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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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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7일 13시 05분 등록

 

1부 저자에 대하여

사람들 중에는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볼수록 혹은 만날수록 매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처음에는 그저그러했는데 만날수록 끌리는 사람도 있다.

 

죠셉 캠벨은 어떠할까? 양쪽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톰 피터스처럼 우렁차지 않게 그저 조용히 다가와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그 한마디는 나의 폐부 깊숙이 찔러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우주와의 공명바로 이 한마디였다.

 

스스로 깨달음의 길 위에 있지 않는 이라며 결코 할 수 없는 이 한마디 말이 내 심장에 와서 박히는 그날부터 난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화려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나의 영혼 가장 깊숙이 박힌 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서서히 알아가는 그의 세계란 알수록 오묘하고 신묘하기까지 하다.

 

신화는 그에게 그 스스로도 말하는 것처럼 진리를 향해 가는 한 가지 여정이리라. 어쩌면 그 자신이 전생에 인디언 샤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저자.

 

신의 가면 1~4편을 모두 사버렸다. 연구원이 아니었으면 일생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 보기에는 지리멸렬해보이는 이 책 4권을 구입하던 날, 난 괜시리 뿌듯했었다. 마치 일생을 함께 가고 싶은 깊은 지인을 알게 된 것 같은 벅찬 감동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지인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거 잘 안다.

 

스승.

그렇다, 내겐 또 한 분의 소중한 스승님이시다.

현존하는 스승님께서 인도하여 주신 또 한 분의 스승님.

 

그 분이 펼쳐 놓는 신의 가면.

이해하기 어렵다. ^^:::

당신 평생 작업을 총망라한 책인데다, 3자의 해석이 곁들여지지 않은 저자의 원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 그래서 무지하게 어렵다.

그러나 한 줄 한 줄의 무게감 또한 남다르다.

그런 만큼 이번 한 번의 독서로 얼마나 이해했다고 해야 할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이해한 만큼 풀고 정리하고 사숙하고. 그렇게 또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심오한 세계에 조금 더 눈을 뜰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3부 내가 저자라면


원시인들보다 덜 똑똑한 현대인들:

내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네안데르탈인들의 뇌 용량이 현대인들의 그것과 동일했었다는 사실!

 

네안데르탈인 가운데에는 1,400~1,500cc 정도 되는 오늘날의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큰 뇌를 가진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저능한 원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보다 조금 더 차원 높은 정신을 가진, 비상하게 강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자신들이 지닌 모든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환경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420).

 

말이 되나? 지금 이 사실이 말이 되는 사실인가? 세상에, 나는 원시시대 인류는 지능이 엄청 낮아서 유인원과에서 조금 벗어난, 그야말로 인간이라 불러주기에는 좀 그런 존재들인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정작 무식한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

 

게다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진 내 턱을 빠지게 하는 문장이 이어진다.

 

그는 (크로마뇽인: 기원전 3~1만 년경) 직립으로 보행하였으며, 키가 크고 뇌 용량도 1,590cc에서 약 1,880cc에 이까지 이른다. 따라서 현대인의 평균 뇌 용량보다 큰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423).

 

세상에! 크로마뇽인들의 뇌 용량은 현대인들보다 컸었다니! 우리 현대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원시인이라 부르며 이다지도 오만한 걸까? 이런 내게 경종을 울리는 문장이 계속된다.

 

솔루트레안기는 춥고 건조한 시기이다. … 이 새로운 이주자들은 아름다운 창끝을 만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뇌 용량이 1,350cc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아 정신 수준에서 어떤 퇴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25).

 

그러니까, 뇌 용량이 일직선으로 계속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뇌 용량은 3만년 전의 크로마뇽인의 한계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현대인은 과거 모든 역사 위에서 현대를 이룩한 것이지 결코 우리가 특별히 잘나서 휘황찬란한 과학의 시대를 이루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이 20세기에 존재했었던들, 그들 역시 우리 못지 않은 문명 창조가 가능했었고, 크로마뇽인들이 생존했다면 어쩌면 우리보다 더 현명한 문명을 이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과연 우린 정신적 문명의 퇴보를 이루고 있지는 않은건지? 과연 후대들은 20세기말에서 21세기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는지약간의 과학 문명의 진보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잘난척하는 오만했던 21세기 인류는 사실 알고보면 그다지 대단치 않았던 존재였다 평하지는 않을는지.

 

우리가 과거 시대를 돌아볼 때, 힘과 권력만을 앞세워 제국을 이룬 역사보다는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사상을 전해주는 문화민족을 더 오래 기억하고 배우려 애쓰는 것처럼, 우리 현대인들도 이제 그만 과학의 오만에서 벗어나 진정 인류 본연의 문제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건지..

