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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31일 23시 54분 등록

 

선비” – 김기현 지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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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하여

 

김기현 교수는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북대학교 사법대학 윤리교육과 교수로 있다. 공저 저서로 < 퇴계학과 남명학>, <조선 유학의 학파들> 등이 있고, 논문으는 퇴계의 소유와 존재 의식’, ‘퇴계의 심미 의식과 초월의 정신’, ‘사림파 도학자들의 실천 정신과 그 굴절등이 있다.

 

저자에 대한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어렵게 전북일보에 실린 그의 책 인터뷰를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사인 것 같아 여기에 옮겨 본다 :

 

시대를 뛰어넘는 선비정신. 매화처럼 강인하고 학처럼 고고했던 그들에게 길을 묻는 책. 김기현 전북대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59)의 「선비」(민음사). 7일 전북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한복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옛 책들을 읽고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겨울이면 늘 한복을 챙겨입는다는 그에게 "교수님은 스스로를 선비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따라갈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흔히 선비정신이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선비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를 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요. 화석을 뒤져서 나열하자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철학에 입각해 오늘날 사고와 문법에 맞게 정렬하자는 것이지요." 그는 '선비정신을 무시하고 폐기처분해도 좋을 만큼 오늘날 우리는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심미적으로 성숙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선비」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선비의 정신을 이 시대의 토양 위에 재생하고자 한 것. 그렇다면 선비란 누구일까. "지금의 선비는 단순히 지식인을 가르킵니다. 옛날 선비 역시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란 점에서는 똑같지만, 적어도 옛날 선비들은 지식을 상품으로 팔기 위해 공부하지는 않았었죠." 이 책이 열어 보여 주는 선비의 세계는 성리학상의 것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삶을 모델로 한다. 배경은 사서오경. 오직 진리와 도의에 입각하여 자아를 확립하고 완성하려 했던 사람이 진정 선비다. "요즘 연구자들은 이기심성론이란 건조한 논법으로 접근하지만, 이기심성론에서는 워낙 추상적이어서 인간의 체취,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책을 자연과 인간, 사회, 죽음과 삶으로 나눈 것도 그 때문이죠. 독자들이 선비의 인격을 스스로 느끼면서 자기성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은 선비의 사상적 배경과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모든 덕목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역사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선비의 모본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그의 책을 읽은 둘째 아들은 "어렵다"고 했으며, 큰 아들은 "읽으면서 자기성찰을 하게 돼 진도가 안나간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술서이기 때문에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현대인이 어려운 것은 외면하고 너무 가벼운 것에만 익숙해져 그럴 수도 있다" "삶의 철학, 인간과 자연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밝혀내는 데 가벼울 수는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을 위해 책머리에 '선비와 오늘'이란 서론 형식의 글을 써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전북일보, 2010 18일자 도휘정 기자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 머리에

 

선비들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가졌던 진지한 사색과 실천은 시대와 사회를 넘어 여전히 현재성을 얻으며 창조적인 지성으로 활용될 여지를 많이 갖고 있다. 아니, “참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成己成物, <중용>)”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그의 행적을 접하다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부박한 의식과 왜소한 인간상이 반조되어 때때로 탄식과 함께 자괴감이 일곤 한다.[6]

 

<논어집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선비에는 대체로 세 등급이 있다. 첫째, 도덕에 뜻을 두는 사람이다. 그는 공명에 연연하지 않는다. 둘째, 공명에 뜻을 두는 사람이다. 그는 부귀에 연연하지 않는다. 셋째, 부귀에만 뜻을 두는 사람이다. 그는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선비의 도덕은 규범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진리와 도의를 자신의 것으로 인격화한다는 뜻을 갖는다. 말하자면 오직 진리와 도의에 입각하여 자아를 확립하고 완성하려 했던 사람이 진정 선비다. 그는 부귀공명을 오히려 자아 상실의 요인으로 여겨 배척하였다. 소유의 가난을 마다하지 않고 존재의 맑음을 추구했던 그의 청빈 사상이 이를 무언으로 실증한다.[7]

 

어떠한 사상이든 그것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의 행태만 가지고 논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한 사상을 말하려면 그에 앞서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이 그려 내고자 하는 선비의 세계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7]

 

마음을 외계로 돌리기보다 우선 내계로 돌려 자성 체찰을 쌓아 가면서 항상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존엄한, 그러면서도 따스한 생명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것이 우주의 생명력에 연결됨을 자각하여 이것을 존양하고 함양하는 것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삼고 목표로 하는 학문, 인간 정신의 존엄성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생명을 자각하고 존양하는 것을 제일의로 하는 학문, 선철의 책을 읽고 절기근사, 진실한 자기를 탐구하고 자기의 심흔과 기질을 순화하여 인격을 도야하고 생명의 환희를 얻으려고 하는 실천학이자 수양학 이 같은 사상이 이퇴계의 사상의 대본이다.” - <퇴계학보>[8]

 

선비와 오늘

 

선비란 일반적으로 유교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조선 사회의 지식인상을 일컫는다. 하지만 유학자들 모두가 곧 선비였던 것은 아니며 선비는 당시의 유교 지식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갖는 사람이라 하겠다.[13]

 

선비는 우리처럼 다양한 지식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여 그것을 상품으로 내놓은 오늘날의 지식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사체의 정신, 즉 온몸으로 인식하고 온몸으로 성찰하고 온몸으로 시험하고 온몸으로 실천한다는 온몸의 학문정신이 선비사상을 잘 말해 준다. 선비 역시 많은 지식의 섭취를 위해 애썼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참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라는 목표 의식을 잃지 않았다. 요컨데 선비의 앎의 정신은 자족적이거나 주지주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진리와 도의로 참자아를 완성하고 나아가 타자까지도 그렇게 성취시켜 주려는 뜻을 갖고 있었다.[15]

