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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06시 09분 등록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13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중경에서 죽었고, 작은아들 신이가 스물여섯 살이 되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곁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대부분은 생존해서 독립의 일에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이들은 모두 이제 없다. 무릇 난 자는 다 죽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나고 죽는 중에도 민족의 생명은 늘 있고 늘 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ㄲ초을 피우고 열매을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느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15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 [삼국사기]나 [안동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8대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21대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21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전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 때 우리 조상은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군으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이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이라 다시 먼 곳 황해도로 옮기게 되었다. 21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알아채고 미리 대비할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어 후문으로 돌입할 계획을 세웠다.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17, 8세 되는 처녀가 나를 보고 놀라 제 오라비에게 일렀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죄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25
 
내가 아홉 살 때1884년 할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날 준영 삼촌이 큰 구경거리를 연출하였다. 삼촌이 술에 취해 장례일을 돌보는 호상인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고ㅛ서, 급기야는 인근 양반들이 큰 생색을 낸답시고 노복을 한 명씩 보내 상여를 메고 가던 것까지 때려서 모두 쫓아버렸다. 결국 준영 삼촌을 결박하여 집에 가두어 놓고, 집안 식구끼리 운구하여 장례를 치르고, 종증조부 주최로 가족회의를 열어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준영 삼촌의 발뒤꿈치를 잘랐다. 홧김에 가족회에서는 그러한 결정을 내렸지만,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촌이 종증조부 사랑에 누워 범같이 울부짖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 근처에도 못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추태는 상놈이 본색이요 행위라 하겠다. 그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보겟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9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선생이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나갔다. 저 앞에서 키 큰 쉰 살 남짓의 노인이 오신다. 아버님이 먼저 인사하신 후, '창암아, 선생께 절하여라'고 말씀하신다. 공손히 절하고 나서 선생을 바라보니 마치 신선이나 하느님처럼 거룩해 보였다. 이리하여 우리집은 사랑에 공부방을 열고 선생님 식사까지 봉양하게 되었다. 31
 
나는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해 아버님은 무척 고민하셨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동북 10리 되는 학명동에 사는 정문재씨는 상민이었지만 지방 굴지의 선비였고 더욱이 큰어머니와 재종 남매간이었다. 그 정씨 집에는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를 지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서당을 열어 아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너무도 만족하여 나는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를 짓는 데는 초보적인 대고퐁십팔구를 익혔고, 공부는 한,당시와 '대학''통감'을 배웠으며, 글자 연습은 분판만 사용하였다. 34
 
이때 임진년 경과를 해주에서 거행한다는 공포가 있자, 정선생은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렸다. 
 
'이번 과거에 창암이를 데리고 가면 좋겠는데, 글씨를 분판에 쓰면 창암이 답안지도 쓸 만하지만, 과거 답안지와 같은 종이에 연습하지 않으면 처음이라 잘 쓸 수 없을 것이네. 그러니 장지에 연습하면 좋겠는데, 노형은 빈한하여 주선할 도리가 없겠지?'
 
'종이는 내가 주선하여 볼 테지만 창암이는 글씨만 쓰면 되겠나?'
'글은 내가 지어줌세'
선생의 이 말에 아버님은 무척 기뻐하시며 장지 다섯 장을 구입하셨다. 나는 기쁘고 감사하여 필사의 교법대로 정성을 다하여 연습하니 하얀 종이가 온통 검게 변하였다. 35
 
동학은 용담 최수운 선생이 천명하였으나 이미 순교하였고, 지금은 그 조카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어 포교중입니다. 동학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 새백성이 되어 장래 참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42
 
나는 곧바로 예물을 가지고 가서 입도하여 동학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버님도 동학에 입도하셨다. 당시 양반들은 동학에 가입하는 자가 드물었던 반면, 내가 상놈인 만큼 상놈들이 동학으로 많이 쏠려 들어왔다. 불과 수개월 만에 나의 연비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당시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인근에 두루 유포되었다. 사람들이 찾아와'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학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듣는 이들은 내가 자기네들에게 아직 조화를 보여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심창수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다. 나의 도력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평안남북도에 까지 퍼져 연비가 수천에 달하였다. 나는 황해도, 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 접주' 였다. 43
 
'먼저 가르쳐 주신 후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신 다음에,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하였다. 이 말에 정씨는 흔쾌히 악수하고 다음의 방책을 말하였다. 
1. 군기정숙; 병졸에게 서로 절하거나 경어 쓰는 것을 폐지할 것.
2. 민심을 얻을 것; 동학당이 총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곡식이나 돈을 빼앗는 강도적 행위를 금지할 것.
3. 현자를 초빙하는 글을 발포하여 경륜 있는 인사를 다수 구할 것.
4. 전군을 구월산 안에 모아 군사 훈련을 실시할 것.
5. 재령, 신천 두 군에 왜놈이 무미 수천 석을 쌓아두었으니, 그것을 몰수하여 패엽사로 옮겨 양식에 충당할 것. 50
 
