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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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캠벨
1. ‘저자에 대하여’
“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
캠벨아저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천복을 좇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아들이 인디언에 매료되어 아메리카 인디언에 관한 책들을 즐겨읽고 관련된 물건들을 수집하고 자연사 박물관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억압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몰두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말이다.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와 거침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그가 인생을 살아가며 낙천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을 읽는 내내 캠벨 아저씨가 부러웠다. 그가 만나게 되고 친분을 갖게 된 사람들을 보면 크리수나무르티, 칼 융, 하인리히 침머 등 다들 캠벨 아저씨 못지않은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이며 저명인사들인데,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어 캠벨 아저씨가 만나야할 사람들을 적절한 시기에 만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보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아저씨가 말씀하신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천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자신의 천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하지만 자신의 천복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찾은 자신의 천복에 어떻게 나의 전부를 걸고 헌신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큰 과제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천복을 만났으나 현실이라는 벽이 부딪혀 그것을 그냥 흘려보내거나 곁에 모셔만 두고 쉽사리 꺼내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캠벨 아저씨를 보면 용기있는 자만이 자신의 천복을 누릴 행운을 얻는다는 것을 알겠다.
캠벨 아저씨는 대공항을 만나 어려워진 경제사정으로 준비하고 있던 박사논문을 접고 동생 앨리스와 숲속에 있는 1년에 20달러짜리 오두막에 세 들어 살게 된다. 유학생활을 하고 촉망받던 인재가 극빈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면 자신의 처지를 운이 없다고 비관하기 쉬울 터인데, 캠벨아저씨는 그 시련을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원없이 읽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우드스탁의 생활을 마치고 만나게 된 생물학자 에드 키켓과 알래스카 브리티쉬 콜롬비아까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조수간의 동물군을 수집하는데, 이 여행은 신화학과 생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믿음을 재확인시켜준 기회였다.
캠벨 아저씨는 남들은 위기요 시련이라고 부를 상황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내면의 울림에 따라 천복을 따르는 삶을 살아 자기성장의 발판으로 삼게 된다. 실로 캠벨 아저씨는 그때의 독서력 덕분에 그는 신화에 대한 탄탄한 이론이 성립될 수 있었다. 남들은 그냥 시기적절했다며 아저씨의 행운을 부러워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자신의 천복을 좇고자 노력했던 캠벨 아저씨 자신이 만들어낸 행복이다.
캠벨 아저씨는 반려자를 만난 것도 자신의 방식대로 천복을 좇은 결과이다.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시절에 그 대학의 학생이던 진 어드먼과 결혼을 했는데, 12살의 나이차가 났으나 캠벨은 첫눈에 그녀가 교실에서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캠벨의 구애 끝에 진 어드먼과 결혼을 했고 캠벨이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서로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며 해로(偕老)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 희망의 신화학>
p.7 그의 확신과 확신을 통해 이른 평화는 곧 신화가 우리에게 안기는 희망일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의 서문 -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
p.8 ‘참으로 엄연하고 항시적인’ 인간의 고뇌에서 캠벨은 바로 고대 신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읽었다.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p.9 '인간의 모듬살이를 향하여 베푸는 대규모 의례 행위의 전형‘이라고 표현한 장엄한 국장(國葬)은 인간의 소구(訴求)에 그 뿌리를 둔 신화적 주제를 상기시킨다.
p.10 '신화 따위‘의 잔재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내면적 체계의 벽에 줄지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러한 ’따위‘는 아직도 어떤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리고 의례가 바로 이 에너지를 촉발한다.
p.11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웅의 역정에서는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루카스의 영화를 보고 영웅의 역정을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닌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p.12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가,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영웅은 자신을 자신이 경험한 어떤 인격이나 권능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구도(求道)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GP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조셉캠벨은 인생은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해보기는 했다니 놀랍군.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일주일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고 평생 읽으라는 것이네’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
p.14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p.14-15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는 나에게 가름침의 방법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p.15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살아 있음의 ‘경험’을 찾는 것.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天球의 가락’이다. 우리는 그 노래와 가락의 후렴을 듣는다.