 

이 점에서 선비의 학문은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온몸으로 실현하려는 인간학이요, 이의 연장선상에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사회철학이라 할 수 있다.[15]

 

선비는 인간의 존재됨에 관해 절실히 묻고 가까이 성찰하면서 참자아를 찾아 완성하는 것을 학문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가 추구했던 존재의 맑음소유의 가난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는 소유의 가난을 무릅쓰고 존재의 맑음을 추구하였다. 그의 관심은 존재를 맑게 하고 진리와 도의를 즐기는 데 있었던 만큼, 빈부 여부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공자가 가난하면서도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사람을 최상의 인격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였다.[16]

 

선비는 오히려 산림으로 재야의 곳곳에서 진리와 도의의 불빛을 온몸으로 밝혀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을 얻으면서 사회에 이념과 가치를 제공하였다. “혼자 잠을 자더라도 이불에 부끄럽지 않게, 혼자 어딜 가더라도 자신의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살려 했던 선비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정신을 일깨워 주면서 어지러운 사회를 정화해 주는 커다란 힘이었다.[19]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사랑)에 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예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의로움)을 걷나니, 뜻을 펼 기회가 주어지념 만민과 더불어 그것을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이라도 그 길을 가리라. 부귀도 이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이 뜻을 변절시키지 못하며, 권세나 무력도 이 뜻을 꺾지 못할 것이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 <맹자>, ‘등문공 하’ [19]

 

선비의 이런 대장부정신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지식인상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반추한다. 우리 지식인들 가운데 사람들의 삶과 사회를 염려하면서 진리와 도의의 정신을 곧추세우려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우월한 지식으로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간지만 키워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20]

 

치국 평천하의 과제가 선비의 삶의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그는 진리의 탐구와 도의의 실천을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 진리와 도의야말로 삶과 사회를 존립케 해 주는 중추였기 때문이다. 이러첨 진리와 도의는 선비의 표상이요 자존심이었다.[22]

 

옛날 훌륭했던 선비들은 진리와 도의를 즐겼을 뿐, 사람들이 행세하는 힘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공들이 공경과 예의를 다하지 않으면 그들을 자주 만나 볼 수 없었다. 자주 만나 볼 수도 없는데 하물며 그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맹자>, ‘진심 상’[22]

 

거친 밥 먹고 맹물을 마시며 팔베개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으니, 불의하게 주어지는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도 같다.” <논어>, ‘술이’[23]

 

 

1부   자연

 

1장  자연과 문명

 

자연과 문명은 상반하는 용어다. 철학사적으로 따지면 이러한 사고는 서양 근대 문명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근대 철학의 비조 데카르트의 물심이원론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생각하는 나’, 달리 말해 인간의 정신 이외에 자연의 모든 것은 하나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만물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주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삶에 유용하도록 창조된 신의 저급한 작품으로 천시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은 야만이라는 서양인들 의식의 근저에는 이러한 만물관이 놓여 있다. 그들은 자연을 정복하여 그 위에 세운 거대한 인공의 구조물을 문명으로 여긴다.[29]

 

과학 역시 자연을 인과 법칙이 작용하는 하나의 물질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과학자들은 다만 자연의 기계적인 원리를 규명하여 그것을 정복하고 그것의 물질 가치를 극대화하는 일을 학문의 제일 과제로 삼는다. 거기에는 자연을 인간의 관점에서 인공적으로 재구성하여 최대한 이용하려는 인간중심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현대문명은 그러므로 과학 정신이 야만의 자연을 개발하고 정복한 산물이다.[30]

 

반면 현대인이 느끼는 삶의 공허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잘못된 자연관이 자초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자연을 야만으로 여겨 영혼의 커다란 진정제를 스스로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존재의 안식처를 잃고 저처럼 외롭고 불안하게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을 인간을 둘러싼 주변의 환경 정도로 이해하여 그것을 보호함으로써 이 문명의 위기를 벗어나려 할 뿐 그 이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해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32]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하면서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한 생각은 당면의 위기 상황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원천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33]

 

2장  만물의 요람

 

전통적으로 선비는 자연을 개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보다 감각적인 직관과 시적 감성으로 직접 대면하고 체감하였다. [34]

 

자연은 무심히만물의 생성을 그들 각자에게 맡겨둔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묘한 곳’, 즉 섭리의 본래성이다. 자연은 그와 같이 무심하면서도 묘하게도만물의 생성 변화를 총괄하고 거기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한다. 선비는 자연을 개체들의 집합을 넘어선 하나의 통일적이며 연속적인 전체로 이해하였다. … 그리하여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변함없이 만물을 신묘하게 생성한다.(<중용>)” <주역> 또한 말한다. “천지는 만물을 생육하는 위대한 역량을 갖고 있다.” 요컨대 자연은 사물들의 단순한 원자론적 집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만물을 주재해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창조 역량이다. 만물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 아래에서 서로들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의 영원한 생성에 제각각의 방식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으며, 자연의 생성 질서의 관계망 속에서 모든 것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의존하고 조화를 이룬다.[37]

 

자연에서 개체들 사이의 상호 의존과 조화를, 그리고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생성질서를 읽었던 선비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사람들을 독립적이기 보다는 상보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로 여겨 자타간의 협력과 유대를 강조하게 되었다.[38]

 

선비는 마음의 수행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잘못된 마음은 자신의 삼과 사회는 물론 자연 만물까지 혼란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이다.[38]

 

하나의 거대한 생성 체계인 자연 안에서 그 섭리에 따라 살고자 했던 선비에게는 자연과의감응이 하나의 상식이었다.[39]

 

나는 오히려 자연에서 괴테가 말한 영혼의 커다란 진정제를 발견하며 속세의 갖가지 긴장에서 벗어나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 퇴계는 한 제자에게 말한다. “숲과 샘물, 물고기와 새들이 주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세월을 보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선비는 궁극적으로 만물의 생성 근원이요 존재의 요람인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였다.[41]

