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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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자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안다. 찜닭 개시와 함께, 이벤트 하다. 매출이 올랐다. 가만히 있었다면,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장사는 문 열어 놓고 손님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손님을 어떻게 끌고 오느냐 고민하기다. 얼마전 정철형 만나다. 이제 입지가 나빠도, 스마트폰으로 찾아오는 시대가 되었다고 이야기. 벌써 부터 불고기 부라더스, 투쌤 플래이스가 무료 엡을 개발했다. 설치하면, 사용자가 메뉴를 볼 수 있고, 가까운 지점을 찾아갈 수 있다. 쿠폰도 다운 받는다.
아직까지 많은 손님이 스마트폰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대박을 바라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다. 매출은 가랑비처럼 내렸다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조금이라도 매출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결국 실력이 된다. 흔히, 좋아하는 일을 하면, 부富는 따라온다고 이야기하다. 반대로,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실력도 좋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력이 좋아진다면 그 일을 좋아하게 된다고도 볼 수도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창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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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화두이자 가장 경쟁력 있는 인간 특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특기할 만한 것을 생각해내고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언제나 주목이 쏠리는 법이다. 물론 창조성이 오늘날에만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토인비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지금 우리는 창조적인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처럼 창조성이 역사를 결정짓는 시점에서, 창조적인 국가와 사회, 조직, 기업, 가장 그리고 개인이 더 큰 경쟁력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세계 국가의 국부의 순서는 창조성의 지표인 특허출원 총량 순위와 일치하며, 조직과 기업은 감동을 일으킬 만한 새로운 상품과 시스템을 얼마나 선보이느냐로 그 존재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5
전통적인 창조성에 대한 연구는 한 천재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르고 특이한가를 밝힌는 특이성 연구idiographi이거나, 여러 천재들이 공통족으로 지닌 유사점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공통성 연구nomothetic중 어느 한 쪽으로 진행되었다. 가드너는 이 두 입장을 종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 업적을 낸 창조자를 선택한 후, 이들 인물의 '특이성'을 자세하게 검토하고 그 속에서 '공통성'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 책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modernera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먼저 그 첫 번째인 '창조성이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에서, 가드너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하고자 한다. 그는 <개인 - 일 - 타인>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내부에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것만으로는 창조성이 발휘되는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우선 그러한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등)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며,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8
나는 인간 경험의 감정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과 인지적인 차원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다소 갈등을 느끼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반 시절에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저서를 읽으면서 인지적 차원에 약간 더 무게를 두고 이런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해소책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연구생으로 지낼 때 피아제를 집중적으로 읽었나는 나는 여가 시간을 현대 사상과 현대 예술에 좀더 친숙해지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입체화 T.S.엘리엇의 문학을 비롯해 20세기 초반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분출되었던 과학, 예술, 정치 방면의 눈부신 창조적 업적에 매료되었다. 대학원에서는 발달심리학devlelopmental psychology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처럼 눈부신 업적을 낳았으면서도 동시에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대전과 끈덕지게 지속된 냉전에 휘말려들어간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이 이미 나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나는 역사와 전기물에 대한 흥미를 뒤로 제쳐놓고, 경험적 학문인 발달심리학의 연구 방법과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이런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원 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교수들이나 동료 학생들이 예술적 창조성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 자신은 음악 분야에 상당한 소양을 쌓아둔 편이었다. 연구생 시절, 거의 매일 저녁 현재 예술을 탐구하는 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14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다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갖고 훨씬 쉽게 이 책의 '분석적 틀'을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책을 쓰고자 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전문용어는 되도록 쓰지 않고, 꼭 필요한 시각 자료만을 제시했다. 다루는 주제는 복잡하지만 간단명료하게 쓰고자 했다. 복잡한 주제를 쉽게 다루기 위해 중간 중간에 서술 내용을 요약해 정리했으며, 나름대로 신중하게 고른 곳에 세 개의 짤막한 해설(간주곡, interlude)을 삽입했다. 그리고 누군가 내 생각을 도용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책의 첫 부분에 내 이론의 요지와 중요한 결론을 기술했다. 19
젊은이
불행하고 어리석은 젊은이여
도회의 한 구역에서 방금 돌아온 젊은이여
안개 서린 전차 창문으로 비치는,
군중의 비참하고 불안한 모습들
사치스런 장소에 들어갈 때마다 밀려 드는 두려움
모든 게 너무 비싸기만 하다. 너무 고급스럽다.
자네의 미숙한 매너와 유행에 뒤진 옷, 그리고 서투른 행동을
사람들은 다 알아봤을 테지.
자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은 잘생긴 청년이군요.
당신은 건장하고 튼튼해 보입니다.
당신이 불행하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낙타 털 외투를 걸친 테너 가수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지
자네가 그의 마음속 두려움을 알고 그가 어떻게 죽을지 안다면
자네의 근심거리인 빨간 머리 여인,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는 마치 불 속의 인형처럼 보이고
그녀가 익살꾼들의 놀림에 깔깔대는 것을 자네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
자네를 떨게 하는 저택
눈 부신 아파트-
바로 이곳에서 기중기가 잡석을 치웠다네
자네 차례가 오면 자네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지키고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라도 자부심을 느끼겠지.
소원은 이뤄질 테고, 그러면 자네는 '
연기와 안개로 짜여진 시간의 정수를 갈망할 테지.
변치 않는 바다처럼 밀려왓다 밀려가는
단 하루에 불과한 무지개빛 인생.
자네가 읽은 책이 무슨 소용이겠나
답을 찾았지만 해답 없는 인생을 살았을 뿐.
자네는 남쪽 도시의 거리를 걷게 될 거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황홀하게 바라보겠지
간밤에 내린 첫눈이 쌓인 하얀 정원을.
체스와프 미워시. 21
레닌이 말한다. '문학은 당의 문학이 되어야 합니다.....저로 말씀드리면 야만인입니다. 표현주의니 미래파니 입체파니....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합니다.'차라도 자기 생각을 내세운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지금까지 다른 예술로 알고 있는 예술 따위에 신경쓰면 안되지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입니다.'조이스도 한 마디 한다. '당신은 지나치게 흥분했군요. 당신 재능의 한계도 모르고 그저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군요. 뭐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당신이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죠. 예술가란 불멸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스토파드의 [익살]은 급조된 극단에 관한 흥미로운 소극이지만, 동시에 현대가 태동한느 시절에 걸출한 세 인물들이 활약하던 모습을 은밀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계몽주의를 이끈 핵심 인물들이 1740년대에는 모두 소년 성가대원이었고, 미국의 주요 초월주의자들이 1820년대에는 모두 대학생이었던 것과 같다.
[익살]은 오랜 옛 일을 다루고 있지만, 분명히 우리 시대의 작품이다. 서로 갈등하는 해석의 틀과 정치적 신조, 그리고 미학적 규범을 빠른 장면 전환으로 보여주는 '익살'은 조이스나 레닌, 그리고 차라와 같은 '현대modern age'의 핵심적인 인물들에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이 논쟁하고 대화하는 내용은 20세기의 논쟁사를 끊임없이 달구었던 주제들이다. 31
다양한 분야에서 세심하게 선택한 인물들의 획기적인 업적을 좀더 잘 이해하며, 분야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어하는 법칙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한 영역의 창조적인 업적이 다른 영역에서 이루어진 획기적인 업적으로 인해 붕괴될 리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사색 과정과 과학적 업적은 프로이트의 경우와 다르며, 엘리엇이나 간디의 경우와는 더욱 다르다. 창조성의 종류가 단일하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특정한 성품과 조건이 20세기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며, 우리가 이런저런 사상을 구상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또한 다양한 사상들에 반응하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심한 우역곡절을 겪기는 했어도 활기에 넘쳤던 시대, 즉 내가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전혀 다른 시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창조적인 인물들을 고를 수 있지만, 대체로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고(프로이트는 1856년에, 마사 그레이엄은 1894년에 태어났고 다른 인물들은 이 사이에 태어났다.), 넓게 보아 서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선택하면 유리한 점이 있다.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의 특정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형성했고 또한 그들이 그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시대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19세기에 풍미했던 예술과 장인적 기예, 과학 이론, 그리고 지적 통합성은 더 이상 적절치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부적합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곱 명의 창조적 인물들은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20세기 내내, 즉 '그들의 '세기 내내 그 잠재력리 소진될 정도로 철저히 수행되고 연구된 것이다. 38
신동과 천재
우리가 다루는 현대의 거장들은 모두 유년기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지만, 어린 피카소가 보여준 놀라운 그림 솜씨에 당시 각별히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유년 시절부터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0대 후반이 되자 당대의 다른 어떤 화가들 못지않게 훌륭한 솜씨를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이후 75년간의 생애에서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해낸 토대이다. 피카소는 일찍이 눈부신 솜씨를 발휘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된 '신동'에 대한 훌륭한 연구 대상이다. 우리 시대의 '모차르트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정치성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의 이름은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고 존경했으며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배웠던 거의 동년배였으므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모두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에 각기 음악과 미술 분야에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일으켰고,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창조적인 삶을 추구했다. 42 이 기간에 그들은 언제나 독특한 방식으로 과거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재고하면서 한층 더 혁신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43
입체주의 그림은 창시된지 6년도 되지 않아서 뉴욕의 아모리 쇼,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 미술전, 전시장이 뉴욕의 제67기병대 무기고인데서 나온 명칭, 에서 전시되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보다 짧은 시간 내에 적도 부근에서의 일식 관측을 통해 검증되었다. 간디의 단식 투쟁은 전보가 인도 전역과 전 세계에 이 소식을 급히 젆살 수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관습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 모든 혁명적 시대의 특징으로서, 그 도전의 성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은 분야들에서 생겨난 도전들은 상당히 비슷하다. 각각의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단순한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 전통적으로 아이들이 매달리는 문제나 개념들과 씨름한다는 점, 낡은 문명이 주고 새로운(그러나 아직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문명이 탄생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기록하려고 한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이러한 혁명은 백 년에 한 번 일어날지 모르며, 어쩌면 천 년에 단 한 번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중대한 변화에 대해서는 에필로그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보겠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1900년 무렵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 시기로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중요한 창조자들은 공통의 역사적 힘과 사건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활동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들 각자의 노력을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특히 현대라는 시대를 공동으로 창조한 이들의 삶에서 비슷한 사건들과 통찰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면 더욱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56
다른 두 가지 결론은 모든 지능 검사를 둘러싼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된다. 창조성 검사는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한 사람이 창조성 검사를 여러 번 받아도 비슷한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창조성 검사를 받을 때도, 그가 얻은 창조성 점수 사이에는 확고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능 검사와 마찬가지로 창조성 검사도 해당 정신 능력을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다른 검사 방법과 상관관계가 있는 결과가 나와야 그 유효성이 인정된다)
남은 결론은 전통적인 종이 시험paper and pencil test으로 창조성을 검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소 파멸적인 진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창조성 검사는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나 아직 그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이다. 즉, 창조성 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전문 직업이나 여기餘기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나 소속 문화권에서 창조적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반드시 창조성 검사에서 우수함을 입증하는 표시로 여겨지는 발산적 사고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창조성 검사는 지능 검사에 비해서도 별반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부 목적이 분명한 연구를 제외하면, 창조성 검사(그리고 이 검사의 바탕에 있는 생각)는 여러 연구 기관과 교육 단체에서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인지과학 분야의 학자들은 창조성 검사에서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60
성격과 동기부여의 관점
지금까지 나는 주로 심리학의 두 가지 접근법에 의존해서 창조성을 논의했다. 하나는 유서 깊은 심리측정학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최근에 등장한 인지과학적 관점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심리학 내에도 보완적인 접근법이 존재해 왔는데, 이는 개인의 비인지적인 측면, 특히 성격과 동기부여라는 측면과 관련된다.
