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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3일 06시 04분 등록
새벽, 비 내리다. 가게에서 책 읽던중. 신문 아저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전령처럼 신문을 들이민다. '스폰서 검사' 못믿을 진상조사,가 1면이다. 검찰이 검찰을 조사한다는 내용. 발빠르게 처신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싶었는데, 막상 속을 까보니 예와 다를 바 없다. 짜고 고스톱이 될터.

대한민국 검찰은 결국 변화하지 못할 것이다. 외부에서 변화의 칼이 들어와야 옳은 것이다. 서슬퍼런 날이 환부를 도려내야 변화다. 고통스럽고, 자지러지게 아프다. 미지근한 생색내기 조사로는 그냥, 그렇게 갈 것이다. 가끔 그들은 검사가 아니라, 배우가 되었으면 더 잘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웅은 누구나 조력자를 만난다. 혼자 성공하는 영웅은 없다. 운동선수이건, 가수이건, 배우이건 입상식에서는 000에게 감사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수 비에겐, 박진영이 있었고, 보아에겐 이수만이, 서태지에겐 시나위가 있다. 조력자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사람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요다는 제다이의 조력자다. 그는 현자賢者보다는, 코치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도 조력자가 많았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제시하는 트레이닝을 거부했다. 내가 더 잘낫다는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훈련은 지겹고 힘들다. 결국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그들을 거부했다. 세상에 상처 받으면서까지 상대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다. 
  
안좋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영웅은 어린 나이에 조력자를 만난다. 나이가 들면, 미친짓을 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면에서, 최근 들어 조력자 복이 터졌다. 나에게 마지막 기회다. 

어제 성우형 오다. 상대가 긍정적이어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고 이야기. 

몸을 낮추고, 고통을 감수할 것. 변화는 트레이닝의 결과다. 즐거운 트레이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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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인간의 신화에는 끊임없이 살이 붙어왔고, 이러한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신화는, 다함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顯現한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많은 분야의 과학은 이 수수께끼의 분석에 공헌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라크와  하남河南, 크레타와 유카탄의 폐허를 탐사하고 있고, 인종학자들은 오브 강의 오스티아크인 , 페르난도포 섬의 미개인들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일군의 동양학자들은 우리 성경의 히브리 이전 시대 사료史料를 비롯한 동방의 신성한 기록을 우리 앞에 열어 보였다.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지난 세기에 민족 심리학 분야에서 시작된 연구에 박차를 가해 언어, 신화, 종교, 예술의 발달, 그리고 도덕률의 심리학적 기틀을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정신 의학에서 떠오른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다. 정신분석학잗르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에 이르면 견해가 다소 다를 수 있고, 특정 사례나 문제에 대한 해석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도 있지만,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일반 신화학은 없어도, 사사롭고 드러내어 인정받지 못한 미성숙 단계에 있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萬神殿이 있다. 최신형 오이디포스의 화신, 미녀와 야수의 속편이 오늘 오후에도 뉴욕의 42번가와 50번가 모퉁이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미국인 청년은 신문 기사를 배급하는 통신사 담당자에게 이렇게 썼다.
 
꿈을 꾸었는데......나는 우리 집 지붕을 수리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확인하느라고 돌아서는 참인데, 망치가 그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지붕의 경사면을 미끄러져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사람이라도 하나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몹시 놀란 나는 사다리를 타고 마당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아버지가 쓰러져 있더군요. 이미 절명한 다음이었습니다. 나는 울먹이면서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집 안에서 나오신 어머니는 나를 다독거리며 이러시더군요.
 
[얘야, 너무 상심 마라. 저 양반이 갔어도 너는 나를 잘 보살펴줄 거다]16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주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꿈을 읽는 현대 과학인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같은 비현실적 이미지에 유념하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학은 이러한 이미지가 스스로 기능하게 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자아 발달의 위기는, 민간 전승이나 꿈의 언어에 노련한 전문가의 감시안 앞에서 저질러진다. 이 전문가가 시험과 비전秘典을 관장하는 원시림 성소聖所의 주의, 즉 고대 비법 전수자 ancient mystagogue나 영혼의 안내자로서의 역할과 성격을 떠맡게 된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이며, 그 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의사의 역할은, 신화나 동화에서 주문으로 무서운 모험의 시련과 위기에 몰린 영웅을 도와주는 노현자 wise old man의 역할과 같다. 의사는 갑자기 나타나, 무서운 용龍을 죽일 수 있는 빛나는 마법의 칼이 어디 있는지 일러주고, 영웅을 기다리는 신부와 보물이 쌓여 있는 성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며, 영웅의 치명적인 상처에다 고약을 발라주고,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고는 어느 황홀한 밤에 모험을 떠난 길을 되짚어 정상적인 생활이 기다리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21
 
소년은 이 말을 곧이 듣고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어머니나 외조모 혹은 친척되는 여성들과 함께 숨는다. 남자들이 한패가 되어 자기를 거대한 뱀이 울부짖는 남성의 구역으로 데려가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의식적으로 통곡하는데, 이는 뱀이 소년을 삼켜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무의식에서 이에 상응하는 경우의 실례로 C.G. 융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 환자 중 하나는 뱀이 동굴에서 나와 자기 사타구니를 깨무는 꿈을 꾸었다. 그가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믿고 자신을 친모 복합, mother coplex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후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좇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倒錯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하면, 아내들은 결혼한 지 14년,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이렇나 사랑은 켄타우로스 실레노스, 사튀로스, 아니면 판과 흡사한 탐욕스러운 인쿠부스(잠자는 부인을 범한다고 믿어지는 악마)나 줄 숭 ㅣㅆ는 것인데, 아내는 위의 신화적 모티프가 등장하는 2차적인 꿈으로 이것을 경험하거나 최근 영화를 통해서 본 영웅의 모습으로, 성욕의 여신이 기거하는 바닐라 지붕의 신전에서 경험하려 하는 것이다. 24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토인비 교수가, 6권에 달하는, 문명의 영고 성쇠의 법칙에 관한 연구서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의 분열, 사회적 무리의 분열은 세월 좋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계획으로도, 이상적으로 설계된 미래를 보증하는 예정표로도, 심지어는 악화된 요소를 다시 접합시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길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면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는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29
 
사소한 것일수록 손쉬운 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죄 많은 왕을 섬기는 바로 이 장인이, 미궁의 공포를 연출한 장본인인 동시에 자유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은 우리로부터 먼 데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수세기 동안 다이달로스는 장인 및 과학자, 기이할 정도로 냉담하고, 거의 악마적인 현상의 상징, 사회정의의 정상적인 경계를 넘어 자기 시대의 도덕률이 아닌, 자기 예술의 도덕률에만 봉사하는 인간유형을 대표해왔다. 그는 단순하고, 용기에 차 있으며, 진리라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영웅이다.
 
아리아드네가 그랬듯이 우리도 이 사람에게로 달려가 보자. 그는 실타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아마亞麻를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들판에서 거두었다. 수세기에 걸친 경작, 수십 년에 걸친 채집, 수많은 가슴과 손의 힘겨운 작업.... 이 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를 훑고, 간추리고 헝클어진 실무더기에서 실을 자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39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 (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인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화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앟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제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다. 
 
신화와 동화 고유의 사명은, 비극에서 희극에 이르는 어두운 귀안길에 깔린 특수한 위험과 그 길을 지나는 기술을 드러내는 일이다.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환상적이며<비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심리적인 승리지 육체적 승리는 아니다. 전설이 실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경우라도 승리의 행위는 꿈같은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지 실물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이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기 전에 보다 중요하고 보다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더러 꿈속에서 찾아가기도 하는 미궁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43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 올라간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왔다. 이아손은 바위가 서로 부딪치는 험로를 지나고 불가사의한 바다로 항해하여 황금 양털을 지키던 용을 꺽고는 양털과 , 찬탈자로부터 왕위를 빼앗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귀향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저승으로 내려가 죽음의 강을 건넌 다음 삼두구 게르베로스에게 미끼를 던져 환심을 사고는 죽은 아버지의 망령을 만났다. 그는 모든 것, 가령, 사람들의 운명, 개국 직전에 있던 로마의 운명, 그리고 <무거운 짐을 피하거나 견딜 수 있는 방법>까지도 알게 된다. 그는 상아문을 통해 다시 이승의 삶으로 돌아왔다. 
 
영웅 과업의 어려움, 계획이 원대하고, 수행이 신성할 경우 이 영웅 과업의 숭고한 의미를 장엄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부처의 고행에 대한 전설에 잘 나타나 있다. 젊은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사랑하는 백마 간타가를 타고 은밀히 아버지의 궁전에서 경비병들이 지키는 성문을 무사히 빠져나가 24만의 신위에 밝혀진 횃불 사이를 지나고, 너비가 1천 2백24큐빗이나 되는 신성한 강을 건너서는 칼을 뽑아 단숨에 머리 타래를 잘랐다. 그러고는 손가락 두 개 넓이의 길이로 남은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꼬아 머리에다 붙였다. 이어 승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행자行者가 되어 세계를 방황하는데 그는 이동안 여덟 단계에 걸치는 명상의 과정을 넘어섰다. 이윽고 그는 은자로 물러앉아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철저한 금욕 생활로 금방이라고 쓰러질 것 같았으나 다시 일어났다. 다시 일어난 그는 수행 방법을 바꾸어 보다 온건한 탁발승의 수행 방법으로 돌아섰다. 
 
어느 날 그는 나무 아래서 이 세계의 동쪽 하늘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는데, 나무가 그의 광채를 바다 환하게 빛났다. 수자타라는 소녀가 와서 그에게 금 그릇을 떠온 우유죽을 바쳤다. 죽을 마신 그가 그릇을 강으로 던지자 그릇은 흐름을 거슬러 떠갔다. 이것은 그가 승리하는 순간이 임박했다는 표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들이 만들어놓은 너비 1천1백 28큐빗의 길을 따라 걸었다. 뱀과 새들, 숲과 벌판의 신들은 꽃과 천상의 향기로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하늘의 선녀들은 음악을 보내었으며, 만천하는 향기와 꽃다발과 아름다운 가락과 함성으로 차고 넘쳤다. 그가 저 위대한 <정각의 나무>로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아래에서 만상의 이치를 깨칠 보리수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각을 이루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하고 그 보리수 아래, 부동의 자리에 앉았다. 곧 사랑과 죽음의 신 카마 마라가 다가왔다. 
 
이 무시무시한 신은 코끼를 탄 채 1천 개의 손에 각기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규모는 앞으로 백40리, 오른쪽으로 백40리, 왼쪽으로 백40리, 뒤로는 능히 세상을 덮을 만했으며 높이는 1백 리에 달했다. 만상을 지키는 신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미래의 부처는 나무 아래서 움직이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윽고 마라는 그를 공격하여 정신을 흐트러놓으려 했다. 46
 
하느님께서는 한 방향에 나타나시는 게 아니고 네 방향에서 동시에 나타나셨으니, 그래도 그분의 영광이 하늘과 땅을 채우기엔 부족함이 없더라. 이렇게 엄청난 대군이 있었는데도 시나이 산은 붐비기는커녕 오히려 빈 듯하였다. 
 
곧 알게 될 테지만, 대양을 방불케 하는 동양의 광대한 이미지로 표현되든, 그리스의 웅장한 서사시로 표현되든, 아니면 장엄한 성서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영웅의 모험은 위에서 말한 핵 단위의 패턴, 다시 말하면,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 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 그리스인들은, 인류 문명에 대한 최초의 지원으로서의 불과 프로메테우스의 초월적인 행적을 전했고, 로마인들은 세계적인 그들 도시의 창건에 관련된 아이네이아스를 떠올리며 폐허가 된 트로이아를 떠나 무서운 사자의 나라 저승으로 따라나섰다. 장소가 어디 건, 그들의 관심(종교적, 정치적, 혹은 개인적)이 어디에 있건 진정한 창조 행위는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세상으로 무엇인가를 가져오는 행위로 표현되며, 영웅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거듭난 자, 위대한 자, 창조력을 얻어 돌아오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역시 한 목소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모험의 고전적인 단계를 두루 꿰는, 수많은 영웅적인 인물을 따라가 보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작업은 당대의 삶과 관련된 이미지의 의미뿐만 아니라 야망, 권력, 영고 성쇠, 그리고 지혜로서의 인류 정신의 단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51
 
그러나 공주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건방진 개구리가 뭐라고 떠들어대는 거야. 물가에서 다른 개구리들과 놀기나 하지, 뭐, 인간의 친구가 되겠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이야?)
 
개구리는 약속을 받아내자 머리부터 첨벙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왔는데, 어느 새 공을 물고 나와 풀밭에다 던졌다. 공주는 그 공을 집어들고 종종걸음으로 내달았다. 뒤에서 개구리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공주님, 저도 데리고 가셔야죠. 저는 그렇게 빨리는 못 뛰어요]
 
하지만 공주 뒤에다 대고 고함을 질러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공주는 들은 척도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때쯤 다시 샘 속으로 돌아갔을 불쌍한 개구리를 까맣게 잊고 말았더라. 
 
이 동화는, 모험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부지중에 저지른 실수는 극히 드문 것이긴 하지만 뜻밖의 세계를 드러내고, 당사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력과의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이러한 실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이 동화에서 황금 공이 사라진 사건은, 공주에게 닥칠 어떤 운명의 첫번째 조짐이고, 개구리는 두번째, 무심결에 한 약속은 세번째 조짐이다. 71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부왕과 함께  누리던 특권과 행복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왕의 자식의 경우든, 에덴 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입명,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는 똑같다. 
 
