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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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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4일 05시 42분 등록

1. 저자 소개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ener, 1943~ )

심리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교수. 인간의 사고 능력 배양과 창의성 개발을 목표로 하는 하버드의 연구 그룹 ‘Project Zero’의 책임자이며 유명한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 이론의 창시자이다.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계 이민 2세인 가드너는 1943년 미국 펜슬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두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 문제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그것의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드너의 최고 업적이라고 한다면 뭐니뭐니해도 문제 해결 및 논리 활용 영역에 치우진 전통적 지능관에서 벗어나 다중지능이론을 통하여 다양한 인간의 재능 영역을 발굴하고 사회공동체 안에서 각 재능간의 상호 작용을 규명하였다는 점에 있다.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음악적 재능, 신체운동적 지능, 논리수학적 지능, 언어적 지능, 공간적 지능, 대인관계적 지능, 자기성찰 지능, 자연친화지능 등의 지능이 있다. 그는 지능은 태어날 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학습의 정도에 따라 일정 수준까지 계발이 가능하며 개인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환경에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1995년부터는 칙센트미하이, 월리엄 데이먼 교수 등과 함께 훌륭한 전문 직업인이 되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 일명 'Good Work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는 창의적인 영재들이 일을 통해 개인적인 성취 뿐 아니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시작되었다. 자본의 논리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사회적 유용성을 갖는 수준으로 일(work)의 전문성을 높이고 그 일을 통하여 사회적 책임을 구현해 나갈 것인지가 이 연구의 주제이다.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같은 인물들을 Ideal model로 삼은 것으로 봐서는 『열정과 기질(Creating minds)』에서 언급된 개인과 분야 및 場의 상호작용이라는 연구 성과물이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보여진다.


인물에 한정되었던 창조성의 의미를  개인과 사회의 관계로 확장한 가드너는 미래는 훈련된
마음(Disciplined Mind), 종합하는 마음(The Synthesizing Mind), 창조하는 마음 (The Creating Mind), 존중하는 마음(The Respectful Mind), 윤리적 마음(The Ethical Mind)으로 무장한 인재들에 의해 이끌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훈련된 마음은 어떤 분야의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하거나 지식을 습득하는 마음을 말한다. 학교를 다닐때는 문학, 철학, 수학, 과학에 대한 공부를 말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해당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10년 정도를 계속 공부하는 마음을 뜻한다


종합하는 마음은 훈련된 마음을 통합하는 마음이다정보의 홍수 속에서 핵심을 추려내는 능력, 트렌드를 읽는 능력, 이해한 바를 남들에게 설득하는 능력을 말한다. 창조하는 마음은 말 그대로 기존의 질서, 체제, 시스템의 밖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가드너는 창조하는 마음은 훈련된 마음, 종합하는 마음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며 이것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창조성의 발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존중하는 마음은 남들과 협동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마음을 말한다남들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테두리 내에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가는 마음을 말한다.


윤리적인 마음은 성공,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그러고 보니

지금 이 시간 이 외로운 달밤의 체조는 가드너가 말한 미래 인재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값진 훈련의 나날들인 것이다. 옴메~~

감역 문용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및 동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육부 장관,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덕교육론』『EQ가 높으면 성공이 보인다』『이젠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부모가 필요하다』 등을 저술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다중지능: 인간지능 의 새로운 이해』『비범성의 발견』『피아제가 본 아이들의 인지세계』 『에디슨아동, 키워주고 살려주고』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감역자의 글

 

시대적 화두이자 가장 경쟁력 있는 인간 특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특기할 만한 것을 생각해내고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언제나 주목이 쏠리는 법이다. 물론 창조성이 오늘날에만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5

 

세계 국가의 국부의 순서는 창조성의 지표인 특허출원 총량순위와 일치하며, 조직과 기업은 감동을 일으킬 만한 새로운 상품과 시스템을 얼마나 선보이느냐로 그 존재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5

 

이 책은 다중지능론을 주창했던 저자가 실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창조성의 비밀을 역동적으로 풀어낸 교양서이다. 6

 

이 책은 인간의 심리적 기질과 그가 처한 주변환경, 그리고 시대적 특성을 곁들여 창조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조명해낸 최초의 분석서이다. 6

 

이 책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modern era)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먼저 그 첫 번째인 창조성이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에서, 가드너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하고자 한다. 그는 <개인(Individual)-(work)-타인(Other person)>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한다. 7

 

가드너는 창조성 소재 모형은 창조성 연구의 지평을 거대하게 넓힌다. 그는 창조성을 단일능력으로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창조성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고, 창조성에도 종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분야에서 창조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논리-수학 영역에서만 창조성이 뛰었난다. 간디는 인간친화 영역에서 창조성이 뛰어났으며, 마사 그레이엄은 신체운동 영역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서, 엘리엇은 언어에서, 프로이트는 자기성찰 영역에서, 그리고 피카소는 공간 영역에서 창조성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가드너가 보기에 한 개인 속에 잠재한 창조성의 본질은 지능적 요소와 기질적 요소의 특이한 조합이었다. 피카소의 시대에 피카소 주변이나 그가 모르는 사회에는 그와 소질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수백 명 이상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유독 피카소만이 그런 창조적인 작품을 그렸고, 또한 명성까지 얻을 수 있었을까? 가드너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과 환경을 들여다봄으로써 공통적 패러다임을 추출해낸다. ‘10년 주기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창조적 대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대체로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창조성이 성숙하고, 10년간 창조성을 발휘하며, 다음 10년간 그 창조성을 다시 다른 분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런 사람들의 창조성 발휘를 가능하게 한 시대적 특징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가드너가 선택한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은 모두 현대의 인물들이다. 그가 관심을 가진 시대는 현대 사회(modern era)로서, 현대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이 창조성 발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혀보려고 시도한다. 9

 

일곱 명의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이 태어난 19세기 후반의 시대는 점점 더 불확실성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 세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이 대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산업 혁명의 비참한 모습을 비껴간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집안은 다들 유복한 편이었고, 가족 가운데는 독실한 신자도 한 두 명 있었지만 대개는 자유사상에 관용을 베풀 줄 알았다. 그들은 근면과 드높은 성취라는 부르주아적 가치를 체험했을 뿐더러 이것을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많은 어린이가 착취당하는 시대에 이들 현대의 거장들은 자랄 무렵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가끔 끔찍한 상처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현대 거장들은 마치 강력한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 젊은 시절에 모두 유럽과 북미의 주요 도시로 이주했다. 그들은 이 책의 맨 앞에 인용한 미워시의 시에 나오는 젊은이들이었다. ㅇ런 도시들에서 미래의 거장들은 취향이 비슷한 젊은이들을 만나고 공부 모임이나 예술 혹은 과학 회합을 결성하고 인습파괴적인 잡지를 발간하거나 공연을 기획하면서, 훗날의 창조적인 도약을 낳게 되는 지적 잉태 기간을 보냈다. (에필로그 중에서)  10

 

먼저, 창조성의 발휘와 관련헤서 시대를 뛰어넘는 공통점은 무엇이고, 시대에 국한된 특수성은 무엇인가? 둘째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인간의 심리와 족적 속에서 그가 살아간 시대의 특징과 의미를 연역해낼 수 있을까? 10

 

들어가는 글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지배한 실험정신

 

이 책은 내 연구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다. 창조성이라는 현상과 역사적 실례(개별 사례)에 대한 평생 동안의 관심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는 정점이며, 인간의 창조적 기질을 새로운 접근법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는 출발점이다. 이 새로운 연구 방식에서 나는 인문학의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전통에도 의지하였다. 13

 

나는 인간 경험의 감정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과 인지적인 차원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다소 갈등을 느끼고 있었는데, 대학 졸업반 시절에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의 저서를 읽으면서 인지적 차원에 약간 더 무게를 두고 이런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14

 

예술적 인식과 교육에 특별히 주목한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라는 새로운 연구 기획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의 후원을 받으면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두뇌 손상으로 인한 인간 능력과 재능의 파괴, 그리고 일반 아동과 영재 아동의 발달 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연구소는 인간의 상징화 능력의 본질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예술적 창조의 핵심 관건이 되는 상징화 형식에 각별히 주목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구소 동료들과 내가 천착한 주제는 왜 어떤 아동들은 음악가나 시인, 혹은 화가로 자라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예숙가가 되지 못하는지, 그리고 이런저런 예술적 재능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발되거나 혹은 위축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뜻이 묘하게 얽힌 탓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에술(art)’창조성(creativity)’이라는 단어를 비슷한 뜻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15

