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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일 04시 26분 등록
'강제성이 없으면, 공부 못해'

'자율학습은 말그대로, 자율이 아니던가요'라는 나의 말에, 출석부를 날리며,고교담임은 말하다. 

20년 지나고보니 그의 말이 맞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성장할려면 강제성이 필요하다. 성인이 되면, 강제성은 희귀자원이 된다. 미친짓 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강제성이 떨어지는 사람은,(보통 이런 사람은 스스로는 자기관리가 철저하다고 착각한다)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를 옭아매기 위해선, 타인의 주위가 필요하다. 주위attention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시간당 단가는 높아진다. 일례로 개인 트레이닝은 트레이너가, 나의 운동을 1시간 동안 예의주시한다. 개인 트레이닝의 효과는, 트레이너의 코칭이 아니라, 쳐다보고 있다는 강제성이다.  무게가 나가는 웨이트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어도 빼도박도 못하는 것이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은 참 괴롭다. 화생방 훈련을 할때가, 이런 분위기다. 누울수도 없고, 앉지도 못하며, 눈물 콧물 나오지만 닦으면 쓰라리다. 그저, 은은히 치밀어오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한다. 당사자는 괴롭지만, 방독면을 쓰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즐거울 수도 있다. 교관은 가학적으로 군가를 시키거나, 카오스의 공간에서 또 굴린다. 

성장은 빼도박도 못할때, 이루어진다. 화생방 훈련에서 무엇이 성장하겠느냐 반문하겠지만, '적어도 견디어냈다'는 성취감에 자존감이 조금이라도 올라갈터. 군대 이야기중 빠지지 않는 것도, 화생방 훈련이다. 단 5분도 안되는 경험이지만, 죽을 때까지 울궈먹을 수 있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면 망한다. 삶은 공짜가 없다. 몇십년간 향흥을 즐긴, 검사들을 보라. 솜방망이 처벌로 끝날 수도 있다.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를 보며,
뼈 빠지게 몇십년 일해온 결과가 '고작 이거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그 고생을 했기에, '이나마 산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누리는 호사에 감사하기 보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세상은 수학이다. 1미리의 오차도 없이 돌아간다. 

성장하고, 싶다면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랬음에도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구원 활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강제성이다. 내가 언제 이런 책들을 자율적으로 보겠는가? 읽어야 하니까 읽는다. 그 강제성을 충분히 누리자. 

나를 다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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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130편은 상고上古시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한 무제 때까지의 중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에는 중국인들이 사이四夷라고 불렀던 주변 이민족의 역사가 포함된다. 이 책은 중국 역사의 전범典範으로 일컬어지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기]는 본기12편, 표10편, 서8편, 세가30편, 열전70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더러는 유사한 내용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본기]는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사하던 왕조나 군주들의 사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표]는 각 시대의 연표로서 역사 발전의 다섯 단계를 나타낸다. 다섯 칸으로 나누어 각 칸의 맨 앞에는 연원을 기록하고, 그 아래 칸에 내용을 다룬다. 각 편마다 서문이 있어 그 [표]에 다루어진 역사에 대한 논평을 간략하게 싣고 있다. 

[서]는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천문학 등과 같은 전장 제도를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문화사나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세가]는 제왕보다 낮은 위치인 봉건 제후들의 나라별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제후들 외에 황제의 친척과 공훈을 세운 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관의 제왕인 공자와 왕을 칭한 지 6개월 만에 망한 진섭陳涉이 포함 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는데, 신분을 초월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사기]의 이런 분류 방법은 일반적으로 천지자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심조룡文心雕龍][사전史傳]편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여씨춘추]의 12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역법으로 볼 때 12간지와 관련된다. 10표는 사마천이 스스로 만든 것으로, [주보周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이 또한 10간干과 관련된다. 

8서는 [삼례三禮]를 모방한 데서 나온 것이며, 사방, 팔방등 방위 개념과 관련이 있다. 

30세가는 사마천의 독창성이 엿보이는 부분으로 이 가운데 열전에 넣어도 그다지 무리가 없는 [공자 세가孔子世家]와 [진섭 세가陳涉世家]를 뺀다면 28편으로 28수와 일치한다고 볼 수도 있다. 

70열전은 맨 마지막의 [태사공 자서]를 [태사공 열전]으로 볼 수 있고, 열전에 들어갈 수 있는 [공자 세가]와 [진섭 세가]를 합치면 72편의 열전이 되어 천지와 음양의 성수成數 관념에서 생각하면 역법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마천이 천문에 정통한 가계의 후손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고대 중국인의 우주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12

어디를 가든지 고적을 탐방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이 낙양에서 아버지와 만났을때,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서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고 당부한 뒤 세상을 떠났다. 사마담 사후 3년이 지나 무제 원봉元封3년 기원전 108년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하면서 천제에 제사 드리는 봉선封禪에 참여하기도 하고 역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면서 4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끝에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에 정식으로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천한天漢 2년 기원전 99년 전한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는 이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을 깍아내린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고 여겼고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결국 그는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게 되는 몸이 되고 말았다. 1년 후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 그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어 했으나 중인中人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기원전 93년 사마천은 그의 친구 임안任安의 추천을 받아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지 20년 만이었다. 집필을 완성하고 몇 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의 생졸년에 관해서는 역대로 정론이 없다. 그의 생년에 관한 고증은 주로 [태사공 자서]에 근거한 당인들의 주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가 죽은 시기 또한 [한서][사마천전]에 명확하게 기재된 것이 없기 때문에 한당漢唐의 주석가들이 추론해 낼 방법이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16

[사기열전]은 서술에 있어 인물의 비중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극적인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대립되는 인물을 같은 편에 놓은 경우도 많다. 또한 유림, 혹리, 자객, 유협, 골계 등 유사한 직업군을 한데 묶어 차례로 배치함으로써 인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열전]이란 말을 풀이할 때, '열列'이 배열이나 서술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듯 하다. '전傳'은 본래 경전의 주석을 가리키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두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전기傳記, biography로 받아들여져 왔다. 좀 더 구체화시켜 이야기story정도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사마천은 전기를 개인의 역사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전기라고 하면 아무래도 주인공의 삶을 모두 기재해야 하는데 [사기 열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도 더러 있다. 

예컨대 열전의 두 번째 편인 [관안 열전管晏列傳]을 보면 관중과 안영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철저히 무시되고, 그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두 일화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열전]에서 인물에 대해 나열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기 보다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중니 제자 열전]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은 후반부에 이름만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20

이처럼 [이사 열전李斯列傳]이나 [골계 열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 [자객 열전]에서 보이는 구도의 설정능력, [여불의 열전呂不偉列傳]에서 볼 수 있는 구성 방식이나 희극적 효과의 운용은 중국인의 '문사일체文史잁체'관념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례들이다. 

[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시 적지 않다. 

이러한 열전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사마천은  인간 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 배반과 충정, 이익과 손실, 물질과 정신, 도덕과 본능, 탐욕과 베풂등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인간을 제시하고 , 그런 갈등 자체가 인간이 사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사기 열전]을 생명력 넘치는 산 역사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본위의 역사를 읽게 만든 작가의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사마천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인물들을 현재에 살아 있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잇다. 

[사기 열전]이 폭넓은 독자층을 끌어들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사기 열전]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생관 위에 개인적인 비극을 역사 의식으로 승화시켜,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을 조망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무관無冠의 제왕 공자와 시대와의 저항을 택한 백이와 숙제를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일반 역사서와 달리 [사기열전]에 적잖은 주관적 서술이 보이는데, 사마천 자신의 사료 비판 능력과 어우러져 탄탄한 역사 서술 체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마천의 혼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사기 열전]의 서술 방식에는 냉정한 이성과 처절한 열정을 갖고 살아간 시대적 거장들의 숨결이 행간마다 녹아 있다. 25

백이열전

이 편은 일흔 편의 열전 중 첫 번째 편으로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의 고매한 인품을 허유, 무광과 대조 또는 대비하면서 그려 나간다.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 알려진 게 공자의 칭찬에 의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칠십 열전의 인물이 자신의 붓끝을 빌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 나라 김득신이 1만 1300번이나 외웠다는 이 편은 불과 1000자도 못 되비만 십여 명이나 되는 역사 인물을 다룬다. 즉 '백이 열전'이지만 백이에 대한 기록은 겨우 215자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 4분의 3은 저자 자신의 논설이다. 그의 관점은 이렇게 요약된다. 

천도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면서 인간사의 불공정한 여러 형태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천도의 기본은 권선징악이지만 사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아 착한 사람이 재앙을 입고 나쁜 사람이 복을 누리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천은 공자가 백이와 숙제 두 사람에 대해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다'라고 한 칭찬을 의문시한다. 백이와 숙제가 남긴 [채미가]의 내용이나, 이 두 사람이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죽은 것으로 볼 때 원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겸양의 미덕을 강조하고 다툼을 꾸짖었다. 한나라 초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사이의 심각한 이권 다툼 속에서 백이와 숙제가 부귀영화를 마치 뜬구름에 비유하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모순은 단연 돋보였을 것이다. 59

사마천이 단순히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행적을 적었다기 보다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총괄적인 입장을 자신을 빗대어 쓴 것이다. 60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원한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라고 했고, '인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이의 심경이 슬펐을 것으로 본다. 그들의 일시 [채미가](시경에 실려 있지 않은 시)를 보면 공자의 말과는 다른 데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렇게 적혀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인데, 그들의 아버지는 숙제에게 뒤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왕위를 백이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달아나고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중간의 아들(백이의 동생이며 숙제의 형)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이 늙은이를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의 아들 무왕은 선왕의 시호를 문왕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동쪽으로 은나라 주왕을 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무왕 곁에)있던 신하들이 그들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태공, 제나라의 시조인 여상이 [그들을 두둔하여]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이에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조를 지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 하나라 때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했구나!

이들은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64

이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뜻을 좇아서 행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한]이렇게 말했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자리라도 나는 하겠다. 또 만일 찾아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겠다.'
'추운 계절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어찌하여 [세속 사람들은]그토록 부귀한 사람을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죽은 뒤에 자기 이름을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한다.'
가의(한나라 문제 때의 정치가이자 문인)는 이렇게 말했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열사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권세 때문에 죽고, 서민은 그날그날의 삶에 매달린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 어울린다'
'구름은 용을 따라 생기고 바람은 범을 따라 일어난다. 이처럼 성인이 나타나야 세상 만물도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일정한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명성이 묻혀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67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관중 이오는 영수 남쪽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늘 포숙아와 사귀었는데, 포숙은 그의 현명함을 알아주었다.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주고 속인 일을 따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포숙은 제나라 공자(제후의 아들) 소백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를 모셨다. 소백이 왕위에 올라 환공이 되고 이에 맞서던 규는[싸움에 져]죽었다. 관중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으나 포숙은 환공에게 관중을 마침내 추천하였다.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의 정치를 맡게 되었고 제나라 환공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환공이 제후들을 여러 차례 모아 천하를 바르게 이끈 것은 모두 관중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함게 곁에서 규를 도운]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만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있었다. 포숙의 자손들은 대대로 제나라의 봉록을 받으며 봉읍지를 십여 대 동안 가졌으며 늘 이름 있는 대부의 집안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 보다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하였다. 72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둔다. 
노자는 초나라 고형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 이름은 이, 자는 백양, 시호는 담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묻자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려는 그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 없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리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81 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고 스스로 학문을 숨겨 헛된 이름을 없애는 데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자, 관령 윤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앞으로 은둥하려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글을 써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자는 [도덕경]상, 하편을 지어 '도'와 '덕'의 의미를 5000여 자로 말하고 떠나갔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노래자(춘추전국시대의 은자)도 초나라 사람으로 책 열다섯 권을 지어 도가의 쓰임을 말하였는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또는 200여 살을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가 오래 살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도를 닦아 양생의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 되던 해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 태사(역사책이나 역법을 관장하던 직책)담이 진나라 헌공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처음에 주나라와 합쳤다가 500년이 지나면 나뉘고, 나뉜 날로부터 칠십 년이 지나면 패왕이 나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이가 없다. 노자는 숨어 사는 군자였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인데, 종은 위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을 봉토로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이고, 주의 아들은 궁이며, 궁의 현손은 가인데 나는 한나라 효문제를 섬겼다. 가의 아들 해는 교서왕 앙의 태부가 되어 제나라를 다스렸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노자는 하지 않는 것[無爲]으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했다. 83

대체로 유세의 어려움은 내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고, 내 말솜씨로 뜻을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며, 또 내가 감히 해야 할 말을 자유롭게 모두 하기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군주라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내 주장을 그 마음에 꼭 들어맞게 하는 데 있다. 상대방이 높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데 큰 이익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식견이 낮은 속된 사람이라고 가볍게 여기며 멀리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이 큰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높은 이름을 얻도록 설득한다면 상식이 없고 세상 이치에 어둡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속으로는 큰 이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멀리할 것이며, 만약 큰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설득한다면 속으로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꺼릴 것이다. 유세자는 이러한 점들을 잘 새겨 두어야 한다. 

대체로 일이란 은밀히 함으로써 이루어지고 말이 새어 나가면 실패한다. 그러나 유세자가 상대방의 비밀을 들출 뜻이 없었지만 우연히 상대방의 비밀을 말한다면 유세자는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에게 허물이 있을 때 유세자가 주저 없이 분명하게 바른말을 하고 교묘한 주장을 내세워 그 잘못을 들추어내면 그 몸은 위태로워진다. 유세자가 아직 군주에게 두터운 신임과 은혜도 입지 않았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 버리면 설령 그 주장을 실행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군주는 그 덕을 잊을 것이며, 그 주장을 실행하지 않아 실패하게 되면 군주에게 의심을 받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유세자의 몸은 위태로워질 것이다. 또 군주가 좋은 계책을 얻어 자기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데 유세자가 그 내막을 알게 되면 그 몸이 위태로워진다. 군주가 겉으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실제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을 때 유세자가 이것을 알게 되87 면 역시 몸이 위태로워진다. 또 군주가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게 하거나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일을 멈추게 하면 또한 몸이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현명하고 어진 군주에 관해서 말하면 자기를 헐뜯는다는 오해를 받게 되고, 지위가 낮은 인물에 관해서 말하면 군주의 권세를 팔아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며, 군주가 총애하는 자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그들을 이용하려는 줄 알며, 군주가 미워하는 자에 관해서 논하면 자기를 떠보려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말을 꾸미지 않고 간경하게 하면 아는 게 없다고 하찮게 여길 것이고,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말이 많다고 할 것이며, 사실에 근거하여 이치에 맞는 의견을 말하면 소심한 겁쟁이라 말을 다 못한다고 할 것이고, 생각한 바를 거침없이 말하면 버릇없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세의 어려운 점이니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유세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장점을 아름답게 꾸미고 단점을 덮어버릴 줄 아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계책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지나간 잘못을 꼬집어 궁지로 몰아서는 안된다. 자신의 결정을 용감한 것이라고 여기면 구태여 반대 의견을 내세워 하나게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더라도 그 일의 어려움을 들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88

주나라 때의 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화적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 천자가 성을 내림으로써 그들의 지위와 신분을 명확힌 했다. 둘째, 성에는 등급의 구분이 있다. 주나라 천자가 새로 성을 내리고 봉토를 준 칠십여 제후국 가운데서 천자와 성이 같은 제후 노, 진, 정, 위, 우, 괵, 오, 연 등의 지위는 다른 성의 제후들보다 높았다. 셋째,성이 같은 자끼리는 통혼할 수 없다. 

