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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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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15일 11시 27분 등록
  “파블로네루다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1. 저자에 대하여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1973년 9월 23일)


칠레의 시인이자 영사, 정치인으로서 대통령 후보까지 선정되고, 그리고 노벨상을 받는 등 네루다는 무척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시인과 대통령후보가 어울리기나 한 것인가? 

그의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례예스’이다. 열 살부터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타고난 시인이었나 보다. 10대 후반 부터는 아버지의 망토를 입고 보헤미안처럼 여기 저기를 떠돌며 살았다. 만나서 원하면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피를 가진 사람이었다. 피가 뜨거운 사람은 무척 위험하다. 그가 그랬다. 

글쓰는 것을 반대하는 부친에게 자신의 글을 숨기기 위해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하다가 결국 1946년 법원으로부터 정식 이름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판결을 받고 정식 개명한다. 우리는 그의 본명은 모르고 파블로 네루다라고 부른다.


파블로 네루다는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들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의 시는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문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인데, 성적인 표현이 많은 사랑 시들 (흰 언덕 같은)과 초현실적인 시들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인 서사시와 정치적인 선언문들도 있다. 그의 삶의 다채로움이 그의 글도 그리 만든듯하다. 콜롬비아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를 "어떤 언어로 보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고 했다.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둘은 아주 깊은 교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로르카가 1936년 죽는 것을 본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가져다주는 참상을 직접 겪으면서 네루다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회의식으로 충만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시가 변화한 것이다. 


1927년 6월 미얀마의 랑군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된다.  스리랑카(당시에는 실론), 자바,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서 5년여 동안 영사로 근무했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서 옮겨 일했는데, 마드리드 영사로 있을 때 스페인 내전을 겪는다.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에스파냐에 주재하고 있을 때, 인민전선정부가 탄생하고, 이어서 내란과 프랑코 독재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인간적 연대(連帶)를 역설하는 정치 시인으로 변모하여 정력적으로 반(反)파시즘의 시를 썼다. 귀국한 후 1945년에는 북부 탄광지대에서 칠레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된 네루다는 공산당에 입당한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산당 등 좌파진영의 지지를 받던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의 선전 책임자로 일했다. 그러나 비델라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한 노동자를 배신하고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인정하자 대통령의 배신을 폭로하는데 그 댓가로 의원직을 박탈당해 지하로 잠입하고, 이어서 망명을 하여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1950년에는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노래한 웅장한 서사시집 <위대한 노래>를 발표했다. 그 속의 장시 <나무꾼이여, 눈을 떠라>로 50년도 스탈린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52년에는 귀국하여 시 창작에 몰두했다. 70년에 아옌데 인민연합 정권이 수립된 후 주(駐) 프랑스 대사가 되었고, 1971년 네루다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후에 그의 정치적인 행태 때문에 논란거리가 되었다. 1973년 9월의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병상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집에는 1923년 발간한 첫 시집 ‘황혼의 노래’,  스무 살 이던 1924년에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 했다.  이 밖에 시집 <기본적인 오드> <세계의 종말> <불타는 칼> 등이 있다.


그는 시낭송회를 많이 가졌는데 1945년 7월 15일, 상파울루의 파깸부 운동장에서 그는 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혁명가인 루이스 카를로스 프레스테스를 기념하는 낭송회를 가졌다 노벨상 기념 강연후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초대로 에스타디오 나시오날(Estadio Nacional:국립 경기장)에서 7만 명 앞에서 낭송회를 가졌다.
그는 큰상을 받았다. 스탈린 평화상, 노벨상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상은 ‘민중시인’이라는 별칭이라고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보나 스스로 군중의 아픔을 대변하는 역할에 가장 큰 만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서전에 그가 매일 두 편의 시를 썼다고 하는 내용이 있었다. 네루다도 매일한 것이다.  그가 매일 시를 쓴 것이 그의 뜨거운 피가 용솟게 한 자연스런 표출이었는지, 자기 훈련을 위한 인지된 습관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과 노벨상을 받을 만한 시인이 탄생한 것이니 매일의 효과를 그가 확실히 보여준 것에는 틀림이 없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았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는 그에게 시는 언어가 아닌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데, 이것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 했고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천복을 누린 사람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 13]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준다. 나는 어쩌면 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P. 13] 내 인생은 신인의 여러 경험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1.시골소년

[P. 16] 이 식물왕국을 지배하는 법칙은 침묵뿐이다. ......그러나 땅의 음악을 요란하게 울리는 폭풍이 닥칠 때까지 이 식물 왕국은 소곤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칠레의 숲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유년기와 시

[P. 17] 유년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수 없는 것이 딱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진다.

[P. 17] 아메리카 남부에서 내리는 이 찬비는 열대 지방의 소나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열대지방에서는 채찍처럼 한바탕 거세게 쏟아지다가 파란 하늘에서 길을 비켜주지만 남반구의 비는 지구력이 여간 좋은게 아니다. 잿빛 하늘에서 줄기차게 쏟아져 내린다.

[P. 18] 원주민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가제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물건 모양의 간판을 내걸었다.

[P. 18] 변호사는 원주민의 땅을 사취하고 판사는 항의하는 원주민을 감방으로 보내고 신부는 지옥 불에 떨어질 거라고 위협했다. 마지막으로 술이 들어와 그토록 당당하던 아라우카 족을 전멸시키고 말았다.

[P. 19] 1904년 7월 12일 내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한달 수인 8월 오래전부터 결핵을 앓던 어머니는 세상을 버리셨다.

[P. 19] 40년 전 이런 자갈 기차에서 일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 그때문인지 자갈 기차 인부에게는 이력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기차의 기관사였다. 상명하복이 생활화된 사람이었다. 

[P. 21] 우리집은 임시 숙소 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탐험회사 같기도 했다. 집안에 들어서면 술통, 연장, 마구(馬具) 등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항상 공사중인 방도 있었고 공사를 반쯤하다 중단한 계단도 있었다. 이러다간 한평생 공사만 하다가 말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P. 30] 어떤 양귀비꽃은 비둘기만큼 크고 흰색이었고, 어떤 꽃은 핏방울처럼 붉었으며 어떤 꽃은 잊혀진 미망인처럼 보라색이나 검은색이었다. 이렇게 많은 양귀비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양귀비꽃에 대한 경외심에도 불구하고 또 온갖 꽃 가운데 이 꽃만이 자아내는 미신적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꽃봉우리를 땄다. 끊긴 줄기에서 흘러나온 진액이 손에 묻고 야릇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한동안 꽃을 어루만져 보다가 책갈피에 화려한 비단 꽃잎을 넣어두었다. 이 꽃잎은 날지 못하는 거대한 나비의 날개였다.

