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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5일 18시 35분 등록

지식의 대통합 ‘통섭’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에드워드 윌슨 저/ 최재천, 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 북스 (2009)

 

 

저자소개

 

에드워 오스본 윌슨 (Edward Osborne Wilson)

 

1929년 미국의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태어났으며, 개임에 관하 ㄴ연구로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 하버드 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퓰리쳐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저술가, 개미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심 생물 지리학 이론 및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명성 높은 그는 1956년부터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해 왔고 미국 학술원 회원이기도 하다. 또한 20여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한 과학저술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 On Human Nature ”와 “개미 The Ants" 로 퓰리쳐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그 밖에도 미국 국가과학메달, 국제생물학상, 크레포드 상들을 수상했으며, 비단 생물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 현대를 대표하는 과학 지성으로 손 꼽힌다. 과학과 자연보존에 쌓은 업적으로 많은 상을 수상한 그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펠레그레노 석좌 교수이며, 비교동물학박물관 곤충관의 명예관장으로 있다. 그는 아내 르네와 메사추세츠 주 렉싱턴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 ”사회생물학 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 "인간 본성에 대하여“ ”개미(공저)“ ”자연주의자 Naturalist" "생명의 다양성 The Diversity of Life " " 생명의 미래 Future of Life"등이 있다.

 

사실 저는 학문이나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기도 했고 그리고 사회적인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원이라는 것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원 가고 싶어서 몰래 영어학원 ‘영어실력기초’ 새벽반 다녀 본 것이 전부입니다.

 

아마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제가 하는 영어를 들으면 기절할 겁니다. 중국어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혼자 귀에서 짓물이 나도록 듣고 또 들으면서 현실 속에서 배웠습니다. 문법이 엉망입니다.

 

그래도 철학과 신념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주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성이 있고 사실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전 현장에서 몸으로 떼우며 절실함 때문에 하나씩 하나씩 배웠습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처럼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배우거나 어디에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고 배우는 공부는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통섭에 관심을 갖은 것은 오래 됐습니다. 그때는 통섭이라는 단어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하나의 완전한 검법을 만들어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싸들고 이태리까지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윌슨의 생물학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통섭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통섭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많은 것을 배웁니다.

 

밑줄이 너무 많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멀어도 한 참 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키보드를 두들기다보니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한 사람의 내용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서문에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으니까요...

 

훌륭한 펜싱선수의 조건이란 결국 훌륭한 인간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상에서 살던 저의 머리 속이 너무너무 복잡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가야할 길은 분명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평온해 지는 것, 곧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옮긴이 서문

 

 

p7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narro, Ergo Sum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애써 만들어 놓은 학문의 경계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 학문의 구획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그때 그때 편의대로 만든 것일 뿐이다. 진리는 때로 직선으로 또 때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학문의 경계를 관통하거나 넘나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학문의 울타리 안에 앉아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다.

 

 

=>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백퍼센트 역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인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편리에 따라 세분화하여 체계화하고 그 구조나 기능 즉 기제(mechanism)를 밝히려고 했던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중세를 끝낸 르네상스기의 상당 기간에도 당시의 전형적인 학자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전문가다운’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여러 분야에 결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르네상스인(Renaissance Man)' 이라고 부른다.

 

 

=> 만물박사라고 불리는 박학다식한 사람을 그들은 르네쌍스맨이라고 불렀다. 서머셋 모옴의 소설 만물박사를 늘 기억한다. 가치를 위해서 일하는가 ? 돈을 위해서 일하는가? 가치를 위해서 일한다면 너의 인생은 네가 설정한 가치의 밸류만큼이며 돈을 위해서라면 네가 벌 수 있는 돈의 양만큼 인 것이다. 100만원을 벌면 네 인생도 백만원짜리가 된다. 생명을 구하는 소중한 일에 가치를 둔다면 그 삶은 그 일을 하면서 돈을 얼마를 받느냐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p7-8

 

지식은 대체로 보아 16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쪼개지기 시작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 자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과 사람들이 쪼개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 원래, 분석이 종합보다 훨씬 용이한 법이다. 시계를 분해하라고 하면 어떻게든 분해 하지만 다시 조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쪼개는 것은 좋은 데 원상회복이 안 되는 것은 문제다. 물론 새로운 것에 적용하면 되겠지만 개인의 차원에서는 매 번이 다르고 매 상황이 다르므로 결국은 참고가 될 뿐이다.