동화에 나오는 징그럽고 욕지기나는  개구리나 용은, 태양을 입에 물고 솟아오른다. 이 징그러운 뱀이나 개구리, 즉 징그러운 동물은 무의식 심층(하도 깊어서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을 상징한다. 여기엔 징그럽고,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미지의 혹은 지진한 요소, 원리, 그리고 생존의 본질이 우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정이며, 트리톤이며, 물의 수호신들이 사는 우화에 나오는 용궁의 진주며, 지하의 도깨비 나라를 밝히는 보석이며, 뱀처럼 땅을 괴고, 땅을 감싸는 불사의 바다에 있는 불씨며, 불멸의 밤을 꽃피우는 별이다. 용이 지키는 금 덩어리며,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금단의 능금이며, 황금 양털의 보풀이다. 따라서 모험에의 소명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길을 따르면, 길은 낮의 벽을 통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열린다. 혹 전령관은 우리 내부의 억압된 본능적 다산성의 상징인 야수(동화에서처럼 ), 또는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신비스러운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아더 왕 이야기를 보면, 왕이 많은 기사들과 함께 사냥을 떠나게 되는 경위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왕은 앞에 있는 거대한 수사슴을 발견했다. 아더 왕은, 내 이 수사슴을 쫓으리라고 마음먹고 말에다 박차를 가했다. 왕은 한참 동안 말을 몰았는데, 그 기세가 자못 당당하여 곧 그 수사슴을 덮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왕의 추격은 시간을 오래 끄는 바람에, 다리 사이에 끼여 달리던 말은 그만 제풀에 쓰러져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호위병이 다른 말을 한 마리 몰고 왔다. 옹은 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수사슴이 숲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두번째 말도 죽고 말았다. 왕은 샘가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는데, 서른 마리 정도 되는 사냥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때 그는 자기 앞으로 오는 괴상한 야수를 보았다. 듣도 보도 못한 야수였다. 야수는 샘가로 와서 물을 마셨다. 야수의 배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른 쌍 정도의 사냥개가 짖으며 내닫는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야수가 물을 마시자 그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야수가 그곳을 떠나자 또 그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 75
 
나는 꽃이 만발한 뜰에 있었다. 해는 핏빛으로 지는 참이었다. 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젊은 기사가 나타나, 진지하고 그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려오?]
이렇게 말하고는,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손을 잡고는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뿐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 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막내 공주의 세계에서처럼, 황금 공이 샘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뒤, 주인공은 잠깐이나마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오나, 생의 의미는 느끼지 못한다. 이때, 어떤 힘에 대한 일련의 조짐이 나타난다. 이 세계의 문학 가운데서 모험에의 소명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실례인, 아래에 소개할 <네 가지 조짐>의 전설에서처럼, 이러한 소명은 마침내 부정하지 못할 국면에 이른다. 
 
미래의 부처인 젊은 고타마 샤카무니 왕자는 노老, 병病, 사死, 혹은 승려 생활에 대한 지식과 단절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아들이 행여 속세를 버리고 사문이 될까봐 부왕이 아들을 극구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8
 
신경증적인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자기를 현재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균적인 유형은, 의지력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다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있다. 즉, 자기 자아를 자진해서 다시 다듬는 이 작업에 있어서 신경적인 유형은 파괴적인 예비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업은 자의적인 창조 과정은 분리시키고 이를 이념적인 추상성으로 변용시키지 못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역시....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내적인 문제에 국한되며, 건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에서도 알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작품치고<신경즉적>성격의 병리적 위기가 없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저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카마르 알 자만 왕자와 부두르 공주의 모험이 상징하는 영웅 문제의 일면이다. 
 
페르샤 샤리만 왕의 외동 아들인 젊은 미남 왕자는 부왕의 근질긴 제안, 부탁, 요구, 끝내는 명령까지 거부했다. 즉 남 하는 짓 하며 살고 아내를 얻으라는 아버지의 청을 거절한 것이다. 처음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88
 
[오, 부왕이시여, 부왕께서는 저에게 결혼할 욕심도, 여자에게 영혼을 기울일 의향도 없다는 걸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여자들의 교巧와 간姦에 대해서는 저도 많은 책에서 익히 읽고 많은 선인들로부터 익히 들은 바 있습니다. 한 가객은,
 
 
여자를 일러 물으니 대답하겠노라.
내 일찍이 여자의 글에서 명문을 대한 바 없고,
사내의 머리가 희어지고, 주머니가 빌 때면,
사내에겐 나주어줄 사랑의 몫도 없다더라.
 
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여자에 등을 돌려야 알라 신을 돈독히 섬길 수 있고,
여자에게 고삐를 잡히는 사내를 물거품이 된 희망으로 벌금을 문다.
 
여자는 요상한 새 노리개를 찾을 때면 사내를 구박하게 마련이니,
사내는 하릴없는 학문에 천 년 세월을 허송 세월하는구나....]
 
시구 외기를 마친 왕자는 말을 이었다. 
[.......부왕 이시여, 저는 부부 생활만은 결단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죽음을 마시겠습니다. ]
 
아들로부터 이 말을 들은 술탄 샤리만은, 눈앞에서 빛이 흑암으로 변하는 것 같아 몹시 슬퍼했다. 그러나 아들은 지극히 사랑하던 왕은 공연한 말을 되풀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여전히 극진한 사람으로 아들을 대했다. 
 
일 년 뒤, 부왕은 아들에게 다시 이 부탁을 넣어보았으나 아들은 몇몇 시인의 시구를 다시 입에 담으면서 여전히 거절했다. 89
 
[어딜 가느냐? 서라! 너는 내 밥이다!]
도깨비가 외쳤다. 
오무기 태자는 두려워하는 대신, 자기가 몸에 익힌 기예와 재주를 믿고 도깨비를 꾸짖었다. 
 
[도깨비야, 내 이 숲으로 들어설 때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허나, 그대가 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대 뜻이니 어쩔 수 없다만, 그대 역시 각오는 해야 할 게다. 내가 독화살을 그대 살 속에다 박으면 그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태자는 활에다 독 바른 화살을 먹이고는 도깨비를 향해 시위를 한 차례 당겼다.  그러나 화살은 도깨비의 털에 가 붙어버렸다. 태자는 차례로 50개의 화살을 날렸으나 화살은 모두 도깨비의 터럭에 가 붙었다. 이윽고 도깨비가 몸을 흔들자 화살은 후두둑 도깨비 발밑으로 떨어져버렸다. 도깨비는 태자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무기 태자는 다시 한번 도깨비를 위협하고는 칼을 뽑하 힘있게 던졌다. 날이 석 자나 되는 칼은 똑바로 날아가 괴물의 터럭에 붙어버렸다. 투창 공격 역시 실패로 돌아가자 태자는 곤봉을 던졌다. 곤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곤봉 역시 터럭에 붙어버리자 태자는 다시 한번 도깨비를 꾸짖었다.
 
[들어라 도깨비야. 그대는 아직 내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나는 다섯 가지 무기를 지닌 태자다. 그대가 진 치고 있는 이 숲으로 들어오면서 나 역시 활과 칼 같은 무기는 애시당초 믿지를 않았다. 그래, 나는 이 숲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오직 나 자신에 의지하고자 했다. 내 이제 그대를 가루로 만들 테니 그리 알아라!]
 
태자는 자기 결심을 밝힌 다음 한 소리 크게 지르면서 오른손으로 도깨비를 쳤다. 그의 오른손은 도깨비의 털에 붙고 말았다. 왼손으로 쳤지만 역시 터럭에 붙고 말았다. 이번에는 오른발로 걷어찼으나 역시 마찬가지, 왼발로 걷어찼으나 예외는 아니었다.
 
태자는.
 
[오냐, 이번에 내 머리로 받아 네놈을 쓰러뜨리겠다.]
 
이렇게 외치고는 머리로 받았지만, 머리 역시 도깨비 터럭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117
 
이러한 교훈은 쉼폴레가레스(충돌하는 바위 섬)의 모험에 이르러 한층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웅이 외부로의 관문, 즉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는 대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 들어감은 신도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치한다. 신도는 이 신전 안에서, 자신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티끌에 불과하다는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된다. 신전 안, 고래의 배, 세계라는 한정된 공간 건너 위, 아래로 보이는 천상적 공간은 결국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이다. 신전에 접근하거나 들어가는 자들이 기괴한 괴수, 즉 용, 사자, 마검을 든 괴물 살해자, 욕지기나는 난장이, 날개 달린 소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괴수들은, 한 차원 심화된 내적 침묵과 만날 준비가 되지 않는 자들을 지켜주는 관문의 수호자들이다. 이들은, 인습 세계를 특징짓는 신화적 도깨비, 혹은 두 줄로 난 고래의 이빨과 일치하는 존재들로서 존재의 위험한 측면을 보여주는 예비적인 경고의 화신이다. 이들은, 신자가 신전으로 들어가는 순간 변형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이 순간 신도의 세속적 성격은 사라진다. 그는 뱀이 허물로 싸여 있듯이 이 신전을 허물로 삼는다. 신 안에서 신도는, 시간적으로는 이미 죽어 세계의 자궁, 세계의 배꼽, 지상의 낙원으로 돌아갓다는 암시를 받는 수도 있다. 사람들 가운데엔 그저 물리적으로 신전 수호자 앞을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괴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는 없다. 침입자가 이 성전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는 한 얻은 것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읻.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괴수들을 그저 괴물로만 본다. 따라서 그들은 이 괴수들 손에 접근부터 거부당한다. 그렇다면 비유적으로 보아,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고래의 입을 향한 영웅의 돌진은 같은 모험인 셈이다. 즉 회화적 언어로 말하면 둘 다 생의 구심화 행위, 거듭나는 행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3
 
<어려운 임무>라는 모티프의 실례 가운데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매력적인 것은 잃어버린 애인 쿠피도(에로스)를 찾는 프쉬케의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기본적 역할이 역전된다. 즉 신랑이 신부를 찾으려고 애쓰는 대신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얻으려고 목을 늘이며, 엄부嚴父가 청년으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앴는 대신, 시기심 많은 어머니인 베누스(아프로디테)가 신부로부터 자기 아들 쿠피도를 감추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프쉬케가 베누스에게 아들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하자, 베누스는 프쉬케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땅에다 사정없이 메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밀, 보리, 기장, 양귀비 시, 완두, 렌즈 콩, 그리고 붉은 콩을 무더기로 쌓아놓고는 어두워지기 전까지 종류별로 골라내라고 명했다. 프쉬케는 개미 대군의 도움을 받아 명령래로 했다. 베누스는, 이번에는, 위한험 숲의 도저히 접근할 수없는 계곡에 사는 야생 양의 금모를 모아오라 했다. 이 양은 뿔이 날카롭고 이빨에는 독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록빛 갈대가 그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 양이 지나는 길목의 갈대에 묻은 금모를 모으면 된다고 한 것이다. 베누스 여신은, 잠들 줄 모르는 양이 지키고 있는 바위 꼭대기, 얼어 있는 샘에서 물 한 항아리를 길어로라고 했다. 이번에는 독수리가 다가와 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프쉬케는, 명계冥界의 심연으로 내려가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한 상자 가져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높은 탑루가 프쉬케에게 명계로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카론에게 줄 동전과 케르베로스에 줄 뇌물까지 주어 그 길을 다녀오게 했다. 129
 
프쉬케의 저승 여행은, 동화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겪었던 수많은 모험 중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북극 지방 사람들(라프 족, 시베리아 인, 에스키모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일부 종족)의 샤먼들이 잃어버린 사물을 찾거나, 병든 영혼을 치료할 때 하는 모험이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모홈에 대비해서 새나 사슴, 즉 샤먼 자신의 영혼의 모습이며, 자기 망력의 본체인 짐승을 상징하는 마법의 의상을 걸친다. 그의 북은 곧 독수리, 사슴, 말 같은 동물이다. 그는 이런 동물과 함게 날거나, 타고 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든 지팡이 역시 그를 돕는 조력자 중 하난다. 거기에다 그는 보이지 않는 요정을 거느린다. 
 
일찍이 라플란드로 갔던 한 여행자는 죽음의 나라를 향한 이 기이한 사자의 불가사의한 여행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명계는 빛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샤먼의 이 의식은 어두워진 다음에 시작된다. 환자의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은 희미한 등잔불이 깜빡거리는 환자의 집에 모여 샤먼의 이 의식에 동ㅊ참한다. 먼저 샤먼은 보호령(保護靈, helping spirits)들을 불러낸다. 이들은 사면의 눈에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샤면 옆에는 예복을 입은 네 사람의 조수가 앉는다. 네 사람의 조수란, 예복을 입되 허리띠를 두르거나 두건을 쓰지 않은 여자 둘, 허리띠나 두건 중 하나를 두르지 않는 남자 하나, 그리고 미성년 소녀 하나다. 샤먼은 두건을 벗고 허리띠와 구두 끈을 늦춘 다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방 안을 돌기 시작한다. 130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한은 자매, 즉 이난나와 에레쉬키같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기커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운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시련은 첫 관문의 문제를 심화시키고 질문은 여전히 미제로 남는다. 자아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그런가 하면, 주위에 있는 것은 머리가 많은 휘드라水蛇이기 때문이다. 절단한 곳에다 비방을 쓰지 않는 한 하나를 자르면 두 개의 머리가 나타난다. 원래 시련의 나라를 향한 출발은 초보적인 정복과 예언의 힘을 얻기 위한 길고 험한 여로만을 표상했다. 이제 영웅은 용을 죽여야 하고 몇 번이고 위험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 동안 영웅은 몇 차례의 예비적인 승리를 거두고, 일시적이긴 하나 무아의 경지를 체험하며, 이상향을 엿보게 도니다. 143
 
미녀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왕자는 이윽고 열세번째 방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방에서 새어 나오는 금빛 섬광 때문에 왕자는 앞을 볼 수 없었다. 왕자는 눈이 그 빛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이 넓고 휘황찬란한 방 안에는, 황금 바퀴에 실린 황금 침대가 있었다. 바퀴는 끊임없이 돌았고, 침대 역시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고 돌았다. 침대에는 투버 틴타이, 즉 타오르는 샘이 있었다. 샘에는 황금 뚜껑이 덮여 있었다. 이 샘은, 여왕이 누운 침대와 더불어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내 맹세코 이르거니와, 여기서 좀 쉬기로 하리라]
 
왕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로 올라가 엿새 밤낮을 거기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자는 여성은, 동화나 신화에 곧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미 브린힐트와 <덩굴장미 아가씨>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이런 여주인공을 만난 바 있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례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豫兆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혹과 약속은, 이 세상의 도시나 숲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찾아온다. 왜 찾아왔을까?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며, 위안과 자양, 그리고 우리가 아득한 예날에 그 사랑을 받던 <좋은>어머니(젊고 아름다운)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우리와 그녀의 사이를 가로막았지만, 그녀는 영원한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아직 우리의 속 영원의 바닥 밑바닥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148
 
그는 삼나무와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계곡을 발견했다.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숲속으로 들어갓다. 숲속에는 동굴이 있엇는데, 이 안에는 조용히 속삭이며 솟는 샘과, 수초 자욱한 연목으로 흘ㄹ드는 실개천도 있었다. 이 그늘진 외딴 곳은 바로 아르테미스(디아나)의 휴식처였다. 마침 아르테미스는 알몸으로, 요정들에게 둘러사인 채 목욕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테미스는 창과 전통과 활은 물로 신발과 옷까지 벗어두고 몸을 닦는 중이었다. 역시 옷을 벗은 요정 하나는 아르테미스의 머리를 땋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큼지막한 항아리에서 물을 퍼 아르테미스의 몸에 부어주고 있었다. 
 
