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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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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10시 39분 등록
 [백범일지(白凡逸志)]

 (김구 金九 / 도진순 주해)


* 저자에 대하여


  김구(1876~1949) 선생은 황해도 해주 근처에서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상놈으로 몰락한 집안,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가정 상황의 영향으로 백범은 철이 들면서 불평등에 대한 회의와 양반에 대한 분노, 그리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강한 집념을 가지게 되었다. 가난한 형편에도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한 부모 덕분에 다행히 글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구한말 마지막 과거에 응시하지만 결국 과거 시험장의 기가 막힌 백태를 보고 입신양명의 꿈을 버린다. 출세대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결심하고, 평등한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며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까지 올랐지만 결국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동학을 나오게 된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태훈 진사의 호의로 청계동에서 피신 중에 평생 스승으로 모신 후조 고능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고 선생에게서 배운 ‘의’는 특히 평생 백범이 품고 산 가치가 되었다.

  그 후 조국 순례를 거쳐 ‘방랑길’에 오른 백범은 명성 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하고 변장을 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다. 이 일로 수감된 인천 감옥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백범의 거사는 많은 백성들과 관리들의 호응을 받았고 결국 고종의 재가로 사형을 면하게 된다. 감옥에서도 꾸준히 공부하고 신학문을 접하면서 백범은 지난날 자신이 구학문을 고집하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생각한 것을 후회하고 자신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을 새롭게 하였다.

  탈옥을 하고 삼남지방을 떠돌다가 1년 여 동안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의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 사업에 투신하고 예수교에 입교한다.

  십여 년을 학생 교육과 교사양성에 힘쓰는 동시에 민족 사상 고취에 노력하면서 1907년 안창호, 이승훈 등과 비밀 독립 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안중근 의사 의거와 안명근 사건, 105인 사건 등에 연류되어 17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룬다. 5년여의 옥고 끝에 가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후 농감으로 일하면서 농장 내 술과 노름을 없애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고, 5년 남짓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요인 안전과 정부 수호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무국장이 심문관, 검사, 판사로 죄인의 사형 등 집행까지 하게 된다”는 술회처럼 임시 정부의 경찰 사법권을 전담하였고, 임시 정부의 존립 위기가 닥칠 무렵 내무 총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 내부의 이전투구 양상을 보여준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고 임시 정부가 조각조차 하지 못하고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국무령에 선임되어 임시 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긴 망명 생활과 일제의 파괴 공작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하고 변절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만주사변으로 독립 운동 기지들이 무너지고 임시 정부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자, ‘편지 정책’을 통해 미주와 하와이 한인 사회를 끌어들여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한다.

  또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의거를 결행하였고, 이 결과 중국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청년 군관 양성을 시작하고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다. 한국 광복군은 OSS (미군과의 합작 특수 공작) 훈련을 통해 본토 수복을 위한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항복과 조국의 해방을 맞게 된다.

  안타깝게도 백범을 비롯한 임시 정부요인들은 이미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

  그 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이승만과의 대립하였고, 북한과의 협상도 실패로 돌아간 후 1949년 국군 장교이던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백범은 과거 공부와 돈벌이를 해볼 욕심에서 잠깐 공부했던 잡학 공부를 시작으로 동학, 유교, 불교를 거쳐 예수교에 정착하는 사상적인 방랑을 통해 자신만의 민족주의 사상을 확립한다. 그는 하나의 사상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이 우리 민족의 앞날에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우리 땅과 주권을 회복하고 우리 문화를 꽃피게 할 다양한 사상과 제도를 우리의 것으로 접목하기를 원했다.

   우리나라가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세상의 제일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여러 차례 가정의 윤리를 강조하였고, 이것 없이는 사회의 도덕이 바로 서지 않으며, 사회의 도덕 없이는 향기로운 문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유를 삶의 근본으로 삼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심는 자유”를 추구하라고 하였으며, “짐승과 같이 저마다 자기 배를 채우는 자유가 아니요, 제 이웃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백범의 정신과 믿음, 민족에 대한 사랑이 한데 표현된 것이 바로 <백범일지>이다.       


  암살당하기 일 년 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김구 선생이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를 기려 쓴 휘호이다.


  선죽교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고

  사람들은 슬퍼하나 나는 슬퍼하지 않노라.

  충신이 나라의 위기를 만나

  죽지 않고 또 무엇을 하리요.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 썼던 서산대사의 선시이다. 눈보라치는 조국의 위기에 당면하여 일신의 안위나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보다 후손들에게 남겨줄 역사를 강조하였다.

[사진 중에서]


백범 출간사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그리고 하편은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중일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않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나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다. 이것 역시 유서라 할 것이었다.

나는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출판할 것은 꿈도 꾸지 아니하였다.