 

p9

 

그동안 환원주의 일변도로 나아가던 생물학이 드디어 종합의 차원으로 접어든 것이다.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분야들과 달리 태생적으로 위계 구조를 지닌 학문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환원주의적 분석으로만 일관할 수는 없었다. 가능하면 모든 걸 단순한 시스템으로 만들어 분석하는 물리학과 화학의 접근 방법과 기본적으로 복잡계를 다루는 생물학의 접근 방법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 전체성이 하나의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분해해서는 안 된다. 분해하더라도 전체를 근거로 분해해야만 한다. 행동은 그 자체로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신체의 기계기능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과 연관할 때 선약과 평가가 뒤 따르게 된다.

 

 

통합생물학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추구한다. 하나는 생물학이란 모름지기 궁극적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생물계가 본래 위계 구조로 이뤄져 있듯이 그를 연구하는 단위도 같은 구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개념이다.

 

 

물리학과 화학을 기저에 두고 생화학, 세포학, 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등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던 생물학 분야들을 수직적으로 쌓아올린 것이 바로 통합 생물학이다.

 

=> 무엇을 근거로 위계 구조를 설정하는가? 나는 늘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창조적이란 우리가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구조나 체계를 벗어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다. 본질이란 자연의 법칙과 구조가 아닐까.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법칙 그리고 그 물 같은 성질로 대변되는 자연의 법칙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위계를 만들고 싶다면 그럴 것이다. 우리의 현재의 시야를 기준으로 하나는 보다 더 광의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협의의 관점 즉 미시적(micro)인 세계와 거시적(macro)의 세계다. 미시적인 세계로 갈수록 세분화되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갈수록 통합된다.

 

나를 잃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p9-10

 

이 같은 변혁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다. 하지만 그의 시계(視界)는 생물학의 범주 안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그는 생물학과 심리학이 인지신경과학 또는 행동신경과학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본다. 그는 또 21세기 학문을 크게 자연과학과 창조적 예술을 기본으로 하는 인문학으로 양분될 것으로 내다본다.

 

=>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그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리보는 것 일뿐이다. 자연과학은 환원주의적인 원자론적 시각으로 객관적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인문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적으로 주관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 양자는 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하면서 더 큰 전체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게 통섭아닌가?

 

p10

 

사회과학은 이미 시작된 세분화 과정을 계속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당 부분 생물학과 연계되거나 큰 의미의 인문학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러면서 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하려는 인간 지성의 위대한 과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 원래부터 그랬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런 학문의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자연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의 ‘consilience’ 개념을 부활시킨다. 18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 귀납적 과학의 철학 philosophy of the Inductive Sciences ]] 에서 휴열이 처음으로 사용한 'consilience ' 라는 용어는 아마 라틴어 ‘consiliere’에서 온 것 같은데 여기서 ‘con-' 은 영어로 ’with', 즉 ‘함께’라는 뜻을 갖고 있고 ‘salire' 는 ’to leap‘, 즉 ’뛰어 오르다‘ 또는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휴얼은 consilience를 한마디로 ’jumping together' 즉 ‘더불어 넘나듦’으로 정의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휴얼은 우리에게 ‘scientist' 즉 ’과학자‘라는 용어를 선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 왜 사람들은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칠까?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범사에 감사하라’ 는 이야기가 소 잃기 전에 외양간 잘 관리하라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늘 그렇다.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돼서 손을 들고 떠나고 나서 꼭 그런다. ‘있을 때 잘 해!’ 라는 말 뜻이 뭔 말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너무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어울리게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의 불행, 비난과 멸시, 그리고 무관심... 그 모든 것들은 필연이다.

 

p11

 

그 후 1년이 넘는 서캐훑이 끝에 찾은 단어가 바로 ‘통섭’이다. 윌슨의 cconsilience 와 마찬가지로 웬만한 우리말 사전에는 적혀 있지도 않은 희귀한 단어다. 서로 한자가 다른 두 가지의 통섭(通涉) 또는 통섭(統攝)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通涉)는“사물에 널리 통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후자(統攝)는 불교와 성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며 특히 원효의 화엄 사상에 대한 해설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말기 실학자 최한기의 기(氣 )철학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실제로 인터냇에서 ‘통섭’을 검색해 보면 수없이 많은 용례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실 그리 희귀한 단어도 아니다. 일반인들의 귀에 익숙하지 않을 따름이다. 휴얼이나 윌슨이 이 같은 동양 사상의 개념을 이해하고 consilience 라는 용어를 만들고 사용한 것은 아닌 듯 싶지만, 내게는 서양 학문 내에서의 경계들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경계도 넘나들 수 있는 개념인 듯 싶어 적지 않은 감흥을 일으킨다.