심리측정학적 접근법과는 달리 이 방면의 연구자들은 하나의 패러다임만 활용하면서 소속 공동체에서 창조적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성격적 특색을 연구했다. 이 연구에서 피검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선택하고 불명료한 자극(잉크 얼룩이나 실루엣 연상 테스트)에 나름대로 반응하라는 요청을 받는데,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은 그들의 기본 성격을 '환기'하거나 '투사'한다고 여겨진다.
버클리 성격 연구소가 수행한 이 방면의 대표적 연구에 따르면, '창조적인 건축가들'은 그들보다 창조성이 부족한 동료들에 비해 독립성과 자신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기민함, 기꺼이 무의식에 내맡기는 성향, 야망,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의 성격적 특색이 훨씬 풍부했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성격을 지니 사람들이 창조적인 업적을 이루는 것인지, 아니면 창조성을 인정받은 결과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창조적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성격적 특색을 드러내는 것 같다. 66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서 몰입 상태 혹은 몰입 경험 이라는 감정 상태에 관해 설명한 바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내재적으로 동기화된 경험에서 자신이 관심을 쏟는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고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 상태는 어떤 활동 분야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몰입'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자ㅣㄴ이 무엇을 경험하믄지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반성적으로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절정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 자주 창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 상태를 추구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몰입 순간'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훈련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과 마음의 고통까지도 감수하려 드는 것이다. 작품에 전념하는 작가들은 책상에 묶여 있는 시간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결과도 신통치 않은 작품을 쓰면서 그런 '몰입 순간'을 겪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실망할 것이다.
한 개인이 어느 분야에 몰두하다 보면 몰입 경험의 궤적이 변하게 마련이다. 한때는 너무 어려운 도전이라 여겼던 일이 쉽게 달성할 만한 일, 심지어는 유쾌한 일이 된다. 반면에 오래 전에 성취했던 일은 더 이상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나름대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음악 연주자들은 익숙한 곡을 정확하게 연주하면서 몰입 상태를 경험하며, 젊은 대가급 연주자들은 연주하기가 가장 어려운 곡에 도전하고 싶어 한다. 69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탐구하면서 주변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면,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창조성 자본'을 많이 축적하게 된다. 반면에 이러한 발견 행위가 억압당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떠밀리거나, 혹은 세상에는 정답이 하나밖에 없고 권위자들만 그 정답을 앍고 있다는 고정 관념에 짓눌린 아이들은 자기 만의 해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제약과 구속이 심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쓰라린 심정으로 술회한다. 앞으로 나는 유별나게 엄한 부모들에 대해 상술할 것이다. (창조적인 사람들느 부모의 엄격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자신들의 아이를 키울 때는 지나치게 방임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엄격한 환경에서 고통스럽게 자랐으면서도 호기심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성격이 강하고 반항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정해진 선을 넘지 않으면서 규칙대로 살아가는 대신 인생에 대해 좀더 모험적인 태도를 지니라고 격려하는 역할 모델을 적어도 한 명은 만났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창조적인 인물은 유년기의 통찰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편이 어떤 점에서는 살아가기에 좀더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경우에는 유년기야말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된다. 실상 창조적인 인물이란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많은 의문점과 문제의식, 그리고 주변 사물을 관찰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가장 선진적인 이해 방식과 '결혼'시키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이다. 창조적이 사람이 유년기의 '창조적 자본'에 되풀이해서 의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다른 시대라면, 성인이 되어 의존하게 되는 유년의 시기도 달라질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 축적해 놓은 자원을 파헤치는 것은 바로 현대가 부과한 짐인 것이다. 79
다多개인성, 창조적인 인물이나 작품 주위에는 언제나 갓 출현한 성과물의 타당성과 질적 수준을 평가하는 다른 사람들도 제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집단을 지칭한는 칙센트미하이의 장場, field 이라는 용어를 나 역시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장에 관한 연구는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다개인성에 관한 연구 관점은 장의 성원들 - 비평가, 편집자, 대리인, 언론 종사자, 백과사전 필자를 비롯한 여러 평가자들 - 이 어떻게 최초의 평가를 내리는가, 그리고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감안하여 어떻게 더욱 신중한 평가를 내리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이 때 물리학 분야는 소수의 전문가 그룹으로 장이 이루어진 경우이고, 대중 연예 분야처럼 장에 포함된 인원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본격적인 창조성 연구는 신경생물학자와 심리학자, 특정 분야의 전문가, 사회학적 방법론에 기울어진 연구자 등 다양한 관점에 입각하여 창조적인 현상을 탐구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이 책에서 이러한 시도를 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훈련받은 분야도 한정되어 있고 게다가 심리학적 관점이 창조성 연구에서는 우세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 요인을 가장 강조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물론 내 설명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생물학적, 인식론적, 사회학적 관점에도 의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창조성 연구는 창조성이 '위대한 인물'의 성과라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87
이제 우리는 1장에서 소개한 그림을 다시 상기하면서, 그것의 기능을 역동적인 형태로 살펴볼 수 있다. 일단 특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능력과 재능,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출발점이 된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서도 각 분야에는 고유한 규칙과 구조 그리고 실천 관행이 있으며, 개인들은 이러한 틀 안에서 사회화되고 이러한 틀에 맞춰서 활동하도록 되어 있다. 개인들은 장에 성과물을 제시하고, 거꾸로 장은 관심이 가는 다양한 대상을 조사한다. 장에 의해 정밀한 조사를 받는 수많은 개인들과 성과물 중에서 아주 소수만이 지속적인 관심과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평가받는 많은 성과물 중에서 극소수만이 창조성을 인정받는다. 즉, 낯설 정도로 참신하면서도 아주 적절한 성과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평가를 받은 성과물및 인물이 세 요소들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그 분야를 실질적으로 쇄신하는 원인이 되기 대문이다. 다음 세대의 학생들이나 재능 있는 사람들은 이제 창조적인 인물의 업적에 힘입어 전혀 새롭게 변한 분야에서 작업하게 된다. 창조성의 변증법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구도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파리에서 각자 독특한 역량과 화풍을 지닌 1,000명의 신진 화가들이 활동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들 모두는 현재의 회화 기법과 양식에 통달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자굼을 비평가와 미술 학교, 화랑 주인, 대리인 등으로 이루어진 장에 선보인다. 이 많은 화가들 중에 소수만이 주목할 만한 화가로 선택될 것읻. 그리고 오늘날에는 작품의 전적인 새로움이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런 평가 과정을 거쳐 걸러진 극소수의 재능 있는 화가들 중에 기껏해야 한두 명만이 거장의 반열에 오를 터인데, 이들의 탁월한 작품은 결국 미술 분야, 그러니까 다음 세대의 화가들이 터득해야 할 인식구조와 기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90
성장 배경와 유년 시절
어느 면에서 보면, 프로이트는 운 좋게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빈에서 북동쪽으로 240킬로미터 떨어진 모라비아 지방의 프라이베르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주민 수는 5,000여 명이었고, 가족은 유대인이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서 유대인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한 아버지 야콥은 매사에 낙천적인 편이었으나, 상인으로서는 아내 아말리에의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어린 지기스문트 이것이 본명인데, 성년이 될 무렵까지 이 이름을 썼다.)는 좁고 불편한 집에서 살았고, 후에 아버지의 형편이 다소 나아졌을 때 가족 (이 때는 아이들이 일곱 명이나 되었다)은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지기스문트의 가족 구성은 난처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이전에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고, 다 자란 형 둘은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했다. 그리고 지기스문트보다 한 살 어린 조카와 거의 동갑인 조카딸도 한 가족이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글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한 사람의 유년 시절이 그의 인생 행로에 얼마나 중욯나 역할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방금 프로이트의 곤란한 환경을 언급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러 면에서 축복 받은 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첫 아들인 그는 어머니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그가 일흔 살을 넘길 때까지 살았다. 유모의 사랑도 듬뿍 받았는데, 유모는 항상 프로이트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격려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전 세대들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지만, 프로이트가 자랄 무렵만 해도 일시적으로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누그러진 때였다. 107
미술과 연극을 좋아해서 자주 전시회나 극장에 들렀고, 자신이 본 작품을 날카롭게 비평했다. 잠시 철학의 유혹에 빠져 어느 모임에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그는 주요 철학자들을 읽고 존 스투어트 밀을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심리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빈 대학교의 명망 있는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의 강의를 3년간 듣기도 했다. 물론 과학 분야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아서 당시 가장 중요한 과학자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저서뿐만 아니라 다위의 저서도 탐독했다.
이 무렵 프로이트가 친한 친구인 에밀 플루스와 에두아르트 질버슈타인, 그리고 약간 나중에 약혼녀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탐구 정신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평상시에는 쾌활하고 열정적이며 기지가 넘쳤으며 가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야심만만한 청년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상력이 풍부해서 무대와 인물, 제도를 꾸며내거나 시적인 공상으로 비약할 줄도 알았다. 여러 언어로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극적인 상황을 묘사했다. 문학에서 미술로, 과학에서 철학으로, 신변 문제에서 직업이나 정치, 혹은 세속적인 문제로 거침없이 주제를 바꿔가며 편지를 썼다. 이미 누군가에는 스승 노릇을 할 때였지만, 자신이 배운 것을 설명하고 편지 상대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으며, 자신이 얻은 지식을 종합하려고 애썼다. 아마도 프로이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109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용어를 빌면, 프로이트의 20대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유예기간psychosocial moratorium'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생활방식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이제 프로이트는 앞으로의 학문 인생을 전부 걸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샤르코는 신경성 장애의 세계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도 매혹적이었고 프로이트 스스로도 신경성 장애를 관찰하고 분류하고 설명하는 기술을 정교하게 익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신경증 환자의 행동을 해명함으로써 학계에 두각을 나타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브뤼케의 실험실 동료 중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브로이어라는 의사가 있었다. 역시 유대인으로서 아버지가 유대인 거주구역ghetto에서 '보다 자유로운' 빈으로 탈출한 브로이어는 다방면에 박식해서 예술과 철학, 정치에 관해 정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했고, 브로이어는 형편이 어려운 프로이트에게 가끔 금전적인 도움을 제공해서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벌써 1880년부터 브로이어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는 환자들의 인상적인 증상을 프로이트에게 알려주었는데, 특히 베르타 파펜하임(이 환자는 훗날 '안나 O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의 상태를 소상히 전해주었다. 프로이트는 개업의로서 파리에서 얻어 온 과학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고, 또 이 탐구 과정에서 명망이 있고 친절한 브로이어가 훌륭한 협력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117
프로이트가 친밀한 우정과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몹시도 갈망하던 이 중년 초기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프로이트는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엄청난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만약 마흔 살인 지금 명성을 얻지 못하면, 영영 그럴 기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인간적인 한계가 왔다는 신호를 뚜렷하게 느꼈고, 경제적인 형편 역시 어려웠는데 환자들이 거의 오지 않은 시기도 있었다. 자랑거리가 될 만한 교수직도 점점 멀어져갔다. 아버지는 앓아누웠다가 1896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로이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1895년에 여섯 아이 중 막내가 태어났고, 이후에는 뭔가 결심한 듯 성관계를 그만두었다. 당시 그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불안했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 니코틴 중독, 만성적인 위장 장애에 시달렸다.
프로이트는 고독감과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 1887년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어디에서도 학문적인 지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요. 주변에는 '너한테는 기회도 주지 않껬다'는 분위기만 있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정말 실망스러울 겁니다.' 7년 후에 그는 플리스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이곳에서 혼자서 외로이 신경증을 연구하고 있네. 사람들은 나를 편집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내가 자연의 위대한 비밀 한가지를 풀었다는 느낌이 확실한데도 그렇다네'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도달한 결론의 진가를 설명하면서 심한 감정상의 동요를 보였다. 한없이 우쭐대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던 것이다. 125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프로이트는 꿈의 힘을 발견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플리스에게 자기 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 서판이 있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895년 6월 24일 ,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꿈의 비밀을 밝혀내다.'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을 밝힌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에 평생 한 번 허용 될까말까한 통찰'이라고 말했다.
