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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7일 22시 23분 등록

북리뷰 52 : 이미륵 평전 
         
   책: <이미륵 평전 Dr.Mirok Li> 정규화. 박균 지음. 범우사. 2010.


  
***저자에 관하여


  정규화는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했다.

외국어대학 독어과를 졸업하고 뮌헨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수업 중에 정치묵 교수가 소개한 <Der Yalu fliesst>라는 책이 인연이 되어 그 책의 저자인 이미륵 박사를 깊이 연구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고병익이 대학신문에 쓴 “어떤 이방인-독일 사람들의 추억속에 살아있는 한국인” 과
전혜린이 쓴 “이미륵의 무덤을 찾아서”
엘리자벳 샬크가 쓰고 전혜린이 번역한 “이미륵씨와 함께 보낸 가을”
김재원의 “이미륵씨의 생애” 를 읽으며 그에게 다가온 인연을 지극한 정성으로 살려냈다. 


그는 마침내 1965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이미륵에 관한 자료를 충실하게 모아 나갔다.
귀국 후 성신여대 독문과 교수, 한국 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엮임했다.

지금은 이미륵 박사 기년 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우연한 만남을 전공과 연결시켜 자료를 찾아내고 조국보다 독일에서 더 알려진 훌륭한 작가를 한국에 알리는데 헌신했다. 나도 이미륵을 읽을 때마다 함께 하던 이 “정규화”란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저서:  <독·한 자연주의문학의 비교연구>(독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독문학용어사전>(공저), 
          <재외한인작가 연구>(공저), 
          <한국의 독일문학수용 100년>(공저), 
          <Deutschland, Korea-geteilt, vereint>
(공저) 등.  

역서: <압록강은 흐른다>,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등.


박균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성신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음악 대학원에서 한국음악 이론을 전공했고 충북대 대학원에서 한국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몇몇 대학에서 한국음악이론을 강의한다.

   

***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차례

  서언 4 

   제1장 출생과 성장 11
점지(點指)된 아들, 미륵 13
부드러운 남풍의 기억 15
허공의 바람 벽에 서다 16 

    제2장 망명생활의 시작 21
격동의 혼돈 속으로 23
상해에서의 망명생활 29 

   제3장 독일에서의 유학생활 33
고독한 이방인 35
자기성찰의 시간 38
뷔르츠부르크 의과대학 시절 42
안개비에 젖은 하이델베르크의 검푸른 넥카 강 47
회색도시, 뮌헨 50
회류(回流)하는 강, 이자르 62
인식의 자유, 그 신비의 재생력 65

   제4장 초기 작가 생활 71
슈바빙의 보헤미안 73
첫 산행 76
최초의 단편 <어느 날 밤 골목길에서> 79
운명의 만남 84
떠나는 자와 남는 자 87
지식을 표상지우다 89
서양문명의 이율배반적 사고에 대한 비판 92
인식의 무경계 - 가벼움과 무거움의 조화 94
순수한 믿음의 표징 100
이질(異質)과 공감(共感)의 미학 106
‘수심에 잠긴 아이’의 초상 113
단편 <수암과 미륵> 119

    제5장 순수의 초상 ‘압록강은 흐른다’ 125
그래펠핑, 예술혼을 깨우다 127
재회 130
언어를 향한 파토스 137
한국에서의 유년을 회상하다 144
고결한 백장미의 혼(魂) 149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탈고하다 153
무위의 카오스 156
안궁(安窮)의 생철학 159
‘푸른 압록강’의 기적(奇蹟) 164
순수의 초상을 세우다 171
한국을 동경(憧憬)한 독일인들 195

   제6장 사라진 원고의 비밀 203
이별과 회한 205
어느 한국 어머니의 이야기 209
서양으로 향한 길 214
무제(無題), 그래도 압록강은 흐르는가? 220

   제7장 동양 철학교수로서의 마지막 생 227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삶 229
무 성향 , 비 당파성 234
한국어 강의 241
맹자의 위대한 실천 교육 철학을 펼치다 246
동양적 ‘시상(詩想)’의 경험미학의 강의 252
위대한 동양사상의 초석, 논어로 대화하다 258
무상(無常)의 단면, 마지막 생의 스케치 261

  제8장 찬란히 아름다운 죽음 267
마지막 산행 269
푸른 강 저 너머로 272
아름다운 생이여! 찬란히 아름다운 죽음이여! 276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기리며 281
<무던이>의 슬픈 사랑이야기 287
오랜 이별, 그리고 슬픈 해후 290
<압록강은 흐른다> 한국의 이야기로 귀향하다 294

