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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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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7일 11시 5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아니, 이 밤중에 어인 일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단 말이냐?”

밝은 달에 마음을 빼앗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청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백범은 어느새 다가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미옥에게 물었다.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깜냥으로는 어림도 할 수가 없어 답답해하던 중 마침 선생님께서 앉아 계시는 것을 뵈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올라왔습니다.”

“그래, 무엇이 그리도 궁금하단 말이냐?”

“<백범일지>를 읽었습니다. 솔직히 책을 읽기전엔 그저 훌륭한 독립운동가이신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우리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역사를 이끌어오신 선생님의 삶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런데, 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신 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신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이 들면서도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일면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셨습니까?”

“허..그게 그리도 궁금했더냐. 달도 밝고 술도 한잔 걸쳤으니 내 글로는 풀어내지 못했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도록 하마. 자..그럼 이야기가 길터이니 너도 한잔 받거라”

“예~”

미옥은 마음과 눈과 두 손을 모아 하얀 사기잔을 들어 술을 받아 살짝 입술을 축였다.

백범도 술잔을 비우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숨을 고르더니 마치 시조를 읊듯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인간 김창암으로 돌아가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네.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감옥에 獄苦를 치룰 때 뿐이 아니었지. 잠시라도 짬이 생겨 내 삶을 돌아보면 뭐하나 이룬 것없는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또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참기가 어려웠네.

하지만 김구를 버리고 김창암으로 돌아간다 한들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 식구들과 정을 나누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네. 세상이 나를 위해 마련해놓은 자리는 내가 눞기엔 너무도 좁고 누추한 자리였던 것이네. 내가 이 자리를 버리고 그 시절 사회가 허락했던 나의 가정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해도 내 아이들이 자라서 亡國奴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한 순간인들 마음편히 웃을 수 있었겠니? 오히려 그런 비극을 손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괴롭게 않겠니?" 

“하지만 그 시절에도 집안을 보전하며 아이들 훌륭하게 교육시킨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자식들이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걸고 찾아온 나라의 수혜자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가장이 자기 자존심을 좀 죽여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훌륭한 것 아닙니까?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던데..가정을 제물로 평정한 천하는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겁니까? 결국 자신의 공명심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킨 것 뿐이지 않습니까?”

“녀석, 이 오밤중에 나에게 그걸 따져 물으려고 잠도 안자고 기웃거린 것이냐? 허허..이녀석이 아주 작심을 했구나! 속이 다 타는구나. 술이나 한잔 더 따라라”

“아니..그런 것은 아니오나..실은 그것이 지금 제가 안고 있는 문제...”

“되었다.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있는 대로 말해줄 터이니 걱정 말거라. 실은 내겐 그런 저울질을 할 만한 기회도 없었느니라. 가난한 상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지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며 자랐다. 처음엔 科擧에 급제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기를 쓰고 공부를 했지만, 막상 과거 시험장 모양새를 보니 헛된 꿈이었음을 알았지. ‘미관말직까지 돈으로 사고 파는 세상에 벼슬 살 돈이 없는 내게 글공부는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좌절해 있다가 이런 세상에서 내가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상묘를 잘 쓰거나 귀인을 만나 대박을 터트리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관상학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짧은 지식으로 아무리 뜯어봐도 나는 그런 대박을 맞을 관상이 아니지 않느냐. 힘이 빠져 그것도 더는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무렵 만난 것이 동학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접주’가 되어 동학운동에까지 휘말리게 되었지만 순전히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동학이 추구하는 평등 세상이 이루어지면 양반 아닌 나도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더구나. 오히려 어중이 떠중이 모인 동학교도들의 사회는 더 어지럽기만 했다. 동학도 내가 꿈꾸는 세상을 여는 열쇠가 아니었던 것이지. 그러다 고능선 선생님께 세상이치를 배우면서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으며 왜놈의 속국이 되면 지금보다 더 못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무살 혈기의 내게 왜놈은 그렇지 않아도 비참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요괴’같은 존재였지. 치하포에서 왜놈을 죽일 때도 무슨 큰 뜻이 있었다기 보다는 나를 못살게 구는 요괴를 처단한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사람답게 살아 보겠다’ 이 얼마나 소박한 소망인가.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이런 파란만장한 길을 걷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네.”

