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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1일 06시 18분 등록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李舜臣 / 노승석 옮김)


*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忠武)로, 서울 출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삼도 수군통제사를 맡아 남해의 일본해군을 섬멸하였으며 서해를 일본의 침입으로 막아내었고 전란을 끝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노량해전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다가 전사하였다. 사후 무관 최고의 영예인 忠武 시호가 추증되었다.


  충무공의 공직생활 기록을 살펴보면 오로지 놀라울 따름이다.

  1576년인 선조 9년 병과에 급제해 권지 훈련원 봉사로 처음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이어 함경도의 동구 비보 권관, 이듬해 발포 수군만호가 되었으나, 1581년 모함으로 파직되고 이듬해 훈련원 참군으로 복직되었다. 1587년 조산 보만호 때 오랑캐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했으나 이듬해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다시 임용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인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등 계속 낮은 벼슬로 지내다가 1591년 그를 계속 지켜봐오던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 장군, 진도 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고 전라도와 경상도 수군을 지휘하는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였고,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적선 13척,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한산도에서 적선 70여 척을 무찔렀고 9월에는 적의 근거지인 부산에 쳐들어가 배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을 모조리 격파하여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모조리 무찔렀다. 이에 따라 최초로 삼도의 수군통제사가 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내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난민을 구제하고 산업을 장려하는 등 백성을 다스리는 데도 힘썼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도움으로 도원수인 권율 밑에서 다시 한 번 백의종군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회담이 깨어지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 때 원균이 참패하고 충무공이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 배가 12척이었다. 충무공은 12척의 배와 빈약한 병력으로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적의 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을 노량에서 맞아 싸우다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공직에 나간 때는 동인과 서인의 분파로 당쟁이 시작되고 수많은 옥사와 당쟁으로 조정이 혼란스러웠고 공납, 군역, 환곡의 폐단이 극에 달하고 끝없는 오랑캐와 왜구의 침입으로 국력이 악화되었을 시대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 끝에 일본이 전 국력을 모아 쳐들어왔을 때 조선은 이를 막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낸 것은 거의 이순신 장군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전사(戰士)  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연구하는 탁월한 전략이라고 한다. 또한 적국이었던 일본과 원군으로 참여했던 명나라 제독에게조차 극찬을 받고 영국의 넬슨 제독을 능가하는 영웅으로 평가받는 무인이었다.      


  그러면 이순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 장군은 평생 아첨과 거리가 멀었으며 이로서 많은 모함을 받고 고초를 겪었지만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킨 굳은 의지의 사람이었다.

  충무공의 신념과 우국충정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왕과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이 자신을 파면하고 투옥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고, 전란을 예상해서 수 년 동안 준비해온 배와 병사 등을 모두 없애놓고 다시 싸우라는, 어찌 보면 너무도 뻔뻔스러운 조정의 재임용을 받고도 아직 배가 열 두 척이나 남아있는데 어찌 적을 이대로 돌려보내겠냐는 결전의 의지를 불태운 점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장계를 쓰면서 충무공은 조정을 가득채운 간신이나 소인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짓밟히고 있던 백성들을 생각했음이리라.


  또한 이순신 장군은 그 당시에 자신을 “자기만큼 초라하고”, “복이 없는 사람이며”,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한탄하였고,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이렇게도 살펴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지”하고 넋두리를 하기도 한 보통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솔직한 감정의 토로는 명장으로만 알려져 있던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신념과 의지로 영웅의 길로 나아간 진정한 영웅을 발견할 수 있다.


   공은 엄하고 진중해 위풍이 있는 한편 남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겸손하며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하는 말이 “대장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죽을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사짓고 말아도 또한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해 뜬 영화를 탐내는 것은 나의 부끄러워하는 바라.”                                               - 최유해의 행장 중에서 -


스스로 신념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는 것을 평생의 일관된 신조로 삼았기에 그는 반생을 불우하게 지냈으며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난리를 만나 뛰어난 전공을 세워 임금과 조정 신료, 백성들을 감동시켰음에도 속인들로부터 모함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공은 지혜를 내고 일을 지휘함에 있어 한 가지 실수도 없었고, 또 용기를 분발하고 기회를 결단하기만 하면 그의 앞에는 강한 적이 없었다. ...(중략)

그는 전쟁에 다다라서도 조용히 생각하며 항상 여유가 있었고, 또 나갈만한 것을 보고야 나가며 지켜야 할 때는 물러나는데, 반드시 신중하게 세 번 나팔을 불고 북을 친 연후에야 군대를 돌렸다. 마지막 죽던 날에도 군대의 규율과 법도가 평일과 같아 마침내 승첩하게 되었다.... (중략)...