  제9장 정규화 자료 수집 40년, 증언자들을 회고하며 297
Dr. Lotte Wolfle - Otto Seyler
Gutensohn - Schneidewin - Bartscht - Schalk
Prof. Dr. Herbert Gopfert│Prof. Dr. Wolfgang Bauer
Prof. Dr. Gunther Debon│Dr. Hans Dolezalek
Georg Gabritschevsky│Dr. Ludwig Duderlein
Dr. Edmund Gans│Walter Leifer│Margott Dias
Lina Seizer│Else Sigmundt│Clara Huber
Egon-Bernhard Wehner│김재원 박사
Pro. Dr. Andre Eckardt - Prof. Dr. Hermann Lautensach
Dr. Anselm Schaller - Dr. Irmgard Sartorius│李儀貞  

이미륵 자료 347
발표작 및 기고문│유고│번역된 작품│압록강은 흐른다 발췌문
학술작업│서간문│사전 기록│방송│논문 및 저술
헌정서 및 기타│서평│이미륵에 관한 기고문 

참고 문헌 373
국내 문헌│외국 문헌
이미륵 연보 377

  

  서언

4. 1946년, 작가 이미륵의 독문소설, <Der Yalu fliesst, 압록강은 흐른다.>가 뮌헨의 유명한 피퍼 출판사에서 출간 되었을 때, 독일 전역의 신문사들은 일제히 찬사를 쏟아냈고 , 주요 잡지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올해 독일어로 씌여진 가장 훌륭한 책은 외국인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미륵이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1장 출생과 성장

13. 황해도 해주, 수양산 자락에 위치한 평화로운 고을 서영정.

꽤 성공한 상인으로 또 천석 지주로 남부러울게 없었던 이동빈의 간절한 소망은 대를 이을 아들 하나를 보는 것이었다. 연거푸 딸만 셋을 낳은 그의 아내는 애타는 속내를 다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불심의 은덕으로 아들 하나만 점지되길 간절히 바랬다.

15. 마침내 1899년 음력 삼월 초팔일, 그는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삼대독자, 아들을 얻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의경”이라 지었고, 부인은 미륵불 은덕으로 점지된 아이니 집안 사람들과 아랫사람들에게는 “미륵”이라 부르게 했다.

만신이 예언했던 대로 아이의 배꼽 밑에는 신기하게도 우물 정井 모양의 징표가 있었다.

18. 이동빈은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조혼은 흔한 일이었고, 삼대 독자였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해주에서 상인으로 크게 성공한 최 씨 집안의 딸 최문호와의 혼사를 결정했다. 그때 의경의 나이 열한 살, 여섯 살이나 많은 열일곱이었다. 의경은 부모에게 순종적이었고, 혼사는 열한 살의 어린 그에게는 그저 어른들이 행하는 의례일 뿐이었다.

19. 그러나 1913년 여름 날, 알콜 중독 증세로 이미 수차례 발작을 일으켰던 부친은 혼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장 망명생활의 시작  

23. 그는 1916년 개설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강의록으로 독학을 시작한지 일 년 후인 1917년, 그는 경성의전 2기생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상경한 그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안국동에 자취방을 구해 친구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방학 때마다 고향 해주를 찾아 봉사나 계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며칠을 묵은 뒤 곧바로 상경해 친구 익원의 장서에 끼워져 있던 일본어 번역판 철학 책들을 탐독하는 것을 즐겼다. 

마침내 3월 1일 새벽 서울 거리에는 각종 격문과 독립운동의 소식을 알리는 <조선 독립 신문> 제 1호가 독립 선언서와 함께 배포되었다. 

28. 일본 경찰은 시위 주동자들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의경도 수배인물로 지목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상해로 피신할 것을 재촉했다. 

짙은 안개서린 늦은 가을 어느 날 밤, 의경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을이 끝나는 길까지 동행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무사히 넘어 반드시 유럽에 갈 수 있게 될게다. 이 어미 걱정은 절대 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테니, 세월은 빨리 지나간다. 혹여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슬퍼 말거라. 나는 내 생애 가장 큰 기쁨이었다. 이제 혼자 네 길을 가거라!” 

31. 1919년 11월 27일 의경은 대한 적십자대 대원으로 발탁되어 임시 정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의학도였던 그는 간호사 양성하는 일을 도왔다. 

사연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침묵하는 지혜를 터득했고, 또한 누구와도 담담하게 이별하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1920년 4월, 의경은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인 신분의 학생여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한 컷 사진을 남긴 채, 그는 유럽행 프랑스 여객선 르 뽈 르까에 몸을 실었다. 청년 의경의 길고 고단한 망명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3장 독일에서의 유학 생활 

35. 상해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지루한 일정을 마치고 1920년 5월, 마침내 마르세유 항에 도착했다. 의경은 안봉근과 함께 독일로 향했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던 안봉근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성 베네딕트회 빌헤름 수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의경은 그의 도움으로 뮌스터슈바르차하 수도원에서 당분간 머물 수 있게 되었다. 