 

 내가 창조성 문제를 국외자 입장에서 참견하는 정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으로 나아간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내 연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아동과 두뇌가 손상된 어른을 연구하면서 나는 인간의 인지능력이 다양한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지성도 비교적 자율적인 여러 능력, 즉 다양한 인간 지능이 하나의 총체를 이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어떤 한 사람이 무조건 지능이 우수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던정짓는 생각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창조성이 대체로 뛰어난개인을 찾는 연구나 창조성을 시험하는  수단을 개발하는 작업이 내게는 헛된 노력으로 보였다. 지능이 다윈적이라면, 창조성은 더 다원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발달심리학과 사회심리학, 교육심리학 분야에서 훈련받았고 관심사가 서로 비슷하며 이들 주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자 그룹(Invisible College)에 내가 소속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지발달에 관한 피아제의 접근방식에는 대체로 공감했지만, 피아제의 몇몇 주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의 상징화 능력의 본질과 기능, 문화권에 따라 나타나는 상이한 발달과정, 그리고 지능과 창조성, 전문적 기술, 적성, 비범함 등 인간 능력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17

 

나는 특히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이론 공식에 기초해서 창조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발전시켰다. 1분에서 설명하겠지만, 이 새로운 연구 방식은 우선 개인의 발달과정을 연구하고, 그런 다음에 한 개인이 활동하는 특정한 분야, 혹은 특정한 상징체계와 그 분야에서 새로운 업적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기성 권위자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다소 추상적인 용어로 새로운 접근법을 개념화한 다음에, 나는 이 방법을 우리 시대의 창조적인 인물로서 누구나 인정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적용하려고 했다. 17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각기 연구자의 평생을 걸야 할 만한 인물이라는 점, 현대는 굉장히 복잡한 시대라는 점, 분석 도구가 새로운 것이어서 여러모로 불완전했다는 점이었다. 18

 

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예술가란 불멸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31

 

이 책의 목표

일곱 명의 현대의 거장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세 가지 중요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다. 첫째, 나는 대체로 188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이를 통해 그들 나름의 특별하고 종종 기묘하게도 보이는 지적 능력과 성품,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 그들이 제기한 창조적인 의제, 힘겨운 노력, 그리고 그들이 성취한 업적의 특성을 밝힐 생각이다.

 일곱 명의 뛰어난 인물들이 이뤄낸, 성격이 전혀 전혀 다른 창조적인 업적을 조명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가 만약 인문학 전통에서 이 연구를 수행한다면 이들 중 한 사람만을 골라 철저하고 집중적으로 그()가 기여한 바를 규명하려고 할 것이다. 이 경우엔 비교 검토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회과학자로서 이 과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 책은 창조성의 유형을 찾는 형식을 취한다. , 이들 간의 유사점과 교육상 의미 있는 차이점을 규명할 생각이다.

 두 번째 목표는 창조적인 행위(기획)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으로나마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세심하게 선택한 인물들의 획기적인 업적을 좀더 잘 이해하면, 분야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어하는 법칙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36~37

 

창조성의 종류가 단일하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특정한 성품과 조건이 20세기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일반적인 특성이며, 우리가 이런저런 사상을 구상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또한 다양한 사상들에 반응하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심한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어도 활기에 넘쳤던 시대, 즉 내가 현대(the modern era)’라고 부르는 시대에 관해서도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전혀 다른 시대에서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창조적인 인물들을 고를 수 있지만, 대체로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고(프로이트는 1856년에, 마사 그레이엄은 1894년에 태어났고 다른 인물들은 이 사이에 태어났다). 넓게 보아 서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선택하면 유리한 점이 잇다.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의 특정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형성했고 또한 그들이 그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시대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

 

 내 생각에 19세기에 풍미했던 예술과 장인적 기예, 과학 이론, 그리고 지적 통합성은 더 이상 적절치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부적합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일곱 명의 창조적 인물들은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20세기 내내, 그들의 세기 내내 그 잠재력이 소진될 정도로 철저히 수행되고 연구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재정식화(reformulation)의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각 분야의 기본 요소로 회귀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가장 단순한 형태와 소리, 이미지, 수수께끼로의 회귀를 일컫는데, 이는 가장 기본적인 충동과 가장 정교한 이해가 결합되는 다소 묘하긴 하지만 매우 생산적인 정화 과정이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나는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다. 38

 

구성적 주제

이 분석틀은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 창조적인 인물, 창조적인 행위의 대상이나 작업(), 그리고 창조적인 인물의 세계에 거주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가지 핵심 요소와 이들의 관계는 창조적인 행위를 설명하는 기본 토대가 된다.

 

1.  아동과 대가의 관계

혁신적인 인물이 어린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간파하는 것도 창조성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2.  개인과 그가 활동하는 분야의 관계

이 책에서 나는 창조적인 인물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터득하고 그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궁극적으로 그 분야의 성격을 쇄신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에 주목할 것이다.

 

3.  개인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흔히 창조적인 인물들은 홀로 고립되어 작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장하는 기간 내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이 연구에서 나는 성장기에 가족과 교사가 행하는 역할과,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는 시기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역할을 탐구할 것이다. 39

 

처음으로 이런 요소들을 소개하면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우선 한 개인과 객관적인 작업 세계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 다음 두 번째로 그 개인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서 성숙한다는 점이다. 40

 

아동과 대가

그는 당시 물리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과 의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대신 그는 제1원리로 돌아가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단순하면서도 가장 포괄적인 설명 원리를 찾고자 했다.

 어떤 점에서 이는 아인슈타인이 유년기의 개념 세계로 회귀한 것을 의미한다. 관습적인 설명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기본적인 이해 방식을 찾았다는 말이다. 사실 그가 어린 시절에 품었던 수수께끼-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 광선에 올라타는 사고 실험’-는 훗날의 가장 혁신적인 과학적 업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42

 

음악의 정치성

스트라빈스키는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와 벨라 버르토크(1881~1945)와 더불어 20세기의 고전음악을 지배한 음악가이다. 그의 창조적인 혁신은 전통적인 분야에 근본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사고를 자극했을 뿐 아니라, 무용이나 연극과 같은 인접 분야에도 방향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이론 물리학 분야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비교적 고립된 환경에서도 작업을 할 수 있지만, 음악 작곡가는 그럴 수 없다. 거의 모든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공동작업의 소산이므로 그의 창조 활동을 연구하면, 예술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에 올리고 그 성과를 비평가들이 검토하는 과정에 스며 있는 정치적인 요소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43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엘리엇은 다른 누구보다도 현대의 창조적인 인물이 지니는 경계성(marginality)을 고려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상이한 문화권에 끼어 있었고 다양한 시대에 걸쳐 살았던셈인데, 정신 장애에 가까운 불안과 혼란을 겪었다. 게다가 엘리엇은 분명히 미국의 주류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인물이 스스로 경계인(境界人)이 되는 사례의 시금석과도 같다. 43

 

그의 생애는 창조적인 인물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44

 

창조적인 미국 여성

하나는 그녀가 뼈 속 깊은 곳까지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서유럽과 동양의 전통에서 뿐 아니라, 특히 고국에서, 그러니까 뉴잉글랜트 지역의 전통과 유년기를 보낸 애팔래치아 지방, 그리고 드넓은 평야 지역과 거기서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두 번째로 그녀는 여성으로서 남성 본위의 창조 세계에 미만한 태도와 기대치,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여러 장애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44

 

다른 누구보다 마사 그레이엄은 그녀 스스로 행동의 귀감, 즉 역할 모델이 되어야 했을 터인데, 이 점은 생물학자 바바라 맥클린토크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화가 조지아 오키프, 작가 버지니아 울프 등 20세기 선구적인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많은 여성 예술가들에게 용기와 자극을, 주었고, 이들이 좀더 쉽게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청중(관객,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44~45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

