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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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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3일 01시 06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삶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이다”

  

  죠셉 캠벨의 유명한 말이다.


  캠벨은 유럽 유학에서 돌아와 미국의 대학에 복귀했을 때, 철학과 미술을 탐색하려는 자신의 관심사와 대학의 요구가 부딪치자 과감히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대학을 떠나 우드스턱 숲으로 들어간다. 캠벨에게 있어서 박사학위는 삶의 목적이 아니었고 박사학위를 획득함으로서 따라올 명예, 부, 안정 등 많은 것들도 물론 목적이 아니었다. 

  캠벨은 이미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이란 들떠서 행복한 상태나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가 아니고 그윽한 행복, 즉 진짜 행복한 상태라고 한다. 일순간의 세상의 기쁨과 흥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과 공명하는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란 것을 알았고, 자신이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그 순간을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남이 뭐라고 하건 그 순간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즉 ‘자신의 천복을 충실히 따르기’로 한 것이다.

  우드스턱 숲에서의 5년의 시간을 보내고 서른 살에 새러 로렌스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주변에서 그를 가방 끈만 긴 날건달이라고 여겼을지라도 그는 충분히 행복했다.


  자신의 천복을 쫓는 캠벨의 여행은 그가 여든 세 살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첫 책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세계 각지의 신화를 분석하고 신화와 종교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던 캠벨이 죽기 직전 제작되어 결국 사후에 방영된 프로그램인 <신화의 힘>에서 신화와 종교 속의 인간을, 그리고 평온한 논조로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을 읽어가다 보면, 캠벨 자신이 충분히 삶을 경험하고 여행 그 자체를 즐겼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라는 문구에서 나의 느낌은 확실해졌다.


  지금 자신의 삶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란 것은 얼마나 행복한 단언인가! 


  결국 캠벨은 자신의 책과 말로만 ‘천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천복’을 따르는 삶과 그에 따른 평온한 행복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캠벨의 저서가 ‘신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계속해서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 빌 모이어스의 서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는 세계의 신화가 지닌 주제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분석하면서 신화와 종교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던 그가, 이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에 펴내는 이 <신화의 힘>에서는 바로 그 신화와 종교에서, 궁극적인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모습을 읽어내고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휩쓸리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도 그의 눈길과 용기와 깨달음을 길잡이 삼아 거기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는지요 [7]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11]


영웅의 역정에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11]


고명한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2]


로마의 속담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14]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군요... 아니지, 그게 아니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15]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는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18]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타락하게 하기는커녕 이 온 우주가 ‘우리의 내적 자연이 확대, 투사된 것’임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고대와 만나게 했다’. [19]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21]


1. 신화와 현대 세계


캠 : “우리는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됩니다. 삶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그저 우리 몫의 삶을 살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지요.”


모 :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 [26]


모 : 신화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세월에 거쳐 해온 진리에 대한 모색, 의미에 대한 모색, 의미 있음에 대한 모색을 뼈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29]


캠 :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29]


캠 :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29]


모 :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캠 : ‘삶의 경험’...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너무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내적 가치임을, 즉 살아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30]


캠 :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31-33]


캠 :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34]

  

캠 : 전문화에는 전문가가 관심을 두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38]


캠 :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39]


캠 :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


모 :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 :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47]


캠 :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48]


캠 :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54-55]


캠 : 내가 아는 한,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지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인식에 이를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만유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형재애로써 이 만유에 반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61]


캠 :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61]


캠 : 신화학에는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하는 이 천연의 세계를 나타내는 신화가 있고, 특수한 사회에 속하는 극히 사회적인 신화가 있는 것이지요...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 체계는 떠돌아다니는, 따라서 중심을 무리 중에서 찾는 유목 민족의 체계입니다. 대신 자연지향적인 신화학은 경작 민족의 것인 경우가 보통이지요....

자연지향적인 종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대신 사람을 도와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합니다. [62]


캠 :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63-64]


모 : 이성인 과학의 역할과, 결국은 믿음의 역할을 어떻게 화해시키시겠습니까?

