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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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기 글, 양진 사진, 원작 : 일연)
* 저자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지은이는 당연히 일연 스님이다. 학창시절부터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대비되어 수없는 암기를 거친 불변의 사실이다. 그런데 연구원 필독서로 읽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라는 긴 제목의 이 책은 명확하게 ‘고운기 글, 양진 사진’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부분이 좀 혼란스러웠다. 바로 전에 읽은 <사기열전>만해도 저자는 ‘사마천’으로 되어있었고 김원중 교수가 옮긴이로서 해제를 달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의아심은 책을 읽으면서 점차 사라져갔고 이제는 확실히 고운기 교수가 고전을 현대의 우리에게 재해석하여 전해준 새로운 저자임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삼국사기는 통조림, 삼국유사는 밭에서 방금 캐낸 야채로 비유했다. 삼국유사가 씌여진 시대, 즉 고려의 잣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삼국시대의 문화와 사회 그리고 현장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과 없이 담고자 노력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을 쓴 고운기 교수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700년 전에 씌여진 역사책 한 권을 연구하고 있는 삼국유사 전문가로서, 이러한 삼국유사의 생생한 느낌을 현대의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즉, 삼국유사가 일연의 현지답사로 인해 쓰여졌던 것처럼 이 책도 저자의 현지답사를 통해 발로 뛰며 기록한 고운기 교수의 삼국유사인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한국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계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는 질문을 더 자주 던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린 이런 사람이다’라고 얘기해줘야 하는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 삼국유사만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라는 저자 고윤기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스스로를 알기 위해 우리의 역사와 신화를 돌아보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이다.
1961년 전남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와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0년대 초에 산 원본의 영인본 <삼국유사> 제일 앞 장에 “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썼다고 한 것처럼 그동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계속 연구해 왔으며, 책 또한 여러 권 내놓았다.
삼국유사 원전을 우리말로 쉽게 옮긴 <삼국유사>와 스스로 삼국유사 3부작이라고 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002년), 비문으로만 남아있는 저자 일연의 일대기를 복원한 평전 <일연을 묻는다>(2006년),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의 현장을 밟아가며 쓴 기행문인 <길 위의 삼국유사>(2006년) 외에도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2001년)가 있으며, 최근에 나온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2009년)은 일본에서 한일 문학 비교연구를 하는 동안 일본과 한국에 <삼국유사>가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책이다.
옮긴 책으로 <논어>,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 <그늘에 대하여>등이 있으며,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으로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1987년), <섬강 그늘>(1995년),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2001년),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2008년) 등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
- 고운기 -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가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 원작자 일연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 1206 ∼ 1289) 스님은 1206년 경주의 속현인 章山郡(현재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에 절로 공부를 하러 들어갔다가 열네 살에 정식으로 불문에 입문한다. 아버지 김언칠은 지방 향리층이었던 것 같다. 22세에 승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대선사(1259), 국존(1268)의 지위에 올랐으나 말년에는 서울에서의 영화로운 자리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모를 봉양했다고 한다.
일연은 일생의 대부분을 무인정권의 혼란과 몽골과의 전쟁 속에 보냈다.
최씨정권이 몽고와의 결사항전을 하는 동안 일반 민중은 직접적인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고, 최씨정권이 붕괴되고 강화도 정부가 몽고에 항복하여 몽고와 화해분위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원이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에 가중한 부담을 지워 전쟁 때 못지않게 사회가 극도로 피폐한 시기였다.
