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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3일 12시 26분 등록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편해문 글 편해문 사진 / 소나무

 


저자에 대하여

편해문(1969~ )

그는 노는 아이들을 위해 사진도 찍고 놀기도 하는 노는 어른이라 한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서 옛 아이들의 놀이와 노래, 옛이야기를 공부하며 놀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신나게 놀았던 어린 시절이 지금을 사는 힘임을 깨닫고 ‘아이들 놀이노래이야기 연구실 <씨동무>를 꾸려가면서 놀이에 목마른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아이들과 교사와 학부모와 함께 놀며 10년을 보냈다.

 

그는 아이들은 밖에 나가 뛰어 놀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이를 같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어 늘 외롭고 힘들었다. 스스로 힘을 내기 위해 인도를 오가며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아니다. 함께 놀았다.

 

그는 자신이 인도로 간 까닭을 여는 글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땅의 아이들은 마음껏 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현실은 점점 단단해져 가고,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는데, 놀지 못해 몸과 마음이 아파 힘들어하는 아이들 또한 눈에 또렷이 보였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답답한 마음만 앞섰기 때문이다.’[5]

 

놀면서 아이들에게 논다는 것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더 강하게 알게 되었고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놀이의 소중함과 현실의 안타까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이세상에 왔다는 것을 진솔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직접 논 경험과 인도 아이들의 놀이 사진과 함께 실어 <소꿉>이라는 사진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유아교육학과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 놀잇감 모으는 것을 좋아해 앞으로 세계 어린이 놀잇감 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한다. 그는 어린이 놀이와 노래를 가지고 직접 강연을 하고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전문위원, ‘어린이도서연구회’ 자문위원으로, ‘선재학교’ 운영위원으로도 힘을 보태고 있다.

 

쓴 책으로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며 다 아는  <동무 동무 씨동무>(창비, 1998), <가자 가자 감나무>(창비, 1998)가 있고 <옛 아이들의 노래와 놀이 읽기>(박이정, 2002), <어린이 민속과 놀이문화>(민속원, 2005), <산나물아 어딨노?>(소나무, 2006)가 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여는 글 _ 아이들 놀이를 찾아 인도로 떠난 까닭
나는 왜 해마다 인도에 오고 갔던 것일까. 이 땅의 아이들은 마음껏 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현실은 점점 단단해져 가고,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는데, 놀지 못해 몸과 마음이 아파 힘들어하는 아이들 또한 눈에 또렷이 보였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답답한 마음만 앞섰기 때문이다.

 

놀이는 아이들 삶에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쉬운 것이 아닌 아이들 삶에 있어 어떤 것보다 첫 번째 자리에 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디다 말해야 하고 어디에서 실천해야 할지 몰랐다.[5]

 

인도 아이들이 놓여 있는 현실과 지금 우리나라 아이들의 현실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인도에서 본 것은, 이 많은 아이들이 놓여 있는 환경과 처지는 모두 달라도 아이들은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노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인도의 희망은 아이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인도 아이들은 어쨌든 놀고 있고 놀면서 길러진 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얼마나 기운 없고 생기 없고 웃음을 잃게 만드는지 모른다. 인도가 우리와 조금은 먼 곳의 이야기이지만 아이들로부터 우리가 빼앗은 것은 무엇이고 오늘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돌려줘야 할 것은 또 무엇인지 이 책에서 만났으면 한다.[7]

 

에리히 프롬은 만약 아이들이 병들었다면 그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했다.[7]

 

많은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과 집을 왔다 갔다 하다가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게임에 매달린다. 게임에 빠지는 것, 이것 또한 아이들이 놀이와 만나려는 하나의 몸부림임을 잘 안다. 아이들더러 게임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짓누르는 과중한 공부와 경쟁의 세상을 견디라고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8]

 

인도 아이들을 눈여겨 본 사람들은 안다. 아이들의 바짝 마른 정강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까맣게 반들거리는 힘찬 기운을. 우리도 어려서 그런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한테서 도무지 이런 생기를 마주하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공부하고 남는 시간을 게임에 다 쓰고 밖에서 뛰놀지 않는데, 어떻게 땅과 자연이 주는 생기를 몸에 담을 수 있겠는가. [8]

 

1. 소꿉놀이 속으로

가게에서 파는 소꿉세트가 아닌 우리가 어렸을 때처럼 여기 저기서 주어 모은 물건들을 조중하게 늘어놓은 진짜 소꿉놀이를 보는 순간 절로 가슴이 뛰었다.[12]

 

아이들은 놀이 속에 퐁당 빠졌다가 잘도 폴짝 뛰어나오곤 한다.

