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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1일 08시 51분 등록
연구원 활동으로 일상이 변했다. 사실, 연구원은 그 전부터 지원하고 싶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올해에 비로소 지원한다. 바쁘면 바쁜대로, 백수일때는, 내가 지금 그럴때야?라는 자격지심으로 지원을 미루어왔다. 아이들이 자라고, 할일이 점점 많아진다. 확실한 것이 있는데,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사실. 올해도 그리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내년에는 분명 더 시간사정이 좋지않을 것이다. 

연구원 활동은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을 투자해야한다고 한다. 실제로 해보니까, 그 보다 더 많이 시간이 든다.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도 해야하고, 부수적인 활동도 많다. 

 그렇다면, 자연 생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그렇다. 뜻밖의 성공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구글의 업무시간 20%'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시간의 밀도가 더 높아진다. 

흔히,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싶어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고시공부도 하고, 힘든 자격증에 도전한다. 오늘 문득, 왜 난 특별한 기술만 구할려고 하고, 비범한 열정은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기술은 특별하지 않다. 변호사와 한의사의 초봉은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또, 특별한 기술을 가지면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특별한 열정은 의외로 없다. 

시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내 힘으로 단 1초도 늘릴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의 밀도는 높일 수 있다. 

특별한 지식, 기술을 구하지말라. 그 전제가 울궈먹겠다는 심사다. 특별한 열정은 지금 당장 가능하다. 아니, 생각보다 조금만 노력해도 특별한 노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음식장사는 의외로 사람들이 공부를 안한다. 문열어 놓고, 손님 기다리는 것이 끝이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깨끗이 닦고 준비할 뿐이다. 하지만, 데리고 온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갑자기 많아진다. 목숨걸고 투자하면서, 정작 손님 끌고 오는 일에는 생각이 없다. 손님을 끈다는 것이 기껏해야 맛이다. 혹은 찌라시 정도다. 정말 써놓고 보니, 한심한 수준이다. 

글은, 열정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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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의 여러 면에 두루 걸쳐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운 책이 바로 [삼국유사]가 아닌가 한다. 이 책은 그럴 만한 구석이 넉넉하지만, 때로 호들갑스럽게 치켜세워지기도 했고, 그런 한편 짝처럼 거론되는 [삼국사기]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사실 두 책은 비교 우위를 가리는 일이 부질없을 만큼 절대적 권위와 가치가 있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한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곧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책이 [삼국사기]라고 말한 선학의 명쾌한 자리 매김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무게 중심이 [삼국유사]쪽으로 치우친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선학의 말에 수긍하지 않는 바 아니고, [삼국유사]의 매력을 저버리는자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삼국유사]에 대한 가치 부여와 중요성 제고와는 달리, 우리가 이 책을 실제대로 올바로 알고 있는지, 그 세계에 한 번쯤은 깊이 빠져 본 경험이 있는지, 문제는 거기에 있다. 

우선 나부터 부끄러운 고백을 먼저 하자. 초등학교 학생 때 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그리고 김부식과 일연을 연결하는 시험 문제를 틀리곤 했다. 어떻게 그것을 헛갈릴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 말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2

이 같은 역사 인식의 변화를 놓고 볼 때 일연이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같은 시기의 지식인 이승휴가 그의 책 [제왕운기]에 비슷한 내용을 실었고, 이보다 조금 앞서 이규보가 동명왕의 사적을 발굴하여 서사시로 그렸던 점과 맥을 같이한다.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책을 들자면 [삼국사기]를 젖혀놓기 힘들다. 그가 [삼국사기]를 의식하고 있음은 특히 [기이]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 주는 데에 [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이 깊이 간파하고 있엇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13세기 지식인으로서 일연의 입장이었다. 5

이미 13세기에 [삼국유사]가 간행된 다음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면면히 이어지기는 했다. 특히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책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 중종 때 간행된 것인데, 이 때의 연호를 따서 정덕본이라 부른다. [동국통감]의 단군전 부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랑]의 경주 관련 부분에서는 [삼국유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삼국유사]를 믿거나 믿지 못하거나 간에, 일정 부분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한치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심히 괴탄하여 믿지 못할 바'라 하였고, 그 이후 그나마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 [삼국유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04년, 도쿄대학의 배인본 [삼국유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간다본과 도쿠가와본을 저본으로 한 것인데, 이 두 책이 일본에서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일본군 장수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책을 가지고 갔는데, 거기 이 두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정덕본 중의 한인 이 두 책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불충분한 [삼국유사]였다. 

한편 교토대학이 교수인 이마니시 류가 순암수택본을 얻은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이를 저본으로 1926년, 교토 대학에서 [삼국유사]의 영인본을 내놓았는데, 당대 가장 완벽한 [삼국유사]였다. 8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단군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애써 이 시기를 눈감아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이야기가 책의 어느 한 구석에 밀려 있다면 첫머리에 실린 것과 의미가 다르다. 물론 단군 신화의 경우, 내용으로 보아 마땅히 처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 기준'은 누구의 생각인가? 그것이 맨 처음이 되어야 한다고 본 그 관점과 의식은 어떻게 생겼던가? 설령 처음 이야기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실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 다른 부분부터 시작했다가 뒤 어디쯤에서 슬며시 끼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연은 그런 편법을 쓰지 않았다. 

단군 신화의 무엇이 그에게 그다지 중요했을까? 모두가 아는 '개천절 노래'의 첫 구절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고 슨 이는 20세기에 들어 위당 정인보 선생이다. 지금은 흔한 생각이 되고 말았지만, 일연이 살았던 13세기의 사람들이야말로, 그 샘과 뿌리를 단군이라고 본 아마도 첫 세대였던가 한다. 누구나 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에 자못 중요하게 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 등재, 그것도 첫머리에 잡리잡은 일이 그렇다. 12

그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낱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응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게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너무도 잘 알려진 곰과 호랑이 이야기 대목이다. 이 이야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곰으로 상징되고, 어디서든 곰 비슷한 것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의 번역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환웅은 처음에 '100일을 꺼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곰과 호랑이가 '삼칠(三七)'일을 꺼렸다.고 하였다. 이를 번역하여 흔히 '21일을 꺼렸다'고 하지만, 환웅이 처음 100일을 기약했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16

혹시 그 100일 동안 3과 7이 돌아오는 날짜를 꺼리라는 말은 아닐까? 아ㅣㄴ면 3과 7 그리고 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곧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환웅이 먹는 것, 생활하는 것 등에서 어떤 의식을 정해 놓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했는데, 곰은 묵묵히 이행한 데 반해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17

이 사실을 말하기에 앞서 잠시 말머리를 돌리자.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 신화인가 아니면 건국 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당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었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일연이 '고조선'조를 시작하기 저에 서문을 붙였는데, 거기서 중국의 이러저러한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만 예를 들어 설염하고 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아니라 '나라다'.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랑을 비롯한 세상의 온갓 것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다르다.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마,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그러나 단군신화를 놓고 건국 신화인가 창세 신화인가 따지는 일이 다소 부질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굳이 창세 신화가 없어서 서운하기 때문은 아니다. 건국인냐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 방식 아래서 그렇다. 지난날 지구가 빙하기를 통해 몇 차례 뒤집어졌음은 이미 과학적 상식에 속한다. 21단순히 현재 살고 있는 인류만을 기준으로 창세를 말하기가 조금은 우습지 않은가? 지금 세상과 사람들이 지구의 처음은 아닌데 말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지금 세상에 들어 이 땅에도 처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 부락을 만들고, 부락들이 만나 연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가다 보니, 그 사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 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22

두 가지 의문을 종합해 보면,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기자가 다스리고 있던 조선 지역을 복속시켰다. 조선의 유민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터인데, 위만처럼 연나라의 본토에 들어가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옛 땅을 회복해 조선인만의 나라를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다. 

위만이 연나라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그가 본디 조선족 출신임을 더 내세우고자 한 것이고, 거기에 위만의 차림새를 굳이 내세우다보면 이러저러한 오해만 불러이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일까?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ㅈㅂ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 할 이유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은 일단 이 위만조선에서 끝난다. 위만조선이 세워진 것은 한나라 초기 곧 기원전 195년경이다. 그로부터 약 90년 정도 계속되는데, 그 동안은 상당히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했던 듯하다. '위만조선'조에서 '진번과 진한이 위로 글을 내어 천자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사방이 막혀 전달되지 못했다'는 기록은, 한반도 남부에서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만조선이 버티고 서서 상당한 힘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된다. 결국 그것은 한나라와의 외교적 분쟁29 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고구려와 북방계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한반도에 건설된 나라들의 구성원이 딱히 어느 한 곳 출신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한민족이라 하지만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부족들이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에 자리잡은 다음 한 가지 문화와 생활습성으로 하나되어 나가지만 말이다. 

조선의 시대 곧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군웅할거하는 시대를 맞는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은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앞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연은 그런 여러 나라를 일일이 소개하고 잇다. 이 점 또한 [삼국사기]와 다른다. 비록 짤막짤막한 기사들이지만, 대방, 말갈, 발해, 이서국, 가야 등을 소개하고, 한나라의 4군이 2부로, 다시 70여개의 나라로 갈려졌음도 서술하였다. 이른 바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삼국사기]가 단군조선부터 여러 부족 국가를 무시한 것이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김부식과 관찬 사학자들의 관심은 책의 표제대로 신라 - 고구려 35-백제 세 나라만의 역사를 충실히 쓰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가야마저 제외되었다. 고대 왕권 국가로서의 틀을 분명히 갖춘 나라로 선별하자며 이 세 나라 밖에 없다고, 김부식은 판단한 것이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36

일연은 해모수가 하늘님이고 그가 북부여를 만들었으며, 아들 해부루를 낳아 그에게 왕위를 전승한 것으로 썼다. 그러니 해부루가 동부여로 떠난 다음 어디선가 해모수가 나타나 옛 북부여 땅에 도읍을 삼았다는 [삼국사기]와는 완연히 다르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열쇠는 [고기]에 달려 있는 듯하다. 앞서 쓴 바, 일연은 '북부여'조 곧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사실을 [고기]에서 인용하였다. [고기]는 [전한서]를 가져다 붙였을 수 있다. 결국 [고기]를 인용한 일연으로서는 해모수와 해부루의 부자 관계를 인정한 셈이고, 그러자니 '동부여'조부터 '고구려'조까지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도, 부루가 옮겨 간 빈 땅에 해모수가 나타나 나라를 세운 장면을 삭제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일연은 유화가 금와에게 말하는 장면에 각주를 달아 [단군기]를 인용하여,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고까지 쓰고 있다. 곧 '[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고 말한다. 이 기록을 근거 삼아 보건대,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몰래 통한 다음 주몽을 낳았으니, [단군기]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로 하였다'는 기록과 참조하여 보면,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다'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연의 이 주석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로서는 [단군기]가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기록을 받아들여 주몽과 부루가 굳41이 형제라고 말한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형제 아닌가? 

