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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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충무공이 태어나기 전 조선은 4대 사화로 인해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은 기묘사화 때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충무공의 아버지
그는 32살의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데다가 인맥과 지연에 초연한 태도 때문에 변변한 관직을 얻지 못하고 떠돌다가 37살에 발포의 수군 만호로 발령받아 수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사십 세에 함경도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경계하는 둔전관으로 부임한다. 여진족의 침입 기미를 알아챈
1597년 왜군의 간교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모함으로 공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난다. 백의종군하는 아들을 만나러 오던 어머니를, 10월에는 왜군의 손에 막내아들 면을 차례로 잃는다. 그가 백의종군하는 동안 부산 정벌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전멸을 당하고, 원균 또한 왜병에게 살해당한다. 다급해진 선조는 지휘할 배와 병력이 거의 남지 않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충무공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역자 서문
충무공은 임진왜란에 미리 대비하여 그 전년(1591년)부터 거북선 제조에 착수하고 군대를 정비하였다. 수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상과 육지전을 모두 염두해야 한다며 전쟁 대비에 만전을 기한 결과, 왜란(1592) 발생 후 옥포해전을 비롯한 당포ㆍ한산도ㆍ명량 등의 여러 해전을 지휘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신속 정확한 대비와 파악으로 작전하는 모습에서 충무공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에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陳中) 일기다. 임진년(1592) 1월1일부터 무술년(1598) 11월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트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원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6
충무공이란 무관 출신의 장수로서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 기질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6
조선 정조 19년(1795)에 이 초고본을 정자로 해독하여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전서본)가 나왔지만, 그 원문에 상당한 누락과 오독이 있게 되었다. 그후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를 다시 해독하여 『난중일기초』가 나왔는데, 이는 전서본보다 진전된 작업이었으나 해독상의 문제점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7
2007년에 『충무공유사』를 해독하여 『난중일기』 초록 내용이 들어 있는 일기초(日記抄)에서 새로운 일기 32일치를 찾아내었고, 이 내용으로 초고본 및 전서본과 『난중일기초』의 문제점을 상당수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7
해제
그 후 조정은 일본의 움직임을 근심하여 변방을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에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10
그처럼 성실하고 면밀하게 작성된 일기에는 특이한 점도 발견된다. 예로 전쟁은 임진년 4월13일에 일어났지만 전서본 『난중일기』에는 1월1일자부터 적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러한
친필 초고본 『난중일기』
원래는 연도별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란 이름으로 각각 분책되어 있다. 단, 「을미일기」는 초고본이 전하지 않고 전서본이 있으며,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는 일기초에 일부 초록된 내용이 있다. 12
초고본은 전편이 초서로 적성되어 있어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래의 표를 보면 큰 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누락이 심한 반면, 큰 전재이 없었던 해는 비교적 일정하게 이어져 있다. 「임진ㆍ계사 ㆍ정유일기」가 전자에 속하고 「갑오 ㆍ병신일기」가 후자에 속하는데, 「갑오 ㆍ병신일기」의 초고상태는 전자의 일기들보다 훼손이 훨씬 적다. 「을미일기」는 큰 전쟁이 없었던 해에 작성한 것이므로 후자에 속할 것이나 초고본이 전하지 않으므로 원본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다. 14
① 『충무공유사』의 일기초
첫 번째 목차 제목이 ‘재조번방지초’이므로 서지학의 제명(題名)방법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는 이 책이 『재조번방지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표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충무공유사“라고 초서로 희미하게 적혀 있는데, 영인본을 간행할 당시에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17
또한 일기초에는 그간 소실로 인해 볼 수 없었던 초고본 「을미일기」 30일치와 「병신일기」 1일치, 「무술일기」 1일치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을미일기」는 지금까지 전서본만을 의지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인데, 최근에새로 밝힌 내용 중에 당초 전서본을 만들 당시 삭제한 내용으로 추정되는 「을미일기」가 들어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난중일기』가 전쟁 상황을 위주로 한 기록이었다면, 이것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내용을 위주로 적은 것이다. 특히 상관과 동료에 대한 불만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내용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 준다. 19
② 전서본 『난중일기』
정조는 임자년(792) 윤음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皇恩)을 길이 생각하고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篆字)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요즘 이 충뮤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판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21
1934년
② 청주에서 『이충무공전서속편』간행. 국내 유사(有司) 40여 명이 합작하여 보유한 석인본으로 2권이 추가되어 전 16권으로 간행됨. 그러나 15ㆍ16권의 일부가 일본인들에 의해 조정되었다고 한다.
