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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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하여
그의 탄생이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945년 지금부터 455년 전 3월 8일 (양력 4월 20일) 자정에 서울 건초동 (지금의 인현동 1가 부근)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미래에 관하여 “나이 50 이 되면 북쪽에서 대장이 될 것이다” 라고 점치는 사람이 예견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순신의 어머님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 이 아이가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지어라”라 하여 이름을 이순신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16세기 중반 소윤과 대윤의 피 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신진 사람들이 화를 당한 비극의 해였는데, 하지만 이런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또 한명의 아기는 명장의 기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어릴 적 나의 기억 속의 이순신
초등학교 시절 외웠던 장난스러운‘시’ 한편이 이번 난중일기를 읽으며 떠올랐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긴 휴지 옆에 차고 아랫배에 힘을 주니 뚝 하는 그 소리 내 똥인가 하노라’. 갑자기 유치한 이 시가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어릴 적 아이들은 역사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장난감 같은 거북선을 만들어 바다에서 적을 물리친 아저씨 정도로 알았던 것 같다. 나에게 남아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억은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노량해전에서 거북선으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장수였는데, 마지막 순간에 적탄에 맞아 숨지는 순간에서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영웅의 모습이었다. 돌아보니 이순신 장군을 어려서도 존경했었다는 느낌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인간적인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사자를 보내고 어머님의 안부를 대신 묻게 하고, 또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글로써 자주 적었다. 그의 어머니에 다한 자상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충신은 가문에서 나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주 통고하며 울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수 그리고 그때 시대적 배경으로는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우는 것으로 들어왔는데 힘든 일을 눈물로 푸는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명장 이순신의 활약상 연대표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남
1592년 4월 12일 거북선 완성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1
592년 5월 7일 옥포 해전, 합포 해전
1592년 5월 8일 적진포 해전
1592년 5월 29일 사천포 해전(거북선 첫 출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 군관 나대용도 부상.
1592년 6월 2일 당포 해전
1592년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7일 율포 해전1592년 7월 8일 한산도 해전(학익진 사용)
1592년 7월 10일 안골포 해전1
592년 8월 29일 장림포 해전
1593년 2월 6일~3월 8일 웅천포 해전
1597년 7월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1597년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교지 받음
1597년 8월28일 어란진 해전
1597년 9월7일 벽파진 해전
1597년 9월16일 명량해전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 이순신 적의 총탄에 맞아 선상에서 전사. 10명의 조선 장수 함께 전사
무찌르는 글귀
난중일기 -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역자서문
인류의 역사가 변해도 만고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시대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5]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되어 존경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5]
<난중일기> 란 바로 그 당시에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 일기다.[6]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증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6]
해제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11]
‘난중일기’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기존 연구의 문제점들을 바로잡아 정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고본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해독 작업과 번역이 있었지만, 초고본의 해독상 문제점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초고본과 이본에 대한 정밀한 교감 작업을 시도하여 비로소 새로운 원문과 번역본을 만들게 되었다.[12]
새로운 원문과 번역 내용이 완벽한 것이라고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이에 대한 보완으로 더 많은 검토와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여 해당 부분에는 반드시 교감의 근거 내용을 제시하고 시비를 가린 내용이 비교적 합리적임을 설명하였다. 비록 새로 밝혀진 글자와 내용들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전후 문맥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41]
완역 난중일기
임진년(1592) -기회를 놓치면 후회를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51]
늦게 출발하여 영주에 으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면 영주도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55]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매우 다행이다.[58]
몸이 불편하여 아침 내내 누워 앓다가 늦게야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60]
활 열 순을 쏘았는데, 다섯 순은 잇따라 맞고, 두 순은 네 번 맞고, 세 순은 세 번 맞았다.[61]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으며 만약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바로 중위장을 불러내어 내일 새벽에 떠 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써서 보냈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67]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어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와 같이 쏘아 때니, 적들은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68]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새보니 ,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나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71]
계사년(1593)- 만 번 주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없네.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었다.[105]
늦게 (영남) 수사가 왔고 선전관 성문개가 와서 만나니, 피난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을 참지 못했다.[107]
이날 저녁 달빛은 매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108]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은 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119]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베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130]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137]
유기는 문에 땔나무를 쌓아 두고는 파수꾼에게 경계하기를 “빠져나가다가 불리해지거든 즉시 내 집을 불사르고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 고 하였다.[146]
갑오년 (1594)-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에 들어갔다.[149]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 는 것이었다.[160]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 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181]
이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183]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 점쳤더니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 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189]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201]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202]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서신’ 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211]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은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쌍무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 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219]
을미년(1595)-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임으로 교서를 외우고 있으니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꿈을 꾸니 서남방 사이에 붉고 푸른 용이 한쪽에 걸렸는데, 그 형상이 굴곡져서 내가 홀로 보다가 이를 가리키며 다른 이들도 보게 했지만, 남들은 몰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린 사이에 벽 사이로 들어와 화룡이 되어 있었고, 내가 한참 동안 어루만지며 완성하는데 그 빛과 형상의 움직임이 기위하다고 할 만했다.[233]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256]
체찰사가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는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다.[266]
선 수사(선거이) 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북방에 갔을 대에 같이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오늘 아들 회의 생일이다. 그래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주도록 예방에 당부하였다.[273]
병신년 (1596)-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 겠는가.