 

또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통해 밖의 세계와는 아주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15]

 

아이들 놀이 가까이 갈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이들 스스로 어른에게 어떤 작은 역할이라도 주기 전에는 놀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15]

 

신성과 놀이는 하나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의 제의가 바로 놀이라는 말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들의 종교와 같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놀이에 빠져 몰입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 본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 사실을 알게 된다.[16]

 

나는 놀이가 허구이거나 꾸며 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놀이에서 언제나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들만의 작은 우주를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고 있었다.[19]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빨래를 해주는 어른들 곁에서 빨랫줄 거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이들이 일상에서, 어른들의 일 가까이에서 풍부한 놀이거리를 얻어 그들만의 놀이로 바꾸어 놀고 있었다.[23]

 

저녁에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놀던 소꿉놀이 살림이 고스란히 놓여있지 않은가. 누구도 흩트려서는 안 된다는 약속이 있는 것처럼 엄숙하게 남겨져 있었다. 이것은 또한 말해주고 있었다. 내일도 아이들은 이 나무 아래로 나와 소꿉 놀이를 할 것이란 걸. 어제도 그제도 이 나무 아래는 아이들의 소꿉놀이터였다는 것을.

진짜 놀이는 이렇게 한 번 또는 하루에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저녁 놀이 그림자를 끌며 내리는 나무 아래, 남겨진 소꿉들이 내게 묻는다. 한 번으로 끝나는 놀이를 정말 놀이라고 할 수 있을까.[24]

 

찰흙으로 논과 밭을 가는 트랙터를 만들며 놀고 있었는데 바퀴에 난 무늬 모양까지 정교하게 빚어내고 있었다. 지극한 마음으로 관찰하지 않고서는 저토록 정교하게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26]

 

마침 노는 아이들 앞으로 트랙터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아이들은 넋을 잃고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이에 젖는다는 것을 이런 것이다.[27]

 

2.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골목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마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고, 마당을 만난다는 것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기에 골목에 들어서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설렌다.[30]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 뭘 하는지 모르는 때가 많았다. 아이가 지금 이 시간에 무얼 하고 있을까? 그냥 어디서 동물들과 놀고 있겠지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학원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아이들을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세상이나 말이다.

아이들에게 허락된 빈틈이란 게 없는 것이 오늘 아이들의 현실이다.[32]

 

인라인 스케이트는 몸으로 놀지 않으면 아플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눈물겨운 선택이다.

왜 아이들은 이런 선택을 했을까. 아이들은 스스로 안다. 놀아야 한다는 것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프다는 것을. 아이들은 몸으로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물겨운 선택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33]

 

컴퓨터 게임이 지닌 선정성, 폭력성을 따질 겨를이 내게는 없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컴퓨터 게임에 가까이 갈수록 동무와 형제와 부모 같은 사람과 멀어진다는 것이다.[35]

 

밖에서 땀 흘리며 노는 재미를 한껏 맛본 아이들은 그 이후에 만나 게임과 같은 것들을 이 세상 많은 놀이 가운데 하나로 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하다. 그러니 만약 아이가 게임에 중독 되었다면 그 아이는 평소 스스로 놀지 못하거나, 부모들이 놀지 못하게 한 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35]

 

놀이라면 마땅히 온몸으로 노는 것이라야 한다.[36]

 

놀 터가 있어야 놀 것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놀 터와 놀 틈을 다 빼앗아놓고 어떻게 놀기를 바란단 말인가.[36]

 

불과 20년 전의 놀이가 얼마나 풍성했는지 모두 놀랐다.

