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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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이순신 李舜臣 (1545~1598)
이순신은 조선조 인종 원년 서기 1545년 3월 초8일(양력 4월 28일) 자시에 한양의 건천동(지금의 인현동 1가에서 을지로 4가에 이르는 남산 아래쪽 부근)에서 태어났다. 덕수 이씨인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의 4남 중 3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시할아버지 이거의 선몽을 받아 순舜, 여기에 임금의 신하라는 뜻으로 신臣 자를 더해 아들의 이름을 순신舜臣 이라고 짓고, 자字를 여해汝諧 라 불렀다. [서경]에 따르면 순舜 임금이 여러 신하 가운데 우禹 임금을 지적하며 “오직 너汝라야 세상이 화평케諧 되리라.”라고 한 데서 ‘여해’라는 말이 나왔다. 이는 마치 이순신이 그 이름대로 순임금의 신하인 우임금처럼 나라를 구해 화평케 할 운명임을 암시해 놓은 듯하다.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발한 소년이었으며, 21세가 되던 해 8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하였고, 22세가 되던 해부터 활을 쏘고 마을 타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28세 때 한양의 훈련원으로 가서 별과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마하여 실격되었고, 32세 봄에 식년 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는 원칙에 어긋나고 그릇된 일에는 상대가 아무리 직속상관이라고 해도 당당하게 직언을 했지, 뜻을 굽혀 맹종하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어떤 후환이 닥칠지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평생 친구인 유성룡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말한다.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해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 자신을 잊고 국난에 몸을 바쳤으니 이는 평소 수양을 많이 쌓은 데 그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주위의 힘과 세를 빌려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자 했다. 실력이 못 미치면 그뿐이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해 허망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23년간 군인 생활 중에 이순신은 세 차례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을 겪는다. 하지만 자신을 좌천시켜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대로 임지에 가서 그 직무에만 전념했다. 부당하게 파면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사의 오해를 받아도 굳이 찾아가서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가리켜 “성품이 강의해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른다”고 묘사했다. 타고난 강직함과 결벽증에 가까운 청렴성을 지닌 그로서 당시의 부패한 조선사회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 다녔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47세 때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디어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이순신도 왕명에 따라 참전한다.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였고, 1593년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을 세우지만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죽고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그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을 거부하고 포격전(砲擊戰) 위주의 근대적 개념의 해전을 창시하고 진법을 활용하여 이미 이겨놓고 싸운다는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이룩했다. 선조와 간신배의 시기와 모략, 백의종군, 지극히 인간적인 이순신 장군의 국혼은 위대한 민족애와 필사즉생의 기백으로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해전을 이김으로써 백척간두에 놓였던 조국을 구하였다.
[주요연보]
1592년 / 이순신 48세 / 임진년 선조25년
4월 12일 : 거북선 완성
4월 13일 : 임진왜란 발발
4월 27일 : 경상도 출전 명령을 받음
5월 7일 : 옥포 승첩
6월 2일 : 당포 승첩
7월 8일 : 한산 대첩
8월 29일 : 부산승첩
1593년 / 이순신 49세 / 계사년 선조26년
2월 10일 ~ 3월 6일 : 웅포지역 왜적 격파
7월 15일 : 하난도 이진
8월 15일 :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4년 / 이순신 50세 / 갑오년 선조27년
3월 4일 ~ 5일 : 당항포 해전에서 적선 31척 격파
9월 29일~ 10월 8일 : 거제 장문포 수륙 연합작전 실시
1595년 / 이순신 51세 / 을미년 선조28년
2월 : 원균 경상 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전출
7월 : 왜군, 거제도에서 퇴각
1596년 / 이순신 52세 / 병신년 선조29년
전쟁 소강기
3월 : 오랜 진중생활로 투병 (4월까지)
5월 :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를 위하여 여제 치름
8월 : 진중 무과초시 치름
1597년 / 이순신 53세 / 정유년 선조30년
2월 : 함거에 실려 한성으로 압송
4월 1일 : 투옥된지 28일만에 출옥해 백의종군
4월 13일 : 모친 별세
7월 15일 : 원균의 삼도수군 대패, 원균 사망
8월 3일 :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8월 20일 : 전라도 이진으로 이진
8월 24일 : 전라도 어란포로 이진
8월 29일 : 진도 벽파진으로 이진
9월 16일 : 명량해전 대승첩, 당사도로 이진
10월 29일 : 목포 고하도로 이진
1598년 / 이순신 54세 / 무술년 선조31년
2월 17일 : 고금도로 이진
7월 16일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수군 5000명을 이끌고 옴
7월 24일 : 절이도 해전
9월 20일~10월 9일 : 수륙 합동으로 왜교성의 노니시 부대 공격
11월 19일 : 노량 승첩 거두고 순국
* 난중일기와 전략가 이순신
국보 제 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亂中日記’ 는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싸움터에서 직접 쓴 진중 일기이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던 해부터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두고 눈앞에 두고노량 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인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2,539일 동안 있었던 전쟁상황을 적어놓은 것이다.
