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0년 4월 13일 05시 51분 등록
1권.
이 카오스는 형상도 질서도 없는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 퇴적물, 사물로 굳어지지 못한 모든 요소가 구획도 없이 밀치락달치락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여기에는 아직 이 세상에다 넉넉하게 빛을 던져줄 티탄도 없었고, 날이 감에 따라 초승달의 활시위를 부풀려가는 포이베도 없었다. 대지는 아직, 그 대지를 감싸주는 대기 안에서 제 무게를 감당할 형편이 못 되었고 암피트리테도 땅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 팔을 뻗을 형편이 못 되었다. 대지와 바다와 공기를 이루는 요소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땅 위로는 걸을 수가 없었고 바다에서는 헤엄칠 수가 없었으며 대기에는 빛도 없었다. 말하자면, 제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만물은 서로 밤녹하고 서로 방해만 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질료 안에 있으면서도 추위는 더위와, 습기는 건기와, 부드러움은 딱딱함과, 무거움으 가벼움과 싸우고 있었다. 

이 같은 반목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이런 요소들보다는 훨씬 빼어난 자연이라는 신이었다. 신에 다름아닌 이 자연은 하늘로부터는 땅을, 땅으로부터는 물을, 무주룩한 대기로부터는 맑은 하늘을 떼어놓았다. 자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지경에서 이들을 떼어내고는 서로 다른 자리를 주어 평화와 우애를 누리게 했다. 무게라는 것이 없는 창궁蒼穹의 불과, 16사물을 태우는 힘을 가장 높은 하늘로 날아올락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가볍기로 말하면 불 다음인 공기는 바로 그 밑에 자리했다. 이 두 가지보다도 밀도가 높은 대지는 단단한 물질을 끌어당겨 붙이면서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하강했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물은 맨 나중 자리를 잡고 이미 굳어진 대지를 싸안았다. 

이 조물주가 어떤 신이었든, 좌우지간 이 신은 혼돈을 이루고 있던 물질의 덩어리를 정리하고 구분하고 각각 그 있을 곳에다 배치한 뒤 우선 대지를, 어느 쪽에서 보아도 그 모양이 똑같도록 거대한 공꼴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바다를 사방으로 펼치고 거친 바람으로 풍랑을 일으킨 뒤 땅 주변에 펼쳐진 해안선을 빠짐없이 둘러싸게 했다. 이어서는 샘, 큰 호수, 그리고 연못을 파고, 흐르는 강 양쪽으로는 꾸불꾸불한 둑을 만들었다. 강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강 가운데에는, 흘러가다가 대지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리는 강도 있고 멀리 훌러가 이윽고 망망한 대해원大海源의 품에 안겨 초록빛 강변 대신에 단애斷崖의 바위를 씻는 것도 있었다. 신은 또 땅을 고르어 평지를 만들고, 골짜기를 파고, 숲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게 하고, 험한 산을 세우기도 했다. 

신은, 이번에는 하늘을 나누어 오른쪽에 두 권역, 왼족에 두 권역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이 네 권역보다 훨씬 뜨거운 다섯번째의 권역을 두었다. 이어서는 이 다섯 권역의 하늘로 덮인 땅덩어리 역시 같은 권역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땅에도 다섯 지대가 생긴 셈이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지대는 너무 더워 산 것이 살 수가 없었고 양쪽 끝의 두 지대는 아주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 사이에다 남은 두 지대를 두고 더위와 추위가 번차례로 들게 하여 산 것이 살기에 적당한 기후를 베풀었다. 17

한 처음은 황금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관리도 없었고 법률도 없었다.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서로를 믿었고 서로에게 정의로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형벌도 알지 못했고, 무서운 눈총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다. 나라가 청동판에다 포고문을 게시하여 백성을 을러매는 법도 없었고, 청請 넣으러 간 무리가 판관 앞에서 자비를 비는 일도 없었다. 아니 아예 판관이라는 것이 없었다. 사람드른 판관 없이도 마음놓고 살 수 있었다. 소나무만 하더라도 고향 산천에서 무참하게 잘리고 배로 지어져, 본 적 들은 적도 없는 타관 땅으로 끌려가지 않아도 좋았다. 인간도 저희들이 살고 있는 땅의 해변밖에는 알지 못했다. 마을에 전쟁용 참호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었다. 놋쇠 나팔, 뿔피리, 갑옷, 칼 같은 것도 없었다. 군대가 없었으니, 인간은 저희 동아리끼리 아무 걱정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대지도, 괭이로 파고 보습으로 갈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자라지 않게 대어주었다. 인간은 대지가 대어주는 양식을 흥감하게 여기고 양매楊梅, 산딸기, 산슈유 열매, 관목에 열리는 나무 딸기, 가지를 벌린 유피테르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로 만족했다. 기후는 늘 봄이었다. 서풍은 그 부드러운 숨결로, 씨 뿌린 일이 없는데도 산천에 만발한 꽃들을 어루만졌다. 때맞추어 대지는, 보습에 닿은 적이 없는데도 곡물을 생산했고, 논밫은 한 해 묵는 일 없이 늘 익은 곡식의 이삭으로 황금 물결을 이루었다. 20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뱃사람들은 바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제 배의 돛을 바람에 맡겼다. 높은 산에서 옷 노릇을 하던 나무는 배 지을 재목으로 찍혀 내려와 타관인 바다의 파도 사이로 쫓겨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햇빛과 공기와 함께 모든 인간의 공유물이었던 땅거죽도, 서로 제 땅이라고 우기는 이른바 땅 임자들이 그은 경계선으로 얼룩졌다. 사람들은, 넉넉한 대지로부터 곡물이나 먹이를 거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지에 내장에까지 침입하여 대지가 스튁스 근처에다 감추어둔 재보와 인간에게 악업을 부추기는 보화를 파내었다. 이로써 유해한 철과, 철보다도 더 위험한 황금이 속속 인간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금속이 나돌자 사사로운 싸움은 곧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이 터지자 사람들은 피 묻은 손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이 친구는 저 친구로부터 안전하지 못하고, 장인은 사위의 손을 안심할 수 없는 사태가 생겨났다.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아비는 지어미가 죽기를 목마르게 기다렸고, 지어미는 지아비가 죽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사악한 계모는 독초를 찣어 독약을 만들었고 자식은 아비의 점괘를 곁눈질하며 아비 죽을 날을 목 늘이고 기다렸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을 떠나자 마지막까지 이 땅에 남아 있던 불사의 처녀신 아스트라이아도 머리를 풀고 이 피 묻은 땅을 떠났다. 23

뤼카온이라는 이 자, 이리로 변신한 것이오. 이 자가 지니고 있던 광포한 성정이 모여 입은 괴물의 주둥이가 되고 말았소. 지금즘, 타고난 살육의 근성을 못 잊어 그 주둥이로 다른 짐승을 겨누고 있을 것이오. 이리에게는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광기가 있소. 이 자가 이리로 둔갑하고 말았다고는 하나 이 자에게서 원래의 모습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오. 털빛이, 이 장의 머리카락 색깔같이 잿빛인 것이 그러하고, 얼굴에 흉포한 기색이 남아 있는 것이 그러하고, 눈빛이 사납고 이 짐승 자체가 잔혹한 성정의 화신인 것이 그러하오. 

내가 부숴버린 집은 한 채뿐이오만 앞으로 부서져야 할 것이 어찌 한 채뿐이겠소? 아실 테지만 저 땅은 한치도 예외 없이 무서운 푸리아에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오. 나는, 인간이 모두 한통속으로 결탁하여 죄업을 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오만 그대들도 내 의견에 동의할 테지요? 나는 지금 당장, 죄값을 받아 마땅한 이들을 칠 것이오. 이것이 내 뜻이오]

신들 중에는, 유피테르의 뜻을 지지하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느라고 소리를 지르는 신들도 있엇고 조용히 침묵으로 찬성한 뜻을 나타내는 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류가 절멸하게 된 것을 슬퍼하고, 필멸必滅의 존재가 사라진 미래의 땅 못브을 궁금해하기는 어느 신이든 마찬가지였다. 신들은 서로, 앞으로는 누가 신들의 제단에 향을 사르게 되느냐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세상이 정말 야수들에게 맡겨지게 되는 것이냐고 묻는 신도 있었다. 그러나 신들의 왕 유피테르는,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인즉, 신들이 염려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는, 새로운 종족, 이전의 종족과는 전혀 다른, 전혀 불가사의한 기원에 그 뿌리를 두는 새 인류에게 땅을 맡길 것을 약속했다. 30

두 사람은 신전 계단에 엎드려 차가운 돌에 입맞추고는 이렇게 빌었다. 

[신들의 마음이 신심信心 있는 자들의 기도로 움직이고 부드러워진다면, 신들의 분노가 이로써 가라앉는다면, 일러주소서, 테미스 연신이시여, 어찌하면 인류가 절멸한 이 땅의 이 재난을 수습할 수 있을는지요. 자비로우신 여신잇시여, 환란을 당한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여신들은 이들을 가엾게 보고 속삭이는 소리에다 뜻을 맡겼다. 여신에 맡긴 뜻은 이러했다. 

[내 신전에서 나가 너희 머리를 가리고 의복의 띠를 푼 연후에 너희들 크신 어머니의 뼈를 어깨 너머로 던지거라]

여신께서 속삭이는 소리에 맡긴 뜻을 듣고도 두 사람은 어찌할 줄을 몰라 망연자실 한동안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을 퓌라였다. 퓔가는 여신으 뜻을 따를 수 없노라고 말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신의 용서를 빌었다. 퓌라는, 뼈를 홀대하여 어머니의 신성에 누를 끼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참으로 엉뚱하고도 애매한 이 여신의 뜻을 새기려고 묵상했다. 얼마 후 프로메테오스의 아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겁에 질려 있는 에피메테오스의 딸을 달랬다. 

[신의 뜻은 무류無謬하신 법, 죄업 쌓을 말씀은 아니하실 것이다. 내 짐작이 그르지 않다면, 여신의 뜻이 이르시는 어머니는 곧 대지일 것이요, 어머니의 뼈는 곧 돌이 아닐는지.....우리에게, 여신께서는 어깨 너머로 돌을 던지라고 하신 것일게야]37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은 대홍수 뒤 땅에 남아 있던 습기가 햇볕에 뜨거워질 즈음에 저절로 생겨났다. 이즈음 늪지의 진흑이 열기에 부풀어오르고, 만물의 종자는 어머니 자궁 안에든 것처럼 부풀어올라 시간이 흐르자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구河口가 일곱 개인 네일로스 강이, 범람해 있던 벌판에서 원래 있던 하상河床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네일로스 강이 원래의 물길로 되돌아가자, 범람해 있던 곳에 쌓여 있던 진흙은 햇볕을 받아 뜨거워졌다. 이때 이 흙을 일구던 농부들은, 이 흙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수많은 짐승들을 보았다. 이 수많은 피조물 중에는, 종자에서 갓빚어진 것도 있었고, 살아나 마악 기어나오려 하는 것들도 있었다. 물론, 아직은 다 만들어지지 못해 사지가 온전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몸의 일부는 생명체인데 나머지는 흙덩어리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온기와 습기가 알맞게 어울리는 환경에서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만물이 이 두 가지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물과 불은 비록 상극이기는 하나 습윤한 온기는 만물의 근원이었다. 말하자면 물인 습기와 불인 온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생명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대지에 덮였던 진흙이 하늘에서 비치는 태양의 그윽하 열기로 다시 더워지자 대지는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생명을 지어내었다. 이렇게 지어진 생명 중에는 홍수 이전에 있던 것도 있었고 전혀 새롭게 지어진 것도 있었다. 40

그는, 별처럼 반짝이는 다프네의 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다프네의 입술에도 머물렀다. 그는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다프네의 손가락, 손, 어깨까지 드러난 팔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폴로가 다가가면 다프네는 달아났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아폴로가 뒤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요정이여, 페네이오스의 딸이여. 부탁이니 달아나지 말아요. 비록 그대를 이렇게 쫓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아름다운 요정이여, 거기에 서요. 이르를 피하여 어린 양이 도망치듯이, 사자를 피하여 사슴이 달아나듯이, 비둘기가 독수리를 피하여 날갯짓하듯이, 만물이 그 천적 되는 것을 피하여 몸을 숨기듯이, 그대는 지금 그렇게 내게서 달아나고 있고. 달아나지 말아요, 내게 그대를 뒤쫓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오, 장미 덩굴에 그 아름다운 발목이라도 긁히면 어쩌려는 것이오. 그대가 달아나고 있는 이곳은 험한 곳이오, 부탁이오. 천천히 달려요. 걸음을 늦추어요. 나도 천천히 뒤따를 것이니.

그대에게 반하여 이렇듯이 번민하는 내가 누군지 그것은 물어보고 달아나야 할 것이 아니오? 나는, 산속에서 오막살이나 하는 농투산이가 아니오, 이 근동에서 가축이나 먹이는 양치기나 소치기도 아니오. 어리석어라! 어째서 그대는 뒤따르는 내가 누군지 모르시오? 아시면 그렇게 달아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델포이 땅의 주인이며, 테네도스 섬의 주인, 파타라 항구의 주인이오. 나는 저 신들의 아버지 유피테르의 아들이오. 내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는 재주도 있소. 수금竪琴을 나보다 잘 뜯는 인간이나 신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내 화살은 백시백중이오만, 나보다 솜씨가 나은 자가 있어서 내 가슴에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소. 의술은 내게서 비롯되었소.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나를 일러 파이에온 이라고 하오. 아, 나는 약초를 잘 아는 의신이오만, 이 사랑병 고칠 약초는 없으니 이 일을 어쩌리오. 남을 돕는 재주가, 있어야 할 그 임자에게는 하릴없으니 장치 이 일을 어쩌리오....]46

처녀는 발길을 돌려 레르나 풀밭을 지나고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뤼르케아 들판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대지에다 어둠을 깔아 처녀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했다. 처녀가 더 달아나지 못하자 유피테르는 강의 딸 이오와의 사랑을 이루었다. 

천궁에서 아르고스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유피테르의 정처正妻유노는, 벌건 대낮에 이상한 구름이 밤을 지어내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더구나 그 근방에는 안개를 뿜어낼 만한 강이나, 구름을 빚어내는 늪지가 없었다. 유노는 지아비 유피테르를 찾아보았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곧잘 하는 지아비의 버릇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아비 유피테르가 지상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안 유노는, [내 짐작이 그르지 않다면, 이 양반이 필시 또 못된 짓을 하는 게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지상으로 내려와 구름을 날려버렸다. 

유노가 이 구름을 날려버린 것은, 아내가 내려올 것을 미리 안 유피테르가 이나코스 강의 딸 이오를 새하얀 암소로 전신하게 한 뒤였다. 암소로 전신했는데도 부룩하고 암소 이오는 본래의 이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이 암소는 유노에게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유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아비에게, 암소가 대체 누구의 것이고, 내력이 어떻게 된 것이며, 대체 누구소떼에 섞여 있던 것이냐고 물었다. 유피테르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소의 내력을 아는 듯이 캐묻는 아내를 입막음하려고, 대지에서 태어난 소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투르누스의 딸은, 그 암소를 자기에게 선물로 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52

태양신의 궁전은 원주에 떠받친 채 하늘 높이 숫아 있었다. 원주는 휘황찬란한 황금과 불꽃 빛깔의 적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은 윤나게 갈아낸 상아였다. 궁전 정면의, 은으로 만든 두 짝 문은 태양신의 빛을 찬연하게 되쏘고 있었다. 재료도 좋거니와 그 만든 솜씨는 재료보다 윗길이었다. 이 문에는 물키베르의 부조가 펼쳐져 있었다. 이 부조에는, 대지를 가슴 가득히 안은 바다, 대지 자체, 그리고 대지 위의 하늘이 새겨져 있었다. 바다에는 뿔고동 나팔을 부는 트리톤, 둔갑의 도사인 프로테오스, 두 마리의 거대한 고래를 타고 그 등을 채찍으로 갈기는 아이가이온 같은 해신들이 있었다. 62

