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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일 07시 05분 등록

전자의 경향은 오르페우스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파타고라스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거쳐 헤브라이즘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한 축으로 편입된다. 후자에는 헤로도토스와 초기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들을 비롯해 어느 정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포함된다 경험을 중시하고 합리주의를 내세우는 경향은 중세 시대에 수면 아래로 가라앚았다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철학 속에서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그리스 문명은 철학을 처음 탄생시켰고 중세 시대 그리스도교 문명의 출현에도 일조했으며, 중세 말 르네상스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의 사상적 원류이다. 다만 러셀은 그리스 문명이 근대 철학의 운류라는 해석에 대해, 그리스인들의 기여는 수학과 연역 기술을 발명했다는 점에 국한한다. 특히 기하학은 그리스인의 독창적인 발명품인데, 기하학이 없었다면 근대 과학은 성립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정한 사실의 관찰에서 출발해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과학의 방법은 근대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근대에 이르러 비로서 과학적 지식은 사실의 관찰과 가설의 수립, 그리고 수립된 가설의 시험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러셀은 철학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하는 방법의 측명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진리 추구의 열정을 품고 기존의 모든 지식을 비판하는 활동이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해 명료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는 여정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방법은, 부지불식간에 사용된 전제들을 세밀히 조사하고 기초 원리를 끈질기게 검토해 보는 것이다. 옳다는 근거가 없다면 어떤 전제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러셀이 말하는 분석적 방법의 핵심이다. 러셀은 바로 이 분석적 방법을 끝까지 고수하며 진리 탐구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 여정 속에서 거의 모든 철학적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저술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요한 철학적 관점들은 대부분 특정한 시기에 쓴 러셀의 여러 저작에서 검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셀 서양 철학사]는 이러한 진리 탐구의 여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러셀은 바로 분석적 방법을 통해 고대, 중세, 근현대의 대가들을 차례차례 명료한 언어로 비판한다. 6.


다른 한편 러셀은 철학이 소수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을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거나 해체하는 역할을 했다는 입장에서 철학사를 서술해 나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철학은 철학자가 몸담고 있는 사회,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 오르페우스교의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마찬가지로 로마 시대에 독창적인 철학이 생겨나지 않고 일종의 처세 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로마 행정의 지배력이 강하고 일상의 삶이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탓이다.


일정한 시기에 사회 통합에 기여한 철학도 사회, 정치 환경이 바뀌면 영향력이 약해져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다른 철학이 형성되면서 기존 철학을 대체한다. 이러한 대체 과정은 반복된다. 어느 시대이든 사회를 통합하는 요소와 해체하는 요소를 둘 다 내포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로마 시대에 더는 효력이 없어져 쇠퇴했고, 로마 시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중세 가톨릭 제도의 출현과 더불어 가톨릭 철학이 발전했으며, 상업도시와 속인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가톨릭 철학이 쇠퇴하면서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개신교와 근대 철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어 각각 중세 교부 철학자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다시 수용되어 독특한 신학 체계로 발전했다. 중세 시대에 가톨릭 제도는 세속국가와 대립하는 일종의 정치권력으로서 힘을 발휘했는데, 가톨릭 철학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의 기초도 제공한다. 당시 가톨릭 철학은 유럽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가톨릭교 내부에서 일어난 정통신앙과 이단사상의 충돌은 가톨릭 제도 개혁의 계기인 동시에 개신교 성장의 계기가 된 종교 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7.


대부분의 철학사에서 철학자는 저마다 진공 속에 있는 듯이 등장한다. 그의 견해는 고작해야 이전 철학자들이 내놓은 이런저런 견해와 아무 상관없이 나열될 따름이다. 이와 반대로 나는 진실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철학자를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 문화적 환경의 산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공유되지만 모호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진 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 애쓰며 집중하는 한 인간으로 조명했다.


그래서 순수한 사회사를 다룬 몇 장을 덧붙였다. 아무도 헬레니즘 시대에 대해 어지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5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스콜라 철학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철학 사상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우에는 역사적 개요을 일부나마 간략히 소개했다. 또 나는 어떤 독자들은 생소하게 느낄 역사, 예컨대 중세 초기의 역사 부분을 충분히 소개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역사를 소개한 장에서도 당대나 후대의 철학과 거의 관련이 없거나 무관해 보이는 것은 가차 없이 배제했다.


지금 내가 쓰는 책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상세히 다루지 않으면 빈약해져 흥미를 유발하지 못할 것이고, 상세히 다루다보면 과도하게 길어질 위험이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들만 다루면서, 근본적인 면에서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실례나 생동감을 전하는 설명으로서 가치가 있는 내용은 상세하게 언급하는 식의 타협점을 찾았다.


1)철학은 애초부터 학파들, 곧 소수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철학은 공동체의 삶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는 바로 이 부분을 고찰하려 애썼다. 이러한 관점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철학이 특정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동체를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앨버트 반스 박사 덕분에 출간하게 되었다. 본래 펜실베이니아의 반스 재단에서 강연할 목적으로 기획했으며, 일부는 실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2)1932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랬듯이, 내 아내 퍼트리샤 러셀은 연구와 다른 여러 방면에서 나를 아주 많이 도와주었다. 10

-->위대한 사상가, 이를테면 엘빈토플러, 찰스핸디등을 보면 그들 작업에 아내의 공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새롭게 안 사실은, 러셀은 4번 결혼했다. 정력가이다. 


인생과 세계를 표현하는 '철학적인'사상 체계는 두 가지 요소에서 생겨난다.하나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종교 체계와 윤리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탐구이다. 두 요소가 각기 다른 철학자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정도에는 큰 차이가 있으나, 철학은 두 요소를 다 어느 정도 포함한다.


'철학'은 넓게든 좁게든 여러 방식으로 써온 말이다. 나는 '철학'이란 말을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하자고 제안하며, 이제 그 의미를 설명하려 한다.


내가 말하려는 철학은 신학과 과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지식으로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힘든 문제와 씨름하는 사변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을 따르든 계시를 따르든 귄위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명확한 지식은 무엇이든 과학에 속하는 반면,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모두 신학에 속한다.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무인지대No Man's Land가 바로 철학의 세계이다. 사변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대체로 흥미를 느낄 만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거의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며, 신학자의 확신에 찬 대답도 이전 세기와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17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말해주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 따름이다. 또 만약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 망각한다면, 엄청나게 중요한 많은 일에 무감각해지고 만다. 다른 한편 신학은 사실상 무지의 영역까지도 안다는 독단적인 믿음을 이끌어냄으로써, 우주를 향한 일종의 주제넘고 오만한 태도를 양산한다. 생생한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불확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는 누구나 고통을 느끼지만 만약 마음이 편해지도록 위로나 주는 동화에 의지해 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철학이 제기하는 질문을 망각해서도 안 되고, 철학적 질문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답변을 찾았다고 자신을 설득해서도 안 된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고 주저하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 연구자를 위해 철학이 지금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신학과 구별되는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제1기 철학은 고대에 철학의 길로 들어선 후, 그리스도교 Christianity가 발흥하고 로마가 몰락했을 때 신학의 영향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11세기 부터 14세기에 걸친 제2기 철학의 위대한 시기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비롯한 몇몇 위대한 반항아를 제외하면 가톨릭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는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절정에 이른 혼란 속에서 파국을 맞았다.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제3기 철학은 선대 철학자들이 활동한 이전 어느 시기보다 과학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형국이다. 전통적인 종교적 믿음은 계속 중요한 가치로 수용되지만,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과학이 정당화를 요구하는 듯이 보이면 수정되거나 변경되어왔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 가운데 가톨릭교의 관점에서 정통 신앙을 대변한 철학자는 거의 없으며, 철학자들의 세속화 경향에 영향을 더 크게 주고 중요한 역할을 한 쪽은 교회보다는 세속 국가이다.


종교와 과학이 그렇듯이 사회 결속과 개인의 자유는 전 시기에 걸쳐 갈등을 빚거나 불안정한 타협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스에서 사회 결속은 도시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해 보장되었다. 당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시국가를 구시이라해서 폐기했는데도,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다른 정치 조직에서는 도시국가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20


즉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더 중대한 명령이라는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교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보다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까지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초기의 황제들이 아리우스파 신도였거나 아리우스주의에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황제들이 정통 교리를 따르면서 금지되었고, 비잔틴 제국과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러시아에서는 잠재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갈리아 일부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에 걸쳐 곧이어 야만인 출신 이교도 정복자들이 가톨릭 황제 자리를 차지산 서방에서는 정치적 주장보다 종교가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6세기 동안 이어진 야만족의 침입은 서유럽 문명의 종말을 초래했다. 유럽 문명은 아일랜드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나마 9세기에 데인 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서유럽 문명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걸출한 인물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등장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그리스 문명은 생기를 잃은 형태로,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보존되었다. 그런데 예술 전통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법전을 제외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5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에 이르는 암흑기 동안, 서로마 세계는 꽤 흥미로운 변화를 겪었다.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신에 대한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 간의 갈등은 교회와 왕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 형태로 변모했다. 교황의 교회 지배권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아일랜드, 독일, 스칸디나비아, 폴란드로 학장되었다. 처음에는 교황이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밖에서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지배하는 권한이 극히 미약했지만,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11세기 후반)부터 교황의 지배는 현실적으로 효력을 나타냈다. 21.이후 서유럽 전역에서 성직자 계급은 로마의 지시를 맏는 단일 조직을 형성했다. 성직자 조직은 1300년 이후까지 세속 국가의 지배자들과 갈등을 빋으면서 온갖 지식을 동원한 권력투쟁을 집요하게 벌인 끝에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은 성직자와 속인 간의 갈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주해 연안 국가와 북부 야만인 국가 간 갈등의 재현이기도 했다. 교회의 통일은 로마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흉내냈다. 교회의 전례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교회의 지도층 인사는 대부분 이탈리아, 스페인, 혹은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다. 교육이 재개되었을 때 성직자들의 교육은 고전에 치우쳐, 그들의 법 사상과 정치 사상은 당대의 군주들보다는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가 더 잘 이해할 만했다. 교회는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는 하는 곳이자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명을 대표하는 조직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세속 권력은 튜튼족 혈통을 이어받은 왕과 귀족이 장악했는데, 이들은 독일의 삼림 지역에서나 통하는 법령과 제도를 보존하려 노력했다. 절대 권력이란 그러한 법령과 제도에 맞지 않아 낯설었으며, 원기 왕성한 튜튼족 출신 정복자들에게 율법 준수란 멍청이에게나 적합하며 활기 없고 열의가 결여되어 있어 내키지 않았다. 왕은 자신의 구너력을 봉건 귀족들과 나누어 가졌고, 모두 이따금 전쟁, 살인, 약탈, 강탈로 주체하기 힘든 정영을 분출하려는 기대에 차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구주들이 진정으로 경건하다면후회하고 회개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회개 자체가 정영를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 한 번도 오늘날 고용주가 피공용인에게 요구해서 통용되도록 만든, 선행의 평온한 규칙과 질서를 군주들의 마음에 심어주지 못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술을 마시고, 살인하고,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그들이 세상을 정복한들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득의양양한 기사단을 거느린 그들이, 학문에 열중하고 군대도 보유하지 않는 데다 독신생활을 하는 자들의 명령에 왜 따라야 하는가? 군주들은 교권이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결투를 하고 잦은 전투를 벌였으며, 마상 시합과 궁정 연애를 즐겼다. 게다가 간혹 그들은 일시적 흥분에 사로잡혀 저명한 성직자를 살해하기도 했다.22


3)모든 군대가 왕들 편에 섰는데도 교회는 마침내 승리햇다. 교회가 승리한 이유는, 일부는 교회 성직자들이 교육을 거의 독점했기 때문이고, 일부는 왕들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지배자와 민중이 다 같이 교회가 바로 천국의 문을 여는 힘을 가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왕이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내야 할지, 지옥에서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할 의무를 면제해주는 동시에 반기를 들도록 선동하기도 했다. 게다가 교회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상징하는 대표 조직이었으므로, 떠오르는 신흥 상인 계급의 지지를 얻어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러한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는 자신에게 이롭다. 교회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믿음.이 교회를 보호한 셈.


최소한 일부나마 교회에서 독립하려던 튜튼족의 시도는 정치뿐 아니라 예술, 궁정 연애 소설, 기사도 정신, 전쟁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러한 시도가 지적인 영역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은 까닭은 교육의 기회가 대부분 성직자 계급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공인된 철학은 시대를 비추는 정확한 거울이 아니라, 한쪽의 생각만 비추었을 뿐이다. 그래도 정통 교회 신자들, 특히 프란체스코회의 탁발 수도자들 가운데는 다양한 이유로 교황과 사이가 나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는 알프스 이북 지역보다 몇 세기 먼저 속인들에게도 문화가 보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반反교황 문화의 극단을 대표한 인물로서 신흥 종교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가 최고 통치권자였던 나폴리에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철학을 해설한 고전적인 대표 학자로 알려져있다. 50년 후 단테는 두 극단의 문화를 종합하여 완벽한 의미에서 중세 사상계를 포괄한, 유일하게 균형 잡힌 해설을 내놓았다.


단테 이후 정치적 이유와 지적인 이유 둘 다 때문에 중세 철학은 더는 종합되지 않았다. 중세 철학이 계속 종합되는 동안에는 정연한 논리와 소규오의 완결된 체계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체계가 설명한 진리는 무엇이든 그 체계에 속한 극히 한정된 영역의 다른 내용과 맺는 관계속에서 정확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교회의 대분열, 공의회 운동, 르네상스기의 교황제도는 종교개혁 운동을 초래했고, 이는 전 그리스도교의 통일과 교황 주임의 스콜라식 통치이론을 훼손했다. 르네상스기에 발견된, 고대와 지구 표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중세의 다양한 체계에 싫증이 난 나머지 중세의 체계를 정신의 감옥처럼 느꼈다. 23


이러한 변화는 심상치 않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진리는 더는 권위자에게 물어서 확인하지 않고, 내적 성찰을 통해 확인했다. 더불어 정치계에서는 무정부 주의로, 종교계에서는 신비주의로 빠르게 발전하는 경향이 생겨나지만, 이런 경향은 언제나 가톨릭의 정통 체계 속에 편입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또한 하나로 통일된 개신교가 아니라 개신교의 여러 종파가 갈라져 나왔다. 스콜라 철학에 대립하는 한 가지 철학이 아니라 철학자들 수만큼 많은 철학이 존재했다. 13세기처럼 교황에 대립하는 황제가 한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이교도 왕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문학과 마찬가지로 사상 면에서도 주관주의가 계속 심화되어, 주관주의는 초창기 다방면으로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를 부여했지만, 결국 건전한 사회생활에 적대적이고 해로웠으며 개인을 사회에서 분리하는 데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유가 존재한다는 근본적 확신에 입각하여 외부 세계를 추론했다. 이것은 버클리와 칸트를 지나 피히테로 발전해나가는 첫 단계일 뿐이며, 피히테에 이르면 모든 존재가 다지 자아에서 유출될 따름이다.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불건전해 보이며, 이후 철학은 이런 극단적 입장에서 벗어나 상식적인 일상 세계로 탈출하려는 시도로 점철된다.


철학 분야의 주관주의와 정치학 분야의 무정부주의는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루터가 생존하는 동안, 환영을 받지도 인정을 받지도 못했던 그의 제자들은 재침례교의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그 교리는 한동안 독일뭔스터 시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재침례교 신도들이 법이란 법은 모조리 다 거부한 까닭은 선한 인간은 매 순간 고정된 형식의 구속을 받지 않는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전제로 공동생산체제와 성적인 난교에 이르렀고, 영웅적 저항을 벌인 끝에 근절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는 온건한 형태로 변형되어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역사를 따져보자면 퀘이커교의 교리와 의식이 유래한 근원이다. 종교와 아무 관계가 없어진, 더 격렬한 무정부주의는 19세기에 발생했다. 무정부주의는 러시아와 스페인에서, 더 작은 규모로는 이탈리아에서 적지 않는 지지 세력을 확보했으며, 오늘날까지 미국 이민 당국이 경계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27.


철학은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천문학자들이 기원전 585년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일식日蝕을 탈레스가 예측한 사실에 비추어, 그가 살았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과 과학은 본래 분리되지 않는 상태로 기원전 6세기 초에 동시에 탄생했다. 기원전 6세기 이전 그리스와 인접한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어떤 대답을 하든지 일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금세기 고고학의 발전은 이전 세대가 소유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우리 세대에 제공했다.


