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2010년 4월 19일 19시 35분 등록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 C.W.Ceram(체람/세람) - 21세기북스

  * 저자에 대하여 *

1915년 1월 20일 베를린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쿠르트 W.마렉(Kurt W. Marek)으로 로볼트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저널리스트였으며 연극비평가로 대단한 활약을 했다. 1949년 C.W.Ceram이란 가명으로 <Gotter, Graber und Gelehrte=신, 무덤, 그리고 학자=Gods, Graves, and Scolars=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을 첫 책을 발표해 고고학 분야에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쌓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고고학의 명저가 되었다. 그는 인류로 하여금 고대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일깨워 당시 아스완댐 건설로 인한 아부심벨의 유적이 물속에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저자는 히타이트 문명 발굴을 위해 터키 고고학 유적 불굴에 참여하여 <The Secret of the Hittites = 발굴과 해독:고대 최강대국 히타이트, 100년동안의 발견이야기>(1956), <A Picture History of Archaeology = C.W.쎄람의 사진으로 보는 고고학 역사이야기=몽상과 매혹의 고고학>(1958) 등의 고고학 책을 내놓았다. 그 밖에도 <영화속의 고고학>, <도발적인 메모들 : Yestermorrow>,<최초의 아메리카인>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1972년 4월 12일 57세의 나이로 함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체람의 삶은 고고학에 대한 ‘열정과 끈기’의 끊임없는 표현이었다. 그가 쓴 자필 이력서를 보면 “지식에 대한 엄청난 욕구가 뒤따랐다. 나는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켰다.”와 “신문사<디 벨트>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로볼트 출판사의 편장장도 겸했다.……이러는 가운데도 ‘사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일은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 그 당시 독일 내 한 지역에 수집된 자료로는 가장 방대한 양이었다. 나는 4년 반에 걸쳐 정리하고 조립하며, 죽은 모자이크 조각으로 그림을 살려내고, 극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온 힘을 다 쏟아 매진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위해 100%의 에너지를 다 쏟는 것은 ‘열정과 끈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첫 저서 <낭만적인 고고학의 산책>(1949)을 쓸 때 천여권의 책을 들춰볼 정도로 ‘열정과 끈기’로 시작한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저서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1958)의 프롤로그에서 “고대 세계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지, 나아가 지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중심주제”이며 “수메르에서부터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크레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문화적 연속성을 추적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라고 할 정도로 10년이 지나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의 고고학에 대한 ‘열정과 끈기’는 저서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에 쓰여진 “고대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그 중요성을 널리 인정받은 고고학은, 발굴자의 삽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표면적인 증거, 즉 발굴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괄한다. 발굴에 이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과정인 해석 작업이 뒤따르는 것이다.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문명만이 해낼 수 있는 과거의 재창조가 이루어진다. 고고학을 ‘19세기의 주류 과학’(고고학의 역사를 처음으로 다룬 아돌프 미하엘리스의 표현이다) 대열에 올려놓았던 것이 바로 이 재창조 작업이다.” 와 “앞에서 고고학의 개척기는 이미 지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낭만과 모험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고고학에서 낭만적인 모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는 늘 낭만적이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고고학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나 책읽기를 통해 인식된 자신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기초로 꾸준히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그것을 통해 고고학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바꾸는데 공헌을 했다. 그는 고고학을 ‘과거 속에 존재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 눈에 보이는 사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의미를 읽어내어 그것을 현재에 적용시키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 활용해야 하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고고학이 더 이상 고루한 지식의 학문이 아니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고고학은 상상력의 발현을 통한 낭만과 모험이 이루어지는 체험의 학문인 것이다. 이런 고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 모두가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열정과 끈기’를 바탕으로 한 애정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

p.19 고고학은 모험과 낭만을 찾아 떠나는 결단력과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책과 씨름하는 성실성이 한데 어우러진 학문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지구 전역을 활보하며 측량하는 학문이다.

p.20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은 옛날 옛적에 일어난, 낭만적이지만 결코 현실에 위배되지 않는 사건들과 주인공들의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장된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p.20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오로지 사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점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다. 아주 작은 장식물마저도 해당 시대의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일 뿐,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이 아니다.

p.21 고고학과 더불어 내가 사명감을 느끼는 또 한 가지 분야가 있는데, 바로 특수한 형식의 문학이다. 나는 이 책으로써 그 문학 형식의 기틀을 세우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고 생각 한다.

p.22 나는 가장 잘 쓴 논픽션 소설은 문학적인 요소는 단지 학문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만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학문적 사실이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도록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p.29 역사에서나 일상에서 사람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빠른 길인 줄 알고 선택한 길이 알고 보면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p.32 24시간 후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부근 18킬로미터 지역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논밭은 묻혔다. 아프리카, 시리아, 이집트까지 화산재의 일부가 날아갔다. 이제 베수비오 산에서는 가느다란 연기만이 할 줄기 솟아올랐고, 하늘은 푸른빛을 되찾았다.