반면 정치와 종교, 교육, 상업, 임상 분야 등 인간관계의 영역에서 창조성을 논하는 일은 왠지 가당치 않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보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창조성 논의에 더 적합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는 지엽적이다. 다른 이유가 좀더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어떤 특정한 창조적인 도약을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활약한 특정한 개인과 동일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인관계(interpersonal) 방면에서 예수와 싯다르타, 마호메트, 공자, 소크라테스 등 과거의 위대한 혁신가들과 견줄만한 최근의 창조적 인물은 인도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유일하다. 간디는 그가 몸소 관여해서 폭넓게 검토하고 세심하게 실험하면서 인간의 갈등을 폭력 없이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眞理把指)는 소모적인 대결과 비열한 복종, 그리고 폭력에 대한 호소 없이 귀중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방도를 찾는다. 46

 

아인슈타인과 피카소의 사례 연구는 아동과 대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프로이트와 스트라빈스키, 간디의 경우는 창조적인 인물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엘리엇과 그레이엄의 사례 연구는 이들이 활약하는 분야에서 비교적 경계적인 위치에 속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둘 것이다. 46

 

관습에 도전한다는 것은 사실 모든 혁명적 시대의 특징으로서, 그 도전의 성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은 분야들에서 생겨난 도전들은 상당히 비슷하다. 각각의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단순한 형식을 추구한다는 점, 낡은 문명이 죽고 새로운(그러나 아직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문명이 탄생하는 장면을 포착하고 기록하려고 한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55

 

2. 창조성의 연구 방법

길포드가 생각한 창조성의 핵심 개념은 발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였다. 표준적인 지능 검사에 의해 똑똑하다고 인정된 사람들은 주어진 자료나 문제에 대해 항상 올바른(어쨌든 상투적인) 대응법을 생각해낸다. 반면,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자극을 받거나 문제를 보면 아주 다양한 연상을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매우 유별나고 엉뚱하기까지 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길포드의 도전적인 시도 이후 수십 년 동안 심리학자들은 상당한 논쟁과 실험을 거친 후에 다음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창조성은 지능과 다르다는 점이다. 창조성과 지능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지능이 우수하지 않아도 창조성이 풍부한 사람도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게다가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을 검사할 경우에는 일단 IQ 120이 넘으면 심리측정학적으로 창조성과 지능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른 두 가지 결론은 모든 지능 검사를 둘러싼 고전적인 주제와 관련된다. 창조성 검사는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한 사람이 창조성 검사를 여러 번 받아도 비슷한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창조성 검사를 받을 때도, 그가 얻은 창조성 점수 사이에는 확고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능 검사와 마찬가지로 창조성 검사도 해당 정신 능력을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다른 검사 방법과 상관관계가 있는 결과가 나와야 그 유효성이 인정된다.) 59~60

 

창조성에 대한 인지적 접근

나의 연구 방식은 개별적인 사례 연구와 발달심리학적 관점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상징체계를 검토하고 이들 간의 상호 작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루버의 전통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발현된 창조성을 폭넓고 면밀하게 비교 검토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역사-문화적 시대에서 세심하게 선택한 창조적인 인물의 사례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각각의 창조적인 도약과 활동 분야 그리고 그 분야에 속한 공중의 대응 방식이 어떤 식으로 역동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그루버의 전통과 구별된다. 64~65

 

버클리 성격 연구소가 수행한 이 방면의 대표적인 연구에 따르면, ‘창조적인 건축가들은 그들보다 창조성이 부족한 동료들에 비해 독립성과 자신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기민함, 기꺼이 무의식에 내맡기는 성향, 야망,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의 성격적 특색이 훨씬 풍부했다. 65

 

프로이트는 유아 발달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점도 창조 행위를 보는 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는 놀고 있는 아이와 백일몽을 꿈꾸는 성인,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가 사이에 유사점에 있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66

 

놀고 있는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거나, 혹은 자신이 즐거울 수 있도록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을 재배열한다는 점에서 모두 창조적인 작가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창조적인 작가와 놀고 있는 아이가 하는 일은 똑같다. 창조적인 작가는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 작가의 환상 세계에는 그의 감정이 충전돼 있다. 물론 그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67

 

내재적 동기

실제로 창조성이나 독창성을 기준으로 우리의 행동이 평가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행동의 반경이 좁아진다.(비교적 상투적인 결과만을 얻는다). 반면에 그런 평가가 없을 때는 오히려 창조성을 자유롭게 북돋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68

 

칙센트미하이는 어떤 식의 창조성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세 가지 요소(결절점)을 지적한다. (1) 재능 있는 개인, (2) 그 개인이 활약하는 특정 분야나 학문 영역, (3) 인물과 성과물의 질적 수단을 판단하는 장(). 칙센트미하이의 설득력 있는 설명에 따르면, 창조성은 어느 한 요소나 한 쌍의 요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성은 이 세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볼 때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88

 

내 주장은 간단하다.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장의 판단이 없으면, 어떤 사람이 창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92

 

이들 세 결절점 가운데 어느 한 결절점 내에 예외적인 유형이 존재할 때 하나의 결절점 내에 비동시성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가령, 인물의 지능이 다소 독특한 면을 보이거나(어린 시절 공간 지능에서는 조숙한 천재성을 보였지만 학교 공부에는 서툴기 짝이 없었던 피카소), 해당 분야에 극도의 긴장이 서려 있을 때(온갖 악파들이 음악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던 스트라빈스키 시대의 음악 분야), 혹은 장이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할 때(현대 무용이 형성될 무렵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비평가들이 등장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93

 

당연히 비동시성은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 성과물이 얼마나 창조적인가 하는 문제는 별도이다. 내주장은 두 가지 명제에 근거한다. 첫째, 비동시성이 너무 뚜렷하거나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있는데, 이 경우는 창조적인 업적이 나오기 힘들다. 내가 생산적인 비동시성(fruitful aynchrony)이라고 부르는 중간 수준의 긴장 관계나 비동시성이 바람직하다. 둘째, 생산적인 비동시성이 많이 존재할수록 진정으로 창조적인 업적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비동시성의 과잉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바람직한 것은 비동시성에 압도되지 않는 범위에서 실질적인 비동시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94

 

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트(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수요 심리학회의 정수(central core)에서 빈 정신분석학회가 태동했고, 여기서 국제 정신분석학 협의(IPA. International Psychoanalytic Association)가 탄생한 것이다. 105

 

당시의 어린 소년들이 대개 그랬듯이(다른 시대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프로이트도 군인의 삶을 동경했다. 특히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게 매료되어서 스스로 한니발의 전투를 이야기로 꾸미기도 했고, 유대인이 아니었으면(유대인은 군 지휘관이 될 수 없었다)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군인의 삶은 동경했지만 틀에 박힌 종교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고, 성서나 다른 유대 전승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리고 반유대적인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108

 

프로이트는 법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다가, 괴테의 『자연론』에 관한 강의를 듣고 마음을 바꿨다.자연을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 묘사한 세상 만물에 대한 이 위대한 송가는 프로이트가 의학을 공부하고 자연과학도가 되는 데 촉매 역할을 했다. 108

 

젊은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중요한 성취를 이루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그런 성취를 이룰 것인가였다. 이 점에서 그는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일곱 몀의 창조적인 인물 가운데 야심과 자신감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인물이다. 110

 

나의 용어로 말하면, 프로이트는 언어 지능과 인성(personal) 지능이 우수했다. 111

 

최초의 경력 : 신경학

프로이트가 20대와 30대 초반에 발표한 저작들은 신경해부학 분야의 훌륭한 업적이었다. 이 저작들은 프로이트가 세부 사항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과 신경계의 조직 원리를 현미경 수준에서 탐구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뉴런(neuron), 즉 신경세포와 거기서 나온 돌기가 신경계의 기능적 단위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최종 영광은 1994년 빌헬름 폰 발다이어에게 돌아갔다. 113

 

그는 신경증의 다양한 증상을 알게 되었는데, 특히 히스테리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115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의 용어를 빌면, 프로이트는 20대는 일종의 심리사회적 유예기간(psychosocial moratorium)’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직업과 생활방식으 시도했었다. 117

 

대담하게도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어떤 원인이나 증상을 출발점으로 삼든, 종국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성적 체험이다.” 121

 