어느 한곳에 이르러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둘 다 의관을 벗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얼마 후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 하는 사이 만일 서쪽의 적이 급한데 남쪽의 적까지 동원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세겠는가를 되풀이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악지 못했다.[289]
척자점을 쳐 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지 점쳤더니‘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다.[289]
밤바다의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결 같았다. 혼자서 높은 수루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297]
몸이 노곤하여 밤새도록 식은 담이 흘렀다. 삼경에 비가 몹시 왔다. 낮에는 노곤하여 머리를 빗었는데 수시로 땀을 흘렸다.[307]
초경에 곽란이 나서 한참 구토를 했는데. 삼경에 조금 가라앉았다.[308]
낮에 땀이 옷을 적셨는데 밤에는 옷 두겹이 젖고 다시 방바닥까지 흘렀다.[309]
가뭄이 너무 심했다. 근심과 고민을 어찌 다 말하랴.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316]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계획이었다.[317]
새벽꿈에 어던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화살을 멀리 손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삿갓을 말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 할 것이 나 말로 걷어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지를 징조라 하겠다.[328]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어머니 곁에서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341]
정유년 Ⅰ (1597)-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래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 나가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357]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퉁곡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종군하고 있으니, 누가 일을 주관한단 말인가.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셨다.[362]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수군에 있었는데, 수군이 이와 같으니 또다시 가망이 없을 것이다.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388]
새벽에 이덕필,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389]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다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현령 (안위)과 사역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390]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하고 말했다.[401]
인신이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박에 낼 수 잇겠는가. 그러한즉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체면을 깎고 피눈물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어 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화친할 수 없는 이치를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말한 것을 따라 주지 않을지라도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404]
정유년 Ⅱ-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병사가 경솔히 후퇴하는 골이 매우 한탄스러웠다. 점심을 먹은 뒤에 곡성현에 이르니 온 경내가 이미 텅 비고 말 먹일 꼴도 구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그대로 잤다.[407]
아침 식ㅅ사 후 길에 올라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히 쓰러져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갔다.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다시 볼 수 없었다.[408]
사경에 곽란이 일어낫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소주를 미사고 치료하려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범했다. 구토를 여남은 차례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411]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하였다.[416]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서 살 것이냐? ” 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 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 ‘ 라고 하였다.[418]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남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425]
무술년(1598)-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인데, 앞에 있는 배들의 함성이
하늘에까지 울리고 대포 소리는 우레와 같아서 호령을 듣지
못하였다.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참담했다. 삼경에 달빛을 타고 하개도로 옮겨 정박했다가 날이 밝기 전에 군사를 움직였다.[443]
묘시에 진격했는데, 우리의 수군이 먼저 나가서 오시까지 사워 적을 많이 죽였다.[445]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449]
내가 저자라면
난중일기
<난중일기> 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충무공이 전쟁 중에 7년 동안 기록한 일기이다. <난중일기> 는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충사를 성역화할 때부터 온 국민들의 필독서로 알려졌다.‘이충무공 전서’ 에 일기가 실리면서 <난중일기> 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다.