젊고 당돌한 사내가 이 유쾌한 휴양지에 들이닥치자 찢어지는 듯한 여성의 비명소리가 낭자했고, 요정은 속인의 눈길로부터 여주인의 알몸을 지키려고 아르테미스 주위에서 몸으로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스는 요정들보다 훨씬 키가 커 머리와 어깨는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청년은 아르테미스의 몸을 보았고, 그 눈길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스는 활을 찾았으나 너무 멀리 잇어서 급한 김에 손에 잡히는 것, 그러니까 물을 한 움큼 악타이온의 얼굴에 끼얹으며 외쳤다. 
 
[네가 여신의 알몸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려무나]
 
그의 머리에서 사슴의 뿔이 돋앗다. 목은 굵어지고 길어졌으며 귀는 뾰족하게 솟았다. 뿐인가, 두 팔은 길어져 다리 길이와 같아졌고, 손발은 굽으로 변했다. 질겁을 한 그는 한 차례 펄쩍 뛰어보고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데 놀랏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린 다음 물을 먹으면서 맑은 호수에 <비친 제 모습> 을 보고는 그만 기가 막혀 뒤로 물러서고 말앗다.
 
이어 악타이온에게 무서운 운명이 덮친다. 지금까지 수사슴 냄새를 쫓아다니던 악타이온 자신의 사냥개들이 숲속에서 악다구니 를 쓰며 뛰어나왔다. 150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지어 멋대로 가른 <선>과 <악> 다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法과 상像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지난 세기의 위대한 힌두 비법 전수자인 라마크리슈나는 우주의 어머니께 새로 지어 바친 캘커타 교외의 다크쉬네와르 신전의 사제였다. 이 신전에 모신 형상은, 무섭고도 자비로운 이 여신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여신의 네 팔은 우주적 권능을 상징했다 .즉 위 왼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의 손은 참혹하게 잘린 인두의 머리터럭을 거머주고 있었으며, 위의 오른손으로는 <두려워하지말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그 아래 손으로는 은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목에 걸린 목걸이는 인간의 머리를 꿴 것이었고, 치마는 인간의 팔을 짜맞춘 것이었다. 긴 혀는 피를 찾아 낼름거렸다. 이 여신은 다릉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the Black One>, 즉 칼리Kali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다. 152
 
어느 조용한 오후, 라마크리슈나는 갠지스 강에서 올라와 그가 명상하고 잇는 숲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그는 여자가 아이를 낞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곧 아기가 태어났고, 여자는 이 아이를 돌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하여 그 무지무지한 입으로 아이를 깨물어 죽인 다음 씹어 삼키고는 갠지스 강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행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됮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심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유치한)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신화학의 심상 언어에서 여자는, 아려질 수 있는 것들의 전체성으로 표상된다. 알게 되는 존재가 곧 영웅이다. 영웅이 삶의 다른 형태인 입문의 과정을 진행함에 따라 여신의 형상은 그에게 일련의 변형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 여신은 항상 영웅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할 수 있지만 영웅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여신은 그를 유혹하고, 인도하고, 그의 발목에 채인 족쇄를 깨뜨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영웅의 능력이 여신에 미치면 이 양자, 즉 아는 존재와 알려지는 존재는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된다. 여성은 감각적인 모험의 정점으로 영웅을 인도하는 안내자다. 153
 
그 재능이나 아름다움이나 욕망으로 보아 불사신의 배우자가 되기에 마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상의 남편은 그녀에게 하강하여,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를 자기와 동침하게 한다. 만일 여자가 이 배우자를 싫어하면,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그녀의 펴견은 바로잡히게 되고, 그녀가 바라던 존재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녀의 욕망은 평호를 성취한다. 
 
높이 솟은 나무 위로 고슴도치를 따라 올라갔던 아라파호 인디언 처녀는 천상에 사는 사람들의 거처로 꼬임을 당했다. 마침내 거기에 올라간 인디언 처녀는 천상의 청년과 결혼하여 그 아내가 되었다. 고슴도치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녀를 자기의 초자연적 거처로 유혹한 것도 바로 그 젊은이였다. 
 
동화에 나오는 공주는, 우물가에서 개구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도망친 그 다음날,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엇다. 개구리가 성문 앞에 와, 약속을 지키라고 조르고 있었다. 개구리는, 공주가 자기를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개구리는 식탁 앞 의자로 다가와 공주와 함께 조그만 황금 접시와 황금 잔에 든 음식을 함께 먹었고, 심지어는 공주의 조그만 비단 이부자리 안에서 함께 자야한다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짜증이 몹시 났던 공주는 개구리를 집어 벽에다 메치고 말앗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아, 개구리가 아니라 왕자였다. 눈길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왕자였다. 이 대목에 이르면 결과는 뻔하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왕자의 나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되는 수도 있다. 프쉬케가 자기에게 맡겨진 어려운 문제를 모두 풀어내자 제우스는 프쉬케에게 불사의 영약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프쉬케는 사랑하는 애인 에로스와 더불어 완전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158
 
고랠부터 인간의 적이었던 마귀가 어린 베르나르에게 그런 천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동정을 빼앗고자 함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베러나르는 어느 날 악마의 꼬임에 빠져 젊은 여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심히 얼굴을 붉히고 얼음이 뜨는 연못 속으로 들어가 뼈마디가 얼 때까지 참회했다. 또 한번은 잠이 들어 있는데 젊은 여인이 발가봇고 침대로 들어왔다. 여자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베르나르는 아무 말 없이 침대를 내주고는 침대 한 귀퉁이로 돌아누워 다시 잠을 잤다. 한동안 베르나르를 애무하던 여자는, 웬만한 일로는 부끄러워할 줄 몰랐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일어나 줄행랑을 놓았다. 자신이 한 짓이 두렵고, 그 젊은이가 너무나 고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베르나르와 친구들이 어느 돈 많은 여인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 집에 유숙했다. 주인 여자는 베르나르의 준수한 용모에 반한 나머지 동침의 욕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밤이 되자 여자는 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살며시 손님의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유혹이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한 베르나르는, 
 
[도둑이야, 도둑이야!]
하고 고함을 질렀다. 
 
여자는 후다닥 일어나 도망치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일어나 불을 켜들고 도둑을 찾았다. 찾아봐야 도둑이 나타나지 않자 모두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여인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다시 일어나 베르나르의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베르나르는 다시, 
[도둑이야!]
하고 소리쳤다. 다시 온 식구가 들고 일어나 도둑을 찾았고, 도둑이 없자 잠자리에 들었다. 세번째로 이 여인은 전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그랬는지 염치가 없어서 그랬는지 네번째로는 시도하지 않았다. 165
 
영웅이, 조력자인 여성에게서 희망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다. 여성의 마법(꽃가루라는 호부, 중재의 능력)덕분에 영웅은, 자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아버지의 무서운 입문 의식 경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영웅은, 아버지의 끔찍한 얼굴을 믿을 수 없으며 그 믿음을 다른 곳에다 기울인다.(즉지주녀, 혹은 성모) 지원을 보장받은 영웅은 위기를 견디어 나가고, 결국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투영하고 잇지만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바호족의 쌍둥이 전사는 지주녀의 충고와 호부를 받아 길을 떠난 뒤, 무너져 내리는 바위산, 사람을 토막내는 무서운 갈대숲, 걸리면 갈가리 찢기는 선인장 밭, 끓는 사막이라는 험한 길을 지나 마침내 아버지인 태양의 집에 이른다. 문 앞에는 두 마리의 곰이 지키고 있었다. 두 마리의 곰은 상둥이 전사를 보고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그 지주녀가 가르쳐주던 주문을 외자 곰은 잠잠해졌다. 곰에 이어, 한 쌍의 뱀, 바람, 번개가 차례로 쌍둥이를 위협한다. 이들은 마지막 관문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했던 주문을 외자 모두 잠잠해졌다. 옥으로 지은 태양의 집은 크고 넓었으며, 막강한 힘을 지닌 강가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상둥이 전사는 서쪽에 앉은 여인, 남쪽에 앉은 두 미남 청년, 북쪽에 앉은 두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했다. 젊은 여자들은 아무 말 없이 쌍둥이 형제를 네 하늘 보따리에 싸서 시렁 위에 얹어버렸다. 형제는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문 위의 방울이 네 번 울리자 젊은 여자들이, [우리 아버지가 오신다!]하고 외쳤다.
 
태양을 지고 들어온 사나이는 등에서 태양을 내려, 그 방 서쪽 벽에 박힌 말뚝에다 걸고는 몇 차례 흔들자 틀라 틀라 틀라 틀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그는 나이 든 여자에게 돌아서서 노기띤 음성으로 물었다. 172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종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순간 존재하던 것으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창조의 역설, 영원으로부터의 시간이라는 양식의 도래는 아버지가 지니는 근원적인 비밀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신학 체계에는 배꼽, 즉 어머니인 생명의 손가락이 닿았던, 끝내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킬레우스 건腱이 있는 법이다. 영웅이란, 정확하게 그곳을 뚫고(그가 속한 세계와 함께) 들어가, 그의 존재를 제약하는 매듭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영웅은 영혼의 문을 열어 공포를 극복하고, 이 광대무변하고 무자비한 우주의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을 존재의 존엄성 속에서 완전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웅은 자기 몸에 박힌 가시(약점)를 통해 삶을 초월하여, 한순간이나마 그 근원을 투시한다. 그는 여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와 자기가 화해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서의 [욥기]에서, 하느님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는>  신실한 종의 사람됨을 굽어보긴커녕 오히려 그를 괴롭혔다. 하인들이 갈데아 군병들에게 도둑을 당한 것이나, 아들 딸이 무너지는 지붕에 깔려 죽은 것도 그들에게 죄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욥에게 무슨 허물이 있길래 벌이 내린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정직하고 용기가 있었으나 더할 나위 없는 불행을 당한 욥은 자기에게 허물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 엘리후는, 욥이 스스로를 하느님보다 더 공명 정대하다는 것은 독신瀆神이라고 공격했다.
 
야훼는, 폭풍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한 일을 윤리적으로 변호할 생각은 없고 욥에게, 하늘에서 하는 식으로 땅에서도 해야 한다면서 자기 존재를 과장해서 말하기만 한다.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나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네 팔이 하느님의 팔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너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같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세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귄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짓뭉개주어라.
거드럭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꺽어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버려라.
땅굴 속에 가두어버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
 
이 [욥기]에는 사탄과의 내기에 대해서는 설명이나 언급이 없고 오직 일어난 사실에 대한 청천벽력 같은 탄핵의 시위만이 있을 뿐이다. 193
 
극동의 불교 사원에는 예외 없이 이 관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은, 범인凡人과 현자에게 두루 신성한 존재다. 왜냐하면 관음이 세운 맹세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세상을 버티는 심오한 직관이 포함되어 있기 대문이다.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劫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시살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보살의 양성구유적(兩性具有的, androgynous)성격, 즉 남성인 관세음과 여성인 관음의 성격을 동시 갖추고 잇다는 것이다. 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겨글 두루 갖추는 예는 , 신화의 세계에서는 그리 생소하지 않다. 이러한 신들은 항상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신화에 떠오른다. 이러한 신들은 마음을 , 객관적인 체험을 초월한 상징적 영역,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인도한다. 만상의 창조자이며 그릇인 주니 족의 최고신 아오나윌로나는 남성으로 지칭되는 때도 있긴 하나 사실은 양성적인 신이다. 중국 역사의 시원인 성녀 타이유완(聖女太元)은 남성적 원리인 양陽과 여성적 원리인 음陰을 두루 갖추고 있다. 198
 
오스트레일라에서는 할례 다음해에, 완전한 남성이 되고자 하는 입문자는 두번째의 제의적 수술을 받는 다. 이 두번째 수술은 절개 수술이다. (성기의 밑부분을 요도 속까지 절개하여 흉터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흉터는 (페니스 자궁 penis womb)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남성의 질膣을 상징한다. 영웅은 의식을 통하여 남성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절개 수술은 인공적으로 자웅 동체 상태와 어느 정도 비슷한 <하이포스파디아스(요도 입구가 성기의 아래쪽에 있는 이상 상태)>를 만들어낸다. 
 
의식용 치장으로 몸에 칠하거나, 새의 깃털을 몸에 붙이는 데 필요한 피는 아버지들이 자기의 절개 수술 부위에서 뽑아낸다. 그러니까 그 흉터를 다시 찢고 피를 뽑는 것이다. 
 
