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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0일 11시 12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듀안 엘진 (Duane Elgin)


지금까지 저술과 연설, 과학적 연구와 미디어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류 문명의 진화 과정을 밝히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을 해왔다. 


훠튼 비즈니스 스쿨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미국의 미래에 대한 행정부-의회 합동 위원회>의 고위 멤버로 일했으며, 1980년대에는 당파와 관계없는 비영리조직인 <우리 미래의 선택>을 설립하여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이후 싱크탱크인 SRI 인터내셔널의 사회과학 부문 상급 연구원으로 일하며 먼 미래의 인류 문명에 대한 많은 연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대중소비사회의 생활방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함으로써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삶의 방식, 즉 <소박한 삶의 철학>에서 제시하는 ‘스스로 선택하는 소박한 삶’의 방식을 제창하였다.


소박한 삶에 관한 책들 중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혁명적인 책에서 그는 우리들 각 개인의 삶의 태도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는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변화하는 인간의 이미지>(1982, 조셉 캠벨 외 공저), <깨어나는 지구 : 인류 문화와 의식의 진화에 관한 탐구> 등을 저술했으며, 30여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중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가 처한 상황에 대한 포럼>에 제출된 두 건의 보고서, <세계적인 의식의 변화 : 새로 등장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지표들>과 <집단의식과 문화적 치유>가 유명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소박한 삶이란

숲속에서 은둔해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검소한 소비와 생태에 대한 배려,

인간의 내적인 성장이 조화되는 삶이다.

스스로 선택하여 사는 소박한 삶은

빈부의 격차와 생태계의 파괴라는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운동이다. (5)


1. 소박한 삶이란 무엇인가

소박한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이다. (12)


리처드 그레그는 간디의 가르침을 배우던 학생이었는데, ‘자발적인 소박함’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자발적인 소박함에는 내적인 조건과 외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즉, 외적인 혼란스러움을 피하고 삶의 주된 목적과 상과 없는 물건을 많이 소유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마음, 진실함, 내적인 정직성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의 에너지와 욕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막고 원하는 방향에서 더욱 풍요로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삶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삶을 조직하는 것이 포함된다. 물론 사람마다 인생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목적에는 상관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목적과는 전혀 상과 없을 수도 있다... 얼마나 소박하게 살 것인가는 각 개인이 스스로 정해야 할 문제이다. (12)


자발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바깥 세상에서 취하는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하는 우리 자신, 즉 우리의 내면 세계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12)


소박한 삶이란 필요 없는 곳에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서 소박함은 개인적인 문제다. (13)


소박하게 사는 것은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을 벗고 더 가볍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측면-우리가 소비하는 물건, 우리가 하는 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 및 우주와의 연결 등-과 더 직접적이고 겉치레가 없으며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소박한 삶이란 삶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쓸데없는 곳에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고 명료한 자세로 삶과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의미한다. (13)


우리 삶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을 통합시키면, 자발적인 소박함은 겉으로는 더 소박하고 안으로는 더 풍요로운 삶의 방식, 우리의 살아 있는 진정한 자아가 삶과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접촉을 하게 되는 존재 방식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번 습득하고 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현실의 일부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박함이라는 말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우리 삶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사이의 정교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며, 끊임없이 면화하는 과정이다. (13)


우리의 목적은 더 적게 입고 더 적게 쓰면서 독단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목적과 성취, 만족이 있는 삶을 찾기 위해 힘들더라도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14)


소박한 삶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들

어떤 사람들은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을 가난, 진보의 거부, 시골 생활, 아름다움의 부정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잘못된 것이며, 소박한 삶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5)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가르침 중 일부는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을 가난과 동일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15)


착한 사람들과 나란히 일을 하면서 가난에도 인간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소박함’과는 아주 다른 얼굴이었다. 가난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반면, 소박함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해준다. (16)


의식적으로 소박함을 유지하는 삶에는 인간의 정신을 북돋워주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있다. 목적이 있는 소박함은 개인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창조적인 참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기회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16)


역사적으로 볼 때 소박한 삶을 택한 사람들은 중용의 도, 즉 가난과 무절제한 풍요 사이의 창조적이고 미학적인 균형을 추구했다.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대신 풍부한 경험이 가져다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를 추구했다. (16,17)


소박한 삶은 물질적 진보를 거부한다?

