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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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17- 카를 융 기억 꿈 사상-20100628
1. 저자에 대하여
카를 구스타프 융(Jung, Carl Gustav)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케스빌~1961년 6월 6일 퀴스나흐트. 스위스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Carl Gustav Jung은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케스빌(Swiss Kesswil)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양친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학자였다. 그는 그의 고향 도시인 바젤(Bassel)에서 학교를 다녔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바젤대학교(1895~1900)와 취리히대학교(1902 의학박사)에서 공부한 후 1900년 그는 취리히대학교 부설 부르크횔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했다. 당시 이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는 오늘날 정신병의 고전적 연구로 평가되는 심리학적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부르크횔츨리에서 융은 이전의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검사를 매우 성공적으로 응용했다. 후에 그는 이 대학병원 정신과 과장이 되었다.
그 후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아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웠고 외향성·내향성 성격, 원형(原型), 집단무의식 등의 개념을 제시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업적은 정신의학과 종교·문학 관련 분야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연구로 융이 정신과 의사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후, 그의 연구는 프로이트의 많은 생각을 확증해 주었고 1907~12년 두 사람은 공동 작업을 했다. 융은 정신분석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사람들은 그가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그들의 관계가 틀어짐에 따라 무산되었다. 성격과 견해 차이 때문에 그들의 공동연구는 5년 만에 끝났다. 그들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후 융은 한동안 학자들 간에서 좋지 않은 평판을 받아야했다. 융은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나, 1914년 이 학회에서 탈퇴했다.
융은 자신의 견해, 특히 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는 심리치료자가 치료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옛 거장들의 작품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융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심리치료법을 개발하고 이를 이론화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연금술의 전통에 새롭게 중요성을 부과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의식의 발달에 필요한 역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지주의파에서 시작해 연금술에 이르는 이교도 운동을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적절히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의 원형적 요소들이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특히 현대의 꿈이나 환상에도 연금술에서와 같은 상징들이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연금술사들이 집단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융의 역사 연구는 중년과 노년, 특히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환자들을 도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위치를 평가하게 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종교적인 믿음을 상실했는데, 융은 그들이 꿈이나 상상을 통해 표현되는 그들 자신의 신화를 발견한다면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과정을 개체화라 불렀다.
개인적 경험, 계속된 심리치료, 역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인해 그는 시사논평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고 한다. 1918년에 이미 그는 독일이 유럽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나치 혁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견해를 많이 피력했기 때문에 나치 지지자로 잘못 평가되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그는 단순한 것들, 즉 그가 자란 스위스의 시골, 농부, 전원생활 등을 사랑했다. 그와 아내 에마는 취리히 호숫가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에마는 저명한 방문객들의 안주인 노릇을 했고 남편의 연구를 도왔으며, 그녀 나름의 독창적인 일도 했다.
융의 사상 중 특히 동양사상과 심리학의 연관성을 연구한 부분은 내게 흥미를 끌었다. 융은 동서양의 종교와 학문에 대해 “서양이 하나의 새로운 병인 학문과 신앙 사의의 갈등을 만들어 냈지만 동양에서는 종교와 학문사이의 갈등은 없다”라고 했다. 이미 융이 동양 사상의 통합성에 대해 심취되어 있었고, 우수성을 이해한 듯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동양에서는 어떠한 학문도 사실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어떠한 종교도 단순한 믿음을 근거로 하지 않아서 동양에는 종교적 인식이 있고 인식하는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어느 동양인 학자 못지않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동양의 종교와 철학을 깊이 있게 잘 이해했던 듯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易經>에 관해서는 책표지가 헤어질 정도로 읽었고, <도덕경><티베트의 사자>그리고 요가나 禪에 관해서도 철저히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융은 영국 BBC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그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질문 “융, 당신은 신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신을 안다”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융의 이 대답에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대답을 한 것은 믿음의 완성이 궁극적으로는 앎의 완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해온 동양사상의 입장에 이미 깊이 심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본다.
대표적인 저술로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황금꽃의 비밀』 『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 『심리학과 종교』 『심리학과 연금술』 『아이온』 『욥에의 회답』 『인간과 상징』 등이 있다.
2. 내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1st 읽기에서 인용구절 - 검정색
2. 2nd 읽기에서 추가 인용 구절 - 파란색으로 추가
옮긴이 서문
추가[P. 7] 카를 구스타프 유의 자서전이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으나 주로 영어본을 기초로 한 번역본은 중역으로 인한 지나친 의역과 오역이 너무 많아 독서를 추천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어떤 번역본은 직역으로 인한 불명확성의 문제가 있기도 했다.
추가[P. 7] 융처럼 신에 대한 갈등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바로 적임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가장 감명있게 읽은 책으로 추천하기도 하는, 자서전 문학의 백미인 융 자서전을 원서로 읽어보고 번역해 보는 일은 내 일생에서 무척 귀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
추가[P. 8] 융 자서전은 어떤 설명도 없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인도어, 스위스 사트리 등이 막바로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P. 8]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융이 한문장 한문장 손을 보았으므로 거의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8]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추가[P. 8-9] 융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으나 자신이 죽은 훙 출간해애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동의 했다.
[P. 9]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 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 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그와 같이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목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P. 9] 이 책은 한 인간의 정신의 깊이와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을 수 있는가를 인상 깊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의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저서라고 할 만하다
추가[P. 10] 카를 융은 일생동안 종교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10]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섣불리 신에게 접근했다가는 어떤 위험스런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렇게 위험스럽긴 하지만 신은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위대한 위험’인 것이다.
[P. 10] 카를 융이 죽기 2년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아느냐고 물었다.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P. 1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추가[P. 11]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P. 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추가[P. 11-12]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P. 12] 그래서 이제 나이 83세에 나는 내 생애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일을 감행하게 되었다. 나는 단지 직접적인 진술, 즉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추가[P. 12] 자서전을 만드는데 어려운 점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적절하게 비교할 만한 것들도 없다. 나는 내가 여러면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 더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추가[P. 12]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 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추가[P. 12]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나, 기껏해봤자 그런 것을 상상 할 수 있을 뿐이다,
추가[P. 12-13] 사실 인간의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인간의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 지점도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P. 13]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며,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추가[P. 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 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추가[P. 13]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엄밀히 말해서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추가[P. 14]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는 항상 충만하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P. 14] 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는 외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빈약한 편이다. 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P. 15]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일생을 사로잡은 꿈 : 유년시절
[P. 23] 나의 기억은 두세 살 적부터 시작되다.
[P. 23] 아마도 내 생애에서 최초라고 할 만한 한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그 기억은 자못 흐릿한 인상으로만 남아 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 유모차에 누워 있다.
추가[P. 24]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나는 우리집 서쪽에 있는 식당에서 높은 아기의자에 앉아 빵조각들이 들어있는 따뜻한 우유를 떠먹고 있다, 그 우유는 맛이 좋고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우유냄새를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이기억 역시 아주 먼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추가[P. 24]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어떤 친척아주머니 한분이 “지금 너에게 보여줄게 있단다,” 하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집ㅎ앞 닥센으로 통하는 길로 데려갔다. 저 멀리 아래쪽 지평선에 알프스의 산줄기가 타오르는 듯한 저녁놀을 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은 알프스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자 저쪽을 보렴. 산들이 온통 붉구나.” 그때 처음으로 나는 알프스를 바라보았다.
추가[P. 24-25] 그로부터 얼마 지난 시기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투르가우로 간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구는 보덴호숫가에 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호숫가를 떠날 줄 몰랐다. .....호수는 끝도 없이 멀리 펼쳐져있었다. 그 호수의 광활함은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고 비길데 없는 장관이었다,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물이 없이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추가[P. 25]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집주변을 돌아다녔다. 집 뒤편에 언덕 밑으로 이어지는 덮개 없는 배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온통 관심이 쏠리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아직도 네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추가[P. 26] 부모의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어두운 전조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1878년의 나의 병은 아마 부모의 일시적인 별거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어머니는 여러달 동안 바젤의 병원에서 지냈는데, 추측건대 그녀의 병은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친척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P. 26] 그 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감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전이었다. 나중에는 인생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추가[P. 26] 어머니가 없는 동안 하녀도 나를 돌봐 주었다 나는 하녀가 어떻게 나를 안아올렸으며 어떻게 내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는지 지금도 생각난다. .....
추가[P. 27] 이런 것이 나에게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우리 가족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만 속해 있는 듯 싶었다.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추가[P. 27] 부모가 별거하고 있던 시기의 도 다른 추억의 영상이 떠오른다, 금발에 푸른 분을 가진 무척 아리땁고 사랑스러운 젊은 아가씨가, 어느 맑은 가을날 나를 데리고 황금빛 단풍나무와 밤나무 밑으로 산책을 나갔다. ......... 그 젊은 아가씨는 나중에 나의 장모가 되었다. 그녀는 내 아버지를 존경했다, 스물한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외적’ 기억들이다. 다음 것들은 훨씬 강력하고 정말 압도적인 것들인데, 그 일부만이 흐릿하게 기억날 뿐이다.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 일이라든지 각이 진 난로다리에 부딪혔던 일등이다, 나는 통증과 피, 상처를 꿰매주던 의사를 기억하고 있다,
[P. 30] 반복되는 이런 생각들은 내 의식의 첫 외상(Trauma)으로 이어졌다.
[P. 3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우연히 꾸었다. 그 꿈은 이를테면 일생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서너 살이었다.
추가[P. 32] 단 위에서 말할 수 없이 화려한 황금보좌가 놓여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붉은 방석이 보좌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웅장한 보좌로, 동화 속 임금의 보좌 그대로였다,
추가[P. 33] 나는 그 꿈을 여러 해 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오랜 후에야 비로소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남근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나는 어머니가 “저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 라고 했을때 ‘저것’에 강조점을 두었는지, 아니면 ‘사람을 잡아먹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는지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전자의 경우라면 ‘예수’나 ‘제수이트’가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남근상이 잡아먹는다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근상으로 표현되고, 음울한 ‘주 예수’와 예수회 수도사 그리고 남근상은 모두 동일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추가[P. 34] 그 남근상의 추상적 의미는 그것이 스스로 남근이 발기되듯 t n직으로 보좌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추가[P. 34] 남근상(Phallus)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비슷한 ‘팔로스’는 빛나는 찬란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그 꿈속의 남근상은 보통은 언급되지 않는 지하의 신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나의 젊은 시절 내내 그런 의미로 남아 있었는데, 누가 ‘주 예수’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해서 말할 때마다 다시 생각나곤 했다. ‘주 예수’는 나에게 결코 온전한 실체가 될 수 없었으며,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전폭적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인 대역인 그 지하의 신이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추가[P. 35] 이러한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 나의 정신적 삶이 무의식인 출발을 한 것이었다.