p.16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p.17 '너희가 참으로 하찮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대접이 되느니라.‘
p.18 영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인간의 믿음에 관련된 문학에서 인류 공통의 영적인 원리를 찾아낸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賢者)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言表)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미지는 가면일 뿐이다. 이 가면은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 역시 ‘신의 가면’이다.
p.19 캠벨은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환상과 진리의 갈등 너머 존재하는 지혜의 해각(海角)을 믿는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이 지혜가 우리의 삶을 원초의 상태로 되돌린다. 이 지혜의 해각을 찾는 일은 ‘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의 중심과제’이다. 만년(晩年)에 , 그는 과학과 정신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고대 신화가 그 시대에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는 우리 시대를 섬겨 ‘우리 자신과 우주의 기적을 향한, 우리 지각(知覺)의 창을 깨끗이 닦을 수 있게 된 것이다.
p.20 나는 캠벨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데, 그는 이들 이야기의 상호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야기의 단편이 어떻게 서로 일치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른바 ‘강력한 복합 문화적 미래’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닫게 해주었다.
p.21 그는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視覺)을 열어주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가 우리에게 열어준 많은 가르침의 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마치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캠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었을가?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이야기에는 그에 걸맞은 표현의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수천 가지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었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1. 신화와 현대 세계>
p.29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共鳴)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30 신화를 읽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읽어야 하지,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읽는 것이 아니랍니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이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p.31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再會)랍니다. 결혼으로 재회하는 둘은 원래 하나였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둘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혼이 무엇이냐 하면 결혼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연애 같은 것과는 달라요. 연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에요. 결혼은 경험이 지니는 도 하나의 신화적인 차원입니다. 오랫동안 연애하던 사람이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아 갈라서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왜 갈라설까요? 이른 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삶을 온당하게 산 사람이라면, 이성(異性)을 웬만큼만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소유자라면 온당한 남성 혹은 여성 상대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상대의 관능적 관심에 이끌려 결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번지수를 틀리게 찾은 거예요. 상대를 잘못 짚은 거지요.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肉化)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p.31 모이어스: 제대로 된 상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겁니까?
캠벨: 가슴이 말해줍니다. 반드시.
모이어스: 그러니까 내적인 존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캠벨: 수수께끼의 요체가 거기에 있지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자기’를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캠벨: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이거다, 하고 오는 게 있어요. 그러면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이게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p.32 결혼으로 맺은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내는 둘의 관계, 굴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결혼의 관계가 충분히 오래 계속되고, 그러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둘은 실제로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면 자기네의 관계를 상호간의 인간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요.
p.33 결혼은 관계이지요. 우리는 대개 결혼을 통해서 한두 가지씩은 희생을 시킵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관계를 위해서 희생시켜야지. 상대를 위해서 희생시켜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서 도(道)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보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서로 꼬리를 물고 상호작용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음양(陰陽)의 관계, 남성의 원리와 여성의 원리가 지닌 관계를 의미합니다. 결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의 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자기’야말로 신화적 이미지입니다. 초월적인 선(善)의 영역에 들기 위해 희생시키는 사시적인 실재가 바로 그것이지요. 젊은이의 결혼은 어느 대목에 이르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이것이 내가 바로 ‘연금술적 단계’라고 이름붙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에서 부부는 내가 말한 희생의 의미를 서로 아름답게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것 같은 사태가 나지요. 의례가 없는 사회가 어떤지 알고 싶으면 <뉴욕타임스>를 익어보세요.
