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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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l 원전 저자
일연(一然, 1206년 ~ 1289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로, 보각국사(普覺國師)라고도 한다. 속성은 김씨, 속명은 견명(見明)이며, 처음의 자는 회연(晦然),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출생하여 9세에 출가하고 14세에 불문에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78세에 고려 불교계 최고의 자리인 국사로 책봉되었으나, 만년에 군위의 인각사에 내려가 노모를 봉양하며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일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구절로 '생계불감(生界不減) 불계부증(佛界不增)'이 있다. 그는 이 가르침을 깨우침으로써 새로운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생계불감(生界不減)'이란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삶의 세계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불계부증(佛界不增)'는 ‘부처의 세계는 돌아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므로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연은 삶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는 돌고 돌아 어느 쪽이든 줄거나 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깨우치자, 세상의 온갖 일이 조금도 꺼릴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일연의 활동무대였던13세기는 안팎으로 변화의 소용돌이를 심하게 겪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지배를 받았고 밖으로는 영원한 제국일 줄 알았던 한족의 중국이 변방의 오랑캐 원나라에게 무너졌다. 삶의 근간을 이루던 이념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연은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을『삼국유사』를 통해 풀어보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삼국유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단군신화에는 한민족 뿌리찾기의 선언적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한 일연의 개인적 성향이 신이(神異)한 사화(史話)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역사에 반영된 신이가 하등 기이할 것이 없다는 역사인식과 원형의 모습으로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역사서술방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Fact를 중시한 사마천과는 사뭇 다른 역사저술방식이다. 유교적 역사관을 고수한 『삼국사기』와 달리,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신화와 민담을 폭넓게 아우른 덕에 『삼국유사』는 역사 . 지리 . 문학 . 종교 . 언어 . 민속 . 사상 . 미술 . 고고학 등의 분야에서 우리 민족문화유산의 총체적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주요 저서》
- 《어록》 2권
- 《게송잡서》(偈頌雜書)3111권
- 《조동오위》(曹洞五位) 2권
- 《조도》(祖圖) 2권
-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l 새롭게 쓴 저자
지은이
그의 시각을 통해 재탄생한 삼국유사는 그래서 생동감이 넘친다.
그는 텍스트에만 머무르지 않고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 텍스트의 고향인 현장을 담아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 노력 덕분에 삼국유사는 8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로마 신화가 18세기경에 와서야 정립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신화가 오랜 세월 진화를 거듭하는 것처럼 삼국유사가 좀더 친근하고 보편적으로 된다면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지론이다.
‘역사란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시선’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며
한문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후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중국어가 아니다) 표기 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다. 첫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무인 정권 이후 고려는 전반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206년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유학을 기본으로 하는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 주는 데 반해,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5
『삼국유사』는 전체가 「왕력」ㆍ「기이」ㆍ「흥법」ㆍ「탑상」ㆍ「의해」ㆍ「신주」ㆍ「감통」ㆍ「피은」ㆍ「효선」이렇게 9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해 나가겠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해 볼 수 있다. 6
여기서 「왕력」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는 양적으로도 역사 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 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다른 질적인 면이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기이」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 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 이상 강조할 필요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6
이 땅의 첫 나라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11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 지금은 흔한 생각이 되고 말았지만,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그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본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11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12
첫번째 부분은 『위서』라는 책에서 인용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2,000년 전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고 같은 때이다. 14
두번째 부분은 『고기』에서 인용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신화의 ‘몸통’은 여기서 나온다. 15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국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16
일연이 ‘고조선’조를 시작하기 전에 서문을 붙였는데, 거거서 중국의 이러저러한 나라가 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온갖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21
그러나 문제는 거기 있었다. 모방이 창조의 원동력이라고는 하나 지나치면 부작용이 따른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가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23
