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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4일 00시 31분 등록

북리뷰 40:
  <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 고선일 역. 새물결. 2004
      원제: L'homme devant la mort . Philippe Aries. *1985.     * 1977년으로 교정되어야 할 것 같다.


***저자에 대하여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es (1914-84) :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국립도서관, 열대농업 연구소, 플롱 출판사 등 아카데미즘 밖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일요일의 역사가'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정통 학계에서는 '바나나 장수'로 외면당했으나, 그의 연구 주제의 혁신성과 논거 자료의 다양성은 프랑스 역사학계의 연구 대상의 확대와 심화를 가져왔다. 특히 '삶 앞에서의 인간의 태도'와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태도', '아동의 역사' 등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그의 새로운 역사학은 유럽 전체에 혁명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78년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cole des Hautes Etudes en Sociences Sociales : EHESS)의 연구주임 교수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분석한 박사 학위 논문 - [필립 아리에스 1914~1984. 비순응주의적 전통주의자 :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사회과학고등연구원까지](2002) - 이 나올 정도로 프랑스 사학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는 새로운 역사학의 영역을 개척한 동시에 심성사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킨 역사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지은 책으로 [아동의 탄생(원제: 앙시앵 레짐 하에서의 아동과 가족의 삶)](1960), [서양에서의 죽음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1975), [죽음 앞의 인간](1977) 등이 있으며,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와 함께 전 5권으로 구성된 [사생활의 역사](1983)를 편집했다.

필립 아리에스는 심성사 분야의 선구자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날학파중 한 사람인 아리에스는 그동안 역사학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가족, 죽음, 아동등과 같은 생소한 주제들을 역시 기존의 역사학에서 사료로 활용하지 않았던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연구함으로써 역사학 연구의 지평을 넓힌 역사가이다. 특히 1960년 그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어 준「앙시앵 레짐에서의 어린이와 가족 생활」은 중세와 근대에 걸쳐 어린이와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관해 연구한 심성사의 대표적 저작이다. 아리에스는 사랑스럽고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 ‘어린이’라는 개념이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근대에 와서야 형성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족’하면 떠올리는 ‘편안하고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란 개념 및 이미지가 근대에 와서야 형성된 개념이고, 이는 어린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1977년 아리에스는 후속 연구로 「죽음앞의 인간」이란 책을 통해 죽음의 역사에 관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서도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중세와 근대와는 큰 차이가 있음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중세 초에는 죽음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무관심한 것이었다가 중세 말에 이르면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두려운 것이 되고 근대로 이르면 죽음은 낭만적인 것, 동경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죽음의 대한 인식이 낭만주의 시기에 와서는 그 이전과 이후에 비해 확 바뀌어진다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고, 낭만주의가 지나간 현대에도 죽음은 터부시될 정도로 두려운 것인데 낭만주의 시기에서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 동경의 대상이 됨은 분명 특이할 만하다. 그리고 이 시기가 아리에스가 앞선 저작에서 말했던 근대적인 의미의 ‘가정’과 ‘어린이’ 개념의 등장과 들어맞는 시기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립 아리에스는 미시사와 생활사 중심의 역사 연구를 개척한 학자이다. 전통적 우파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정치사 중심의 기존 연구에서 탈피해 묘비, 일기장 등 다양한 자료를 뒤져가며 새로운 글쓰기로 화제가 됐다.  출판사 근무 시절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거부당한 미셸 푸코의 책을 처음으로 출판했고, 이런 인연으로 아리에스가 죽었을 때 푸코는 르몽드 지에 추모사를 쓰기도 했다.

*** 마음을 무찔러든 글귀


[횡와상의 시대]
머리말
1부. 우리는 모두 죽는다
     1. 인간과 친숙한 죽음
     2. 성인 곁 매장 ; 교회 내 매장 
2부. 자신의 죽음
     3. 죽음의 순간. 삶의 기억
     4. 내세에 대한 보증
     5. 횡와상, 기도상 그리고 영혼
[야성화된 죽음]
3부. 먼죽음과 가까운 죽음
      6. 전환
      7. 바니타스
      8. 죽은 육신
      9. 살아 있는 죽은자
4부. 타인의 죽음
      10. '아름다운 죽음' 의 시대
      11. 묘지 방문
5부. 역전된 죽음
      12. 역전된 죽음

결론
네 개의 주제에 의한 다섯가지 변주


1장 인간과 친숙한 죽음

41. 앞으로 이 책에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게 될 죽음의 이미지는 기사 롤랑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중세 초기 시대의 죽음이다.

42. 죽음은 관례화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죽음에는 늘 ‘사전 예고’ 가 전제되어 있었다.

50. 이 경우 죽음은 신의 노여움을 가장한 운명의 부조리한 도구가 되어 세상의 질서를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급사는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56. 죽어가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린다. 그러고는 두 팔을 십자모양으로 모으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고 땅바닥에 조심스럽게 드러눕는다.

58. “죽음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 또는 “죽음보다는 이 세상의 고통이 낫다.”는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기보다는 동일한 감수성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사실상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즉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삶에 대한 회한의 감정은 죽음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지식인 사회의 윤리관으로부터 다소 인위적이고 과장된 요소를 제거하고 있다.