미옥이 빈잔에 술을 채우자 백범은 달을 안주삼아 한잔을 들이키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지 않았네. 그저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최선을 택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나의 인생이 되었던 것 뿐이네. 어쩌면 내 인생엔 가족과의 단란한 삶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는지도 모르지.”

“..............”

“ 물론 딸아이 셋을 어려서 읽고, 큰 아들마저 잃게 되었을 때는 나도 흔들렸네. 내 아들 인이는 나를 도와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3월 중경에서 폐병으로 죽었네. 페니실린만 맞으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동지들도 맞지 못한 비싼 주사를 내 아들이라고 해서 맞힐 수는 없지는 않는가. 아들을 살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생각으로 내 머릿속은 터져버릴 것 같았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가진 것 없는 상놈의 자식이었던 내가 자식을 위해 귀하디 귀한 페니실린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남의 분별없이 마음을 다해 민족을 위해 일한 대가 아니겠는가? 만일 내가 그 마음을 계속 지키지 못했다면 어차피 내게는 주어지지도 않았을 선택지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을 좀 잡을 수 있었네.

만일 페니실린으로 아들을 살릴 수 있었다 치세. 그렇게 목숨을 건진 내 아들이 아버지 덕분에 살았다며 아버지로서의 내 사랑에 의지하여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나? 미안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지 않네. 모질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 수를 더 내다보며 선택을 한 것이네.”

“그럼 선생님은 대의명분을 위해 내 자신과 가족의 희생은 불가피했다고 생각하신다는 건가요?”

“ 아직 모르겠나? 나는 한번도 누구를 위해 대신 희생한다고 생각한 적 없네. 그것은 내 가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고, 불행히도 내 시대에는 누구도 대신해서 나를 살 맛나게 만들어줄 사람이 없었네. 내가 원한다면 내 손으로 쟁취했어야만 했지. 영혼을 저당잡히고 호의호식을 한다 한들 그것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나? 나는 아직도 믿고 있네. 내가 내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는 그들에게 영혼을 찾아주는 것, 다시말해 노예의 삶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일세. ”

"그렇다면 선생님의 삶은 식민치하라는 특수한 역사속에서만 정당화되는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음..어렵고도 쉬운 질문이군..밤도 깊었으니 질문하나로 답을 대신하도록 하지. "

"선생님...."

"미옥아, 너의 영혼은 독립을 이루었느냐? " 

3. ‘내가 저자라면’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국한문 혼용의 어렵고 난삽한 고문을 쉬운 현대문으로 교열하였다(5)

원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 즉 원문의 감동과 내용을 털끝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현대성의 원칙 이상으로 중요하게 고려하였다(5)

원본의 한계를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서․회고록 등 여러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원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비평하였다(6)

원자료의 추적을 통해 정리된 새로운 내용을 기초로 하여 <백범 연보>를 전면적으로 교정하였으며, <인물 찾아보기> 또한 전면적으로 정비하였다(6)

도진순 주해의 <백범일지>는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으며 아쉬웠던 부분을 귀신같이 채워주웠다. 그간 여러권의 <백범일지>를 출판하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글로 쓰면 몇줄이지만 이 간극을 채우는데 들었을 뜨거운 시간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IP *.53.8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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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6.07 15:41:30 *.236.3.241
나이와 성별의 갭을 뛰어넘어서 백범의 머리 꼭대기에 앉았구나 ^^
이순신도 좋았지만 주인공과 인터뷰하는 형식을 취하니 훨씬 너답고 자연스럽다. 다음번엔
네루다? 또 기대할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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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06.08 08:54:25 *.53.82.120
궁금한 게 생기면 당연히 여쭈러 가야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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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6.08 22:21:18 *.34.224.87
너의 영혼은 독립을 이루었느냐?
와우...멋진 질문이구나...

주인공과의 인터뷰의 형식, 
자유로운 너의 상상력과 만나
훨씬 더 편안하게 네가 드러나는 것 같다...
아주 괜찮은 어울림으로 보인다. 멋진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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