이 시기에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 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대내외적으로 같은 시기에 겪은 이 사건은 고려 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데, 무엇보다 기존에 세워졌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이 자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머리에 자리잡는다. 24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의 생애를 장황히 읊은
앞서 나는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한다 했다. 그럴 까닭이 충분하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죽은 자식 무엇 만지듯 있지도 않은 인용처를 대가면서 단군을 그려낸 일연의 의도를 알자면, 열쇠는 이 ‘위만조선’조에 있다. ’28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가 중국의 사료를 내세웠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그에 비해 위만조선에 관한 『전한서』의 기록은 지금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이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34
고구려와 북방계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36
그러나 이런 난생 신화(卵生神話)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破穀而出]’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43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과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44
일연의 백제의 출발을 변한과의 관련성을 따져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돌아오는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百濟)라 했다, 이것이 곧 백제의 탄생이다. 49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박노례 닛금(尼叱今)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齒)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배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3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치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삼국사기』에서는 없는 말이다. 일연이 김알지의 탄생을 거세에 비견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장차 신라의 왕위를 이어 나가는 세력의 탄생을 암시하면서, 결국 그가 잠시 탈해에 의해 끊어진 박씨 계열을 이어나가는 적통자로 본다는 것일까? 알지가 성을 김으로 삼았다지만 성이 무언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86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히미코는 누구일까? 일본 왕조의 계보에 나오지 않는 이 왕은 어디에 나라를 세우고, 이웃한 신라와 외교 관계를 가지려 했을까? 그 의문은 일단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서 풀린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成務王, 131~190년)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년 뒤의 일이므로,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 명사인지 의문이어도,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90
신공왕후는 3세기경 일본열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지만, 『일본서기』와 같은 고대 일본 역사서가 만들어 낸 가공 인물일 것이라는 학설은 학계에서도 거론되는 바다. 91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이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다. 91
“해와 달의 정령이 우리 나라를 버리고 지금 일본으로 가 버린 까닭에 이 같은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연오는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낸다면 될 것이다.”
그러고서 그 비단을 내려 주었다. 사신은 돌아와 아뢰었다.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93
아달라왕 떄의 일이다.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것은 바로 이 왕 때. 세오녀가 일본으로 아달라왕 4년에서 16년 뒤다.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낸다고 추정할 만하다. 94
일연은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96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 땅으로 가 버린 다음 신라에서는 해와 달기 빛을 잃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전반부에 일식을 알리는 기시가 빈번히 동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중국의 역사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일식이 곧 오늘날의 일식인지 분명하지 않거니와, 그나마 한반도 내에서 관찰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일관이 이르기를 ‘일월지정(日月之精)’이라 했다. ‘정’을 편의상 ‘정령’이라 번역했는데, 이 의미에 주목해 보자.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97~98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유독 토착 신앙에 강했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한다. 연오와 세오는 신라의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올 법한 인물이다. 더욱이 바닷가 마을, 이 땅에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뜬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토착 신앙이 바탕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는 설화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100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111
『삼국유사』의 「기이」편은 왕의 재위 순서로 엮겼다. 그러면서 그 왕대에 일어난 일이나 특이한 사람을 하나 소개하고, 그것이 제목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미추왕 죽엽군’이라고 하면, 미추왕 때의 죽엽군 사건을 쓰면서, 미추왕의 재위 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방법이다. 118
밤에 찾아오는 손님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개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121
『삼국사기』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힌트를 남기지 않고 있다. 진지왕이 죽자 진평왕이 들어섰다고, 매우 순탄한 이양처럼 기록했다. 그러나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 121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신라의 후진성을 인정하고 그 극복을 처음으로 꾀한 왕은 아무래도 법흥왕(514~539년)일 것이다. 법제 정비와 불교 공인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지만, 이 두 가지가 곧 후진성 탈피에 기치를 든 일이나 다름없다. 141