나는 우리의 완전한 독립국가가 선 뒤 이것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춰지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행이라 할까 불행이라 할까, 아직 독립의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내 죽지 못한 생명만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이 책을 동포의 앞에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13]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의미에서 실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철학의 대강령을 적어본 것이다. [14]


내가 이 책 상편을 쓸 때 열 살 내외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 인은 그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중경에서 죽었고, 작은아들 신이가 스물 여섯 살이 되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몸으로 내 곁을 들고 있다. 그는 중국의 군인인 동시에 미국의 비행장교다. 그는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14]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것을, 나는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요, 내 생애의 기록이 이 책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다. 백범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크고 훌륭한 애국자와, 엄청나게 빛나는 일을 하는 큰 인물이 쏟아져 나오기를 믿는다. 동시에 그보다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 나라로 알고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니,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보내는 것이다. [15]


상권

인. 신 두 아들에게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너희들이 장성하였으면 부자간에 서로 따뜻한 사랑의 대화로 족할 것이나. 세상일이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19]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 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19-20]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조상과 가정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4]


2) 난산의 개구쟁이

하루는 그 집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데 그 집 아이들이 “해줏놈 때려주자”고 공모하여 이유 없이 매질하였다. 나는 곧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아이들을 다 찔러 죽일 결심을 하고 그 집으로 달려갔다. [25]


아버님은 양반들에게 잘 해주던 다른 존위들과 반대로 양반에게는 가혹하게 공전을 거두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부담하실지언정 가혹하게 하지 않으셨다. [28]


“너희 집에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로 해서 생기니 너마저 술을 먹는다면, 나는 단연코 자살하더라도 그 꼴을 안 보겠다.” [29]


3) 궁핍한 배움길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 빈격, 흉격 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38-39]

  

2) 동학의 세계로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42]


3) 팔봉 접주

“먼저 가르쳐 주신 후 제가 실천하는 것을 보신 다음에, 다른 접주와 마찬가지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49]


4) 청계동 안진사

안중근이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여 글공부를 뒷전으로 미루자, 부모와 선생은 꾸중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이 초패왕처럼 장부로써 살기로 결심하고 글공부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는 안중근에게 글공부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58]


5) 스승 고능선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도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세.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2]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등, 여러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좋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63-64]


“그런데 망할 것으로 하여금 망치 않게 할 방침은 없습니까?”

“자네 말이 옳네. 기왕 망할 나라라도 망치 않게 힘써 보는 것이 백성된 자의의무지.” [66]


지금은 누가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자네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싶으면 그대로 실행하여 보는 것뿐이지.“ [66]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2) 김이언 의병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근처 동네의 강씨, 이씨들은 조상님의 뼈를 사고파는 죽은 양반들이지만 너는 스스로 마음을 수양하고 몸으로 실행하여 살아있는 양반이 되겠다고 하던 것 등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86]


4) 복수 의거, 치하포 사건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렇다.”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여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거리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94]


5) 첫 번째 투옥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104]


6) 역사적인 신문

“나는 벼슬을 못하는 상놈이기 때문에 작은 놈밖에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양반들은 너희 황제의 목을 베어 원수를 갚을 것이다.” [114]


7) 사형수의 옥중생활

독서, 교육, 대서, 성악


8) 파옥

‘그렇지 않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인이 되어도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부끄러운 마음 견디기 어렵거든, 하물며 저와 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인이 되어서야 죽을 때까지 그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랴?“ [131]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2) 삼남견문록

3) 출세간의 길

가을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 밑에 있는 마곡사를 마치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니,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151]


‘견월망지(見月忘指)’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생각지 말라. 어떤 목적을 세웠으면 그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 [156]


4) 장발의 걸시승

5) 동지를 찾아서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3]


6) 스승과의 논쟁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8) 교육자의 길, 그리고 결혼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여하튼 양반의 세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당당한 그 양반들이 보잘것없는 상놈 하나 접대하기에 힘이 따려 애쓰는 것을 볼 때 더욱 가련하였다. 나라가 죽게 되니까 국내에서 중견세력을 가지고 온갖 못된 위세를 다 부리던 양반부터 저 꼴이 된 것 아닌가. 만일 양반이 살아나 국가가 독립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양반의 학대를 좀더 받더라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이 일어났다. [203]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구식 양반은 군주 일개인에 대한 충성으로도 자자손손이 혜택을 입었거니와, 신식 양반은 삼천리 강토의 이천만 민중에게 충성을 다하여 자기 자손과 이천만 민중의 자손에 만세토록 복음을 남길지라. 그 얼마나 훌륭한 양반이냐. [204]


3) 각 군 순회 교육운동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5) 신민회와 안악 사건

6) 세 번째 투옥과 고문

나라가 망하기 전 구국사업에 성의 성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기도 깎이지 않겠다는 소위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0]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에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1]


7) 기약없는 15년형

“그러면 언제부터 공대를 하오리까?”