생태계와 공존하는 소박한 삶이 경제적인 진보를 거부하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은 오히려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기술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삶이다.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은 ‘성장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삶의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삶이다. (17)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발전적인 소박함의 법칙’이라는 말로 성장의 본질을 설명했다. 그는 한 사회가 점점 더 많은 양의 에너지와 관심을 삶의 물질적인 측면에서 비물질적인 측면으로 옮겨서 문화,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 공동체 의식, 굳건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나가는 능력이 커질 때 진정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17)


소박한 삶이란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박한 생활이라고 하면 숲속 월든 연못가의 오두막집에서 살았던 소로를 연상하고, 소박한 삶을 위해서는 사람들과 떨어진 전원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소로가 은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로는 “숲속에서 살 때 내 삶의 어느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썼다.


소박한 삶은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 가장 좋은 결과를 얻도록 노력하자”는 운동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18)


소박한 삶은 아름다움을 부정한다?

소박한 삶은 때로 단순함을 옹호하고 아름다움과 미학의 가치를 부정하는 원시적인 접근 방법으로 여겨진다. (18)


청교도들은 예술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지만, 소박함의 다른 옹호자들은 예술이 사물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박한 삶을 선택한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 것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19)


소박함은 아름다움을 부정하기보다는 인공적인 방해물들에서 사물을 해방시킴으로써 미학적인 감각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소박함은 사물을 가리는 소란스러움을 제거하고, 모든 정수를 우려내는 우리의 정신을 밖으로 내놓는다. (19)


소박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의식적으로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책은 없다.

리처드 그레그는 “소박함은 기후, 관습, 문화,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소박한 삶을 정의할 수 있는 단순한 공식 같은 것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어느 누구도 나 때문에 나와 같은 삶의 방식을 택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길 원한다.” (20)


마하트마 간디도 삶의 물질적인 측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됐든 내적인 도움과 위안을 주는 물건이라면 반드시 간직해야 한다. 자기 희생 정신이나 엄격한 의무감 때문에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될 것이고, 그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 물건에 더 이상 관심이 가지 않을 때에만 그 물건을 포기하라.” 소박함은 각자의 생활 수준은 물론 개인의 삶의 목적과도 관계가 깊기 때문에 ‘진정 옳은’ 단 하나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20)


사람들은 소박한 삶의 특징을 외적인 변화에서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소박한 삶은 생명체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목적을 지닌 만족스런 전체로 통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23)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은 삶의 두 가지 측면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이란(정상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것과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능가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생명체는 자신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과 자신을 능가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생명체가 오로지 자신을 유지하는 작업만 한다면, 삶이란 죽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23)


소박한 삶의 내적인 특징과 외적인 특징들은 소박한 삶이 피상적으로 삶의 스타일을 바꾸는 것 이상의 일임을 보여준다. ‘스타일’이 변한다는 것은 새로운 유행처럼 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박함은 이보다 훨씬 의미가 깊은 말이며,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와 관련돼 있다. (25)


소박한 삶의 역사적 뿌리

기독교적 전통

소박한 삶의 공통적인 기초는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황금률’, 즉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는 측은지심의 가르침에 잘 표현되어 있다. (34)


다양한 기독교 단체들이 새로운 현실에 적합한 생활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1973년에 작성한 “셰이커타운 맹세”에는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소박함의 현대적 표현이 들어 있다. 두 개의 핵심적인 서약이 이 맹세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것에 자신을 바친다”와 “나는 창조적인 소박함이 있는 생활을 하는 것과 나의 개인적인 부를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에 자신을 바친다”가 그것이다. 이 서약들은 곤궁하고 비참한 삶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함께 채우는 공정한 생활 방식을 장려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자유와 성취를 증가시키는 미학적인 소박함을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 (35)


동양적 전통

불교, 힌두교, 도교 같은 동양의 정신적 전통 역시 물질적인 중용과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장려했다.


“자기가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부자다.”

- 노자 -


“문명은 진정한 의미에서 증식이 아니라 욕망의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이것만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만들어낸다.”