황룡사가 지어진 것도 장륙존상이 만들어진 것도 진흥왕 때다. 일연은 「탑상」편의 ‘황룡사의 장륙[黃龍寺丈六]’조에서 즉위한 지 14년(553년) 2월, 용궁의 남쪽에 자궁紫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그 곳에 나타나,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지었다고 하였다. 황룡사 건립은 17년이 걸린 역사였다. 144
“서천축국(西天竺國)의 아육왕이
아육왕은 아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본지수적(本地垂迹) 또는 불국토 사상(佛國土思想)이라 부르는, 토착화한 신라 불교의 모습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은 통일의 힘을 쌓는 일이기도 하였다. 144
그러나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ㆍ불국토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4
그런데 진자가 찾아가는 부처님이 구체적으로는 미륵선화다.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64억7,000만 년 뒤에 오신다는 부처님이 미륵이다. 이른바 후세불을 기다리며, 때에 따라서 바로 지금 내려와 달라고 비는 하생신앙은 중국으로부터 무르익어, 이 때 이미 백제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 같은 걸출한 불상이 만들어질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147
일연은 어떤 이의 말이라고 하면서, “미(未)는 미(弥)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매우 닮은 것을 응용해 헤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149
“불교계에서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섯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151~152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慈藏) ㆍ원효(元曉)ㆍ의상(義湘)이다. 152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153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이 이야기의 끝에 일연은
일제시대 때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79
다시 말하거니와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당나라 군서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184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을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예컨대
권력의 끝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이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213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삼국유사』의 맨 처음에 실린 「왕력」편에서는 왕과 왕의 부모 그리고 왕비가 비교적 소상히 적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삼국사기』와 일치한다. 이 가족관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왕비 쪽이다. 대부분의 왕에게 한 사람의 왕비만 기록되어 있다. 왕이 거느린 여자가 왕비 한 사람만일 리 없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편찬된 두 책의 저자가 모두 정실로서 왕비의 격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후궁이 여럿이었을 텐데도 기록한 것은 왕비 한 사람이다. 214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신라의 진골은 대체로 진흥왕으로부터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출발은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 부터다. 삼국통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거기 공로자가 나오기 마련이고,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태종과 문무왕대에는 강력한 왕의 힘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괄화된 이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왕실과 가까운 최고 권력층에서 터졌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아직 부왕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그 주모자는 다름 아닌 바로 왕의 장인이지 않았던가?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막을 불러 왔다. 219
그런 왕의 시대에 멋진 여자 하나 나타난다. 바로 수로부인이다. 수로부인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느 여인과는 다른 특이한 매력을 풍긴다. 그것은 약간 ‘공주병’에 걸린 듯한 푼수 끼가 보이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강한 개성 때문이다. 223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226
그런데 순정공은 그이상의 일을 당했다. 아예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여기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 그가 앞서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던 노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 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衆口朔禽)’이라 표현되어 있다. 228
「구지가」로부터「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229
동해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국도는 7호선이라고 번호가 매겨져 있다. 번호는 홀수선이 남북을, 짝수선이 동서를 잇는 국도에 붙여진다. 여기서 1ㆍ3ㆍ5ㆍ7호선이 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국도인데, 1호선이 목포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서쪽선이고, 7호선은 부산을 출발해 원산까지 이어지는 동쪽선이다. 3과 5는 그 중간에 놓인다. 7호선은 1ㆍ3ㆍ5호선이 모두 태백산맥이 서쪽에 놓인 데 비해, 오직 관동 지방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232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233
첫 성전환증 환자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을 것이다. 그는 정식 왕비만 둘이었는데, 16년간 재위하였으므로 24세에 죽었지만,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도 없다. 물론 재위 마지막 해의 반란 사건 때, 왕을 포함한 전가족이 몰살당했을 가능성은 있다. 혜공왕의 성전환증은 신라 왕실이 오랫동안 근친혼을 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한 직계가 6대에 걸쳐 8명의 왕을 내었으니 할만큼 했다고도 하겠다. 이후 신라 왕실은 김양상과
왕이 되는 자
북천은 알천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화백제도 시절, 부족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다. 혁거세의 신이한 탄생을 목격한 곳도 알천의 언덕 위였다. 그러므로 북천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는 왕위를 바라는 자가 해야 할 조상에 대한 알림 곧 고유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255