또한 씨에도 문화적 속뜻이 분명하다. 첫째, 씨가 성과 같은 것은 귀족이나 공경 사대부들의 특권이었다. 씨의 주요 공능은 신분상의 귀천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귀한 자는 봉분이 있고 씨가 있지만 천한 자는 봉분도 씨도 없다. 그래서 주대를 전후로 하여 의사, 장인, 도살자, 배우 등은 씨가 없었고, 단지 이름 앞에 종사하는 직업이나 특기를 더하여 구분했을 분이다. 둘째, 씨는 당시 봉건 종법 제도와 긴밀한 관련이 있어 씨를 받는 방식으로는 나라 이름, 할아버지의 자, 관직, 봉지로 했다. 예를 들면 노나라 군주는 '노'로 씨를 삼고 제나라 군주는 '제'로 씨를 삼는다. 왕족의 아들은 왕자씨가 되고, 왕자의 아들은 왕손씨가 되며, 왕손의 아들은 그 할아버지의 자를 씨로 삼는다. 셋째, 씨는 바뀔 수 있다. 이것은 토지가 분열되고 봉토가 나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성에도 다른 씨가 있을 수 있는데 가령 희 성은 맹씨, 계씨, 손씨, 주씨, 상씨, 임씨, 유씨 등으로 구분되었다. 또 같은 한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다른 씨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유하혜는 봉지에 근거하여 '유하'를 씨로 했지만, 동시에 할아버지의 자 자전에 기인하여 '전'을 씨로 삼기도 했다. 

'예'란 일반 귀족들의 모든 행위를 규범화한 합리적인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서 '의'와 통하며, 주나라의 예를 말한다. 이 '예'는 '인'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으로, 공자에게 이상적인 지배 질서이며 한 나라의 근본 원리였다. 

사마천은 노자와 노래자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여기에 기록했다. [열선전]에 의하면 노래자는 초나라 사람으로 당시 세상이 혼란스러워 몽산 북쪽에서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살았는데, 초나라 왕이 이곳까지 와서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전설속의 인물로 성은 공손이고 호는 헌원씨이다. 중원 각 부족의 공동 조상이며 중국인의 조상으로 숭배된다. 당시 궁실, 수레, 배,음악, 문자, 의학등을 창조하고 발명햇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여 온갖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자라고 하고 제왕이 형상을 부여했다. 황제는 노자와 함께 자연을 숭상하였으므로 합쳐서 황로라 일컫는 경우가 많다. 

형명이란 '원래 형체와 명칭'을 가리키는 말로 '형명'이라고도 한다. 선진 때 법가들은 '형명'을 '법술'과 연계시켜 '명'을 명분, 법령 등의 
뜻으로 써서 '순명책실', '신상명벌'을 주장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을 형명지학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형명이라고도 부른다. 94

병사들을 감동시킨 용병술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먹거리를 비롯하여 문병하고 약을 챙겨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보살폈다. 또한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풀고, 자신은 병사들 중에서도 몸이 가장 허약한 병사의 몫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에 병사들을 다시 순시하자 병든 병사들까지도 모두 앞다투어 싸움터로 나가기를 바랐다. 

진나라 군사들은 이 소문을 듣고 물러가고, 연나라 군사들도 이 소문을 듣고 황하를 건너 흩어졌다. 양저는 즉시 스들을 뒤쫓아 가 예전에 잃었던 봉국의 땅을 되찾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양저는 군대가 도성에 닿기 전에 병사들의 무장을 풀고 군령을 거두어 충성을 맹세한 뒤에 도성으로 들어갔다. 경공은 대부들과 교외로 나와 군사들을 맞이하여 노고를 위로하고 개선 의식을 마친 뒤에 궁궐로 돌아갔다. 경공은 양저를 만나 보고는 대사마로 삼았다. 전씨는 제나라에서 나날이 더욱 존경을 받게 되었다. 

얼마 뒤 대부 포씨 고씨, 국씨의 무리가 경공에게 양저를 헐뜯었다. 경공이 양저를 물러나게 하자 양저는 병이 나 세상을 떠났다. 전기와 전표의 무리는 이 일로 인하여 고씨, 국씨 등을 원망했다. 그 후 전상이 간공을 죽였을 때 고씨, 국씨 일족을 모두 죽였다. 전상의 증손자 전화는 제나라 의왕이 되었다. 제나라 위왕이 병사를 다루고 위엄을 보이는 일에 대부분 양저의 병법을 본받자, 제후들은 제나라에 입조하게 되었다. 

제나라 위왕은 대부들에게 고대의 [사마병법]을 연구하도록 하였고, 그 가운데 양저의 병법을 덧붙여 [사마양저병법]이라고 일컫게 하였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어 보니 그 윤곽이 넓고 크며 깊어 설령하, 은, 주 삼대의 제왕들이 나서도 그 내용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보면 과장된 점도 있다. 양저는 온힘을 다해 작은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찌 한가하게 [사마병법]에서 말하는 겸양의 예절을 지킬 틈이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이미 [사마병법]이 많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만을 짓는다. 

1. 여기서는 '곁말'은 '참'을 풀이한 것이다. 고대에는 수레 한 대에 말 세 필 또는 네 필을 매었는데 중간에 있는 말을 복마, 양쪽 옆에 맨 말을 참마라 불렀다. 

2. 제나라 대신 전성자로 이름은 항이다. 전상은 기원전 481년에 간공을 죽인 뒤 그 자리에 평공을 앉히고 재상이 되엇다. [좌전]애공14년을 보면, 전상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 재아가 아니라 전상과 더불어 총애를 다투던 감지였다고 한다. 감지의 자가 자아인 데서 오해가 생긴 듯하다. 감지는 이때 피살되었다. 103

급소를 치고 빈틈을 노려라. 
손무가 세상을 떠난 지 백여 년쯤 뒤에 손빈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손빈은 제나라의 아읍과 견읍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또한 손무의 뒷 세대의 자손이다. 손빈은 예전에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공부를 마치고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혜왕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능이 손빈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렀다. 방연은 손빈이 도착하자, 그가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죄를 뒤집어쒸었다. 방연은 손빈의 두 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글자를 새겨 숨어 살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했다. 

그 뒤 제나가 사자가 양나라로 갔을 때, 손빈은 형벌을 받은 몸이므로 몰래 제나라 사자를 만나 설득했다. 제나라 사자는 손빈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몰래 수레에 태워 제나라고 돌아왔다. 제나라 장군 전기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빈객으로 예우해주었다. 
당시 전기는 제나라 공자들과 자주 마차 경주 내기를 하곤 하였다. 손빈은 말들이 달리는 속도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말에 상, 중, 하 세 등급이 있음을 알고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기를 크게 거십시오. 당신이 이길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

전기는 손빈을 믿고 제나라 왕과 여러 공자에게 천 금을 건 내기를 했다. 110 경기가 시작되려 하자 손빈이 말했다. 
'당신의 하급 말과 상대편의 상급 말을 겨루게 하고, 당신의 상급말과 상대편의 중급 말을 겨루게 하며, 당신의 중급 말과 상대편의 하급 말을 겨루게 하십시오'

세 등급 말의 시합이 끝난 결과 전기는 첫 번째는 지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이겨 천 금을 얻었다. 전기는 손빈을 위왕에게 추천했고, 위왕은 그에게 병법을 묻고는 마침내 군사로 삼았다. 

그 뒤 윙나라가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는 다급하여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이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고 하자 손빈은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 
'형벌을 받은 사람은 장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왕은 전기를 장군에 임명하고, 손빈을 군사로 삼아 휘장을 친 수레에 앉아 작전을 세우도록 하였다. 전기가 병사들을 이끌고 조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이 이렇게 말했다. 

'어지럽게 엉킨 실을 풀려고 할 때는 주먹으로 쳐서는 안되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려고 할 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먹만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저절로 물러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으니, 날쌘 정예 병사들은 틀림없이 모두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고 쇠약하고 지친 자들만 나라 안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빨리 위나라의 수도 대량으로 쳐들어가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텅 빈 곳을 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조나라 공격을 멈추고 자기 나라를 구하러 들어올 것입니다. 111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 번 움직여 조나라의 포위망을 풀어 주고 위나라를 황폐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손빈의 계책체 따르니 위나라는 정말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물러났다.제나라 군대는 계릉에서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그로부터 심삼 년 뒤에 위나라와 조나라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호소했다. 제나라에서는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내보냈다. 전기는 곧장 대량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 장군  방연은 이 소식을 듣고는 공격을 그만두고 돌아갔으나, 제나라 군사는 [방연보다 한 발 앞서]위나라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손빈은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삼진의 위나라 병사들은 원래 사납고 용감하며 제나라를 무시하고 제나라 군사들을 겁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그 형세를 잘 이용하여 유리하게이끌어 나갑니다. 병법에 '승리를 좇아 백 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상장군을 잃게 되고, 승리를 좇아 오십 리 밖까지 급히 달려가는 군대는 겨우 절반만 목적지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땅에 들어서면 첫날에 아궁이 10만 개를 만들게 하고, 다음 날에는 아궁이 5만 개를 만들게 하며, 또 그 다음 날에는 아궁이 3만 개를 만들게 하십시오'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뒤쫓은 지 사흘째가 되자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일찍이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인 줄 알고 있었지만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달아난 병사가 절반을 넘는구나'
그러고는 그의 보병들은 따로 남겨 둔 채 날쌘 정예 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 만에 달려 급히 뒤쫓았다. 손자가 방연의 추격 속도를 헤아려 보니 저녁 무렵이면 위나라의 마릉에 이를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은 데다가 길 양쪽으로 험한 산이 많아 병사들을 매복시키기에 좋았다. 손빈은 길 옆에 있던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 흰 부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방영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골라 쇠뇌 1만 개를 준비시켜 길 양쪽에 매복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밤에 불빛이 보이면 일제히 쏘도록 하라'
방연은 정말 밤이 되어서 껍질을 벗겨 놓은 나무 밑에 이르렀다. 그는 흰 부분에 씌어 있는 글씨를 발견하고는 불을 밝혀 비추어 보았다. 방연이 그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은 한꺼번에 수많은쇠뇌를 쏘아댔다. 위나라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다하고 싸움에서 진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어린애 같은 놈이 이름을 천하게 떨치게 만들었구나'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제나라 군대는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위나라 군대를 전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손빈은 이 일로 해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병법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113

오자서가 송나라에 이르렀을 대, 송나라에는 화씨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달아났다. 정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잘 대우해 주었으나, 태자 건은 [작은 나라는 자신에게 힘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다시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 경공이 말했다. 

'태자는 정나라와 사이가 좋고, 정나라에서도 태자를 신뢰하고 있소. 태자가 나를 위하여 안에서 호응해 주고 내가 밖에서 친다면 틀림없이 정나라라르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오. 정나라가 멸망하면 태자를 그곳 왕으로 봉하겠소'

결국 태자는 정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공교롭게도 태자가 사사로운 일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시종을 죽이려고 한 일이 일어났다. 시종이 그이 음모를 다 알고 이 사실129 을 정나라에 낱낱이 알렸다. 그러자 정나라 정공과 자산이 태자 건을 죽였다. 

건에게는 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겁에 질린 오자서는 승과 함께 서둘러 오나라로 달아났다. 그들이 소관에 이르자 소관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들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오자서는 승과 헤어져 혼자 도망치다가 뒤쫓아 오는 자가 바짝 따라와 거이 붙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오자서가 장강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강에서 배를 타고 있던 한 어부가 오자서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고 그를 건네주었다. 오자서는 강을 건너고 나자 갖고 있던 칼을 풀어 어부에게 주며 말했다. 

'이 칼은 백금의 가치는 될 테니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지요'그러자 어부는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법에 오자서 당신을 잡는 자에게는 좁쌀 5만 석과 집규(작위 이름으로 봉국의 군주격임)라는 벼슬을 준다고 했습니다. [내게 욕심이 있었다면]어찌 이까짓 백 금의 칼이 문제이겠습니까? 
어부는 끝내 칼을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오나라에 이르기도 전에 병이 나 가던 길을 멈추고 밥을 빌어먹기도 하였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이르렀을 때는 오나라 왕 요가 막 정권을 잡고 , 공자 광이 장군으로 있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에게 오나라 왕을 만날 수 있게 다리를 놓아 다랄고 부탁했다. 
초나라 국경의 종리라는 마을과 오나라 국경의 비량지라는 마을은 모두 누에를 치며 살았다. 얼마 뒤 이 두 곳의 여자들이 뽕잎을 차지하러 다투다가 마을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초나라 평왕은 몹시 화를 냈고, 두 나라가 모두 병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게 되었다. 오나라에서는 공자 광에게 초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공자 광이 초나라의 종리와 거소를 함람시키고 돌아왔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요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으니 공자 광을 다시 보내십시오'
공자 광은 오나라 왕에게 말했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나라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가 왕께 초나라를 치라고 권하는 것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초나라를 치더라도 아직은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나라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속셈이 잇어, 아직은 나라 밖의 일을 이야기할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 굉에게 전제라는 사람을 추천하고 물러나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초야에 묻혀 농사를 지엇다.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나 초나라 평왕이 죽었다. 일찍이 평왕이 태자 건에게서 가로챈 진나라 공주의 아들 진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소왕이다. 

오나라 왕 요는 초나라의 국상을 틈다 두 공자(촉용과 갑여)를 시켜 병사를 이끌고 가서 초나라를 몰래 치도록 했다. 그러나 초나라에서는 병사를 움직여 오나라 군사의 뒤를 끊어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오나라에서는 도성이 텅 비게 되자, 공자 광이 전제에게 오나라 왕 요를 암살하도록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이미 자리에 올라 뜻을 이루자 곧 오131자서를 불러 행인(외무 대신급)으로 삼아 함께 나랏일을 꾀하였다. 132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
그로부터 이 년 뒤 합려는 태자 부차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초나라를 치게 하여 파 땅을 빼았었다. 초나라는 오나라가 다시 대거 쳐들어올까 봐 두려워 영을 버리고 수도를 약으로 옮겼다. 이때 오나라는 오자서와 손무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쪽으로는 강한 초나라를 깨뜨리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누르며, 남쪽으로는 월나라 사람들을 복종시켰다. 

그로부터 사 년 뒤에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다시 오 년 뒤에는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월나라 왕 구천이 고소에 맞아 싸워 오나라를 무찌르고 합려의 손가락에 상처까지 입히자 오나라는 군사를 물렸다. 그 뒤 합려는 상처가 커져 죽음에 이르게 되자 부차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구천이 아비를 죽인 일을 잊겠느냐?'
부차가 대답햇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 합려가 죽었다. 부차는 왕위에 올라 백비를 왕실 안팎의 일을 처리하는 태재로 삼고 군사들에게 싸우는 법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그는 이 년 뒤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초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월나라 왕 구천은 남은 병사 5000명을 이끌고 회계산에 머물면서 대부 문종을 시켜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고, 월나라를 오나라에 바쳐 자신은 오나라 왕의 신하가 되고 자기 아내는 그의 첩이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오나라 왕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오자서가 간언했다. 

'월나라 왕은 아무리 힘든 고통도 잘 견뎌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를 없애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태재 백비의 계책에 따라 월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그로부터 오 년 뒤에 제나라 경공이 죽었다. 오나라 왕은 제나라의 새 군주가 유약하다는 말을 듣고, 제나라 대신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하고 있는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제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자서는 이렇게 간언했다. 

'구천은 반찬 하나로 밥을 먹으며 문상과 문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그들을 요긴하게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오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오나라에 월나라가 있다는 것은 뱃속에 병이 생긴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께서는 월나라를 먼저 없애려 하지 않고 제나라를 치려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군사를 애릉에서 크게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추나라와 노나라 군주까지 협박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계책을 더욱 홀시하였다. 

사 년뒤에 오나라 왕은 또 북쪽으로 제나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월나라 왕 구천은 공자의 제장인 자공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도우면서 한편으로는 태재 백비에게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태재 백비는 이미 월나라 왕이 주는 뇌물을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에 우러나라 왕을 유달리 좋아하고 믿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나라 왕에게 월나라 왕을 좋게 이야기하였다. 오나라 왕은 백비의 계책을 믿었다. 오자서는 간언했다. 