추가[P. 40-41] 한순간 내가 경이로운 형상들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완전히 압도된 나머지 나는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구경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친척 아주머니가 늘 한걸음씩 뒤쳐져 있는 나를 출구 쪽으로 잡아끌며 소리쳤다.
여섯 살 때 부모가 나를 데리고 아를레스하임으로 소풍을 갔다. 이런 때는 어머니가 어떤 옷을 입고 갔는데, 그 옷이 내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다. 동시에 그 옷은 내가 어머니를 기억하는 둘도 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 옷감은 작은 녹색 반달무늬가 새겨진 까만 천이었다. 첫 기억의 영상 속에서 어머니는 날씬한 젊은 여인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나의 나머지 다른 기억들 속에는 어머니가 늘 나이 많고 살이 찐 모습으로 남아 있다.
추가[P. 41] 여러 해 동안 나는 가톨릭 성당으로 들어갈 적마다 피와 넘어짐과 예수회 수도사들에 대한 은밀한 두려움을 느꼈다.
추가[P. 42] 이런 어린이답지 않은 행동은 한편으로는 예민한 감수성과 상처받기 쉬운 성격과 연관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유년 시절의 깊은 고독감과도 연관이 있었다.
추가[P. 43] 일곱 살에서 여덟 살까지는 블록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탑들을 세우고 나서, ‘지진’을 일으켜 무너뜨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난다, 여덟 살에서 열한 살까지는 늘 전쟁그림,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포격을 기하고 해전을 벌이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리고 연습장을 모두 잉크 얼룩으로 가득 채우고는 그 얼룩들에 대해 기발한 해석을 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학교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얻지 못했던 놀이 친구를 드디어 거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추가[P. 45] 그 유년시절에 나는 시골학교 학우들과 사귀는 동안 발견한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집에 있을 때와는 달라졌다. 나는 그들과 장난도 치고 집에서는 결코 생각도 못했던 그런 일을 스스로 꾸미기도 했다, ....나로서는 나이 변화가 학우들의 영향 탓이라고 여겨졌다, 그들은 내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되도록 어찌해서든지 나를 유혹하거나 강요했다,
추가[P. 45-46] 나의 밤기도는 낮을 잘 마감해주고 편안히 밤과 잠으로 인도해주는 종교의식적인 피난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낮이 되면 새로운 위험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나 자신과의 불화를 느끼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의 내적 안정이 위협을 받았다.
나는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의 그 시기에 불놀이를 즐겨 했던 것을 기억한다,
추가[P. 48]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하는, 래커칠을 한 노란 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작은 자물쇠가 붙어있었다. 그 필통 안에는 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그 자의 끝부분에 나는 프록코트와 높은 모자에 광택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길이 6센티미터 쯤 되는 성인 남자 인형을 새겼다. 인형을 잉크로 까맣게 칠한 후 자에서 잘라내 필통에 넣어 두었다. 그 속에는 내가 인형을 위해서 만든 작은 침대도 들어 있었다, 나는 모직 옷감 조작으로 인형의 상의 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하나의 큰 비밀이었다. 나는 인형이 들어있는 필통을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집 꼭대기 다락방으로 몰래 가지고 가서 지붕 뼈대를 이루는 들보위에 감추어주고 무척 흐뭇해했다. 왜냐하면 그 필통은 누구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 필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나의 비밀을 발견하여 망가뜨릴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과의 불화로 안한 괴로운 감정은 사라졌다.
추가[P. 48-49]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거나 나의 예민한 감정이 상했을 때, 혹은 아버지의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나 어머니의 병약함으로 내가 침울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싸서 침대에 뉘어놓은 남자 인형과 곱게 칠해진 매끄러운 그의 돌을 생각했다.
추가[P. 49] 나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보통 일주일 간격으로 종종 몰래 꼭대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거기 들보 위로 기어 올라가 필통을 열고 그 인형과 그 돌을 바라보곤 했다. 이렇게 할 적마다 나는 미리 어떤 글을 써놓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필통 속에 넣었다.
추가[P. 49]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되는 신성 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가[P. 50] 이와 같이 비밀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나의 성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것을 내 이른 소년 시절의 본질적인 요소, 즉 내게는 가장 뜻 깊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P. 50] 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면서 늘 깎아내리거나 “땅 밑에 있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항성 따라 붙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주입되면서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라는 말들을 듣게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다른 무언가가 있을거야’
추가[P. 50-51] 남자 인형 에피소드는 내 유년시절의 정점이었으며 종결이기도 했다. 그것은 1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 후 나는 서른 다섯 살이 되기까지 그 사건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추가[P. 51] 이러한 회상을 함으로써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P. 53]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추가[P. 56]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가[P. 56] 나는 나의 부모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좀 더 강해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변덕스럽고 과민한 성질을 부릴 때면 나는 어머니 편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나의 성격 형성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되었다.
[P. 56] 이러한 갈등에서 행방되기 위하여 나는 좋든 싫든 부모님을 판정해야 하는 상위의 중재재판관 역할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일종의 자만심이 야기했다. 그 자만심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는 자존심을 부추기기도 하고 동시에 약화시키기도 했다.
추가[P. 57] 아버지는 나를 어머니 침대 옆으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작은 생명체를 팔에 안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이 동생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막연한 의혹을 나에게 남겼다 그 의혹은 나로 하여금 날카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예민하게 관찰을 하도록 했다.
추가[P. 59] 사태가 아주 나빠질 때는 다락방에 있는 나의 은밀한 보물을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쓸쓸할 때도 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비밀, 즉 프록코트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 인형과 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인간’일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P. 61] 아무도 나에게 수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는 그러한 의문을 조리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나의 어려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추가[P. 61-62] 그와 마찬가지로 나를 격앙시킨것은 선생이 자신이 주장했던 평행선의 정의에 반하여 평행선이 무한대로 가면 서로 교차한다고 말했을 때였다. 이런 것은 시골 사람을 등치는 어리석은 속임수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되었다.
추가[P. 63] 나는 나 자신의 이해 부족으로 몹시 주눅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감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추가[P. 63] 게다가 나는 재능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미술시간을 면제받기도 했다. 이것은 시간을 얻게되어 환영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나에게 미술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패배를 의미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 재능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기분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대상만을 그릴 수 있었다.
추가[P. 63-64] 열두살은 나에게 참으로 숙명적인 해가 되었다. ..............갑저기 다른 소년이 나를 한 대 때리는 바람에 나는 스러지고 말았다. 나는 보도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혀 그 충격으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얻어 맞는 순간 번ㄱ 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너는 더 이상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반쯤만 정신이 멍했는데도 음흉한 공격자에 대한 복수심에서 필요이상으로 조금 더 그대로 누워 있었다,.....그후 나는 학교로 다시 가야 할 때가 되면 그 즉시로 기절하기 일쑤이다.
추가[P. 65-66] “.... 그 아이가 만일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끔찍한 일일세. 나는 얼마 안되는 재산을 다써버렸어. 만일 그 아이가 자립해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아다. 그것은 현실과의 충돌이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나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추가[P. 66] 나는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와 아버지 서재로 들어가 내 라틴어 뭅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뻔했으나 몇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결심대로 밀고 나갔다. 그렇게 15분 가량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자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갑자기 나는 이전 몇 달의 상태보다 나아진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발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모든 속임수는 끝이 났다. 여기서 신경증(neurose) 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추가[P. 66]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차츰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추가[P. 67] 신경증은 나의 또 다른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부끄러운 비밀이 일종의 패배였다. 그럼에도 신경증은 나를 아주 꼼꼼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특히 부지런한 사람이되게했다.
[P. 67]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만,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추가[P. 68]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내’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추가[P. 69] 나의 내부에 ‘권위자’가 자리 잡았다.
추가[P. 70]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자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 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추가[P. 72] 나는 두 시대에 살고 있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결과에 혼란을 느끼고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P. 73] 따라서 나는 항상 무엇이 내게 닥치는지,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싶어했다. 아마도 이것은 수개월 동안 나를 버렸던 어머니와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추가[P. 74] ‘세계는 아름답고 교회도 아름답다. 하느님은 아 모든 거을 창조하시고 푸른 하늘 저 너머 황금보좌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러자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비되는 듯한 느낌 속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P. 74]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 살인? 아니다. 그것일 수 없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죄를 짓은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추가[P. 77-78]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추가[P. 78]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하느님이 나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의도했는지 아닌지 잘 몰랐다. 나는 계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할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하느님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이러한 곤경으로 밀어넣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채 방치했다. 나는 하느님이 의도한 대로, 스스로 혼자서 출구를 찾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추가[P. 78]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
추가[P. 78-79]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추가[P. 79] 내가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의식하게 된 대략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통일성과 위대함, 그리고 초인성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를 결정적으로 시험삼아 써보려고 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추가[P. 79-80] 하느님은 내가 더 이상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용서 받을수 없는 죄를 짓도록 이제 막 강요당하고 있는데 나를 도와 주지 않는다. 하느님은 그의 전능한 힘으로 어렵지 않게 나에게서 이러한 강요를 거두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가 영원한 저주를 두려워하여 온힘을 다해 막고 있는 그 일을 하도록 하느님이 특별한 과제를 줌으로써 나의 복종을 시험하려 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종교의 가르침, 더 나아가 하느님 자신의 계명에도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지옥과 저주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의 신앙과 통찰을 통하여 알고 충격을 받고 있는데도 하느님이 내가 당신이 뜻을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지 보기를 원한단 말인가?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추가[P. 80]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 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 조각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었다.
추가[P. 80]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P. 81]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로,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깊은 신앙심을 내세워 그 의지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기적을 아버지는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성서의 계명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성서에 씌여짔고, 조상들의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아서 직접 임하시는 하느님, 성서와 교회를 넘어서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느님, 당신의 자유를 인간이 누리도록 촉구하고, 당신의 요청을 무조건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와 신념들을 버리도록 강요할 수도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
추가[P. 81]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P. 81] 사람이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그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추가[P. 81] 하느님은 또한 아담과 이브를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이 복종하는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P. 82]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추가[P. 83] 대성당에 대한 그러한 체험과 함께 마침내 위대한 비밀에 속한 어떤 것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들에 관해 늘 이야기해오다가 지금은 그돌을 손에 쥔 것과도 같았다.