36. “나는 지쳐있었다. 온통 내 삶을 눌러왔던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해왔다. 총소리도 들리지 않고, 체포하려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오히려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지독한 피로감이었다.” 

37. 의경이 독일에 도착한지 한 달 정도가 지난 1920년 6월 29일, 본국의 대구지방법원에서는 항일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대한청년외교단의 총무를 비롯한 간부 이하 여덟 명과 애국부인회 회장과 지부장 및 기타 이십여 명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다. 독일로 망명한 이의경에게는 궐석재판으로 출판법 위반에 따른 2년형이 언도 되었다. 

1919년 이후 일제는 상해임시정부의 지휘 하에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 활동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그것의 근본적인 차단을 위한 자구책으로 유럽 내 유학생 및 거류한인들을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여 감시했고, 의경도 그들 속에 포함되었다. 고향의 가족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이방인의 고독은 점점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변해갔다. 

41. 그러던 어느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이미 세상은 눈 속에 깊이깊이 하얗게 잠겨 있었다. 마침 그날 그는 고향에서 온 편지 한통을 받았다. 

“언젠가 고향마을 송림만 위로 휘날리던 쓸쓸한 눈보라의 소리없는 난무를 닮아 있었다. 그날 아침, 그는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큰누이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 어머니가 며칠을 앓은 뒤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오히려 그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생의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붙잡게 했다. 그랬다. 그는 살아남아야했다. 어머니가 간절히 소원했으므로! 

43.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1년간을 청강생으로 수업에 참가한 후, 다음 해 1922년 4월 26일 학적부에 정식으로 의거ㅏ대 학생으로 등록되었고, 5월에야 전공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44. 뼈 속 깊이 각인된 그의 동양적 사고방식대로라면 학문이란 그대로 ‘문 文’을 익히는 것이었고, 따라서 하나의 문장 혹은 하나의 경구 속에 내재된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대에 맞게 변용하여 스스로 실천적 행동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학문하는 참된 목적이었다. 

50. 1925년 봄, 그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 의학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 경성의전에서 3년,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2년, 그리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1년을 모두 합치면 그는 6년이라는 긴 시간을 의과대학에서 보냈다. 그것은 그의 짧았던 생을 고려한다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51.여느 아침때처럼 일글리쉬 가든에 앉아 책을 읽고 잇을 때, 키가 크고 날렵해 보이는 독일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안젤름 샬러 라고 소개했고, 뮌헨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샬러는 선뜻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교수 한분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그를 교수연구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의 지도교수가 된 동물학 박사 빌헤름 괴취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62. 5년 전 뷔르츠부르크 대학시절에 겪었던 중환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병의 재발은 치명적인 것이어서 그는 순간순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학생처 후생 담당의사는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학업을 중단하길 권했고, 스위스 루가노에 있는 아그라요양소를 소개해 주었다. 

살아서 뮌헨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의경은 떠나기 전에 미리 짐을 정리해 두었다. 편지와 문서의 대부분은 불살라버렸고, 누구든 고향으로 보낼 수 있도록 작은 소포하나에 주소를 적어두고, 그는 루가노로 떠났다. 

63. 석 달간의 요양생활을 마치고 뮌헨으로 돌아온 그는 이자르 강 부근 베스터뮐 슈트라세에 값싼 자취방을 구했다. 

그래도 집 근처엔 이자르 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을 따라 길게 나있는 길은 그에겐 좋은 산책로를 제공해 주었다.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난한 생활의 허기진 가슴은 충만해졌다. 

64. 그 무렵 어느 봄날, 의경은 짙은 갈색머리의 아름다운 독일 여인, 로자 마우러를 만났다. 뮌헨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녀를 의경은 꼭 의도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혹은 길에서 혹은 이자르 강가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두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66. 1927년 겨울 학기, 그는 처음으로 순수철학 강의를 신청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의 인연 쿠르트 후버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후버는 자신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인간이 사고하는 단계적 체계를 탐색하는 도구로 활용하였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과 인지론을 구축했다. 젊은 학자의 도전정신은 대학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미륵도 예외는 아니었다.  

69. 무엇보다 후버교수의 명쾌한 지적은 그에게 학문적 진전이 힘들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단순히 독일어 구사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양적 사고에 깊이 침잠해 있었던 자신의 무의식적 사고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시켰다. 

70. 1928년 7월 18일, 그는 마침내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의 내용은
<비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 재생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였다.
 