파에톤이 벅찬 가슴을 안고 태양 수레를 만져보며 찬탄하고 있을 즈음, 붉게 동터 오는 동녘에서는 새벽 잠을 깬 아우로라가 장미꽃이 가득 핀 방의, 눈부시게 빛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키페르가 긴 별의 대열을 거느리고 천계의 제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태양신은 이 루키페르가 떠나는 것과, 하늘이 붉어지면서 이지러진 달빛이 여명에 무색해지는 것을 보고는 발빠른 호오라이에게 분부하여 천마를 끌고 나오게 했다. 호오라이가 분부를 시행했다. 호오라이들은 천장이 높은 마구간에서, 암브로시아를 배불리 먹은 천마를 끌어내어 마구馬具를 채웠다. 천마들은 숨쉴 때마다 불길을 토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에다, 불길에 그을리는 것을 예방하는 신고神膏를 바르고 잘 문질러주고는, 아들의 머리에다 빛의 관을 씌어주었다. 아버지는, 이러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지 자주자주 한숨을 쉬었다. 오래지 않아 자식에게 닥칠 재앙과 이로 인한 자신의 슬픔을 예견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포에부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비의 말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라. 되도록이면 채찍은 쓰지 말고 고삐는 힘껏 틀어잡도록 해야 한다. 천마는 저희들이 요량해서 잘 달릴 게다마 이들의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천계의 다섯 권역을 곧장 가로질러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세 권역의 경계선 안으로 조금 휘어진 샛길이 있다. 이 길을 잡으면, 설한풍이 부는 극남 권역과 극북 권역을 피해 갈 수가 있다. 이 길로 들어서면 수레의 바퀴자국이 보일 게다. 하늘과 땅에 고루 따뜻한 빛을 나누어주려면 너무 높게 몰아서도 안 되고 너무 낮게 몰아서도 안 된다. 너무 높게 몰면 창궁에 불이 붙을 것이고 너무 낮게 몰면 대지를 그을리고 만다. 그 중간이 가장 안전하니 명심하여라. 오른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말아야 하다. 거기에는 똬리 튼 뱀이 있다. 왼쪽으로 너무 치우쳐 바로 아래 있는 신들의 제단을 태워서도 안된다. 이 사이을 조심해서 지나가도록 하여라. 내 이제 너를 포르투나의 손에 붙이고 포르투나가 너를 도아ㅗ주기를, 네가 너를 돌보는 것 이상으로 자상하게 너를 돌보아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구나. 서둘러라. 벌써 밤이 저 멀리 서쪽 해변에 이르렀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제 태양 수레가 나타날 차례다. 아우로라가 어둠을 몰아내고 있지 않느냐? 자, 고삐를 힘잇게 쥐어라. 혹 내 말을 듣고 네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느냐? 변했거든 천마의 고삐를 놓고 내 말을 따르거라. 따를 수 있을 때 따르거라. 네 발이 이 단단한 태양신궁의 바닥에 닿아 있을 때 내 말을 따르거라. 미숙한 너에게 하늘로 오르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네가 이 위험한 일을  해보겠다고 우기기는 한다만, 대지에 빛을 나누어주는 일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그 빛을 누리기나 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68

헬리아데스의 슬픔도 어머니의 슬픔에 못지않았다. 이들도 그래서 죽은 아우의 무덤에 눈물과 애곡의 제물을 바쳤다. 이들은 밤이고 낮이고 파에톤의 무덤 위로 몸을 던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파에톤의 이름을 불렀다. 파에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들은 달이 네 번 차고 기울 동안 무덤 앞에서 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런데 헬리아데스중 맏이인 파에투사가 일어서서 걸으려다 말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아름다운 람페티에가 언니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람페티에는 갑자기 발에 뿌리가 생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셋째는 머리를 손질하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에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엇다. 하나가, 다리가 나무 둥치로 변한다고 고함을 지르는 식이었다. 헬리아데스 다섯 자매가 이 놀라운 변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잇을 동안 나무 껍질은 이미 이들의 허벅지를 덮고 사타구니, 젖가슴, 어깨, 손을 덮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이들은 입이 껍질로 덮이기 직전에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인들 무슨 수로 이들을 구할 수 있을가....어머니 클뤼메네는 달려가, 자신의 입술을 느낄 수 있을 동안이라도 입을 맞추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뤼메네는, 입맞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내려고 애쓰면서 아직은 부드러운 나뭇가지를 꺽어보았다. 79

곰이 된 이 요정 카릴스토의 아들 아르카스가 열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아르카스는, 뤼카온의 딸인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긴 줄은 까맣게 모르는 채 자라났다. 어느 날 숲속에서 짐승을 쫓던 아르카스는 에뤼만토스 산에다 큰 그물을 친 다음, 목을 잡고 숨어서 기다렸다. 아르카스는 여기에서, 곰이 된 어머니 칼리스토를 만났다. 칼리스토는 아들 아르카스를 보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칼리스토는 아들을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곰이 이상한 눈치를 보이는 까닭은 헤아리지 못하는 아르카스는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곰이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곰 모습을 하고 있는 칼리스토는, 아들에게 다가서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한 발짝만 접근하면 아들의 창이 날아와 가슴에 꽂힐 터였다. 그러나 이 모자에게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능하신 유피테르 신이 이 아르카스와 칼리스토의 손을 잡고는 이 모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아들로 하여금 살모殺母의 대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햇다. 즉, 돌개바람을 시켜 이들을 빈 하늘로 옮기게 하고 다시 이들을 이웃해 있는 두 개의 별자리로 박아준 것이었다. 

칼리스토 모자가 별이 되어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으니, 질투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유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유노는 바다를 뛰어들어 백발의 여신 테튀스와 연로한 해신 오케아노스를 찾아갔다. 이 노신 부부는 올륌포스 신들의 존경을 받는 티탄들이었다. 89

피와 함게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기 전에 코로니스가 남긴 말은 이것뿐이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싸늘한 죽음의 손길이 코로니스의 몸을 쓴 것이었다. 

포에부스는, 코로니스에게 내린 벌이 너무 가혹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큰 까마귀의 말을 듣고 이를 믿은 것을 후회했다. 이를 믿고 화를 낸 것을 후회했다. 포에부스는, 코로니스의 부정을 고자질한, 그래서 자신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게 한 큰 까마귀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활과, 활을 쏜 자신의 손, 그리고 지각없이 쏘아보냈던 화살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싸늘하게 식은 코로니스의 시신을 쓸면서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신유神癒의 권능도 하릴없었다. 너무 늦은 것이었다.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안 아폴로는 애통해했다. 화장할 나무 더미가 쌓였다. 그 아름답던 코로니스의 사지는 곧 그 나무 더미의 불길 속에서 소진될 터였다. 그러나 아폴로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신들에게 눈물을 금기였다. 아폴로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백정 앞에 선 송아지 같았다. 금방이라고 내리칠 듯이 망치를 오른쪽 귀위로 번쩍 쳐든 백정 앞의 송아지 같았다. 아폴로는 코로니스의 가슴에, 이제 코로니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향료를 듬뿍 뿌ㅡ리고는 마지막으로 뜨겁게 껴안았다. 이로써 그는 죽음이 요구하는 의식을 끝마쳤다. 95

필리라의 아들인 반신이자 반인반마인 케이론은 울면서 딸을 본 모습으로 되돌려달라고 아폴로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아폴로도 유피테르의 지엄한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길 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도와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아폴로가 당시에는 엘리스와 메세니아 벌판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폴로는 양치기 모습을 하고,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일곱 개의 갈대를 나란히 붙여 만든 쉬링크스 즉 목신의 피리를 들고 다녔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의 아폴로는 코로니스를 잃은 슬픔을 목신의 피리로 달래며 소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니 가축을 제대로 돌볼 수 있었을 리 없다. 가축 무리는 아폴로가 목신의 피리나 불고 있는 틈을 타서 퓔로스 벌판으로 넘어갔다. 유피테르와 마이아 사이에서 난 아들 메리쿠리우스는 이 가축 무리를 보고는 손을 써서 이들을 모두 숲속에다 감추어버렸다.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근동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던 바투스 노인을 제외하면....바투스는 저 재산가 넬레오스의 초장을 지키면서 혈통 좋은 종마를 건사하던 자였다. 이 바투스의 입이 무서웠던 메르쿠리우스는 그를 한쪽으로 불러 이렇게 꼬드겼다. 

[여보 노인장, 노인장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혹시 누가 노인장에게 가축 무리를 못 보았느냐고 하거든, 못 보았다고 대답하시오. 그리고, 여기 잘생긴 소 한 마리가 있으니, 내가 베푸는 성의로 여기고 거두어주시오]101

아글라우로스는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은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석상이 되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석상이 되었는데도 돌의 색깔은 거무튀튀했다. 검은 마음의 물이 들어 그런 색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아트랄스의 외손은 말버릇이 고약하고 뱃속이 검은 이 처녀를 벌하고는 팔라스 여신과 그 이름이 같은 도시를 떠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버지의 유피테르가 이 아들을 불러 다짜고짜 이렇게 명했다.

[내 명을 집행하는 아들아, 서둘러 네게 익은 길로 날아내려가 왼쪽으로 네 어머니 별을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더 가거라 그러면 시돈이라는 땅에 이를 게다. 가서 보면 그 땅 임금의 가축이 산자락에서 풀을 뜯고 있을 터이니, 이 가축 무리를 해변으로 내몰아라]

대신의 지엄한 분부의 시행에 일각의 지체가 있을 수 없었다. 유피테르의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그 땅 임금의 소떼는 해변 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소떼가 가는 해변은 그 나라의 공주가, 친구들인 튀로스의 처녀들과 자주 어울려 놀던 풀밭이었다. 109

시체를 빨닥 머리를 쳐들 때마다 왕뱀의 혀 끝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카드모스는 부르짖었다. 

[전우들이여! 내 맹세하거니와 그대들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 역시 그대들의 뒤를 따르리라]

이 말 끝에 카드모스는 오른손으로 커다란 바위를 하나 들어 있는 힘을 다해 괴물에게 던졌다. 맞았다면, 높은 탑루가 딸린 튼튼한 성벽도 무너지고 말았을 만큼 큰 바위였다. 

그러나 괴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흉갑 같은 비늘과 검고 튼튼한 가죽이 바위를 둥겨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늘과 가죽도 카드모스가 던진 투창에는 견디지 못했다. 투창은 괴물의 등 한가운데에 꽂혔다. 꽂혀도 창 끝이 뱃가죽에 이르기까지 아주 깊이깊이 꽂혔다. 괴물은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치면서 제 등을 제 눈으로 보려고 몸을 뒤틀었다. 고개를 돌려 제 상처를 본 괴물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창자루를 물고는 좌우로 흔들다가 기어이 이 창자루를 뽑아내었다. 그러나 날은, 뼈를 뚫을 정도로 깊이 꽂혀 있었다. 괴물은 날뛰기 시작했다. 목의 핏줄은 독액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독니 가로는 흰 거품이 일었다. 대지는 이 괴물의 비늘에 찢기었다. 스튁스의 동굴만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주위의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괴물은 거대한 나선꼴로 똬리를 트는가 하면, 나무 둥치처럼 몸을 세우고 공격해 오고는 했다. 괴물의 앞을 가로막던 나뭇가지가 괴물의 가슴에 밀려 부러졌다. 카드모스는 조금 물러서서 사자 가죽 방패로 괴물의 공격을 막다가, 괴물의 입안으로 창을 던져 넣었다. 괴물은 미친 듯이 날뛰며 쇠붙이로 된 창날을 깨물었다. 115

악타이온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로 사위가 시끄러웠다. 맨 먼저 멜란카에테스가 그 주인의 등에다 이빨을 박았다. 이엉서 테리다마스와 오레시트로포스가 주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사냥개의 추적 속도는 다소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냥개들은 번번이 지름길을 찾아 산을 넘어와 이 사냥감을 덮치고는 했다. 주인이 쓰러지자 나머지 개들까지 합세하여 그 몸에다 이빨을 박았다. 이빨 댈 자리가 모자랄 만큼 몰려와 물고 뜯었다. 악타이온은 비명을 질렀다. 이 비명은, 인간의 음성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슴이 지를 법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가 다니던 산등성이는 그이 비명으로 낭자했다. 기도하려는듯이, 두 팔을 벌리고 용서를 빌려는 듯이, 그는 무릎을 꿇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사냥 친구들은 저희들 앞에서 찢기고 있는 사슴이 악타이온인 줄을 모르고, 늘 그래왔듯이 고함을질러 개들을 부추기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며 악타이온의이름을 불렀다. 목소리 크기를 겨루려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악타이온의 이름을 불렀다. 불러도 대답이 없자 이들은 대장이 옆에 없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악타이온이, 볼 만한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생각하고는 아쉬워했다. 악타이온은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사냥개들 이빨에 찢기는 대신 진짜 사슴이 찢기는 것을 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면 얼만 좋았겠는가!그러나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거기에 있었다. 사냥개들은 둘러서서 겉으로만 사슴인, 사실은 저희들 주인인 악타이온이 그 많은 사냥개에게 뜯기어 숨이 끊어질 즈음에야.....저 사냥의 여신 디아나의 분이 풀렸다고 한다. 123

에코의 뼈는, 날아간 게 아니고 돌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때부터 에코의 모습은 숲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에코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에코의 목소리만은 살아 있으니 당연하다. 

나르키소스는 이로써 에코의 사랑을 농락한 셈이었다. 물의 요정, 숲의 요정, 그리고 수많은 동남동녀들을 그렇게 했듯이 나르키소스는 이 에코까지 박대한 것이었다. 

나르키소스로부터 박대받은 이들 중 하나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저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하시되 이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이로써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람노스의 여신이 이 기도를 듣고 이루어지게 해주려고 마음먹었다. 

숲속에는 맑은 물이 고인 샘이 하나 있었다. 양치기가 다녀간 적도 없고, 그 산에서 풀을 뜯던 어떤 염소나 소도 다년간 적이 없는 샘이었다. 새들도 산짐승도, 심지어는 떨어지는 나뭇잎조차도 이 샘에만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위로 무성한 숲이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이 샘을 가리고 있어서 샘물은 늘 시원했다. 133

요정 에코는 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르키소스로부터 받은 박대를 생각하면 고소하게 여겨야 할 판인데도 에코는 슬퍼했다. 나르키소스가 한숨을쉬면서, [아!]하고 부르짖자 에코도 하늘을 울러 보며, [아.......]하고 부르짖었다. 나르키소스가 제 어깨를 치면서 울부짖자 에코 역시 똑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르키소스는 샘물을 내려다보면서 마지막으로 [무정한 이여!] 이렇게 중얼거리자 에코도, [무정한 이여....]하고 중얼거렸고, 나르키소스가, [안녕]하고 마지막 인사를 보냈을 때도 에코는[안녕....]소리를 되울렸다. 

나르키소스는 푸른 풀을 베고 누웠다. 곧 죽음이 찾아와 아픔답던 그의 눈을 감기었다. 사자死者들의 나라로 간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스튁스 강에 비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케피소스 강 요정들은 동생인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머리를 모두 깍가 그의 죽음에 바쳤다. 숲의 요정들도 울었다. 에코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숲 하나 가득하게 되울렸다. 

관이 준비되고, 화장단이 마련되고, 불을 붙일 횃불까지 만들어졌지만, 나르키소스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요정들은 그의 시신 대신 흰 꽃잎이 노란 암술을 싸고 있는 꽃 한송이를 찾아내었다. 138

바쿠스의 주신장이 아니라, 창칼을 들어야 마땅할 혈기방장한 젊은 것들아! 너희들이 어쩌면 다투어 나를 이렇게도 놀라게 할 수가 있느냐? 바라보니, 너희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홀로 여럿을 대적해서 싸워 이긴 저 배암의 기백을 보여라. 그는 저 샘과 연못을 위하여 죽었다. 너희들도 저글 물리쳐 너희 명예로운 이름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리베르 신이라는 자는 용맹스러운 적을 물리쳐 조상의 영광을 지켜야 한다. 테바이가 어차피 무너져야 할 성이라면 우리 눈에 불길이 보여야 하고 우리 귀에 적의 함성이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설사 우리가 성을 잃더라도 후대의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싸움에 패배해서 성을 잃는다면 패배가 애통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치욕의 눈물은 흘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보라! 지금 테바이를 위협하고 있는 적이 누구냐? 무장도 하지 않은 애송이다. 전쟁이나 군마와는 아무 인연도 없는 애송이다. 머리에 화관 쓰고, 몸에는 색실 술을 단 옷과 꽃다발을 걸고 다니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애송이다. 너희들은 물러나 있거라. 내 몸소 나가 저것을 붙잡아 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며, 신성한 제사는 새빨간 사기극임을 자백하게 만들겠다. 아크리시오스는 신성한 권능을 뽐내는 이 사기꾼을 몰아내고 그 면전에서 아르고스 성문을 닫았다. 이 자가 또 온다고 하면, 나 펜테오스와 테바이 시민이 겁을 먹을 줄 아느냐? 어림도 없는 소리. 가거라, 어서 가거라. 어서 가서 우두머리를 사슬로 엮어오너라. 내 명을 시행하는 데 지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펜테오스 왕은 부하들에게 명했다. 142

그제서야 박쿠스 신께서 몸소 나서시어 놈들을 조롱하셨습니다. 제가 신께서 놈들을 조롱하셨다고 하는 것은, 놈들의 속셈을 알아치라시고는 갑판에 서신 채 바다를 내려다보시면서 거짓 울음을 터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거짓 울음을 터뜨리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여보시오, 뱃사람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내가 말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 무슨 경우가 이렇습니까? 내가 대체 무슨 못된 짓을 했다고 이렇듯이 대접하시는 것입니까? 어른들이 혼자 길 떠난 나이 어린 사람을 이렇게 곯리다니 이런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답니까?>

저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거짓 울음을 운 것이 아니고 정말로 울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제 동아리 뱃사람들은 우는 저를 비웃으며 여전히 어둥한 방향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때 제가 뵌 신....이분보다 위대하신 신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이 신께 맹세코,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옛 사람들이 하고, 듣고, 믿던 신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한마디도 틀림이 없는 진실입닏.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물 빠진 항구로 들어간 것처럼 우뚝 서버렸습니다. 뱃사람들은 대경실색하고, 노를 젓는다, 돛을 팽팽하게 편다. 노잡들을 돕고 돛 펴는 뱃사람들을 돕는다....이렇게 부산을 떨었지만, 세상에....노에는 덩굴이 감기기 사작하면서 손잡이 쪽으로 뻗어 올라오고 있었고, 돛에는 열매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47

테바이 여자들과는 다랄서, 미뉘아스의 딸 아키토에는, 이 박쿠스 신도들 무리에 휩쓸리지 않았다. 알키토에는, 박쿠스신을 찬미하는 야단스러운 축제가 자기네 나라에서도 베풀어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ㅇ낳았다. 알코토에는, 심지어는, 박쿠스가 유피테르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천연덕스럽게 했다. 이 알키토에의 여동생들도 박쿠스를 믿지 않는 언니를 편들었다. 