 

선비가 삶 속에서 이루고자 했던 천인합일이나 물아일체의 이상을 나와 남을 분리하고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하는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어불성설이겠지만 선비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상식이었다. [41]

 

선비가 신 중심의 사고를 갖지 않았던 이유는 신은 사람들이 자타 대립, 주객 분리의 이원적 관념 속에 외로움에 빠진 실존을 구원하기 위해 상념해 낸 자기 밖의 절대자라면, 그러한 관념을 거부한 선비의 삶 속에는 신이 등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42]

 

선비의 생성론적 사고는 그가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시간적 요소를 중시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는 공간적 실체 관념 보다는 시간적인 변화의 관념에 익숙하였다.[45]

 

“(유가 사상과 달리 서양 사상에서는) 시간의 중요성은 매몰되었고, 일체 모두는 공간적 그림자로 변해 버렸다. 더욱이 그리스 후기에 천문학으로부터 기하학이 형성되었으며, 이런 기하학이 형성되자 곧 공간적 구조에 전체 우주를 집어넣었고, 그 안의 모든 것은 공간적 도량으로 자연계의 만물을 표현한 것이다. (…) 서양의 과학과 근대 철하은 베르그송 이전에는 모두 시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일체 우주의 존재를 안배할 때, 그것을 모두 하나의 좌표 계통 속으로 끌어들여 하나의 공간적 구조를 형성했다. 뉴턴의 고전 과학의 물질과 공간적 인소는 중요하지만, 시간은 오히려 지위가 없었고 공간을 유일한 근거로 삼았다.” - <원시 유가 도가 철학> [45]

 

양자 역학이 출현하기 이전 서양의 과학이 탐구해 온 원자/전자나 서양 철학의 실체가 다분히 공간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면서 시간적 요소를 무시해 온 것과는 달리, 선비는 세계 만물을 바라보는 데 생성 변화의 과정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자연관이나 사물관을 이해하는데 이 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46]

 

선비의 생성론적 사유에 담겨 있는 시간 의식은 자강불식과 수신의 동력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개인 너머 세대 간 연쇄 질서상에서 바라보도록 했을 것이다.[46]

 

개인주의는 생물학적으로는 자식이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정상적으로 여기면서도, 도덕적으로는 그것을 비정상으로 여긴다.” - <Habits of the Heart> [48]

 

우리는 한 사물의 의미를 타자와 절연한 채 그 자체 내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타자를 기다려서, 타자와의 관련 속에서 마련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응용한 책이 바로 <주역>이다 [49]

 

3장  자연의 섭리

 

오늘날 과학은 온갖 지식과 진리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면서 세계 이해의 지도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과학이 세계와 삶의 비밀스러운 뜻을 풀어 줄 만능의 열쇠는 물론 아니다. 예컨대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던지는 물음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답변하지 못한다.  숨 막히고 현기증 나는 존재의 의문에 대해 그것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아마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만큼 절실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52]

 

사람은 누구나 인간과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불안과, 그것들을 통일적이고 정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의 충동을 갖고 있다. 그러한 불안과 충동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갖가지로 만들어 온 수 많은 신화와 종교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것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우주의 궁극적 근원을 상상하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안에 인간의 위상과 삶의 지침을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안심입명의 길을 제시한다.[53]

 

성리학의 이기론은 당시 여러 학자들이 이를 본격적으로 학문의 장으로 끌어 올려 이론 체계화해 놓은 것이다. 이는 역시 성리학자들이 그들의 형이상학적 불안을 이기론 속에서 해소하려 했음을 의미한다.[53]

 

선비는 그의 형이상학의 정점에 ()’를 세워 놓는다. 이기론의 는 상제, , 천명, 천도, 태극, 건곤 등의 개념을 종합하고 요약해 놓은 최상의 복합 관점이다.[55]

 

생성론의 문법은 실체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후자가 앞뒤의 모순 없는 논리적 진술을 절대 원칙으로 하는 데 반해, 전자는 전후 모순된 비문법적 진술을 태연하게 행한다. 이렇게 실체론과 생성론 사이에 문법이 다른 것은 역시 사물관의 차이에 연유할 것이다. 즉 전자는 사물의 불변의 실체를 규명함에 있어 논리 법칙에 따라 정확하고 모순 없이 진술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사물의 부단한 생성과 변화에 주목하는 생성론적 사고는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을  자기 한정적인 언어로 충분히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것이다.[56]

 

선비의 자연관을 살필 때 신비의 여운을 제거한 채 자연의 섭리를 합리적 이해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그의 자연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만을 훈련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또 다른 정신 능력 즉 창조적 감성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이성이 걸러내고 마는 세계의 깊이와 자연의 신비를 잡아 낼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합리성은 신비로움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60]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유럽 전통에 따라 세상을 볼 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이 무슨 밑감(그 기초가 되는 재료: 재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가를 따져 보는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이게 어떤 무늬새(무늬를 이루는 모양:양태)를 갖는지 살펴보는 접근이다. 서양 문물이 비롯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는 이 두 접근을 살피면 거의 언제나 밑감(재질)’의 연구에 치우쳐 온 것을 본다. 이에 견주어 동야에서는 정반대다. 중국 문명에는 서양의 물리에 해당하는 학문이 없었다. 사물의 구성원소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주 높은 수준의 생물학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해 동양에서는 사물의 무늬새를 연구하는 것이 학문의 핵심이었다. 사물의 무늬새를 연구하는 이런 연구가 이제는 서양에서도 그 가치를 되찾고 있다. 이를테면 체계론이나 혼돈 이론 등과 같은 첨단 이론들은 모두 무늬새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는 개념들이다.” – “옴살스런 세계관”, <과학사상> [63]