프로이트는 학문적인 면에서는 스스인 샤르코나 브뤼케와 같은 인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적인 면에서는 가족들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맺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분리시킬 줄 알았지만, 학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감을 한 사람과 맺기를 더 좋아했다. 브로이어는 젊은 프로이트에게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둘의 관계는 프로이트에게 특히 중요했으며, 사이가 멀어졌을 때 프로이트는 심한 고통을 겪었다. 프로이트의 사상이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은 형국이었는데, 그런 후에 남은 것은 텅 빈 공허감이었다. 123

 

만약 마흔 살인 지금 명성을 얻지 못하면, 영영 그럴 기회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인간적인 한계가 왔다는 신호를 뚜렷하게 느꼈고, 경제적인 형편 역시 어려웠는데 환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자랑거리가 될 만한 교수직도 점점 멀어져갔다. 125

 

프로이트가 혁명의 주요 개념

프로이트의 이론은 바로 이 개념을 중심축으로 해서 여러 주요 개념들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 것이다. 그 핵심 개념은 억압(repression)이다.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표상(Vorstellung)들을 의식 아래로 억누르는 심리 과정을 일컫는다. 프로이트 자신도 이개념의 중요성을 확언한 바 있다. “억압이라는 교의는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가 서 있는 주춧돌이다.” 129

 

만약 억압이 프로이트 이론 체계의 중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은 억압 과정을 이해하고 그 밖의 정신 생활(psychic life)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130

 

신경증은 다양한 방어 기제에 의존한다. 방어 기제란 두려운 생각이나 정서적 불안을 야기할 만한 관념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심리 기제다. 억압이 가장 중요한 방어 기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승화(sublimation)라든가 반응 형성(reaction-formation), 투사(projection), 전위, 금지(inhibition)와 같은 다른 방어 기제도 존재한다. 131

 

만약 심리학이 물리학이었다면, 그리고 프로이트가 뉴턴(혹은 아인슈타인!)이었다면, 「프로젝트」는 프로이트의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발전했을 터이고, 심리학적 신경학 혹은 신경학적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했을 것이다. 136

 

『꿈의 해석』과『프로젝트』간의 명백한 차이에 불구하고, 전자를 후자의 논리적 계승물로 여겨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143

 

나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 자연과학이나 수학에는 아무 재능이 없다. 양적인 것에는 아무 소질이 없다.” 실상 프로이트의 저서에는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을 의문에 붙일 수도 있는 증거를 고려한 흔적이 거의 없다. 145

 

현대성의 요람인 도시에서, 그 화려한 순간에, 클림트와 바그너와 루스는 프로이트와 말러, 비트겐슈타인과 상상의 커피숍에서 만나 어울리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 149

 

지구 반대편의 간디처럼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 꿈 분석, 치료 개입(therapeutic intervention)등 사람들을 돕는 데 실제로 사용되는 실천 기법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을 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치유를 갈망하는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치유법을 알려준 것이다. 153

 

사실 프로이트의 이름이 한때 동료였던 융이나 오랜 기간 경쟁자였던 자네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은 이론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이론을 널리 보급하는 운동이 그만큼 탁월했고 또 가혹할 정도로 일사불란했다는 점에 기인했다. 158

 

프로이트는 이 규칙의 첫 부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꿈의 해석』은 그가 샤르코의 임상교실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한 지 거의 정확히 10년 만에 탄생한 업적이다. 물을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창조성은 이후 수십 년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발휘되었다.  이 점에서 그는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보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과 같은 예술가와 더 비슷하다. 새로운 성과물이 정확히 10년 간격을 두고 나오는지 여부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1910년 무렵에 사회적 문제로 관심사를 확대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정치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161

 

처음엔 세상에 매료되었고, 다음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처지가 되어 비밀스런 탐구 작업을 계속했으며, 결국 다시 세상에 돌아와 다양한 집단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이트는 창조성의 이원적 성격을 새삼 환기시킨다. 165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영원한 아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고 유형과 아이들의 일반적인 사고 유형이 유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69

 

그는 우리가 아는 물리학이란 세 살 무렵이면 알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71

 

이처럼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종교적 성향이 강했다는 점은, 그가 영혼의 진한 갈증을 느꼈으며, 궁극적인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고, 관습적인 지혜에 반발할 수 있는 능력(충동적인 반발이 아니다)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73

 

그런데 때로는 2류 소설가가 자기 시대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포착하는 것처럼,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이 젊은 창조자의 관심을 끌 만한 문제를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178

 

과학사가 토마스 쿤의 유명한 용어로 말하자면,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패러다임 이전(preparadigmatic)’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 공인된 지식 체계나 탐구 방법, 혹은 인식상의 발전을 나타낼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분야이다. 반면에 패러다임적 과학 분야는 비교적 합의된 지식 체계와 문제 집합, 그리고 널리 인정된 접근 방법과 새로운 작업을 판단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180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뉴턴의 절대적역학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을 때도, 가령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도 이런 상대성 원리가 유효하다는 점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183

 

아인슈타인의 객체 중심적인정신

통상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프로이트는 인간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면, 아인슈타인은 사물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이트가 사람들 사이에 관계에 매료되었던 데 비해, 아인슈타인은 객관적 사물 간의 관계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성공을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팔았으며, ‘우리의 세계에서 그것(사물)’의 세계로 날아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들과 사귀었고, 말년의 프로이트보다는 훨씬 호감가는 인물이었다.  191

 

아인슈타인은 남다른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몇 시간, 심지어 몇 일 동안이나 중단 없이 같은 문제를 숙고할 수 있었다. 그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 중에는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것도 있었다. 194

 

아인슈타인 자신의 말대로 그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물리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글도 무척 잘 썼지만, 언어 자체에는 별 흥미를 갖지 못했다. 외국어를 익히고 용어를 정확히 외우는 데 서툴다는 한탄을 가끔 했을 뿐이다. 반면에그는 논리-수학 지능과 공간 지능이 뛰어났다. 195

 

나 자신과 나의 사고 방법에 관해 살펴보노라면, 공상하는 재능이 실증적인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나한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97

 

이를 좀더 정식화해서 말하면, 특수 상대성 이론은 다음 두 가지 가정에 입각해 있다. (1) 서로에대해 등속 운동하는 두 개의 좌표계에 대해서는 법칙이 달라지지 않는다. (2) 모든 광파(光波)는 정지한 광원에서 발사한 것이든 움직이는 광원에서 발사한 것이든 그러한 좌표계에서 동일한 속도로 운동한다. 206

 

물리학의 표준 절차는 현상을 관찰하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한 후에, 이로부터 원리와 이론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정반대로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높은 추상 수준에서 기본적인 물리 법칙, 가령 광속 일정의 원리를 우선 제기한 후에 이에 근거하여 경험적 현상을 추측하고 그 기본 원리를 다른 법칙과 연결시켰다. 208

 

심리학을 비롯한 미숙한 과학 분야는 장의 모든 성원들이 인정하고 참여하는 규범적인 패러다임이 나오는 대신 여러 학파들이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반면 물리학 분야는 학자들이 대거 새로운 이론, 즉 양자 역학으로 몰려가는 경우에도 상대성 이론을 옹호하는 학자들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다만, 고전적인 뉴턴 물리학이나 고전적인아인슈타인 물리학이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주제로 관심을 돌릴 뿐이다. 217

 

가끔은 상대성 이론의 요체를 기자들에게 설명할 때처럼 친절하고 참을성 있게 대했다.

 

제 대답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그저 농담 한 마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제 이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시간과 공간은 그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4공간 역시 물질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지요. 222

 

1920년대 내내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 운동과 연대했으며 시온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독일에 대해서는 애증을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과거의 훌륭한 과학과 문화에는 자부심을 느꼈지만 전체주의가 출현하는 징후에는 공포스럽게 지켜보았다. 독일은 인간성과 희망과 위기를 모두 상징했다.