원에 항복한 이후 원종의 초청으로 불교계의 통솔을 위해 노력했던 일연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인식하여 현실적인 구원사상을 표방하였는데, 이는 실천적, 현세적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와 고통을 받았던 일반 민중들로 하여금 구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한 신앙적 노력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민족의 침략과 원나라의 사실적 지배하에 있는 현실은 민족적 위기감을 가지게 했고 이러한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삼국유사> 저술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단군신화를 <삼국유사>에 처음 수록한 것도 오랜 몽고의 지배로 인하여 점차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지배층과 일반 민중에게 고유한 정신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근본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화랑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곳곳에 실려 있는 것 또한, 물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도 했지만, 몽고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화랑도 정신을 일깨워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며
<삼국유사>를 이해해 들어가는 중요한 단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의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3]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 (중국어가 아니다) 표기 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는 점도 이와 길항하는 관계였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로 인해 더 이상 최소한 지식인에게 한문은 낮선 문자가 아니었다.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 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년 (1145년)의 일이다.
그리고 100여년이 넘게 흘렀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로 요약된다.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화에 압도당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념의 틀은 우리에게서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3-5]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10세기부터의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그 쓰디쓴 경험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꾼 것일까? 그렇다면 값비싼 희생을 치렀지만 귀중한 결과물을 얻은 셈이다. 승려 출신의 일연 같은 이가 <삼국사기>와는 다른 책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다만 거기에도 무한정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세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12-14]
단군신화는 건국 신화다. [21]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21]
빙하기가 끝나고 지금 세상에 들어 이 땅에도 처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부락을 만들고, 부락들이 만나 연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가다 보니, 그 사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2]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중국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23]
우리가 <삼국유사>의 첫 부분을 대할 때 유의할 점이 여기에 있다. 일연이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는 것이다. [34]
고구려와 북방계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43]
<삼국사기>에서 인용하는 두 가지 삽화다. 앞선 삽화가 주몽의 뛰어난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뒤는 하늘의 도움까지 함께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완벽히 갖춰진 조건이다.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44-45]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의 구성원이 전부 북방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원주민이 있었고, 여러 역사서에 그 이름이 나타나듯이, 그들의 나라 곧 변한 등은 사실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부족 간의 이동은 끊이지 않았고, 좀 더 우세한 세력과 기술을 가진 쪽으로 힘의 균형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름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52]
신라와 남방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앞서 환웅과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가 직접 왕이 된다든지 왕이 될 아들을 낳는 것으로 북방계 민족과 나라의 출발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데 있지 않을까? [56-57]
대체적으로 남쪽 지방의 산신 신앙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고 할진대, 신라 왕조의 출발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신화와 사촌 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
신라 불교가 토착적인 신앙과 만나는 장면은 앞으로 자주 소개되겠지만, 그것이 곧 왕실과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호국불교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볼 만하다. [68]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탈해의 인간됨됨이를 알 수 있는 사건은 바로 다음에 이어 나온다.
...
정말 간사스런 꽤다. 실제 자기 것을 꾀를 내어 다시 찾았다면 지혜스럽다 하겠으나, 남의 것을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니, 이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탈해의 인간성을 그다지 탐탁하게 볼 수 없다.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좋은 말을 차지하려 썼던 꾀보다도 더 심하다.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78]
어쨌든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를 영위해 나가는 시기가 이 한반도에도 도래한 셈이다. [78]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 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1]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왜도 고대 왕권 국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고 비록 지금의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지역에 한정하지만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116]
밤에 찾아오는 손님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돈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20]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20-121]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37]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140]
미리 조금 말하자면, 신라의 불교는 공인 이후에도 순조롭게 자리잡아 가지 못한다. 한 사상, 더욱이 종교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절대 시간을 계산하기 어렵지만, 민간에 퍼져 있는 초보적 종교 형태의 전통과 힘이 강했던 것이 신라이기에, 다른 두 나라에 비한다면 어려움은 이중으로 겹쳐 있었다. [141]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4]