p.33 이제 그때와는 다른 지식으로 무장하고 다른 관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 땅에 발굴의 삽을 내리꽂았다.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유물들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그 일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p.33 자신의 학문 세계에 갇힌 어리석은 학자는 그토록 끔직한 재앙이 남긴 유물들을 학문적 성취를 위한 자료로만 보고 좋아할 뿐, 경건한 마음으로 희생자를 애도할 줄 모른다.

p.40 빙켈만은 그 일로 씁쓸해하고 있을 즈음 동지를 한사람 만났다. 그를 받아준 아우구스트 수도원에서 알게 된 피아기 신부였는데, 그 당시 피아기 신부는 대단히 특수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p.43 빙켈만의 업적은 그리스 문학에 대한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이 난무하던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고, 추측과 전설로 얼룩진 부야에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는 데 있다. 그가 열어준 고대의 세계를 바탕으로 괴테와 실러를 낳은 독일 고전주의가 싹틀 수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 보대 더 오래된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고고학자는 빙켈만이 미리 준비해둔 연장을 사용해 손쉽게 어둠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

p.46 우리 시대에 쓴 역사책을 읽어보면 여러 옛 민족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은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꽃을 피웠다. 그 삶은 시간의 어둠속에 깊이 가라앉았지만, 오늘날 인류의 언어와 풍속과 문화재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읽는 것은 그들의 역사다. 전설이나 신화가 아니다.

p.48 19세기에 들어서도 유물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풍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무지와 욕심이 부른 일이었다. 돈이 된다면 유물을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p.49 유물은 끊임없이 문회한의 손에 파괴되었고, 도굴범들은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 고고학자들이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과거를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해석의 기술이 개발되었다.

p.52 고고학자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사람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결론을 얻을 때까지 수사관과도 같이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해 퍼즐을 짜 맞추듯 돌멩이 한 조각 한 조각을 짜 맞추어 간다.

p.53 오인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흔적은 어쩌면 의도적으로 흘린 가짜 흔적보다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p.55 고고학자들은 유물 해석 과정에서 부딪치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삽과 통찰력으로 맞서고 있다. 분석적인 해석 방법, 보고, 설명하는 작업, 즉 신화, 문학, 새김글, 동전, 도구들에 근거를 둔 해석과 다른 작품들, 발굴 장소, 배치상태, 주위환경 등을 바탕으로 끌어내는 종합적인 해석…….

p.59 슐리만은 언젠가 호메로스 이야기에 나오는 머나 먼 나라를 찾아내고 그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소년 시절의 꿈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은 그가 쓴 편지와 두 편의 자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p.59 슐리만은 18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6주 만에 터득했으며, 그 후 3개월 만에 6각운으로 슨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얼마나 노력하면 그럴 수 있을까? “6주 후에는 내가 쓴 편지를 플라톤이 받아 보고 애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오로 공부했다.”

p.62 “하늘이 내 무역 사업에 기적과도 같은 축복을 내려 주신 덕분에 1863년 연말에는 내 야심을 능가하는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에 이어 내린 결론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오직 하인리히 슐리만 자신만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무역과 사업에서 손을 뗐다.”

p.62 최상의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소년 시절에 품은 꿈을 좇기 위해 자신의 업무용 선박을 모두 불태웠다. 머릿속이 호메로스 이야기로 꽉 차 있던 그 사람은 역사성을 의심하던 학계의 견해에 맞서 호메로스 이야기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리고 문헌학자들의 펜이 수백 권의 책을 통해 흐려놓은 역사를 삽으로 직접 확인시켜주겠다며 일어섰다. 이것이 동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p.63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고찰도 슐리만의 믿음을 흐리지는 모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숨김없는 사실로 이해했다.

p.68 슐리만은 증거를 종합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소수에 불과했다.

p.69 슐리만은 <이타카>에서 자신이 모은 증거들을 나열한 후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모든 주장을 배제한 채, 히사를리크를 바라본 소감을 감동으로 가슴 벅찬 소년의 심정으로 밝히며 그 장(章)을 마무리했다.

p.71 매일 기적 같은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슐리만은 시간이 흐르면서 동료들과 더불어 무려 일곱 개의 몰락한 도시를 발견했고, 여기에 훗날 두 개를 더 보탰다. 세상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과거의 세계를 아홉 개나 목격했던 것이다!

p.76 세상에는 일생 믿기지 않을 만큼의 큰 성공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훗날 이런 사람의 인생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화려하게 묘사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사람의 일생이란 뒤로 갈수록 더욱더 고조된 표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생을 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자로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동화 같은 슐리만의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놀라운 사건으로 가득해진다. 슐리만이 고고학 분야에서 거둔 성공은 세 번에 걸쳐 결정에 이른다. 그 첫 번째가 ‘프리아모스 왕의 보물’을 찾은 일이고, 두 번째는 미케네의 황실 고분을 발굴한 일이다.

p.82 중요한 점은 슐리만이 잃어버린 과거를 향해 또 한 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학문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대단히 귀중한 보물을 찾아냈다. 그 보물은 유럽 문화의 원조를 밝혀주는 값진 자료다. “내가 고고학을 위해 발견한 세계는 너무나 새로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세계다!”

p.88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가 말했듯이 빙켈만이 그리스의 비밀을 멀리서 보여주었다면, 슐