일연은 이 이후의 이야기를, '졸본주에 이르러 비로서 도읍을 정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은 없어, 다만 비류수 웃편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 때문에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이 때 나이 열두 살, 한나라 효원황제 건소建昭2년은 갑신년(기원전 37년)인데, 이 해에 즉위하여 왕이라 불렀다'고 간닪 처리하고 만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신하로 삼은 일, 말갈과 비류와의 싸움에서 이긴 일 등이 이어진다. 여기까지 보면 더욱 영웅의 일생 유형과 가까워진다. 시련받는 인간 주몽에서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이다. 

일연은 왕이 즉위한 나이를 12세라 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22세라 하여 차이가 있다. 후자가 더 그럴듯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박혁거세가 즉위했다는 나이도 일연은 13세라 하고 있다. 

주몽을 없애려 했던 동부여의 대소왕은 지황地皇3년 임오년22년에 이르러 주몽의 손자 무휼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앞서 북방계의 흐름 속에 백제가 놓인다고 했었다. 일연은 백제의 출발을 변한과의 관련성을 따져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최치원이 '변한은 백제다'고 한 데서 촉발된 듯한다. 

[당서唐書]에서 '변한의 후손들은 낙랑 땅에 있었다'라고 한 것이 '온조왕의 계통이ㅣ 동명왕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일뿐'이라고 한 일연은 '낙랑인이 낙랑 땅에서 나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맞서본 적이 온조왕 이전에 있었던 듯이 말하지만, 도읍이 낙랑 땅에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고 못 박는다. 45 다만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으므로 변한이라 한다'는 것이다. 

일연이 '진한'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지만 기실 이 부분은 진한에 관한 내용이라기보다 진한 지역 내에 있던 중국 유민들의 이야기다. 일연은 최치원의 말을 인용해 그 중국 사람들이 본디 연나라에서 피난 왔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보충하였다. 

본격적인 신라 이야기에 앞서 이런 내용을 붙인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을까? 아무래도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북방계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보이고자 해선인 것 같다. 비록 중국계 사람들이 진한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라의 지배계층이 아니었다. 그저 한가한 동네 노인들로나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신라 여섯 부족은 또 다른 오리지널
신라 건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삼국사기]와 일연은 처음부터 충돌한다.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조를 이 책의 가장 첫머리에 두었다. 일연은 [기이]편에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먼저 여섯 부족을 설명함은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 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54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차이는 뒤로 갈수록 커진다. 혁거세 탄생의 내력담을 [삼국사기]는 단 몇줄로 줄이고 있다. 큰 틀은 비슷하지만 세밀한 내용에서는 다른 부분이 많다. 먼저 일연이 쓰고 있는 혁거세 탄생 신화를 보자. 

전한의 지절은 원년은 임자년인데,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족의 시조들이 각각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의 강변 위에서 모여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다스리려 하나 백성을 읶르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요. 어찌 덕을 갖춘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두지 않겠습니가?'

그런 다음 높은 곳에 올라 남쪽으로 양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나정곁에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흰 말 한 마리가 무릎 꿇어 절을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길게 울었다.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도 ㅣ이상하게 여겨, 동천에서 몸을 씻어 주었다. 몸은 광채를 띠고, 날짐승 물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 때문에 혁거세라 이름을 지었다. 왕위에 올라서는 거슬한居瑟한이라 하엿다. 

여기서는 여섯 부족의 합의 아래 왕을 세우려는 논의가 먼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57

[신라라는 이름]
일연은 신라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 '서라벌 또 서벌 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사라 또 사로 라고도 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서벌이 나중에 서울로 바뀌어 나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다음 이어서,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어떤 이는 계림국이라고도 하는데, 계룡이 나타나는 것을 상서롭게 여긴 까닭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가 태어나던 밤, 닭이 숲 속에서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뒷날 마침내 신라라는 이름을 정하였다'고 정리하였다. 

[신라왕의 이름]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반부 곧 남해왕부터 지증왕까지에서 왕의 이름과 관련된 부분을 여기 한 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대체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도 그 같은 종류의 하나다. 

'신라에서 왕을 부를 때 거서간이라 하는데 그 곳 말로 왕이다. 간혹 귀인을 부를 때 쓰는 칭호라 하고, 어떤 이는 차차웅을 자추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차차웅은 이 지방 말로 무당을 일컬으며, 세상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므로 이를 두려이 공경하다보니 높으신 분을 자충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간혹 부른 니사금은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 남해왕이 죽고 아들 노례왕이 탈해왕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자, 탈해가 '내가 듣기에 성인과 지혜로운 이들은 이가 많다'하고 시험삼아 떡을 물어 보였다. 옛부터 전하는 말이 이렇다.......어떤 이는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마립이라는 것은 이 지방 말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을 표지로 자리에 세워 두면 왕이니, 말뚝은 주인이 되고 신하는 아래에서 말뚝을 따라 죽을 지었다. 이런 까닭에 붙인 이름이다'고 하였다. 

다름 한편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제4에 실린 '지증마립간'조의 끝에 붙인 사론 또한 인용해 두고 있다. 

'신라에서 거서간, 차차웅이라 부른 것은 한 번, 니사금을 열여섯 번, 마립간은 네 번이다. 신라시대 말기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지음 [제왕연대력]에서는 모두 '무슨 왕'이라 하고 거서간 등은 말하지 않았다. 대개 그 말이 비속하고 거칠어 부르기에 흡족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이제 신라의 일을 기록하매 이지방 말을 함께 남기는 것도 마땅하다'69

어느 모로 보나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에다, 매부에게 왕위가 간다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듯하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여기서 저 유명한, 떡을 물어 치아의 숫자를 세 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은 [기이]편의 '제3대 노례왕'조에 묘사된 그 장면이다. 

박노례 닛금尼蛇今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매부인 탈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마땅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봅시다'하고, 떡을 물어 살펴보았다.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치아 많은 이가 되는 왕 자리? 그래서 왕도 닛금이라 불렀다는 이 기이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남해와의 유언 때문이기도 했다. 왕은 아들과 사위를 불러 나이순으로 왕을 하라고 일렀었다. 나이로 치자면 탈해가 더 위다. 그런데 탈해가 먼저 기이한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탈해는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앟았으리라. 사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저면 결과를 뻔히 알고 하는 듯한 내기처럼 보이지 않는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다'는 논리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덕 있는 이가 왕위에 오른다는 생각이야 좋겠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그 때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신체적 조건과 인품의 상관 관계가 있다면 몰라도, 우리는 탈해의 이러한 제안에 왠지 무언가 수믄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정? 73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 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나마 그가 카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왕이 된 다음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신라와 일본이 맺은 우호조약은 그 같은 사정을 말해 준다. 

[삼국사기]에서 일본의 침략을 보여 주는 기록은 탈해왕 이전에 두 번 나온다. 혁거세왕 8년과 남해와 11년이다. 비록 기록은 그렇다 하나 한반도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이 잇는 신라로서는 그들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탈해는 박씨의 세력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썼다. 탈행와 11년에 나라를  주와 군으로 나누고 박씨들 가운데 높은 신분에 있는 친척들을 주주와 군주로 보냈다. 그들에 대한 어떤 대우처럼 보이지만, 이는 실상 탈해 자신에게 외척인 박씨들이 서울에 모여 있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같이 일련의 정책은 효력이 있었던가? 유감스럽게도 그래보이지 않는다. 특히 탈해와 17년에 일본군이 목출도木出島에 쳐들어왔을 때, 왕이 각간 우오羽烏를 보내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우오마저 거기서 죽는다. 일본 외교의 실패다. 

탈해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 것은 김알지의 출현이었다. 83

그런데 얼마 후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레슬러 가운데 어떤 사람의 폭로가 나오면서 하루아침에 그 바닥의 열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물론 비정상적으로 쌓아올린 인기가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조짐은 벌써부터 있었지만. 