이 왕 때 진자가 미륵상 앞에서 ‘부처님을 화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진자가 찾아가는 부처님이 구체적으로는 미륵선화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억 7,000만 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 이른바 후세불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 바로 지금 내려와 달라고 비는 하생신앙은 중국으로부터 무르익어, 이 때 이미 백제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걸출한 불상이 만들어질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147]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ㅇ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150]
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153]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그러나 왕위는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선덕여왕이 15년 진덕여왕이 7년을 하는 동안 춘추는 기다려야 했다. 더욱이 이미 성골의 혈통을 깬 다음이므로 춘추에게는 다른 명분이 필요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진골이다. 그 때까지는 두 집안이 모두 왕족이어야만 왕이 되는 신라 왕실에서, 이제 한 쪽만이어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 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2]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다시 말하거니와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183-184]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문무왕의 이같이 거룩한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 핀다.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다. 두 이름을 합쳐보면 법정 민명,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값을 하고 있다. [185-186]
사천왕사가 당나라 군대를 쳐부술 무슨 힘이 있으리라 믿지 못한 김부식은 피리 한 자루가 나라를 지킬 보배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 그는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삼국사기> [잡지]의 ‘삼죽’조에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는 하나.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187]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189]
권력의 끝
얼마 전, 우리나라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 이미 사마천의 시대부터 변함없는, 비정의 극치를 달리는 원칙이다. 권불십년이라, 거기서 예외가 될 사람 또한 없다. 최소한 그 권력을 좋아하고, 함께 쫓아다닌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사냥개 신세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196]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205]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은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 할 뿐이다. [212-213]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그런 왕의 시대에 멋진 여자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수로부인이다.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223]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 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첫 성전환증 환자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서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은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사실 이 시는 여덟째 줄까지 평범한 인간이 토로할 슬픔을 절제된 감정 속에서 마음껏 뱉어 놓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울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라면 승려의 신분으로 주책맞을 일, 아홉 번째 줄에서 감탄사를 길게 뺀 다음 흩어진 감정을 추스린다. 이는 향가라는 시의 형식이 가진 특장이기도 하다.
다시 만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241-242]
왕이 되는 자
서양에서도 전해오는 동화 한편과 너무나 닮았다. 이렇게 닮은 이야기가 <삼국유사> 속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워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양의 동화에서 이발사가 여기서는 두건 만드는 기술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대나무를 베어버린 다음의 이야기도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똑같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의 동화를 들으면서 컸다. 거기에 따르는 구구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 여기서 거들 일은 아니고, 설화가 지닌 우연한 일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어서, 다만 우리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에서 더 넓은데 어찌 그다지 철저히 외면당했는가 그 아쉬움만 표명해 두기로 하자. 그것은 무엇인가? 경문왕은 겉ㅇ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6-267]
나라가 망하는 징조
달도 차면 기운다.
한 집안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이, 나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절대적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지언정, 한번 일어나면 한번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대체로 흥망성쇠를 유전하기 마련이다. 과학적 증명이나 운수소관을 따지기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269]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간다. [272]
지는 해 뜨는 해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89]
결과만 놓고 본다면야 경순왕의 결정이 옳았다. 김부식도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마지막 사론에서 “만약 죽을 힘을 다해 싸워 태조의 군사에 저항하다가 힘이 부치고 세력이 다했다면, 왕족이 몰살당하고 피해는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고 결론 내린다.
나 또한 앞서 비슷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세 그렇게 표현하는백성의 힘이다.
그러나 정녕 아쉬움은 있다.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 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물론 그런 느낌일 뿐이다. [302]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라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
여러 역사학자들이 마치 사금을 모으듯, 고구려와 백제의 잃어버린 역사를 여기저기 역사서에서 그러모아 짜깁기를 해놓고 있지만, 그것이 시원스레 당시를 재현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정녕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졌다면, 고구려에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07]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325]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326]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327]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첫머리다.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그 때문에 받는 고난 등의 배치가 그렇다. [328]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 서동은 이웃 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330]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332]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부처님 당시에 생존했던 미륵보살은 부처님에 의해 미래불로 지정 받았다. ...