이 피는, 여자의 질에서 나온 월경혈, 남자의 정액, 그리고 오줌과 물과 남성의 유두에서 나온 젖을 동시에 상징한다. 피가 흘러내린다느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그들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세계의 샘은 동일한 것이다. 203
 
위대한 아버지 뱀의 부름은 아이를 놀라게 했고,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이윽고 아버지가 왔다. 그는 미지의 신비로 아이를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비의의 전수자였다. 어머니와 누리던 유아기라는 아이의 낙원에 침입한 아버지는 원형적인 것이다. 이 때부터 아이에게 있어서 평생토록 모든 적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를 상징한다. 그래서 <살해당한 것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머리를 자르는 습속이 있는 사회(가령 뉴기니아에서처럼)에서는 단순한 복수전이 아닌, 머리 자체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뿐만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도 여기에서 비롯되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은 끊임없이 집단 폭력으로 발전한다. 그런 사회나 종족 집단에서 노인들은 토템 의식이라는 심리적 마법으로 자라나는 아들 세대로부터 자위自衛를 도모한다. 그들은 도깨비 같은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연출하는 한편,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임을 아들들에게 보여준다. 새로운 대규모 낙원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낙원은, 아직도 조직적인 공격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전통적으로 적대하던 종족이나 인종은 끼워주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적인 모든 <선한>요소는 집단의 평화로 수렴되고 <악한> 모든 것은 외부로 투사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라. 
 
[저 할례받지 않은 불러셋의 녀석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겁니까? 204
 
<형상色은 빈 것空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빈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 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  
 
기존의 자기 확신, 자기 방어, 자기 중심적 에고의 미망을 억눌렀기 때문에, 그는 같은 적멸의 안팎을 안다. 그는 밖에서, 받애한 생각을 초월하는 공空의 시각적인 측면을 본다. 에고, 형상, 지각, 언어, 개념, 지식에 대한 체험은 그 위에서 전개된다. 그는 제 악몽에 쫓기며 스스로 겁에 질린 존재를 자비로이 여긴다. 그는 일어나 그들에게로 돌아와 에고를 초월한 중심으로서 그들과 함께 거한다. 에고를 초월한 그를 통하여 <공>은 자체를 현현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한 <대자대비로운 행위>다. 왜냐하면 이 행위로 인해 중생은 자신의 욕망과 적의와 미망이라는 세 겹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이 바로 열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선물의 물결>을 쏟아낸다. 이러한 속세의 살미 곧 열반이 겨냥하는 바다. 이 양자는 털끝만큼도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환자를 소생시키는 치료의 현대적인 목적은 고대의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도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다만 보살이 지나온 여로의 주기가 클 뿐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출발은 오류가 아니라 여행의 첫 출발이다. 이 먼 여로에서, 우주 순환의 심오한 적멸을 깨치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힌두교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삶에서 자유로워진 사람jivan mukta, 욕심이 없고 대자 대비하고 현명한 사람이 요가로 자아를 통일하고 만사 평등하게 보면 일체 만유 속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속에서 일체 만유를 본다. ...........절대의 마음으로 만유 안에 있는 나를 우러러 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속의 삶이 어떠하든 신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217
 
일본의 다례茶禮는 도교 신봉자의 지상 낙원의 정신을 그 근간으로 한다. <안식의 집數奇屋>이라고 불리는 다실은 시적인 직관의 순간을 감안해서 세운 가건물이다. <무위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이 방에는 장식이 배제도니다. 혹 그림이나 꽃꽃이가 잠시 놓이는 수는 있다. 다실이 있는 건물은 <파격破格의 집>이라고 불린다. 불상칭의 파격은 움직임을 암시한다. 의도적인 미안성 공간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공간이다. 손님은 뜰길을 따라 들어와, 허리를 구부리고 문을 들어서야 한다. 이어서 그림이나 꽃꽂이, 소리를 내며 물이 긇고 있는 주전자에 예를 표하고 바닥에 정좌한다. 통제된 단순성에 의해 지배되는 극히 단순한 분위기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 안에서 무한한 존재의 비밀을 안은 침묵으로 일관된다. 손님은 자신과 관련된 경험을 묵상할 수 있다. 다도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축소된 우주를 명상하고, 그 축소된 우주와 불사의 선인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위대한 다도의 달인達人은 천상적 경이를 체험된 순간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이어서 이 경험은 그 다실에서 가정으로 확산되고, 가정에서는 국가로 침윤했다.
 
1854년 펄리 제독이 도착하기 전, 길고도 평화로운 도쿠가와 시대가 계속될 동안 일본인들 생활의 구조는 의미 심장한 공식화 습성에 젖어 있어서 사소한 존재도 영원의 의식적 표현으로 다루어지고 미화 자체가 불문율로 통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동양 전역, 고대 세계 그리고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아메리카에서는 사회와 저연이 다투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이해시키려 했다. 219
 
그래서 그는 샘으로 내려가 불타는 샘에서 물을 길어 병 세 개를 채웠다. 황금으로 된 방에는 황금 식탁이 있고 황금 식탁 위에는 양다리와 빵 한 덩어리가 있었다. 에린 백성 모두가 열두 달 동안 그 식탁의 음식을 먹어도 양다리와 빵은 먹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터였다.
 
왕자는 식탁 앞에 앉아 빵과 양다리를 뜯어먹었다. 그러나 빵과 양다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일어나 물병을 자루 안에 챙겨 넣고 그 방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대로 가버리면 여왕은, 자고 있을 동안 누가 다녀간지 모를 것이다. 그냥 가버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에린 왕과 외딴 섬의 여왕 사이에서 난 아들이 투버 틴타이의 황금 방에서 엿새 밤낮을 머물고 불타는 샘에서 물 세 병을 긷고, 황금 식탁의 음식을 먹었노라고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여왕의 베개 밑에 넣은 그는 열린 창으로 나가 여위고 비루먹은 말을 타고는 온전히 숲 사이를 빠져나가 강을 건넜다.
 
여기에서 이 모험이 쉽게 끝났다는 것은 주인공이 초인간이며, 원래가 왕의 재목이었음을 뜻하고 있다. 영웅이 모험을 쉽게 끝내는 예는, 여러 동화나 육화한 신의 행위에 관한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보통 영웅 같으면 모진 시련을 겪을 터인데도 선택된 자는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또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샘은 세계의 배꼽이고, 불타는 물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며, 돌고 있는 침대는 세계의 축이다. 만상이 잠드는 성成은, 꿈속에서 의식이 도달하는 궁극의 심연이다. 꿈은 개인의 삶이 미분화에너지 속으로 해소되는 지점이다. 해소되어 버리면 곧 죽음이다. 226
 
일본의 신들은 <사께酒>를 마시고, 폴리네시아 신들은 아베ave를 마시며, 아즈텍 신들은 선남 선녀의 피를 마신다. 야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은 천상의 낙원에서 먹어도 먹어도 주렁들지 않는, 맛있는 베헤못과 레비아단과 지즈 고기를 먹으며, 천국의 네 강에서 퍼올린 달콤한 물을 마신다.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뜻에서, 그리고 옛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ㄴ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당한다. 천국을 떠나면서 단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작은 쪽배에 있는 그대들이여. 노래를 부르며 저어가는 나의 배를 뒤따르라.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들의 물가를 굽어보라. 나를 잃으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바다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시라.
 
내가 지나는 물은 일찍이 아무도 건넌 바 없다.
미네르바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아폴로는 내 길을 인도하며,
아홉 뮤즈는 내게 북두칠성을 일러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무용해지고, 이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다. 232
 
교반은 다시 계속되었다. 이윽고 무한히 깊은 곳으로부터 권능의 결정체인 고귀한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압사라스 요정들이 나타났고, 행운의 여신인 락쉬미, 우카이 쉬바리스, 즉 <큰소리로 운다>는 이름의 백마, 카우스투바라고 하는 진주, 그리고 열세 가지에 이르는 그 밖의 형상들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손에 생명의 감로잔인 달을 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재주가 용한 의사인 단반타리였다.
 
이제 이 귀중한 감로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거이들 중 하나인 라후는 감로 한 모금을 훔쳐먹다가 채 삼키기도 전에 목을 잘렸다. 이 머리는, 달을 따라잡으려고 그때부터 영원히 달을 좇아 하늘을 떠나니게 되었다. 라후가 달을 따라잡으면 잔이 그 목으로 들어갓다가 나오는데,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들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데 착안한 비쉬누는 아름다운 무희로 둔갑했다. 무희는, 탐욕스러운 거인들이 자기에게 넋을 놓고 있을 동안 불사주의 잔인 달을 집어 잠시 거인들을 놀린 다음 이를 신들에게로 넘겼다. 다시 막강한 영웅으로 변신한 비쉬누는 신들의 편에 가담하여 거인들을 쳐부수고 이들을 명계冥界의 산과 어두운 골짜기로 쫓아버렸다. 이렇게 해서 신들은 이 세계 중심에 있는 수메루 산 꼭대기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영원히 불사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35
 
그러니까 불사의 선계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육체의 불로불사를 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동자를 크게 해서, 육체와 그 종자從者인 개성이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로불사는 현실로서 체험된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여기에 있다.>의 경지인 것이다.
 
만물은 나아가고, 알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될돌아가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스에는 미다스 왕 이야기가 있다. 미다스 왕은 디오뉘소스로부터 무엇이든지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 미다스 왕은, 자기가 만지는 것은 모두 금이 되게 해달라고 말했다. 은총을 입은 왕이 지나가면서 시험삼아 참나무 가지를 만져보았더니 곧 금가지로 변했다. 돌을 집어도 금으로 변했고, 사과를 집으니 금덩어리가 되었다. 몹시 황홀해진 그는 이 기적을 자축할 잔치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잔치상 머리에 앉아 고기를 집자 고기덩어리는 금덩어리로 화했다. 그의 입술에 닿자 포도주는 황금 액체로 변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그가 사랑하는 딸이 수심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러 나옸으나 이 딸 역시 아버지가 껴안는 순간 아름다운 금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단테가 정신적 모험을 마지막 한 걸음까지 마치고 천상의 장미에 싸인 삼위 일체 신Triune God의 상징적 환상 앞에 섰을 대도 마찬가지다. 성부, 성자, 성신의 형상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도 아직 한 가지 경험이 더 유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베르나르가 나게 눈짓과 함께,
저 위를 보라는 듯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249
 
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저 지존의 빛줄기 속으로,
자꾸만 빨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본 환상은, 말로 할 수 없었으니,
마리 그 나타난 바에 승복하고,
기억 또한 압도당했다.
 
 
보리수 아래에서 얻엇던 부처의 승리는 이러한 행위의 동양적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마음의 칼로 우주의 거품을 찌르자 거품은 흩어져 무화無化됐다. 대륙, 하늘, 전통 종교 신앙의 지옥같은 자연적 경험 세계는 그 신들고 ㅏ마귀의 개념과 함께 일거에 폭발했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폭발한 뒤에도 재생되고 부활하여 참 존재의 광휘로 영광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실재로 부활한 하늘의 신들은 그들을 꿰뚫고 그들의 생명이자 근원인 무無에 이르렀던 영웅 인간을 목청을 드높여 찬양했다. <깃발과 가치는 세계의 동쪽 구역에 세우고, 그들의 장기長旗는 세계의 서쪽 구역으로 휘날리게 했다. 마찬가지로 세계의 동쪽 구역에도 깃발과 기치를 세우고 그들의 장기는 동쪽으로 휘날리게 했다. 세계의 북쪽 구역에도 깃발과 기치를 세워 그들의 장기가 남쪽으로 날리게 했고, 남쪽 구역에다 깃발과 기치를 세워 그들의 장기가 북쪽 구역으로 휘날리게 했다. 땅의 바닥에 세운 깃발과 기치는 그들이 브라마 세계에 이르기까지 장기가 휘날리게 했다. 브라마 세계의 깃발과 기치는 그들의 장기가 땅바닥에까지 이르게했다. 일만 세계에 걸쳐 꽃피는 나무는 꽃을 피웠고, 과일나무는 과일의 무게로 휘청거렷다. 둥치 연화는 둥치에 연화를 피웠고, 가지 연화는 가지에 연화를 피웠으며, 덩쿨 연화는 덩쿨에 연화를 피웠고, 가공 연화는 하늘에다 꽃을 피웠으며, 줄기 연화는 바위 사이에서 일곱 송이씩 짝지어 피어났다. 251
 
카리드웬에겐 거대한 주전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기에다 과학과 영감을 넣어 끓이려 했다. 요술책의 도움을 빌려 카리드웬은 주전자에다 이 두가지 혼합물인 시커먼 덩어리를 놓고 불 위에 얹어 1년간 끓이면, 영감의 진국이 딱 세 방울 나오게 되어 있었다. 
 
카리드웬은 우리의 영웅 궤이온 바크에게는 이 반죽을 젓게 햇고, 장님인 모르다Morda라는 사나이에겐 주전자 밑의 불을 돌보게 했다. 
 