63. 일상성 혹은 단순성이 죽음의 가장 본질적인 두 성격 중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공개성으로 이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죽어가는 자는 군중의 한가운데 있어야 했다.

70. 죽음이란 다른 곳으로 건너감을 뜻했다. 장켈레비치는 “죽은 자는 이 세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세상으로 건너 간다”라고 말한다.

74. 죽은 자들이 잠드는 장소는 거의 언제나 꽃이 만발한 정원이다.

2장 성인 곁 매장, 교회 내 매장

84. 고대인들은 죽음과의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과 가까이하기를 꺼려했으며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이 돌아올 것을 염려해서 무덤을 숭배했다. 묘지나 죽은 자들의 영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죽은 자들이 돌아와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고대 로마의 12동판 법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시신은 어떤 경우에도 도시 안에 매장되거나 태워질 수 없다.”

90. 순교자들은 육신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가 육신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우리를 위탁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죄악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고, 저 세상에 가서는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한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우리의 육신을 순교자들의 유골과 연합시키려고 애썼다.

91. 이렇게 순교자들의 무덤은 분묘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순교자들은 보통 도시 외곽에 있던 집단적인 매장지(네크로폴리스)에 묻혀 있었으므로 에로부터 내려오는 이교도들의 매장지가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추앙받는 매장지가 되었다.

141. 중세의 묘지세를 연구한 역사가 베르나르의 표현에 따르면, 묘지는 “도시든 농촌이든 취락지역 가운데 가장 시끄럽고 가장 분주하고 가장 떠들썩하고 가장 상업적인 장소였다.” 교회는 “공공건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택이 일반적으로 비좁았고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야했던 시대에, 또 길거리 외에는 만남이나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공장소가 부재하던 시대에 묘지는 만인에게 개방된 공공장소였다.

167.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교회는 분묘장소로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장소였다.

182. 이 장에서는 몇 가지 분묘 관행이 로마 카톨릭을 채택한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지역마다 근소한 차이를 보이면서 거의 천년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묘의 형태는 다음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좁은 공간에, 특히 야외에 위치한 묘지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묘지기능을 했던 교회 내부에 시신들을 쌓아올렸다.
둘째, 육탈된 인골들을 끈임없이 만지작거렸다. 다시 말해 시신을 매장한 후 일정기간이 지 나면 다시 땅을 파고 뼈를 추려내어 납골당으로 옮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죽은 자들이 존재하는 장소는 늘 산자들로 북적였으며, 따라서 이곳은 일상생활이 이 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3장 죽음의 순간 , 삶의 기억

208. 이제 침실은 한 인간이 죽음을 맞는다는 평범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죽어가는 자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장소였고 그의 전 인생, 열정과 집착을 가지고 그가 행한 모든 것이 점검되는 장소, 즉 한 드라마의 무대가 된 것이다.

209. 당시의 관습대로 방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공개된 채로 죽음을 맞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참석자들은 현재 진행되는 것을 보지 못하며 죽어가는 자 또한 이들을 보지 못한다. 의식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시선은 그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경이로운 장면, 즉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방으로 침입하여 자기의 머리맡으로 앞 다투어 몰려드는 광경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는 삼위일체, 성모마리아, 천상의 모든 법정 참석자들, 수호천사가, 다른 쪽에는 사탄과 무시무시한 악마들의 군단이 있다. 종말의 순간에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가 환자의 침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다시말해 천상의 법정이 그곳에 소집된 것이다.

222. “죽음의 무도”는 본래 성무일도 서에 수록되어있는 세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묘지의 장식화였다. 즉, 납골당 벽이나 회랑의 기둥머리들을 덮고 있던 프레스코화의 주제였던 것이다. “마카브로”의 의미를 두고 논란이 많다. 대중언어에서의 마카베 (속어적 표현으로 시체를 뜻함)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카베오 성인, 죽은 자 들의 수호성인.

223. “죽음의 무도”란 죽은 자와 산 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끝이 없는 원무를 말한다. 죽은 자들이 이 게임을 주도하며 이들만이 춤을 춘다. 벌거벗고 부패되고 성별을 알 수 없지만 활기 넘치는 미라 하나와, 각자 신분에 따라 옷을 갖춰 입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자 혹은 여자가 한 쌍을 이룬다. 죽음은 산 자에게 송을 뻗쳐 그를 끌고 가려 하지만 그는 아직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예술의 묘미는 죽은 자들의 활기에 찬 리듬감과 산 자들의 마비상태가 이뤄내는 대조에 있다. 여기에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생각을 일깨우려는 도덕적인 목적성이 있다.

260.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실패감을 노출 혹은 억압된 형태로 맛보게 된다.

261. 시련은 보통 40세 전후에 다가온다. 그리고 이것은 성인들의 세계로 접근해가는 청소년기의 문제들, 즉 알코올 중독, 마약,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어려운 문제들과 점점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결코 실패감이라는 씁쓸한 경험을 죽음과 연관짓지 못한다.

‘길들여진 죽음’의 시대, 그 냉정하고 느리던 시대에는 아무도 이러한 충격을 알지 못했다.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었으며 변화를 원치도않는 운명에 모두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2세기 이후에 부자들, 지식인들, 권력자들의 세계에서 누구나 개인적인 전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고가 출현한다. 처음에 이 개인적인 전기는 단지 최종적인 심판에 제출될 선행과 악행, 즉 존재 자체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생전에 열정적으로 집착하던 사물과 동물, 사람들, 그리고 명성, 한마디로 ‘가진 것’으로 그 내용이 바뀐다.