'월나나라는 뱃속에 생긴 병처럼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월나라 왕의 황당한 거짓말을 믿고 제나라를 넘보고 있습니다. 설령 제나라라르 쳐서 빼앗는다 해도 황폐한 땅이라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또 [서경][반경]편의 고에 '옳고 그른 것을 거스르고 공손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볍게는 코를 베고 무겁게는 목을 베어 이 땅에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상나라가 흥성하게 된 까닭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제나라를 치려는 마음을 접어 두고 먼저 월나라를 처리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나라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돌아오기에 앞서 아들에게 말했다. 
'나는 왕께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왕은 내 말을 드지 않았다. 이제 곧 오나라가 망하느 날을 보게 될 것이다.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덧없는 일이다'138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오나라 왕은 오자서를 죽이고 나서 드디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제나라 포씨가 군주인 도공(제나라 경공의 아들)을 죽이고 양생을 왕으로 세웠다. 오나라 왕은 역적들을 없애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이 년 뒤에 오나라 왕은 노나라 애공과 위나라 출공을 탁고로 불러 맹약을 맺었다. 그 이듬해에는 북쪽의 황지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아 주나라 왕실의 이름으로 명령하였다. 이 사이에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를 습격하여 태자를 죽이고 오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오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와 사신을 통해 많은 선물을 보내 월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구 년 뒤에 월나라 왕 구천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였다. 태재 백비도 자기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고 구천 자신과 내통하였다는 구실로 죽였다. 

이보다 앞서 오자서와 함께 달아났던 초나라 태자 건의 아들 승은 오나라에 있었다 .오나라 왕 부차 때, 초나라 혜왕은 승을 초나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때 초나라 귀족 섭공이 이렇게 간언했다. 

'승은 용맹스러운 것을 즐겨 하는데,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은 은밀히 찾고 잇으니 아마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합니다.'141

그러나 혜왕은 섭공의 말을 듣지 않고 승을 불러들여 초나라 국경지역인 언에 살게 하고 백공이라고 불렀다. 백공이 초나라로 돌아온 지 삼 년째 되던 해에 오나라에서는 오자서를 죽였다. 

백공 승은 초나라로 돌아온 뒤 아버지를 죽인 정나라에 원한을 품고, 남몰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사람들을 길러 정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초나라로 온 지 오 년 째 되던 해에 정나라 토벌을 요청하였다. 초나라의 영윤인 자서가 허락했으나 병사를 내기도 전에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에서는 초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초나라에서는 자서를 보내 돕도록 했다. 자서가 정나라와 맹약을 맺고 돌아오자 백공 승은 화를 내며 말했다. 
'원수는 정나라가 아니라 자서이다'
승이 직접 칼을 갈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승이 대답했다. 
'자서를 없애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자서는 웃으며 말했다.
'승은 겨우 알[卵]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 년 뒤에 백공 승은 석기와 함께 조정으로 쳐들어가 영윤 자서와 사마 자기를 죽였다. 석기가 말했다. 
'왕을 죽여야만 합니다.'
초나라 혜왕을 죽이려고 하자, 왕은 고부(도성 안에 있는 창고)로 달아났다. 그 뒤 석기의 시종 굴고가 혜왕을 업고 소부인의 궁전으로 달아났다. 섭공은 백공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백공을 공격하였다. 백공의 무리는 싸움에서 지자 산속으로 달아나 자살하였다. 섭공이 석기를 사로잡아 백공의 시체가 잇는 곳을 물었으나 석기는 말하지 않았다. 섭공이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석기는 이렇게 말했다. 
'일이 성공하였다면 경이 되었겠지만 실패하였으니 삶아 죽어야 할지니 떳떳하게 누려야 할 직분이지만'
석기는 백공의 시체가 있는 곳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섭공은 석기를 삶아 죽이고 혜왕을 찾아내 다시 왕으로 세웠다. 

태사공은 말한다. 
'원한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정녕 심하구나! 임금이라도 신하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야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오자서가 아버지 오사를 따라 함께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와 무엇이 달랐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까지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슬프구나! 오자서는 장강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급한 사오항에 놓이고, 또 길에서 빌어먹을 때도 마음속에 어찌 초나라의 수도 영을 잠깐인들 잊었겠는가? 그는 모든 고초를 견뎌 내어 공명을 이룰 수 있었다. 강인한 대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백공도 만일 스스로 왕이 되려고만 하지 않았던들 그 공적 또한 이루 말하지 못했으리라! 143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가 존경한 사람들
공자는 '내 문하에서 학업에 힘써 육예에 통달한 사람은 일흔일곱 명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덕행으로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 있고, 정치로는 염유와 계로가 있으며, 언변으로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문학으로는 자유와 자하가 특히 뛰어났다. 그러나 전손사는 생각이 치우친 데가 있고, 증삼은 어리석으며, 고시는 우직하고, 중유는 거친데가 있었다. 안회는 끼니를 자주 거를 만큼 가난하였으며, 단목사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물만을 모았지만 세상의흐름을 정확히 파악했다. 

공자가 존경한 인물로는 주나라의 노자,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 정나라의 자산, 노나라의 맹공작등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는 장문중, 유하혜, 동제백하(진나라 대부 양설적), 개산자여 등을 자주 칭찬했다. 그러나 뒤의 네 명은 모두 공자보다 앞 시대 사람들이어서 세대를 같이하지는 않았다. 147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염구는 자가 자유이며 공자보다 스물아홉 살 아래이다. 그는 [노나라 대부] 계씨의 집안일을 총괄하는 재가 되었다. 그 당시 세도가 있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천 호 되는 고을과 전차 백 대를 가진 대부의 집에서 세금 징수에 관한 일을 할 만한 사람입니다.그러나 어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계강자는 또 물었다.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염구와 같습니다.'
염구가 공자에게 물었다. 151

'의로운 일을 들으며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 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째서 같은 질문에 달리 대답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152

월나라의 천한 신하 문종에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갑옷 스무 벌과 도끼, 굴로라는 장인이 만든 창, 차고 다니면 빛이 나는 칼을 올려 출정을 축하드리도록 했습니다.'

오나라 왕은 매우 기뻐하여 자공에게 물었다. '월나라 왕이 몸소 과인의 제나라 정벌에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데 허락해도 괜찮겠소?'
자공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남의 나라를 텅 비게 하고 남의 군대를 모조리 동원시키면서 또 그 나라의 왕까지 싸움터로 나가게 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그가 보낸 예물과 군대만 받으시고 왕의 종군은 사양하십시오'

오나라 왕은 자공의 권고를 받아들여 월나라 왕이 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사양하였다. 오나라 왕은 드디어 아홉 군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제나라 정벌에 나섰다. 자공은 진나라로 가서 정공에게 말했다. 

'신은 생각이 먼저 정해지지 않으면 돌발 사태에 잘 대처할 수 없고, 군대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적을 이길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나라와 오나라가 싸우려 하고 있는데, 만일 이 싸움에서 오나라가 지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할 것이고 오나라가 이기면 반드시167 여세를 몰아서 진나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두려워하며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자공이 대답했다. 
'군대를 잘 정비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고 기다리십시오'
진나라 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자공은 진나라를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오나라 왕은 과연 제나라와 애릉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적의 장군 일곱 명이 이끄는 군사들을 사로잡았다. 오나라는 돌아오지 않고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향해 나아가 황지에서 진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이 두 나라는 서로 강함을 다투었으나 진나라가 공경하여 크게 이겼다. 월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자 강을 건너 오나라를 습격하여 도성 밖 칠 리쯤에 주둔하였다. 오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고서 급히 진나라와의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와 오호에서 월나라와 세 차례 싸웠으나 다 지고, 결국 월나라 군대에게 도성까지 내주었다. 월나라 군대는 오나라 궁궐을 에워싼 뒤 오나라 왕 부차를 죽이고, 재상 백비의 목을 베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깨뜨린 지 삼 년 뒤에 동방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십 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68

자공은 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 금을 쌓아두기도 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삶을 마쳤다. 169

명망과 통달의 차이
자장은 공자에게 물어싸. 
'선비는 어떠해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무슨 뜻이냐?'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고 집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명망이지 통달이 아니다. 대체로 통달한 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여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표정을 살피며, 깊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낮춘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통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망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진 척하지만 실제 행동은 완전히 어긋나면서도 그러한 것에 물들어 조금도 의심 없이 해옫ㅇ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반드시 이름을 얻게 된다' 173

재능은 빼어난데 몸담고 있는 곳이 작다. 
복부제는 자가 자천이며 공자보다 서른 살 아래이다. 공자는 자천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자로구나! 그러나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어떻게 군자의 도리를 배울 수 있었겠는가?'
자천은 선보읍의 재상으로 있던 어느 날 잠시 공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 이 나라에는 저보다 어진 사람이 다섯 분이나 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 
'안타깝다. 부제가 다스리는 곳이 너무 작구나! 다스리는 곳이 컸더라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수 있었을 텐데.175

죽음의 문턱에 있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상군은 위나라 왕의 여러 첩이 낳은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은 양이고 성은 공손이며 그 조상은 성이 희였다. 공손앙은 젊어서부터 법가의 학문을 좋아하고 위나라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대부의 집안일을 맡아봄)가 되었다. 

공숙좌는 상앙이 현명한 줄을 알지만 위나라 왕에게 추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침 공숙좌가 병에 걸리자 위나라 혜왕이 직접 찾아와 병문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공숙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공숙좌는 이렇게 대답햇다. 
'제 중서자로 있는 공손앙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재능이 빼어납니다. 대왕께서는 나랏일을 그에게 맡기고 다스리는 이치를 들으십시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195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이렇게 사과했다. 
'오늘 왕께서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을 묻기에 나는 당신을 추천하였소만 왕의 낯빛을 보니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소. 나는 구주에게 먼저 충성을 다한 뒤에 신하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왕께서 당신을 기용하지 않으시려면 죽여야 한다고 하였소. 왕은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였소.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붙잡힐 것이오'
공손앙이 말했다. 
'왕께서 당신 말을 듣고도 저를 임용하지 않는데, 또 어찌 당신 말을 들어 저를 죽이겟습니까?'
그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돌아와서 주위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숙좌의 병이 깊어 슬프오. 과인보고 공손앙에게 나라를 맡기고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하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196

상균이 말했다. 
'선생은 진나라를 다스리는 내 방식을 싫어하십니까?'
조량이 대답했다. 
'돌이켜 자기 마음속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총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을 명이라고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고 합니다. 순 임금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순 임금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제 의견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상앙이 말했다. 

'처음에 진나라는 북쪽 오랑캐인 융적의 풍습을 받아들여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 없이 한방에서 살았습니다. 내가 그런 풍습을 고쳐서 나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게 하였고, 큰 궁궐 문을 세워 노나라나 위나라만큼 훌륭한 문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진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오고대부 백리해와 비교해볼 때 누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까? 
조량이 대답했다. 
'천 마리의 양가죽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아부는 한 사람의 올바른 직언만 못합니다. 주나라 무왕은 신하들의 올바른 직언으로 일어났고,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이 입207 을 다물어 망하였습니다. 당신이 만일 무왕을 잘못됐다고 나무라지 않는다면 제가 온종일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죽이지 않으시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겉치레 말은 허황되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되며, 듣기 괴로운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독이 된다.' 선생께서 진정으로 하루 종일 바른말을 해 줄 수만 있다면 나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려 하는데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사양하려 하십니까?'
조량이 말했다. 
'저 오고대부는 형 땅의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진나라 목공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고 싶지만 찾아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신을 진나라로 가는 여행자에게 팔아 남루한 홑옷을 입고 소를 치며 따라갔습니다. 그로부터 일년이 지나서야 목공은 백리해가 어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하루아침에 미천한 소치기이던 그를 백성의 관리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이 일에 불만을 갖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진나라 재상이 된 지 육칠 년이 지나자 동쪽으로 정나라를 치고, 진나라의 임금을 세 번이나 세우며, 형나라의 재앙을 한 차례 구해 주었습니다. 나라 안 사람들을 가르치니 [진나라 남쪽에 있는]파인까지 공물을 가져오고, 은덕을 제후들에게 베푸니[진나라 서쪽에 있는] 여덟 곳의 오랑캐까지 와서 복종했습니다. 유여도 이소문을 듣고 문을 두드리며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고대부는 진나라 재상이 된 이래 아무리 피곤해도 수레에 걸터앉지 않으며 더워도 수레에 햇빛 가리개를 치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순시할 때에도 호위하는 수레를 거느리지 않고 무장한 호위병도 없었습니다. 그의 공로와 명예는 역사책을 모아 놓은 창고 안에 보존되고 덕행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고대부가 세상을 뜨자 진나라 사람들은 남자 여자 할 것없이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며, 절구질을 할 때도 방아타령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 것은 오고대분의 덕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시 총애받고 있던 신하 경감의 소개를 통해 진나라 왕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명예로운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나라 재상이 되어서는 백성의 이익을 중요한 일로 삼지 않고 큰 궁궐을 세웠으니 그것은 공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태자의 태사와 태부를 죽이고 이마에 먹물을 들이며 무서운 형벌로 백성을 상하게 한 것은 원한을 사고 쟁을 쌓아 놓은 일입니다. 당신은 왕의 명령보다도 깊게 백성을 교화시키고 백성은 왕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본받습니다. 지금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것을 교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또한 임금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 과인이라 일컬으며 날마다 진나라의 공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시경]에서는 '쥐한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을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로 보더라도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 준 목숨을 다 누릴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공자 건은  [코 베인 것을 부끄럽게 여겨]벌209 써 팔 년 동안이나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또 축환을 죽이고 공손고를 경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인심을 얻을 만한 행위가 못 됩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레 수십 대가 뒤따릅니다. 수레에는 힘세고 신체 건강항 장사가 옆에 타서 수행하며, 창을 가진 병사가 양쪽 옆에서 수레와 함께 달립니다. [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처지는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데도 아직 목숨을 연장하여 오래 살기를 바라십니까? 210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다. 
소진은 동주 낙양 사람으로 스승을 찾아 동쪽의 제나라로 가서 귀곡 선생에게 배웠다. 

소진은 동주를 떠나 여러 해 동안 유세하러 다녔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형제, 형수, 누이, 아내, 첩이 모두 은근히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나라 사람들의 풍속에 따르면 농사를 주로 하고 물건을 만들고 장사에 힘써서 10분의 2의 이익을 올리는 것이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본업을 버리고 입과 혀끝만을 놀리고 있으니 가난하고 궁핍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진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슬퍼졌다. 그는 그길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꺼내 두루 훑어보다가 이렇게 말해삳. 
'대체로 선비가 머리를 숙여 가며 배우고도 높은 벼슬과 영화를 얻을 수 없다면 책을 많이 읽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고는 [주서][음부]를 찾아내어 머리를 파묻고 읽었다. 일 년쯤 되어서야 [유세할] 상대방의 심리를 알아내어 설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방법만 있으면 이 시대의 군주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217

그는 주나라 현왕을 만나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왕의 주위 사람들은 본디 그를 알고 있기에 모두 무시하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소진은 서쪽 진나라로 갔다. 때마침 진나라 효공이 세상을 떠나서 그 아들 혜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는 사방이 튼튼한 요새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위수를 끼고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함곡관과 황하가 있고, 서족으로는 한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파군과 촉군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군과 마음이 있으니 이곳은 하늘이 [특별히]만들어 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ㅣ. 진나라 선비와 백성에게 병법을 가르친다면 천하를 삼켜서 제왕이라고 일컬으며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 왕이 대답햇다. 
'새도 깃털이 자라지 않으면 높이 날 수 없소. 우리 나라는 다스리는 이치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천하를 통일할 수 없소'
당시 진나라는 상앙을 죽인 뒤라서 유세하며 변론하는 선비들을 싫어하여 소진을 등용하지 않았다. 218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의심을 끊고 비방을 버리는 떠도는 말의 흔적을 사라지게 하며 파벌의 문을 막는 데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왕을 존경하고 땅을 넓히고 군사력을 강하게 만드는 계책을 신하가 왕 앞에서 충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잠시 왕을 위해서 계책을 세워 보면 한, 위, 제, 초, 연, 조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지금 천하의 장수와 재상들을 원수 근처로 모이도록 하여 인질을 맞바꾸고 백마를 죽여 맹세하고 이렇게 약속해야 합니다. 