박큐스 신관들은, 박쿠스 축제는 반드시 거행되어야 하고, 이날만은 하녀들도 하녀들 몫의 일에서 풀려나 이 신을 섬기 룻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하녀나 주인이나 이날만은 젖가슴을 짐승가죽으로 가리고, 머리댕기를 풀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손에는 잎 달린 나뭇가지로 만든 주신장酒神杖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2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든 젊은 청년들의 환호성과 여자들의 함성, 방울북, 바라, 회향 대롱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테바이 여자드른 박쿠스에게,

[신은 우아하고 다정한 현재하심이 영원토록 저희와 함께 하시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순서에 따라 법도 있게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미뉘아스의 딸들만은 집안에 틀어박혀 실 감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로써 이 제사를, 이 제사를 흠향하는 박쿠스를 욕되게 했다. 그들은 양털을 벅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실을 꼬기도 하고, 베를 짜기도 하는 등, 저희들끼리 바쁘게 일하는 것은 물론 하녀들에게까지 바쁜 일감을 맡겨 문밖 출입을 못하게 햇다. 

미뉘아스의 딸등 중 하나가 엄지손가락으로 실을 부드럽게 꼬면서 자매들에게 말했다. 

[처녀라는 처녀는 모두 뿌리도 줄기도 없는 축제에 나가 휴일을 즐기니까 우리도 이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어야 하지 않겠어? 손은, 저 박쿠스보다 더 거룩하신 필라스 여신의 직무에 맡기고 입으로는 차례로 옛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 하나가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들으면서 일하고....]

나머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하자 먼저 말을 꺼내었던 처녀가 이야기를 준비했다. 

이 처녀에게는 아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처녀는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할까....하고 궁리했다. 팔라이스티나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바뷜로니아의 케티스 이야기? 155

찬란한 천상의 빛인들 사랑의 포로가 되었는데 별 수 있겠어? 쿠피도의 화살을 한 대 맞자 태양의 불길로 세상을 달구던 이 태양신이 이번에는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한 거야. 어떻게? 삼라만상을, 온 우주를 내려다보아야 할 솔의 눈길이 레우코토에라는 처녀를 한번 본 뒤로는 그만 이 처녀에게 못박히고 만 거지.레우코토에에게 반한 이 태양신은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부룩하고 동쪽 하늘에 그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시각인데도 하늘에서 머뭇거리는 등, 도무지 신들이나 인간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어. 이 레우코토테를 보려고 태양신이 하늘에서 어물거렸으니, 그 짧던 겨울 해가 길어져 인간들을 당황하게 했을 수밖에 ...상사병으로 상심하는 바람에 태양빛이 아주 희미해졌을 때도 있었어. 그러니 인간들이 얼마나 놀랐겠어? 태양이 희미해진 것은, 달 때문이 아니었어. 달이 태양빛을 가리면 세상이 어두컴컴해지지 왜? 그러나 이때 세상이 컴컴해진 것은 이 때문이 아니라 태양신의 상사병 때문이었대. 말하자면 태양신의 관심은 온통 이 처녀에게만 쏠려 있었던 거야. 

태양신은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클뤼메네, 로도스, 아이아이아 섬에 사는 키르케의 아름다운 어머니, 심지어는 클뤼티에까지 본 척도 하지 않았더. 참, 클뤼티에 말인데....이즈음 클뤼티에는 태양신 솔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크게 상심하고 있었어. 레우코토에 때문이었지. 165

<내 너에게 은미랗게 할 말이 있다. 그러니, 얘둘어,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거라. 어미에게는 딸에게 은밀한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너희가 이 권리를 빼앗지 말아라.>

이 말을 듣고 하녀들이 물러가자 태양신은 레우코토에에게 말했어.

<사실은, 나는 태양신이다. 긴 세월의 흐름을 재는 태양신, 삼라만상을 내려다보는 태양신이다. 대지 위에 사는 것들은 모두 내 빛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느니라. 나는 우주의 눈이니 내 말을 믿어라. 나는 너에게 반하고 말았구나.>

소녀는 무서워했어. 손에 들고 있던 물레가락과 실감개를 떨어뜨렸을 만큼. 태양신에게는 지체없이 본 모습을 드러내었어. 얼마나 눈부셨을까? 처녀 레우코토에는, 이 뜻밖에 나타난 태양신의 모습에 몹시 놀랐지만 그 본모습이 너무 멋져 딴소리 없이 태양신의 품에 안겼지

이즈음 태양신을 짝사라아하고 있던 클뤼티에가 이 사실을 알았어. 자기의 사랑은 본 척도 않고 다른 처녀를 사라아하는 이 태양신이 이 클뤼티에에게는 얼마나 원망스럽게 보였을까? 클뤼티에에게는 태양신뿐만 앙니라 이 레우코토에까지도 원망스럽게 보였어. 그래서 클뤼티에는 레우코토에가 태양신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을 퍼뜨렸지. 이 소문은 오래지 ㅇ낳아 레우코토에의 아버지 오르카모스의 귀에까지 들어갔어. 오르카모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수밖에. 그는 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지. 레우코토에는 아버지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태양을 향해 팔을 벌리고 이렇게 외쳤대.

<그분이 강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원해서 그리 된 게 아닙니다>167

신들은 요정의 기도를 듣고 이를 이루어지게 해주려고 했던 모양이야. 잠시 붙어 있던 이 둘의 육체를 하나 되게 했으니까. 그래, 신들은 이 두 개의 육체를 하나로 만든 거야. 두 개의 가지가 맞붙어 자라다 거의 한덩어리로 굵어진 게 정원사의 눈에 띄는 경우가 종종 있지? 한덩어리가 된 소년과 요정의 몸이 곡 이런 가지 같았어. 하지만 이들의 몸은 곧 붙은 자국도 보이지 않는, 진짜 하나가 되었어. 남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나의 육체, 남성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 아니라고도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양성을 두루 갖춘 하나의 육체가 되었던 거야.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어. 그러고는, 물에 들어올 때는 남성이었던 자신의 육체가 반남성, 반여성의 육체로 변해 있는 걸 알았어. 몸이 얼마나 연약해졌는지 불면 날고 쥐면 꺼질 것 같았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팔을 벌리고 기도했어. 물론, 그 목소리는 더이상 남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니었을 테지.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두 분의 명자名子를 받은 이 아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호수에 뛰어든 자는 반남반녀로 나오게 하시고, 이 호수의 물에 닿는 자는 그 힘과 살을 잃게 하소서>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부모는 이 기도를 듣고, 반남반녀, 어지자지가 된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어. 그래서 이 호수에다 이렇게 엄청난 마력을 내렸다는 거야]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미뉘아스의 딸들은 박쿠스 신을 험담하고, 박쿠스 축제를 비아냥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문득 세 자매의 귀에 북소리, 피리소리, 바라소리가 들려왔다. 몰약沒藥냄새, 사프란 냄새도 코를 찔렀다. 이상하게도 베틀이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자매가 짜던 베에서도 담뱅이 덩굴의 잎 같은 이파리가 돋기 시작했다. 베의 일부는 포도 덩굴로 변했다. 실은 덩굴손으로 변했다. 날실에서도 포도나무 잎이 돋았다. 이들이 짜던 벽걸이는, 이미 같은 색깔의 탐스러운 포도나무로 변해 있었다. 176

그런데 이 신을 가엽게 보는 자가 하나 있었다.아바스의 아들이자 바쿠스와는 핏줄을 닿은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가 바로 이 사람이다. 아크리시오스는 이 박쿠스를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부하들에게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군사를 풀어 박쿠스의 입성을 저지했다. 

아크리시오스는 박쿠스만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는, 유피테르가 황금 소나기로 둔갑하여 자신의 딸 다나에를 범하고 페르세오스를 지어 낳게 했는데도 부룩하고 이 페르세오스를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아크리시오스는, 박쿠스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손을 외손으로 용인하지 않았던 것을 크게 통한하게 된다. 진실의 힘이라는 것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 아니던가. 191

이아페토스의 아들인 아틀라스는 여느 인간에 비해 그 크기가 엄청났다. 이 거인 아틀라스는 세계의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의 지배자였다. 하루종일 하늘을 달린 태양 수레와 이 수레를 끈 천마들을 받아들이는 바다가 바로 이 아틀라스 나라의 바다였다. 아틀라스의 나라 근방에는, 이 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왕국이 없었다. 이 나라의 목장에는 수천 마리의 양과 소가 있었다. 아틀라스 왕에게 잎과 가지와 열매가 온통 황금으로 되어 있는 황금 사과나무가 있었다. 페르세오스는 이곳에서, 새벽별이 새벽의 여신을 깨우고 새벽의 여신이 태양 수레를 끌어낼 때까지만 쉬어가게 해달라고 아틀라스 왕에게 청을 넣었다. 

[아틀라스 왕이시여, 혹 문벌을 보아 손님을 응대하신다면 말씀드립니다만, 나는 유피테를 신의 아들입니다. 혹 영웅적인 공적으로 손을 대접하신다면 말씀드립니다만, 아마 왕께서 내가 이룬 공적을 아시면 적지 않게 놀라실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내게 호의를 베푸시어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아틀라스는 , 파르나소스 산정에서 테미스 여신이 내비치던 예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테미스  [아틀라스여, 네 황금 사과를 도둑맞을 날이 올 것이다. 유피테르의 아들이 네 사과를 손에 넣을 것이다], 이렇게 예언했던 것이었다. 

아틀라스는 테미스의 예언대로 황금 사과를 도둑맞을 날이 올까봐, 과수원 둘레에다 높은 담을 쌓고, 거대한 뱀으로 하여금 이 나무를 지키게 하는 한편 제 땅에 오는 길손에게 사과나무 근처에도 못 가게 해오던 참이었다. 아틀라스는 다른 나그네에게 하던 말을 페르세오스에게도 그대로 했다. 192

[가보시게, 영웅 어쩌고 하는 자네의 허장성세가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유피테르의 아들 아니라 유피테르라고 해도 마찬가질세]193

그동안 이 괴물은, 힘좋은 뱃사람이 ;젖는 노에 밀리어 뾰족한 가슴으로 물결을 헤치면서, 발레리아스 투석기를 쓰면 돌이 닿을 많한 거리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웅은 땅을 차고 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그림자가 수면에 드리워지자 괴물은 미친 듯이 그 그림자를 공격했다. 페르세오스는 아래로 내리꽂혔다. 오비스의 새가 하늘에서, 사막에 똬리 틀고 있는 독사를 보고 뒤에서 이를 덮쳐 그 무지막지한 발톱을이 독사의 목에다 박고, 독니를 쓰지 못하게 대가리는 뒤로 뒤집어 거머쥐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페르세오스도 이 괴물의 등을 공격하여 포효하는 이 괴물의 오른쪽 어깨에다 낫같이 꼬부라진 칼을 박았다. 깊은 상처를 입자 이 괴물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물 속으로 곤두박질하는가 하면, 사냥개 무리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뭄부림치며 포효했다. 그러나 영웅은 날개의 힘을 빌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이 괴ㅏ물의 이빨을 피했다가 빈틈이 보일 때마다 내려와 괴물의 몸에다 칼을 박았다. 조개껍질로 덮인 등을 찌르는가 하면 옆구리, 물고기 꼬리 같은 괴물의 꼬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찔렀다. 괴물은 입으로, 빨간 핏물을 내뿜었다. 페르세오스의 날개는 물에 젖어 이미 무거워져 있었다. 젖은 날개로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게 된 페르세오스는 물이 잠잠할 때는 물 위로 드러났다가 파도가 밀려 오면 물 밑으로 잠기는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 바위에 달라붙어 바위 꼭대기르 ㄹ안고는 오른손에 잡은 칼로 끊임없이 괴물의 옆구리를 난도질했다. 197

이들이 다시 몸을 가누려 하자 페르세오스는, 암피메돈은 옆구리를 찌르고 프르바스는 울대를 따서 그 자리에다 내굴렸다. 날이 넓은 도끼를 쓰는 악토르의 아들 에뤼토스는 좀 색다르게 죽었다. 페르세오스는 그 낫 같은 칼로 이 자를 죽이는 대신 부조浮彫가 깊이 새겨진 크고 무거운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이 자를 쳐죽인 것이다. 에뤼토스는 진홍빛 피를 뿜으면서 두로 벌렁 나자빠져 죽었다. 이어서 세미라미스의 후손인 폴뤼다이몬, 카우카소스에서 온 아바리스, 강신 스페르케우스의 아들 뤼케토스, 머리카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헬리케스, 풀레귀아스, 클뤼토스가 차례로 죽었다. 페르세오스는 죽은 자를 위로 밟고 다니며 싸웠다. 

피네오스는 페르세오스와 가까이서 일 대 일로 싸우려고는 감히 하지 않았다. 피네오스는 멀찍이서 페르세오스를 겨누고 창을 던졌다. 그러나 창은 겨냥을 벗어나 이다스의 몸에 꽂혔다. 이다스는, 올 때는 피네오스를 따라왔으나 막상 싸움이 벌어진 것을 보고는 어느 편에 서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다스는 죽어가면서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피네오스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피네오스, 각오하라. 나는 네 꾐에 빠져 너의 적을 내 적으로 만들었다. 이제 내가 입은 이 치명적인 부상의 값은 네가 치르어라.]206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입은 달싹거리는데 말은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자 역시 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퀵스가 전우들을 격려한답시고 호령했다. 

[사지 굳는 것은 너희들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지 저 고르곤 대가리에 신통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저런 가짜 무기를 깨뜨리는 데 우리 청춘을 바치자]

에뤽스는 청춘을 바치러 뛰어나가다 말고 청춘을 제대로 바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뿌리박혀 무장한 병사의 석상으로 화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폭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봉변을 당한 사람도 하나 있었다. 페르세오스를 편들던 아콘테오스가 영웅을 위해 싸우다가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는 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콘테오스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아스튀아게스가 칼로 그의 목을 치자 쇳소리가 났다. 아스튀아게스는 아연실색,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아연실색한 그 모습 그대로 돌이 되었다. 

여기에서 돌이 된 폭도들 이름을 다 거론하자면 한이 없다. 요컨대 창칼 싸움에서 목숨을 부지한 폭도 수는 이백여 명이었고, 고르곤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돌이 된 폭도 수도 따라서 이백여 명이었다. 

피네오스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크게 잘못 저지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들 무엇하고 후회한들 무엇하랴. 피네오스는 다양한 모양으로 석화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이제 그만 눈을 뜨고 나와 자기를 도와달라고 눈물로 애원했ㄷ다. 그는 부하들이 돌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래도 믿기지 않던지 일일이 손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211

무사이 중 하나인 우라니아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더니 높은 나뭇가지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유피테르의 딸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목소리가 어찌나 또렷했던지 미네르바 여신은 사람의 목소리거니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인사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새였다. 남의 목소리 흉내 잘 내는 까치 아홉 마리가 가지에 앉아 저희 팔자를 한탄하고자 인사를 했던 것이었다. 미네르바 여신이 놀란 듯한 얼굴을 하자 무사이 중 하나가 설명했다. 

[저것들 역시 새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들입니다. 저희들과의 노래 겨루기에서 져서 새가 된 것이지요. 원래 저것들은 펠라의 대지주 피에로스와 파이오니아 여자 에우이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입니다. 어미 에우이페는 아홉 번이나 저 위대한 여신 루키나를 불러 그분의 도움을 받아 딸 아홉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홉 자매는 저희들 수가 많은 것을 뽐내며 하이모니아와 아카이아의 여러 도시를 두루 여행하다 이 헬리콘까지 와서는 저희들에게 도전하더이다. 그 중 하나가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노래로 무식한 자들을 속이는 짓은 이제 웬만큼 해두세요, 테스피아이 신녀님들. 정말 노래에 자신이 있으시면 우리와 한번 겨루어보면 어떨까요? 우리라면 목소리로 보나, 기예로 보나 신녀님들께 못지않을 것이고 마침 숫자까지 같으니까요. 우리를 못 이기시면, 신녀님들은 메두사가 판 샘과 아가니페를 떠나세요. 우리가 지면 이 땅을 떠나 저 눈에 덮인 파이오니아까지 물러나겠어요. 요정들을 판관으로 세우고 어디 한번 겨루어보자고요.>218]

시켈리아 요정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요정 퀴아네가. 그래서 샘 이름도 퀴아네 샘....퀴아네는, 플루토의 수레에 실려가는 프로세르피나를 알아보고는 몸을 일으켰지. 그러고는 감히 플루토에게 이렇게 탄원했대. 

<플로투 신이시여. 더 이상은 못 가십니다. 케레스 여신께서 원치 않으시는 바에, 플루토 신께서는 결단코 여신의 사위가 되실 수 없으시는 바에, 플루토 신께서는 결단코 여신의 사위가 되실 수 없습니다. 플루토 신께서는 그분의 따님을 납치하실 일이 아니라 그분께 따님을 주시라고 청하셨어야 했습니다. 견주기가 황송스럽기는 하나 저 역시 강의 신 아나피스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그분이 당신의 신부 되어주기를 저에게 청하셨고 제가 그분의 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플루토 신께서 납치하신 그 처녀처럼 협박을 못 이겨 혼인했던 것은 결단코 아니랍니다.>

퀴아네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샘물로써 플루토의 앞길을 막았다지. 사투르누스의 아들 플루투가 한갓 샘에 지나지 않는 이 퀴아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을까?