삽 타기, 2개로 걷기, 뒤에서 오금차서 주저앉히기,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 낭떠러지 건너뛰기, 기차에서 먼저 내리기, 개구리 똥꼬에 보릿대로 바람불어 넣기, 길에 함정파기, 가방메고 가면 뒤에서 가방 문 몰래 따기, 무술 가위 보, 이불 속에서 옷 바꿔 입기, 걸으면서 꼭 약속한 것만 밟고 걷기, 베개싸움, 두꺼운 이불 위에서 레슬링하고 재주 넘기, 성애 낀 유리에 글씨 쓰기, 연탄집개 반쪽 던져 꼽기, 스무고개, 입으로 물 품어 무지개 만들기, 담벼락에 낙서하기, 신문지에서 자기 이름 찾기, 책 쪽 끝수 펴기, 책받침 깨기, 지우개 따먹기.

 

틈과 터.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과 또래를 먼저 보고 가장 뒤에 놀이를 보아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이 사실 놀이다. 놀이거리가 없어도 놀 틈과 놀 터와 놀 또래만 있으면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잘 놀기 때문이다.[42]

 

아이들은 언제 하늘을 보나

 

함께 쓰레기 줍자 하면

앞엣아이들 재수 없다며 투덜대고

뒷아이들 눈치 보며 도망을 가고

언제 아이들 이렇게 변해 버렸나

 

이 아이들 언제 하늘 한 번 쳐다보나.

언제 먼 데 산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겠나.

 

먹고

버리고

서너 군데씩 학원에 가고

무엇엔가 늘 쫓기면서

이 아이들 언제 하늘 한 번 쳐다보나.

 

미루나무 끝에 부는 바람 언제 보고

우리 잠든 사이

하늘 높이 떠 세상을 지키고 있는 별들

가만가만 속삭이는 소리

언제 귀 기울여 들어 보겠나.

-임길택 <할아버지의 요강> 보리,1996

 

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을 때 아이들은 옛날 놀이와 요즘 놀이에 갇히지 않는 자신들만의 놀이 문화를 스스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걱정이다.[46]

 

나는 아이들이 할 놀이가 없고 놀 방법을 모르는 것에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가슴 아파하는 것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틈과 터를 없애 버리고 이 아이들을 모두 학원으로 실어 보내는 우리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다.[47]

 

3. 연이 난다 아이들이 난다
바라나시 갠지즈 강!

이 곳에 온 이방인들은 이내 숙연해지고 만다. 이 강가에는 사람 화장하는 모습을 아주 쉽게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그 냄새 또한 피할 수 없이 코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곳을 찾는 인도 사람들은 너무나 행복해 한다. 바라나시를 흐르는 갠지즈 강 때문이다.

 

갠지즈 강은 모든 것을 정화 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은 외국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살고 죽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기는 것 같다. 나 또한 슬픔과 두려움과 덧없음을 함께 안고 화장터를 스치고 지나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이었다.[50]

 

죽음과 삶이, 늙음과 젊음이, 고통과 놀이가 스쳐 지나가면서 함께 어울리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 갠지즈 강이다. 화장터에서 타고 있는 여러 시신들 앞에서 너무 마음 죄지 말고,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그 많은 연과 연을 날리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면 삶은 또 다른 기운으로 넘칠지 모른다.[53]

 

놀이가 되려면 이렇듯 여러 사람이 절대적인 시간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것을..[56]

 

할아버지께서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살림살이도 넉넉지 못했다고 하셨다. 그런 소년이 연을 만나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땅 위에 할아버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연을 띄워 하늘 높이 날리는 그 순간에는 연 아래 온 세상이 내 것이 되는 느낌이었다고 하셨다.

 

이런 사무치는 기억이 지금까지 연을 손에 놓지 않고 계신 까닭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이 하나가 참 대단한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지금까지도 연줄의 팽팽한 기억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분은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사람임에 틀림없다.