자기 이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1890년대에 프로이트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네 가지 영역을 연구했다. 이들 영역은 대체로 프로이트의 초기 관신ㅁ사에서 마지막 관심사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지만, 중첩된 부분도 있음은 물론이다. 관심 영역들은 각기 구별되며, 20세기 초반의 연구로 이어졌다. 이들 영역은 여러 편의 논문에서 나누어 다루어졌지만, '꿈의 해석'에서 탁월하고도 단호하게 종합되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겠다. 130
브로이어가 플리스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였다. '프로이트의 지성은 절정에 달했어요. 나는 닭이 매를 지켜보듯이 그를 죽 지켜보고 있었지요' 이후 몇 달 안에 프로이트는 정상인의 꿈에도 그와 브로이어가 신경증 환자와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어렴풋이 발견한 다양한 심리 과정과 기제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역시 검열 기제와 다양한 종류의 위장,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오려는 두려운 표상들, 의식 아래에 잠복한 성적인 내용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97년 무렵 프로이트는 진지한 마음으로 자기분석을 시작했는데, 이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탐구 작업이었을 것이다. 수면 중에 꾼 꿈을 재료로 삼아 자유 연상을 시도하고, 되도록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고 연상에 비롯한 표상들을 분석하였다. 이와 같은 자기분석은 프로이트 자신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낳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특정한 힘과 내용도 밝혀냈다고 믿었다. 꿈의 분석 과정은 또한 프로이트의 외로운 시절에 그에게 힘이 돼 주었다. '내가 내린 결론에 망설임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아무 뜻도 없고 뒤죽박죽으로 뒤엉키 꿈을 분석해서 꿈속에서도 논리적이고 뜻이 분명한 심리 과정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밝혀낸다는 것은, 내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자신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그는 꿈의 수수께끼 같은 언어를 힘겹게 해독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모든 꿈에는 모종의 소원이나 환상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되었다. 꿈은 억압된 소원이 위장 실현되는 과정이며, 예전의 결심이나 근심 혹은 욕망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다. 137
[프로젝트]를 집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로이트는 급격한 사고의 전환을 이루었다. 1890년대 중반 이후로 그는 어른 환자의 신경장애가 어린 시절에 받은 성폭력이나 성적 학대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1896년 빈 의사 협회에서 이런 대답한 주장을 명백하게 밝혔다. 그러나 1897년 플리스에게 보낸 변명조의 편지에서는 잘못 판단한 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많은 사례에서 부모나 다른 어른들에 의한 유년기의 성적 학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유혹은 주로 어린 아이들이 꾸면낸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문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방향 전환을 환경적인 요인으로 설명하거나 커다란 실수로 간주했다. 빈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성적으로 추행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를 순진한 바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프리 매슨 같은 논쟁적인 정신분석학자들은 동시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프로이트가 아동 유혹이라는 가설을 폐기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사고의 변화가 프로이트 자신에겐 꽤 깊은 인산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이론이나 치료법의 발달에 있어서는 특별히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싶다. 아동 유혹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든, 아니면 일어난 일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하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프로이트의 사고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어는 경우든 마음속에서 털어내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문제엿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그처럼 극적인 사고의 변화를 보이면서 아동 유혹이라는 가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햇다는 점은 한 가지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다. 분명 프로이트는 자기 생각을 바꿀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자긍심과 의지가 많은 사람답게 이런 변화를 깊숙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142
심리적 기제의 특성에서부터 개별적인 꿈의 특질 및 꿈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는 극적인 이야기 솜씨를 발휘하여 생생하게 분석한다. 논리적인 서술과 풍부한 임상 사례 역시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의 저서에는 정량적인 특성이 전혀 없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어떤 견해를 지녔는지를 반영한다. '나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에는 아무 재능이 없다. 양적인 것에는 아무 소질이 없다.'실상 프로이트의 저서에는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을 의문에 붙일 수도 있는 증거를 고려한 흔적이 거의 없다.
어쩌면 놀라운 일일지 모르겠으나, 프로이트의 생생한 묘살에는 공간적, 시각 - 공간적, 혹은 신체 - 운동적 이미지 역시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과학적 저서로서는 드문 특성이다. 생물학의 다윈이나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사유 과정에 있어서 이미지를 중시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사유 과정에 있어서 이미지를 중시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그가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현상의 법칙이더라도 주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저서는 거의 언어적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적은 수의 간단한 도해조차 설득력 있는 서술에 대해 사족 이상의 의미는 없다. 프로이트의 과학적 사유는 그 본질이 언어적이며, 공간적 요소는 거의 없고 논리적 요소가 얼마간 담겨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러한 논의 패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일 터인데,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해놓고 있다. '나는 공간상의 관계를 시각화하는 능력이 지독하게 부족한 편이라서, 기하학이나 거기서 유래한 학문을 연구하는 일은 내게는 불가능하다'146
정신분석학 운동의 아버지
앞에서 나는 프로이트를 정신분석학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프로이트는 모든 젊은이의 삶에 아버지의 역할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에 주목했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 운동 내부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띠었고, 프로이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결과를 빚어냈다.
초기의 개종자 가운데 프로이트보다 19살 어린 스위스의 정신 의학자 칼 융은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분명 일급의 지성을 소유했고, 빈의 이름 없는 유대인 의사의 사상에 끌린 것도 무슨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융 자신도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고, 다른 나라와 문화, 사회적, 종교적 배경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프로이트는 과거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느낄 수 있었다.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웠던 고립'에 관해 심정을 토로한 후에 이렇게 썼다.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네라네' 프로이트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조그만 모임에서 융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1910년 새로 탄생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만만찮은 두 사람의 성격이 부딪칠 때가 되면, 그것은 분명 후회할 결정이었다.
초기 정신분석가들 사이에 벌어진 반목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글이 쓰여졌지만, 외부인으로서는 그런 갈등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었고 심지어는 건강한 모습이었는지, 그런 갈등이 얼마나 지도자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지닌 기묘한 병적 특질을 반영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156
오늘날 프로이트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가까운 장래에 그의 위상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100년 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인물이 이처럼 유명해진 것은 참으로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까지 살았으며,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칼이 아니라 꿈꾸기와 꿈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 방식이었던 그였다.
내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를테면,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트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특정 분야에서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어냈고, 덕분에 그 분야는 마침내 다양한 인간 사회의 관심과 가치를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65
어린 시절의 수수께끼들
아마 그런 질문들은 어린 아이들이 언제나 궁금해하는 문제일 것이다. 물론 어른들이 '입을 틀어막는' 경우가 별로 없는 아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이다. 아이들은 다섯 살에서 열 살 무렵까지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면서, 신기하거나 두려운 현상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야외에서 산책하거나 밤에 잠을 자면서도 그 해답을 궁리하곤 한다. 어떤 경우는 프로이트처럼 인간 관계의 본성에 관련된 질문, 그러니까 권위적인 부모, 원치 않는 형제, 선이나 악의 화신 등이 연루된 상황에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반면, 예술가들에게서 보는 것처럼 일종의 비언어적인 상징체계로만 풀 수 있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 노래에서 가장 멋진 선율은 어느 부분인가? 이 색깔은 어떤 효과를 자아낼까? 내 느낌대로 춤을 출 수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다른 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명한 심리학자 장 피아제가 아이들에게 물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의문을 품곤 했다. 사물이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자연 법칙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러면 모든 결과가 달라질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고 유형과 아이들의 일반적인 사고 유형이 유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지나친 겸손에서 나온 말일 터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내가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보통 어른이라면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느라 길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문제는 아이 적에나 골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지능 발달이 더뎌서 어른이 된 뒤에나 겨우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보통 능력을 가진 아이보다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170
학생인 만큼 그는 교재를 배우고 강의를 듣고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면서, 그리고 표준적인 문제를 풀고 표준적인 시험을 치르면서 당시ㅢ 물리학과 수학을 익혀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지리학과 금융 시장, 스위스 정치, 인류학, 지질학, 괴테의 작품 등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주류 과학 강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특히 좌절감을 느긴 것은 주로 공학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는 하인리히 베버의 진부한 물리학 강의였다. 베버는 자신의 스승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저작을 중심으로 고전 물리학을 가르쳤지만, 이미 아인슈타인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던 제임스 클락 맥스웰의 중요한 저작과 전자기 문제를 무시했다. 당연히 아인슈타인은 출석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마르셀 그로만이란 친구가 기막히게 정리한 노트를 빌려주었다) 이 고집스러운 독학자는 하인리히 헤르츠와 헨드리크. 로렌츠가 멕스웰의 이론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재정식화한 글을 옆에 나란히 두고 맥스웰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리고 루드비히 볼츠만과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같은 이론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공부했다.
선구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의 교육 여정을 재구성하다 보면, 대개는 그 획기적인 발견자와 정신적으로 가장 가깝고 또 비슷한 업적을 낸 선행자에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경우엔 멕스웰과 로렌츠 ,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 수학자인 쥘 앙리 푸앵카레가 아인슈타인이 이룬 업적의 '전사前史'로서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데 때로는 2류 소설가가 자기 시대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포착하는 것처럼,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이 젊은 창조자의 관심을 끌 만한 문제를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178
설명력이 뛰어난 뉴턴의 이론이 널리 보급되면서, 과학자들은 뉴턴의 사고를 모든 물리학 분야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들은 엄격한 인과율에 따라 만약 하나의 역학적 체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즉 그 체계 안에 포함된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체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료롭게도 미래의 운동에 대한 이러한 예측 가능성을 두고 사람들은 역학적(기계론적 mechanistic) 물리학의 상대성 원리라고 불렀다. 이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운동이 아니라 상대적인 운동만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전기 작가인 필립 프랭크가 말했듯이,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뉴턴의 '절대적' 역학이 더 이상 타장하지 않을 때도, 가령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도 이런 상대성 원리가 윻하다는 점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뉴턴의 발견은 천체의 운동을 아주 정확하게 추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뉴턴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커다란 모순이 생기는 영역이 있었다. 뉴턴이 믿었던 것과는 달리 빛은 운동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입자가 아니라, 공기 중에서 소리가 진동하는 것처럼 가볍게 진동하는 파동과 같은 것은 여길 필요가 있었다. 과학자들은 빛의 파동을 전달하는 매질로서 에테르라는 물질을 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에테르를 통과하는 물체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가? 가령,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가? 에테르는 물체의 운동을 방해하는가? 즉, 에테르는 제동효과를 발휘하는가? 184
어린 시절부터 프로이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음에 비해, 아인슈타인은 객관 세계와 물리적 힘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어릴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 읽는 것을 다른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좋아했다. 통상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프로이트가 인간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이 맣았다면, 아인슈타인은 사물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이트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매료되었던 데 비해,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사물 간의 관계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팔았으며, '나'와 '우리'의 세계에서 '그것'의 세계로 날아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고, 말년의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성 문제에 있어 금욕적인 모습을 보인 프로이트와 달리, 아인슈타인은 젊은 여성들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였고 이 여성들도 그에게 호감을 내비치곤 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젊은 수학자 마르셀 그로스만과 오랫동안 지속될 교유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우정은 몇년 후에는 전문 분야에서 공동을 이론을 연구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대학 동기인 밀레바 마릭과는 한층 더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결국 아인슈타인은 이 여자 친구와 결혼을 했고 15년쯤 후에는 이혼을 한다. 특허국에서 근무할 때는 젊은 공학자인 미켈란제롤 베소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 친구와는 자신이 한창 구상하고 있던 생각을 지속적으로 논의했으며, 50년 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자주 만났다. 아인슈타인이 이들과 맺은 우정에는 프로이트와 남자 동료들 사이에 미만했던 강렬한 열정은 없었지만, 그 우정은 좀더 꾸준한 편이었고, 프로이트와 동료들의 관계를 물들였던 긴장과 편집증적인 특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192
아인슈타인은 남다른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몇 시간, 심지어 몇 일 동안이나 중단 없이 같은 문제를 숙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 중에는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것도 있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음악을 듣거나 요트를 타곤 했지만, 이런 순간에도 사색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공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새로운 생각이 더오르면 공책에다 적곤 했다. 그는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에 동료인 볼프강 파울리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에는 빛의 본성에 관해 탐구하고 싶다네'라고 말했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내보이는 시각적 행동이 빛에 눈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는 사실이 전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없다고 느꼈으며, 이 분야에서는 일부러 강의를 맡지 않았고 연구도 계속하지 않았다.