- 마하트마 간디 -


간디는 욕망의 감소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주며,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진정한 문명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35)


불교는 우리의 잠재력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충족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물질적 행복을 목적 그 자체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질적 행복은 정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각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기 통제와 소박한 생활은 부나 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없는 자선과 관대함이 실천만큼이나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36)


고대 그리스의 전통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그저 충분할 뿐인 ‘황금의 중도’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다른 정신적 전통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물질적인 세상을 우선적인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으로 보았다. 사상과 영혼이라는 광대한 세상에 대한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또한 부와 빈곤 사이의 황금의 중도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중도를 추구하고 지적인 면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균형 잡힌 삶을 좋아했다. (37)


청교도적 전통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떠들썩한 소비국가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소박한 삶이 미국 역사에 강한 뿌리를 갖고 있다. 초기의 청교도 이주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며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고, 정신적인 것에 확고하게 헌신하는 것을 강조하는 ‘청교도적 윤리’를 미국으로 가져왔다. 청교도들 역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 이상의 물질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황금의 중도를 강조했다. 청교도 전통은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엘리트 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남아도는 것을 마땅히 도움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쓰도록 장려하는 측은지심도 갖고 있었다. (38)


퀘이커의 전통

청교도들과는 달리 그들은 평등을 강조했고, 이것은 종교적인 관용을 낳았다. 퀘이커 교도들은 천명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 금주, 검소함의 미덕을 강조했다. 사람이 자기 노동의 과실을 즐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지구상에 머무르는 순간은 아주 짧으므로 영원한 것에 사랑과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38)


초월주의적 전통

초월주의적 시각은 미국에서 180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 꽃을 피웠으며, 랄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과 저작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초월주의자들은 정신적인 존재가 세상에 깃들어 있으며, 소박한 삶을 통해 기적적이고 필수적인 생명력을 더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38)


에머슨은 초월주의적인 길이 자기 발견으로 시작되어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세계와 자아의 유기적인 통합’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초월주의자들은 자연을 경외했으며, 자연 세계를 신성한 것으로 통하는 문으로 여겼다. 자연을 사색과 정신적인 영감의 수련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여겼다. 에머슨은 자연과 벗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의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신성한 것과 하나됨의 궁극적인 소박함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9)


소로 역시 소박함을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는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물건의 숫자만큼 부유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소박한 삶을 사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잡념이 없는 사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풍부한 내면적 삶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에머슨과 소로는 소박함이 사람의 소유물보다는 사람의 의지와 더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39)


소박한 삶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이비드 샤이는 돈을 벌고 물건을 쌓아두는 행위가 영혼의 순수성, 정신의 생명, 가족의 응집력, 사회적인 선(善)을 질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소박한 삶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최소 공통분모라고 말한다. (39)


2.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

겉으로는 소박하지만 안으로는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

소박한 삶을 택한 공통적인 이유는 일, 소비, 사람들과의 관계 등에서 겪는 외적인 경험과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균형있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는 것, 물질적인 소비와 과시에 집착하는 공허한 사회가 아닌 의미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는 것, 아이들에게 앞으로 살아가게 될 사회에 적합한 인생 경험과 더 인간적인 가치체계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개인을 소외시키는 복잡한 대중 사회에서 더 높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찾고 싶었다는 것, 사람들과 더 협동적이고 서로를 생각해주는 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것, 빈부의 엄청난 격차를 인정하고 개인적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을 통해서라도 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는 것, 환경 오염과 자원의 고갈에 나름대로 대처하고 싶었다는 것,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성차별을 하지 않는 태도를 기르고 싶었다는 것, 심각한 경제적 붕괴와 사회적 분열의 시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는 것, 자신의 느낌, 생각, 행동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 등이었다. (57)


어떻게 소박한 삶에 이를 수 있는가

자발적으로 소박한 삶을 택하는 과정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는 것 같다. 몇 개월 또는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초기 단계에선 새로운 삶을 시험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새로운 삶의 양식 사이를 오간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들의 생활에 자그마한 변화들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들의 인식과 행동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다른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자그마한 변화들이 모여서 마침내 산업사회적인 삶의 방식에 안녕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우면 그 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깊은 애착을 지니게 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61)


3. 소박한 삶의 즐거움

소박한 삶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첫째, 소박한 삶은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한다. 소박한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삶의 방법이며, 자족적인 생활과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소박한 삶을 택한 선구적인 사람들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음을 직접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훨씬 더 의미있고 효과적인 삶을 일구어나갈 수 있다.