'진나라가 만일 초나라를 친다면 제나라와 위나라는 각기 날랜 군대를 보내 초나라를 돕고, 한나라는 진나라가 식량 옮기는 길을 막으며, 조나라는 황하와 장수를 건너고 , 연나라는 상산 북쪽 지역을 지킨다. 진나라가 한나라나 위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뒷길을 끊어 버리고, 제나라 는 정예부대를 보내 두 나라를 돕고, 조나라는 황하와 장수를 건너고, 연나라는 운중을 지킨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면 초나라는 진나라의 뒷길을 끊고, 한나라는 성고를 지키고, 위나라는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길을 막으며, 조나라 225 는 황하와 장수를 지나와 박관을 건넜고, 연나라는 정예부대를 보내 제나라를 돕는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친다면 조나라는 상산을 지키고, 초나라는 무관에 군대를 머물게 하며, 제나라는 발해를 건너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모두 정예부대를 보내 연나라를 돕니다. 진나라가 만일 조나라를 치면 한나라는 의양에 군대를 머물게 하고, 초나라는 무관에 군대를 머게 하며, 위나라는 황하 남서쪽에 군대를 머물게 하고, 제나라는 청하를 건너며, 연나라는 정예부대를 보내 조나라를 돕니다. 제후 중에 이 약속을 따르지 않은 자가 있으면 다섯 나라의 군대가 함께 그나라를 공격한다. '

여섯 나라가 합종하여 함께 진나라에 맞서면 진나라 군대는 틀림없이 감히 함곡관으로 나와 산동을 위협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조나라 왕이 말했다. 
'나는 나이가 젊고 자리에 오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일찍이 국가를 잘 다스리는 계책을 들어 본 적이 없었소. 지금 그대가 천하를 보존하고 각 나라를 안정시킬 좋은 뜻을 갖고 있으니, 나는 진실로 이 나라를 당신 말에 따라 이끌어 가겠소'

그리고 조나라 왕은 소진에게 치장한 수레 백 대와 황금 2만 냥, 백옥 백 쌍, 비단 1000필을 갖추어 주고 각 제후들과의 맹약을 추진하게 했다. 226

대체로 신하 가운데 진나라를 섬기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간사한 신하이지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 그들은 신하된 자로서 자기 군주에게 땅을 떼어 주고 다른 나라와 우의를 맺도록 요구하여 한때의 성공만을 구하려 들 뿐 그 뒤의 겨로가는 돌아보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나라를 무너뜨려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밖으로 강대한 세력에 기대 안으로 자기 군주를 위협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도록 요구하고 있ㅅ브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서]에서는 '처음에 싹을 자르지 않아 무성해지면 어떻게 하나? 터락같이 작을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재앙이 이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섯 나라가 합종으로 친교를 맺고 힘을 합쳐 뜻을 하나로 한다면 강력한 진나라를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조나라 왕께서 신을 보내 어리석은 계책을 제시하여 분명하게 약속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왕께서는 조칙을 내려 주십시오'

위나라 왕은 대답했다.
'나는 어질지 못하여 일찍이 훌륭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었소. 지금 당신은 조나라 왕의 조칙을 가지고 나를 가르쳐 주었소. 삼가 나라를 들어 당신 의견을 따르겠소'231

부귀하면 우러러 보고 가난하면 업신여긴다. 
이렇게 하여 여섯 나라는 합종하여 힘을 합치게 되었다. 소진은 합종 맹약의 우두머리가 되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였다. 
소진은 북쪽으로 조나라 왕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러 가는 길에 낙양을 지나게 되었다. 기마와 짐을 실은 수레를 비롯하여 제후들마다 소진을 모실 사자를 보내 주어 전송하는 자가 매우 많아 국왕의 행차에 견줄 만하였다. 주나라 현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이 지나가는]길을 쓸도록 하고 교외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 위로하게 하였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가 곁눈으로 볼 뿐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하니 소진이 웃으면서 형수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전에는 오만하더니 지금은 공손합니까?'
형수는 몸을 굽혀 기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하며 말했다. '계자의 지위가 귀하고 재무링 매우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한 몸도 부귀해지자 친척들이 두려워하고 가난하면 업신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만일 나에게 낙양성 주변에 밭이 두 이랑만 있었던들 어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을까? 238

당시 소진은 천 금을 풀어 일족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에 소진은 연나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백 전을 빌려 노자로 삼은 일이 있었는데 부귀해지자 백 금으로 갚았으며, 전날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보답하였다. 그 하인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보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소진 앞으로 나와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니 소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너는 나를 따라 연나라로 갔을 때 역수가에서 여러 차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하였다. 그때 나는 매우 곤란한 처지라서 너를 깊이 원망했다. 그래서 너에 대한 보답을 맨 뒤로 미루었을 뿐이다. 너에게도 이제 보답하겠다.'

소진이 여섯 나라와 합종의 약속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오자 조나라 숙후는 그를 무안군으로 봉하고 곧 합종 약속 문서를 진나라로 보냈다. [그로부터]진나라 군대는 십오 년 동안 감히 함곡관 밖을 넘보지 못했다. 239

충신만이 죄를 짓는가?
그러나 소진을 헐뜯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소진은 여기저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다니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신하이니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소진은 누명을 쓸까 봐 두려워 제나라에서 돌아왔지만 연나라 왕은 그가 지난날 가지고 있던 벼슬을 다시 주지 않았다. 소진은 연나라 왕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신은 동주의 비천한 사람입니다. 공을 조금도 세우지 못했지만 선왕께서는 친히 종묘에서 신에게 관직을 주셨고, 조정에서 예로써 대하셨습니다. 지금 신은 왕을 위해서 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성 열 개를 돌려받았으니 신을 더욱 아껴 주셔야만 합니다. 지금 신이 연나라로 돌아왔지만 왕께서 신에게 벼슬을 주시지 않는 거슨 틀림없이 어떤 사람이 왕에게 신을 신실하지 못한 자라로 모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신실하지 않은 것은 왕의 복입니다. 신이 듣건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고, 나아가 이루는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신이 제나라 왕을 설득한 것은 결코 그를 속인 것이 아닙니다. 신이 늙은 어머니를 동주에 버려두고 이 나라에 온 것은 본래 자기를 위해 행동하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아가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지금 증삼 같은 효자, 백이 같은 청렴한 인물, 미생 같은 신의 있는 인물이 있다고 합시다. 이 세 사람을 찾아 왕을 섬기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매우 만족하겠소'
소진은 이렇게 말했다. 
'증삼 같이 효성을 다하는 자는 도리상 자기 부모 곁을 떠나 밖에서 하룻밤도 자지 않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어떻게 그에게 천 리 밖으로 와서 위기에 빠진 약소한 연나라의 국왕을 섬기도록 하실 수 있겠습니까? 백이처럼 청렴한 자는 의리를 지켜 고죽군의 후사가 되지 않았고, 무왕의 신하가 되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아 봉읍을 받아 제후가 되지 않고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청렴한 사람이 있다면 왕께서는 또 어떻게 이러한 사람을 천 리 밖 제나라로 보내어 연나라 왕을 위한 일을 추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미생처럼 신의 있는 자는 다리 밑에서 여인과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그 여인이 오지 않자 물이 불어도 떠나지 않은 채 다리기둥을 껴안고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의 잇는 자를 왕께서는 또 어떻게 천 리 밖으로 보내 제나라의 강한 병사를 물리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른바 충성스럽고 신실하기 때문에 왕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

연나라 왕은 말했다. 
'그대는 충성스럽고 신실하지 않았던 것이오. 어찌 충성스럽고 신실하면서 죄를 지을 수 있겠소?'
소진이 대답했다. 243

'신은 동주에서 태어난 미천한 사람입니다. 신은 사사로이 왕의 의기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천하고 어리석지만 호미와 괭이를 버리고 왕을 섬기러 왔습니다. 신은 [처음에]한단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본 것은 동주에서 들은 것과는 거리가 멀어 실망하였습니다. 이제 연나라 조정에 와 왕의 신하들과 하급 관리들을 보니 왕께서는 이 세상의 현명한 왕이십니다.'
연나라 왕이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현명한 왕이란 어떤 것이오?'
소대가 대답했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왕은 자기 허물을 듣는 데 힘쓰고 자신의 뛰어난 점에 관한 칭찬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이 왕의 허물을 말씀드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 제나라와 조나라는 연나라의 원수이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연나라의 동맹국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원수 나라를 끼고 동맹국을 치고 있으니 이것은 연나라를 이롭게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왕께서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잘못된 계책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허물을 왕께 말하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닙니다. '
연나라 왕이 말했다. 
'저 제나라는 본디 과인의 원수로 깨뜨려야 하지만 나라가 황폐하여 힘이 모자람을 걱정할 뿐이오. 당신이 지금의 연나라로 제나라를 칠 수 있다면 나는 이 나라를 당신에게 맡기겠소'
소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247

'하늘의 시운이 그 나라를 돕지 않으면 청제와 탁하가 있을들 어찌 그것으로 튼튼하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힘이 없어지면 정성과 거방이 있은들 어찌 그것을 요새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날 제나라가 제수 서쪽 지역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지 않은 것은 조나라에 대비하기 위함이고, 황하 북쪽 지역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지 않은 것은 연나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수 서쪽과 황하 북쪽 일대에서 군사를 불러 모아 온 나라가 다 황폐해 있습니다. 대체로 교만한 군주는 반드시 이를 좋아하고 멸망하는 나라의 신하는 반드시 재물을 탐한다고 합니다. 왕께서 진실로 아끼는 아들과 어머니와 동생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진주와 보옥과 비단으로 제나라 왕의 좌우 신하들을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면, 제나라는 연나라를 자기편으로 여겨 안심하고 경솔하게 송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연나라 왕은 말했다. 
'나는 드디어 당신 때문에 하늘의 뜻을 잇게 되었소'
연나라는 공자 한 명을 제나라에 볼모롷 보냈다. 소려는 연나라에서 보낸 인질을 통해서 제나라 왕을 뵙기를 청했다. 제나라 왕은 소진에 대한 원망으로 소려를 가두려고 하였으나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공자가 소려를 위해 사과하였다. 소려는 몸을 굽혀 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연나라 재상 자지는 소대와 인척 관계를 맺고 연나라의 실제적인 권력을 쥐려고 생각하여 소대를 제나라에 보내 볼모가 된 공자를 모시도록 하였다. 제나라에서는 소대를 연나라로 보내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때 연나라 왕 쾌는 소대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나라 왕은 천하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소?'
소대가 대답했다. 
'될 수 없습니다.'
연나라 왕이 말했다. 
'어째서 그렇소?'
소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나라 왕은 자기 신하를 믿지 않습니다'
연나라 왕이 나라의 정치를 자지에게 맡기고 오래지 않아 왕위까지도 그에게 주므로 연나라는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제나라는 연나라를 치고 연나라 왕 쾌와 자지를 죽였다. 연나라에서는 소왕을 세웠다. 이로부터 소대와 소려는 다시는 연나라로 들어가지 않고 제나라로 망명햇다. 제나라에서는 그들을 잘 대우하였다. 250

정의로운 행동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나 진나라에서 연나라 왕을 초대했다. 연나라 왕이 가려고 하자 소대는 말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나라는 지 땅을 얻고서 나라가 멸망하고, 제나라는 송 땅을 얻고서 나라가 멸망하엿습니다. 초나라와 제나라가 지 땅과 송 땅을 차지하였으나 진나라를 섬기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싸워서 공을 세운 나라는 어는 나라든 진나라와 큰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는 천하를 얻는 데 정의를 따르지 않고 폭력을 썼습니다. 진나라는 폭력으로 정치를 하면서 천하에 공개적으로 경고했습니다. 

[예를 들면]초나라에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촉 땅의 군대가 배를 타고 문강(사천성에 있는 강으로 문수 또는 민강이라고도 함)에 떠서 여름에 물이 불었을 때를 틈다 장강으로 내려오면 닷새 만에 영도에 이를 수 있소. 한중의 군대가 배를 타고 파강을 나와 여름에 물이 불었을 때를 틈타 한수로 내려오면 나흘 만에 오저에 이를 수 있소. 내가 직접 완에255서 군대를 모아 수읍을 향하여 내려가면 현명한 사람이라도 계략을 세울 겨를이 없고, 용감한 사람이라도 성내며 맞서 싸울 겨를이 없으므로 나는 매를 쏘는 것처럼 당신들을 재빠르게 칠 것이오. 그런데 왕은 천하의 요새인 함곡관을 치러 오기를 기다리려 하니 그것은 아주 아득한 일이지 않소'256

작은 이익을 탐내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한다. 
장의는 위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세술(합종술과 연횡술)을 배웠는데, 소진은 스스로 장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의는 학업을 마치자 유세하러 제후들을 찾아갔다. 장의는 일찍이 초나라 재상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잇는데, 초나라 재상이 구슬을 잃어버렸다. 재상의 문하 사람드른 장의를 의심하고 이렇게 말했다.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이 좋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그자가 재상의 구슬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모두 함께 장의를 붙들어 수백 번 매질을 했으나, 장의가 구슬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풀어 주었다. 
장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이 글을 읽어 유세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런 수모를 겪었겠습니까?'

그러자 장의은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대꾸햇다. 
'내 혓바닥이 아직 붙어 있는지 보아 주시오'
장의의 아내는 웃으면서 말했다. 265

'혀는 붙어 잇네요'
장의가 말했다. 
'그럼 됐소'

이 무렵 소진은 이미 조나라 임금을 설득하여 합종을 약속받았지만 진나라가 제후들을 공격하여 합종 약속이 깨어져서 서로 등을 돌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소진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나라에 힘을 쓸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장의에게 사람을 보내 은밀히 권유하도록 했다. 

'선생께서는 처음에 소진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지금 소진은 이미 정치를 맡고 있습니다. 선생은 어째서 그를 찾아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탁하지 않으십니까?'

장의는 곧바로 조나라로 가서 이름을 마랗고 소진에게 만나 주기를 청하였다. 소진은 문지기에게 그를 들여보내지도 말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장의는 소진을 만날 수 있었다. 소진은 장의를 마루 아래에 앉게 하고 하인이나 첩이 먹는 형편없는 음ㅅ기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잘못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면서 꾸짖었다. 266

깃털도 쌓으면 배를 가라앉힐 수 있다. 
진나라 혜왕 10년에 공자 화와 장의를 시켜 위나라 포양을 에워싸서 항복을 받았다. 장의는 진나라에 말하여 그 땅을 위나라에 돌려주고, 진나라 공자 요를 위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장의는 이렇게 일을 처리하고 위나라 왕을 설득했다. 

'진나라 왕이 위나라를 매우 정성껏 예우하고 있으니, 위나라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답례가 있어야 됩니다'

위나라는 상군과 소량을 진나라에 바쳐 진나라 혜왕에게 보답하였다. 진나라 혜왕은 이에 장의를 재상으로 삼고 소량을 하양으로 고쳐 불렸다. 

장의는 진나라 재상을 지낸 지 사년 만에 [공으로 있던]혜왕을 세워 왕이 되게 하였다. 또 일 년 뒤에 그는 진나라 장수가 되어 섬 땀을 빼앗고 상군에 요새를 쌓았다. 

