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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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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06시 10분 등록

. 저자 소개


백범 김구의 일생을 영웅신화의 서사구조로 정리해 보았다.


1)
탄생 및 성장기

김구1876 8월 29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 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경순왕 계열인 그의 선조들은 고려 김자점의 獄 이후로 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해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이 되었다.

이유없이 자신을 때린 아이들에게 복수하고자 부엌칼을 들고 덤빈 일화에서 드러나듯 김구의 기질은 정의감이 넘치고 강단이 있었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상민에 대한 천대에 민감했고 자의식이 강했던 김구는 일찍이 배움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지만 과거시험 당시 매관매직의 타락상을 목도하고 입신양명의 꿈을 접는다.

2) 開眼 및 떠남

김구 18세에 동학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어 동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입교 1년이 안돼 수천 명의 신도를 관리하는 아기 접주가 되어 황해도를 거점으로 동학운동에 뛰어들었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하였다가 같은 동학군 이동엽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피신하는 몸이 되었다. 이때 안태훈(안중근의 부친)과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특히 고능선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들의 야욕에 눈뜨게 되고, 청나라와의 화친을 통해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그의 권유에 따라 청나라행을 결심한다.

1896년 청나라로 행하던 그는 단발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청나라로 가던 발길을 돌려 귀향길에 오른다. 귀향 중 황해도 치아포에서의 일본군 중위와의 조우는 독립운동가로서 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김구는 치아포구 여관방에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을미사변의 공범 미우라 고로로 오해하고 그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3) 고난의 시기

김구는 이로 인해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그는 사형 집행 하루를 남기고 고종 황제의 형 집행 보류지시로 살아 남았다. 이후 3년간 『대학』 등 동양 고전과 세계역사, 세계지리 등 개화 사상과 신학문을 접한 그는 역사와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정립한다. 1898년 동료죄수들과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 생활을 영위하다가 1899년 환속했다.

4) 귀환

① 광복 이전

교육의 힘과 그 필요성을 절감한 김구는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를 설립했고 공립학교 교원으로도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육 없이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교육을 통한 계몽활동에 매진했다.

1919 31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그 해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의 천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었다. 이후 국무령ㆍ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1928년 에는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0년대 초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등 으로 중국내 입지가 약화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 등과 암살 ㆍ파괴 공작을 실행했다.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미국과 국내 진입작전을 모의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② 광복 이후

김성수, 조소앙 등과 1945년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국이 배제된 독자 정부 수립과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승만의 단선ㆍ 단정에 반대해 남북한 연립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49 6 26,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에 암살당했다.

 

.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교감 원칙

1.     현대성의 원칙

원본이 영인되어 있고 직해본도 나와 있는 사정을 고려하여, 또 청년들이 많이 읽어주길 원했던 백범의 뜻을 존중하여, 본문에서는 현대성의 원칙을 견지하였다. 즉 청소년과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국한문 혼용의 어렵고 난삽한 고문을 쉬운 현대문으로 교열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잘못된 교열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물쩍 넘긴 용어ㆍ개념 ㆍ경구ㆍ문장의  적확한 뜻을 찾아 번역하였다.

 

2.     순수성의 원칙

그간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순수성이 많이 훼손된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 책에서는 원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 즉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현대성의 원칙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백범의 호흡이 긴 문체는 살리고, 글자 한자 한자를 원본과 철저하게 대조하였으며, 의역과 수정이 불가피한 경우 원문을 본문이나 각주에 밝혔다. 또한 해방 후 백범이 구술한 추가본을 최초로 발굴하여 이에 의거하였다.

 

3.     비평성의 원칙

『백범일지』는 별다른 자료 없이 기록한 수고(手稿)이기 때문에 백범 특유의 훈훈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날짜와 인명의 혼란, 문장의 중복과 선후가 뒤바뀐 것 등 사실관계의 착오가 없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원본의 한계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서ㆍ회고록 등 여러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원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비평하였다.