 

매운 겨울바람에 손이 얼어 터지는 줄도 모르고 밖에서 연을 날리며 우리들만큼 하늘을 오래 보았던 세대로 없을 것 같다. 어른이 되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힘 또한 바로 이런 작은 놀이에게 길러진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을 이런 놀며 길러지는 힘이 아닐까.[59]

 

4. 놀이가 똑같네!
제기차기, 자치기, 그네타기, 까막잡기, 진놀이, 전쟁 놀이 등등 우리가 하지 않았던 놀이는 거의 없었다. 멀리 떨어진 한국과 인도 아이들의 놀이가 비슷한 까닭은 무엇 일까. 나는 한쪽에서 영향을 끼쳤다기보다는 아이들의 놀이 본능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굴리고, 돌리고, 꾸미고, 날리고, 넘고, 따먹고, 움직이고, 숨고, 쫓고, 찾고, 치고, 차고, 타려고 하는 힘이 아이들 몸 속에서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놀이라는 것은 이런 타고난 몸 속의 힘이 동무를 만나고 놀잇감을 만나면서 터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62]

 

놀이에서 경쟁이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아이들에게 경쟁이 0%인 놀이를 더 많이 만나게 해주고 싶다. 노래가 그렇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참 재미있고 즐거워지는데 이 즐거움은 경쟁을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까닭이다.[66]

 

놀이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기를 누가 더 오래 차는 지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바깥 놀이에 쏟아 붓는 절대적인 시간이 얼마 만큼인가 이다. 놀이의 질은 놀이 시간의 양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69]

 

여자 아이들이 제기차기 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제기 차기를 남자들의 놀이로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처음부터 대부분의 놀이에 남녀 구분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여자들이 하기에는 얌전하지 못하다거나, 그것은 여자애들이나 하는 놀이하는 어른들의 생각에 따라 강요된 놀이 선택이 많다고 본다.[69]

 

5.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아름다운 놀이의 꽃은 핀다

아이들 놀이가 가장 활발하게 뿜어져 나오는 환경은 어떤 것일까. 당혹스럽게도 그것은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이다. 

 

폐허로 변한 환경은 최고의 놀이터와 놀잇감이 가득 찬 세계로 아이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삶의 가장 힘든 시기야말로 돌이켜 보면 희망이라는 씨앗을 뿌리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니었던가.[90]

 

오늘날 아이들이 이 정돈된 세상에서, 이 반듯하게 잘라진 시간과 공간에서 무슨 놀이를 할 수 있는지….위험하니까, 더러우니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까놀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왜 이렇게 늘어만 가는지. 세상과 어른들은 왜 갖은 구속과 핑계로 아이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지..

 

무릎이 까지고 넘어지고 구르지 않고 어떻게 놀이와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흔히 사람들은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힘을 기른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많은 상상은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서 길러지는데 그 꽃은 옛날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가 꽃이라면 놀이는 열매라고 할 만큼 상상을 무한대로 펼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어린 아이들일수록 그렇다. 그러니 놀이를 막는 것은 아이들의 상상을 막는 일이 되고 만다.[90]

 

나는 새삼스레 아이들이야말로 환경에 굴복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았다. 아이들이 어른과 크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놓여 있는 현실과 처지에 파묻히지 않을 힘이 있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꿈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97]

 

놀이에 있어 오염과 순수의 경계란 아이들에게 이렇듯 무의미한 것이었다. 붓다께서 일찍이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고 하지 않으셨던가.[98]


6.
어른들의 일터는 아이들의 놀이터

놀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데 이 힘은 어른들을 도와 일을 하거나 작은 인은 손수 하면서 저절로 길러진다. 어른들이 아무리 공부만 시키려고 해도 어려서 일을 해봤던 아이들은 몸으로 이를 거역하고 놀이로 세상을 이해하는 길을 스스로 찾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철저하게 아날로그로 자라야 한다. 아날로그의 품을 팔지 않는 디지털은 휘황한 껍데기이고 거짓말이고 환영일 뿐이다.[105]

 

이 나라 교육의 가장 큰 잘못은 아이들에게서 얼마간의 일마저도 빼앗아버린 점이다. 시골 아이들은 제 몸 하나는 부릴 줄 안다. 놀이가 뭐 별것인가. 제 몸하나 건사하고 부릴 줄 알면 그것이 놀이가 아니겠는가.

