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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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저자 소개
주인공(protagonist)에 맞서 주인공의 가는 길을 방해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세력을 시나리오 이론에서는 적대자(antagonist)라고 한다. 주인공은 적대자로 인해 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한다. 이런 연단의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더욱 입체적인 인물로 재탄생하고 관객들은 극적인 긴장을 즐기게 된다. 갈등의 불씨가 되는 적대자는 일반적으로 외부의 인물이다. 외부의 인물과 함께 내적인 갈등이 또 하나의 적대자로서 적절히 작용하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시인이다. 하지만 남아메리카의 정치ㆍ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그는 공산주의라는 창을 들고 모순에 맞서는 전사가 되었다. 시인이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지만 남아메리카 땅이 지닌 모순은 그만큼 모질고 폭압적이었다. 모순이 강화될수록 자연과 영혼의 탐색가인 그의 내면에서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간에 거친 바람이 일었고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는 깊디 긴 골과 다채로운 색깔의 풍광이 전리품처럼 남았다.
1904년 7월,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 파랄에서 교사인 어머니와 가난한 철도 노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두 달 만에 생모를 잃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계모 밑에서 자랐지만, 타고난 감수성을 지닌 네루다는 일찍이 시의 세계에 빠져 19세에 벌써 《황혼일기》를 펴내고, 스무 살에 청년기의 대표시집이라 할 수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발표한다. 다소 내성적이지만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에 남미 대륙의 원시적 자연과 여인에 대한 사랑이 네루다 시의 本鄕이다. 네루다 자서전의 특징 중 하나는 사실을 스푸마토 기법(경계를 흐리기 그리기)으로 묘사하여 시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는 점이다. 묘사된 회상 장면을 싯구로 바로 전환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헤미안 시인의 필치로 유려하게 보여 준다. 남미대륙의 원시적 자연, 그리고 라틴계열의 언어와 사람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가슴이 정령이 되어 그에게 폭포수 처럼 쏟아지는 상상을 해 본다. 詩는 그에게 그렇게 왔다.
팔 할이 바람인 그에게 스페인 내전은 가장 악독한 안타고니스트였다.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촉발된 내전은 4년 동안 백 만 명의 희생자를 낳고 1939년 이래 30여 년간 스페인을 파시즘 독재체제로 몰아 넣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접 목격하고 절친 로르카의 암살을 겪은 네루다는 시를 포기하는 대신 민중의 시인이자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정치가로 거듭난다. 파시스트들이 준동하는 현실 세계에서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에 앞장선 유일한 저항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외교관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네루다는 1945년 상원의원이 되고 칠레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박해를 받자 외국으로 탈출하여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기질상 그는 뼈속까지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었던 것 같다. 공산주의 사상과 시와 자연인 네루다는 갈등하지 않았다. 민중을 생각하며 열렬히 시를 쓰기는 했지만 자연인 네루다는 여전히 사랑하고 노래하기를 즐겼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프티부르즈와라고 비난하였으나,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는 시인이면서 민중의 편에 선 혁명가로서 살기 위해 네루다는 좁은 길 사이에서 용의주도한 생을 살고, 1971년 세계문학에 끼친 필생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열렬한 사랑을 갈구하는 격정적인 연애시인이었으며,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시인이었다. 네루다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시를 선보인 시인은 드물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전립선암과 투병 중 쿠데타의 기운을 감지한 네루다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칠레 내전을 막아달라고 절절한 호소를 보낸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1973년 9월11일 기어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칠레공군 전투기들이 자국의 대통령 궁을 폭격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스페인에 이어 칠레에까지 들이닥친 파시즘의 망령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그는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한 69세의 생을 마쳤다.
생은 시를 낳았고, 시는 혁명과 자유의 골짜기에 명멸하는 존재의 아득함을 남겼다.
Ⅱ.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이 책에 수록된 회고랄까 추억은 듬성듬성하다. 간혹 잊어비린 일도 있다. 바로 그런 게 인생이다. 우리는 듬성듬성 꿈을 꾸기 떄문에 힘든 삶을 견뎌 낸다. 그런데 기억해 내는 순간 희미해지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추억이 너무 많다. 마치 산산조각 나 버린 유리 같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 준다.
1. 시골 소년
유년기와 시
유년 시절의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k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17
테무코는 새로 개척한 도시였다. 이런 고장에 역사와 전통일 있을 리 만무하지만 철물상 하나만은 즐비했다. 원주민들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가게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물건 모양의 간판을 내걸었다. 어머어마하게 큰 톱, 가마솥만 한 냄비, 문짝만 한 자물쇠, 삽만 한 숟가락, 그 앞의 신발 가게는 무지막지하게 큰 장화를 걸어 놓았다.