 

4.     현장성의 원칙

『백범일지』의 기록 자체도 매우 생생하지만, 여러 가지 시각 매체를 활용하면 『백범일지』의 현장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본문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사진ㆍ문서ㆍ지도 등의 자료를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5.     보완성의 원칙

이 책에서는 『백범일지』의 효용가치를 높이고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몇 가지를 추가하였다. 원자료의 추적을 통해 정리된 새로운 내용을 기초로 하여 『백범 연보』를 전면적으로 교정하였고, 원본에 누락되어 있는 「대가족 명부」는 세 가지 방증자료를 통해 가능한 수준에서 복원하였으며, 「인물 색인」 또한 전면적으로 정비하였다. 마지막으로 「백범일지의 판본에 대한 해제」와, 교감에 활용된 「참고문헌」을 첨부하였다.

 

백범 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5~6

그리고 하편은 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것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 때 내 나이 벌서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다. 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릉ㄹ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태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14

 

나는 내가 못날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15

 

백범일지(상권)

 

  신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그간 내가 겪어온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였으면 부자간에 서로 따뜻한 사랑의 대화로 족할 것이나,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 아이니, 너희들이 나이와 지식이 더할수록 나의 정신과 기력은 쇠퇴할 따름이다. 또한 나는 이미 왜구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사선(死線)에 선 몸이 아니냐.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된 사실들이라 잊어버린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부러 지어낸 것은 전혀 없으니 믿어주기 바랍니다. 20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이다. 21

우리 조상의 텃골로 들어오던 시기는 조선시대의 전성기로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엄밀하였던 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하여 김자점의 족속임을 숨기고 일부러 상놈 노릇을 하였다. 양반의 문화생활을 접어두고 농사 짓고 임야를 개척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완전히 판 박힌 상놈이 되었다.

 

우리 조상은 텃골 북쪽 고개 넘어 왼쪽에 있는 군역전을 경작한 이후 완전히 ()를 찬 상놈이 되었다. 군역전을 경작하다 완전 상놈이 된 것은 문을 존중하고 무를 천하게 여기는 조선시대의 나쁜 풍습 때문이었다. 22

 

우리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문사(문사)도 없진 않았으나 높이 떨친 경우는 찾아볼 수 없고 대체로 불평분자가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짜 어사질로 체포되어 해주 관아에 구속되었다가, 어느 서울 양반의 청탁 편지로 겨우 형벌을 면하였다고 한다. 23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    난산의 개구쟁이

나는 병자년(1876), 할머니의 기일인 7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산통이 있은 지 근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고 산모의 생명은 위험하였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의술 치료와 미신 처방을 다 하였지만 효력이 없었다. 상황이 자못 황급해지자 집안 어른들은 아버님께 소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 용마루로 올라가 소 울음소리를 내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선뜻 따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다시 호통을 쳐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난 후에야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침으로 따로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24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사랑 앞문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알아채고 미리 대비할까 봐 칼로 울타리를 뜯어 후문으로 돌입할 계획을 세웠다. 울타리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마침 안마당에 있던 17,18세 되는 처녀가 나를 보고 놀라 제 오라비에게 일렀다. 나는 다시 그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빼앗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는 칼을 잃어버린 죄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내내 시치미를 떼었다. 25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ㆍ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사람을 구타하면 맞은 자를 때린 자의 집에 떠메어다가 눕혀두고 생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이 그 시대 지방 관습이었다. 때문에 우리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거의 죽게 된 사람’ ’전신이 피투성이 된 사람이 사랑방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다. 아버님이 사람을 잘 때리셨던 것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고 순전히 불평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는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27

 

인근 양반들의 회유책이었는지 아버님은 도존위(都尊位)에 천거되셨다.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公錢)을 거두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결국 아버님은 3년이 못 되어 공금유용〔公金欠逋〕으로 도존위에서 면직되셨다.