캠 :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73]


캠 :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의 기능

1. 우주, 인간의 신비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2. 우주론적 차원을 염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3. 사회적 기능 - 도덕률

4. 교육적 기능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74-76]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76]


캠 :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77] 


2. 내면으로의 여행


모 : 신화는 왜, 제가 호자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제가 진실일 것이라고 믿던 것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까? 제가 혼자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이 저라는 존재의 바탕, 제 앞을 살던 모든 존재에게서 물려받은 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어서 그렇습니까? [83]


캠 :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87]


캠 :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 : 개인의 사적인 꿈이 공적인 신화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라면 좀더 건강하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89]


캠 :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89-90]


캠 :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생명은 생명을 먹습니다. 이런 것을 의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먹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

마음과 인식을 화해시키는 것,

인간의 마음과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91-92]


모 : 아담과 이브의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대극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캠 : 사과를 먹음으로써 둘은 대극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동일성만 인식하는 의식에서 이원성에 참여하는 의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100-101]


캠 :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 너머에 존재하지요....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102]


최상의 것은 생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

차상은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생각이 가리키는 것

세 번째로 좋은 것이 바로 우리가 언표하고 있는 것들 [103]


캠 :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106]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 [107]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 [109]


이 세계라는 대교향악단과 조화를 이루려면 우리 개인의 하모니를 이 큰 하모니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113]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114]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 [115]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117]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120]


산스크리트어로는 ‘마르가’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122]


‘초월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과 관련된 기술적, 철학적 술어입니다...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초월자는 사유의 모든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126]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133]


세속성이 개입되어 있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지요. 우리가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134]


우리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일 중 하나는, 속으로는 구역질이 나는 타인, 혹은 타인의 행동, 혹은 타인의 조건에 대해서도 ‘옳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136]


우리는, 우리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삶의 기적 앞에서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137-138]


뉘우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의 세상이 곧 영원이라는 확신 [138]


3. 태초의 이야기꾼들


인간의 발달 단계...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142]


3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156]


고대 의례가 지닌 중요한 역할은 개인을 부족의 한 구성원으로, 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 한 모듬살이의 구성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서구 문명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분리시켜왔습니다. [165]


4. 희생과 천복


사는 곳을 성화시키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177]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179]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잇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179]


자연 위에서, 자연에 군림하는 것으로서의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관념은 정말 몹쓸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법률이 백성들에게, 관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참 삶을,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결코 하지 못하는 채 살아야 했던 중세는 바로 황무지나 다름없어요. [188]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하ㅗ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189]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순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190]


사냥꾼의 신화는 외계적입니다... 권능과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숲으로 들어가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면 동물이 나타나 권능과 지식을 얻는 방업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농경문화에서는 식물의 세계 자체가 스승 노릇을 합니다. [194]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난 겁니다. [204]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211]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전쟁은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215]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마음으로 열린 순간, 즉 ‘열정(passion)’이 ‘연민(compassion)'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218]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 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218]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 이런 사람은 자기의 천복을 쫓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21]


천복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222]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223]  

부모가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223-224]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으면 그 길로 나가게. [225]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225]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깊이와 경험과, ‘사트, 취트, 아난다’와 관련된 존재의 확신과, 의식과 천복을 통한 나름의 존재 방식이 있어요. [226]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227]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천복을 쫓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27]


자기 천복을 쫓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227]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229]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229]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의존적인 상태로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만, 대신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230]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33]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239]


이런 위험한 길을 갈 때는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44]


이 세상의 기원 신화를 접어두고, 인간의 내면 탐색에 관한 신화로 되돌아가,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어떤 시련을 경험하게 되는지, 어른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읽어보세요. [255]


경제적인 유혹, 정치적인 유혹, 영성의 과시... [255-256]


탐욕-욕망, 성취, 후회, 공포-죽음, 무리의 의견에 대한 복종-사회적 의무 [256]


전통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웅도 있어요. 이런 영웅은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시대에 뒤떨어진 상투성에서부터 전통의 상징성을 해방시켜 당대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지요. [259]

 

 * 자아는 우리가 중심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한 측면, 하지만 자아가 우리의 중심은 아니다. 자아를 나타내는 사각형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타내는 점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바로 주도권을 행사한다. [260-261]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늘,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 [262]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263]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 [265]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꺽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270]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0]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포스’를 찾아야 합니다...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271-272]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272]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바로 그겁니다. 만일에,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272]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273]