사실 테무코는 칠레 남부 지역을 명실상부한 칠레로 편입하게 위한 전진 기지였다. 이런 편입 과정은 피로 물든 긴 역사를 의미한다.
300년 동안 스페인 정복자들에 맞서 싸우던 아라우카 족은 결국 추운 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칠레인들은 이른바 ‘아라우카 지역 평정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동포인 원주민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한 것이다. 그동안 원주민들을 무찌르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아낌없이 동원했다. 18
마지막으로 술이 들어와 그토록 당당하던 아라우카 족을 전멸시키고 말았다. 18
이런 개척지에서 재산을 고스란히 지켜 낸 사람은 오로지 독일인들뿐이었다. 21
항상 공사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 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21
나이가 들면서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버팔로 빌의 무용담이나 살가리의 모험담을 읽으면서 내 정신은 꿈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첫 사랑, 지극히 순수한 사라은 철물점 딸 블란카 월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24
학교 친구들은 내게 시인의 기질이 있다는 걸 몰랐고, 또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24
이런 기억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킨다. 내 첫 연애 사건도 이상하게 자연과 뒤섞여 있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나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집 뒤뜰에서 조그만 것들을 찾으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판자로 만든 담장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구멍으로 내다보니 우리 집처럼 황량하고 잡초만 무성한 땅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막연한 예감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구멍에서 손이 나타났다. 내 또래 아이의 손이었다. 내가 담장으로 다가갔을 때 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 대신 아주 자고 하얀 양 한 마리가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빛바랬으나 양모로 만든 양이었다. 밑에 달린 바퀴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양은 처음이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에 보답하는 선물을 들고 나와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솔방울이었다. 이제 막 벌어지면서 솔향기를 내뿜고 있어서 무척이나 아끼던 물건이었다. 26
à 그래, 詩가 내게로 왔어. 신비로운 찰나의 순간에 그 모든 것이 나를 바꿔놨어.
비의 예술
아메리카 남부 지방의 겨울은 추위와 비와 진흙탕으로 변한 길거리 때문에 스산한 반면 여름은 타는 듯한 불볕더위로 지글거린다. 우리 고장은 처녀림으로 둘러싸인 산골이다.
기차는 추운 지방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테무코에서 카라우에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광대한 땅과 처녀림을 지나갔다. 28
정원에는 나를 매료시킨 물건이 또 하나 있었다. 커다란 보트였다. 암초에 부딪힌 큰 배에서 떨어져 나와 고아가 된 보트가 파도도 폭풍도 없는 양귀비 꽃에 좌초해 있었다. 30
한 동안 꽃을 어루만져 보다가 책갈피에 화려한 비단 꽃잎을 넣어두었다. 이 꽃잎은 날지 못하는 거대한 나비의 날개였다. 30
수학 공책에 시를 썼다. 35
광활하고 무서운 개척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소년 시인은 무척이나 고독했다. 나는 삶과 책을 통해 조금씩 흥미진진한 신비의 세계로 나아갔다. 35
나는 타조처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어삼켰다.
그 무렵 키가 큰 여자가 테무코에 나타났다. 긴 치마에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만년설로 뒤덮인, 칠레의 최남단 마가야네스 지방에서 여학교에 새로 부임해 온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945년 라틴아메리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이었다. 37
방금 깎은 손톱 같은 하얀 초승달이 떠올랐다. 40
지난 30년 동안 이 외딴집에 들른 사람은 모두 스물일곱 명이었다. 사업 때문에 온 사람도 있고 호기심으로 들른 사람도 있고 또 나처럼 우연히 지나가다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 기록 카드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카드에는 방문한 날짜와 제공한 메뉴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메뉴를 보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똑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예요.” 43
밀짚 속에서 나는 사랑
우리 같은 남자들 잠자리는 탈곡장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산더미만큼 짚을 쌓아 놓은 탈곡장에서 폭신하게 몸을 눕힐 수가 있었다. 45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크고 거칠었지만 분명 여자의 손이었다. 그 여자는 내 이마와 눈과 얼굴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여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를 짓눌렀다.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처럼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46
2. 도시의 방랑자
자취집
매년 12월 수학 시험에서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중등 과정을 무시히 마쳤으니 겉으로는 산티아고 데 칠레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겉으로’라고 말한 이유는 머릿속이 온통 책과 꿈 그리고 벌 떼처럼 윙윙거리는 시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49
나중에야 금바의 아내 또한 분마(奔馬)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 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이 미모의 과부는 나를 만난 후에도 한동안 검은 옷을 벗지 않았다. 검은색과 자주색 비단옷을 두른 그 여자는 마치 애도라는 껍질 속에 눈처럼 새하얀 속살을 감추고 있는 과일 같았다. 55
수줍음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않은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사람들이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록 쉽게 우정을 맺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류에 대해서 별다른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알 수는 없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57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시인들과 화가들은 너나없이 파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58
알베르토 로하스 히메네스
로하스 히메네스의 시는 당대를 풍미하던 아폴리네르 시론과 스페인 극단주의 시학에 충실했다. 또 ‘아구’라는 시 운동을 주창하였는데 그는 이 말이 인간의 원초적 외침, 즉 갓난아이가 최초로 지어 낸 시구라고 했다.