미래불로 오시는 미륵보살의 세상이 이렇기에 시대가 혼란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신앙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남북조시대의 혼란한 시기에 먼저 생겼고, 후백제의 견훤이 자신을 ‘미륵의 하생’이라 선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342-343]
견훤, 비운의 영웅
그것은 마치 초 항우와 한 유방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358]
신비의 왕조, 가야
노래에서는 맞이하려는 대상을 거북이로 상정하고 있다. 이 거북이는 용으로도 바꿔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2]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그 탑의 의미가 여러 가지나.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을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378]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 탑과 절을 만든 경위, 고승들의 전기 등이 누벼지는데, 일연 자신이 승려 출신이기에 그랬을까, 전반부에 비할 때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385]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불교역사주의’ [386]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잠시 뒤에 소개할 신라와 비교한다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어떤 이유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라고 해서 민간 신앙이 없었을 리 없고, 4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나름대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중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389]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394]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399]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이미 몸을 버리기로 한 순교자의 절개는 눈물겹거니와, 이를 말리는 왕의 애정 또한 깊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겠고 매도 굶길 수 없음으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정녕 법흥왕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406]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417]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424]
고구려에 처음 온 전진의 승려 순도 또한 불상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불상은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다음 그에 따라 중국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장륙존상은 인도에서 직수입된 모델을 가지고 만들었다.
순도의 불상도 장륙존상도 모두 없어져 버린 지금,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세계 불교 문화의 두 중심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430]
이에 올라 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
라고 노래한다.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34-435]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오대산이 왜 문수 신앙의 근거지인가. 좀더 나아가 문수 신앙이 무엇인가를 조금만 더 거론하고 넘어가자.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저 유명한 <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로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수보살은 그가 죽은 다음 동북방의 나라에 봉우리가 다섯 개인 산, 청량산이라 부르는 거기에 머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문수 신앙은 불교의 본토인 인도에서도 발견되지만, 4세기 이후 곧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중국의 불교에서 본격적으로 번성하게 되는 바, 중국인들은 문수보살이 예언한 산이 바로 산서성의 오대산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
우리나라의 오대산은 바로 이 같은 배경을 가진 오대산이 그대로 넘어온 것이다. 그러나 일연의 기록이 늘 그렇듯이, 그것이 단순한 수입만이 아님을 여기서도 힘차게 주장한다. [440-441]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44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454]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가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455]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57-458]
개인사의 그늘에 놓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삼국유사>는 때로 일연의 생애와 견주었을 때 보다 맑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69]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2000년 가을, 중동의 예루살렘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다시 벌어졌었다. 그 현장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머물렀던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에 두려워 떨고 있는 한 소년과 소년을 지키려고 온몸으로 막고 있는 아버지, 그러나 사격을 중지해 달라는 아버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배에 총을 맞고 아버지의 품에서 숨져가는 소년을 보았을 것이다.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굴정현 꿩 모자가 마치 소년 부자의 이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 꿩 식구들을 살린 조상을 가진 후손으로 우리는 그나마 착한 사람들일까. [471]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기름진 밭에 풍년이 들어 무척 남는다 해도, 옷과 밥이 생각하는 대로 이르러 저절로 배부르고 따스함만 같지 못할 것이요,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한,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도를 이루려면 이만한 결단력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저절로 시켜서 된 것이지 억지가 끼여들 수 없다. [475]
“이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478-479]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쫓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로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끓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현신인지도 모른다. [481]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481]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485]
낙산사의 힘