[P. 34] 물고기라도 잡아먹으면 좋을 것 같아 강바닥 모래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 은빛 물고기를 가리켰다. 그러나 슬픈 눈으로 물끄러미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P. 34] 그때 백조는 죽을 때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 35] 자두는 아직도 파란색이었다. 나는 소금 봉지를 들고 언덕으로 뛰어올라갔다. 자두나무에 올라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자두를 한입 베어낸 다음 소금을 뿌려서 먹었다. 이런 식으로 백개 정도 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먹었다.

[P. 36] 언제 처음으로 시를 썼는가? 난생처음 시심에 사로 잡힌 때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기억을 한번 더듬어 보겠다. 아주 오래전, 어릴 적 일이다. 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몇 자 적었다. 운율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일상 언어와는 다른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종이에 정서할 때에도 설렘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깊은 불안, 일종의 고뇌와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 어린 시절 항상 포근하게 나를 감싸 준 천사같은 새어머니에게 바치는 시였다. 첫 작품이 어떤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들께 들고 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식당에 앉아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이들이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확연하게 갈라놓는 대화 내용이었다. 나는 시적 영감이 채 가시지 않아 조금 떨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는 건성으로 받아들고 대충 훑어 본 후에 되돌려 주면서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 “어디서 베꼈니?”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중요한 문제를 논의했다. 내 기억으로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무책임한 비평의 쓴맛을 보았다.

[P. 37] 그 무렵 키가 큰 여자가 테무코에 나타났다. 긴 치마에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만년설로 뒤덮힌 칠레의 최남단 마가야레스 지방에서 여학교에 새로 부임해 온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945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여류시인] 이었다. 

[P. 37] 미스트랄과 가까이 지내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게다가 나는 지나치게 내성적이라 수줍음을 많이 탔다.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내가 갈때마다 책을 주었다. 하나같이 러시아 소설이었다. 미스트랄은 세계문학에서 러시아 소설만큼 뛰어난 작품도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 덕분에 나는 러시아 소설가들의 암울하고 섬뜩한 비전을 접하게 되었고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작품을 애독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작가들을 좋아한다.

[P. 41] 나는 깊은 호수에 빠진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한 탓에 호수 밑바닥에서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P. 41] “보들레르!” 그 여자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이런 외딴 시골에서 보들레르라는 이름을 듣다니, 아마 세상이 생긴 이후 처음일 거야. 우리집에 [악의 꽃]이 있는데 반경 500킬로미터 내에서 이 시집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들뿐이죠. 이런 시골에는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P. 42] 정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다 세자매는 요리의 대가였다 조상으로부터 프랑스 요리의 비법을 물려받은 것이다. 음식마다 생각지도 못한 맛이나 향기가 배어 나왔다. 술창고에서 오래된 포도주도 꺼내왔다.

[P. 43] “우리가 메뉴를 보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똑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거예요”

[P. 44] 고독하고 거친 삶속에서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없이 옛날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던 우수에 찬 세자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여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접근하기도 힘든 산중에서 조상이 일군 우아한 문화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었다.


2. 도시의 방랑자

[P. 52] “체념하라. 너는 우리와 가까이 지낼수 없다. 너는 죽었다. 이런 오싹한 경고문이 방, 식당, 복도, 작은 거실 할 것없이 도처에 붙어 있었다.”

[P. 53] 그러나 백발의 집주인은 내가 너무 영리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드나드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여자들이 찾아오는 것도 규칙을 만들어 제한하고 내책과 편지도 몰래 들춰 보았다. .... 이처럼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는 형편이니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에 길거리를 쏘다니며 새 방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P. 55] 그런 남편이 분마성 폐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야 금발의 아내 도한 분마처럼 날뛰는 비너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니실린이 없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편이 두어달 만에 쓰러진 데는 몸이 뜨거운 부인도 일조를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P. 56] 사실 청소년기에는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살았다.

[P. 56] 수줍음이란 마음의 병이며 고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또 한사람이 두겹의 껍질을 가진 것처럼 고통을 겪는다. 겉껍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속껍질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삶에서 움츠러든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이러한 특성,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강력한 자의식을 형성한다.

[P. 57] 그 당시에는 인류에 대해서 별다른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알 수는 없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P. 57] 사방벽면은 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채로운 색깔의 책등은 나로서는 향유할 수 없는 봄날이었다. 야네스 부부는 내가 겹겹이 세워 놓은 침묵과 고립의 장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씩이나 정중하게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그 집을 다녀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야네스 부부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자주 초대했다.

[P. 63] 로하스 히메네스의 시는 당대를 풍미하던 아폴리네르 시론과 스페인 극단주의 시학에 충실했다. 또 ‘아구’라는 시 운동을 주창하였는데 그는 이 말이 인간의 원초적 외침, 즉 갓난아이가 최초로 지어낸 시구라고 했다.

[P. 63] 그는 포도주 창고에서 포도주 병을 찾아내듯이 프랑스 시인들을 발굴했으며 프랑스스 잠의 여주인공들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아름다운 시를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녔는데 언제나 출판될지 모르겠다.

[P. 64] “선생님이 죽어 관속에 누워 있을 때 뛰어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입니다. 생전에 허락을 받고 죽은 다음에 뒤어넘는 것입니다. 저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제 취미랍니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제가 뛰어 넘은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로하스 히메네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이상한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몇 년뒤 칠레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겨울, 로하스 히메네스는 죽었다. ............그런데 그날밤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이상한 조문객을 맞이했다.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커다란 프라타나스를 뒤 흔들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문상객 차림의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낯선 남자는 친구들의 예상을 뒤엎고 곧바로 관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말 한마디 없이 비 내리는 밤거리로 총총히 사라졌다. 이처럼 로하스 히메네스의 경이로운 삶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의식으로 막을 내렸다.            

[P. 66] 광기와 시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성적인 사람은 시인이 되기가 무척 어렵듯이 시인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가 무척 어렵다. 물론 이성이 우위를 점해야 함녀 정의의 근간인 이성이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P. 77-78] 첫 시집! “작가의 작업은, 적어도 시인의 작업은, 신비하거나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작업,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시와 가장 유사한 것은 빵이요 질그릇이요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껏 깎은 목각품이다.” 그러나 어떤 장인도 시인처럼 자신이 손으로 처음 창조한 대상에서 이러한 도취의 감정이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은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완전하고 아름다운 책이 되고, 시인의 언어는 향기를 품고 노래하는 포도주처럼 다른 언어라는 술잔에 옮겨져 지구 곳곳을 누비겠지만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낸 저 순간, 날개를 활짝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 듯한 저 황홀한 도취의 순간,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 첫눈에 들어오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는 그런 환희의 순간은 시인의 일생에서도 단 한 번밖에 없다.