로하스 히메네스는 미겔 데 우나무노〔스페인의 실존주의 소설가로 『안개』를 썼다.〕에게서 종이학 접는 법을 배웠다. 목이 긴 새를 접어 날개를 펼친 다음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곤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포도주 창고에서 포도주 병을 찾아내듯이 프랑스 시인들을 발굴했으며, 프랑시스 잠의 여주인공들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63
후한 성격 탓에 로하스 히메네스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어느날 카페에서 한 낯선 남자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하시는 말씀을 죽 듣고 있었는데 무척 공감이 가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로하스 히메네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낯선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요? 당신이 지금 탁자 앞에서 앉아 있는 나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얘깁니까?”로하스 히메네스가 되물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낯선 남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죽어 관 속에 누워 있을 때 뛰어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입니다. 생전에 허락을 받고 죽은 다음에 뛰어넘는 것입니다. 저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제 취미랍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게 제가 뛰어넘은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64
겨울의 기인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66
몇 달 후, 새 책이 출판되었다. 제목은 『소와 나눈 대화』였다. 그 책 첫 페이지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헌사가 수록되어 있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런 헌사였다. “이 철학서를 2월24일 밤 루나 공원에서 나에게 야유를 퍼붓고, 또 나를 죽이라고 고함치던 4만 명의 개자식들에게 바친다.” 69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장소나 명예가 중요하지 않다네. 솔직하게 말해서 저 아름다운 그림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내가 진정으로 아쉬워하는 것은 우리가 사로 잘 알지도 못햇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거라네. 저 감자 때문에 서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라네. 72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말했다. “비현실의 경계를 탐험하는 우리들에게 자비를 내리소서.” 내가 지금 이 말을 인용하는 까닭은 앞에서 이야기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인이라고 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72
큰 사업
우리 시인들은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며 사업 수완도 뛰어난데 다만 이런 천재성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73
“이런 가죽하고는 결혼할 수 없소.” 76
초기 시집
매일 시를 두 편 이상 썼다. 76
우리 시인들은 작품 가운데 단 한 편만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알레르기가 돋는다. 이러한 알레르기는 생물학적으로 건강한 반응이다. 앞서 말한 독자들의 애착은 시인을 특정 순간에서 못 빠져나오게 만든다. 창작이란 부단한 연찬을 통해, 비록 참신성과 자발성은 떨어질지언정, 안정적으로 회전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다. 78
1923년 나는 흥미 있는 경험을 했다. 테무코에 있을 때인데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각에 귀가했다. 침대에 눕기 전에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보고 넋을 잃었다.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별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세수를 끝낸 듯한 밤, 남극의 별이 머리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79
그 때 그 작품을 사바트 에르카스트에게 보여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바트 에르카스티는 위대한 우루과이 시인인데 지금까지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시인의 작품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그 신비한 힘까지 포괄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내 야망이 실현되어 있음을 보았다. 우주의 위대한 신비와 인간의 가능성을 모두 아우르는 그런 서사시 말이다. 79
사바트 에르카스티의 편지를 받고 장시를 쓰겠다는 야망을 접었다. 내가 제대로 천착할 수 없는 웅대한 시와는 담을 쌓았다. 의도적으로 문체와 표현을 낮추었다. 한결 소박한 표현과 내 고유의 조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면서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이다. 80
우리 학생들은 민중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산티아고 거리에서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수천 명의 초석 광산과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산티아고로 몰려왔다. 시위와 진압의 난무로 칠레 사회는 비극적인 상처를 안게 되었다.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82~83