 

=> 걱정이 된다. 가리키는 것을 보라는 말인데, 손가락을 보게 될까봐,...

 

명확하다는 것은 그 만큼 더 정확하게 왜곡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지도는 정확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정확하게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왜냐면 지도를 그리고 있는 그 시점에도 사실은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추상적인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게 되는 데, 그것의 또 다른 문제점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이다. 해석하는 자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보는 식이 되는 것이다.

 

p12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 중문대사전 中文大辭典]] 일본 학자 모로히시 데쓰지 (諸橋轍次)가 편찬한 [ 한화대사전 漢和大辭典 ] 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 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 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을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관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윌슨은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팩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 에는 전자(通涉) 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 꿈보다 해몽이라고... 본질을 깨닫는 것은 가까이 가는 것과 다르다. 지식은 분석, 유추, 상상, 추론 같은 기능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서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본질 자체는 경험과 체득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아~~’ 하고 깨닫기 전까지는 그저 다가선 것일 뿐, 그것이 아니다.

 

지식, 개념, 용어, 실험, 도전, 시도 등 이 모든 것은 그 체득을 위한 도구다.

 

 

p13

 

흥미롭게도 이 책이 출간되기 1 년 전인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새로운 와인 클럽(california Reds Wine Club)dl 만들어지고 있었다. (중략) 그 때 그들이 선택한 와인의 이름이 바로 consilience 다.

 

=> 이것도 역시 꿈보다 해몽이라고,,, 도구는 사용자에 의해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불도저와 부삽은 모두 필요하다. 그 가치는 사용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귀에 걸어야 할 때 코에 걸면 바보가 된다. 문제는 귀어 걸어야 할 것을 모두가 코에 걸고 있을 때이다. 이럴 땐 어째야 되나, 귀에 걸면 살기가 폭폭해 질 것이고, 코에 걸면 스스로가 한심해 진다.

 

그들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p14

 

consilence 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뜻한다. 이것은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가졌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들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같은 관점을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며 우리 네 사람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http://www.californiareds.com/consilience.html)

=> 요즈음에 한 참 대두되는 것이 스토리가 있는 브랜드 마켓팅이라더니...

p15-16

 

윌슨이 부활시킨 또 하나의 과거는 바로 계몽주의다. 계몽사상은 흔히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며 프랑스 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볼테르의 [철학서간] (1734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1748년),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4년) 등을 통해 정립된 사상르로 알려져 있지만 레스터 G. 크로커 (Lester G. Crocker)rk 편집한 [계몽의 시대(The Age of Enlightenment)](1969년)에 따르면 계몽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되어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나 낭만주의 시대는 역사 속의 뚜렷한 시간적 존재로 인식될 수 있지만 계몽주의는 어쩌면 인류의 지성사와 처음부터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집단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한 시절부터 계몽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 현상에 대하여 일관성 있는 설명을 도출하여 세상을 계몽하려 한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천박하다고 멸시해버리는 인터냇 세계에도, 그리고 심지어는 ‘안티’들의 세계에도 계몽주의의 사조는 펄펄 살아있다.

 

=> 뭔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뭔가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言者不知, 知者不言 이라고 하지 않던가, 계몽주의는 늘 전체주의와 공포정치로 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계몽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3S (Screen, Sports, Sex) 정책처럼 말이다.

 

p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터와 로터를 비롯한 몇몇 인문 사회과학자들이 윌슨의 통섭개념을 불편해 하는 까닭은 윌슨의 통섭이 다분히 환원주의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윌슨은 이 책 곳곳에서 분석과 종합을 한데 묶어 통섭을 이룰 것을 주장하지만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미국의 라파예트 대학(Lafayette College) 의 영문학자 로라 대소 윌스(Laura Dassow Walls) 의 지적에 따르면 휴얼의 통섭은 환원주의적 통섭(reductive consilience) 과는 거리가 먼 가법적인 통섭(additve consilience) 또는 융합적 통섭(confluence consilience) 이다.

 

[귀납적 과학의 철학]보다 3년 먼저 저술한 그의 저서 [귀납적 과학의 역사 History of Inductive Sciences] (1837년)에서 휴얼은 과학을 강에 비유한다. 여러 갈래의 냇물들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먼저 밝혀진 진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합쳐져 결국 하나의 강령에 호함될 뿐 그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냇물이 강으로 환원되지 않듯 진리는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진리들과 합류된다는 것이다.