이 전서본 활자본들은 초간본을 비롯하여 후대에 총 여섯 차례 간행되었다. 초간본 간행 시에는 당시의 정유자판을 사용하여 간행했고, 1915년 간행본부터는 일본에서 들여온 신연활자(新沿活字)롤 간행하였으며, 1934년에는 석판본(石板本)으로 간행하였다.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활자는 바뀌었어도 내용은 모두가 거의 동일하다. 『난중일기』는 바로 전서본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 초고본에 대한 탈초 작업이 처음 이루어진 것이며, 난중일기란 말도 이때 처음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서본은 이서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내용이 누락되었고, 내용에서 약간씩 다르며 없거나 많이 적혀 있는 등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27
이 전서본 『난중일기』를 초고본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그때 당시 정자로 옮겨 전서본을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이다. 29
③ 조선사편수회의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이 『난중일기초』는 초고본과 형태와 체제를 그대로 살려 비교적 완벽에 가깝게 편집되었다. 31
곧, 우리나라 학자로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연혁〕 대정 11년(1922) 12월 총독부훈령 제64호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을 공포하고, 다음 해 12년1월 조선 역사에 조예가 깊은 내선(內鮮)의 학자를 선발하여 위원으로 한 것이 조선사 편수 사업의 발단이다. 조선의 문화는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되엇고 탁월한 것이 적지 않지만, 학술적 견지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한 역사서 중에 볼 만한 것이 없다. 또 고기록, 고문서 기타 사료로 될 만한 문헌류가 해가 감에 인멸되어 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본 사업이 기획된 거슨 실로 그 결락을 보충하기 위함이다. 32
『난중일기초』는 조선 선조 당시 임진ㆍ정유의 역을 치를 때 수군의 명장으로 칭송받던
④ 기타 『난중일기』 이본(異本) 및 번역서
후대의 『난중일기』 연구자들이 전서본과 『난중일기초』를 가장 표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36
1960년 4월에
1968년
2005년 필자는 초고본 해독 과정에서 발견한 오류 100여 곳을 발견하여 전서본 『난중일기초』와 비교하고, 기존 해독의 문제된 곳을 교감(校勘)하여 완역을 시도하였다. 인명 지명 등의 잘못된 표기와 동형의 글씨를 오독한 경우 새롭게 해독하였는데, 대부분 초고본의 훼손 상태가 심하거나 수정을 반복하고 난필로 알아보기 어렵게 씌어진 글자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후대의 활자본에는 오독의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거나 미상의 기호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난중일기 완역본』 역자 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38
전서본에 상당한 누락과 오독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난중일기초』가 나오게 되었고, 다시
이로 인해 결국 번역상에서 서로 다른 이견들이 나오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초고본을 저본으로 한 이본 간의 비교 분석을 통해 분제되는 내용들을 교감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초고본과 이본 및 번역서들을 종합 검토하여 거기서 발견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초고본의 결손 부분을 복원함으로써 정본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그 정본화를 위하여」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40
전서본은 초고본 내용이 요약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많아서 실제 초고본이 교감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었고, 다만 전서본으로 교감한 부분은 주로 『난중일기초』는 전서본과 달리 초고본형태를 따라 활자화한 이본으로서 초고본의 문제점은 바로 『난중일기초』의 문제점과 상관된 것이었으므로, 『난중일기초』문제에 관한 것은 초고본에 대한 검토 작업이었다. 일기초에서 을미ㆍ병신 ㆍ무술일기의 새로운 32일치 일기를 포함한 초록 내용도 초고본의 결손 및 보유 문제를 상당수 해결할 수 있었다. 40~41
임진년(1592)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1월
16일 정축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25일 병술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2월
29일 경신 맑으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위장을 순천 부사로 교체하라는 것이니, 한심스럽다.
3월
4일 갑자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으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다행이다.
5일 을축 좌의정
6일 병인 아침 식사를 한 후 나가 앉아 군기(軍器)를 점검하니 활, 갑옷, 투구, 화살통, 환도(環刀)가 대부분 깨지고 훼손되어 제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색리, 궁장(弓匠), 감고 등을 논죄하였다. 58
20일 경진 사도 첨사(김완)에게도 만남을 기약할 일로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하고 검토했다고 했다. 또 반나절 동안에 내나로도, 외나로도 와 대평도, 소평도를 모두 수색, 검토하고 그날로 포구에 돌아왔다고 하니, 이 일은 너무도 거짓된 것이다. 이를 조사하려는 일로 흥양 현감과 사도 첨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60
23일 계미 보성에서 보내올 널빤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에 색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 담당자를 수색하여 잡아들이게 했다. 순천에서 사환으로 온
24일 갑신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김수)의 편지는 ‘쓰시마 도주(島主, 宗義智)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거짓되다. 61
4월
15일 갑진 맑음. 나라 제삿날 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록을 써서, 곧바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 질 무렵에 영남 우수사(嶺南右水使, 원균)가 보낸 통첩에,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 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삼백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
18일 정미 미시(未時, 오후 2시경)에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함락되고, 양산(梁山,
5월
2일 신미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도착했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현령(
3일 임신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
29일 무술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했다, 바로 그곳에 가 보았더니 왜인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는 산봉우리 밑에 줄지어 매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재빠르고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들은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8월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齊)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廢疾)이 있는 자가 〔기맥만 남아〕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사와 말들이 이곳(호남)을 휩쓸고 갔습니다. 75
계사년(1593)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없네.