4)문자 기술은 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에서 발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등장했다. 어느 나라든 문자는 뜻이 담긴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되어, 이러한 그림들이 사회에서 약속으로 통용되면서 표의문자로 변모한다. 지금도 중국어에는 표의문자가 남아 있다. 이러한 번거롭고 어색한 문자 체계는 수천 년의 변천 과정을 거쳐 알파벳 문자로 발전했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발전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달한 초기 문명의 연원은 나일 강,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이며, 강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량도 늘어났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와 페루에서 발견한 문명과 흡사했다. 전제 권력을 소유한 신성한 왕이 존재하며, 이집트의 경우 왕이 온 나라 땅을 소유했다. 또한 다신 숭배 종교의 정점에 위치한 최고신은 왕과 특히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이 밖에 군사 계급에 속한 귀족과 사제 계급에 속한 귀족이 존재하여, 왕이 병약하거나 험난한 전쟁에 나가 교전 중일 때, 사제 계급이 왕권을 찬탈하는 일이 흔히 발생했다. 토지를 경작하는 계급은 노예들로서, 왕과 귀족, 사제에게 종속된 처지였다.


5)이집트 신학과 바빌로니아 신학의 차이는 컸다. 이집트인들은 죽음 문제에 몰두해서, 죽은 자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내려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오시리스Osiris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 영혼이 결국에는 육신과 함께 지상으로 되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고 휘황찬란한 무덤을 축조했다. 피라미드는 기원전 4000년 말부터 3000년 초35까지 여러 왕의 주도 아래 건설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이집트 문명은 점점 더 고정관념에 사로잡혔고, 종교에 대한 보수주의 경향이 나타나 문명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기원전 1800년경 이집트는 셈족인 힉소스 왕조에게 정복당한 후 약2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다. 힉소스 왕조는 이집트에 후세가 기릴 만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이집트 문명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전파했다. 36

-->정복 당하는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무력으로 정복해서, 문화에 정복 당하다. 


종교가 제국의 통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동기는 종교의 원시적 특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신이나 여신은 국가와 결합되면서 풍작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는 존재가 되었다. 부유한 사제 계급은 제례의식과 신학을 정교하게 다듬고, 제국에 편입된 지역의 몇몇 신들을 한 신전 안에 통합했다.


신들은 통치권과 결합되면서 도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이 입법자에게 법전을 부여했기 때문에 법 위반은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법전은 바빌론 왕, 함무라비의 법전이다.(기원전 2067 ~ 2025). 함무라비는 이 법전을 최고신 마르두크가 전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종교와 도덕의 관계는 점점 더 가가워졌다.


바빌로니아의 종교는 이집트와 달리 내세의 행복보다 현세의 번영에 관심이 더 많았다. 마술, 점술, 점성술은 바빌로니아에서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다른 어느 곳 보다 바빌론에서 더 발전했기 때문에, 바빌론을 거쳐 고대 후기를 지배하게 되었다. 과학적인 발견 몇 가지도 바빌론에서 비롯되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원을 360도로 분할했으며, 월식은 확실하게 예측되지만 일식은 확률적으로 예측되는 식蝕 현상의 주기성도 발견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빌로니아의 과학적 지식을 습득한 철학자가 바로 탈레스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농업에 기반을 두었고, 주변 국가의 문명은 초기에는 유목 생활에 의존해 잇었다. 상업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요인이 등장하지만, 처음에는 해상 무역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기원전 1000년까지 무기는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국의 영토 안에 금속이 매장되어 있지 않는 나라는 무역을 조달하거나 해적 행위로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적 행위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 여건과 정치적 조건이 적당하게 안정된 곳에서는 교역이 더 많은 이득을 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교역 분야에서는 크레타 섬이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듯하다. 기원전 2500년부터 1400년까지 약 11세기 동안 크레타에는 예술이 발전한 문화가 존재했는데, 미노아 문명이라 부른다. 현존하는 크레타 예술은 밝고 쾌활함이 지나쳐 거의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인상을 주는 데, 이집트 신전의 무시무시하고 침울한 느낌과 차원이 전혀 달랐다. 37.


농업지대의 주민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작농들이었다. 그러나 상업과 산업이 번성한 지역의 자유민은 광산업에서는 남자 노예를, 방직업에서는 여자 노예를 공요하여 부를 축적했다. 이오니아 지역의 노예들은 주변지역 출신의 야만인들로서 대부분 처음에는 전쟁 중 붙잡힌 포로들이었다. 부의 증가에 따라 신분이 높은 여성들의 고립은 오히려 심화되어, 여성들은 스파르타와 레스보스를 제외하면 그리스 문명인의 생활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스의 정치 체제는 일반적인 경로로 발전하는데, 우선 군주정치에서 귀족 정치로 나아간 다음 참주정치와 민주정치가 교대로 나타난다. 그리스의 왕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왕과 같은 절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원로회의의 자문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형벌의 부담 탓에 관습과 관례를 마음대로 어길 수도 없었다. '참주정치tyranny'는 반드시 나쁜 정치를 의미하지 않고, 다만 권력의 세습이 허용되지 않는 지도자 한 사람의 지배를 의미했을 따름이다. '민주정치democracy'는 모든 시민에 의한 정치를 의미했지만 노예와 여성은 시민에서 제외되었다. 초기의 참주들은 메디치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장 부유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획득했다. 이는 금광이나 은광을 소유한 데서 기인하고, 그들은 새로운 화폐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더욱 큰 부를 창출했다. 화폐제도는 이오니아와 인접한 리디아 왕국에서 유래했는데, 기원전 700년 직전에 발명되었던 듯하다.


처음에 거의 구별되지 않던 교역과 해적 행위가 그리스인들에게 초래한 가장 중대한 결과는 문자 기술의 획득이었다. 수천 년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존재했으며, 미노아 문명을 건설한 크레타인도 지금 그리스어로 알려진 문자를 사용했는데, 그리스인들이 알파벳 문자를 언제 획득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들에게서 문자 기술을 배웠고, 시리아의 다른 주민들처럼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받은 페니키아인들은 이오니아,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지에 그리스 도시가 출현하기 전까지 해상 무역을 지배했다. 기원전 14세기에 이크나톤(이집트 이교도 왕)에게 서한을 보낼 때, 시리아인들은 여전히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41


 도덕적인 면에서도 신들에게 특이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떻게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후대에 쓴 몇몇 구절은 신들을 볼테르처럼 불경하 태도로 다루었다. 호메로스 작품에서 찾아야 할 진정한 종교심은 올림포스의 신들보다는 오히려 숙명이나 필연, 혹은 운명과 같은 더욱 어둡고 실체가 없는 존재와 관련이 깊은데, 제우스조차 이제 복종해야 한다. 숙명은 그리스 사상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이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을 도출하게 된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정복을 일삼는 귀족 계급의 신들로 실제로 땅을 일구는 농부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풍작의 신이 아니었다. 길버트 머리는 Gilvert Murray는 이렇게 말한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신은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렇지 않다. 신들이 행한 일은 대부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왕국을 수중에 넣었을 때 무슨 일을 하는가? 정치에 참여하는가? 농업을 징진하는가? 무역과 산업에 종사하는가?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그런 정직한 일을 하겠는가? 그들은 세입으로 살면 더욱 쉽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세금을 내지 않는 민중에게 벼락을 쳐서 위협하면 만사형통이다. 그들은 정복을 일삼는 족장이거나 왕권을 손에 넣은 해적들인데, 싸우고 축제를 벌이고 놀이를 즐기며 음악을 연주한다. 그들은 한껏 술을 퍼마시고 취해, 시중드는 절름발이 대장장이를 보고 요란스레 웃곤 한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왕 이외에는 결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연애를 하거나 전쟁을 벌일 때를 제외하면 거짓말을 하는 법도 없다.'


호메로스의 인간 영웅도 신과 마찬가지로 선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가문은 펠롭스 가인데,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시아 왕조의 창시자 탄탈로스Tantalos는 신들의 화를 돋우려 노골적으로 무례한 짓을 저지름으로써 끔찍한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45


벌이 꿀을 만든다거나 다람쥐가 호두를 땅에 묻는 따위로 드물게 나타나는 행동도 순전히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문명인에게 나타나는 예상의 결과가 아니라 직접적 충동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이며, 나중에 이를 관찰한 인간이 유용하다고 설명한 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예상은, 충동과 아무 상관 없이 이성이 장래의 어느 날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사냥은 현재의 쾌락을 즐기려는 것이므로 예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작은 노동인데, 자연적 충동에 따라서는 경작을 할 수가 없다.


6)문명사회는 자기 관리에 의한 견제 수단인 사려나 예상뿐만 아니라 법, 관습, 종교를 통해 충동을 억제한다. 이로써 문명사회는 야만 상태에서 물려받은 충동을 억제하고 본능이 점점 덜 드러나게 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어떤 행동은 범죄로 분류해 처벌하고, 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는 다른 행동은 사악한 행위로 분류해 사회의 승인을 받을 수 없도록 처리한다. 사유재산 제도는 여성을 예속시키며, 노예 계급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사회의 공동 목적이 개인에게 강요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을 몸에 익힌 개인이 점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기 현재를 희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의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행동은 처음부터 있었던 일이 아니다.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욕구불만이 생기고, 병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욕구불만을 현대인은 어떤식으로 풀고 있는가? 


이러한 과정은 수전노의 경우처럼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더라도, 사려하면 인생에서 맛보아야 할 최선의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쉽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오니소스 숭배자는 사려에 맞선 반동 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도취 상태에 들어가 사려 탓으로 훼손된 강렬한 감정을 회복한다. 그가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알아보자마자, 상상력은 일상적인 걱정이나 근심이라는 감옥에서 갑자기 해방되면서 자유로워진다. 바쿠스 종교 의식은 '종교적 열광enthusiasm'을 불러일으키는데, 어원을 따져 보면 신이 그를 숭배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서 신의 숭배자는 자신이 신과 하나가 되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에는 도취의 요소, 즉 사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열정의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있다. 49


오르페우스가(실제로 존재했을 경우) 무엇을 가르쳤든 간에, 오르페우스교도들이 따른 교리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영혼이 윤회한다고 믿었으며, 영혼은 여기 지상의 생활 방식에 따라 내세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기도 하고, 영원하거나 일시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정결淨潔'을 목표로 삼았는데, 일부는 정화 의식을 통해, 일부는 특정한 부정을 피함으로써 깨끗해지려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정통에 가까운 신자들은 성스러운 의식의 일부로서 고기를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육식을 피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지상에 속하기도 하고 천상에 속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정결한 생활을 통해 정화를 거듭하면 천상의 요소가 증가하고 지상의 요소는 감소한다. 마침내 바쿠스와 일체가 된 사람을 가리켜 '한 바쿠스 a Bacchus'라 부른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오르페우스교의 신학에 따르면 바쿠스는 두 번 태어났는데, 한 번은 모친 세멜레에게서 태어나고 또 한 번은 부친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났다.


디오니소스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한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의 아들로 등장하는데, 아직 소년이었을 때 티탄들에게 찢겨 죽음을 당한 후 모조리 먹혀버리고 심장만 남았다. 어떤 이는 제우스가 디오니소스의 심장을 세멜레에게 주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제우스가 심장을 삼켰다고 전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디오니소스의 두 번째 탄생을 설명해주는 근원이다. 바쿠스 무녀들이 들짐승을 찢어 죽이고 날고기를 먹는 의식은 티탄들이 디오니소스를 찢어 죽이고 먹은 일을 재현한 셈이다. 또 의식에 바친 짐승은 어떤 의미로 보면 신의 화신이다. 티탄들은 땅에서 태어났으나, 신의 육신을 먹고 나서 신성의 기미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땅에 속하기도 하고 신에 속하기도 한 존재이다. 바쿠스 전례는 인간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신성에 가까워지게 했다. 51


오르페우스교도에게 현세의 삶은 고통이고 따분하며 지루할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 끝없이 반복되는 주기로 돌아가는 수레바퀴 아래 갇혀 산다. 우리의 진정한 삶은 도달하기 어려운 천상의 삶이지만, 우리는 지상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정화와 포기와 금욕생활을 통해서만 삶의 고단한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마침내 신과 일체가 되는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인생을 쉽고 즐거운 삶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흑인 영가와 더 흡사하다.


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

신께 나의 모든 고통을 말하려네.


그리스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정열적이고 불행했으며, 지성이 인도한 길과 열정이 인도한 길에 내몰려 자신과 싸우고, 천국을 생각하는 상상력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고집 센 자기주장으로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도 너무 지나치지 않게 하라'는 격언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들은 순수 사유의 측면에서나, 시나 종교나 도덕적인 죄 같은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행동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경우에 한해, 그들은 바로 지성과 열정을 결합함으로서 위대해졌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그들이 변모시켰던 만큼, 다가올 모든 시대에 이르도록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리라.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원형 신화는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아니라 불을 천상에 훔쳐내 인간에게 전해준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이다.


그래도 만약 그리스인들의 전체적 특징을 살펴보자면, 방금 위에서 한 말도 그리스인들이 '침착한' 특징을 지녔다는 견해만큼이나 일방적이고 편협하다. 사실 그리스 문화를 지배한 두 가지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열정을 중시하고 종교에 몰입하며 신비를 표방하고 내세를 믿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명랑하고 경험을 중시하며 합리주의를 내세우고 다양한 사실에 대해 지식을 획득하려는 경향이다. 헤로도토스는 후자의 경험을 대표하는 역사가이며, 초기의 이오니아 자연 철학자들도 후자의 경향을 따랐고, 어느 선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후자의 경향에 포함된다. 58


학생들의 위해 쓴 철학사마다 첫 부분에서 철학은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탈레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철학사 교과과정에서 철학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려 애쓰는 초심자에게 실망만 안겨준다. 탈레스에 대해 존경심을 느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아마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과학자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탈레스Thales는 소아시아의 번성한 교역도시, 밀레토스 출신이었다. 당시 밀레토스를 구성한 인구는 대다수가 노예였고 자유민들은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갈라져 계층 간에 격심한 투쟁을 벌였다. '밀레토스에서는 처음 민중이 승리를 거두고 나서 귀족층의 부인과 자녀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귀족층이 주도권을 잡은 데 이어 적대자들을 산 채로 화형에 처하면서 생긴, 불타오른 횃불이 도시의 공공 광장을 훤히 밝혔다. '탈레스가 살았던 당시 소아시아의 도시 상황은 대부분 비슷했다. 61


밀레토스도 이오니아의 다른 교역도시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처음에 토지를 소유한 귀족층이 정치 권력을 장악했으나 점차 상인 계급에 의한 금권정치로 대체되었다. 이어 참주가 등장하여 상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데, 참주는 보통 민주주의 당파의 지지로 권력을 얻었다. 밀레토스는 니네베가 함락될 때까지(기원전 606년) 그리스 해안도시 동쪽에 위치한 리디아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써 리디아는 서방 세계로 관심을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밀레토스는 리디아와 유별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특히 기원전 546년 키루스에게 정복당한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와 더욱 좋은 관계를 과시했다. 이집트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집트 왕은 그리스 용병들을 고용해서 권력을 유지했으며 몇몇 도시를 그리스와 무역을 하기 위해 개방하기도 했다. 그리스인이 최초로 이집트에 정착한 곳은 밀레토스의 주둔군이 점령한 요새였지만, 기원전 610 ~ 560년에 가장 중요한 정착지는 다프나이였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유대계 망명자들이 네부카드레자르의 압제에서 도망쳐 피난처를 찾아다녔다. 이집트는 틀림없이 그리스인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유대인의 영향은 찾아보기 어렵고 예레미야가 의심하던 이오니아인에 대해 공포감 외에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추측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탈레스가 살았던 연대를 추정할 가장 좋은 증거는 천문학자들이 기원전 585년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일식을 탈레스가 예측했다는 유명한 사실이다. 변변치 못한 다른 증거도 그가 이 무렵 활동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일식을 예측했다고 해서 그가 비범한 천재였다는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밀레토스는 리디아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리디아는 바빌로니아와 문화 교류가 활발했는데,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들은 이미 일식이 약 19년 주기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월식을 분명하고 완벽하게 예측하는 데 성공했으나 일식을 예측할 경우에는 일식을 특정한 장소에서는 볼 수 있고 다른 장소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로 곤란해졌다. 62.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밀레토스 학파의 3대 철학자 가운데 마지막 철학자로서 나악시만드로스만큼 흥미로운 인물은 아니었으나 어떤 면에서 중대한 진보를 이룩한다. 그의 생몰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아낙시만드로스의 후대에 속한다는 것과 기원전 494년 이전에 활약한 것은 확실하다. 바로 그해, 페르시아가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밀레토스를 멸망시켰다.


그는 제일 실체가 공기라고 말했다. 영혼은 공기이며, 불은 희박해진 공기이다. 공기가 응축되면 처음에 물이 되고, 더욱 응축이 일어나면 흙이 되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돌이 된다. 그의 이론은 서로 다른 물질들간의 차이를 오로지 응축의 정도에 따른 양적이 차이로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그는 지구가 둥근 탁자 모양이고, 공기가 만물을 에워싼다고 생각했다. '공기로 이루어진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숨과 공기가 전 세계를 에워싸고 있다' 세계가 숨을 쉬고 있다고 여긴 듯하다.