왕은 이 피리가 진평왕 때 만들어졌다고 했으나 실은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해중능 곧 대왕암에서 받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문무왕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바다 가운데 능을 쓰도록 유언한 사람이다. 일본을 경계하는 뚜렷한 의지가 거기에 담겨 있고, 그것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통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원성왕은 그 같은 사실을 애써 은폐하고 있다. 원성왕이 아버지로부터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앞서 나왔다. 그런데도 왕은 두 번씩이나 시치미를 떼고 있다. 금을 싸들고 찾아오는 사신들을 도리어 은을 주며 돌려세운다. 왕이 한 선의의 거짓말은 국보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거절하되 어떤 다른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지 않도록 섬세히 배려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의 조심스런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257
원성왕 이후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기에 빠진다.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란 결국 정권을 잡고자 하는 진골 귀족 계급간의 골육상쟁이었는데, 특히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대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한다. 262
경문왕은 원성왕의 손자인 희강왕의 다시 손자다. 희강왕은 사촌간인 민애왕에게 죽임을 당했고, 민애왕은 죽임을 당했다. 모두 6촌간의 가까운 형제들이다. 이런 처참한 살육극을 목도했을 헌안왕이나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 경문왕이나, 모두 덕치를 펴야할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263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고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삼아 자야 했던 사람, 시중 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267
나라가 망하는 징조
원성왕 이후 신라가 망하기까지 150년이다. 그 사이에 19명의 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한 왕이 그저 8년 남짓 자리를 지킨 셈이나, 1~2년 만에 죽거나 죽임을 당한 왕도 여럿이다. 완성왕 후손이 자리를 이어나가다 마지막에는 신라 천 년의 수미쌍관을 장식하려 한 것일까,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는 박씨 세 사람이 차례로 즉우히난 데에서는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심정이다. 271
게다가 한 왕대의 일이 아니라 여러 왕대에 걸쳐 있다. 같은 제제를 여러군데서 찾아 한 자리에 묶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객관적 사실만 나열시켜 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272
일연은 사건의 기록보다는 ‘이른 눈’이라는 이상 징후를 통해 한 사회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 있다. 272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에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277
헌강왕은 여기서 동해 왕을 만난다. 이미 수로부인의 이야기에서 확인했듯이, 우리 옛 이야기 속의 용은 그다지 나쁜 역할을 맡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 뿐이다. 280
처용은 정말 용의 자식인가? 문면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없어 갖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 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 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한편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81
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다. 284
나라가 망하는 징조는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286
지는 해 뜨는 해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도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있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통일 당시부터 대동강 이북을 내주어야 했던 당나라에 대한 정치적 보상말고도, 신라 안에서 중앙과 지방간의 원활한 교류가 이뤄질 어떤 대책조차 세워져 있지 않았던 것이, 영토상으로도 통일 이전보다 그다지 많이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287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288
주지하다시피 경순왕의 이름은 김부다. 신덕ㆍ경명ㆍ경애의 3대가 박씨에게서 나왔으나, 경애왕은 견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한 후 다시 김씨 성을 가진부가 왕에 올랐다. 그의 가계는 저 위로 문성왕(839년~856년)에 이어진다. 그러나 김부의 즉위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술은 실로 부정적이다. 전자에서는 견훤이 “임시로 나라 일을 맡겼다”고 적었고, 후자에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 “왕은 견훤에 의해 자리에 오른 것이다”고 표현하였다. 신라가 이미 자주권을 잃었음을 나타내면서, 결국 경애왕으로 실질적인 신라의 멸망을 상정한 셈이 아닌가 한다. 296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 사실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309
분명코 이 도읍의 역사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에다가 도읍을 두었을 때는 북부여로부터 출발한 북방계 민족일 뿐이었다. 그 외교 관계의 중심점도 북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일본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로부터 가중되어 오는 압박을 견디기에 백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그러므로 웅진ㆍ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11
6세기 들어서서 즉위한 일본의 왕들은 줄줄이 백제 왕실과 한 집안이었음을 알게 된다. 백제 왕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왕실의 권력을 한 손에 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홍 교수는 곤지왕자로 보고 있다.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왕자는 일찍이 일본왕실에 건너가 있다가, 자신의 형인 문주왕과 조카인 삼근왕 둘 다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자, 아들을 보내 동성왕으로 손자를 보내 무녕왕으로 올리고, 그로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앉을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더욱이 다른 손자인 계체왕은 일본에서 왕으로까지. 321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327
견훤, 비운의 영웅
실상 견훤은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다. 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왕의 역사를 마감했다고는 하나, 그의 외손자들이 고려조의 왕위에 올랐고, 경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고려 왕실의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된다. 고구려 또한 고려로 그 정신사적 계승을 해주었고, 고려조 중반에는 묘청이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며 반란까지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나 백제는 견훤으로 모든 것이 깨끗이 끝나고 말았다. 347