리만은 그 태고의 세계를 직접 열어서 보여주었다. 슐리만은 고고학을 연구실의 석유등 불 빛 아래에서 과감히 그리스 하늘의 태양 아래로 끌어냈다. 전통 문헌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선사시대로 한 발을 내디뎠고, 전통 학문에 선사시대를 추가해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p.82 저돌적인 작업 방법과 빠른 속도, 거듭된 성공, 학자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모호한 신문, 그러면서도 양쪽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광고와도 같은 성격’의 책 출판……. 전 세계의 학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p.82 학자들이 슐리만에게 퍼부은 신랄한 공격의 핵심은 그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이었다.

p.83 “사실 아마추어에게는 예술이나 학문 자체가 목적인 반면, 전문가들에게는 수단일 뿐이다.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래서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취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들이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p.83 빌헬름 되르펠트는 슐리만의 동료이자 조언자이며 친구였다. 그는 슐리만의 편을 들어준 몇 안 되는 독일 전문가 중 한사람

p.90 성공한 ‘아웃사이더’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은 일반인이 천재에게 보이는 불신과 같다.

안정된 인생행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이런 멸시는 정당하지 않다.

p.91 이 정도면 충분한가? 물론 전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조건은 모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수단이 순수하다면 자격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아웃사이더’들을 특히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p.98 크레타, 특히 크노소스를 발굴하겠다는 계획을 슐리만은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슐리만은 죽기 1년 전에 쓴 글에서 이 계획을 밝혔다. “나는 평생을 바친 발굴 작업에 멋진 마무리를 하고 싶다. 그 일은 크레타의 선사시대 왕성인 크노소스 성을 발굴하는 일이다. 그 성은 내가 3년 전에 발견한 것이다.”

p.119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피라미드를 가리켰다. 나폴레옹은 대중의 심리를 잘 아는 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맞선 유럽인이었다, 그 순 간 나폴레옹은 외쳤다, “병사들이여! 4000년의 역사가 그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p.120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훗날 이집트를 정치적으로 개척하고 고대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시작하는 결과를 낳았다.

p.123 이집트를 총검으로 정복한 나폴레옹은 그 승리를 1년 밖에 유지 할 수 없었지만, 드농은 파라오의 나라를 제도용 연필로 정복해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의 그림은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영원의 시간을 부여했고, 우리의 의식을 눈뜨게 했다. 흩뿌려진 5000년의 유적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때마다 첫날의 황홀감이 되살아났다.

p.125 드농의 예술적 감수성은 낯선 세계를 접한 뒤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가 그린 그림의 정확성은 열정으로 인해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도 표현주의도 모른 체 ‘수공업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떤 세부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고 묘사했던 옛 동판화가 들의 작품처럼 학문에 필요한 사실성을 철저히 지켰다. 이렇게 드농의 그림은 연구하고 비교하는 학자들에게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많은 자료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이 자료를 근거로 이집트학의 바탕이 된 <이집트 기록>이 완성되었다.

p.126 그 수집품 가운데는 매우 특이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검은 빛이 반들반들한 현무암 석판이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언어로 쓴 세 편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돌이 이집트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 유명한 ‘로제타의 3개 언어로 된 돌(로제타석)’이다.

p.131 ,이집트 기록은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RP를 열어주었다. 유럽에서는 이제 막 과거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어 연구에 불이 붙었고,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의 주도로 폼페이를 다시 발굴했다. 학자들은 빙켈만에게서 고고학의 연구와 고찰 방법을 배웠으며, 배운 바를 실제로 써보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p.137 아버지에게 “제가 트로이를 찾겠어요.”라고 말했던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샹폴리옹 또한 확신에 차서 신들린 듯이 목표만을 좇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얼마나 다른가? 두 사람이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시킨 방법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슐리만은 전적으로 혼자 공부했지만 샹폴리옹은 정해진 교육의 길을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 길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말이다, 슐리만은 전문적인 지본 소양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로 작업에 착수한 반면, 샹폴리옹은 그 시대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으로 무장했다.

p.138 신시하게도 샹폴리옹이 배우는 모든 것, 그가 하는 모든 일, 그에게 흘러드는 모든 영향은 이집트 마법의 손아귀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이집트’로 통했다. 고대 중국어를 공부한 이유도 오직 고대 이집트어와의 연결고리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p.140 지금까지 생각해온 일, 줄곧 남몰래 품었던 희망이 그 순간 갑자기 분명해졌던 것이다. “나는 상형문자를 해독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샹폴리옹의 갈색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p.141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 세 가지 언어로 글이 새겨진 로제타석

각 언어는 상형문자로 쓴 이집트어, 민중문자로 쓴 이집트어, 그리스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돌이 결국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1822년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한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로제타석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p.142 무너진 요새의 폐허에서 우연히 발견된 그 돌은 식탁만큼이나 컸다. 입자가 고운 검은 현무암이었는데, ‘망치로 두드려도 안 깨질 정도로’ 단단했다. 한 면은 곱게 갈려 있었는데, 그 면 위에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세단으로 나뉜 새김글은 2000년을 덮고 있던 모래알에 마모되고 그 귀를 스친 바람으로 풍화되어 일부분 지워져 있었다, 세 가지 새김글 가운데 첫째 단은 14줄의 상형문자로 쓰여 있고, 둘째 단은 민중문자로 쓴 22줄로 쓰여 있으며, 셋째 단은 54줄의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다.