프로레슬링 선수를 무슨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었던 사실 자체가 이미 난센스였다. 완벽한 각본으로 설정된 보고 즐기는 오락거리로서 접근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김일 선수를 마치 안중근 의사같이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는 당시 군사정부의 유치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들었지만,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장황히 할 이유는 없다. 그 이후 까맟게 잊고 지내던 프로레슬링이었는데, 아직도 일본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음에 의아했을 뿐이다.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는 몹쓸 병마저 얻어 만년을 쓸쓸히 지내고 있지만, 깅에서 김일 선수를 괴롭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가 되어 그 인기를 느긋하게 끌어 나가고 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그 자체가 볼 만한 오락거리로 자리잡은 데서 유지되지 않았나 싶다. 더러는 서슬 푸른 싸움처럼 꾸미면서, 건장한 체구들이 몸을 날리고 들어 메치는 장면에서는 스트레스가 풀릴 만큼 시원스럽기까지 하다. 그건 쇼니까 가능한 일이다. 쇼가 아니라면 그 링에 오른 누군가는 시체가 되어 내려올 것이다. 우리가 무슨 로마시대를 사는 사람도 아닌데 진짜 죽이고 살리는 경기이기를 바라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피는 조금 흘리겠지만 말이다.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들의 인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기량이야 남자에 미치지 못해도 남자들 경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이 연출되는 덕을 보는 것 같았ㄷ. 여자 경기는 단독 출전보다는 두 사람 이상의 팀 경기가 많다. 그래야 볼거리가 더 많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한 팀이 히미코였다. 89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일연은 슬여다. 승려 생활은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어쏙,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서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그의 이 같은 관심과 실천 속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일연의 붓끝은 힘을 얻는다.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에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에 앞서 3년간 그는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분주했다. 그러기에 낙향은 본연의 승려 생활로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오어사는 지금 가 보아도 한가롭기 그지없는 산골 마을에 있다. 영일을 거쳐 들어가는 이 마을에서 그는 꿈처럼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긋들을 [삼국유사]속에 소중히 건사되었다.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때 해를 맞는 고장이다. 동네 이름에서부터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96

정령을 잃은 사람은 눈 뜬 소경과 같다. 사회도 그렇다. 일연이 강조한 것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유독 토착 신앙에 강했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한다. 연오와 세오는 신라의 그렇나 분위기에서 나올 법한 인물이다. 더욱이 바닷가 마을, 이 땅에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뜬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토착 신앙의 바탕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는 설화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일본의 경우, 해에 관한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해가 먼저 뜨기는 신라보다 오히려 그 쪽이니, 그들이 7세기 들어 자기들의 나라 이름을 왜에서 일본으로 고친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일본의 삼국유사'라고 불리는 [고사기]에 실린 대표적인 신화를 하나 소개한다. 

아마테라스가 천하를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 그의 동생 하야스사와는 어쩐지 사이가 좋지 않다. 어떤 일로 둘은 내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에 상관없이 하야스사는 자신이 이겼다고 우기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아마테라스가 이를 두려워하여 석굴의 문을 열고 숨어 버리자, 이 때문에 천상계와 온 나라가 완전히 어두컴컴해진다. 

아마테라스 신화의 전반분에 들어 있는 이 이야기는 해와 동굴이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해석을 낳게 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테라스가 동굴에서 나오도록 온갖 방법이 동원되는 이야기가 그 뒤를 잇는데, 아마테라스 자신이 해이고, 그 해가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101

'도화녀와 비형랑'조는 전형적인 야래자 유형의 설화다. 아니 그 원조다. 자칫 몰래한 사랑의 불륜성 시비에 휘말릴 이런 이야기를 일연은 서슴없이 [삼국유사]안에 거둬들이고 있다. 그것은 다시 [기이]편의 무왕조와 '후백제와 견훤'조에서 거듭 반복된다. 

그런데 이 유형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삼국시대의 비극적 영웅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우리는 거기서 당대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의 탄생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견훤의 탄생 설화는, 가까운 일본의 백제 영향권 아래의 지역에서 유포된 설화와 매우 비슷한 점을 보여, 설화를 통한 이동 경로를 추정하는 데도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이야기는 신라 제 25대 진지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576년에 즉위하여 4년간 왕위에 있었던, 6세기 후반을 짧게 살다간 왕이 다. 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바야흐로 신라가 법흥왕과 진흥왕을 지나며 한반도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때다. 그런데 진지왕은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등극하여 불과 4년 만에 왕위를 진평왕에게 물려주고 있다. 법흥왕이 26년, 진흥왕이 36년을 재위하며 나라가 안정되어 가는 시기에 일어난 뜻밖의 일이다. 진평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힌트를 남기지 않고 있다. 진지왕이 죽자 진평왕이 들어섰다고, 매우 순탄한 이야처럼 기록했다. 그러나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 121

봄꽃이라면 뭐든 아름답다 하나 복사꽃을 따를 만할까? 희다면 희고 붉다면 붉은 꽃, 그 두 가지 빛이 어우러져 먼 데서 보면 뾰족하게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의 맑고 붉은 볼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그것은 도연명이 묘사한 무릉동원이라는 이상향을 장식한 꽃이기도 하였다. 도화랑은 그렇게 어여쁜 여자였던가 보다. 

사량부는 신라의 여섯 부족 가운데 원래 고허촌이었고, 이는 정씨의 시조가 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건대, 그 시조 소별공은 처음 박혁거세를 맞아들여 왕위에 오를 때까지 키운 사람이다. 물론 도화녀가 이 집고 무슨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여자가 이미 혼인을 할 유부녀였다는 점이다. 진지왕은 그런데도 여자를 불러들여 관계를 가지려 해였으니, 음탕함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 

복사꽃처럼 어여쁜 이 여자는 유부녀가 지켜야 할 도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그 앞에서 떳떳이 영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다. 죽음이라도 흔연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인데,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지닌 여자도 아름답지만, 한마디 농담으로 계면쩍은 부누이기를 수습한 왕이 그대로 여자를 보내 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최소한 이 일만 가지고 본다면 진지왕이 폐위감은 아니지 않은가? 125

오모노누시노오카미는 지금 나라현의 미와야마에 머무는 신이다. 이 이야기에서 한자가 달리 적혔을 뿐 발음이나 장소가 같다. 그런데 이 신의 정체가 뱀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비록 [고사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남자의 정체를 뱀으로 볼 수 있다. 

견휜의 경우 남자의 정체가 큰 지렁이인 반면 미와야마의 경우 뱀인 점이 다르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의 구조는 이처럼 꼭 같ㄷ.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은 서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같다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흘러간 것일까? 시기로만 놓고 본다면 미와야마가 훨씬 앞서 있다. 그러나 [고사기]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설화라는 것, 이 책이 편찬되던 7세기의 영향을 받아 고쳐져 있다는 것 등으로 인해, 실제 이야기의 시대아 바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최근 연구 결과, 딸의 아버지 이름이 스에쯔미미노미코토 인데, 여기서 스에는 스에키라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의 지명이고, 이 도자기의 생산자들은 고대 백제계 이주민들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설화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견훤 탄생담 같은 야래자 설화가 견훤 이전에도 한반도에 퍼져 있었고, 그 증거는 앞서 도화녀의 이약기에 나타나거나와, 그 같은 이야기의 틀은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당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37

이제 그런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쉽고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법하다. 고구려는 남진 정책을 써도 주로 백제 쪽을 노리고 있었다. 

백제는 친하자고 말을 걸어와도 껄끄럽고, 고구려는 가끔 쳐들어와도 치명적일 것 없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백제의 침공은 수도 경주의 안위와 직결되지만, 고구려는 변방에서 변죽만 울리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당나라를 생각했다. 당나라가 중원의 새 주인이 된 해는 618년, 신라 진평왕 40년이었다. 그보다 30여년 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오랜 싸움의 끝이었기에 그랬을까, 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기도 전에 쇠약한 기미를 보였고, 결국 당나라로 넘어가고 말았다. 중국이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루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다만 신라로서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당나라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 이득이었다.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의 외교는 본격화된다. 사신으로 가는 먼 길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이어 나갔다. 더러 당나라의 조정에 나아가 고구려가 길을 막는다고, 투정 섞인 호소를 하기도 하였ㄷ. 물론 백제나 고구려도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당의 건국이래 신라가 취한 발걸음에 비한다면 두 나라는 뒤떨어지는 느낌이다. 

진평왕을 이어 선덕왕과 진덕왕이 내리 여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여왕으로서의 이점 또한 십분 살리는 인상을 받는다. 일연은 [기이]편에서 두 여왕을 나란히 소개한다. 157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추억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을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읍내 극장에 가서 처음 본 영화가 [미워도 다시 한 번]이었다. 흔히 그 때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말처럼, 60년대 후반까지도 극장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아직 텔레비전이 보금되기 전, 특히 지방 소도시 사람들의 가장 큰 오락거리가 영화 관람이었고, 거기 외화보다는 방화가 단연 압도적인 인기를 차지했었다. 그 중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관객의 심금을 여지없이 울려버린 명작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입장료도 안 내고 어머니 치마폭에 감겨 묻어 들어갈 정도의 어린 나이였던 나에게는 영화보다 내 주위의 다 큰 아주머니들이 손수건에 홍건히 밸만큼 눈물을 쏟아내는 광경이 더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인공 여자 배우의 포근한 듯 우수에 찬 듯 여린 얼굴은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배우의 이름이 문희였던가? 영화의 내용에 상관없이 분명 내게 아름다운 여성의 근원은 거기서 만들어졌다. 

문희라는 이름을 다시 본 것이 [삼국유사]에서다.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역사의 문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 삼각의 한 축을 감당해야 했던 여자의 표정 또한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문희와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160 

문무왕 법민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와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물론 통일을 위한 모든 기반을 김춘추와 김유신이 마련했으므로, 문무왕은 다만 그것을 이어 마무리한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자 시절에도 문무왕이 아버지 못지 않은 활약을 벌이는 데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작업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해 낸 점 등은 통일을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로 보인다. 

문무왕 법민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앞서 잠시 그런 분위기를 내비췄으나, 문희 이전에 춘추에게 자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야국 출신의 어머니에게 뿌리를 두고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법민은 줄곧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당할 정치적 경제를 피하고, 당나라 조정과의 친분을 쌓아 왕으로 등극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하는, 김춘추나 김유신의 뜻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178

명랑은 물들인 비단을 가지고 임시로 절을 짓자 하고, 그를 필두로 밀교 승려 12명을 동원하여 문두루의 비법을 썼다. 그랬더니 갑자기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되었다. 이런 일은 3년 뒤인 671년, 조헌이 장수가 되어 5만명의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한 번 더 일어난다. 

다분히 믿지 못할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서 이 같은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668년과 671년 사이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문제가 일어났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특히 670년, 당나라가 그동안 잡아두었던 김흠순을 돌려보내고 대신 김양도를 가둔 일 같은 것이 그렇다. 신라왕이 멋대로 백제 땅과 유민을 차지했다 하여, 당나라 황제가 문책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고구려와의 관련성은 없다. 