이용선은 함경도 정평 출신인데 장사하러 황해도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사냥하는 총술이 있고 무식하지만 사람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내가 화포영장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후 아들과 조카가 와서 정평 본향으로 이용선의 주검을 이장할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피살 당시의 정황을 설명 듣고 또 시신을 꺼내다가 내 저고리로 얼굴을 싼 것을 보고서 나에게 나쁜 감정을 품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용선이 죽은 날 밤 나는 부산동 정덕현의 집으로 가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정씨는
'이용선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지만, 형은 지금부터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장부이니, 수일간 홍역의 여독을 풀고 난 뒤 나와 함께 풍진을 피하여 유람이나 떠납시다'
 
'아니오, 이용선의 복수를 해야 합닏'
'복수는 의리에 당연하나 경군과 왜병이 아직 구월산을 소탕하지 못하는 것은 산 밖에 이동엽 부대가 크고, 산속 패엽사의 우리 부대가 험한 산세에 의거하고 또한 정예부대라고 탐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부대의 싸움 소식을 듣고서 경군과 왜병은 즉각 이동엽 부대를 섬멸하고 즉시 패엽사를 점령할 것이니 복수를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54

모르는 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넹..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고선생의 말씀은 내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리던 아이가 어머니 젖을 빨아먹는 것과 같았다. 62

여하간에 찾아가 보기로 상의하고 두 사람이, 때로는 헤어져서 때로는 함께 다니면서 수소문하여 김이언의 비밀 주소를 알아내게 되었다. 강계군 서문인 인풍루 밖으로 80여리 더 가서 압록강을 건너면 그곳 사람들이 보통 황성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부근 10여 리 되는 곳에 삼도구 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김이언의 비밀 주소지였다. 

김이언을 찾아갈 때에는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것보다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따로 가기로 뜻을 모았다. 김이언의 사람됨도 각자 알아보고, 참말 의병을 거사할  뜻이 있는지, 혹시 무슨 술책이나 가지고 백성들을 꾀는 것은 아닌지, 각자 자세히 관찰하자는 의도였다. 며칠 먼저 김형진을 유람객 행색으로 꾸며 출발케 하고, 나는 김이언과 그를ㄹ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탐지할 작적으로 참빗장수의 행색을 하고 내댓새 뒤에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였다. 77

의병을 일으키는 모의에는 우리 두 사람도 참가했다. 나는 비밀히 강계성에 들어가서 화약을 매입하여 등에 지고 압록감을 건너기도 했고, 초산, 위원 등지에 몰래 숨어 들어가 포수를 모집하기도 했다. 

거사한 때는 을미년 11월 초였'다. 압록강은 대부분 빙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삼도궁서 행군하여 얼음 위로 강을 건너 강계성까지 바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위원에서 일을 마치고 책원지인 삼도구로 돌아오던 중 혼자서 얇은 어름을 밟았다가 강 속에 빠진 적이 있었다. 몸음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겨우 머리와 양손만 얼음 우에 남아 있는 형편이 되었다. 죽을힘으로 솟아올라 육지에 도달하여쓰나, 옷이 삽시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하여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익사는 겨우 면하였으나, 동사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시간을 다투던 그때 내 고함 소리를 들은 산골짜기 동네사람이 나와서 자기 집으로 끌고 가 구호하여 준 덕분에 겨우 살 수 있었다. 81

나는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간단하게 한마디로 선언하엿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리라'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을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햇다. 아직 2월 날시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달려들려고 하던 놈이 누구냐?'
방안에 있던 자들 중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자들은 모두 엎드려서 빌기 바빴다. 

'장군님 살려주시오. 나는 그놈이 왜놈인 줄 모르고 보통 싸움으로만 알고 말리려고 나갔던 것입닏'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배 위에서 장군님과 같이 고생하던 장사꾼입니다. 왜놈과 같이 오지도 않았습니다.'96

'얘, 우리집 앞뒤에 전에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와서 수없이 둘러서 잇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수십 명이 쇠채찍과 쇠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면서 물었다. 
'네가 김창수냐?'
'나는 그렇거니와 그대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데 이같이 요란하게 인가에 침입하는가?'
 그들은 그제야 내무부령을 등인한 체포장을 보여주고, 나를 압송해서 해주로 길을 떠났다. 순검과 사령이 모두 30여 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 동여졌다. 몇 사람은 앞뒤에 서서 쇠사슬 끝을 잡았고, 그 나머지는 좌우로 나를 에워싼 채 길을 갔다. 

한 동네에 있는 320여 호 전부가 문중사람들이었으나, 두려워하여 한 사람도 감히 내다보지를 못하였다. 인근 동네의 강씨, 이씨들은 김창수가 동학한 죄로 붙잡혀 가는 줄 알고 수군거렸다. 