p.160 위대한 정신적 발견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끝없이 사고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정신을 훈련한 끝에 얻는 결과다.  

p.160 아무리 기발한 생각이라도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 쏟은 노력의 역사를 알게 되면 기발하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p.161 샹폴리옹과 같은 삶을 산 에, 그 많은 노력을 기울인 후에도 이러한 반전을 두고 착상이라 할 수 있을까? 단지 행운의 순간이 찾아왔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샹폴리옹이 처음 그 착상에 이르렀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생각을 버렸다. 

p.162 샹폴리옹은 12개 이상의 고대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콥트어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옛 이집트인들의 언어에 나타난 정신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영처럼 개별 단어나 철자에서 출발하지 않고 전체적인 체계를 알아보았다. 단지 문자를 해석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 문자를 읽고 가르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체계의 기본 원리를 터득한 순간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굳히게 만들었던 착상으로 다시 돌아가 진정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문자 해독은 왕의 이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p.166 샹폴리옹은 훌륭한 이론으로 학계를 정복했지만 거기에 성공적인 발굴 활동을 추가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이집트를 볼 수는 있었다. 도한 골방에 틀어박혀 얻은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p.171 1896년 런던에서 열린 ‘왕실학회’에서 이집트학 학자 피터 르 파지 르노의 연설을 통해 샹폴리옹은 업적에 마땅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가 죽고 64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샹폴리옹이 문자의 비밀을 풀었다. 이제 사람들은 삽을 들고 발굴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p.172 샹폴리옹이 상형문자를 해독한 이후 수십 년 사이에 네 사람이 이집트학 분야에서 위대한 발견을 했다. 이탈리아의 벨초니, 독일의 렙시우스, 프랑스의 마리에트, 영국의 피트리다. 벨초니는 수집했고 렙시우스는 정리했으며, 마리에트는 보존했고 피트리는 측량하고 해석했다. 이 네 사람이 유럽의 각기 다른 네 나라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네 사람은 같은 목표를 추구했고, 지식과 진실을 향한 욕구가 무엇보다도 강했다는 점에서 일치했으며, 한 가지 업적에 공동으로 기여했다.

“그는 이집트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조반니 바티스타 벨초니를 두고 한말이다.  

p.175 벨초니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보면서 한때 약간의 전문지식을 키우기는 했지만, 유물을 얻으려는 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봉인된 묘실을 열기 위해 공성 망치로 깨부술 정도였다.

p.175 벨초니가 살던 시대와 그가 해낸 두 가지 일을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다. 벨초니는 처음으로 고고학 연구의 고리를 꿰었으며, 그 사슬은 아직도 이어져 있다.

p.176 벨초니는 ‘왕가의 계곡’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이 아니며, 피라미드의 입구를 처음 발견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진실보다 황금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두 곳의 고분 묘실과 피라미드에 관련된 고고학적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었다. 그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p.178 원정은 1843년에서 1845년까지 3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전까지 어떤 원정대로 가질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노획물을 챙기려 하기보다 지식을 이해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성공이 보장되는 곳에 삽을 꽂았다.

p.178 렙시우스가 거둔 첫 성과는 수많은 유물 속에서 고왕국을 발견한 일이다. 

p.179 렙시우스는 왕가의 계곡을 최초로 측량한 사람이었으며, 사원 벽의 부조들과 수많은 새김글, 특히 왕의 이름을 쓴 수많은 카르투시를 베끼거나 본떴다. 렙시우스는 눈으로 본 것을 정리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유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허로 여긴 그곳에서 그는 최초로 이집트의 역사를 보았고, 면화를 인식했다. 

p.180 오스발트 슈펭글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대 사람들에게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80 시간의 개념이 없으면 역사의 기록도 없다. 이집트에는 역사가 없었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어설픈 연보뿐이며, 그 역사적인 신빙성은 대개 전설이나 만화와 비슷한 수준이다. 

p.181 현재 연대기 작성의 근거가 될 만한 최초의 자료는 이집트 세베니토스의 사제 마네토가 쓴 ,<이집트 회고록>이다. <이집트 회고록>은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2세의 통치 기간에 그가 기록한 이집트의 역사다. 

p.181 마네토는 그 누구도 하지 않은 3000년 이라는 긴 세월에 대한 정리를 최초로 시도 했다. 

p.181 ‘고고학’이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고대에 관한 학문을 총칭한다. 유물과 새김글 등이집트 관련 자료가 대단히 풍부했기에 이집트만을 집중 연구하는 특수 분야가 탄생했고, 이 분야의 학문을 렙시우스 이후 ‘이집트학’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에 관한 학문은 ‘아시리아학’이라고 한다. 

p.183 명확한 연대 확인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이집트보다 오래되고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된 것, 인류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바로 천체의 운행이다.