추가[P. 83]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체험을 했는지 시험해보고 문의하고 싶었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러한 체험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는 파문되었거나 선택되었다는 느낌 , 저주 받았거나 축복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추가[P. 84] ‘그래 그래 정말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그 비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거지? 그것은 은총이 비밀이기도 하다. 당신들은 그 비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당신들은 내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 심지어 나쁜 일을 하고 저주 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하느님이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P. 84]나는 아버지의 서재를 샅샅이 뒤져 하느님 삼위일체 영혼, 의식 들에 관한 책이면 무엇이든 읽어나갔다. 그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으나 그것으로 현명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또다시 ‘이 사람들도 모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추가[P. 85]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추가[P. 8.6] 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의심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은총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체험을 생각하곤 했다. 어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추가[P. 87] 나는 아버지가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것은 최상으로 바뀔것이라고 확신했다.
추가[P. 87]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되고 믿어야해. ” 나는 생각한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눈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P. 87]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추가[P. 87] 반에서 1등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아래에서 나를 시샘하면서 따라잡으려고 기회를 노리는 학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 그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 편하게 했다. 학교 과제는 몹시 성가셨다. 나는 그것 역시 경쟁심으로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추가[P. 89]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서 동시에 잘못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않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추가[P. 90] 하느님의 형상이 단지 인간 하고만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받아 들일수 없었다.
[P. 91] 나의 전생애에 걸친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간의 대립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 말하는 그런 ‘분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즉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제2의 인격은 내 생애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제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추가[P. 91] 교회는 점점 나에게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큰 소리로 하느님에 대해서,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하느님이 무엇을 행하는지를 설교를 했다.
거기서 나는 아무도, 심지어 목사까지도 그 비밀을 모르는 것 처럼 보인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P. 91-92]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가[P. 92]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의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헤아릴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 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추가[P. 92] 제1의 인격이 내게 너무 자주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종교적인 계율들이 심지어 하느님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깜짝 놀랄만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일 수 있는데 그 계율들은 하느님의 이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있는듯하다,
[P. 92] 악마는 오랫동안 내 생각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P. 93] 하느님 이외에 그 누구도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추가[P. 93]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것일까? 아버지는 자기 아들인 나를 이삭처럼 인간 제물로 삼아 칼로 찌를 수 있을까?
추가[P. 93] 인간보다는 하느님에게 더 순종하라고 재촉하는 말을 들을때 그런 말은 그저 강단위에서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추가[P. 93]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지를 안다면 이 중심과제를 정말 하느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다루었을 것이다.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서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의지를 아는 체하는 자들 중에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켰는지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P. 95]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가 나에게 제기되었다.
[P. 96]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증명되었다.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추가[P. 96]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추가[P. 97] 어머니는 나에게 무척 좋은 분이었다. ....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역시 두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악의 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추가[P. 100] 어머니의 두인격 사이에는 엄청남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낮에는 사랑스러운 어머니 였으나 밤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그 시간 어머니는 이상한 동물이기도 한 예언자처럼,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처럼 보였다.
추가[P. 102] 내가 전혀 일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내 생애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 인식은 마치 나 자신의 착상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몰랐으나, 그 목소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것 같았고 그 상황에 들어맞는 내용을 정확하게 말했다.
추가[P. 106] 나는 성찬식이 뭔가 이미 계획되고 인습에 맞는 격식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 역시 그 일을 무엇보다 규범에 맞게 수행하려고 애를 스고 있는듯보였다.
추가[P. 106] 내 차례가 되었다. 빵을 먹었다. 예상했던 대로 맛이 없었다. 포도주는 아주 조금만 맛보았는데 묽고 시큼했다. 상품의 포도주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추가[P. 107] 하나님에 관한 언급은 있었으나 단지 말뿐이었다.
추가[P. 108] 나에게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다,
[P. 10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추가[P. 109]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 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고 가르쳤던 갓이다.
[P. 109-110]나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 나의 의지보다 강한 의지가 그 둘을 나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이 내 안에서 그랬던 것인가? 그러나 자연은 창조주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추가[P. 110] 이것과 관련해서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추가[P. 110] 성찬식의 실패? 그것은 나의 실패였을까?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나는 교회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와 다른 모든 사람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P. 111]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추가[P. 111-112] 그 견해가 나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종교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이루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행위로 나는 다만 거기에 맡겨져 있을 뿐 이었다. 하느님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아의 종교는 인간 편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었다.
추가[P. 112] 하느님과 같이 거의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서 하느님에 관해 더 많이 알아야만 했다.
추가[P. 112] 인격도 역시 하나의 성격일 것이다. .... 만일 하느님이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주관적이며 한정된 세계의 자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종류의 성격내지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이 문제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를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추가[P. 113] 나는 하느님의 다른 특성들을 열심히 조사했다.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특성들은 모두 내가 견신례학습에서 이미 배운 바와 같았다.
[P. 113] "하느님의 초세계적 속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첫째 부정적인 표현: 하느님이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등등 둘째 긍정적인 표현: 하느님이 천국을 거주지로 삼고있다 등등" 이런 구절들은 끔찍했다.
[P. 114] 하느님은 그 전능한 힘으로 피조물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느님은 피조물을 시험할 욕심이 생겼다. 실험결과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피조물을 시험대위에 세웠다. 자 그럼 이런 하느님의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이 d행동하는 인간적인 인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추가[P. 119] 이 철학자들은 뭔가 잘못된 것인가? 나는 자문해 보았다. 그들은 단지 소문으로만 하느님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점에 있어서 철학자들과 달랐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모순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신하고 있었다.
추가[P. 120]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것이 아니다.
[P. 120]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는가? ......... 그 어느것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런 것들로부터 나의 관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 즉 생각해서 고안해낸 어떤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고 생각해서 고안해내고, 그러고 나서 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는 자명(自明)한 것이 되었을까?
[P. 121]그 무렵 나는 하느님은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경험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추가[P. 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편이 나을 것이다.
[P. 124]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왜 다른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왜 학식있는 책들 가운데 여기에 관한 것은 없단 말인가? 내가 그런 경험을 한 유일한 인간이란 말인가? 왜 내가 그 유일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가? 내가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추가[P. 125] 나의 ‘특이성’은 차츰 불쾌하고 으스스하기까지 한 느낌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추가[P. 127] 사람들은 나를 상당히 어리석고 천박한 아이로 여기고 잇었던 것이다. 이런 말들은 사실 나를 화나게 하지 않았다. 나를 격분시킨 것은 그들이 나를 사기꾼ㅇ로 추정하여 나를 도덕적으로 망하게 했다는 점이었다.
추가[P. 128]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P. 128] 나자신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거기 있다는 의미심장한 느낌이 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별들과 끝없는 우주의 장엄한 세계의 숨결이 나에게 닿은 것 같았으며, 또한 오래전에 죽었으나 아직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의 영혼이 보이지 않게 몰래 방안으로 들어와 있는것 같기도 했다. 일ㄴ 종류의 급전은 누멘의 후광에 둘러싸여 있었다.
추가[P. 131]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추가[P. 132] 나는 철학사에 관한 작은 입문서를 체계적으로 읽었고 그로 인해 이미 사색되었던 모든 사상에 대한 일종의 개관을 얻게 되었다. 만족스럽게도 나는 나의 많은 영감이 그 사상들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추가[P. 133] 나에게는 그들이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는 있지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P. 133] 그런데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큰 소득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이것들을 다른 모든 사람은 거의 주목하지 않은 것 같았으며, 항상 조화와 이해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P. 134] 그가 사용하는 ‘의지’라는 말이 사실은 신과 창조주를 뜻한다는 것과, 그가 이를 ‘맹목적’일고 일컫는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잇다는 것을 알았다.
추가[P. 135]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추가[P. 136] 이전에는 내가 수줍고 소심하고 의심ㅁ낳고 창백하고 마르고 병약한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방면에서 왕성한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
[P. 136] 나 자신이 바라는 바를 알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나는 확실히 붙임성이 있고 속이 트인 사람이 되었다.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내 발을 받쳐주는 훨씬 든든한 기반을 느끼며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후회하게 되었다.
추가[P. 138] 학교 과목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칸트나 쇼펜하우어 도는 고생물학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젠체했다는 것이었다.
[P. 138] ’신‘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추가[P. 143] 혼자 집에 잇거나 자연 속에 있을 때는 그 즉시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강력하게 되살아나고, 그들과 함께 위대한 ‘신의 세계’도 되살아났다.
추가[P. 144] 나는 교회와 거리를 두면 둘수록 더욱 마음이 편해졌다.
추가[P. 144] 습관에 따라 정기적으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서로 교제하는 유대관계가 약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추가[P. 147]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추가[P. 149-150] 이제 나는 이 어마 어마한 산에 와 있다. ..... 거대한 낭떠러지들이 있어서 나는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들은 신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신의 세계가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추가[P. 154] 침울해하고 있는 쪽은 제2의 인격이 아니라, 제2의 인격을 상기할 때의 제 1의 인격이었다.
[P. 156]'정신'이란 물론 내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마음 속 갚은 곳에서는 아주 희석된 공기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다.
[P. 157] 이와 같이 환상에 빠져 수개월을 매우 즐겁게 지내다가 결국 싫증이 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환상이라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P. 164] 아버지가 무척 걱정하며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는 모르고 있어.” 나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가[P. 164] 그순간 나는 자연을 우리가 살고 잇는 세계를,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가[P. 165] 이 두 개의 꿈이 나로 하여금 자연과학 쪽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점에서는 나의 회의가 살졌다.
[P. 166] '결코 따라해서는 안 된다'이것이 나의 신조였다.
[P. 166] ‘학문을 한다는 것’은 내게 확고했으나 다만 어떻게 공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P. 167]제1의 인격의 눈으로 바라본 나라는 인간은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보통 수준의 재능을 갖춘 청년으로, 허황된 야심과 세련되지 못한 기질, 모호한 태도들을 지니고 있었다. 즉시 천진난만할 정도로 흥분하는가 하면, 또 금방 변덕스럽게 유치한 실망에 빠지기도 했다. 깊은 내적인 본질로는 세상에 등을 돌린 반계몽주의자였다.