 

한 가지 사실에서 난 역사의 큰 단면을 본 것 같다.

더불어 나의 오만까지도..

 

내가 육식을 멀리하는 이유:

그러나 죽이는 데는 옳은 방법과 잘못된 방법이 있다. … 주술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없다. … 사람들이 사냥을 하기 전에 들소 춤을 적절하게 추면, 살해당하는 들소들은 그들의 본질이나 생명이 아니라 단지 육체만을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시 살게 된다. 그리고 다음 계절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단지 육체만이 종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육체 속에는 영원하고 소멸될 수 없고 파악 불가능한 자기 (self)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의 현인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물은 변화하지만 결코 소멸하지는 않는다. 영혼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다.”… 이것을 카리보우 에스키모 이그주가르주크의 말과 비교해보라. … 우리는 생명이 무한하다는 것을 안다. 단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어떤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지를 알지 못할 뿐이다 (337).

 

우린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우린 그들을 옳은 방법으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있을까?

 

깨달음의 세계에서도 인간이 영혼이 동물의 영혼보다 성장한 단계라 표현하고 있다. 동물의 몸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인간의 몸을 받아야만 깨달음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동물을, 식물을 그리고 대자연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진데,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카드를 너무 쉽게 남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처럼.

 

나는 동물원에 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 불쌍한 영혼들을 가두어 놓고 구경거리로 삼고 그것도 모자라서 쇼를 연습시키고. 잔인하다.

 

인간 스스로는 자유를 그토록 갈망하면서 어떻게 다른 존재들의 자유는 그리도 쉽게 박탈할 수 있는걸까?

 

그것도 모자라 몇몇 동물들은 가축이라고 따로 명명하며 클 때부터 먹이로 키우고 함부로 죽인다. 정말 끔찍하다.

 

인류 모두가 채식을 해야 한다는 의미까지는 아니지만, 사육과 도살의 방법만이라도 좀 개선할 수는 없을까? 누군가 비용이 어쩌고 라는 표현을 쓴다면, 정말이지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분노가 치밀어서.

 

젊어서는 공자를 배우고, 나이가 들면 노자를 배워야 한다는 중국인들의 철학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로 미친듯이 달려가는 그들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세월 흐름은 지혜가 함께하지 않으면 추한 껍데기만 남길 뿐이다.

난 작년보다 조금쯤은 지혜로워졌을까?

난 어제보다 조금쯤은 겸손해졌을까?

누군가에게, 세상에게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내 안의 오물부터 거두어야 하리라..

 

구석기 시대 신화 Vs 신석기 시대 신화
몰랐다. 정말 이 두 시대 간의 신화에 그러한 차이가 있는 줄은 진짜 몰랐었다. 무식함의 끝이 보이지가 않는다 ^^:::

 

구석기 미술 작품들에서는 미적 영역의 기하학적 구성이라는 개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167).

 

이것이야말로 사냥꾼의 신화와 농경민의 신화를 구분해주는 첫번째 특징이다. 농경의례의 초점은 집단에 놓여 있는 반면, 사냥꾼의 의례는 그 초점이 개인에 놓여 있다 (274).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미술의 특징은, 근대 인상주의의 출현이 있기까지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직접적이고 순수하며 어떠한 이지적인 작용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형태로 시각적인 인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 현대인들이 복잡한 기구를 동원해서야 발견해낸 갖가지 뉘앙스를 구석기 시대 화가들은 그대로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상실되었으며, 이 단계에서 벌써 인간은 감각적 인상의 직접성 대신 개념의 고정불변성에 의존하게 되었따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15).

 

어째서 구석기 시대는 초현실주의 혹은 사실주의적 신화를 표현하고 있고, 신석기 시대로 넘어오면 상징주의적인 기호 체계의 신화로 발전 혹은 이양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우주 천체를 가늠하는 능력에 있다고 캠벨은 말하고 있다.

 

, 구석기 사냥의 시대에 인류는 내일의 일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살면서 매일 하루가 목숨을 건 사냥 아니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까 구석시 시대인들에게는 사냥감이자 나를 죽일 수도 있는 동물의 힘이나 움직임 등을 가능하면 가장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최고로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만큼 샤먼을 포함한 그 시대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것들을 주술적 혹은 예술적 경지로까지 끌어올려 동굴 벽화라는 위대한 작품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고.