 

어버님의 어렸을 때 별명은 효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 할머니 입에 피를 넣어드려 사흘이나 더 사시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날 영원히 돌아가셨다. 28

 

큰아버지와 셋째 삼촌은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농군이셨으나, 아버님과 넷째 준영 삼촌은 특이하셨다. 준영 삼촌은 술을 많이 마시고 문자는 국문(한글)을 겨울 내내 하고 하더니 끝내 못 배우고 말더라.

 

그 때 어머님은 나에게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다. 29

 

3)    궁핍한 배움길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살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다. 그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치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30

 

동무들 중에서 나보다 수준이 높은 자도 있었지만, 배운 것을 외우는 시험에서는 늘 내가 최우등이었다. 31

 

그러나 『통감』(通鑑) 『사략』(史略)을 읽을 때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던 진승(陳勝)의 말,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유방(劉邦)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얻어먹었다는 한신(韓信)의 사적 등을 볼 때 나도 모르게 양어깨가 들썩거렸다. 33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나는 이처럼 과거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강가ㆍ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ㆍ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에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 두겠습니다.” 38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상서』중에서)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39

 

2)    동학의 세계로

나는 황해도ㆍ평안도의 동학당 중 나이 어린 자로 가장 많은 연비를 가졌기 때문에 별명이 아기 접주(接主)’였다. 43

 

5) 스승 고능선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지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2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ㆍ실행ㆍ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금언)을 들려주셨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게 보여주기 위해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들쳐 보이곤 했는데, 그것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나를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63

 

3.      질풍노도의 청년기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진사, 오늘부터 끊네.”

고선생이 절교를 선언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나의 심사도 매우 저어하여졌다. 이 일이 인격으로 된 것이었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 오랑캐가 하는 서학(西學)을 한다는 말이 매우 괴이하였다. 88~89

 

그랬다가 갑오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당시는 일반 인심에 대부분의 아들딸 가진 사람들이 자식 혼인시키는 것을 유일한 의무로 알던 때였다. 당시 나는 동학 접주가 되어 동분서주하던 판이었는데, 하루는 집에 들어가니 술과 떡을 마련해 놓고 혼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사코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부모님도 할 수 없다고 여기셨던지, 김치경에게 자식이 원하지 않으니 혼약을 해제할 것을 상의하시고, 그 집 딸도 다른 자리에 출가시키라고 하셨다. 김치경도 무방한 일이라 생각했었다. 89~90

 

4) 복수 의거, 치아포 사건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得樹攀枝無足奇)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懸崖撤手丈夫兒)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94

 

7) 사형수의 옥중생활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ㆍ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ㆍ경제ㆍ도덕ㆍ교육ㆍ산업이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시대 과제 〔時務〕를 아는 영웅의 할 일인 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5

 

아이구, 이제 김창수는 살았소! 아이구, 우리 감리 영감과 감리서 전직원과 각 청사 직원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밥 한 술 먹지 못하고 창수를 어찌 차마 우리 손으로 죽인단 말이냐 하고 서로 말없이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탄하였소. 그랬더니 지금 대군주(고종) 폐하께옵서 집무실〔大廳〕에서 전화로 감리 영감을 부러 계시옵고, 감리 영감은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칙(親勅)을 받잡고 밤중에라도 감옥에 내려가 창수에게 알려주라는 분부를 내리셨소. 오늘 하루 얼마나 상심하셨소?” 120

 

이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당신 아들을 이인(異人)이라 생각하게 되셨다. 배를 타고 강화갑곶(각구지목)을 지나오면서 강물에 같이 빠져 죽자고 하셨을 때 내가 결코 죽지 않을 거라 했던 일을 기억하시고, “내 아들은 미리 자기가 죽지 않을 줄을 알았다.”고 확신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님뿐 아니라 내외분이 다 그런 신념을 갖게 되셨다. 122

 

4. 방랑과 모색

3) 출세간(出世間)의 길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地獄苦〕을 받는다고 하였다.