[P. 167]제2의 인격을 제1의 인격을 까다롭고 배은망덕한 도덕적 과제, 종결되어야 할 일종의 숙제로 여겼다.
[P. 170]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 들을 헤쳐 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추가[P. 171-172] 왜 그것이 의식을 뚫고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의식적으로는 그와 같은 발전을 촉진시키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다른 방면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P. 173-174]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불확실감이 생겨난다.
[P.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P. 176]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 178] 어떤 특별한 것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으며, 짐작컨대 그것은 아버지의 종교적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일련의 암시들을 통해 그것이 종교적인 회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필요한 체험이 아버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졌다.
추가[P. 180] 이제야 나는 나의 체험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 자신은 나의 꿈속에서 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둔 교회를 부인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그밖의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ㄹ학을 허용해주었다.
추가[P. 181] 그 신학적 종교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P. 186]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시잘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언젠가 여송연 한통을 선물로 받은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여송연은 일요일에만 한 대씩 피웠기 때문에 1년이나 피웠다.
추가[P. 193]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P. 193]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마음이 언급된 곳에도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추가[P. 198]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니체를 닮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불안을 느끼며 주춤했던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니체가 내적인 체험과 통찰을 가지고 불행하게도 그것들에 고나해 말하고자 했으나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P. 199]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추가[P. 199] 차라투스트라는 의심의 여지없이 병적이었다.
[P. 199-200] 니체는 인생 후반, 그러니까 중년을 넘기고서야 제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반해 나는 제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되는 아르헤톤에 대해, 마치 만사가 순조로운 것처럼 순진하게 조심성없이 말했다.
[P. 200]그는 제2의 인격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에다 그것을 거리낌 없이 앞뒤 재지도 않고 밝혀버렸다.
[P. 201] <파우스트>가 나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P. 201]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서 순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P. 201] 나는 새로운 관념이나 단지 특이한 측면까지도 오직 사실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사실들은 남아있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책상 밑에 버려져 있지 않고 언젠가 어떤 사람이 그것을 만나게 되고, 그는 자기가 찾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P. 202] 나는 더 나은 방법이 정말 없어 사실들을 제시하는 대신 말만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사실들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전보다 더 경험주의로 치우치게 되었다. 나는 철학자들을 좋지 않게 여겼다.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추가[P. 206] 왜 어떻게 해서 식탁이 갈라지고 칼이 파열된 것일까?
추가[P. 209] 정신의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잇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인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병적인 이상 현상도 함께 고찰하려는 심리학이 없었다.
추가[P. 210] 나에게 정신의학 외에는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격적으로 계시처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P. 210]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P. 211]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추가[P. 212] 공부를 마치고 나서 몇 년후 그는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P. 213] 나의 첫 저서는 조발성치며(정신분열증)의 심리학에 헌정되었다. 그 책에서 내 인격이 선입견을 지닌 채로 이러한 ‘인격의 병’에 대하여 대답을 한 셈이다.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추가[P. 217] 소위 정상적인 것의 병적인 변형들은 내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정신에 관해 보다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는, 그토록 바라던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P. 221]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의 중심 주제로 삼은 것은‘무엇이 정신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화급한 의문이었다.
[P. 221] 정신의학강의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병든 인격에 관해 소위 추상화를 하고 진단과 증상의 기록, 통계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P. 222]프로이트 자신은 정신의학자가 아니고 신경학자였지만 심리적인 문제를 정신의학에 도입했다.
추가[P. 223] 나는 무의식으로부터 이른바 직접 정보를 얻었다.
[P. 225-226]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를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추가[P. 228] 그러자 그녀가 “그런데 내가 나았어요!” 라고 외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추가[P. 229] 나는 다시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고 그녀는 그때처럼 저절로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통증으로부터 벗어났다.
[P. 235] 살인범은 이니 자기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셈이다. ...........m 부인은 살인으로 인해 심지어 동물에게도 소외되었고, 견딜 수 없이 고독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P. 236]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추가[P. 239] 이제까지 정신병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돈’것들만은 결코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추가[P. 240] 한번은 정신분열증 여자환자를 다루어야만 했는데 그녀에게서 배후에 있는 ‘정상적인’ 인격을 아주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P. 241]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 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추가[P. 243] 겉으로 보게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자주 환자의 외관에 속는다,
[P. 247] 그후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 249]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P.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추가[P. 250]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드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P. 250-251]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이른바 교육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주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P. 251]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부석자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추가[P. 251]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P. 252]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P. 253] 나는 의사로서 환자가 나에게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항상 자문해야 한다. 환자가 나에게 무엇을 예시하는가? 환자가 나에게 아무것도 예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공격목표가 없는 셈이다.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의 환자들을 진지하게 다룬다. 아마 나도 그들과 똑같은 문제 직면해 있는지 모른다. 환자가 의사의 약한 부분을 덮어주는 적절한 고약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추가[P. 253] 상처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 253]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관점도 가지게 된다.
[P. 254]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자기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P. 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P. 260]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P. 261]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아고 있었던 셈이다.
추가[P. 261] 나는 환자를 어떻게 개종시켜보려고 한적이 없으며 그것을 강요한 적도 없었다.
[P. 264]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추가[P. 264]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조금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추가[P. 269] 행운이든 불행이든 세상의 관심을 끌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상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전례가 없는 발전과 재앙을 두루 겪은 사람들을 의사는 만나게 된다,
[P. 270] 우리시대에 이와같이 마음의 분열로 희생된 자들은 단지 ‘스스러 택한 신경증 환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발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추가[P. 271] 영혼은 개념들 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P. 272] 나의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심리적 수준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P. 275] 나의 정신적 발달을 향한 모험은 정신과의사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채 나는 정신병 환자를 임상적으로 밖에서부터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질의 정신 과정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기록하고 분류했지만 그 내용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P. 276]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나는 억압기제가 연상장애에도 작용하고 있으며. 내가 관찰해온 사실들이 그의 이론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프로이트의 논지를 단지 지지할 수 있었다.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추가[P. 277] 예를 들면 사회적응, 비극적인 삶의 정황으로 인한 억압, 체면차리기 등의 문제들이었다.
[P. 277-278] "네가 그와 같이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 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 그리하여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후로 나는 공공연히 프로이트 편에서서 그를 위해 싸웠다.
추가[P. 279]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추가[P. 281]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P. 282-283] 심리적으로 강력한 공포의 대상에 ‘신적’이거나 ‘악마적’d;s 속성이 부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에게는 ‘성적 리비도(Lobido)’가 ‘숨은 신’의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추가[P. 283] 하지만 보다 강력한 대상에 대해 이런 명칭을 붙이든 저런 명칭을 붙이든 결국 무슨 상관이 잇단 말인가?
[P. 284]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을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추가[P. 287] 신성한 힘의 체험으로 마음이 격렬히 동요하게 되면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실이 끊어질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절대적인 긍정으로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부정으로 빠지게 된다.
[P. 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 288] 모든 것이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P. 295]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추가[P. 298] 여기서 나는 그가 어떤 종류의 꿈들을 다루는 데는 전혀 무력하여 그 자신의 교리에서 도피처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추가[P. 300]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추가[P. 301]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반대로 나날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추가[P. 302] 나는 프로이트와의 결별을 예시하는 꿈을 꾸었다.
[P. 307]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너무나도 인간적인’것 외에 다른것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P. 308]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완전히 이성적인 삶의 영위란 경험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대개 불가능하다.
[P. 311]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독특한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들어간데 있을 것이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P 315]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얼마동안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방향상실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P. 315-316] 나는 이론적인 관점을 모두 접어두고 환자가 꿈의 이미지를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나는 꿈을 다룰 때 이와 같은 방식을 꿈해석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 꿈이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사실이다.
추가[P. 316]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소.“
추가[P. 320] 오히려 나는 무겁게 눌린 마음으로 지냈다. 때때로 마음이 너무 짓눌려 내가 어떤 정신장애를 앓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P. 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추가[P. 325] 나는 자주 흥분되어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때 까지만 했다.
[P. 326]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추가[P. 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P. 327-328]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위 돕는 자인 나는 환자의 황상 내용을 나 자신의 견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쓸모도 별로 없는 몇 가지 이론적인 편견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P. 332]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추가[P. 333] 그 노인은 자신이 엘리야라고 말했다 그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처녀는 나를 더욱 당황하게 핶다. 그녀가 자기를 살로메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P. 334]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엘리야는 지혜로운 조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인식의 요소를 나타내지만 살로메는 애욕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추가[P. 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되었다.
추가[P. 338]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P. 339]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내가 아닌 어떤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고,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말로 표현하는가 보다.“
추가[P. 340]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속에 잇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라고 불렀다.
추가[P. 341] 매일 저녁 나는 글 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P. 341]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의 내용을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행사하게 된다.
[P.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P. 343] 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이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P. 345]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추가[P. 351] 나의저작, 즉 내가 정신적으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다 초기의 명상과 꿈에서 나온 것이다.
추가[P. 351] 나의 학문은 나를 혼돈 상태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며 수단이었다.
추가[P. 352-353]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이 길을 좇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나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추가[P. 356] 나의 만다라 그림들은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자기, 즉 나의 전체성을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추가[P. 365] 나는 인생 후반기가 시작되면서 무의식과의 대면을 시도했다. 무의식에 관한 나의 작업은 오랜 기간이 걸렸다.
추가[P. 365]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추가[P. 368] 1926년 무렵 나는 연금술과의 만남을 예감케하는 결정적인 꿈을 꾸었다
추가[P. 371] 내가 연금술적 사고과정의 미궁에서 실을 찾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내 손에 실을 쥐어주는 아리아드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P. 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는 바람직한 발견이었다. 이것으로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추가[P. 373]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모든 것은 이러한 중심점에서 설명되며 나의 모든 연구는 바로 이주제와 연관된다,
[P. 376-377] 심리학도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취급한다. 말하자면 강도의 측정, 양의 많고 적음을 다룬다. 그런데 나타나는 형태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리비도를 에너지로 본다면 일종의 통일된 관점을 갖게 된다. 그러면 리비도의 성질에 관한 논쟁적인 질문, 즉 그것이 성이냐 권력이냐 배고픔이냐, 그밖의 것이냐 하는 질문들은 별로 주요하지 않게 된다.