223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과학이란 가장 작은 세계에서도 질서를 가져야 했다.  230

 

물리학보다 체계가 느슨한 분야에서는, 이를테면 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와 같은 분야에서는 어린 시절의 직관에서 성찰적인 지혜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일어난다. 241

 

간주곡1

두 사람 모두 위대한 도약의 시기에 고립된 생활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론적이고 정서적인 도움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한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소규모의 친구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245

 

두 사람은 모두 무명 인사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여기서 오는 불편을 씩씩하게 견딘 반면, 프로이트는 다소 선동가다운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를 아직도 가야할 곳이 남은 군사 작전의 지도자로 여긴 탓이다. 246

 

5. 파블로 피카소(신동과 천재)

이와 동시에, 특히 서구에서는 지금까지는 자기들이 고저 열성적으로 밀어붙이는 부모나 강압적인 선생님, 혹은 다른 누군가의 야망을 대신 실현해 주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주위 사람들의 야망은 그들 자신의 오랜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해 나가야 하고, 이렇게 주도권을 되찾게 되면 지금까지 그들의 경력을 관리해 온 사람들과 여러모로 충돌을 빚게 된다. 253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했고, 특히 숫자를 익히는 데 큰 곤란을 겪었다. 이를테면 숫자를 수량을 나타내는 상징보다는 차라리 시각적 무늬로 여기고 싶어 해서, 가량 0은 비둘기의 눈으로, 2는 비둘기의 날개로, 숫자의 합은 베이스라인으로 생각하는 식으로 숫자들에게서 비둘기의 모습을 볼 정도였다. 256

 

당시 피카소는 콘치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겠다고 신에게 약속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미신적인 성향이 강한 피카소는 전문 분야에서나 개인적인 삶에서나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느꼈고, 이런 만용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 응분의 죄책감도 느꼈다. 이와 같은 신과의 거래는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260

 

피카소가 아버지가 아들의 그림 솜씨를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포기했는지 여부는 정확하지 않지만, 파블로가 아버지의 성() 루이스(Ruiz)를 버리고 어머니의 이름인 피카소로세상에 알려지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262

 

피카소가 파리의 예술 거리 몽마르트 언덕에 도착했을 당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탁월한 혁신적 미술 사조인 인상주의는 이미 역사가 되어 있었다. 기서 화단을 공격하는 운동으로 출발한 인상주의-고전적 주제와 장대한 감정, 사진과 같은 리얼리즘의 이상을 폐기했던-가 이제는 실질적인 규범이 되어 있었다. 266

 

두루 알다시피, 피카소가 처음 인정을 받은 시기를 청색시대라 부른다. 이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거지들, 슬픔에 잠긴 부부, 가난한 가족 등 비참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렸으며, 이들 인물도 개별적인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묘사했다. 269

 

특히 아폴리네르와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사고방식이 비슷했고, 서로 보완되는 관심사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노선이 비슷했다. 존 리처드슨의 견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예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서로에게 촉매 역할을 했다.” 270

 

피카소는 긴 생애 내낸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을 아예 부정하려고 했다. 죽은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질병과 노화, 죽음을 야기하는 사람이나 요인을 두려워했다. 271

 

피카소의 중요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 하나의 정점이자 선취(先取, anticipation)이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이전에 보았던 것, 그리고 최근까지 작업해왔던 것을 훌륭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창조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생」은 이 재능 있는 젊은 스페인 예술가의 작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상징이자 징후이며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277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all-put-together)’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structurer)’형의 예술가이다. 모차르트가 전자의 전형이라면, 베토벤은 후자의 전형이다. 279

 

하지만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적 영향을 미친 요소를 하나만 고른다면(이 점에선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띤 동시대 화가였던 마티스와 브라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직계 선배 세잔의 작품이었다. 세잔은 소묘나 채색에 특별히 능한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20세기의 기준에 맞는 회화의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세잔은 회화를 형태 위주의 작업으로 여겼다. 여기서 형태적이라 함은 회화에서는 형태문제가 결정적이고 모든 지각 대상에 내재한 기하학적  형태가 시각 예술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그는 자연에서 우리는 원통과 구, 원뿔 형태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82

 

피카소는 수십 년 후에 브라사이에게 내가 세잔을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82

 

피카소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이러한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287

 

피카소 역시 이런 견해에 공명하는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293

 

특히 중년 이후에는 피카소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이 작품의 동기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은 무언가에 거역하는 작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 나는 가슴을 찌르는 그림을 그린다. 폭력, 심벌즈의 쨍그렁 소리…… 폭발…… 훌륭한 그림, 아니 모든 그림(!)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면이 있어야 한다.” 310

 

실상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불멸의 위치에 오른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인생」의 사랑과 인생,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 「아비뇽의 처녀들」의 척박함과 잔혹함, 초현실주의 작품인「세 무용수」의 예기치 못한 열정과 무아지경의 폭력성,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와「우는 여인」의 데포르마시옹, 그리고「미노타우로마키」의 복잡하게 엉킨 주제와 의인화가모두 이 작품에 담겨 있다. 322

 

메리 게도는 피카소를 일컬어 비극 중독자라 불렀는데, 피카소는 연약한 여인들에게 매력을 느꼈고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그녀들의 삶에 남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점에서 피카소가 결백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카소는 나의 죽음은 배가 침몰하는 일과 같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질 거다라고 말한 바 있다. 328

 

나는 데생을 터득하고서 색채에 눈을 돌렸는데, 당신은 색채를 터득하고 데생에 눈을 돌렸군요.” 329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음악가이자 정치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자서전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 334

 

스트라빈스키는 음악가라는 장인이 작업하는 소재인 가락과 리듬은 그 자체로는 목수의 대들보나 보석 세공사의 보석과 마찬가지로 표현할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334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평생 이와는 전혀 다른 측면을 생생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정치라는 외부적인 자극 요소가 없이는 음악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웅변한 실례인 것이다. 모든 창조자들, 특히 음악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폭넓은 대중과 더불어 자신이 창조한 작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주위 동료들 사이에서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335

 

일신상의 문제나 직업상의 문제에 있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소용돌이 에 휘말린 정도로 말하자면, 스트라빈스키는 이 책에서 다루는 창조적인 인물뿐만아니라 음악 작곡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극단적인 인물이다.(아마도 점차 복잡하게 뒤얽힌 피카소의 애정 생활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 같은 분쟁 사안을 겪으면서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336

 

하지만 결국 스트라빈스키는 연극성이 짙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시각적인 요소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는 점에서 다른 작곡가들과는 뚜렷이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음악 신동은 아니었다. 실상 그는 음악 자체보다는 회화나 연극에 더 흥미를 느낀 아이였다. 피아노 교습은 아홉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받기 시작했는데, 일단 배우기 시작하자 일취월장했다. 339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교육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좌장격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를 만난 일이었다. 341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 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342

 

“1903년과 1904년에 소나타를 작곡한 이후 4,5년 동안 스트라빈스키가 나아간 거리를 보면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343

 

디아길레프를 만나 발레뤼스 무용단에 동참하기를 부탁받은 일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을 하룻밤 사이에 바꿔놓았다. 347

 

이 극적인 이야기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연극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권을 허용했다. 그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배운 기법에 의존하여, 배역의 성격에 고유한 음역을 찾아냈다. 가령, 초자연적인 배역에 대해서는 반음계 작곡법을, 인간에 대해서는 온음계 양식을 활용했고, 러시아의 전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동양적인 선율을 사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또한 주인공의 특징적인 몸짓과 움직임까지도 음악으로 표현했다. 349

 

창조성 연구자 딘 키스 사이먼튼은 위대한 창조자들은 걸작이든 태작이든 작품 자체를 다량으로창조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증거 자료를 모아놓았다. 355

 

악보 초고를 보면 묘한 특색이 한가지 더 있다. 오늘날에는 이 작품의 가장 혁신적인 면이 리듬 구성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리듬보다는 오히려 악기편성에 가장 많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360

 

현대에 뛰어난 고전음악 가운데 「봄의 제전」만큼이나 노골적인 적대에 부딪쳤던 작품은 없다. 362

 

음악계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부터 스트라빈스키의 특징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법학을 공부했다. 370

 

스트라빈스키는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더욱 단호하고 모질게 굴었다. 그가 오랫동안 함께 일해야 했던 사람들인 에이전트와 중개인, 은행가, 출판업자, 홍보 대리인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소송을 걸겠다는 위협과 막무가내 식의 감언이설이 가득 차 있다. 대개는 아주 적은 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373

 

전쟁 이전에도 스트라빈스키는 일본 예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일본의 서정시는 일본의 회화나 판화만큼 내게 감명을 주었다. 시점과 공간의 문제를 회화적으로 해결한 것을 느끼고 나는 이와 비슷한 것을 음악에서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375

 