[P. 79] 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내려 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물만난 물고기가 헤엄치듯 술술 시를 써내려갔다.  
[P. 80] 특히 그날밤의 열광도 불모의 꿈이었다는 사실을 좀처럼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밤하늘의 별에 푹 빠져 버린 것도 저 남극 하늘의 폭풍을 내 감각으로 포착한 것도 다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실수를 한 것이다. 영감을 믿지 말아야 했다. 이성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걸음 좁은 길로 나아가야 했다. 겸손을 배워야 했다. 찢어 바린 원고도 많았고 다시 써야 하는 원고도 많았다. 이 원고는 10년후에야 비로소 책으로 출판되었다.
사바트 에르카스티의 편지를 받고 장시를 쓰겠다는 야망을 접었다. 내가 제대로 천착할 수 없는 웅대한 시와는 담을 쌓았다. 의도적으로 문제와 표현을 낮추었다. 한결 소박한 표현과 내 고유의 조화로운 세계를 추구하면서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이다.
[P. 83] 그 시절부터, 간혹 공백도 있었지만, 정치는 내 시와 삶의 일부를 차지했다. 시를 쓸 때 젊은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사랑, 삶, 기쁨, 슬픔을 외면할 수 없듯이 나는 길거리 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P. 84] 나는 윙하고 날아가는 말을 붙잡습니다. 말을 생포해서 잘 씻고 껍질을 벗겨 접시에 담아 내놓습니다.

[P. 84] 말을 휘젖고 뒤흔들어 마십니다. 꿀꺽꿀꺽 삼킵니다. 말을 분쇄합니다. 말을 치장합니다. 말을 해방시킵니다. 말을 종유석처럼 곱게 손질한 나무 조각처럼, 석탄처럼 파도에 밀려오는 난파선의 잔해처럼 시에 놓아둡니다. 모든 것이 말에 달렸습니다. 어떤 생각은 통째로 바뀌기도 합니다. 말이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어떤 문장에 기대하지 않은 말이 느닷없이 끼어들더니만 이내 여왕 행세를 하면서 문장을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

[P. 84-85] 우리말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흉포한 정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이 언어가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정복자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게걸스러운 식성으로 감자, 소시지, 콩, 담배, 금, 옥수수, 달걀 프라이를 찾아 험준한 산맥을, 거친 아메리카 대륙을 성큼성큼 돌아다녔습니다. 정복자들은 종교, 피라미드, 종족, 그리고 그들이 보따리에 담아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상을 모두 집어삼켰습니다. 가는 곳마다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 야만적인 정복자들의 장화 밑바닥에 박혀있던 조약돌처럼 수염에서, 투구에서, 편지에서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 빛나는 말이 여기 남아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패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자였습니다. 저들은 황금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황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갔지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우리들에게 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3. 세계의 길
[P. 95-96] 위를 쳐다봐도 아래를 내려다봐도 계단이 휘감겨 돌아간다. 계단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지다가 층계참에서 조금 쉬는가 싶더니 다시 수직으로 휘감긴다. 현기증이 나도록 급경사를 이루다가 조금 완만해지면 다시 내리막이 나타난다. 계단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계단이 몇이나 될까? 층계는 몇이나 될까? 계단을 밟는 발은 얼마나 될까? 빵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을까? 저 계단이 닳아서 빗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배수 통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계단! 

어떤 도시는 발파라이소처럼 계단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지 않는다.

[P. 100] 1920년대 칠레의 문화계는 몇몇 용기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유럽에 의존하고 있었다.

[P. 107] "당신은 우리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입니다. 루벤 다리오만이 당신과 견줄 수 있을 뿐이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예흐, 우리 친구로 지내고 싶다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을 작가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어떤 사이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오”

[P. 118] 어디를 가든 내 꿈은 식물처럼 사는 것이다. 한곳에 눌러앉아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기에...


4. 빛나는 고독
[P. 125] 누가 이 많은 뱀을 여기에 갖다 놓았을까? 어떻게 뱀을 길들였을까? 이렇게 묻자 입가에 웃음을 띤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 “뱀은 제발로 왔고 또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납니다. 문은 항상 열려 있고 뱀의 앞길을 가로막는 창살이나 유리창은 전혀 없답니다.”

[P. 127] 시인은 민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은 내게 이런 경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명예가 있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형제애가 있고 어둠속에서 꽃피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교훈이었다.
[P. 131] 실제 동양에 가보면 흔히 말하는 동양의 신비주의란 서구인이 직면한 불안 노이로제 혼란 기회주의의 부산물임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발생한 부산물인 것이다.

[P. 136] 표범같은 조지 블리스를 미얀마에 버렸다는 게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배가 벵골 만의 파도를 가르고 출발하자마자 나는 [홀아비의 탱고]라는 시를 썼다. 핏속에서 쉼없이 분노의 화산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린 여인, 내가 잃어버린 여인에게 바치는 비극적인 시였다. 그날밤은 왜 그리도 광막하게 보였으며 대지는 왜 그리도 외로워 보였던가!

[P. 141-142] 며칠 전 누이가 공책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이 공책에는 오래전에, 1918년과 1919년에 사이에 쓴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청소년기의 우울을 보고, 다시 말해서 내 젊은 시절의 모든 작품들에서 발산하는 문학적 고독을 보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젊은 작가는 이런 몸서리치는 고독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도 그렇다. 이는 성숙한 작가의 인간적 동료의식, 사회의식 없이는 아무런 글도 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P. 148-149] 드디어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배 타는 데 까지만 바래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배가 닻을 올리고, 나는 배에서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려가 승객들을 헤치고 뛰어나왔다. 슬픔과 사랑에 복받쳐 내 얼굴을 키스와 눈물로 뒤덮었다. 그리고 무슨 의식을 행하듯 내 팔과 옷에 키스를 하더니 갑자기 내 구두에 얼굴을 묻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얼굴은 백구두의 초크 가루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떠나지 말라는 얘기는 못 했다. 이제 떠나면 영원히 못 만날 테니 우리 함께 배에서 내리자는 말은 못 했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가눌 길 없이 북받쳐 오르던 저 설움, 초크 가루로 뒤범벅된 얼굴 위로 흘러내리던 처절한 눈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P. 149] 이처럼 허공에 뜬 내 삶의 이야기가 이 시집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표현되어 있다. 잉크보다는 피를 가까이 하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 문체는 한결 정제 되었고, 반복되는 광적인 우수를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진리와 수사법을 고려할 때 씁씁한 문체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유의 문체를 체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문체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대기가 스며들지 않는 시는 죽은 시다. 숨을 쉴수 없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 
[P. 155] 칠레 정부가 왜 세계 곳곳에 수많은 영사관을 설치했는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극 근처의 구석에 처박힌 작은 공화국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군도, 해안, 산호초에까지 공식대표를 파견하고 주재시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런 영사관은 본질적으로 우리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존심과 환상의 산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언급한 대로 칠레는 이처럼 멀리 떨어진 외국에서 황마와 양초의 원료인 고형 파라핀,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차를 수입한다. 칠레 사람들은 하루에 네 번 차를 마시는데 국내에서는 차를 재배할 수가 없다.