그런데 671년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오고 간 장문의 외교 문서는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을 보다 더 분명히 보여준다. 7월 26일, 황제의 이름도 아닌 총관 설인귀의 이름으로 온 글은 신라를 은혜도 모르는 반역자라로 매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무왕이 보낸 답신은 지나 10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큰 오랜 전쟁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맺은 협약이며 합동 작전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가 무리하게 요구한 것드리며 위약을 자세히 들어, 문제의 책임은 결코 신라에 있지 않음을 완곡하나마 강학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린 이 당신을 읽다 보면 문무왕의 당당한 면이 잘 드러난다. 

사실 그 이후로도 문무왕은 끝까지 당나라와 살얼음 밟는 듯한 관계를 계속했다. 싸움은 거의 그칠 날이 없을 정도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토했겠는가 [삼국사기]에서는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181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사천왕사가 당나라 군대를 쳐부술 무슨 힘이 있으리라 믿지 못한 김부식은 피리 한 자루가 나라를 지킬 보배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 그는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삼국사기][잡지]의 '삼죽'조에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는 하나,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일연은 다른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모살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신문왕 2년(682년), 5월 그믐의 일이다. 감은사 가까운 바닷가에 작은 산이 떠서 오간다는 희한한 보고가 올라왔다. 일관은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33천의 하나가 된 김유신이 큰 선물을 주려는 징조라고 풀이했다. 신문왕에게 두 사람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였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 가마를 타고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신하를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다음 날 정오,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어두워지는 데, 7일간이나 갔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왕이 바다를 건너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쳐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왕은 영접하고 함께 앉아 물었다. 187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쪼개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도 하니, 어찐 일입니까?'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은로 제사를 드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189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최근 학계에서 [화랑세기]라는 책의 진위 여부와 그 역사적 가치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이 전해 주는 화랑의 모습이 부분적으로나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인데,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잖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글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남창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그것이 정말일까? 너무나 어이없기에, 이는 분명코 위서며, 이 책의 출처인 일본 쪽의 어딘가에서 신라 화랑을 욕보이려고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게도 된다.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움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주지랑 또한 그런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기이]편의 '효소왕대의 죽지랑'조에 소개된 그는,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여싸. 진덕왕, 태종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208

성덕왕 때의 이 출궁 사건은 그 아들 경덕왕의 그것보다 아버지 신문왕 쪽에 더 닮아 있지 않나 싶다. 태자로 책봉된 아들까지 둔 왕비를 내보낼 때의 이유란 반역 사건에의 연루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해서다. 다음 해 태자의 죽음도 여기서 멀지 않은 까닭이었을 터다. 

사실 처음에 살펴보았던 경덕왕의 첫 왕비 삼모부인의 출궁 사건에도 왠지 반경의 냄새가 난다. 아무리 아들이 없다 한들 그토록 재빨리 갈아 치워버릴 수 있을까? 만월부인에게는 15년씩이나 말미를 주면서 말이다.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와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신라의 진골은 대체로 진흥왕부터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출발은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 부터다. 삼국 통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거기 공로자가 나오게 마련이고,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태종과 문무왕댕에는 강력한 왕의 힘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골화된 이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왕실과 가까운 최고 권력층에서 터졌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아직 부왕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그 주모자는 다름 아닌 바로 왕의 장인이지 않았던가?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는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막을 불러왔다. 220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춰 놓고 있겠는가? 훔쳐간들 닳지 않는 것이라면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런데 순정공은 그 이상의 일을 당했다. 아예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여기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 그가 앞서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던 노인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 그가 알려 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우너문에서 '중구삭금衆口삭金'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읻. 노인은 그렇게 힘을 모을 방법으로 노래를 권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일연은 노래의 제목을 [해가]라고 붙여 놓았다. 전체적인 구조는 수로왕의 탄생담에서 나오는 [구지가]와 흡사하다. 노래가 끝나자 용이 부인을 들고 나와 바쳤다는 결말도 수로왕이 출현하는 과정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이는 수로왕을 다룰 때 자세히 보기로 하자. 229

첫 성전환증 환자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경덕왕을 꽤 자주 등장시킨 편이다. [기이]편의 '경덕왕과 충담사 그리고 표훈대덕'조는 신라의 왕대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잡혔다 할 수 있으나, [감통]편의 '월명사의 도솔가'조에는 주인공으로 다시 한번 나오고, 다른 여러 조에서는 그 왕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의 이름이 관형되어 있다. 

이렇듯 자주 등장하는 데에는 경덕왕보다 사건 또는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중요성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본 대로 경덕왕의 재위 무렵은 신라 사회가 전성기인만큼 여러 가지 문제적 사건이 많이 일어나긴 했다. 그래서 경덕왕인지 모른다. 

경덕왕을 전후로 한 왕대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읽힌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경덕와 때 인상적인 일들이 줄을 잇는다. 실명한 딸을 위해 향가를 지어 간곡히 기도하는 회명, 자기 손바닥을 뚫어 새끼줄을 꿰고는 필사적으로 염불하는 욱면이 그 시대 사람인가하면,  땅 속에서 사방불을 캐내고, 황룡사에 종을 만들어 건 이가 경덕왕이다. 234

왕은 매우 이상스럽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게 했다. 아이는 궁안 절의 탑으로 들어가더니 숨어버렸다. 차와 염주는 미륵보살을 그린 남쪽 벽 앞에 두었다. 그제야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불러 모셨음을 알았다.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여기사 잠깐 월명사 이야기를 하나 보태고 가자. 그를 말하자면 [제망매가祭亡妹歌]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서정 시가로서 신라향가 최고의 명편이다.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이시를 썼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241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본디 열 줄짜리 시지만, 해석하면서 종장을 석 줄로 처리해 보았다. 충담사는 자기의 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다. 왕까지도 그가 향가를 잘 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스님의 시가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다'는 왕의 말에, 충담사는 태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정도다. 충담사는 같은 시대를 산 월명사와 함께 현재 전해지는 최고의 향가 시인이다. 

충담사는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 자식에 비유한다. 고대 왕권 국가였기에 나올 법한 비유였으나,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도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낟.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여자 같은 남자. 
경덕왕이 충담사에게 청해 들은 노래 [안민가]는 곧 왕의 유언이었는지 모른다. 24년간을 왕위에 있으면서, 삼국 통일의 위업 아래 자랑스럽게 전해지는 김춘추 직계로서의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 247 격화되어 가기만 하는 진골 계급간의 암투와 반목이 왕위 계승만 아니라 자칫 나라의 흥망과도 연결되리라는 근심이 그를 짓눌렀다. 249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었다 했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건대 이는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증세다. 

사람은 누구나 남성과 여성 호르몬을 같이 가지고 있다 한다. 다만 남성은 남성 호르몬이, 여성은 여성 호르몬이 더 강할 뿐이다. 그런데 희귀한 경우지만, 남성의 몸을 타고 났으면서도 여성 호르몬이 더 강한 사람이 있고, 빈대의 경우도 있다. 그들이 겪는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성전환증이라 한다. 그들은 남성이면서 여성처럼 놀고, 성인이 되어서는 화장이나 옷차림을 아예 여성의 모습으로 바꾸어 버린다. 물론 여성은 반대다. 오늘날 이런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법적으로 성전환을 시켜주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어 있다. 양성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불법적으로 수술을 감행하는 숫자가 한국에서도 암 수술 환자 다음으로 많다.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을 것이다. 그는 정식 왕비만 둘이었는데, 16년간 재위하였으므로 24세에 죽었지만,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도 없다. 물론 재위 마지막 해의 반란 사건 때, 왕을 포함한 전 가족이 몰살당했을 가능성은 있다. 혜공왕의 성전환증은 신라 왕실이 오랫동안 근친혼을 했다느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한 직계가 6대에 걸쳐 8명의 왕을 내었으니 할만큼 했다고도 하겠다. 이후 신라 왕실은 김양상과 김경신등 내물왕계 후손이 다시 왕위에 오르고, 김춘추 직계는 어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쓸쓸한 종막이다. 

한편 일연은 '혜공왕이 선덕왕과 김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썼는데, 여기에 약간 문제가 있다. 우선 선덕왕이 김양상이므로 이는 분명한 착오다. '선덕왕 곧 김양상'이라 하든지, '선덕왕과 김경신'이라 했어야 맞다. 김경신은 김양상의 동생이다. 그리고 그들이 혜공왕을 죽였다고 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금 다름다. 251

서양의 동화에서 이발사가 여기서는 두건 만드는 기술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대나무를 베어버린 다음의 이야기도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똑같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의 동화를 들으면서 컸다. 거기에 따르는 구구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 여기서 거들 일은 아니고, 설화가 지닌 우연한 일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어서, 다만 우리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에서 더 넓은데 어찌 그다지 철저히 외면당했는가 그 아쉬움만 표명해 두기로 하자. 그것은 무엇인가?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이 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덧붙여 있다.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숙종랑등이 금란에 가서 놀다가, 적이 군주를 이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뜻을 담아, 노래 가사 세 편을 지었다. 심필 사지를 시켜, 가사가 적힌 원고를 대구 화상이 있는 곳에 보내, 세 노래를 짓도록 하였다. 처음은 [현금포곡], 둘째는 [대도곡], 세 번째는 [문군곡]이다. 왕에게 들어가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칭찬하였다. 267

무릇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 이가 여기 무당 하나뿐일까?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정리하자고 꺼낸 이야기라면 글머리와 맞지 않다. 백제의 멸망을 예언한 이 기사처럼,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또한 같은 처지에 다가와 있었다. 찾으니 이지러지는 달에서 우리가 읽는 역사의 유전이 감상적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해도,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긑을 보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꿏은 목숨만 앗아갈 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71

나라가 망하는 징조
꼭대기에서는 왕을 죽고 죽이는 혼란 속에 아래 백성들의 삶이 편안할 리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막다른 길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그런 분명한 징후들을 일연은 '효공왕'조와 '경명왕'조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제 52대 효공왕 때인 광화 15년은 임신년912년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년에,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또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하면,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의 사흘 간이나 서로 싸웠다. 