셋째,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한 삶의 방식에는 물질적인 검소함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중앙에서 바깥을 향해 뻗어나가는 바퀴 살처럼 소박한 삶의 방식은 우리 경험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핵심에서 뻗어나가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소박한 삶이 바로 이것이라고 규정하는 정답은 없다. 생태계와 공존하는 삶의 방식은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여섯째, 소박한 삶을 택한 선구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관련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변화들이 한데 모이면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수많은 작은 변화들이 한데 모여서 우리 모두의 삶이 철저하게 변화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일곱째, 의식적으로 소박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능력과 새로운 일을 기획하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째, 소박한 삶은 세상에서 물러나 은둔하는 삶을 뜻하지 않는다. 소박한 삶을 택한 선구적인 사람들이 지구가 갖고 있는 자원과 환경을 공격적으로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세상을 거부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소박한 삶은 은둔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박한 삶은 우리가 삶과 더 밀접해지도록 우리를 돕는다. 스스로 원해서 직접적으로 삶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상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고, 더불어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통찰력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의 뒤를 잇는 것은 상부상조하는 삶이고, 이를 통해 전세계에서 새로운 문명이 꽃필 수 있게 된다. 소박한 삶을 택한 사람들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향한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67,68,69)


4. 소박한 삶의 철학

자유의지에 따라 인생을 산다는 것은 좀더 의식적으로 삶을 대한다는 뜻이다. 소박하게 인생을 산다는 것은 삶을 보다 솔직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107)


소비 지향적인 삶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인생을 좀더 깊이 음미하기 위해 우리는 우주가 바로 우리의 고향이며 죽음이 우리의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08)


우주는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과 섬세한 솜씨를 가진 누군가가 역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훌륭하게 디자인해놓은 우주 안에서 살고 있다. (110)


창조의 기적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 하나하나 속에 스며들어 있다. 미국 인디언의 민간전승은 세 가지 기적이 겹쳐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사물이 존재한다는 기적이 첫 번째고, 살아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기적이 두 번째고, 살아 있는 것들이 자아를 의식할 수 있게 된다는 기적이 세 번째라는 것이다. (110)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기적적인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지구를 하나의 소중한 시스템으로 인식할 수 있다. (112)


죽음은 우리의 친구이다

삶을 음미할 때 죽음은 중요한 친구가 되어준다. 내가 말하는 친구로서의 죽음은 우리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임을 자각하게 해주는 존재를 뜻한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배워나갈 시간이 짧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부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보지 않도록 도와주는 친구이다. 죽음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13)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 삶에 시각과 균형을 부여해주는 친구이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생명이라는 선물을 더 완전하게 음미할 수 있게 된다. (118)


5. 스스로 선택한 삶의 아름다움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태토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119)


자신을 깨닫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더 정확하고 튼튼할수록 더 자발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120)


인생의 흐름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훌륭하게 인생을 살면서 내적인 경험과 외적인 표현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 수 있다. (120)


우리는 너무도 습관에 젖어 살고 있다

우리의 사고 과정과 행동에 더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E. F. 슈마허는 <어리둥절한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라는 책에서 이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했다. “자아를 좀더 알고자 하는 사람을 보고 ‘사회에 등을 돌린다’며 비난하는 것은 커다란 실수이다. 아마도 이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즉 자아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사회에 위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대부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25)


자신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식’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 된다. 이 말은 또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좀더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존재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126)


우리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관찰한다면, 거짓된 자아 이미지와 사회적인 허울, 심리적인 장벽 같은 것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좀더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27)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래 된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자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물고기는 드물다.”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의 의미는 자신을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관찰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그런 관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데 있다. (127)


자아를 의식할수록 우리는 더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을 마음속에 배어 있는 의식과 자기성찰 의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우선, 마음속에 배어 있는 의식은 흔히 정상적인 의식, 또는 깨어 있을 때의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우리 마음속의 환상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매 순간 자신을 관찰하는 데는 거의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129)


마음속에 배어 있는 의식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가 바로 자기성찰 의식이다. 마음속에 배어 있는 가장 큰 특징이(습관적인 행동에 의존하는) 자아 상실이라면, 자기성찰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의도적이고, 신중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자아 관찰이다. (130)


자기성찰 의식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이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변화하며 살아움직이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끊임없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성찰 의식에 마음을 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작은 일에 정확하고 섬세하게 주의를 집중하면서 동시에 삶의 전반을 파노라마처럼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균형 있게 발전시켜가는 모습이다. (130)


스스로 습관적인 행동을 얼마나 인식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런 행동에서 풀려날 수 있다.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유의지에 따라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130)