4장 초기 작가 생활 

73. 1928년 박사학위를 마치자 더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생활은 또다시 궁핍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의 탁월한 서예 실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관심있는 몇몇 독일인들이 그를 찾아와 레슨을 받았다. 그는 수업료로 받은 몇 마르크의 돈과 이따금 일본 유학생들의 논문을 번역해주고 받은 사례비로 어렵게 생활했다. 

75. 그럼에도 슈바빙의 젊은 청년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배고픈 육체적 곤궁을 정신적 가치로 대체시키면서 자유로운 몽환적 일탈을 꿈꾸고 있는 보헤미안 들이었다. 

76. 감추어졌던 자신의 운명과의 극적인 해후를 알리는 서곡이 그의 내부에서 아주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87. 1932년 그는 지금껏 돌아들어왔던 에움길에서 진정한 운명으로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알프레드 자일러 박사와 그의 부인 알리체, 딸 베르타, 그리고 아들 오토, 그는 자일러 일가와의 천륜과도 같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111. 기억을 유추해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나에서 저 먼 시간’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저 멀리로부터 현재의 나’로 이르는 방식이다. 단편 이상한 사투리는 그의 회상의 글 가운데 , 어쩌면 글쓰는 그 시점이 작가에게서 가장 근접해있던 시간의 기억 단상이다. 

의경은 화선지의 여백만큼의 공간 속에 시간을 관조하는 스케치 방식을 회상의 서술장치로 삼았다. 그리고 그 위에 독자들 스스로 선명한 배경 채색을 드리우고 관조적 정조를 담아내도록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20. 작품의 허구란 바로 수면 위로 반사된 모습 뒤에 깊숙이 잠수해 있는 전신의 몸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이었다. 누구든 한번 정도는 용감하게 그 자신의 전신을 들여다보도록 허용하는 예술의 경험세계. 

5장 순수의 초상 ‘압록강은 흐른다.’ 

127. 1937년 12월 20일, 자일러 가족과 이미륵은 그래펠핑 아킬린디 슈트라세 46번지로 이사했다. 뮌헨 근교에 위치한 그래펠핑은 작고 조용한 도시였다.  

129.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58년을 살았고, 대작 <파우스트>를 완성하고는 숨을 거두었던 바이마르! 그는 괴테의 저택을 둘러보면서, 무엇보다 그의 집 담벼락을 온통 휘감고 있는 담쟁이 넝쿨의 음밀한 기생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것은 마치 깊은 고즈녁함 속에 괴테의 숨결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이미륵은 넝쿨 줄기 몇 개를 뜯어 가방에 몰래 챙겨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 담쟁이 넝쿨의 작은 뿌리를 화분에 심어 그의 창가에 놓아두었다. 몇 년 후 그의 침실 벽은 ‘마치 식물원처럼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위대한 독일 작가 괴테의 예술혼과의 기묘한 동거! 

그래펠핑의 볕 잘 드는 작은 방에서 이미륵은 밤낮없이 타자기를 두들겼고, 그의 파이프에선
연거푸 회색연기가 뿜어졌다. 

130. 1938년 가을 어느 날, 한적한 그래펠핑 역 부근에서 그는 아주 우연히 후버 교수를 만났다. 십년만의 재회였다. 후버 교수는 그해 10월 베를린 국립음악연구회에서 민속음악분야의 지도자 자리를 버리고, 뮌헨 근교 작은 도시 그래펠핑으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독일의 고대 민요를 채집해 기록으로 남기고, 또 그것을 심리 철학적인 측면으로 확장시키는 새로운 이론적 시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후버는 민요를 단순히 노래가 아닌 형이상학적인 총체개념, ‘독일성’을 파악하는 심리적 장치라고 확신했다. 

131. 그러나 민족성이라는 총체적 의미를 순수한 학문적 대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후버의 연구업적들은 점차 나치의 정치적 이념 속에서 퇴색되고 변질되어 갔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어린 청년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태에 이르자, 깊은 회의감에 빠진 그는 1938년 10월, 베를린에서 그가 누리고 있던 모든 명예와 직위를 버리고, 뮌헨대학의 음악강사로 되돌아왔다. 

135. 확고한 신념과 그에 걸맞는 이미륵의 실천적 태도는 사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미륵은 쿠르트 후버의 진정한 친구였다. 우리 세사람은 함께 둘러앉아, 같은 사상, 같은 희망을 나누며 숱한 밤을 지새웠다. 그는 언제든 철학적 심연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고, 현자의 유머도 지니고 있었다.  

143. 중국어 문법책은 최종적인 출판단계에까지 이르렀지만, 세계 제2차 대전 중 당시 원고의 원본을 소장하고 잇던 키이펜 호이어 출판사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면서 출판사는 결국 이미륵의 중국어 사전 원고를 분실하고 말았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한국말을 가르친 것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어 문법>책을 만들었는데, 언어학자들의 눈에는 학술적이 아니라고 해서 뮌헨대학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말았다. 