용은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273]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273]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의 발현이 되는 겁니다. [277]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낙타의 삶-어린아이, 소년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 -> 낙타가 무릎을 끓고 짐을 실음

* 광야에서 사자로 변모 - 청년, 자기 발견의 시대

등짐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을 강해진다.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

[283-384]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286]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쫓으면 되는’ 겁니다. [286-289]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296]


부처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조화롭고, 중심이 온전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깨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겁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296]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두 방법이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301-302]


6. 조화여신의 은혜


인도의 관념 체계 - 관심과 의식과 행동의 심리적 차원 상징

1. 직장 - 기본적인 생명 유지 기능은 보양, 뱀

2. 성기 - 생식의 충동

3. 배꼽 높이 - 의지력의 중심, 자기 통제와 자기 성취 vs 정복, 파괴

  1~3 : 골반과 가까움

4. 가슴 가까이 - 자비로운 마음, 인간성, 종교적 명상, 영적인 탄생, ‘차크라’ [318-320]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22]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음유시인들이 알기로 아모르는 개인적이었어요. 에로스적 사랑과 아가페적 사랑은 ‘비개인적’인 사랑이었고요. [341]


에로스적 사랑 - 생물학적 충동, 몸으로 느끼는 사랑

아가페적 사랑 - 영적인 사랑, 자비

아모르적 사랑 -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


사랑을 경험하겠다는 용기가 전통에 반하는, 다시 말해서 교회 전통에 반하는 자기만의 경험에 뛰어들게 했겠군요.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 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남들에게서 이어받은 체험이 아닌 자기만의 체험, 그 체험에서 우러난 신념을 중요시할 수밖에요. [343]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345]


자기 손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하는 서구식 개인주의는 이런 낭만적인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느낌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랑이 그렇다.

그게 바로 개인주의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 [350]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 가지 미덕 - 절제, 용기, 사랑, 충성, 예의바름

  -> 어떤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다섯 기능 중 하나의 기능이 전체적인 질서를 섬기지 못하고 한 사회를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351]


음유시인들의 가슴속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권력에의 의지예요. 그들의 가슴에 있었던 의지는 개인적인 경험에의 의지와 이 경험을 통한 자기 존재의 승화에의 의지예요. [354-355]


황무지 사람들은 죽은 삶을 살기 때문에, “나는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다.” 이런 말을 합니다. [357]


생의 역동성과 생의 정신성의 이분법 [358]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자연의 충동이지 초자연적인 권위에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358]


성배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사는 삶, 자기 충동의 체계로 사는 참 삶을 상징합니다. [359]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359]


융 박사,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360]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며,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모듬살이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듬살이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듬살이가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의 삶의 모양을 빚어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360-361]


만약 결혼을 하고도 그 결혼을 가장 큰 관심사로 치지 않는 사람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지요. [365]


결혼은 우리의 동일성, 즉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366]


부모가 조금 줄여서 베풀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사랑이고요.

“주여, 언제 보내야 할지 보낼 때를 일러주소서” [373]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73]


8. 영원의 가면


<우파니샤드>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375]


마음을 플라톤의 이른바 ‘불멸하는 생각, 신적인 생각’에 집중시키는 것 -> 명상

명상이란 특정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378]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아병적 생각에 집착해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큰 체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보다 큰 체험이 접근해오는 순간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에 매달림으로써 거기에서 도망쳐버리려고 합니다. [379]


우리의 영혼은 서로 다른 중심, 혹은 서로 다른 원형적인 경험의 단계를 지나 상승합니다. 처음에는 기아와 탐욕 같은 기본적인 동물적 경험단계에서 시작하여 성욕의 단계를 지나 물질적인 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이행합니다. 이런 단계가 바로 경험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부여하는 단계인 겁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나’와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 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입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 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80]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381-382]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성적인 기관의 수준을 살고 있다, 그 사람 삶의 목적이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는 삶의 의미랍니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철학 아니겠어요? 다음에 대두되는 것이 권력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애들러의 철학입니다. 애들러에 따르면 인생은 장애물과 싸우는 것, 이로써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도 완벽한 인생일 수 있어요. 그러나 이건 동물의 수준이에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이 있어요. 가슴의 열림으로 상징되고 있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인 겁니다...