비밀의 열쇠는 다름 아닌 담에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낙산사의 경내라고 할 사천왕문부터 금당까지는 담이 둘러쳐 있다. 특이한 공법으로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담은,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금당 뒷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을 정도다. 다른 큰 절에 비해 그다지 넓지 않은 경내가 이 담으로 인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가 싶다.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ㅇ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488]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을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이런 만남은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다. [496-497]
아홉 살에 어머니를 떠나 구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 일연에게는 귀 하나가 없는 사미승의 이야기가 그렇게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한 귀가 잘린 채 먼 이역에서 고국의 스님을 만나 고향에 돌아가거든 자기 어머니를 찾아가 달라고 말하는 소년은 정취보살이기에 앞서 일연 자신인지 모른다. 어머니를 떠나 머나 먼 강원도 산골에 와 있는 소년 일연의 마음이 그랬을 터이니 말이다. ‘아, 어머니. 저 먼 나라를 아십니까?’ [503-504]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508]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우리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승려가 단 한 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삼국시대를 특히 신라 중심으로 기술한다고 했을때, 몇몇 승려들의 역할과 업적은 불교의 그것을 떠나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아쉬움을 크다.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513]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풀 같았다. 헛되이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실로 생애의 두려움으로 다가와 ” 드디어 출가한다. [515]
세속오계는 다분히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오륜과 닮아있다. 원광이 승려이기에 앞서 유학을 공부했던 사람임을 감안한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세속오계가 그저 오륜을 베낀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일상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범위의 불교의 계율이 잘 스며들어 있다. 처음에 귀산과 추항이라는 사람이 원광을 찾아왔을 때 원광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남의 신하가 된 몸’이란 곧 현실 정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지임을 가리킨다. 그들이 승려와 똑같은 계를 지니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어렵다는 점을 원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속 깊은 배려다. [521-522]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어느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530]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531-533]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다.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537]
의상, 화엄의 마루
(원효왈) “...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551]
그러나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송고승전>의 마지막 대목은 적고 있다. 의상은 그런 사람이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552]
“솥 안의 국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하다” [567]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태도가 함의된다. [568]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화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그렇지만 거기라고 사람 사는 세상인 바에야 왜 호사를 바라지 않고 다툼이 없겠는가 의문스러워 해본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569-570]
나는 거기서 참으로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모진 것과 다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욕심에 벼려져서 모질다면 그들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몸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생존하려는 데서 생긴 모짐이다. 인류가 가장 인류다운 모습, 아마도 문명 이전에 인류는 저렇게 살았을 것 같은 모습을 그들은 지금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진실로 두려워 할 줄 알고, 진실로 견뎌 낼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성스러워 보였다. [571]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지장은 대지의 태, 곧 땅 속에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땅이 지닌 덕을 의인화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과 함께, 주은 이들의 구제자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에게 빌어야 한다. 지금도 절에 가면 명부전이라는 불당이 있는데 거기서 바로 이 지장보살을 주불로 삼는다. [586-587]
‘삼베를 붙들고 황금을 버린다’는 말은 <중아함경>에 나오는 비유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길가에 삼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캐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은이 널려 있었다. 한 사람은 삼베를 버리고 은으로 바꾸어 들었다. 또 가다 보니 금이 널려 있자. 은을 들고 있던 사람은 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의 삼베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들고 돌아왔다. 좋은 것을 보고도 취하지 않는 바보스런 사람을 비유한 이야기다. [590]
일연이 그랬던 것처럼 진표에게도 불심과 효심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으리라. [596]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서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603]
현교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있는 불교랄까,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 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605]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불쌍한 어린 아이에게 베푼 덕이 곧 내게 해준 일이라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에게 말한다. 아마도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위로하자는 차원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623]