추가[P. 377]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P. 388] 상처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알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죽은 자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즉 의식 너머의 세계 무의식에서 그런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P. 394]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추가[P. 395] 여러 신의 힘으로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즉 인간의 세계인식 면에서 창조를 폐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추가[P. 397]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P.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은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P. 401] 학문적 탐구를 통해 나는 차츰 나의 환상과 무의식 내용의 토대를 세울 수 있었다.
추가[P.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내가 돌을 다루는 동안, 연이어 이런 어구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추가[P. 417]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 같이 늘 여겨진다,
[P. 417-418] 집단적인 문제가 집단적인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 정신영역에서 뭔가 혼란이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P. 420-421]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추가[P. 421]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P. 421]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추가[P. 422]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P. 422]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P. 422-423] '이 책에서 나는 나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은 내가 이성적으로 궁리하고 짜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반쯤 감은 눈과 반쯤 닫은 귀로 존재의 형상과 소리를 보고 듣고자 시도할 때 생기는 하나의 환상이다.
여행
[P. 431]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 당하고 있는듯했다. 열기가 진동하며 점점 높아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P. 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추가[P. 437]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추가[P. 439] 꿈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단지 수동적으로 무의식 작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림자’와 동일시하려고 덤벼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추가[P. 441]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워 지는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추가[P. 443] 나는 그에게 왜 박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했다.
추가[P. 447] 종교적인 이야기를 할 때 인디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일상생활에서 인디언은 거의 감정 표현이 없는 침착성을 유지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 통제와 위엄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비밀의식에 고나한 것들을 말할 때는 숨길 수 없는 놀라운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추가[P. 450]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오는지 뚜렸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P. 452]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P. 453] 조물주의 손에서 나온 것은 모두 좋다. -루소
[P. 457]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창조주의 몫으로만 돌려왔다.
추가[P. 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체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P. 458] 인간의 의식은 비로소 객관적 실재와 의미를 만들어냈으며 이로써 인간은 그의 위대한 존재 확립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P. 463] 나의 흑인들은 대부분 뛰어난 성격감정가임이 증명되었다. 그들의 직관적인 인식방법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씨, 몸짓, 걸음걸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데 놀랐다.
추가[P. 469] 짐승 떼와 함께 돌아다니는 남편의 ‘자기장’의중심이 되고 있느냐 하는데 있느냐 하는데 있는 것 같았다.
추가[P. 490]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P. 491]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P. 491]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 495]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P. 507]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先史)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추가[P. 507] 남성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아니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늘 나 자신이 원래 어떤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야만인처럼 여겨진다.
[P. 508] 사람들이 이미 있던 무의식 내용을 의식에 통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환상들
추가[P. 511]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추가[P. 513] 나의 생의 한계점에 이르렀고 내가 꿈속에 있었는지 황홀경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극히 인상 깊은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P. 515] 내가 마음먹고 바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 세속적 생활의 모든 환각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제거되었다. 그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뭔가 남는 것이 있었다.
추가[P. 516] 나에게 남아 이는 그것이 바로 ‘나’라고 말이다, ‘나’를 이를테면 남아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P. 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P. 526-527] 병을 앓은 후에 나에게는 왕성한 연구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많은 주요저작이 그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는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P. 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 527]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 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P. 527-528]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추가[P. 528]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 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P. 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P. 535] 우리가 어떤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린ㄴ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P. 536]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을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 만틈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추가[P. 539]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이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P. 543]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 한다’, 그래서 ‘앏’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P. 547] 사후에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의식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의식은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때그때 한계가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미치지 못한 채 남아 있을뿐 만 아니라, 특히 생존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추가[P. 551] 어딘가에서 이미 도달하게 된 의식성의 수준은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상한을 이룬다고 여겨진다.
[P.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 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P. 555]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사건뿐아니라, 물리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추가[P. 556] 다른 관점에서 보면 즉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에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추가[P. 560] 재생의 관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카르마의 관념이다,
[P. 561] 내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고 있는 카르마가 내 전생의 결과인지, 혹은 내 속에 유산을 모아 남겨둔 조상의 소산인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나도 답을 모르겠다.
[P. 562]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추가[P. 566] 육체의 짐을 벗어버린 상태에서 의식을 자각하는 것은 깊은 희열을 느끼게 한다.
추가[P. 566-567] 나는 저승에도 역시 어떤 제한이 잇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P. 572] 그러므로 무의식의 통합성은 나에게는 모든 생물학적, 정신적 현상의 고유한 영적 인도자로 여겨진다.
[P. 573-574] 인간의 과제는 이를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 관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식을 형성해가야 하는 그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 의식의 증가가 무의식에 작용한다는 사실까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만년의 사상
[P. 577] 기독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기독교의 도그마 속에 신성의 변화과정, 즉 ‘다른 측면’에서의 역사적 변형이 예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추가[P. 579] 빛에는 창조주의 다른 측면인 그림자가 따른다,
추가[P. 580] 악의 현실성을 인정하게 되면 선은 당연히 두 대극의 한쪽으로 상대화 된다,
추가[P. 580] 선과 악(또는 불완전함)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추가[P. 581] 개인은 보통 자신의 결단 능력을 결코 인식하지 못할 만 큼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 있다.
추가[P. 583] 우리 앞에 악에 관한 두려운 문제가 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답은커녕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P. 584]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추가[P. 585] 그노시스파로부터 제기된 “어디서 악이 나오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세계에서는 해답을 알지 못했다.
추가[P. 591]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을 할 수 있을 뿐 이다
추가[P. 592]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의 이점은 그것들이 대상의 객관화 즉 인격화를 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추가[P.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아여 증명된다.
[P. 597]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P. 597-598] 그 말씀은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디느라 고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각한 불확실성에 내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추가[P. 598] ‘타자의 의지’ 가 표현되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형성된 재료? 즉 인간의 생각과 언어, 인간의 관념과 온갖 편이다,
추가[P. 599] 이러한 정과를 확고히 거두고 난후에야 이미 주어졌기에 임의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자신의 근본과 기원을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단계에 비로소 이르게 된다.
추가[P. 600]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다,
추가[P. 603] 아마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할만한 가장 고유한 영역에서 생애 처음으로 보다 강하고 낯선 존재를 대면하게 된다,
[P. 604]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추가[P. 604] 자신의 다이몬(daimon)의 충동에 따라 감히 중간 단계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곳에 정말로 이르게 된다.
추가[P. 605]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그 개인에게 이전에는 몰랐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제 그것은 잘 알려진 사회적으로 잘 정의된 자아일 뿐 아니라 무엇이 본래부터 가치 있는가를 심리하는 기관이 된다.
[P. 608]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며 의식을 규정하는 원형들은 실제적인 역할로 출현한다.
[P. 609-610]정신이란 단지 사람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추가[P. 610] 어떤 의식적인 의지도 생의 충동을 오랫동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충동은 내부로부터 일종의 당위나 의지 도는 명령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그 충돌을 이를테면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인 다이모니온’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심리학적인 정황을 적절하게 표현한 셈이다.
[P. 613] 일반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진술은 정신에 의해 as들어진다. 정신은 특히 역동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 역동적인 과정은 정신의 대극성과 그 내용의 토대에 기인하며 양극간의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P. 613] 정신은 자신을 뛰어 넘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고유한 양극성이 진술의 상대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P. 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고린도 전서> 13:7).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P. 620]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전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태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회고
[P. 623]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 624]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적이다.
[P.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 624-625]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추가[P. 626] 나는 많은 사람에 대해 강렬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간파하고 나서는 즉시 마력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많은 적을 만들었다.
[P. 628] 나는 내 인새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P. 629]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P.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 흐리멍덩하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자기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P. 630]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편집자의 말]
[P. 631]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는 세계 속에 감추어진 세계를 그의 의식에 보태었다.
추가[P. 632] 융에게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나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일을 마음속으로부터 ‘사명’으로 느끼지 않는 한 그와 같은 일을 감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가[P. 634] “내 안에서 무언가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거기에 마음이 기울어 내가 쓰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만연의 시상이라는 장이 생겨났는데 그 글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가장 깊은 자신의 사상들을 말하고 있다.
[P. 639] 융은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도 의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치료에 있어서 종교적인 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추가[P. 641] 학문적인 저작에서는 융은 신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인간 마음속에 있는 신의 형상’에 관해 말할 뿐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하나는 주관적인 체험에 기초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진술이다. 전자의 경우는 일반인으로서 말하는 것으로, 그 생각들이 열정적인 감정과 직관, 길고 풍부한 내적, 외적 인생경험들과 연관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는 연구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그 진술이 인식론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사실과 입증 가능한 것에만 국한하고 있다.