남의 삶에서 ‘나’의 삶을 인식하는 것, ‘나’와 남은 둘이지만 살고 있는 삶은 하나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겠지요. [387]


우리는 시간을 원의 상징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감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에게는 디지털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간은 째깍거리면서 그저 그렇게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 디지털 시간을 벗어나야 우리는 진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389]


‘만달라’라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가 곧 ‘원’입니다. 만달라의 원은 그냥 원이 아니고 다른 원과 상호관계하거나 상징적인 문양을 이룸으로써 하나의 우주 질서를 상징합니다. [392]


중심을 찾아 자기 마음을 거기에다 두자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을 우주의 중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군요. [392]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하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할 수 있는 겁니다. [393-394]


엘리엇은 변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고요한 중심에서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 고요한 중심은,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흐르지 않음이 공존하는 바퀴의 굴대에 해당하겠지요? [394]


(괴테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기와 변화하기를 통하여 신에게 이르는데 필요한 것이고, 지성은 존재가 확정된 것, 변화가 끝난 것, 말하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삶의 모습을 다듬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394]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앎에의 갈망을 체험하고, 인류의 언어를 초월해 있는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신앙을 돈독하게 할망정 신앙에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군요. [396]


심리학자 마슬로프 ‘절정 경험’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398]


제임스 조이스 ‘에피파니 (단순 평이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한 직관적인 진실의 드러남)’

그런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느낌을 일게 할 경우, 조이스는 그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포르노그라피라고 부르지요...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비평하고 싶게 하고 거부하고 싶게 하는 예술 작품을, 그는 도학적인 작품, 혹은 예술 자체가 지닌 사회 비평 기능이라고 부르지요.

미학적 체험은 그저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조이스의 말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액자에 넣어 두게 하고,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게 하고, 다음에는 그것이 작품임을 느끼게 하고, 다음에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 다음에는 부분과 전체, 그 다음에는 전체와 각 부분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작품이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미학적 요인(관계의 조화 정연한 리듬)입니다. [399]


예수는, “너 자신에게 묶여 있는 자아를 잘라 자유롭게 하려고 칼을 가지고 왔다.”

머리 위로 불칼을 높이 치켜든 부처 이미지, 분별의 칼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것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분별하게 하는 칼입니다. [403-404]


영원은 지금 여기에 있지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경험하지 못하면 천국에 가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404]


삶의 모든 문제는 ‘존재하기’와 ‘되기’를 맴돈다

‘되기’라는 것은 단편적입니다만 ‘존재하기’는 전체적인 겁니다. [409-410]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씬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의 효과를 지닙니다.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411]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체헌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412-413]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413-414]


이 세상 도처에 있는 언어의 신비를 드러내는 소리 ‘옴 (AUM)' [414]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필멸하는 측면과 영생하는 측면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5]


* 내가 저자라면


  죠셉 캠벨의 책, <신화와 인생>을 처음 읽던 지난 2월, 난 머리가 아프고 복잡했다.

  ‘그동안 신화를 모르고도 별 탈 없이 살았는데 이제 와서 이해도 안 되는 이 책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하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아니, 혹시 내가 찾아 헤매던 실마리를 이곳에서 찾을지도 몰라’하는 희망까지, 낯선 ‘신화’의 세계에서 한참을 헤매며 책을 읽는 내내 쉽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신화’의 단편적 이야기와 몇몇 나라의 기원신화 정도를 알고 있었고 그것들이 먼 과거의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며, 또한 미지의 영역에 있던 많은 것들이 과학의 힘을 통해 밝혀지는 현재에 신화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해보았던 나에게 ‘신화’란 너무나도 생소한 주제였다. <신화와 인생>을 읽으며 처음 들어보는 단어와 인용구들에 허덕이며, 생전 처음 나의 이해력을 의심해 보기도 했다. 