자기성찰 의식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의식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길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문이다.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의식의 개발은 시작된다. 거대한 나무라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듯이, 자기성찰 의식이라는 씨앗ㅇ는 의식에 개발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숨겨져 있다. (131)


인내심을 갖고 끈기 있게 자신의 행동에 순간순간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자아’에 대한 경험이 서서히 놀라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각이 점점 정확해짐에 따라 ‘내부의 자아’와 ‘바깥 세상’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져가기 시작한다. 내적인 자아와 바깥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하나로 합해져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경험의 강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자기 성찰 의식을 넘어선 다음 단계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하나로 통합된 흐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131)


의식적인 삶만이 새로운 문명을 가능케 한다

의식적으로 산다는 것은 개인적인 인생은 물론, 힘든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문명 전체와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의식을 갖고 사는 법을 점점 몸에 익힘에 따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구축한 현실(습관적인 생각과 행동)의 토대를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축한 현실(한 문화권 전체를 특징짓는 습관적인 생각과 행동)도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134)


좀더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은 또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 주고, 훨씬 더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135)


자기성찰 의식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사회를 향한 인류의 진화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136)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미래를 구축하려면 지금 우리의 의식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해야 한다. (137)


우리의 잠재력은 아직 완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보면 ‘본성’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의 내재적인 특징 또는 기본적인 성격. 정수”라고 풀이돼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내재적인 특징이나 정수가 변하는 일은 없는 걸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자. 씨앗이 나무로 자랄 때 씨앗의 내재적인 특징이 변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무가 될 잠재적 능력은 언제나 씨앗 안에 들어 있었다. 씨앗이 나무로 자라는 것은 그 본성 안에 언제나 내재돼 있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씨앗이 나무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듯이, 인간의 본성도 정적인 ‘물건’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잠재력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기본적인 인간 본성의 변화 없이도 원시인에서부터 현대의 문명인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138)


그러나 나무가 내적인 잠재력을 실현하는 방법과 인간이 내적인 잠재력을 실현하는 방법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씨앗이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비옥한 토양이 필요하다. 그런 땅에 떨어지면 씨앗은 자동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없다.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배어 있는 의식의 단계에서 자기성찰 의식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138, 139)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화는 씨앗이 자라는 땅에 해당한다. 그러나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각 개인의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잠재력을 지닌 존재이다. (139)


소박한 삶은 우리의 잠재력을 개발할 기회를 준다

소박함, 공평함, 측은지심을 통해 우리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140)


6. 소박하기에 더욱 풍요로운 삶

소박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144)


소박함이란 겉치레를 버리고 삶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소박함’은 직접적이고 명확함. 겉치레나 거짓이 없음. 허영, 허식, 필요 없는 과시가 없음. 부차적인 복잡한 문제가 없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소박한 삶을 살면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삶과 직접 접촉하고 있을 때는 필요한 것이 많이 줄어든다. (146)


동양의 고대 격언에 따르면, 소박함은 거장의 풍모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점점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가다 보면, 우리가 삶의 거장이 되었다는 증거로 소박한 삶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박함은 우리 삶의 진정한 특징이 겉으로 드러나게 해준다. (147)


소박함이란 꼭 필요한 것만을 소비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지나치게 풍요롭거나 지나치게 궁핍하지 않을 때 균형이 잡힌다.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깨달아야 한다.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성장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는 것’은 그 이외의 것, 즉 심리적으로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148)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똑바로 인식한 후에야 우리는 지나치게 남아도는 것들을 잘라내고 극도의 풍요와 극도의 가난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이 길을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149)


삶이 더 명확하고 더 직접적이 되고, 겉치레와 복잡한 문제가 줄어들면 자신의 삶이 균형잡힌 소박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가난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정신적으로 산만해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을 수 있다. 지나치게 풍요롭거나 지나치게 궁핍한 것은 모두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149)


아무런 희망도 없이 행복을 주는 물건을 찾기보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소비’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이다. (151)


물질적인 부를 위한 경주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피상적인 물질로 치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면, 스스로 큰 변화를 느낄 수 있다. (151)


우리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우리 모두가 유행하는 옷이나 화장품으로 치장한 모습보다 훨씬 더 흥미 있고 매력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위엄,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급진적인 소박함이다.