 

=> 갑자기 스승님의 어성천 법수치의 강연이 생각이 났다. 섞여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구분해 내지 못하거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못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알 수 있다면 말이다.

 

p17

 

기본적으로 기존의 통섭은 (휴얼의)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통섭다운 통섭을 해 보지 못한 것이다.

 

휴얼의 통섭 개념은 각 합류점마다 이른바 창발성(emergent properties)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점을 장점으로 들고 있지만 창발성은 사실 매우 비겁한 개념이다. 현재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비겁하게 뭉뚱그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창발성도 언젠가 반드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 설명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가? 알 수 없으면 없는 것인가? 창발성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닌가? 하긴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뭐 눈에는 뭐 만 보인다지 않는가? ^^

 

그러나 환원주의와 통섭은 태생적으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환원주의는 통섭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통섭적 연구가 다 환원주의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강의 유비’대신 ‘나무의 유비’를 제안한다. 나무는 줄기를 가운데 두고 위로는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로 분화되어 잇고 땅밑에도 역시 많은 뿌리로 갈라져 있다. 하늘을 향해 펼쳐진 수많은 가지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기술하며 분류하는 학문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측정하고 이론화하는 학문들도 있다. 땅 밑에 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들도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분석 과학 분야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나는 뿌리와 가지를 연결하는 줄기가 통섭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줄기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물관과 체관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 아니다. 나는 통섭이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영향적이기를 바란다. 통섭은 분석과 종합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윌슨이 그리고자 한 통섭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환원주의 흔적이 군데 군데 그림을 흐릿하게 하고 있다.

 

=> 글쎄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인간적인 스케일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원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라니까... 통섭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천킹(chunking 군집화)

 

이고 당연히 환원주의와는 상대될 수 밖에 없지만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환원주의는 구체적인 하나를 분해내려가는 것이지만, 통섭은 불확실한 하나를 구체적으로 추론해가는 것 즉 통합해 가는 것이다.

 

 

p18

 

내친 김에 나는 통섭의 개념으로 우리 인간을 재정의하려고 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구별해 냈다. 어차피 인간을 모든 다른 사물로부터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데카르트로서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자아밖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생물학의 발달 덕택에 신경 세포들이 단순한 망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가 드리어 신경절 덩어리(gangglionic mass)를 이루는 프라나리아 같은 편형동물에 이르면 그 작은 원시적인 뉘를 가지고 제가끔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걸 한다는 사실을, 플라나리아가 T-미로의 분기점에 다다랐을 때 일정한 방향으로부터 가벼운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을 몇 차례 반복하면 전기 자극이 없더라도 플라나리아는 분기점에 이르기 무섭게 자극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튼다.

 

=> 글쎄 그게 반응이라니까 !

 

p18-19

 

뇌의 진화는 대개 ‘생존의 뇌 (survival brain)' '감정의 뇌(reeling brain)' '사고의 뇌(thinking brain)' 의 세 단계로 나뉜다. 인간은 사고의 뇌를 갖춘 대표적인 동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뇌를 가진 동물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갖췄다. 특히 영장류, 그중에서도 침팬지나 보노보에 이르면 그들의 뇌는 우리 인간의 뇌와 구조적으로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네 번째 단계로 ’설명의 뇌(explaining brain)를 제안하려고 한다. 다른 많은 동물들도 생각하는 뇌는 갖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설명하고 구연할 줄 모를 뿐이다.

 

꿀벌은 꿀이 있는 장소로 동료들을 인도하기 위해 춤이라는 상징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방향과 거리에 관한 정보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들의 귀납의 능력은 한 두 영역에 제한되어 나타난다. 우리 인간은 모든 현상을 독립적으로 경험하며 그 인과관계를 익히지 않는다. 서로 다른 현상들의 귀납들을 한데 묶어 의미를 추출한다.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피카소는 예술을 가리켜“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거짓말” 이라 했다. 예술과 종교를 창조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또 우리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데카르트의 언명“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의 대안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Enarro, Ergo Sum).를 제안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의 뇌과학은 ‘생각하는 뇌’를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이 사고할 때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촬영하기에 급급했다. 나는 이제부터 뇌과학자들이 우리의 ‘설명하는 뇌’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명하는 뇌’는 아마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보다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 속에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통섭은 바로 이 ‘설명하는 뇌’의 작용이다. 나는 21세기 뇌 과학이 이 두 뇌들의 합주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 이것도 반응이고!