연도별로 7권으로 나뉘며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 달에 시작해 순국 전날까지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본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던 것을 정조 대왕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한 데서 지어졌다.7책 205장 분량이며 모두 초서체로 쓰여졌다. 매일 처리한 공무, 진영에 대한 기록, 매일의 날씨, 격렬했던 전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난중일기에는 그의 인간적 고뇌가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난중일기]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임진장초]는 이순신이 7년 전쟁 동안 쓴 공식기록 문서다. 당시의 전황이나 수군의 출전 경과, 진중의 경비와 준비 사항 등을 조정에 장계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순신 특유의 전법과 당시 군사제도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친필로 흘려 쓴 초서체인 [난중일기]와 달리 임금과 조정에게 보내는 공문이기에 아랫사람을 시켜 정확하고 반듯하게 쓰게 했다. 그의 꼼꼼한 책임의식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2만 명의 왜군 해군이 궤멸되었으나 살상보다는 배를 파괴하는 데 중점을 둔 해전방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왜군들이 헤엄쳐 도망갈 수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임진년 1년 동안 왜군의 수급을 벤 것은 불과 211개였고, 조선 수군이 일본도에 의해 잃은 수급은 1개에 불과했다. 왜군들은 비록 적이었지만 살생보다는 쫓아내려고 애쓴 해전사였다. 즉 적의 생명도 아꼈음인데, 이러한 면에서도 이순신의 성자다운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러일 해전에서 도고 제독이 기적같은 승리(1905년 5월 27일, 대마도 해전에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탁 함대를 격파)를 거두자. 세계가 깜짝 놀랐고, 곧바로 ‘도고 신드롬’이 일어났다. 1907년 영국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도고를 방문했다. 그리고 “각하와 넬슨, 그리고 이순신 제독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도고 헤이하치로는 말한다. “이순신이 제독이면, 난 하사관에 불과하다. 나를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기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이 일화는 이순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일본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 또한 인상깊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茶)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그러나,‘칼의 노래’를 쓴 김훈은 이순신 장군을 신화화된 영웅이 아닌 ‘엄정한 현실주의자’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7년 전쟁에서 거둔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환상과 심리적인 동요를 배제한 채 현재 병력과 지형, 지물 등 지극히 현실적인 토대위에 뿌리를 두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훈이 말하는 ‘난중일기를 읽은 소감’을 들어보자.
"코피를 쏟고, 식은땀을 흘리고, 환청에 시달리는 기진맥진한 수군통제사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적탄을 맞은 어깨가 덧나 욱신거리고 정치적 모함으로 고문 받은 허리와 무릎이 견딜 수 없이 시려올 때, 그래서 그가 자신의 몸을 적과 임금이 동거하는 몸으로 인식할 때, 알 수 없는 적들의 적의와 기댈 곳 없는 썩은 정
치판 속에서 그 어느 쪽으로도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한 무인의 운명을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싸운 것은 '세상의 무의미'였으며, 희망 없는 세상을 돌파해 나가야만 하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이었다.
그 싸움에서 무인인 그가 기댈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수단은 칼인데, 이러한 헛것은 베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칼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칼에 새긴 검명처럼 적의 피로써 산하를 물들이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의 놀라운 문장들은 여기에 기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존망의 찌꺼기가 묻지 않는 칼과는 달리 인간은 특히 그 몸은 생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그가 마침내 견딜 수 없어 그 흔적을 드러낼 때 나는 함께 울었다."