이집트에는 태양력이 있었다. 이집트의 존폐는 나일 강의 범람에 달려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의 범람에 대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태양력을 이용했다. 이 역법은 기원전 46년 로마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율리우스력으로 대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수학자와 천문학자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모든 자료를 제공했다. 새김글을 번역하고, 상형문자로 된 자료 가우데 하늘의 뜻, 천체의 운행을 암시하는 모든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전해주었다. 

p.184 마리에트는 1821 볼로뉴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고학을 공부했고, 1849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조교가 되었다, 그는 카이로에 가서 파피루스를 사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런데 이집트에 와보니 고대유물이 마구 반출되고 있었다. 마리에트는 골동품상과의 흥정에 열중하는 대신 무분별한 발굴을 방지할 방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오직 연구와 발굴에 모든 관심을 쏟던 마리에트는 고고학의 미래를 위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바로 ‘보존’이었다.  

p.192 파피루스 숲을 지나는 모습을 조각한 부조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p.192 마리에트 시대에 이 작품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 예술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일상을 상세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p.194 고고학계의 위대한 측량가이자 해석가인 윌리엄 매튜 플린더스 피트리.

p.194 이집트의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유물을 꺼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땅속에 묻히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지식욕을 잘 조절하여 이집트의 흙 한 알 한 알을 ‘긁어내야’한다는 말이었다. 

p.201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높고 가장 큰 것이 쿠푸의 피라미드다. 1889년 피트리가 진흙투성이 통로를 따라 도굴꾼의 자취를 더듬었던 피라미드는 하와라의 피라미드였다. 상고시대에 짓기 시작해 에티오피아 메로에 왕조에 완성된 땀과 문물의 결정체였다. 유일한 존재였던 한 사람을 위해 지은 무덤들, 자신의 이름을 수십만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시켜 하늘 높은 곳에 돌로 쓰고자 했던 사람들. 

p.202 피라미드 축조의 의미는 이집트의 ‘특별한 종교적 믿음’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종교적 믿음이란 그들 종교의 바탕이 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집트인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인간의 삶은 계속된다고 믿었다.

p.202 이러한 사상은 두 가지로 구체화되었다. 시신의 방부처리와 요새와도 같은 무덤 축조였다. 모든 피라미드는 그 안에 숨긴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요새였으며, 모든 적에 대비해, 보든 모독 행위와 소요에 대비해 두 겹, 다섯 겹, 열 겹으로 방비했다. 

p.203 단 한 사람의 망자에게 영원한 안전과 영원한 삶을 주기 위해 수천의 산 사람이 무역에 희생되었다. 

p.203 이러한 믿음의 힘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든 이성의 목소리를 물렀다. 파라오들의 피라미드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끝도 없이 치달은 이기주의의 산물이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들만이 쓸 수 있는 무덤이었다.  

p.205 왕은 죽어서도 왕이었다. ‘카’가 미라에 스며들어 저승에서 새로운 삶을 일깨워 줄 때 왕은 그 보물이 필요했다. 

p.206 가설은 모든 학문의 연구방법 가운데 하나다. 가설은 확실한 결과를 바탕으로 가능성을 열어주며, 그 가능성 뒤에는 언제나 뚜렷한 물음표가 붙어 있다. 반면 억측에는 제재가 없다. 대부분은 출발점마저도 ‘확인된’ 것이 아니라 그냥 ‘멋대로’ 정한 것이다. 결과라고 내놓는 것은 상상의 결과일 분이다. 억측은 꿈의 신을 신고 형이상학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외진 길, 가장 어두운 신비의 숲, 잘못 해석한 피타고라스 철학과 유대교 신비주의의 비밀이 우거진 어지러운 들판을 헤맨다. 이런 억측이 논리와 결합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대단히 위험하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논리에 대해서만 기립박수를 보낼 준지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p.207 거대 피라미드는 흔히 ‘돌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는 성서의 ‘해석’을 잘 알고 있다. 거대 피라미드의 해석도 거의 완성되었다. 설계도에서, 대문, 통로, 홀, 묘실의 위치에서 이 민족의 전체 역사를 읽어냈다.  

p.208 피트리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는 고고학자였다. 그의 집요함과 끈기는 1889년 아메넴헤트 3세의 무덤을 발견할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p.209 지칠 줄 모르고 일에 열중하는 피트리가 도둑들의 끈기를 찬양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다. 

p.213 피트리는 고대의 건축가가 왕을 보호하기 위해 미래의 무법자들을 위식하고 미리 조장해놓은 난관을 극복하느라 그 예리한 통찰력과 수많은 경험으로 얻은 지식을 쏟아 부었다.  

p.221 오늘날 우리는 람세스 4세(기원전 1125~기원전 1107) 시대의 파피루스 유물을 통해 무덤 도굴의 목격자가 되 될 수 있다. 3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된다니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그 사건은 당시 세상의 이목을 끈 중대한 것으로, 이전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던 도둑들의 이름이 갑자기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p.225 왕은 사신의 미라를 위신에 걸맞게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유혹은 너무도 컸다. 부자가 되고픈 욕망을 채우고도 남을 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은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의 차지였으며, 도둑은 이르든 늦든 그 길을 찾고야 말았다. 

p.230 오늘날 ‘왕가의 계곡’은 전 세계에서 온 수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보물 가운데 가장 값진 보물이 지난 세기에 자로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p.237 그 석관은 입구 바로 앞에 있던 가장 큰 관 가운데 하나였는데, 새김글을 보니 세티 1세의 미라를 넣은 관이었다. 이집트의 망자숭배 사상을 보여주는 값진 물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셀 수 없이 많은 귀중품들이 바닥에, 관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p.238 감동에 싸인 브룩시는 관에 새겨진 글들을 어디에서부터 읽어야 좋을지 오른 채 대충 훑었다. 그리고 곧 ‘방황하는 미라들’에 대해 기록한 부분을 발견했다.