 

새로운 형이상학의 궁극적 실재는 변화 저편에 있는 부동의 실재라기 보다는 사물들과 함께 움직이고 변하는 유동적 실재로 파악되어야 한다. 사물들과 함께 변화하되 변화에 방향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실재 혹은 존재론적 원리여야 한다.” – 길희성, “21세의 종교: 새로운 영성을 향하여”, <철학과 현실> [65]

 

마음이란 살아 있는 것의 본질, 또는 유기체의 특성으로서, 자기 조직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일련의 과정들과 동일한, 일련의 시스템적 성질들의 발현이다.” – F. 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68]

 

4장  자연의 생성태

 

자연의 섭리는 역동적인 만큼 일련의 전개 양태를 갖는다. 그것은 부동의 실재가 아니라 만물의 생성과 변화에 일정한 질서와 연속성, 방향성과 의미를 갖는다. 요컨데 원, , , 정은 만물의 생성 변화상 그 시작과 성장과 결실과 완성의 과정에 작용하는 자연의 섭리의 각 국며을 범주화 한 것이다.[79]

 

,., 정이 자연의 섭리를 만물 생성의 각 국면에 따라 네 가지로 범주화한 것이라면, 만물 생성의 질료적인 요인을 분석한 것이 음양오행 이론이다. 음양은 기의 두 가지 속성으로서, 두 개의 이질적이고 상대적인 동력 또는 성질을 범주화 한 것이다. 생성적이고 진행적인 힘(성질)을 범주화 한 것이 양이요, 상대적으로 쇠멸적이고 퇴행적인 힘을 범주화한 것이 음이다. 이것은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한 힘의 역동적인 분화 양상이다. [87]

 

음과 양은 얄립을 거부하면서 서로 배척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발전과 완성의 조건으로 상대를 기다리고 필요로 하며, 나아가 양자는 상호간 생산적인 조화를 지향한다.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 이는 당연히 사물에 대한 택일적 사고를 거부한다. 일자는 타자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타자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89]

 

사람은 상대를 기다려서만, 상대와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성취할 수 있으며, 상대를 지켜 주고 튼튼하게 받쳐 줄수록 자신을 위대하게 완성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타자와 상호 교섭 없이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사물이 그 주변에서 만나는 각종의 상대야말로 그것의 존재 및 생성을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다.[90]

 

오행은 사물의 생성 변화상 다섯 가지의 기본 성질(동력)인 수 화, , , 토를 뜻한다. 오행은 음양의 상호 작용 속에서 전개되는 다섯 가지 특성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조화와 발육은 이 오행에서 비로소 그 구체적인 형질을 얻는다. 즉 음양의 상호 작용과 오행의 착종 속에서 만물은 다양하고 또 무궁하게 생성과 변화를 펼쳐 나간다.[91]

 

그리스인들은 공통의 속성을 지닌 것들을 같은 범주로 분류했지만, 중국인들은 서로 공명을 통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다.” - <생각의 지도>

 

 

2부   인간

 

1장  우주적 좌표 의식

 

선비의 학문인 유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주제로 깊은 사변과 성찰을 행하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인간학이요 삶의 철학이다. [100]

 

선비는 존재론적인 사고 속에서 타자를 배제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려는 태도를 거부하였다. 선비는 인간 관계와 사회, 만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그것들이 갖는 의미와 가치들을 적극 실현하려 하였다. 그에게는 바로 그것이 자기실현이요 자아 완성의 길이었다.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만민을 위해 도를 세우며, 과거의 성인들을 위해 단절된 학문을 잇고, 영원 만대를 위해 태평 세상을 열리라.” [105]

 

성인은 공동체적 자아의 성실한 실현을 통해 자신은 물론 타자까지 성취시켜 주며, 궁극적으로는 만물의 생성 발육을 도움으로써 천지에 비견될 만한 사적인 발전과 성공이 아니라, 남들의 삶과 만물의 생성을 돕는 데에 평생의 과제를 두었음을 알려 준다. [106]

 

() 의식은 개인의 독립성과 고유성에 주목하면서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 선비사 에 대해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갖고서 그것의 극복을 공부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만물을 갖추고 있는자아의 본래적인 존재성을 훼손하고, 우주적 대아의 이념을 못 갖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선비는 사를 극복하여 천지와도 같이 넓은 도량을 회복하기 위한 수행 방법을 다양하게 개발하였다.[110]

 

도가는 자연을 인위와 인문이 배제된, 심지어 언어에 의해서조차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 선비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위의언어로 규정하여 가치 개념화하고 실천 논리화하였다. 이처럼 선비는 일견 도가처럼 자연 속에서 물과 아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그에 이르는 길은 도가와 사뭇 달랐다.[118]

 

선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한다. 그는 자연 속에 인간의 모습을 흐리지 않으며, 인간에 주목하되 자연의 배경을 잊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그 자체 지고의 가치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삶 속에서 그것만으로는 안 되며 사람들은 그것을 인문화하여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125]

 

2장  인간의 본질

 

인의예지는 도덕 생명의 근저에 놓여 있는 본래적인 인격을, 일상 생활에서 흔히 발로되는 측은, 수오, 공경, 시비의 도덕 감정을 토대로 네 가지로 범주화 한 것이다.[129]

 

자연의 섭리(생명정신) 자체가 하므로, 그것을 온전히 타고난 인간 역시 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세계 기획상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은 다만 후천적으로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지어내는 일탈 행위일 뿐 인간의 본래적인 품성이 아니다. “의지에서 선악의 기미가 나뉜다.”고 한 퇴계의 말뜻이 여기에 있다.[131]

 

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라면, 모든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를 모델로 하고 있다면, 그래서 낯선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할아버지니 아주머니니 하는 식으로 가족 구성원에게나 사용할 호칭을 부여한다면, 악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의 가족이 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인의 선과 악> [137]