제목이 '효공왕'이지만 실제 효공왕과 신덕왕 때의 기이한 사건을 함께 소개하였다. 효공왕은 원성왕 후손의 마지막 왕잉고, 신덕왕은 박씨 문중이 왕위에 복귀한 첫 왕이다. 대개 사찰과 관련된 일들이어서, 그것이 더 일연의 관심을 사기에 족했겠지만, 왕조의 마감을 알리는 예고편 치고 섬뜩한 내용도 있다. 이는 '경문왕' 조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제 54대 경명와 때인 정명 5년은 무인년918년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 

7년은 경진년920년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이 그림자가 금모今毛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 간이나 했다. 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뜨락으로 나와 달리다가 벽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286

일연은 위호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달리 그가 부호부인의 남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유모의 남편이라면 여왕과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날터인데, [삼국사기]에서는 여왕이 위홍과 정을 통했다고까지 하고 있으니, 위홍은 꽤 매력적이 남자였다는 것인가? 대구라는 스님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을 편찬한 이도 바로 그다. 

거리에 나붙었다는 [다라니]는 일종의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1980년대에, 혹독한 군사 정권을 비판하는데 큰 몫을 했던 노가바의 출생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 다라니의 유행 경위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 엉뚱하게도 왕거인이 작자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거인을 은거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감옥에서 이런 시를 지어 억울하을 호소하였다고 하니, 왕거인이 진범은 아닌 듯한데, 정작 노가바를 누가 지었는가 알려 하기보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이라고 단박에 지목하여 철창에 집어넣은 그 사회의 꽉 막힌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늘이 감옥을 흔들었다는 대목은 사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289

더욱이 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도 10여 년이 지난 다음이다. 벌써 새로운 나라가 시작하여 새로운 기운이 뻗쳐나갈 때, 새 왕조에 편입되지 않은 두 세력 곧 신라와 후백제를 곱지 않게 볼 여지가 충분하거니와, 후백제 견훤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앉혀진 경순왕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정사의 입장을 견지하다보니 그나마 끝까지 공식 명칭을 쓰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일연은 여기서 자유로운 편이라 김부대왕이라는 멋쩍은 표현도 마다하지 않은 것일까?

사실 '김부대왕'조의 이 첫 부분에서부터, 구원병을 보내고 조문을 하고, 주인공은 왕건으로 바뀌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두번재 대목을 왕건의 경주 방문으로 설정한 데서 분명해진다. 

[포석정에 대하여]
신라 멸망의 상징으로 포석정 연회를 든다. 마치 박정희의 마지막 만찬처럼. 그러나 포석정은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고 폄하되어야 할 곳이 아니다. 

포석정이 단순한 연회의 장소인지, 그보다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와서 춤을 춘 이야기는 후자에 가깝고, 여기서처럼 경명왕이 연회를 벌이다 견훤에게 혼찌검을 당하는 이야기는 전자에 가깝다. 

그러나 대체로 포석정은 그 두 가지을 아우르고 있지 않나 싶다. 고대 왕권 국가에서 왕의 연회 장소가 곧 제사의 장소를 겸하고 있었음은 일본의 경우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특히 2000년 2월, 나라시에서 발견된 거북이 모양의 석조물은, 그 모양새나 물을 흘려 보내는 구조가 포석정과 매우 닮아 있는데, 그 곳에서는 대체로 왕실과 나라의 평안을 비는 행사를 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포석정의 기묘한 굴곡은 거북을 닮아있고, 거북은 영생불사의 신선 사상과 연결되며, 거기에 물을 흘려 보내는 구조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세상의 어떤 순조로운 흐름을 기원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97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아쉬운 백제의 역사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다만 시조 왕의 사적을 잠깐 언급한 다음, 나머지는 신라에 비해 옹색하기 그지없다. 

한편 [삼국사기]가 비슷하 상황일진대,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여러 역사학자들이 마치 사금을 모으듯, 고구려와 백제의 잃어버린 역사를 여기저기 역사서에서 그러모아 짜집기를 해놓고 있지만, 그것이 시원스레 당시를 재현해 주지는 못하는 듯 한다. 정녕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졌다면, 구구려에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07

일본의 독립선언
일본의 왕실이 보다 튼튼한 체계를 갖춘 것은 역시 나라시대였다.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시대, 이 때를 아스카 문화라 한다. 이 시기가 앞서 말한 백제계 왕들의 재위 연간이다.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들어 종주국 백제가 멸망하였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내심 독립할 요량이던 일본 왕실로서는 어쩌면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을지 모른다.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7년 뒤, 곧 670년에 의자왕과 항렬이 같았던 일본의 천지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주욱의 말을 익히더니, 왜라는 명칭을 싫어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신당서]의 제 220권에 나오는 [동이전]'일본'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 내용을 [신라본기]'문무왕'조10년에 전재해 놓고 있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최초 사용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대목이다.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느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에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325

일연이 쓴 '무왕'조를 사실로 보아 무왕의 출생이나 왕위 등극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것도 등극과는 서열이 먼 상태에서 만난 여염집 여자 더욱이 과부에게서 얻은 아들을 떳떳이 자기 집 안으로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 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난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다른 한편, '무왕'조의 앞뒤 부분은 사실이고, 그 가운데 곧 선화 공주와의 사건은 이런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들러붙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가능성을 [바리데기 설화] 견주어 가며 설명해 본다. 

먼저, 선화공주가 공주의 신분으로 쫓겨난다는 점에서 [바리데기 설화]의 바리공주와 비슷하다. 설화 속에서, 아들을 바란 왕은 줄줄이 여섯 명의 딸을 낳고, 다시 일곱 번째 딸이 태어나자 내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바리공주다. 선화공주도 셋째 딸이다. 그가 선화공주라는 이름을 얻고 아버지가 진평왕으로 설정된 것은, 실제 진평왕에게 딸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진평왕에게 딸이 셋이고, 그 가운데 셋째 딸이 선화공주라는 말은여기 서동 이야기에서만 나온다. [삼국사기]에서는 첫째 딸이 덕만공주로 아버지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고, 다른 딸이 천명부인으로 김춘추의 어머니라고만 전해준다. 셋째 딸이 있었는지, 그 딸의 이름이 선화공주인지 사실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선화공주가 설화적 인물일 가능성을 보여 주는 첫번째 이유다. 

그런데 첫째 딸이 선덕여왕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진평왕이라고 해서 아들을 바라지 않았을 리 없으며, 후사를 딸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처지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오르지 말란 법은 없다. 335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한느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이다.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미륵은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treya의 음역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현우경]의 권12[바파리품]에 다음가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중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마달왕에게 한 재상이 있어 아들을 얻었는데, 32상을 타고 났으며, 그 어머니가 아이를 가진 다음부터 마음이 자비롭게 변하였다. 점 치는 사람이 미륵이라고 이름지르아 했는데, 미륵은 곧 자비라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곧 바리불다라국의 국사였더 외숙부 바파리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오래지 않아 여러 경전을 꿰뚫어 알게 되자, 바파리는 다른 15인의 제자와 함께 미륵을 석가모니불에게 보낸다. 석가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마침 왕사성의 기사굴 산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려 한 것이다. 여기서 바라피의 16제자은 모두 석가에게 감화되어 불제자가 된다. 

그런데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즉시 얻었지만, 미륵만큼은 장차 석가의 교화가 끝난 다음 이 사바세계에 다시 나타나 부처가 될 인연이 있으므로 일생보처불로 남게 된다. 일생보처불이란 중생을 모두 이끌고 대각을 이루기 위해 한 생만 더 후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부타 곧 보살이다. 

석가는 금루직성가사를 미륵에게 전해준다. 이 옷은 석가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사파제가 조카에게 입히려고 오랜 세월 금실로 정성들여 짠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지구상의 인간 수명이 8만 4000세가 되는 56억7천만년 뒤에, 미륵이 다시 태어나 성불하고, 용화수 아래서 삼회의 설법을 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 예언한다. 343

사실 초반전의 싸움은 견훤이 훨씬 우세했다. 견훤 자신이 싸움에 능할 뿐 아니라 휘하의 부하들도 뛰어났고 군사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왕건은 '임시방편으로 화친하는 척하고, 그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작전으로'일관했음을, [삼국사기]는 여기저기 적어 놓았다. 일연도 그 글들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은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와 살해일 것이다. 그 대목은 앞서 김부대왕을 쓰면서 소개했다. 

이 일로 신라의 여론이 견훤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견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고려와 가까워지려는 신라를 확실히 눌러놓자는 계산이었지만, 도리어 등뒤의 적을 만든 셈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왕건이 나라를 세운 지 10여 년이 지난 다음이지만, 형세는 여전히 견훤이 압도하고 있었다. 신라를 돕겠다고 뒤늦게 출동한 왕건은 정예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만나 크게 싸웠는데, 김락과 신숭겸은 전사했고, 왕건 또한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결국 왕건은 견훤을 대적하지 못한 채 그가 하는 대로 내러벼 둘 뿐이었다. 고려조에 예종이 지은 유명한 노래 [도이장가]는 바로 이싸움에서 죽은 두 장군을 추도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의성부의 태수 홍술이 죽자 왕건은 '내 오르날을 잃었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이 때가 견훤의 전성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353

먼 뱃길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절에는 어느 곳에나 탑을 세운다. 그 탑의 의미가 여러 가지나,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은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탑의 생김새와 자질이 특이하다. 네모나게 4면의 5층, 게다가 붉은색 반점을 가진 부드러운 돌로 만들어졌다고, 일연은 기록한다. 일연은 분명 이 탑을 보았다. 아마도 그의 나이 40대 중반쯤, 남해에 살았던 때였을 것이다. 지금 이 탑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닳아서 없어졌는데, 일연 때는 정도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리라. 어떻든 이 탑은 신라나 가야의 고유한 형태거나,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은 북방계는 아니다. 