브룩시는 그곳에 모인 왕의 수를 세었다. 40명이었다. 40구의 미라, 한때 신과도 같았던 권위로 세계를 통치했던 왕 40명의 유해. 그들은 처음에는 도둑이, 그 후 다시 에밀 브룩시 베이가 눈길을 던질 때까지 3000년을 고이 잠들어 있었다.  

p.245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하워트 카터는 이 물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얽힌 사건을 본보기로 삼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덤에서 유물을 빼냈다는 이유로 우리를 파괴자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에게 이 교훈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고대유물을 박물관으로 옮긴 일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발굴 현장에 그대로 두었다면 언젠가는 도둑의 곤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일은 결국 유물을 없애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브룩시는 유물과 함께 카이로에 도착했다. 그는 박물관의 소장품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다시없이 위대했던 고대의 제국에 대해 온 인류가 더 많이 알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p.247 불타는 열정이 거둔 극적인 성공 가운데 최고봉은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만과 크노소스를 발견한 에반스가 제일 먼저 차지했고, 그 다음으로는 바빌론과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를 발굴한 콜데바이와 올리를 꼽을 수 있다. 슐리만은 몸소 삽을 들어 땅을 판 최후의 위대한 아마추어였으며, 독자적으로 활동한 천재였다. 

p.248 하워드 카터는 피트리의 제자답게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이런 비유를 써도 된다면-고고학의 일선 공무원으로서 미지의 나라로 향하던 무모한 돌격에 마침표를 찍고, 정밀한 방법을 동원해 오랜 문명을 측량하고 기록 했다.

p.248 인류가 찬란한 고대 문명의 모습과 표정과 성격과 정신을 발견한 이래 모든 수수께끼를 파헤친 사람들이었다.

p.248 카르나본 경은 스포츠맨인 동시에 미술품 수집가였다. 이렇게 동떨어진 두 가지 취미에 심취하는 것은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사이자 세계여행가였고, 합리적인 행동과 낭만적인 감성을 공유한 사람이었다.  

p.249 이 두 사람의 결합은 환상 그 자체였다. 하워드 카터는 카르나본 경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p.252 카르나본 경과 카터는 ‘왕가의 계곡’ 앞에 서 있었다.

훗날 그는 “다 끝나고 나서 이런 말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비난을 개의치 않고 말하는데, 우리는 어떤 왕의 고분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굳은 희망이 있었다. 바로 투탕카멘의 고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엉망으로 파 엎은 ‘계곡’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들린다. 게다가 이 두 사람에게 그토록 부푼 희망을 심어준 근거는 너무도 빈약했으며, 학계에서는 이제 ‘왕가의 계곡’에서 유물을 발견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p.254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는 시도는 지금까지 모두 실패했지만 이러한 유물로 보건대 그의 무덤은 그래도 이 발굴현장 근처 어딘가에, ‘계곡’ 중앙에 있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추가의 증거 없이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투탕카멘 왕이 매장된 후 ‘계곡’을 지나간 3000년의 세월을 생각해 보라. 고분 안에 매장된 보든 유물은 도둑과 사제들이 수없이 끌고나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발굴 초기에 미숙한 작업으로 인해 얼마나 낳은 유물이 파괴되었던가? 카터가 확보한 네 가지 ‘증거’란 소형 금판 몇 점, 파이앙스 잔 한 점, 토기 몇 점과 인장 몇 점이 전부였다. 이 정도의 자료를 근거로 투탕카멘 왕의 고분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다니! 아니, 직관에 근거한 확신을 얻다니! 이는 자신의 성공에 대한 투철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p.257 집으로 향하는 나귀의 발걸음은 평온했지만 카터는 충동과 조바심, 엄청난 발견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맞서 싸워야 했다.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위대한 발견을 눈앞에 둔 고곡학자가 고분을 다시 메우고 후원자이자 친구인 카르나본 경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한일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p.263 보물창고는 경탄을 불러 일으켰다. 카터는 그 방을 훑어본 후 그곳에 보관된 보물에서 물질적 가치 이상의 가치를 확인했다. 그 보물들은 고고학 연구에 대단히 유익한 자료들이었다. 이집트의 일상과 사치와 문화를 대변하는 수많은 물건이 모여 있었다. 특정시대의 이집트 미술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p.277 카르나본 경과 카터는 이제 막 발견한 무덤에 다시 흙을 덮기로 결정했다.

p.277 어떤 경우에도 고분 안의 유물을 서둘러 꺼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카터는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유물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후에는 얼른 보존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부패하거나 파손될 유물이 매우 많았다.