 

그에 비해 농경시대인 신석기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근본 원인은 우주의 질서를 헤아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 계절의 변화, 날씨 등이 예측가능해져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수학까지도).

 

생각해보면 인류 역사상 실로 어마어마한 변혁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나로서는 구석기인의 삶이나 신석기인들의 삶을 실감할 수 없지만, 어쩐지 이 책을 읽으며 그들 역시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주어진 한 세대를 나름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살았고, 그 나름의 방법으로 승화시기기까지 했었다는 점에서 뭐랄까이전과는 많이 다른 관점에서 인류의 뿌리를 더듬게 되는 것 같다..

 

나와 똑같았던, 그러나 나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조차 굴하지 않고 빙하기까지 이겨내던 나의 선조들어쩐지 경외심이 드는 것 같다. 그들의 불굴의 용기와 열정 앞에서..

 

오늘 다시 깨달은 신화의 기능:

캠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는 한다. 이번 신의 가면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부분이 다음인 것 같다.

 

하나의 로서 기능할 때, 신화와 제의는 개인의 변화를 초래한다. 개인을 지역적, 역사적 조건에서 해방시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와 달리 종족적 관념으로 기능할 때에는 신화적 이미지가 개인을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그 종족의 정서와 활동과 신념의 체계에 연결시킴으로써, 그를 사회학적 유기체의 한 구성원으로 만든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우리의 연구 주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522).

 

신화적 상징은 표현 불가능한 세계를 구체적이고 국지적인 상징을 통하여 경험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국지적인 상징 형태의 힘과 호소력이 확장되는 동시에 경험자의 정신이 그것들을 초월하게 되는 어떤 역설이 가로놓여 있다. 신화가 지닌 독특한 도전적 힘은 바로 이러한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 자체의 시도 속에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화학의 전체적 논점과 신비를 놓치게 된다 (522).

 

그러니까 신화는 한 개인을 사회나 국가라는 커다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작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신석기 농경시대 문화), 더불어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를 마들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구석기 시대의 개인적 수렵 문화).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그 중간에 종족적 관념으로부터 근본적 관념에 이르는, 국지적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길이 놓여 있다. 여기서 보편적 존재란, 사람들이 알면서도 알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간 그 자체이다 (533).

 

인간 정신은 모든 신들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이며 신들의 노예이자 그 주인인 것이다 (533).

 

그러니까 우주의 생명을 그대로 머금은 우리 인간은, 속한 사회의 문명 파괴자 혹은 이탈자로서가 아닌, 건강한 구성원으로 그 사회를 뛰어넘어 더 깊고 심오한 세계로 나의 신화를 확장시킬 때, 그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심오한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샤먼이 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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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첨부 :
<
결론: 신화의 기능>

1 국지적 이미지와 보편적 길

u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 아닐 예배의 깊이와 성실성이다” (521)

u       인도인의 사유는 모든 제의 전통의 두 측면을 간파하고 있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논의한 아돌프 바스티안의 근본적 관념종족적 관념이 그것이다. 바스티안의 이론에 따르면, 근본적 관념들은 각 지방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형성된 종족적 관념- 근본적 관념을 실체화하는 수단인- 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상태로 직접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근본적 관념들은 인간 자신의 이미지처럼 인생의 파노라마 안에서 아주 다양하게 굴절된 형태로서만 알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나 의례를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영구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을 가리키는 단서로 간주할 수도 잇고, 각 지방, 즉 관련된 종족의 풍도, 역사 그리고 사회학의 함수로 간주할 수도 있다 (521).

u       하나의 로서 기능할 때, 신화와 제의는 개인의 변화를 초래한다. 개인을 지역적, 역사적 조건에서 해방시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경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와 달리 종족적 관념으로 기능할 때에는 신화적 이미지가 개인을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그 종족의 정서와 활동과 신념의 체계에 연결시킴으로써, 그를 사회학적 유기체의 한 구성원으로 만든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우리의 연구 주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522).

u       신화적 상징은 표현 불가능한 세계를 구체적이고 국지적인 상징을 통하여 경험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국지적인 상징 형태의 힘과 호소력이 확장되는 동시에 경험자의 정신이 그것들을 초월하게 되는 어떤 역설이 가로놓여 있다. 신화가 지닌 독특한 도전적 힘은 바로 이러한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 자체의 시도 속에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화학의 전체적 논점과 신비를 놓치게 된다 (522).

u       문화 간의 교류가 활발한 현대 사회에서 지역적인 장벽을 뛰어넘는 지성을 소유한 자들은 낯선 형식의 경험과 깨달음 속에서도 공통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523).