내가 어느 정도 수학을 무시했던 것은 수학보다 과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다음에 설명하는 바와 같은 묘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수학은 수많은 전문 영역으로 분리돼 있는데, 그 하나하나는 우리의 짧은 생애를 쉽게 소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런데 물리학 분야에서 나는 어느 영역이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금방 간파했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본질적인 것에서 주의를 흩트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요한 주제를 골라내는 이러한 능력이 가장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을 찾으려는 아인슈타인의 노력과 긴밀히 맺어졌다. '나 같은 사람에게 발달의 전환점이라나, 그저 덧없을 뿐인 개인적 관심사를 서서히 뒤로 하고 사물을 관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집중한다는 사실에 있다'194
아인슈타인은 이런 문제들을 깊이 탐구하고, 그가 상상한 우주선이나 기차, 자유 낙하하는 엘리베이터 같은 것들을 다양하게 변용하면서 생산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 이같은 공간적 형상을 간직하고 이에 관해 다채롭고도 계발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시킬 수 있었던 능력은 아인슈타인의 독창적인 과학 사상이 형성도는 데 핵심 역활을 했다. 이런 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상징체계인 것이다. 훗날 이같은 '수수께끼 푸는' 행위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사고의 중심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이든 말이든 언어의 세계는 나의 사고 기제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을 전개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한 심적 요소는, 마음속에 '자발적으로'생겨나고 서로 결합되곤 하는 특정 기호와 다소 명징한 이미지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결합과 연상 작용이야말로 생산적인 사고에서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가 싶다. ...내 경우에는 시각적 요소와 근육 감각적인 요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관습이 어휘나 다른 기호들은, 위에서 언급한 연상과 결합 작용의 틀이 충분히 잡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나 이차적인 단계로서 애써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이한 감각 체계에 기반을 둔 이러한 요소들에 주목하는 것 외에도, 상상과 공상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 자신과 나의 사고 방법에 관해 살펴보노라면, 공상하는 재능이 실증적인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나한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196
홀턴은 이 세편의 논문 모두가 동일한 일반적 문제, 즉 태양 복사에너지 압력의 불안정성이라는 문제를 다룬다고 지적한다. 홀턴은 또한 이 논문들의 스타일도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각각의 논문을 우선 형식적으로 불균형한 진술, 혹은 심미적으로 부조화한 진술로 시작한다. 그런 후에, 관찰된 현상의 불균형을 단숨에 해소하고 설명의 장황함을 제거하여 하나 이상의 경험적 예측을 가능케 하는 우아한 원리를 제안한다.
매우 간결하게 쓰인 이 논문들이 기존의 사고를 단순히 반영하기만 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전기 작가 카를 젤리히Carl Seelig)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구상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데까지는 5주에서 6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도 몇 년 동안 충분히 논의하면서 이론의 주춧돌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다만 근본적인 수준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서 '근본적인 결정'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추론하건대, 그 결정은 베소와의 대화가 계기였던 것 같고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서 머릿속에 떠올랐던 듯하다. 아인슈타인은 두 사건의 동시성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시간과 신호 속도(signal velocity. 우주에서 정보가 전달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 즉 빛의 속도를 가리킨다.) 는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 동시서 개념을 절대적으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04
로렌츠 역시 플랑크처럼 결국에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는데, 이 점은 푸앵카레나 마흐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에테르 개념과 19세기의 고전 물리학에 대한 애착과 정열이 너무 컸다. 나이가 많고 자신의 사고방식이 확고한 로렌츠가 상대성 이론을 수용하기는 많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새로운 혁명적 과학 사상이 기성 시대, 즉 장場의 권위자들에게 수용되는 일은 드물다는 토마스 쿤의 주장에도 부합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수용되려면 입장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점을 뚜렷하게 예증하기라도 하듯, 1905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는 당대의 1급 물리학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미 출판 검토를 위해 제출된 상태였던 아인슈타인의 획기적인 논문의 주제를 예견한 발표문은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이론가들이 침묵했던 반면, 실험가들은 아인슈타인의 작업에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발터 카우프만일 터인데, 그는 아인슈타인과 로렌츠의 이론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꽤나 의미심장하게도 아인슈타인은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이러한 비난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실험 결과에 의지한 이론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신의 이론이 올바를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확고했던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과학과 생애의 전반기 동안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216
아인슈타인의 출세 가도
처음 몇 년간의 불확실한 시기가 지난 후 아인슈타인은 꾸준히 경력을 쌓아갔다. 1911년 국제 물리학회가 처음으로 솔베이에서 개최될 무렵에 아인슈타인은 분명 플라크와 푸앵카레, 로렌츠, 어니스트 러더포드, 마리 퀴리와 동렬에 서는 제 1급의 물리학자로 인정받았다. 1912년에 그는 벌써 프로이트를 비롯한 지도적인 과학자 그룹에 합류하여 형이상학을 반대하고, 철학은 과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지지 의사를 표했다.
취리히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은 이후 짧은 간격을 두고 연이어서 프라하에서 유망한 교수직 제의를 받았고,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다가 베를린에서 전례 없이 좋은 자리를 제시 받았다. 높은 봉급과 원하는 만큼 가르치는 선택권이 보장된,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그는 이제 존경스러운 플랑크를 비롯해 세계 최정상급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18
이러한 만곡彎曲형태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천체 수준에서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개기 일식이 일어나는 기간에 태양 근방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고 별빛이 태양의 가장자리를 지나 지구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측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아인슈타인은 다양한 기하학을 터득하고 그것을 적절히 수정해야 했다. 이 방식에 따라 일단의 천문학자들은 광성이 중력장에서 휘어지는지, 이러한 만곡 효과가 상대성 이론의 예측과 정량적으로 일치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1919년의 일식을 관찰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확실히 자리매김되었다. 그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상상하고 그 해답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대담한 예측도 제기했는데 이 예측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으로 입증되었다. 사실 1919년의 일식 관측에서 상대성 이론이 입증되자 세상은 축복으로 환영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담담했고 조금은 지겨운 기색까지 비쳤다. 그 날 그와 마주친 학생에게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아인슈타인은 관찰 결과가 그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도 이 점을 인정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했어도, 아주 태평한 심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편지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16년에 한 학생에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입중할 수 잇는 실험 자료를 찾아보라는 격려를 했던 것이다. 228
사실 아인슈타인은 만년의 30년 동안 오히려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문제에 상당한 정력과 재능을 쏟았다. 과학을 실제에 응용하는 문제, 과학의 매력, 과학의 인식론적 성격, 사유의 심리적 측면, 상식과 과학적 사유 간의 관계, 과학에서 심미적 감수성이 담당하는 역할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각각의 주제에서 아인슈타인은 꽤 인상적인 생각을 밝혔다. 이를테면, 과학과 인식론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 과학적 사유란 단지 상식의 확장에 다름아니라는 점, 과학자와 예술가는 모두 일상에서의 도피를 추구한다는 점, 과학자로서 그의 임무는 신이 마성적으로, 그러나 전혀 불가해하지는 않게 우주에 짜 넣은 구조의 주요 요소를 알아내는 데 있다는 점 등이었다. 그는 기탄 없이 말했다. '나는 신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했는 지 알고 싶다. 이런저런 현상이나 이런저런 요소에 대한 각양각색의 견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신의 생각이다.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이다. '철학적 색채가 가미된 아인슈타인의 발언은 어느 것도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일관성 있게, 그리고 인상적인 태도로 그런 주장을 했고, 덕분에 그의 주장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다. 236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열정적일 만큼 관심이 많은데 비해, 이와는 이상하리 만치 대조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직접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협동 작업에는 익숙치 않고 혼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고립은 때로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여기에는 나름대로 보상이 있었는데, 나는 관습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변덕스런 토대에 내 정신을 의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독창적인 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마흔 살 때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는 과학과 철학, 심리학, 인간 본성, 세계 문제 등에 관해 계속 성찰하면서 남은 생애에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런 주제에 관해 우리의 인식 폭을 넓힌 사람은 매우 드물다. 프로이트와 간디 정도가 최근 역사에는 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인물로 돋보일 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특기 그가 친숙해 있던 과학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하고도 귀중한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과학 연구의 본성과 과학 연구에 필수적인 사고 과정에 대해서는 근거가 확식한 견해를 듣고자 하는 법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세계관과 원칙적인 자세는 모두는 아니라라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물리학보다 체계가 느슨한 분야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와 같은 분야에서는 어린 시절의 직관에서 성찰적인 지혜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일어난다. 241
게다가 비범한 솜씨라는 것도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 아이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인다. 물론 지금까지 교육적 고나심을 주로 재능 있는 남자 아이들에게 쏟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체스의 명수나 수학의 대가가 대개 남자라는 현상에 어느 정도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신동의 성 차이 문제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논의할 생각이 없으나, 나는 유전적이고 신경 생물학적인 요소가 신동의 출현이라는 현상에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모차르트와 체스 선수인 바비 피셔, 그리고 수학자 칼 가우스의 신경계의 구조나 기능에는 고른 음의 패턴이나 체스 말의 배치, 혹은 숫자 결합의 가능성을 어린 나이부터 불가사의할 정도로 쉽게 터득할 수 잇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동이 신경해부학적으로 타고 난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거기엔 문화적인 측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데이비드 펠드먼이 설명하듯이, 신동이 재능을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이란 이미 해당 문화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분야이고 최소한 그 아이의 행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분야인 것이다. 만약 문상文像, graphic표현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서화가 간단히 무시되고 버려지는 문화권에서라면, 수묵화의 신동은 태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중국 미술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어느 문화가 특정 분야에서 조숙한 솜씨를 발휘하는 아이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뜻밖의 재주꾼을 발견할 수가 잇는 것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특출한 재능을 발휘한 미술 신동은 왕야니라는 중국의 여자 아이일 터이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 아이가 그려 놓은 비상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앞에서 언급한 신동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 그러니까 체스나 음악, 수학 분야에서 서양의 남자 아이들이 주로 신동의 재주를 뽐냈다는 상투적인 인식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252
재능의 연마
입문 훈련을 마친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대개 그렇듯이, 피카소 역시 처음 만난 교사들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이야기는 모차르트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불필요한 정규 수업을 연이어서 받고, 평범한 교사들을 경멸하고, 사적인 갈등을 빚곤하고, 이전 시기의 맘에 드는 거장들을 사숙하며 독학으로 기량을 연마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하다. 피카소는 처음에 바르셀로나의 미술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시험은 손쉽게 통과했지만, 출석은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규정에 적응하지 못해 곧 학교를 떠났다. (학생들은 자신이 교사보다 유능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이런 추측이 사실로 판명날 때에는 학교에 남기가 힘들다.)그러나 살바도르 삼촌은 피카소를 마드리드의 미술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똑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마드리드에서 불행했던 피카소는 17살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좀더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는 자신본다 나이가 많은 이지드레 노넬과 로만 카세스와 같은 화가들을 만났고, 화가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시인 자이메 사바르테스를 비롯한 보헤미안 기질의 젊은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의 회합에 들어갔다. 피카소는 재능과 기지, 매력적인 성품 덕분에 주로 '엘스 쿠아트레 가츠(고양이 네 마리)'라는 선술집에 모이던 테르툴리아라는 모임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264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하낟.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all put together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 structurer' 형의 예술가이다. 모차르트가 전자의 전형이라면, 베토벤은 후자의 전형이다. 신동 피카소는 첫 번째 유형을 대표하지만 ,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고 아폴리네르는 주장한다. '그가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로 변신하는 것은 참으로 환상적인 장관이라 할 만했다' 피카소 자신도 이런 이율배반을 느꼈는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내가 라파엘로만큼 잘 그릴 수 있다면, 적어도 내 길을 선택할 권리는 있을 거네. 사람들도 그런 권리를 인정해야 할테고. 하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네'라고 불평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한 예술가의 특징작을 선정할 때는 어느 정도 단순화가 필요하다. 후보작으로는 우선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1906이 눈에 띈다. 그림을 그린 과정이 유별났던 탓이다. 피카소는 모델이 된 친구에게 여든 번 이상이나 앉아 있기를 요구했는데, 정작 그림을 그릴 때는 여름 여행을 떠나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의 형태를 지유고, 스타인과는 떨어진 장소에서 사실적인 얼굴을 가면 같은 얼굴로 바꿔서 그림을 완성했다. (초상화가 스타인을 닮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자 피카소는 세기의 농담이라고 할 만한 유명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결국은 스타인이 저 그림을 닮게 될 테니까') 또 다른 후보작은 같은 해에 그린 [두 나체 여인]이다. 몸집이 풍만하고 조각상을 닮은 두 명의 여인상을 그린 작품인데, 개별적인 인물보다는 어떤 유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관람객은 날 것의 물감이 넓게 번져서 만들어진 색조를 보게 되낟. 그리고 1907년의 [자화상]이 있다. 이 작품의 얼굴 모습은 윤곽이 뚜렷한 살아있는 생명체보다는 차라리 기하학적 형상을 닮아 있다. 가면을 닮은 초상화의 또 다른 예인 것이다. 280
사생활의 혼란은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상당 기간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은 시기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의 인새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몇 년간은 작품 창작이 이전에 비해 턱없이 줄었다. 겓에 따르면 피카소는 일년에 보통 300점의 그림과 소묘를 그려왔지만, 1926년에서 1936년 사이에는 일년에 100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품만을 제작했을 뿐이다. 티모시 힐턴은 피카소의 다채로운 연애 경험, 미술 양식과 매체에 관한 다양한 실험, 보헤미안적인 삶과 부르주아적인 삶이 혼융된 생활 등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영감이 사라지는 현상을 필사적으로 막으련느 시도였다고 보았다. 어쩌면 피카소는 무의식적으로 인생의 판돈을 더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피카소가 작품 활동에서 늘 활용했던 방식이었다.