아낙시메네스는 고대에 아낙시만드로스보다 더한 감탄과 찬양을 받았으나 현대에 이르러 거의 정반대로 평가된다. 그는 피타고라스와 이후의 사색에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이었다. 파타고라스학도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반면, 원자론자들은 지구가 원반형이라는 아낙시메네스의 견해를 고집했다.


말레토스 학파는 성취한 업적이 아니라 철학적 시도로 인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학파는 그리스 정신이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문화를 만나 빚어낸 성과였다. 밀레토스는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는 사이 우너시적 편견이나 미신의 영향이 약해졌다. 이오니아는 기원전 5세기 초 다리우스 대왕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문화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오니아는 디오니소스나 오르페우스와 연관된 종교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아오니아의 종교는 올림포스굥ㅆ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의 사변적인 이론은 과학적 가설로 보아야 하는데, 의인화하려는 갈망이나 도덕관념을 부당하게 끌어들인 부분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66


결국 그는 처음에 참주체제를 수립할 때 자신을 도와준 두 형제를 제거했으며 해군력은 대부분 해적질에 활용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즈음 밀레토스가 페르시아에게 항복하자 이득을 채겼다. 그는 서방 세계로 뻗어가는 페르시아인들의 영토 확장을 막으려 이집트의 왕 아모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승리를 거두리라 예상하고 캄비세스 편을 들었다. 그는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자신의 정적들로 구성한 함대를 파견했지만, 선원들이 모반을 일으켜 반대로 그를 공격하려 사모스로 뱃머리를 돌렸다. 폴리크라테스는 그들을 물리쳤으나 마침내 탐욕을 채우려는 자신의 배반 행위로 몰락했다. 사르데스의 페르시아 총독은 다리우스 대왕에 맞서 반란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도와주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폴리크라테스에게 전달했다. 그를 만나러 본토로 들어간 폴리크라테스는 붙잡혀 십자가형을 당하고 말았다.


폴리크라테스는 예술의 후원자라로서 눈에 띄는 공공사업을 시작했으며 사모스의 미화에 힘썼다. 아나크레온도 그의 궁정 시인이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폴리크라테스 정권을 혐오한 나머지 사모스를 떠났다. 이때 피타고라스가 이집트를 방문해 거기서 많은 지혜를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그럴듯한 말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피타고라스가 자신의 사상을 최후로 확립한 곳은 분명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이었다.


사모스나 밀레토스 같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는 대부분 부유했으며 번창했다. 더욱이 페르시아인들의 위협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두 도시가 바로 시바리스와 크로톤이었다. 시바리스는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유명했으며,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전성기의 인구가 3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물론 과장된 것이다. 크로톤의 규모도 시바리스와 거의 같았다. 69


 수학에 근거하여 사유가 감각보다 우월하고 직관이 관찰보다 우울하다고 가정햇다. 만약 감각 세계가 수학에 적합하지 않으면, 감각 세계는 그만큼 더 나쁜 세계가 된다. 갖가지 방식으로 수학자의 이상에 더 가까워지려는 방법을 찾으려 했으며, 그 결과 생겨난 제안들은 형이상학과 인식론 분야에서 빋어진 수많은 오류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와 더불어 시작된다.


누구나 알듯이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이다'라고 말했다. 이 진술은 현대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지만, 그가 말한 바를 정확히 알아보면 무의미하지 않다. 그는 음악에서 수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으며, 음악과 수학 사이에 확립된 관계는 수학의 전문 용어인 '조화평균 harmonic mean'이나 '조화수열 harmonic progression'로 살아남아 사용된다. 그는 수를 주사위나 놀이 카드에 나타나는 모양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도 수의 입방이나 평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피타고라스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그는 직사각형 수, 삼각형 수, 피라미드 수 같은 용어도 사용했는데, 해당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갈의 수(또는 더 자연스럽게 말한다면 어림수)로 표시되었다. 그는 세계가 원자들로 구성되며, 물체는 갖가지 모양으로 배열된 원자들로 이루어진 분자들에 의해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런 식으로 그는 수학을 물리학뿐만 아니라 미학에서도 필요한 기초 연구 분야로 만들기를 바랐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직계 제자들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직각삼각형에 관한 정리, 즉 직각에 닿는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나머지 변에 해당하는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진리이다. 이집트인은 삼각형의 세변이 3, 4, 5가 되면 직각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인이 최초로 3(2)+4(2)=5(2) 임을 알아냈으며, 이 제안의 영향을 받아 앞에서 말한 직각삼각형에 관한 일반 정리의 증명방식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곧 약분할 수 없는 수의 발견으로 이어진 일은 불행한 사태였는데, 그것이 전체 철학을 반증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직각이등변삼각형에서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 중 하나의 제곱의 두 배가 된다. 가 변을 1인치로 가정해보자. 75


먼저 자명한 공리를 인지한 다음, 연역을 사용하여 현실 세계에 관한 정리들을 발견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견해는 플라톤과 칸트,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철학자들 대분분에게 영향을 주었다. 미국독립선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을 본떠 주장한 셈이다. 18세기 자연권 학설은 정치학에서 일어난 에우클레이데스식 탐구이다.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형식은 널리 인정되듯이 경험 가능한 물질을 다루는데, 전적으로 에우클레이데스의 바업의 지배를 받는다. 정확히 스콜라 철학의 형식에 해당하는 신학도 에우클레이데스 방법에서 표현방식을 빌려온다. 개인적 성향의 종교는 무아경에서 도출되고, 신학은 수학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무아경과 수학은 둘 다 피타고라스에서 근원을 찾아야 한다.


나는 수학이 초감각적인 지성계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영원하고 정확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발생시킨 주요 원천이라 생각한다. 기하학은 정확한 원을 다루지만, 감각 가능한 어떤 대상도 정확한 원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아무리 주위를 기울여 컴퍼스로 원을 그린다고 해도, 빗나가거나 고르지 못한 데가 조금이라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정확한 추리란 오로지 감각 가능한 대상들과 대비되는 이상적 대상들에 적용될 뿐이라는 견해를 암시한다. 더 나아가 사유가 감각보다 더 고귀하며, 사유의 대상이 감각, 지각의 대상보다 더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시간을 영원과 연겨란 신비주의 학설도 순수 수학으로 강화되는데, 수 같은 수학의 대상들이 실재한다고 해도 영원한 존재로서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원한 대상들은 신이 생각해낸 것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이 기하학자라는 플라톤의 학설과 신이 수학에 빠져 있다는 제임스 진스 경의 믿음은 바로 앞의 사실에서 유래한다. 종말론적인 예언 종교와 대비되는 합리주의 성향의 종교는 피타고라스 이래, 특히 플라톤 이후부터 철저하게 수학과 수학적 방법의 지배를 받았다.77


헤라클레이토스의 작품 가운데 후대에 전해진 작품에 따르면, 그는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을 경멸하는 일에 거의 중독된, 민주주의자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동포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년에 이른 에페소스인들은 도시를 풋내기들에게 맡기고 목매달아 죽어 마땅하다. 그들은 가장 휼륭한 에페소스인 헤르모도로스를 추방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결코 두지 않으리라. 그런 자가 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 있게 내버려 두자' 그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저명한 선대 사상가들을 전부 혹평한다. '호메로스는 선대 사상가의 명단에서 제외해야 하며 호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담론을 펼쳤던 사람들 가운데 지혜란 모든 담론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만물에 대해 안다고 해서 이치를 깨닫게 되지는 않는다. 아니면 헤시오도스와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와 헤카타이오스도 깨달았을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스스로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겼으나, 그저 만물에 대한 지식이요 익살을 부리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 주장을 했을 따름이다.'헤라클레이토스의 신랄한 비난을 모면한 유일한 예외는 테우타모스인데, '나머지 인물들보다 훨씬 더 나은 설명을' 한다고 평한다. 이러한 칭찬의 근거를 찾아보면, 테우타모스는 '인간은 대부분 악하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인류를 경멸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오로지 강제력을 동원해야만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을 위해 행동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축들은 매로 쳐서 목초지로 몰아가야 한다''당나귀는 금보다는 짚이나 먹는 것을 좋아하리라'


예상한 대로 헤라이클레이토스는 전쟁을 좋게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요 만물의 제왕으로, 어떤 존재는 신이 되게 하고 어떤 존재는 인간이 되게 하며, 어떤 자는 노예가 되게 하고 어떤 자는 자유민이 되게 한다.'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호메로가 '소망컨대,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투쟁이여 사라질진저! 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그는 자신이 우주의 파멸을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83 왜냐하면 그의 기도가 이루어졌더라면 만물도 소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만물에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만물은 투쟁을 통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83


물리학자들은 굴하지 않고 전자와 양자라는 더 작은 새로운 단위 물질을 고안했는데, 이것들이 원자를 구성하며 수년간 이전에 원자의 성질이던 파괴불가능성을 가진다고 가정했다. 불행히도 양자들과 전자들은 결합하고 폭발하면서 새로운 물질이 아니라 빛의 속도로 우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 파장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너지가 불변하는 물질을 대체했다. 그러나 에너지는 물질과 달리 상식적인 '사물'개념을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의 한 단계일 따름이다. 공상에 빠져 에너지를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불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에너지는 연소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에 연소하는 물질이 아니다. '연소하는 물질'이란 개념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다.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 넘어가보면,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천체들은 영속하는 사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행성들은 태양에서 나왔고, 태양은 성운에서 나왔으며, 태양은 이미 얼마 동안 존속했고 얼마 동안 더 존속할 것이다. 더 빠를 수도 더 느릴 수도 있겠지만, 아마 약 1조 년 후에 태양이 폭발하면서 모든 행성은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천문학자들은 아마 지구 종말의 날이 더 가까워질 때 자신들이 계산한 대폭발의 시기에 착오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가르친 끝없는 흐름의 학설은 두통거리인데, 이미 보았듯이 과학도 이 학설을 논박할 만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철학자들이 전력을 다해 이루려는 야망 가운데 하나는 과학이 소멸시킨 듯이 보였던 희망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시간의 제국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찾으려는, 위대하고도 끈덕진 탐구를 감행했다. 이러한 탐구는 바로 파르메니데스와 더불어 시작된다. 91.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은 [자연론]이라는 시에서 설명되었다. 그는 감각이란 우리를 속이고, 많은 감각 가능한 존재는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참된 존재는 '일자the one'로서 무한하며 분할할 수 없다. 일자가 헤라클레이토스에서처럼 대립물의 통일로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일자 안에는 어떤 대립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차갑다'는 단지 '뜨겁지 않다'를, '어둡다'는 단지 '밝지 않다'를 의미할 뿐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신을 생각하듯 '일자'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일자를 물질적이고 연장된 존재로 생각하는 듯한데, 일자를 구형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자 전체가 어디서나 나타나기 때문에 일자는 분할할 수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리를 따르는 길'과 '의견을 따르는 길'이라 한다. 우리는 후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가 진리를 따르는 길에 관해 말한, 후세까지 살아남은 핵심 논점에 해당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無는 불가능하며, 그대가 무를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까닭은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게 되는가? 혹은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될 수 있었는가? 만약 그것이 존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만약 그것이 미래에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성becoming은 무효가 되며 소멸 passing away이라도 말해서는 안된다.


'사유와 사유의 대상이 동일한 까닭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한, 존재가 없는 사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된다. 당신이 생각할 때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고, 당신이 명사를 하나 사용할 때 명사는 어떤 존재에 대한 명사여야 한다. 93


햄릿은 상상의 개체이고, 일각수도 상상에 의해 구성된 종이다. '일각수'란 단어가 나오는 어떤 문장은 참이고, 어떤 문장은 거짓이다. 그러나 어느 문장에서나 참인지 거짓인지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일각수는 뿔이 하나 달렸다'와 '젓소는 뿔이 두 개 달렸다'는 두 진술을 고찰해보자. 둘째 진술을 입증하려면, 젖소를 자세히 보고 뿔이 몇 개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책에 젖소는 뿔이 두 개 달렸다고 쓰여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일각수가 뿔이 하나 달렸다는 증거는 책 속에서만 찾을 수 있으므로, 사실상 이렇게 하면 정확한 진술이 될 수 있겠다. '어떤 책에서는 '일각수'라 불리는 뿔이 한 개 달리 동물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각수들에 관한 모든 진술은 실제로는 '일각수'라는 말에 관한 진술이며, 이는 햄릿에 관한 모든 진술이 실제로는 '햄릿'이라는 말에 관한 진술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7)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단어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분명히 단어가 의미하는 대상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의 논증은 이렇다. 만약 어떤 단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 단어는 무엇인가를 의미해야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대상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해야 한다.

-->기호와 기표, 기의에 관련된 이야기다. 철학과 기호학은 어떤 관계일까? 기호학은 철학의 그릇인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그러면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우리가 택할 대안은 단 두개뿐인 듯하다. 하나는 그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안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조지 워싱턴'이란 말을 사용할 때 실제로는 그 이름을 가지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는 대안이다. 양자 모두 역설처럼 보이는데, 후자의 역설이 좀 덜 심각하므로 후자의 대안이 어떤 의미에서 참이 되는지 보여주려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말이란 불변하는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가정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파르메니데스가 펼치는 논증의 기반이며 이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전이나 백과사전에 어떤 말에 대해 공식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승인된 의미가 실려 있기는 해도, 같은 말을 쓰는 두 사람이 마음속에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지는 않다. 95.


이미 파르메니데스에서 철학자, 예언자, 과학자, 돌팔이 의사를 혼합한 특징을 확인했지만,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0경 ~ 430는 그러한 특징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440년경에 활약한 인물로, 파르메니데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같은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의 학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유사한 면이 더 많다. 그는 시칠리아 남부 해안에 위치한 아크라가스의 시민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한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 특히 시칠리아의 도시국가에서는 민주정치와 참주정치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당파이든 일순간에 정권을 잃은 지도자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추방되었다. 추방 당한 자들은 그리스의 적국들과 교섭하는 일도 서슴지 않아서, 동쪽의 페르시아나 서쪽의 카르타고와 손을 잡았다. 엠페도클레스도 정해진 수순을 밟아 국외로 추방되었는데, 추방되어 유형에 처해진 후 망명자로서 흥미진진한 경력을 쌓기 보다 차라리 현자로서 사는 길을 선택한 듯 하다. 그는 젊은 시절 얼마간 오르페우스교에 기울었으며, 국외 추방 이전에는 정치와 학문을 결합하려 했고, 말년에 국외로 추방된 이후에는 예언자로 살았다. 99


엠페도클레스가 종교에 대해 내놓은 견해는 피타고라스의 견해와 일치한다. 아마 피타고라스를 언급한 듯이 보이는 단편에서 이렇게 말한다.'그들 가운데 진귀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 온갖 지혜로운 일들을 제일 능숙하게 처리하는 사람, 최고로 풍부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이 살았다네. 그는 오 마음을 바쳐 애쓸 때는 언제나 수월하게 열 사람, 아니 스무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일을 전부 보기도 했다네.'이미 말했듯이 황금시대에 사람들은 아프로디테 여신만을 숭배했기 때문에 '제단은 순종의 황소 피로 악취를 풍기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둘러싸 황소를 산 채로 찢어 죽인 후 맛좋은 사지를 뜩어 먹는 가증스러운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는 어떤 때에는 자신이 신이라고 열광적으로 주장한다.


저 위 요새 옆 아크라가스의 노란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큰 도시에 거주하는, 훌륭한 일로 바쁜 동포여, 이방인을 위한 영광의 항구여, 야비한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만세! 나는 여러분 사이에서 불멸하는 신으로 이제 죽을 운명에서 벗어나, 만나는 모든 이의 존경을 받으며 띠와 꽃으로 장식한 화관을 머리에 쓰고 돌아다니노라. 보자마자 나를 따르는 남녀들과 열을 지어 번화한 도심지로 들어갈 때마다 사람들이 나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들은 수많은 군중 틈에서 나를 쫓아다니며 어떻게 해야 자기들이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네. 어떤 사람은 신탁을 갈망하고, 기진맥진한 나날 속에서 온갖 질병으로 쓰라린 격통에 사무친 어떤 사람은 내게 치유의 말을 들려달라고 청한다네....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마치 죽어 없어질 운명의 인간들을 능가해야 할 위대한 사명이 있는 듯, 이런 일들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가?103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해 싸웠던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비극의 막을 열었다. 그의 비극 가운데 '페르시아인'은 호메로스의 주제를 택하는 관례대로 시작하지만, 크세르크세스의 패배를 다루고 있다. 소포클레스 기원전 496 ~ 406가 바로 뒤를 잇고, 에우리피덴스 기원전 484 ~ 406 가 소포클레스의 뒤를 이었다.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는 둘 다 페리클레스의 실각과 죽음에 뒤따라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암흑시대까지 관심 영역을 넓혔는데, 에우리피데스는 희곡들 속에 페리클레스 시대 후반기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담아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거칠고 제한적인 상식의 관점에서 모든 주의주장을 비웃는다. 더군다나 그는 특히 소크라테스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성하지 못한 사이비 과학적 비전秘傳, mysteries을 장난삼아 퍼뜨린다고 비방하며 웃음거리로 희화하였다.