물론 일연은 이 때 아직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라는 사실을 들어, 당시에 만드러진 불탑으로서의 가능성을 약간 의심하고 있다. 역시 같은 '금관성의 바사석탑'조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우리나라에는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이르지 않았고, 사람들이 기꺼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본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년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지었고, 또 왕후사를 창건하여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다. 378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오직 한결같이 정밀하네

길 가던 나그네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꾼은 밭 갈기를 양보해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모든 백성이 태평성대를 맞았네

이윽고 풀입의 이슬이 마르는 것처럼
장수하던 나이를 보전치 못해
천지의 기운이 변해지고
조야가 모두 슬퍼했네

그 발자취 금과 같았고
그 명성 옥 소리처럼 떨쳤네

'가락국기'는 이어서 수로왕의 사당에 배향되는 제사를 소개하고 있다. 아들 거등왕부터 9대손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5일 그리고 월 5일과 15일이면 풍성하고도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지냈는데,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형왕 때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난 다음은 사정이 달랐다. 제사는 소원해지고 사당은 폐허가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무왕이 이 제사를 일으켰다. 그가 왜 끊어진 제사를 이었는가? 381 문무왕에게 직접 들어보자

'짐은 가야국 수로왕의 9대손 구형왕이 본국에 항복할 때에 데려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현 잡간의 딸 문명화후가 낳았다.그러므로 수로왕은 내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 남아 있으니, 신라 종묘에 합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라' 382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나,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물꼬를 튼 처음 사건, 이차돈의 순교는 그래서 일연의 관심을 사기에 족했다.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거기에 신라 불교의 공인 그리고 한국 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의미를 보탠다면 더 이상의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 이차돈을 일연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이차돈의 순교는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조에서 다루고 있다. 원종은 법흥왕을 가리키고, 염촉은 이차돈의 다른 이름이다. 제목에서 원종을 앞세워 그가 '흥법'의 주인공인 듯하였지만, 역시 중심은 염촉 곧 이차돈에 가 있다. 

이 조는 크게 삼국사기를 인용한 서론, 촉향분예불견사문을 인용한 본론, 향전등을 인용한 마무리, 이렇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일연은 첫 단락에서 삼국사기의 인용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사실 삼국사기의 본문에서 이차돈의 순교는 꽤 자세히 쓰여져 있다. 거기에는 김대문의 계림잡전을 인용하였다고 밝혔는데,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매우 정연히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연은 이 자료에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인용한 부분마저 '법흥대왕이 즉위한 지 14년 되던 해'라고 해서, 삼국사기가 5년이라고 밝힌 것과 다르다. 402

'황룡사의 장륙'조를 필두로 '황룡사의 구층탑'조에서는 절정을 이루며, 황룡사 종에 대해서는 몇 개의 대표적인 종을 소개하는 조 가운데 포함시켰다. 무려 세 조에 걸친 집중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정작 황룡사 자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적고 말았다. 황룡사에 있었던 불상과 탑 그리고 종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다. '황룡사의 장륙'조를 시작하면서,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즉위한지  14년 곧 계유년553년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거기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지었다'는 정도다. 이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4년'조에서 인용한 데 불과하다. 다만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 '는 말만 덧붙이고 있다. 

왜 그랬을까? 절의 구조라든가, 전체적인 규모라든가, 오늘날 황룡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터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이 이것인데, 좀더 자세한 소개가 없는 점 무엇보다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굳이 이유를 찾으면 탑상 편의 성격상 그랬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소개할 탑상 편은 기본적으로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부분이고, 거기에 경전과 사리가 추가된다. 이것들은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만들고 떠받들어졌다. 그에 비한다며 절 자체에 대한 소개는 무척 미미하다. 절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어떤 까닭으로 절이 만들어졌는지 연기담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 규모와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진다. 이는 황룡사만이 아닌 다른 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기담을 참고하건대, 별궁을 지으려다 절로 바꾸었다면, 이는 황룡사를 나라의 원찰로 삼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원찰의 개념이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결과를 두고 볼 때 내릴 수 있는 개념 규정이다. 이는 장륙존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셨다든지, 금당 앞에 구층탑을 만든 까닭을 통해 충분히 증명된다. 422

'무엇 하러 이 곳에 이르렀나요?'
'부처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신인이 절하고 나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남았나요?'
'우리 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졌고, 남쪽으로 왜인들과 붙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범하는 등, 인근의 적들이 설칩니다.'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 노릇을 하고 있어서, 덕은 있으되 위엄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건드리는 것이오. 빨리 당신 나라로 돌아가야 하오'
'고향에 돌아가 무엇을 해야 좋겠습니까?'
'황룡사의 호법룡은 내 큰아들입니다. 석가모니의 명령을 받아, 거기 가절을 지키고 있지요.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구층탑을 지으시오. 이웃 나라들이 항복해 오고, 구한이 조공을 바칠 것이며, 왕실이 영원히 평안하리다. 탑을 세운 다음 팔관회를 설치하고, 죄인들을 사면해 준다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그런 다음 나를 위해 서울 근처 남쪽 강가에 자그마한 절을 지어 나의 복을 빌어 주면 나 또한 덕을 갚아 주리다. '

말을 마치자 신인은 구슬을 받들고 나와 바치고는 홀연히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본국을 돌아온 것은 643년이었다. 처음 문수보살을 만난 때로부터 7년 뒤의 일이다. 자장은 원래 왕족이었다. 곧 선덕여왕을 만나 탑을 지을 일에 대해 아뢰었다. 그렇다면 구층탑의 기본적인 모델은 중국에서부터 왔다고 할 것이다. 일연은 자장이 신인을 만나는 부분에다 절의 기록을 인용해 주석을 붙이기를, '종남산의 원향선사에게서 탑을 지은 연유를 들었다'고 했다. 자장이 중국에 있는 동안 모델이 될 만한 탑을 두루 찾아보았다는 증거다. 433

그러다면 왜 오대산인가? 앞서 중국 오대산의 경우를 잠시 설명했지만, 한국의 오대산도 같은 양상을 보여 준다. 여기에 '오대산의 오만 개 진신'조의 진짜 이야기와 주인공이 등장한다. 바로 정신왕의 태자 보천과 효명 두 형제다. 일연은 여기서 주석을 달아 정신왕은 정명왕이라고 불렸던 신문왕, 효명은 효소왕이 잘못이라고 설명하였다. 

두 형제는 은밀히 이 세상에서 벗어나 뜻을 약속하더니,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빠져 나와 몰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산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암자를 짓고 사방을 두루 찾아 예불을 드리는데, 그 봉우리가 오대산이라 이름 붙인 것처럼 다섯이었다. 다섯 봉우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동대는 만월산인데 1만 명의 관음진신이 나타나고, 남대는 기린산인데 여덟 분 큰 보살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관음진신이 나타나고, 남대는 기린산인데 여덟 분 큰 보살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서대는 장령산인데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북대는 상왕산인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명의 대아라한이, 중대는 풍로산 또는 지로산인데 비로자납물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있었다. 이아 같은 5만 명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불을 드렸다. 

동서남북으로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1만 명씩과 아라한 500명이고, 가운데가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하는 문수보살 1만명이 있다고 하였다. 오대산의 중심이 문수보살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금도 월정사에 가면 금당 자리에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바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금당에 붙이는 이름이다. 445

내가 존경하는 선배 시인이 쓴 [절]이라는 시가 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내 마음 오늘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래 그 옛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오라고
잎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안에도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절하며 간다.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차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 살 수 없다. 456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일연의 생애와 그 반영으로서 삼국유사
개인사의 그늘에 놓일 책이 아니라는것을  잘 알지만, 삼국유사는 때로 일연의 생애와 견주었을 때 보다 맑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장춘과 그의 어머니 보개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진 아들을 찾고자, 애끊는 마음을 부처님 앞에 가 빌고 비는 어머니는, 다름 아닌 일여노가 그 어머니의 대역들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미물이라는 짐승에게서도, 일연은 끊지 못할 어떤 인연과 정을 발견한다. 

영취사는 지금 울산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5번 국도의 울산 경계를 막 벗어난 곳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던 시절이다. 이 절에서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일연은 '영취사'조에서 소개하고 있다. 469

부득은 애처로운 마음 가눌 길 없어 등불을 가만히 피워 놓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더니 목욕물을 부탁했다. 노힐부득은 두려운 마음이 엇갈렸으나,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항아리 욕조를 마련해 여자를 거기앉히고, 새로 물을 끓여 씻겼다. 그러자 욕조 안의 물이 향기를 가득 피우면서, 금빛의 즙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노힐이 크게 놀라자 여자가 말했다. 
'우리 스님도 여기서 씻으시지요'
노힐은 굳이 권하자 이에 따랐다. 문득 정신이 상쾌하고 맑아지면서, 피부가 금빛이 되었다. 그 곁을 보았더니 어느새 연대가 하나 나타났다. 여자는 거기 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나는 본디 관음보살이오. 스님이 대보리를 이루도록 와서 도운 것이라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정체는여기와서야 밝혀졌다.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시험삼아 두 사람을 방문했던 것이다. 거기에 박박은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지만, 부득은 합격한 셈이다. 
'제
성불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과음보살이 흔히 여자이 모습인 것은 삼국유사안에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여자의 모습인가는, 일연이 결론 부분에서 '여자는 부녀자의 몸으로 나타나 섭화자라 할 만하다. 480

문면으로만 놓고 보건대 원효의 완전한 실패담이다. 진신을 만나러 간다는 사람이 길가다 마주친 여인들에게 희롱이나 일삼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될 판이다. 서답이란 여인네들이 월경을 할 때 입는 속옷이다. 속옷인 것만도 남정네들에게 보이기 민망하려니와, 더욱이 월경 때 묻은 피를 빨러 나온 터에, 거기 다가가 물을 달라 하는 스님이 속절없어 보인다. 