“잘못인 줄 아는 시간부터니라.” [232]


8) 서대문 감옥으로

나의 심리 상태가 체포된 이전과 이후에 큰 변동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체포되기 이전에는 십 수 년 동안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서 설교하거나 교편을 들고 교실에서 학생을 교훈하였으므로,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게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불과 반년 만에 심리에 큰 변동이 생겨났는가를 연구해 보았다. [238]


왜놈이 나를 뭉두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는 생각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나는 죽는 날까지 왜마의 소위 법률이란 것을 한 푼이라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계속 행하고, 왜마를 희롱하는 것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고, 보통사람으로 맛보기 어려운 별종생활의 진수를 맛보리라 결심하였다. [239]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 [246]


9) 옥중의 의.식.주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ㅇ로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 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54]


10) 기인과 영웅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4]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을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67]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6.망명의 길

1) 출옥, 고향으로

다른 가정에서는 보통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말다툼이 생기면 주로 모친이 아들 편을 들건만,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을 반대할 때 어머님이 열백 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우신다. 가만 경험하여 보면 고부간에 귓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된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집안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기 김옥에 들어간 후 네 동지들 중에 젊은 처자가 남편이 죽을 곳에 있음에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하느니 추행을 하느니 하는 판에 네 처의 절행은, 나는 고사하고 너의 친구들이 감동하였다. 네 처를 결코 박대해서는 못쓴다.” [275]


2) 농감생활

김용승 진사가 이름짓기를 맡아 김린이라 한 것을, 왜의 민적에 등록된 까닭에 인(仁)으로 고쳤다. [282]


3) 상해망명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5) 내인생을 돌아보며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89]


민국 8년(1926) 나석주가 식전에 많은 양의 고기와 채소를 사 가지고 와서 어머님에게 드렸다.

“오늘 선생님 생신이 아닙니까? 돈은 없고 해서, 의복을 전당하여 고기근이나 좀 사가지고 밥해 먹으러 왔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을 받은 것을 영원히 기념할 결심과, 어머님에게 너무도 죄송하여, 내 죽는 날까지 내 생일을 기념하지 않기로 하고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290]


하권

하권을 쓰고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298]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2) 경무국장 시절

나는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보고 정부의 문지기를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벼슬을 시켜주지 않는 반감으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여, 도산은 의아해하고 염려하는 빛을 보였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 할 때 후일 만일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032]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07]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315]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 이봉창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3]


2) 일본 천황 불행부중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326]


그러나 목이 마르고 나서 우물 파듯 사전 준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329]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331]


4) 홍구공원의 쾌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 광동인 장진구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이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실시하려고 머리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3]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5.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 5당 통일운동

3) 폭격 속의 남경생활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362]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그 후 남경으로 모셔다가 1년을 경과한 후 남경 함락이 가까워져 장사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367]


5) 가슴에 박힌 총탄

“자네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윤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에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는 것보다 못하네.” [371]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2) 7당 통일회의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8]


3) 광복군 창설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395]


2) OSS 국내침투훈련

3) 왜적의 조기항복

4) 중경생활 회고

5) 해방 직후의 상해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나 자신과 우리 일행은 개인의 형식으로 입국하였지만, 국내 동포들이 정식으로 ‘임시정부 환영회’라고 크게 쓴 글씨를 태극기와 아울러 창공에 휘날리고 수십만 겨레가 총출동하여 일대 성황리에 시위행렬을 진행하니, 만리 해외에서 풍상을 겪은 온갖 고통을 동정하는 듯 싶었다. [410]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나의 소원

1) 민족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에서였다.

  근래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나라를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외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사상의 조국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연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에 인연이 얽힌 한 몸으로 이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이요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 알력, 침략,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작고 큰 전쟁이 그칠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불안과 도덕의 타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리 삼천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갈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닌 확신하는 바이다.