뉴스를 한번 보시라는 겁니다. 문명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자행하는 파괴적이고 범죄적인 행위도 뉴스로 등장해 있을 겁니다.
p.35 모이어스: <고린도전서>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는 군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정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캠벨: 바로 그겁니다. 사춘기 의례가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지요. 원시 사회에서는 이빨을 쪼아낸다거나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할례(割禮)를 베풀거나 하는 사춘기 의례가 있었어요. 이러한 의례를 거치면 어린이의 몸은 더 이상 어린이의 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아이들이 도시에서 자라나는 경우, 오늘날 이들은 어디에서 신화의 존재를 만날까요?
캠벨: 스스로 만듭니다. 뉴욕이라는 도시가 온통 낙서투성이인 것도 그 때문이지요. 이렇게 낙서하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불량배가 있고 나름의 입문 의례가 있으며 나름의 도덕률이 있어요. 아이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신화를 체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위험합니다. 그 까닭은 이들의 범이 도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나름의 입문 의례를 치르지만, 이들이 입문하는 곳은 우리 사회가 아니지요.
p.37 오늘날 우리는 비신화화(非神話化)한 세계를 살고 있어요.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겁니다.
p.38-39 나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어요. 로마 카톨릭 가정에서 자란 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신화라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신화를 삶에 적용시키고, 신화모티프와 유사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카톨릭 가정의 아이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탄생하고, 무리를 가르치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하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이 순환적인 주기를 계절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랍니다. 말하자면 1년 내내 계속 가변적인 존재의 불변하는 핵(核)같은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다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에게 죄악이라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행위이지요. 그러다가 아메리카 인디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우리 부모님은 너그러운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인디언에 관해 쓰여진 그 시절의 책을 사 볼 수 있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신화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 신화에,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수녀 선생님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모티프가 있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p.41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으로서, 한번 빠져볼 만한 것이 신화이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6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 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헤엄을 쳐야 하는데도 헤엄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는 물이지요. 영적인 삶의 경우 이것은 진실입니다. 의식(意識)의 변모라고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체험인 것이지요.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氣)는 어떤 점에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p.47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 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그 명상의 대부분이 비의도적(非意圖的)인 명상이긴 하지만요.……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합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p.48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現夢)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神話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p.50 영화에는 확실히 마력(魔力)같은 게 있어요.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그 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곳, 그러니까 영화가 나타내고 있는 상황을 체험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지요.
p.54 확실히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한 게 있습니다.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타워즈>에서 보는 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잣ㄴ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p.56 우리 삶의 신비에 이르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p.57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뿐입니다.
p.64 모이어스: 우리에게는 어떤 신화가 필요할는지요?
캠벨: 우리에게는 개인을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라는 이 행성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신화가 필요해요.
p.70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면, 도(道), 즉 초월적인 존재에서 하나가 나오고, 이 하나에서 둘이 나오며, 이 둘에서 셋이 나오고, 이 셋에서 우주 만물이 비롯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p.74 모이어스: …… 인간에 대한 신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일는지요?
캠벨: 앞으로도 우리는 신화를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은 신화를 낳을 사이도 없이 너무 눈부시게 변하고 있어요.
모이어스: 그럼 신화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캠벨: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내가 밤낮 하는 이야깁니다만,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신화의 두 번째 기능은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관심을 두는 영역이 바로 이 차원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신화는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줍니다.
p.75 신화의 세 번째 기능은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중혼(重婚)의 신화도 있곤, 단혼(單婚)의 신화도 잇는 것은 이 기능 대문입니다. 중혼이든 단혼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니까요. 신화의 기능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p.76 신화에는 네 번째 기능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한번 음미해보야야 할 바로 이 기능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어요.