아테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점령당하면서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이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페리클레스는 신전들을 재건하는 데 헌신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해, 옛터로 남아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인산을 주는 다른 신전들은 바로 페리클레스에 의해 복원되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국가에 고용되어 거대한 신상과 여신상을 제작했다. 페리클레스 시대가 끝날 무렵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출신이었으나 아테네에서 살았으며, 아테네 제국에 고무되어 아테네의 관점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서술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가 이룩한 성취와 업적은 어쩌면 온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웠으리라. 페리클레스 시대까지 아테네는 그리스의 다른 여러 도시국가보다 뒤처져서, 최초의 입법가인 솔론을 제외하면 예술에서나 문학에서나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107


 정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무한하고 자기조절 능력이 있으며, 어떤 것과도 혼합되지 않는다. 정신에 대해서는 에외지만, 만물은 아무리 작더라도 뜨거우면서 차가운 것, 하야면서 검은 것처럼 대립하는 모든 것의 일부를 포함한다. 그는 눈은 하얗지만 눈의 일부는 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낙사고라스에 따르면 정신은 모든 운동의 근원이다. 정신이 회전 운동을 일으켜 점차 세계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다가 가장 가벼운 것들은 경계선 주위로 흩뜨리고, 가장 무거운 것들은 중심으로 모은다. 정신은 한결같아서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똑같이 완전한 것이다. 겉으로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해 보이지만 이것도 인간이 손을 상요할 수 있기에 생긴 결과이다. 겉으로 드러난 지능의 차이는 모두 실제로는 신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는 둘 다 아낙사고라스가 정신을 도입한 후에 철학적인 용도로는 거의 상요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사고라스가 다른 내용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정신을 원인으로 도입했을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가능한 경우에는언제나 기계적 설명을 하고 필연과 우연이 사물이 발생하게 된 기원이라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그의 우주론에는 '섭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윤리나 종교에 대해 그리 많은 사색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아마 자신을 기소한 자들이 주장했듯이 무신론자였을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보다 앞서 활동했던 선대 철학자들이 전부 그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피타고라스만은 예외였다.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은 아낙사고라스의 경우에도 엠페도클레스와 동일했다.


8)아낙사고라스는 과학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달이 반사광으로 빛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나, 파르메니데스도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암시하는 모호하고 비밀스런 단편도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는 이론을 세웠으며, 달이 태양보다 아래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태양과 별들은 불타는 돌덩이들이지만, 너무 멀리 있어 열기를 느낄 수 없을 뿐이라고 말했다. 태양은 펠로폰네소스 지역보다 더 크며, 달에도 산과 거주민이 있다고 생각했다. 112

-->별은 불타는 돌덩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충돌이 일어나면서 원자들의 무리가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나머지는 아낙사고라스의 견해와 동일하게 진행되지만, 소용돌이를 정신의 활동보다는 오히려 기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점은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잇다.


고대에는 원자론자들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돌렸다고 해서 비난을 받는 일이 흔했지만, 이와 반대로 원자론자들은 엄격한 결정론자로서 모든 일은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어떤 일이든 우연히 이러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명백하게 부인했다. 레우키포스는 역사적으로 생존했는지조차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무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밑바탕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일어난다.'사실 그는 세계가 왜 처음에 있던 그대로 존재했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줄 아무 이유도 대지 않았는데, 아마 우연에 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가 언젠가 존재하게 되었던 때 이후, 세계의 진행은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바꿀 수 없게 고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주석가들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를 원자들의 최초 운동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했지만, 바로 이 점에서 원자론자들은 그들을 비판한 자들보다 더 과학적인 태도을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과관계는 어떤 것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것이 시작되는 곳이 어디든 최초의 여건을 설명해줄 원인을 말하기는 어렵다. 조물주가 세계를 창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조차도 조물주 자체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실 원자론자의 이론은 고대에 제안된 다른 어떤 이론 보다 더 현대 과학 이론에 근접한 견해였다.117


 그러니까 연장을 갖는 실체는 물질이고, 연장은 그것을 갖는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에게 빈 공간이란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없는 행복만큼이나 불합리하다. 라이프니츠도 약간 다른 근거에서 꽉 찬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공간이 단지 관계들의 체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제를 둘러싸고 라이프니츠와 뉴턴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뉴턴 측을 지지한 대표자가 클라크였다. 논쟁은 아인슈타인의 시대까지 미결로 남았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라이프니츠의 견해에 결정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지금도 물질 어떤 의미에서 원자라고 믿지만 빈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물질이 없는 곳에도 어떤 것, 특히 빛의 파동이 여전히 존재한다. 물질은 철학 분야에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통해 획득한 당당한 지위를 더는 누리지 못한다. 물질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며, 그저 사람들이 사건들이 무리를 짓는 방식일 따름이다. 어떤 사건들은 물체로 여겨지는 집합체들이고, 빛의 파동과 같은 다른 사건들은 물체가 아니다. 세계를 채우는 것stuff은 사건들이며, 사건은 제각기 짧은 기간 지속한다. 이 점에서 보면 현대 물리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반대하고 헤라클레이토스 편에 선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양자 이론이 나타날 때까지는 파르메니데스 편에 서 있었다.


공간에 대한 현대적 견해는, 공간이란 뉴턴이 주장했고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해야 했던 실체나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연장된 물체들의 형용사가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주장했던 관계들의 체계라는 입장이다. 이 견해가 빈 공간의 존재와 양립할수 있는지는 결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추상적인 논리학의 문제로 접근하면, 그러한 견해와 빈 공간이 존화를 이룰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떤 두 사물 사이 더 크거나 더 작은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거리는 중간에서 매개하는 것들의 존재를 함의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소용없는 일이다. 아인슈타인 이후 거리는 사물들 사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에 생기며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거리는 본질상 인과성에 근거한 착상이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원거리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모두 논리적 근거보다 오히려 경험적 근거에 기초한다. 122


여러 도시, 특히 아테네에서는 더 가난한 계층이 부유층에게 이중으로 적개심을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선망에서 비롯된 적개심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을 고수하는데서 비롯된 적개심이었다. 부유층은 경건치 못하며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고 여겼으며, 이것은 대개 정당했다. 그들이 예부터 전해 내려온 신앙을 전복시키는 데다 아마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정치적 민주주의는 문화적 보수주의와 결합되었던 반면, 문화의 혁신을 추구한 사상가들은 정치적으로는 반동세력으로 취급받기 쉬웠다. 어느 정도 유사한 상황이 현대 미국사회에서도 벌어진다. 가톨릭 주요 단체 가운데 하나인 태머니파는 계몽 진영의 비난에 대항하기 위해, 전통 신학 교리와 전통 윤리 신조를 방어하는 데 열을 올린다. 그런데 개혁 사상가들이 아테네보다 미국 내에서 정치적 힘이 더 미약한 까닭은 부유층과 제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유층을 변호하려는 관심과 더불어 대단한 지성능력을 갖춘 중요한 계층이 바로 법인 변호사 계층이다. 그들이 맡은 몇몇 직무는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이 수행하던 역할과 비슷하다.


9)노예와 여자를 배제한 점에서 심각한 한계를 지니기는 했으나, 아테네 민주주의에는 현대에 등장한 어떤 민주주의 체제보다 더욱 민주적인 몇 가지 측면이 있었다. 배심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행정 관리는 추첨으로 선출되었으며, 짧은 기간 직무를 이행했다. 이렇게 뽑힌 자들은 오늘날의 배심원처럼 보통 시민들로서, 보통 시민들의 특징인 편견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데다 전문성도 결여했다. 대개 각 소송을 참관하는 배심원은 다수였다. 원고와 피고, 혹은 기소자와 피의자는 직업적인 변호사를 동반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출두했다. 당연히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결과는 대중적 편견에 호소하는 웅변술에 좌우되었다. 소송 관련자는 스스로 변호하는 연설을 해야 했지만, 자신을 위해 연설문을 써줄 전문가를 고용해도 되었다. 혹은 많은 이들처럼 그는 법정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대가로 보수를 지불할 수도 있었다. 소피스트들이 바로 그러한 기술을 가르쳤다. 127

-->변호사의 기원은 소피스트다. 소피스트들은 돈을 받고, 웅변술과 처세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는 경직된 청교도적인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재치 있기는 커녕 지독한 냉소주의로 바뀌어가는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변화 속에서 소피스트들이 어떤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힘없이 무너져가는 정통 신앙을 방어하려는 우둔하고 지독한 노력과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맞선 이오니아 도시국가들을 이끌어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490년에는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는 404년에 스파르타에게 패배하고, 399년에 소크라테스에게 선고된 사형을 집행한다.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인 면에서 더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으나, 문화적인 면에서 확실한 최고 지위를 누리며 군림했다. 아테네의 문화적 지위는 그리스도교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유지되었다.


10)기원전 5세기 아테네 역사 가운데 어떤 부분은 플라톤이나 이후 전개된 모든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최고 영예는 아테네인들에게 돌아갔는데,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당당히 승리했기 때문이다. 10년이 지나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해상에서는 그리스 최고의 지위를 누렸지만, 지상에서는 주로 스파르타인들이 승리를 거두어 그리스 세계의 지배자로 공인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시야가 매우 좁고 자기 나라에만 한정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들이 유럽 그리스 지역에서 쫓겨나자 그들과 더는 대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테네가 아시아 지역 그리스인들의 승리를 이끌고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던 여러 섬들을 해방시키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이를 계기로 아테네는 해상권을 장악하고 이오니아의 여러 섬에 대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제국주의적 지배권을 획득했다. 온건한 민주주의자이자 온건한 제국주의자였던 페리클레스의 지도력 아래 아테네는 번성했다. 지금도 유적지로 남아 아테네의 영광을 빛내주는 거대한 신전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침입했을 때 파괴된 신전을 페리클레스의 주도로 재건한 것이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부는 급속도로 증대하고 문화도 빠르게 성장했는데, 특히 부는 외국과 무역을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전통 신앙이 파괴되는 시대에 늘 일어나는 일이다. 133

-->스파르타인들은 정복하기 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단련했다.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 ~ 399는 역사가들이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철학사에는 조금밖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여러 명 존재하며 많이 알려진 사람도 잇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조금 아는지 많이 아는지부터 불확실하다. 그는 틀림없이 아테네의 중간 계층 시민이었고, 존재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젋은 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으나 소피스트들과 달리 돈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확실히 재판을 받았고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며, 기원전 399년 대략 70세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구름]에서 풍자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유명 인사였다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모든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소크라테스의 두 제자, 크세노폰과 플라톤은 그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두 사람은 소크라테스에 대해 전혀 다르게 이야기한다. 버넷은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때조차 크세노폰이 플라톤의 저술을 베꼈다고 해석했다.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떤 이는 크세노폰을 믿지만 다른 이는 플라톤을 믿고, 또 어떤 이는 둘 다 믿지 않는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논쟁 속에서 나는 어느 쪽에 가담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겠지만 다양한 관점을 간략히 설명하려 한다. 138


나는 플라톤이 완벽한 소크라테스를 지어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렇게 했는지는 물론 다른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고 생각되는 대화편은[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연설한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물론 법정 속기 기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벌어진 후 몇 년이 지나서, 플라톤이 기억한 내용을 무학적 기교로 다듬었다. 플라톤은 확실히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출석했기 때문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기억해서 서술했으며 의도 역시 대체로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었다고 보아야 공정한 평가인 듯하다. 한계는 있겠지만 [변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란 인물을 꽤 명확하게 그려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사악한 자이며 땅 아래에 있는 것과 하늘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괴상한 사람이고, 나쁜 명분을 좋은 명분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에 능한 데다 그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까지 한다.'는 고소장에 따라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적대감을 초래한 실제 이유는 그가 귀족층을 지지하는 당파와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제자들 대부분이 귀족 출신인 데다 권력자의 지위에 있던 일부 제자들은 악독한 지배로 아테네 시민들을 괴롭혔다. 그런데 그러한 근거도 당시 재판 결과에 대해 특별사면을 베풀었던 관례를 보면 분명치 않다. 배심원들 중 다수가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그때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법률에 따라 사형보다 낮은 형량을 제시할 기회가 있었다. 배심원들은 피고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더라도 원고 측이 요구한 형량과 피고 측이 제시한 형량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니까 재판부에서 수긍할 만한 적당한 형량을 제시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30미나mina 벌금형을 제시했고, 그의 친구들 가운데 몇 사람(플라톤을 비롯하여)은 기꺼이 보증을 섰다. 142


11)각 부종작이 검사한 후 병약한 아이는 내다 버렸으며, 건강한 아이들만 기르도록 허가했다. 20세가 될 때까지 모든 소년은 큰 학교에서 다 같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의 목적은 강인하고 고통에 무심하며 훈육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문화교육이나 과학교육을 가치 없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교육의 목표는 국가에 완벽하게 헌신하는 훌륭한 군인을 배출하는 일이었을 따름이다.

-->지금의 북한과 다른점은 무엇일까? 


12)스파르타 시민은 바로 20세부터 실제 군 복무를 시작했다. 20세 이상이면 누구나 결혼을 할 수 있었으나, 30세까지는 '남자 기숙사'에서 살면서 마치 부정하고 은밀한 일인 양 결혼생활을 했다. 30세가 지나야 훌륭하게 성장한 시민다운 시민으로 대우를 받았다. 시민은 각자 속한 식당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모여 식사를 했는데, 각자 부지 내에서 재배한 농산물 가운데서 똑같은 양을 거두어 음식을 마련했다. 국가가 정한 준칙에 따르면 스파르타의 시민은 궁핍해서도 안되고 부유해서도 안 된다. 시민들은 각자 부지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살아갔으며, 부지는 자유 증여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 스파르타 시민이라면 누구든 금이나 은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을 철로 만들었다. 스파르타인의 검소한 생활은 널리 알려졌다.

-->물질에 대한 욕구를 억누름으로써, 자아를 관리하다. 


13)스파르타에서 여자들의 지위는 특이했다. 그들은 그리스 다른 지역의 신분이 높은 여자들과 달리 격리된 생활을 하지 않았다. 소녀들은 소년들과 똑같은 체육 과정을 이수했다. 게다가 소년과 소녀가 모두 벌거벗은 채 같이 체력 단련을 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바람직했다.(노스North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에서 인용한다)


 소녀들은 달리기, 씨름, 창던지기, 활쏘기 들로 신체를 단련해서, 나중에 임신할 태아에게 강하고 왕성한 신체의 자양분을 공급하여 더 우수한 자손을 낳고 퍼뜨려야 한다. 또 운동으로 체력이 강해지면 당연히 출산의 고통도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소녀들이 나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더라도 불성실한 태도나 저항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경기마다 놀이와 장난이 많았지만 발랄한 면이나 방종한 태도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155

-->그리스 다른 지역과 달리, 스파르타 여인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경제권을 갖자, 발언권이 높아진 것과 같다. 


14)다른 지역의 그리스인들이 스파르타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 이유 한 가지는 스파르타의 안정성 때문이었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은 전부 혁명을 겪었으나,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는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되면서 감독관들의 권력이 점차 증가했을 뿐인데, 그것도 폭력이 아닌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일어났다.

-->안정적으로 정치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공동체 의식이란, '서로 돕는 것이다' '서로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그들을 당연하게 복종하게 했을 것이다. 


15)오랜 기간 스파르타인들이 자신들의 주요 목표인 무적의 전사 종족 육성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곤란하다. 아마도 테르모필라이 Thermopylae 전투(기원전480)는 스파르타 전사들이 용맹을 여실히 보여준 가장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테르모필라이는 산을 통과하는 협곡으로, 거기서 페르시아 군대를 저지하려했다. 스파르타 전사 300명이 보조병사와 함께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페르시아 군을 전부 격퇴했다. 그러나 마침내 페르시아군이 언덕으로 통하는 우회로를 찾아냈고 이어서 양측에서 동시에 공격했다. 스파르타 전사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전사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두 사람은 눈병이 심해졌고, 거의 일시적 실명 상태에 빠져 병가로 전투지를 이탈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노예에게 전투지로 데려다 달라고 우겨 결국 거기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른 한 사람 아리스토데모스는 병이 너무 심해 전투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스파르타로 돌아오자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를 '겁쟁이 아리스토데모스'라 불렀다. 그는 수년 후 스파르타 군대가 승리를 거둔 플라타이아Plataea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사함으로써 불명예를 씻었다. 158

-->목숨 보다 명예를 중시했다. 