정복자들은 종교, 피라미드, 종족, 그리고 그들이 보따리에 담아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상을 모두 집어삼켰습니다. 가는 곳마다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 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자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85
3. 세계의 길
빌파라이소의 방랑자
발파라이소는 골목도 많고 모퉁이도 많고 숨겨진 곳도 많은 곳이다. 산동네에서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산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모엇을 못 먹고 무엇을 못 입는지, 세상이 다 안다. 집집마다 내걸린 빨래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 같은 판자촌에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91
구멍에 파견된 칠레 영사
1920년대 칠레의 문화계는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유럽에 의존하고 있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에 젖어 등 엘리트들이 아메리카 대륙 각국에서 활개를 쳤고, 과두 지배 계급 출신의 작가들은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위대한 시인 비센테 우이도브로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뱅상이라고 프랑스식으로 바꾸었다. 100
지구의가 오래된 것이라 아시아 쪽이 움푹 들어가 있었는데 우리가 찾던 랑군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내가 부임할 곳은 지구의 구멍속에 있는 도시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103
몽파르나스
당시 포마드는 아르헨티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106
모든 시인들이 그렇듯이 바예호 또한 자부심이 강해서 잉카인다운 외모를 자랑하길 좋아했다. 108
4. 빛나는 고독
밀림의 이미지
이 시대는 보편성을 지닌 시의 황금기다. 새로운 노래가 총부리에 쫓길 때, 봄베이 변두리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밤마다 도로 옆에서 잠을 잔다. 그렇게 자고 태어나고 죽는다. 집도 빵도 약도 없다. 문명국이라고 자부하는 영국이 식민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 식민지 신민들에게 학교, 공장, 주택, 병원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오직 감옥과 빈 위스키 병만 산더미처럼 남겨 놓고 떠난 것이다. 123
그 퓨마는 한 폭의 별이 빛하는 밤하늘이었고, 쉬지 않고 돌아가는 녹음 테이프였고, 세상을 휩쓸어 버릴 것처럼 꿈틀대는 검은 화산이었고, 살아 있는 발전기였다. 칼끝처럼 예리한 노란색 두 눈은 불길을 내뿜으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자기의 수감 생활도 인류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124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 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127
인도 국민회의
간디는 지칠 줄 모르는 성자인 반면 네루는 혁명을 주장하는 학자다. 128
몇 년 뒤 이곳 인도에서 만난 보세의 친구는 싱가포르 요새가 함락된 경위를 들려 주었다.
“우리는 싱가포르를 포위한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긴 겅예요.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그래서 부하들에게 뒤로 돌아 명령을 내리고 총부리를 영국군에게 겨누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일시적인 침략자이지만 영국은 영우너한 침략자로 보였거든요.” 128
와불
조각가들은 그리스도가 고통받는 사람, 산모, 참수형을 당한 사람, 불구자, 탐욕적인 사람, 교회 내부 사람과 교회 주변 사람 등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상에 소름끼치는 상처를 새겨 넣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죄 지은 사람도 고통을 받지만 죄 없는 사람도 고통을 당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가르치는 고난의 종교로 변질되어 버렸다. 129~130
불행한 인간 가족
실제 동양에 가 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131
이런 이유로 동양은 불행에 시달리는 거대한 인간 가족처럼 느껴져서 내 양심상 동양의 신이나 의식에만 몰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창작한 시는 폭력적이고 낯선 세계에 이식된 이방인의 고독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132
동양의 영원한 푸른 하늘 또는 불쌍한 여자의 쓸쓸한 다비식을 완전한 평정심과 무한한 무관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 파워스의 첫 번째 여자 장례식)133
그러나 이러한 배척 때문에 나는 오히려 행복했다. 저 편견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잠시 들렀다 가는 식민지 관리와 함께 살려고 동양에 온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오랜 정신을 경험하고, 불행한 인간 가족과 함께 살려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135
아편
아편은 뜬소문처럼 이국 취향에 함몰된 사람들이 향유하는 천국이 아니었다. 착취 당하는 사람들의 도피처였던 것이다. 아편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침한 사람들이었다.
실론
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토막으로 팔았다.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신성한 동물을 살육자의 칼로 토막 내서 피묻은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39~140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전에,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모든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2
정장 차림의 영국인들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도주에 음악을 듣느라 늦었습니다.”