 

동생을 돌 보고, 밭 매는 어른들 따라 작은 힘이라도 보태다가 장난도 치고, 그것이 다 놀이 아닌가. 아이들의 일할 권리를 빼앗은 것은 아이들 사랑과는 관계가 없다. 아이들은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고 싶어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놀이를 꼽으라면 나는 어른들이 제 일에 몰두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아이들이 보거나 떠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놀이이기 때문이다.[105]

 

아빠가 물건을 고치거나, 엄마가 저녁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만큼 좋은 놀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들은 어른 세계에 함께 참여하는 놀이를 너무나 하고 싶어 한다.[106]

 

7. 시키지 않아도, 가르치지 않아도
놀면서 수도 없이 지고 이기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무언가에 패배했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그 패배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나는 놀이가 패배와 죽음을 넘어서는 수많은 상황과 만나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놀이든 놀이가 몸에 푹 익기 전까지는 놀이에서 숱하게 지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자꾸 해보고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는 이기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놀이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이처럼 놀면서 몸으로 익힌 용기와 긍정적인 힘은 놀이 바깥 세계에서도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꿈을 찾아가는 힘도 놀면서 기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놀이의 힘히다.[121]

 

놀이는 모름지기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며, 하면서 즐거워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가면 두면 재미있을 것도 부모님, 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 되면 놀이는 어느새 일이 되어 버린다.[121]

 

공기놀이는 아이들의 머리와 마음과 손과 동무와 세계가 함께 어울리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기놀이에는 수입된 많은 교구놀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단순한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공깃돌 다섯 알로 따뜻하게 이어주는 마음이 깃든다. 공기놀이를 하면서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모습은 복잡한 놀잇감을 가지로 홀로 노는 모습보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이들은 손과 발을 써서 마음과 바깥세계를 잇는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손과 발은 세계와 만나는 길이다. 이런 까닭으로 손을 쓰는 놀이는 아이들의 마음과 정신, 육체와 세계를 일깨워 준다.[122]

 

공기 놀이의 놀잇감은 퍽 단순하다. 이처럼 놀잇감은 단순할수록 좋다. 아이들이 놀면서 채울 부분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돌 다섯 개람 있으면 충분하다. 단순한 놀잇감이지만 이 공깃돌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재주와 솜씨를 끝없이 다채롭게 창조해낼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은 공기 놀이를 하면서 섬세하게 근육을 쓸 수 있게 되며 고도로 집중된 몰입과 끈기를 자연스럽게 기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은 돌멩이 다섯 개로 하는 공기 놀이가 한 가닥 실로 하는 실뜨기를 오래도록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까닭은 공기 놀이나 실뜨기가 지닌 놀이의 열린 성격 때문이다. 이런 놀이들은 한 가지 놀이 방법에만 머물거나 갇히지 한고 아이들 스스로 얼마든지 다른 모양의 놀이로 만들어갈 수 있다. [123]

 

9. 가장 훌륭한 배움터는 천장이 하늘로 되어있다
요즘은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서도 대형 모니터를 켜놓고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묻고 싶다. 이런 것이 교실에 들어왔다고 꼭 교육 환경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전자 기계들 덕분에 아이들이 잃는 것은 무엇일까? [151]

 

학교란 무엇인가? 건물인가? 시설인가? 교사인가? 무엇인가?

 

배움이라는 것은, 가르친다는 것은 좋은 장비가 있느냐 없느냐 이전의 문제이다. 교육이란 교사와 아이들의 배우고자 하는,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철저하게 아날로그로 배우고 익혀야 하지 않을까. 아날로그를 넘어서 디지털화된 교육은 좀 더 커서 해도 좋지 않을까.[154]

 

아이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으면서 배우고 싶은데 대한민국 유치원과 어린이집,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이 모습은 첨단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의 감각을 닫게 만드는 것들로 채우려는 데 매달리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154]

 

아이들은 진짜 물건을 만지고 싶고, 사람이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듣고 싶고, 제 몸으로 춤추고 싶지만 이 모든 것을 그림으로 음반으로 프로그램으로 사진으로 만나게 해주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어디까지 데려갈까.[154]

 

10. 놀잇감을 만드는 것도 놀이
놀잇감은 되도록 자연과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만들고 이렇게 만든 놀잇감의 모양은 단순하지만 놀이의 상상력을 끝없이 펼치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이렇듯 놀잇감을 스스로 만들어 놀아야 진짜 놀이다.[158]

 

놀이는 평등해야 하고, 평화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공짜여야 하지 않겠는가.[161]

 