전날 밤 나를 찾아와 자기 상좌가 되어 달라고 할 때에는 지극히 공손하던 하은당부터 , 원종아를 기탄없이 부르고, “생긴 것이 미련스러워서 고명한 중은 되지 못하겠다.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나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한다. 154~155

 

산 아래 신흥동에 있는 푸줏간을 영천암의 용달소로 하여, 나는 매일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 올랐다. 승복을 입은 채 드러내 놓고 고기를 먹었고, 염불을 하는 대신 시를 외웠다. 종종 최재학과 함께 평양성에 나가 사숭재 황경환 등 시객들과 율을 짓고, 밤에는 대동문 옆에 가서 면을 먹었다. 처음에는 주점 주인이 주는 대로 소면을 먹다가 나중에는 육면을 그대로 먹었다. 불가에서 소위 말하는,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왼다는 구절과 가깝게 되었으니, 평양성에서는 시쳇말로 걸시승(乞詩僧)이라 하였다. 161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儒傳千歲佛千歲)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我亦一般君一般) 162

 

5) 동지를 찾아서

그리하여 각자 관찰한 바와 시험한 것을 모두 모아서 어떤 사업에 적다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하여, 벼슬살이에 적당한 자는 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ㆍ농으로 인도하여 종사케 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규정이오. 연하(蓮下)는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얕고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하되,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전적으로 맡아 어느 정도 수준을 이루도록 할 것이오. 174

 

6) 스승과의 논쟁

나는 그 사이에 깨달은 세계 사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또 선생님께서 평소에 교훈하시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주의가 정당한 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먼저 그 나라 사람들의 경국대강(經國大綱)을 보고 오랑캐의 행실이 있으면 오랑캐로, 사람의 행실이 있으면 사람으로 대우함을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저 대양 건너에 사는 각 나라에서는 제법 국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문명도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공자ㆍ맹자의 그림자도 보지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달된 법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계속 오랑캐, 오랑캐하면서 배척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만하고 생각됩니다.” 178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그래서 나는 허벅지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작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181

 

그 할머니는 웃으면서 물으셨다.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내 대답,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3

 

예수를 신봉하던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85~186

 

정창극에게 여비 계싼을 하여 130여 냥 남은 금액을 넘겨주었다. 정창극은 여비사용대장에서 짚신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떡ㆍ마대ㆍ밥값을 합해 총 70을 보고 경탄하였다. 그러고는 우리나라의 관리가 다 김선생 같으면 백성의 고통이 없겠다느니, “박가나 신가가 갔다 왔으면 적어도 몇 백냥은 더 청구하였으리라하였다. 190

 

준례는 당시 18세로, 뜻에 맞는 남자를 골라 자유결혼을 원하고 있었는데, 양성칙이 나에게 의향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당시에 조혼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를 절감하던 터여서 준례에게 지극한 동정심이 생겼다. 192

 

4.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196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교육은 단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 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천주학이나 하라는 소린 줄 알고, 자기 가문 중에도 예수교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며 대화를 기피하였다. 204

 

5) 신민회와 안악 사건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한 당시의 인심은 매우 흉흉하였다. 원로대신과 내외 관리들 중 자살하는 자도 많았고 교육계의 배일사상이 극도에 달했다. 오직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농민들 중에는 합병이 무엇인지,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자도 많았다. 215

 

나는 간곡히 만류하였다. 장래 대규모의 전쟁을 하려면 인재 양성이 없고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일시적인 격발로는 5일은 커녕 3일도 기약하기 어려우니, 분기를 참고 다수 청년을 북쪽지대로 데려가 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라고 했다. 매산 역시 뜻은 수긍하나, 자기가 요량하는 바와 다른 점을 발견하고는 좀 만족하지 못한 의사를 가지고 작별하였다. 217

 

