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김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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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1876 ~ 1949)
본관 안동, 호는 백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자를 따서 지었다. 본명 창수, 황해도 해주 출생.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워서 책을 읽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등을 두루 습득한다.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알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다.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했다. 평생의 한이던 상님의 껍질을 벗고 월등한 양반이 되어 오랜 원한을 갚고자 했다.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 한학을 배운다.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이던 정문재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7세에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녕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과거를 보게 하는 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한다. 서당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다.
동학에 입교한다. 이름을 김창암에서 김창수로 바꾼다.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지자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팔봉 접주로 임명된다.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고,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한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하다.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의 배려로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군에게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다.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오는 일을 하였다.
1895년에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다.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된다. 강도살인죄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된다.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눈을 뜬다.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8년 복역중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원종.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 마찰등으로 후회한다. 다음해에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한다.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작은 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지만, 거절하고 본향을 다시 떠난다. 현재 마곡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숨결과 발자취를 좇는 명상길이 생겼다.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까지 받는다.
1900년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1902년 최여옥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한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한다. 1903년 약혼녀 여옥이 병사.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온다.
1905년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을사조약 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한다.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한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한다. 1907년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으로 활동한다.
1911년 '안악사건'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안명근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일본은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모집으로 날조해서, 관련인사 160여 명을 검거한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고,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을 역임한다. 1922년 어머니 곽낙원 여사 상하이로 오다. 9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이 출생한다. 10월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이 된다.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에 선출된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 단원을 모집하고, 1931년 이봉창이 찾아온다. 그가 왜 일본왕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그를 도쿄에 파견한다. 관병식에 참가하는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친다. 윤봉길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폭탄투척사건을 지휘하였다. 1933년 장제스를 만나 무관학교 설치를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한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 유지를 천명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민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했다.
1939년 모친 곽낙원 여사가 폐렴으로 82세로 사망.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941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된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15. 광복으로 귀국하는데,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한다.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북한에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한다. 1949년 6월26일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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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는 김구 선생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후 1928년부터 쓴 자서전으로, 상,하권이다. 상권은 고국에 있는 아들 인과 신,에게 남기는 유서로 집안 내력과 자신이 걸오 온 길을 중심으로 썼다. 하권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중국 내륙으로의 피신생활과 해방되기까지의 투쟁역사를 기록했다.
책의 구성을 이야기할 때, 쉽게 생각하는 것이 콘텐츠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구성과 배치에 대해서 스티븐킹도 이야기했지만, 현실 세계에 '구성'이란 없다. 구성이란, 콘텐츠 제작 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소위 한국에서 작가라고 하면, 문학작가를 일컫는다. 이들은 말 그대로, 문장을 다듬는다. 사장되는 언어를 캐내서 복원시키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조사나 어미 하나를 놓고, 한시간 이상 끙끙댄다면 나에게는 쓸데없는 일이다. 문장력이란, 내 생각을 풀어내는 정도다. 글쓰기 공부는 (물론 이것도 쉽지 않지만) 내 생각을 풀어내는 정도만 한다.
구성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텐츠를 상품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소설가나 전문 작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다. 글은 매체다. 미네르바의 글은 기본적인 어법조차 맞지 않지만, 나라를 뒤흔들었다. 문장력은 영향력이 없다. 글이 힘을 가질때는, 글에 경험이 들어있을 때다. 혹은, 나의 존재와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지식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다. 억지로 말을 만들려하지 않는다. 글이 안나오면, 공부와 경험이 부족해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장력이 아니라 용기가 필요하다.
백범일지는 설득력이 넘친다. 한결같이 저자 본인이 체험한 글이기 때문이다. 근 100년 전에 중국 일대를 휘젓고 다니던 백범의 활약은 눈부시다. 게다가 그는 겉모습답지 않게, 진로를 마구 바꾸어대고, 사업을 많이 벌린다. 일을 많이 하고, 경험도 많기에 쓸 말도 많다. 그는 기억력이 탁월하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인데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늘날은 당시 보다 더 빠르다. 지금 나는 미아리에서 이 글을 쓰지만, 맘만 먹으면 오늘 저녁 도쿄의 비지니스 호텔에 가 있을수도 있다.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회가 있다. 헌데, 왜 나의 일상은 매일 같을까? 내가 오늘날 김구라면, 매일 일을 벌려야 한다. 하루하루 다채로운 일들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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