플루토는 역정을 내면서 고삐로 말잔등을 치는 동시에, 그 힘 좋은 손에 든 저승의 왕홀王笏로, 탁, 이 샘을 쳤다지. 그러자 샘 바닥이 갈라지면서 하르타로스로 통하는 길이 열렸지. 플루토는 이 길을 통하여 저승으로 들어갔고, 퀴아네는, 납치당해 끌려가는 프로세르피나가 불쌍해서, 샘의 권리가 짓밟힌 것이 분해서 한없이 울었는데....가엾어라, 퀴아네. 얼마나 울었으면 슬픔이 요정의 육신을 녹여 물이 곧 요정, 요정이 곧 물이게 했을까. 225

그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오. 그대가 이렇게 우기니 프로세르피나를 마땅히 천궁으로 데려와야 할 일이기는 하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프로세르피나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야 하오.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것은 파르카에가 정한 법이니까>

유피테르로부터 이 말을 들은 케레스는, 프로세르피나가 저승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이 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 하지만 파르카에의 법은 카레스의 소원이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걸림돌. 프로세르피나가 저승에서 금식禁食의 법을 어겼구나. 231

무사이 신녀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미네르바 여신은, 신녀들이 분을 참지 못했던 일을 놓고 자기라도 참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하고 그들의 노래를 칭송했다. 여신은 그러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남을 칭송하는 것이 어찌 내가 칭송을 받는 것만 하랴. 칭송을 받는 것도 좋지만 신들의 권능을 업신여기는 것들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일이지....]

여신은 문득 마이모니아 땅에 살던 처녀 아라크네를 떠올렸다. 이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에 관한 한 미네르바 여신에 못지않게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처녀였다. 239

아라크네는 벌떡 일어났다. 아라크네의 뺨은 잠깐 붉게 상기되었다가는 곧 핏기를 잃었다. 새벽의 손길에 붉게 물들었다가 해가 돋으면서 창백해지는 하늘빛 같았다. 아라크네는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오직 이길 수 있다는 일념으로 제 운명과 맞서려 할 뿐이었다. 

유피테르의 딸도 더 이상은 이 아라크네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여신은 이 도전을 받아들여 곧 겨루기에 들어갔다. 여신과 아라크네는 방 이쪽저쪽에 놓인 베틀로 올라가 날실을 걸었다. 둘 다 부테허리를 허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바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로 밀어넣었다. 씨실에 날실을 지날 때마다 바디가 이 씨실을 쫀쫀하게 짰다. 옷을 걷어올려 젖가슴을 질끈 동여매고 여신과 처녀는 있는 힘과 기를 다해 베를 짰다. 이 둘의 손은 쉴새없이 베틀 위를 오고갔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읻들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일했다. 이들이 베에다 짜넣은 실에는, 튀로스 염료로 물들인 보라색 실은 물론이고 색조가 조금씩 다른 여러 가지 색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색실이 다른 색실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어디서부터 이 색실에서 저 색실로 바뀌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나기가 하늘에다 그려넣은 긴 활꼴 무지개와 흡사했다. 무지개가 지닌 여러 가지 색깔의 띠는, 맞물리는 곳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이는 법이다. 242

아라크네는, 황소로 둔갑하여 아이올로스의 딸을 범하는 넵투누스의 모습도 그림으로 짜넣었다. 넵투누스가 강의 신 에니페오스로 둔갑하여 알로에오스의 아내를 취하고 쌍둥이 아들을 끼치는 장면, 수양으로 둔갑하여 비살티스를 감쪽같이 속이는 장면도 짜넣었다. 오곡五穀의 어머니이자 자비로운 금발의 여신의 눈에는 이 넵투누스가 말로 보였고, 멜란토에게는 돌고래, 날개 달린 천마를 낳은 사발蛇髮의 공주의 눈에는 새로 보였다는 이야기도 거기에 그림으로 짜여들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묘사는 정확했고, 등장인물과 때와 곳데 대한 고증도 그럴듯했다. 포에부스 이야기도 있었다. 포에부스가 농부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고, 매의 깃털로 온몸을 가린 대목, 사자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었다. 목동으로 둔갑하여 마카레우스의 딸 이세를 희롱하는 대목도 있었다. 포도송이로 둔갑하여 에리고네를 취한는 리베르, 말로 둔갑하여 반인반마인 케타우로스 케이론을 끼치는 사투르누스도 있었다. 247

테바이 여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는 제사를 중도에 작파하고 라토나 여신에게 올리는 기도를 입 안에다 넣고 모두 그 자리를 떠났다. 

이를 내려다본 라토나 여신은 노발대발, 퀸토스 산정에 선채로 아들과 딸인 아폴로와 디아나를 불러 이렇게 푸념했다. 

[너희 둘을 낳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 어미는, 저 유노 여신을 제외하고는 어더한 여신에게도 꿀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었느냐? 내 신셩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너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오랜 세월 내가 섬김을 받던 내 제단에서 젯밥 얻어먹기도 어렵겠구나. 내가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너희들도 들었다시피 저 탄탈로스의 딸년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제 문벌이 나보다 나은 것을 자랑했고 나보다 자식 많은 것을 자세藉勢했다. 내 이년에게 당한 것을이년에게 돌려주고 말아야 겠다. 이년은 제 아비처럼 신들을 업신여겼다.  ]

라토나는 니오베를 향하여 욕지거리를 더 퍼부으려 했다. 그러자 아들 포에부스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하세요. 불평하시면 불평하시는 만큼 저 여자가 벌을 받는 시각이 지체될 뿐입니다. ]

그의 누이 포이베도 오라비와 의견이 같았다. 253

따가운 햇볕에 시달리면서 먼 길을 온데다두 아기에게 젖이라는 젖은 깡그리 빨리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여신이지만 오죽 목이 말랐겠습니까? 그런 참에 여신은 계곡 아래쪽에 있는, 크기가 고만고만한 호수를 발견했지요. 이 호숫가에서는 이 지방 농부들이 고리버들, 갈대, 사초莎草 같은 것을 꺽고 있었습니다. 티탄의 딸은 호숫가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있던 농부들은 여신에게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신은 이들에게 애원했지요. 

'왜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물이라는 것은 만물로 하여금 요긴하게 쓰라고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자연이 공기와 햇빛과 함께 넘실거리는 물을 창조한 것은 어느 한 동아리만 이롭게 하자고 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물을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이 물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무릎을 꿇고 여러분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물에 몸을 씻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걷는데 지친 다리를 담그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목을 축이자는 것뿐입니다. 나는 입이 말라 지금 말도 못하겠습닏. 목이 말라 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물을 마시신다면 이 물은 내게 넥타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물을 마시게 해주신다면 여러분은 내 목숨을 살려주시는 셈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이 물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생명까지 주시는 셈입니다. 260

[살려주세요. 어쩌자고 진짜로 내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까? 다시는 이러지 않겠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약속합니다. 피리 불기에서 졌다고 이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가 이렇게 고함을 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아포롤는 그의 껍질을 깡그리 벗겨버렸다. 이로써 그의 몸은, 전체가 하나의 상처가 된 것이었다.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신경의 가닥도 하나 남김없이 밖으로 드러났다. 껍질이 없어졌으니,  핏줄 뛰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벌떡벌떡 뛰는 내장기관과, 가슴 속의 허파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들판을 누비고 다니던 숲의 반신들인 파우누스들으 이 마르쉬아스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동아리인 사튀로스들은 물론, 그가 사랑하던 올륌포스, 요정들, 산에서 양떼나 뿔 달린 가축을 돌보던 목동들까지도 이 마르쉬아스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다. 기름진 땅은 눈물로 젖었다. 젖은 땅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가슴 깊슥이 빨아들였다. 땅은 이 눈물로 샘을 지어 땅 위로 용솟음치게 했다. 이 시냇물은 온 프뤼기아 땅에서도 가장 맑았는데, 사람들은 이 시내를 <마르쉬아스 시내>라고 불렀다. 263

장인 판디온과 사위 테레오스는 만나자마자 얼사안고 그간의 긴긴 회포를 풀었다. 테레오스는 자기가 아테나이에 온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청을 받고 처제를 데리러 온 것인 만큼 함께 가게 해주면 오래지 않아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말했다. 장인과 사위가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필로멜라가 들어왔다. 필로멜라는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바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오히려 이 성장이 무색했다. 필로멜라의 용모는,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나 깊은 숲속에 사는 드뤼아데스를 묘사하는 데 어울리는 말로써나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이들이 필로멜라처럼 단장하지 않는다면 그런 말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필로멜라를 보는 순간 테레오스의 가슴속에서는 욕망의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길은, 마른 옥수수 대궁이 아니면 건초 창고를 태우는 불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테레오스의 가슴속을 번져갔다. 필로멜라의 아름다움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테레오스는 제 성격 탓에, 그럴 만한 정도 이상으로 애를 태웠다. 원래 트라키아 사람들은 지극히 감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성과 테레오스 자신의 성격 때문에 이 불길은 삽시간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레오스는, 자기 왕국을 털어서라도 필로멜라를 오우이하는 시녀들에게 뇌물을 주고, 필로멜라를 기른 유모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필로멜라 자신에게도 귀한 선물을 안기고 싶다는 충동, 필로멜라를 납치하여 멀리 데려다 놓고는 이 아름다운 볼모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 고삐 풀린 충동에 따른다면 테레오스에게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안에서 번지며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 장인의 궁전에 더 머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267

이들이 베푸는 의식은 밤에 시작되는데 이 의식이 시작되면 로도페 산은 신도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와 바라 소리로 찌렁찌렁 울린다. 밤이 되자 왕비 프로크네도 이 신을 경배하는 데 필요한 제구祭具를 모두 갖추고 집을 나섰다. 머리에 쓰는 포도 덩굴관, 왼쪽 어깨에 드리우는 사슴 털가죽,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는 짧은 창, 이러한 것들이 박쿠스 신을 경배하는 제사에 필요한 제구이자 무기였다. 프로크네는 몸종들을 거느리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갖가지 생각으로 착잡했다. 프로크네는, 박쿠스 신의 광란에 쫓기는 신도로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 프로크네가 쫓는 거슨 슬픔 뒤에 오는 분노였다. 이윽고 프로크네는, 동생이 갇혀 사는 오두막에 이르렀다. 오두막 문은, 박쿠스 신도 특유의 외마디 소리와 광란의 몸짓과 함께 부서져 나갔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박쿠스 신도들 의상을 동생에게 입히고는 머리에 담쟁이 덩굴 관을 씌워 얼굴을 가려 왕궁으로 데려왔다. 

필로멜라는, 자신이 그 저주받을 자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낯빛을 잃고 부들부들 떨었다. 프로크네는 동생의 머리에서 박쿠스 신도의 관을, 몸에서는 박쿠스 신도 의상을 벗겼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껴안았으나 필로멜라는 얼굴을 들고 언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언니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74

[그렇게 무리한 말씀이 어디에 있어요? 한 사람의 수명에서 몇 년을 빼어 다른 사람에게 보태라니요? 헤카테 여신께서도 그런 것은 허락하시지 ㅇ낳습닏. 그대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서 내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이아손님이시여, 나는 그대가 바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드리렵니다. 세 얼굴을 지니신 여신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면, 내가 하려는 일을 어여쁘게 보아주신다면, 그대 수명에서 빼지 않고도 아버님의 젊음을 되찾아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달의 양쪽에 솟아난 두 개의 뿔이 만나 보름달이 되려면 사흘이 남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사흘이 지나 이윽고 달이 그 둥근 얼굴로 온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 날 밤, 메데이아는 발 밑까지 치렁치렁 드리워진는 옷차림에 머리는 풀어 어깨 위로 늘어 뜨린 채 맨발로 집을 나왔다. 메데이아는 한밤의 적막 속을 홀로 걸어 혼자만 아는 곳으로 갔다. 새도, 짐승도, 사람도 모두 잠든 시각이었다. 산울타리 속에서도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나뭇잎은 그저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밤안개 속을 흐르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자지 않는 별만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별들이 빛나는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들고 메데이아는 그 자리에서 세 바퀴 돌고, 저승의 강에서 길어온 물을 세 방울 머리에 뿌린 다음 세 번 하늘을 향해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런 다음 메데이아는 굳은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292

당시 날빛을 쐰 적이 없는 이 개는 나맃 아래로 나오자 세 개의 머리를 내두르고 몸부림치면서 몹시 짖었는데 이 바람에 이 개의 입에서 들은 침이 바닥을 적셨다. 이 침이 굳어졌다가 기름진 대지에 뿌리를 박고 풀로 돋아나니 이 풀이 바로 그 유명한 독초가 된 것이란다. 이 풀이 단단하 바위 위에서만 자란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것을 <아코니톤>이라고 부른다. 새기면<바위꽃>이 된다. 

하여튼 아이게오스는, 메데이아가 독약을 타서 건네준 술을 자기 아들에게 권했다. 물론 아들인 줄 모르고 권했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영문을 모르고 이 독약이 든 술을 마시려 했다. 그러나 아이게오스는 그 순간 테세우스가 찬 칼의 상아 자루에 자기 왕가의 문장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잔을 빼앗아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메데이아는 주문을 외어 검은 구름을 일으키고는 그 안으로 숨어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아이게오스 왕은 아들이 무사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한편 자기가 지을 뻔했던 죄에 대하여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제단에 불을 밝히고 신들에게 많은 제물을 바쳤다. 목에 꽃다발을 두른 수많은 황소들이 끌려나와 그 튼튼한 목으로 제단의 도끼날을 받고 쓰러졌다. 아테나이 사람들로서는 처음으로 누려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수많은 도시국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잔치에 참석했다. 포도주가 입을 열게 하자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테세우스를 찬양했다. 307

나는 신전 문 앞에 버려진 시체를 많이 보았습닏. 신들을 원망하고자 하는 자들이 그랬는지 제단 앞에도 시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내 백성 중에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은 자도 많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을 마중하고, 이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치고자 그랬던 것이겠지요. 장례의식을 통하여 제대로 주검 대접을 받은 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시 밖으로 실려나가지 모한 관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관이 고루 나가기에는 성문이 너무 비좁았던 것이지요. 매장도 하지 않고 버려둔 시체도 많았습니다. 화장도 못해서 무더기로 싸인 시체도 많았습니다. 시신에 대한 예의? 그런 것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어요. 화장할 장작을 두고 싸움질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남의 불에 제 식구의 시신을 사르려는 자들도 있었으니까요. 슬피 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소리를 듣지 못한 어머니의 영혼, 젊은 아내의 영혼, 늙고 젊은 사람들의 영혼이 정처도 없이 떠돌았지요. 무덤 쓸 땅도 넉넉하지 못했고, 화장할 나무도 넉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불의에 닥친 이 재난의 돌개바람에 하도 기가 막혀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대신께서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사랑하셨다는 사람들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저 같은 것을 아들로 용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제 백성을 살려주시거나 저 역시 백성들과 한 무덤에 묻히게 하소서>316

하늘을 날아 크레타 왕의 군막 앞에 내려 미노스 왕께 내 사랑과 내 느낌을 고백하고, 나를 아내로 맞아주시는 대신 지참금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면 나는 세 번 복을 받은 여자인 것을. 미노스 왕이 지참금으로 요구한다면, 내 아버지의 왕국만 빼고 이 세상에 무엇이 아까우랴. 아니다, 아버지의 왕국만은 안 된다. 아버지의 왕국을 버려야, 아버질글 배신해야 이룰 수 있는 사랑이라면, 내 비록 꿈은 간절하나 이 혼인이 내게 무슨 뜻이 있으랴. 관대한 승리자의 온정이 나라를 잃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수가 있기는 하다더라만....미노스 왕은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이 의로운 전쟁을 일으켰다지. 그에게는 든든한 명분도 있고, 이 명분을 지킬 막강한 군대도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지고 말 게 분명하다. 그래, 우리가 이 전재엥서 지게 되어 있다면,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사랑을 위하여 내가 성문을 열어주어서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가만히 있으면 저분의 군대가 성문을 깨뜨리고 들어올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성문을 열어주는 것이 낫지 않은가. 저분으로 하여금, 더 빨리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해주는 편이 낫지 않은가. 더 이상의 살육을 막고, 저분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이렇게만 하면, 나는 저분이 다칠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기야 저분이 누구인지 안다면야, 감히 저분의 가슴을 겨누고 창을 던질 만큼 심장이 강한 인간이 있을 리 없겠지만]

스퀼라의 마음은, 이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결국 스퀼라는 아버지의 왕국을 자신의 혼인 지참금 대신 미노스에게 바치고 이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자면 용기가 필요했다. 334

이윽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입을 맞추었다. 

다이달로스는 날개를 달고 먼저 하늘로 날아올라 뒤를 돌아다 보면서 뒤따라 날아오는 아들의 비행에 이것저것 참견했다. 높은 나무에 매달린 중지에서 새끼를 거느리고 날아나온 어미새처럼....그는 이카로스에게 바싹 뒤좇아 오라고 말하면서, 손으로는 날개를 조종하고 시선은 뒤따라오는 아들에게 둔 채 비행 기술을, 오래지 않아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비행 기술을 가르쳤다. 물에다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선 목동, 쟁기를 잡고 선 농부가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신들로 여겼을 터였다. 