16)리쿠르고스는 다른 개혁가들처럼 아이들의 교육이 법률 개혁가가 확립해야할 '중차대한 문제'라 생각했다. 또 그는 군사력의 증강을 주요 목표로 삼은 모든 사람들처럼 출생률을 유지하려 고심했다. '소녀들이 젊은 남자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 하는 놀이, 운동, 춤은 젊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싶어하도록 이끌고 꾀어내려는 도발적 자극이다. 플라톤이 말하듯 기하학적 비례로 설득하는 결혼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바로 사랑으로 하게 되는 결혼이었다. '결혼생활을 처음 몇 년 동안 은밀한 일처럼 취급하는 습관은 '남자와 여자 양쪽이 여전히 부라는 사람을 계속하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적어도 플루타르코스의 견해는 이러한다. 이어서 그는 어떤 남자가 늙어서 젊은 아내를 얻게 되면 아내에게 아이를 갖도록 젊은 남자를 만나도록 허락해도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하는 정직한 남자가 남편에게 그 여자와 동침하고 싶다고 간청하는 것도, 그가 비옥한 땅을 갈아 잘생긴 자식의 씨를 집 밖으로 퍼뜨리는 일도 법률에 저촉되지 않았다.' 어리석은 질투를 하면 안되는 까닭은 '리쿠르고스가 자식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공복리를 위해 공동의 소유가 되는 쪽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민이 되어야 할 아이는 아무 남자나 낳게 하지 않고 제일 정직한 남자들만 낳게 하려 했다' 그는 이것이 농부들이 가축들에 적용하는 원리라고 설명한다.

-->아이들이 공공 자산이라는 관념은 심하다.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렇게 까지 생각할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17)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가문의 연장자 앞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았다. 만약 아이가 건강하면 부친에게 돌려주어 양육하도록 하고, 건강하지 않으면 깊은 물구덩이에 던져버렸다. 자식들은 처음부터 가혹할 정도로 힘든 과정을 이겨내야 했으나, 예컨대 엄한 감시 속에 놓이지 않는다는 좋은 점도 있었다. 일곱 살이 된 소년들은 집을 떠나서 기숙학교에 들어가며, 그곳에서 조별로 나뉘고 각 조는 구성원들 가운데 분별력과 용기가 있어서 선출된 대표 소년의 명령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학문으로는 소년들에게 유용한 것을 배웠다. 학문을 배우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 소년들은 복종하는 법과 고통을 없애는 법과 노역을 참는 법을 배우고 싸움에서 이기는 법까지 배웠다' 163

-->스파르타는 어린시절부터 개인의 욕망을 죽이고, 공동체에 속하는 훈련을 받는다.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플라톤 사상에서 '선'은 소크라테스 이전 사상가들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 점은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의 영향으로 귀착된다.


앞서 언급한 모든 사고방식은 어떻게 정치적 군위주의와 연결되는가?


첫째 시간을 초월한 선성Godness과 실재성Reality을 지닌 최선의 국가는 천상의 원형을 가장 가깝게 모사한 국가로서, 변화는 최소화하고 정적인 완벽한 특징은 최대화해야 하므로 영원한 선을 최대로 이해한 사라들이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신비주의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플라톤의 신념 체계 안에도 삶의 방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소통하기 어렵지만 근간을 이루는 확신이 자리잡고 잇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입회자가 지켜야 하다는 규칙을 세우려 노력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이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유능한 정치가가 되려면, 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지성의 훈련과 도덕적 훈련을 겸비할 경우에만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중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허락한다면 국가는 반드시 부패한다.


셋째, 플라톤의 원리에 따라 유능한 통치자를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을 많이 해야한다.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훌륭한 왕으로 만들기 위해 기하학을 가르쳐야 한 주장이 현명하지 못한 듯하지만,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본질적 요소였다. 그는 수학을 알지 못하면 참되 지혜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피카고라스 사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과두정치를 암시한다.


넷째, 플라톤은 대부분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혜를 얻으려면 여유가 필수 요소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런데 노동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어려우니, 남에게 의존하지 않을 만큼 재산을 소유하거나 국가의 구제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만 지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본질상 귀족정치의 특징이다.


플라톤과 현대 사상을 비교해보면 두 가지 일반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지혜'와 같은 덕이 존재하는가? 둘째, 지혜가 존재한다면 정치 권력이 지혜를 실현할 정치 체제를 고안할 수 있는가? 168


 플라톤이 통치자들조차 속아 넘어가기를 바라고, 어쨌든 통치자들 이외에 도시국가의 전체 주민을 속여 넘길 '충성심에서 우러나서 꾸며낸 거짓말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이 '거짓말'에 대해 꽤 상세하게 설명한다. 거짓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신이 인간을 세 종류로 , 즉 금으로 빚은 최고 계급, 은으로 빚은 둘째 계급, 동과 철로 빚은 평민 계급으로 창조했다는 교의이다. 금으로 빚어진 자들은 수호가 계급에 적합하고, 은으로 빚어진 자들은 군인 계급이 되어야 하며, 동과 철로 빚어진 자들은 수공업에 종사해야 한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아이들은 부모와 같은 계급에 속하게 마련이다. 부모와 같은 계급에 속하지 않은 경우에 아이들은 자격에 따라 승격되거나 강등되었음이 틀림없다. 현 세대가 이러한 신화를 믿도록 만들기는 좀처럼 어렵지만, 다음 세대와 이후에 이어질 모든 세대가 신화를 의심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일은 가능하다.


플라톤은 두 세대가 지나면 신화에 대한 신앙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옳았다. 일본인들은 1868년 이후 천황이 태양 여신의 후예이며, 일본이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일찍 창건되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학문적인 작업에서조차 이러한 교의에 의문을 던지는 대학 교수는 누구든 일본에 반하는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신화를 강제로 수용하도록 교육하는 일이 철학과 양립할 수 없으며 지성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다.


[국가]의 전체에서 다룬 명목상의 목표인 '정의'를 정의 내리는 작업은 4권에서 한다. 정의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몫을 일하고  남이 일에 참견하지 않는데서 실현된다고 한다. 국가는 상인 계급, 보조 계급, 수호자 계급이 각각 자기 몫을 일하고 다른 계급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 정의롭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몫으로 정한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은 분명히 칭찬할만하지만, 현대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정의'개념과 대응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의 정의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그리스식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에 대응하지만, 의미가 정확히 일치하는 번역어는 없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다음 구절은 생각해볼 만하다.


만물은 다시 한 번 정해진 운명에 따라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간다네. 만물이 서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 불의를 보상하고 충족시켜주기 때문이지. 177


 이상계는 물체들이 햇빛에 드러날 때 보게 되는 세상인 반면, 일시적인 사물 세계는 어둑어둑해서 물체를 혼동하게 되는 세상이다. 눈은 영혼에 비유되고, 태양은 빛의 근원으로서 진리나 선에 비유된다.


영혼은 눈과 같다네. 영혼은 진리와 존재가 훤히 드러나는 것을 응시할 때 지각하고 판단하면서 지성 능력을 발휘하지. 그러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불확실한 곳을 볼 때면 영호은 더듬더듬 먼저 의견을 하나 내놓았다가 다음에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되어 지성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네....이제 자네가 인식 대상에 진리를 부여하고 인식 주체에게 인식 능력을 부여하는 바탕을 선의 이상이라 부르고 학문의 근원이라 생각하기 바라네.


18)여기서 차츰 유명한 동굴의 비유로 넘어가는데, 이에 따르면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앞만 보도록 사슬에 묶인 채, 뒤쪽에서 모닥불이 비쳐 앞에 가로놓인 벽에 그림자가 생기는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에 비유된다. 죄수들과 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보는 사물은 전부 뒤에 놓인 물체들이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벽에 비친 그림자들이다. 죄수들은 어쩔 수 없이 그림자들을 실재인양 생각하기 때문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든 물체들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마침내 몇 사람이 드디어 동굴에서 벗어나 햇빛 속으로 나가게 된다. 동굴에서 벗어난 사람은 난생 처음 실재하는 사물을 보고는 이제까지 그림자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사람이 수호자에 적합한 부류의 철학자라면, 이전에 함께 지낸 동료 죄수들을 만나러 동굴로 되돌아가서 진실을 깨우치고 동굴 밖으로 나오도록 알려주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죄수들을 설득할 때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데, 햇빛으로 나오면서 죄수들보다 그림자를 능숙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전보다 더욱 바보처럼 보이는 탓이다.191.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잃는다. 


우연히 지배를 받는 세계, 곧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세계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환상일 뿐만 아니라 악하다고 비난을 받았던 일상 세계이다. 그러므로 조물주造物主, the Creator는 환상과 악을 창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노시스파에 속한 몇 사람은 바로 이 견해를 채택할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 앞에서 말한 난점은 아직 표면 아래 숨어 드러나지 않으며, 그는 [국가]에서 그 난점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듯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수호자의 운명을 타고난 철학자는 동굴로 돌아가 진리의 태양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살아야 한다. 만약 신이 자신의 창조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스스로 철학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믿는 플라톤주의자는 육화肉化, incarnation를 바로 그렇게 해석한다. 그러나 신이 왜 이상 세계에 만족하지 않았는지 속 시원하게 설명한 길은 없다. 철학자는 동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비심 때문에 동굴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물주가 만물을 창조했다면 동굴이 아예 생겨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의 난점은 그리스도교에서 수용한 조물주 개념에서 생겨날 뿐이고, 신이 만물을 창조하지 않고 선한 존재만 창조했다고 말한 플라톤이 책임져야 할 일은 전혀 없을 수도 있겠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감각 세계에 나타나는 다수성은 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서 유래한다. 또 어쩌면 이상들도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신ㅇ 창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상들의 다수성과 연루되어 겉으로 드러난 다원주의는 최종 결론이 아닌 셈이다. 신, 곧 선 자체만 궁극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이상들은 형용사 역할을 한다. 여하튼 이것은 플라톤에 대해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이다. 197.


 그는 목소리의 충고에 따라 아테네에 남아 사형 선고를 받기로 결심한다.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사실을 풀고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그는 울먹이는 아내를 비통해하는 넋두리가 토론을 방해하지 않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 정신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대로 죽음을 환영할 테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까닭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벗들은 자살이 왜 법에 어긋나는지 묻고, 오르페우스교의 교리에 따른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그리스도교가 할 법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란 문을 열고 도망칠 권리조차 없는 죄수라는 설이 은밀하게 퍼져있지.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무척이나 신비스런 교의라네.' 소크라테스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송아지와 주인의 관계에 비유한다. 만약 소가 길에서 벗어나 멋대로 날뒤면 주인이야 당연히 화가 날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간은 지금 나를 부르듯 신이 브를 때까지 자살하지 말고 기댜려야 한다는 말에는 까닭이 있을지도 모른다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비탄에 빠지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이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지혜롭고 선한 다른 신들엑게로 간다고 확신합니다.(이와 같은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잇는 만큼 확신한다.) 둘째, (이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내가 죽은 뒤에 남은 사람들보다 더 선한,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로 간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죽은 자들을 위한 무엇, 악한 자들보다는 선한 자들을 위해 훨씬 더 나은 것이 존재하리라는 선한 희망을 품고 있지요.'


19)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원론 말하자면 실재와 현상, 이상과 감각 대상, 이성과 감각지각,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철학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이렇게 쌍을 이루는 개념들은 제각기 먼저 놓인 개념이 다음 놓인 개념보다 실재한느 정도와 선한 정도에서 우월하다. 이러한 이원론에서 금욕주의와 도덕이 자연스럽게 파생한다. 그리스도교는 금욕주의 도덕을 일부만 받아들이고 전체를 다 수용하지는 않았다. 202


육체는 단지 양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끝없이 말썽을 일으키는 근원이며, 병에 걸리면 마음을 온통 빼앗아 참 존재를 추구하지 못하게 방해만 하지. 육체는 우리를 사랑, 정욕, 공포, 온갓 공상으로 가득 채우고 어리석은 짓을 끝없이 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아예 빼앗아버리기도 한다네. 전쟁, 투쟁, 당쟁은 왜 일어나느가? 육체나 육체의 정욕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 돈 욕심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는데 돈은 육체를 위해, 육체를 돌보기 위해 필요하지. 이런 방해물 때문에 우리는 철학할 시간을 내지 못한다네. 최악의 경우에는 사색에 몰두할 여유가 생기더라도, 육체가 훼방을 놓아 우리의 탐구 활동에 혼란과 혼동을 일으켜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네. 경험에 비추어보면 말이지, 우리가 무엇이든 참된 지식을 얻으려면 육체를 떠나야 하고, 그래야만 영혼이 자신 안에서 사물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네. 그러면 우리가 바라고 사랑하는 지혜에 이르게 되겠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나 지혜에 이른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육체와 얽혀 있는 동안에는 영혼이 순수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죽은 다음에는 지식을 얻게 된다는 말이지.


요컨대 육체의 아둔함을 제거하면 우리는 순수해지고 순수한 존재와도 맞닿게 되기에 어디에서나 저절로 진리의 빛과 다름없는 밝은 빛을 알아보게 된다네. 불순한 존재는 순수한 존재에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지. ........정화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는 현상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이렇게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풀려나는 현상을 바로 죽음이라 한다네.  참 철학자들, 그들만이 늘 영혼을 육체에서 풀어놓으려 하지.


만물을 다 바꿀 수 있는 진짜 화폐는 바로 지혜라네.


신비 의식의 창시자들은 실재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던 듯하고, 정화되지 않고 종교에 입문하지 않은 채 저승에 간 사람은 타락의 구렁에 빠지게 되지만, 종교에 입문하여 정화된 다음 저승에 간 사람은 신들과 살게 된다고 오래 전 비유를 들어 암시할 때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신비 의식 속에서 말하듯 바쿠스 지팡이를 든 자들은 많지만, 내가 이해한 참된 철학자를 의미하는 신비주의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네. 206

-->수도사들이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이유다. 그들은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육체를 위한 돈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지혜를 원한다. 


지성과 이성으로 불변하는 존재를 파악하고, 의견으로 변화하는 존재를 파악한다. 감각 가능한 세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신이 창조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신은 선하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의 원형에 따라 세계를 만들었다. 또 신은 질투심이 없으므로 만물이 가능한 한 자신과 닮기를 원했다.'신은 만물이 선하기를 바라고 가능한 한 악한 존재가 하나도 없기를 바랐다네' '눈에 보이는 세계 전체가 쉬지 않고 규칙도 질서도 없이 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무질서한 세계를 질서 있는 세계로 만들었다네' 따라서 플라톤의 신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신과 달리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이전에 존재하던 물질material을 재배열했을 따름이다. 신은 영혼 속에 지성을, 육체 속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신은 세계 전체를 영혼과 지성을 갖춘 살아 있는 생물로 만들었다. 세계는 하나일 뿐, 소크라테스 이전 많은 사상가들이 가르친 바와 달리 세계가 여럿 존재하지는 않는다. 세계가 하나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까닭은 신이 파악한 영원한 원본과 가능한 한 일치하게 설계하여 창조한, 모사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는 눈에 보이는 한 생물로서 다른 모든 생물들을 전부 자신 안에 품고 잇다. 세계가 구형인 까닭은 유사성이 비유성보다 더 공평하고 구체球體마는 어디에서 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회전하는 까닭은 원운동이 가장 완벽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원운동이 세계가 하게 되는 유일한 운동이기 때문에 손과 발은 필요없다.


4원소인 불, 공기, 물, 흙은 제각기 겉보기에 따라 수로 나타내며, 연비례 관계를 맺어 예컨대 불과 공기의 비는 공기와 물의 비와 같고 물과 흙의 비와 같다. 신은 세계를 창조할 때 4원소를 모두 사용했으므로 세계는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이를 먹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비례관계에 따라 조화를 이룬 세계는 우애 정신으로 경속되므로 신이 아니고서는 조화로운 비례를 깨지 못한다.