[P. 641] 학자로서 융은 경험론자인 셈이다. 융이 회상록을 위해서 개인적인 종교적 느낌과 경험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이 그의 주관적인 경험의 여로를 기꺼이 따라오리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융의 주관적인 진술이 자기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P. 642-643]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글로 써온 내용의 정수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노력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i)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 50개의 인용 귀절을 설명하라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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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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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 |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
융은 외적 사건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내적 변화에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거의 무한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관심의 집중인가 지능의 우수성인가 알수는 없지만 |
2 |
P. 9 |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 |
융의 자서전은 자기 내부에서 본능과 무의식의 결합인 타고난 자기가 의식의 영향아래에서 생각하는 자아에게 보내는 신호를 포착하기 위해, 꿈과 무의식 환상들을 모두 종합하여 철저히 자기를 분석해가는 책이다. |
3 |
P. 10 |
카를 융이 죽기 2년전 BBC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융에게 신을 아느냐고 물었다. 수백만의 시청자들은 융이 어떤 대답을 할것인가 긴장하며 기다렸다,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
이유명한 구절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자서전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자서전의 전체과정이 어쩌면 그가 말한 ‘나는 신을 압니다’라는 문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융이 어떻게 신을 아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4 |
P. 11 |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selbst: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
어쩌면 인간의 인생은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이 실현되는 과정은 아닌지 모른다. 인간이 각각 믿고 있는 종교도 근원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까지 형성되어온 무의식이 신의 이름으로 둔갑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자기신화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
5 |
P. 12 |
그래서 이제 나이 83세에 나는 내 생애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일을 감행하게 되었다. 나는 단지 직접적인 진술, 즉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
그에게는 ‘신화’가 인생이었다. 그는 모든 순간에 집중하고 진실되게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자서전 출간에 임한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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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2 |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 적인 견해를 가질수 있겠는가? |
“신화적인 존재가 인간을 넘어선다,” 우리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의 신화로 외부에서 바라보고 표현할 수 잇을 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인 듯하다. |
7 |
P. 13 |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인간의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 지점도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
인간의 생이 그 사람이 생각해내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의미를 가지게 된 시점부터 우리의 진짜인생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나이가 4살일 수도 있으나 어떤 경우는 40세인 경우도 있다. 비록 40세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때부터 신화가 만들어진다면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다,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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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8 |
P. 13 |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
융이 말하는 이뿌리는 무의식의 세계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 무의식 뿐 아니라 인류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집단 무의식까지 이 뿌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 뿌리 즉 집단 무의식에서 까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우주에 접속할 때 우리는 집단 무의식에서 무한한 정보를 받을 수 있다. 우주의 ‘아카이브’이다. |
9 |
P. 14 |
내 생애의 외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희미해졌거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른 실체와의 만남, 즉 무의식과의 충돌은 나의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는 항상 충만하고 풍성하여 다른 모든 것은 그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
융은 외적 사건에 대한 기억은 다 사라졌으나 자신의 내적 사건은 4살 때 까지를 기억하고 있는데 이 내적 사건이란 무의식이 의식과 충돌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충돌을 통해 자기가 자아와 만나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것이다. 종교를 가질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종교의식 행위가 중요한게 아니고 그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질 때 그리하여 인간내부에서 어떤 충돌과 변화가 일어날 때 그것이 종교가 주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
10 |
P. 24 |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나는 우리집 서쪽에 있는 식당에서 높은 아기의자에 앉아 빵조각들이 들어있는 따뜻한 우유를 떠먹고 있다, 그 우유는 맛이 좋고 독특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우유냄새를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
여기서 융은 자기와 자아의 충돌 뿐 아니라 우유를 처음으로 의식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내적 사건에 의미가 있는 것 만을 기억한다고 한 것이 사건의 특수성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듯하다. 우유에 대한 기억은 그의 우수한 지능이 분명 연관이 있는듯하다. 우유가 의식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아기가 역사 이래 몇 명이나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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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5 |
그로부터 얼마 지난 시기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투르가우로 간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친구는 보덴호숫가에 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호숫가를 떠날 줄 몰랐다. .....호수는 끝도 없이 멀리 펼쳐져있었다. 그 호수의 광활함은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고 비길데 없는 장관이었다, 그때 호수 근처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물이 없이는 아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
알프스를 처음으로 본일, 호수를 보면서 물가에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은 어떤 사물이 의식을 통해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에 기억한 것 같다. 그리고 “호수가에 살아야 겠다” 고 한 이때의 생각은 무의식의 심층으로 가라앉은 듯하다. 결국 융은 말년에 물가 근처에서 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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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6 |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 목사요 나는 그보다 더 가난한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가[P. 56] 나는 나의 부모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목사인 아버지를 연민하기 시작하고 아버지의 목사직업이 야기한 가난을 체험하면서 융은 직업으로서의 목사를 폄하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후에 융이 종교적 행위에 대해 불신을 하게 되는 심층 작용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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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13 |
P. 26 |
부모의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어두운 전조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1878년의 나의 병은 아마 부모의 일시적인 별거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어머니는 여러달 동안 바젤의 병원에서 지냈는데, 추측건대 그녀의 병은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보다 스무살이나 많은 친척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재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그 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감을 뜻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출발하면서 함께 가져가야 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나중에는 인생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
부모의 불화로 인한 어머니의 부재가 어린시절에 큰 어려움을 준 것으로 인해 융은 ‘사랑’이라는 것에 의심하게 되었고, 여자들을 믿지않게 되는 증상을 보인다, 친구들은 아마 동성이라 믿었을 테지만 그 친구들로 인해 발생한 실망은 융의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져왔을듯 하다. 그리고 융은 이것을 “ 인생을 출발 하면서 함께가져가야 할 불리한 조건 ” 이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수정이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어느정도 수정되었을까? 인생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자는 분명 축복된 자들일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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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6- 27 |
어머니가 없는 동안 하녀도 나를 돌봐 주었다 나는 하녀가 어떻게 나를 안아올렸으며 어떻게 내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댔는지 지금도 생각난다. ..... 이런것이 나에게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이상하게 친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우리 가족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만 속해있는듯 싶었다.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
어머니의 부재시에 자신을 돌봐준 하녀는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로 인해 그녀의 형상이 하나의 여성상을 형성하였고 이것은 융이 지산속의 여성상 즉 아니마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여성의 경우 최초 가장 크게 각인된 남성이 ‘아니무스‘를 형성할 것이다. 따라서 최초 접하고 의미를 가진 여성, 남성은 그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할 것이고 그(혹은 그녀)가 친절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일때 그 사람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는 당사지의 지원자가 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사람을 반대하는 폭군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
15 |
P. 50 |
의식의 차원에서 나는 기독교적 의미로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면서 늘 깎아내리거나 “땅 밑에 있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항성 따라 붙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나에게 주입되면서 이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라는 말들을 듣게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다른 무언가가 있을거야’ |
목사의 아들이었던 융은 행위로는 종교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남자인형의 숨겨둠과 몰래 훔쳐보는 행위를 통해 남모르는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므로, 종교적 가르침 외에 사람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최초의 기록인 듯하다, 이런 성향이 나중에 융에게는 신화의 역할로 나타난다.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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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16 |
P. 48- 50 |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다시 말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거나 나의 예민한 감정이 상했을 때, 혹은 아버지의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나 어머니의 병약함으로 내가 침울해졌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싸서 침대에 뉘어놓은 남자 인형과 곱게 칠해진 매끄러운 그의 돌을 생각했다.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결코 누설되어서는 안되는 신성 불가침의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았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비밀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나의 성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것을 내 이른 소년 시절의 본질적인 요소, 즉 내게는 가장 뜻 깊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노란 필통속의 자로 만든 성인 남자 인형을 다락방에 몰래 숨겨 두었던 것이 어린 융에게 엄청난 비밀로 작용했고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하는데서 융은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을 가졌다고 한다. 간혹 종교를 믿는 신자들 중 매일 남몰래 하는 기도의 영향이 이런 것과 비슷하지는 않는가? 조셉캠벨이 매일 새벽글쓰기를 남몰래 한 것 역시 실제의 결과물이 주는 성취 외에도 이런 심리적 영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새벽 글쓰기를 하거나 새벽 수련을 하거나 새벽기도를 할 때 그 당사자는 최초 심리적 위안부터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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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P. 56 |
아버지에 대해서 연민을 느꼈으나,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로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좀 더 강해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변덕스럽고 과민한 성질을 부릴 때면 나는 어머니 편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나의 성격 형성에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되었다. 이러한 갈등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나는 좋든 싫든 부모님을 판정해야 하는 상위의 중재재판관 역할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일종의 자만심을 야기했다. 그 자만심은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는 자존심을 부추기기도 하고 동시에 약화시키기도 해다, |
아버지를 연민하고, 잠을 아버지와 잤으나 의식적으로는 어머니 편이라고 느꼈던 융은 이러한 심리적 갈등이 자신의 성격형성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의학자의 말년의 고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심리적 안정이 성격형성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양친 부모의 경우 일관적인 태도가 중요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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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59 |
사태가 아주 나빠질 때는 다락방에 있는 나의 은밀한 보물을 생각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를테면 내가 쓸쓸할 때도 나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비밀, 즉 프록코트에 높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 인형과 돌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인간’일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융에게 남자인형의 존재는 자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홀로 하는 것,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이유가 여기서 보인다. 그래서 아이의 경우 인형에 집착하고,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현상이 보인다. 성인의 경우 종교나 수집물, 특정 취미에 매달리는 것이 혹시 이런 심층적인 무의식의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성인이 되어서도 아이 때의 것에 고착되기도 한다,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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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19 |
P. 64 |
열두살은 나에게 참으로 숙명적인 해가 되었다. ..............갑자기 다른 소년이 나를 한 대 때리는 바람에 나는 스러지고 말았다. 나는 보도 경계석에 머리를 부딪혀 그 충격으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얻어 맞는 순간 번.개 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너는 더 이상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반쯤만 정신이 멍했는데도 음흉한 공격자에 대한 복수심에서 필요이상으로 조금 더 그대로 누워 있었다,.....그후 나는 학교로 다시 가야 할 때가 되면 그 즉시로 기절하기 일쑤이다. |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아이가 그 상황이 가져다준 이익을 재현하기 위해 그런 상황을 다시 재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중독을 가져온다. 약간의 위통이 있는 아이가 그 위통을 호소할 때 교사와 급우가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되어 그 관심을 끌기위해 위통이 사라졌을 때도 거짓 통증을 호소하고 그것이 먹혀들면 반복해서 그런 일을 벌린다. 그 결과 심기증과 같은 증상이 생겨나고 그 사람은 심리적 댓가를 치루게 된다. 정신의 영역에서도 공짜는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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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6 |
나는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와 아버지 서재로 들어가 내 라틴어 뭅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뻔했으나 몇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결심대로 밀고 나갔다. 그렇게 15분 가량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자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갑자기 나는 이전 몇 달의 상태보다 나아진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발작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융에게 간질 증세가 있다고 의사가 추측했으나 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는 의사의 말을 믿었고 융은 부모의 걱정을 듣고는 정신차리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간질증세로 보이는 졸도 현상이 있을 때마다 공부를 한다. 증상이 완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가 사라졌다는 이 이야기는 질병이 심리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고, 심리적 제어로 그 질병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가 간질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융에게는 발작 증세가 분명히 있었고 그가 그 증세를 없애기 위해 공부를 해야 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 발작이 지속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
21 |
P. 66 |
모든 속임수는 끝이 났다. 여기서 신경증(neurose) 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
정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신경증이라면 신경증은 정신의 변화 없이는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정신의 힘이다. |
22 |
P. 68 |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내’가 이제 여기 있고, 내가 이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내가 옆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지금은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한다.