6) 세번째 투옥과 고문

나의 국모보수 사건(국모보수사건)은 비밀이 아니고 세상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왜놈들이 각 경찰기관에 주의인물로 붉은 줄을 긋고 나의 온갖 행동을 조사했으니, 해주검사국에 비치한 『김구』라는 책자에도 반드시 쓰치다를 죽인 사실이 기재되었으리라 생각했고, 이번에 총감부 경시 한 명이 안악에 출장 조사까지 하였으니, 그 사실이 발각된다면 내 일생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였다. 와타나베 놈이 썩 들어서면서 내 가슴에 X광선을 비췄으니 과거를 다 알고 있노라고 할 때, ‘인천 사건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놈의 X광선을 시험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국가는 망하였으나 인민은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평소 우리 한인의 정탐을 몹시 미워해서 여지없이 공격하곤 했는데, 나에게 공격을 받은 정탐배까지도 자기가 잘 아는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밀고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나의 제자로서 형사가 된 김흥식 , 같은 학교 직원으로 있던 원인상 등부터 밀고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고 보면 각처 한인 형사와 고등정탐까지도 그 양심에 애국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225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어미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229~230

 

7) 기약없는 15년형

황해 평안 양도에는 특히 지방 풍습에 성년이 되기까지 부모에게 해라하는 습속이 있으므로, 그 천한 풍습을 개량하려고 애쓰던 때였다. 232

 

내가 안악에 이사했을 때 역시 처형과 장모가 찾아왔는데, 처형은 신창희와 부부 관계를 끝냈다고 한다. 나와 어머님은 한때도 집안에 용납할 생각이 없었으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정은 심히 불안에 빠졌다. 235

 

아내 역시 친모와 친형에 대한 친족관념을 단절하고 지냈다. 그 후 처형은 평산 등지에서 헌병보조원의 처인지 첩인지가 되어 살고, 장모도 같이 산다는 풍설만 들었다. 236

 

8) 서대문감옥으로

그뿐 아니라 5년 이하는 세상에 나갈 소망이 있으나 7년 이상은 옥중귀신이 되리라고 믿었기 대문에.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동지들도 대부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므로 옥중에서 하는 일이 서로 모의하지 않고도 같은 때가 많았다. 오월동주(吳越同舟)란 옛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닌 줄을 깨달았다. 238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241~242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食人之食衣人衣)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所志平生莫有違) 244

 

9) 옥중의 의ㆍ식ㆍ주

옴을 만드는 방법을 말하면, 가는 철사를 얻어서 끝을 갈아 뾰족하게 만들어 감추어둔다. 그러다가 의사가 각 공장과 감방으로 돌아다니며 병든 수인을 진찰하기 30분 전, 철사 끝으로 좌우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두면 찌른 자리가 옴과 같이 솟아오르고 그 끝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른다. 그러면 누가 보든지 옴병으로 보게 된다. 그 방법으로 진찰하니 그날로 옴방으로 전방되어, 둘이 같이 한 방에 들어갔다. 251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여름철에는 감방에서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다. 가스에 불이 나서 수인들이 질식되면 방안으로 무소대를 들이쏘아 진화하고, 질식된 자는 얼음으로 찜질하여 살리는데, 죽는 자도 여러 번 보았다. 수인들이 가장 많이 죽기는 여름철이다. 겨울철에는 감방에 20명이 있다면 솜이불 네 장을 들여주는데, 턱 밑에서 겨우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태반 동상이 나고, 귀와 코는 얼어서 극히 참혹한데, 발가락 손가락이 물러 터져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 보았다.