성서에 바탕을 둔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고나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이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p.77 오늘밤에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알 수 없듯이, 내일 어떤 신화가 태동할지도 알 수 없어요.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정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신화가 어떻게 될 것이냐는 질문 앞에 내밀 수 있는 나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런 신화는 다른 모든 신화가 다루었던 문제를 고루 다루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유아기에서 성장기를 거쳐 성인기에 이르고, 성인기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의 모든 문제, 심지어는 이 사회와의 관계, 이 사회가 지니는 자연의 세계와 우주와의 관계까지 고루 다루어진 신화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가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한결같이 반영하는 신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 역시 이 지구라는 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신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p.78 모이어스: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캠벨: 그렇지요. 그것이 바로 미래 신화의 바탕입니다. 그 바탕은 벌써부터 여기에 있어요. 내 나라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종교 사회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 내가 속하는 언어 집단의 아닌 이성의 눈……. 아시겠지요? 이렇게 태동한 신화는 이 집단, 저 집단의 철학이 아닌 이 땅의 철학이 될 것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보면 국경같은 게 안 보이잖아요? 이것은 미래 신화를 위한 대단히 중요한 상징 같습니다.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이러한 나라이고, 우리가 한 겨레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인 것이지요.
p.81 시애틀추장의 이야기....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남는 삶의 시작이랍니다.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내면으로의 여행>
p.86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온다는 겁니다.
나는 신화와 같이 삽니다. 신화는 나에게 늘 그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천국과 지옥이 다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도 우리 안에 있지요.…… 모든 신들, 모든 천국, 모든 세계가 다 우리 안에 있어요. 이런 개념이야말로 확장된 인류의 꿈이고, 꿈은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속의 에너지가 이미지 형태로 현현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몸의 서로 갈등하는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한 것이지요. 우리 몸의 각 기고나이 갈등한다고 한 까닭은, 이 기관은 이것을 원하고 저 기관은 저것을 원하는 식으로 바람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두뇌도 이러한 기관의 하나입니다.
p.87 만물의 바탕자리는 바로 우리 존재의 바탕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세상 여기저기에 널린 온갖 잡사를 다 보고는 하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꿈은 우리 자신에 대한 영적인 정보가 무진장하게 발현되는 현장입니다.
p.88 모이어스: 꿈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캠벨: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 꿈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캠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우리 삶에서 의미심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른 꿈을 꾸면 우리의 해석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지요.
p.89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p,89-90 범용한 사람도 자기의 길을 찾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기는 하나 기왕에 해석된 길을 반드시 벗어날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
p.96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서 살아지는 겁니다. 이 상징적이고 역설적이 이미지들이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비입니다.
p.102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많은가, 적은가.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 하는 개념의 용어속에 갇혀 있어요. 우리는 항상 대극(大極)이라는 용어 안에서 생각해요. 그러나 궁극적 실재인 하느님은 대극의 너머에 존재하지요.
p.102 모이어스: 남성 대 여성, 삶 대 죽음, 선 대 악…….
캠벨: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진실과 허위 ……. 이 세상 만물은 대국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하지만 신화는 우리에게 이 이원성의 이면에는 일원성의 세계가 있어서, 대극이 서로 꼬리를 물로 있음을 암시하지요. 시인 블레이크는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고 했지요.
p,103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p.104 우리 시공(時空)의 장(場)에 있는 만물은 ‘이원적’입니다. 신의 화신(化身)은 남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우리 자신이 바로 신의 화신입니다.
p.105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체험하는 것이랍니다.
p.109 우리가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정의 지침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도에는 참 아름다운 인사법이 있어요. 두 손을 모으고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겁니다.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만물에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p.113 우리는, 원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우리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인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같고, 우리는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 잣ㄴ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p.114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 중국의 <도덕경>에도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신화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이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삶의 지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개인을 그가 속한 동아리에, 그리고 동아리를 자연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신화는 자연의 장과 개인의 본성을 통합시킵니다. 신화는, 조화시키는 힘입니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먼이나 선견자(先見者)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p.124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看取)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p.126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라니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것은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7 무엇이든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p.133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p.134 이대로가 즐거운 겁니다.……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p.135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영웅의 행동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요.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p.139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3.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2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그러다 결국 죽는 거지요.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나는 삶에 고나한 나의 사고 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고나한 관념 자체를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p.175 캠벨: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고나한 정의가 있습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周邊)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가 가능한) 구체(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모이어스 씨가 앉아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모이어스: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캠벨: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개인주의라고 변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잇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4.희생과 천복(天福)>
p.177 사는 곳을 성화(聖化)시티는 것, 이것은 신화의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p.179 모이어스: …… 변모의 중심은 현세의 벽이 무너지면서 우주의 경이가 드러나는 관념적인 성소(聖所)라고 하셨습니다만, 성소라는 말은 떤 뜻으로 쓰셨습니까?