p.279 6년 동안이나 찾아 헤맨 투탕카멘 왕이 그들 눈앞에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카터는 말했다. “이런 순간에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p.280 카터가 역사를 훑어본 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 것은 맞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지식이 허용하는 확실한 사실은 투탕카멘 왕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사건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과 매장되었다는 사실 뿐이다.” 

p.283 투탕카멘 왕을 치장한 장신구의 수는 우리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한계를 넘는 수준이었다. 겹겹이 두른 아마포 붕대를 풀 때마다 나오는 보물은 총 101개의 모둠으로 분류되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는 금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에 관한 카터의 조사 조고서는 33쪽에 이르는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을 몸뚱이에서 나온 유물이 차지했다. 금과 보석이 열여덟 살의 파라오를 그야말로 겹겹이 싸고 있었다. 

p.540 지난 세기 이후 발굴 사례는 10년을 주기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였다. 다만 무의미한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을 뿐이다. 몇몇 학자들은 오직 한 지역을 발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p.540 고고학 전문가와 아마추어들이 유물이라고는 나올 것 같지 않은 대도시 중심부나 얼음으로 덮인 산꼭대기에서 발굴에 성공해 대중을 놀라게 하는 일이 거듭 일어났다. 

p.541 새로운 발굴과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하인리히 슐리만과 그의 업적, 출판물이 다시금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슐리만의 기본적인 공로는 여전히 인정되었지만, 그의 자화상에서는 몇 가지 흠집이 확인되었다. 슐리만은 광고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이타카, 펠로폰네소스, 트로이>에서 밝힌 대로 슐리만이 1868년에 실제로 히사를리크 언덕을 찾았는지에 대해 오늘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그때는 히사를리크 언덕의 의미를 잘 모른 채 갔다 왔을 것이다. 그 언덕의 의미를 알려준 캘버트의 공로에 대해 슐리만은 훗날 끝끝내 침묵했다.  

p.546 제2차 세계대전 후 고고학 전반에 걸쳐 나타난 중요한 현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의 대대적인 영향이었다. 가장 먼저 확인된 현상은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수중 고고학과 공중 고고학이 발전한 일이었다. 

p.549 미국에서는 핵물리학과 생물학이 현대 고고학의 중요한 보조학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모든 고고학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다. 정확한 연대확인이 가능해진 일이었다. 1948년에 미국인 월러드 리비는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개발했다. 

p.551 그밖에도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유물의 연대, 출처, 진위를 쉽게 확인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연과학적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p.551 좋은 일도 있었다. 과거에는 밀교와도 같던 고고학이 일반 대중에게도 개방된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일반인들도 고고학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있다. 

p.552 발굴은 전 세계에서 계속될 것이다. 미래의 100년을 차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5000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580 열여덟 살에 어느 출판사에 입사해 일과 학업을 병행했으며, 같은 해에 <베를린 증시 정보>에 문학과 영화에 대한 첫 평론을 발표했다. 1년 후 처음으로 잡지사와 출판사를 창립하여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p.580 나는 경험을 향한 욕망을 여행에서 충족시키고자 했다. 거기에 지식을 향한 엄청난 욕구가 뒤따랐다. 나는 하루에 책 한권을 읽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지켰다.  

p.581 사람을 배경으로 사실들을 제대로 정리하면 그 사실은 가장 재미있는 문학적인 주조가 된다. 이러한 시도는 전후 처음으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p.581 이러는 가운데도 ‘사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일은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발국의 역사, 즉 고고학사라는 새로운 분야를 발견했다. 우연히 엄청나게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독일 내 한 지역에 수집된 자료로는 가장 방대한 양이었다. 

p.582 그 다음으로 나는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을(나를 위해!) 썼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도발적인 메모들>인데(영어 제목은 ‘예스터모로우’이고, 앨런 프라이스 존스가 서문을 썼다), 문화철학적인 단상들을 모은 글이다.  

p.583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아라. 그리고 책을 써라.” 
 
* 내가 저저자라면 *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박물관의 유물에 대한 설명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지루한 책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옛날 옛적에 일어난, 낭만적이지만 결코 현실에 위배되지 않는 사건들과 주인공의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다.……이 책은 ’논픽션 소설‘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 사실만을 소재를 소설이라는 문학적 틀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논픽션 소설의 방식은 딱딱한 학문적 사실만을 배열하는 데 그치는 역사서의 고정관념을 깨주면서 특히 그 역사를 이끌어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특히 발굴 사실에 대한 진부한 보고서 형식을 탈피하여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발굴 작업을 직접 계획하고 참여하였던 고고학에 대한 열정어린 사람들의 불굴의 활동과 업적에 대한 생생한 기술과 전체 역사 속에서의 의미 파악과 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작자의 노력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고고학의 고전으로 많이 읽히며 대중적인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에 고고학 탐사에 참여하여 불후의 업적을 남긴 이 책의 많은 주인공들은 전문 고고학자들이 아니었으며, 또 그들의 업적을 생생한 필치로 기술하여 만천하에 알려준 체람 역시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체람은 책에서 “성공한 아웃사이더에 대한 전문가의 불신은 일반인이 천재에게 보이는 불신과 같다. 안정된 인생행로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이런 멸시는 정당하지 않다.