카리드웬은 1년 하고도 하루 동안 잠시도 쉬지 말고 반죽을 젓고 불을 돌보아야 한다고 일렀다. 그 동안 카리드웬은 천문 서적에 따라 매일 장례적으로 영험이 있는 약초를 모았다. 한 해가 거의 다 갈 무렵인 어느 날, 카리드웬이 약초를 다듬으며 주문을 외고 있는데 문득 주전자에서 영험이 있는 진국 세 방울이 흘러나와 바크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워낙 뜨겁던 참이라 궤이온 바크는 엉겁결에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다 보니 이 영약 방울을 핥아먹게 되었고, 이를 먹은 그는 미래를 예견하는 권능을 얻게 되었지만, 그때부터 가리드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일이 큰 일이었다. 카리드웬은 재주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이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서둘러 고향 땅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주전자는 터져 두 조각이 나버렸다. 세 방울의 영약이 흘러나와 버리면 주전자 안에는 독액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그 독액이 주전자를 삭혀 버린 것이다. 이 독액은 시냇물로 흘러들어갔고 귀드노 가란히르Gwyddno Garanhir의 말들이 시냇물을 먹고 죽으니 그때부터 이 시냇물은 <그드노 말의 독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곧 카리드웬이 달려와 한 해 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화가 난 카리드웬은 장작개비를 집어 장님 모르다의 머리통을 갈겼는데 얼마나 세게 갈겼던지 눈알이 튀어나와 뺨 위로 흘러내렸다. 장님이 항변했다. 258
 
 
[잘못 아셨습니다. 저에겐 아무 죄도 없습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닙니다]
그러자 카리드웬이 말했다. 
[네 말이 옳다. 내 영약을 훔친 놈은 궤이온 바크다]
 
 
이어 카리드웨은 달아나는 바크를 따라갔다. 카리드웬을 본 바크는 산토끼로 둔갑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카리드웬이 사냥개로 둔갑하여 따라가니 형세가 자못 급박했다. 강에 이르자 바크는 물고기로 둔갑했다. 그러나 카리드웬은 수달로 둔갑해서 뒤쫓았다. 절박하게 쪼치던 바크는 이번에는 새로 둔갑하여 물 위로 날아올랐다. 카리드웬도 지지 않고 매로 둔갑하여 추격하니 그에겐 숨돌릴 사이가 없었다. 매가 덮치는 순간 바크는 창고 앞을 타작 마당을 보고 그 밀 속으로 뛰어들어 한 알의 밀알로 둔갑했다. 카리드 웬은 시커먼 수탉으로 변신, 발로 다른 밀알을 헤치고 변신한 궤이온 바크를 찾아내어 쪼아먹어 버렸다. 그런데, 계속되는 이야기인즉, 카리드웬은 그를 9개월 동안이나 몸속에 넣어두었다가 낳고보니 그 용모가 하도 준수하여 죽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카리드웬은 바크를 가죽 부대에 넣어 4월 29일에 바다로 던져 신의 자비에 맡겼다. 259
 
오누이는 멀리서 마귀 할멈을 보고 있었다. 마귀 할멈이 가까이 오자 동생은 머리 빗는 솔을 던졌다. 이 솔은 땅에 떨어지는 즉시 산으로 변했다. 이 산에는 수십만 개의 강모剛毛가 거대한 나무처럼 솟았다. 마귀 할멈은 이 산을 오를 수 없었다. 그 틈에 오누이는 도망쳤다. 그러나 어떻게 지나왔는지 마귀 할멈은 어느새 오누이 뒤에 바싹 붙어 추격하고 있었다. 이번엔 소년이 빗을 던졌다. 빗은 당에 떨어지자마자 수십만 개의 빗살이 솟은 거대한 산으로 변했다. 그러나 마녀는 이 산을 넘는 방법을 아랑ㅆ다. 오누이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마녀는 어느새 오누이 바로 뒤까지 추격해 와 있었다. 소녀는 거울을 던졌다. 거울은 땅에 떨어지자 마자 거대한 거울 산으로 변했다.
 
이 거울 산은 너무 미끄러워 마귀 할멈도 오르지 못했다.
[오냐, 내 집으로 돌아가 도끼를 가지고 다시 와서 이 거울 산을 둘로 쪼개놓으리라]
 
마귀 할멈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집으로 돌아가 도끼를 가지고 와서 거울 산을 부쉈다. 그러나 오누이는 이미 멀리 도망쳐 있었다. 마귀 할멈은 할 수 없이 다시 샘으로 되돌아갔다.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융 박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263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 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264
 
이 동안 라벤은 천장의 고래 등뼈 옆에 붙은 대롱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으나 이를 애써 누르고 있었다. 이누아는 방을 나갈 때마다 그 대롱을 만지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 이누아가 밖으로 나가자, 라벤은 대롱에서 떨어지는 기름 방울을 받아 혀로 핥아보았다. 달콤햇다. 그는 이런 짓을 되풀이하다 성에 차지 않아 떨어지는 기름방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먹었다. 그러나 맛을 들이고 나니 기름방울 떨어지는 속도는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라벤은 그래서 대롱을 한 토막 뜯어내어 먹었다. 이 순간 기름이 파도처럼 그 방으로 밀려들어 등잔불을 꺼버렸다. 동시에 방이 앞뒤로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의 요동은 나흘이나 계속되었어다. 라벤은 지쳐 쓰러졌고, 그가 쓰러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그랬을뿐,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고 방도 요동을 멈추었다. 라벤이 가장 중요한 동맥을 잘랐기 때문에 고래가 죽어버린 것이다. 이누아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고래의 시체는 파도에 의해 해변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라벤은 고래의 뱃속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래의 뱃속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라벤의 귀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두 사람은 고래의 등 위에서 두런거리다가 마을 사람들을 부르러 갔다. 오래지 않아 마을 사람드른 고래의 등에다 구멍을 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기를 잘라 해변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라벤은 그들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왔다. 그러나 해변에 오른 라벤은 고래의 뱃속에 부시 막대를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입고 있던 옷과 두건을 벗었다. 마을 사람들 눈에, 괴상한 동물 가죽을 몸에 두르고 작업 현장으로 다가오고 있는, 몸집이 작고 새카만 라벤이 보였다. 사람들은 라벤의 행색을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라벤은 일을 거들어주겠다면서 소매를 걷어부치고 작업에 가담했다.
 
얼마 후, 고래 배 안에서 작업하고 잇던 사람이 소리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고래의 뱃속에 부시 막대가 들어있다니!]
 
라벤이 이 말을 받아 대답했다.
 
[이건 참으로 해괴한 조짐이구나. 언젠가 내 딸은, 사라믈이 가른 고래의 배 안서에서 부시 막대가 나오면, 그란 사람 대부분이 죽는다고 예언하더라. 나는 도망쳐야겠구나]
 
라벤은 소매를 내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도망쳤다. 라벤은 얼마 후에 그 자리로 되돌아와 혼자서 그 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272
 
일본의 신토전설([코지키古書기]가 씌어질 8세기 당시에 이미 옛 이야기)에는 중요한 신화가 나온다. 바로 이 세계가 갓 창조된 시기에 천상의 바위 산에 은거하던 아름다운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天照가 그 모습을 나타낼 당시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천복 상태에서 다시 세상에 나오기를 꺼리는 영웅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데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는 아주 못된 짓을 일삼았다. 아마테라스는 이 남동생을 구슬리는 것을 물론이고 때로는 도를 넘는 잘못까지 저질러도 용서해주었으나 스사노오는 여전히 누이의 논을 짓밟고 누이가 세운 질서를 어지럽히는등 악행을 단념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사노오는 아마테라스의 직실織室 천장에다 구멍을 내고, <부당하게 강탈한 알록달록한 천마>를 몰아넣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바쁘게 신들의 옷을 짓고 있던 직녀신들은 너무 놀라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몹시 상심한 아마테라스는 천계로 들어가 하계로 통하는 문을 닫고 은거했다. 그러나 이는, 아마테라스로서 차마 못할 짓이었으니 아마테라스의 은거, 즉 태양의 은거는, 제대로 창조가 끝나지도 못한 우주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테라스의 은거와 함께, 천계의 벌판과 하계의 갈대밭은 흑암에 잠겼다. 악령이 세상에 창궐하고 재앙의 조짐이 도처에서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오월 쉬파리떼 소리를 방불케 했다.
 
결국 8백만에 이르는 신들은 천계의 강바닥에 모여 그중의 한신인<생각을 두루 하는 신(오모이가네)>에게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의 토론에서 강구한 대책은 바로 아마데라스 여신에게 거울과 칼과 옷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큰 나무를 세우고 이를 보석으로 장식한 뒤 수탉을 모아다 계속하여 울게 했다. 그들은 또 모닥불을 피우고 전례문도 읽었다. 8자에 이르는 거울을 나뭇가지에 건 그들은 젊은 여신 우즈메로 하여금 춤까지 추게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8백만 명의 신들은 웃고 떠들며 놀았는데 그 웃음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다카마가하라天高原>가 다 흔들렸다.
 
천서굴에 있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이 소리를 듣고 크게 놀랐다.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왜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던 나머지 천석굴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며 물었다.
 
[내가 고천원과 갈대밭을 물러나 천석굴로 은거함으로 인하여 세상이 흑암에 묻혀야 하거늘, 우즈메가 저렇듯 춤을 추고 8백만 신이 저렇듯 웃으니 무슨 연유인고?]
 
우즈메가 대답했다.
 
[아마데라스는 님보다 더 밝은 신이 이렇듯 빛나니 어찌 기뻐 날뛰지 않으리요]
 
우즈메가 이렇게 대답하고 있을 동안 두 신이 아마데라스 앞에다 보경을 들이대었다. 더욱 놀란 아마테라스는 문에서 조금 더 빠져나와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때 힘이 세신신이 손을 잡아 아마테라스를 끌어내었고, 다르 신이 문에다 금줄<시메니와>을 걸며 소리쳤다.
 
[이제 더는 들어가시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고천원과 갈대 평원은 다시 밝아졌다.
 
이렇게 해서 태양은 뭇 생명체가 그렇듯이 밤이 되면 잠시 쉬러 들어가지만 아마테라스는 이 시메나와 때문에 영원히 천석굴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세계로 널리 확산되었을, 남신이 아닌 여신으로서의 태양 모티프는 괟 신화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남아라비아의 위대한 모성신은 바로 여성적 태양인 일라트ilat다. 독일어에서 <태양>은 여성 명사인 <디 조네 die Sonne>다.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에도 태양을 여성으로 다루는 이야기가 더루 수집되기는 한다. 이리에게 먹혔다가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는 붉은 모자 동화에서도 우리는 아마테라스의 경우와 비슷한 모험의 메아리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흔적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나, 아득한 옛날의 신화가 아직까지도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는 예는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찾아볼수 없다. 즉 일본의 미카도天皇는 아마테라스 손자의 직계손들이며, 아마테라스는 황실의 여자 선조로서, 지금도 거국적인 신도전통에 의해 최고신의 하나로 섬김을 받고 잇다. 이 아마테라스의 모험에서 우리는, 잘 알려져 있는 남서 ㅇ태양 <신>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는다. 사람들은 신들에게 빝 자체를 준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그 빛을 통하여 사물을 볼 수 있게 된데 대하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을 터인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종교적인 분위기에 젖게 했을 터이다.
 
그러나 거울과 칼과 나무의 의미는 분명하다.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非顯現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돈 형상의 장場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도니다. 칼은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들이 동지冬至, 크리스마스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276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2차원의 평면으로 3차원의 형상을 나타낼 것이며, 다차원의 의미를 3차원의 이미지로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한 쌍의 대립물에 대한 정의의 시도가 무의미한 데, 어떻게<그렇다>와 <그렇지 않다>는 말로 이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空을 설명한단 말인가?

수많은 실패의 사례가, 이 삶을 확정하는 관문의 통과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증하고 있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프,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헛된 정열에 소진된 범상한 남자와 여자에게 왜 초월적인 은혜의 체험을 그럴싸한 것, 혹은 흥미로운 것으로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밤에 ㄲ무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정신으로, 전날 밤에 햇던 기도를 후회한다.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 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정신적 산과의産科醫가 <시메나와>를 쳐놓고 퇴로를 차단한다 해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282

고대 철학자들은, 그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라이든 병甁에 전기가 충만해 있듯이 신성한 인물에 충만해 있는 물질적 실체 혹은 액체라고 생각햇다. 그리고 라이든 병의 전기가 양도체良導體와 접촉하는 경우에 방전하는 것처럼, 신성한 인물 속에 충만한 이 신성성, 주술력도, 훌륭한 양도체와 다름없는 대지와는 접촉으로 방전, 고갈되어 버린다고 믿는 것이다.ㅣ 따라서 신성한 인물이나 터부가 되어 있는 인물은 이 신성성, 주술력이 방전, 고갈되지 않도록 땅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읻. 결국 이러한 인물에게 그 신성한 실체가 목구멍에 이르기까지 충만되어 있도록 하려면, 전기 용어를 빌려 말해서, 이러한 인물과 대지 사이엔 절연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예에서 우리는, 신성한 인물의 절연은 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가 속한 사회를 위한 예방책으로 권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신성한 미덕에는 일촉에 즉발하는 고폭성이 있어서, 터지거나 방전하거나 누출되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예방책에 심리적인 변명이 가세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나이지리아 정글에서 야회복을 입고 있는 영국인은, 작기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특급 리츠호텔 로비를 서성거리는 텁석부리 예술가는 질문을 받기가 바쁘게 자기의 특이한 성벽을 설명할 것이다. 성직자 법의의 칼라는 그가 강단에 서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수녀드른 중세기 차림 그대로 거리를 나다닌다. 아내가 낀 반지는, 다분히 그런 의미에서의 절연체다. 290

서머싯 몸의 이야기는, 야회복이라는 금기를 무시한, 백인의 짐을 나르는 짐꾼의 변신을 그리고 있다. 많은 민요는, 반지를 파기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노래한다. 그리고 신화(가령 오비디우스'변신이야기'라는 개론서에 모아둔 수많은 신화 같은)는 고도록 집적도니 전력의 중심과, 주위 세계의 비교적 낮은 전압의 전력장 사이의 허술하던 절연체가 갑자기 무력해질 때 생기는 충격적인 변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켈트족 및 게르만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꼬마 난장이나 요정은 해가 뜨면 막대기나 돌로 바뀐다.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립 반 윙클은 무엇을 체험하고 왔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귀환은 한탄 우스개로 끝나고 만다. 오이신은 자신의 저승 체험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중심이 저승에 있다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에 여깃 전락하고 만다. 카마르 알 자만은 그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 속한다. 그는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카마르 알 자만이 탑루 안엣 잠을 자고 있을 동안 두 마리의 진(요정), 즉 다나수와 마이무나는 먼 중국 땅으로부터 섬들과 바다와 칠궁七宮을 다스리는 나라 공주를 그곳으로 데려왔다. 부두르 공주였다. 두 진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는 이 공주를 페르시아의 왕자 바로 옆에다 눕혔다. 그러고 나서 이불을 걷고 두 사람, 즉 페르시아 왕자와 중국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은 흡사 쌍둥이 같았다. 

다나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알라 신에 맹세코, 우리 아가씨 족이 더 아름답군요'

그러나 카마르 알 자만을 사랑하던 여정女精 마이무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아, 왕자 쪽이 더 아름다워]
둘은 옥신각신했다. 이 논쟁은, 다나쉬가 공정한 심판관을 찾아 물어보자고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92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ㅇ,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을 때는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신화란 신화는 이 한순간의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예수는 안내자이며, 길이며, 초월적인 세계, 귀환의 동반자다. 제자들은 그의 비의 전수자들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통달한 자들이 아니라, 두 세계를 일거네 수렴하는 역설적 체험으로 안내받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겁에 질린 나머지 중언 부언하낟. 그들 앞에서 육肉은 변하여 말씀이 되었다. 그들은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일어났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298

이러한 환상은, 나팔소리가 울리면 전투가 시작될 일촉즉발의 전쟁터에서 아르쥬나에게 나타났다. 아르쥬나 왕자는 신에게 전차를 끄는 말의 고삐를 맡기고, 전투 준비를 끝내고 나팔소리를 기다리는 두 전열戰列로 나온 것이었다. 그의 부대가 맞서야 하는 적은 바로 그의 사촌의 부대였다. 따라서 그가 섬멸해야 하는 부대에는 그가 알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무수히 들어 있었다. 