[P. 166] "네루다는 1932년에 칠레로 돌아왔다. 귀국하기 2년전, 바타비아에서 자바 섬에 정착한 젊은 네델란드 여인 마리아 안토니에타 아헤나르와 결혼했다. 그녀는 영사의 아내라는 신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메리카를 매우 이국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지금 매우 열심히 배우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언어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서적으로 네루다와 굳게 결합되어 있다. 두 사람은 늘 함께 나다닌다, 마루카는 키가 크고 온화하며 성직자 같다."


5. 가슴속의 스페인

[P. 177] 그러나 급히 서두르다 보니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그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와 나는 로르카를 일으켜 세워야 했는데,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로르카는 보름 동안 다리를 절고 다녔다. 

[P. 179] “에르난데스, 드디어 직업이 생겼어. 자작이 자네에게 한자리 주겠대. 이제 아주 높은 자리에 앉게 된 거야. 원하는 자리가 뭔지 말해 봐. 그래야 임명을 하지.” 에르난데스는 생각에 잠겼다. 때 이른 주름살이 깊이 파인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이 지난 오후에야 그는 대답을 주었다. 인생 문제의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마드리드 근처에서 염소 Ep를 키울 수 있게 해줄 수는 없을까?”

[P. 182-183] 각광받는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 이사람을 보고 그 유명한 스페인의 시기심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다른 사람을 시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암울한 20세기 초에 그의 시집은 찬란한 빛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둔자 행세를 하고 살면서 자기 명성을 가린다 싶으면 닥치는 대러 비난을 퍼부었다.   
[P. 186] 그런데 로르카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로르카는 또 다른 교살자를 만났던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스페인 내전은 한 시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이어 내 시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P. 187] 나는 로르카 작품의 메타포가 가지는 힘에 매혹되었으며 그가 쓴 모든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로르카 또한 종종 내 최신작을 읽어 내려가면 “그만! 그만해! 이러다간 자네 영향을 받겠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P. 188] 나는 청색이 제일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색은 하늘처럼 자유와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적인 공간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로르카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어떤 자리든 얼굴만 내밀어도 분위기가 살아났습니다.

[P. 192] 내 영사 생활도 끝이 났다, 칠레 정부는 공화군 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를 해임했다.

[P. 194] 낸시 큐나드와 함께 시 전문 잡지를 발행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지지한다.” 라는 잡지 제목은 내가 정했다.

[P. 205] 우리 집은 양 진영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무어인들과 이탈리아군이 진격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마드리드를 방어하는 세력이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기관총 탄환이 벽을 뚫고 들어왔다.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책이 널브러진 방바닥에는 탄피가 굴러다녔다. ............마지막 잔치가 끝난뒤....사라진 가면과 더불어 방바닥에 나뒹굴던 가면과 더불어 우리집에 무단 침입한 저 병사들과 더불어 내가 사랑하던 스페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6. 쓰러진 사람들을 찾아서

[P. 207] 나중에 칠레로 돌아와서 공식적으로 입당한 후에야 당원 증명서를 발급받았으나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게 되기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P. 209]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P. 210] 시는 언제나 평화적인 행위이다,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평화가 있어야 시인도 있다.

[P. 210] 그러나 시는 죽지 않았다. 시는 동요에 등장하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일곱 개나 되는 불사신이다. 시를 괴롭히고 길거리로 끌고 다니고 침을 뱉고 조롱거리로 만들고 목 졸라 죽이려 들고 추방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총알을 난사해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갓 씻은 해맑은 얼굴을 보이고 갓 찧은 쌀알 같은 웃음을 짓는다.
[P. 214] 시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을까? 시가 인류의 투쟁에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지금껏 시는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영역을 실컷 걸어왔다. 이제는 걸음을 멈추고 휴머니즘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휴머니즘이 현대 문학에서 추방되었다고는 하나 인간 존재의 염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의 노래]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P. 228]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 그동안의 긴 여행이 헛고생이었을까? 나는 다시 한 번 새로 발견한 땅위에 홀로 남게 되었다. 탄생의 순간처럼, 초기 시의 원천이었던 형이상학적 공포에 경악했을 때처럼, 내 작품에서 창조한 새로운 황혼을 맞이했을 때처럼 지금 나는 또다시 고뇌와 고독에 휩싸여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돌아갈 것이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어디를 향해 침묵하며 또 어디를 향해 소리칠 것인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제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직 내 손으로 공들여 만들어 놓은 공허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 있던 것,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강렬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을 뿐이다.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바라보았으니 텅 빈 도시만 눈에 들어왔다. 비참한 모습의 공장을 둘러보았으나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P. 228]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자 세상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영원해졌다. 이제 우리는 대지 위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무한정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어떤 신비도 찾지 않는다. 우리들이 바로 신비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일부가 되고, 바다 속과 지하 세계의 일부가 되고, 놀라운 식물 세계로 들어가고, 대낮에도 유령과 대화를 나누고, 땅속 깊은 곳에 숨겨진 광물을 탐색하고, 가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어주고 있다.


7. 멕시코, 꽃과 가시의 땅
[P. 235] 멕시코는 지적 생활은 회화가 지배했다. 멕시코 화가들은 역사와 풍물, 시민 항쟁, 격렬한 논란의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가지를 뒤덮었다.

[P. 237] 리베라는 비록 거짓말일지언정 설득력 있는 어조로 구체적인 사항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는 창의력을 지닌 허풍쟁이였다. 이는 리베라를 만나본 사람이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P. 238] 이런 활화산 같은 화가들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끔 그들은 무시무시한 논쟁을 벌였다. 한번은 논리가 궁해진 리베라와 시케이로스가 커다란 권총을 꺼내 들고 거의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상대방을 향해 쏜것이 아니라 극장 천장에 있는 석고상 천사의 쏘았던 것이다.

[P. 244-245] 나는 열네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못하게 막았다. 당신 아들이 시인이 되는게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발표할 때 아버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 필명을 사용했다, 어떤 잡지에는 네루다라는 체코인의 이름을 보고 필명으로 사용한 것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체코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작가로서 아름다운 발라드와 로망스를 창작하였으며, 프라하의 말라스트라나에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P. 249] 그 뒤 쿠바를 포함하여 여러나라에서도 조개껍데기를 교환하거나 구입했다. 때로는 선물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훔치기도 했다.(수집가치고 정직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렇게 모은 바다의 보물은 방을 가득 채우고, 이내 집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중국, 필리핀, 일본, 빌드 해에서 희귀종을 구했다. 남극 소라와 쿠바의 플라미타 달팽이 껍데기도 수중에 넣었다. 카리브해의 댄서들처럼 빨간색과 주황색, 청색과 보라색 옷을 입고 있다. 