이들의 눈에, 유노 여신의 성도聖島 사모스 섬이 왼손 편으로 보였고 델로스 섬과 파로스 섬은 이미 뒤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345

이 짐승이 논밭을 짓밟고, 덜 익은 이삭을 모조리 짓씹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의 타작마당과 곳간은 그래서 늘 빌 수 밖에 없었다. 포도송이는 익기도 전에 잎째 떨어졌고 올리브 열매는 익기도 전에 가지째 떨어졌다. 멧돼지는 가축도 공격했다. 멧돼지가 나타나면 목동도 개도 가축을 지킬 수 없었다. 사나운 황소도 멧돼지 앞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나운 황소도 멧돼지 앞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야 안전하다고 생각, 농토를 버리고 성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게 되자 멜레아그로스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이 짐승을 죽여 명예와 영광을 얻겠다고 나섰다. 

이 젊은이들의 면면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는 권투에 능하고 또 하나는 기마술에 능한, 튄다레오스의 쌍둥이 아들, 처음으로 배다운 배를 지었던 이아손, 절친한 친구 사이인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 테스티오스의 두 아들, 륀케오스와 발빠른 이다스 형제, 한때는 여자로 태어났다가 장성하여 남자가 된 카이네오스, 위대한 전사 레우키포스, 투창의 명수로 유명한 아카스토스, 히포토오스와 드뤼아스, 아뮌토르의 아들 포이니코스, 악토르의 쌍둥이 아들, 엘리스에서 온 퓔레오스, 텔라몬과 후일 아킬레오스의 아버지가 되는 페레오스, 페레스의 아들, 보이오티아의 이올라오스, 힘이 좋기로 소문난 에우뤼티온, 달음박질이라면 겨룰 상대ㅑ가 없는 에케온, 나뤽스 사람 렐렉스, 파노레우스와 휠레오스, 범 같은 장사 히파소스와 당시에는 젊은이였던 네스토르...351

창자루에 맞은 멧돼지는 불같이 노하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멧돼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숨결에도 불길이 섞여나왔다. 멧돼지는, 적국의 성벽이나, 군사들이 빽빽하게 올라가 있는 탑루를 향해 투석기가 쏜 바위처럼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무리의 오른쪽 날개 노릇을 하던 에우팔라모스와 펠라손이 멧돼지의 공격을 피하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땅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일으켜주지 않았더라면 멧돼지의 엄니에 찍혀 큰 변을 당했을 터였다. 이들의 경우와는 달리 히포코온의 아들 에나이시모스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멧돼지의 엄니를 피할 수 없었다. 공포에 떨면서 에나이시모스는 그곳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멧돼지의 엄니가 허벅지에 박히자 그는 다리를 꺽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퓔로스의 네스토로는, 멧돼지가 공격해 오자 창대를 장대삼아 짚고 가까운 나무로 뛰어올라, 밑에서 식식거리고 있는 멧돼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봉고도棒高跳 재간이 없었더라면, 네스토르는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을 터였다. 네스토로를 놓친 멧돼지는 참나무 둥치에다 그 엄니를 갈았다. 한동안 이렇게 엄니를 간 멧돼지는, 이 새로운 무기, 이 뾰족해진 엄니로 이번에는 히파소스를 공격했다. 히파소스는 멧돼지 엄니에 허벅다리를 찍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늘에 별로 박히기 전의 쌍둥이 형제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는 백설같이 흰 말을 타고 내달으면서 이 괴수를 향하여 창을 날렸다. 그러나 이들이 날린 창도 이 괴수에게서는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353

내가 저 아이를 죽여야 한다니, 견딜 수가 없구나. 하면, 저 아이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야 할까? 너희 형제는 죽어 음습한 땅의 망령으로 떠도는데, 죽어서 한줌의 재가 되었는데 저 아이는 이 멧돼지 사냥으로 칼뤼돈의 영우이 되고, 칼뤼돈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느냐? 안 된다. 그것만은 나도 용납할 수가 없다. 이 죄많은 것도 너희들처럼 죽어야 한다. 죽어서, 아비의 희망, 제 아비의 왕국과 함께 저승으로 가야 한다. 제 아비의 왕국은 쑥대밭이 되엉 하낟. 그러면, 아, 그러면 어미가 자식에게 보이는 자애는 어쩌고? 부모와 자식을 잇는 사랑의 끈은 어쩌고? 내가 저 아이를 배고 했던 열 달의 고생은 어쩌고?

내 아들아, 차라리 네가 아기였을 때 저 장작개비와 함께 네 생명을 태워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어미의 손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던 내 아들아. 이제는 그때 네가 받았던 생명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네가 한 일이 있으니 야속하다고 생각 말고 그 대가를 치러라. 이 어미로부터 두 번, 한 번은 이 어미가 너를 낳았을 때, 또 한 번은 불붙은 장작개비를 불 속에 꺼낼 때 받았던 그 목숨을 어미에게 돌려다오. 네가 그 목숨을 내어놓기 싫거든 이 어미를 어미의 아우들이 있는 저승으로 보내다오. 

아, 내 손으로 이 장작개비를 태우고 싶다만 할 수가 없구나. 피투성이가 된 내 아우들의 모습, 이들이 죽어가던 순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데도, 아들에 대한 어미의 사랑, 어미라는 이름이 이 결심을 깨뜨리는 구나. 나같이 팔자가 기박한 것이 또 있을까....아우들아. 너희들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승리하는 순간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이 누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느냐? 그러나 승리해야 한다. 너희에게 승리를 안긴 연후에 나 또한 너희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360

파메나는 원래 케레스 여신의 뜻과는 늘 엇길로 가기로 유명합니다만 이때만은 여신의 명을 그대로 좇아 시행했지요. 파메나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 곧 여신깨서 가르쳐주신 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이 참람한 인간 에뤼식톤의 침실로 들어갔고요. 에뤼식톤는 자고 있엇습니다. 밤이었으니까요. 파메나는 자고 있는 에뤼식톤을 끌어안고 입술, 목, 가슴 할것없이 가리지 않고 허기의 씨앗이 잔뜩 든 숨결을 내뱉아 이 씨앗이 핏줄 속으로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기아와 공포뿐인 제 고향으로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에뤼식톤은 날개 달린 솜누스의 도움에 힘입어 아주 곤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뤼식톤은 자면서 먹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꿈을 꾸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에뤼식톤은 자면서도 입맛을 다시고, 이빨을 갈고, 음식을 삼키는 시늉을 했더랍니다. 음식 대신에 하릴없이 바람만 잔뜩 들이마신 것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에뤼식톤은 시장기를 느끼고 미친 듯이 먹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위장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376


2권.
그러자 넵투누스의 용감한 아들 테세우스는 아켈로오스에게 한숨은 왜 쉬며 이마는 어쩌다 다쳤느냐고 물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갈대로 질끈 동여매고 있던 이 칼뤼돈 땅의 강신江神 아켈로오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대가 물으시는 것에 답하기가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노릇입니다. 이 세상에, 제가 진 싸움 이야기를 하기 좋아할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싸운 것 자체의 영광이 진 불명예를 덮을 수 있다면 말씀드려도 좋겠지요. 나는 그때의 싸움에서 진 것을 몹시 부끄러워합니다만 싸운 상대가 온 세상이 다 아는 영웅이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는답니다.
 
데이아네이라라는 이름 들어보셨겠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였답니다.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한다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이 처녀를 아내 삼으려고 그 아버지의 왕궁으로 몰려갔답니다. 나도 이 처녀를 얻으려고 장차 내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분께 달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파르타온의 아드님이신 왕이시여. 저를 따님의 지아비로 삼으로서>
 
그런데 저 유명한 헤라클레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거기에 와 있었습니다. 결국 다른 구혼자들은 다 떨어지고 나와 헤라크레레스만 사위 후보로 남게 되었지요. 나의 연적이 된 헤라클레스는 데이아네이라를 유피테르의 며느리로 삼아야 한다면서 저 유명한 열두 가지 난사難事를 열거하면서, 자기의 의붓 어머니인 유노의 명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었노라고 합디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되, 이 일은 헤라클레스가 신위에 오르기 전에 있었다는 것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인간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왕이시여. 저는 전하의 땅, 비탈진 물길을 도도히 흐르는 물의 왕입니다. 전하의 사위가 되고자 하는 저는 낯선 해변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라 전하의 신민 중 하나이고 전하가 다스리시는 왕국의 일부입니다. 천궁의 왕후이신 유노 여신의 미움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유노 여신으로부터 난사의 시험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해서 저를 내치시는 마소서.
 
그리고 알크메네의 아들이여, 그대는 유피테르 대신大神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대는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일 리 없을 터이거니와 만일에 그대가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또한 자랑 거리가 될 턱이 없다. 그대가 만일에 그대가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또한 자랑거리가 될 턱이 없다. 그대가 만일에 유피테르 대신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대는 이로써 그대 어머니의 간통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자, 어쩔 테냐?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테냐, 아니면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우겨 그대가 참으로 부끄러운 짓거리의 씨앗이라고 할 테냐?> 16
 
우리들의 그 황소와 비슷했지요. 헤라클레스는 세 번이나 자기 가슴을 내 가슴에다 대고는 나를 밀어보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내 손을 뿌리치고는 나를 한 대 쥐어박는데,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김에 솔직하게 말씀드리리다, 정신이 없더군요. 내가 비틀거리는 틈을 이용해서 이 친구가 재빨리 내 등에 올라탑디다. 내 말을 믿으세요, 나는 그대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고 불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에다 헤라클레스를 달고 있으려니 흡사 산 밑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는 내 말에 과장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찌어찌해서, 온통 땀에 젖은 내 팔을 그 친구의 팔과 내 가슴 사이에다 찔러넣을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몸을 조르는 그 친구의 팔을 좀 느슨하게 풀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소 느슨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제대로 숨으리 쉴 수가 없고 힘을 쓸 수가 없습디다. 헤라클레스는 잠시 후 팔로 내 목을 감더니 땅바닥에다 내동댕이 칩디다. 나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지요.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길래 나는 방법을 바꾸어 긴 뱀으로 둔갑, 재빨리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몸으로 나선형 똬리를 만들어 갈라진 혀로 쉭쉭 소리를 내고 있는 걸 본 이 티륀스의 영웅은 내 재주를 비웃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보에 싸여 있을 때 뱀을 잡은 나다. 아켈로오스야, 네가 뱀으로 둔갑은 했다만, 레르나의 휘드라에 비하니 네 모양이 초라하기 그지 없구나. 백 개나 되는 휘드라의 머리는 예사 머리가 아니다. 하나를 자르면 전보다 튼튼한 머리가 둘씩이나 돋아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머리가 아무리 많이 돋아나면 무얼 하느냐, 자르는 족족 돋아나면 무얼 하고 해치려는 자의 힘을 제 힘으로 이용해 먹으면 무얼 하느냐, 결국은 내 손에 도륙을 당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아라. 네가 둔갑한 꼴은 뱀 같다만, 내가 쓸 무기인 독니가 네 솜씨에 익은 것이 아니고, 그 형상이라는 것도 잠시 빌렸을 뿐인 형상에 지나지 않는데 네가 장차 내 손에 어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19
 
제단에는 이미 불이 지펴져 있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향을 사르고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읊조리며 포도주를 대리석 제단에다 부었다. 이 동안 제단에는 타는 불의 열기에 녹은 독은 그의 몸속으로 퍼져들어가 사지는 물론이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타고난 용기와 참을성으로 되도록이면 오래 그 고통을 참았다. 그러나 고통이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자 그는 제단 앞을 뒹굴며 오이타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예복을 몸에서 뜯어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복은, 뜯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단단하게 그의 살갗에 달라붙었다. 그런 예복을 한사코 뜯어내려고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그의 살점이 무수히 떨어져 나와 뼈가 보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는, 불같이 뜨거운 독물을 만나 쉭쉭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말하자면 그의 피는, 빨갛게 단 쇠를 만난 차가운 물처럼 끓어 올랐다. 고통은 끝이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독물이 불꽃이 되어 타올랐고, 그의 온몸에서는 검은 땀이 뚝뚝 들었다. 뒤틀리는 힘살에서는 탁탁, 힘줄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뼈는 이독하기 짝이 없는 독물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참다 못한 그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오, 사투르누스의 따님이신 유노 여신이여. 제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마음껏 보고 즐기소서. 높은 데서, 고통 받는 저를 내려다보시되, 그 심술이 가라앉을 때까지 마음껏 보소서. 제 팔자가, 제 적인 여신까지 불쌍하게 여겨야 할 만큼 기박하다면 실컷 보신 연후에 제 피를 말리는 이 고통, 이 몹쓸 영혼을 거두어가소서. 저에게 어울리는 선물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야말로 서자庶子인 저에게 주시기에 알맞은 선물입니다. 25
 
저의 원수인 에우뤼스테오스 왕은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저는 오장육부를 그을리고 사지를 태우는 이불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는데 누가 하늘에 신들이 있다하겠습니까?]
 
헤라클레스가 오이타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데, 그 모양은 사냥꾼이 던지고는 도망친 창을 맞고 그 창을 등에 꽂은 채로 울부짖는 들소와 비슷했다. 그는 신음하면서 이를 갈면서 몸에 달라붙은 그 예복을 뜯어내려 했다. 그러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나무를 쓰러뜨리거나 산에다 화풀이를 하거나 자기 아버지의 천궁이 있는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고는 했다. 28
 
불카누스가 헤라클레스의 몸으로부터 불에 탈 수 있는 것을 모조리 털어내자 이 영웅의 형상은 이 영웅을 떠났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영웅의 모습, 오로지 아버지 유피테르로부터 받은 것으로만 이루어진 영웅의 모습은 이제 지상에서 숨쉬던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고 새 비늘이 반짝이는 새 껍질로 거듭나듯이 티뤼스의 영웅도 필멸의 육체를 벗고 불사의 몸으로 거듭났다. 인간의 오체를 벗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그는 이전보다 더욱 위엄있는 모습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전능한 그의 아버지 유피테르는 그를 사두마차에다 태우고 구름으로 가려 천상으로 불러올리고는 반짝이는 별자리 사이에다 박아주었다. 아틀라스는 이 새로운 별의 무게를 어깨로 느낄 수 있었다.31
 
저희가 살던 곳에는, 경사가 완만한 둑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둑이 아주 좋아서 흡사 해변 같았어요. 물가에는 도금양挑金孃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요. 자기 팔자를 알 리 없는 드뤼오페 언니는 이 호숫가로 갔습니다.드뤼오페언니는 사실 요정들에게 바칠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호숫가로 갔던 것입니다. 언니는 한 살도 채 못 되는 아기를 안은 채 젖을 먹이고 있었어요. 호숫가에는, 튀로스 산産 보라색 옷감 보다 더 고운 보라색 물 로토스 꽃이 잔뜩 피어 알차게 열매를 맺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드뤼오페 언니는 아기에게 주려고 장난삼아 꽃을 몇 송이 꺽었습니다. 저도 마침 언니 옆에 있었어요. 저도 언니처럼 꽃을 몇 송이 꺽으려고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언지가 꽃을 꺽은 수련 대에서 피가 흐르더군요. 줄기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요. 나중에야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만, 그 나무는 파리아포스라는 자에게 쫓기다가 로토스 나무로 변한 요정 로티스였어요. 모습은 바뀌었어도 이름은 옛날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걸 알지 못하는 드뤼오페 언니는 파랗게 질리고 말았어요. 언니는 요정들에게 기도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죠. 하지만 언니는 발을 떼어놓지 못했습니다. 그때 벌써 발밑에 뿌리가 생겼던 것이죠. 언니는 이 뿌리를 뽑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만36 움직이는 것은 윗몸뿜이었어요. 땅에서 생긴 부드러운 껍질이 언니의 허벅지에 덮이는 것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언니는 일이 이렇게 되자 미친 사람처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손에는 이미 잎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곧 머리에도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죠. 암피소스(이게, 할아버지 에우뤼토스가 지어준 언니 아들의 이름이었습니다)는, 제 엄마의 젖이 굳어지면서 젖이 나오지 않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냥 거기에 서서, 팔자 기박한 언니가 나무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무로 변해가는 언니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머님, 정말이지 저도 언니처럼 나무로 변하여 그런 껍질에 갇히고 싶었습니다.
 
이윽고 드뤼오페 언니의 남편 안드라이몬과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이 두 분이 저에게, 드뤼오페 언니 어디에 있느냐고 하길래 저는 로토스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두 분은, 그때까지는 여전히 따뜻한 나무 둥치에 미친 듯이 입맞추며 나무의 뿌리짬에 매달렸습니다. 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얼굴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나무로 변해버렸던 것입닏. 언니의 몸이 있던 곳에 돋아 있던 잎에서는 눈물 같은 물기가 번졌습니다. 드뤼오페 언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움직일 수 잇던 입으로 울음에 섞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팔자가 기구한 인간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면, 내 신들께 맹세코 말하거니와,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지은 죄도 없이 이렇게 터무니 없는 벌을 받고 있다. 나는, 남들의 비난ㄴ을 받을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 잎은 내 가지에서 떨어질 것이고 내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며 내 둥치는 도끼에 찍혀 불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 이 아기를 이 가지에서 거두어가다오. 데리고 가서, 잘 보살펴주고 우유를 먹여주고, 자라거든 내 가지 밑에서 놀 수 있게 해다오. 말을 하게 되거든 이 어미에게, 슬픈 사연이나마 이런 말을 하게 해다오.
 