145. 무엇보다 ‘산은 많은 것을 사진에 담을 수 있게’했다. 사진 광에 가까울 정도로 그는 사진찍기를 즐겼고, 또 어두운 암실에서 직접 인화한 사진들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149. 1942년 1월에 이미 다섯 번째 전단 <모든 독일 시민에게 외침>이 발행되었고, 저항단체인 ‘백장미’가 설립되었다. 1942년 6월 3일 후버 교수는 숄 자매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처음 만났고, 그 해 12월에 그는 마침내 백장미 전단의 발행자들을 만나 저항의 글을 계획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18일 후버는 <학우들이여!>의 전단을 인쇄하고 배포하기 위해 대학에 들렀다가 관리인에게 발각되어 곧바로 게슈타포에 의해 연행되고 말았다. 

1943년 7월 13일, 후버와 슈모렐은 뮌헨-슈타델하임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후버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진정한 학자적 기질과 양심을 지니고 있었던 학자의 죽음은 이미륵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151. 영웅의 죽음은 고독했다. 후버 교수는 부인이 마지막으로 싸들고 갔던 그 음식과 포도주를 모두 마시고 태연한 모습으로 형장으로 들어갔다. 수습된 그의 시신은 뮌헨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음침하기 이를 데 없는 한 공원묘지 한 모퉁이에서, 작은 몸을 움츠려 떨고 있는 어린 두 자녀를 끌어안고 젊은 미망인 글라라는 오열을 토해내지 못하고 그저 흐느껴 울어야 했다. 

152.후버 교수가 처형당한 뒤, 그의 많은 지인들은 후버가의 사람들을 멀리했다. 그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작곡가 카알 오르프 마저도 발길을 끊어버린 절망적인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미륵이었다. 

153. 1943년 그는 10년 동안 혼신의 힘으로 집필해오던 소설을 마침내 탈고했다. 그리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마무르기 위해 많은 지인들과 오랜 토론 시간을 가졌다. 

154. 수많은 지인들과 반복적인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회상의 장면들은 보다 간결하고 명쾌한 문체로 완성되어 갔다. 이미륵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허무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독일의 친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을 그 초안으로 잡았다. 

156. 편지를 보낸지 3개월 만에 출판사로부터 답신이 왔고, 1944년 7월 6일 , 그는 마침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유명한 피퍼 출판사와 정식으로 출판계약을 체결했다. 

그의 생은 마침내 진정 살만한 이유들로 충만해졌다. 

157. 1945년 5월 7일, 마침내 독일은 패망했다. 

한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차오르는 감격에도 오히려 그는 침묵했고, 홀로 깊은 감회에 젖어야했다. 

159. 이미륵이 귀국을 망설였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예상치 못했던 고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실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기다려주는 정인들이 고향에 남아있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인 현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63. 끝내 살아서 귀향하지 못했던 이미륵의 회문의 역설.

그는 항상 스스로 곤궁한 생을 선택했다.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한번 더 인내해야 했을 그의 고독하고 슬픈 절망감을 어찌 가늠조차 할 수 있을까. 

164. 1946년 5월, 그의 소설 <Der Yalu fliesst. 압록강은 흐른다> 가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된 지 3개월 후부터 전혀 뜻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독일에서 이름난 잡지와 지역신문에 연이어 화려한 찬사의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64.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인들에게 한국사람, 한국문화, 한국역사를 고결하고 품위 있는 동경 상으로 각인 시켰고, 그들의 끔찍한 살육 판에서도 고결하고 순수한 정신세계를 지키고 있었던 한국인 이미륵을 흠모하게 하였다.  

182.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산 속으로 들어가 은둔했던 옛 시대의 많은 학자들을 떠올려 보렴. 그들은 밤마다 다시 붓을 잡기 위해 낮에는 종일토록 쟁기질을 했단다. 너도 야만인들이 물러가고 좋았던 옛 시절이 돌아올 때까지 이 조용한 곳에서 지내야 한다. ” 

183. 나에게 유럽은 현세적 고민도 없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지 않아도 되며, 오직 자연과 우주를 연구하면서 학자의 길만을 걸어갈 수 있는 환상적인 동경 상을 꿈꾸게 했고, 경이로운 세계에 대한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일화들은 나를 다시금 생기 차게 만들었다. 

나는 어떻게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마침내 ‘포구의 얼음덩이’가 녹아 완전히 사라지고, 온기가 찾아든 “어느 화창한 삼월 오후, 나는 걸어서 족히 이틀은 걸리는 신막을 향해 길을 나섰다.“ 

193. 길 위에 놓인 “생”은 살아지기 마련이듯 “나”의 항해는 계속되고. 선상 위에 놓인 사람들의 운명이 그렇듯, “나”또한 작열하는 태양과 동행의 무리들과 함께 대양의 물길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지치도록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인물“나”에겐 오직 유숙할 수 잇는 안식의 공간에 도달하는 것만이 “궁극의 목적”이 된다. 