이순신은 타고난 전략가였다.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훤히 꿰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최고 지휘관이었지만 현장답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피난민과 포로로부터 정부를 수집하고 정보원과 정탐선을 파견해 적의 규모와 이동상황을 세밀히 파악했다. 봉화, 연 등을 이용하여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이순신은 수많은 기습공격을 통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한번도 적에게 기습공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조형, 조류 등 자연환경과 우리 수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집중 공략했다. 일본수군은 칼싸움에 능해 일단 배 위에서 싸우면 그들이 유리했다. 또 그들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화포는 미약했다. 이러한 적의 강점,약점을 파악한 이순신은 적이 배에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거북선을 제작해 활용했다. 또한 화포를 집중 발사해 적선의 접근을 막으면서 격침시켰고 육전에서 주로 쓰이던 학익진을 해상에 응용해서 진법과 포격술의 유기적인 활용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23전 23승의 신화가 가능한 이유였다.
그는 왜 기록을 남겼을까?
전쟁은 길었고 참혹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외롭고 괴로웠다.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전쟁 중에 그는어머니를 잃고 아들도 잃었다.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 아닌가! 전쟁터의 외로운 장수,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 7년 전쟁을 견디게 한 힘은 일기였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면서 희망을 보았을까? 매일 매일 유서를 쓰는 절박함으로 일기를 썼을까?
도서관의 참고서적에서 이순신이 쓰던 술잔‘도배挑盃’(보물 제 326호) 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복숭아 잎이 그려진 그 술잔을 벗삼아,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위무했을 것이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했던 세상을 사랑하고, 단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싸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헌신과 실천으로..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역자서문
6. 충무공은 임진왜란에 미리 대비하여 그 전년(1591)부터 거북선 제조에 착수하고 군대를 정비하였다. 전쟁에 대한 신속 정확한 대비와 파악으로 작전하는 모습에서 충무공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해제
11.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이지만, 내용은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임진년 (1592)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51. 맑았지만 춥기가 한겨울 같다. 저녁에 쇠사슬 박을 구멍 낸 돌을 실어 오도록 배 네 척을 선생원으로 보냈는데, 김효성이 거느리고 갔다.
52. 맑음. 동훤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53. 맑았지만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이날 거북선에 쓸 돛베 스물아홉 필을 받았다.
56. 가랑비가 산에 가득히 내려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60. 몸이 너무 불편하여 일찍 들어왔다.
65. 영남 관찰사의 공문이 왔다. “큰 적들이 치열하게 몰아쳐 와 그 앞을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달라는 일로 장계 올리기를 청한다고 했다.
70. 적선 다섯 척이 먼저 우리 군사를 알아채고 남쪽 넓은 바다로 달아났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일제히 추격하여 사도 첨사 김완이 한 척을 통째로 잡고, 우후도 한 척을 통째로 잡고, 녹도 만호 정운도 한 척을 통째로 잡았다. 왜적의 머리를 합해 보니 모두 서른여섯 급이었다.
71.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이날밤은 꿈자리로 많이 어지러웠다.
73.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75. 대저 변방의 중진을 한번 잃으면 그 해독은 심장부에까지 미치게 되니, 이것은 실로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음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계사년 (1593)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한 마음 그지 없네.
80.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83.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87. 관군들이 쇠 탄환과 편전을 비 오듯 마구 쏘아 대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천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칠천량에서 잤다.
91.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95.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96.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97. 요행과 만일이란 실로 병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105.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108.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110. 여러 장수들이 애써 권하기에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먼저 고기 맛을 보게 되니 더욱 더 비통하다.
115. 가소롭다. 명나라의 배신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
118. 거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119.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25.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130. 비는 땅의 먼지를 적실 정도이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133. 원 수사가 음흉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주 형편없다. / 새벽 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137. 식은 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138. 달빛은 대낮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139. 원 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145.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갑오년 (1594)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48.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151.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마흔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 현감이 들어왔다.
155. 새벽꿈에 한쪽 눈이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58. 술 열잔에 취하여 말에 광기가 많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저물어서 활 석 순을 쏘았다.
16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162. 대나무로 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 삼아 쏘아보니, 소리만 요란하고 별로 소용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169.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171. 술이 세 순배 돌자 원수사가 거짓으로 술 취한 체하고 광기를 마구 부려 무리한 말을 해 대니, 순무어사가 그 괴이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했. 원 수사가 의도하는 것이 매우 흉악했다.
174. 밤새도록 앉은 채 앓았다.
176.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180.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182.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188. 유 상 (유성룡)이 죽었다는 부음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유 정승을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훼방하려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191. 명나라 장수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도 매우 풍성하다고 하였다.
200.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202.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05.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214. 서풍이 불어 춥기가 살을 에는 듯하였다.