이 시기에 피카소의 작품이 질적으로 쇠퇴했는지 여부는 판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훨씬 잔인한 장면을 그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전에는 언제나 냉정하고 분석적인 자셀 그림을 그렸었고, 실제로 입체주의 시기에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피카소는 이제 여자의 모습을 잔혹하게 그렸다. 기형적이거나 절단된 형상, 기괴한 자세, 왜곡된 얼굴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한 여자를 여러 번 그린 경우에도 보통은 나중의 판본을 훬니 왜곡된 형상으로 표현했다. 피카소는 신화에 나오는 괴물을 작품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몸은 사람이고 얼굴은 황소인 마노타우로스를 많이 그렸다. 308
[게르니카]의 작업과정
드로잉 노트를 통해 잘 알려진 피카소의 작업방식은 [게르니카]의 스케치 작업에서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바로크 협주곡에서 듣는 바처럼, 그는 부분과 전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한편으로 난삽하고 비틀린 사지와 몸통을 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의 전경을 가볍게 스케치했다. 강박적으로 세부 묘사에 힘을 기울이다가, 캔버스에서 거리를 두고 전반적인 화면 구도를 조망하면서 가벼운 필치로 솜씨 있게 스케치를 해나갔다. 마흔 장의 묘한 스케치 가운데 여섯 장이 전체적인 구도를 다룬 것이다. 여타의 스케치는 개별적인 동물이나 인간, 얼굴의 모양과 특징을 각기 완성작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 따라 실험적으로 묘사한 것들이다. 이들 스케치를 일괄해서 바라보면, 눈을 다양한 모양으로 그려보거나 주요 인물의 배치를 이리저리 옮겨보거나 혹은 황소의 시선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 보는 실험적인 시도와 아이다운 필치로 가볍게 그린 말의 모습이 눈에 띈다. 피카소나 가까운 주변 천지도 온갖 스케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최종 완성작에서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319
피카소는 온 힘을 다해 질로를 파멸시키려고도 했지만 자신의 맹렬한 공격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고는 마지못해 그녀를 존중하기로 했던 것 같다. 거트루드 스타인 역시 이 목록에 포함시킬 수는 있으나, 만년의 피카소가 그녀를 멀리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지막 예외는 채 10년을 넘기지 못한 브라크와의 관계인데, 미술사 전반이나 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사적으로도 친밀하게 지내면서 회화 작업에 공동 보조를 취했으며, 매우 효과적이고 끈질긴 공동작업을 통해 서양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었다. 이 ㅣ때 피카소는 이전이든 이후든 비근한 사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자아와 개성을 억눌렀고, 덕분에 새로운 전망을 열 수가 있었다. 훗날 그는 이 무렵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브라크와 맺은 관계가 그의 가족 관계를 재현한 것인지, 동성애적인 함의를 내포했는지, 이후에는 입체주의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길을 방해한 면이 있는지 여부는 임상 의학자들에게 맡겨둬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한 단계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332
이러한 유년 시절을 결정화 경험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창조적인 인물이나 그 가족들은 탁월한 재능을 암시하는 어린 시절의 특징적 표지를 찾는 데 열심ㅇ니 법이고, 필요하면 그것이 증거로서 '가치 있음'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억을 윤색하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개별 인물에 따라 어린 시절에 흥미를 느낀 일이나 훗날 기억 속에 오롯이 떠오르는 경험은 서로 다르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런 맥락에서 어린 스트라빈스키의 청각적 경험은 나침반에 흥미를 느낀 아인슈타인의기질이나 시각과 촉각에 민감했던 엘리엇의 감수성과 유비 관계를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러한 장면의 시각적인 요소도 정확히 기억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황금귀'의 소유자였음을 입증할 생각만 했다면 굳이 꾸며낼 필요조차 없는 기억의 윤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스트라빈스키는 연극성이 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시각적인 요소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는 점에서 다른 작곡가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음악 신동은 아니었다. 실상 그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였다. 피아노 교습은 아홉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받기 시작했는데, 일단 배우기 시작하자 일취월장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오페라 악보를 읽었고 연주회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음악 교육을 받는 초창기부터 즉흥 연주에 흥미를 보였고 스스로 멜로디와 변주곡을 만드는 일을 되풀이했는데, 가족과 교사들이 이를 시간 낭비라고 나무랐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339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새롭고 신선한 구상을 단숨에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몸을 던질 줄 아는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다.'스스로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못할 운명임을 잘 알았던 디아길레프는 재능을 키워주는 역할에 자족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인물로는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작곡 교사인 나디아 블랑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등이 있는데, 이 소수의 예술 양육자들이 20세기의 예술사를 풍요롭게 키워낸 장본인이었다. .
유력한 잡지 출판과 공연 성공을 통해, 그리고 자신이 이끌던 재능있는 예술가들의 활약상에 힘입어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를 평정한 디아길레프는 이제 유럽, 그 중에서도 파리로 눈길을 돌렸다. 우선 그는 1906년에 파리 그랑팔레에서 다섯 차례에 걸친 연주회를 열었으며, 이어서 1908년에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공연을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346
[봄의 제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린 소리
1910년 봄 [불새]의 스코어를 마무리하던 중에 스트라빈스키는 꿈을 꾸었다. '이교도의 성스러운 제전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마을 원로들이 빙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봄의 신神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소녀가 춤을 추다가 죽어 갔다. 이것이 [봄의 제전]의 주제가 되었다. ' 이런 꿈 자체는 러시아의 모더니스트 시인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후 3년 동안 특히 [페트루슈카]를 완성한 이후부터 스트라빈스키는 이 환상적인 장면을 악보로 옮기는 작업에 매달렸다. 잘 알려진 대로 [봄의 제전]은 초연 당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창적인 자궆ㅁ이자 현대 음악사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내게는 음악이나 발레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이 문학이나 시를 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봄의 제전]의 작곡 과정과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볼 생각이다. 작곡 과정을 둘렀나 사건들은 상당히 복잡하다. 스트라빈스키의 환상을 듣자마자 디아길레프는 공식적으로 작품을 의뢰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이교도 의식에 관해 정통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함을 직감햇고, 화가이자 고고학자이며 민족지 학자인 니콜라스 로에리히와 함께 긴밀한 공동작업에 착수했다. 1910년이면 아직 집중적으로 곡을 쓸 때도 아니었는데, 로에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새 발레는 원시 부족의 제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름 밤에 벌어지는 제의는 다음 날 첫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어진다. 의식 무용을 위주로 안무를 구성한 작품인데, 뚜렷한 극적 이야기 없이 원시 부족의 삶을 재현하는 첫 시도가 될 것이다. '포킨은 이미 다른 기획에 참여한 마당이었고, 덕분에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발레뤼스 무용단이 이미 새로운 작품 공연(유명한 모리스 라벨의 [ㅔ다프네와 클로레]와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진행시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1913년 까지는 [봄의 제전]을 공연할 가망도 없었다. 357
[결혼]; 또 다른 종류의 걸작
1912년에 이미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농부의 결혼을 테마로 한 합창곡 [결혼]을 구상하고 있었다. 처음엔 결혼식의 장관을 묘사할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통속적인, 그러니까 비문학 적인 시verse를 직접 따 와서 결혼식'을 표현하는 것임을 곧 깨달았다. 훗날 그가 설명하듯이, [결혼]은 일련의 결혼식 장면을 표현한 모음곡이었는데, 이 작품은 [율리시스]처럼 가벼운 클리셰와 민족시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일관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어떤 분위기만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개별 인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유형의 성격을 대역하는 역할만이 있다.
실제로 이 걸작을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다. 스트라빈스키가 1915년에 이 작품의 최초 버전을 연주했을 때 디아길레프는 감동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결혼]은 디아길레프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고,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그에게 헌정했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결혼]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1917년에 짧으 스코어로 작곡했지만, 초연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23년에 작품을 완성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다른 어느 작품도 이 작품만큼 여러 번 스코어를 바꾸지 않았다. 즉, 그 자신의 말을 빌면 '악기의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 초기 버전을 그대로 대형 관현악곡으로 악보에 옮긴 것이다. 그런 후에 스트라빈스키는 다양한 악기 그룹을 별개의 앙상블로 나누어 무대에 올렸다. 가령, 현악기와 금관악기를 대조적으로 구성했다. 다른 버전에서는 관악기부와 타악기부, 혹은 피아놀라 그룹Pianolas과 금관악기부를 대조적으로 배치햇다. 376
동기야 여럿이겟지만 어쨌든 스트라빈스키는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느꼈고, 이는 평생 동안 그의 내면에 남아 매일매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이 재능은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맨 처음에 말한 생각이 중요하다.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라는' 그리고 로버트 크래프트에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려면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악마도 믿어야 하고 교회의 기적도 믿어야 한다.'