미륵 신앙과 대칭되는 점에 서 있는 미타 신앙의 정토왕생 신앙은, 현세에 복락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내세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소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실 정토 신앙은 번성기에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
그러니까 미타 신앙에도 미륵 신앙에도 여러 부면이 있거니와, 그 가운데 뚜렷이 보이는 특징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전자가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에, 후자가 혼란한 시기의 고통받는 층에 왕성히 퍼져나간다는 정도로 이해해 두자. [625]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절이 산에 만들어진 것은 이 나라 불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특히 조선왕조 이후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의 절들은 자꾸 없어지고 산에만 남게 되어, 이제는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신령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637]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민간 신앙의 큰 줄기인 산신 신앙을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절 안에도 산신을 모신 산신각이 생기게 된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산신각에는 산신뿐만 아니라 칠성신, 용왕신 등을 같이 모시기도 한다. [641]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진신은 달빛처럼 이 땅에 찾아왔었다. 그러나 정토에의 참된 희구는 없고, 형식과 의례에만 치우친 무리들뿐이니, 그들은 밝은 달빛을 가리우는 구름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663]
사실 고려는 기본적인 국가 체계를 유학의 이념에 두었다고 해야 한다. 불교의 권위는 여전했으되 신라만큼 그렇게 철저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사회의 종교는 오히려 더 타락하기 쉽다.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았다. [670]
피은(避隱)
숨어사는 이의 멋
‘피은’은 피세은거, 즉 세상은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671]
그 때까지의 불교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산지가람과 평지가람의 공존에서 산지가람 일변도로, 이것은 불교가 사회의 전면에 있느냐 배경으로 밀리느냐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671-672]
변재천녀는 불교에서 보이는 최고의 여신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여신이지만 불교에 들어와서 사람의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비파를 오른손으로 퉁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686]
결국 연희는 왕의 사신이 찾아오자 “제 업으로 받아야 할 줄 알고, 부르심대로 궁궐로 가서 국사에 임명되었다” [686]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일연의 나이는 79세였다. 어머니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아들을 보았다는데, 일연이 여덟 살 나던 해 산으로 공부하러 떠났으니, 어머니는 무려 스물다섯 살부터 돌아가시기까지 70여 년을 홀로 사신 분이다. 일연의 아버지는 이름만 나올 뿐이요, 다른 형제에 대해서 일체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어머니의 일생은 외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690]
대성이라는 아이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종살이로 팔려가는 신세였다. 성도 가지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다. 그런 그의 아픈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점개 스님의 축원이었다.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받는다는 축원은 시주 받은 승려가 해줄 답례일지 모르고, 지금 잘 살고 있는 주인집으로서야 그 부가 자손만대 이어지기를 바라는 정도이겠지만, 대성으로서는 그 이상 절박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695-696]
삼뇌는 소,양,돼지를 일컫는다. 칠정은 일곱 개의 솥에다 각각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이 둘을 합치면 그지없는 진수성찬이다. 그런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받은들, 아들이 수련에 들어 도에 이르는 것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신념과, 남의 집 문 앞에서 걸식을 해도 좋다는 각오, 그것이 진정을 진정이게 했다.
어쩌면 참된 효도가 무엇이겠냐는 일연의 질문을 담고 있는 진정의 이야기는, 여덟 살에 어머니 곁을 떠나, 그 어머니가 70년을 홀로 사시도록 이 세상에서는 외롭게만 해 드렸던 자신의 삶에 대한 답변이지 않았을까? [703]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표기 수단이 외연적 현상이라면 문제 안에 내포된 은밀한 논리가 있다.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으려 하였는가? 한문이라는 고급 언어 수단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란 무엇인가? 한문이 어렵다지만 배우면 그만이다.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 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제망매가>,<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706]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 신라시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화랑 밖에 없다. 다만 같은 화랑 출신이라 해도 관계에 나가 화려하게 출세한 이들은 여기서 제외되며, 현세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그들은 그 박탈감 속에서 오히려 현세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노래하는 것이다. [710]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712]
노동요는 일할 때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더욱이 함께 힘을 모아 부르다보면 박자에 맞추어 행동이 통일되니 힘이 덜 든다. 양지 스님은 그 같은 노래의 효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벌이는 사업은 곧 즐거운 잔치로 변한다. 거기에 양지는 당대 불교가 추구한 이념을 자연스레 녹아들게 하였다. 서방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714]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25]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728]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앞에서 요약한 13세기의 시대 상황을 다시 떠올리건대, 나라의 체모는 흐트러지고 백성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거니와, 그것은 한두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것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3]