캠벨: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날 조간(朝刊)에 어떤 기사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고,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남에게 무엇을 빚졌는지 모르는 그런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처음에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p.179-180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p.186 내게 감동을 준 것은 현재입니다. 대성당은 세계의 영적 정보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줍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걸어다니면서, 앉아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서 명상하는 곳입니다.
p.186-187 왜 우리가 새삼스럽게 신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p.189-190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神性)은 누가 해석합니까? 구가 우리의 샤먼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캠벨: 그것은 예술가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자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 됩니다.
p.203 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p.209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테마를 드러내고 있어요.
p.211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개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잊은 채로 서로에게 무엇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p.222 캠벨: …… 평생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지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모이어스: 이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됩니까?
캠벨: 천복에 이르는 거지요.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수레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성혼서약(成婚誓約)에도,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가난할 때나,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중략)…나는 그대를 중심으로 맞아들이고 그대를 천복으로 좇는다, 그대가 나에게 줄 재물도 아니요, 그대가 나에게 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그대만 좇으리다……. 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게 바로 천복을 좇는 것입니다.
모이어스: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캠벨: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언제 선생님의 천복을 만났습니가?
캠벨: 어릴 때 일입니다. 나는 고집이 세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늘 나를 도와주었어요. 언제 어디에서든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었으니까요. 나는 그런 삶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지냈어요.
모이어스: 부모 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천복을 찾게 해줄 수 있습니까?
캠벨: 아이를 잘 알아야 하고, 아이에게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를 도와줄 수 있지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가르칠 대 나는 학생들과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식 정도는 약 반 시간씩 개인 면담을 하고는 했어요. 가령 학생들과 독서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학생이 보이는 반응에서 뭔가를 느껴낼 수 있지요.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붙잡고, “이 학생은 여기에 매달리게 해주어야겠구나.” 이런 결심을 하고는 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방에서 자기 갈 길을 찾은 학생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p.225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실제로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종종 있던 일이어서 나는 알고 있지요. ……
“……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p.226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존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p.227 모이어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캠벨: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생전 안 하던 경험을 하니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의 경험은 바로 이곳에서 하는 것이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이어스: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에게는 그럴 때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캠벨: 늘 하지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굳게 믿는 미신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의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모이어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캠벨: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있다면 연민을 느껴야 당연한 불상한 사람이지요. 생명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목을 쥐어뜯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지요.
모이어스: 영원한 생명수가 옆에 있다고 하시는데 그게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캠벨: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영웅의 모험>
p.22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p.229-300 사람의 행적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모험에 뛰어들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상실한 것, 혹은 생명의 불사약 같은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영웅의 모험에는, 출발과 귀환 사이에 일종의 주기(週期)가 있지요.……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브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3 모이어스: 영웅의 시련, 시험, 난관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캠벨: 굳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정말 영웅인지 아닌지, 이 사람이 관연 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 정말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가 예비해놓은 어떤 관문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p.233-234 자신을 버려서 자신을 더욱 높은 목적, 혹은 타인에게 준다는 겁니다. 이것만 알면 이 자체가 바로 궁극적인 시련이라는 걸 깨달아낼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참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좌정에 분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p.239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48 신화는, 내어놓은 목숨에서 새 생명이 비롯된다는 메시지도 전하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영웅의 목숨이 아니라 새 생명, 새로운 존재, 혹은 육화(肉化)의 길일 겁니다.
p.251 이 새로운 것을 세우기 위해서 영웅은 기왕에 살던 땅에서 새로운 것을 싹 틔울 잠재력이 있는 씨앗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삶(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에서 나온 것입니다.
p.259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에요.
p.262 신화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런 문제를 이해하게 하는 데 필요한 기본 교육 자료였어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이런 종료의 적당한 신화 교육을 베풀고 있지 못해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행동 통일을 하는 데 그렇게 애를 먹고 있는 거지요. 나에게는 하나의 이론이 있어요. 어떤 젊은이가 모종의 장벽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특정 신화 대응물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이의 경우는, 문턱 넘기 의례와 관련된 신화 대응물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 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p.262-263 모이어스: 늘,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까?