'우리 엄마는 이 나무 안에 숨어 있대요'37
 
이 밀레토스 땅에는, 내리흐르기도 하고 치흐르기도 하는 마이안드로스 강신의 아름다운 딸 퀴아네가 살고 있었다. 이 퀴아네는 아버지 강 마이안드로스의 아름다운 둑을 거닐다가 이 밀레토스의 눈에 들어 정분을 맺고 쌍둥이 남매를 낳으니 이 쌍둥이 남매가 바로 오라비인 카우노스와 누이인 뷔블리스다. 그런데 바로 이 뷔블리스가 세상 처녀들에게, 사랑해도 좋을 상대가 잇고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처년 뷔블리스가 제 오라비인 카우노스에게 품어서는 안 될 사랑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렇다. 이 뷔블리스는 오라비 카우노스를 대하되, 누이가 오라비를 대하는 그런 마음으로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정도를 넘어 무슨 연인 대하듯이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뷔블리스도 자기 마음에 깃들여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는, 당연한 것이거니 여기고 오라빙게 다정하게 입을 맞추거나 오라비의 목을 팔로 감아 안거나 했다. 

뷔블리스는, 자신의 행동에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꽤 오랫동안 저희가 남매간이라는 것에 기대어 제가 하는 짓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오라비에 대한 뷔블리스의 사랑은 상궤常軌를 저만큼 벗어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오라비를 만나야 할 때면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차려 입거나, 오라비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턱없이 애쓰거나, 자기보다 예쁜 여자가 오라비 곁에 있으면 터무니없이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45

이 사랑을 거절하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인즉, 이렇게 죽은 내 묘비에,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의 이름으로 그대 이름이 새겨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보내어보아야 하릴없는 이렇나 글귀를 서판에 가득하게 쓴 뷔블리스는, 더 이상 쓸 곳이 없게 되자 마지막 인사는 서판 가장자리의 빈 데에다 썼다. 이윽고 쓰기를 마친 뷔블리스는, 인장 가락지를 눈물로 적시어 서판에다 찍었다. 침을 발라 찍어야 했으나 입이 말라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가 부끄러웠으나 뷔블리스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시종 하나를 불러, 꾸민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고맙구나. 부디 이 편지를 전해다오. 나의....]

뷔블리스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이렇게 덧붙일 수 있었다. 

[....오라버니께.... ]

뷔블리스가 시종에게 이 서판을 건네주려는 찰나 서판은 뷔블리스의 손에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 불길한 징조가 뷔블리스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뷔블리스는, 이런 징조에 마음을 쓰지 않고 시종에게 서판을 주어 보냈다. 

시종은, 적당한 때를 보아 뷔블리스의 오라비 카우노스에게 뷔블리스의 밀서를 전했다. 마이안드로스 강신의 왼손은 그 서판을 받아 겨우 몇 줄을 읽고는 그 뜻을 짐작하고, 치를 떨면서 옆에서 부들부들 떠록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호령했다. 

[이따위 편지난 전하는 이 쓰레기 같은 놈!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거라! 한주먹에 때려죽이고 싶다만 너 같은 것을 죽여 내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

시종은 혼비백산 도망쳐 와 안주인에게 카우노스가 했던 말을 곧이곧애로 전했다. 51 
 
크레타 섬의 도시국가 크소소스와 인접한 파이스토스에 릭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릭도스는 명문과는 별 인연이 없는 평범한 집안의 자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재산도 크게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 생활에서나, 품행에서나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짓은 않고 사는 위인이었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내가 있었는데, 이 아내 텔레투사의 해산날이 가까워오자 릭도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내게는 바라는 것이 두 가지 있고. 하나는 그대가 되도록이면 진통으로 고생하지 않고 아기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아들을 낳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오. 딸은,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오. 불행히도 나는 딸을 먹여살릴 만큼은 넉넉하지 못하오. 그러니 그대가 딸을 낳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오. 만일에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도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다 가족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나를 용서하기 바라오]

이 말이 끝나자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엇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 남편보다는 이런 말을 들은 아내가 더 섧게 울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제발 그런 말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했지만 하릴 없었다. 남편의 결심은 이미 아내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했다. 55

신들은 나에게 주실 것을 모두 주셨다. 내 아버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 모두가 나와 같은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자연>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다. 그러나 이 자연을 누를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는 다가오고 있다. 혼인할 날이 임박했다. 이 날만 지나면 이안테는 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안테는 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 속에 갈증에 시달려야 한다. 기품 있으신 유노 여신이시여, 휘메나이오스 신이시여, 이 날 저희에게 오소서, 신랑은 하나도 없고 신부만 둘인 이 혼인 마당으로 오소서]

말을 마친 이피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안테의 사랑 역시 이피스의 사랑에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래서 이안테는 이안테대로 휘메나이오스 신이 하루빨리 오시기를 기도했다. 이안테가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 텔레투사는 갖가지 구실을 붙여 자꾸만 혼인 날짜를 연기했다. 때로는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어 연기했고 때로는 불길한 징조를 보았다거나 꿈자리가 나쁘더라는 구실을 대어 연기ㅐㅎㅆ다. 그러나 구실이나 핑계가 떨어져 도저히 더는 댈 수 없을 때가 왔다. 

질질 끌어오기만 하던 혼례식을 겨우 하루 앞둔 날의 일이었다. 

텔레투사는 딸 이피스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서, 자신의 머리와 이피스의 머리에서 댕기를 풀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제단을 치며 울부짖었다. 

[파라이토니움에도 거하시고, 마레오티스 땅에도 거하시고 파로스 땅에도 거하시고, 일곱 하구를 거느린 네일로스 강가에도 거하시는 이시스 여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의 이 근심을 없이 하여 주소서. 여신이시여, 옛날, 저는 여신을 뵈었습니다. 여신의 제단을 뵈었고, 여신을 보필하시는 분들을 뵈었으며 횃불도 보았고 신성한 악기가 울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여신의 말씀을 듣고 이를 제 기억에다 아로새겼습니다. 제 딸이 아직도 살아 있고, 제가 거짓말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여신께서 저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여신이시여, 저희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말을 마친 텔레투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때 여신이 텔레투사의 말을 들었다는 표적으로 신전을 흔든 것 같았다. 아니, 여신은 정말로 신전을 흔들었던 것이었다. 이어서 신전의 문도 일제히 흔들렸다. 여신의 이마에 달린 초승달 꼴의 장식이 달처럼 빛나면서 신성한 악기가 울렸다. 여신이 자기네 모녀를 도울 것이라는 확신은 얻지 못했으나, 좋은 징조를 보았는지라 모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전을 나올 수 있었다. 아피스는 어머니 옆에서, 늘 그러듯이 시원시원한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피부색이 변했다. 얼굴 생김새도 바뀌었다. 이피스의 근육에서도 힘살이 부풀어올랐다. 이피스는 여자리기보다는 남자 같았다. 실읹그 조금전까지만 해도 여자였던 이피스는 그 순간에 남자로 변한 것이었다. 마땅히 신전으로 달려가, 기뻐하는 마음으로, 믿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려야 할 일이었다. 텔레투사와 이피스는 신전 제단에다 제물을 바치고 거기에다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남겼다. 61

처녀로서 약속드렸던 이피스의 제물을, 
청년이 된 이피스가 드리나이다. 62

저는 제 아내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뱀에 물려 청춘의 꽃을 마음껏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은 제 아내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제가 이 슬픔을 참아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강한 인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참으려고 애썼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모르 신이 부리는 조화가 저에게는 너무나 힘에 벅찼습니다. 이 사랑의 신은 저 윗세상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만 아마 여기에서도 그럴 것입ㄴ디ㅏ. 제가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이곳을 다스리시는 신께서도 오래전에 이 사랑의 신이 쏜 화살을 맞으시고, 왕비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시어 윗세상에서 왕비님을 모셔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마 두 분께서도 이 사랑의 신을 아실 것입니다. 이 무서운 땅의 권능에 기대어, 이 끝없는 혼돈, 이 넓은 땅을 감도는 침묵의 권능에 기대어 소원합니다. 채 피기도 전에 져버린 에우뤼디케의 운명의 실을 다시 이어주십시오. 저희들 산것들은, 산 것들의 동아리들은 모두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팔자를 타고 태어났습니다. 빨리 오든, 늦게 오든 필경은 모두 이곳으로 와야 합니다. 저희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으며 이 곳은 저희들 최후의 안식처입니다. 인간은 이곳에 와서 영원히 이곳의 신이신 저승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도 다른 산 것들과 마찬가지로, 저 윗세상에서의 한살이를 마치면 신께서 다스리시는 땅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65

이 소년이 삼나무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 카르타이아에 이곳 카르타이아 벌판 요정들의 사랑을 받던, 갈래진 뿔이 유난히 튼튼하고 아름다운 수사슴이 한 마리 있었다. 이 수사슴의 뿔은 금빛으로 찬연히 빛났고, 그 뿔의 가지에는 귀한 돌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이 목걸이는 이 수사슴이 걸을 때마다 목과 어깨 위에서 출렁거렸다. 수사슴의 이마에는 이 수사슴이 태어날 때부터 은제銀製 호부護符가 가죽줄에 묶인 채로 붙어 있었다. 양쪽 귀에 매달린 진주귀고리는 관자놀이 위에서 오락가락했다. 이 수사슴은, 태어나면서부터 요정들의 사랑을 받아서 인간을 겁내는 것을 잊었는지 통 겁이 없어서 인가人家를 스스럼없이 드나드는가 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도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는 했다. 그러나 이 수사슴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람은, 케오스에서 가장 인물이 잘난 소년이었던 퀴파리소스였다. 퀴파리소스는 이 사슴을 푸른 풀밭이나 수정 같은 물가로 데려가거나 갖가지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그 뿔에다 걸어주고는 했다. 때로는 말을 타듯이 이 수사슴을 타고 앉아, 사슴의 부드러운 주둥이를 고삐 삼아 잡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사슴을 몰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정오, 거해좌巨蟹座의 긴 다리에 태양의 열기가 내리쬘 즈음 이 수사슴은 풀을 뜯는 데 지쳐 나무 그늘 아래 누위 쉬고 있었다. 그런데 퀴파리소스가 그만 부지불식간에 그 날카로운 창으로 이 수사슴을 찌르고 말았다. 사랑하던 수사슴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본 이 소년은 자기도 수사슴을 따라 죽기로 마음먹었다. 포에부스 신은, 사랑하는 수사슴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니 슾러하는 것은 당연하나 죽어가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것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이 소년을 달랬다. 72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또 이렇게 이어졌다. 

[이렇게 사악한 삶을 사는 여자들을 본 퓌그말리온은 자연이 여성들에게 지워놓은 수많은 약점이 역겨워 오랫동안 여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정말 혼자 산 것은 아니고,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솜씨로 만든, 눈같이 흰 여인의 상아상과 함께 살았다. 퓌그말리온이 만든 이 상아상의 여인은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퓌그말리온은 자기 손으로 만든 이 상아상의 여인을 사랑했다. 이 상아상은 살아 있는 여인이 가진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아상은 언제 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언제 보아도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다. 이 상아상을 만든 솜씨로 실로 인간의 솜씨로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신묘했다. 퓌그말리온은 틈만 나면 이 상아상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만든 이 상아상에 대한 사랑이 샘솟았다. 자주, 그는 그것이 정말 상아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살인지 확인하고 싶어 상아상의 살갗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고는 그것이 상아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쓸쓸해하고는 했다. 퓌그말리온은 이 상아상에 입을 맞추면서는 이 상아상이 이 입맞춤에 화답하기를 바랐다. 그는 이 상아상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상아상을 껴안기도 했으며 어쩌면 눌렀던 자국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손가락으로 이 상아상의 살갗을 꼭 눌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혹 상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너무 깊이는 누르지 않았다.]80

유모는 <아버님>이라는 말 대신 <그분>이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날 들은 것을 비밀에 붙이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이윽고 혼인한 여자들은 모두 케레스 신전으로 가는, 케레스 여신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제삿날이 되면 여자들은 모두 백설같이 흰 옷으로 단장한 다음 옥수수 이삭을 꽂은 꽃다발과 그 해에 처음으로 거둔 과일을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신전으로 갔다. 

여자들은, 이 제삿날이 오면 아흐레 동안을 금욕 기간으로 삼고 남편 곁에는 가지 않았다. 왕비이자 뮈라의 어머니인 케크레이스도 나라 안의 다른 여자들과 하메 이 밀의를 모시러 신전으로 갔다. 

키튀라스 왕의 침소에 왕과 잠자리를 함께 할 여자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공주의 원을 풀어준다는, 길 잃은 충정에 눈이 먼 유모는 키뉘라스 왕이 술에 취할 때는 기다렸다가는 살며시 다가가 말했다. 

<전하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사온데 인물로 말씀드리자면 가히 절색이라고 할 만합니다.>

왕이 유모에게 그 여자의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유모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뭐라 공주님과 동감입니다>

왕이, 그렇다면 그 여자를 침소에 들게 하라고 말하자 유모는 나는 듯이 뮈라에게 달려가 이런 말을 했다. 

<아씨, 아씨, 기뻐하세요,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뮈라에게 이것은 온 마음으로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불륜의 죄를 짓고 벌을 받을 생각이 뮈라의 마음 한구석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었다. 뮈라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만큼 착잡했던 것이었다. 91

<도망치는 짐승을 보거든 용기를 내어 쫓아도 좋다. 그러나 네가 사냥하려는 짐승이 너와 용기를 겨루려 하거든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런 짐승과 겨루는 것은 위험하다. 너로 인하여 고통 받는 것이 나라는 것에 유념하고 겁없이 대들지 말기 바란다. 자연이 너와 대적할 무기를 내린 짐승은 도발하지 말아라. 공연히 도발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명예에 대한 네 욕심 값을 나는 근심으로 치러야 한다. 베누스까지도 반하게 만들었던 너의 그 젊음, 너의 그 아름다움, 너의 그 매력도 사자나 멧돼지나 그 밖의 사나운 들짐승의 눈이나 사나운 성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멧돼지는 그 무서운 엄니로 전광석화 같이 공격하고 사자는 포악하여 언제나 인간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기다린다. 내 너에게 이르거니와 이런 짐승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

아도니스는 여신에게 사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여신은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너에게 들려주마. 오랜 옛날에 있었던  일이다만, 너도 들으면 놀랄 것이다. 하지만, 욕심 내어 뛰어다녔더니만 피곤하구나. 보아라. 마침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버드나무가 있고, 그 그늘에 풀이 잘 자라 있어서 눕기에도 안성맞춤이로구나. 여기에 너랑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하자>

여신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풀밭에 앉아 아도니스에게 기대었다가, 곧 머리를 아도니스의 가슴에다 파묻었다. 여신은 간간이 아도니스에게 입을 맞추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97

저 인물이 내 마음을 흔들기는 한다만 정작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저 젊음이다. 저 청년은, 청년이라기보다 아직 소년이 아닌가? 그렇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저 청년의 외모가 아니라 저 청년의 젊음이다. 게다가 저 청년에게는 용기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도 있다. 과연 해신의 자손답구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청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저 청년은 나와의 혼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운이 없어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저 청년은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안 된다. 가거라, 길손이여. 구혼자들의 피가 묻은 나를 버려두고 갈 수 있을 때, 너무 늦기 전에 가거라. 나와 혼인하기 위해 그대가 치러야 할 값은 너무 비싸다. 상대가 그대 같으면 어떤 여자도 지아비로 맞는 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지각있는 처녀라면 그대 같은 지아비를 맞게 해달라고 하늘의 신들께 기도까지 할 것이다....그러나, 가만 있자,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일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왜 저 청년으로 인하여 상심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미 내 앞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죽었는데? 저 청년의 걱정은 저 청년이 해야지 왜 내가 한다지? 죽고 싶으면 죽으라지. 수많은 구혼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렇게 나서는 것을 보면 사는 데 싫증이 난 모양이지.

그렇다면 저 청년은 죽을 것이다. 나와 함께 살고 싶어했다는 죄밖에 없는데도 죽을 것이다. 저 청년은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고통스러워할까? 사랑의 대가로 받는 이 부당한 죽음을? 그런 일이 생긴다면.....나도 내 승리를 역겨워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인가? 그러나 죽지 않을 수도 있다. 101

이 농부들은 광기 들린 여자들을 보자 농기구를 밭에다 버려두고 도망쳤다. 이들이 떠난 밭에는 괭이, 고무래, 호미 같은 연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광기 들린 여자들은 이 연장을 주워들고는 먼저 뿔을 앞세우고 이들을 위협하는 소를 갈가리 찢어죽인 다음 오르페우스에게 덤벼들었다. 오르페우스는 폭도와 다름없는 이들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의 말은 이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오르페우스는 이미 말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여자들은 오르페우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는 그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오르페우스의 숨결응ㄴ, 바위의 마음을 움직이던 그 입, 들짐승의 마음도 누그러뜨리던 그 입을 통해 빠져나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슬픔에 잠긴 새떼, 들짐승 무리,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노래에 울고 웃던 나무와 바위, 모두가 오르페우스를 위해 울었다. 나무는 모두 그 잎을 벗고, 알몸이 되어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슬퍼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강물은, 스스로 흘린 눈물 때문에 물이 불어 둑을 넘었고, 물의 요정, 숲의 요정들은 머리를 풀고 검은 상복을 입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오르페우스의 사지는 갈가리 찢긴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의 머리와 수금을 받아들인 것은 헤브로스 가ㅓㅇ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머리와 수금이 강 위를 떠가면서 나직한 가락을 지어내었고 강둑은 그 노래를 듣고 눈물로 화답했다는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은 강물에 실려 고향 땅을 떠나 바다로 흘러갔다가 이윽고 메튐나 가까이 있는 레스보스 섬에 이르렀다. 머리카락이 바닷물에 흠씬 젖은 채 해변에 떠오른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이곳에서 뱀테의 습격을 받았다.111

미다스 왕은, 자기가 섬기던 신의 스승이자 비교의 교우인 이 실레노스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들여 밤 열흘 낮 열흘 잔치를 베풀었다. 열하루째 되는 날 루키페르가 하늘의 별들을 몰아낼 즈음, 왕은 이 실레노스를 뤼디아로 데려가 거기에 있는 박쿠스 신도들에게 인도했다. 