그로부터 이 년 뒤 그는 사신이 되어 제나라와 초나라 재상을 설상에서 만났다. 동쪽에서 돌아와서는 진나라 재상 자리를 내놓고 위나라 재상이 되어 진나라를 위하여 일을 꾀하였다. 장의는 먼저 위나라에게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게 하려고 하였으나, 위나라 왕은 장의의 의견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 왕은 몹시 노하여 위나라를 쳐서 곡옥과 평주를 빼앗고는 은밀히 장의를 더욱 두텁게 대우했다. 장의는 진나라에 보고할 만한 공적이 없음을 부끄러워했다.,273

장수는 지혜롭고도 용감하여 병력을 내지 않고도 상산의 요새를 석권하여 천하의 척추를 꺽을 수 있습닏. 그러므로 천하의 제후 가운데 남보다 늦게 복종하는 자는 먼저 망할 것입니다. 또 합종에 참가하는 나라들은 양떼를 몰아 사나운 호랑이를 공격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와 양은 서로 적수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왕께서는 사나운 호랑이와 손잡지 않고 양떼 편에 섰습니다. 신은 왕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닏. 

대체로 천하의 강한 나라는 진나라가 아니면 초나라이고, 초나라가 아니면 진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다툰다면 그 형세는 양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왕께서 진나라 편이 되지 않으면 진나라는 군대를 보내 의양을 칠 테고, 그렇게 되면 한나라의 상지(상당군)와는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나라 군대가 하동으로 내려와 성고를 빼앗으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의 신하가 될 테고, 위나라는 대세를 따라 진나라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초나라의 서쪽을 치고, 한나라와 위나라가 초나라의 북쪽을 치면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또 합종론자들은 힘이 약하고 작은 나라만을 모아서 제일 강한 나라를 치기로 하고는 적을 헤아리지 않고 섣불리 싸움을 벌이고 잇습니다. 나라가 가난한데도 자주 전쟁을 일으킨다면 위험에 빠지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은 '병력이 부치면 싸워서는 안 되고, 식량이 부치면 오래 싸우지 말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합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말을 부풀려 꾸미고 거짓말로 임금의 절개를 높이 추켜올리면서 이로운 점만 말하고 해로운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282

이제 진나라는 왕의 힘으로 파와 촉을 얻고 한중을 통일하였으며, 양주를 손에 넣어 구정을 옮기고 백마의 나루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한쪽에 치우쳐 있는 먼 벽지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분노와 원한을 품어 왔습니다. 이제 진나라는 해진 갑옷을 걸친 지치고 초라한 군대를 거느리고 민지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황하와 장하를 건너 파오를 차지하고, 갑자일에 한단성 아래에서 서로 만나 싸워 은나라 주왕을 정벌한 것처럼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삼가 신을 사자로 보내서 미리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왕께서 합종을 신뢰하신 것은 소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은 제후들을 현혹시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제나라를 등지려다가 저잣거리에서 거열혈으로 다스려지는 결과를 자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의 힘으로 천하가 하나로 묶일 수 없음은 명백한 일입니다. 지금 초나라는 진나라와 형제 나라가 되었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스스로 동쪽 울타리가 되는 신하라고 하며, 제나라는 물고기와 소금이 나는 땅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조나라의 오른팔을 잘라 버린 셈입니다. 정말 오른팔을 잘리고 남과 싸우려 하고, 자기 쪽의 지원군도 없이 고립되어서 위태롭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제 진나라가 장차 세 군을 보낸다면 한 군은 오도를 막고 제나라에 알려서 군사를 일으켜 청하를 건너 한단 동쪽에 진을 치게 할 것입니다. 291

사람 됨됨이는 그 주위 사람이 제대로 안다. 
진진은 유세하는 사람이다. 장의와 함께 진나라 혜왕을 섬겨 모두 중요한 인물이 되어서 임금의 총애를 다투었다. 장의는 진나라 왕에게 진진을 헐뜯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진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사신으로 다니느 것은 두 나라의 수교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초나라가 진나라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진진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것은 진진이 자신의 영리를 우선시하고 왕을 위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진진은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려고 합니다. 왕께서는 어째서 그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진나라 왕은 진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이 들으니 그대는 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가려고 한다는데 그것이 정말이오?'
진진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진나라 왕이 말했다. 
'장의의 말이 정말로 옳구나!'
그러자 진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장의만이 아니라 길 가는 사람도 다 압니다. 예전에 오자서는 그 임금에게 충성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기 신하로 삼으려고 서로 다투었고, 증삼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였기 때문에 온 천하가 그를 자식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노비가 그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팔리면 좋은 노비입니다. 소박 맞고 쫓겨 온 여자가 그 마을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좋은 아내입니다. 지금 신이 자기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면 초나라도 어떻게 신을 충성스럽다고 여기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버림받으려 하는데 신이 초나라로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혜왕은 그 말을 옳다고 여기고 그 뒤부터 그를 잘 대우하였다. 299

'장의는 이미 진나라와 위나라가 힘을 합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을 치고 진나라는 삼천을 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장의를 아끼는 것은 한나라 땅을 얻고 싶어셔입니다. 또 한나라의 남양은 이미 빼앗길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소인에게 작은 일이라도 맡겨 한나라에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면 진나라와 위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닏. 게다가 위나라는 분명히 진나라를 칠 생각으로 장의를 버리고 한나라와 한편이 되어 소인을 재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공숙은 그 말대로 하는 것이 이롭겠다고 생각하여 남양 땅을 서수에게 맡겨 공을 세우게 하였다. 서수는 결국 위나라 재상이 되었고, 장의는 위나라를 떠났다. 

의거 왕이 위나라에 입조하였다. 서수는 장의가 또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여 의거의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 나라는 먼 곳에 있어 다시 우리 위나라에 오기 어려울 테니 이곳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원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치지않으면 진나라는 분명 당신 나라를 쳐서 불사르고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원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서둘러 사신들 편에 많은 예물을 보내어 당신 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 304

'저는 일찍이 진나라 소왕을 위하여 조나라를 쳤는데, 조나라가 저를 원망하여 '장당을 잡아 오는 자에게는 사방 백 리 땅을 주겠다'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지금 연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조나라를 지나야 되므로 저는 도저히 갈 수 없습니다.'

문신후는 불쾌하지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때 감라가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까?'
문신후가 말했다. 
'내가 강성군 채택에게 연나라를 섬기게 한 지 삼 년 만에 연나라 태자 단을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왔다. 그래서 내가 직접 장경(강당)에게 연나라로 가서 재상이 되라고 하엿짐나 가지 않으려고 한다.'
감라가 말했다. 
'제가 그를 가도록 만들겠습니다'
문신후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물러가라. 내가 직접 부탁해도 듣지 않는데, 네까짓 것이 어떻게 가게 할 수 있단 말이야?'
감라가 말했다. 
'저 항탁은 일곱 살에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열두 살입니다. 어르신께서는 그렇게 야단만 치실 것이 아니라 저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325

[주서]에 '천명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포자와 싸워 이겨 현 여덟 개를 얻은 것은 병사가 정예로워서도 아니요 계략이 교묘해서도 아니고 하늘이 큰 행운을 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 망묘를 싸움에서 져 달아나게 하고 북택으로 침입하여 대량을 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하늘이 내려 준 행운이 늘 자기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듣건대 위나라는 백 개 현에서 뽑은 정예 병사를 모두 동원해서 대량을 지킨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그들의 병력은 30만은 족히 될 것입니다. 정예 병사 30만 명으로 대량의 쉰여섯 척 높이의 성을 지키고 있으니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쉽사리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체로 초나라와 조나라의 병력이 뒤에서 위협하고 있는데도 이를 가볍게 여기고 쉰여섯 척이337나 되는 성벽을 기어 올라가 30만 대군과 싸워서 반드시 함락시키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만일 쳐서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틀림없이 진나라 병사는 지칠 대로 지치고 도읍은 망할 것입닏. 그러면 당신이 지금까지 쌓은 공로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338

잃는 게 없는 싸움을 하라. 
그 이듬해에 위나라는 진나라를 등지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다. 진나라는 양후에게 위나라를 치게 하여 4만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 장군 포연을 도망치도록 했으며, 위나라의 세 현을 손에 넣었다. 양후는 봉지를 더하게 되었다. 

이듬해에 양후는 백기, 객경 호양과 함께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를 치고 망묘를 화양성 밑에서 쳐부숴 10만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의 권, 채양, 장사, 조나라의 관진을 빼앗았다. 그 뒤 조나라에 관진을 돌려주는 대신 조나라에 군사를 지원하여 제나라를 치게 했다. 제나라 양왕은 두려운 나머지 소대를 시켜 몰래 양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했다. 

저는 길 가는 사라믈이 '진나라는 앞으로 조나라에 군사 4만명을 보내 제나라를 치려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몰래 우리 제나라 왕에게 '진나라 왕은 현명하게 계책에 뛰어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 처리에 능숙하므로, 결코 조나라에 병사 4만 명을 주어 제나라를 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339 삼진(한, 위, 조)이 힘을 합쳐 한편이 되는 것은 진나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삼진은 진나라를 백 번 배반하고 백 번 속였으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그다지 신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제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살찌운다면 조나라는 진나라에게 큰 적이 되니 결코 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참모는 반드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삼진과 초나라가 제나라를 치면 제나라를 깨뜨릴 수 있지만 삼진과 초나라도 지칠 것입니다. 이렇게 된 뒤에 삼진과 초나라를 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제나라는 황폐한 나라입니다. 천하의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제나라를 친다는 것은 1000균이 나가는 쇠뇌로 곪아 터지려는 종기를 터뜨리는 것과 같아서 제나라를 쉽게 깨뜨리겠지만 삼진과 초나라르 지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병사를 적게 보내면 삼진과 초나라가 믿지 않을 테고, 병사를 많이 보내면 삼진과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압도되어 결국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는 격이 됩니다. 제나라는 겁이 나서 진나라를 좆지 않고 삼진과 초나라를 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제나라 땅을 떼어 삼진과 초나라에게 주면 삼진과 초나라는 이곳에 병사를 두어 지킬 것입닏.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도리어 적을 만들어 놓는 셈이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삼진과 초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는 것은 삼진과 초나라가 진나라를 이용하여 제나라 땅을 빼앗고, 제나라를 이용하여 진나라 땅을 빼앗는 결과가 됩니다. 이는 삼진과 초나라가 얼마나 지혜로우며 진나라와 제나라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341

백기는 미 땅 사람으로 병사를 다루는 데 뛰어나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 소왕 13년에 백기는 좌서장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 신성을 공격했다. 이해에 양후가 진나라 재상이 되어 임비를 한중군 태수로 기용했다. 그 이듬해에 백기는 좌경에 올라 한나라와 위나라를 이궐에서 공격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고, 적의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았으며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국위로 승진하여 황하를 건너 한나라 안읍에서 동쪽으로 건하에 이른느 땅을 함락시켯다. 이듬해에 백기는 대량조에 올랐고, 위나라를 쳐서 크고 작은 성 예순한 개를 차지했다. 그 다음 해에 백기는 객경 사마조와 함께 원성을 쳐 손에 넣었다. 그로부터 오 년 뒤에 백기는 초나라를 쳐서 언과 등의 다섯 성을 차지했다. 그 이듬해에도 초나라를 쳐서 영을 점령하고 이릉을 불살랐으며, 마침내 동쪽으로 경릉에 이르렀다. 초나라 왕은 영을 버리고 동쪽에 위치한 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자 진나라는 영을 남군으로 삼았다. 백기는 승진하여 무안군이 되었다. 345

사욕은 혼란의 시작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일찍이 [맹자]라는 책을 읽다가 양(위)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구절에 이르러 책 읽기를 멈추고 '아! 이익이란 진실로 혼란의 시작이로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자가 이익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 혼란의 근본 원인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라고 했던 것이다.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데서 생긴 폐해가 어찌 다르겠는가?' 363

사람의 운명은 어디로부터 받는가?
맹상군은 이름이 문이고 성은 전이다. 그 아버지는 정곽군 전영인데 제나라 위왕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제나라 선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전영은 위왕 때부터 관직에 나아가 나랏일에 관여하였다. 

전영은 성후 추기, 전기와 더불어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구하고 위나라를 친 적이 있다. 성후 추기는 전기와 임금의 총애를 다투는 사이인데 성후가 전기를 매도하였다. 전기는 두려워서 제나라의 변방 고을을 습격했지만 싸움에서 져 도망쳤다. 때마침 위왕이 죽고 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선왕은 성후가 전기를 모함한 것을 알고 다시 불러들여 장군으로 삼았다. 

선왕 2년에 전기는 손빈, 전영과 함께 위나라를 마릉에서 쳐부수고 위나라 태자 신을 사로잡았으며 위나라 장군 방연으 죽였다. 

선왕 7년에 전영은 사자로서 한나라와 위나라에 가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제나라에 복종하게 했다. 전영은 한나라 소후, 위나라 혜왕이 동아 남쪽에서 제나라 선왕과 만나 맹약을 맺고 돌아가도록 했다. 377

'당신은 제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를 돕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한 지 벌써 구 년째나 됩니다. 그 동안 완과 섭 북쪽 지역을 빼앗아 한나라와 위나라의 국력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진나라를 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더욱더 이롭게 하려고 하십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어지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어지면 오히려 제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닏. 한나라와 위나라는 틀림없이 제나라를 하찮게 보고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렇게 되는 것은 당신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주나라나 진나라와 관계를 긴밀히 하고, 서주를 치지도 말고 또 군대나 식량을 빌리지도 마십시오. 당신이 함곡관까지 가더라도 진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저희 주나라를 시켜서 당신 마음을 진나라 소왕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십시오. '설공 맹상군은 결코 진나라를 무너뜨려 한나라와 위나라를 강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진나라를 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초나라 회왕을 설득해서 초나라 동쪽 땅을 제나라에 떼어 주게 하고, 또한 진나라가 초나라 회왕을 풀어 주어 제나라와 진나라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이 저희 주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게 하면, 진나라는 초나라 동쪽 땅을 떼어 주게 한 대가로 자기 나라의 군대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제나라의 공격을 면할 수 있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385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진다. 
제나라 왕은 진나라와 초나라의 비방에 현혹되어 맹상군의 명성이 군주보다 높아서 제나라 정권을 제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여기고 마침내 맹상군을 벼슬에서 물러나게 했다. 여러 빈객은 맹상군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자 모두 떠나갔다. 풍환이 말했다. 

'저에게 진나라로 타고 들어갈 만한 수레 한 대만 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시면 당신을 제나라에서 중용되게 하여 봉읍을 더욱더 넓혀 드리겠습니다.'

맹상군은 수레와 예물을 갖추어 그를 진나라로 떠나보냈다. 풍환은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이렇게 설득했다. 

'천하에 유세하는 선비로서 수레를 몰고 말을 달려 서쪽 진나라로 들어오는 사람 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수레를 몰고 말을 달려 동쪽 제나라로 들어가는 사람 치고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두 나라는 암수를 겨루는 나라이므로 형세가 양립하여 둘 다 수컷이 될수는 없습니다. 수컷이 되는 나라가 천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무릎을 끓어앉아 풍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진나라가 암컷이 되지 않게소?'
풍환이 물었다. 394

'대왕께서는 제나라가 맹상군을 벼슬에서 내친 일을 아십니까?'
진나라 왕이 대답했다 .
'알고 있소'
그러자 풍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나라를 천하에서 비중 있는 나라로 만든 이는 맹상군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나라 왕은 다른 사람이 헐뜯는 말을 듣고 그를 내쳤습니다. 맹상군은 마음속으로 원망하며 반드시 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그가 제나라를 등지고 진나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제나라의 속사정을 진나라에게 다 털어놓을 테니 제나라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 수컷이 되는 정도뿐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서둘러 사자를 시켜 예물을 실어 보내 아무도 모르게 맹상군을 맞아들이십시오. 때를 놏치지 마십시오. 만일 제나라가 잘못을 깨닫고 다시 맹상군을 기용하면 암수는 진나라와 제나라 중 어느 쪽이 될지 예측할 수 없습닏'

진나라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수레 열대, 황금 2000냥을 보내서 맹상군을 맞이하게 했다. 
한편 풍환은 진나라 왕과 헤어져 사자보다 한 발 앞서서 제나라에 이르러 제나라 왕에게 말했다. 
'천하에 유세하는 선비로서 수레를 몰고 말을 달려 동쪽 제나라로 들어노는 자 치고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수레를 몰고 말을 달려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는 사람 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395

애첩을 죽여 신의를 지킨다. 
평원군 조승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자들 주엥서 승이 가장 어질고 빈객을 좋아하며 그 밑으로 모여든 빈객이 대략 수천 명이나 되었다. 평원군은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례난 재상 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는 동무성에 봉해졌다. 