이틀 만에 해주옥에 들어갔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다 해주로 오셔서 , 어머님은 밥을 빌어다가 먹여 주시는 옥바라지를 하셨고, 아버님은 전에 당신이 늘 그러셨듯이 넉넉치 못한 사령청, 영리청, 계방 사람들에게 교섭하러 다니시며 나를 풀어주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시세가 이전과 달라졌고, 사건이 하도 중대하여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옥에 갇힌 후 한 달여에 신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옥에서 쓰던 대전목 칼을 목에 걸고 선화당 뜰에 들어갔다. 101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

이처럼 마음을 굳게 먹고,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업혀 들어가면서 살펴보니 도적 신문하는 형구를 삼엄하게 설비해 놓고 있었다. 간수가 나를 업어다가 문 밖에 앉혀 놓자, 당시 경무관 김윤정이 내 모양을 보고 물었다. 

'어찌하여 저 죄수의 형용이 저렇게 되었느냐?'
열병으로 그리 되었다고 간수가 보고하자. 김윤정이 내게 물었다. 
'네가 정신이 있어 묻는 말에 족히 대답할 수 있느냐?'
'정신은 있으나 성대가 말라붙어서 말이 나오지 않으니 물을 한 잔 주면 마시고 말을 하겠소'

그러자 곧 청지기더러 물을 가져다가 마시도록 해주었다. 김윤정은 법정 위에 앉아 순서대로 성명과 주소, 연령을 묻고 사실 심리에 들어갔다.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모월 모일에 일본인이 살해한 일이 있느냐?'
'본인이 그날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소'107

이같이 말하며, [세계역사, 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갖다주며 읽어보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는 격으로, 내 죽을 날이 당할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리라 하고 손에서 책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감리서 직원들이 종종 와서 내가 신서적에 열심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좋아하는 빛을 보였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 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여하튼 대군주께서 친히 저오하하신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경성부 안에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 지 오래였으나, 경성 외의 지역에 장거리 전화가 설치된 것은 인천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 지 3일 째 되는 병신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감리서에서 내려온 주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관리들뿐 아니라 오늘 전 항구의 객주 32명이 긴급회의를 하고 통지문 돌리는 것을 보았는데, 항구 안에 있는 집집마다 몇 사람씩이든지 되는 대로 우각현에 김창수의 교수형을 구경가되, 각 사람이 엽전 한냥씩 준비하여 가지고 오라 하였소.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거기서 모인 돈으로 한 사람의 몸값을 쳐주되, 부족한 액수는 32객주가 담당하고 김창수를 살리자고가지 하였소. 그러나 지금은 천행으로 살았고, 아마 며칠이 못 되어 궐내에서 은명이 계실 터이니 아무 염려 마시고 계시오'

눈서리가 내리다가 갑자기 봄바람이 부는 듯하였다. 밤에 옥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던 동료 죄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서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신골방맹이로 차꼬 등을 두들기며 온갖 노래를 다 부르고, 푸른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춤도 추고 우스운 짓도 하며 하룻밤을 지내는 양이 마치 청의배우들의 연극장과 같았다. 121

한규설도 속으로는 그 말에 경복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가 벌써 나의 사건이 국제문제로 화하게 될까 염려하여, 각 대신들 중에 이 사건으로 폐하께 아뢰는 자만 있으면 별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위험한 지경으로 떨어뜨릴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니 옳은 일인 줄은 알지만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고 하였다. 김경득은 사관에서 분기탱천하여 대관들에게 욕을 퍼붓고 나왔다. 

어떻든지 공식적으로 소장이나 들이자 하여, 제1차 법부에 소지를 올렸다. 그러자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 말의 뜻을 가상하나, 사건이 중대하여 여기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쓴 제지가 내려왔다. 두번 세번 각 관청에 일일이 소장을 올렸으나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고 결말이 나지 않았다. 125

다시 공주 이성방과 갑사에서부터 동행하던 중에 있었던 일을 쓰고자 한다. 이서방은 홀아비로 몇 년 동안 사설 글방의 훈장으로 지냈고, 지금은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도 그리 하기를 권했는데, 나도 얼마간 뜻이 없는 것은 아니었느나 갑작스레 생긴 문제였으므로 섣불리 결정할 수 없어서 이야기만 하였다. 하루 종일 걸어서 마곡사 남쪽 산꼭대기에 오르니,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 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을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151

어느날, 최재학과 학자들은 평양에 가고 나 혼자 있노라니, 대보산 앞 태평시 내촌에 있는 서당의 훈장 한 사람이 학동 수십 명과 시인 몇 명을 동반하여 영사시회를 차리고, 술과 안주를 장만해 가지고 절 안으로 집합하였다. 