196. 제 3제국의 몰락은 시간이 지나면서 악몽의 현실을 뼛속 깊이까지 자각 시켰고, 그 시기에 무르익었던 게르만 민족의 우월감에 대한 환상이 급격히 허물어지면서 독일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198. 너무도 긴 시간 원고 교정에 몰두해 있었던 탓에 몹시 지쳐 있었던 이미륵은 잠시 휴식을 갖기로 하고 킴가우로 여행을 떠났다. 독일 독자들의 예상치 못했던 큰 호응은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속 이야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다.  

200. 언론인을 꿈꾸는 독일 청년 발터 라이퍼, 그는 어느 날 잡지에서 아주 특별한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한국인 작가 이미륵이 뮌헨의 피퍼 출판사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독일어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당장 책을 구입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비오는 어느 날 일곱시간 거리의 그래펠핑 이미륵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나는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그의 고통과 근심을 짐작할 수 잇었습니다. 내가 결코 그를 잊을 수 없게 되었던 것도 바로 그 순간부터였을 겁니다. 

202. 동양인 작가와의 만남, 그것은 마침내 독일 청년 라이퍼에겐 운명이 되었다. 후일 그 청년은 주한독일 대사관에 파견되어 문정관이 되었으며, 오랫동안 한국에서 지낸 뒤, 귀국해 ‘이미륵 협회’를 결성하였는가 하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미륵의 탁월한 문학세계와 철학자로서 혹은 교육자로서의 일생을 찬양했다. 

6장 사라진 원고의 비밀  

207. 이미륵은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집필하면서 처음부터 그것의 후속작품을 출판사와 이미 선계약한 상태에 있었고, 그가 아주 열정적으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친구였던 안젤름 샬러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208. 그러나 1947년은 검열의 억압된 속박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잿더미로 와해되고 해체된 독일 어디에서도 목가적인 상상을 부추길 만한 풍경은 남아 있지 않았고, 패배감과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 또한 이미 불확실성에 빠져 순수한 꿈의 형상을 받아들일만한 감성의 여백조차 품을 수 없었다. 

209. 그의 완성된 후속원고는 한순간 사라져버렸고, 영원한 미스터리를 남겼다.

그가 실제로 원고를 태워버렸는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예술의 지고한 순수를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작가적 고뇌는 충분히 짐작된다. 

213. 단편 <아들을 위한 투쟁>은 암울한 세상의 절망 속에 갇힌 모든 고독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작가 이미륵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혹은 남편을 잃은 수많은 독일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14. 단편 <서양으로 향한 길>은 수심이 나로 전환되는 반전에서 시작된다. 

215. 압록강은 고요히 푸르게 흐르고 있다. 태양이 산 너머로 잠긴다. 먼 남쪽으로 그것은 그렇게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224.“ 마지막 진찰이 있던 날 의사는 유감스럽게도 병이 너무 깊어져 있으니 가능하면 즉시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고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진단이 내려질까 걱정했었다. 병의 재발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225. 작가 이미륵에게 ‘흐르는 물’은 차단된 혹은 영육의 재생을 위한 본원적 에너지의 역동성을 의미하는 은유적 메커니즘이고,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는 바로 그 자신의 생에 대한 내적 암시이다. 

7장 동양 철학 교수로서의 마지막 생 

229. 1947년 7월 어느날, 짙은 갈색머리의 아름다운 독일 여성이 그를 찾아왔다. 에파 수잔네 크라프트였다. 베를린 태생(1923-2007)인 그녀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당시 중국학과 몽고 언어학의 권위자였던 에리히 해니쉬 교수가 뮌헨대학에서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뮌헨행을 결정했다. 

‘뮌헨 대학에 들어가서 일본어 공부를 하려고 할때 이미륵 박사를 찾아가라는 권고를 받았어요..... 그렇게 개인지도가 시작 되었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또 다른 “생”으로의 선회를 알리는 새벽 녘 미명의 울림과도 같았다. 그것은 바람결 같은 작은 떨림으로 젖어 들어와 그의 또 다른 생을 깨웠다. 

233. 동양학에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업적을 지니고 잇었던 해니쉬 교수와 이미륵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1947년 해니쉬 교수는 뮌헨대학 동양학과에 한국어를 개설해 이미륵을 정식으로 초빙했다. 

새로운 만남은 늘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숙명으로 다가온다. 

241. 1948년 여름학기부터 이미륵은 뮌헨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첫 개설과목은 한국의 언어와 역사, 맹자, 동아시아 문학사였다. 