신라 사회는 고대 삼국시대에서도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의 조화 아래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신라 문화의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39-741]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고, 모두 9개의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대기로서 [왕력(王歷)], 준역사서로서 [기이(紀異)],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편이다. <삼국유사>는 전통적인 서술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저자 일연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한 가지 명확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원문 그대로 해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으로 여러 가지 자료와 비교하면서 삼국유사의 내용은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저자의 의견이 들어간 새로운 저술이라는 것이다. 물론 군데군데 삼국유사의 내용(조)가 인용되지만 어디까지나 주체는 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너무나도 단순했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대한 간단한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자세한 내용을 앞뒤 배경과 함께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좀 더 원문에 집중한 내용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구성도 본문 중간 중간에 원문이 인용되는 형태가 아니라, 소제목 다음에 규칙적으로 인용되거나 했다면 좀 더 원문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것은 이 책 이전에 <사기열전>을 보고 그 형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삼국유사>의 총 140여 개의 조목을 보다 이해하기 좋게 40개의 제목으로 재분류하여 기술하고 있고 [왕력]은 다루지 않으며, [기이]편이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불교에 대한 부분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맨 마지막 부분에 ‘향가’와 ‘일연’에 대한 항목을 구성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향가와 일연에 대한 지은이의 별도의 항목을 읽어보면 평생 <삼국유사>에 천작해온 저자가 왜 <삼국유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느끼게 된다. 저자에게 <삼국유사>는 단순히 역사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과 주체성을 담고 있는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총체적인 민족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이다.
고전을 읽을 때, 서문에서 책을 쓴 (옮기거나 주해한) 관점을 명확히 서술해주고 책이 씌여진 시대상황과 목적 등과 후대의 끼친 영향들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면 아주 좋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은 책머리 ‘들어가며’에 <삼국유사>의 전체적인 구조와 함께 저자의 <삼국유사>에 대한 접근법, 즉 독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 각 편의 구조적 특징 및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시대적 흐름과 다른 역사서와의 비교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 등의 의미와 일본 등 주변 지역과 후대 한국사 연구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기 위한 좋은 안내를 해주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삼국유사의 현장을 몸소 찾아 역사의 흔적을 살핀 생동감 넘치는 답사기이자 시인으로서 저자의 강점을 잘 살린 서정 넘치는 책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자칫 어려울 수 있는 고전을 흥미진진한 기행문과 편안한 에세이처럼 쉽게 읽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십년 넘게 저자와 호흡을 맞추어 답사를 다니고 삼국유사의 현장을 찍어온 양진 작가의 사진이 더욱 이러한 풍취를 살려줌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고전의 깊이를 전하되 먼 옛날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이야기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한다는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효선]편의 이야기와 현대 대학생들의 감상평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효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 인도로 구법을 하러갔던 승려들의 이야기를 현대 우리들의 인도여행과 비교하여 ‘모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미를 대비한 것 등은 바로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더구나 저자가 밟고 다닌 그 현장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하여 생각하는 계기 또한 마련해 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조선시대 한 문인의 말처럼, 그리고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유행시킨 유홍준 교수의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을 읽고나니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고, 느끼고 싶고, 또 사랑하고픈 그런 꿈과 욕심을 준다.
저자는 고전의 현장에 가서 고전 속의 문구를 다시 떠올리는 자신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 대해 “고전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또한 꼭 직접 경험해 보리라 결심한다.
***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돈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120]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그 탑의 의미가 여러 가지나.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을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378]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531-533]
‘삼베를 붙들고 황금을 버린다’는 말은 <중아함경>에 나오는 비유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길가에 삼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캐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은이 널려 있었다. 한 사람은 삼베를 버리고 은으로 바꾸어 들었다. 또 가다 보니 금이 널려 있자. 은을 들고 있던 사람은 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의 삼베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들고 돌아왔다. 좋은 것을 보고도 취하지 않는 바보스런 사람을 비유한 이야기다. [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