시작하자마자 방주승 호출령이 내렸다. 나는 공손히 합장배례하였다. 시객한 사람이 오만방자한 태도로 말했다. 
'너 이 중놈, 선배님들이 오시는데 거행이 어찌 이처럼 태만하단 말이냐?'
'예, 소승이 선배님들 오시는 줄을 알지 못하여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영접을 못하였으니 매우 죄송하올시다'
'이놈, 그뿐이야? 네가 이 절의 방주가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예 서너 달 전에 왓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근처 동네에 계신 양반들을 찾아뵙고 인사들리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야?'
'소승이 임무를 맡은 초기에 절의 업무 정리를 하느라 아직 인근에 계신 양반들을 못 찾아뵈었습니다. 그 죄가 막대하나 용서하심을 바라나이다.'
이른바,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못한다는 격으로 훈장이 한편으로는 나를 꾸짖고 또 한편으로는 그 시객을 타일러 근근히 일이 조용하게 해결되었다. 나는 다시 내게 죄를 묻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날 일을 시키는 대로 공손히 하며 마음 졸이며 지냈다. 161

밤을 지내고 다음날 식후에, 어떤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얼금얼금 마마자국이 있는 나이 서른 남짓이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없이 사랑으로 들어왔다. 내 앞에서 공부하는 윤태를 보고서 대뜸 이렇게 일렀다. '이놈 윤태야. 그새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 작은 아버지 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윤태는 곧 안방에 들어가 진경을 앞에 세우고 나왔다. 
그 사람은 진경과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바로 김주경의 소식부터 물었다.
'아직 형의 소식은 못 들었지?'
'예,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하, 걱정이로군. 유완무의 편지 보았겠지?'
'예, 어제 받았습니다'
그 말을 하고 진경은 내가 앉은 앞의 방을 미닫이로 닫고는 둘이서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동들이  '하늘천 따지'를 '하늘소 따갑'이라고 잘못 읽을 때도 바로 고쳐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윗방에서 이춘백과 진경이 하는 이야기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듣고 있었다. 169

급히 들어가 뵈니 아버님은 매우 반가워하셨지만 병세가 정말 위중하셨다. 약간의 시탕으로는 약효도 내지 못하고, 아버님은 열나흘 동안 내 무릎을 베고 계시다가 경자년 12월9일, 애써 내 손을 잡으시던 힘이 풀리더니 먼 나라로 떠나셨다. 아버니께서 운명하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평생 친구인 유완무나 성태영 등을 만나 그들의 주선으로 연산으로 이사하였다면, 백발이 성성한 아버님이 이웃 마을 강씨나 이씨에게 늘 상놈 대우를 받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겪는 일만은 되셨을 텐데'하고 아쉬워하였다. 이제 아주 먼 길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천고에 남을 한 이 되고 말았다. 18

그 모친이 작은딸로 하여금 이웃 동네에 사는 청년 강성모에게 허혼했었는데, 급기야 준례가 장성한 뒤로는 모친의 명을 순종치 않고 약혼을 부인하니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선교사 한위렴, 군예빈, 등이 권면하여 강성모에게 출가케 하려다 준례의 항의로 실패하였다.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사평동에 가서 준레를 만나본 후 혼약이 성립되게 되자 강성모 측에서 선교사에게 고발했다. 교회에서 나에게 그만두도록 권고하였고 친구 중에서 만류하는 자가 많았다. 그때 신창회는 은율읍에 살고 있었는데, 나는 최준례를 사직도 내 집으로 데려가 굳게 약혼하고 난 뒤, 경성 경신학교에 유학 보냈다. 192

'도적이 집집마다 쳐들어온다는데, 동장은 실태도 관찰하지 않는가?'

나와 문답하던 왜병이 호각을 부니, 외출하였던 놈들이 닭을 한 손에 두세 마리씩 들고 들어왔다. 그놈들이 무슨 말을 하더니, 강탈한 닭을 내버리고 동네 바깥으로 나갔다. '아랫동네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잡아 몇 짐이나 지고 갔다'며 동네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하기에, 나에게 맡기라고 했다.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198

안악으로 이주한 뒤에도 교육사업에 열중하다 휴가에 성묘차 고향에 갔다. 여러 해 만에 고향 땅을 방문하니 어릴 때 공부하고 놀던 옛 추억에 대한 감회가 형언할 수 없었다. 나를 안아주고 사랑해 주던 노인들은 태반이 나 보이지 않고, 내가 어리게 보앗던 어린 아이들은 거의 다 장성하였다.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03

안악에 돌아와 소문을 들으니, 안명근이 안악에 와서 나를 여러 차례 찾았으나, 나의 경성행으로 서로 어긋나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밤중에 명근이 양산학교로 찾아왔다. 그는 자기가 해서의 각 군 부호를 다수 만나본 결과 모두 독립운동 자금을 허락하고도 신속히 추렴에 응하지 않아, 안악읍 몇몇 부호를 총기로 위협하여 타지방에 영향을 미치게 할 목적이니, 응원 지도를 주기를 청했다. 217

내가 안악에 이사했을 때 역시 처형과 장모가 찾아왔는데, 처형은 신창희와 부부 관계를 끝냈다고 한다. 나와 어머님은 한때도 집안에 용납할 생각이 없었으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정은 심히 불안에 빠졌다. 

나는 아내에게 비밀히 부탁하고, 장모에게 '큰 딸을 데리고 나가주지 못할 터이면 작은딸까지 데리고 나가 달라'고 말했다. 말뜻을 깨닫지 못한 장모는 좋다 하고, 모녀 세 사람이 집을 떠나 경성으로 출발하였다. 