소나무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 화상'이라 했다 한다. 가운데 빈 자리에 '호'를 넣으면 될까 한다. '제호'의 본디 뜻은 뛰어난 스님이다. 아마도 이 새울음은 '제호화상은 그만두시라'는 뜻일 것이다. 제호화상은 원효를 가리키지만, '잘난 스님은 그만두시오'라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라고나 할까? 진실을 만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일의 전말을 깨닫기는 낙산사 금당에 도착해서다. 파랑새가 앉아 울던 소나무 아래서 보았던 갖신의 다른 한 짝이 금당의 관음보살 앞에 놓인 것을 보고서다. 관음보살이 여성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앞서도 보았지만, 원효는 보살의 시험에 여지없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실패만이 아니라 낭패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실패일까? 원효는 톡톡히 낭패만 당한 것일까?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관음보살인줄 알았건 몰랐건 만나기는 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에서 박박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까? 만났으면서도 만난 줄 몰랐을 뿐이다. 그런 뜻밖의 만남이 곧보살 과의 만남임을 영원히 모르고 지났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커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 496

신라의 삼기산을 떠나 중국에서 11년 동안을 수행한 원광이 다시 돌아온 해는 앞서 적었다. 그로부터 앞 이야기의 후반부는 이어진다. 

범사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러 예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이르렀다. 밤중에 신이 와서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바다와 육지 길로 오가는 일이 어떻던가?'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평안히 이르렀나이다.'
'내 또한 법사에게 계를 주고 싶은데'
그래서 윤회하는 세상에서 서로 주제해 나가자는 약속을 하였다. 그런 다음 법사가 청했다. 
'신의 진짜 모습을 뵐 수 있을는지요?'
'법사가 만약 내 모습을 보고 싶거든 아침에 동쪽 하늘가를 보라'
법사는 다음 날 그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강 닿아 있었다. 그 날 밤 신이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기이하고 뜻밖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비장산이라 부른다. 
'비록 이런 몸을 가졌더라도 무상의 고통은 벗어나지 못하오. 그래서 내가 어느 달 어느 날에 그 고개에서 몸을 버리리니, 법사는 와서 영원히 가는 혼을 송별해 주시오'

약속한 날을 기다렸다가 가서 보았다. 거기에 한 늙은 여우가, 검기는 옻칠을 해놓은 것 같은데, 헉헉 거리며 숨을 쉬지 못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죽었다. 519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 원효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보이더라도 부분만 보인다. 그가 그린 어느 한 부분만 보이고, 그가 한 말의 어느 한 부분만 들린다. 그래서 원효에 대해서는 가지가기 이야기가 난무한다. 

일연은 원효의 생애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의해 편에서 원효의 전기를 쓰며 지은 제목 '원효불기'를 풀어보면 그렇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본문을 시작하는 첫머리에 원효를 관형 하기를 '성사'라 한 것이다. 같은 의해 편에서 일연은 의상에게 법사라 하고, 자자에에게 율사라 했다. 세 분은 신라 불교를 대표한다. 일연이 그런 세분을 평가하는 첫마디는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인관형 어에서 들을 수 있다.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530

종남산과 태백산이 똑같은 봄
일연이 원효를 성사라 관형하는 한편 의상을 법사라고 했다는 말은 앞서 했다. 중국에서 동문수학하던 법장이 그를 불러 화엄법사라 한 데서도 그 까닭을 찾아보았다. 일반적으로 승려를 높이는 말 가운데 법사가 쓰이지만 의해 편에서 그것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왜 법사일까?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 원효의 현실주의를 앞서 소개했거니와 의상의 교조주의 또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일편 딱딱하기만 한 그의 생애에서 자못 낭만적으로 보이는 선묘의 이야기는 송고승전에 실려 잇다. 두 번째 중국 행, 산동 반도의 등주에 발을 디딘 의상은 생계를 꾸릴 탁발길에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난다. 선묘는 수려한 의상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 뜨거운 정을 품는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철석같다. 끝내 선묘는 의상의 불심으로 감동되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한다. 

선묘를 의상이 다시 만난 것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서였다. 등주의 선묘 집을 찾자 그녀는 단 앞에 무릎을 꿇고 일심으로 합장 공경 예불하고 있었다. 의상은 션묘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다 보다 발길을 돌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선묘는 선창가로 달려나가 보지만, 배는 이미 떠나고, 멀리 의상의 모습은 아스라하기만 하다. 이 때 선묘는 몸을 바다로 던진다. 그런데 순식간에 용으로 바뀌어 의상이 탄 배를 호의해 신라까지 이르렀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음 다음 거기 우물을 하나 만들어 용이 된 선묘가 머무르게 했다. 1950년대에 나왔던 어느 연구자의 논문에는 그 우물을 선묘정이라 부르며, 최근까지도 우물이 남아 있었다고 쓰여 있다. 568

의정의 승전에 나오는 현태와 구본이 이들일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숫자는 더 불어난다. 그런가하면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압축고승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승려들은 더 있을 것 같다. 

그 길이 얼마나 험했던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붙 엇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바다 얼어서단을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깍아만 간다. 

사실 이 책은 그 전부가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여행 경로며 보고 들은 자세한 것을 다 알 수 없다. 돈황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겨우 100여 년 전, 그것으로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 준다. 

겨울날 투카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옲은 이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572

신라의 밀교 승려
여기서 소개하는 여러 승려는 모두 밀교에 속한 이들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밀교 승려 세 사람을 신주라는 이름 아래 묶어 놓고 잇다. 먼저 이 편의 특징을 설명한다. 

전부 5권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의 마지막 권은 이 신주, 편부터 시작한다. 신주라는 말은 밀교 신승들의 사적을 뜻햐겠는 데, 일반적으로 다른 고승전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다. 일연은 밀교승들이 '신령스런 주문'을 외우기 때문에 그것을 특징 삼아 이렇게 이름짓지 않았나 싶다. 실제 신주 편에서 소개하는 밀본, 혜통, 명랑 세 사람의 밀교승들은 모두 주문을 외워 어떤 어려움을 물리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앞서 고승들의 전기인 의해 편에 넣어도 된다. 조의 제목을 짓는 방법이나 기술 방식이 같은 것도 일연이 이를 의식해서 였을 것이라 보이고, 의해 편에서도 진표나 심지 같은 승려는 밀교적 요소가 다분한 승려로 보이기도 하는데, 굳이 편을 달리해서 묶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밀교는 같은 불교이면서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사실이다. 밀교의 기본 경전인 대일경에 따르면, 수행의 10단계가 있는 데, 거기서 9단계까지를 현교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단계를 밀교의 세계로규정한다 . 현교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 있는 불교랄까,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 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605

삼국유사 저자의 이름
제5권의 머리에 적혀 있는 저자의 이름은 무척 길다. 위 사진에서 보는 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줄에 '국존 조계종 가지산하 인각사 주지 원경충조 대선사 일연 차'이라 되어 있다. 

국존은 국사와 같은 말이다. 원나라 간섭 시기에 우리의 관직 명칭을 한 단계씩 낮추면서, 국사도 국존이 되었다. 조계종은 기실 조선조에 들어와 선종을 합친 종단의 이름이다. 지금의 조계종이 바로 이것을 잇고 있다. 가지산은 고려시대 아홉개 선종 산문 가운데 하나로, 이일연이 속해 있던 산문이다. 인각사는 일연이 마지막으로 주석했던 절이고 원격충조는 일연이 주근 다음 나라에서 내려 준 시호다. 대선사는 고래시대 승려의 위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다. 608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불교적 정신이 바탕 된 사회
지금부터는 세 번에 걸쳐 감통 편의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9개 편 중에 일곱 번째인 감통 편은 기본적으로 의해 편과 성격이 비슷하다. 감통이라는 용어도 중국의 고승전에 나오지만, 승려들이나 불교신자들이 이야기를 담았다는 데에서 그렇다. 다만 여기 나오는 승려나 신도들은 고승이라기보다 다소 평범한 사람들이다. 더러 고승의 반열에 올릴 만한 승려도 전기로서 엮어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 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까지 얼마만큼 체화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전부 10조로 이루어진 이 편에서 그 같은 성격이 잘 드러난 이야기를, 나는 정수 스님의 경우로 설명하곤 한다. 

제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엇다. 
겨울철어는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쌓이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웠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621

불교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담고 있다는 삼국유사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다. 사실 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의 전생담에 보이는 것처럼 호랑이는 도움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어떤 경우에 나오고 있으니, 해악을 끼치는 동물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옛 이야기나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그렇지 아니한가? 일연이 삼국유사 안에 거둬들인 감통 편의 호랑이 이야기 '김현이 호랑이에 감동되다' 조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조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째 부분이 이 조의 제목대로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사랑, 둘째 부분이 이와 비교하기 위해 실어 놓은 신도징과 호랑이 부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연이 의론을 덧붙인 부분이다. 

둘때 부분의 신도징 이야기는 인용처가 확실하다. 바로 중국의 송나라때 이방이 황제의 명을 받아 지은 태평광기의 429권에 나온다. 부분적으로 생략하거나 글자를 바꾼 곳이 있지만, 전체 내용은 거의 그대로다. 그에 비해 정작 몸통이라 할 수 있는 김현의 이야기는, 호원사의 연기 설화나 김현이 손수 지었다는 논호림이라는 글에서 나왔겠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오직 일연이 거두어들인 삼국유사에만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이야기가 일연보다 조금 지난 시기에 편찬된 최자의 보한집에 변산노승전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것이 사찰 연기 설화라거나, 호랑이가 사람으로 변하여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구조 때문에 한 뿌리에것 나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더 적다. 638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다시,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
효소왕이 절을 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왕의 은덕을 과시하려는 듯 성대히 베푼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을 것이다. 감통 편의 진신이 공양을 받다'조에 나오는이야기다 . 
절의 이름은 망덕사. 후에 제망매가의 시인 월명사가 거처한 절로도 이름난 곳이지만, 본디 당나라 황실을 위해 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지으면서, 당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사천왕사라고 둘러댄 바로 그 절이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중국 황실을 위한 절이 되었고, 경덕왕 14년에는 절의 탑이 흔들렸는데, 이 해에 바로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언해 준 것이라고 믿었다. 