박쿠스 신은 스승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크게 반가워하면서 미다스 왕에게 선물을 하나 내리고 싶다는 말을 했다. 박쿠스 신은 미다스 왕에게 우엇이든 좋으니 소원을 하나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미다스 왕에게, 이 박쿠스 신이 내리는 선물은 좋을 것이 없었다. 그 까닭은 이 미다스 왕이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팔자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쿠스 신이 소원을 하나 대라고 하자 미다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제 손이 닿은 것이면 무엇이든 황금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박쿠스 신은, 그보다 나은 소원이 얼마든지 있을텐데....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프뤼기아 왕 미다스는 , 저에게 횡액이 내린 것도 모르는 채 좋아라 하고 제 나라로 돌아갔다. 제 나라로 돌아간 미다스는 박쿠스 신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 마음이 생겨 손에 잡히는 참나무 가지를 하나 꺽어보았다. 신통하게도 참나무 가지는 그의 손이 닿자마자 황금 가지로 변했다. 그래도 미심쩍었던 미다스 왕은, 이번에는 땅바닥의 돌멩이를 하나 주워올려 보았다. 돌멩이도 그의 손 안에서 금덩어리로 변했다. 흙을 한 움큼 쥐어봐도 흙은 금이 되었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잘 익은 곡식의 이삭을 하나 잡아보아도 황금 이삭이 되었고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한 알 따보아도 황금 사과가 되었다. 115

결국 이 판은 감히 아폴로와 음악을 겨룰 생각을 했다. 심판은 토몰로스 산신이 맡기로 했다. 나이 많은 이 산신은 산 사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금이라도 더 잘 들을 욕심으로 귓속에서 자란 나무라는 나무는, 머리카락 대신인 참나무만 남겨놓고 다 뽑아내었다. 그의 관자놀이에는 도토리가 잔뜩 매달려 대롱거렸다. 

[심판 볼 준비는 다 되었소]

산신이 판과 아폴로 신에게 말했다. 

판은 피리를 꺼내어 한 곡조 멋들어지게 불었다. 판의 가락은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미다스의 귀에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었다. 판의 피리 소리를 다 들은 트몰로스 산신은 고개를 돌려 아폴로 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트몰로스 산의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아폴로 신을 바라보았다. 아폴로 신은 파르나소스의 월계수로 금발을 질끈 동여맨 채, 보라색 옷자락을 끌며 나왔다. 그는 왼손에 힌두스 상아 무늬가 박힌 수금, 오른손에는 수금채를 들고 있었다. 아폴로 신이 악신樂神답게 한 곡을 연주하자 트몰로스 산신은 그 가락에 취해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 판의 피리 소리보다는 아폴로 신의 수금 소리가 낫다고 판정했다.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청중들도 모두 이 점잖은 산신의 판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미다스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공정하지 못하다면서 심판의 판정에 항변했다. 델로스의 신은, 이같이 어리석은 자의 귀가 여느 인간의 귀와 같은 모양을 하고있는 것이야말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117

우리는 새벽이 되어 새벽의 여신을 불러놓고서야 잠자리에 드는 루키페르를 아버지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형과는 달라서 나는 평화를 사랑했습니다. 평화와 부부생활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습니다만, 형은 전쟁을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용감한 그는, 많은 왕들의 무릎을 꿇리고 많은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보세요, 저렇게 모습이 바뀌어도 티스베의 비둘기를 떨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키오네라고 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자색이 고와서 열네댓 살 때 이미 청혼자들을 무수히 모여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델로이에서 온 포에부스 아폴로와 퀼레네에서 온 마이아의 아들 메르쿠리우스가 동시에 이 키오네를 보고는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메르쿠리우스는 밤이 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최면장으로 얼굴을 건드려 이 아이를 잠재우고는 그만 사랑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어 별들이 하늘을 채울 즈음 포에부ㅠ스 아폴로는 노파로 둔갑하여 키오네에게 접근, 이미 메르쿠리우스가 차지한 바 있는 이 아이를 껴안았습니다. 달이 차자 케오네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신의 아들인 아우톨뤼코스인데, 이 아이는 제 아버지처럼 사술詐術에 능하여 흰 것을 능히 검게 할 수 있었고, 검은 것을 능히 희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포에부스 아폴로의 아들인 필라몬인데, 이 아이는 제 아버지처럼 노래를 잘 부르고 수금을 잘 탔습니다. 125

[왕비시여, 당신의 두려움은 아름다운 당신에게도 어울리고, 지아비에 대한 당신의 사랑에도 어울립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시오. 이렇듯이 나를 도와주시려는 케위크스 왕께 감사드립니다만, 내게는 무력으로 저 괴물을 퇴치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무력을 쓰는 대신 바다의 여신들에게 기도를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성채 위에는 높은 탑이 있었다. 오랜 항해에 지친 뱃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이정표가 될 만한 탑이었다. 펠레오스 일행은 그 탑으로 올라가, 울부짖는 소, 죽어 나자빠진 소, 턱 긑으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면서 좌충우돌 소를 찢어죽이는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펠레오스는 두 팔을 벌리고 바다의 여신에게, 이제는 그만 노여움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했다. 바다의 여신 프사마테는 처음에는 노여움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햇다. 바다의 여신 프사마테는 처음에는 노여움을 거두지 ㅇ낳았으나 테티스가 남편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바람에 화를 가라앉혔다. 바다의 여신이 화를 가라앉혔는데도 불구하고 괴물은 그 성질을 눅이지 않았다. 피맛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테티스 여신이 이 이리를 대리석으로 화하게 했다. 대리석상이 된 이리는, 색깔만 달랐을 뿐 모양은 이리였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리가 대리석상으로 변한 뒤에도, 그 땅에 머물 팔자를 타고나지 못했던 펠레오스는 그 땅을 떠나 오래 방황하다가 이윽고 마스네시아 땅에 이르렀다. 펠레오스의 살인죄를 닦아준 사람은 하이모니아 왕 아카스토였다. 129

배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적은 성 밖에서 공격하고 백성들은 안에서 혹은 저항을 계속하고 혹은 앞서 들어온 적의 칼날에 쓰러지는 한 도시국가의 최후와 비슷한 형국이었다. 뱃사람의 용기는 이미 간 곳이 없었다. 사기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파도는 이들의 방어망을 허물고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뱃사람들 중에는 우는 사람도 있었고, 망연자실 가만히 서있는 사람도 있었다. 시신을 찾아 장례나 치러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과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집에 남겨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는 것만은 다 같았다. 케위크스가 생각한 것은 오직 알퀴오네뿐이었다. 케위크스의 입가를 맴돈 것은 오직 알퀴오네라는 이름뿐이었다. 메위크스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알퀴오네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알퀴오네를 보고 싶어하면서도 알퀴오네가 그 배가 타고 있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케위크스는, 조국의 해변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바다는 쉴새없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고, 어둠은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고향이 어느 쪽에 있는 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35

알퀴오네는 케위크스가 왔던 흔적이 남아 있기라도 한 듯이, 꿈속에서 케위크스가 서 있던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울부짖었다. 

[저를 버리고 떠나지 마시라고 한 것은, 맞바람이 치는 곳으로 가시지 못하게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답니다, 그대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두려워서 한사코 말렸던 거랍니다. 그대가 어쩌면 그런 일을 당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저를 데려가달라고 했던 거랍니다. 데려가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데려가주셨으면 그대 없는 세상을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데려가주셨으면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을. 저는 그곳에 없었지만, 저는 그대와 바다에서 죽지 못했지만, 제 마음은 이미 바다 속에 들어가 있답니다. 이 세상에 남아 목숨을 부지하려고 애쓴다면, 이 슬픔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면 저는 그대를 앗아간 바다보다 못한 여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슬픔과 싸우면서 살지는 않으렵니다. 그대 없는 세상을 살지는 않으렵니다. 우리를 태운 재가 비록 한 항아리에 들지는 못할지언정, 비록 그대와 나란히 묻히지 못할지언정 저는 그대 뒤를 따르렵니다. 제 뼈가 그대 뼈와 섞이지 못할지언정 제 이름만이라도 그대의 이름과 나란히 새겨지게 하렵니다.]142

이 말 끝에 아킬레오스는 뤼키아 사람인 메노이테스를 향하여 창을 던졌다. 창은 메노이테스의 흉갑을 뚫고 가슴에 박혔다. 메노이테스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아ㅑ킬레오스는 메노이테스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들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이 팔, 이 창은 다른곳에서 공을 세우던 그 팔, 그 창과 다르지 않다. 어디 이 창을 이 퀴크노스라는 자에게 던져보아야 겠다. 이 창에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벌틸 수 있는지 어디 보자]

아킬레오스는 메노이테스의 가슴에서 뽑아낸 창을 퀴크노스에게 던졌다. 물푸레나무로 창자루에 청동 창날을 해박은 창은 겨냥을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날아갔다. 퀴크노스는 창을 피하지 않았다. 창은 퀴크노스의 어깨에 맞았다. 그러나 창은, 바위에 맞은 듯이 되튀어나왔다. 그런데도 퀴크노스의 어깨에서는 피가 들었다. 어깨에서 피가 듣는데도 퀴크노스는 웃고 있었다,. 퀴크노스의 어깨에서 듣는 피는 퀴크노스의 피가 아니었다. 창에 묻었던 메노이테스의 피였던 것이었다. 155

<술이 그렇게 좋거든 스튁스 강물을 섞어 마시게>

포르바스는 이러면서 창을 던졌네. 아피다스는 반듯이 누운채 손만 내밀고 있다가 목이 창에 꽂히는 바람에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네. 아피다스의 목에서 쏟아진 피는 와상의 깔개를 적시면서 술잔에 고였네.

페트라이오스가 도토리가 잔뜩 열린 떡갈나무를 뽑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게 눈에 띄더군. 두 팔로 나무 둥치를 안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용을 쓰는데 아닌게 아니라 나무가 금방이라도 뽑힐 것 같았네. 하지만 뽑히면 뭘 하나. 페이피토스가 창을 던져 페트라이오스의 몸과 나무 둥치를 한 창날에 꿰어버렸는걸. 뒤에 들었는데, 뤼카스와 크로미스도 페이리토스의 손에 죽었다더군. 헬로프스는, 페이리토스가 던진 창이 오른쪽 관자놀이로 들어가 왼쪽 관자놀이로 나오는 바람에 죽었고, 딕튀스는 좁은 산길으 따라 도망치다가 죽었지. 뒤따라오는 페이리토스에게 쫓기다가 벼랑으로 떨어져, 제 무게에 부러진 물푸레나무에 꿰여 죽었던 게야. 

아파리오스가 딕튀스의 복수를 한답시고 산비탈의 바위를 하나 들어 페이리토스에게 던지려고 했네만, 테세우스가 이걸 보고 있다가 들고 다니던 참나무 몽둥이로 이 아파리오스의 팔꿈치를 부숴버렸지. 켄타우로스를 더 죽일 기분도 아니고, 죽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테세우스는 키가 유난히 큰 켄타우로스인 비에노르의 잔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네. 비에노르의 잔등? 주인 아니면 아무도 태워주지 않던 잔등이었다네. 165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켄타우로스가 또 하나 있네. 파이오코메스라는 켄타우로스인데, 당시에는 여섯 장의 사자 가죽을 갑옷삼아, 인간의 형상을 한 상반신과 말의 형상을 한 하반신에 두루 걸치고 다녔지. 이 파이오코메스는 황소 두 마리가 끌어도 끌여올까말까 한 나무 둥치를 안고 휘두르다가 이걸로 올레노스의 아들인 텍타포스의 머리를 갈겼네. 머리가 부서지면서 안에 들었던 게 사방으로 튀고, 입과 코와 눈과 귀로 나오는데....참나무로 만든 통에서 우유가 새나오는 것 같았네. 그러나, 자네 부친이 잘 알고 있네만, 이 장의 허벅지를 칼로 찌른 것은 바로 나였네. 크토니오스와 텔레보아스도 내 칼 아래 쓰러졌지. 크토니오스는 나뭇가지로 만든 몽둥이를 휘둘렀고, 테렐보아스는 창을 휘두르다가 내 손에 죽었네만, 텔레보아스의 창에 찔린 상처의 흉터는 지금도 여기에 남아 있네. 보게 여기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지 낳은가. 아, 그 시절에 이 트로이아 원정이 있었더라면....그 시절에는 내게도 힘이 있었네. 그 시절 같으면 헥토르를 이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하는 것만은 적어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헥토르가 나기도 전인걸, 아니, 어린아이였을 시절이었나? 169

트로이아 군 쪽에서 보면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리스 군에서 보면 거룩한 평화의 수호자였던 이 불굴의 전쟁영웅도 결국은 화장단 위에서 재가 되었다. 아킬레오스의 갑옷을 지어주었던 그 신이 이번에는 불꽃으로 그의 육신을 소진시킨 것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범 같은 장수였던 아킬레오스도 재가 되었을 때는 항아리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온 세상에 차고 넘쳤다. 아킬레오스라는 이름이 있을 곳으로 마땅한 곳은 넓디넓은 우주뿐이었다. 이 펠레오스의 아들은, 영원히 살 곳으로 마땅하지 않다고해서 타르타로스의 나라에도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남긴 방패까지도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남은 장수들은 그가 남긴 무기가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다투었을 정도였다. 그의 유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도 아무나 끼여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튀디데스도, 오일레오스의 아들인 아이아스 도, 아트레오스의 작은 아들도, 나이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아우보다는 윗길인 큰아들도 끼여들 수 없었다. 아킬레오스의 유품을 두고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와 라에르테스의 아들 울릭세스뿐이었다. 179

그러나 나와 더불어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오뒤세우스의 인품은 이 신성한 유품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아이아스는 설사 이 유퓸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아스가 차지하기 전에 이미 오뒤세우스에게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잇었기 때문입니다. 오뒤세우스가 욕심을 부렸다는 사실만으로 이 유퓸은 더 이상 신성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적수인 오뒤세우스는, 설사 이 논쟁에서 패배하고 유품을 나에게 양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보람은 얻은 셈입닏. 오뒤세우스라는 이름은, 오뒤세우스가 이 아이아스를 상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명해지게 될 테니까요. 

나를 보십시오. 내 용기를 의심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이 신성한 유품의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 나와 아킬레오스는 같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텔라몬의 아들입니다. 테라몬이 누굽니까? 영웅 헤라클레스의 휘하에서 트로이아 성벽을 깨뜨렸던 장수, 파가 사이에서 자은 배로 콜키스 해변에 상륙하신 분입니다. 텔라몬의 아버지 아이아코스는 지금 고요가 지배하는 저 망령의 나라의 판관으로 계십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던가요? 아이올로스의 아들이자, 여기에 있는 이 오뒤세우스의 조상인 시쉬포스가 무거운 바위를 험한 산정으로 굴려올리는 무서운 벌을 받고 있는 나라입니다. 184

금으로 치장한 투구를 이 사람에게 씌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숨기 좋아하는 이 사람이 이 금빛 투구 때문에 숨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금방 적의 눈에 띄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오뒤세우스가 저 무거운 아킬레오스의 투구를 쓰고 배겨낼 것 같습니까? 펠리온 산의 물푸레나무로 자루를 해박은 아킬레오스의 창은, 저렇게 약한 오뒤세우스에게는 너무 무거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훔치는 일이나 능사로 아는 오뒤세우스의 가냘픈 왼팔에, 넓고넓은 우주를 새겨넣은 아킬레오스의 방패가 당할 것같습니까? 오뒤세우스, 참으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이여, 그대를 파멸케 할 이런 것들에 왜 욕심은 내는지 모르겟군요. 만일에 그리스 군에서 이 아킬레오스의 유품인 무기를 그대에게 내리는 실수를 범하는 경우, 그대의 목숨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대에게 능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도망치는 것인데, 이런 무기를 몸에 지닌다면 그대는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의 방패만 해도 그렇습니다. 재대로 싸워보지 못한 그대 방패이니만큼 아직은 말짱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내 방패는 전장에서 수천 개의 창을 받은 방패라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새 방패가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누가 유품의 임자가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기로 합시다. 이 영웅의 우품을 적진에다 던져두고 우리 둘을 보내어 이를 찾아오게 해주십시요. 이로써 찾아오는 사람을 임자로 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말이 끝났다. 장수들 쪽에서는 아이아스의 말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0

수많은 그리스 군 가운데서 디오메데스에 의해 유일한 전우로 꼽힌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아니오. 나는 디오메데스와 함께 저 위험한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갔소만, 이는 내가 제비뽑기를 잘못해서 간 것이 아니오. 우리는 적도,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숨어들어가 우리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던 적장 돌론을 잡아죽였소. 그러나 그냥 불문곡직하고 잡아죽인 것은 아니오. 우리는, 이 자로부터 자백을 받고, 트로이아가 무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에야 이 자를 죽였소. 그렇소,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는 적에게서 빼앗은 병거를 타고 개선장군들처럼 돌아왔소. 적의 밀정은, 공을 세울 경우 아킬레오스의 말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고 합디다. 그러니 이 밀정을 잡아죽인 나에게 아킬레오스의 유품인 무기를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만일에 여러분이 나에게 아킬레오스의 무기를 준다면 아이아스는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99

그리스의 장수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저 아이아스에게 내리려던 상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여러분을 보살펴왓던 이 사람에게, 그 숱한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이러한 명예를 내리시어 내가 세운 공적을 빛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운명의 족쇄를 풀었고, 트로이아의 봉쇄를 가능하게 하여 저 험하디험한 트로이아 성을 여러분의 손에 붙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것이 된 희망의 날에 기대어, 미구에 폐허가 될 트로이아 성에 걸고, 우리가 적의 손으로부터 빼앗은 신들의 이름에 걸고, 우리가 지혜로운 조언을 따라 해야 하되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 일에다 걸고 여러분께 말합니다.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트로이아를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일이 아직도 남아 있거든 이 오뒤세우스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아킬레오스의 무기를 나에게 주지않으려거든, 여기에다 바치십시오!]