2월
3일 무자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 군수(김득광)는 오지 않았다. 동쪽 상방(上房)으로 나가 앉아 순천 부사, 낙안 군수, 광양 현감과 한참 동안 의논하고 약속하였다. 이날 영남에서 옮겨 온 귀화인
8일 계사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이억기)가 기약 어긴 잘못으로 지금 먼저 떠나간다.”고 극언했다. 내가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가 중천에 뜰 때 도착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더니, 과연 오시에 돛을 달고서 모임에 왔다. 79
3월
6일 신유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무리가육지로 다급하게 도망쳐 산 중턱에 진을 쳤다. 관군들이 쇠 탄환과 편전을 비 오듯 마구 쏘아 대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포로로잡혀 갔던 사천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87
제가 곧 바로 나아가 문안을 드리고자 했으나 지난번 교전할 때 격분하여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에 나아갔다가 거기서 탄환을 맞은 자리가 매우 컸습니다.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96
5월
16일 기사 맑음. 아침에 적량 만호 고여우, 감목관 이효가, 이응화,
27일 경진 경상 우병사(
30일 계미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 그는 공문도 내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하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 가소롭다. 명나라의 배신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남해 현령
6월
10일 계사 사경에 경상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 흉악하고 음험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이루 말로 하지 못하겠다. 이날 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119
7월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의 피란민들이 왜군 차림을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분탕질하였다.”는 것이었다. 128
28일 경진 원 수사가 음흉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주 형편없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 앞으로 갔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이 와서 만나고 곧 돌아갔다.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 사로잡은 포작 열 명이 왜군 옷으로 변장하여 한 짓이 준비된 것이기에 추궁하여 물으니, 어떤 근거가 있을 듯하더니 경상 우수사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발바닥을 여남은 대씩 때리고는 놓아주었다. 133
29일 신사 맑음. 새벽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133
2일 계미 또 원사(원균)가 망령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말했다. 모두가 망령된 짓이나,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침부터 아들 염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는 데다가 적을 소탕하는 일도 늦어지고 마음의 병도 침중하여 밖으로 나가 마음을 풀고자 하였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들 염의 아픈 데가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더 늦었어도 치료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매우 놀랍고 한탄스러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고 하니, 다행임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의사 정종의 은혜가 매우 크다. 134
30일 신해 원 수사가 또 와서 영등포로 가기를 독촉했다. 참으로 음흉하다고 할 만하다. 그가 거느린 배 스물다섯 척은 모두 다 내보내고 다만 칠팔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씀씀이와 일하는 것이 다 이따위다. 140
9월
15일 병인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다.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결사의 마음을 품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 〔정예하기 훈련되지 않은〕겁에 질린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그래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143
하나, 지난해부터 변란이 일어난 뒤로 수군이 적과의 접전을 수십 차례나 자주 가졌는데, 큰 바다에서 교전할 때면 저 왜적들은 무너져 파괴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143
갑오년(1594)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월
1일 경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ㅇ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147
14일 계사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받아 보니 “아산의 산소에서 설날 제사를 지낼 때 패를 지어 모여든 무리들이 무려 이백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므로 제사를 뒤로 물렸다.”고 한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15일 갑오 동궁(광해군)의 명령이 있었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감독하라는 내용이었다. 149
18일 정유
19일 무술 원 수사,
21일 경자 저녁에 녹도 만호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이백열네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한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원 수사의 진영에서 와서 적의 정세를 상세히 이야기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151
30일 기유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식은땀을 흘렸다. 154
2월
3일 임자 맑음. 새벽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55
5일 갑인 원수(
9일 무오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다. 158
12일 신유 미시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유지 두 통과 비밀 문서 한 통, 도합 세 통인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 통에는 “흉적의 뜻이 호남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차단하고 형세르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다. 그 안의 비밀 문서를 내 보니 “여러 해 동안 해상에서 나라를 위해 애쓰는 것을 내가 늘 잊지 못하니, 공이 있는 장병으로서 아직 큰 상을 받지 못한 자들을 치계(馳啓,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159
21일 경오 맑고 따뜻함.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162
3월
6일 갑신 늦게 거제로 향할 때 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 남해 현감(
5월
7일 갑신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176
6월
4일 신해 저녁이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181
15일 임술 신경황이 영의정(
7월
3일 기묘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 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186
14일 경인 비가 계속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심대처럼 내리니 지붕이 새어 마른 데가 없어서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에서 얻은 그대로니 참으로 절묘하다. 189
8월
17일 임술 원수(
30일 을해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201
9월
3일 무인 새벽에 비밀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명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응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202
10월
4일 무신 선전관 이계명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는데, 임금님이 담비의 털가죽도 내려 주셨다.