스트라빈스키가 싸우고 있던 악령이 무엇이든, 우리 대부분에게 그는 본질적으로 코스모폴리탄 예술가였다. 음악계에 아는 사람이 많고, 옷차람이 반듯하고, 유럽에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유부남이었지만 베라 드 바세트vera de vassset라는 매력적인 여류 예술가와 함께 살았으며, 1940년 병약한 첫 부인이 사망하자 결혼했다. 배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음악을 널리 소개하고, 다른 작곡가의 음악에 축복을 내리거나 저주의 말을 남겼다. 나이가 들몃 트르라빈스키 자신의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에 살을 보탰다. 재치 있고 신랄한 글을 쓰면서 자신의 재미 있는 성격을 더욱 과장해놓은 것이다. 물론 그는 재기 넘치고 매력적이고 명석한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줄 알았다. 사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들을 모두 알고 싶긴 하지만, 굳이 고른다면 스트라빈스키의 만찬에 참가하면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낟. 386
작곡을 선택하고 게다가 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한 장르를 선택함으로써, 그는 회화나 시처럼 비교적 혼자서 작업하는 개인적인 분야에는 그다지 필요치 않은 공동작업에 관여해야 했다. 디아길레프에게서 공동작업의 기본적인 모델을 베웠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성격과 다소 부정적이라 할 만한 위압적인 성격을모두 내면화했다. 음악가로서 절정에 올랐을 때는 공동작업자로서 꽤 불쾌한 면모도 보여서, 20세기 초반에 스트라빈스키가 남긴 선동적인 글을 보고 크래프트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만년에 이른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과 점점 더 평화롭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지잘구레한 것까지 까다롭게 따지고 여전히 지독한 구두쇠 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삶을 질기고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여행도 자주 다녔다. 무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는 당대의 극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고, 그에게 의미가 있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음악사에 크게 기여했던 음악 형식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작곡가였다. 그는 오든과 크래프트처럼 동시대의 분위기를 호흡하고 동시대의 주위 환경에 관여하도록 그에게 권유하는 젊은이들에게 먼저 협력의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영리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피카소보다도 훨씬 운이 좋았다.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는 훨씬 강렬했지만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주로 젊은 연인들이나 찾아다니면서 가장 혁신적이고 풍요로운 예술적 동향과는 별 접촉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책에서 논하는 다른 창조자들보다도 유년기에서 흘러나오는 중요한 어떤 것을 간직할 줄 알았고, 또 만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열매를 만끽할 수 있었다. 399
[황무지]의 재발견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Berg 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 초고가 발견되었다. 대개는 타자로 친 54페이지 분량의 초고 뭉치였는데, 군데군데 육필 원고도 끼어 있었다. 별다른 표시가 없는 페이지도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뚜렷한 페이지도 있었고, 아예 가위로 삭제 표시가 그어진 페이지도 있었다. 타자로 친 부분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구어체 영어로 쓰인 대목도 많았고, 우아하고 심원한 문체로 쓰인 대목도 많았다. 각종 유럽어에서 산스크리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쓰인 시행이 페이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흔히 얘기하는 초고와는 달랐다. 20세기 영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작품이라 할만한 [황무지]의 중간 초고였다.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그는 아내 비비언과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 정착했던 시인으로서 가까운 친구 에즈라 파운드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다. 이 '우호적인 비평가들'은 엘리엇과 함께 작품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특히 에즈라 파운드는 원래 길이를 반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가차없이 수정하라는 제안을 했다. 엘리럿 연구자인 헬렌 가드너의 말을 빌면, '파운드는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이 함부로 뒤섞인 초고 뭉치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403
새로운 삶
엘리엇이 소외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싶어 했던 점을 감안하면, 졸업 후에 유럽 여행을 결정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엘리엇은 라포르그의 분위기에 젖고 싶은 마음에 프랑스로 떠났다.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가 영시에는 전혀 없었다. 프랑스 시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엘리엇은 앙리 베르그송과 에밀 뒤르켐과 같은 석학들의 강의를 들었는데, 특히 어빙 배빗처럼 가톨리시즘과 고전주의, 그리고 군주제를 옹호한 샤를 모라스의 보수적인 사상에 이끌렸다. 젊은 프랑스인들과도 사귀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은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와 의학도이자 작가인 장 베르데날이었다. 엘리엇과 무척 친밀한 사이였던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엘리엇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엘리엇은 파리에서 방문객으로 사는 일이 보스턴에서 학생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지식인들의 살롱이나 아방가르드 예술과 누추한 거리의 가난한 모습 사이에 크나큰 대조가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집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재능 있는 여느 젊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저 새로운 지식과 인상을 흡수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런던에는 한 차례 이상 다녀왔고 독일도 방문했으며, 1911년 여름에는 첫 번째 주요 작품인[J 알프레드 푸루프록의 연가]의 초고를 마무리했다. 412
엘리엇의 성공에는 그 자신의 노력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최근에 출간된 엘리엇의 서한집에 따르면, 처음부터 엘리엇은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는 데 꽤 신경ㅇ르 썼다. 한때는 부끄럼이 많던 엘리엇이 대담성과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친분을 쌓기 위해 신중하게 노력했다. [다이얼]의 스코필드 세이어, 보스턴의 부유한 후원자 스튜어드 가드너, 뉴욕의 중요한 편집자 알프레드 노프, 그리고 보수 없이 자신의 충실한 에이전트로 일해 준 퀸이 그들이었다. 영국에서도 리처드 올딩턴과 브루스 리치먼드를 비롯한 중요한 문학계 인사들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행동햇다. 그는 이들에게 합당한 존경을 표했고 나름의 권위를 인정해주었는데, 각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서 서신교환이나 만남의 횟수 그리고 교제기간을 적절히 조정했다. 423
젊은 나이에 시인으로 성공하고 창조력이 쇠퇴한 데에는 개인적인 연유도 잇고 시 장르와 연관되는 원인도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엘리엇이 1920대 초반 이후부터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점이다. 이러한 보수성으로 인해 작품의 제작 편수나 현대시 독자에 대한 관심이 줄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대체로 시란, 특히 서정시란 젊ㅇ느 시절에 문제작을 내는 경우가 많은 장르이다. 최근 수세기 동안 위대한 시인들 대부분은 20대나 30대에 대표작을 완성했으며, 이후에는 사망했거나 아예 시쓰기를 그만두었다. 시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주목할 만한 발전이나 변화 없이 비슷한 작품을 내놓았을 뿐이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로버트 펜 워랜처럼 중년 이후에 대단한 작품을 쓴 시인들도 있기 하지만, 이들 역시 중년 이후에 정점에 오른 소설가나 작곡가, 화가에 비하면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소설가 마샤 데이븐포트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437
결국 이런 이유로 그는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고 특정한 정치적 신념을 신봉했으며, 훌륭하고 완전한 영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비평가 도널드 데이비는 엘리엇이 영국에서도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런던의 소수 지인들과만 교제하면서 아웃사이더, 타고난 이방인이라 생가갛고 싶어 해서 스스로를 일컬어 '이방인'이라고 자주 불렀다. 그는 일종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기를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예술만을 좇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예술은 인간이 어느 가족이나 계급, 당 혹은 동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일 뿐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이런 말은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실상 그의 획기적인 업적은 그가 경계인임을 통렬하게 자각할 때 나왔다. [프루프록]과 [여인의 초상]에서 보스턴 거리를 관찰하는 젊은 예술가, [황무지]와 [텅빈 사람들]에 잘 드러난 대로 서구 문명의 몰락에 번민하는 중년 초입에 들어서 남자, 그때까지 무시되어 온 작품을 복권하고 신성시되는 기존의 걸작을 비판하면서 전복적인 위치를 차지한 데서 기쁨을 느낀, 만년의 사심 없는 문학 비평가가 그의 이력이다. 문학가 엘리엇의 목소리, 혹은 그의 말대로 그의 다양한 목소리들은 경제성을 집약적으로 나타내며,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어떤 거장도 기쁜 순간은 거의 없고 잦은 병치레와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엘리엇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가혹한 삶을 살았기에, 비록 희생자라는 느낌을 시적으로 조롱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무언가에 구속받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토로했다. 457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앞선 시대의 서양 예술에 우세했던 형상을 조각내고, 이전에는 재현 위주로 형상화되었던 사물의 형태와 모양을 새롭게 그려냈다.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에서는 이런 새로운 회화 언어를 호소력 짙은 인간적 주제와 결합시켰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과 불협화음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실험하여 [봄의 제전]과 [결혼]을 작곡했는데, 이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양식이 되었다. 엘리엇은 [황무지]에 소외된 세대의 감정을 담은 목소리를 표현함으로써 영구인의 귀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시의 주제와 양식을 도입했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마사 그레이엄도 새로운 몸짓 언어와 주제를 탐구하여 전통적인 무용 형식에서 벗어났다.
좀더 거리를 두고 살펴보면, 앞선 시대 작품들과의 연속성도 감지할 수 있다. 피카소와 세잔, 스트라빈스키와 드뷔시, 엘리엇과 라포르그 사이에는 연속성이 개재한다. 이들 혁신가들 사이에는 인상적인 유사점이 있다. 파편적인 요소와 형태 자체에 대한 관심, 일상의 세속적인 삶에서 겪는 긴장, 원시에의 동경, 과거의 무거운 주제, 세속의 사소한 일들과 고상한 전체 주제 사이를 왕복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설명만으로는 이들 작품의 분명한 성격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우선 이들은 장인 정신이 투철한 예술가다. 매일같이 작업실에 들어가 거의 홀로, 완성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씩이나 걸리는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463
용기 있는 성격에다 미학적인 모험을 추구하였던 이사도라는 당연하게도 무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녀의 기술적인 혁신은 많은 사람의 추종을 불러올 만큼 숙련성이나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사도라의 성공 요인은 제자나 '양녀'들에게 전수해 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주로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몸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사도라는 통상적으로 새로운 무용 저농의 창시자라기보다는 고독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날카로운 식견을 지닌 무용 비평가 애그리스 드 밀Agnes de Mille은 이렇게 맗다. '이사도라는 무대에 널린 쓰레기들을 모두 청소했다. 그녀는 거대한 빗자루였다. 그녀로 인해 비로소 무대가 깨끗하게 청소된 것이었다. '
이사도라가 대서양과 에게해 방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또 다른 무용계의 선구자 루스 세인트 데니스는 주로 동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사도라와 거의 동년배인 세인트 데니스는 이집트와 중국, 일본, 자바, 태국, 인도의 무용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 역시 이사도라와 마찬가지로 무용이 진지한 예술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고, 미국인들이 몸의 아름다움과 기능에 대한 청교도적인 혐오감을 버리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의 특정 세부에 주목하면서 무용 동작을 통해 악기 소리와 리듬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비주의 성향에 물들어 있던 세인트 데니스는 이사도라처럼 인간의 격정과 생명력을 몸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순수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468
마사 그레이엄은 다재다능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녀는 비극뿐만 아니라 패러디와 희극에서도 상당한 재능을 과시했다. 1929년작 '네가지 부덕Four Insincerities'(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과 [모멘트 루스티카](작곡가 프라니스 풀랑)가 그 예이다. [황홀경]1933은 몸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이해한 작품이었다. 그레이엄은 조지 앤타일, 헨리 카웰, 데이비드 다이아몬드, 헌터 존슨, 월링포드 리거 와 같은 훌륭한 작곡가들의 새로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는 또한 여러 방몀에서 다재다능한 솜씨를 발휘했다. 1930년 4월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레오플드 스토코프크시가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공연에 참여한 것도 그런 활동에 속한다. 주인공 처녀의 역할을 맡은 그레이엄은 저명한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의 지도로 프리마 발레리나처럼 높이 도약할 수 있었고, 자신의 이상과는 다소 어긋나는 음악과 무용에 대한 공연단의 이상을 멋지게 구현할 수 있었다. 493
그녀는 1931년 앤아버 시에서 공연한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서 춤을 추었다. 유명한 공연 흥행주 록시(사무엘 로서펠)는 1932년과 1933년의 겨울 시즌에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 이례적으로 그레이엄의 공연을 주선했다. 그레이엄은 이 예외적인 공연을 멋지게 해냈다. 마틴은 기사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는 격렬하게 뛰고 도약했다. 마치 그 규모만큼이나 훌륭한 이 작품을 장악한 것처럼 자신의 몸을 확장하여 무대를 가득 채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레이엄의 화려한 공연도 뮤직홀에 온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녀는 곧 공연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이 무렵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은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다. 그레이엄 무용단의 일원이자 나중에 그레이엄의 전기를 쓴 에르네스틴 스토텔Ernestine Stodelle은 이렇게 쓴다.