262. 건강이 한창일 때, 또는 젊음이 한창일 때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물이 주는 쾌락은 변질되어 나타난다. 이때 죽음은 저울, 결산, 심판, 혹은 잠이 아닌 썪은 고기나 부패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또한 삶의 종말이나 마지막 숨결이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 고통, 와해로 나타난다.

이렇게 종교적인 표상들,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태도들을 통해서 우리는 의식적인 죽음과 한 개인의 삶의 응축으로부터, 같은 의식적인 죽음과 그 삶에 대한 절망적인 애착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4장 내세에 대한 보증

263. 살아서 돌아오리라는 희망도 없이 십자군 전쟁을 떠나기에 앞서 이들은 강복의 형태로 내려지는 사면을 받는다. “그들은 사면 되었고, 죄의 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대주교는 그들에게 성호를 그려주었다.”

264. 그러고는 매장이 “모든 예의를 갖추고” 진행된다. 여기서 “예의”란 분향의식이 수반된 더욱 장엄한 두 번째 사면과 강복을 말한다.

266. 만일 우리의 가설이 옳다면, 이 속죄의 사면 행위는 그후에 무덤에서 행해지는 의식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수와 향은 죽음과 관련된 것들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자는 꼭 필요한 만큼만 삶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끝까지 침착함과 단순성을 지켜냈다. 그런데 죽음은 친숙하게 길들여져 있었으나 남은 자들의 애도 양상은 야만성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아니면 그렇게 보여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268. 이러한 상주들의 격정적인 애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주변사람들의 몫이었다.

271.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자 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것인 이 통곡(planctus, 가슴을 치며 통곡함의 뜻으로 직업적인 곡녀들을 고용하는 관습을 이름)의 의례를 교회는 애초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금지했다.

죽음의 순간에 행해지는 첫 번째 면죄기도,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애도와 통곡이 끝나면 마침내 시신은 운구되어 매장 장소로 옮겨졌다.

290. 로마 전례가 죽은 자들을 위한 메멘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제 모든 미사는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가 되었다.

300. 한 로만세로에서 주인공 엘 시드는 유언장에서 그 당시 관습적인 장례절차를 따르지 말도록 부탁한다.

내 장례식의 애도를 위해
직업적인 곡녀들을 고용하지 않도록 부탁하노라.
쉬멘의 눈물만으로도 충분할지니,
그 외 돈을 주고 사들인 울음이란 무슨 소용이 있을까

301. 그런데 1400년 5월 어느 날 이러한 요소가 갑자기 사라진다. 즉 살루타티 자신이 아들을 잃은 것이다. 그는 전에 저 자신이 보낸 위로의 서신에서 주장했던 의견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절감한다. 아들의 임종 순간에 그는 고통에 굴하지 않았으며,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려주었고, 마침내 아들의 죽음을 흔들림없는 감정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탄식 한마디 없이 무덤까지 아들의 시신을 따라갔다고 부언하고 있다. 살루타티는 그 시대 비슷한 신분에 있었던 일반 사람들처럼 처신 했을 뿐이다.

303. 검은색의 상복을 입는 관습이 16세기에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국왕이나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아직 요구되지 않았다.

304. 이로써 죽어가는 자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부터 친지나 동료에게도, 가족에게도 속해 있지 않고 교회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추도의 기도가 전통적인 곡과 한탄을 대치했고, 밤샘 의식은 종교적인 의례로 변모되었다. 이 종교의례는 집에서 시작되어 때로는 교회당으로 이어졌으며, 이곳에서 성직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즉 고인의 영혼을 하느님께 위탁하는 기도인 레코멘다체스를 올렸다.

밤샘의식이 끝나면 앞으로 상징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될 의식, 즉 장례행렬이 시작된다. 중세 문학 작품을 통해 살펴본 바대로 친구들, 가족과 친지가 분묘장소까지 시신을 동반했다. 마침내 평정을 되찾은 애도의 마지막 표현이었을까? 결국 명예라는 개념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속적인 행위로서의 그리움과 회한의 표출에 앞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306. 장례 행렬의 순서와 참석자는 관례 또는 성직자단의 결정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고인이 남긴 유언장에 지정되어 있었다. 이때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제와 빈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명예롭게 여겨졌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성직자들이란 곧 미사 또는 기부행위 등 장의 의례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던, 16-7세기의 프롤레타리아 사제들, 즉 ‘성직록 수혜혜택을 받지 못한 보좌사제들’을 가리킨다.

308. 장례식에 가난한 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고인의 마지막 자선행위였던 것이다.

331. 13-4세기 이후 18세기까지 유언자들은 사제, 교구 운영위원회, 기부 수혜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언자들은 성당에 계약기간, 기부내용, 그 대가로 부여되는 미사와 제식, 기도들을 공시하기도 했다. “동판을 한 개 제작하여 상기 유언자의 이름과 직위, 사망연도와 날짜, 그리고 고인이 된 그의 부모와 친구들, 위 성당의 후원자들의 영혼을 위해 영속적으로 드리게 될 미사를 명시하도록 하시오.”