 

성리학자들의 본성 관념에 내재된 심학화의 약점은 도학 이념의 사회 정치적인 실천이 제반 현실의 저항과 위협을 받으면서 더욱 심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세상사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정치 생활 속에서 체감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수많은 도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조선 중기 여러 차례의 사화들은 그들의 실천 정신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39]

 

인의예지라는 명칭은 그것을 실천한 뒤에 성립된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한 뒤에 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하기 전에는 인이라는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 <여유당전서>

 

3장  생명애의 이념

 

선비는 인의예지의 도덕성 가운데에서도 인을 가장 핵심에 둔다. 그에 의하면 인은 의, , 지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와 사회생활상 모든 덕목들의 근간으로 작용한다.[143]

 

생명정신의 개방적인 행사를 통해 만물의 생성과 발육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인은 도덕생명 정신 자체라 할 수 있다.[144]

 

이는 물아일체의 사랑이야말로 사람들을 실존의 고독과 허무로부터 구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145]

 

맹자의 말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바 차마 (모질게) 못하는 마음도 실은 이러한 생명애 정신의 반사적인 발로다. 그러한 마음은 생명 부정적이고 파괴저인 사태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드러내는 거부 반응이기 때문이다.[146]

 

생명애의 정신은 직접적으로는 두 가지의 양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타의 마음과 측은지심이 그것이다. 전자는 내가 호의와 기쁨 속에서 만민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따뜻한 마음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남의 슬픔과 고통 앞에서 나의 생명정신이 손상을 당하면서 드러내는 마음이다.[149]

 

퇴계는 측은지심의 함양을 위해 유아의 사를 깨뜨려 무아의 공을 넓혀 나갈 것을 강조한다.[152]

 

프로이트는 사랑을 자기의식과 외부 세계 간의 경계를 무디게 하는 병적인 특성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했지만 선비는 오히려 사랑에서, 나와 너의 분별적인 사고를 넘어 존재의 경계가 무너진 물아일체의 건강한 정신 지평을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천지 만물을 아우르고 상호 교감하면서 그들의 생성과 발육을 도우려 하였다.[153]

 

개인주의 속에서 남들을 자신의 존재 밖으로 배제하는 것이나, 인간과 만물을 이원화하면서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곧 자기 소외요 자기 파괴의 짓에 다름 아닐 것이다.[155]

 

인자는 자신이 나서고 싶을 때에는 남이 나서도록 도와주고, 자신이 뜻을 펴고 싶을 때에는 남이 뜻을 펼치도록 도와준다.” - <논어> ‘옹야’ [159]

 

수행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생명 폐쇄적인 자리의 요인을 제거하여 이타의 도덕 생명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159]

 

참다운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노력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주희암은 말한다. “비록 사랑을 하고자 한다 해도 공경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160]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공경하고, 경오하면서도 사랑해야 한다.” – ‘곡례 상’ [162]

 

사랑은 이러한 개인성의 초극 위에서만 피어난다. 사랑의 세계는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를 벗어나 자타간 긴밀한 존재 유대의 의식 속에서 상대방을 공경하는 가운데에서만 열린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공경의 정신을 향리에서 아무리 비천한 사람에게라도 반드시 예를 다하셨, “손님이 오면 그가 아무리 나이 어리다 해도 반드시 계단을 내려와서 맞이하시고, 전송도 그렇게 하신퇴계의 삶에서 확인한다.[163]

 

선비는 자타 분단의 자기중심적인 의식을 타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충서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이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의 처지를 헤아려 그를 배려하는() 것을 뜻한다. 배려의 행위에 진실한 마음을 요구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거나 이기의 술수에 지나지 않겠기 때문이다.[165]

 

충서의 정신은 중심의 전이라고 하는 심리 기제를 갖는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의 자리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사물과 세계를 살피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165]

 

퇴계는 오륜의 다섯 명제 아래에 사람을 대하는 요점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적어 놓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든 돌이켜서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라.” 우리는 여기에서 상대방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에게 일방적으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선비의 윤리에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근본 토대로 작용하였다.[167]

 

혈구의 정치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만민과 만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따사로운 봅바람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사랑의 사회를 지향한다. 그것은 치자에게 막강한 지위와 권력으로 나서지 말고 생명감통의 정신으로 백성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보살피고 성취시켜 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69]

 

선비들이 정치 사회에서 혈구의 실천을 가로막았던 불평등한 신분 질서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개혁하려 하지 않았던 점은 커다란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지만, 충서의 정신은 제도를 떠나 선비들 개개인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진지하게 실천되었다.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충서의 정신은 오히려 고래로 전승된 상하귀천의 신분질서가 야기해 온 폐단들을 줄이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70]

 

4장  의로움의 정신

 

의로움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퇴계에 의하면 그것은 일을 마름질하는 도리로서, “마치 날카로운 칼로 물건을 마름질하여 그 장단과 대소에 각기 알맞음을 얻어 내는목수의 정신과도 같다. 이 때 마름질의 기준은 일의 이치다. 선비는 이처럼 의로움의 정신이 준거하는 이치를 일상생활과 자신의 일거일동에서 찾아 실천하려 하였다.[182]

 

의로움의 정신은 공리 의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즉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를 계산하는 공리 의식과 달리, 의로움의 정신은 순수하게 오직 그 행위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를 올바르게 실현하려 한다. 이와 같이 의로움의 정신은 공리 의식을 배제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만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가치 합리적이다.[186]

 

전자(가치 합리적 행동)은 어떤 행동 고유의 것이라고 사료되는 가치의 구현에 집중되는 것이고, 후자(목적 합리적 행동)은 어떤 행동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목적 달성에 집중된다. 가치 합리적 행동은 행동의 본질적인 고유성에 맞춰지는 것이고, 목적 합리적 행동은 그 행동에서 기대되는 의도된 결과에 맞춰진다.” – R. 브루베이커, <합리성의 한계> [187]