내가 얼마 후에 경성에 가서 동정을 살펴보니, 아내는 어머니와 형을 떠나 어느 학교에 투신할 계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은밀히 약간의 여비를 주고 내려와 재령에 있던 선교사 군예빈에게 말을 하니, 준례는 당분간 데려다가 자기 집에 있게 하고 서서히 데려가라 하였다. 235강

'인간은 모래를 먹고 살 수 없는데 내가 먹는 한 그릇 밥에서 골라낸 모래가 밥의 분량만 못하지 않으니, 이것을 먹고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징역이나 중하게 지고 죽는 것이 영광이다. 1년도 종신이요, 종신도 종신이 아닌가? 

전옥은 얼굴색이 주홍같이 되어서 식당 간수를 불러 꾸짖고 밥 짓는 데에 극히 주의하여 모래가 없도록 개량했다. 241

그러면 나는 하루 한 끼 혹 두 끼 사식을 먹으니, 밥이 부족하여 애쓰는 수인들을 먹이고도 나는 한 끼라도 자양분 있는 음식을 먹는 셈이다. 건강에는 큰 결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해서, 매번 내 밥은 곀에서 먹는 수인을 주어 먹게했다. 처음에 먹기를 시작할 때, 곁에 앉은 수인의 옆구리를 꾹 찌르면 그 사람은 알아차리고 빨리 자기 분량을 먹은 뒤 내 앞에다가 빈 그릇을 놓는다. 내 밥그릇을 그 사람에게 주면, 간수놈 보기에 나는 밥을 빨리 먹고 앉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수인들의 품행이, 열 번 내 밥을 먹는다면 먹을 때는 죽어도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고 치사를 하던 자라도, 아침밥을 얻어벅고는 저녁밥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면, 그 즉시로 욕설을 퍼부었다. " 저놈이 네 의붓애비냐? 이야, 효자문 세우겠다." 그러면 밥을 얻어먹는 자가 또한 나를 옹호하는 말로 맞대고 욕설을 하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어 함께 벌을 서는 까닭에, 선을 행함이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수인들이 내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수인중의 정수분자인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은 모두 일어에 능통하여 왜놈들에게 큰 신임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한여 극히 존경하는 것을 동료 수인들이 보았던 것디아. 수인들을 임시 신문할 때 그들을 통역으로 사용했으니, 성행이 사나운 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려다니는 터에 통역들에게 밉보이고서는 자기에게 직접 해가 돌아올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내가 날마다 밥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보니 후일의 소망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이유이다. 249

종일 힘든 일을 하던 수인들이므로 그같이 끼어서도 잠이 든다. 처음 누울때는 남쪽 북쪽으로 어긋나게 모로 누워 선잠을 자다, 가슴이 답답하여 잠이깨어 방향 전환하자는 의사가 일치하면, 남쪽으로 누운 자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누운 자는 남쪽으로 일제히 돌아눕는다. 그것은 고통을 바꾸고자 함이다. 입과 코를 마주 대고 호흡할 수는 없지만, 잠이 깊이 들 때 보면 서로 키스하고 자는 자가 많고, 약한 사람은 솟구쳐 올라 사람 위에서 잠을 자가 밑에 든 자에게 몰리어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날을 밝히는 것이 옥중의 하룻밤이다.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우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이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252

조직 방법에 대하여는 근본 비밀결사인 만큼 엄밀하고 기계적이므로 설명을 충분히 해드리기 어려우나, 노형이 연구하여 보아도 단서를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부터 말씀하지요.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각 도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뭎이 침착할 것,
이상 몇 가지를 갖춘 자를 은밀히 보고하면, 설의 지도부에서 보고 올린 유사도 모르게 다시 비밀조사를 하여, 조사가 서로 부합될 때 그 설 책임유사에게 맡겨 합격자를 도적놈으로 만듭니다. 

합격자는 물론 자기에게 대하여 보고를 하거나 조사하는 것을 완전히 모르게 합니다. 책임 유사가 노사장의 분부를 받들어 자격자에게 착수하는 방법은, 먼저 그 자격자게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미색으로, 술을 즐겨 마시는 자에게는 술로, 재물을 좋아하는 자는 재물로 극진히 정을 베풀어 환심을 사서 친형제 이상으로 정의가 밀착케 된 후 훈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261

출역중이던 어느날 졸지에 역사를 중지하고 수인을 한 곳에 회집케 하더니, 메이지의 사망을 선언한 뒤 이른바 대사면을 반포하였다. 먼저 보안 2년은 면형이 되니, 보안율로만 감옥 살던 동지들은 그날로 출옥하였다. 강도율에는, 명근 형에게는 감형도 되지 않았으나, 15년 역에는 나 혼자만 8년을 감해 7년으로 되고, 김홍량 이외 몇 사람은 대부분 7년을 감해 8년으로 되고, 10년, 7년, 5년들도 차례로 감형되었다. 