 간수놈들의 심술은, 감방에서 무슨 말소리가 났는데 누가 말을 하였나 물어보아 ,말한 자가 자백을 않고 누가 말했다고 고발도 없을 때는. 여름철에는 방문을 닫아버리고 겨울철에는 방문을 여는 것이었으니, 이것이 감시의 묘방이다. 252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지금 감옥은 물론 이민족의 압제를 받는다는 감정이 충만한 것이므로 왜놈들의 처사로는 탈끝만이라도 감화를 줄 수 없으나, 내 민족끼리 감옥을 다스린다 하여도 남을 모방하여서는 감옥 설치에 아무런 효과가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254

 

그런데 강원도에 근거를 둔 자들의 기관 명의는 목단설이요, 삼남에 있는 기관은 추설이라 하여왔습니다. ’북대라는 것은 무식한 자들이 임시임시로 작당하여 민가나 털고 약탈하는 자를 말하는데, 목단설과 추설 두 기관에 속한 사람끼리 만나면 초면에도 옛 친구처럼 동지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나, 북대에 대하여는 두 설이 하나같이 적대시하는 규율을 정하였으므로,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死刑)을 하는 것이외다. 259

 

조직 방법에 대하여는 근본 비밀결사인 만큼 엄밀하고 기계적이므로 설명을 충분히 해드리기 어려우나, 노형이 연구하여 보아도 단서를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부터 말씀하지요.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각 도 각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말고,

셋째, 담력이 강실(强實)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261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자를 구()자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267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자본 없는 장사는 거지와 도적이지요. 더욱이 도적질에 입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 꿈을 다 꾸지만 사회에 나가면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 산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자연 농ㆍ공ㆍ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과 같이 해본 놈은 거기만 눈치가 뚫려서 다른 길은 밤중이구려.” 269

 

5.      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이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273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에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분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5

 

2) 농감생활

나는 소작인 준수규칙 몇 조를 반포했다.

ㆍ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ㆍ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一等地〕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ㆍ학령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上等地〕두 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ㆍ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279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해주 검사국과 경성총감부에서 각 지방 보고를 수집하여, 김구』라는 책에 나의 일언일동을 상세히 기재하였을 것이지만, 어떤 정탐이라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287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내 육십 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귀해도 궁하고 궁해도〔窮亦窮〕 궁한 일생을 지냈다. 288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동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란 곳에는 혹을 떼러 제중원 1개월, 상해에 온 후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치료한 것뿐이다. 291

 

백범일지(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지금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6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해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1.상해 임시정부 시절

2) 경무국장 시절

나는 5년 동안 경무국장으로서 신문관ㆍ검사ㆍ판사뿐만 아니라 형집행까지도 담당하였다. 범죄자 처결하는 것을 요약하면, 말로 타이르는 것 아니면 사형이었다. 302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7

 

심지어 정부의 국무원 중에도 대통령과 각 부 총장들 간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로 각기 옳다는 주장을 좇아 갈라졌다. 그 대강을 거론하면 국무총리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309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310

 

그러던 중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黨是)로 주창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자연 찬동하고 나서서 유일독립당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의연히 공산당 양파의 권리쟁탈전이 음양으로 치열하게 대립되어 한 걸음도 진전되기 어려웠다. 민족운동자들도 차차 깨우쳐 공산당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결국 유일독립당촉성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313~314

 

동북 3성의 정의ㆍ신민ㆍ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 뒤 3부가 점차 할거하여 군정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까지 하였다.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고 함은 바로 이를 가리킨 격언이라 할 수 있다. 315

 

이 무렵 내가 연구 실행했던 사무가 하나 있으니, 곧 편지정책이다. 당시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해외 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19

 

2. 이봉창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이봉창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

 

4) 홍구공원의 쾌거

그러나 관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관적인 면이 더 많았다. 나에 대한 한인 교포들의 유일한 불만은 429사건 이후 신변이 위험하여 내가 평소 친지들의 면담 요구에 함부로 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341

 

3. 피신과 유랑의 날들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정주(程朱)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이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馬克思)와 레닌주의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2) 5당 통일운동