u       19세기의 성인이지 현자인 라마크리슈나는 모든 종교의 궁극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심리학적 지향을 강조하였다: 신은 구도자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종교들을 만들었다. 모든 교의는 신에게 다가가는 서로 다른 길이다. 그렇지만 그 중 어떤 길도 신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그 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헌신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신과 합일할 수 있다 (523).

u       모든 비교신화학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정통주의가 신에 관한 언어를 지배하면 나라가 분열된다. 그 경우에는 의례와 숭배의 상징이 지닌 국지적, 역사적, 윤리적 측면, 즉 데이시가 지나치게 심각하게 취급된다. … 반면, 신비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데이시가 무엇이든간에, 그들의 말은 심오한 차원에서 서로 만난다. 여기서는 시바, 알라, 부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역사적인 힘을 잃는다. 그것들은 시간과 속세에서 제약받는 능력과 한계를 초월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걸어야 하는 하나의 길 (마르가)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으로 간주될 뿐이기 때문이다 (524).

 

2 사랑, 권력, 그리고 덕의 속박

u       고전적인 인도철학은 이 세상에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들과 이 목표들로부터의 절대적 해방을 구별한다. 이 세상에서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목표들은 더도 덜도 아닌 세 가지이다. 사랑과 쾌락 (카마), 권력과 성공 (아르트하) 그리고 법적인 질서와 도덕적 덕행 (다르마)이 바로 그것들이다 (524~5).

u       첫번째 목표인 카마는 프로이트가 모든 삶과 사고의 기본이 되는 관심 혹은 목적이라고 간주하였던 것에 해당한다. .. 그러한 심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세계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신화의 상징도 오로지 섹스만을 의미한다. … 따라서 그에게는 모든 신화와 제의가 단순히 이러한 생물학적 관심 체계의 조화로운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525).

u       세속적 목표의 두 번째 범주인 아르트하는 권력과 성공에 대한 욕구이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과 알프레드 아들러의 후기 심리학에서 모든 삶과 사고의 근본적 충동 및 관심으로 간주한 욕구에 해당한다. … 이 충동에 철저하게 지배되는 사람은 정복하고 파괴하고 낭비하기를 좋아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한 심리 상태의 소유자는 신화와 신들과 제의에서 자아 확장과 종족의 확장을 위한 초자연적 수단만을 찾으려고 한다 (525).

u       성적인 관심과 공격적인 관심이라는 이 두 가지 관심 체계는 인간의 일차적인 생물학적 충동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심들은 주입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으며, 모든 경험과 반응의 동물적 기초를 제공한다 (525).

u        이제 우리는 이 두 기본적 관심 체계, 카마와 아르트하, 즉 쾌락과 권력이 반드시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때때로 갈등 관계에 놓인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526).

u       모든 동물은 서로 다른 요구들을 절충하는 방법으로 그 갈등을 해결한다. 인간의 세계에서도 절충과 타협이 있다. 다르마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규범과 모레가 도입되기 이전에도, 인간의 심리 안에는 균형과 조화라는 기본 문제가 존재한다 (527).

u       다르마는 자신의 의무를 알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그런데 그것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젊은이에게 주입되는 목표이다 (527).

u       이처럼 쾌락, 권력 그리고 도덕법칙에 각각 해당하는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는 모든 신화 체계 속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힘의 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교육적인 목적이 포함된 법 체계 (다르마)는 다른 두 힘 (카마와 아르트하)보다 더 큰 중요성과 권위를 지녀야만 한다. 그것은 흠잡을 데 없는 어떤 차원 높은 힘의 의지이자 본성으로 제시된다 (528).

u       그런데 이런 여러 표현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점은, 사회적으로 제시된 이 세번째 원리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두 원리를 다스려야 하며, 그러하 세 번째 원리를 대변하는 사회적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528).

u       기원전 6천년경 농경 사회가 등장하면서불평등과 협력을 본질로 하는 우주의 질서가 어떤 직관적인 천재의 솜씨에 의해서 다르마의 모델로 채택되고 인류가 천체의 질서를 배운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고대의 모든 사회 체제에서는 인간과 우주를 통합하고 조정하는 자연의 조화에 관한 신화가 다양한 사회적 질서를 출현시켰다. 그리하여 서로 적대적인 세 가지 관심 체계인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의 상호 작용에서 비롯하는 거대한 폭력성이 네 번째 원리의 작동에 의하여 순화되고 미화되고 매우 풍요로워졌다. 그 네 번째 원리는 세계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경외심이었다 (529).

u       이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 네 번째 원리이다. 이 원리를 철저하게 실천한 극단적인 예는 동양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원리의 힘은 신화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깃들어 있고 또 언제나 깃들여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신화의 차원이 다시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과학 분야 자체인 것이 분명하다 (529).

