 성취한 것일까? 처음엔 오직 기술만 존재했다. 그 후 6000년 전 최초의 문명들에서 과학이 기록된 수학과 천문학 지식의 형태로 기원했다. 그러나 이 발전은 과학을 복잡한 농업경제에 응용하려 했던 중앙정부와 국가 수준의 집단을 사회적 맥락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유용한 지식에 한정된 지원을 제공하는 패턴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등장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국가의 힘이 약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과학은 자연철학의 형태를, 기술을 숙련된 솜씨의 형태를 띄었으며, 이 둘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기술의 대부분은 응용과학이나 순수과학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어쩔 수 없이 또 느리게 정부와 산업체들이 이론적 연구를 기술과 산업에 응용할 가능성을 깨달았으며, 그 결과 과학의 기술적 응용이 극적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R&D의 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한 것이다.[540]

 

인용 연구가 보여주는 과학적 정보의 짧은 수명, 과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 현존 과학자의 양적 우위, 교육 현장의 관행,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548]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미국의 운자폭탄 개발과 사용은 현대 과학기술사의 분수령을 이룬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그 사건은 과학의 잠재적 실용성을, 혹은 이론을 유용한 목적에 전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둘째, 그 사건은 정부가 풍부한 자원으로 거대 규모의 과학적 연구 개발을 지원할 때 어던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549]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시작된 원초문명들에서 정부가 과학과 과학 전문가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에서 처음 드러나는 응용과학에 대한 기대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과학과 기술은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화해하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결합했다.[558]

 

결론 : 역사라는 무대

 

우리의 논의는 기술이 인류의 역사에 근본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었다. 기술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그리고 그 후의 모든 문명에서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인류가 존재하고 지구에서 거주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기술을 이용하여 세계를 주무를 것이 분명하다.[563]

 

우리는 또 최초 문명들의 정부가 국가 통치를 위해 전문가들을 고용한 이후에 비로소 과학에 기초한 기술들이 존재했음을 보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산업의 강한 연결은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이 과학-산업 연결은 새롭고 막강한 역사적 현상이며 긍정적인 효과와 부정적인 효과를 모두 가지고 있다.[563]

 

역사는 세속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성이 있다는 생각을 최초로 공표한 것은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이었다. 그러나 진보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도 필연적으로 지속되는 것도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산업혁명과 그 귀결들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세상을 급속도로 또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의 산물로 도래한 현재 인류의 강화된 산업적 실존 양식은 지속되기 어려워 보인다.[566]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은 구석기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는 200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기술과 과학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모해 왔는지와 과학과 기술이 어떤 관계 속에서 문명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하여 시대의 흐름 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 책은 인류의 과학기술문명사에 대하여 4단계로 나눠 접근하고 있다. 첫번째는 초기 유인원부터 고대 그리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로 구석기 시대의 불의 이용, 신석기 시대의 농업과 목축, 방직과 도기 기술, 야금기술 그리고 도시문명의 탄생을 이끈 시기이다. 그리고 독립적인 자연철학의 탄생을 낳은 ‘그리스의 기적’까지를 다루고 있다. 두번째는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 중세에 발생한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제국, 중국, 인더스,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과학 기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세번째는 유럽의 과학혁명의 역사로서, 중세 동안 문명적 진보 없이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유지하던 유럽이 12세기 부흥기를 거쳐 16, 17세기에 과학혁명을 이루기까지의 시기를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18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서구 주도의 산업혁명과 제2의 과학기술혁명을 살펴보면서 산업혁명을 낳았던 다양한 기술들과 19세기의 고전적 세계관과 진화론, 그리고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살펴 보고 있다.

 

책의 특징

 

향후 IT 기술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통찰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책을 쓰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과학과 기술 중심의 세계사에 대한 이해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가지 책을 검색한 끝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세계역사학회 최고도서상수상이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 왔다. 인터넷에서 구매하기 전에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쭉 훑어 보았는데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 배치, 적절한 이미지의 삽입 등이 한 눈에도 봐도 괜찮은 책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약간의 도전 정신을 가지고 읽어 보았다.

 

이 책은 T자형 책이다. 넓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논문형 영작문의 특징(문단의 가장 첫 문장이 핵심을 나타내는 주요 문장이며, 따라서 각 문단의 첫 문장만 연결하여 읽어도 큰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함)을 활용하여 문단의 주요 문장만 연결하여 읽어도 전체적인 인류역사 상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 방향과 이의 의미,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깊이가 있었다. 주요한 발견과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해서는 그 과정과 인생, 그리고 대표 작품을 아주 심도 있게(기술적인 내용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포함하여) 설명하여 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두 가지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주요 문장들만을 읽어 세계사 속에서의 과학과 기술의 영향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내가 1차적으로 사용한 방법). 그런 후 보다 세부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에 대해서 연대별/기술별/인물별로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이다(차후에 다시 보면서 각 세부 이론별로 보다 깊이있는 이해를 구할 예정이다).

 

이 책은 또 주요 역사적 사건 및 장소, 인물의 역작에 대하여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적절한 이미지(당시 지형도, 유물 사진, 원본 책에 실린 그림들, 통계 그래프 등)들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절히 수록하여 시대적 상황과 주요 이론에 대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적절한 이미지의 사용과 주석이 아주 돋보인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세계역사학회(WHA) 최고도서상을 수상한 책 답다는 생각이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이 책을 읽고난 후에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던 과학과 기술 관련 세계사적인 사고의 편린들이 결합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1000피스 짜리 고난도 퍼즐을 오랜 시간 공들여 맞춘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희미하게 나마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저자들이주장하는 대로 기술이 인류의 역사에 근본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했음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논증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기술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그리고 그 후의 모든 문명에서 어떤 측면에서 어떤 특징을 통해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가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관성으로 볼 때 인류가 존재하고 지구에서 거주하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기술을 이용하여 세계를 주무를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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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북리뷰16-<니진스키:영혼의 절규> [4] 박경숙 2010.06.21 6756
205 설득의 심리학 유영규 2004.10.12 6769
204 [피트 드러커] 자기경영노트4 박노진 2005.03.25 6778
203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2] 홍현웅 2004.11.04 6784
20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1] [1] 도서대여점 2005.02.23 6787
201 leaders 리더스 [1] 푸른이 2004.11.05 6804
200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박혜홍 2019.01.20 6826
199 #43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불씨 2019.01.20 6843
198 멋진 징조들 권아영 2004.10.14 6847
197 새벽나라에 사는 거인 [2] 강석진 (plus3h) 2004.10.13 6858
196 [선의 북리뷰]<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레슬리 베네츠 선형 2012.01.04 6860
195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박혜홍 2019.01.27 6862
194 4th Review <두번 읽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 조셉 캠벨 file 사샤 2011.04.25 6863
193 라르쉬의 정신 [1] 백수진 2004.12.10 6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