2)정치이념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 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어니와 이것은 수백년 계속하였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상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만일 이러한 정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하나로 통일될 법도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행히 잘못된 이론일진대, 그런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학설의 기초인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란 것이 이미 여러 학자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진리가 아닌 것이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지 아니함은 뉴튼, 아인슈타인 등 모든 과학자들의 학설을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노자의 무위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한 사람 또 몇 사람의 호령으로 끌고 가는 것이 극히 부자연하고 또 위태한 일인 것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스 독일이 불행하게도 가장 잘 증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미국은 이러한 독재국에 비겨서는 심히 통일이 무력한 것 같고 일의 진행이 느린 듯하여도, 그 결과로 보건대 가장 큰 힘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의 효과이다. 무슨 일을 의논할 때에 처음에는 백성들이 저마다 의견을 발표하여서 훤훤효효하여 귀일할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갑론을박으로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으견이 차차 정리되어서 마침내 두어 큰 진영으로 포섭되었다가, 다시 다수결의 방법으로 한 결론에 달하여 국회의 결의가 되고, 원수의 결재를 얻어 법률이 이루어지면, 이에 국민의 의사가 결정되어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시기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 국론, 즉 국민의 의사의 내용은 그때그때의 국민의 언론전으로 결정되는 것이어서, 어느 개인이나 당파의 특정한 철학적 이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특색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그중에서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서 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상에 말한 것으로 내 정치 이념이 대강 짐작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라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로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로도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의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에 보태는 일이다.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을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약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도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 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이 태탕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 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가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의 기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423-433]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주해자인 도진순은 김구 전문가답게 김구 선생의 개인적 기억에 의존하였던 <백범일지>의 미흡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실관계/의 착오를 수정하고 원문의 내용을 보완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문의 감동을 높이기 위해 사진, 문서, 지도 등 여러 시각 자료를 적절히 활용하여 책의 감동을 한층 깊게 더해주었다. 또한 적절한 각주를 활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깊게 해 준 것도 아주 좋았다. ‘교감원칙’을 책머리에 두어 이러한 방향성을 명확히 밝힌 것도 책을 읽는 내내 큰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책의 말미에 달린 ‘백범 연보’는 년도와 작가의 간단한 변화를 기입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짤막한 연보가 아니라, 거의 일대기를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자세한 내용을 백범의 나이와 함께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시기 국내 정치 및 사회 상황과 국제 정치 상황까지 함께 기입하여 시대적 변화 속에서 백범의 행적과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연보를 통해서 개인적 시각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는 자서전의 한계를 일정부분 극복할 수 있었고 백범의 사상과 일생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지식도 함께 얻을 수 있어서 아주 큰 공부가 되었다. 사실은 바로 전주에 읽었던 난중일기에서도 이런 형태나 또는 사기열전의 단락별 해제처럼 본문의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역자의 도움이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백범일지는 1947년, 김구 선생 나이 72세에 간행된 자서전으로 상권은 1929년, 54세 때,  하권은 1942년, 67세에 각각 집필되었으며 끝에 붙인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를 간행하면서 평소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한 것이다.

  출간사를 통해서 상권과 하권의 저술 동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일제를 향한 특무작전에 나서며 아직 어린 아들들에게 남겨주고자 개인적인 일생과 행적의 서술에 주력한 상권은 그 집필 동기와 함께 더욱 큰 감동을 주었으며, 임시정부를 둘러싼 여러 상황을 저술하는 데 주력한 하권에서는 학교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임시정부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백범일지 출간에 임하여 덧붙여진 ‘나의 소원’은 그 원문을 미처 접하지 못하고 앞부분을 포함한 짤막한 내용만을 알고 있던 것을 이번 기회에 그 전체를 깊이 음미하면서 읽고 또 필사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김구 선생은 밤새워 자신을 고문하는 왜경에게서 자신이 자신의 일과 애국을 저만큼 충성된 마음으로 열심히 했는지를 반성하고, 또 감옥에서 만난 강도에게서 강도 조직과 비밀유지, 훈련에 대해 들으며 신민회를 포함하여 그동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해왔던 일의 엄격하지 못함을 반성한다. 왜경과 강도에게서도 배웠던 선생이 평생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이것이 바로 시골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김구 선생이 민족의 사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밑바탕이자 힘이었을 것이다. 


  백범일지를 다 읽고 나니, 전 주의 <난중일기>와 함께 그 감동이 더 크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주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덧붙여 들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출간한 채 2년이 못되어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평소의 어록과 기고문 등이 정리되어 <백범어록>이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저자 조사를 위해 김구 선생에 대한 다른 책을 살피던 중 도진순 엮은 <백범어록>을 발견하였다. <백범일지>에 더해 김 구 선생의 깊은 사상과 내면을 알기 위해 꼭 읽어볼 책이다.


***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 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능력이 탁월하여도 그 뜻을 바르게 세우지 못하면 오히려 능력이 부족한 사람만도 못한다. 뜻은 능력에 선행한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나의 소원' 중에서-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 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나의 소원' 중에서-

*** ‘습관’에 참고할 문구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세.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62]

하나하나 일마다 양심을 본위로 삼아서, 삿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먼저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는 감히 다른 사람의 그릇됨을 탓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학생들과 친우들 간에 충실하다는 신망을 받고 지냈고, 매사에 자기로부터 실천하여 남에게 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건만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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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6.08 22:26:49 *.34.224.87
그래...나도 백범어록을 잠깐 보면서
그의 넓고 깊은 철학과 사상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었어..

뜻은 능력에 선행한다...깊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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