캠벨: 지금 우리가 그래요. 지금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어요.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은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어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이어스: ‘자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자기’와 우리가 잘 모르는 도 하나의 ‘자기’ 즉 진짜 ‘자기’가 있을 수 있겠는데요. 신화는 어떻게 하면 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캠벨: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신화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은 알고 잇을 테니까요.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명령은 제자들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 되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습니다.
p.265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정도의 행동은 의미도 없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p.272 캠벨: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겁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잇는 것을 거머쥡니다.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우리 개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선생님의 이른바 ‘드높은 영혼의 모험’이란 무엇입니까?
캠벨: 내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내리는 처방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는 겁니다. 천복을 찾아내되, 천복 따르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p.273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p.275 캠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뿐이지요.
모이어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를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思想)을 차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캠벨: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p.276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암시입니다. 스승이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니체는 “인간은 병든 동물이다”라고 했지요. 인간은, 그 병을 어떻게 치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동물입니다.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아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p.277 서구인들은 ‘나’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있는 가능성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위대한 서구적 진실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줄 수 있을 때도, 주어지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 개개의 경험과 우리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이 발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동영의 전통적인 사회, 거의 모든 전통 사회를 보면 개인은 기계로 찍어낸 과자 같아요. 이런 사외 구성원의 의무는 정확한 용어로 정확하게 정의되어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지요.
영적인 문제의 도움을 받으러 스승을 찾아갈 경우, 이 스승은 그 제자가 전통적인 길 어디쯤에 와 잇는지,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가기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압니다. 그러면 스승은 이 제자에게 무엇을 주는고 하니, 바로 자기가 구상한 바를 일러줍니다. 그러니 제자가 스승 비슷하게 도리 수밖에요. 서구의 교수 방법은 이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p.278-279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죽기에 좋은 날이다!”
죽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85 아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요. 맡겨서 홀로 서기에 충분한 힘이 있게 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새끼 새는 자기가 날 수 있을 때가 되었다는 걸 압니다. …… 내 생각에는 사람들에게도 안에는 이런 것이 있지 싶어요.
예술학교 학생들에게는, 스승이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가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이 순간이 스승이 가르치고자 하는 기법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동화시킨 순간, 날 준비가 된 순간이지요. …… 스승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마땅히, 제자에게 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고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합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다른 계통의 학생들도 대개 자기에게 때가 오면 그때를 알아차립니다.
p.286 신화는 처방가지 해주지요. 가령 신화는 우리에게, 나이 몇 살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까지 가르쳐줍니다. 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좋은 기준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인차가 엄청나게 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대기만성형이 있어서 아주 늦게야 빛을 보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287 아무리 신화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좇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행복을 좇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러줄 뿐이지요.
‘구혼의 거절’이라고 이르는 모티프
어머니가 정해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p.298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지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이것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6.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p.320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중심을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한 거예요.
p.322 두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가슴 아래쪽에는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p.333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참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없어요.
p336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p.337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p.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에서 육체적인 하나 되기는 정신적 하나 되기를 확증하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거꾸로 말하자면,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7 자기의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사랑을 선택하는 데도 그래야 하지요.
p.359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64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홉니다.
p.370 사랑은 곧 신의 임재입니다. 사랑이 결혼보다 상위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8. 영원의 가면>
p.376 내게는 삶의 경이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내게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나에게는 증오의 경험도 있고, 남이 턱주가리를 부셔놓고 싶다는 악의의 경험도 있어요.