불과 몇 달 뒤에 메이지의 처가 또한 사망해서 잔기의 3분의 1을 감하니, 5년여의 가벼운 형이 되었다. 그때는 명근 형도 종신형에서 20년으로 감하였으나, 명근 형은 형을 더하여 죽여줄지언정 감형은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왜놈 말은 "죄수에게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이니 감형을 받고 안 받음도 수인의 자유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때 공덕리에 경성감옥을 준공한 후이므로, 명근 형은 그리로 이감되어 얼굴만이라도 다시 보지 못했다. 266

"이미 준비가 완성되었으니 함께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하는 청년들이 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선창합니까?"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이닌,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안악읍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평내 소작인들을 지휘하여 농기구를 가지고 일제히 모이라 하고, 지팡이를 짚고 제방에 올라 제방 수리에 몰두하였다. 내 집을 감시하던 헌병놈들이 내 동정을 보아야 농사 준비만 하기 때문인지, 정오가되어 유천으로 올라가버렷다. 

나는 점심시간에 소작인들에게 이릉ㄹ 잘 끝마치도록 부탁한 후 잠시 "이웃마을에 다녀오마"하고 안악읍에 도착하니, 김용진 군이 말했다. "홍량더러 상해에 가라고 했더니 10만 원을 주어야 가지 그렇지 못하면 떠나지 못한다고 하니, 선생부터 가십시오. 홍량은 추후로 갈 셈 치구요." 283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옛날에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다지만 나는 [우궁문]을 짓고 싶으나 문장이 아니므로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으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고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기미년(1919, 44세) 2우러 26일이 어머님 환갑이었으므로, 약간의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친구들이나 모으고 축하연이나 하자고 아내와 의논을 하고 진행하려는데, 이 눈치를 아시고 어머님은 극히 말리셨다. 

"네가 1년 추수만 더 지내도 좀 생활이 나을 터이니, 한다면 네 친구들을다 청하여 하루 놀아야 하지 않느냐? 네가 곤란한 중에서 무엇을 준비한다면 도리어 내 마음이 불안하니 다음으로 미루라."하시므로 이루지 못했다. 289

나는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보고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벼슬을 시켜주지 않는 반감으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여, 도산은 의아해하고 염려하는 빛을 보였다. 나는 "일찍이 본국에서 교육사업을 할 때 어느 곳에서 순사 시험과목을 보고 집에 가서 혼자 시험을 쳐서 합격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또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 할 때 후일 만일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름자는 '구'로 별호는 '백범'으로 고쳤다"이런 예를 들면서 나의 진정한 평소 소원을 말하였다. 이에 도산은 쾌히 승낙을 하며 자기가 미국에서 백악관을 지키는 관원이 있는 것을 보았다며, "백범 같은 이가 우리 정부청사를 수호하는 것이 적당하니 내일 국무회의에 제출하겠다"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도산은 뜻밖에도 나에게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며 취임하여 근무할 것을 권하였다. "순사의 자격에도 못 미치는 내가 경무국장의 직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302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시무할 때는 중국 인사는 물론이고, 눈 푸르고 코 큰 영.불.미 친구들도 더러 임시정부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제 임시정부에 서양인이라고는 공무국의 불란서 경찰이 왜놈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세금 독촉으로 오는 이 외에는 없었다. 상해에서 서양사람들 틈속에 끼여 살지만, 서양인 친구라곤 단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적어도 몇백 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 그전의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어떠한 곤란 중이라도 14년 동안 연중 행사로 실행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 

이 무렵 내가 연구,실행했던 사무가 하나 있으니, 곧 편지정책이다. 당시 사방을 돌아보아도 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19

1931년 12월 중순경 나는 이봉창을 비밀리에 불란서 조계 중흥여관으로 초청하여 하룻밤 같이 자면서 일본행에 대한 제반 문제를 상의하였다.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하였다. 하나는 왕웅을 시켜 병공창에서 구입하였고, 다른 하나는 김현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에게서 구입하였고, 다른 하나는 김현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에게서 구입하여 몰래 감추어 두게 하였다. 하나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자살이 실패하여 체포될 때를 대비하여, 신문에 응할 문구까지 지시하였다. 

다음날, 나는 품속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내주며 이 돈으로 일본행 준비를 다 해놓고 다시 오라고 작별하였다. 이틀 후 중흥여관에 다시 와서 마지막 밤을 같이 잘 때, 이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 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상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326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도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종전에 공장 구경을 다니며 윤군을 보고, 그가 진실한 청년 노동자로 학식은 있으나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거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자신의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룰 의로운 대장부였다. 나는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전쟁중에 연구.실행코자 한 일이 있었으나 준비 부족으로 실패하였소. 그런데 지금 신물을 보니 왜놈이 전쟁에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의 대목적을 이날에 달성해 봄이 어떠하오?"  331

나는 솔직한 답변을 할 수 없어서 두리뭉수리로 대답하였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부 맡기는 것인즉, 윤군 마음대로 어디서 무엇인가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엿다. 336

문 밖으로 나가면서 보니 일본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란서인, 러시아인, 중국인 등 각국의 정탐꾼이 문 앞과 주위를 수풀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 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란서 조계지를 지나 중국지역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고, 나와 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이곳은 남파 박찬익 형이 은주부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마련한 곳으로 엄항섭 군의 가족을 비롯하여 김의한 일가와 석오 선생이 벌써 며칠 전에 이사해 와 있었다.