나의 내부에 ‘권위자’가 자리 잡았다. |
융은 자신에 대한 자각, 자의식이 생기고 난후 자기 내부에 ‘권위자’가 생겼다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는 자의식을 가질 때 스스로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볼 때 그것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보고 있는 현상, 그런 상황을 체험할 수 있을 때 무의식의 횡포에 말리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인가? |
23 |
P. 70 |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자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 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
융은 자신의 내부에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서 심리적 힘이 생긴다. 자신 내부의 두 개의 인격 중 막강하고 영향력을 가진 인격에 권위를 주게 될 때 자신이 주인이 될 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내부에 어떤 인격이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이다,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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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24 |
P. 74 |
‘세계는 아름답고 교회도 아름답다. 하느님은 아 모든 거을 창조하시고 푸른 하늘 저 너머 황금보좌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러자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비되는 듯한 느낌 속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인가? 살인? 아니다. 그것일 수 없다.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죄를 짓은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
목사였던 부모의 종교 영향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것은 융에게 엄청난 부정이고 어쩌면 전면 부정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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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7- 78 |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진지한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부모가 죄를 범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
목사의 아들로서 신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부인하기 시작한다. 원죄의 원인을 하느님에게로 돌리는 불경을 서슴치 않는 목사 아들로서의 융은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심리적, 정신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났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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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8 |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 |
이때부터 신의 생각을 알고자 한 융은 교회의 종교의식과 기독교 문화나 목사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진정 ‘신을 안다’는 단계로 접근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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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 |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 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높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밑으로부터 거대한 똥 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 조각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었다. |
이때 융에게 교회는 죽은 것이 된다, 신이 죽은게 아니고 교회가 죽은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서 융은 신을 알아가게 된다. |
28 |
P. 80 |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
분명 신은 교회보다 인간을 사랑하는가보다. 융이 자신이 알고 있던 종교관을 버리는 불경을 저질렀는데 저주가 아닌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신에 대해 배운대로 알아야 만 정답이라고 하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 신은 분명히 말했다. “항상 기뻐하라”고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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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29 |
P. 81 |
내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나는 체험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로,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깊은 신앙심을 내세워 그 의지에 대항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치유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기적을 아버지는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
융의 아버지는 목사로서의 규범을 중요시하여 인간의 축복을 원하는 진정한 신의 의지를 외면했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 현재도 많은 신자는 종교관습과 종교의식과 교회의 규범에 의해 자신의 신앙심을 항상 시험받고 있다. 지금도 면죄부가 성행하고 있고, 한 영혼보다도 교회 건축의 벽돌을 많이 만드는 성도가 믿음이 좋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협박한다. “너희의 물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
30 |
P. 81 |
인간의 용기를 시험할 때 하느님은 비록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하느님은 또한 아담과 이브를 그러한 방법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느님은 그들이 복종하는가를 알기 위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한 그 명령에 불복종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던 신의 명령에 순종했다. 선악과 한 개가 무슨 큰 불경인가, 그러나 명령을 불복한 것이 불경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은 신이 주신 약속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한다. 이 경우 신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삭을 내려치려 한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란 야훼가 급해서 아브라함을 연거푸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믿음을 보았다. 저기 양이 준비되었으니 그것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것을 융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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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2 |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하느님에게 맡겨졌다는 것과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
우리가 혹시 신으로부터 이탈되는 현상조차 신의 의지에 의한 각본에 들어있는 것인가? 신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신을 떠나서라도 행복하라는 진짜 부모의 심정이 들어있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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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3 |
대성당에 대한 그러한 체험과 함께 마침내 위대한 비밀에 속한 어떤 것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들에 관해 늘 이야기해오다가 지금은 그 돌을 손에 쥔 것과도 같았다. |
지식으로 은혜를 아는 것과 은혜를 직접 체험하고 신앙을 갖는 것은 다르다. 물론 후자가 비교할 수 없을만치 막강한 힘을 지녔다. 단한번의 체험으로 단번에 종교를 개종하는 사람이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바울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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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4 |
당신들은 그 비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당신들은 내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 심지어 나쁜 일을 하고 저주 받을 일을 생각하기를 하느님이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 |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은혜를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불경을 저질러도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고 인간의 행복을 우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리새인들은 경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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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6 |
그 무렵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의심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은총에 관해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체험을 생각하곤 했다. 어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 지식으로 전달하는 목사를 의심하는 성도는 최초로 권위에 대한 극복을 해야한다. 그런데 융의 경우는 그 대상이 아버지이다. 이 경우는 아버지라는 권위가 더 들어가므로 그 결합된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융으로 하여금 반대되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을 때 시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융은 이 일을 했고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갖게 된 체험을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시작으로 결국 융은 신을 안다고 알 수 있게 된 듯하다.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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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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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7 |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 이런 너는 항상 생각하려고만 하는구나.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되고 믿어야해. ” 나는 생각한다, ‘아니다 사람은 체험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로는 ‘나에게 그런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눈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고는 체념한 듯 몸을 돌렸다. |
이것이 융이 ‘신을 안다’고 말한 중요한 증거이다. 그래도 그의 내부에서는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고 아직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인격이 승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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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7 |
반에서 1등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아래에서 나를 시샘하면서 따라잡으려고 기회를 노리는 학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 그후 나는 학급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 편하게 했다. 학교 과제는 몹시 성가셨다. 나는 그것 역시 경쟁심으로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
경쟁을 싫어하게 된 융은 흔히 넘버원으로 설명되는 최고의 길이 아닌 온니원으로 표현되는 차별성에 가치를 두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벌써 학창시절에 형성된 것이고 1등을 할 수 있는자가 의도적으로 2등을 하면서 자신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었을 때 그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탁월했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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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9 |
나는 나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서 동시에 잘못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임을 발견했다.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않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
융 내부에서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어린 때이다. 우리는 각자의 내부에 두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있는가? 혹 전혀 알지 못하고 무의식의 황포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보는것이 아닌가? 어떤 생각이 들 때 그것이 나의 자아인지, 초자아인지, 이드인지,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인지, 페르소나 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진정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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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0 |
하느님의 형상이 단지 인간 하고만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
이때부터 융은 불교의 교리와 비슷한 사고를 하게된듯하다. 화엄경의 마지막 가르침 중에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티끌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 는것이다. 융은 인간 외에 만물에게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게 되고 동양적 사고를 하게 되는 시점이 여기부터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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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1 |
교회는 점점 나에게 괴로운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뻔뻔스럽다고 할 정도로 큰 소리로 하느님에 대해서,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하느님이 무엇을 행하는지를 설교를 했다. 거기서 나는 아무도, 심지어 목사까지도 그 비밀을 모르는 것 처럼 보인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여기에 와서 융은 완전히 교회와 정신적인 결별을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신과의 교통의 통로로 자연을 통해 신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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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2 |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융은 교회나 목사가 아닌 자신의 복종을 통해 신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것에 대한 확신있는 말을 하고 있다. “기독교는 분명 체험의 종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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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내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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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2 |
종교적인 계율들이 심지어 하느님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깜짝 놀랄만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것일 수 있는데 그 계율들은 하느님의 이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있는듯하다, |
종교적인 계율과 종교행위의 강조가 오히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구원을 시도하는 신의 의지에 반하게 되는 사례는 지금의 기독교내에서도 설명할 필요없이 횡행하고 있다. |
42 |
P. 93 |
내게 일어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자신의 압도적이고 충격적인 의지를 무력한 인간들에게서 철저히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이 말을 통해 융은 진짜 신을 믿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신이 요구할 때 이삭을 찌르는 행위를 할 만치 순종할 수 있게 되어야 신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인가? |
43 |
P. 96 |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
이런 상태가 된다면 이 땅의 자기와 하늘의 신이 연결된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초월의 상태가 일어나 융은 그 초월이 시간의 초월로까지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
44 |
P. 97 |
어머니는 나에게 무척 좋은 분이었다. ....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역시 두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악의 없고 인간적이었으며, 거기에 반해 또 하나는 으스스했다. |
융은 자기 어머니를 원래 따뜻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내부에 두 개의 인격을 본다. 이것은 여성 속에 존재하는 남성형상인 ‘아니무스’를 느낀 것인가? 비로소 융은 자신외의 인간에게서도 2개의 인격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여성속의 남성인 아니무스와 남성속의 여성상인 아니마에대한 실체적인 개념을 세우는 듯하다. |
45 |
P. 100 |
어머니의 두인격 사이에는 엄청남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낮에는 사랑스러운 어머니 였으나 밤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그 시간 어머니는 이상한 동물이기도 한 예언자처럼,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처럼 보였다. |
이곳에서 융은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두 인격을 만난 듯하다. 타인속의 여러 인격을 볼 수 있게 된 이 능력은 정신의학을 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융의 달란트였던 듯하다. |