<난중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이순신 자신이 말하는 이순신’을 가감없이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그의 육필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걸러진 이순신의 모습(혹은 일방적으로 그려진 성웅의 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을 읽어낸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느낀점
전쟁이 시작되기 넉 달 전부터 전쟁이 끝나던 무술년 10월까지 2589일 동안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던 전날까지 꾸준히 일기를 쓴 것을 보면 그는 문학적 기질이 있었거나 아니면 전쟁뿐만 아니라 일기에 대해서도 남다른 사명감을 느낀 듯하다. 이 글들을 통해 무능한 조정과는 달리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쟁을 예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전쟁 전부터 왜적의 배를 분석하고 거북선을 건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또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둔전을 경작하며 메주도 쑤고 무밭도 경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전쟁과는 다른 또 다른 푸근한 삶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일반 배들에게는 일정한 통행세를 받아 전비를 보충하는 모습은 한 명의 장수로서뿐만 아니라 빈틈없는 현대의 CEO 로서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간결한 문장 속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 했는데, ‘성웅 이순신’ 으로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 <난중일기> 는 한 명의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기에 비춰진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
그의 건강
빨간불 적신호였다. 아팠다는 말이 아마도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식사 후에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밤새 신음했다. 장군 이순신은 의외로 자주 앓았다. 내가 그의 진단을 해보니 ‘스트레스’ 로 인한 소화 장애 이었던 것 같다. 집안이나 나라 걱정을 한 다음 날 어김없이 땀을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다음날 이면 기운이 축이 나서 종일 고통스러워했다.
초경에 곽란이 나서 구토를 했는데 삼경에 조금 가라앉았다.[308] 이와 같이 그의 그 당시 상황에서의 고뇌가 건강으로 나타난 문구들은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가족애
어머님을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기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 내린다. 이순신 장군의 가족을 사랑하고 챙기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아산 집에서 소식이 안 오면 애 닳아했고, 소식이 오면 편안한 마음으로 직무에 열중함을 엿 볼 수 있었다. 어머니 이외에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자식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여느 부모나 자식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민중에 대한 사랑
충청 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소포도 권관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179]
이 날 밤 소나가기가 흡족하게 내리니 어찌 하늘이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183]
체찰사가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조용히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는 백성을 위해서 고통을 덜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다.[266]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계획이었다.[317]
늘 군사를 위해, 백성을 위해 걱정하는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다. 힘든 군사의 노고를 풀어주고 굶주린 백성의 배고픔을 알아주는 그는 진정한 장군이었다.
국난 극복에 대한 염원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니 비가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에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206]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256]
인신이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대에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그러한 즉 강을 위한 계책을 세운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체면을 깎고 피눈물을 흘리며 충심을 드러내어 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화친할 수 없는 이치를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말한 것을 따라 주지 않을지라도 죽음으로써 그것을 이어 가야 할 것이다.[404]
상관 장수와의 갈등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181]
장흥 부사가 와서 만났다. 그에게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230]
“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한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390]
“안위야, 국번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야?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성 공을 세우게 해주마.“ 라고 하였다.[418]
그는 원균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전술상의 의견 차이에서 생긴 불화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점치고 꿈꾸는 명장 이순신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는 것이다.[208]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서신’ 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211]
새벽꿈에, 영의정이 이상한모양을 하고 있고 나는 관을 벗고 있었는데, 함께 민종각의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다가 깼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215]
불안한 하루를 점으로 시작하려 해석하며 위로 받고, 꿈을 해석하고 믿는 그의 모습이 조금
나약해 보이기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이 꾼 꿈을 풀이하는 그는 한국판 프로이트나 칼융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씨에 대해 거론하지 않은 날은 딱 이틀
임진년 3월 27일과 임진년 4월7일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날의 날씨가 궁금하다.이 날은 왜 날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이 ‘난중일기’ 는 당시의 정치, 경제, 그리고 개인사까지 폭 넓게 다루어져 있다.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아쉬운 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찾아 본 몇 권의 자료 책들이 임진왜란 기간 동안의 장군의 업적과 난중일기를 통해 드러난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를 읽고 가장 많이 다가온 부분은 몸 약한 아주 자상한 가장이고 효자였다는 느낌만이 강하게 남았다. 물론 이순신 자서전도 훑어보았으나 그의 어린 성장과정이나 그가 그런 명장이 될 수박에 없었던 고난과 이의 극복 과정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