판두라는 왕은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5형제를 아우 드리타라슈트라에게 맡겼다. 드리타라슈트라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그중 드료다나는 질투심이 강했다. 이 전쟁은 파두라의 아들들과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 즉 사촌들간에서 벌어진 골육상잔이다. 

그는 기가 꺽여 마차를 몰아주는 신 크리슈나에게 호소했다. 
[아, 어쩌다 이리되었습니까. 왕국의 탐욕 때문에 일족을 시살하여야 하다니. 차라리 전장에서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 손에 빈손으로 서 있다가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겠습닏. 저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주主의 지혜를 허락하는 한편, 결국은 자신의 이렇ㄴ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왕자 아르쥬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자기 친구들이 우주를 버티는 기둥인 신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변모하고, 두 군대의 영웅들이 신의 입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을 본다. 기겁을 한 그는 소리친다. 

[크기의 하늘에 미치시고, 갖가지 빛깔로 휘황하게 비치는 주님이 모습을 뵈오니, 그 큰 입, 그 크고 형형하신 눈을 뵈오니, 제 혼은 공포로 떨려 용기와 마음의 평정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나이다. 비쉬누 신이시여, 무서운 이빨과, 이승의 모든 것을 소진시키는 불꽃 같은 입 안을 뵈오니 어지러워진 이 마음을 건사하지 모하겠나이다. 신들 중의 신이시여, 우주의 거소居所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 열국의 군주들, 비쉬마, 드로나, 카르나 같은 장군들 그리고 제 편의 선봉자들이 주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양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302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하나됨 at one ment>, 즉 <자기 화해 self 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잠녀, 익명의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이러한 무애적無碍的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는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가장假裝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306

[왕이시여, 저희가 술 취한 사람처럼 구는 것은,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구는 것은 술로 인함이 아니고, 저기 저 구석에 아이의 모습으로 앉아 조화를 부리는 정령 때문입니다]

왕은 시종들을 보내어 그 아이를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탈리에 신이 오지 않자 왕은 몸소 그 구석 자리로 찾아가 탈리에신에게, 정체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탈리에신은 시로 대답했다. 

나는 엘핀의 으뜸가는 시인이나, 
원래 내 고향은 여름 별이 빛나는 곳입니다. 
이드노와 하이닌은 나를 일러 메르딘이라고 하나, 
열왕列王은 나를 일러 탈리에신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나는, 악마 왕 루키페로스가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질 때
저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서 기치를 들었으며, 
북쪽 하늘에서 남쪽 하늘에 이르기까지,
별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은하수, 피조물을 두루 뿌리신 이의 왕좌 옆에도 있었고,
압살롬이 죽음을 당할 당시 가나안에도 있었습니다. 
나는 헤브론 골짜기까지 성령을 전하였으며, 
귀드온이 태어나기도 전에 
도니골의 궁전에 있었습니다. 
나는 엘리와 에녹을 가르쳤고,
사제장의 영험으로 날개를 얻었으니, 311
언변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웅변가를 따돌렸습니다. 
나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에도 동참했고, 
아리안롯 감옥에도 3대를 있었으며, 
니므롯 탑 공사장에서는 감독을 지냈으니, 
나는 근본이 밝혀지지 않은 기적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타고 아시아에도 갔었으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로마가 일어날 당시에는 인도에 있다가, 
이제 이 트로이아 유적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나귀의 구유에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힘을 주어 요르단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하늘에 있었으며,
카리드웬의 주전자로부터 영감을 얻어, 
로클린의 레온을 위한 시인으로 있었습니다. 
나는 퀸빌린의 궁전, 흰 산 위에 있었으며,
한 해 하고도 하루 동안 영어의 몸이 되어
성모의 아들을 위해 금식했고,
신선의 땅에서 자라, 
뭇 지자들을 가르쳤으니,
이제 온 우주를 가르 칠 수 있습니다. 
나는 땅거죽이 심판을 받는 날까지 거하리니,
내 몸이 육肉인지 고기漁인지 누가 알리오.

그러다 나는 카리드웬의 자궁 안에서 아홉 달을 있었고,
원래는 퀘이온이었으나, 
지금은 탈리에신입니다. 312

이 승리는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과의 성적 결합(신성한 결혼), 창조자인 아버지에 의한 인정(아버지와의 화해), 그 자신의 신격화, 혹은 적대적인 능력이 그의 힘에 벅찰 경우에는 전리품의 가로채기(신부 훔치기, 불 훔치기)로 나타난다. 원래 이 승리는 자기 의식의 확장이며, 존재와의 합일이다. (깨달음, 변모, 자유). 마지막 단계는, 귀환이다. 영웅이 그 권능의 축복을 받은 경우 전리품은 영웅을 보호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영웅은 도망치고, 부정적인 세력의 추격을 받는다. (모습을 바꾸며 도주하기, 장애물을 피하며 도주하기). 귀환의 관문에서 초월적인 권능의 소유자는 뒤에 남아야 한다. 영융은 혼자서 그 무서운 왕국에서 귀환한다. (귀환, 부활). 그가 가져온 전리품은 세상을 구원한다. 

구조가 단순한 원질신화가 보이는 다양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화 중에는 전체 이야기의 전형적인 요소(시련 모티프, 도망 모티프, 신부 사취)의 한두 가지를 따로 떼어 부연하는 설화도 있고, 일치된 연속 이야기로 꿰어맞추는 설화도 있다. 다른 인물과 에피소드가 녹아들어 올 수도 있고, 단일의 요소가 되풀이되거나 상당히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고대의 흔적은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게 보통이다. 유입되는 신화는, 이를 유입하는 지방의 풍경과 관습과 신앙에 따라 윤색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틀거리가 빗나가게 되기도 한다. 더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무수히 재연되다 보면, 고위적이든, 우연히든 와전과 전위가 불가피하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무의미하게 되거나, 때로는 상당ㅎ 기술적으로 부수적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318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따라서 문화가 신화 시대의 시점에서 현실적 시점으로 옮겨옴에 따라 낡은 이미지는 감지되거나 증명되기 어려워진다. 헬레니즘 시기의 그리스와 로마 제국 시대의 고대의 신들은 단순한 시민들의 수호신, 집안의 애완물, 문학의 소재 정도로 전락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 같은, 난삽한 전승 주제(태양신의 화신인 신적인 왕에 대한 고대 이집트, 크레타 인들이 어둡고 무서운 측면)는 당대에 알맞게 윤색되고 재해석되었다. 올륌포스 산은 진부한 연애담이나 우굴거리는 <리베에라>가 되었고, 어머니 여신은 신경질적인 요정으로 바뀌었다. 신화는 그저 초인간을 다룬 로망스 정도로 읽혔다. 중국의 예도 흡사하다. 인본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유교가 자기네 고대 신화에서 응대 화려한 요소를 모조리 비워버린 중국에서는, 오늘날 신화라고 치부하는 이야기들이 고작 이러저러한 행적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그 사회의 인사치레를 통하여 국지적인 신으로 추앙받는 정치가들의 아들 딸들 이야기가 고작이다. 현대의 선진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스도(로고스의 화신이자 구세주인)는,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남을 대접하라>는 자비의 교리를 가르치고도 범죄자로 처형당한 역사적인 인물이며, 준동양적 과거의 현인이 되어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고결함과 견인 불발의 산 교휸으로 읽히고 있다.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끊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격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319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 신화의 상징 체계가 지닌 심리학적 의미를 감지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지그문트 포르이트 C.G. 융, 빌헬름 슈테켈, 오토 랑크, 카알 아브라함, 게자 로하임,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활약한 많은 학자들은 꿈과 신화 해석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학서른, 각자 서로 다른 것이긴 하나, 상당히 공통적인 원리 체계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향으로 수렴된다. 동화와 신화의 패턴 및 논리가 꿈의 패턴 및 논리와 일치한다는 발견과 더불어 오랫동안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던 고대적 인간의 기괴한 환상은 극적으로 현대인 의식의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6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좌절당한다. 인간이 지닌 감각 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제의와 신화의 기능은, 유추 작용을 통해 이를 볼 수 있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기능이다. 마음과 감각이 감지할 수 있는 형상과 관념은 초월적인 진리와 개방성을 암시하도록 제시되고 조정된다. 이어서 명상의 조건이 완비되면 개인은 홀로 남는다. 신화는 부수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현상계 저쪽 세계(공空), 혹은 범주를 초월한 존재)로 들어가 적멸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 혹은 신들은 편의적인 방편, 즉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고 또 그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어디까지나 편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31

순환적 대화재大火災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영혼은 세계혼world soul 혹은 <원초적인 불>로 환원된다. 이 우주적 소멸이 끝나고 새로운 우주의 형성(키케로의 이른바 혁신)>이 시작되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반복하고, 모든 신, 모든 인간은 그전에 하던 역할을 다시 맡는다. 세네카는 저서 [마르치아의 위안]에 이 팔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는 다가오는 순환에서의 재생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이 우주발생 순환주기는 쟈이나교포들의 신화 체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고대 인도 종파에서 가장 최근에 나타난 선지자이자 구세주는 부처와 동시대를 살던 마하비라Mahavira다. 그의 부모는 이미 위대한 쟈이나교의 구세주이자 선지자인 파르쉬바나타Parashivanata의 추종자였는데, 이 파르쉬바나타는 어깨에서 뱀들이 튀어오르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기원전 877 ~ 772년까지 실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파르쉬바나타보다 몇 세기 전에는 쟈이나교의 구세주 네미나타Neminatha가 있었다. 그는 힌두교들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는 크리슈나의 사촌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또 네미나타 이전에도 정확하게 21명의 구세주가 더 있었는데, 이들의 조상이 되는 이는 리사바나타Rishabhanatha이다. 태초에,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이미 혼인한 한 쌍으로 태어나던 시절에 존재하던 이 리사바나타는 키가 약 3.2킬로미터에 이르렀는데, 1무량년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 리사바나타는 인간에게 72가지 학문(쓰는 법, 산수, 예언법 등)과, 여성을 위한 64가지의 재주(요리, 바느질 등)와 백 가지의 기예(도자기 굽는 법, 길쌈, 그림, 쇠 벼르는 기술, 이발 기술 등)을 가르쳤다. 그는 또 정치를 가르쳐 왕국을 꾸미게 하기도 했다. 334

우주란의 껍질은 공간에 떠 있는 세계의 뼈대요, 그 안에 있는 풍요한 생식력은, 식을 줄 모르는 자연계 생명력의 역동설을 나타낸다.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현대의 물리학자가 1928년에 그가 본 세계를 그리는 이 간략한 표현은 신화 체계의 우주적 알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잇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생물학이 다루고 있는 생명의 진화는, 우주 발생 주기의 첫 단계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태양의 쇠잔과 우주의 극단적인 고갈과 더불어 온다고 주장하는 세계의 파멸은, 탕가로아의 방화가 남긴 상처로 예고되고 있다. 결국 세계의 창조자 - 파괴자에 의한 세계 파괴의 효과는 점진적으로 늘어나 마침내 모든 것이 지복의 바다에 귀속하게 되는, 우주 발생 주기의 제 2단계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우주적 알이 깨지면 그 안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서운 물체가 부풀어오르는 예는 드물지 않게 신화에 나타난다. 이ㅣ것이 바로 유태 신비주의자들이 <살아 있는 절대자Mighty Living One>라고 부르는, 생성력의 신인 동형적 화신이다. 또 하나 남쪽 바다의 섬인 타히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음의 저주를 내리는 전능한 타아로아Taaroa, 그는 이 세계의 창조주다. 그는 외로웠다. 그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타아로라는 그저 공空안에서 살았다. 거기엔 땅도, 하늘도, 바다도 없었다. 땅은 몽롱한 상태였다. 바탕이 없었다. 그래서 타아로아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공간이여 땅이 되어라, 공간이여 하늘이 되어라.
몽롱한 상태로 존재해 온 쓸모없는 세계여, 
기억할 수도 없는 세월토록 존재해 온
쓸모없는 하계下界여, 넓어져라!

타아로아의 얼굴이 밖으로 나타났다. 타아로아의 껍질이 떨어져 나가 땅이 되었다. 타아로아는 둘러보았다. 땅이 생겼고, 바다가 생겼고, 하늘이 생긴 것이었다. 타아로아는 자기가 지은 세계를 내려다보며 신처럼 살았다. 

이집트 신화는, 자위 행위에 의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를 그리고 있다. 힌두의 신화는 요가적 명상에 잠겨 있는 조물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명상중에 그의 내부 환상이 밖으로 튀어나와(그는 몹시 놀란다) 그의 주위에서 빛나는 신들의 만신전이 되는 것이다. 인도의 다른 신화에서는, 조물주가 하나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져 이 양성의 우너리에 따라 만물을 짓는 신으로 그려진다. 354

신화 속에서는 부동하는 원동력, 즉 살아 있는 전능자가 관심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마다 우주의 조형에 대한 초자연적인 자발성이 뒤따른다. 각 구성 요소들은 응축하여 자기네들의 뜻대로, 혹은 창조자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다. 저절로 깨어지는 우주적 알껍질의 부분부분은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제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초점이 살아 있는 존재로 옮겨지면, 즉 공강과 자연의 파노라마를 거기에 거주하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 우주적 풍경에 갑작스런 변모의 그늘이 진다. 세계의 형상은 더 이상 살아 있고, 자라고, 조화를 이루는 사상의 패턴에 따라 움직는 게 아니라 완고하게 정지하거나 타성에 머문다. 우주적 무대의 지주가 다시 세워지거나 만들어져야 한다. 땅은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인간은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신화는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하나의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의 능력은 스스로 기능해 나간다. 다른 한 양식에 따르면, 조물주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우주 순환의 다음 단계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후자의 신화 양식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오랜 원초적 암흑이 계속될 동안, 창조된 자식이 우주적 어머니의 품 안에 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마오리족의 신화를 빌려 이 주제를 다루어보자. 