 

군자는 오히려 목적 합리적 사고 속에 사람들의 삶과 사회가 황폐화 될 것을 우려한다. 인간의 본질 가치인 의로움의 정신을 도외시한 채 바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공동화시켜 삶을 허무로 몰아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의는 삶의 길이요 이는 죽음의 길이라고 극언한 뜻도 여기에 있다.[188]

 

이처럼 의로움의 정신은 ㅅ속적 손익 계산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람됨과 삶의 의미를 부단히 성찰하고 실천하면서 당당하게 세상에 나선다.[189]

 

참다운 능력으로 따지자면 가난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도의를 수호하려는 정신만큼 이 세상에서 강인하고 창조적이며 위대한 힘은 없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가치인 사랑과 의로움, 예의의 정신을 지켜 밝히고자 했던 선비의 호연하고 당당한 대장부의 기상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191]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상 갖는 수많은 이름()들에 담겨있는 의미를 숙고하고, 그로써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와 본분()을 알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로움의 정신이 명분을 중요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192]

 

맹자가 폭군을 두고 독부(獨夫)라고 폄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에게 포악을 부린다면, 그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혁명 사상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194]

 

명분 관념의 함정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사실 명분 자체는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것의 시대적인 개변 가능성을 도외시한 채 과거에 정립된 내용만을 고집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름의 의미와 과제가 현실의 토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197]

 

참다운 의로움의 정신은 이처럼 처사의 원칙과 기준을 미리 세워 두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에 대해서조차 교조적인 태도를 거부한다. 그는 진리도 변화하는 시대와 삶의 상황 속에서 창조적으로 응용될 때에만 진정한 의의를 얻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197]

 

의로움의 가치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는 주관적 성질을 갖는다. 그러므로 의로움의 판단은 사람들에 따라 과불급의 편차를 상당히 드러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평소에 책 속에서 또 실제의 생활 현장에서 갖가지 사례의 연구와 분석을 통해 의로움의 판단 능력을 제고하고 처사의 의로움을 도모하였다. 예 관념은 의로움의 도덕 가치가 갖는 이와 같은 약점을 보완해 주는 의의를 갖는다.[205]

 

이는 예치의 사회일수록 이ㅡ로움의 정신이 항상 살아 움직여서 예의 사회적 생산성 여부를 감리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207]

 

5장  예의 정신

 

예는 자체의 마술적특성으로 인해서 예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형성시키며 인간화하는 신성한 힘을 가진 인간적 교제의 구체적 행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는 행위의 있는 그대로의 양식이 아니라 이른바 종교적, 도덕적, 미학적 의미들의 담지자로서의 행위 양식이다. 무엇보다도 예는 물리적 강제나 강제적 위협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인간적 교제에 있어서의 무수한 자연적, 자발적인 정중한 행동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마술적동의에 이상적으로 기초한 행위를 의미한다.” – 벤자민 슈월츠,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 [210]

 

예의 인간학적인 의의는 사실 서양 문화를 지배하는 에티켓에도 그대로 타당할 것이다.[210]

 

6장  앎의 추구

 

유교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와 역행(力行)이라고 하는 세 가지 학문 정신을 기축으로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세계와 삼을 외경으로 대하고, 만사 만물의 이치를 부단히 탐구하며, 배워서 안 것을 힘써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291]

 

선비는 궁리의 자리에 인간과 삶을 개입시켜 처사접물의 이치를 얻으려 하였다. 선비는 진리를 일상의 현장에서부터 찾아 행하려 하였다. “군자는 현재 처해 있는 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도를 행할 뿌나, 그 밖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리 궁핍하고 험난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 이 자리의 정신으로 진리 수행의 기쁨을 찾았다. 그는 행복을 미래의 어떤 시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찾아 누리려 하였다.[293]

 

군자의 도는 비유하면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서며, 높은 산을 오르는 데 낮은 곳에서부터 나서는 것과도 같다.” - <중용> [294]

 

사물을 관찰하려면 나의 삶부터 성찰하라.

주역의 깊은 이치 소강절이 밝혀 놓았으니

나를 버리고 사물만 관찰하려 한다면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모습도 마음만 번거롭게 하리라.” – 퇴계 이황 [294]

 

훨씬 더 선해지려는 사람은 열심히 그리고 열중해서 상상을 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 다른 사람과, 그 이외의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 서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류의 고통과 즐거움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선의 훌륭한 도구는 상상력이다. (…) 시는 인간의 도덕적인 본성이라는 기관의 기능을 강화시켜 준다.” – 멜빈 레이더 [296]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된 의미는 오히려 삶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궁리의 중요성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302]

 

사물에 있는 것이 이치요, 그 이치에 따라 처사하는 것이 의로움이다.” – 정이천 [304]

 

학업(궁리)은 삶의 의미를 일구어 내고 풍요롭게 가꾸어 인생무상을 떨쳐내게 해 줄 중요한 자기 구원의 기제이다. [306]

 

선비는 선현들에게서 그 이론을 빌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배움을 통해 사랑하고 의로우며 예절 바르고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였다.[312]

 

퇴계는 말의 숨바꼭질을 만들지 말 것, 성현들의 가르침을 빈말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온몸으로 성찰하고 또 실제로 체험할 것을 충고했다.[315]

 