332. 이 기증판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기증판들이 무덤을 대신하기도 했다. 유언자가 선정한 주임사제가 기일장을 본따 만든 장부에 유언의 내용을 적어 놓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 장부는 ‘금속판에 새기다’라는 의미의 ‘마르틀루아즈 marteloyge' 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364.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죽음, 즉 신 앞에서의 자기혼자만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것은 자선 행위와 기도들로 점철된 유일한 자산인 자기 자신만의 전기를 가지고 다시말해 일생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행위와 열의, 그리고 현세의 물질에 대한 수치스러운 애착과 내세에 보증을 함께 지니고 하느님 앞으로 홀로 대면해야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인간은 현세에서 잘 살아가고 또한 사후에도 잘 살아가기 위해서 그 주위로 이렇게 복잡다단한 체계를 조직해야 했다.

5장 횡와상, 기도상 그리고 영혼

368. 무덤이 묘지 숭배를 위해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정확한 장소를 지시한다는 사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묵적성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모누멘툼, 혹은 메모리아등 무덤을 가리키는 명칭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무덤은 기념물(메모리얼)이었다. 죽은 자의 내세는 종말론적 차원으로 제물 또는 제식을 통해서 보장될 수도 있지만 표식, 혹은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나 작가들이 작성하는 추도사를 통해 현세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고인의 명성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되었다.

391. 중세에 나타난 초기 묘비명들은 오히려 죽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새로운 욕구를 자발적, 무의식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392. 12-3세기에 묘비명은 거의 항상 라틴어로 쓰여졌다. ‘여기 누워 있다’ 라는 문구와 고인의 이름 다음으로 고인의 직업이 언급되며 그리고 ‘세상을 떠나다’ 라는 표현이 등장하고있다.

394. 실제로 비문에는 의사소통이 양방향으로 전개된다. 영혼의 안식을 바라는 취지의 죽은자를 향하는 기도와 살아있는 자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죽은 자의 기도가 동시에 이루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비문은 교훈인 동시에 일종의 ‘호소’가 된다.

408. 또한 16세기 중엽에는 부부간의 정조가 비문의 주제로 등장했다.

409. 16세기에는 묘비명을 작성하는 것이 죽음을 사유하기 위한 한 방편이기도 했다.

430. 상상의 무덤 박물관에서: 휴식을 취하는 자, 횡와상

432. 횡와상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었다. 이들은 복자들(beati)이었으며, 에밀 말에 따르면 수난의 그리스도와 같은 연령대인 영광스럽고 영원히 젊음을 간직한 육신들이고 파노프스키가 말한 “하느님의 도시에 거주하는 지상의 구성원들”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을 가리켜 ‘장엄한 직분을 지닌 이상형들’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441. 이처럼 죽음의 순간과 입관 시점 사이의 짧은 기간에 무덤 위의 횡와상 또는 재현상의 모습대로 시신을 전시하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468. 데드 마스크 관습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부르주아 계층의 거실을 장식하던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이다.

477. 횡와상은 17세기 초에, 또한 기도상은 18세기 말에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492. 때로는 묘표와 묘비명이라는 두 용어가 무덤을 뜻하는 말로 구분없이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묘비명은 묘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518. 무덤과 분묘로 이루어진 상상의 박물관을 주의 깊게 둘러보는 것이 죽음이나 내세에 관한 집단적 감성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6장 전환

528. 실제로 플라톤은 철학이란 늘 죽음에 대한 묵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529. 임종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것을 구태여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진대 왜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자연과 상관없이 살고자 애쓰는가?” 여기서 죽음이 곧 “여행”이라는 스토아 학파의 사고가 도입되고 있으며, 죽음을 뜻하는 프랑스어 ‘trepas(저승으로 건너감)’라는 단어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사고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531. 그리하여 죽음은 임종 순간이나 혹은 그것이 임박했을 때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늘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홀바인 2세의 작품인 ‘죽음의 무도’ 텍스트를 1538년에 출간하기도 했던 리옹출신 장 드 보젤은 마치 생명이 이 세상에 탄생하기 위해 아홉달 동안 포태기간이 필요하듯 현세에서의 삶은 영생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위한 기술대신 삶을 위한 기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행복하게 죽기 위해서는 사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죽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533. 중세 왕생의 기술에서 죽어가는 자가 놓이게 되는 상황을 삶의 매순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534. 죽음을 미리 대비한 자에게는 매 순간이 떠날 수 있는 순간이 된다.

546. 영적인 진보가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목표였던 세계에서 절제는 단 한가지 지헤로운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미덕이 되었다.

7장 바니타스

567. 17-8세기를 통틀어 사회전체를 허무의 심연으로 향하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단순성의 욕구는 유언장에서 나타난다.

574. 애도 기간이 지나면 관습상 개인적인 감정 표출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관례적으로 허용된 짧은 복상 기간만으로는 일상적인 삶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살던 곳을 떠나서 수도원이나 시골을 찾아 은거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575. 이처럼 삶의 중심, 즉 삶과 사물들과 인간존재에 대한 애정의 한가운데를 죽음이 앗아가 버리고 난 빈 공간, 다시말해 허무의 개념은 ‘자연적’감정의 소산인 동시에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영향의 산물이었다.