상해에서 피치 부인이 니게 보고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피치 부인은 아래층에서 유리창으로 문 밖을 살펴보다고, 동저고리 차림의 낯선 중국인 노동자가 자기네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수상하게 여겨 따라가서, "누구냐?"고 질문하였다. 
"나는 양복점 사람인데 댁에 양복 지을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자 왔습니다."
""그대가 내 주방 하인에게 양복 짓겠는지 묻는다고? 수상하다."
그제야 그 사람은 주머니 속에서 불란서 경찰서의 청탐꾼 증명을 내보였다. 
이에 화가 난 부인이, "외국인 집에 함부로 침입하느냐?"고 호통을 치니, "미안합니다."하고 가더라는 것이다. 343

주씨가 건축한 산꼭대기의 길가 정자에서 휴식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몇백 보를 가니 산충턱에 양옥 한 채가 아담하게 보였다. 들어가니 지키는 고용인 일가족들이 나와 저부인을 공경하며 맞이하였다. 저부인은 고용인에게 자기 친정에서 가지고 온 육류와 과일, 채소를 건네며,
"저 양반의 식성은 이러이러하니 주의하여 모시고, 등산하면 하루에 3각을 받고 기타는 얼마를 받고, 응과정을 가면 4각만 받아라."고 지시하고, 그날로 작별을 고하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 산당은 원래 피서하던 곳이었지만, 저부인 친정 숙부를 매장한 후에는 묘소 제청이  되었다. 나는 날마다 묘지기를 데리고 산과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는 데 무한한 취미가 생겼다. 본국을 떠나 상해에서 생활한 14년간, 다른 사람들이 남경, 소중, 항주의 산천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천이 극히 그립던 차에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비할 데 없이 유쾌하였다. 348

"그렇습니다. 일본의 마수가 시시각각 중국 대륙으로 침입하니, 좌우를 물리쳐 주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좋소."
진과부, 박남파가 문 밖으로 나간 후, 장씨가 붓과 벼루를 친히 가져다 주었다. 내가,
"선생이 백만 원의 돈을 허락하면 2년 이내 일본,조선,만주 세 방면에서 대폭동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교량을 파괴할 터이니, 선생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고 묻자, 장씨는 붓을 들어 쓰기를 
"서면으로 상세히 계획을 작성하여 보고해 주시오."
하게에 '그러겠다'하고 물러나왔다. 

다음날 간략한 계획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그랬더니 진과부 씨가 나를 초청하여 자기 별장에서 연회를 베풀고 장씨를 대신하여,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 말하게에 나는,
"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진실로 바라는 바요. 문제는 장소와 재력이오."라 대답했다. 356

어머님의 생활문제를 빠뜨렸으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기록한다. 나는 상해에서 민국 6년(1924) 1월 1일 상처하였다. 처는 신을 낳은 후 몸이 채 튼츤치 못하였을 때 영경방 10호 2층에서 어머님께 세숫물을 버려 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실족하여 층계에서 굴렀다. 그후 늑막염이 폐병이 되어서 홍구 서양인이 경영하는 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내가 그곳에 못 가는 까닭에 보륭의원에서 최후 작별을 하였다. 김의한 부처가 방문하여 처의 임종을 봐주었고, 나는 그들이 돌아와 서 보고하는 것만 들었다. 미주에서 상해에 온 유세관이 입원 때와 장례식 때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어머님은 세 살인 신을 우유로 길렀는데, 밤에 잘 때는 어머님의 빈 젖을 물려 재웠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 영업자들을 제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363

엄항섭 군의 집에서 휴양중이었는데, 하루는 홀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므로, 다시 상아위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X광선으로 심장 곁에 들어 있던 탄환을 검사하니, 위치가 변동되어 오른쪽 갈비뼈 옆으로 옮겨가 있다는 것이었다. 서양 외과 주임은,
"본시 심장 곁에 있던 탄환이 대혈관을 통과하여 우측 갈비뼈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불편하면 수술도 쉬우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른쪽 다리의 마비는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까닭이나 점차 소혈관들이 확대됨에 따라 해소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372

나는 백번 생각해 보아도 이 편지가 오게 된 내력을 알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이영근의 처제인 것은 의심할 바 없고, 일찍이 본국에서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인 듯했다. 그러나 죄소의 서신이 어디서 왔는가? 본국에서 내 이름자는 들어서 알고 있었을 터이나, 지금 내가 장사 상아의원에서 입원,치료하는 것을 수백 리 떨어지 상덕수용소에서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냈으며, 우표도 없고 날짜 소인도 없는 순전히 인편 서신인즉, 그렇다면 아까 방문 바께에서 그림자만 어른거리고 없어진 여자는 천사였던가?