3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u       사제 도시국가 시대에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느낀 자신들의 경외심을 무언극을 통하여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런데 그 법칙은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의 영역에 보다 우월한 새로운 원리의 힘을 작동시켰다. … 약간 느슨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영적 원리나 신비적 원리 또는 종교적 원리로 부를 수도 있다 (529~530).

u       이러한 원리에서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사회적 충동뿐만 아니라 즐기고 지배하려는 (그와 반대되는 혐오와 공포도 함께) 생물학적 충동도 즉각적으로 사라진다. 거기에서는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어떤 순수한 황홀의 경험이 나타난다. 그러한 충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비추어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얽어매는 신경망에서 생겨나는, 즐기고 싶고 이기고 싶고 예의범절을 지키고 싶은 온갖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자아가 해체되면, 신경망에는 오로지 생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만이 남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선사들은 이 상태를 무심의 경지라고 불렀다. 이에 해당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용어에는 해방을 뜻하는 목샤, “깨달음을 뜻하는 보디그리고 욕망의 바람을 초월한 경지를 뜻하는 니르바나가 있다. 조이스는 심미적 즐거움의 밝고 고요한 균형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상태에서는 심미적 이미지의 선명한 광휘가 파악된다. 그리고 이 때 마음은 이미지의 총체성과 조화에 의하여 사로잡히고 매혹 당한다 (530).

u       예술에 대한 충동은 고대 사회 조직의 장엄한 토대를 이룬다. … 그러나 그러한 무언극에 참가하였던 모든 사람이 그 경이로움을 심미적 관점에서 체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대다수는 그것의 가치를 오로지 주술적인 것에서 찾았음에 틀림없다. 즉 그들의 세 가지 원초적 욕구의 열매를 산출하는 힘 말이다 (531).

u       대다수 사람들에게 종교는 일차적으로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의 질서에서 나오는 효용에 근거한 것이었다. 제의는 음식과 자손의 풍요화, 적을 제압하는 강한 힘의 증대, 그리고 개인을 사회 질서에 결합시키는 마술적인 수단으로 이바지해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들을 데이시, 즉 국지적, 종족적 맥락에 참여시키는 수단으로 봉사해왔고 그 보상으로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의 이익이 죽음 이후에까지 연장되는 것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531).

u       샤먼이 걷는 고통의 길은 네 번째 목적에 일생을 바친 최초의 알려진 사례이다. 샤먼들은 신화를 마르가, 즉 심리학적 변형에 이르는 길로서 진지하게 이용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런 최초의 원시적 수준에서도 샤먼들이 영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개인적 경험의 지평을 확장시키고 깨달음의 깊이를 심화시켰다는 분명한 증거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샤먼들은 국지적인 환상의 체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정신 그 자체의 신비와 접촉했다. 따라서 영혼과 그 세계에 관한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에 안주하여 창조성을 상실한 사회를 새로운 깨달음의 영역과 깊이로 안도하는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532).

u       이처럼 두 유형의 정신은 상호 보완적이다. 타성에 젖어 있고 반동적인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기가 속한 지역적, 세속적 조건에 애착을 가지는 반면, 살아 있는 진보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는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 이 두 유형의 인간은 아주 옛날부터 서로 대화를 해왔다. 그 결과 좁은 지평에서 더 큰 지평으로, 단순한 조직에서 더 복잡한 조직으로, 그리고 소박한 예술 작품에서 보다 화려한 양식의 예술 작품으로의 실제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다 (532).

u       이 점이 일단 인정된다면, 그 다음 이야기는 저절로 입증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카마, 아르트하, 다르마의 목적에 공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에고와 연결된 이런 강박관념들로부터의 해방 수단으로 공헌하는, 그러한 신화의 이중적 기능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리고 후자의 기능에서 신화가 예술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예술가의 정신 이외의 다른 원천에서 과연 신화가 생겨날 수 있을까? 구석기 시대의 사원-동굴이 그에 대한 답을 준다 (532).

u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그 중간에 종족적 관념으로부터 근본적 관념에 이르는, 국지적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에 이르는 모든 단계의 길이 놓여 있다. 여기서 보편적 존재란, 사람들이 알면서도 알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간 그 자체이다 (533).

u       인간 정신은 모든 신들의 창조자이자 파괴자이며 신들의 노예이자 그 주인인 것이다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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