심심함이야말로 놀이가 시작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조건이다. 심심해야 이제 한번 놀아볼까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심심해 할 틈도 없이 온갖 장난감을 사서 안기기에 바쁘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지금 장난감 소화불량에 걸린 상태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놀잇감은 아이들이 창조해내는 세계이지 어른들이 사다 주고 만들어주는 세계가 아니란 것을 잊은 것 같아 안타깝다.[162]

 

일찍이 아이들의 손과 발을 요즘처럼 굼뜨고 둔하게 한 시대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이 아이들에게 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편리함이 단 하나의 가치인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162]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사다 주는 것은 놀잇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놀았던 야쿠르트 병 실전화기를 아이들은 더 오래도록 가지고 논다는 것을.[163]

 

동무들끼리 사람끼리 만나 부대끼며 놀이를 뒤로 미루고 아이들은 장난감과 놀게 해서는 안된다. 누가 뭐래도 놀이는 사람하고 만나 어울리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75]

 

12. 죽음과 부활, 놀이의 아름다움

땅이 있으니 돌을 가지고 금을 긋고. 금을 그어 금 이쪽과 저쪽을 살고 죽는 공간으로 가르고, 그 중간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둘이 어울려 있는 공간도 만들면서 여러 형태의 금놀이가 만들어졌을 것이다.[190]

 

남다른 것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다르던 돌이 다시 놀이에서 망으로 쓰이면서 놀이의 생명을 이어가는 도루가 된다는 점이다. 가끔은 망이 제가 그려놓은 금을 밟거나 넘어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놀이에서 삶과 죽음은 영원하지 않다. 놀다가 때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만, 삶과 달리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놀이이기도 하다. 놀이의 영원성은 바로 이쯤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놀이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해야겠다.[190]

 

요금 아이들과 놀이를 해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지는 것을 못 견디는 아이들 모습이다. 놀이를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애들이 왜 저러나 당황하게 만든다.

첫 번째 까닭은 아이들이 그 동안 놀이다운 놀이를 해본 경험이 너무 적다는 것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까닭은 여럿이 힘을 모아 하는 놀이를 해보지 못한 탓이다.[197]

 

함께 놀며 아이들은 화를 다스리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 아이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놀이에서 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경쟁에서 밀렸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좀도 따듯하게 즐기면서 과정이 아름다운 놀이를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 하나는 어울려 놀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갑자기 놀이로 뛰어들어 일어나는 문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놀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198]

 

13 모래를 파헤치고 진흙에서 뒹굴고

아이들이 지식을 만나게 해야 하는 것처럼, ‘놀이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215]

 


15.
아이들은 굴리고 싶고 돌고 싶다

놀이는 아이들의 심성에서 출발해서 이해해야 한다. 굴리고 싶고 돌리고 싶고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에서 놀이는 시작된다.[234]

 

아이들이 놀이에 몰두하게 되면 놀이 또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놀이에 몰입할 수 있는 널널한 시간이다.[239]

 

16. 숨고 찾고 쫓고 쫓기고
아이들이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놀이가 하나 있다. ‘나 잡아봐라놀이이다.[250]

 

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웃음이라고 본다. 한 마디로 웃으려고 논다는 말이다. 놀이를 하는데, 그것이 전래동화든지 민속놀이든지 요즘 놀이든지 관계없이 웃음이 없다면 그것은 놀이가 아니다. 거꾸로 아빠가 저녁에 일찍 와 어린 딸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하는 놀이는 뭐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고, 그것이 전래놀이도 아니지만 훌륭한 놀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웃음은 틀림없는 놀이라 해야 옳다.[253]

 

누가 내게 왜 놀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웃기 위해서라고 말하겠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웃음이 없는 놀이는 가짜 놀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놀다가 자주 울기도 한다. 그렇다. 웃음과 울음이 있어야 진짜 놀이다.[253]

뭔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된 세상이다. 애들 공부 너무 시킨다. 일단 놀고 노래도 좀 부르고 공부해도 늦거나 모자라지 않다. 큰 일 안 난다. 아이들은 글동무도 있어야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들동무, 놀동무가 있어야 한다.[261]


닫는 글 _ 어릴 때 놀았던 힘으로 나는 오늘을 산다

놀이의 차례와 방법을 머리에 넣고 가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가르칠 뿐이다. 놀이를 가르치다니, 사실 이건 말이 안 된다. 아이들과 놀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놀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278]