576. Vanitas, 인생무상, 유한성, 덧없음, 허무를 뜻하며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사물들, 또 정물화나 초상화의 한 장르를 가리키기도 한다.

583. 중세의 정물화는 삶과 사물에 대한 열정적인 애착, 다시말해 아바리티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여겨지던 이 세상이 타락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바니타스 차원에서도 상황이 역전된다.

584. 이렇게 해서 바니타스는 인간에게 죽음이 아니라“필멸의 삶”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게 했다. 이러한 개념은 공통적 사고로서 자리잡게 된다. 공통적 사고란 한 사회의 결속을 돕는 조건화에 필요한 강력한 요소들이다.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사회 전반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거나 그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평범하고 상투적인 것, 혹은 자명한 이치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8장 죽은 육신

621. 이 두 책은 17세기 의사들이 바라보았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르만은 무엇보다도 죽음과 수면의 유사성에 관심을 보인다. 수면을 통해 인간은 신을 인식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이 모든게 불가능하다. 즉 수면이나 죽음 속에서는 영혼이 육신 전체를 관통하며 흩어지는 대신 육신 밖에서는 영혼의 집약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639. 시신 절개는 가족 주치의에 의해 개인 해부실에서 은밀하게 실시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해부는 의사니 외과 전문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육신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육신을 안다는 것은 자연 신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640. 아나토미 한 가운데서, 열렬한 사랑에 불타는 나의 눈은 그 뼈 조각들 속에서 다이아나의 초상화를 알아 보았습니다.

650. 해부학의 기술인 산 채로 피부를 벗겨내는 형은 예술적 소재로서 17세기에 유행했던 고문 형태였다. 피부가 벗겨지는 형을 당했다고 해서 구두 제조인들의 수호성인이 되기도했던 바르톨로메오 성인을 비롯해서 아폴로에 의해 같은 고문을 당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마르시아스, 또는 헤호도토스로부터 원용된 주제이며 보우츠가 그리기도 했던 ‘독직을 했던 재판관’이 그 희생자들 이었다.

653. 연인처럼 다가오는 죽음은 달콤하다.

이처럼 죽음과 쾌락이 혼동되고 있어서 죽음은 쾌락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긴다. 따라서 죽은 육신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9장 살아있는 죽은 자

695. 죽은 자의 이름을 큰소리로 세 번 부른다는 콘클라마티오를 비롯해서 시신을 단장하고 전시하던 관습, 매장 직전까지의 애도 관행(만약 죽은자가 살아있다면 그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깨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죽은 자의 얼굴을 드러내는 관습, 화장전 며칠 동안의 유예기간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710. 루이 14세 시대의 유언자들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자신들이 정하는 기간동안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며, 칼로 상처를 내어 확인한 다음에 시신을 천으로 덮으라고 당부하던 것에서는 산 채로 매장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 너머 그들 내부의 어느 은밀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시체를 만지고 조작하는 관습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가난한 자들만이 거의 아무런 조처없이 묘지로 보내졌다.

711. 그런데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간과 죽음 간의 친숙성에 변화가 나타나던 바로 그 시시에 이러한 두려움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다. 이때, 그 친숙성과 공존하고 있었던 죽음의 존엄성도 타격을 입게 된다.

10장 ‘아름다운 죽음’의 시대

720. 낭만주의 시대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증언들

프랑스의 경우: 라 페로네 가

758. 영국의 경우: 브론테 가. 제인에어, 폭풍우 언덕.

783. 미국의 경우“ 이주민들의 서신

830. 죽음은 사랑하는 이의 완전한 종말이 아니므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제아무리 참아내기 어렵다 해도 죽음은 추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고, 죽은자들 역시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11장 묘지 방문

836. 중세나 근대의 도시나 마을 풍경은 교구 성당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더욱 도시화된 풍경은 묘지나 장의 기념물들에 예전에 교구성당이 수행했던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이처럼 묘지는 한 문화의 징표였다.

869. 한편, 1779년 말에 생 인노상 묘지의 대규모 공동 묘혈들에서 발산된 기체가 이웃한 랭즈리 가에 있는 집 세채의 지하실로 유입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지하실들은 폐쇄되었으나 1780년 6월에 찾아온 큰 더위로 인해 악취와 독기가 그 이웃집으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전염병과도 흡사한 감염성의 질환 같았다.

870. 원인은 50 피트 깊이의 묘혈이었다. 묘혈을 개봉하고 묘혈 주위로 생석회를 채우는 등 소독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유독가스가 그 밑을 통해서 새어나왔던 것이다.

“묘지 내 여기저기 피워놓은 불은 통풍을 원활하게 했으며, 공기를 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몇 피트씩이나 쌓아올려진 인간 유해로 지대가 높아진 묘지, 그 음울한 안식처에서 수세기 이래 처음으로 밤의 적막이 깨졌다. 사방에 널려있는 인골더미, 여기저기 밝혀놓은 횃불들...”

871. 1780년 생인노상 묘지를 시작으로 1781년에는 생 로슈 교구의 쇼세 당탕 묘지, 생 쉴피스 교구 묘지, 그리고 1782년에 생 루이섬 묘지가 문을 닫게 된다.