216. 밤에 달빛이 대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218. 새벽꿈에 이일과 서로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는데,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구태여 음탕한 계집을 두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219. 밖으로는 나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을미년 (1595)
227.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230. 순변사 이일의 처사가 지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쓴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237.“풍신수길이 삼 년 동안 군사들을 내보냈지만 끝내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와 부산에다 진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는 것이다.
242. 종일 큰비가 왔다. 비가 흡족히 오니, 올해농사는 풍년일 것을 점 칠 수 있다.
247. 비가 퍼붓듯이 오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혼자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배영수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254. 우도의 각 관청과 포구에 있는 전선의 부정 사실을 조사했다. 음탕한 계집 열두 명을 잡아다가 그 대장과 함께 처벌했다.
258. 이경에 바다의 달빛이 수루에 가득 차니, 가을 생각이 매우 어지러워 수루 위를 배회하였다.
264. 이기남이 하는 짓에 괴상함이 많으므로 우후에게 달려가 부정 사실을 조사하도록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270. 선 수사(선거이)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수를 지어 주었다.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이 시를 비단에 적었다.
282.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신음했다.
병신년 (1596)
287. 이른 아침에 이영남과 좋아지내는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권숙이 치근거리기에 피해 왔는데,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 고 했다.
289. 척자점을 쳐 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쾌가 나왔다.
296. 아침에 벚나무 껍질을 마름질했다. 늦게 손인갑과 좋아지내던 여인이 들어왔다.
298. 이날 밤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빛은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랫사람들은 밤새도록 취하며 노래했다.
302. 조정에서 계책이 이럴 수가 있는가. 체찰사가 계책을 내놓은 것이 이렇게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단 말인가. 나라의 일이 이러하니 어찌할 것인가.
307.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을 적셔서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까지 젖었다. 몸이 불편했다.
313. 이날 아침에 남해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부터 펴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316.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 주고자 한 계획이었다.
323. 남도포 만호의 소실인 본포 사람이 허씨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투기 싸움을 했다고 핸다.
328.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화살을 멀리 쏜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삿갓을 발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 할 것이나 발로 것어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334. 몸은 언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바로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밤의 통증이 낮보다 배로 심하여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341.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정유년 (1597)
353. 맑음. 옥문을 나왔다.
356.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358.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362.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370. 흐리다 갠 것이 반반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383.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뼛속에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390.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392.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주며 당부하는데,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정유년 Ⅱ
409. 길가에 노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416.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424.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겉면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431. 이날 밤 삼경 꿈에 면이 죽었던 모습이 보여 울부짖으며 곡을 했다.
무술년 (1598)
443. 아침에 좌수영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참담했다.
449.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반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속으로 와서 보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지난 1주일 내내, 몸이 아팠다. 식은 땀을 흘리고 종일 가슴은 무거웠으며 머리는 지끈지끈했다. 난중일기를 읽으며,그에게 빙의된 것일까?
그의 일기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날씨다. 날씨만으로 일기가 끝나기도 하다. 해군으로서 바다의 날씨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바람에 실린 바다의 냄새, 밤새 퍼붓는 비소리가 가득하다. 이순신의 문장은 수사의 꾸밈이 적고 간결하다. 그는 매일매일 바다의 날씨를 꼼꼼히 살펴 적었고 적과 아군의 형편을 기록했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을 굉장히 아꼈다. 부하와 그의 애인 사이의 관계까지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했다. 이순신이 체포된 정유년 1597년의 일기는 석달치가 빠져 있다. 원균의 모함을 받고 옥에 갇혔으니 당연히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이다. 그 해 일기는 4월 1일부터 시작된다.
맑다. 옥문을 나왔다...
단 한마디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의 글은 무인의 글이다.
지금으로부터 465년 전에 태어난 한 명의 무사, 문을 숭상하고 무를 경멸하는 시대에 22세부터 무예를 익히고, 자신의 주관대로 당당히 살았다.‘바다를 지켜 나라를 구한다.’는 救國의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일이 있기 전에는 철저히 준비하고, 일을 맞이하면 죽기로써 전념하며, 일이 끝나면 결과에 담담했다. 열두 척의 전선으로 133척에 맞서 이기고, 스물세 번 전투에 나아가 스물세 번 모두 승리했으며, 최후의 전투에서는 죽어서도 살아나 적을 물리쳤다.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김훈이 말한다.
“이순신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 분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리더십, 그걸 배워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