 

놀이는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저런 책을 펴놓고 배울 수도 없다. 오로지 놀면서 느낄 수 있고 그 재미있고 따뜻하고 때론 흥분되는 느낌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놀려면 놓여나야 한다. 놀려면 교사와 이이들을 일상에서 붙잡고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 놓여날 수 있어야 한다. 교장과 원장이 아이들과 교사를 놓아 주어야 공부 터와 놀이터가 활기차게 바뀐다.[279]

 

슈타이너는 아이들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책으로 삼아 배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놀이 또한 마찬가지다. 제대로 놀려면 놀이하는 방법과 차례가 적힌 책을 먼저 손에서 내려놓아야 한다.[280]

 

더 나아가 놀이마저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참 많다. 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놀이는 강을 건너면 뒤에 두고 가는 배와 같다. 놀이를 위해서 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보다 중요한 것은 놀이를 서로 오래도록 하다 보면 생기고 쌓이고 오가가는 따뜻한 사랑과 이해와 우정이다. 사랑은 말로 마음에 새기기 어렵다. 교사와 부무가 아이들과 놀이로 서로 부대껴야 사랑의 싹을 틔울 수 있다. 무슨 놀이를 하든 상관없다. 꼭 민속놀이나 전래놀이를 할 필요가 없다. 그때그때 상황을 놀이로 여기고 즐겁게 놀 수 있다면 그만이다. 이렇듯 놀이를 하는 시간이 바로 사랑을 나누는 사간으로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280]

 

또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사람이 있음을 깨우친다. 가까이 있는 동무가 나와 생각이나 몸짓이 다를 수 있다는 것도 배워서가 아니라 놀면서 깨우친다. 놀다보면 서로 다르니까 조절하는 것을 배우고 조절하다 보면 자기 고집도 돌아보고 가진 것도 나눈다.[281]

 

놀이와 게임은 다르다. 학교에서 하고 있는 놀이는 놀이가 아니라 모두 게임이라고 해야 옳다. [282]

 

놀이에서 자발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자발성과 함게 가야 할 것이 바로 따뜻한 사람의 샘솟음이다. 머리라 가지 않고 튼 돈 들이지 않아도 아빠와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어울리면서 오고 가는 사랑이 바로 훌륭한 놀이다. 뭐라 딱히 이름 붙일 수 없는 놀이, 이것이 진짜 놀이다.[284]

 

아이들이 흙을 밟지 못하고 강과 갯벌과 숲에서 멀어져 자란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이 아직 무엇이지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 한다. 아이들에게 지식을 앞세우는 가르침은 살아 움직이는 세계와는 만남을 가로막는 어두운 장막일 뿐이다. 아이들은 자신과 또래의 동무,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배울 뿐이다.[289]

 

아이들은 물, , 바람, 흙 속에서 비로소 해방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놀이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들과의 원시적인 만남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집을 떠나 추위, 더위, 비바람을 맞서 보아야 한다. 나는 안다. 이런 것들 속에 아이들이 가장 만나고 싶고 놀고 싶어하는 놀이가 가득 숨어있다는 것을….이렇게 잘 놀아본 아이라야 행복을 찾아 나설 힘이 있다는 것을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오로지 놀기 위해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291]




내가 저자라면

나도 어릴 때 자연과 함께 놀았던 힘으로 오늘을 산다. 나의 어린 삶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하나의 자연이었다. 채집이라기 보다 같이 놀 친구였기에 자세히 들여다 보고 만지고 함께 했다. 그 느낌이, 그렇게 놀았던 기억이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미나리, 부추, 고추, 가지, 토마토나의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그들은 나에게 따짐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내가 따주고 솎아 주어야만 더 풍성하게 자라나기 때문에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열매를 따고 부추를 뜯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연보호를 모른다.

 

과일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이 귀했던 탓에 아주 작은 열매가 열릴 때부터 지켜본다. 얼마나 커졌는지, 언제쯤이면 먹을 수 있을지.  약간의 붉은 기운만 돌면 하나 따먹어보고……너무 셔 눈은 저절로 미안하다 윙크하고 혀는 입 밖으로 나온다.