독무가 마사 그레이엄을 기억하면, 거역할 수 없고 신비로운 감동의 영상이 되살아난다. 깊이 움츠렸다가 갑작스레 숨을 토해내는 듯한 간결하고 힘찬 몸짓, 팔다리의 가볍고도 신속한 놀림, 좌우로 급히 움직이는 동작, 발끝을 치켜 든 자세에서의 도약, 허공을 가르는 발차기 동작, 군더더기 없는 착지와 빠른 자세 회복 등 신비스러울 만큼 매혹적인 동작은 우리의 신곙계를 직접 자극한다. 494
정서불안
예술가들은 줄타기 곡예를 하듯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마사 그레이엄도 이 점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공연'예술가였다. 공연할 때 무대에 올라야 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았다. 무용단을 이끌면서 사전 연습을 충분히 마쳐야 했고, 음악가들이 제 할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았는지, 의상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무대 배경의 설치가 모두 끝났는지, 이밖에도 수많은 자질구레한 일들이 제대로 실행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혼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고, 스트라빈스키조차 연주회가 열리는 순간에 꼭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레이엄은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관여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활동 분야는 간디의 활동 분야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잇다. 간디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을 했어야 했거니와, 게다가 후속적으로 생기는 일에 관해서는 그레이엄 보다 통제력을 더 가질 수 없는 처지였다. 분명히 그레이엄은 모든 현장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무용가로 나선 초기에 겪었던 우울증이 1940년대 후반에 재발했다. 이 시기는 그레이엄이 전례 없을 정도로 인생의 부침을 겪은 시기였다. 거의 30년 동안이나 가까운 사이로 일했던 호스트와 그레이엄이 급작스럽게 헤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리허설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다툼이 헤어짐을 재촉한 셈이었지만, 그레이엄이 호킨스와 깊은 사이가 되었던 것이 이미 두 사람의 관계에 긴장을 점차 고조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호스트와 헤어진 후 채 한 달도 못 돼서 그레이엄은 호킨스와 결혼했다. 그레이엄 생애에서 단 한 번뿐이었던 이 결혼은 어떤 사람들에겐 세인트 데니스와 숀 관계의 재연으로 보였지만 오래 지속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레이엄은 주변 상황을 자신이 직접 통제할 생각을 굽히지 않앗고, 이런 고집에 호킨스는 소외감을 느꼈다. 509
두 번 돌진, 그리고 오른쪽 무대로 돌아온다. ....부레bourree 회전으로 오른쪽 무대로 향한다.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잡는다.' [마음의 동굴]에 대한 기록은 '발리Bali 턴으로 도약' 하는 '뱀의 독무'를 묘사하고 있다.[번민의 눈The Eye of Anguish]에 대한 메모에는 [청교도 과두정Puritan Oligrachy]과 플라톤의 [국가]10권,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월터 드 라 메어, 영국의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 토머스 드 퀸시 T.S. 엘리엇[번트 노턴],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의 글, 그리고 모나리자에 대한 문헌 자료에서 인용한 구절이 섞여 있다.
그레이엄은 초기에 기록한 노트는 거의 대부분 없애버렸지만, 후기 작품과 관련된 노트는 출판에도 동의했다. 그 이유는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레이엄은 무용 장면의 촬영에 관해서도 똑같은 입장의 변화를 보였다.)초기에는 부끄럽게 느꼈던 일을 후기에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레이엄의 노트가 시각적 신체 표현으로서 그녀의 무용이 발전해 온 과정에 대해 별달리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킨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마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발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다른 무용가에게 전달하는 일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레이엄의 노트는 무용 입문서로로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생각을 알아보는 데는 상당히 유용하다.
노트는 그레이엄이 자기 작품의 어떤 '공간'을 전개시킨 장소이다. 515
무용가의 삶
마사 그레이엄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혹은 논란이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70년 동안 큰 변화없이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무용단을 이끌고 매년 예정된 공연을 소화하면서, 춤을 추고 안무를 맡았으며, 무용 테크닉과 작업 스타일, 무용 이론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을 실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이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라 현대 무용의 본래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테크닉과 작업 습관
그레이엄은 안무가 마리 비그만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에게 영감을 받아 자기만의 독창적인 무용 테크닉을 발전시켰다. 그녀는 안무 경험을 통해 전통적인 발레에 대비되는 무용 테크닉을 고안했다. 발레는 매우 선형적인 구도를 가지는 데 비해, 그레이엄의 무용은 역동적이고 불규칙한 형식을 강조한다. 발레는 팔과 다리를 별개의 기관으로 활용하고, 몇 가지 고정된 자세를 통해 전수된다. 반면 그레이엄 무용의 특징은 골반에서 머리로 흐르는 동작을 강조하면서 몸을 끊임없는 흐름 속에 놓아두려는 데 있다. 발레의 아라베스크나 앙트르샤 자세처럼 전혀 힘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을 하는 대신, 관객에게 신체적 긴장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무용수가 매우 열의가 있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으며 뭔가를 애써 추구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와 같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0년 동안 발전된 발레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시간낭비다. 나는 발레 자체와 싸운 적이 없다. 다만 고전 발레의 경우는 뭔가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강렬한 극적 상황이나 열정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고, 이런 부족함 때문에 내가 하는 종류의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520
1600년에 영국의 동인도 무역 회사가 설립되었고, 10년 후에 영국의 왕은 아시아 전역에서 무역할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이 회사에 부여했다. 이후 2세기에 걸쳐 동인도 회사의 위세와 영향력은 꾸준히 증대했다. 인도산 농산품과 옷감이 수출되었고 영국산 공업 제품이 관세 없이 인도로 수입되었다. 무굴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동인도 회사는 안정화 수단의 일환으로 견고한 지배력을 확보했고 어느 정도는 인도에 산업화의 혜택도 가져왔다. 물론 이것은 외국인 소유자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다.
영국 통치하의 인도
영국 무역 회사는 이루한 정치적, 종교적 내분을 겪고 있던 인도아 대륙의 실정을 철저하게 활용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사분오열된 인도아 대륙의 2억5천만 인구가 몇 천 명에 불과한 영국의 상인들과 공무원, 군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역사가 윌리엄 쉬러의 말을 빌면, '이는 역사상 개인 소유의 무역 회사가 인구가 밀집한 광대한 아대륙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사익을 위해 착취한 유일한 사례였다'영국 동인도 회사가 계속해서 무역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18세기 후반에 들자 영국 정부는 주요한 행정권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지배하는 영국인과 인도 민중 사이의 긴장은 1857년에 폭발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벵갈군에 속한 인도인 용병이 유혈 항쟁을 일으켰다. 인도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던 이 항쟁은 델리를 수복하고 일시적으로는 무굴 황제가 복고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영국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인명 손실을 자아내며 결국 이른바 세포의 항쟁을 진압했다. 그 이후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는 영국 여왕(빅토리아 여왕), 즉 인도 여제의 지배로 대체되었고, 영국 여왕의 이름으로 총독이 인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런 고통스런 항쟁의 뒤를 이어 인도 민족주의가 끓어오르고 인도 독립에 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자치를 향한 움직임이 생긱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영국이 영원히 인도를 지배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신념이 굳건한 한 명의 인도인이 동료 시민들을 인도 독립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543
남아프리카에서의 성숙
남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젊고 미숙한 변호사에 불과했던 그의 바람은 그저 유능함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처음 맡은 소송건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이 경험을 통해 타협과 중재가 상대의 약점을 끝까지 파고드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간디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20년 동안이나 정치적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탈에서의 기차 사건
나탈 주州의 더반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에 간디는 트란스발 주의 프리토리아 행 기차를 탔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기차가 나탈 주의 마리츠버그에 정차했을 때, 간디가 앉아 있던 객실에 들어온 어느 백인 남자가 유색인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거부하는 의사를 표했다. 승무원은 간디에게 3등칸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간디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간디는 기차밖으로 쫓겨났고, 추운 대합실에서 밤새 몸을 떨어야 했다. 트란스발까지 가는 남은 여정 동안 간디는 1등칸 객실에서 여행하고 1급 여관에서 숙박하겠다고 계속 요구했지만, 그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부당한 대우에 점점 더 화가 났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이 2등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후에 그는 인도인의 부당한 처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거기에 사는 모든 인도인들을 모이게 했다. 551
만년에 간디는 자신이 남은 인생 동안 매진하게 된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했다. '나는 인도인 정착자들의 힘든 상황을 글로 읽고 귀로 들어서 뿐만 아니라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는 자존심 있는 인도인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이런 상태를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내 마음은 점점 더 사로잡혔다.'552
그가 요구한 것은 하나였다. 스스로 재판정에서 발언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졌다. 간디는 전례 없이 웅변적인 어조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비폭력이 자신의 신조임은 분명하지만, 결국 일어나고야 만 폭력적인 범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기꺼이 가혹한 형량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판사님, 귀하에게 가능한 선택은,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단 두 가지밖에 없을 겁니다. 판사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아니면 가장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는 겁니다' 그는 남아프리카와 인도에서 겪은 자신의 이력을 하나도 빠짐 없이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언제나 영국에 충성했으며, 로우래트 법안, 즉 '인도 민중에게서 실제적이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가는 법안'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기록을 열거하면서, 영국인이 인도에 들어온 이래 인도는 남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하고 가망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영국이 인도 민중을 착취했다는 증거를 대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하늘에 신이 계시다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영국와 인도의 양국민이 어떤 대답을 내릴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그는 어떤 특정한 관리나 영국의 왕에 대한 개인적인 적개심은 전혀 없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전체적으로 과거의 어떤 정부보다 인도에 더 큰 해악을 끼친 정부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판사와 피고 사이에 오간 외교적이면서도 깊은 교감이 어렸던 대화는 미리 정해진 운명에 따라 막을 내렸다. 브룸필드 판사는 간디가 유죄를 시인함으로써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하는 제가 재판을 해봤거나 앞으로 재판을 하게 될 그 어떤 사람들과도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귀하의 수백만 동포들의 눈에는 귀하가 위대한 애국자요 지도자로 비친다는 사실을 저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브룸필드는 자신이 허용가능하다고 생각한 한도 내에서 가장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6년형이었다. 572
검소함과 극기
간디의 실험에는 성자와 같은 검소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세속적인 소유를 물리치고 검소한 식사를 했으며 알몸이나 다름 없을 정도만의 옷을 걸쳐 입으며 되도록 안락한 삶을 멀리 했다. 금욕과 극기에 관한 인도의 신화에 합치되는 성관계 중단 결정은 대부분의 국외자들에게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한 편이었다. (3장에서 언급했듯이 프로이트 역시 성관계를 중단하기로 결심했었다.) 극기를 통해 삶의 자양분을 얻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런 재산도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참으로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이다. .........나는 가난한 탁발 수도승이다. ....기도가 내 삶을 구원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을 좀더 세속적인 관점에서 평가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간디가 가난하게 사는 데는 아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간디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 잣기에 전념한 것 - 나중에는 거의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은 단지 매일매일의 자기 단련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면 모든 인도인이 자신을 스스로 부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의학이나 건강, 음식, 식이요법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인 것도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잇는지, 특히 물질적 자원이 빈약한 처지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간디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료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책임감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의 치료도 관장하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어린 이들을 장티푸스에서 낫게 하면서부터는 자신의 방식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의학 치료에 대한 이런 완고함이 필요한 의학 치료를 그가 못받게 했던 다른 가족에게는 불필요한 고통을 자아냈다.