실론에서 25년을 지낸 그 사람들은 점잖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음악이라니요? 원주민들에게도 음악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과 방대한 아시아 세계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결코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리는 비인간적인 고립을 의미하며 아시아인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의미한다. 143
진정한 동양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학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인데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주관적 소설가인 그의 아내 버지니아 울프의 명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144
로렌스는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위대한 영국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를 훈계하려 들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로렌스는 우리가 삶과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성교육 강좌를 개설한 것이다. 나는 로렌스가 지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성의 신비에 대한 고통스러운 탐구, 쓸모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이러한 탐구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5
콜롬보 생활
실론 사회는 여러 영역 또는 계층으로 나뉘어 있다.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사는 영국인들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점유하고, 그 아래에는 남아메리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중산층이 있다. 이들을 ‘버거’라고 부르는데, 인근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즉 보어인 후예들이다. 보어인들은 19세기 식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실론 섬으로 건너왔다. 그 밑으로는 수백만을 헤아리는 싱할라족 불교도와 회교도가 있다. 이들 밑에는 열악한 임금을 받는 수백만 노동자 계층이 있는데, 인도 남부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타밀어를 사용하며 힌두교를 믿는다. 146
이처럼 허공에 뜬 내 삶의 이야기가 이 시집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표현되어 있다. 잉크보다는 피를 가까이하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 문체는 한결 정제되었고, 반복되는 광적인 우수를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진리와 수사법을(이러한 밀가루로 시라는 빵을 만든다.) 고려할 때 씁쓸한 문체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유의 문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은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149
그녀는 창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식민주의 산물이었다. 식민주의라는 나무에 열린 솔직하고 헤픈 열매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뒤로 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152
칠레 사람들은 하루에 네 번 차를 마시는데 국내에서는 차를 지배할 수 없다. 한때는 이 이국적인 기호 식품의 공급 부족으로 인해 초석 광산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155
5. 가슴속의 스페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우리는 깜짝 놀랄 만한 행사를 기획했다. ‘알알리몬’ 연설을 준비한 것이다. 아마 독자들은 알알리몬이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잘 몰랐다. 기발한 생각을 잘 해내는 로르카는 이렇게 설명했다.
“투우사 두 명이 망토 한 장을 같이 들고 투우와 싸우는 경우가 있지. 투우에서 가장 위험한 도전 방식이라 자주 볼 수는 없어. 백년에 두세 번 밖에 안 하거든. 그리고 투우사 두 명이 형제이거나 최소한 피가 섞인 친척일 때만 그런 경기를 하는 거야. 이것을 알알리몬 투우라고 하는데 우리 둘이 연설에서 한번 시도해 보자는 거야.” 170
행복은 피부와 마찬가지로 로르카의 일부분이었다. 176
미겔 에르난데스
내 세대의 스페인 시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시인들보다 우의도 좋고 단결력도 강하고 쾌활했다. 이와 동시에 우리 라틴아메리카 시인들이 더 세계적이고, 다른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페인 시인들 가운데 스페인어 이외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178
잡지 《초록말》
에르난데스의 얼굴은 스페인의 얼굴이었다. 햇빛에 깍이고, 씨를 뿌려 놓은 밭처럼 고랑이 파인 얼굴은 빵이나 지구처럼 둥글둥글한 데가 있었다. 바람에 그을려 까칠까칠해진 얼굴에서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은 강인함과 온유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180
1936년 7월19일이 발행 예정일이었으나 그날 거리는 화약 연기가 자욱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무명의 장군이 아프리카 주둔군을 이끌고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185
그라나다의 범죄
나는 내전을 경험한 사람이다. 스페인 사람 백만 명이 죽었다! 백만 명은 망명했다! 저 피 묻은 가시는 인류의 양심에 영원히 박혀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무어인 경호대 앞에서 사열하는 저 청년들은 섬뜩한 역사의 진상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186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186
로르카는 진정한 시인이었다. 우아한 기품과 천재성, 뜨거운 가슴과 맑은 폭포수가 그렇게 완벽하게 결합된 시인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로르카는 사방에 빛을 뿌리는 요정이었다. 가슴에 모아 둔 기쁨을 주변에 퍼뜨리며 행성처럼 삶의 행복을 반사하는 사람이었다. 순진하고 재미있고 세계적이고 지방적이고 독특한 음악가이고 명석하고 겁이 많고 미신적이고 명랑하고 고상한 로르카는 스페인 역사에서 개화한 민중 문화를 한눈에 보여 준 시인이었다. 또한 아랍-안달루시아 전통을 계승한 시인으로, 자유로운 스페인이라는 저 무대에서(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재스민 나무처럼 빛을 발하고 향기를 내뿜었다. 186~187
나는 폴 엘뤼아르와 함께 시간을 허비하는 미학적 즐거움을 여러 차례 누렸다. (……) 아라공은 지성과 학식, 독설과 능변을 두루 갖춘 전자제품 같은 사람이었다. 엘뤼아르 집을 나설 때는 까닭을 모르겠으나 나는 항상 빙그레 웃고 있었다. 반면에 아라공 집에 몇 시간 있다 나오면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생각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희한한 사람이었다. 193
그 무렵 스페인 내전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고, 세계대전이라는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은 그 규모와 잔혹성, 그리고 영웅적인 투쟁 면에서는 비교할 데가 없으나 스페인 내전만큼 시인들의 가슴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195
반파시즘 작가 대회
에르난데스가 흩어진 서류 더미 속에서 이미 책으로 출판된 몇몇 원고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어질러진 모습은 내 인생의 한 시기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나느 에르난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아.”