요즘 아이들은 모든 과일이 잘 익은 상태만 안다. 그 모습이 처음 모습이자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깨물면 살이 오르지 않아 바로 씨앗일 때 그 신맛부터 시큼하지만 두세 입은 베어 물정도 일 때, 익진 않았지만 먹을 만 할 때까지 한 과일의 갖가지 맛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자두와 꼬약. 복숭아.. 우리 동네 귀한 과일이었던 탓도 있다. 유난히 먹고 싶어 눈독을 들였던 과일 나무이다.^^  사과, , 감 심지어 밤까지음흠..그립다.

 

그는 책은 내가 아이들은 자연에서 놀아야 한다고 늘 주장하는 바를 매우 잘 표현했다. 어떤 장난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해서 스스로 놀잇감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노는 것이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는 것은 웃기 위해서라는 말하는 대목도 신선하다. 현재 아이들의 부모세대에서 추억할 수 있는 놀이고 그때의 풍경을 정겹게 잘 그렸고 요즘 아이들의 놀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함이 나와 비슷하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글 뒤에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어 쓰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그가 20년 전의 놀이를 나열한 대목에서는 내가 놀았던 놀이들을 10가지가 넘게 떠올리기도 했다.   

 

부지깽이로 그름에 글씨쓰기, 나뭇가리에서 뛰어내리기, 싸리나무 꺾어 잠자리 덮치기, 감꽃 꿔어 목걸이 만들기, 옥수수꽃 꺾어 인형 만들기, 흙으로 손 덮어 두꺼집 만들기, 돌로 바위에 글씨쓰기, 줄기 지그제그로 꺽어 귀걸이 만들기, 칡 잎 엮어 고깔모자 만들기, 아카시아 나뭇잎 손가락으로 따기 게임, 닭 쫓아 달리기,

 

저자보다 내가 강한 건 자연을 이용한 놀이 경험은 더 풍부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놀 공간과 놀 시간이 없다는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한다. 나 또한 그렇다. 우리집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주어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 놀 공간이 많은 시골에는 아이들이 없어 놀 수 없고, 아이들이 많은 도시에는 놀 터와 놀 틈이 없어 놀지 못한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아이는 아이와 놀아야 한다. 그래야 재미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 내는 놀이에 더 열광한다.

 

놀 터와 놀 틈을 만들어야겠다. 우리 아이들에게 먼저 해봐야겠다. 먹을 것만 약간 싸가지고 가서 놀기. 한강이 있지 않은가. 성미산 마을에도 한번 걸어가 봐야겠다.

 

놀 친구들이 없어 각자 방에 쳐 박혀 있는 아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볼까? 그런 또래를 찾아봐야겠다. 시간 나는, 심심한 아이들이 모여 놀 수 있는 공간. 자연공간이면 더 좋겠지만 함께 웃고 울고 땀 흘리며 놀 수만 있다면 어디들 어떠랴.

 

아이들과 잘 놀 수 있는 창조놀이를 하나 구상해 봐야겠다. , 스승님께서는 내가 이 고민을 하는지 어찌 아시고 필살기 교본을 건네 주셨단 말인가! 눈초리 가면을 쓰고 따라 해 보자.

IP *.1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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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건친구
2010.03.28 23:18:15 *.180.96.4
나는 게으른 엄마라서 아이들에게 뭘 해주어야 할지 도대체 계획을 못세웁니다. 그런데 그게 도리어 약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 계획없이 아이랑 놀다가 아이가 뭔가에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며 재밌어 한다는 걸 감지하면 그 놀이에 빠져드는 식으로 놀아주는데, 그때가 바로 놀이가 가장 재밌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일 때가 있거든요.
예를 들어 네 살짜리 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가 책 내용보다 그림의 동작들에 관심이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책 읽는 것은 중단하고 동작 따라하기 놀이를 했습니다. 아이가 어찌나 세세한 동작과 표정을 잘 잡아내는지 감탄했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아이랑 놀아주는 건지 아이가 저랑 놀아주는 건지 헷갈리더라구요. ㅎㅎㅎ
아이들은 정말 부러울 정도로 인생을 맘껏 즐기고 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섯부르게 뭔가를 가르쳐준답시고 아이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태도를 경직시키지 않으려고 늘 조심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주욱 게으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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