[P. 255] 자청해서 총영사직을 사임한 덕분에 아주 즐거운 일이 생겼다.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나라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 뽑힌 사람이 맛보는 좌절감은 어떤 형태로든 영혼을 흐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향 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발을 딛고, 내 땅을 만지고, 내 땅의 소리를 듣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의 물소리와 그림자를 느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내 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자양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칠레로 돌아가기 전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내시는 한층 더 두터워졌다.
[P. 257] 지금 이야기하려는 일이 있은 지 몇 년 뒤, 나와 인터뷰한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이탈리아 소설가)는 신문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칠레 시인이라면 파블로 네루다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아니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발도 없는 사람들 편을 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P. 258-259] 나는 이런 북쪽 출신이 아니라 정반대의 남쪽 출신이다. 땅은 푸르고 삼림은 울창한 고장에서 태어났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와 눈을 맞으며 성장했다. 이런 나에게는 단지 이러한 달나라 같은 사막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뒤바뀔 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의회에서 지역민의 여론, 소외감, 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물 한방울 없고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땅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강가에 펼쳐진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사막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나는 사막의 언어, 다시 말해서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P. 262-263]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았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런 상이란 나비 날개에 묻은 꽃가루처럼 덧없는 것이다. 내가 받은 제일 큰 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멸하지만 실제로는 정말 받기 어려운 그런 상이다. 어려운 미학적 연찬을 거치고 수많은 언어의 미로를 통과한 끝에 민중시인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내 글이나 시집도 아니고, 시어를 해석하거나 해부한 비평서도 아니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로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주는 시인이 있어.”
1945년 7월 15일, 나는 칠레 공산당에 가입했다.
[P. 266] 우리 신인들은 본래부터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연기를 내뿜는 불길이다. 이러한 불길로 나는 창작에 전념했다.

[P. 274] 떠날 때가 임박했다. 곧 눈이 내릴 것이고, 도 안데스 산맥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동료들은 매일 길을 찾아 나섰다. 말이 좋아서 길이지 사살은 오래전에 눈과 낙엽으로 뒤덮혀 버린 오솔길을 찾아 나서는 탐험이었다.

[P. 276] 나는 지금도 그 사람 편이다. 그 사람은 기엇에서 지울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로드리게스는 자유를 찾아가는 한 시인을 위해서 원시림에 6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뚫으러고 명명한 작은 황제이다.

[P. 279] 저 워시림 한가운데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시야가 탁 트였다. 산 기슭에 동지를 튼 작고 아담한 초원이었다. 맑은 물, 푸르런 풀밭, 야생화, 강물소리 파란 하늘, 그리고 수목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아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술로 펼쳐놓은 듯한 그 초원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신성한 장소에 초대받은 손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그 뒤에 참여한 의식으로 더욱 강해졌다.

[P. 285] 그 무렵 파리에서는 평화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대회장에 나타나 시 한편을 낭송했다. 모든 대표들이 박수갈채와 더불어 나를 포옹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다. 무지비한 칠레 경찰의 추적을 어떻게 따돌렸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P. 286] "사실 그 희곡을 쓴 사람은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아니라 다른 영국인입니다. 다만 우연히 세익스피어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 이름 또한 윌리엄 세익스피어였습니다."

“기자 양반 이렇게 쓰세요. 나는 파블로 네루다가 아니라 다른 찰레인입니디. 하지만 그는 시를 쓰고 자유를 위해 싸우며 이름 또한 파블로 네루다라고요. ”


9. 망명의 시작과 끝

[P. 294]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첫인상은 광할한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넓은 평징[서 물결치는 자작나무, 누구의 손길이 닳지 않는 광대한 숲, 큰강, 밀밭위로 무리지어 달리는 말.

나는 첫눈에 소련 땅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땅은 전 세계인에게 정신적 교훈을 주었고 눈부신 진보를 이룩했다. 이와 더불어 나는 순수한 자연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이 스텝 지대에서부터 획기적인 비상이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다.

[P. 298] 문학의 궁극적 목적을 논의할 때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에서 새로운 형식, 즉 기존 형식의 혁신은 관습적인 틀을 넘어서거나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문학이 어떻게 철저하고 광범위한 혁명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경험한 승리, 갈등, 인간적인 문제, 풍요, 진보, 성장을 핵심적인 주제에서 제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잔인한 침략자들에게 짓밟히고 집요한 식민주의자들과 온갖 종류의 우민화를 자행하는 세력에게 포위된 저 소련의 민중들과 연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문학이나 예술이 이처럼 본질적인 사안을 외면하고 공허한 자율성만을 고집해도 된다는 말인가?
[P. 300] 작가의 작업도 저 얼음 낚시꾼의 작업과 공통점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작가는 강을 찾아야 한다. 만일 강이 얼어붙었다면 끌로 구멍을 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 내고 조소를 이겨 내야 한다. 또한 깊은 강물을 찾아 적절한 낚싯바늘을 던지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한 다음에 아주 조그마한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낚시를 던지고 추위와 고통을 견뎌 내면 시간이 갈수록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P. 307] "내가 보기에, 평화를 말하거나 평화를 위해 무언가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편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복수와 전쟁을 외치는 사람만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P. 314] 중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잘 웃는 사람들이다. 혹독한 식민 시대와 혁명, 기아와 학살을 겪었으나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잘 웃는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인구가 수확한 가장 귀한 쌀은 어린아이의 웃음이다. 그러나 중국인의 웃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노란색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자연스런 웃음이다. 농부들과 대다수 민중들은 이런 웃음을 짓는다. 다른 하나는 코 밑에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웃음이다. 이는 관료들의 웃음이다.

[P. 321] "네루다는 로마에 머물라! 네루다는 이탈리아를 떠나지 마라! 저 시인에게 체류를 허락하라. 칠레인은 남고 오스트리아인은 쫒아내라!“

[P. 324] 나는 완벽한 고독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전 시를 쓰고 마탈데는 오후에 타자기로 옮겼다. 우리가 한집에서 기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에서 우리 사랑은 점점 깊어 갔다. 우리는 더 이상 떨어져 살 수 없게 되었다.

[P. 325] 그러나 느닷없이 정렬로 불타오르는 이 시집은 유순한 그녀가 보면 돌팔매질이나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익명을 고집했던 근본적이고, 개인적이고, 존경할 만한 단 하나의 이유이다.