「결혼」은 스트라빈스키가 현대와 러시아의 과거에 다리를 놓은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내부에 길항하고 있는 이런 두 성향을 조정하려는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작곡가 생애 내내 러시아적인 것과 현대성을 동시에 견지했다. 380

 

시간상으로 우리와 더 가까운 시기가 더 먼 시기보다 일시적으로는 우리와 더 많이 떨어져 있는게 세상 이치다” 383

 

스트라빈스키의 삶은 대중적인 이목과 논란의 중심에 선 저명한 음악가로서의 삶과 지성적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장인의 삶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특별한 경우에만 격렬한 디오니소스의 세계에 들어가는, 기본적으로 질서와 균형이라는 아폴로적 원리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87

 

우리가 다루는 다른 창조자들도 대개 그렇듯이, 스트라빈스키 역시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 대신 평온하고 애정어린 가족 관계를 잃어야 했던 것이다. 399

 

7. T. S 엘리엇(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S.(Tomas Stearn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혹은 이 작품에 포함될 운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402

 

훗날 그는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고 썼다. 404

 

엘리엇은 내면에서 일고 있는 상반되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당시의 미국 문학이 그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버드가 선호하는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1807~18882)의 경박한 애국적 시보다는 과거나 외국의 신비한 문학에 매료되었다. 407

 

엘리엇의 하버드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서 시몬스(1865~1945) <상징주의 문학 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Literature)>을 만난 일이었다. 엘리엇은 산문적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예술을 일종의 종교로 간주하면서 시적 상징이 존재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는 영적인 비전을 추구하는, 나아가서 시란 외부와는 절연된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시몬스의 문학관에 열광했다. 407

 

하지만 엘리엇에게는 아이다호 주 출신으로 1908년에 유럽에 이주한 젊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선례가 있었다. 활기차고 논쟁하길 좋아했던 파운드는 이런 성격에다가 다섯 권의 시집으로 영문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414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영국 문학계는 영국 태생이 아닌 작가들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아일랜드에서, 조셉 콘라드(1857~1924)는 폴란드에서, 그리고 엘리엇과 파운드는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416

 

영국의 젊은 세대가 전장에 나가 있고 가장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실은 영국의 문화계에 공백지대를 만들었다. 비로 이 빈틈을 엘리엇과 파운드 같은 외국인들이 채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역시 이런 역할을 기꺼이 맡고자 했다. 423

 

여전히 엘리엇은 수줍음과 뻣뻣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자기 자신에게도 불만이 많았지만, 만나는 유력한 인사들 대부분에게 멋진 인상을 심어주었다. 점잖고 신중한 태도며 별로 드러내지 않는 박학다식과 우아한 유머 감각 그리고 영원한 경계인의 표지는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425

 

파운드는 문학에 관한 조언을 했고 비비언은 정서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기는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다. 이런 두 명의 훌륭한 편집자가 있었기에 엘리엇은 전반적인 시의 흐름과 특정한 행의 단어 선택에서 모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429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35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소설가 마샤 데이븐포트)

 

그럼에도 종교 개종에 이어서 자신이 문학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자, 종교에 있어서는 영국 국교도, 정치에 있어서는 왕당파라고 선언했을 때는 많은 문학계 인사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후로 엘리엇은 문학과 정치 및 사회에 관해 매우 독특한 보수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440

 

엘리엇은 시를 정서나 개성의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정서와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겼다. 그는 개성과 정서를 소유한 사람만이 거기서 도피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동시대 모더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한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443

 

엘리엇이 문학 이론에 기여한 내용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일 터이다.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해당 정서를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444

경계인이란 오직 공동체를 전제하고서야 성립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창조적인 인물의 생애에서는 경계인이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과 공동체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는 순간이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궤적을 엿볼 수 있다.이를 달리 말하면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457

 

엘리엇의 뛰어난 작품은 경계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출현했거니와, 그런 빛나는 업적을 계속 쌓기 위해서는 그가 원하지도 않았고 감당할 수도 없었더라도 경계인의 자리를 줄곧 지켰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457

 

간주곡2

스트라빈스키와 엘리엇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가톨릭교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피카소는 기성 종교보다는 미신에 의존하는 성향이 짙었다. 정치적인 영역에 관해서도 상당한 차이점이 있어서, 엘리엇이 생래적인 보수주자의자라 할 수 있다면 피카소는 반사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459

 

하지만 이들은 전통적인 예술 형식이 소진되고 전위적인 작품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461

 

피카소와 세잔, 스트라빈스키와 드뷔시, 엘리엇과 라포르그 사이에는 연속석이 개재한다. 이들 혁신가들 사이에는 인상적인 유사점이 있다. 파편적인 요소와 형태 자체에 대한 관심, 일상의 세속적인 삶에서 겪는 긴장, 원시에의 동경, 과거의 무거운 주제, 세속의 사소한 일들과 고상한 전체주제 사이를 왕복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462

 

8. 마사 그레이엄(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여러 예술 형식 가운데 오직 무용만이 주로 미국에서 선구적으로 현대화된 장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체 표현 양식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다.

 

마사 그레이엄의 혁신은 무용의 두 가지 흐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우선 고전 발레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예술 형식이다.(……) 그러나 참을성이 없고 모험심이 강하며 불손하기까지 한 미국인들이 보기에 발레는 여전히 유럽의 폐쇄적인 무용 형식이었다.

 또 하나의 주요한 무용 흐름은 비유럽인,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원주민의 민속 무용이다. 대개 의식(ritual)에 기반한 이러한 무용은 수백 년 동안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관습과 가치관과 감정을 반영한다. 미국과 유럽의 관객은 이러한 이국적인 무용 공연에 호기심을 느끼지만, 대개는 고급 예술이 아니라 민중 예술이나 기예 정도로 여길 뿐이다. 466~467

 

마사 그레이엄에게 외가쪽 친척들, 특히 무섭고 엄한 외할머니는 청교도 전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마사는 매우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매일 기도하고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주일 학교에 나가야 했다. 470

 

어린 그레이엄이 천식 기미를 보이자 가족은 1908년 마사의 나이 열네 살 때 캘리포니아 주의 산타 바바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마사의 가족은 산타 바바라의 기후와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했다. 471

 

저 애는 무용을 보고만 있어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할 줄 알아요라고 항의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무용하는 모습만 보고도 그 무용을 완전히 터득했음을 입증했다. 473

 

그레이엄은 푸른 색의 바탕에 붉은 물감을 튀기듯 칠한 러시아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작품에서 하나의 해답을 얻었다. “나는 이 그림처럼 춤을 추겠다.” 475

 

그레이엄은 어떤 춤을 출지에 관해서 미리 정하는 법이 없었다. 무대 배경이나 의상을 언제까지 준비 완료해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연 당일까지 프로그램이 계속 바뀌었다. 완벽주의와 혼란이 나란히 존재했다. 물론 공연 자체는 대개 강한 인상을 주었지만, 덕분에 막이 오르고 내리는 그 순간까지 전체 단원이 엄청난 긴장을 견뎌내야 했다. 482

 

그레이엄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되는 「프론티어」는 미국 문화를 아낌없이 수용한 작품이었다. 496

 

그것은 순수한 미국, 솔직하고 자유로운 미국, 불굴의 의지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미국인의 정신이었다.