“정말, 책 한 구너도 안 가져 갈 거야?”
“음.”
우리는 빈 차로 돌아왔다. 204
6. 쓰러진 사람들을 위하여
한 길을 선택했다
나는 반은 빨갛고 반은 검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이 신발은 무정부주의자의 징표였는데, 제화공들은 이런 구두를 만들면서 꽤나 애를 먹었을 것이다. 208
이 같은 무리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떄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209
창작에 전력투구하기로 다짐했다.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훨씬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이제 우울한 시는 쓸 수 없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우수에 찬 주관주의나 『지상의 거처』에 담긴 고통스러운 애상은 막을 내렸다. 두 시집을 형성하는 광맥은 지하 암반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온갖 책갈피 속에서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214
역사적 사건, 지리적 환경, 우리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모두 아우르는 총괄적인 시를 반드시 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슬라네그라의 거친 해변과 대양의 사나운 물결 덕분에 나는 이 시의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215
나의 시는 투쟁을 통해 그들에게 조국을 찾아 주는데 성공했다. 226
암울한 시절 나는 혁명과 같은 지각 변동은 두려워하면서도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독소가 숨쉬는 공기와 먹는 빵에 스며들어도 수수방관하는 유럽인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익숙해졌다. 227
긴 여행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해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나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에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라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느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시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 내 시에서 가장 신비한 재료로 만든 새로운 대륙이 솟아나고 있다. 나는 이 대륙에 정착하고, 이 대륙에 이름을 붙이고, 신비한 해안선을 만져 보고, 파도를 잠재우고, 동물들이 사는 땅을 둘러보고, 지형을 측량하는 데 어둡고 고독하고 아득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228~229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에도 리베라는 대단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재담꾼이었다. 인육(人肉)이야말로 건강 식품이자 최고의 진미에 속하는 음식이라고 우겼다. 그리고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나이별로 사람들을 요리하는 조리법도 창안했다. 한때는 레즈비언 연애 이론을 대대적으로 설파한 적도 있었다. 자기가 직접 지휘한 발굴 작업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을 살펴볼 때 레즈비언만이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했다. 236
잡지 《아라우카니아》
라틴아메리카 몇몇 국가는 여러 민족이 혼합된 혼혈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인종주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는 과거 식민 시대의 잔재물이다. 모두들 정상에 오르고 싶어 하지만, 이 정상이란 극소수의 백인 속물들만이 순수 아리안 족이나 위선적인 관광객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뽐내며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다. 251
8. 암담한 조국
마추픽추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255
뿌리
내 시를 읽고 또 번역하던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뿌리’가 너무 많다고, 내 시에 뿌리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뿌리’가 많아?”