[P. 330] 해양 동물 가운데 일각고래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동물은 없다. 그 이름에서 ‘노래하는 바다의 술잔’ 또는 ‘수정 뿔피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10. 여행과 귀환 

[P. 335] 칠레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사물만 보면 나에게 무작정 떠맡기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나에게 책임을 둘러씌우고 싶은 모양이다. 참 이상한 풍조다. 아무튼, 어느날 우리집을 찾아온 소년은 묶여있는 양을 보았다. 필요도 없는 양을 떠맡은 마당에 소년 한명 더 떠 맡는다고 해서 부담이 크게 늘어날 일도 아니었다. 소년에게 양 돌보는 일을 맡겼다.

[P. 341] 나는 파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 역시 그 누구도 파문시키지 않을 것이다. 파스칼 같은 신부에게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영세를 주어서는 안되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당신은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시, 당신의 창작물을 게재할 수 없소.”라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누구나 성당에 들어갈 수 있고, 인쇄소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추방하려고 시장을 면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누구나 웃는 얼굴로 시청을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란다.

[P. 341-342]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로지 한길을 추구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길이 우리 모두를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P. 347] 내가 보기에 중국은 수수께끼 같은 나라가 아니었다. 현재 강력한 혁명적 추동력을 얻고 있기는 한, 이미 수천년 동안 건설되었고, 항상 건설 중인 나라로 보였다. 인간과 신화 즉 전사와 농민과 신들이 들락거리는 거대한 탑 같았다. 즉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웃음마저도 그랬다.
[P. 353-354] 스탈린의 경우, 나도 개인 숭배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은 우리에게 히틀러  군대를 물리친 승리자, 인류의 구원자로 보였다. 이러한 스탈린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이며, 우리들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땅도 하늘도 광대한 이 혁명 중국에서, 그것도 대낮에, 한 인간을 신화로 만드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게 만드는 신화, 즉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한 사람의 손아귀에 맡겨 버리는 신화였다. 나는 이처럼 쓰디쓴 약을 두 번씩이나 삼킬 수는 없었다.

[P. 360] 멀리 남쪽으로 눈덮인 아라라트 산이 아르메니아의 역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바로 이산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 그리하여 지상에 다시 만물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용암대지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이런 땅을 일구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고 그 결과 고대 세계에서 최고의 민족 문화를 일궈냈다.

[P. 362] "네루다 시인이 꼭 동물원에 가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문인협화만 방문해도 온갖 종류의 동물을 다 보실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 우리들 가운데 사자, 호랑이, 여우, 물개, 독수리, 뱀, 낙타, 앵무새가 다 있잖습니까."

[P. 363] 헝가리에서는 ‘황소의 피’라고 부르는 독한 포도주를 맛본 적도 있었다. 취기가 올라오면 집시가 연주하는 바이올린도 딸가닥거린다는 술이다.


11. 시는 직업이다.
[P. 377] 나는 시 몇 편을 읽고 몇 마디 설명을 한 다음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시를 한편, 한편 읽어 나가며 내 목소리가 깊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또 저 노동자들의 검은 눈동자와 눈썹이 점차 내 실[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제야 진전한 독자를 마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운율에 취하고 또 바려진 영혼들이 시에 젖어 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계속 시를 낭독했다.

[P. 378] 이처럼 냉대와 열광을 한꺼번에 경험한 뒤에 달라지지 않을 시인은 없을 것이다.

[P. 384] 나는 천천히 방을 나왔다. 건달은 좀 전의 그 자세로 여전히 시를 외우고 있었다. “그 아이의 핏속에서 불타오를 생명으로 우리 삶을 묶어야만 할 것이다.” 건달은 시에 패배한 것이다.

[P. 387] 언어와 한평생 같이 살다보면 친근감이 몸에 배어 언어를 잡아당겨보고, 탐구해 보고, 머리카락과 배를 뒤져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인어를 다루었다. 구어도 색다른 맛이 있으나 문어또한 예상외로 맛깔스러운 면이 있다. 작가의 개성은 언어를 옷이나 피부처럼 사용함으로써, 소매나 기운 자국이나 땀이나 핏자국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것이 문체이다.
[P. 388-389] 만약 내 시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경향일 것이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문화의 틀 속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았다. 내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고향 개척지 사람들이 땅을 넓혀 갔듯이 나 자신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했다.
[P. 391]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데, 이것도 물론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나는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다. 양심은 편안하고 지성은 불안한 사람이다.
[P. 391-392] 얼마전 내 작품에 관한 비평을 읽었다. 성직자이자 명석하기로 소문난 젊은 비평가의 글이었는데, 명석한 비평가라고 해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비평가에 따르면 내 시의 약점은 바로 행복감이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고통을 처방했다. 이런 논리라면, 맹장염을 앓아야만 탁월한 신문을 쓸 수 있고, 복막염을 앓아야만 숭고한 시를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 수중에 있는 소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소재로 작업할 것이다. 나는 잡식성이어서 감정, 존재, 책, 사건, 전투 등 무엇이나 삼킨다. 온 땅을 먹고 싶고,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
[P. 393] 나는 가진 것 없이 맨몸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는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함부로 비웃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었다. 어리석은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양식있는 사람은 후일 내 시에 공감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비뚤어진 사람은 점점 나를 두려워했다.

[P. 394] 시란 인간의 심오한 감상에서 우러나온다. 바로 이런 감성에서 예배와 찬송이 우러나왔고, 나아가 종교가 탄생했다. 시인은 갖가지 자연 현상과 대담하게 맞섰고, 원시시대에는 사제라는 이름으로 직책을 유지했다.

[P. 395-396] 내 초기 시집에서는 감정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인이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나 애정을 노래하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러나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시는 감정보다 한층 본질적인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통제된 자발성을 믿는다. 이를 위해 시인은, 이를테면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용품처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품목은 단어, 음성, 비유에 대한 형식적, 실제적 정보이다. 이런 것들은 벌처럼 귓가를 휙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에 재빨리 낚아채서 주머니 속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나는 이런 면에서서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나 좋은 충고인 것만은 틀림없다. 마야코프스키는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감정이란 품목도 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한다는 말인가? 감정이 생길 때,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종이 앞에서 그 의식을 기억해 낼 수 있는데, 감정보다 훨씬 더 선명하다.
[P. 396] 신비한 영감이라든가 시인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은 불순한 의도를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창의력이 발현되는 순간에 창작한 작품이라고 외적인 압력이나 이전의 독서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얼마간은 타인의 것이다.