 

미국 무용의 문제에 대해 길을 찾아야 할 사람들 입장에서 내놓을 해답이란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량함과 비옥함이 참으로 흥미로울 정도로 대조를 이룬 이 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498

 

그레이엄은 신화적인 주제를 무용에 도입하면서 소위 신고전주의적인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가 20년 전에 이미 통과한 단계였다. 사실 1910년 경에 결정적인 혁신이 이루어진 음악과 회화 분야와 1930년 경에 혁신이 이루어진 무용 분야 사이의 이런 시간 지체 현상은 이치에 맞다. 513

 

그레이엄은 훌륭한 무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10년이 걸린다고 생각했다.(이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창조적 도약에 관한 10년 규칙에 적합하다.) 520

 

예술가와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521

 

마사 그레이엄의 오랜 생애는 20세기 전체와 거의 겹친다. 20세기는 미국이 농업 위주의 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으로 발전하고 세계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시기이다. 예술 분야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전통적인 예술(회화와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현대 예술(영화와 방송 매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점차 영향력이 커졌다. 535

 

마사 그레이엄은 이런 단점들(내 용어로 말하면 비동시성)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국적인 용모를 오히려 매력의 중심으로 삼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엄격한 청교도 유산을 때로는 모방하고 때로는 그 토대를 무너뜨리면서 무용의 민감한 주제로 활용했다. 537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은 아마도 그녀가 이처럼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539

 

9. 마하트마 간디(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그의 가족은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인도 사회의 중간 계층인 바이샤 계급에 속해 있었다. 간디의 가문은 특별히 교양이 풍부하거나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지방에서 유지 역할을 할 정도는 되었다. (……) 간디는 자기가 작은 지역 출신인데다 가용할 물질적ㆍ사회적 자원이 빈약한 처지이므로 자신이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간디의 부모는 다양한 종교적 관행과 믿음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던 예외적인 힌두교도였다. 543~544

 

 

모한다스는 어린 시절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도 그는 자연스럽게 중재자 역할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이런 방면에서 재능이 남다른 아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 부모는 어른들의 권위가 강한 분야에서도 아들이 도덕적 중재자 역할을 맡

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545

 

종교와 사회 및 정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검열이 무척 심한 편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초자아가 강한 것이다. 546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간디는 이 강요된 결합을 훗날 조혼의 잔인한 풍습이라고 부르며 많은 점에 분개했다. 547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하기로 한 것은 금기시된 길을 가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547

 

유럽에 정착한 엘리엇이나 파리로 간 피카소처럼 간디 역시 먼 타향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었다. 548

 

주의 깊게 자신이 한 일과 쓴 돈을 모두 기록했고, 이 과정에서 조직을 키우는 재능을 얻을 수 있었다. 548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인도라는 나라의 작은 지역과 세상의 수많은 종교가운데 일부 종교에만 익숙해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영국을 떠날 때 그는 폭넓은 독서 체험을 하고, 아주 다양한 견해에 접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되어 있었다. 549

 

만년에 간디는 자신이 남은 인생 동안 매진하게 된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했다. “나는 인도인 정착자들의 힘든 상황을 글로 읽고 귀로 들어서 뿐만 아니라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는 자존심이 있는 인도인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이런 상태를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내 마음은 점점 더 사로잡혔다.” 552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인도인은 인도아 대륙의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집단의 축소판이었다. 인도인 대부분은 간디가 나탈에서 트란스발로 향하는 기차간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종류의 부당한 대우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간디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모욕감을 깊이 느꼈다. 553

 

간디는 원래 1년 만에 인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에 이 새로운 거주지에 머물고 가족을 남아프리카로 데려오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런 심경의 변화는 남아프리카 정부가 인도인의 공민권을 모두 박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데서 기인한다. 이후 20년 동안 간디는 활발한 정치 활동에 끊임 없이 참여하게 되는데, 모든 활동은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553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른이 된 시기는 인간이 활동의 중심에 서는 시기이다. (……) 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지켰고 자신이 관장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기록했다. 555

 

진정한 치유는 영국이 이기심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아무런 목적도 없고 헛되기만 할 뿐인, 그리고……. 기독교의 정신을 부정하는 그런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558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간디가 시타아그라하’, 즉 얼마 후에 인도로 돌아가서 완성하게 될 진정 새로운 저항 방법을 실천한 일이었다. 1906년에 벌써 간디는 동지들에게 법령에 항의하고 불복종할 뿐 아니라 폭력을 자제하고 체포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부당한 법에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 559

 

요컨대 나는 인도 중서부 지역의 아메다바드에서 1918년에 있었던 사건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의 탄생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에릭 에릭슨의 지적에 동의한다. 564

 

전기작가 로버트 페인은 이 대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사건은 아나수야 사라바이에게는 정의의 문제였고, 공장주에게는 수익의 문제였다. 간디에게는 사타아그라하 방법을 시도하는 문제였다.” 565

 

소로에게서는 시민 불복종 사상과 개인이 국가의 압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웠고, 간디가 영국에서 공부할 무렵에도 생존하고 있던 러스킨에게서는 인간 행위의 사회적 차원을 이해하는 통찰을 얻었다. 특히 그는 러스킨을 통해 노동(고상한 노동에서 미천한 노동에 이르기까지)의 중요성, 특권층과 빈자들의 관계, 경제적 요인과 인간적 요인의 갈등에 대해 면밀하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574

 그러나 무엇보다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톨스토이의 저작이었다. 톨스토이를 읽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보다는 의무, 그리고 모든 인간 문제에서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574

 

간디가 바로 보았듯이, 사티아그라하는 정화의 형식이자 영혼의 일깨움이다. 고통을 자초하는 것은 진리파지자의 진심과 곤경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상대방에게 정당성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577

 

간디는 사티아그라하의 한계도 지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시타아그라하를 채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덕적 명확성이 결여된 상황, 규율 바른 실천자나 추종자가 없는 상황, 반대파에게 공정성에 대한 분별이 없는 상황은 사티아그라하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리고 간디는 안타까운 듯이 폭군에게는 사티아그라하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580

 

친밀한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간디의 결함은 결국 가족의 문제로 불거져 나왔다. 처음부터 간디는 무조건 가족을 사랑하거나 연민하는 대신 공적인 목표와 사상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가족을 대했다. 590

 

그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학살의 현장으로 조용히 걸어가라고 독려했을 정도였다. 593

 

소금 행진은 여러 의미에서 효과적인 사티아그라하의 모델을 상징한다. 우선, 간단하고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대의에 따라 조직한 운동이었고, 부당한 세금에 대항한 저항이었다는 점이다. 운동의 모든 단계가 신중하고 계획되었고 적당한 인도의 지역 및 전국 지도자들과 연대하여 진행되었으며 인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598

 

이 마지막 사례에서 보듯 자신의 강압적인 행태와 이기적인 동기에 그처럼 둔감했다는 사실은 매우 이채롭다. 606

 

아마도 간디의 유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계승한 인물일 터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간디가 억압 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건전한 유일한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608

 

간주곡3

나의 전문분야는 행동이다.”

                  - 마하트마 간디

 

그녀의 예술적 공헌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 그리고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중요한 점에서 그녀는 간디와 유사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 역시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펼친 활동(performance)과 이 활동 내용에 대한 사라들(그를 접한 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 창조자였다. 611

 

그렇다면 간디와 그레이엄은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육체로서 창조 활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체적인 외양,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창조 활동의 핵심이다. 611

 

그녀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러한 상징체계를 하나씩 혹은 서로 결합해서 탐구했고, 자신의 생각을 호스트와 무용단과 함께 시험했다. 간디는 일급의 사상가였다. 사티아그라하는 매 단계와 그것의 가능한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철학 이론만큼이나 세심하게 구상한 것이다. 613

 

이들 창조자들 가운데 오직 간디만이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 속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인물이다. 614

 

한 분야를 쇄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간디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비록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 그러했듯이, 그의 종교적 ㆍ정치적 혁신이 그의 선행자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참으로 다른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615

 

3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구성적 틀-재론

나는 모든 창조적인 활동에는 역동적인 면이 있다고 가정했다. 재능 있는 개인과 전문 분야, 그리고 창조물의 질을 판단하는 장()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역동성은 보통 다양한 종류의 긴장과 비동시성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이 나의 공식이다. 비동시성이 이러한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수중에만 이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인물을 키우고 창조 과정을 촉진하고 창조물의 생산을 고무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620

 

서장에서 나는 창조성에 대한 본 연구가 두 가지 입장에 의해 틀지워졌음을 암시했다. 하나는 하워드 그루버와 그의 동료들이 수행한 연구로서 창조적인 인물 개인을 상세하게 조망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딘 키스 사이먼튼이 수행한 방대한 규모의 정량적인 연구가 취한 입장이다. 본 연구에서는 전통적으로 특이성 중심적(idiographic) 방법으로 불리는 이러한 두 입장을 종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선택한 일곱 명의 인물을 자세하게 검토하는 동시에 이들 전부 혹은 적어도 대다수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사항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621

 

전형적인 창조자의 초상

E.C라는 약칭으로 불리게 될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의 초상 622

 