랑기(Rangi, 하늘)가 파파(Papa, 어머니의 대지)의 배와 너무 가까운 곳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수 없었다. 359

노인은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는 인간을 만들고, 사물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는 남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가면서 동물을 창조하고, 새들을 창조했다. 그는 먼저 산을 만들고, 초원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덤불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여기저기에 강을 만들고, 폭포를 만들었으며, 이곳저곳의 땅바닥에다 붉은 물감을 칠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세계를 만들었다. 그는 우유의 강the Teton을 만들고 이를 건넜으나 피로를 느끼고는 산으로 올라가 누워서 쉬었다. 네 활개를 벌린 채 바닥에 등을 대고 눕자 그의 모습은 그대로, 바위에 찍혔다. 그의 몸, 머리, 다리, 팔의 자국이 그대로 찍힌 것이다. 한동안 쉰 뒤 다시 북쪽으로 걷던 그는 작은 둔덕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는 바람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나쁜 것, 감히 누구 발에 걸리는 것이냐>하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는 그 둔덕에 있는 커다란 바위 두 개를 치워버리고 이 둔덕을 <무릎>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그는 북상을 계속하여 자기가 가지고 온 바위로 아름다운 풀밭이 있는 언덕을 만들었다. 

어느 날 노인은 여자와 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흙으로 여자와 이 여자의 아기 형상을 빚었다. 진흙으로 사람 형상을 빚은 그는 여기에다 대고<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잘 싸서 놓아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367

9년이 지나가고, 
열번째 여름이 지나고 있을 즈음,
바다에서 어머니의 머리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이마를 내밀고, 
창조의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먼저 세계의 질서를 부여했다. 
바다 표면에,
그리고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서는, 
비죽이 튀어나온 곶이 생겼고,
어머니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는, 물
고기가 놀 동혈이 생겼다.
어머니가 물 속 깊이 들어가면, 
바다가 깊어졌다. 
어머니가 육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변이 늘어났다. 
육지에서 발을 대고 걸은 곳에서는,
발자국마다 연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어머니의 머리가 스친 곳에서는
만灣이 늘어났다. 
어머니가 떠 있는 곳,
그리고 물 속의 거처,
바다 속에다 창조한 바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톱, 
여기에서는 배가 난파하고
선원들은 삶을 막음했다. 377

그러나 아이는 어머니의 몸 안에서, 감상적인 중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여전히 태어나지 못한 바이나뫼이넨
여전히 태어나지 못한 불멸의 시인.
나이가 든, 부동의 사나이 바이나뫼이넨,
그 어머니의 몸 속에 머물렀다. 
여름이 서른 번이나 지나가고, 
겨울이 서른 번이나 지나도록,
그 잔잔한 물 위에서,
포말을 날리는 파도 위에서,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처럼 음울한 처소,
그처럼 좁은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거기에서는 달빛도 볼 수 없었고,
햇빛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입을 열고,
자기 생각을 이렇듯 나타내었다. 
[달이여 나를 도우소서, 태양이여, 나를 풀어주소서. 큰곰자리 별이여, 지혜를 빌어주소서. 
내가 모르는 문을 통해,
내게 생소한 길을 통해.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작은 둥지에서,
이같이 비좁은 이 처소에서,
나그네가 찾아가는 땅으로,
그 맑은 바람 속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하늘의 달을,
그리고 태양의 광휘를 볼 수 있도록]
달이 그에게 자유를 베풀지 않고,
태양이 그를 풀어주지 않자
그의 삶은 차라리 고역, 
생명은 차라리 짐이었다. 
이윽고 그는 문을 밀었다. 
손가락하고도 네번째 손가락으로,
그러고는 왼발 발가락을 세우고,
뼈마디 사이의 문을 열고,
무릎걸음으로 문을 나왔다. 
머리 하나 가득 물을 뒤집어쓴 채,손
으로 파도에 저항하여,
이윽고 인간은 바다로 나왔다. 
이윽고 영웅은 파도 위로 나왔다. 379

[맘보 므우에트시는 병이 들어 슬퍼하고 있구나. 므우에트시를 드시보아로 보내라]

그러자 므우에트시의 자식들이 므우에트시를 목졸라 죽여 장사지냈다. 그들은 모롱고를, 으우에트시와 함께 묻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을 맘보로 뽑았다. 모롱고 역시 으우에트시의 짐바브웨에서 2년을 산 것이다. 

<짐바브웨>라나 말은 대강 <궁전>이란 뜻이다. 포트 빅토리아 인근의 방대한 선사 유적은 <큰 짐바브웨>, 남 로데시아의 돌 무더기는 <작은 짐바브웨>라고 불린다. 

창조 이후의 세 단계는 각각 세계의 발달 시기를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 발달 과정의 패턴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거의 예견된 것이었다. 이것은, 최고 신의 경고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전능자인 월인月人은 자기 운명의 자각까지 박탈당하려 하지는 않는다. 호수 바닥에서의 대화는, 영원과 찰나의 대화,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적인 대화>다.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월인의 아내들과 딸들은, 월인 자신의 운명의 화신이며 참전물이다. 세계를 창조하는 의지의 진화와 함께 여신인 어머니의 미덕과 외모는 변형되었다. 사대적 자궁에서 태어난 첫 아내, 두번째 아내는 전인간적, 초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우주 발생의 순환이 진행됨에 따라 우주적으로 탄생한 여왕들은 물러가고, 무대는 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조물주는 자기 사회 속에서 형이상학적 구닥다리 존재로 타락했다. 결국 그가 단순한 인간인데 넌더리를 내고 윤택했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세계는 그의 충격적인 반응 때문에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만 곧 여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주도권으 아이들의 사회로 넘어갔다. 상징적이고, 몽상적이었던 부모의 모습은 원초의 심연으로 함몰했다. 풍요한 대지는 오직 인간만 남았다. 순환은 계속 진행되었다. 389

어느 날 대합을 낳은 어머니인 여자는, 대합이 자기에게로 미끄러져 오는 걸 보았다. 여자는 화를 내며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합은, 화를 낼 시간이 없다면서 어서 해산할 수 있도록 휘장을 둘러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서둘러 휘장을 쳐주었고, 대합은 이 안에서 아주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기 어미인 대합은 아기를 낳자마자 목욕통으로 돌아가고, 대합의 어머니인 여자가 아기를 돌보는 한편 이름을 <백단향 숲속을 지나는 파타이>라고 지었다. 세월이 흐르자 대합은 또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다시 어머니의 집으로 기어와 아기를 낳을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합의 어머니는 그대로 해주었고, 대합은 또 사내 아기를 낳았다. 이 아기의 이름은 <파파이 안에서 제멋대로 자란 도금양나무>라고 했다. 이 아이 역시 대합의 부모 손에서 자랐다. 

두 아이가 장성하자, 대합의 어머니는 시닐라우가 잔치를 연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의 두 외손자를 이 잔치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두 외손자를 부른 대합의 어머니는 잔치에 갈 차비를 하라고 이르고, 잔치집 주인은 다름아닌, 두 청년의 아버지라고 일러주었다. 잔치집에 간 두 청년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두 청년이 지나가자 여자들은, 걸음을 멈추고 자기네들 쪽으로 돌아서 보라고 했지만 두 청년은 이를 거절하고 카마 술을 마시는 곳까지 갔다. 거기에서 그드른 카마 술을 대접받았다. 

그러나 자기 잔치가 두 청년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시닐라우는 몹시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접시 두 개를 가져오게 했다. 이어 시닐라우는 부하들에게 두 청년 중 하나를 붙잡아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은 그를 베기 위해 대나무 칼을 갈았다. 그러나 대나무 칼은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버렸다. 그가 시를 빌어서 소리쳤다. 

칼이 닿아서 미끄러지는데도,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십니다. 
우리가 자기를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도 모르는 채. 395

초기 우두사신牛頭蛇神의 문화 영웅은 자연계의 창조 능력을 타고났다. 그의 형상이 초자연적인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영웅은, 후세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하강>해야 한다. 

그러나 전설을 만든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우대한 영웅들을 단순한 인간에 국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을 제한하는 지평을 넘어갔다가, 보통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는 신념과 용기로 선약을 얻어 돌아오는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을 만든 사람들에겐 탕생의 순간, 심지어는 잉태의 순간에 영웅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생애는, 그의 모험을 절정으로 하는 엄청난 장관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영웅의 전기와 그 고유한 성격과의 관계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잇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와 같은 초월적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그의 행적을 글자 그대로 흉내내는 수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수라는 영웅은 글자 그대로 본이 되는 전형이라기 보다는 묵상해야 할 하나의 상징이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400

앞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지만 영웅의 첫번째 과업은, 우주 바생적 순환의 그 전단계를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출emanation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가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 째 과업은, 심연에서 일상의 삶으로 귀환하여 조물주적 잠재력을 가진 인간적인 변환 자재자가 되는 것이다. 후앙 티에게는 꿈을 꾸는 권능이 있었는데, 이 꿈은 그가 하강하고 귀환하는 수단이다. 바이나뫼이넨의 두번째 탄생, 혹은 물 속에서의 탄생은 그를 사대적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통가의 민담에 나오는 대합인 아내는, 아기를 낳고 다시 웅동이 속으로 물러선다. 형제 영웅들은, 전인간적 자궁에서 태어났다. 

개인적 주기의 제2단계에 나타나는 영웅의 행적은, 제1단계인 하강 주기 행적의 심도에 비례한다. 대합의 아들들은 동물적인 차원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그들의 외모는 범상치 않았다. 바이나뫼이넨은 물과 바람이라는 요소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에겐 음유시로서 자연과, 인간의 육체에 깃들여 있는 요소를 불러일으키거나 위무할 능력이 있었다. 후앙 티는 정신의 왕국을 다르렸으며, 마음의 조화를 가르쳤다. 부처는 창조신들의 영역을 넘, 공空에서 돌아왔다. 그는 우주 순환輪廻에서의 구원解脫을 외쳤다.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아가데의 사르곤 왕King Sargon, 어림잡아 기원전 255년 전후, 은 천모賤母 소생이었다.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몰랐다. 갈대 바구니에 담긴 채 유프라테스 강에 띄어보내어진 그는 아키Akki라는 농부에게 발견되었다. 농부는 이 아이를 길러 정원사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신 이슈타르가 이 젊은이를 총애했다. 마침내 그는 살아 있는 신으로 섬김을 받는 왕, 혹은 황제가 되었다. 403

어린 시절의 크리슈나는 말리기 힘든 장난꾸러기였다. 그는, 우유를 젓던 하녀가 졸면, 우유 그릇을 가져가 버리곤 했다. 어찌나 먹성이 좋았던지 시렁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면 이를 내리느라고 시렁 전부를 뒤엎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하녀들은 아기 크리슈나를 버터 도둑이라고 부르면서 안주인 야소다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지만, 크리슈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위기를 모면하기가 다반사였다. 어느 날 크리슈나가 마당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그의 양부모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기 크리슈나가 진흙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 달려갔을 때 아기 크리슈나는 입술을 닦으며 그런 것은 먹은 적이 없다고 둘러대었다. 양어머니는 아기의 지저분한 입을 벌리게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 안에는 삼계三界인 우주가 통째로 들어있었다. 양어머니는 홀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아드을 삼계의 주재자라고 생각하다니, 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러자 모든 것은 그녀의 생각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양어머니는 하릴없이 아이를 안고는 집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당시 그곳 유목민들은, 힌두교의 제우스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왕, 비의 주재자인 인드라Indra 신을 섬기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제물을 바치자 청년이 된 크리슈나가 그들을 나무랐다. 

[하늘의 왕일지는 모르나, 인드라가 최고신이라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그는 거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더구나 여러분이 빌고 있는 비와 풍요는, 물을 빨아들였다 다시 쏟아지게 하는 태양에 달린 것이자 인드라가 주재하는 것은 아닙니다]411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의 둥글게 퍼져나간다. 

시베리아 야루트족의 영웅 신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부동의 심연 위, 아홉 천구, 하늘의 일곱 층 및, 즉 세계의 배꼽인 한가운데에, 달도 기울지 않고 해도 지지 않고, 영원히 여름만 계속되어 뻐꾸기가 시도 때도 없이 노래하는, 이 세상에서도 가장 조용한 곳에서 백발 청년white youth은 눈을 떴다. 

백발 청년은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기가 있는 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가 있는 곳의 동쪽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벌판 한가운데에는 높은 산이 있고 산 위에는 까마득히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의 수액은 투명한 데다 향기로웠고, 수피는 마르지도 쭈그러지지도 않았으며, 거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은빛이었고, 풍성한 잎은 시들어 있지 않았으며, 꽃망울은 흡사 술잔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 그 나무 꼭대기에는 일곱 층의 하늘이 걸려 있어서, 가지가 최고신 이린 아이 토욘Yrin ai tojon을 붙잡아매는 기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무의 뿌리는 지하의 심연까지 뚫고 들어가, 그 지역에 살아서 마땅한 신비스러운 피조물의 거처를 버티는 기둥이 되어 있었다. 이 나무는 나뭇잎으로, 천상적인 존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도린 백발 청년은, 초록색 평원 한가운데 있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우유의 호수를 발견했다. 그 호수 가장자리에는 우유가 굳어서 생긴 늪이 있었다. 419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 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햇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폭군은 자만한다. 그리고 자만은 바로 폭군이 파멸하는 씨앗이다. 폭군은, 자기 힘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만한다. 따라서 그는 그림자를 본질로 오인하는 광대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 본연의 모습의 근원인 암흑에서 다시 나타난 신화적 영웅은 폭군을 파멸로 몰아넣는 비밀을 알고 있다. 단추 하나 누르는 듯한, 참으로 간단한 몸짓으로 그는 이 무서운 형상을 지워버린다. 영웅의 행적은 순간의 결정화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 행위다. 이야기는 순환한다. 신화의 초점은 발전하는 단계에 모인다. 변모, 유동성, 일정하지 않은 무게는, 살아 있는 신의 특징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형상은 부서지고, 토막나고, 이윽고 흩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요컨대 도깨비 - 폭군은 불길한 사상事象의 옹호자이며, 영웅은 창조적인 삶의 옹호자다. 