[P. 399]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P. 401] "나는 사사로운 깃발을 내걸지도 않고, 선수상도 수집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이아들 팽이가 욕심나서 우는 아이와 똑같다.
[P. 403] 각종 문학상에서 받은 상금으로 고가의 희귀 서적을 구입할 수 있었다. 내 장서량은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 서가에서는 희귀본 시집이 빛을 발했고, 자연사에 관심이 많은 탓에 총천연색 양장본의 식물도감, 조루도감, 곤충도감, 어류도감도 빼곡하게 들어찼다.

[P. 405] 수집품을 대학에 기증한 지도 20년이 지났는데, 그 이후로 내 장서와 조개껍데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책방과 바다로 되돌아가 버린 모양이다.

[P. 411] 엘뤼아르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란 동반자가 필요해. 자질구레한 인생사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 말이야.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내 숨통을 조르는 것 같아.”
[P. 421-422] 미스트랄은 한밤중에 데무코 역을 통과했다. 테무코에서 코피우에 꽃을 받기 싫어서 일부러 복잡한 야간 열차를 이용한 것이다
지금 미스트랄을 악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가슴 깊이 사무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토록 수려한 시를 쓴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증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P. 423] 나는 당신과 함께 진리와 본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진리와 본질은 우리들의 목소리와 우리들의 행동 덕분에 소중히 간직될 것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 마음이 대양과 안데스 산맥 사이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 조국에서 고이 잠들고 살고 싸우고 노래하고 창조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고귀한 이마에 입맞춤하고, 당신의 원대한 시에 경의를 표합니다.

[P. 427]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문인들 사이의 갈등은 지구 어느 곳에서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문단에서는 자살하는 문인이 많다.

[P. 430] 우리 시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거창한 허무주의, 즉 어설픈 니체식 냉소주의를 내세워 범죄자의 탈을 뒤집어썼다. 이 덕분에 작지 않은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거나 자기 파멸로 치달음으로써 인생을 망쳤다.

[P. 435] 나는 월트 휘트먼과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긍정적인 영웅”을 좋아한다. 이 시인들은 어떤 공식에 의거하여 영웅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결코 쉽지 않은 창작 작업을 통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들어와 빵과 꿈을 나눠 먹는 친근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P. 436]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내 시를 링 위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종종 시와 더불어 나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고통을 경험하고 영광을 찬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P. 441] 세월은 흘러간다. 사람은 소진되거나 꽃을 피우고, 고통을 당하거나 환호성을 올린다. 세월은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기도 한다. 이별이 좀 더 잦아지고 친구들이 수감되었다가 출감하기도 하고 유럽에 다녀오기도 하며 그냥 죽기도 한다.

[P. 448] 사실, 지구라는 이 행성에 사는 작가들은 한 번쯤 노벨 문학상을 꿈꾼다. 노벨상에 대해 겉으로 아무런 내색을 안하는 작가도 심지어 노벨상을 거부하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P. 456] 노벨상 시상식에는 조용하고 예의 바른 관중들이 참석했다. 관중들은 적절한 순간에 점잖게 박수를 쳐 주었다. 늙은 국왕이 수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상장과 메달 그리고 수표를 주었다 그리고 상장을 받은 수상자들은 지정된 좌석으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관중들의 얘기에 따르면 국왕이 다른 수상자들보다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내손을 더 오래 잡았으며 눈에 띄게 다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P. 472] 많은 사람들이 나를 확고한 스탈린주의자라고 믿었다. 파시스트와 반동분자들은 스탈린 에 대한 서정적 주석가로 묘사해왔다, 특별히 기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뒤죽  박죽인 혼돈의 시대에는 평가도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니까.

[P. 474] 현대 시인은 침몰하는 선박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맨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이성의 꿈으로 도피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의 자발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에 매료되어 즉흥주의자가 되었다.

[P. 479]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우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희망의 대륙’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한다. 하원 선거나 상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도 자신이 ‘희망의 후보’라고 선전한다.

이러한 희망은 실제로는 ‘천국의 약속’ 같은 것이고, 항상 변제 날짜를 뒤로 미루는 차용증 같은 것이다. 다음 선거까지 미루고, 다음 해까지 미루고, 다음 세기까지 미룬다.

[P. 485]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많다. 예를 들어, 불굴의 혁명 투사라는 나의 자부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옹졸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속사정이야 어떻든 아직도 치욕이라고 여기는 그 편지에 서명한 사람들하고는 지금까지 악수를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악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2. 희망과 고난의 조국
[P. 488] 극단주의자보다 수천 배나 위험한 존재가 스파이다. ..... 어떤 스파이는 도발 행위를 부추기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어떤 스파이는 끈질기게 관찰 임무만 수행한다.

[P. 492] 당에 입당하고 나서 십 수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만족스럽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족처럼 지낸다,  풍파에 시달려 피부는 거칠어졌어도 마음만은 따뜻한 사람들이다. ..... 어딜가나 공산주의자들은 매를 맞는다.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 얻어맞는다.

[P. 495] 사람들이 항상 묻는 말이 있다. 특히 기자들이 그러는데 지금 무슨 작품을 쓰느냐 또는 무슨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왜 사람들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항상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한번도 쉬지 않고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시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시가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P. 496] 나는 군중에게 인생을 배웠다. 시인의 타고난 수줍음으로, 수줍은 사람의 두려움으로 군중에게 다가가지만,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본질적인 다수의 한 부분으로, 거대한 인간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으로 변모한다.

고독과 군중은 이 시대 시인이 떠맡아야 하는 기본 의무이다. 고독 속에서 내 삶은 풍부해졌다. 칠레 해안에서 바위와 전투를 벌이는 파도,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다, 완벽한 편대를 이룬 철새, 그리고 눈부시게 부서지는 포말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군중이란 거대한 물결에서,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정한 눈길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P. 499] 내가 만일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험난한 문제가 산적되어 있고, 특별한 해결책도 없고, 외채만 많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다. 게다가 칠레는 매몰찬 나라다. 대통령은 취임 첫달 동안 칭송받다가 그후 5년 11개월 동안 때로는 정당하고 대로는 부당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P. 507] 칠레에서 배가 고파 닭을 훔친 사람은 참모총장 암살범보다 두배나 많은 형을 언도 받는다. 이처럼 지배 계급이 제정한 법률은 계급에 따라 적용이 달라진다.

[P. 514] 칠레는 민선 정부의 전통이 강하며 정변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정부는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며 평범했다, 작은 대통령은 수없이 많지만 위대한 대통령은 발마세다와 아옌데 두명 뿐이다.