오뒤세우스는 미네르바의 성상을 가리키며 연설을 끝마쳤다.

장수들은 오뒤세우스의 웅변에 술렁거렷다. 웅변의 힘은 과연 위대했다. 영웅 아켈리오스의 유품인 무기는 이 웅변가인 오뒤세우스의 차지가 되었으니까....

혼자서 헥토르를 대적하고, 불과 창칼과, 심지어는 유피테르 대신과 맞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이아스는 분노로 마으을 가누지 못했다. 슬픔과 분노가,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던 아이아스를 정복한 것이었다. 그는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쳤다.207

[누가 뭐라고 하든, 이 칼만은 내 것이다. 아니다, 오뒤세우스는 이 칼까지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이것뿐이다. 트로이아 군의 피를 부르던 이 칼이, 이제 아이아스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이 칼의 주인, 아이아스의 피를 부를 것이다.]

아이아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급소인 가슴에다 칼끝을 대고 깊이 찔러넣었다. 그의 팔은, 찔러넣은 칼을 다시 뽑아내지 못했다. 칼을 뽑아낸 것은 용솟음치는 핏줄기였다. 피에 젖은 대지는, 휘아킨토스의 피에 젖은 대지에서 피었던 것과 똑같은 보랏빛 꽃을 피워올렸다. 꽃잎 한가운데엔, 미소년 휘아킨토스의 죽음과 아이아스의 죽음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자는, 휘아킨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탄식인 동시에 이 영웅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두 문자이기도 했다. 208

[아키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파우누스인 아버지와 바다의 요정인 쉬마이티스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부모님은 이 아키스를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나는 부모님 이상으로 이 아키스를 사랑햇다. 내가 사랑한 인간은 오직 아키스뿐이었으니까.

정말 잘생긴 청년이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 부드러운 턱이 보드라운 솜털로 덮이기 시작하는. 나는 이 아키스를 사랑햇다. 하지만, 이 일을 어째? 외눈박이 거인인 플뤼페모스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는걸. 모르겠어. 아키스에 대한 내 사랑의 감정이 강했는지, 폴뤼페모스에 대한 내 증오의 감정이 강했는지는....아마 비슷비슷했을거야.

스퀼라, 저 사랑의 여신 베누스는 하넚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이 여신이 부리는 조화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란다. 괴물 폴뤼페모스가 누구더냐? 들짐승들도 두려워하는 폴뤼페모스, 나그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폴뤼페모스, 심지어는 올륌포스 신들에게도 대든 폴뤼페모스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 폴뤼페모스라는 괴물도 사랑을 알고 나니 참으로 희한해지더구나. 사랑을 알고 난 뒤부터 폴뤼페모스는 가슴에 불이 붙었는지 양떼고 동굴이고 도무지 아는 체를 하지 않아. 포뤼페모스가 흉측한 제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남들 눈에 들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 게 이즈음부터였어. 나뭇가지를 꺽어들고 머리를 빗는가 하면, 낫으로 수염을 깍고는 맑은 물에 제 모습을 비추어보고는 울지를 않나, 웃지를 않나]229

처녀 스퀼라는 도망쳤다. 그러나 글라우코스는, 온갖 말로 처녀를 달래며 쫓아왔다. 스퀼라는 있는 힘을 다해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스퀼라가 서 있는 산꼭대기의 솦에서는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엿다. 스퀼라는 이곳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글라우코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스퀼라로서는 글라우코스가 괴물인지 바다의 신인지 알 수 없었다. 

스퀼라의 눈에 글라우코스의 모습은 기이했다. 어깨를 지나 등까지 덮고 있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초록색이었다. 글라우코스의 하반신은 인간의 하반신이 아니라 물고기의 하반신이었다. 글라우코스는, 스퀼라가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까이 있는 바위에 기대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처녀여, 나는 괴물도 아니고 바다에 사는 맹수도 아니다. 나는 이래봬도 어엿한 바다의 신이다. 이 바다에서는, 바다의 신들인 프로테오스도, 트리톤도, 아타마스의 아들인 필라이몬도 나를 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도 과거에는 인간이었다. 나는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에서 나는 물산物産 거두는 일을 업으로 삼을 만큼 바다를 좋아했다. 인간이었을 적에, 나는 낚싯대로도 고기를 잡았고 그물로도 고기를 건졌다.]237

[스퀼라가 살아 있는 한, 바다에 들풀이 돋고, 산꼭대기에 해초가 자랄지언정 스퀼라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신 키르케는 화를 내었다. 그러나 키르케는 글라우코스를 해칠 수가 없었다. 해칠 마음도 없었다. 글라우코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키르케는, 그래서 글라우코스에게 분풀이하는 대신 자기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인간 스퀼라에게 분풀이할 결심을 했다. 사랑을 거절당한 키르케는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가 무서운 독초를 모아들인 다음 이를 가루로 만들고 헤카테 여신으로부터 배운 주문을 외며 이 독초 가루를 섞었다. 이윽고 독약 만들기를 끝낸 키르케는 검은 옷을 입고 궁전을 나가 궁전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짐승 무리 사이를 빠져나갔다. 키르케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흐르는 이곳의 급류를 마른 땅 밟듯 지났다. 이 근방에는, 스퀼라가 자주 와서 노는 초승달 모양의 만灣이 있었다. 태양이 남중하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바람에 그림자 길이가 가장 짧은 시각이었다. 스퀼라는, 이런 시각이면 물에서 나와 짧으나마 그늘을 찾아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나 키르케가 머지않아 스퀼라가 오겠거니 여기고 스퀼라가 자주 멱을 감는 웅덩이에다 가지고 온 독초 가루를 풀면서, 아무도 들은 적이 없는 주문을 아홉 번씩 세 차례 읊었다. 243

<그대가 바람을 타고 도망쳐 보아라.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 내가 누구더냐. 내 약초가 어떤 약초인 줄 아시는가. 그대는 내 마법을 피할 수는 없을 게다.>

키르케 여신은 이러면서 가짜 멧돼지를 한 마리 지어 피쿠스왕 앞을 지나가게 했어요. 물론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지요. 여신이 지어낸 이 멧돼지의 환영은, 빽빽한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나무가 어찌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지 말을 타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숲이었지요. 피쿠스 왕은, 그게 가짜 멧돼지인 줄 모르고 말 잔등에서 내려 이 가짜 멧돼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어요. 키르케 여신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피쿠스 왕을 보면서 정체 모를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문과 주문을 외었어요. 키르케 여신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백설같이 밝던 달이나 여신의 아버님이신 태양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262

이렇게 해서 디오메데스를 찾아왔던 사신은, 원군을 얻지 못한 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루툴리 족은 원군 없이도 전투를 계속했다. 양군의 희생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육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 루툴리 족의 왕 투르누스는 횃불을 마련하여, 소나무로 지어진 아이에이아스 일행의 함대에다 불을 질렀다. 그토록 험한 바다를 건너온 배도 횃불 앞에서는 무력했다. 불길은 배의 방수 도료인 역청과 밀랍에 옮겨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루툴리 족이 불을 지른 지 오래지 않아 불길은 돛대를 타고 올라가 돛을 태우기 시작했다. 신들의 어머니인 거룩하 퀴벌레 여신은 그 배를 지은 나무가 자기의 성산인 이다. 산에서 자란 소나무라는 것을 알고는 격노했다. 여신이 격노하자 하늘에서는 바라 소리와 피리 소리가 낭자했다. 여신은 길들인 사자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호령했다. 

[투르누스야, 하릴없다. 너의 그 오만불손한 손으로 내 성산 나무로 지어진 배를 불태우려는 모양이다만, 내가 그 배를 구할 것이었다. 한때 내 성산에서 자랐고, 따라서 내 숲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나무로 지어진 배를 잿더미로 만들 수는 결단코 없다]272

<아낙사레테여, 그대가 이겼고. 그대가 이겼으니 이제는 나로 인하여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대는 이겼으니 마음껏 좋아하시오. 그대는 이겼으니 파이안 이라도 부르시오. 이겼으니 월계관이라도 쓰시오. 그대는 승리자가 되었고 나는 패배자가 되었으니, 패배자가 된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겠어요. 아, 무정한 여인이여, 마음껏 기뻐하시오. 하지만 내 사랑에는, 그대도 어쩔 수 없는 힘이 있어요. 그대도 언제가는 내 사랑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그대도 언젠가는 내가 그대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사랑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내 사랑의 불은, 내 생명의 불이 꺼질 때까지 타오른다는 걸 알아야 하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바람이 그대 귀에 전하게는 하지 않겠소. 나는 그대가 볼 수 있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죽겠소. 여기에서 죽어서, 무정한 그대가 내 주검을 바라보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소. 아, 하늘의 신들이시여, 신들께서 우리 인간을 내려다보신다는 게 사실이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282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유피테르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히베리아에서 소떼를 목고 바다를 건너왔을 때의 일입니다. 오랜 항해 끝에 라키니움의 해변에 이른 헤라클레스는 소떼는 해변에 풀어 풀을 뜯게 하고 자신은 코로톤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답니다. 환대를 받고 떠나면서 헤라클레스는, 

<우리의 손자 대代에 이르면, 이곳은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했답니다. 

헤라클레스의 이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이 예언을 성취시킨 사람은 뮈스켈로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 이야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뮈스켈로스는 아르고스 사람인 알레몬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 중에 신들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뮈스켈로스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뮈스켈로스가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늘 몽둥이를 둘러메고 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어나거라. 얼어나서 네 아버지 나라를 떠나 머나먼 아이사르 강의 자갈이 많은 지류를 찾아가거라.>]293

흔히 황금 시대로 불리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자연은 저절로 열매 맺는 과일나무와 대지가 가꾸어내는 곡식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입술을 다른 짐승의 피로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이 시절에는, 새들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었고, 메토끼는 아무 두려움 없이 들판을 누빌 수 있었으며 물고기는 낚시 바늘에 대한 걱정 없이 물 속을 헤엄쳐 다녔습니다. 이 시절에는 덫도 없었고 속임수도 없어서, 모든 동물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가 지나자,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누군가가 고기를 그 탐욕스러운 목구멍으로 삼키는 사자를 보고는 이를 부러워하고 나쁜 전례를 만들면서 인간은 죄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자로 인하여 인간이 칼에다 다른 동물의 피를 묻히는 일이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우리 인간을 해치려는 동물만 인간의 칼에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은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어야 했습니다. 죽일 이유는 있었지만 먹을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요. 297

나는 헬레노스가 아이네이아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네이아스는 가정의 수호신과 함께 트로이아를 떠났습니다. 다행히도 트로이아 유민들의 성벽이 다시 오르고 있습니다. 그리스 군의 승리는, 이렇게 해서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군요. 나를 태운 말이 목적지를 잃고 한동안 엉뚱한 곳을 헤맸군요. 자, 본론으로 되돌아갑시다. 

하늘과, 하늘 아래 있는 만물은 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땅과, 땅 위에 있는 만물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피조물의 하나인 우리 인간도 변합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날개 달린 영혼도 여기에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날개 달린 우리의 영혼은 들짐승의 가슴을 찾아들어갈 수도 있고, 가축의 가슴을 찾아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짐승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짐승의 몸에 어쩌면 우리 부모형제나, 우리 친척, 우리와 같은 인간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이 예사롭지 않은 지위를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튀엣테스식 식사로 우리의 배를 채우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맙시다. 314

키포스 장군도 강가에서 강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다가 기겁을 했다. 자기의 머리 양쪽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일렁거리는 수면의 장난이겠거니 여기면서 그는 자기 머리를 만져보았다. 물에 비치던 것은 실제로 그의 머리 양쪽에 붙어 있었다.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을 물리치고 개선하던 그는, 승리의 기쁨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하늘에 계신 신들이이셔, 저는 신들께서 부리신 조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이것이 좋은 징조라면 제 조국과 퀴리노스의 백성들을 위한 징조이게 하시고, 나쁜 징조라면 저에게 나쁜 징조이게 하소서]

기도를 끝낸 그는 떼를 떠서 제단을 만들고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향연을 피워올렸다. 그러고는 점술사에게 명하여 갓 잡은 양의 내장을 꺼내어 어떤 징조인지 점을 쳐보게 했다. 에트루리아 인 점술사는 양의 내장을 꺼내어 보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 징조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중대한 일이 터질 징조라는 것까지는 읽어내었다. 그는 양의 내장을 보던 눈을 들어 키포스의 뿔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세, 만세, 대왕 만세! 키포스 장군이시여, 이 땅과 라티움 성채는 장군과 장군의 뿔에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하루 속히 장군을 위해 열린 라티움 성으로 입성하소서. 이것은 장국의 운명입니다. 성 안에 드시면 장군께서는 왕이 되시어 영원한 국왕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320]

베누스는 하늘에 사무치게 애원하면서 신들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으나 하릴없었다. 신들도 연세 많은 세 자매 여신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세 자매 여신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 대신 다른 신들이 징조를 미리 보여 이 슬픈 일이 있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먹구름 속에서 난, 무기와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하늘에서 들려온 나팔 소리와 뿔고동 소리가 이 일이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고 한다. 신들이 보인 징조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양이 어두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당에 이르는 빛은 납빛이었고, 별 사이에서는 횃불과 같은 붉은 빛줄기가 보였으며, 빗방울은 핏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루키페르는 빛을 잃어 불그스레하게 보였고, 루나의 수레는 핏빛으로 보였다. 지옥의 새인 부엉이도 불길한 징조를 전했다. 많은 지방에서는 상아로 만든 신상이 눈물을 떨구었고, 성림에서는 노래 소리, 외마디 소리가 울려나왔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데도 이러한 흉조는 길조로 바뀌지 않았다. 점술사들이 잡은 짐승의 간은 그 윗 부분이 크게 상해 있어서 국가에 변란이 생길 것이라는 점괘를 보여주었다. 밤이 되자 포룸과 민가와 신들의 신전 근처에서는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댔고, 유령들이 나와 배화하는가 하면 지진이 도시를 흔들었다. 332
IP *.129.207.200

프로필 이미지
이은주
2010.04.13 08:07:46 *.219.109.113
인건아~ 너 책  전체 스캔 떠서 올리는거지? ㅋㅋ
내가 너 지문 없어진다고 레이스 때 이야기 했잖아.
암튼 일하며, 놀며, 이렇게 해내는 너 참 멋지다.
이런 사람을 세자로 뭐라 할까요? (공모)
맞추신 분은 닭 한마리 ㅋㅋ

프로필 이미지
맑은
2010.04.14 00:19:18 *.129.207.200
세자? 멋쟁이?

장중한 글을 쓸려면, 길게 필사해야하지요. 
프로필 이미지
2010.04.14 11:06:32 *.106.7.10
정말 그러네
나는 주로 문장을 필사했는데, 인건은 아예 그 장면을 모두 필사했구나!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한 수 배움!

세자? 깍쟁이 ! ㅋㅋㅋ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12 #22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서연 2012.10.02 3851
811 #16.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카를 융 file 쭌영 2013.09.02 3854
810 주역강의 -서대원 혁산 2009.11.23 3858
809 신 - 김용규 file [1] 콩두 2012.10.16 3860
808 장자 김학주번역/ 연암서가 id: 깔리여신 2012.12.17 3864
807 38. 공자노자석가_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한젤리타 2013.01.21 3869
806 강의 (신영복) // 2005. 03. 25 ~ 2005. 03. 37 읽음. 강미영 2005.03.26 3872
805 #58. 데미안-헤르만헤세 file [3] 미나 2012.06.05 3872
804 # 47 융 [3번읽기] 기억 꿈 사상 file 샐리올리브 2013.03.25 3872
803 #2. 변신이야기_오비디우스(수정본) file [1] [1] 터닝포인트 2012.04.17 3873
802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2] 김귀자 2007.11.16 3877
801 # 44.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 버그 file [1] 샐리올리브 2013.03.03 3878
800 43. 그리스인 조르바_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한젤리타 2013.02.26 3885
799 [49] 비단꽃 넘세/ 나라만신 김금화 자서전 [6] 써니 2008.04.03 3886
798 백범일지 file 장재용 2012.09.24 3886
797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 file 콩두 2012.11.05 3886
796 3-24. 베이비 플랜 - 박문일 콩두 2015.02.18 3888
795 북리뷰 29 - 삶의 기술 - 안셀름 그륀 [2] 범해 좌경숙 2009.11.08 3894
794 북No. 1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유재경 2011.04.03 3900
79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어니언 2014.04.28 3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