학문연구의 역사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뒤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위대한 발견을 한 아마추어가 대단히 많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는 정식교육이 거는 브레이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문의 전통이 설치한 장애물을 뛰어 넘었다. 이런 아웃사이더 가운데는 독학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고 따뜻한 애정을 갖게 된 고고학에 대해 아마추어였던 작자가 자신의 길을 먼저 걸어간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의 삶과 업적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모습 그리고 인류의 삶의 모습과 동일시되는 부분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체람의 책을 읽고 나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하는 점에 동의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모두 다룬 것이 아니라 서구와 자신의 관심사 중심으로 기술하다보니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인더스 문화와 중국의 문화 및 우리의 문화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해명하고 있으나 동양의 아니, 한국의 또 다른 체람이 나타나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멋지게 채워 주기를 바래본다.

 책을 읽는 내내 고고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다해 꿈을 이룬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어린시절 동화같은 꿈을 꾸었던 이들이고, 자신의 꿈을 결코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어릴적부터 인문학을 접하여 그것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꿈을 꾸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를 선물 받고 어른이 되면 트로이와 왕의 보물도 찾을 것이라고 말했던 소년은 언젠가 호메로스 이야기에 나오는 머나 먼 나라를 찾아내고 그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소년 시절의 꿈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트로이를 찾아내었다.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에 마음을 빼앗기고, 돌에 새겨진 가장 오래된 상형문자에 넋을 잃고는 자기가 크게 되면 그것을 읽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하던 소년은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였다. 결국 로제타스톤의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다시 구성한다며 아이들에게 고고학자들이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발견하기까지 어린 시절 꿈을 꾸게 된 시절부터 그들이 자신의 업적을 이루는 과정을 보다 자세하게 보여주면서, 그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열정을 갖고 노력하는 순간을 통해 고고학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호기심을 갖고 읽을 수 있도록 아마추어 고고학자 위인전을 단편으로 구성해보고 싶다.

<참고서적>
1. 몽상과 매혹의 고고학 (C.W.쎄람의 사진으로 보는 고고학 역사이야기) / C.W.쎄람 저 / 강미경 역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2.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 C.W.세람 저 / 안경숙 역 / 대원사 / 2000년

IP *.68.10.114

프로필 이미지
박상현
2010.04.19 20:00:12 *.236.3.241
연주의 리뷰가 갈수록 집요해지는구나. 잘 배우마 ^^

"고고학에서 낭만적인 모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는 늘 낭만적이다.”
--> 고고학은, 역사는 사실들의 조합이지만 낭만적일 수 밖에 없음은 주인공인 사람이 감정의 고등동물일지언정,
      이성의 화신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프로필 이미지
우성
2010.04.19 22:11:24 *.30.254.28
차라리 시간이 늦을지언정,
리뷰의 퀄리티를 손상시키지 싶지 않다는 뜻(?)

정성이 배에있는 리뷰..잘 읽었다..
연주야...부족한대로....시한내에 올려라...

여전히 맏이 같은 막내..
힘내라...홧팅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72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캠벨 [2] [2] id: 문윤정 2012.04.23 2916
1671 현경과 앨리스의 神나는 연애.. [4] 김미영 2005.10.21 2917
1670 북리뷰15-<네루다자서전: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4] 박경숙 2010.06.15 2917
1669 #24. 그들이말하지않는23가지 / 장하준 file [1] 쭌영 2013.10.29 2917
1668 <사기열전> 사마천 지음 ( 2회 읽기 ) file jeiwai 2013.07.22 2919
1667 [독서15]다산문선/정약용 [1] 素田최영훈 2007.06.25 2920
1666 44. 나만 위로할 것_김동영 지음 한젤리타 2013.03.03 2920
1665 쟈크 아탈리-인간적인 길 [11] 도명수 2007.04.27 2921
1664 [북리뷰 15]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사/노/투 file [5] 신진철 2010.06.15 2921
1663 [9] 이은상의 난중일기 file 지희 2008.06.02 2924
1662 <세월이 젊음에게 - 우리가 가져야 할 일과 인생에 대한 마음가짐 > - 구본형 [2] [1] 김연주 2011.03.08 2924
1661 (09) 난중일기 - 이순신 이한숙 2008.06.02 2925
1660 (21) 피터 드러커 자서전 - 피터 드러커 이한숙 2008.10.06 2928
1659 [북리뷰]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오병곤, 홍승완 이선형 2011.01.10 2929
1658 숨겨진 힘 사람 [4] 박소정 2006.05.04 2930
1657 [3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2008.12.29 2933
1656 [양갱]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사진강의노트_ 김성민 [1] 양갱 2012.05.01 2933
1655 착한 미개인과 동양의 현자.. [2] 김미영 2005.05.20 2934
1654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 -프레드 앨퍼드 지음- 문요한 2005.06.28 2934
1653 [부드럽게 말하고 강력하게 행동하라, 제임스 M. 스트록] 통찰맨 2005.09.14 2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