또 밤마다 군사들을 쉬게 한 뒤 자신은 스스로 화살을 다듬기도 했으며, 적선이 눈앞에 닥쳐오면 자기도 활을 당기어 같이 쏘았다. 부하 장수들이 공이 다시 탄환에 상할까 염려해 “어찌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하고 말리면 공은 하늘을 가리키며 “내 명은 하늘에 있거늘 어찌 너희들만 시켜 적을 대항케 할 것이냐.”했다.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려고 본시부터 정한 것이 이와 같았다.            - 이식의 시장에서 -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 서문

인류의 역사가 변해도 만고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시대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국가의 보전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해제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1]


후대인들이 일기 문학 작품 중에서 특히 <난중일기>를 대표작으로 손꼽는 이유는 결코 임진왜란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순신의 유일한 저작이라는 사실에 더해 저자 자신이 7년 동안 전쟁을 직접 체험하며 남긴 사실 기록이라는 점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11-12]

임진년 (1592년)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49]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58]


그러나 장차 한 해가 바뀌려 하는데도 아직 적을 섬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하니,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 도(전라도)에 달려 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렸습니다. 본도의 감사가 재차 부임하여 나랏일에 힘쓰고, 절도사는 오랫동안 다른 도에 머물면서 군사와 말을 정선하여 부리되, 군기와 군량은 이곳으로 다 보내고, 진과 보루에 방어할 군사를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각각 반을 나누어 뽑아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늙고 중도에서 굶주림과 추위가 한꺼번에 닥쳐와 과반수가 패주했습니다. 혹 패주하지 않은 자가 있어도 기근과 동상이 너무 심하여 사망하는 일이 연이었는데, 큰 고을 가려내 진압할 날을 정하고 출정을 독촉하니, 한 도가 소동하였습니다. 게다가 소모사가 내려와서 남아있는 군사들을 징발하고, 각 진영과 포구에 방군을 나누고 여러 고을의 수병들도 그 정한 기일 내에 뽑아서 충원하니, 한 도가 소동하여 행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도를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은 뻔한 일이니, 길에서 통곡하고 있으며......

... 종사와 도성도 보존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 신이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서 방비하여 지킬 일이 매우 급하니, 오래전부터 있는 병폐라고만 여겨 방어하는 것을 줄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례에 따라 출발을 재촉하는 것은 한편으로 배의 격군을 채울 수 있고, 한편으로 성을 지킬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 번 적에게 나아가고 열네 번 싸워 이겼던 것이 이미 여덟 달 전에 겪은 일입니다. 대저 변방의 중진을 한번 잃으면 그 해독은 심장부에까지 미치게 되니, 이것은 실로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72-75]


계사년 (1593년)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없네.


두 차례 유인했으나, 우리 수군에 이미 겁을 먹고는 나올 듯하다가 돌아가 버려 끝내 잡아 섬멸하지 못하였다. [79]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80]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후 진도의 상선(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을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 때문이다. [83-84]


요즘 도내의 인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뒤로 군대의 사정은 근심에 괴로워하고 원망하여 바로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릴지라도 모두 달아날 꾀만 낼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음이 있으며 어떻게 통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 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이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93]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오래 체류하는 것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던 차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에 잠겼다. [109]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115]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19]


이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물과 하늘이 일색을 이루었다.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어와 홀로 뱃전에 앉았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28]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이 왔는데, 무릇 군사의 일가족들에 관한 일은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140]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 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144]

갑오년 (1594년)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을 탄식하지 않으셨다. [149]


“아산의 산소에서 설날 제사를 지낼 때 패를 지어 모여든 무리들이 무려 이백여 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구걸하므로 제사를 뒤로 물렸다.” [149]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176]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176]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179]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저녁 바람이 몹시 사나워져 걱정이 더욱더 심해졌다. [182]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의 평안하심을 알았으나, 또 면의 증세가 중하다고 하였다. 몹시 애타는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유 상(유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저어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날 저녁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 없었다. 걱정에 더욱 번민하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 상이 만약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면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188-189]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200-201]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219]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해의 고을에 저장해 두고 있거늘,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보내어 곳간째 털어 실어 갔습니다. 저는 타도의 먼 바다에 있어서 미처 조치를 하지 못하여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220]