평원군의 집 누각은 민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다. 평원군의 애첩이 누각에서 민가를 사는 절름발이가 절뚝거리며 물을 긷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 다음 날 절름발이가 평원군의 집 문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천 리를 멀다 낳고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 다리를 절뚝거리고 등이 굽는 병이 있는데 당신 첩이 저를 내려다보고 비웃었습니다. 원컨대 저를 비웃은 자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평원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소'403
그러나 평원군은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놈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내 애첩을 죽이라고 하니 너무하지 않은가?'
평원군은 끝내 첩을 죽이지 않았다. 그 뒤 일 년 남짓한 사이에 빈객과 문하, 사인들이 조금씩 떠나가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평원군은 이를 이상히 여겨 말했다. 
'나는 여러붅을 예우하는 데 크게 실수한 적이 없거늘 어째서 떠나가는 자가 이처럼 많소?'
문하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당신이 절름발이를 비웃은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비들은 당신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하찮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하여 떠나는 것입니다.'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비웃은 애첩의 목을 베고, 직접 문 앞까지 가서 절름발이에게 그 목을 내 주면서 사과했다. 그 뒤 문하에 다시 선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제나라에는 맹상군, 위나라에는 신릉군, 초나라에는 춘신군이 있어서 서로 다투어 선비를 정성껏 예우하였다. 404

강한 자는 공격을 잘하고 약한 자는 지키지 못한다. 
우경은 유세하는 선비이다. 그는 짚신을 신고 어깨까지 걸치는 채이 긴 삿갓을 쓰고 와서 조나라 효성왕을 설득했다. 효성왕은 그를 처음 만나 보고 황금 2000냥과 흰 옥 한 쌍을 내리고, 두 번째 만나서는 조나라 상경으로 삼았다. 그래서 우경이라 불렀다. 

진나라와 조나라는 장평에서 힘을 겨루었는데, 조나라는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도위 한 명을 잃고 말았다. 조나라 왕은 장군 누창과 우경을 불러서 말했다. 

'우리 군대는 싸워 이기지 못하고 도위마저 잃었소. 과인이 갑옷을 걷어붙이고[가벼운 차림의 날랜 군대를 데리고]진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누창이 대답했다. 412
'이롭지 않습니다. 비중 있는 사신을 보내 화친하는 것이 낫습니다. '
우경이 말했다. 
'누창이 화친하자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군대가 반드시 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친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진나라에 달려 있습니다. 왕께서는 진나라를 볼 때 조나라 군대를 깨뜨리려 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보십니까?'

조나라 왕이 대답했다. 
'진나라는 반드시 힘을 다해 조나라 군대를 깨뜨릴 것이오' 413

어진 사람을 얻으려면 정성을 다하라. 
위나라 공자 무기는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위나라 안희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면서 공자를 신릉군에 봉했다. 이 무렵 범저가 위나라에서 망명해 진나라 재상이 되었는데, 위나라 재상 위제에 대한 원한으로 진나라 군대를 내어 대량을 에워싸게 하고 화양에 진을 치고 있는 위나라 군대를 무찔러 위나라 장군 망묘를 달아나게 하였다. 위나라 왕과 공자는 이런 사태를 걱정했다. 

공자는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예의로 대우했다. 선비가 어질든 그렇지 않든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사귀고, 자기가 부귀하다고 해서 교만하게 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사방 수천 리에서 앞을 다투어 몰려와 공자에게 몸을 의지하여 빈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 그 무렵 제후들은 공자가 어질고 빈객이 많음을 알고 섣불리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지 않은 지 십여 년이나 되었다. 

어느 날 공자가 위나라 왕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북쪽 변방에서 봉화가 올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데 이제 막 국경을 넘어서려 하고 있427 습니다.'
위나라 왕이 바둑 두던 것을 멈추고 대신들을 불러 모아 상의하려고 하자, 공자가 왕을 말리며 말했다. 
'조나라 왕은 사냥을 할 뿐 침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다시 그대로 바둑을 두엇다. 왕은 걱정이 되어 바둑에는 마음이 없었다. 조금 뒤에 또 북쪽 지방에서 말을 전해 왔다
'조나라 왕은 사냥을 할 뿐 침략한 것이 아닙니다.'
위나라 왕은 매우 놀라 물었다. 
'공자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의 비낵ㄱ 중에 조나라 왕의 은밀한 일까지 정탐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조나라 왕이 하는 일마다 하나하나 신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신은 이번 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왕은 공자가 어질고 능력 있음을 꺼려 그에게 나랏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428

잊으면 안 되는 일과 잊어야 할 일
한편 공자가 진비의 군대에 이르렀을 무렵에 후영은 정말로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위나라 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쳐 왕명이라 속이고 진비를 죽인 것을 알고 화를 냈다. 공자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알기 때문에 진나라 군대를 물리쳐서 조나라를 존속시킨 뒤에는 부하 장수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빈객들과 조나라에 머물렀다. 

조나라 효성왕은 공자가 진비의 군사를 속여 빼앗아 조나라를 존속시켜 준 일을 고맙게 여겨 평원군과 상의하여 성 다섯 개를 공자의 봉읍으로 주려고 했다.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 교만한 마음이 생겨 공을 자랑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자 빈객 중 한 사람이 공자에게 말했다. 

'세상일에는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또 잊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은덕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이나 속여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를 군한 것은 조나라 입장에서는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보면 틀림없이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 스스로 교만해져 공로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436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다 지치면 개도 못이긴다.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헐이고 성은 황이다.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배워서 보고 들은 것이 넓었으며 초나라 경양왕을 섬겼다. 경양왕은 그가 변론에 뛰어남을 알고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이보다 먼저 진나라 소왕은 백기에게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기가 한나라와 위나라 군사를 화양에서 깨뜨리고 위나라 장군 망묘를 사로잡으니 한나라와 위나라는 항복하고 진나라를 섬겼다. 진나라 소왕은 백기에게 명하여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 군사가 아직 떠나기 전에 초나라 사자 황헐이 때마침 진나라에 와서 이 계획을 들었다. 그 무렵 진나라는 그에 앞서 백기에게 초나라를 치게 하여 무군과 검중군을 빼앗고 언과 영을 함락시켰으며, 동쪽으로 경릉까지 쳐들어갔으므로 초나라 경양왕은 동쪽으로 옮겨 가서 진현에 도읍을 정했다. 

황헐은 일찍이 초나라 회왕이 꾀임에 빠져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속아서 그곳에서 죽는 것을 보았다. 경양왕은 그 아들이므로 진나라는 그를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황헐은 진나라가 한번 병사를 445 일으키면 초나라가 망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워서 진나라 소왕에 글을 올려 말했다. 446.

복과 불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이십오 년째 되던 해에 초나라 고열왕이 병에 걸렸다. 주영이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생각지도 않던 복이 찾아올 수도 있고, 또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올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생각지도 못한 행복과 재앙이 찾앙오는 세상에 살고 있고, 기대를 걸 수 없는 군주를 섬기고 계십니다. 어찌 재앙을 막아 낼 수 있는 뜻밖의 인사를 구해 두지 않으십니까?'
춘신군이 물었다. 
'무엇을 생각지도 않은 복이라고 하오?'
주영이 대답했다. 
'당신께서 초나라 재상이 된 지 이십여 년이 됩니다. 이름은 재상이지만 사실은 초나라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초나라 왕이 병에 걸려 머지않아 돌아가시려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린 군주를 도와 나랏일을 하게 될 텐데, 이는 옛날 이윤이나 주공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왕이 자라면 정권을 돌려주거나, 아니면 왕노릇을 하여 고라고 일컬으며 초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입니다.' 459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진다. 
범저는 날이 갈수록 소왕과 더욱 가까워졌다. 소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 지낸 지 몇 해가 지나자 범저는 기회를 보아 왕에게 이렇게 말햇다. 
'신은 산동에 있을 때, 제나라에는 전문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제나라 왕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자를 왕이라 하고, 사람에게 이익과 해를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를 왕이라 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위력을 가진 자를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태후는 왕을 돌아보지 않고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양후는 다른 나라ㅗ 사신을 보내면서도 왕께 보고하지 않으며, 화양군과 경양군은 멋대로 사람을 죽이고도 왕을 꺼리지 않고, 고릉군은 사람을 마음대로 나아가고 물러나게 하면서도 왕의 허락을 청하지 않습니다. 이런 네 종류의 일이 있는데도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네 종류의 존귀한 사람 밑에 있게 되면 왕은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 왕의 권력이 기울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명령이 왕에게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그 권위를 굳히고 밖으로는 그 권력을 무겁게 한다'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양후는 왕의 중요한 권력을 장악하여 마음대로 사신을 보내 제후들을 다루고, 천하의 땅을 나누어 사람을 봉하며, 적을 무찌르고 다른 나라를 치는 등 진나라의 국정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싸워서 이기고 쳐서 빼앗으면 이익은 도읍(양후의 봉토)으로 돌리고 손해는 제후에게 씌웁니다. 싸움에 지면 백성을 원망하고 화근을 나라 탓으로 돌립니다. 옛 시에도 '나무 열매가 너무 많으면 가지가 부러지고, 가지가 부러지면 나무 기둥을 해친다'라고 했습닏. 수도가 지나치게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신하가 지나치게 존중되면 군주가 낮아집니다. 480

충신이 반역자가 되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악의의 선조는 악양이다. 약양은 위나라 문후의 장군이 되어 중산국을 쳐서 빼앗았다. 위나라 문후는 악양을 영수에 봉했다. 악양이 죽은 뒤 영수에 장사를 지냈으므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집안을 이루게 되었다. 그 뒤 중산은 다시 나라를 일으켰지만 조나라 무령왕때 다시 조나라에 멸망했다. 악씨의 후손 중에 악의라른 사람이 있었다. 

악의는 어질고 병법을 좋아하여 조나라에서 그를 천거했으나, 무령왕이 사구의 난으로 죽었으므로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그 무렵 연나라에서는 자지의 난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탓 제나라가 연나라를 깨뜨렸다. 연나라 소왕은 제나라를 원망하며 제나라에 복수할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연나라는 작고 멀리 구석진 곳에 있어서 제나라를 꺽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연나라 왕은 몸을 굽혀 겸허한 태도로 선비를 높이 받들었는데, 먼저 곽외를 예우하여 어진 사라믈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악의는 위나라 소왕에게 부탁하여 연나라에 사자로 갔다. 연나라 왕은 빈객에 대한 예의로 그를 대우하려 했지만 악의는 사양하며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고자 했다. 509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떠나라
악난이 연나라에 산 지 삼십여 년이 되었다. 연나라 왕 희는 재상 율복의 계책을 써서 조나라를 치려고 창국군 악간에게 의견을 물었다. 악간이 대답했다. 

'조나라는 사방의 적국과 자주 싸워 온 나라이므로 그 백성은 싸움에 익숙합니다. 조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나라 왕은 악간의 말을 듣지 않고 조나라를 쳤다. 조나라에서는 장군 염파에게 연나라를 치도록 했다. 염파가 율복의 군사를 호에서 크게 깨뜨리고 율복과 악승을 사로잡았다. 악승은 악간의 집안사람이므로 악간은 조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가 드디어 연나라를 포위하니 연나라는 거듭 땅을 떼어주고 화친을 맺었다. 그러자 조나라 군대는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연나라 왕은 악간의 말을 듣지 앟은 것을 후회했지만 악간은 이미 조나라에 가 있었다. 이에 악간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517

은나라 주왕때 기자는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계속 간하여 들어주기를 바랐소. 상용도 간언했으나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몸까지 치욕을 당했지만 주왕이 마음을 바꾸기를 바랐소. 그러다가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죄수들이 멋대로 감옥을 빠져나가는 지경에 이르자 두 사람은 비로소 물러나 숨었소. 주왕은 포악하다는 허물을 썼으나 두 사람은 충성되고 성스럽다는 이름을 잃지 앟았소. 왜냐하면 두 사람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다했기 때문이오. 지금 비록 과인은 어리석지만 주왕처럼 포악하지는 않으며, 연나라 백성은 어지럽기는 하지만 은나라 백성처럼 심하지는 않소. 한 집안에서 말썽이 있었다 하여 서로 정성을 다하지 않고 이웃에 일러바치는 것은 어쩐 일이오. 과인이 보기에 그대가 과인에게 간하지 않고 또 이웃 나라인 조나라로 달아난 이 두 가지 일은 그대를 위해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소. 518

세금이 공평하면 나라가 부유해진다. 
조사는 조나라 전답의 조세 징수를 맡은 관리이다. 그가 조세를 거둬들이는데 평원군의 집에서 조세를 내지 않으려고 하자, 법에 따라 평원군의 집에서 일을 보는 사람 아홉을 죽였다. 평원군이 화가 나서 조사를 죽이려고 하자, 조사는 그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조나라의 귀공자입니다. 지금 당신 집에서 나라에 바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내팽개쳐 둔다면 국법이 손상될 것입니다. 국법이 손상되면 나라가 쇠약해질 테고 나라가 쇠약해지면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이며, 제후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조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게서 어떻게 이와 같은 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 같은 귀한 분이 국법이 정한 대로 나라에 의무를 다하면 위아래가 공평해질 테고 위아래가 공평해지면 나라가 강해질 것이며, 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는 튼튼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국왕의 일족이니 그 누가 공자를 하찮게 보겠습니까?'

평원군은 조사가 현명하다고 여겨 왕에게 추천했다. 왕이 그를 등용하여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게 하자, 세금이 매우 공평하게 거둬들여지고 백성은 부유해지며 창고는 가득 차게 되었다. 534

권세를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 몰린다. 
한단의 포위가 풀린 지 오 년 뒤, 연나라는 '조나라 장정들은 장평 싸움에서  다 죽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장정이 되지 못했다'라는 재상율복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쳤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출전하여 연나라 군대를 호에서 크게 깨뜨려 율복을 죽이고 연나라를 포위했다. 연나라에서 성 다섯 개를 때어주며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이를 허락했다. 조나라 왕은 염파를 위문 땅에 봉하여 신평군으로 삼고 임시 상국으로 임명했다. 

이보다 앞서 염파가 장평에서 파면되어 권세를 잃고 돌아왔을 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빈객이 모두 떠났다. 그러나 다시 등용되어 장군이 되자 빈객이 또다시 모여드니 염파가 말했다. 
'객들은 물러가시오'
그러자 한 빈객이 말했다. 
'아!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판단이 더딥니까? 대체로 천하 사람들은 시장에서 이익을 좇는 것처럼 사귑니다. 당신에게 권세가 있으면 따르고 권세가 없어지면 떠나갑니다. 이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을 원망하십니까?'

그로부터 육 년 뒤에 조나라는 염파에게 위나라 번양을 치게 하여 함락시켰다. 

조나라 효성왕이 죽고 아들 도양왕이 즉위하자 염파 대신 악승을 장군으로 삼았다. 염파는 화가 나서 악승을 쳐 도망치게 했다. 염파는 위나라 대량으로 달아났다. 그 이듬해에 조나라는 이목을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를 쳐서 무수와 방성을 함락시켰다. 