[P. 516-517] 나는 지금 이 회고록의 몇 줄을 위대한 동지 아옌데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지 사흘 후에 서둘러 쓰고 있다. 저들은 살해행위를 은폐하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미망인만이 불멸의 육신을 동행할 수 있었다. 고격자들의 말로는 대통령 궁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며 자살의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 언론의 견해는 다르다. 공중 폭격 직후, 수많은 탱크들이 작전에 돌입했다. 단 한사람 칠레 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노린 대담한 작전이었다. 아옌데는 불꽃과 연기로 뒤덮인 집무실에서 혼자 당당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기에 기관총을 난사해야 했다. 시신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비밀리에 매장했다. 무덤까지 가는 길에 동행한 사람은 오직 한 여인, 전 세계인의 애도를 한 몸에 안은 여인이었다. 시신은 칠레 군인들이 난사한 기관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은 또 다시 칠레를 배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1) 책의 구성과 장점

이 책은 노벨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이다.

평화로웠던 유년기부터, 방랑의 기간을 지나던 청년기, 영사를 지내던 기간, 스페인 내전, 동서로 나뉜 세계의 이념적 갈등 시기, 칠레의 정치상황 등을 외적 사건을 중심으로 회고한 기록이다.

부제가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인 것처럼 네루다는 시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가장 원초적인 것에 몰두한 것 같다. 본능대로 사랑하고, 끝없이 노래했고 목숨 걸고 투쟁했다. 그런 그가 노벨상을 받을 만큼 탁월한 시를 썼음에 더욱 놀란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별을 보고 도취했다. 우주적, 천상적 도취였다. 그 즉시 책상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써 내려 갔다. 마치 누군가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는 것 같았다.”

네루다는 스스로 말하듯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영감을 얻어 노래를 하는 시인이었다. 얼마큼 피가 뜨거워야 그리될 수 있는가? 보통 시인의 피는 우리보다 두배 쯤 진한 듯하다. 네루다는 보통시인의 피보다 두배 이상 진한듯하다.  누군가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는 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때 펄펄끓는 피를 가진 천재시인이 받는 영감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당연했겠지만 그런 네루다에게 시는 삶의 전부였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그는 “나는 시를 위해 살아왔고, 시는 내 투쟁의 밑거름 이었다”고 고백한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를 썼고 부친의 반대에도 글을 쓰기 위해 이름을 숨겼고, 그 필명이 결국은 자신의 이름이 되었고, 암의 고통 속에서도 시를 노래했다. 이렇듯 그를 끝없이 노래하게 한 영감의 원천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자연이라고 평한다. 

정현종 시인은 “네루다의 시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생동이다”라고 하였고, 민용태 시인은 네루다 시의 생동감을 한 단어로 ‘열대성’ 또는 ‘다혈성’이라고 표현했다.

로르카는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어떤 강연에서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루다의 시는 폭우에 흠뻑 젖는 느낌과 강렬한 태양 아래 벌거벗고 선 느낌, 폭풍우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 그리고 빽빽한 밀림 속에서 공룡알로 누워 있는 느낌을 준다고 한비평가가 말을 했는데, 나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글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힘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본능대로 노래할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천복을 향해 가는 지름길을 일러준 셈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배운 학습결과로 우리는 본능대로 살지 않고 사회 규범에 종속되어야 좋은 시민이 된다고 알고 있다. 좋은 시민은 결코 천복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시민’임을 버려야 하는가? 좋은 시인의 자질은 좋은 소설가의 자질이 될 수 있고 좋은 학자의 자질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몰입할 때 자연이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자연과 교감능력이 탁월한 천재이기만 했을까? 타고난 피도 짙었겠지만 그는 자연에 몰입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시인이 아닌 나로 하여금 그 방법을 배우라고 웅변한다. 몰입하라. 그러면 거기서 영감이 나올 것이다, 자연에 몰입하는 자 자연과 교감할 것이고, 동물에 몰입하는 자 동물의 언어를 알 것이고, 기계에 몰입하는 자 기계가 저절로 결합되어 움직이는 원리를 자연 알게 될 것이다.

나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다간 낯선 시인에게서 그런 가르침을 받았다. 몰입하라. 그러면 천복이 따를 것이다. 



(2) 아쉬운점: 내가 역자라면

- 그의 삶이었던 회고록에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자에게 아쉬운 점은 약간 있다. 일단 책의 볼륨이 조금 작다면 집중도를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두꺼운 자서전이라 후반으로 가면서 집중되지 않았다.

- 또 그가 비꼬듯이 표현한 사람들에 대한 관점이 왜 그리 형성되었는지 그것이 네루다의 개인 감정일 확률이 많았을 텐데 그에 대한 설명을 역자가 조금 따로 해두었더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많았을 듯 하다.

- 그중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그가 노벨상을 받은 시인이라는데 그의 시를 편집과정에 앞이나 뒤에 몇 편 넣어주었다면, 나 같은 시를 모르는 사람도 바로 읽을 수 있었을듯하다. 시를 접하지 않고 살아온 나 같은 독자로 하여금, 그의 시가 궁금해 따로 책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조금 줄어줬을 것이다,  

- 그 외에 그가 접한 사건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스토리를 책의 중간 중간 박스 타입으로 편집하고, 관련 사진과 인물 사진을(현재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중간에 삽입하였더라면 독자에게 더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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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2010.06.15 21:30:40 *.212.98.176
시인, 정치가, 스탈린주의자, 대통령후보-  시인으로서 어색한 감투들인데
네루다는 그 모든 걸 다 자기 것으로 잘 소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히 산 덕분에 평생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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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2:33:37 *.145.204.123
자신의 목소리에 충실히 산것으로 인해 자신의 영혼은 자유로웠겠으나
그의 뜨거운 피로 인해 데인 사람은 없었을까?
시인이 정치가로 살 수 있었던것은 그가 충실한 공산주의 시를 쓸수있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피의 온도가 중요할까 재능이 중요할까?
그도 저도 없는 사람은 어쩌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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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06.17 03:08:34 *.67.223.107
우리 경숙샘 참 훌륭해요. 

네루다가 공산당원이 되고난 후에 격었던 고난은 조국 칠레의 험난한 운명과 같았지요.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한 충실한 삶이 그의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글로 자주 만나게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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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7 09:07:14 *.145.204.123
범샘~~
스스로 선택한 일에 충실하게 산것이 네루다를 돋보이게 하였듯
저 역시 선택한 일에 충실히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격려에 힘이 왕창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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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김용규 [1] 레몬 2012.10.21 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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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 #38 구본형의 그리스인이야기_생각정원 [1] 서연 2013.01.21 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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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 내 인생의 처 책쓰기 - 오병곤, 홍승완 혜향 2010.01.19 2940
1636 #8 북리뷰 - 신곡 _ 단테 file 터닝포인트 2012.05.28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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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lt;이권우&gt; [2] 놀자 2005.09.19 2941
1633 <백범일지> 김구, 저자소개/저자라면 [3] 박미옥 2010.06.07 29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