875. 1763년의 조사이후, 묘지들을 시장이나 광장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렇게해서 생 인노상 묘지에는 광장이 들어서게 된다.

“예전에는 죽음의 구덩이들만이 입을 벌리고 있던 그곳에 지금은 생명의 모든 원천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도달하기 까지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묘혈 발굴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지면을 고르게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했으며, 막대한 양의 시체와 흙과 인골들을 들어내고 묘지를 소독해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10피트 두께의 ‘시체 잔해물들로 오염된’ 흙을 파내었고, 80개의 납골 시설과 50여개의 큰 공동묘혈을 개봉했으며 “여기서 20000구가 넘는 시체와 관을 수거했다”.

877. 이러한 상황에서 보여준 파리 시민들의 무관심,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시신 매장을 길거리의 인부들에게 아무렇게나 맡겨버렸던 경솔한 태도를 고려해 볼 때, 필자는 그당시 죽은 자들, 적어도 시신들에 대한 존중이 부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884. 묘지들의 비참한 현실: 오물 처리장에 버려지는 시신들(대혁명 기간의 상황)

904. “내 자식들 중 부모, 동료, 고향으로부터 가장 큰 칭송을 듣는 자식이 조상들의 뼈나 뼛가루 또는 메달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가 어디를 가든 이것을 가구처럼 갖고 다니다가 나머지 가족들이 요구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914. 평화로운 들녘에 내 소박한 무덤을 만들어 주오,

916. 개인 분묘 관행은 또한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자치령에서, 특히 버지니아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923. 19세기의 무덤은 방문의 목적지요 묵상의 장소가 되고 있다. 들릴은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내 어두운 은신처로 나를 보러 오오,
        나뭇가지들이 가만가만 흔들리는 그곳으로
       감미로운 환영이 내 무덤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나의 그림자를 당신에게 보여줄 거요.
       그곳에서 때로는 가슴 아파하고 탄식할 당신이여
        이 슬픈 거주지에 머무르고 있을 나를 위하여
        아름다운 어느 날 어스름 무렵에
        나의 시정어린 영묘를 찾아주오
        평화와 온정과 애도가 함께하는 이 거주지에
        언젠가 당신이 머물러 있어
        내 관 위로 한두 방울 눈물을 떨군다면
        떨어지는 눈물방울 마다 장미꽃을 송이송이 피워낼 거요.

928. 이 서러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구나. 오, 내 아이여!
        내말 들리니? 엄마가 왔어! 오, 하나밖에 없는 나의 희망이여!
        좀 깨어나 보렴. 그처럼 오랫동안 잠을 잔 적이 없지 않니!

   *천사의 군대로 얼른 들어가렴.
    알퐁스, 천사 하나가 모자라서 하느님께서 너를 부르셨나보다.

931. 묘석을 취급하는 상인들은 유족에게 기성품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표현된 내용은 개인적이고 진솔한 감정일지 모르나 그 방식은 당연히 관례적이고 상투적이었다.

934. 묘지는 종교와 철학을 가르쳐주는 학교이다.

935. 묘지는 “역사적 연속성, 그리고 한 사회의 근원의 의미”를, 아니면 조국의 의미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964. 기념 묘로써 명예를 부여받았던 최초의 병사들은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내전의 희생자들 일 것이다. 1792 년 8월 10일 학살당한 스위스 용병들에게 바친 루체른의 기념물, 또 파리의 퓍퓌스 묘지와 속죄 예배당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965. 페르 라세즈 묘지에도 죽은 자들을 위해 1870년에 세운 기념물이 잇는데, 이것은 기념관 역할을 하는 비어있는 무덤이다.

966. 1차 대전은 ‘기억할 만한 전투들’의 전사자들에 대한 시민적 숭배가 이전에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회 저변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위세를 획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전장에 시신들을 매장하거나 소각한다는 사고가 이제는 설 땅을 잃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건축물과 자연 풍광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묘지들이 세워져 이들에게 헌정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이러한 묘지에서는 동일한 형태의 십자가들이 끝 간 데 없이 줄지어있었다. 이곳의 십자가들은 죽음과 희망을 동시에 뜻하는 상징물로 선택되었다.

967. 나폴레옹 1세가 에투알 광장 교차로에 세우게 했던 개선문 역시 그곳에 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매장되면서 무덤이 되었다. 또한 1918년 전승 기념일은 승리의 날로 기념되기보다는 죽은 자들의 날이 되고 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전 프랑스인이 죽음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978. <7 피트의 땅과 관 하나> 1955년 갈릴레오라는 이름의 대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있던 피르미노가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 최초의 농민 연맹을 결성한다. 그 이익이란 이들에게 유골을 안치할 수 있도록 7피트의 땅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시신이 그 안에서 서서히 부패될 수 있도록 나무로 된 관에 담겨 땅속에 묻힐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브라질 북동부 지역에서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인생이 실제적으로 그들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죽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삶에서 겪는 가난과 부당함의 굴레로부터 언젠가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죽음만이 이들에게 존엄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었던 것이다.

12장 역전된 죽음

984. 죽음은 늘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이었다.

985. 오늘날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져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이전 상황에 대한 ‘역전된 이미지’ 혹은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국가적인 인물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가 죽음을 추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죽음을 맞았다 하더라도 도시에서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표시나 고지행위의 흔적이 전혀없다.