조선 성리학의 변천사 속에서 살피면 중기 이전까지의 도학 시대에 선비의 실천 정신을 매우 치열하였다. 기묘사회의 희생자였던 정암 조광조가 대표적인 인물에 해당된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사화들을 겪으면서 정도의 실천을 불온시하는 기풍이 만연한 지식인 사회에서, 당시의 선비들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실천 정신을 점점 외면하였다. 그들은 대신 성리학의 매력적인 주제들을 찾아 정리하여 중국의 성리학을 능가하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그것이 체험적 성찰과 실천의 공부 정신을 약화시킨 점은 유학으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은 이기심성의 파행적인 논쟁에 빠져든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성리학이 사회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기심성론이 심화되는 것과 반비례하여 갈수록 빈곤해지는 현실 인식은 일상에서 전개되는 사회 현상에 어두워 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성리학자들의 이와 같은 학문 경향에 대한 반성 속에 태동했다.[317,318]

 

 

3부   사회

 

1장  사회의 형이상학

 

사회의 인간관계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상대를 기다려서만, 상대와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긍정할 수 있으며 또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324]

 

선비는 존비나 주종이나 선후의 질서가 인간관계를 파탄시킬 위험이 있음을 염려하면서 서로 간에 교류하고 교분을 나누는 화합의 사회를 소망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아랫사람에 대한 위사람의 배려 의무를 강조하였다.[327]

 

음양의 인간관계와 사회는 정감을 중시한다. 정이야말로 타자와 접촉하고 교섭하기 위한 제일의 관문이다. 그리하여 일자와 타자 사이에 정의 교감과 소통 여부가 일차적으로 양자의 생성과 발전을 결정짖는다.[327]

 

이성은 인정의 조율 원리로, 즉 인정이 과도에 흐르지 않도록 해 주는 정신 기능으로 역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선비가 그의 도덕 철학상 사랑의 이념에 더하여 의로움의 정신을 강조한 것도 사실을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였다. 그는 인정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사랑을 의로움의 가치 합리적 정신으로 알맞게 조율하고자 했던 것이다.[329]

 

선비가 말하는 요순공맹은 사람들의 노력에 따라서는 현재와 미래에 성취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격의 보통명사였다. 그에게 과거의 요순은 왕도 정치를 행하여 백성을 구제한 역사적 교훈의 인물들이었을 뿐이며, 그는 그와 같은 이상적 인격과 사회를 자신도 언젠가는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331]

 

선비의 도학 정신은 부조리한 사회를 도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면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띨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물론 대동의 미래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332]

 

사회는 사람들이 먼저 개인으로 존재한 다음에 필요에 따라 계약에 의해 발생한 인위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사회는 인간의 삶의 선천적인 형식이다. 더 나아가 윤리를 인간관계의 핵심으로 여겼던 선비에게 사회는 일종의 윤리적인 구성체로 여겨졌을 것이다.[333]

 

2장  개인과 사회

 

개인주의는 지성의 오만이다. 그것은 개인이 남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337]

 

선비의 철학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를 견지한다. 그의 존재공동체의 저인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독립, 단독의 개체로 여기는 실체주의적 사고를 부정한다. 이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만물은 서로 의존하고 보충하느 ㄴ가운데에서만 존재하고 생성해 나갈 수 있다.[338]

 

솥은 쇠로 주조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흙을 물로 개어 그 모형을 만들고 나무로 불을 떄서 쇠를 녹여 부어 솥을 만드는 것처럼 쇠그릇에는 오행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 <퇴계전서> [339]

 

사회는 인간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며, 그의 존재를 유지시켜 주고 성취시켜 주는 사람들의 유기적인 관계망이다.[341]

 

선비는 사회(만물) 공동체의 과제 수행을 바로 자아의 수행에서부터 시작하였다.[343]

 

자유의 진정한 의의는 소극적으로 외부의 강제를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는데 있다.[343]

 

공동체 내 상호 의존의 정신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추측하는 것과 달리 갱인주의 보다도 오히려 더 성숙하고 균형잡힌 개인을 만들어 낸다는 실증적인 주장도 있다.[344]

 

이제 나는 대가족과 친밀한 작은 공동체야말로 성숙하고 균형 잡힌 개인들을 만들어 내는 보다 나은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 의존을 권장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 개인들은 아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안정감을 느낀다.”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345]

 

3장  도덕 사회의 이상

 

도덕사회의 조성은 나의 도덕성을 떠나서는 도대체 불가능하다. <대학>은 말한다. “자신의 근본이 어지러운데 남을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사회에서 치자들에게 도덕 수행이 그토록 강조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347]

 

선비의 공동체 정신은 윤리 도덕을 인간고나계와 사회의 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예와 의로움과 청렴함과 부끄러움은 나라의 기강으로서, 이 네 가지가 행해지지 않으면 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347]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의 안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화해롭고 도덕적인 삶에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정치란 사람들의 부정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349]

 

4장  불평등 속의 조화 이념

 

선비의 조화의 정신은 대립과 갈등 이전에 경쟁조차 부도덕한 것으로 여겼다. 그에게 경쟁이란 남들과 대소와 장단, 다소를 비교하는 의식의 산물인 만큼 자신의 존재를 축소시키는 악행에 다름 아니다. 선비는 오히려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게 만드는 를 버리고 그들을 아우르면서 자타간 화해로운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극기복례의 공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359]

 

5장  사회사상의 약점과 한계

 

 

4부   죽음과 삶

 

1장  생사 화해 및 불멸 의식

 

선비는 죽음이 다만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삶의 한계 상황 너머를 제멋대로 생각하고 또 미리부터 염려하는 것이 무익한 일임을 알아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하려 했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전망 안에 있는 삶에 충실을 기하는 것을 현명한 일로 여겼다. “평소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죽음을 맞이하는 길입니다.” [394]

 

율곡이 삶이란 잠시의 유숙이요 죽음은 영원한 귀환이니 (…) 산언덕이야말로 진정한 집이라 하였는데, 이는 자연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그 근본에서부터 화해시켜주는 크나큰 힘임을 일러준다. [398]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고 화해시킬 심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양자의 부조리에 부대낄 수 밖에 없다. 퇴계는 그 심법을 자연에서 찾았다. 그에게는 자연이야말로 부조리할 것 같은 삶과 죽음의 상대와 안팎을 넘어서 양자를 화해시켜 줄 조화의 근원이었다. [399]