염파는 오랫동안 대량에 머물렀지만 위나라에서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 동안 조나라는 진나라 군대에게 자주 시달려 다시 염파를 얻으려 했고, 염파도 다시 조나라에 등용되고 싶어했다. 조나라 왕은 사자을 보내 아직 염파를 장군으로 쓸 만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살피게 했다. 이때 염파는 원수인 곽개가 사자에게 많은 금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도록 했다. 염파는 조나라 사자르르 만나자 식사 때 마다 쌀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어 보이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아직도 쓸 만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나라 사자는 돌아와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염 장군은 비록 늙긴 했지만 아직 식사도 잘합니다. 그러나 신과 자리를 같이하는 동안에 몇 차례나 소변을 보았습니다.'
조나라 왕은 염파가 늙고 쇠약해졌다고 여겨 부르지 않았다. 초나라는 염파가 위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몰래 사람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염파는 한 차례 초나라 장군이 되었으나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나라 군사로서 싸우고 싶다'
염파는 결국 수춘에서 죽었다. 542

수레바퀴 축의 쇠가 목숨을 구한다. 
전단은 제나라의 여러 전씨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단은 민왕 때 임치의 시연(시장을 감독하는 관리)이었으나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연나라가 악의를 보내 제나라를 쳐서 깨뜨리자 제나라 민왕은 달아나 거성을 지켰다. 연나라 군대가 깊숙이 쳐들어와 제나라를 평정하자 전단은 안평으로 달아났다. 전단은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수레바퀴 축의 양끝을 모조리 잘라 버리고 쇠를 덧붙여 튼튼하게 만들도록 했다. 얼마 뒤 연나라 군대가 안평을 쳐서 성을 함락시켜 제나라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났지만, 바퀴 축의 양 끝이 부러져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모두 연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오직 전단의 집안사람들만은 바퀴 축을 쇠로 싸 두었기 때문에 탈출하여 동쪽 즉묵으로 가서 몸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연나라는 제나라의 거의 모든 성을 정복하였으나 거와 즉묵만은 손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연나라 군대는 제나라 왕이 거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을 모아 공격하엿다. 그러자 [제나라를 구하기 위해]초나라 장수 요치가 제나라 민왕을 죽이고 거를 굳게 지키며, 연나라 군대에 맞서 여러 해 동안이나 항보갛지 않았다. 연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즉묵을 둘러쌌다. 즉묵의 대부들은 성에서 나와 싸우다가 져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단을 추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평 싸움에서 전단의 집안사람들만이 바퀴 축을 쇠로 싸 두었기 때문에 무사했으니 군대를 잘 다룰 것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장군으로 삼았다. 전단은 즉묵을 지키며 연나라 군대에 대항하였다. 550

잠시의 부끄러움을 참고 이름을 길이 남겨라
그 뒤 이십여 년이 지나 연나라 장군이 제나라의 요성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요성의 어떤 사람이 그들의 장군을 연나라에 참소했다. 연나라 장군은 처형될까 봐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요성에 주저앉았다. 한편 제나라는 전단을 보내 요성을 일 년 남짓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만 희생시켰을 뿐 요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노중련은 편지를 써서 화살 끝에 매달아 성아능로 쏘아 연나라 장수에게 보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제가 듣건대 지혜로운 자는 때를 거슬러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감한 자는 죽음을 겁내어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기  한 몸을 앞세워 군주를 뒤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장군은 참소를 받은 한때의 분노를 못 참아 연나라 왕에게 좋은 신하가 없음을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요성을 잃고 장군도 죽게 된다면 제나라에 장군의 위엄을 떨칠 수 없으니 이는 용감함이 아닙니다. 또한 공이 허물어지고 명성을 잃게 되어 후세 사람들이 장군을 칭송하지 않게 되면 이는 지혜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세상의 군주들은 이런 세 가지 행동을 한 사람을 신하고 쓰지 않고, 유세하는 선비들도 그러한 ㅅ람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용감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567

지금 신은 충성과 정성을 다하여 마음속의 계책을 다 말씀드려 대왕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랐지만, 대왕 주위의 신하들이 밝지 못한 탓으로 오히려 옥리에게 심문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형가와 위 선생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연날와 진나라는 그들의 참뜻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깊이 살펴보십시오. 

옛날 변화는 보옥을 바쳤지만 초나라 왕은 그것이 가짜라고 그의 발을 잘랐습니다. 이사도 충성을 다하였지만 호해는 그를 극형에 처했습니다. 기자가 미친 척하고, 접여가 세상을 피해 살았던 것도 다 이런 우환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참뜻을 깊이 살펴 앞으로는 초나라 왕과 호해처럼 잘못된 참소를 듣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신이 기자와 접여에게 비웃음을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또 신이 듣건대 비간은 가슴을 찢기고, 오자서는 말가죽 주 머니에 넣어 강물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신은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펴서 신을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속담에 '젊을 때부터 흰머리가 되도록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듯한 이가 있는가 하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간 이야기하고도 옛날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입니다. 574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굴원은 이름이 평이고 초나라 왕실과 성이 같다. 그는 초나라 회왕의 좌도로 있었는데,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잘 다스려질 때와 혼란스러울 때의 일에 밝고 글을 쓰는 탁월했다. 그는 궁궐에 들어가서는 군주와 나랏일을 의논하여 명령을 내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빈객을 맞이하며 제후들을 상대하였다. 회왕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상관 대부 근상은 굴원과 지위가 같았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면서 마음속으로 굴원의 능력을 시기하였다. 회왕이 굴원에게 나라의 법령을 만들도록 하여 굴원이 아직 초안을 완성하지 않았을 때 상관 대부가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굴원이 내주지 않자 왕에게 이렇게 헐뜯었다. 

'왕께서 굴원에게 법령을 만들도록 하신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는 법령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자기 공을 뽐내며 '자기가 아니면 법령을 제대로 만들 사람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회왕은 화가 나서 굴원을 멀리하엿다. 

굴원은 왕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밝지 못하고 헐뜯고 아첨하는 마링 군주의 밝음을 가로막으며, 흉악하고 비뚤어진 말이 공정함을 해치고, 단아하고 올곧은 사람이 쓰임을 받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근심하며 깊이 사색에 잠겨 [이소]를 지었다. 

'이소'란 '걱정스러운 일을 만난다'라는 뜻이다. 무릇 하늘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는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곤궁해지면 근본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힘들고 곤궁할 때 하늘을 찾지 않는 이가 없고, 질병과 고통과 참담한 일이 있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이가 없다. 굴원은 도리에 맞게 행동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군주를 섬겼지만 헐뜯는 사람의 이간질로 곤궁해졌다고 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는다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굴원이 [이소]를 지은 것은 이처럼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586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굴원은 강가에 이르러 머리를 풀어헤치고 물가를 거닐면서 읊조렸다. 그의 얼굴빛은 꾀죄죄하고 모습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었다. 어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닙니까?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소'
어부가 물었다. 
'대체로 성인이란 물질에 구애받지 않고 속세의 변화를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아름다운 옥처럼 고결한 뜻을 가졌으면서 스스로 내쫓기는 일을 하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사람이라면 또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 쓰겠소!'592

들새가 들어오고 주인이 나간다. 
가생이 장사왕의 태부가 된 지 삼 년쯤 되자 부엉이가 가생의 집으로 날아들어 방구석에 앉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부엉이를 '복'이라고 불렀다. 가생은 좌천되어 장사에 살고 있었는데, 장사는 땅이 낮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그것이 슬퍼서 부를 지어 스스로 위로했으니 그 문장은 이러하다. 

정묘년
4월 초여름, 
경자일 해질 무렵
부엉이가 내 집으로 날아들어
방구석에 앉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한가롭구나!
이상한 것이 들어와 있으니
그 까닭이 괴이하도다!
책을 펼치고 점쳐 보니
점괘가 그 길흉을 말하는데ㅏ, 
'들새가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주인이 나가는 형국이로다'
부엉이에게 묻는다. 

'내 가면 어디로 갈까?
길한 징조면 내게 말해 주고
흉한 징조면 그 재앙을 말해 다오!
땅에 묻힐 나이를 헤아려
그때를 나에게 알려 다오'
부엉이가 이에 탄식하고
머리를 들고 나래를 친다.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날갯짓으로 대답하네.

만물은 변하며
진실로 쉼이 업사. 
돌아 흘러서 옮겨 가고
또는 밀어서 돌아간다. 
형테와 기운이 끊임없이 도니
변하고 진화하는 것 매미와 같네
그 깊은 이치 끝이 없는데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
재앙이란 복이 의지하는 곳이고
복이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라.
근심과 기쁨은 같은 문으로 모이고
길함고 흉함은 한곳에 있네. 
저 오나라는 강대했으나
부차는 패하였고, 
월나라는 회계에 숨어 살았지만
구천은 세상을 제패했네. 
이사는 유세에 성공하였으나
오형을 받았고
부열은 죄수였으나
무정의 재상이 되었도다. 
재앙과 복이 
어찌 꼬인 새끼줄과 다르랴!
천명이란 말할 수 없는 것
누가 그 끝을 알랴!
물은 부딪치면 빨라지고
화살은 힘을 받으면 멀리 가는구나. 
만물은 돌고 돌아 서로 부딪치고 
진동하며 변하네.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 되고
구름이 모여 비 되니
얽히고설켜 서로 흐트러진다. 
조화의 신이 만물 만드는 일은
넓고 커서 끝이 없다네
하늘의 이치 예측할 수 없고
도는 미리 꾸밀 수 없도다. 
수명에는 길고 짧음 정해져 있는데
어찌 그때를 알 수 있으리! 604

한 글자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여불위는 한단의 여러 첩 가운데 외모가 뛰어나고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일어나 여불위의 장수를 축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햇다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자초를 위해 힘쓰고 있는 까닭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그 여자를 바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몸임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정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 여자를 부인으로 세웠다. 

진나라 소왕 50년에 진나라는 왕의에게 한단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하였다. 자초는 여불위와 모의하여 금 600근으로 지키던 관리를 매수하고 탈출하여 진나라 군대로 도망쳐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나라는 자초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자초의 아내는 조나라 부호의 딸이므로 숨을 수 있었기에 어머니와 아들이 마침내 무사하였다. 진나라 소왕이 즉위한 지 오십육 년 만에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라 화양 부인을 왕후로 하고 자초를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조나라는 자초의 아내와 아들 정을 받들어 진나라로 돌려 보냈다. 

진나라 왕이 즉위한 지 일 년 만에 죽자 시호를 효문왕이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 자초가 왕이 된 이 사람이 장양왕이다. 장양왕은 양어머니 화양 부인을 화양 태후라 하고, 생모 하희를 높여서 하 태후라 하엿다. 자양왕 원년에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에 봉하였으며, 하남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617

장양왕이 즉위한 지 삼 년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정은 여불위를 존중하여 상국으로 삼고 중부라고 불렀다. 진나라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태후가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였다. 여불위의 집에는 하인이 만 명이나 있었다. 

이 무렵 위나라에는 신릉군, 초나라에는 춘신군, 조나라에는 평원군,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선비를 존중하여 빈객 모시는 일을 두고 다투었다. 여불위는 진나라가 강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선비들을 불러 정성껏 대하자 빈객이 3000명에 이르렀다. 이때 제후들의 나라에는 변사가 많았는데, 순경 같은 무리는 글을 지어 천하에 자신의 학설을 퍼뜨렸다. 이에 여불위는 자기 빈객들에게 각각 보고 들은 것을 쓰게 하여 [팔람], [육론], [십이가]등 이십여 만 언으로 모아 이것이야말로 천지, 만물, 고금의 일을 다 갖추고 있다고 여겨 [여씨춘추]라고 불렀다. 이 책을 함양의 시장 문 앞에 펼쳐 놓고 거기에 1000금을 걸어 제후국의 유사나 빈객 중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이에게 그 돈을 주겠다고 했다. 618

'진나라 땅은 천하에 골고루 나뉘어 있어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쪽에는 감천산과 곡구같은 험한 요새가 있고, 남쪽에는 경하와 위하 같은 기름진 땅이 있으며, 파와 한중처럼 풍요로운 땅까지 독점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농과 촉같은 험한 산악 지대가 있고, 왼쪽에는 관과 효 같은 험준한 산이 있습니다. 백성이 많고 병사들은 패기가 넘치며 무기와 장비도 넉넉합니다. 진나라가 쳐들어올 뜻만 있다면 장성 남쪽과 역수 북쪽에는 안정도니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원한 때문에 진나롸 왕을 화나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단이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국무가 대답했다. 
'제가 깊이 생각해 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른 뒤, 진나라 장수 번오기가 진나라 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을 오자 태자는 그를 받아 주었다. 그러자 국무가 이렇게 간언하였다. 641
'안 됩니다. 저 포악한 진나라 왕이 연나라에 원한을 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두려운데, 하물며 번 장군이 연나라에 있다는 소문으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 놓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반드시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관중과 안영이 살아 있다고 해도 그 대책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태자께서는 하루빨리 번 장군을 흉노 당으로 보내어 진나라가 트집잡을 일을 없애십시오. 서쪽으로 삼진과 맹약을 맺고 남쪽으로는 제나라, 초나라와 연합하며 북쪽으로 흉노의 선우와 화친을 맺으십시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진나라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자는 이렇게 말했다. 
'태부의 계책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내 마음은 근심으로 어지러워 잠시도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번 장군은 이 세상에 몸 둘 곳이 없어 내게 그 몸을 의탁했는데, 설령 강하고 포악한 진나라의 협박을 받을지언정 가여운 친구를 저버리고 그를 흉농게ㅔ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내 운명이 다했을 때나 가능합니다. 태부께서는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국무가 말했다. 
'대체로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며넛 복을 구하려고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질 뿐입니다. 새로 사귄 친구 한 명과 사귐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서 나라의 커다란 피해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원한을 쌓고 재앙을 만드는 일입니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치기란 가벼운 기러기 깃털 하나를 화로의 숯불 위에 놓아 태우는 것처럼 아주 손쉽습니다. 그러니 독수리나 매처럼 탐욕스럽고 사나운 진나라가 원망에 가득 차서 포악스럽게 노여워한다면 그 맹렬함ㅇ르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연나라에 전광 선생이라는 분이 계신데 지혜가 깊고 용감하며 침착하니 더불어 성의할 만합니다.'
그러자 태자가 말했다. 
'태부의 소재로 전광 선생과 사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습니까?'
국무가 대답했다.
'삼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국무는 곧장 나가서 전광 선생을 만나 보고 말했다
'태자께서 선생을 뵙고 나랏일을 의논하고 싶어합니다'
전광이 대답했다. 
'삼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643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자기 위치에 달려 있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가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으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그러고는 순경에로 가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기술을 배웠다. 그는 공부를 끝마치자 초나라 왕은 섬길 만한 인물이 못되고, 여섯 나라는 모두 약속하여 섬겨서 공으 ㄹ세울 만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는 순경에게 이렇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저는 때를 얻으면 꾸물대지 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만승의 제후들이 바야흐로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는 때여서 유세가들이 정치를 도맡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키고 제라고 일컬으며 다스리려 합니다. 이는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661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것은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 하여 억지로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낮은 자리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며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닐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쪽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려고 합니다.'