에렌부르크의 말이 사실이다. 내 시는 개척지 땅에 뿌리 내렸고 한 번도 그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내 인생도 긴 순례였다. 항상 돌고 돌아 칠레 남부의 숲으로, 무성한 밀림으로 되돌아왔다. 290
9. 망명의 시작과 끝
생명은 계율보다 강하다. 혁명은 생명이나, 계율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이다. 296
내 삶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한쪽에서는 몽둥이로 패고, 다른 쪽에서는 진정하라며 꽃다발을 건네준다. 303
중국인의 웃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노란색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농부들과 대다수 민중들은 이런 웃음을 짓는다. 다른 하나는 코 밑에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웃음이다. 이는 관료들의 웃음이다. 314
10.여행과 귀환
우리 집 양
소년을 불쌍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가 보라고 일러 줬다.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칠레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사물만 보면 나에게 무작정 떠맡기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나에게 책을 둘러씌우고 싶은 모양이다. 335
내 시와 경찰 사이의 거듭되는 대결에도 불구하고, 앞서 얘기했듯이 내가 경험한 황당한 일이나 이제는 얘기조차 못 하게 된 사람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342
내가 이런 중국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마오쩌둥이 아니라 마오쩌둥주의떄문이다. 다시 말해서, 마오-스탈린주의, 사회주의 신에 대한 우상 숭배 때문이었다. 353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한 사람의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354
11. 시는 직업이다
나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건달은 좀 전의 그 자세로 여전히 시를 외우고 있었다. “그 아이의 핏속에서 불타오를 생명으로 우리 삶을 묶어야만 할 것이다.” 건달은 시에 패배한 것이다. 384
시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386
언어와 함께 살기
가끔 발음을 기준으로 라틴아메리카인과 스페인인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언어 감각에 있다. 바로크 시대의 스페인 시인 공고라가 애용한 고도의 압축미는 우리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 공고라의 영향을 받지 않은 스페인어 시는 없다. 우리 아메리카 대륙의 지층은 먼지 이는 자갈밭과 부서진 용암과 피 섞인 진흙으로 구성되었다. 이런 우리들은 수정(水晶)을 세공할 줄 모른다. 정교하게 조탁된 라틴아메리카 시는 왠지 공허하게 보인다. 『마르틴 피에로』에 등장하는 포도주 한 방울이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에 나오는 흐릿한 꿀 한 방울 정도가 제격이다. 이런 소소한 사물도 이곳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꽃을 꽂아 둔 화병만큼이나 두드러져 보이니까. 388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 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움을 준 시인이 바로 맨해튼에 살던 월트 휘트먼이었다. 389
비평가도 고통을 당해 보라
우리 시인들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단, 우리가 민중과 강고한 유대를 맺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단서가 붙을 때만.
일리아 에렌부르크는 어느 글에선가 “바블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에렌부르크가 말한 파블로가 바로 나인데,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391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391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392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비합리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로지 합리주의만 추구하는 시인은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또한 한심한 일이다.
이런 방정식은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나 악마가 제시한 해법도 없다. 합리와 비합리라는 양극단은 시 내부에서 부단히 다투고 있으며 한번은 이쪽이 승리하고 다음 번에는 저쪽이 승리한다. 하지만 시 자체는 결코 패하는 법이 없다. 394
오늘날 시민사회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고대의 사제 행세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어둠과 결탁했다면, 이제는 빛과 함께해야 한다. 395
독창성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개성을 믿는다. 예술 창조에서 어떤 언어와 형식을 사용하든, 또 예술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개성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창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관념은 근대의 발명품이자 속임수의 산물이다. 395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휙 스치고 지나가기 떄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396
감정이라는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396
거장 엘뤼아르
이런 과정에서 공산당 입당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엘뤼아르에게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412
문단의 적
자발적인 망명을 떠나는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들 작품이 갈수록 우리 아메리카 대륙의 진실과 꿈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428
비평과 자평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나에게는 리얼리즘이 맞지 않으며, 적어도 시를 논할 경우에는 리얼리즘을 혐오한다. 그리고 시가 리얼리즘 이상이거나 리얼리즘 이하일 필요도 없으나 반리얼리즘이 될 수는 있다. 내가 말하는 반리얼리즘이란 모든 합리성과 모든 비합리성, 다시 말해서 모든 시를 내포한다. 435
나는 월트 휘트먼과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적인 영웅”을 좋아한다. 이 시인들은 어떤 공식에 의거하여 영웅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결코 쉽지 않은 창작 작업을 통해서, 우릳들의 일상생활에 들어와 빵과 꿈을 나눠 먹는 친근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사회주의 사회는 재촉하는 시대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이러한 시대는 재화보다는 광고 포스터를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본질을 곁가지로 치부한다. 435
나는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436
게바라는 미래를 예견한 듯이 일기장에 내 시 「볼리바르에게 바치는 노래」의 한 구절을 적어 놓았다. “용감한 대장의 왜소한 시신…….” 443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치스
13만 청중 앞에서 자기 시를 낭송한 경험이 있는 시인은 이미 예전의 시인이 아니며, 이전과 똑같은 생각으로 시를 쓸 수도 없다. 465