당시 국무위원 김규식 조소앙ㆍ최동오송병조ㆍ차이석ㆍ양기탁유동열 7인 중 김규식ㆍ조소앙 ㆍ최동오양기탁유동열 다섯 사람은 통일에 심취하여 임시정부 파괴에 무관심하였다. 이것을 본 김두봉은 임시 소재지인 항주에 가서 송병조 차이석 양인을 보고,

5당 통일이 되는 차제에 명패만 남은 임시정부를 존재케 할 필요가 없으니 취소하여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ㆍ차 두 사람은 강경 반대를 하였다. 국무원 7인 중 다섯 사람이 직책을 내놓으니 국무회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다. 358

 

상해에서 우리 일본 경관들이 당신 아들을 체포하려 해도 찾지 못하는 터에 노인이 말할 수 업이고생할 것 없소. 상부 명령으로 당신 출국은 허락지 않으니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서 안심하고 지내시오.”

어머님은 크게 노하여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그대네 경관보다 나을 것이다. 언제는 출국을 허가한다기로 살림살이를다 처분하였는데, 이제 와서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니, 남의 나라를 빼앗아 이같이 정치하고도 오래갈 줄 아느냐?” 라고 말하고 너무 흥분하여 기절하셨다. 366

 

9년 만에 모자상봉 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을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67

 

5) 가슴에 박힌 총탄

그날 남목청에서 연회가 시작될 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남경에서부터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 하여 내가 금전 보조도 해준 적이 있는 이운환이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1발에 내가 맞고, 2발에 현익철이 중상, 3발에 유동열이 중상, 4발에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의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나와 유동열은 입원 치료하고 상태가 호전되어 동시에 퇴원하게 되었다 한다. 369

 

이운환은 필시 강박 양인이 악선전에 이용된 나머지 정치적 감정에 충동되어 남목청 사건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370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한족보다 특히 묘족(苗族)의 형색이 극히 궁핍하고 행동이 야만스러워 보였다. 중국말을 모르는 내가 언어로 한족과 묘족을 구별하기는 어려웠으나, 묘족 여자는 의복으로 구별되고, 묘족 남자는 야만〔文野〕스런 눈빛〔眼光〕으로 분별할 수 있었는데, 한족화한 묘족들도 많은 듯했다. 375

이에 계획서를 작성하여, 광복군(즉 한국 국군) 결성을 허락해 주는 것이 3천만 한족의 총동원적 요소임을 설명하여 장개석 장군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즉시 김구의 광복군 계획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회신이 도착하였다. 382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중국이 대일전쟁을 5년간이나 계속하는 동안 군대를 조직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원통한 일이어서, 「한국광복군 조직계획안」을 작성하여 중국 장개석에게 제청하니 장주석은 하락한다고 답변하였다. 393

 

중국 중앙정부 군사후원회(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의 소위 「9개 행동준승」(行動準繩)을 발표하였는데, 조항 중에는 우의적인 것도 있고 모욕적인 것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임시정부와 광복군 간부드은 준승의 접수 여부에 의논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교정하려면 시일만 연기될 뿐이므로, 우선 접수하고 불합리한 조건을 시정하기로 하였다. 394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395

 

3) 왜적의 조기항복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398

 

입국하려 할 때에 미국 측은 미국 군정부가 서울에 있으니 임정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입국 문제로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결국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로 결정되었다. 400

 

중경을 떠날 당시에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周恩來)ㆍ동필무(董必武) 등이 우리 임시정부 국무원 전체를 초청한 송별연이 있었다. 401

 

4) 중경생활 회고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고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을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만일 우리 동포들이 저 지경을 당하였다면 어떠할까? 화가 나느니 성이 나느니, 홧김에 술을 마신다 성난 김에 싸움을 일으킨다 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태만하지나 않을까.’ 403~404

 

5) 해방 직후의 상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전의 독립정신을 굳게 지키며 왜놈의 앞잡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우혁(鮮于赫) 장덕로(張德櫓) 서병호(徐炳浩) 한진교(韓鎭敎) 조봉길(曺奉吉) 이용환(李龍煥) 하상린(河相麟) 한백원(韓栢源) 원우관(元宇觀) 등 불과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굳은 지조를 가상히 여겨 서병호 자택에서 만찬회를 개최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408