이사가 진나라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양왕이 죽었으므로 곧 진나라 승상 문신후 여불위를 찾아가 그의 사인이 되었다. 여불위는 이사를 현명한 인물로 생각하여 왕의 시위관으로 임명했다. 이사는 진나라 왕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어 이렇게 설득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만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밀고 나갑니다. 옛날에 진나라 목공이 우두머리가 되고서도 동쪽에 있는 여섯 나라를 끝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제후 수가 너무 많은 데다 주나라 왕실의 은덕이 여전히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패가 차례로 일어나 번갈아 가며 주나라 왕실을 더욱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나라 효공 이래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져서 제후들이 힘을 합쳐 관동은 여섯 나라로 줄어들었습니다. 진나라가 상승세를 타고 제후들을 눌러 온 지 벌써 여섯 대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여 마치 진나라의 군이나 현 같습니다. 무릇 진나라의 강대함에 대왕의 현명함이라면 취사부가 솥단지 위에 앉은 먼지훔치듯 손쉽게 제후를 멸망시키고, 황제로서 대업을 이루어 천하를 통일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만년에 한 번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게으름을 피우고 서둘러 이루지 않으면 재ㅔ후들이 다시 강대해져서 서로 모여 합종하기로 약속할테고, 그렇게 되면 황제같은 현명한 왕이 있을지라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와 왕은 이사를 장사(궁궐의 모든 일에 총괄하는 관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그의 계책을 듣고 은밀히 모사들에게 황금과 주옥을 가지고 가서 제후들에게 유세하도록 하였다. 제후국의 명망 있는 사람들중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결탁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또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시키는 계략을 쓰면서 진나라 왕은 훌륭한 장수를 보내고 그 뒤를 수행하게 하였다. 진나라 왕은 이사를 객경으로 삼았다. 663

제 몸조차 이롭게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다스리랴.
법령에 따라 죽이고 벌하는 일이 날로 더욱더 가혹해지마 여러 신하가 스스로 위험을 느껴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또 황제를 위하여 아방궁을 짓고 곧게 뻗은 큰 길과 넓은 길을 만드느라 세금이 더 무거워지고 변방 부역에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초나라 수비병 진승과 오광등이 반란을 일으켜 산동에서 일어나니 호걸과 날랜 사람들이 다 일어나 스스로 제후가 되고 왕이 되어 배반했다. 그 반란군은 홍문까지 진격했다가 물러날 정도로 거셋다. 

이사는 여러 번 2세 황제가 한가한 틈을 타 간언하려 했지만 2세 황제는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이사를 문책하며 말했다. 681

충신은 대신들과 다투지 않는다. 
몽염은 그 조상이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할아버지 몽오는 제나라에서 진나라로 와 소왕을 섬겼으며, 벼슬이 상경에 이르렀다. 진나라 장양왕 원년에 몽오는 진나라 장수가 되어 한나라를 쳐서 성고와 형양을 빼앗고 삼천군을 두었다. 2년에는 몽오가 조나라를 쳐서 성읍 서른일곱 개를 빼앗았다. 시황제 3년에 몽오는 한나라를 쳐서 성읍 열세 개를 빼앗고, 5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성읍 스무개를 빼앗아 동군을 두었다. 몽오는 시황제 7년에 죽었다. 몽오의 아들은 몽무이고, 몽무의 아들이 몽염이다. 

몽염은 한때 형벌과 법률을 배워 소송 문건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시황제 23년에 몽무는 진나라 부장군이 되어 왕전과 함께 초나라를 쳣 크게 깨뜨리고 초나라 장수 향연을 죽였다. 24년에는 몽무가 초나라를 쳐서 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몽염의 아우는 의이다. 

시황제 26년에 몽염은 가문 대대로 장군을 지낸 관계로 진나라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쳐서 크게 깨뜨려 내사(수도 함양을 다스리던 행정 장관)가 되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에게 명하여 군사 30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융적을 쫓아 버리고 하남을 차지하여 장성을 쌓도록 했다. 그는 장성을 쌓으면서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는데 임조에서 요동까지 1만여 리나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몽염은 황하를 건너 양산 산맥을 차지하고 꾸불꾸불 북쪽으로 올라갔다. 공사를 위해 십 년 동안 군대를 국경 밖에 내놓았고, 그는 상군을 근거지로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몽염의 위세는 흉노 땅까지 떨쳣다. 시황제는 몽씨 일족을 매우 존중하고 남다르게 아끼며 신임하고 현명하다고 여겼다.그리고 몽의를 가까이하여 그 지위가 상경에 이르게 하고,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를 함께 타고 궁궐로 들어와서는 늘 곁에 두었다. 몽염에게는 궁궐 밖의 일을 맡기고 몽의는 언제나 궁궐 안에서 정책 수립에 참여하여 둘 다 충신이라는 평을 받으니, 여러 장수와 대신들도 감히 그들과 다투려하지 않았다. 704 

목이 달아나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장이는 대량 사람으로 젊을 때 위나라 공자 무기의 빈객이 된 적이 있다. 장이는 일찍이 죄를 짓고 달아나 외황이라는 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외황의 한 부잣집에 아주 아리따운 딸이 있는데,  그녀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도망쳐 나와 아버지의 빈객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객은 전부터 장이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 부잣집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어진 남편을 구하고 싶거든 장이를 따라가거라'
여자는 이 말을 따라 마침내 그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장이에게로 시집갔다. 장이는 이때 혐의가 풀려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여자의 집에서 장이를 후하게 받들었으므로 천 리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불러 사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나라에서 벼슬하여 외황의 현령이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어질다는 이름이 더욱 높아졋다. 

진여도 대량 사람으로 유가의 학문을 좋아하여 조나라의 고형이라는 곳에 자주 다녔다. 고형의 부자인 공승씨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진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여는 나이가 젊으므로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두 사람은 서로 목이 달아나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만큼 깊이 교분을 맺었다. 

진나라가 대량을 멸망시켰을 대 장이의 집은 외황에 있었다. 일찍이 고조가 평민일 때 장이를 따라 더돌아다니기도 하고, 몇 달동안 그의 빈객으로도 있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지 여러 해 지났을 때 장이와 진여가 위나라의 이름 있는 선비라는 소문을 듣고 장이에게는 1000금, 진여에게는 500금의 현상금을 걸어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장이와 진여는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함께 진으로 가서 어느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끼니를 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문을 지키고 있는데 마을의 관리가 진여에게 잘못이 있다고 매질을 하였다. 진여가 발끈하여 대들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을 밟아 그대로 매를 맞게 했다. 관리가 떠나자, 장이는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 이렇게 꾸짖었다. 
'처음에 나와 그대가 약속한 것이 무엇이오? 지금 하찮은 치욕때문에 일개 마을 관리의 손에 죽으려고 하시오?'
진여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진나라는 조서를 내려 돈을 걸고 이 두사람을 찾았는데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 신분으로 마을안에 조서를 전하였다. 716

이익 앞에서는 친구도 원수가 된다. 
장한은 군대를 이끌고 한단에 이르러 그곳 백성을 모두 하내로 옮기고 성곽을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장이는 조나라 왕 헐과 함께 달아나 거록성으로 들어갔지만 왕리에게 포위되었다. 진여는 북쪽 상산의 병력을 모아 수만 명을 얻어 거록성 북쪽에 진을 쳤다. 장한은 거록성의 남쪽 극원에 진을 치고 강까지 양쪽으로 흙을 쌓아 길을 만들어 왕리에게 군량미를 보내 주었다. 왕리의 군대는 군량미가 넉넉해지자 급히 거록성을 쳤다. 거록성 안에서는 군량미가 거의 바닥나고 병력도 적었다. 장이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진여에게 앞으로 나오기를 요구하였으나, 진여는 병력이 적어서 진나라 군대에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자 장이는 몹시 노하여 진여를 원망하게 되었고, 장염과 진택을 진여에게 보내어 꾸짖었다. 

'처음에 나는 그대와 목이 달아나도 변치 않을 깊은  교부늘 맺었소. 지금 나는 왕과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죽을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대는 수만 명의 병사를 가지고도 우리를 도우려 하지 않소. 서로를 위하여 목수믈 버리자던 의리는 어찌 되었소! 진실로 그대에게 신의가 있다면 어찌 진나라 군대로 달려들어 함께 죽으려 하지 않소? 그렇게 하면 열명에 한두 명은 살아남을 것이오'728

인생은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처럼 짧다. 
위표는 본래 위나라의 여러 공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형 위구는 옛날 위나라 시절에 영릉군으로 봉해졋다. 그러나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위구를 서인으로 떠렁뜨렸다. 진승이 일어나 왕이 되자 위구는 그를 찾아가 섬겼다. 진나라 왕은 위나라 사람 주불에게 위나라 땅을 빼앗도록 하였다. 그러나 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자, 위나라 사람들은 서로 주불을 위나라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불은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어지러우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지금 천하가 함께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있으니 도의상 반드시 위나라 왕의 후예를 왕으로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제나라와 조나라가 각기 수레를 쉰 대 보내서 주불을 위나라 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주불은 받지 않고 진나라에서 위구를 맞이해오려고 했다. 사자가 다섯 차례나 오간 뒤에야 비로소 진나라 왕이 위구를 보내 겨우 위나라 왕으로 삼을 수 있었다. 743

항적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신안에 이르자, 다시 영포 등을 시켜 한밤중에 진나라 군대를 습격하도록 하여 장한이 이끄는 이십여 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항적은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또 영포 등을 시켜서 먼저 사잇길로 쳐들어가 함곡관 부근의 진나라 군대를 깨뜨리고 들어가게 하여 진나라 수도 함양에 이르렀다. 영포는 언제나 군의 선본이었다. 항왕은 장수들을 봉할 때 영포를 구강왕으로 삼고 육에 도읍을 정하도록 했다. 

한나라 원년 4월에 제후들은 항우의 휘하를 떠나 각각 자기 나라로 갔다. 항왕은 회왕을 세워서 의제라 하고 도읍을 장사로 옮기도록 하면서 남몰래 구강왕 영포 등에게 의제를 습격하게 했다. 그해 8월에 영포가 자기 장수를 시켜서 의제를 습격하여 침현까지 쫓아가 죽였다. 

한나라 2년에 제나라 왕 전영이 초나라를 배반하자, 항왕은 제나라를 치러 가면서 구강에서 군사를 징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강왕 영포가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고 장수를 시켜 수천 명을 이끌고 가도록 했다. 한나라 군대가 초나라 군대를 팽성에서 깨뜨렸을 때도 영포는 병을 핑계로 초나라를 돕지 않았다. 항왕은 이러한 일로 해서 영포를 원망하여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서 꾸짖고 불러들이려 했다. 그렇지만 영포는 더욱더 두려워 감히 가려고 하지 않았다. 757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간다. 
회음후 한신은 회음 사람이다. 처음 평민일 때에는 가난한 데다 방종하였으므로 추천을 받아 관리도 될 수 없고, 또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어 늘 남을 따라다니며 먹고 살아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싫어하였다. 일찍이 회음의 속현이 하향의 남창 정장의 집에서 여러 번 얻어먹은 일이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정장의 아내는 한신을 귀찮게 여겨,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속에서 먹어 치우고는 식사 시간에 맞춰 한신이 가도 밥을 차려 주지 않았다. 한신도 그 뜻을 알고는 화가 나서 끝내 절교하고 발길을 끊었다.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가운데 한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알고 밥을 주었는데 빨래를 다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을 그렇게 했다. 한신이 기뻐하며 아낙에게 말했다. 
'내 언젠가는 이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겠소'
그랬더니 아낙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하기에 내가 젊은이를 가엾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775

지금 당신께서는 한나라 왕과 두텁게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고 한나라 왕을 위하여 힘을 다해 군대를 지휘하고 있지만 결국 그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항왕이 아직 살아 있는 덕택입니다. 지금 한나라 왕과 항왕 두 사람의 싸움에서 승리의 저울추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오른쪽으로 추를 던지면 한나라 왕이 이기고 왼쪽으로 추를 던지면 항왕이 이길 것입니다. 오늘 항왕이 멸망하면 다음번에는 당신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당신은 항왕과 연고가 있는데 어째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손잡아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되지 않습니까? 지금 이 기회를 버리고 스스로 한나라를 믿고 초나라를 치다니, 이것이 어찌 지혜로운 자가 할 일이란 말입니까? 797

아녀자에게 속은 것도 운명이다. 
한신은 한나라 왕이 자기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언제나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도 않고 수행하지도 않았다. 한신은 이로부터 날마다 고조를 원망하며 불만을 품고 강후 주발이나 관영등과 동급의 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한번은 한신이 장군 번쾌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번쾌가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마중하고 배웅하였고, 또 한신 앞에서 자신을 신이라고 일컬으면서 말했다. 
'왕께서 신의 집까지 왕림해 주셧군요'
한신은 문ㄴ을 나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살아 생전에 번쾌 등과 같은 반열이 되었다니....;
고조는 일찍이 한신과 함께 여러 장수의 능력을 마음 놓고 말하면서 각각 등급을 매긴 일이 있었다. 고조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겠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그저 10만 명을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807

빈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변란의 조짐이다. 
진희는 완구 사람인데 그가 처음에 왜 고조를 따라다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조 7년 겨울에 한나라 왕 한신이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갔을 때 고조는 평성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진희를 봉하여 열후로 삼고, 그를 조나라 상국으로서 장수로 삼아 조나라와 대나라의 변방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그래서 변방의 군사는 모두 진희에게 속하였다. 

진희가 한번은 휴가를 얻어 돌아오는 길에 조나라에 들른 적이 있다. 이때 조나라 재상 주창은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의 수레가 1000여 승이나 되어 한단의 관사가 꽉 차는 것을 보았다. 빈객들을 대한느 태도는 포의의 사귐과 같아 자기 몸을 낮추어 빈객들을 존경하였다. 진희가 대로 돌아가자 주창은 곧 고조께 들어가 뵙기를 청하였다. 주창은 황상을 뵙자 이것을 자세하게 말했다. 
'진희의 빈객은 지나칠 만큼 많습니다. 밖에서 여러 해 동안 군대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니 무슨 변란이라도 있을까 두렵습니다'828

항량은 장한을 뒤쫓았지만 장한의 군대가 더욱더 강성해졌으므로, 조나라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출동시켜 다 함께 장한을 치자고 하였다. 이에 전영이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이면 지금 바로 군대를 출동시키겠소'
초나라 회왕이 말했다. 
'전가는 동맹국의 왕으로서 곤궁한 처지가 되어 우리에게 왔으니 그를 죽이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오'
조나라도 전각과 전간을 죽이면서까지 제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제나라 사신이 이렇게 말했다. 
'독사에게 손을 물리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리면 발을 자릅니다.왜 그렇겠습니까? 자르지 않으면 몸뚱이마저 해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가, 전각, 전간은 초나라와 조나라에게 손이나 발 같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죽이지 않습니까? 또 진나라가 다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면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자들은 당연히 죽일 테고, 게다가 그 무덤까지 파헤칠 것입니다.'

그러나 초나라와 조나라가 사자의 말을 듲지 않자, 제나라도 화가 나서 끝내 군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장한은 항량의 군대를 쳐서 항량을 죽이고 초나라 병사를 깨뜨렸다. 조나라 병사가 동쪽으로 달아나자 장한은 황하를 건너 거록에서 조나라를 에워쌌다. 항우가 급히 달려와 조나라를 구해 주었으나, 항우는 이일로 전영을 원망하게 되었다.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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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2010.05.03 08:21:44 *.219.109.113
'강제성이 없으면, 공부 못해'

'자율학습은 말그대로, 자율이 아니던가요'라는 나의 말에, 출석부를 날리며,고교담임은 말하다. 

ㅎㅎㅎ 이거 읽으며 웃음이 터져 킬킬댔어. 어쩌면 이 글에서 니 냄새가 진하게 날까?

정말 인건이 매력은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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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5.05 20:44:00 *.160.33.180

인용한 대목들을 다 외웠느냐 ?   언제 어디서나 꺼내 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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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김인건
2010.05.06 01:53:02 *.129.207.200
타이핑한 부분을 출력해서,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연구원 도서의 인용과제는, '글쓰기 힘을 기른다'는 생각으로 합니다. 저의 경우, 글을 만드는 것은, 글쓰는 행동과 습관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긴 글을 따라써보면 저도 긴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인용은 주로, 신문과 잡지를 참고합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주제에 다가가는 방법으로 글을 씁니다. 

분량이 많지만,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읽고 또 읽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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