242. 중국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해니쉬 교수는 이미륵의 한국어 강의를 직접 청강하기도 했다. 

246. 이미륵은 1948년 동양학 강의로 ‘맹자’를 선택했다. 

249. 그에게 있어서 ‘선’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람다운 심정’이었다.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혹은 통치자에게서 백성에게로 이르는 인의 본질을 역설하는 이미륵의 사상은 압록강에서 이자르 강으로 혹은 이자르 강에서 압록강으로, 물이 항시 흐르는 것을 허용하는 듯 순리의 항로를 따라 흐르고 있다. 

250. 그는 인을 완성시키는 실천 강령이 ‘의’에서 출발한다고 보았고, 그에 따른 인간의 도덕적 모형을 교육기재로 삼고자 했다. 

261. “그때가 1948년이었다. 이미륵의 눈빛엔 이미 지독한 고통으로 가득찬 죽음이 다가와 있었다 . 그는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 했다. 누렇게 빛바랜 종이 같은 그의 얼굴은 아주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262. 1949년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중세문학 작품 요시다 겐코오의 츠레츠레쿠사(일명 도연초)를 선정해 강론을 시작했다. 

266. 독일 청년 바우어는 훗날 뮌헨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미륵의 제자들 가운데는 탁월한 동양학 전공 대학생들이 있었다. 볼프강 바우어,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동양학교수가 된 귄터 데본을 비롯해 이미륵이 특별히 아꼈던 에파는 그의 곁에서 동양학의 신비에 빠졌던 독일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그의 애제자 에파 크라프트는 이미륵의 사후 오랫동안- 죽을 때까지- 그를 잊지 못했다. 

“이미륵 박사는 스승이나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지요.나이로나 학식으로나인격으로나 훨씬 월등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제자로서 이미륵 박사를 만난 것은 짦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와의 만남은 길었습니다.” 

8장 찬란히 아름다운 죽음 

269. 죽음은 늘 생의 경계를 배회하고 있다가, 언제든 틈만 보이면 슬며시 그 경계를 넘어온다. 

270. 둥글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검은 눈동자가 조금은 확대되어 보인 탓에 무척 진지해 보이는 동양인 학자에게 매순간 매료되었던 에파는 그에게로 향한 존경심이 그녀의 삶을 지배할 것이라는 걸 미처 예감조차 하지 못했다. 

275. 해마다 겨울이면 감기처럼 찾아드는 늑막염으로 항상 고생해야 했던 이미륵에게 독일의 겨울은 무진장 길고, 춥고, 또 지루했다.

그러나 1950년 3월 20일, 죽음은 이미 그의 침상 밑으로 깊게 드리워 있었다. 

276.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마지막 신음소리가 그의 강인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메마른 입술을 헤집고 쏟아져 나왔다. 자일러 부인과 에파는 서둘러 베크만 박사를 찾았다. 그가 황급히 달려와 몰핀을 주사하자, 가쁜 숨이 잦아들더니 그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1950년 3월 20일, 짙은 어둠이 무겁게 드리운 여덟시 이십분경,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자일러 부인과 오토, 제자 에파는 <애국가>를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76. 1950년 3월 24일 금요일 예사롭지 않은 장례식 광경이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삼백여 명의 적지 않은 조문객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조용히 관을 따르고 있었다. 통곡하는 상주도, 상여 소리도 없었다. 다만 무겁게 가라앉은 장엄하고 엄숙한 서양식의 추모의식이 거행될 뿐이었다. 

277. 그의 생이 그토록 아름다웠을 진데, 그의 죽음은 차라리 눈물 속에 반사되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빛으로 찬란했다.  

세상 고통을 가슴 속 깊이 품고도 늘 그윽한 미소로 온후한 인정을 베풀었던 최고의 인간 이미륵을 떠나보내며, 누군가 생전 그가 즐겨 불렀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했다. 

293. 1959년 4월 29일과 5월 2일, 독일 바이에리쉬 방송국에서는 이미륵 추모방송을 방영했다. 짦은 흑백 영상필름에 담긴 이미륵의 생전 모습! 

그는 자전거를 타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295. 1959년 독문학을 전공한 전혜린은 바로 이미륵 장례식 때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의 한국학 강의를 이어 받았던 엑카르트 교수의 조교가 된다. 그녀의 짙은 감성이 배인 1959년 <압록강은 흐른다> 첫 한국어 번역본이 여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296. 1963년 한국 정부는 이미륵에게 독립 운동의 공로를 인정하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12월 26일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국가 보훈처로부터 이미륵에게 독립유공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 내가 저자라면 

1967년 판 <압록강은 흐른다>를 끈으로 묶어놓은 책 더미에서 다시 찾아냈다. 홍익 출판사 판이다. 이미 노랗게 변색한 종이에서 옛날의 기억이 묻어난다. 손 때묻은 책, 오랫동안 다시 생각이 나곤 했던 감명 깊었던 책... 사람의 인연을 생각하기 전에 잠시 책과의 인연을 회상해보았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이 미륵의 세계로 찾아 들어갔던가....  