쓸쓸히 바라보며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신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오

배를 몰던 며 채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마음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찟기고

쓰라인 가슴은 살을 에는 듯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리고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듯

신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이백 년에

화려한 문물은 삼천 가지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도다

여러 해 바다 막을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222-223]


을미년 (1595년)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입으로 교서를 외우고 있으나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몸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입으로 교서를 외우고 있으나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250]


조형도가 무고하여 장계하되, “수군 한 명에게 날마다 식량 다섯 홉, 물 일곱 홉씩을 준다.”고 했다니, 인간 세상의 일이란 참으로 놀랍다. 천지간에 어찌 이처럼 속이는 일이 있을 수있을까. [252]


내년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56]


병신년 (1596년)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를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군왕을 만나 본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와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하였다. [288]


저녁에 물을 부엌가로 끌어들여 물긷는 일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이날 밤 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았다. 혼자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297]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계획이었다. [317]


이날 아들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붙들어다가 잘 타일렀다. [331]


종 경이 심하게 앓는다니 무척 걱정이 된다. [332]


식후에 활터 정자에 가서 아들들에게 활쏘기를 시키고 말달리면서 활 쏘는 것도 연습시켰다. [338]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드렸다. [341]


뒤미처 점검하는 곳으로 가서 진주 소촌 찰방을 만나고 일찍 광양현에 이르렀다.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반이 되어 그 참혹함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우선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염려하는 마음을 풀어 주어야겠다. [341]


이중익이 군색하고 급하다는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했다. [346]


새벽에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함께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와서 종일토록 즐겁게 모시니 이 역시 다행한 일이었다. [348-349]


정유년 (1597년) I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종 순화가 배에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356-357]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357]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하직을 아뢰었다. [358]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의 음은 열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361]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362]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통곡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에까지 따라와서 이토록 근심하고 애달파 한 것이니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또 남원의 추수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형님들의 혼령이 말없이 걱정하여 주는 터라 애통함이 더욱 간절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원통한 마음에 눈물이 엉겨 피가 되건마는, 하늘은 어찌 아득하기만 하고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가. 왜 어서 죽지 않는 것인가. [362-363]


아침에 정혜사의 승려 덕수가 와서 미투리 한 켤레를 바쳤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두세 번 드나들며 고하기에 그 값을 주어 보내고 미투리는 바로 정원명에게 주었다. [363]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364]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368]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돌려주었다. [371]


아들 열이 곽란을 앓아 밤새도록 신음했는데, 애태우며 고민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374]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어머님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더욱 심하여 밤이 깊도록 잠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385]


열이 떠나간 것을 걱정하는 마음 어찌 감당하랴. 더위가 매우 엄혹하여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 [385]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사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않았다. [389]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과 사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39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 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상선(지휘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하고 말했다. 그러고서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한 마장 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중군의 영하기와 초요기를 세우니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도 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고 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를 곧장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우리를 에워싸던 적선 서른 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400-401]


아들 회가 집안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올라갔다. 홀로 배 위에 앉으니 심회가 만 갈래였다. [403]


아, 슬프도다. 그 때가 어느 때인데, 강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 했던가.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다른 길을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 균을 매단 것과 같아서, 한창 인신이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에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체면을 깎고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어 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화친할 수 없는 이치를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말한 것을 따라주지 않을지라도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이 역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책)을 따르고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이를 위해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 가서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며, 만에 하나라도 혹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어찌 인신으로서 몸을 맡기고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버려 둘 수 있는 것인가. [404]


정유년 (1597년) II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 식사 후 길에 올라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고 곡하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하였다. [408]


그 편에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더해지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410]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416]


아산 고향 집이 이미 적에게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도고 남은 것이 없다고 전하였다. [421]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424-425]


사경에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차가워 뱃사람들이 추워서 얼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427]


도원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선전관을 통해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원칙)과 권(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을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유지와 함께 고기반찬을 하사하셨는데, 마음은 더욱 비통하였다. [435-436]


무술년 (1598년)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인데,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울리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난중일기>는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과 정조 때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의 제 5권에서 제 8권에 실린 <난중일기> 두 가지가 있다.