  간신히 첫 과제를 마쳤으나, 책을 반도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했다. 그 후 3권의 책을 더 읽고, 특히 카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읽고, 다시 잡은 죠셉 캠벨의 이 책 <신화의 힘>을 읽으며, 한 달 만에 캠벨의 이야기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깜짝 놀랐다.   

  

  물론 ‘신화’라는 주제에 좀 더 익숙해지기도 한 이유도 일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이 책의 구성과 흐름의 힘이다.

  죠셉 캠벨의 생애 막바지에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을 엮은  이 책은 기본적으로 대화체의 문장이다. 책 한 권을 대화체로 끌고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죠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는 끝까지 주제를 장악하고 밀도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상, 신화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부터 차근차근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어서 일반적인 교양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궁금한 점을 해소해 가며 읽어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도 이 책이 신화 입문서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이유가 된다.

  첫 번째 장인 ‘신화와 현대 세계’에서 현대의 신화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에서 시작하여 내면의 탐색, 통과의례의 의미, ‘천복’, 그리고 영웅, 또 사랑과 결혼 등 현대인의 관심사와 결코 유리되지 않는 신화의 이야기를 정말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지막 장까지 점차 확장되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시청자 또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인생에서 신화의 힘을 되새겨보게 된다.


  각 장의 첫 문장은 예외없이 모이어스의 도발적인 또는 사례가 있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 또한 독자가 책의 내용으로 빠져들게 하는 특별한 장치였다. 제 1장 ‘신화와 현대 세계’의 첫 문장,

  “왜 하필이면 신화입니까? 우리는 왜 신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도대체 신화가 우리 삶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문장을 읽은 독자는 이 책에 빠져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라.  


  또한 죠셉 캠벨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빌 모이어스의 서문’은 장장 14페이지에 걸쳐, 캠벨과 그 사상에 대해 예를 들어가며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서문  만으로도 독자는 캠벨에 대한 호기심과 약간의 지식을 가진 채 본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대담집이라는 특성상 좁은 의미에서 주제가 일관적이지 않고 흐르는 부분도 있다. 

  ‘모듬살이의 요구에 어느 선까지 동의할 것인가, 만일 세상이 모두 개인적인 천복을 좇는다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모이어스의 질문에 대한 캠벨의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는 곧 와해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공감이 갔으나 그렇지 않은 사회에 대한 언급이 없이 기독교와 루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360-361p)

  개인의 천복을 좇는 것과 사회의 요구와의 조화에 대한 캠벨의 의견이 궁금했다. 이 문제는 각자 개인의 판단일 수밖에 없는지, 아님 신화에서 다른 실마리를 주는지 좀 더 확인하고 싶었다. (가장 비슷한 대답이 ‘자비’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순 없다)
  4월 말에 <신화의 힘>을 다시 읽으면 꼭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봐야겠다.


  ‘천복을 쫓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체헌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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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4.03 02:02:29 *.129.207.200
1등이시네요. 전 여전히 이해가 안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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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22:38:08 *.106.7.10

ㅍㅎㅎ, 전에 읽은 <신화와 인생>에 비해서 좀 더 이해가 되었다는 소리 ^^
또 지금 딱 내 생각의 크기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책이겠지.
그만큼 받아들여졌다는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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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4.05 18:38:47 *.30.254.28
지금, 자신의 삶이 내가 살아야 할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천복이라는 단어가 참 좋구나...그대의 편안한 목소리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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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선
2010.04.05 22:48:44 *.106.7.10
노래를 잘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럼 오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텐데 ^^
노래를 못하는 선은 조용히 시 한 구절 읆을 뿐 ㅎㅎ

...
살아서는 다 쓰지 못한 나의 시 한 편
나 그때서야 한 그루 나무의 꽃으로 세상에 전하겠네

- 박남준, [삼월 눈 속에서 차를 마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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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4.06 10:43:17 *.236.3.241
물들여진다는 것은 중첩되고 모호해지고 흡수되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봄이 오는 자리에, 시작하는 자리에 '조화 선'이 있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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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연주
2010.04.08 00:28:30 *.68.10.114
"캠벨은 이미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캠벨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같아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임을 일찍부터 깨달을 수 있는 행운을 지금 우리도 누릴 수 있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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