반면, 의식적인 소박함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자발적인 소박함은 ‘금욕적인 소박함’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소비 패턴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에 우아하게 잘 들어맞는지를 고려하는 ‘미학적인 소박함’이다. (151)


사람들이 삶의 물질적인 측면만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더 가볍고 미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이전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게 할 뿐이다. (152)


소박함은 더 직접적이고 정직한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다

의사소통 능력은 인간의 삶과 문명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첫째, 소박한 의사소통이란 정직한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내적인 경험을 겉으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일관성과 진실성은 신뢰를 낳는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의견이 다를 때에도 협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다. 그리고 협동은 다시 상부상조하는 삶의 기초가 된다.


둘째, 소박한 의사소통이란 쓸데없는 말과 흥미 위주의 뒷소문을 입에 올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꼭 말해야 하는 것들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다보면, 우리의 말에서 점점 위엄과 무게가 느껴지게 될 것이다.


셋째, 침묵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소박한 의사소통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도의 현자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침묵이 ‘중단 없는 웅변’이라고 했다. 침묵이 지닌 힘과 의사 전달 능력을 인정하면,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더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일단 의사소통에서 침묵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정하고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우리 자신을 더 완전하고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침묵이 지닌 소박성을 통해 위엄과 깊이, 솔직함이 자라나는 것이다.


넷째, 소박함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더 자주 눈을 마주치는 데서도 드러난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바라볼 때는 상대방을 포용하는 듯한 ‘부드러운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드러운 눈’으로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 대개는 상대방도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공감대의 원천은 함께 마주치는 눈동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우리의 내적인 중심 안에 있다. 바로 그 중심 속에서 상대방의 ‘부드러운 눈’을 의식하고 그에 어울리는 반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이 아주 깊숙한 곳에서는 모두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도 바로 춤추듯이 반짝이는 이 마음의 눈이다.


다섯째, 소박한 의사소통은 성적인 의도와 상관없는 육체적 접촉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속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 솔직한 포옹과 접촉은 다른 사람들과 더 완전하고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155, 156)


소박함은 직장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든다

소박함을 통해 일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간다. 일을 통해 우리 자신과 인류에 진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때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몰라보게 바뀐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의 솜씨를 단련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에 기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일의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의 즐거움도 없다.” 마치 ‘사냥을 하듯’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일을 한다면 우리는 일과 삶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거기에 반응함으로써, 우리의 일은 자연스럽게 초점을 맞출 곳을 찾게 되고, 우리는 삶 속에서 깨끗함과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157)


소박한 삶이란 모든 생명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소박한 삶이란 모든 생명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균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려 하지 않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열어보이는 것이다. (159)


소박한 삶은 본질적으로 ‘생명에 봉사하는’ 삶이다. 그러나 생명에 봉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도 봉사를 한다. 우리는 모두 생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삶을 실천함으로써, 경박하게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다른 생명체에 도움이 되도록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159)


삶의 정신적인 측면과 물질적인 측면을 동시에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서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상승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경험이 점점 우리 행동 속으로 스며든다. 삶을 느끼고 생명에 봉사하는 행동이 일관된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 모든 잠재력, 모든 경험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면 새로운 삶의 길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161)


 

3. 내가 저자라면


‘화이불치 검이불누(華而不侈 儉而不陋)’

<삼국사기>에 나오는 글귀로 온조왕이 지은 궁궐을 설명한 문구라고 하는데, 그대로 풀이하면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것’. 집꾸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문장이다.


나의 식대로 해석하면 내가 사는 집을 풍요로운 삶, 행복한 꿈을 꾸는 공간으로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을 담아 꾸민다면 설사 화려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은 사치가 아닐 것이고, 이런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것을 절제하고 아껴 집을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가꾼다면 설사 채워지지 않았다 해도 좀 낡았다 해도 그 역시 누추함은 아닐 것이다.


의식적인 소박함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자발적인 소박함은 ‘금욕적인 소박함’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소비 패턴이 이 지구상에서의 삶에 우아하게 잘 들어맞는지를 고려하는 ‘미학적인 소박함’이다. (P151)


소박한 삶이란 모든 생명체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균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려 하지 않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열어 보이는 것이다. (P159)


내가 생각하는 의식 있는 소박한 집꾸밈은 즐겁게, 의미있게, 유행을 초월하는 집주인의 개성과 취향을 살려 손때 묻히고 발품 팔아 편안하게 꾸민 공간이다. 그저 많은 물건, 비싼 물건으로 치장한 집이 아니라, 무조건 적게 사고, 적게 쓰고, 적게 소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 온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와 손길 하나하나, 애착이 느껴지는 따듯하고 소박한 공간이다.