 

7. 조국에 돌아와서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却來觀世間)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猶如夢中事) 412

 

3) 삼남지방 순회

제가 일곱살 때 선생님 글공부하시던 좌석에서 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외 동족 중 한 사람인 김판남 씨가 나와서, 48년 전 나의 필적이 완연한 책 한 권을 내보이며 옛일이 어제와 같다고 말하였다. 전에 나와 알던 이는 이 두 사람뿐이었다. 416

 

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가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3~424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424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항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ㆍ경제상ㆍ사회상으로 불평등ㆍ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사기 알려 침략 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425~426

 

2) 정치 이념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427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ㆍ경제ㆍ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427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431~432

 

. 내가 저자라면


백범일지는 당초 두 아들에게 남기기 위해 일기 형식으로 쓰여진 유서다. 김구의 성격 자체가 솔직담백한데다가 자식을 독자로 상정하고 쓴 것이라 글에서 저자의 성정이 매우 명료하게 읽혀진다.『백범일지』는 구한말에서 해방정국에 이르는 한국 근ㆍ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했던 인물의 서술이라는 점 뿐만 아니라 저자의 정서가 순전하게 스며나오는 문체에서 다른 자서전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에는 주해자가 제2의 저자라고 느껴질 만큼 주해자 도진순의 노고가 듬뿍 배어있다. ‘『백범일지』 판본에 대한 해제를 보면 왜 현대에 쓰여진 이 책에 원본, 영인본, 등사본, 필사본, 추가본,출간본 등 수 많은 참고문헌을 찾아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책 맨 앞머리의 교감 원칙은 주해자가 백범에 대해 느끼는 애정의 정도를 대변하는 듯 하다. 다섯 가지의 교감 원칙과 차례는 김구의 사상과 메시지를 왜곡 또는 누락하지 않고 독자에게 어떻게 온전히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한 산물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노력은 성공했다.

 

『백범일지』는 김구와 관련된 사진화보로 시작된다. 10여 쪽의 화보를 보고 나면 어리숙하게 자리잡고 있던 김구에 대한 호기심이 텍스트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되기에 편안한 상태가 된다. ‘교감원칙을 읽으니 무엇을 주의하며 읽어야 할 지 감이 왔다. ‘차례는 주요사건을 기준으로 시계열로 정리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지만 간혹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지리한 경우가 있었다. 애당초 개인의 성장과 신변활동을 위주로 기술했던 자서전이 하권에서는 임시정부와 해방정국을 다루는 역사서 성격으로 전환됨으로 인해 서술 주제에 다소간의 단층화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나마 상ㆍ하권을 들어가기 전에 백범의 출간사가 배치되어 있어 관점의 전환을 파악하기에 좋았다. 일지 다음에 배치한 나의 소원은 논설문 형식의 글로 김구의 사상과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인류의 불행 이유를 인의ㆍ 자비ㆍ사랑의 부족 탓으로 보고 문화를 통해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는 생각은 21세기에서 봐도 통찰력이 넘치고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와 외교의 슬기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이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아 공감되는 바가 컸다.

 

본문 이후에 곁들여진 부록 중 특히, 백범연보는 시대별로 백범에게 일어난 사건과 주변 상황을 연계해 설명해 주어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 아쉬운 점은 일지에서 언급된 주요사건에 대한 개관이다.을미조약의 배경이 된 가쓰라-태프트 밀약,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 언급한 세계 제1차 대전, 해방정국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 좌ㆍ우익 진영과 김구의 관계 등에 대해 꼭지글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IP *.23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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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6.08 22:17:35 *.34.224.87
영웅의 스토리..
맞아 가장 적합한 인물...
우리역사에 영웅이 이리 많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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