순박함의 교훈
나는 사회학적 사고를 하지 않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일반 원칙,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고 인류의 완고한 모순을 갈수록 이해하기 어렵다. 473
나는 혁명, 특히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간혹 오류와 불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성문화되지 않은 인류의 법칙은 혁명가나 반동주의자 모두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도 실수를 피할 수 없다. 혁명과정에서 드러난 맹점, 사소한 맹점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하찮은 일이다. 485
12.희망과 고난의 조국
파리 주재 대사관
180년 동안 칠레에서는 똑 같은 통치자들이 명찰만 바꿔 달았다. 그들이 해 놓은 일도 똑같았다. 누더기 옷, 누추한 가옥,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맨발의 아이들, 불쌍한 민중의 투옥과 구타가 전부였다. 502
구리 광산 국유화가 단행된 이후, 미국은 더욱 철저한 봉쇄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국제전화전신회사(ITT)는 전임 대통령 프레이의 동의를 얻어 기독민주당을 우익 파시스트의 품안으로 밀어 넣었다. 508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 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과두지배 세력이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두 경우 모두 군이 사냥개 역할을 했다. 발마세다의 경우에는 영국기업이, 아옌데의 경우에는 미국 기업이 이 같은 군부의 만행을 조장하고 후원했다. 515
불멸의 국민적 가치를 지니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칠레 해방을 원치 않는 적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비극적인 상징이 바로 대통령 궁 폭격으로 나타났다. 나치는 무방비 상태의 스페인, 영국, 러시아 도시를 전격적으로 공습했는데, 이제 칠레에서도 그런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말았다. 칠레의 공군 조종사들은 180년 동안 민선 정부의 보금자리였던 대통령 궁에 급강하 공격을 퍼부었다. 516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517
옮긴이의 말
성찰의 거울은 내면이 아니라 외면을 향하고 있다. 복잡한 사생활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 않고, 그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인물을 회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마치 네루다라는 창을 통해 20세기 세계사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534
네루다를 끊임없이 노래하게 만든 영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거의 무든 비평가가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대자연이다. (……) 그렇기에 네루다 또한 이렇게 고백한다. “아마도 사랑과 자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시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534
지난 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정치적인 억압과 굴레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사람에게 남겨진 정치적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535
이 책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책상머리에서 이론으로 다가온 게 아니라 스페인 내정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힘”으로 다가왔다. 히틀러와 프랑코로 상징되는, 전 방위적이고 무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에 대항하는 유일한 정항 세력이 공산주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마찬가지로 네루다에게도 공산주의는 권력이 아니었다. “시와 삶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인본주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536
네루다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약점이 적지 않은 사람이다. 때로는 정당한 공격도 받았고, 떄로는 부당한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기에 네루다는 이 책에서는 자신을 열렬히 변호하기도 하고, 공적을 자랑하기도 하고, 문단의 적이나 정적을 격렬하게 성토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네루다의 주관적인 견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537
Ⅲ.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네루다의 詩論이자 인생 에세이이자 여행기이자 인물 평전이다. 시와 문학에 대한 잠언 같은 한 마디는 효자손처럼 통렬한 시원함을 안긴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도록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든가’, 독창성이란 급속도로 몰락해 가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미신에 불과하다’는 말에서는 견고한 선입견을 불쑥 찌르고 들어오는 쾌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시인이자 공산주의자라는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고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시와 공산주의의 지형도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인의 영혼이 거기에 있었다. 이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남미 문학과 남미의 근현대 역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네루다가 활동하던 남미의 시공간을 체험하는 것은 비슷한 지형지세를 보였던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o 책의 구성과 장단점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내용이 흥미진진할 뿐더러 글의 장평에 여유를 두어 눈에 부담이 크지 않다는 게 장점이다. 각 장이 끝나거나(때로는 시작되는) 지점에는 장의 내용과 관련된 A4용지 한 장 분량의 에세이를 배치했는데, 글의 포인트를 압축 정리하여 이해도를 높이고 서술방식에 변화를 주어 환기의 효과를 주었다. 긴 여행(228쪽)이라는 에세이를 보자. 네루다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 이라고 민중에게 관심을 돌리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짧은 구성이지만 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민중에 대한 사랑으로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직관적 표현으로 서술했는데 한 편의 산문시같이 짝짝 달라붙는 맛이 있었다. 책 후미에 네루다 연보를 달아 시기별로 주요 사건을 챙겨 보기에 수월했다. 다만, 남미 사회주의 및 민중운동의 출발점이 된 식민지배와 그로부터 해방되기까지의 과정, 정치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온 스페인 내전과 칠레 내전 등 남미의 주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개요 설명을 추가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