신은 먼저 영혼을 만들고 나서 육체를 만들었다. 영혼은 나뉘지 않으면서 변하지 않는 부분과 나뉘면서 변하는 부분이 혼합된 존재이며, 제3의 본질로서 중간에서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214


이 논점에 이르러 파르메니데스가 너무 위대하고 훌륭해서 그를 논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는 '고귀하고 경외할 만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모든 면에서 고귀한 깊이가 잇었다.'그는 '내가 어느 누구보다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말들 속에서 플라톤은 정적인 우주에 대한 애정과 논증을 펼치기로 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설에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플라톤은 존경심을 표현한 다음에도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식의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지식과 지각을 동일하게 보는 견해에 맞선, 플라톤의 마지막 논증에 이르렀다. 그는 우리가 눈이나 귀로 지각하지 않고 눈과 귀를 통해서 지각한다고 지적하며, 이어서 우리가 획득한 어떤 지식은 감각 기관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소리와 색이 닮지 ㅇ낳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떤 감각 기관도 양자를 지각하지 못한다. '존재와 비존재, 유사성과 비유사성, 동일성과 차이성, 단일성과 수 일반'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명예와 불명예, 선과 악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명예와 불명예, 선과 악을 파악하는 특수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은 그 자신을 도구로 삼아서 어떤 일을 관조하고, 육체가 갖춘 능력을 통해서는 다른 일을 관조한다.'우리는 촉각으로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지각하지만,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있다거나 반대되는 성질이라고 판단하는 역할은 바로 정신이 담당한다. 정신만이 존재를 파악하며,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감각만으로 사물을 인식하지 못한느 까닭은 감각만으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므로 지식은 인상이 아니라 반성 속에 존재하며, 지각이 지식은 아닌 까닭은 '지각이 존재를 파악할 때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진리를 파악할 때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기'때문이다.


20)지식과 지각을 동일시하는 입장에 맞선 논증에서 거부해야 했던 주장 가운데서 수용할 만한 점을 풀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플라톤이 논의한 서로 연관된 세 가지 논제는 다음과 같다225


 (1)지식은 지각이다.

 (2)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2)만물은 흐름의 상태에 있다. 226

-->지각은 선택이다. 사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다르다. 이 선택을 지각이라고 한다. 위 논리라면,'지식은 계속 변한다(흐른다)'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철학자의 저술을 읽고 이해할 때,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읽고 이해할 때는 두 가지 방식으로, 곧 이전 철학자들과 관련짓거나 이후 철학자들과 관련지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점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후자의 측면에서는 단점이 두드러지낟.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점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후대 철학자들이 책임이 더 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사상을 꽃피운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성장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필적할 만한 철학자가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2000년이 걸렸다. 이 긴 시기가 끝날 무렵,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만큼이나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무소불위의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진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 요소였다. 17세기가 시작된 이래 지성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거의 모든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논리학의 경우 이런 경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선대 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가(아마 데코크리토스를 제외하면) 동등한 권위를 얻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앙의 수준이 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공정하게 다루려면 애초부터 과도하게 추앙된 사후의 명성뿐만 아니라 그 반동으로 나타난 과도한 비난도 잊어야 한다. 234


플라톤에게 스며들었던 오르페우스교의 요소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희석되어 상식이라는 강력한 요소와 혼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색채를 나타내는 곳에서는, 누구나 그가 받은 가르침으로 인해 타고난 기질이 압도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열에 좌우되지 않는, 뜻을 더 깊이 새겨보자면 종교에 기울지 않은 인물이다. 선대 철학자들이 범한 오류는 청년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범하기 쉬운 영광스러운 오류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범한 오류는 습관이 형성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기 없는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그는 상세한 서술이나 비판의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기초의 명확성이나 티탄의 광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어떤 논점에서 설명할지 결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가장 설명하기 좋은 지점은 아마 플라톤의 이상 이론을 비판하고 보편자 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이상 이론에 반대하는 매우 뛰어난 논증을 많이 내놓는데, 대부분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이미 나와 있다. 가장 강력한 논증은 '제3인간'논증으로 다음과 같다. 만약 한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면, 보통 사람들과 이상적인인간을 유사하게 만드는 한층 더 이상적인 인간이 존재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동물인데, 이상적인 인간이 이상적인 동물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이상저긴 인간이 이상적인 동물이라면, 동물들의 종들만큼 많은 이상적인 동물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연구할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점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러 개발자에게 한 가지 술어를 적용하는 일은 개별자들과 같은 종류에 속한 무엇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적인 무엇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점은 대체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제시한 학설은 조금도 명료하지 않다. 바로 이러한 명료성의 부족 탓으로 중세에 유명론자들과 실재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236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난해하다. 근대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는 변화의 원인이란 먼저 일어난 변화여야 하며, 우주가 일찍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면 영원히 그렇게 정지되었을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테레레스가 말한 의도를 이해하려면 그가 말한 원인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원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각각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라 불렀다. 조각상을 조각하는 사람의 예을 다시 들어보자. 조각상의 질료인은 대리석이고, 형상인은 제작될 조각상의 본질이며 , 작용인은 대리석을 끌로 쪼는 행동이고, 목적인은 조각가가 마음에 떠올린 목적이다. 현대의 용어법에 따르면 '원인'이라는 말은 작용인에 한정될 것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목적인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부동의 원동자는 변화가 향하는 목적을 제공하며, 변화는 본질적으로 신과 닮아가는 진화로 나타난다.


앞에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질적으로 종교심이 깊지 않다고 말했지만, 단지 일부만 맞는 말이다. 아마 그가 가진 종교심의 한 측면을 다음과 같이 조금 자유롭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신은 영원히 순수 사유로서 행복, 즉 완전한 자기충족의 상태에 있어 실현되지 않은 목적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이와 반대로 감각 세계는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생명, 불완전한 욕망, 불완전한 사유에서 비롯된 염원을 드러낸다. 모든 생물은 정도가 크든 작든 신을 의식하기에, 신에 대한 염원과 사랑으로 활동하며 신을 향해 움직이다. 따라서 신은 모든 활동의 목적인이다. 변화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할 때 일어나지만, 감각 사물이 관련되 경우 질료라는 기체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신만이 질료 없는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세계는 등급이 더 높은 형상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신과 더 많이 닮은 단계로 계속 진보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완성되지 못하는 까닭은 질료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탓이다. 이것이 진보와 진화의 종교인데, 바로 신의 정적인 완전성static perfection은 유한한 존재들이 신을 느끼는 사랑을 통해서만 세계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수학에 기울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 기울었다. 244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가운데 윤리학 관련 저술 셋이 한자리를 차지하지만, 세 가운데 둘은 일반적으로 지금은 제자들의 저술로 여긴다. 셋째 저술,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대부분 출처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만, 이 저술에 대해서도 일부(5,6,7권)는 제자들이 쓴 작품 가운데 한 작품의 내용을 짜 넣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는 무시하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전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제시한 견해는 주로 당시 교양 있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된 의견을 대표한다. 그의 견해는 플라톤과는 달리 신비 종교가 스며들어 있지 않으며, [국가]의 재산과 가족에 대한 논의에서 나타난 정통에서 벗어난 이론을 장려하지도 않는다.[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예의바름의 정도가 떨어지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은 사람들, 곧 품행이 바른 시민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보게 될 터이다. 그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다. [윤리학]은 품행이 건실한 중년층의 호감을 사며, 특히 17세기 이래 젊은이의 열정과 열광을 억압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 책은 아마 깊은 데서 우러난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248


그러니까 아내, 어린이, 신하는 남편, 부모, 군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정도보다 더 많이 남편, 부모, 군주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결혼 관계에서 '남자는 그의 가치에 따라 남자가 해야 하는 일들을 지배해야 하지만, 여자에게 어울리는 일들은 아내에게 맡겨야 한다' 남편은 아내의 영역까지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아내는 이따금 상속녀일 경우에 일어나듯 남편의 영역을 지배하려 해서도 안 된다.


21)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가장 훌륭한 개인은 그리스도교의 성인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다. 가장 훌륭한 개인은 적당한 긍지를 지녀야 하며 자신의 공적을 낮추어 평가해서도 안 된다. 또 경멸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든지 경멸해야 한다. 긍지에 찬proud, 또는 대범한magnanimous 사람에 대한 서술은 이교도 윤리와 그리스도교 윤리의 차이, 니체가 그리스도교를 노예 도덕으로 평가한 의미의 정당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대범한 사람은 큰 일을 할 만하기 때문에 최고로 선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층 더 유능한 사람은 한층 더 뛰어난 일에 알맞고, 가장 훌륭한 사람은 가장 큰 일에 알맞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대범한 사람은 틀림없이 선하다. 온갖 덕을 탁월하게 지녔다는 점이 대범한 사람의 특징인 듯이 보인다. 또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 팔을 휘저으며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일은 대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터이다. 아무도 자기보다 위대하지 않은데 무슨 목적으로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겠는가?....그렇다면 대범함은 덕들을 빛게 하는 일종의 왕관이 듯하다. 왜냐하면 대범한은 덕들을 한층 더 위대하게 하며, 덕들이 없다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대범해지기 힘든 까닭은 성격이 고귀하고 선하지 않으면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252

-->'대범한 사람은 틀림없이 선하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재벌 총수들은 대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선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인 덕은 목적이지만 실천적인 덕은 수단일 뿐이라고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자는 유덕한 행동의 결과는 대개 선하지만 유덕한 행동 자체만큼 선하지 않으며, 유덕한 행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쾌락이 선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덕을 단지 수단으로 여길 따름이다. 선이 곧 덕이라는 정의를 제외하면, 선에 대해 내리는 다른 정의가 무엇이든 덕이란 덕이 아닌 다른 선을 위한 수단이게 되는 동일한 결과에 이르게 마련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에 대해 이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의 으뜸 과제는 선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일이며, 덕은 선을 산출하려는 행위로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지만 대개 동조하는 입장이다.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한 윤리 문제를 하나 더 제기한다ㅏ. 올바른 행위가 목표로 삼은 선이 사회 전체 또는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에 선한 것이라면, 이러한 사회적 선은 개인들이 누리는 선의 총합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부분이 아닌 전체에 속한 무엇인가? 이 문제는 인간의 육체와 유비하여 설명되기도 한다. 쾌락은 대부분 육체의 각 부분과 관련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쾌락이 어떤 사람 전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코 하나만 가지고 그 냄새를 즐길 수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와 사회를 유비시켜 잘 조직된 사회에도 전체에는 속하지만 부분에는 속하지 않는 탁월한 장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형이상학자들이라면, 헤겔처럼 선한 성질은 무엇이든 우주 전체의 속성이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개인이 아닌 국가에 선한 속성을 부여하게 되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더 적어진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분리된 개개의 성원에게 부여하기 어려운 다양한 속성을 국가ㅏ에 부여하기도 한다. 예컨대 인구밀도가 높다, 거대하다., 강하다 같은 술어를 국가에 부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고찰한 견해는 윤리적 속성들을 국가와 같은 집합에 부여하며, 파생된 의미로만 개인에게 적용할 따름이다. 개인은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나 조흔 국가에 소속될 수도 있지만, 개인에게 인구 밀도가 높다거나 좋은 국가에 쓰인 '좋다'는 술어를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256


22)다음에는 스콜라 척할의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에 크게 영향을 미친, 장사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사물의 쓰임은 두 가지로, 하나는 적합한 쓰임이고 다른 하나는 부적합한 쓰임이다. 예컨대 신발은 신어 닳게 되면 적합하게 쓰인 것이고, 팔리게 되면 부적합하게 쓰인 것이다. 여기에서 신발을 팔아 생계를 꾸려야만 하는 구두장이는 품의를 잃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소매업은 부를 얻는 자연스런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부를 얻는 자연스런 방법은 집과 토지를 요령껏 관리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얻게 되는 부에는 한계가 있지만, 장사로 얻게 되는 부에는 한계가 없다. 장사는 돈money과 관계가 있지만, 부는 주화를 획득하는 일과 관련이 없다. 장사로 얻은 부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혐오해야 한다. '돈에 상응하는 물건이 아니라 돈 자체에서 이득을 얻는 고리대금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으며 혐오할 만한 근거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돈이란 교환을 위한 수단이지 아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를 얻는 모든 방법 가운데 고리대금이 제일 부자연스러운 방법이다.

-->땀흘려 벌지 않은 돈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그랬다. 지금은 돈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이 당연하다. 


이러한 아리스토테레스의 공식 의견에서 기인하는 결론을 토니의 [종교와 자본주의의 출현]에서 읽어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토니의 역사 서술은 신빙성을 지닌 반면, 그의 논평은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를 지지하기 때문에 편견을 드러내기도 한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출현]에서 말하는 '고리대금'이란 오늘날처럼 터무니없는 이율로 돈을 빌려주는 사업뿐만 아니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가지 인류, 다시 말하면 적어도 경제를 발전시킨 인류는 채무자와 채권자로 나뉘었다. 채무자는 이자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고, 채권자는 이자에 찬성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지주는 채무자가 되었던 반면,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채권자가 되었다. 266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 모든 그리스인은 백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은 백인이다' 이 삼단논법은 그리스인들이 존재하면 타당하고 그렇지 않으면 타당하지 않다. 만약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모든 황금산은 산이다. 모든 황금산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어떤 산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어떤 점에서 내가 제시한 전제들이 참이라고 해도, 내가 내린 결론은 거짓일 것이다. 만약 명백학 표현해야 한다면,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라는 한 진술을  두 진술로 나누어, 한 진술은 '그리스인들이 존재한ㄷ'고 말하고 다른 진술은 '만약 무엇이든 그리스인이라면, 그것ㅇ든 인간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중에 한 진술은 순수하게 가설적인 진술로서 그리스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진술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형식에 속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어가 되지만, '모든 그리스인은 인간이다'에서 '모든 그리스인'이 주어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리스인들이 존재한다'는 진술이나 '만약 무엇이든 그리스인이라면, 그것은 인간이다'라는 진술에서 '모든 그리스인'에 관해 아무 언급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오류가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나타난 오류의 근원이었다. 두 명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 관한 우리의 인식 상태를 고찰해보자. 우리는 대부분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명제가 진리라는 사실을 알려면 증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증언이 믿을 만한 것이 되려면, 소크라테스르 ㄹ알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각된 한 가지 사실, 즉 소크라테스의 시신은 그 시신이 소크라테스로 불렸다는 지식과 더불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소크라테스의 성질을 충분히 확신시켜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에 이르게 되면, 문제는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이런 일반 명제들을 어떻게 아느냐는 문제는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때때로 일반 명제들은 단지 언어의 문제일 뿐이다. 279


23)원근법은 아가타르코스Agatharcos라는 기하학자가 아이스칼로스의 연극 상연에 필요한 무대 도면을 그리기 위해 처음 연구했다고 한다. 바다에 떠 있는 배까지의 거리를 알아내는 문제도 탈레스가 연구했다고 전해지며, 초기 단계에 정학히 해결되었다. 그리스 기하학자들을 사로잡은 굉장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정육면체를 두 배로 만드는 문제로, 어떤 신전의 사제들이 받은 신탁에서 유래하는데, 신탁에 따르면 신이 이전에 만든 것보다 두 배가 되는 신상을 원했다. 처음에 사제들은 신상의 모든 면을 두 배로 만들면 되겠다고 간단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면 원래의 신상보다 여덟 배가 커지며, 비용도 신이 요구한 거소다 훨씬 더 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플라톤에게 대표단을 보내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누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는지 물었다. 기하학자들이 그 문제를 맡아 여러 세기 동안 연구를 거듭하면서 부수적으로 경탄할 만한 성과물이 만힝 나오게 되었다. 그 문제란 물론 2의 세제곱근을 구하는 문제이다.

-->커다란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우주개발에서 많은 발명품이 나왔듯이. 


2의 제곱근은 최초로 발견된 무리수로서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알려졌으며, 그것의 근사치를 구하는 기발한 방법들도 찾아냈다. 가장 독창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각 항의 수를 a와 b라 부르는 두 수열을 만든다. 각 수열의 첫째 항은 1시작한다. 각 단계에서 다음 a는 전항의 a와 b를 더해서 만들며, 다음 b는 이전 b에 이전 a를 두 번 더해서 만든다. 그렇게 얻은 처음 여섯 쌍은 (1, 1), (2, 3), (5, 7),(12, 17),(70, 99)이다. 각 쌍에서 2a제곱 - b제곱은 1이거나 -1읻. 따라서 b/a는 거의 2의 제곱근에 가까우며, 새로 만들어진 각 단계에서 b/a는 2의 제곱근에 더 가까워진다. 예컨대 독자들은 99/70의 제곱이 2와 거의 같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도 있다.