 

p19

 

‘설명하는 뇌‘ 즉’통섭의 뇌‘는 인문학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학문이란 어차피 인문학으로 시작하여 인문학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분석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여 할 수 있지만 통섭은 결국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도 발견과 분석은 할 수 있다. 다만 그들에게는 그들의 발견을 꿸 실이 없을 뿐이다.

 

과학이 모든 학문을 통합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윌슨이 생각하는 과학은 다분히 인문학적 과학이다.

 

=> 반응이라는 데... 당연히 생물학적인 개념에 더 가깝게 있지, 인문학적이라면.... 대응,...대처라고 해야하나 ...

 

p20

 

생물학에만 통섭의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학문들은 물론 사회 전반에 통섭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퓨전(fusion)'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 이것도 반응이고,,. 대처고,,, 현실적인 대응이고...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합쳐져 있는 것이 ‘설명하는 뇌’라는 그의 관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느끼는 뇌’=>‘생각하는 뇌’ => ‘설명하는 뇌’ 로 가는 위계적인 구조이다. 그것이 통합의 궁극인 통섭은 아닐 것이다. 통섭은 본질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를 보여주고 있어야 함으로 내 주장이 더 타당하다. 통섭은 공통분모를 추출하는 것이며 그래서 명제가 된다. 그래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반응” 이라는 개념이 이다. 반응은 느끼는 뇌든, 생각하는 뇌든 설명하는 뇌든 모든 뇌에서 공통으로 존재하는 현상이고 단지 질적인 수준에서 다른 것이다.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더 추상적인 수준으로 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내가 논리가 더 타당하지 않는가? 그래서 내가 10년 전에 그랬지 ^^

 

"반응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그리고 ”반응하는 인간“ 이게 바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해서 인간을 표현해 주는 가장 적나라한 ... 근데 휴먼 스케일이 아니므로 ‘대처하는 인간’ 정도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반응하는 인간’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보는 ‘인간’이고 ’대처하는 인간’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는 인간이겠지? 그럼 그걸 통합하는 개념은 무엇이지? 그건 인간이라는 개념을 벗어나야 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부다’ 라는 명제가 된 것이다. 이거야 뭐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다 발견해 놓은 것은 현대적으로 바꾸어 놓은 거니까...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나 ‘도는 도라고 할 때 이미 도가 아니다’ 도(道)는 명사적 개념이고 동사적 개념은 ‘접어서 하나가 되고 펼쳐서 무한에 이르는’ 중용(中庸)쯤 되겠지

 

에이... 헤갈리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 두자.

 

어쨌든, 쇼펜하우어가 그랬고 나의 스승 구본형이 그랬다.

 

“학문이나 예술을 가장 진지한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그 일 자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는 사람, 그리하여 순수한 애정으로 그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최고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언제나 이런 아마추어였다. 돈 받고 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

 

“학문이든 예술이든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 늘 시작할 때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 되살아 나는 사람, 그 사람만이 순수한 푸른 불꽃으로 남을 수 있다. 발심(發心)이 초심 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영원한 초보로 되살아 나는 자, 그들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살면서 죽어 있지 않기를, 날마다 삶의 샘물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기를, 모든 깨어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기를. 내리는 비에 감응하고, 쏟아지는 햇빛에 춤출 수 있기를. 그리하여 살아있다 외칠 수 있기를.” (구본형 )

 

쇼펜하우어는 서양의 관점에서, 구본형은 동양의 관점에서 진정한 전문가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장자의 소잡는 백정의 이야기처럼 대가 즉 진정한 전문가란 전문성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전문성을 통해 전문성을 벗어나면 ‘萬物一統’ 즉 통섭에 이를지 모른다.

 

내 이야기는 ‘위대한 발견’ 아닌 ‘가치있는 명제’를 만드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다. 꼭 전문가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모르지 ‘반응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통섭의 근거가 될지..

 

p20-21

 

진정한 세계화는 진리를 추적하는 학문의 영역들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진리의 행보들이 마냥 무작위적인 것 같지는 않다. 진리는 철새처럼 어느정도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생물학에서 출발한 문제가 경제학과 정치학을 거쳐 심리학과 수학에 정착한다. 사회학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행정학과 법학은 물론 기상학과 화학 그리고 음악의 영역까지 그 가지들을 뻗는다. 그동안 우리는 이른바 학제적(interdisciplinary) 연구라는 걸 한답시고 적지 않은 시도들을 해 왔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의 대부분은 단순회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가끔 자기 영역의 목소리만 전체에 보태는 다학문적 (multidisciplinary)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진정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 (transdisciplinary) 접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는 길이다.