 

2장  상제례에 내재된 생사 의식

 

 

 

 

내가 저자라면

 

책의 주제와 구성

 

이 책은 선비라고 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가졌던 사상의 본질에 대해 살펴 본 책이다. 저자가 정의하는 선비는 유교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조선 사회의 지식인상을 일컫는데, 하지만 저자는 유학자들 모두가 곧 선비였던 것은 아니며 선비는 당시의 유교 지식인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갖는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특별한 위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서 보건데 높은 학업 수준과 실천을 통해 타의 귀감이 되는 정신세계를 갖춘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선비들의 사상을 의미하는 선비 정신의 핵심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고 참 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 추구속에서 사랑의 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데 힘쓴 실천학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오직 진리와 도의에 입각하여 자아를 확립하고 완성하려 했던 사람이 진정 선비임을 밝히면서, 선비는 부귀공명을 오히려 자아 상실의 요인으로 여겨 배척하면서 소유의 가난을 마다하지 않고 존재의 맑음을 추구했던 그의 청빈 사상이 이를 무언으로 실증하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비는 선현들에게서 그 이론을 빌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배움을 통해 사랑하고 의로우며 예절 바르고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하였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점에서 선비 정신의 특징은 인간과 자연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우주적자연관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온몸으로 실현하려는 인간학이요, 이의 연장선상에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사회철학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고찰에 기반해서 저자는 먼저 1부에서 선비들이 인지했던 우주적 자연관에 대해서 살펴 보고, 2부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선비들의 다양한 고찰, 그리고 3부에서 사회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부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고 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선비가 인간과 사회에 보여 준 진지한 사색과참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의 정신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선비정신이 오늘날까지 창조적인 지성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받은 긍정적 영향

 

이 책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생각은 선비정신이 관계 중심의 실천학이라는 것이다. , 단지 이론만의 학습이 아닌 배운 것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타인을 사랑하면서 그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나와 타인의 관계 개선과 확립에 최우선을 두면서 그 관계 속에서 자아 완성도 함께 추구하는 궁리의 실행을 통해 비로서 진정한 선비가 될 수 있었던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보통 선비정신에 대해서 쉽게 폄하했던 것이 기실은 선비 사상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의 영달을 좇아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백성의 고통을 외면했던 일부 사대부 권세 가문과 올곶은 정신으로 출세가 아닌 도학의 학습과 이의 실천에 매진하여 삶 속에서 그 도리와 의로움을 실천했던 진정한 선비들을 아무 분별없이 뭉뚱그려 생각했기 떄문이었던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선비는 인간의 존재됨에 관해 절실히 묻고 가까이 성찰하면서 참자아를 찾아 완성하는 것을 학문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가 추구했던 존재의 맑음소유의 가난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는 소유의 가난을 무릅쓰고 존재의 맑음을 추구하였다. 그의 관심은 존재를 맑게 하고 진리와 도의를 즐기는 데 있었던 만큼, 빈부 여부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공자가 가난하면서도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사람을 최상의 인격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였다.[16]

 

è  나의 제 2 인생의 핵심 주제로 생각하는 청복한 삶과 일맥상통하는 아니 그 삶의 방법을 가장 적절히 설명한 문장으로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사랑)에 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예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의로움)을 걷나니, 뜻을 펼 기회가 주어지념 만민과 더불어 그것을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이라도 그 길을 가리라. 부귀도 이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이 뜻을 변절시키지 못하며, 권세나 무력도 이 뜻을 꺾지 못할 것이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 <맹자>, ‘등문공 하’ [19]

 

è  삶의 지표로 삼을만한 좋은 글귀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이러한 개인성의 초극 위에서만 피어난다. 사랑의 세계는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를 벗어나 자타간 긴밀한 존재 유대의 의식 속에서 상대방을 공경하는 가운데에서만 열린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공경의 정신을 향리에서 아무리 비천한 사람에게라도 반드시 예를 다하셨, “손님이 오면 그가 아무리 나이 어리다 해도 반드시 계단을 내려와서 맞이하시고, 전송도 그렇게 하신퇴계의 삶에서 확인한다.[163]

 

 

퇴계는 오륜의 다섯 명제 아래에 사람을 대하는 요점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적어 놓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든 돌이켜서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라.” 우리는 여기에서 상대방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에게 일방적으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선비의 윤리에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근본 토대로 작용하였다.[167]

 

è  퇴계 선생은 학문적으로나 그 실천으로나 선비의 귀감이 되는 분이셨다. 작은 일화와 말씀이지만 그 분의 선비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왜 다산 정약용 선생이 퇴계사숙록이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로 그 분의 삶을 반추해 보고 그를 따르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비판적 시각과 교훈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거슬렸던 부분은 선비사상의 핵심 내용 중 일부가 비슷한 패턴으로 거의 모든 장에 걸쳐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교수이고 또 자신이 출판했던 논문을 기반으로 해서 책을 구성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음에 있어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다른 하나는 책의 내용이 선비사상에 대해 이론적인 고찰에 너무 치중되어 있어 실제 귀감이 될 만한 선비들의 삶과 그들의 철학에 대해서는 빠져 있어서 철학이자 실천학으로서의 선비사상에 대한 고찰의 일면에 치우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다. 추상적인 설명과 함께 선비들의 수행 내역도 함께 제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이 때문에 주장만 있고 근거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부부은 저자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저자는 선비들의 수양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의 언급한 대로 선비사상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대폭 줄이고(비슷한 설명을 최대한 배제해서) 실천적 삶의 사례를 추가해서 비슷한 두께의 책으로 출판했으면 독자 입장에서 더 유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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