현대 사회에는 휴지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개인의 소멸 역시 사회의 연속성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한다. 마치 그 누구도 죽어나가지 않는 듯, 도시에서는 모든 게 각각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두 번째 특징은 변화의 속도이다. 오늘날에는 풍습이 완전하게 역전되는 데 단 한세대로 충분한 것 같다. 변화의 신속성과 돌연성, 이점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1009. 이반 일리치는 그 고독한 여정동안 마치 15세기 왕생의 기술의 죽어가는 자들처럼 자기의 인생이 언제부터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곧 “아직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시킨다.

1019. “오늘날 죽음과 애도는 한 세기 전 성적 충동의 문제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오늘날 분별력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지와 정신력을 동원해서 애도기간에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애도 절차가 사라진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경박함이 아니라 사회의 준엄한 억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가 유족들의 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는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으나 죽음의 존재를 거부한 것이다.

1032.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좋은 죽음’, ‘아름다운 죽음’은 옛 시대의 저주받은 죽음, 즉 급사난 돌연사,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죽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어젯밤 잠을 자는 동안 숨을 거두었다. 아침에 다시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날 의학의 발달로 인해 이렇게 온화한 죽음을 맞는 사례가 흔치 않게 되었다.

1034. 이러한 행동들은 병원이라는 제도, 그리고 죽음의 의료화 현상과 불가분의 관게에 있는 ‘관료주의화’나 죽음의 경영학에 내재된 추악하고 상스러운 면모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오늘날 도처에 만연되어 있다.

1036. 1959년 파이펠에 의해 출간된 공동 저작 <죽음의 의미 The Meaning df Death>는 이들 최초의 공식 선언이었다.

1037. 1969년에 출간된 <On death and Dying>의 저자이기도 한 엘리지베스 퀴블러로스는 미국과 영국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이 두 나라에서 그녀의 책이 백만 부 이상이나 팔려나간다. 소외된 임종환자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한 여론의 흐름이 죽어가는 자들에게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존엄성을 되찾아 줌으로써, 죽음의 현 상황을 개선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1038. 1976년 4월 29일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죽음 Dying"이라는 제목의 약 한시간짜리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담당한 마이클 로머( Roemer)는 원시사회를 연구하는 민족학자처럼 후기 산업 사회 시기를 맞이한 미국 사회에서의 죽음을 관찰했다.

1042. 죽음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죽음을 일상생활 박으로 추방함으로써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금지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가 이 영화 “죽음”이 보여주는 태도, 즉 죽음을 하나의 기술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불가피한 만큼 무의미한 그저 그런 것으로 축소시키려는 태도이다.

1043. 병원에서의 죽음을 개선해야 된다는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으며, 모두가 기꺼이 논의에 참여했다. 하지만 죽음이 병원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이 늘 전제되었다. 그런데 이 견고한 의료시스템에 틈이 생겨나, 그동안 공들여 분리해 놓은 삶과 죽음이 대중적인 격론의 거센 물살 속에서 서로 만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안락사의 문제, 즉 치료를 중단 혹은 연장하는 권리의 문제이다.

1047. 그런데 기술이 죽음의 영역을 잠식해 갔으며, 결국 죽음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이른다. 역전된 죽음의 지리적 공간은 기술의 효력, 즉 인간과 자연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의 능력을 가장 강하게 믿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다.

1055. 장례식장의 임대, 시신 염습, 장례에 필요한 갖가지 소품, 이러한 것들은 보통 값이 매우 비싸다. 따라서 이러한 사업은 높은 이윤을 보장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산업으로 발전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숱한 비판을 야기하고 있다.

1057. 오늘날에도 역전된 죽음이라는 모델은 미국식의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프랑스로 유입되고 있다. ‘아테네 신전’을 방불케하는 건물들이 이미 묘지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북서부 유럽에서는 영국식의 다양한 형태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화장 관행이 확산되고 있다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이처럼 전체 사회 내에서 죽음을 위한 장소로서 병원이 유일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병원과 죽은 자들의 집 즉 장례식장, 이렇게 두 개의 장소가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결론

네 개의 주제에 의한 다섯 가지 변주

1059. 필자는 먼저나온 책 <죽음의 역사에 관한 소고>의 서문에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의 자료들을 어떻게 점진적으로 선택했는지 밝혔다. 그런데 나는 이 자료들을 개별적으로 , 혹은 특정한 순서에 따라 다루지 않았다. 나의 초기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제기된 문제들이 인도하는 대로 그 자료들을 동시에 검토했던 것이다.

1060. 너무나도 길었던 여정의 종착지에 도달한 지금, 출발점에서 설정했던 가설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르게 되었다. 마치 우주 공간에 떠있는 관측소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우주 비행사처럼, 천년 세월을 겪어온 광활한 정경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4가지 심리적 요소들에 의거한 방대한 공간이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다.