가장 극단적인 극기 형식은 단식이었다.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닌 인도의 자기 정화의 수행법이었으며, 그의 어머니가 무수히 실행했던 방법이었다. 간디는 오랫동안 단식을 주로 자신이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시험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인도의 독립을 촉구하는 운동 과정에서 간디는 단식을 정치적 설득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단식은 적에 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단식은 오직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고, 오직 우리 자신의 복리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단식에는 그 나름의 체계적인 수련법이 있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숙한 경지에 오른 간디는 인도인 전체를 그의 가족으로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정신적 도약을 기꺼이 감행했다. 585
불편한 가족관계
간디와 가족들의 관계, 특히 자식들과의 관계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간디는 오랫동안 아내와 갈등을 빚었다. 아내에게 글을 배우라는 요구와 자신의 말(침실 변기를 청소하고 불가촉 천민을 공동체에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게끔 하는 문제도 그런 갈등 요인이었다. 그녀가 병이 났을 때 간디는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상식이나 의료법보다 자신의 치료법을 앞세웠다. 그는 아내 카스투르바이를 마지못해 존중했으며 자기 나름으로는 그녀를 사랑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간디와 함게 한 그녀의 삶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간디는 아이들, 특히 맏아들 하리랄과는 매우 불편한 사이였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기에 그런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면 적어도 무의식상에서는 자식들에게 등을 돌렸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하리랄은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아버지의 믿음과 실천에 반항했다. 이는 에릭슨이 가족의 기대치에 관련해서 '부정적 정체성negative identity'이라고 부른 것의 실례이다. 카스투르바이는 하리랄을 옹호했지만 간디는 그럴수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사실 그는 모든 경우에 대해 하리랄의 상속권을 박탈했고, 아들이 아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며, 데사이Desai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자식으로 생각한다는 신랄한 말을 하기도 했다. 590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마하트마 간디
그레이엄은 많은 점에서 이 책에서 논의한 다른 예술가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20세기 내내 해당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새로운 예술 언어를 창조했다. 그녀는 또한 재능 있는 동료들과 함께 현대 무용을 주재한 작가와 비평가 그룹, 그러니까 새로운 장場의 형성을 자극했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획기적인 작품을 창조한 그레이엄은 예술가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했으며 중년 이후에는 신고전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탁월한 작품을 만들었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일흔 살에 포기해야 했지만, 거의 눈을 감을 때까지 안무와 공연을 스스로 맡아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레이엄은 간주곡 2에서 다루어도 마땅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그레이엄의 창조 활동은 간디의 창조활동과 연관해서 살펴보는 것이 낫다.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그레이엄은 기본적으로 공연가였다. 그녀의 예술적 공헌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 그리고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중요한 점에서 그녀는 간디와 유사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 역시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펼친 활동 performance과 이 활동 내용에 대한 사람들(그를 접한 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 창조였다.
그렇다면 간디와 그레이엄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육체로서 창조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인 외양,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창조 활동의 핵심이다. 그레이엄과 간디는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딱히 매력적니 용모라 할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풍모를 지녔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공연에 매료되어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몸을 위주로 한 삶은 작업실이나 실험실에 기반한 다른 창조자들의 삶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 건강을 챙겨야 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현시를 즐길 즐도 알아야 한다. 관객과 동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거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끊임없이 몸의 이상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단식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텝을 잘못 밟아 작품을 그르칠 수 있다는 두려움, 혹은 그럴싸하게 보이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실존의 순간마다 그들은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611
인생패턴: 창조성의 10년 규칙. 정당한 근거 없이 숫자의 마술을 부릴 생각이 없었음에도 본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창조성의 10년 규칙을 발견했다.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물로 분야마다 약간씩 기간은 달라도 대략 10년을 사이에 두고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었다. 인지 심리학 계통의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한 사람이 어느 분야를 기본적으로 통달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이다. 피카소처럼 네 살에 시작하면 10대에 거장이 될 수 있고, 10대 후반에 창조의 노력을 시작한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작곡가와 그레이엄과 같은 무용가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성의 본 궤도에 올라선다.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지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나느 프로이트의 [프로젝트]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 [프론티어], 간디의 아메다바드 팡ㅂ을 결정적인 도약으로 간주한다.
이어서 창조자는 자신의 혁신적인 도약과 타협을 한다 혁신에의 열정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후속적인 혁신은 보다 폭이 넓고 종합적인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좀더 미묘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해당 분야의 과거에서 이루어진 성과 및 다른 사람들이 수행한 업적과 좀더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식으로 혁신을 감행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트라빈스키의 [결혼], 엘리엇의 [4개의 사중주], 그레이엄의 [애팔래치아의 봄], 간디의 소금행진 등이 두 번째로 정점에 오른 도약이라 할 수 있다. 638
하지만 뉴턴과 결부된 물리학 패러다임, 혹은 맥스웰과 페러데이와 결부된 물리학 패러다임, 마흐와 헬름홀츠와 결부된 물리학 패러더임은 어느 것도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1910년 경에 로렌츠와 푸앵카레는 당시 통용되는 물리학 개념의 불안정성을 표명했는데,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암시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과학 이외의 분야에도 확장해서 비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분야에도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는 시기가 있음을 분명히 나타낼 수 있다. 18세기 후반 서양 고전 음악은 하나의 작곡 패러다임을 수용했으며, 오늘날의 영국 법정도 분쟁을 다루는 몇 가지 패러다임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 주요 예술 장르에는 확고한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음악과 문학의 낭만적 사조, 그리고 미술의 관전파 및 인상주의 운동은 쇠퇴 국면에 있었고, 무용은 진지한 예술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 분야는 '패러다임이 없는'상태였고, 따라서 새롭고 유능한 패러다임이 등장할 여지가 많았다. 대영제국의 지리적 실체간의 관계에 패러다임이라나 용어를 적용할 수 있다면,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식민지와 식민지 주민들게 최선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을 테지만 원주민들은 오히려 점점 더 반항적인 집단이 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것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매우 빠른 속도로 폭넓게 수용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최적의 표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혁신적인 이론은 처음에는 의혹을 받았지만 물리학 공동체에서 신속하게 수용될 수 있었다. 반명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분야의 구심적인centripetal 특성은 젊은 세대가 곧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낼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자와 경쟁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음을 뜻한다. 아인슈타인이 겪었던 일은 기존의 확립된 분야에서 다른 패러다임 창시자가 겪었던 일과 같다. 그는 곧 자신의 이론을 쉽사리 터득하고 여기에 기반해 새로운 이론을 세웠던 젊은 과학자들에게 추월당했던 것이다. 647
지나치게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했는가? 당연히 이 책 못지 않게 방대한 연구를 전혀 다른 측면(성격,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동기, 사회적 지원)에 주목해서 수행할 수도 있다. 마찬가질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대시 사회학자들처럼 장場에 주목할 수도 잇고, 역사가나 과학 철학자 및 예술철학자들처럼 분야에 주목할 수도 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현재로서는 가장 통찰력 있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인지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물론 인지적인 측면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님은 잘 알고 있다. 나는 인지적인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해석해서 정서나 종교, 영혼의 문제까지 다루려고 했다. 이 경우에도 확고한 인지과학자들은 내가 창조적인 인물들의 고유한 정신 과정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도 않았고 창조적인 인물들이 정보를 처리하는 기본 모형을 제시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정말로 창조성에 주목했는가? 내가 선택한 인물들이 창조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독자가 대부분일 테지만, 분명 내 기준을 미덥지 못하게 여기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장場에 의한 수용이라는 발상은 내가 순수한 창조성보다는 대중적 평판이나 세속적 성공을 우선시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선택한 인물 못지않게 창조적인 인물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장의 수용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창조성을 대중적 평판을 얻는 경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에는 믿을 만한 기준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이란 단어가 중요하다. 20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에서도 이 책에서 거론한 인물들은 해당 장場에서 최고로 인정받지 못했다. 프로이트나 그레이엄 혹은 스트라빈스키의 업적에 대해 쏟아진 부정적인 평가나 심지어 난폭한 비평의 숫자를 보면 잠시 멈칫거릴 정도이다. 하지만 걸출한 인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부각되게 마련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물론 장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뛰어난 인물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고, 설령 들어봤더라도 (적어도 아직까지는)그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668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100년 후에 지적하듯이, 현대의 독특한 리듬과 특질 및 시공간이 출현한 곳은 파리의 도시 생활에서였기 때문이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엘리엇, 그레이엄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의 현대적인 요소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우선 과거 예술에 비해 플롯과 멜로디, 선조성linearity, 기교, 규범적 형태, 분명한 도덕적 태도, 충실한 인물과 장면 묘사 등 전통적인 아카데미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기대할 만한 특징을 경원한다는 점이다. 대신 순간적인 인상과 파편화, 강렬한 리듬, 날카로운 어조 등을 통해 일상적 경험의 느김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러한 예술작품은 평범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 모르짐나, 추상화 경향과 경험의 일반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형태적 요소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의 추상 표현주의나 음렬주의와 같은 좀더 후대의 예술과는 달리, 비구상의 공허함에서 뒷걸음치고 오나전한 자의성을 거부하면서 순수 추상의 세계를 회피한다.
현대 예술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맥락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전통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의 말대로' 새로움의 전통'을 창조하려는 단호한 노력이다. 그리고 피카소의 회화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그레이엄의 무용, 엘리엇의 시에는 각기 고유한 시선으로 포착한 현대적인 요소와 누구나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전통적 요소가 병치되어 있다. 이처럼 현대 예술은 한때는 굳건하게 그어져 있던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현대 예술은 또한 대중과 관료제, 익명성과 공허함이라는 특정한 인간 조건을 문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예술은 전통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러한 혼합 역시 오직 엘리트 예술의 입자에서만 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자칭 니힐리즘과 '몽매주의ignorabimus'와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679
아마도 나의 감성은 포스트모던 시대보다 현대에 더 가가울 것이다. 비록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는 있지만, 나의 감수성은 모더니즘 정전에 의해 형성되었다. 내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티프와 정신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포스트모던한 정신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내가 다소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잇다. 표준적인 해석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통적인 해석 방식이 아직 심층적으로 분석되거나 비판되지 않았을 때나 이치에 맞는다. 하지만 일단 이런 낡은 형식에 대한 기억이 약해지면, 그에 대한 저항도 희미해진다. 모든 것이 매너리즘과 스펙터클, 순간적인 인상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이런 비판을 규범적인 모더니즘의 시대라 지난 뒤에 등장한 모든 형식에 똑같이 들이밀 수는 없다. 가령, 신앙의 시대에 귀를 기울인 작품이나 단순한 형식의 ㅂㄴ복에서 미덕을 발견한 작품, 정치적 주제를 다룬 작품, 지적인 관객(독자)까지도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작품까지 몰아서 이런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판본'들은 모더니즘 시대를 포함한 보다 전대의 관습과 기준에 걸맞기 때문이다.
포스트포더니즘을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더니스트들은 여전히 전통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모더니스트들은 비록 진보주의나 유물론, 합리주의 혹은 결정론을 비판했지만, 이밖에 다른 담론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판단에는 어긋날지라도 이런 담론을 고수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688
철학을 비롯한 여러 인문학 분야에서는 이에 관련되 연구가 엄청나게 축적돼 있고, 국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 왔지만, 대중 교양서에서는 그다지 설명되지 않았다는 게 그동안 역자가 품은 생각이었다. 독자들은 서장과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개략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을 간단하게만 숙자해도, 20세기 초의 역동적인 시대 상황을 흐릿한 배경으로 염두에 두면서 평생 동안 창조적인 실험 정신으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해 간 거장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인문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다.
창조성은 단순한 재기나 문제풀이 능력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도한 입시교육이나 취업경쟁이라는 상황 탓인지 창조성을 그런 재주 정도로 오해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에서 역자가 가장 공감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창조성은 단지 한 개인의 탁월한 재능만으로 실현되거나 발휘될 수는 없고, '오직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 그리고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대학에서 교양 강의를 하다보면, 언제나 공부를 잘한 우등생이었으니까 문화나 예술을 이해하는 데도 최고일 거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대개는 그런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때로는 이상한 고집만 남은 학생도 보게 된다.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를 모두 잘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각자가 자신이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우리에게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이 중요시되는 방침이 교육계나 일반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생각이다.695
흔히들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라고 말한다. 지식이란 결국 콘텐츠다. 최근 동남아와 일본을 강타한 한류 열풍은 우리 문화의 창조적 역량을 입증한 쾌거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은 더 없이 중요하다. 천재나 거장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총체적인 문화 역량이 축적되어 있을 때나 뛰어난 개인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의 거장이 탄생하려면,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와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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