효소왕 6년 정유년에 낙성회가 열렸다. 그런 말석에 남산의 비파암에 산다는 초라한 차림이 승려 한 사람이 있었다. 한편으로 언짢았으나, 그에게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자비심을 과시할 기회라 여겨, 한 자리 마련해 주었다. 

자리가 파할 무렵, 왕은 내심 거만하게 다짐해 두었다. 짐짓 놀리는 목소리였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653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상
효소왕의 이야기를 하는 일연의 본디 마음은 다른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사하게 차려 입어야 사람 대접받는 것은 지금 세상이나 예나 마찬가지, 효소왕이 걸려 넘어진 것은 그런 겉모습에 집착한 데 까닭이 있었다. 그래서 일연은 경전에 나오는 다른 예화 하나를 더 소개하고 있다. 

옛날 계빈에 큰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촌철살인의 예화다. 계빈은 옛날 북인도의 캐시미르 지방에 있던 나라다. 일연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효소왕의 일이 그와 같다고 덧붙인다. 662

숨어 사는 이이 멋
숨어 사는 것의 뜻
삼국유사의 여덟 번째 편은 피은이다. '피은'은 피세은거, 즉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대체로 승려들의 삶이란 피세은거 자체다. 출가가 벌써 이 세상의 인연을 일정 부분 끊는 것이고, 산중의 절에 들어가 세상과는 다른 삶을 영위하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숨어 사는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삼국유사 안에 다시 '피은'이라는 제목의 편을 만들고, 그런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까지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그 때까지의 불교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찰의 경우, 그것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나눠 보지만, 고려시대까지 두 가지 사찰은 비슷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조선조 이후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이 확립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회지에 산재한 절들이 차례로 문을 닫는가 하면, 전란을 겪으면서 불탄다든지 그 피해가 산자가람보다 더 심한데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라도 중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산지가람과 평지가람의 공존에서 산지가람의 일변도로, 이것은 불교가 사회의 전면에 있느냐 배경으로 밀리느냐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이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물론 사찰이 산에도 있었듯이 세상과의 완벽한 절연 속에 살아간 승려도 많았다. 그런 그룹들을 다루려는 것이 바로 이 피은 편이 아닌가 한다. 672

그런 까닭에 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적 역사와 설화의 모음이라고 한다면 모르되, 승전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책이거나 거기에는 그 책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념이 불교일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효심이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일연에 대한 탣가 어떠했는지 지금 그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추정해 들어가는 일연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는 너무도 분명히 나타나 있어 췌언이 필요치 않다. 

일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나는 자세하게 쓴 적이 있다. 앞서 잠깐 소개한 일연이라는 그의 전기에서였는데, 여기서 다시 반복할 여유가 없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그 책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연의 비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두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스님은 평소 서울 생활을 즐겨하지 않고, 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사양의 뜻이 매우 깊어, 임금께서도 거듭 그 뜻을 거스르다가, 결국 허락하였다. 근시좌랑 황수명에게 명하여 하산을 호위케 하니, 조야의 인사들이 희귀한 일이라 하여 탄복해 마지 않았다.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96세였다. 

어머니를 모시기가 지극히 효성스러워, 목주 진족숙의 유풍을 사모하여 스스로 목암이라고 호를 붙일 정도였다. 나이가 매우 연만하여서도 총명함이 쇠해지지 않았으며, 사람을 가르치기를 권태로워하지 않았으니, 지극한 덕과 진정한 자애가 아니면 누가 이와 같이 하겠는가. 688

그러고서 옹기로 솥을 삼아 먹을 것을 익혀 드렸다. 진정은 전에 군대에 있을 때, 의상 법사가 태백산에 있으면서 설법을 해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곧 거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걱정하는 눈물겨운 광경이다. 살림도 살림이려니와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처지에 출가를 결심하기가 머뭇거려졌었지만, 단 하나뿐인 재산을 시주하는 어머니를 보고 아들은 자신감이 생겼던 모양이다. 저런 어머니라면 자신이 출가하는 것도 이해하시리라고 말이다. 진정은 조심스럽게 제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효도가 끝나고 나면, 꼭 의상 법사에게 들어가 머리를 깍고 도를 배우려 합니다'효도가 끝난다 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진정이 생각한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두 모자 사이에 이어지는 다음의 대화는, 세상의 인연을 모질게 끊고 출가의 길로 나서려는 이들의 번뇌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어머님은 많이 늙으셔서 오직 제가 옆에서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놓고 출가라니요. 어찌 차마 그러겠어요?'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한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701

진정은 침통한 생각으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쌀독을 뒤집어 쌀 일곱 되를 털어 내, 그 자리에서 밥을 짓고는 말했다. 
'네가 밥 지어 먹으면서 가느라 늦어질까 오히려 두렵다. 내 보는 눈앞엣 그 중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 개를 싸서 서둘러 가거라'
진정은 눈물을 삼키고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어려운데, 하물며 몇 일 먹을 식량마저 탈탈 털어 가다니요? 하늘이며 땅이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세 번을 거듭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모두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거듭 어기지 못해 길을 나서, 쉬비 않고 3일만에 태백산에 이르렀다. 의상문하에 들어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어 제자가 되었다. 이름은 진정이라 하였다. 702

지금 전해오는 향가의 편수가 너무나 적어, 일반적이건 구체적이건 향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기만 하다. 일단 남아 있는 항가만을 가지고 정리해 볼 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첫째, 작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서동가의 서동, 천수대비가의 희명, 헌화가의 노인 정도가 여기서 예외다. 이는 화랑과 승려 사이에 어떤 함수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화랑은 국가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만든 젊은 남자들의 심신수련 그룹이었다. 그들의 심신수련 가운데는 시를 짓는 일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승려들 또한 시를 짓는 링에 쉽게 가까이 할 수 있었겠지만, 신라의 통일 이후 상당수 화랑들이 승려가 되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확징할 수 있기에, 승려와 화랑이 일치되는 부분에서 대다수 향가는 나온다. 바로 그들이 대표적인 향가 시인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앞서 경덕왕과 우러명사의 이야기에서 도솔가 라는 향가를 소개했지만, 그 때 월명사는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재를 올리라는 왕의 주문에, 자신은 화랑의 무리에 속해 있었으므로 산스크리트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줄 안다고 대답한다. 같은 시기의 충담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통일 이후 상당수의 화랑이 승려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 그들은 향가를 능숙하게 짓는 시인들이었다는 점이 확인되는 예다. 

둘째, 향가의 내용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 전해지는 향가는 대체적으로 불교적인 사상이나 정조에 바탕을 두고 잇다. 이는 작가가 누구냐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불교시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개인의 일상이 개인의 정서 속에서 부딪혀 형상화되어 있다. 709

50대 초반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일을 해석해 보는 일은 일연의 사상적 성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앞에서 요약한 13세기의 시대 상황을 다시 떠올리건대, 나라의 체모는 흐트러지고 백성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거니와, 그것은 한두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 괒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중편조동오위의 경우 불교학자 정병조 교수는 이를 일연의 원융적이고 포괄적인 태도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확대해석하기도 하였다. 

일연이 오위설을 군신과의 묘합으로 이해한 점은 그의 독특한 민족 의식의 발로이다. 즉 삼국유사가 신이를 강조하여 몽고에 억눌린 한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웠다면, 이 책을 통하여 군신의 단합을 강조한느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스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733

예컨대 제망매가 를 지은 월명사는 국가의 변괴를 물리칠 연승으로 부름을 받을 만큼 도와 덕이 높은 승려였는데, 범어, 산스크리트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승려가 범어로 주문을 외우지 못한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한느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싱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다름 아닌 향가의 대표적인 시인에게서 보인느 이런 태도가 곧 향가의 성격을 결정짓은 요소다.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 있게 보았던 것이다.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물론 승려이기에 그가 보여 준 행적은 일반적인 경우의 충격적인 것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승려의 신분 아에서는 분명 예외적이었다. 그러기에 누카리야와 같은 학자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을 법한데, 이는 한마디로 사회사적 배경을 무시한 결론이다.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741

운문사를 첫 답사지로 정하고 떠나던 날, 고 서내가 적은 기행문 첫머리다. 지금처럼 자가용은 없었기에 기차며, 버스며 시간에 맞추어 닥치는 대로 타고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차가 없으면 무작정 걸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7백 년 전으로 돌아가 일연도 걸었을 그 때 그 길을 그려보기도 했고, 탑만 남은 빈 터에 절을 일으켰다가 허물기도 수 없이 했다. 물론 그보다 많은 시간을 서로의 옛 애인을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3 ~ 4년을 쏘다니다가 나는 결혼을 했고, 카메라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 나는 삼국유사 사진 찍기를 다시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동하면 그 날로 길을 떠나 혼자 참 많이 다녔다.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 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별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켜 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기 지귀의 짝사랑 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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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0 10. 삼국유사_저자, 구성 [2] 맑은 김인건 2010.05.11 3584
2339 Review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 최우성 2010.05.11 3054
» 10. 삼국유사_발췌 맑은 김인건 2010.05.11 3005
2337 북리뷰 10.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_고운기 [2] 박상현 2010.05.11 3060
2336 북리뷰10.<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三國遺事)>고운기 [4] 이선형 2010.05.10 3030
2335 5-2 <삼국유사> 고운기 [1] 이은주 2010.05.10 2748
2334 북리뷰 <사기열전 > -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 [6] 낭만 연주 2010.05.03 3357
2333 Review 사기열전 [3] 우성 2010.05.03 3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