하여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어, 퇴원 후 한구 장위원장에게 청구하여 포로 조사의 특권을 얻은 뒤 노태준, 송면수 두 사람을 상덕에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상덕 포로수용소에는 한인 포로가 30여 명이고 일본인은 수백 명인데, 한방에 같이 섞여 있는 한인과 일인 포로들 사이에서도 한인은 일인의 지휘를 받았다. 운동ㅊ조에도 일인이 명령.지도하고, 일체 사물에 대해서도 일인의 권리가 더 많았다. 그런데 신봉빈은 극단으로 일인의 지휘와 간섭을 받지 않고 오히려 유창한 일어로 일인에  대해 극렬하게 항쟁을 전개하였다. 385

다음날 미국 군관들의 요청으로 비밀훈련을 받은 학생들의 실전실험을 해볼 목적으로 두곡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40리쯤 떨어진, 고대 한시에 유명한 종남산 고찰에 있는 비밀훈련소로 자동차를 몰았다. 산입구까지 가서 차를 버리고  다시 보행으로 5리 가량 들어가 당도하니, 시간이 마침 정오라서 미국 군대식으로 오찬을 먹었다. 

맨 먼저 냉수 여러 통을 뜰에 가져다 놓고 군대용 국과 물그릇으로 병용하는 철기를 1인당 1개씩 나누어 준 후, 종이갑도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풀어헤쳐 보니 과자 비슷한 것이 5개씩 들어 있고, 여러 가지 통조림 까통, 연초 4개, 그리고 휴지까지 들어 있었다. 또한 종이로 싼 가루 한 봉지를 냉수에 섞어보니 휼륭한 고깃국이 되어 점심으로 충분하였다. 미국 군대의 평상시 전투식량이라 간단한 서양요리였으나 누구든 부족한 사람은 없을 걳이다. 군대식사 한 가지만 왜병과 비교해 보더라도 왜적이 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하겠다. 397

중경에 돌아와 보니 중국 사회는 벌써 전쟁중의 긴장된 분위기가 돌변하여 각계 각층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우리 한인 사회는 앞으로 어찌해야할지 방향을 찾지 못한 형편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그 사이 의정원을 개회하고 "국무원이 총사직을 한다"느니,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본국에 돌아가자"느니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다 "주석이 중경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있으니 주석의 의견을 청취한 후 결정하기로 하자"고 하여, 의정원은 3일간 정화중이었다. 

나는 개회 벽두에 출석하여, "임시정부 해산 운운은 천만부당하고 총사직도 불가하다. 우리가 장래에 서울에 들어가 전체 국민에게 정부를 도로 바치고 난 뒤 국무위원이 총사직하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때 [14개조 원칙]을 결정하였다. 입국하려 할 때에 미국 측은 미국 군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이정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입국 문제로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결국은 개인 자경으로 입국하리고 결정되었다. 400

그날의 참사는 비단 폭탄에 맞아 죽은 것뿐 아니라 방공호에서 질식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시체 모양을 보면 남녀간에 의복이 성한 것은 없고, 신체에 상처가 많은 것은 방공호 속에서 질식하여 최후발악의 몸부림이 벌어진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면 격투가 일어나도록 방공호 속에서 나오지 못한 원인은 어디 있는가? 그럿은 지휘하던 경관이 방공호 문을 밖으로 채운 채 자기만 급히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그 과실로 인하여 경비사령 휴치 상장은 크게 문책당하였다. 

산같이 모아놓은 시체를 운반하는 것을 보았는데, 화물차에 마치 물건처럼 실었다. 화물차가 달리다 흔들릴 때 시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선 시체는 다시 싣기 귀찮아서 화물차 뒤에 목을 달아매고 달리니, 시체가 땅에 끌리며 달려가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그런데 그많은 시체 중 대다수는 밀매음하던 여자의 시체이니, 그 원인은 본래 교장동 부근이 밀매음촌이었던 까닭이다. 405

전술한 바를 대강 다시 음미하게 된다 22세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맏았다가 23세 때 탈옥.도주하였고, 41세 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감옥으로 이감하였다. 17년 전에 파괴하고 탈주하였던 그 감옥을 다시 철망에 얽히어 들어가니 말없는 감옥도 나를 아는 듯, 내가 있던 자리는 예날 그대로 나를 맞아주었다. 그러나 17년 전 김창수는 김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세월 또한 오래 흐른 관계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 지난 일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는 인천 순시는 대환영리에 마쳤다. 411

지금, 사람과 땅이 생소한 서촉 화상산 남쪽 자락에 손자와 같이 누워 계신것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영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오셔서 이몸과 같이 환영을 받으신다면 다소 위안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내 개인의 감상일 뿐이다. 연안의 동포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총출동하여, 연안에서 제일 큰 학교 운동장에 빽빽하게 운집 도열한 성대한 환영이 있었고, 아울러 강연을 마쳤다. 

그 길로 청단에 도착하니, 역시 환영하는 동포돌의 열정은 도처에 일반이나, 소위 38선 관계로 내가 태어난 곳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가 보지는 못하였다. 돌아서 서울을 향하게 되니 그때의 감개무량한 회포란 필설로 다 할 수가 없다.  421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우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만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만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 는 정치상.경제상.사회상으로 불평등.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 민족과 민족의 시기.알력.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425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법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등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곳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432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다.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년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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