또 하나,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규칙, 소박한 집꾸밈도 미학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움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언뜻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지구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얼마든지 근사한 생활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친환경 제품을 쓰는 것만이 자연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소비로 그 결정을 번복하느니, 또 다시 시간과 돈을 들여야하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미리 계획하는 의식있는 소비생활로 낭비를 줄여나가는 것도 우리가 가장 손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고심하여 고른 좋은 의자 하나, 기다림과 인내로 얻은 좋은 그림 하나, 발품 팔아 건진 좋은 그릇 하나, 귀한 솜씨가 느껴지는 좋은 이불 하나, 집에 관한 이 모든 것들이 그 집에 사는 사람과 교감을 나누며 쌓아온 시간만큼 정교해지고 다듬어지면서 이런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소박한 삶을 경험하기를 희망한다. 


럭셔리는 눈에 보이지 않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럭셔리는 단순함이다. 럭셔리는 필요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럭셔리는 생계를 꾸려가는 능력이며, 타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절하는 자유다.

- 코코 샤넬 -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똑바로 인식한 후에야 우리는 지나치게 남아도는 것들을 잘라내고 극도의 풍요와 극도의 가난 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이 길을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P149)


나는 코코가 말한 럭셔리에 대한 이 정의가 좋다. 럭셔리와 소박함, 반대되는 단어 같지만 샤넬이 말한 럭셔리에 대한 정의와 이 책에서 말하는 소박함의 정의에는 닮음이 존재한다.


자신을 지켜내는 주축이 흔들리지는 않는지 제대로 점검하며 중심을 잡고 사는 삶은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얽매여 사는 고정된 삶은 싫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삶에 깊이가 쌓이게 되면 덜어내고 버리면서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여백은 남겨두고 싶다.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나 스스로가 만든 틀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의식적으로 소박함을 유지하는 삶에는 인간의 정신을 북돋워주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있다. 목적이 있는 소박함은 개인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창조적인 참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기회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P16)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드는 생각은 느린 걸음으로 한걸음한걸음씩 내딛으며 성실하게 쌓아가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다. 욕심 내지 말고 소박한 마음가짐과 실천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게 되고, 무엇보다 지금 하는 나의 일에, 배움에 성실히 참여하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생각이다. 


자발적으로 소박한 삶을 택하는 과정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는 것 같다. 몇 개월 또는 몇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초기 단계에선 새로운 삶을 시험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새로운 삶의 양식 사이를 오간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들의 생활에 자그마한 변화들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들의 인식과 행동에도 아주 조금이지만 다른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자그마한 변화들이 모여서 마침내 산업사회적인 삶의 방식에 안녕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우면 그 변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 만큼 깊은 애착을 지니게 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P61)


예전의 나는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한시 두시에 자는 것은 기본이고 세네시까지 일하다가 자기 일쑤였다. 지난 1년 새로운 패턴에 맞추어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새벽의 시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 이 시간을 내 몸에 고정된 패턴으로 만들고자 새벽마다 나와 씨름하고 있다. 1시간이 지나면 어깨가 저려오고, 2시간이 지나면 눈꺼풀은 묵직해진다. 1시간 정도 다시 잠을 청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잠자고 있는 세상에서 내가 깨어있다는 것이 좀 뿌듯하다. 어떤 때는 책을 집중해서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집중이 안 될 때는 인터넷을 잠시 떠돌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멍하니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깊은 믿음이라면 매일매일의 습관이 새로운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실행이 결코 쉽지 않은 나의 자발적인 습관이 변화를 경험하며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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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향
2010.04.01 07:13:34 *.67.223.107
그래그래,
새벽형 인간.....> 새나라의 어른이
난 제발 내 손가락을 어찌 소박하게 간직할 지.... 자꾸 이 홈피 돌아다니며...꼼지락거려서....몬살겠다.  헤헤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를 쓸때 이 문장들 인용해야겠다. 괘얀치?

소박한 삶이란 삶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쓸데없는 곳에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고 명료한 자세로 삶과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서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의미한다. (13)

의식적으로 소박함을 유지하는 삶에는 인간의 정신을 북돋워주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있다. 목적이 있는 소박함은 개인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창조적인 참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기회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16)


혜향의 빛나는 노력에도 기립박수 짝짝짝!  향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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