46 |
P. 102 |
내가 전혀 일수 없는 어떤 일을 갑자기 알게 되는 일이 내 생애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 인식은 마치 나 자신의 착상인 것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
자신이 알 수 없던 어떤 일을 자연히 알게되는 현상을 우리도 가끔 경험한다. 융은 이것을 집단 무의식의 개념으로 정리하였는데 여기서 자신의 그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
47 |
P. 106 |
나는 성찬식이 뭔가 이미 계획되고 인습에 맞는 격식에 따라 행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 역시 그 일을 무엇보다 규범에 맞게 수행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듯 보였다. |
융은 의미없는 종교행위에 회의를 느꼈음을 설명하면서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그맛이 없었다는 설명으로 성찬식이라는 종교 행위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를 은유하고 있다. |
48 |
P. 108 |
나에게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다, |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종교가 인간을 구속하기 시작하면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것을 부정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절대적인 신에 대해서 조차....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진정한 의미의 재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
No. |
Page |
원문 |
내 생각 |
49 |
P. 109 |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안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한쪽면에만 매달려 유혹자와 파괴자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
융은 신을 위대한 위험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가진 진짜 신에 대한 경외심을 피력한다. 신은 교회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교회에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신은 만물위에 존재할 수 있고 신의 의지에 인간은 순종해야만 한다. 신은 두렵고 떨리는 존재이다, 위대한 위험이라 한다, 마지막순간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선포를 받게 된다면 우리는 어쩔것 인가? |
50 |
P. 110 |
성찬식의 실패? 그것은 나의 실패였을까?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나는 교회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와 다른 모든 사람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
여기서 융은 자신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 때문이었고, 교회에 하느님이 없어서 였기 때문이라고 마지막으로 정리한다. 기존 기독교의 계율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위험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까? 신을 위대한 위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통 기독교 밖에서 너무도 종교적으로 산다. 그리고 신을 안다고 했다. 그런 그를 신도 잘 안다고 했을까?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
51 |
P. 112 |
하느님과 같이 거의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찾기 위해서 하느님ㅇ[ 관해 더 많이 알아야만 했다. |
신을 알아야만 그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사랑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보고도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시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알려고 하지 않는 대상은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융이 이 논지는 진리에 가까울 것 같다,. |
52 |
P. 112 |
인격도 역시 하나의 성격일 것이다. .... 만일 하느님이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주관적이며 한정된 세계의 자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종류의 성격내지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이 문제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를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융은 신의 성격까지 알려고 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우리가 한 인격을 알아가면서 그의 성격을 파악해 간다. 마찬가지로 신의 성격을 파악해 간다는 것은 신에 대해 여러 면모를 하나 하나 파악해 간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특성 외에도 특수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특수한 상태가지도 속속 알게될 때 우리는 그의 성격을 조금 파악한다고 할 수 이다. 신에 대해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단계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가능한 것일까? |
53 |
P 119 |
이 철학자들은 뭔가 잘못된 것인가? 나는 자문해 보았다. 그들은 단지 소문으로만 하느님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점에 있어서 철학자들과 달랐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모순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신하고 있었다. |
융은 종교적 갈등으로 철학으로 향한다. 파우스트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는데 진정한 철학으로 가는 길에는 혼란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철학 사전>을 읽고 철학자들이 신을 모른다 라고 느끼게된다. |
54 |
P. 121 |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편이 나을 것이다. |
그렇다. 아무리 선한의도로 선하게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도 교만이 들어가면 그 순간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교만을 제일 싫어한다. 천사장 루시퍼를 통해 신은 교만으로 타락하면 손 쓸 수가 없음을 학습하였을 것이다. |
No. |
Page |
원문 |
내 생각 |
55 |
P. 132 |
나는 철학사에 관한 작은 입문서를 체계적으로 읽었고 그로 인해 이미 사색되었던 모든 사상에 대한 일종의 개관을 얻게 되었다. 만족스럽게도 나는 나의 많은 영감이 그 사상들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우리가 무언가에 관해 고민하는 것을 이미 오래전 누군가가 이미 고민하여 답을 내놓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을 만나면 철학자들의 고민을 찾게 되고 거기서 중요한 단서를 찾곤 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형태로 우주의 아카이브로 저장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56 |
P. 143 |
혼자 집에 잇거나 자연 속에 있을 때는 그 즉시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강력하게 되살아나고, 그들과 함께 위대한 ‘신의 세계’도 되살아났다. |
융에게 철학은 신을 알아가는 한 과정에 포한된 것이었다. 자연도 그랬다. |
57 |
P. 150 |
이제 나는 이 어마 어마한 산에 와 있다. ..... 거대한 낭떠러지들이 있어서 나는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들은 신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신의 세계가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
융은 이때부터 자연 속에서 신이 보이는 것을 피력하기 시작한다, |
58 |
P. 180 |
이제야 나는 나의 체험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 자신은 나의 꿈속에서 신학과 거기에 기초를 둔 교회를 부인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이 그밖의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을 허용해주었다. |
기독교 이외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
59 |
P. 193 |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서 그 어떤 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마음이 언급된 곳에도 마음에 관한 진정한 지식은 없었다. |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융이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정신의학자가 된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는 정신과의사 나 심리학자 뿐만 아닌 우리같은 일반인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모든 것의 답은 마음이 쥐고 있다. |
60 |
P. 213 |
정신의학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병든 정신과 ‘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의 정신 간의 대화이며, ‘병든’ 인격과 치료자 인격 간의 대결이다. 그런데 치료자 인격이라는 것도 병든 인격과 마찬가지로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의 정신건강이 너무 중요하고 그들이 다른 전문가에게서 슈퍼바이저를 받는 것이다. |
61 |
P. 223 |
나는 무의식으로부터 이른바 직접 정보를 얻었다. |
연상 진단에 의해 ‘무의식’으로부터 정신질환의 원인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 정보를 제공한 무의식은 집단 무의식일 가능성이 더 크다, |
62 |
P. 225 |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
정상인인 우리에게도 이런 조짐이 조금씩은 다 있다. 그래서 사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울고 웃는 과정을 통과해야 깊은 이해가 동반되는 것이 아닌가? |
63 |
P. 239-240 |
이제까지 정신병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돈’것들만은 결코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 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번은 정신분열증 여자환자를 다루어야만 했는데 그녀에게서 배후에 있는 ‘정상적인’ 인격을 아주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대리인이라고 외치던 정신병자에게서 정상의 징후를 발견했다는 융의 진단은 우리가 나진스키에서 보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양의 차이 이지 질의 차이는 아니다. 누구든 도가 넘어 간다면 정신병으로 진단 받을 수 있고, 정신병자로 낙인받은 자도 조금 덜하면 퇴원이 가능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이 된다, |
No. |
Page |
원문 |
내 생각 |
64 |
P. 250 |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
정말 마음이 모든 것의 출발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온다. 인간의 정신의 변화가 오는 위험은 이 위험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늘 마음이 문제이다. |
65 |
P. 269 |
전례가 없는 발전과 재앙을 두루 겪은 사람들을 의사는 만나게 된다, |
전례가 있든 없던 개인사에서 발전과 재앙을 두루 겪게 되면 신경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이 그 스트레스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종교조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
66 |
P. 373 |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모든 것은 이러한 중심점에서 설명되며 나의 모든 연구는 바로 이주제와 연관된다, |
인생을 통해 하나의 목표를 갖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 목표를 이른 시기에 갖게 될 때 오래 지속된 그 목표는 눈덩이가 구르는 효과처럼 커다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
67 |
P. 491 |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우리가 해방을 맞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것에 헌신을 다해야 한다. 억눌려 있는 것이 있을 때 결핍된 것이 있을 때 사람을 죽일 수도 잇을 신경증이 유발된다, |
68 |
P. 491 |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
사람들의 경우는 여우의 신포도가 통하지 않을수도 있다. 숨겨진 억압된 욕구는 어떤 곳에서 튀어 나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욕구를 표출해야 한다, |
69 |
P. 536 |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을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
우리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뿌리도 깊고 방대하게 퍼져있다. 무의식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상당한 자산이 된다. 잘못되면 재앙이 되기도 한다. |
70 |
P. 641 |
학문적인 저작에서는 융은 신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인간 마음속에 있는 신의 형상’에 관해 말할 뿐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하나는 주관적인 체험에 기초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진술이다. 전자의 경우는 일반인으로서 말하는 것으로, 그 생각들이 열정적인 감정과 직관, 길고 풍부한 내적, 외적 인생경험들과 연관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는 연구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그 진술이 인식론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사실과 입증 가능한 것에만 국한하고 있다. |
융의 신앙은 체험에 기반하여 검증 가능한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인격으로서의 신을 분석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인간의 인격 분석을 선행했다.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분석했고 인간 속의 신성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심리학적 도구에 맞춰서 객관화 하려고 했다. 그는 인간의 단계를 넘어서서 자연에서 조차 신성을 찾으려했고 이 과정을 거치며 동양종교에까지 심취하게 된듯하다. |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 ‘기억 꿈 사상’은 융의 제자이면서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간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융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대필이 아니라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에 거의 융의 집필이라고 봐도 된다고 역자는 말한다.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융의 뜻에 따라, 그가 만 85세의 나이로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융은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의 자신의 정신세계를 차례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환자를 분석하는 의사 시절의 기억은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사고를 일갈한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자신 속에 들어있는 여성상 아니마에 대한 고백, 연금술로 표현한 분석심리학에 대한 견해 , 카르마를 이야기하며 보여주는 동양 사상에 대한 자신의 사고, 무의식과 그 현상에 관한 연구를 위해 원주민을 직접 만난 여행이야기, 꿈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 신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원형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만년의 사상인 집단 무의식과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 이런 순으로 책이 전개되고 있었다.
야페가 쓴 서문에 보면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외적 사건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적인 큰 의미를 가질 때 그의 기억에 남고, 그 기억은 평생을 관통하며 그의 사상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정리했다. 자기실현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데 융은 꿈의 분석을 통해 ‘자기’를 참 모습을 찾아내 ‘자아’에게 전달하려 한 것 같다. 이 자서전은 융이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작업을 해가는 과정과 그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융에게는 매우 명료한 작업이었겠으나 읽는 나는 이해의 부족으로 모호했다.
연구원 과정에 뒤늦게 참여하여 처음 이 책을 3일 만에 읽어야 했을 때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람의 기억력이 어떻게 수십년을 지속할 수 있을지 그의 기억력에 놀랐었다. 어떻게 80세가 넘은 나이에 2-4세 무렵에 꾼 꿈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 유모차에 누워 있었던 기억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지, 우유를 처음 먹었을 때 기억을 해내는 융이 우리와 다른 머리 구조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융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조차 꿈으로 기억하고 표현하고 있었고 그런 많은 것을 평생 기억하고 있는 그가 미치지 않은 게 기적 같았었다.
그런데 지금 두 번째 읽으면서 그의 기억력뿐 아니라 평생을 두고 관찰하고 사고한 정신과정에 경외감을 느낀다. 단순한 천재라기 보다 무서운 집중력과 집념이 있었던듯하다.
또한 두 번재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자서전이 그가 ‘신은 압니다’라고 대답한 것에 대한 상세한 해설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융은 스스로를 ‘교회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신이 없는 교회는 나가지 않겠다. 은혜를 지식으로 알고 설교하는 도무지 신을 알지 못하는 목사의 설교는 듣지 않겠다. 자신은 신과 직접 교통하겠다. 기독교외에도 구원은 있다. 대자연 속에도 신성이 있다. 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 신의 인격뿐 아니라 신의 성격까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해 알아 가려는 하는게 순서이듯 그는 신에 대해 알아 가고 있었고 이 자서전은 그가 ‘신을 압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자세한 해설서로 느껴졌다.
두 번째 읽으면서도 나는 사람의 정신의 깊이와 넒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또 다시 보았다. 자서전 문학의 백미라고 하는 이 책의 우수성이 다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책은 어려웠다. 두 번 읽어서도 역시 어림도 없다. 세 번째 읽으면 또 다른 관점이 보일 것이고, 열 번째 읽을 때 나는 아하~~하는 것을 찾아내게 될지 모르겠다. 위대함이 분명 들어있는 자서전이다. .
융은 "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내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책은 두 번째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았으나 그래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몇 독을 더해야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역시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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