p.378 동양의 신들은 더욱 본질적이고 덜 인간적이에요. 동양의 신들은 서양의 신들보다 훨씬 자연력에 가깝지요.
p.378 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별로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돈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도 좋은 명상으로 칩니다.
p.380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가 믿는 신과 하나 되기여야 합니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라집니다.
p.383 원수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을 뽑아내려 하지 말고,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뽑아내는 겁니다. 그럴 수 있으면 원수가 사는 삶의 방법을 비난 할 수 없을 겁니다.
p.394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색은 우리 내부의 발화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발화점은 존재의 모습이 확정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과는 무관하고, 공포도 없고 욕망도 없는 순수무구한 한 점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용감하게 전장으로 달려나가는 병사의 마음이 바로 이 한 점의 상태와 같지요.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p.398 절정 경험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는 어느 한 순간에 하는 경험입니다. 존재의 조화와 나 자신의 관계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나는 절정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이게 어떤 경험인지 알았습니다만, 내 경우는 운동 경기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이긴다고 확신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길 것 미리 알고 있었어요. 이게 나의 절정 경험입니다. 그날은 어떤 선수도 나를 이길 수 없었어요.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와 나의 존재가 완벽하게 만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p.412 나는 인생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p.413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신화의 힘>이라는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와의 TV의 대담을 담은 책이다. 캠벨이 말년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대담의 주제가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天福),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영원의 가면으로 개인의 삶과 사회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이전의 책들에 비해 조금은 쉬운 표현으로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캠벨의 책이 매력적이기는 하나 쉽게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캠벨의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구절은 “그대의 천복을 따르라”이다. 캠벨이 다루고 있는 모든 주제는 신화를 이해하여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울림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보다 감탄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천복을 좇아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기초로 한 그의 교육관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체화한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지혜로운 스승이었다.
캠벨이 제시한 스승상은 첫째,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어야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역할은 암시자이다. 둘째, 학생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통해 개개인이 지닌 잠재력이 발현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역할은 인도자이다. 셋째, 학생 스스로가 스승이 가르치는 것을 자기 것으로 동화시켜 때가 되면 날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의 역할은 조력자이다. 궁극적으로 캠벨은 학생은 아버지나 어머니의 길을 좇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보호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이야기한다. 스승은 학생의 길을 대신 걸어가 줄 수는 없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학생 자신이다. 단지 스승은 학생이 천복인 자신의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시해야하며, 학생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갈 때 자신이 자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안내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보안점>
조셉캠벨의 사상은 독자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2년전에 이 책을 추천받아 읽으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서문과 1장의 2페이지를 읽고는 아직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라 생각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책을 읽어보니 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사실 책의 구성 자체는 친근감이 떨어지나 내용 자체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다. 캠벨이 말년에 자신의 사상을 응집해 놓은 것이라 그래도 여전히 방대한 캠벨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전체가 대화체로 되어있어서 글을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를 듣는 듯 재미가 있으나, 캠벨의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의 저서를 통한 용어 설명이나 사상에 대한 보충설명이 주제가 끝날 때 마다 정리되어 있으면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조셉캠벨의 강의 내용 중에서도 청소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신화의 교육적 요소를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지금의 교육에는 전통이 무엇인지 그 뿌리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앞의 지식만을 탐구하는 것이 교육의 최대 목적이 되어있다. 하지만 지엽적으로 지식탐구만을 위한 교육 목적에 충실한 교육을 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 다양한 형태로 사회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지금의 학생들에게 종종 꿈을 묻곤 한다. 그들의 과반수가 자신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을 통해 어떤 과정을 거쳐 돈을 벌지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돈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이다. 이런 것이 삶의 목적이 되는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들이 과연 온전하게 행복한 느낌을 갖으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교육 내용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신화를 통해 자신의 천복을 찾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천복을 느껴본 학생만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