인간의 형상을 한 영웅의 재세 기간은 마을과 도시가 온 땅을 뒤덮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많은 괴물들은 여전히 외곽 지대에 웅크린 채, 인간의 사회에 대해 심술을 부리거나 인간의 기를 꺽는다. 이러한 괴물들은 정복되어야 한다. 더구나 인간의 탈을 쓴 폭군들은 이웃의 선의를 짓밟고 일어서 학정을 일삼는다. 이 폭군들 역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영웅의 기본적인 임무는, 그러한 괴물과 폭군을 퇴치하고 그 인간의 삶의 무대를 정화하는 것이다. 423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그가 폐위시킨 예전의 세계 군주나 그를 제거할 영리한 영웅뿐 아니라 아버지까지도 표상한다. 영웅이 변화를 가져오듯이, 무섭고 잔인한 폭군은 한 가지 편견에 고착된 인간을 표상한다. 시간의 순간순간이 이전의 순간순간의 족쇄에서 해방되듯이, 이 괴룡과 압제자는, 그 전세대, 즉 구세주를 맞던 그 이전 세대를 반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영웅의 임무는, 아버지(용, 시험자, 무섭고 잔인한 왕)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해하고, 우주의 자양이 될 생명의 에너지를 그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서도 성취될 수 있고, 그 의지를 거스르고도 성취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아니 어쩌면 신이, 그에게 스스로 자식을 위한 제물이 되라는 의지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설적인 논리가 아니라 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용의 살해자와 용, 제관과 제물은, 뒤집어보면 결국 하나다. 이 하나인 세계에서는, 대립물의 양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과 거인이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는 이쪽 세계인 것이다. 어쨌든 용(아버지)은 어디에든 있다. 소산消散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 탈환으로 늘어만 간다. 용(아버지)은 우리 삶이 걸린,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인가, 여럿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가 거기에 있는 한 그는 하나지만, 여기 자식들 안에 있을 때는 여럿이다]441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에 대한 구원이 이 모양이니 앞날이 하무할 수밖에 없다. 구세주 크리슈나가 칸스의 왕비와 후궁들ㅇ게게 던진 말이 유난히 섬뜩하다.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도 그렇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아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이 무서운 예언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화는 이 궁극적인 계시를 희미한 장막으로 가려놓았다. 그러나 신화는 단계적인 교휸의 형태를 포기하지 않는다. 폭군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구세주적 인물은 (오이디포스처럼) 그 아버지으 운명에 한걸음 다가선다. 골육상잔의 끔찍한 광경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설은 아버지를, 잔인한 숙부, 혹은 포악한 니므롯으로 출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일 것은 보이고 만다. 결국 보이게 되면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인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이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종말 그리고 재개再開의 비밀이다. 442

이것은 바로 개인이 소멸되는 순간, 사자死者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기도다. 즉 개인은, 생전에 자기 가슴에 반영되어 있던, 세계를 창조하는 신에 대한 근원적인 깨달음오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허약해지면(늙음으로 허약해지거든, 병으로 허약해지거든)   사람은 망고나 무화과나 딸기가 가지에서 놓여나듯, 그렇게 사지四枝에서 해방된다. 이제 그는 다시, 근원의 문과 그 근원 자체를 경유하여 삶으로 되돌아온다. 귀족들, 관헌들, 전차 몰이들, 마을의 원로들이 왕을 위하여 먹을 것고 마실 것과 거처를 마련해 놓고 오는 자를 기다리다가 이렇게 외친다. 

[그가 온다. 그가 이곳으로 온다]
이 진리를 아는 자를 기다리던 만물은 외친다.
[불멸의 존재가 온다. 불멸의 존재가 이리로 온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고대 이집트의 관棺에다 새기는 글귀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사자는 자신이 신과 함께하게 된다고 노래한다. 

나는, 외로웠던 나는, 아툼Atum이다. 
나는, 처음으로 현신現身했던 Re다.
나는, 스스로 신들 중의 신이라고 했고,
어느 신도 범접하지 못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위대한 신이다. 
나는 과거였고, 미래를 안다. 
내 일언지하에 신들의 전쟁이 벌어졌다. 459

요툰하임이라는 거인의 나라에 붉은 마법의 수탉이 운다. 발할라Valhalla, 오딘의 전당, 에서는 황금빛 볏의 수탉이 울고, 지옥에서는 새빨간 새가 운다. 사자死者의 나라 입구를 지키는 개 가름Garm이 벼랑 끝에서 그 큰 입을 벌리고 짖어댄다. 땅은 흔들리고 바위와 나무는 부서지고 찢기며, 바다는 땅을 덮친다. 태초부터 이 괴수들을 묶고 있던 족쇄가 부서져 나간다. 펜리스 늑대도 족쇄에서 풀려나, 아래턱은 땅에 대고, 위턱은 하늘에 댄다.(그러고는 그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삼킨다). 이 늑대의 눈과 목구멍에서는 불길이 나온다. 우주의 바다에서 세계를 감싸고 있던 뱀도 일어나 포악을 부리며 늑대에 가세하여 땅을 공격하며 독을 뿜으니, 이 독이 대기와 물에 낭자하다. 나글파르Naglfar, 사자의 손톱으로 만들어진 배, 가 풀려나 거인들을 운반한다. 다른 배는 지옥의 주민들을 나른다 화염을 방사하는 인간들이 남쪽에서 공격해 온다. 

신들의 파수병이 나팔을 불면, 오딘의 아들들은 이 마지막 결전장으로 불려나간다. 신들의 모든 처소에서, 거인, 악마, 난장이, 도깨비들이 이 전장에 나간다. 세계의 재 World Ash, 이그드라실 Ygtdrasil이 전율하니, 하늘과 땅에 충만한 것은 오직 공포뿐이다. 

오딘은 늑대를 대적하고, 토르Thor는 뱀ㅇㄹ 대적하고, 티르Try는 개(모든 괴수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을 대적하며, 프레이르Freyr는 화염을 방사하는 인간인 수르트Surt를 대적한다. 토르는 뱀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열 걸음 정도 떼어놓으나, 뱀이 뿜어놓은 독 때문에 쓰러져 흙으로 돌아간다. 오딘은 늑대의 밥이 되나, 뒤에 비다르Vidarr가 한 발을 늑대의 아래턱에다 대고 손으로 위턱을 잡아올려 찢어버린다. 로키Loki는 하임달르Heimdallr를 살해하나 그 역시 살해된다. 수르트는 땅에다 불을 뿜어 세계를 깡그리 태워버린다. 471

이 노회한 해신의 딸에 이끌려 그 휴식처로 가서, 신으로부터 응답을 얻어내는 방법을 배운 그리스의 전사이자 왕인 메넬라오스Menelaus는, 자기에게 개인적ㅇ니 어려움이 닥친 이유와 친구들에 대해 물었다. 신은, 메넬라오스를 깔보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신화 체계는 현대의 석학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다.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햇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 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Durkheim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寶庫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으며,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햇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이 계시라고 정의했다. 갖가지 판단은 판단자의 견해에 따라 결정된다. 신화가 무엇이냐는 관점이 아니라, 신화가 어떻게 기능하고 과거에 어떻게 인간에 봉사해 왔으며,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면,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478

사회적인 의미를 통해 개인은 축제를 정상적, 일상의 생존으로 수렴할 것을 배운다. 이로써 개인의 정체가 확인된다. 거꾸로 말하면 무관심과 반항(혹은 도피)은 개인과 사회를 단절시킨다. 사회라는 단위에서 볼 때 그 단위에서 단절도니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쓰레기다.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반면에, 입문 의식이나 취임식은 개인과 집단은 어쩔 수 없이 하나라는 교훈을 베푼다. 계절적인 축제는 인간의 지평을 넓힌다. 개인은 사회의 구성 요소(우루자른 거대한 집합체의 한 측면인, 종족 이나 어떤 도시)그리고 인간성 전체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계절적인 축제가 통상, 자연을 통제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것은 어림없는 해석이다. 인간의 갖가지 행동, 특히 비구름을 부르고, 병을 낫게 하고, 홍수를 막는 주술적 의식에 통제이 의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종교적인 (순전한 주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제의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피할 길 없는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계절적 축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겨울이 오는 것을 막겠다는 부족적 의식이 전해진 적이 있던가? 오히려 모든 의식은, 자연의 휴식과 더불어 오는 이 혹한의 계절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준비를 촉구한다. 봄이 오면 의식을 통해, 옥수수와 콩과 호박이 싹을 튀우도록 자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연의 계절에 합당한 노동을 권면한다. 480

이제 신들에겐, 망원경과 현미경에 의한 탐색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한때 신들이 섬김을 받던, 그런 사회도 이제는 없다. 사회의 구성 단위는, 이제 종교적 내용물의 전달자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다. 이 경제적, 정치적 조직의 이상은 신성한 무언극을 통하여 천상의 형상을 끊임없이 물질적 우위와 자원의 우위를 겨루는 세속적인 국가를 지키는 데 있다. 신화 체계가 가득 담긴 지평의 꿈에 잠긴, 격리된 사회는 이제 착취의 대상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보한 사회 안에서도, 제의, 도덕률, 예술이라는 고대 인류 유산의 흔적은 조락凋落의 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신화 체계(이제는 거짓으로 알려진)가 위대한 조정 수단으로 통용되던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시대 사람들이 안고 잇던 문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당시엔, 모든 의미는 집단적인 것에, 위대한 익명의 형식에 귀착되었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개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늘날 집단 속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도 그렇다. 모든 것은 개인에 귀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란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디고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교류 통로는 단절되고, 우리는 둘로 찢기고 말았다. 

오늘날에 이루어져야 하는 영웅의 업적은, 갈릴레오의 세기에 이루어졌던 업적이 아니다. 그때는 암흑 시대였지만 지금은 광명의 시대다. 그러나 빛이 있었던 곳이 지금은 어둠에 싸여 있다. 현대 영웅의 위업은 영혼이 균형을 이류고 있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대륙의 불을 다시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485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488

<명저>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무슨 해독이 깨치는 바 있을까만, 역자는 나름의 까닭이 있어서 <명저의 해독>이란 말을 더러 은밀히 생각에 울리다. 이른바 <명저>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가, 여유로운 정신으로 사상을 대하여야 할, 그러니까 사상이 덜 여문 독자와의 만남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전 현상을 일으키고, 이 방전 현상의 체험이 독자로 하여금 그 감독의 여신餘燼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게 하는 편집증적 색안경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기야 <명저>란, 독자에게 베푸는 관점의 안경이 부정적 색안경이 아닌 경우에 붙여지는 이름이긴 하다. 그렇다면 역자가 말하는 <명저의 해독>이란 명저에 대한 심술궂은, 극단적 찬양이 될 터이다. 

한 분야를 들고 파지 못하고 이것저것 집적거리면서도, 이 해찰 궂은 버릇을 자유로운 정신의 한 길로, 알아도 크게 자못 알고 있던 역자에게 이런 감전 현상을 체험하게 했던 <유독한?> 명저가 몇권 있다. 489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꿈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가령 프로이트의 이른바 <꿈의 작업>, 즉 응축, 치환, 형상화 작업은 신화 형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웅이 공유하는 경험인, 지정상적인 탕생, 어린 시절의 고난, 방황, 조력자와의 만남, 기적적인 권능의 획득, 귀환의 도식이 캠벨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캠벨은, 무대가 다르고 사건이 다르고 의상이 다르지만, 인간의 무의식이 투사된 영웅, 말하자면 인간의 집단이 그려낸 영웅 신화는 거의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르면 아폴로든, 동화 속의 왕자든, 듀톤의 신 오딘이든 부처든, 모든 영웅은 일정한 영웅의 싸이클을 따른다. 그는, 서로 접촉이 없는 세계 각 문화권의 무수한 영웅 신화와 심층 심리학의 꿈 해석에서 재발견되는 영웅의 상징 체계를 분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 가운데서 하나의 영웅, 그러니까 모든 영웅 신화의 본(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을 떠올린다.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학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심오한 은어적 술어로 이야기하는 대시, 이른바 거장의 붓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지 않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와 관련시키거나, 세계 여러 나라의 예화를 넉넉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가 시적 상상력으로 이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게 된다. 엘리아데, 융, 짐머, 케레니 같은 이들의 글을 대하면 인식과 인식의 구조물이 켜를 이루고 있다기 보다는, 행간을 직관으로 건너는 듯한 시적 분위기가 엿보이는데, 캠벨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어느수준에서는 언어가 무색해지는 이 분야 학문의 특수성 때문인 듯하다. 

오랜 세월, 우리 숨줄이 닿아 있던, 우리 육즙이 층층이 묻어 있던 문화는 이제 이 땅에 남아 있돼, 오직 하나의 질투하는 신학에 가려져 있다.신화나 종료글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와 경직된 흑백의 논리에 길들어 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걸핏하면 조상이 우상으로 단죄되고, 하나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오랜 역사 살림을 꾸려온 민족까지 우상의 자식들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 시대, 기댈 곳 없던 민중의 문화가 <미신>으로 업어치기를 당하고, 충정에서 우러난 비판 정신과 각자의 자유를 겨눈 정신적 편력의 간증이 <사탄>의 소리 수작으로 간주되는 이 시대에, 모든 민중의 문화와 종료를 고루 짚어보며, 그 바른 뜻을 더듬는 이 책을 우리 글로 옮긴 뜻은 그러므로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 다른 이들의 종교라면 듣도 보도 않고 흰 는을 하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체로운 종교 정신을 곧추세우는 데 밑바탕삼을 수 있다면, 남의 집(종교)도 좀 기웃거려 보는 데 인색해서야 되겠느냐는 뜻에서다. 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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