  친필 초고본을 <초서본 난중일기>라고 부르며, 7책과 별책 부록 1책이 남아 있다.

  제 5책과 제 6책은 두 책이 모두 정유년 일기여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가 중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 5책에는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곳이 많고, 내용을 보아도 제 6책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나중에 충무공이 여유를 틈타 앞의 간지의 잘못을 바로잡는 한편 기억을 더듬어 보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초서본 난중일기>는 일기와 서간첩 및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충무공 전서>에 실린 난중일기를 <전서본 난중일기>라고 부르며 1795년 정조 때 완성되었는데 친필 초고본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런 차이는 편찬 시 정자로 옮기는 과정의 문제로 여겨진다.


  초고본 <난중일기>는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무술년(1598) 11월 17일까지 부득이한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과의 전쟁을 직접 기록한 진중일기이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폭넓은 사회 상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전투 진행상황, 공문 등 공식적인 내용과 진중의 갈등상황과 인사문제 등 내부적인 문제, 또한 이순신 장군의 가족에 대한 사항 및 장군의 심적인 고민과 한탄 등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공사간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일기문학의 보고이다.

  또한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직접 당사자의 현장 기록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사료적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인 이순신 장군이 무관이었지만 또한 유학을 공부했던 문필력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가치도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난중일기>에 담긴 이순신 장군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정신은 그 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만이 감동을 받을 것이 아니며, 경제적 가치가 제일 우선시되고 충효(忠孝)와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시대에 누구나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할 덕목일 것이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자주 눈에 띄는 대목이 있는데, 전쟁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인편에 어머님의 안부를 묻고 또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글로 써 놓은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효성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덕목은 서로 통해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아내의 고생과 아들(면)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전쟁터를 지켜야 했던 충무공의 아픔을 읽을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 년도의 일기 앞 편에 당시 전쟁의 진행상황과 조정의 상황,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정황 등을 설명해주는 ‘해제’를 붙였더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각각의 일기를 읽을 때 짧은 일기의 내용만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앞머리의 ‘해제’부분은 난중일기의 해석과 판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좀 더 자세히 해설되었다면 <난중일기>의 감동이 더욱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매우 아쉬웠다.

  또한 우리나라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옛 지명과 뒤섞인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펼치고 수군을 지휘한 장소들을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더 잘 알리기 위해 각 전투와 병력 이동 등에 대한 해도와 설명들을 덧붙였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지난번 하동 여행에서 남해대교를 가서야 비로소 그곳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치러진 곳이라는 점을 알았던 나만의 무지일 수도 있다.

  즉 <난중일기>가 우리나라 영웅의 이야기요, 우리나라 전쟁의 이야기지만, 벌써 400여 년이 넘어가는 것을 감안하여, 원본을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고전의 향기가 느껴질 수 있는 추가설명과 해설이 필요하다는 느낌이었다.


***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아, 슬프도다. 그 때가 어느 때인데, 강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 했던가.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다른 길을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 균을 매단 것과 같아서, 한창 인신이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에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체면을 깎고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어 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화친할 수 없는 이치를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말한 것을 따라주지 않을지라도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 이 역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선 그들의 계책(화친책)을 따르고 자신이 그 사이에 간여하여 이를 위해 일을 낱낱이 꾸며 맞추어 가서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며, 만에 하나라도 혹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 강의 계책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떠나가기만을 구하고자 했으니, 어찌 인신으로서 몸을 맡기고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버려 둘 수 있는 것인가. [404]

이순신 장군은 남송의 신하 이강의 이야기를 빗대어 말한다.

“이강은 자신의 항금정책이 화친파와 대립을 겪자, 떠날 것을 청하여 조정을 떠난다. 그러나 나라가 이렇게 어려울 때, 어찌 떠난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체면을 깎고 피눈물을 흘리며 상대방을 진심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려 애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반대편의 정책을 따르게 되어도 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반영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야 하며, 그러는 중에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책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순신 장군이 끊임없는 모함을 받고 억울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바다를 떠나지 않고 나라를 지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라 생각된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과 그리고 원균에 대한 불만이 많이 나오고, 이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한탄이 나온다. 또한 “왜 어서 죽지 않는가”하는 피맺힌 절규가 여러 차례 나오지만 장군은 결코 살아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인간이었던 이순신 장군이 민족의 운명을 구한 ‘영웅’이 된 이유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누구나 처하게 되는 이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습관’에 참고할 문구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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