1955년 10월 스물 한 살의 전혜린이 독일 뮌헨 땅에 내렸다. 서울 법대를 다니다 다시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독일로 유학을 간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전혜린은 무려 10편의 독일작품들을 우리말로 번역해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도 카프카도 잉게보르그 바흐만도 다 그녀가 우리에게 처음 소개해 준 독일 문학이었다. 그녀는 독문학 수업을 마치고 1959년 이미륵 박사의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했고, 또 이미륵의 한국학 강의를 이어 받았던 엑카르트 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그래펠핑의 작은 공원묘지 한 모퉁이 담쟁이 덩굴이 질긴 생명력으로 뿌리내린 이미륵의 묘소 앞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는 전혜린, 그녀의 사진과 함께 <압록강은 흐른다>은 그녀의 짙은 감성이 배인 번역본으로 195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소설을 써서 또 다른 한국인이 독일어로 그의 글을 읽고 다시 모국어로 번역해서 또 다른 한국인들에게 전했다. 독일의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이미륵의 글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과의 인연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전혜린은 이미륵을 한국에 번역 소개함으로써 그가 이 땅에서 사후 생을 살도록 했다. 그리고는 운명의 장난처럼 1965년, 서른 한 살의 짦은 생을 스스로 버렸다. “회색 우수와 레몬빛 동경”을 불러 일으키며 젊은 날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천재적인 글 솜씨를 보여줬던 전혜린이 말이다. 

1960-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은 전혜린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책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 당시에는 우리의 텍스트 북이 아니라 거의 바이블 수준으로 존중받았다. 책과의 인연이 질긴 것이 그때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책을 우리 아이가 다시 읽고 있다.  되돌아 오는 순환의 논리,  그녀가 알려준 <데미안>도 다시 되돌아왔다. 

이미륵은 책 표지 사진의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그가 언제나 나와 동시대의 사람처럼 생각된다. 그는 겨우 50년을 살고 이국 땅에 묻혔다. 그가 독일에서 맺은 인연의 사슬이 얼마나 질긴지, 올해 그의 60주기를 맞이하며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SBS 와 독일 BR 사가 공동제작했고 3부작 드라마를 줄여 영화로 만들었다. 나는 우연히 이 영화의 상영회에 초대받았고 , 눈물을 비오듯 흘리고 나서 오늘 북리뷰하는 이 책 <이미륵 평전>을 구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모두 훝어 이미륵과의 인연을 회상하고 있다. 물론 내게는 이 책의 독일어 원본도 있다. 이 책을 쓴 정규화박사는 전혜린이 그의 활동을 일찍이 알렸고 잊어버릴 만하면 한번씩 신문에 그가 나타나고는 했다. 그는 무슨 인연으로 , 그 조용하고 명상적인 이미륵박사를 찾아 온 독일땅을 누비며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쓰고 온갖 문서들을 번역해낸 것일까? 이 책을 보면 저자 정규화교수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다. 그는 참 철저하게도 작업을 했다. 

이 책의 9번째 장은 증언자들을 회고하며 정규화박사가 40년 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무려 50쪽. 그 뒤로 이어지는 이미륵 자료목록은 무려 30쪽. 

이미륵의 글은 그 후에 단편들을 묶어서 <이야기>라는 책으로 나왔다. 나는 이 책도 구해서 읽었고 어딘가 옛날 책들 속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정서를 조근조근 풀어간 미륵의 이야기 솜씨는 뛰어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그 장면에 나도 나가서 놀고있는 것 같다. 때로는 그의 마음과 꼭 같은 감정이 내게도 일어난다. 이 설명할 길 없는 공감은 분명 이야기꾼의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륵의 평전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사람의 인연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이기에 정규화 박사는 이미륵의 흔적을 이렇게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기록해두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혈연관게도 아니고 프로젝트에 따른 작업도 아니언만 온전히 사람의 향기에 이끌려 40년, 그를 이렇게 온전히 다시 살려놓았다.

지금도 독일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에 있는 이미륵묘소에서는 한국식으로 상을 차려 제를 지내고 있다 한다. 그리고 2009년엔 그의 묘소를 영구 사용할 수 있도록 그래펠핑시가 승인을 했단다. 칼럼으로 나가야 할 글을 주섬주섬 엮어놓는다. 날이 밝은 후에 교정을 다시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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