피타고라스는 늘 정체가 조금 분명치 않은 인물로 여겨지지만, 프로클로스는 그를 기하학을 교양교육으로 확립한 첫 인물로 묘사한다. 토마스 히스 경을 비롯한 많은 권위자들은 아마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했으리라고 믿는데, 그 정리에 따르면 직각삼각형에서 직각과 마주하는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 294


 알렉산드로스의 짧은 생애로 그리스 세계가 급변했다. 기원전 334년부터 324년까지 10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사마르칸트, 박트리아, 펀자브 지역을 정복했다. 가장 큰 나라로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은 세 차례 전투 끝에 멸망했다. 이로써 고대부터 전승된 바빌로니아인들의 지식과 고대의 미신이 호기심 많으 그리스인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을 비롯하여 정도는 덜하지만 불교가 최고 지위를 차지한 인도의 갖가지 종교에도 익숙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침입한 곳이라면 어디나, 아프가니스탄의 산 속이든 작사르테스 강의 기슭이든 인더스 강의 지류이든 그리스 도시가 들어섰으며, 자치정부의 법령과 더불어 그리스 제도를 재현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군대가 대부분 마케도니아인으로 구성되고, 유럽의 그리스인들이 거의 마지못해 그에게 복종했다 하더라도,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에는 그리스 문화으 사도로 자처했다. 하지만 점차 정복 지역을 확장하게 되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우호적인 제휴를 촉진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러한 정책을 펼치게 된 동기는 다양했다. 한편으로는 규모가 크지 않은 자신의 군대가 거대한 제국을 단지 무력으로 영구히 장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점령지 주민들의 회유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동양은 신선한 왕이 지배하는 정치를 제외한 정치 형태에 익숙하지 않았으며,알렉산드로는 자신이 신성한 왕의 역할을 수행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신이라 믿었는지, 아니면 정책을 위한 동기로 신성을 부여했는지는 역사상 증거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심리학자가 대답할 문제이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는 분명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후계자로 대우받거나 페르시아에서 대왕으로 대우받던 아첨의 순간을 즐겼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동지들'이라 부르던 명장들은 서방 귀족들이 입헌 군주와 상대하던 태도로 알렉산드로스를 대했다. 그들은 그의 앞에 꿇어 엎드리려 하지 않고 생명이 위험을 무릎쓰더라도 증거를 들이대며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갠지스 강 지역을 정복하려 행군하지 않고 인더스 강에서 고향으로 회군하게 했다. 305


 그는 욕망에서 해방됨으로써 덕과 도덕적 자유를 얻으려 했다. 행운이 따라야 얻게 되는 좋은 것들에 냉담해져라. 그러면 두려움을 떨치고 해방되리라. 스토아 학파는 이 점에 관해서 디오게네스의 학설을 채택했지만, 문명의 혜택을 거부한 면까지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프로메테우스가 오늘날 인간의 삶을 복잡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든 불의 사용 기술을 인간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처벌받아 마땅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는 도가들이나 루소와 톨스토이와 닮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일관된 태도를 지녔다.


디오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제시한 학설에서 풍기는 기질은 헬레니즘 시대에 속했다. 이라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밝게 바라본, 그리스의 마지막 철학자이다. 이후 철학자들느 모두 이런저런 형태로 은둔 철학을 내놓았다. 세상은 악하니 세상의 의존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외부의 좋은 것들은 위태로운 행운의 선물로서 우리 자신이 노력한 끝에 얻는 보상은 아니다. 주관의 노력으로 성취한 좋은 것들, 즉 덕이나 체념하여 얻은 만족은 잃어버릴 염려가 없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의 가치만 인정할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활기가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학설은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학설과 마찬가지로 실망감 때문에 자연스런 열정마저 잃어버린, 기진맥진한 사람들에게나 호소력을 갖는 학설이었다. 도 강력한 악의 세력에 맞서 저항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예술이ㅏ 과학이나 정치적 수완이나 어떤 다른 유용한 활동도 증진할 만한 학설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키니코스 학파가 대중의 인기를 끌었을 무렵 가르친 학설에 주목하면 흥미롭다. 기원전 3세기 초 키니코스 학파가 한창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했다. 키니코스 학파는 작은 훈계 책자를 발간하여, 물질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간소한 음식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값비싼 옷을 걸치지 않았도 겨울에 얼마나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지(이집트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본국에 애착을 느끼거나 누구의 아이나 친구가 죽었다고 해서 애도하는 일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가르쳤다. 이렇게 대중화도니 키니코스 학파의 학도인 탈레스Teles는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이나 아내가 죽었다고 하여 이것이 아직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내 재산을 살피지 않을 이유가 된단 말인가.'322


 그는 카르네아데스가 지지한 개연성 학설을 저버리고 초기 회의주의로 되돌아갔다. 그의 영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서기 2세기에 풍자시인 루시안이 아이네시데모스를 추종햇고, 바로 뒤이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도 추종자가 되는데, 그는 후대에 저작을 남긴 유일한 고대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예컨대[신에 대한 믿음에 반대하는 논증]이란 짧은 논문이 잇는데, 에드위 베번이 [후기 그리스 종교]52 ~ 56쪽에 번역해놓았는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마도 클리토마쿠스가 전한 카르네아데스에게서 회의주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라 한다.


이 논문은 행동의 차원에서 회즤주의자들도 전통을 따른다고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우리 회의주의자들은 실천할 경우에는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만 세상에 관해 어떤 의견도 주장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신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신들을 숭배하며 신들이 섭리대로 행한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말할 때도 믿지 않고 독단주의자들의 무모한 확신을 피하려 할 따름이다. '


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본성이 각양각색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신이 형체가 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형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에 대해 아무 경험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신의 속성도 알 리가 없다. 신의 존재는 자명한 사실이 아니므로, 증명이 필요하다. 이러한 증명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조금 혼란스러운 논증도 제시한다. 다음으로 악의 문제를 다루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신이 존재한다고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사람들은 불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만약 그들이 신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말하면 신을 악의 창조자로 만들어버리게 되고, 만약 신이 일부 사물만 지배한다거나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신을 인색하거나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밖에 없으니, 이렇든 저렇든 명백한 불경을 저지르는 짓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서기 3세기 무렵까지는 교양을 갖춘 몇몇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끌었지만, 점점 더 독단적인 종교와 구원의 교리로 기울어지던 시대의 추세와 반대되는 경향이었다. 회의주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게할 만한 힘은 지녔으나, 순수하게 지적인 영역에서도 국가 종교를 대신할 만한 적극적인 요소는 하나도 제공하지 못했다. 330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철학을 완전하게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데모크리토스의 덕을 많이 입지만, 그가 '연체동물 ㄱㅌ은 인간'이라고 넌지시 말하기도 했던 나우시파네스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11년 처음 미틸레네에서 학파를 세운 다음, 람프사코스에 이어, 307년 이후 아테네에서 학파를 세웠고, 기원전 271년 또는 270년에 아테네에서 죽었다. 에피쿠로스는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아테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하게 되며, 단지 건강이 나빠서 고생했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집 한채와 분명히 집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원이 하나 있었고, 그 정원에서 가르쳤다. 처음에 학파의 회원은 에피쿠로스의 형제 세 사람을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테네에서 철학을 배우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그들의 자식들, 노예들, 헤타이라hetaera들이 들어오면서 공동체의 규모가 커졌다. 에피쿠로스의 적들이 헤타이라들의 입회를 빌미로 이따금 추문을 퍼뜨렸는데, 분명히 공평치 않은 처사였다. 에피쿠로스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맺는 아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공동체에 소속된 회원들의 어린아이들에게도 상냥하고 유쾌한 편지를 쓰곤했다. 그는 감정을 표현할 때 고대 철학자들이 나타내리라 예상되는 점잔 빼는 행동과 자제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의 편지들은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었다.


24)에피쿠로스 학파의 공동체 생활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했는데, 한편으로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론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음식은 대체로 빵과 물이었는데, 에피쿠로스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나는 빵과 물로 살 때 몸이 쾌락으로 충만하며, 내가 사치스러운 쾌락에 침을 뱉는 까닭은 사치스러운 쾌락 자체가 나쁜 탓이 아니라 그것에 뒤다르는 불편한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공동체는 재정이 측면에서 적어도 일부는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여 유지되었다. 그는 '저장용 치즈를 조금 보내주게. 좋은 때 연회를 열려고 하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썼다.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네와 자식들의 위해 우리 성스러운 공동체의 살림에 필요한 물자를 보내주게'라고 썼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다. '내가 바라는 기부금은 제자들이 북풍 넘어 상춘국常春國에 사는 주민Hyperborean들이라도 내게 보내기로 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여러분 각자에게 해마다 220드라크마를 받을 뿐 그 이상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네'라고 썼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라는 생각만 하지, '어떻게 하면 돈을 안쓸까?'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질문이 필요하다. 


에피쿠로스는 한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시달렸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법을 터득했다. 인간이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스토아 학파가 아니라 바로 에피쿠로스였다. 에피쿠로스에게 이렇게 주장할 만한 권리가 있다느 사실을 보여주는 편지가 두 장 전해지는데, 하나는 죽기 며칠 전에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한 당일에 쓴 것이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편지를 쓰기 7일 전 몸의 기능장애가 극에 달해 사람이 임종의 날에나 당할 만한 고통을 겪었다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메트로도로스의 아이들을 4, 5년 돌바주게. 그러나 지금 자네가 나에게 보내주는 비용 이상을 지불할 필요는 없네'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일생에서 참으로 행복한 오늘,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다네. 내 방광 질환과 위장 질환이 진행되어 평소에 느끼던 격렬한 고통이 이어지고 있다네. 그러나 이 모든 증세와 반대로 자네와 내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게 아닌가. 어릴 적부터 철학과 나에게 자네가 보여준 헌신에 비추어보면 자네가 메트로도로스의 아이들을 잘 돌봐주리라 기대해도 되겠지.' 에피쿠로스는 유언에 다라 그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대체로 신사답고 친절했지만, 철학자들 중 특히 사상적으로 신세를 졌다고 생각되기도 하는 철학자들과 맻는 관계에서 성격의 다른 면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평니나 늘어놓는 자들은 내가 연체동물 같은 인간(나우시파네스)의 제자이며, 술을 좋아하는 몇몇 젊은이들과 어울려 그의 학설에 귀를 기울였다고 믿으려 한다. 335


철학은 그가 이해한 대로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계획된 실천 체계였다. 그래서 철학에는 상식이 필요할 뿐, 논리학이나 수학이나 플라톤이 규정한 정교한 훈련은 조금도  필요치 않다. 에피쿠로스는 젊은 제자이자 친구인 피토클레스에게 '어떤 형태의 문화이든 다 피하라'고 열심히 권고한ㄷ. 이러한 권고는 어떤 사람이 권력을 성취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부러워하고 해치려 드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는 법이니 공적인 생활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 에피쿠로스의 원칙에서 귀결된 당연한 결론이었다. 설령 그라 외부로 드러나는 불행을 피한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현자는 적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가려 할 것이다.


25)성적인 사라은 가장 동적인 쾌락 가운데 하나로 당연히 금지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성교는 결코 이간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며, 성교가 인간을 해치지 않았다면 운이 좋은 셈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는 아이들(남의 자식들)을 좋아했는데, 이러한 취향을 즐기고, 기쁨을 맛보기 위해 자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은 타인들에게 의존했던 듯하다. 사실 그가 더 훌륭한 판단을 위배하면서 아이드을 좋아했던 듯이 보이는 까닭은, 결혼과 자식이란 훨씬 더 진지한 탐구 생활에 방해가 될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비난하며 에피쿠로스를 추종한 루크레티우스는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성교에 해악이라곤 전혀 없다고 본다.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그 에너지를 자아를 완성하는데 쓸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만, 어렵다. 


에피쿠로스의 의견에 따르면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쾌락 가운데 제일 안전한 것은 우정이다. 에피쿠로스는 벤담처럼 인간은 모두 언제나 때로는 현명하게 때로는 현명치 않게 오로지 자기 자신의 쾌락을 추구할 따름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는 또 벤담과 마찬가지로 본성이 친절하고 애정이 넘쳐서,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당연히 해서는 안 되지만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친구들과 분명히 사심 없는 우정을 나누었지만, 자신의 철학에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만큼 자신도 이기적인 존재라 확신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쾌락과 떼어놓을 수가 없고, 우정이 없이는 안정된 삶으 살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살지도 못하며 심지어 유쾌하게 살 수도 없기 때문에 우정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37


스토아 철학은 에피쿠로스 철학과 같은 시대에 출현하지만, 역사가 더 길고 학설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성향은 더 약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가르침은 서기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르침과 전혀 달랐다. 제논Zenon, 기원전 335경 ~ 263경은 유물론자로서 주로 키니코스학파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을 결합한 학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점차 플라톤 철학과 혼합되면서 유뮬론을 포기하고, 종국에는 유뮬론의 흔적이 거의 사라져 조금밖에 남지 ㅇ낳았다. 사실 그들의 윤리 학설은 약간 바뀌었고, 대부분은 윤리 학설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렇지만 이 점에서도 어느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생긴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토아 철학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계속 줄어들고, 윤리학이나 윤리학과 가장 관련이 깊은 신학의 일면들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경우가 계속 늘어났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에 관해서는 모두 저작들이 단편 몇 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연구에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서기 1, 2세기의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온전하 책을 후대에 남겼다. 346


세네카는 네로 황제를 제자로 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보다 운이 더 나빴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표면상 부를 경멸했지만,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3억 세스테르티우스(약 3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전한다. 재산은 대부분 영국에 돈을 빌려주어 벌었다. 디오Dio에 따르면, 세네카가 가차없이 거둔 과도하게 비산 이자가 영국에서 일어난 반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며, 영웅의 풍모를 보여준 보아디케아 여왕은 금욕을 가르친 철학의 사도가 대표한 자본주의에 맞서 반란을 지휘하고 있었던 셈이다.


네로의 난폭한 행동이 더욱 심해지면서 세네카는 점점 더 총애를 잃게 되엇다. 드디어 정당한든 부당하든 세네카는 네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는 큰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어떤 사람은 새 황제가 세네카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네로는 세네카의 이전 공직 수행을 참작해 자비를 베풀어 세네카에게 자살해도 좋다고 허락했다(서기 65년)


세네카의 최후는 교훈이 되고도 남았다. 처음에 네로 황제의 결정을 통보받고, 유언장을 작성하려 했다. 유언장을 작성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듣자, 그는 슬퍼하는 가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지상의 부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 덕이 높은 삶의 본보기를 남긴다.' 또는 그런 뜻으로 말을 했다. 다음에 그는 혈관을 끊고 비서를 불러 유언을 받아 적게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네카의 웅변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조카이자 시인이었던 루카누스도 동시에 비슷하게 죽음을 당했는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시를 읊었다고 한다. 세네카는 후대에 얼마간 의혹을 불러일으킨 행적이 아니라 감탄을 자아내는 교훈들로 평가를 받았다. 몇몇 교부들은 세네카가 그리스도교도라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 같은 사람들은 그가 성 바울로와 서신 왕래를 했다는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에픽테토스Epiktetos 서기 60경 ~ 100경는 철학자에 아주 가깝지만 색다른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인으로 원래는 에파프로디투스의 노예였다가 네로의 자유민이 되어 행정장관까지 지냈다. 그는 절름발이였는데, 당시 노예에게 내리던 잔혹한 형벌탓이라고 한다. 그는 토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식인들을 쓸모가 없다면서 철학자들을 모두 추방한 서기 90년까지 로마에서 살며 가르쳤다. 356


현실의 악이 에픽테토스의 포부를 한껏 펼치게 한 결과, 현실 세계가 기원전 5세기 아테네보다 열등한 만큼 그의 이상 세계는 플라톤의 이상 세계보다 우월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할아버지, 아버지, 양아버지, 여러 생님들과 신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가 나열한 은혜 가운데 이상해 보이는 항목도 몇 가지 있다. 그는 디오그네투스에게 기적을 행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배웠고, 루스티쿠스에게 시를 쓰지 말라고 배웠으며, 섹스투스에게 꾸밈없는 침착한 태도를 배웠고, 문법학자 알렉산드로스에게 다른 사람들의 문법 실수를 고치지 말고 나중에 바른 표현을 사용하라고 배웠다. 플라톤주의자 알렉산드로스에게 편지의 회답이 늦어졌을 경우 일이 바빴다는 구실로 핑계를 대지 말라고 배웠고, 양아버지에게 소년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배웠다. 그는 이어 조부의 소실과 오랜 기간 살며 양육되지 않은 것, 남자의 생식력을 너무 이른 시기에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 자식들이 아둔하지 않고 불구가 아닌 것, 아내가 온순하고 정답고 검소한 것, 철학을 하게 되었을 때 역사나 삼단 논법이나 천문학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은 신들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명상록]에서 개인의 삶과 상관없는 견해는 에픽테토스와 아주 흡사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영혼의 불멸에 의혹을 품으면서도 그리스도교도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바로 이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 매 순간 행동과 사고를 바르게 하라' 삶은 우주와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선하며, 우주와 조화를 이룬 삶은 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삶과 같다.


'만물은 당신, 오, 우주와 일치된 나와 조화를 이룹니다. 당신을 위한 예정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일들 가운데 아무것도 저에게는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습니다. 만물은 당신의 계절이 제게 가져오는 열매입니다. 오, 자연이여 만물이 당신에게서 나오고, 당신 안에 존재하고, 당신에게 돌아갑니다. 그 시인은 케크롭스Cecrops의 그리운 도시를 노래하니, 당신은 제우스의 그리운 도시를 노래하지 않으렵니까?'363


사실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을 때까지(기원전 30년)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스페인은 한니발과 맞선 전쟁 때 일어난 사변 때문에 정복당했다. 프랑스는 카이사르C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 ~ 44가 기원전 1세기 중욥에 정복하고, 약 100년 후 영국도 정복했다. 전성기 로마 제국의 변경은 유럽의 라인 강과 , 도나우 강, 아사아의 유프라테스 강, 북아프리카의 사막까지 이르렀다.