6일 경술 일찍 선봉을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아 놓았는데, 그 내용은 “일본은 명나라와 더불어 바야흐로 화목하고자 하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209
14일 무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六穴銃筒)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서신’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211
을미년(1595)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입으로 교서를 외우고 있으나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월
21일 갑오 장흥 부사가 와서 만났다.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230
5월
4일 병자 아들의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이 왕씨(왕건)이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245
7월
1일 임신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일기초) 256
7일 무인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도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이것을 보니, 놀랍고도 황송한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258
9월
25일 갑오 미시에 녹도의 하인이 불을 내 대청과 다락방에까지 불길이 번져 모두 타 버렸다. 271
11월
1일 기사 김희번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영의정의 편지와 조보 및 원흉의 답서를 가져와 바치니,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망하는 말들은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천지 사이에는 이 원흉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일기초) 277
병신년(1596)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1월
12일 기묘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의관을 벗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놓았다. 얼마 후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알지 못했다. 289
3월
22일 기축 그 편에 들으니 작은 고래가 섬 위로 떠밀려 와서 죽었다고 하므로 박자방을 보냈다. 308
4월
19일 을묘 이날 아침에 남여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313
5월
13일 기묘 부산의 허내은만의 고목이 왔는데, “가등청정(加藤淸正)이란 왜적이 이미 10일에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갔고, 각 진에 있는 왜적들도 또한 장차 철수해 갈 것이며, 부산의 왜적들은 명나라 사신을 모시고 바다를 건너가려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318
6월
20일 병진 어제 아침 곡포 권관 장후완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평산포 만호(김축)에게 제때에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할 때에, 날짜를 정해주지 않았기에 오십여 일을 물러나 있었다고 답하였다. 해괴하기 짝이 없어서 곤장 서른 대를 쳤다. 324
9월
8일 신축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이 올랐는데 나라 제삿날(세조의 제사)이라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344
정유년(1597) Ⅰ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4월
11일 신미 새벽꿈이 매우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말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종을 보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13일 계해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후에 대강 적었다. 356~357
5월
3일 계사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의 음은 열(悦)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361
15일 을사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주인집이 너무 낮고 추하여 파리가 벌떼처럼 들끓어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366
21일 신해 과천의 좌수
7월
22일 신해 아침에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390
8월
3일 신유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392
9월
16일 갑진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 척의 적선이 명량을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항해 온다.”고 했다. 어려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상선(지휘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적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하고 말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한 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令下旗, 군령 내리는 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처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고 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를 곧장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서른 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401
정유년 Ⅱ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8월
21일 기묘 사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소주를 마시고 치료하려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구토를 여남은 차례 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23일 신사 병세가 매우 위중해져 배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였다. 실제로 전쟁터도 아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411
9월
2일 경인 배설이 도망쳤다.
15일 계묘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잊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416
16일 갑진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418
10월
14일 신미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었다. (……)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는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것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425
12월
5일 신유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선전관을 통해 들으니, 통제사
무술년(1598)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인데,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울리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10월
3일 을묘 도독(전린)이 유 제독의 비밀 서신에 의하여 초저녁에 나가 싸웠는데, 삼경에 이르도록 공격하다가 명나라의 사선(沙船) 열아홉 척, 호선(虎船) 이십여 척이 불에 탔다. 도독의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일 무오 도원수(군율)가 군관을 보내 편지를 전하는데, “유 제독(유정)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했다.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446
11월
17일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449
3.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는 두 번 쓰여졌다. 충무공
“이제 초고본에서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은 없다.”라는 자부심의 근간이 된 그의 정성스러운 노고 덕분에 『난중일기』가 ‘나중일기’가 될 뻔할 일이 없어졌다.
o 보완할 점
이런 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