도리어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을 한 시기는 고려와 후백제가 한창 싸움을 벌이는 와중이었다. 아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궁지에 빠뜨린 이 일을 두고 우리는 부자간에 불화 이외에 무엇으로도 까닭을 설명하기 어렵다. 불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똑 같은 되풀이를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 집안 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53
신비의 왕조, 가야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단편적인 소식이 신라사에 섞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요, 일본 쪽의 역사서에서 산견되는 자료는 일부 『삼국사기』와 중복되거나,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자는 의도에서 왜곡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뿐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그러나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365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곳은 완충지였다. 신라와 백제가 그로 인해 힘의 균형을 이루었고, 열본열도에서 몰려온 또는 몰려갈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활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가야의 역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일연의 손에 의해 거둬들여진 이 짧은 기록 하나가 전부다. 369
노래에서는 맞이하려는 대상을 거북이로 상정하고 있다. 이 거북이는 용으로도 바꿔볼 수 있다.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 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2
불교로 보는 역사
전반부의 「기이」편이 끝나고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여는 첫 편은「흥법(興法)」이다.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의『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일, 탑과 절을 만든 경위, 고승들의 전기 등이 누벼지는데, 일연 자신이 승려 출신이기에 그랬을까, 전반부에 비할 때 이야기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인용한 책도 다양하다.『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385
「흥법(興法)」은 곧 흥국(興國)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로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에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물론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법」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적 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386
5호16국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전진과는 달리 백제에서는 가장 남쪽의 진나라로부터 불교가 왔다. 이 같은 사실은 백제 불교의 성격을 말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백제에는 바다를 건너 중국 남방계의 불교가 이어지는데, 특히 법화 신앙의 흐름은 이것을 타고 한층 뚜렷해진다. 390
다만 불교가 처음 전래된 이 경이로운 사건을 두고, 정작 승려인 일연 자신은 『삼국유사』의 기록만 옮겨다 놓기가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여기서 찬을 생각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삼국유사』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392
순교의 흰 꽃 이차돈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 나라에서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2
‘살을 베어 저울로 단다’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시비왕의 고행을 한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겠고 매도 굶길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메에게 먹였다. 정녕 법흥왕의 마음을 그랬을 것이다. 406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는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교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물론 그것은 일연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일연은 대각국사 의천이 1091년 경복사에서 쓴 다음과 같은 시를 덧붙여 놓고 있다.
열반의 무릇 평등한 가르침이
우리 스님에게서 전해 받았네
애달프다, 방이 날아온 다음
동명왕의 옛 나라 위태로워졌네
삼국의 흥망을 불교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려했던 일연의 태도는 의천의 이 같은 입장과 더불어 결론 내려지고 있다. 415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지리상으로만 아님 마음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417
고구려에 처음 온 전지의 승려 순도 또한 불상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불상은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다음 그에 따라 중국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장륙존상은 인도에서 직수입된 모델을 가지고 만들었다. 430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나머지 하나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다. 434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出家)의 보살이라 한다. 저 유명한『화엄경』의 이야기에서, 문수 스스로 남쪽을 두루 돌며 깨닫고 동쪽으로 오는데, 거기서 만난 선재동자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곧 선재의 출가를 뜻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길에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 데 부모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자다. 문수도 성불(成佛)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고 이런 문수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0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의해」편에서 원효의 전기를 쓰며 지은 제목 ‘원효불기’를 풀어보면 그렇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원효를 관형하기를 ‘성사(聖師)’라 한 것이다. 같은 「의해」편에서 일연은 의상에게 법사(法師)라 하고, 자자에게 율사(律師)라 했다. 세분은 신라 불교를 대표한다. 일연이 그런 세 분을 평가하는 첫마디는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인 관형어에서 들을 수 있다.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530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537
의상, 화엄의 마루
그렇다면 왜 법사일까?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敎條主義)다. 원효의 현실주의를 앞서 소개했거니와 의상의 교조주의 또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565
그가 얼마나 원칙적이며 정통적이었나를 보여 주려는 듯, 일연은 의상의 전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삽화를 붙인다.