 

=> 그러게!  

 

내 이야기는 ‘위대한 발견’ 아닌 ‘가치있는 명제’를 만드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다. 꼭 전문가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모르지 ‘반응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통섭의 근거가 될지..

 

p21

 

나는 대학에서 이른바 ‘교양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는 우리의 현실부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양 과목은 백화점이나 구민 회관 문화 센터에서나 하는 것이다. 대학은 교양을 쌓는 곳이 아니다. 대학은 전문교육을 하는 곳이다. 윌슨도 이 책에서 주장했듯이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과업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성공적인 만남은 결국 모든 학문의 통합으로 이어질 것이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원시적인 제도는 이제 과감히 걷어내자 21세기를 대비하는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기본이 돼야 한다.

 

하바드 대학교를 비롯한 세계 최고의 대학들은 지금 거의 모든 전공 분야의 학생들에게 자연과학을 필수로 가르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을 개혁하고 잇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인문학의 모든 배움에 기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결여된 자연과학은 결코 통섭의 경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바탕 위에 수학과 자연과학으로 무장한 다음에야 자시이 전공할 학문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학제를 개편해야 한다.

 

=>그런데 왜 대학에서는 가르치면 안되는가?

 

IT는 지난 버전을 배울 필요가 없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 과거와 현재가 미래의 방향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더 많은 삶을 지배하는 무의식, 그 무의식의 생물학적 원리는 강도와 반복이다. 그것이 가변성을 통해서 강화와 진화라는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대학이 교양교육과 기초교육을 하고 문화센터나 구민회관에서 최신 버전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 안정 속에서 혁신이란 있을 수 없다. 생존위협을 받지 않는 대학이 무슨 경쟁력있는 전문성을 가르치겠는가? 문만 열면 장사되던 시절은 끝났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는 신을 통해 앎을 얻는다고 했지만 과학은 우리에게 앎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신도 영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기독교 신화 역시 이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신악과, 즉 지혜의 나무였을까?언뜻 보면 신화에 발이 묶인 듯 보이는 서양에서 지극히 합리적인 현대 과학이 탄생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다. 나는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속의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꿰뚫는 보편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노력 즉 통섭의 노력 역시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알면 사랑한다!”를 외치고 다닌다.

 

=>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다 ‘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

 

노자가 말한다. ‘도는 도라고 이름지을 때 이미 도가 아니다’

 

인간적으로는 신의 의지를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이를 수 없더라도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면 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이 신에게 불충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신학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그것을 포괄하는 더 큰 그릇의 법칙에 따르는 것일 것이다.

 

지식이 최종 목적지가 되지 않는다. 아는 것 즉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깨달고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지식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不立文字나 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종불교(禪宗 佛敎) 일 것이다.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없다. 인지적인 영역만으로는 인간과 세계를 완전하게 수용할 수 없다. 그것은 그러한 수용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다. 지식이란 숟가락 같은 것이다.

 

‘밥그릇에 닿는 것은 숟가락이지만 밥맛을 아는 것은 혀다’라고 부처가 말했듯이 사물을 구분하고 개념지으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지적인 자아지만 그것을 깨닫고 통섭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다. 무엇이 실체인지는 고전 그대로 문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것이 통섭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에게 다가 가려고 한다면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다가 서려고 하는지...

 

 

나는 사실 이런 거창한 개념이나 학문적인 배경이나 논리 같은 것을 잘 모르는 시절에 ‘통섭’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통합적인 검법을 정리할려고 했었다. 1996년이었으니까... 이 책이 1998년에 출판되었으니까 그보다 2년 전이다. 그 핵심은 부족한 심리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심리연구를 불안극복을 위한 무슨 정신 이완기법이나 동기화를 위한 심리기술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한다. 물론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이 허용해주어야 하고 과학이 요구하고 있는 신뢰도와 타당성을 제시해야 하지만 말이다.

 

내가 세웠던 가설의 핵심개념을 최근에 찾은 샘이다. 최재천의 말대로 자연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발견한 셈이다. 모순을 수용하고 모든 것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 통섭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통섭을 뒷 받침하는 유일한 법칙은 바로 ‘적절함’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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