1061. 이 네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가 이 연구작업을 이끌어 온 자아의식이고 그 나머지는 야생적 자연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 시스템, 내세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1082. 따라서 죽음이란 단지 평온한 자가 우호적인 사회로부터 빠져나가는 은밀하지만 품위있는 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심적 고통이나 신체적 통증도 없으며 불안감도 없는 한 개인의 생물학적 전이 라는 사실에 의해 지나치게 타격을 받아서도 지나친 비통함에 잠겨서도 안된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필립 아리에스는 ‘프랑스적’ 의미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역사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역사가로의 입문과정은 엄청나게 길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소르본느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공부했지만 아카데미즘 밖에서 직업을 가졌다. 국립도서관과 출판사 등에서 일을 하며 그는 스스로 “일요일의 역사가” 라고 하였다. 일요일에만 역사 공부를 했다고. 그러나 그의 독서량과 자료를 수집하는 능력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드러나게 했다. 그는 정말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신 심성사적 측면에서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를 아날학파의 역사가라고 말한다. 아날은 1929년에 발간된 ”사회 경제사 연보“란 제목 중 첫글자 annales에서 따온 말이다.


1973년 발표한 <앙시앵 레짐 하의 어린이와 가족생활>이란 책으로 그는 유명해졌다. 그는 집단 정신사의 개척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오브제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역사학의 지평을 상당히 확대 심화시켰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는 1975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행한 4개의 연속적인 강의를 했고 그때 준비한 강의 내용은 그가 오래전부터 숙고해 오던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주제에 대한 반응이 대단했다. 그는 이미 15년 전부터 서구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지만 워낙 주제가 광범위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성격의 주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연구는 그가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계속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범위가 계속 확대되어 가기만 했다.


그래서 1966년부터 1975년까지 틈틈이 발표했던 논설들을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낸 것이 <죽음의 역사>이다. 이 책은 테마가 새롭기도 했지만 그의 아날학파적 연구방법으로 씌여진 책이기에, 동시대의 배경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유추해 볼 수 있기에, 더욱 흥미진진했다. 시간을 통한 여행의 흔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꿰뚫어 보는 것, 동시대사를 읽을 수 있다. 즉, “역사책은 그 책의 저자와 그 책이 씌여진 시대의 분위기를 전해주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10년 후에는 전혀 쓸모없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연구자의 주관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쓸 때 이 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미처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뒷받침 해줄 자료를 다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1977년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책 <죽음 앞의 인간>을 발간한 것이다. 이 1120쪽 짜리의 책을 위해 그는 중세의 수도자처럼 세속의 수도원에 머물렀다. ‘학자들을 위한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에 들어가서 6개월을 몰입했다. 역량있는 학자에게 각자의 연구주제를 파고들 수 있게 전격적인 지지를 해주는 세속의 수도원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모든 시간과 정성을 이 주제에 쏟을 수 있었으며 15년 전 이래 추진해 온 책을 마침내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방대한 부피의 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요약하자면 <죽음의 역사>에서 4개의 큰 논설을 펼쳤고 <죽음 앞의 인간>에서 그동안 섭렵했던 온갖 자료들을 다 펼쳐놓았다. 그래서 사실 요약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이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우선 6쪽이나 되는 목차를 따로 카피해 둔 다음 , 각 세부 사항이 필요할 때,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그 부분만을 읽으면 될 것 같다. 전체적인 연결이나 어떤 결말을 찾으려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10년을 공부해도 힘이 들 것 같다. 저자 자신이 도서관에 앉아서 15년을 준비한 자료에다가 수시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결합했으니, 일요일에만 공부했다는 그의 말을 곧이 들으면 절대로 안될 것 같다.,


만일 내가 저자가 되어 이 책을 써 본다면, 나는 제 1주제로 역전된 죽음을 내놓겠다.
이 주제를 위해서 길들여진 죽음과 횡와상의 역사를 말하고 교회의 개입을 설명하겠다.
그런 다음 퀴블러 로스의 업적과 안락사의 문제로 바로 연결시켜서 임종자의 입장을 해석해 보겠다.

다음 두 번째 주제로 죽음에 대한 낭만주의적 입장을 따로 강조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깨닫게 된 것인데 우리의, 나의 죽음에 대한 정서에는 다분히 17-8세기의 낭만주의적 이해가 깔려있다. 사랑이 표면에 떠오르고 이별과 죽음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는 그런 미학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로 문학 책을 통한 이해였던 까닭에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모든 문학적 이해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시를 포함하여.

세 번째는 묘지의 역사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도시 개발의 관점에서도 묘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시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될 것 같다. 사회적 관계의 변천사도 이 묘지를 형성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며 관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묘비명도 매우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예술사적 입장에서도, 어쩌면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리에스가 묘지 방문에 대하여 114쪽이나 할애해 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내가 작가라면 이 책으로 7권 정도의 단행본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은 무겁기도 하고, 들고 읽기도 불편하고, 두괄식이니 미괄식, 그 어느 것으로도 요약이 안되는 책이었다. 누구를 한번 골탕먹여 보고 싶으면 이 책으로 북리뷰를 하자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은 요약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마음을 풀어놓고 재미있게 읽으려면, 또한 이 책을 추천할 수 있겠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시간과 집중력을 모두 들인 책이었기에, 나중에 나의 책을 쓸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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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1.24 00:35:50 *.67.223.154
이 책의 원서는  1977년에 발간된 것입니다.
그런데 번역서의 표지뒤에는 1985년이라고 써있어서 처음에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번역자가 본 책이 1985년에 인쇄된 1985년 판이었다는 뜻인가요?

필립 아리에스는 198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상황파악이 더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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