주요 쟁점-재론

실은 이들간에는 지배적인 지능만 다른 게 아니라 지능들의 폭과 결합 양상도 서로 다르다는 결론이다. 프로이트와 엘리엇은 학문적 재능(언어와 논리 지능을 반영한다)이 우수했다. 아마도 많은 학문 영역에서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피카소는 학문에 약점이 있는 대신 공간, 신체, 인성 영역에서 재능이 뛰어났다. 스트라빈스키와 간디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이는 학교 공부에 별 취미가 없었기 때문이지 지적인 능력에 근본적으로 결합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626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함,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사교 생활이나 취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껏해야 일에 몰두하다가 한숨 돌리는 정도의 주변적인 의미밖에 없다. 628

 

창조성의 현저한 특징은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의 결합에 있다. 이런 결합은 성격만이 아니라 사고방식(관념)에서도 나타난다. 아이다운 특성이 순진함과 참신함으로 나타나면 긍정적인 색채를 띠게 되지만, 반대로 이기심과 보복심리로 나타나면 부정적인 색체를 띠게 된다. 629

 

내가 아는 한, 이들 모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낙담하고 의기소침했으며 거의 모두가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린 적이 있다. 633

 

일부 창조자들은 탄생의 조건에 의해 경계인이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독일어권 지역의 유대인이었고, 그레이엄은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활약한 여성이었다. 다른 인물들은 본인의 선택이나 어떤 필연에 의해 경계인이 삶을 살게 되었다. 인도인 간디는 대영제국에서, 러시아인 스트라빈스키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미국인 엘리엇은 런던에서, 그리고 스페인인 피카소는 파리에서 (얼마간) 살았다.

우리의 창조적인 인물들은 모두 인구통계상 경계인이었음을 물론이려니와 그러한 경계인이 라는 위치를 창조 활동의 지렛대로 삼았다. 635

 

인생 패턴 : 창조성의 10년 규칙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프로이트의「프로젝트」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프론티어」, 간디의 아메다바드 파업을 결정적인 도약으로 간주한다. 638

 

창조적인 인물의 특징적인 모습은 창조성의 삼각형에서 어떤 부조화, 혹은 부드러운 연결의 결여를 장점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654

 

예컨대 장() 에 의한 수용이라는 발상은 내가 순수한 창조성보다는 대중적 평판이나 세속적 성공을 우선시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선택한 인물 못지않게 창조적인 인물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장의 수용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창조성을 대중적 평판을 얻는 경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에는 믿을만한 기준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667

 

에필로그(현대와 현대 이후)

현대에 관한 책을 쓰면서 나는 분명히 연대기적 서술의 장점을 뛰어 넘었고 정치적인 시대 구분을 포기했다. 현대(The modern era)라는 용어는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계몽주의 혹은 낭만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에서 나온 용어이다. 670

 

현대성이란 파편화된 삶이며 시간의 급속한 변화이고 조각난 경험이다.” “현대성이란 덧없고 우연한 것이다. 이게 예술의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677

 

현대 예술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맥락에서 탄생한다. 그것은 전통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비평가 로젠버그의 말대로 새로움의 전통을 창조하려는 단호한 노력이다. 678

 

보들레르가 말한 대로 천재란 유년기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나는 창조적인 거장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내 요점은 유년기의 놀라운 힘을 찬양하는 것이고, 어떤 인물들은 그런 능력을 오랫동안 보유한다는 점을 평가하는 것이다. 685

 

옮긴이의 글

가드너는 창조성이란 바로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힘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평생 동안 지닐 수 있었기에 이 책에서 다루는 거장들은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게 저자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것 같다. 693

 

이 책에서 역자가 가장 공감한 대목 가운데 하나는 창조성은 단지 한 개인의 탁월한 재능만으로 실현되거나 발휘될 수는 없고, “오직 재능이 갖춰진 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 그리고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694

 

3. 내가 저자라면

Creating minds’란 원제를열정과 기질로 의역한 것은 이 책이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다양 한 Me story를 펼쳐낸 창조적 거장들을 다룬 이야기라는 점에서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보여진 다. 책을 펼치기 전만 해도 저자 하워드 가드너는 나에게 인간이 가진 재능에 대해 좀 특별한 관심을 가진 교육학자정도였다. 그의 다중지능이론을 액기스만 발췌하여 번역한 문용린의『지력혁명』을 읽은 터라 더욱 그러하였다. 헌데 제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에서 이 책의 목표와 구성적 주제의 틀을 읽고 나서 교육학자의 좁은 틀로 그를 보는 것은 예의가 아 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사회학자로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가진 예술비평가로서의 풍모도 엿보인다. 최근 칙센트미하이, 윌리엄 데이먼 등 과 진행중인 「Good Work Project」를 봐서는 사회운동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창조성에 대한 연구성과가 상아탑 안에 머물지 않고 나의 전문분야는 행동이라는 간디의 말처럼 사회로 확장되어 실천되어가는 행보를 볼 수 있다.

 

책의 구성

다중지능이론을 체계화한 저자의 연구서답게 이 책은 제1부에서 창조성을 연구하는 방법론과 창조적 거장들을 바라보는 분석틀을 명쾌하게 제시(74창조성 연구의 주요 요소참조)한다.일관된 도구로 7명 각각의 개인적 삶과 주변인물들, 그리고 시대와의 호흡을 읽어나가는 종적 연구에 사안에 따라 7명의 연관성을 연결하는 횡적 분석이 덧붙여짐으로써 인물 뿐만 아니라 창조성의 본질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데 효과를 배가시켰다.

 

2부는 가드너가 제시한 프리즘을 통해 창조적 거장들의 면면을 살펴 보는 장이다.프로이트-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아인슈타인-영원한 아이와 같이 시작부터 각 인물을 분석하는 설계도가 명확히 정립되어 있어 7명의 삶을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7명을 2~3명씩 나누어간주곡이란 형식으로 비교ㆍ분석한 부분은 책의 흐름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중간중간에 적절한 매듭 역할을 했다.

 

3창조성의 조건에는 전형적인 창조자(Exemplary Creator),창조성의 10년 규칙,개인 과 그 플랫폼으로서 사회와의 관계, 場의 의한 수용 등 주요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해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만한 사항들을 꼼꼼이 정리해 놓아 전반적인 이해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보완점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고,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의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을 저술 목표로 밝혔다. 그에 따라 이 책에서는 현대사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7명의 독보적인 위인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학자, 예술가, 정치가 등 특정 영역에 한정된 직업을 가졌다.

 

창조성 모형이 일반인에게도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이 부분에서 도약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앞서 말한 위인들처럼 특출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할 뿐더 러 사회의 場으로부터 인정받을 기회도 많지 않다. 창조성 모형이 전형으로서 가치를 획득하 려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창조성을 발굴하고 계발하는 연구가 좀더 진척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드너는 Good Work Project를 통하여 창조성의 현장 실험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대상들 또한 선택받은 소수의 재능보유자들이다. 그의 주장대로 재능이 후천적 노 력과 학습에 의해 계발가능한 것이라면 향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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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5.24 06:06:17 *.225.229.30
'일반인들이 창조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제가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전 우선, 제가 하는 일을 '나답게'하면 그것이 창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이나 방향이 아니라, 노력의 정도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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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5.24 14:36:21 *.236.3.241
창조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례연구를 통해 창조성의 특성을 찾아내고 훈련하는 과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노력만으로 창조적 인간으로의 탈바꿈이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창조적 거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창조성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는 게 앞서야겠지만 나의 기질과
재능을 파악하고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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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05.24 11:43:41 *.219.109.113
책의 구성을 까꿍이의 프리즘으로 분석한 것이 좋았어.

같은 책 다른 분석, 늘 읽지만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

눈병은 언제 나으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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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5.24 14:46:03 *.236.3.241
그러게요. 책의 제목부터 의견이 분분하네요~~

은주 웨버는 요즘 강아지들과의 교감이 활성화되면서
에너지가 마구 분출하는 걸로 아는데ㅎㅎㅎ  컬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의 티끌같은 눈병이야 회복 국면입니다만 목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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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5.27 22:01:54 *.34.224.87
나랑은 생각이 달랐네..
[열정과 기질] 이란 제목은 책의 내용을 압축한 제목이랄 수 있지만,
고객에게 먹히는 제목은 아니라 생각했지..ㅎㅎ
아..몸살감기가 안 떨어져서, 책이 눈에 안들어와..
노안도 심해졌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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