의상이 황복사에서 지낼 때였다.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는데, 매번 허공을 딛고 올라갈 뿐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 탑에는 돌 사다리를 놓지 않았다. 제자들과 계단에서 세 자쯤 떠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이에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 할 게야.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이 아니지.” 568
밀교의 한 자락
출가의 동기르 밝히는 가운데서도 가장 내 마음을 치는 이야기가 다음의 경우다. 주인공은 신라의 승려 혜통(惠通).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604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辛苦)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다. 그러기에 출가담도 그만큼 더 극적인 것일까? 다만 더 극적이어서 가치가 높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한 속에서도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고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재들은 얼마든지 있다. 불교의 출가자들 속에 연면히 내려오는 출가의 동기를 소중히 여기자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동기 하나로 깨달음은 단박에 몰려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604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고려 원종 기사년(1269년) 7년 6월, 한번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간 곳이면 어떤 생명체도 남기지 않는다는 몽고의 전란에 휩쓸린 나라,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는데, 일신의 안락만을 구하는 승려들의 추한 모습을 『고려사』의 한 구절은 이렇게 증언해 준다. “왕이 경주에 행차하였다. 하승과 비승배들이 능라를 가지고 뇌물을 바쳐 관직을 얻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나선사요 능수좌라 일컬었다. 여자를 얻어 사림을 차린 자가 절반 이상은 되었다.” 668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향가란 어떤 노래인가? 주지하다시피 신라는 고대 삼국 가운데 중국의 문물을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훌륭히 소화해 냈다. 불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재래 신앙이 강하게 형성되었던사회 중심부에 외래의 불교가 파고들어 오는데, 신라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에 종속되지 않는면을 보여 주었다. 재래 신앙과 불교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04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 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728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앞에서 요약한 13세기의 시대 상황을 다시 떠올리건대, 나라의 체모는 흐트러지고 백성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거니와, 그것은 한두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것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3
3. 내가 저자라면
연구원 커리큘럼으로 두 권의 역사서를 읽었다. 사마천의『사기열전』과
어느 것이 입맛에 맞는지는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고전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가진 이들은 남의 프레임을 통해 원전을 읽게 된다는 점 때문에
또 하나 이 책의 장점으로 꼽고 싶은 건 글과 사진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대학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호흡은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처럼 자연스럽고 상호보완적이다. 텍스트의 내용과 분위기를 사진에 담아내는 솜씨가 독자의 상상력을 한껏 고조시킨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역사읽기가 ‘과거의 현재적 해석’임을 몸소 보여 주었다.
머리말 말미의 <
이 책의 차례는 준 역사서인「기이」편으로 시작해 삼국시대 불교의 도래 및 전개 과정을 그린「흥법」으로 이어진다. 이후 불교라는 주제를 공통 축으로「탑상」,「의해」,「신주」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데 장간의 연결이 매끄러운 느낌을 받았다. 민담과 설화를 다루는「감통」,「피은」을 거쳐 孝가 주제인「효선」에서 일연의 개인적 내력을 이끌어낸 것은 형식적인 완결미를 주며 인간 일연에게 친숙히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원작자 일연에 대한 친절한 소개 및 채프터별로 배치한 노란 박스의 설명문은 독자를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느낌을 주어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는 경험상 비싼 책이 편집솜씨며 내용 구성이 훌륭한 경우가 많았다. 퀄리티는 고민의 정도가 아니라 책값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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