로마 제국주의는 십중팔구 북아프리카(교회사에서 성 키프리아누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으롷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에서 가장 번성했다. 로마 시대 이전과 이후에는 개간하지 않은 북아프리카의 광대한 구역이 비옥했기 때문에 인구가 조밀한 도시들에 식량을 공급해 부양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의 즉위(기원전 30)부터 3세기 대재난의 시기 전까지 200년 이상 전반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유지했다.


26)그동안 로마 국가의 정치 체계는 중요한 발전을 이룩했다. 로마는 원래 작은 도식국가로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특히 스파르타처럼 외국 무역에 의존하지 않았다. 로마의 왕위는 호메로스가 그린 그리스의 왕들처럼 귀족 공화정에 의거하여 계승되었다. 점차 원로원으로 구현된 귀족주의적 요소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 반면, 민주주의적 요소도 추가되었다. 스토아 찰학자 파나이티오스(그의 견해를 풀리비오스와 키케로가 물려받는다)는 그 결과로 이룬 타협을 군주정치와 귀족정치, 민주정치의 이상적 결합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정복 사업이 불안한 평형상태를 깨뜨렸다. 정복 사업은 원로원 계급을 비롯하여, 정도는 약간 덜하지만 상류 중간 계급이라 부르는 '기사 계급the knights'에게 막대한 부를 새롭게 가져다 주었다. 자신과 가족의 노동으로 곡식을 재배하는 소농들의 손에 맡겨졌던 이탈리아의 경작지는 로마 귀족 계급이 거대 부동산의 한 부분으로 소유하게 되었고, 이제 이곳에서는 노예 노동으로 포도와 올리브를 경작했다. 그 결과 원로원이 사실상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었지만, 수치스럽게도 그 힘을 국가의 이익이나 백성들의 복지와 무관한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했을 따름이다. 370

-->로마의 정복 사업은 현 대기업이 상당 부분 외국에서 매출을 올리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역사가인 폴리비오스polybos, 기원전 200경 ~ 118경는 기원전 200년경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났으며, 죄수로서 로마에 압송되엇다가 소小스키피오와 친구가 되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을 만나 여러 번 함께 출정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에 교육 받은 로마인들이 대부분 그리스어를 알기는 했으나 그리스인으로서 라틴어를 알고 있는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폴리비오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와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인들을 위해 로마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후기 포에니 전쟁사를 기록했다. 로마 정치 체계에 대한 찬양은 저수라는 동안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까지 로마 정치 체제는 안정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그리스 여러 도시국가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치 체제와 필적할 만했다. 로마인들은 당연히 그의 역사서를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즐겨 읽었을지는 의심스럽다.


스토아 철학자 파나이티오스Panaitios, 기원전 180 ~ 109경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고찰했다. 판이티오스는 폴리비오스의 친구였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소 스키피오의 정치적 피보호자였다. 파나이티오스는 스키피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주 로마를 방문했으나 스키피오가 죽은 다음에는 스토아 학파의 수장으로서 아테네에 머물렀다. 로마도 그리스인이 잃어버렸던 희망, 즉 정치 활동의 기회를 잡으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파나이티오스의 학설은 초기 스토아 학파의 학설보다 정치에 훨ㅆ니 더 큰 관심을 나타내며, 키니코스 학파의 학설과 닮은 점이 훨씬 적었다. 아마 교육받은 로마인들이 공감한 플라톤 숭배의 영향으로 이전 스토아 철학자들의 독단적 편협성을 포기했을 것이다. 파나이티오스와 그의 후계자 포세이도니오스가 폭이 훨씬 넓은 형태의 학설을 내놓음으로써, 스토아 철학은 로마인들 가운데 훨씬 진지한 성향을 띠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 당겼다.


후일 에픽테토스도 그리스인이면서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는 자신이 들었던 실례들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얻었다. 그는 언제나 현자는 황제 앞에서도 두려움에 덜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는 실례를 들고 있다. 376


스토아 학파는 단지 유물론의 요소 때문에 부정할 따름이고 에피쿠로스 학파의 경우에는 철학 전체를 다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은 프로티노스가 그에게서 차용한 이모저모를 종종 인정하지 않기는 해도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나는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은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플로티노스가 보여주는 플라톤은 실제 플라톤만큼 모든 며에서 완벽하지는 않다. 이상 이론과 [파이돈]과 [국가]6권에 나오는 신비주의 학설과 [향연]의 사랑에 대한 토론이 모두 혼합되어 [엔네아데스Enneades](플로티노스의 저술을 부르는 말)에 나타난 플라톤의 전체 철학을 구성한다. 정치에 대한 관심, 각 덕에 대한 정의 찾기, 수학에서 얻는 즐거움, 개인에 대한 극적이고 완고한 평가, 무엇보다 플라톤의 흥겨운 말잔치 들은 플로티노스에게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플라톤은 칼라일이 말했듯이 '시온 산'에서 아주 편하게 살고', 폴로티노스는 정반대로 늘 최선을 다해 행동한다.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은 일자 the One, 정신 Spirit, 영혼 Soul의 성 삼위일체에서 시작한다.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의 위격들과 달리 동등하지 않다. 일자가 최고 자리에 존재하고, 정신이 다음에 오고, 영혼은 마지막에 자리한다.


일자 the One는 그림자가 여러 개 생기는 조금 어렴풋한 개념이다. 일자는 때로는 신God이라 부르고 대로는 선 자체 the Good라 부른다. 일자는 일자에서 비롯되는 최초의 필연적 결과인 존재 Being를 초월한다. 우리는 일자에 속성을 부여해서는 안 되고, 그저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따름이다.(이 말은 파르메니데스를 떠올린다) 신을 '범신 the All'이라 말하는 것도 잘못일 텐데, 신이란 온갖 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신은 온갖 것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현존한다. 일자는 생성이 없어도 현존할 수가 있다. '일자는 아무데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다. 390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 법이다. 그러나 형벌으 죄를 짓는 자가 저지르는 끊임없는 잘못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우리는 죽은 다음 현세의 삶을 기억할까? 완벽하게 논리적인 답변을 제시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말할 만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는 반면, 지고지선의 참된 삶은 영원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영혼이 영원한 삶을 향해 성장해갈수록 영혼이 기억할 것은 점점 줄어든다. 친구들, 자식들, 아내에 대한 기억은 점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우리는 현세의 사물 가운데 아무것도 알려 들지 않고, 지성계만을 관조하게 된다. 관조적인 통찰 속에서는 당연히 의식되지 않는 개성에 대한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영혼은 정신과 하나가 되어 파멸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정신과 개체의 영혼은 둘인 동시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다루는 [엔네아데스]4집, 7권의 한 절에서 영혼 불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육체는 합성물이므로 분명히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때 육체가 우리의 일부라면, 우리는 결코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영혼과 육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고 말했는데, 폴로티노스는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라면 지성의 활동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거부한다. 스토아 학파는 영혼도 물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혼의 단일성은 스토아 학파의 견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게다가 물질은 수동성을 지니기 때문에 창조를 했을 리 만무하다. 영혼이 물질을 창조하지 않았더라면 물질은 존재했을 리가 없고, 더욱이 영혼이 존재하하지 않았더라면 물질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영혼은 어떤 물체의 질료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지만, 그 물체의 본질Essence이고 본질은 영원하다. 이러한 견해는, 영혼은 이상들이 영원하기 때문에 불멸한다는 플라톤의 논증에 암시되어 있다. 396


세계가 복사복이므로 불가피하게 지닐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에 더해, 그리스 도교도뿐만 아니라 플로티노스에게도 죄에서 비롯되는 더욱 적극적인 악의 문제가 존재한다. 죄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생겨나는 결과인데, 플로티노스는 결정로자의 견해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점성가의 입장에도 반대하려 자유의지를 지지했다. 그는 감히 점성술의 유효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점성술에 한계를 두어 자유의지와 양립할 수 있게 하려했다. 그는 마법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드러내고, 성자란 마법사의 능력을 없앤 자라고 말한다. 포르피리오스는, 경쟁 관계에 있던 한 철학자가 플로티노스에게 악마의 저주를 걸려고 애썼으나 플로티노스의 성스러움과 지혜 때문에 악마의 주문이 오히려 경쟁자에게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포르피리오스와 플로티노스의 추종자들은 모두 미신적인 면을 플로티노스보다 훨씬 더 많이 지니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경우 미신적 요소는 당시의 수준에 비해 적게 나타난다. 이제 플로티노스가 가르쳤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주로 수용한 학설에 대해 체계적이고 지적인 학설로서 지니는 장점과 단점을 요약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먼저 플로티노스가 이상과 희망을 간질할 가장 안전한 피난처여야 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노력과 지성적 노력을 둘 다 포함했던 학설을 구성해보기로 하자. 3세기 야만족의 침입 이후 이어진 세기에 서방 문명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신학이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신 활동인 상황 속에서 수용한 체계가 그저 미신에 경도되지 않고, 때로는 깊숙이 묻혀 있지만 그리스의 지성을 대표한 다양한 업적으로 비롯해 스토아 학파나 신플라톤 철학에 공통된 도덕적 헌신을 충실하게 구현한 학설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신학은 스콜라 철학이 출현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으며, 나중에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도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고대 사상가들을 새롭게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400


이 책에서 논의하게 될 기간은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점에서도 이전이나 이후 시대와 확연히 다른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교회 권력이다. 교회는 철학적인 믿음체계와 사회, 정치, 상황이, 400년경부터 1400년경까지 이르는 중세 시대의 이전과 이후보다 훨ㅆ니 더 밀접한 관련을 맺도록 주도했다. 교회는 일부는 철학과 관련이 있고 일부는 성스러운 역사와 관련이 있는 신경信經, creed에 근거하여 형성된 사회제도이다. 교회는 바로 그 신경을 매개로 권력을 쟁취하고 부를 축적했다. 교회와 자주 갈들을 빚던 세속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이 카톨릭 신앙의 진실성을 갚이 확신했기 때문에 교회의 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교회는 로마 전통이나 게르만 전통과 맞서 싸워야 했다. 로마 전통은 이탈리아, 특히 법률가들 사이에서, 게르만 전통은 야만족의 정복으로 발흥한 봉건 귀족 계급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두 전통 가운데 어느 편도 교회에 대적할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전통이 적합한 철학의 힘ㅇ르 빌려 구체화되지 못한 탓이었다.


우리가 관여하는 사상사는 중세 시대를 다룰 경우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치우칠수 밖에 없다. 극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당시 지성계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성직자들이었다. 속인들도 중세 기간 동안 느리기는 하지만 강력한 경제체제와 정치 체제를 형성했으나, 그들의 활동은 어떤 점에서 맹목적인 특징을 드러냈다.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교회문학과 전혀 다른, 중요한 세속문학이 출현했다. 이러한 세속문학은 일반 역사 연구를 통해 철학 사상사에서 요구되는 수준보다 훨씬 더 깊게 연구될 터이다 우리는 단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당대의 교회철학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저술한 속인을 만나게 된다. 성직자들은 14세기까지 사실상 철학을 독점하게 되면서 교회의 관점에서 서술했다. 이 때문에 중세 사상은 교회제도, 특히 교황 체제의 성장에 관한 광범위하면서도 적절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405


'나는 가장 수준 높은 철학적 문제, 말하자면 영감을 받은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는 최상의 통솔자가 될 수 있을지 논의하려 한다. 또 나는 여러분이 이 문제를 다루는 철학에 진심 어린 태도로 진지하게 유의해주기를 바라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철학을 배우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지만, 특히 할례와 안식일 준수, 돼지고기를 비롯한 다른 부정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고수하겠다는 특별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느헤미야 시대부터 서기 70년 이후까지,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새로운 가르침을 들고 나오면 더는 참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예언자들과 같은 문체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니엘이나 솔로몬이나 그 밖에 과오가 없는 고대의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저술한 고서를 발견했다고 거짓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드은 고유한 종교 의식을 통해 한 민족으로 단결하였으나, 율법을 강조함으로써 점차 독창성을 잃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습에 함몰되었다. 이러한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지배력에 맞선 성 바울로의 반발은 더욱 빛이 났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탄생 직전 시대의 유대 문헌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생각하듯 신약성서는 완전히 새로운 근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예언자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단지 들려줄 기회를 얻기 위해 저자의 이름을 숨기는 방법을 채택했을 따름이다. 이 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저술은 [에녹서]로서, 마카베오 가문 시대 직전, 기원전 64년 무렵에 여러 저자가 쓴 합작품이다 [에녹서]는 대부분 족장 에녹의 묵시적 환영을 고백 형태로 기록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로 변하는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에녹서]를 잘 알고 있다. 성 유다는 에녹이 실제로 그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초기 교부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에녹서]를 정경正經으로 취급했으나, 히에로나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에녹서]는 세상에서 잊히고 19세기 초 에티오피아어 필사본 세 편이 아비시니아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행방이 묘연했다. 423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 이전에는 모든 교회를 지배하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형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주교의 권한은 여러 대도시에서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한층 커졌다. 신도들이 바친 헌금은 주교가 관리하기 때문에 주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보류할지도 결정했다. 그래서 주교의 뜻에 기꺼이 따르는 궁핍한 무리가 생겨났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주교들이 사법, 행정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최소한 교리 문제에 관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조직이 생겨났다. 가톨릭교도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다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통거리였다. 그리스도교도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한 콘스탄티누스는 가톨릭교도와 아리우스파 신도들이 통일된 조직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그는 양측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그리스도교회가 참여하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니케아 신경을 이끌어냈으며, 아리우스 논쟁과 관련하여 정통 신앙의 영구적인 표준을 정했다. 후대에 일어난 다른 논쟁들도 전 그리스도 교회의 공의회ecumencial council를 통해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되었으나, 동방과 서방이 분리되고 동방교회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함으로써 공의회를 통한 갈등 해결도 불가능해졌다.


교황은 공식적으로 교회를 대표한 가장 중요한 개인이었으나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회 전체를 지배할 권위를 인정받았다. 교황의 권력이 점점 성장하게 된 과정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 그리스도교의 성장은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한 동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저자들이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곤했다. 437


'로마 세계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네. 그렇게 되고 말겠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죄를 짓고 더 많은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수치스러울 뿐이라네. 명성을 날리던 도시, 로마 제국의 수도가 무시무시한 화재로 사라져버리고, 로마니들이 망명 생활을 하지 않는 땅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교회 건물은 한때 신성한 곳이었으나 이제 먼지와 잿더미로 변해버렸지. 그런데도 우리는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네.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있지. 그러면서도 이승에서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집을 짓는다네. 벽은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친장과 기둥머리도 화려하게 치장을 하지.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 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헐벗고 굶주린 채 죽어간다네.'


27)이 구절은 자신의 딸을 영원히 정결한 처녀로 봉헌하기로 결심한 친구에게 쓴 편지 속에 우연히 등장하는데, 편지는 대부분 하느님께 바친 소녀를 교육할 때 지켜야 할 규칙에 관한 내용이다. 히에로나무스가 고대 세계의 멸망에 대해 온갖 통렬한 감정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처녀성 보존을 훈족과 반달족과 고트족에게 승리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예상 밖의 일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실제 정치에 필요한 가능한 수단을 강구하는 쪽으로 생각을 돌린 적이 없었다. 또 재정 제도나 야만인들로 구성된 군대에 의존하는 군사정책의 좋지 않은 점도 결코 지적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사실 정치가이기는 했으나 교회를 위해 일하는 정치가였을 따름이다.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활약한 당대 지성인들이 세속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의 파멸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한편 로마 제국의 파멸은 불가피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사고방식은 사람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심어주고, 지상의 삶이 헛된 것처럼 보일 때 종교적 소망을 간직하도록 이끄는 데 적합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관점을 드러낸 [신국]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최고 걸작이다. 455

-->흥망성쇠는 관념의 차이다. 


28)자중에 죄는 개인과 더 밀착되어 정치적 특성을 상실했다. 유대 민족을 교회로 대체할 경우 이러한 변화가 더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까닭은, 교회란 영적 존재로서 죄를 지을 수 없지만 개인으로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교회와 교섭을 중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죄는 자만과 관련이 있다. 원래 자만은 유대민족의 자만이었으나, 이후에 교회는 결코 죄를 범한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 신자 개인의 자만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두 분야로 나뉘는데, 하나는 교회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영혼과 관련된다. 후대에 이르러 가톨릭교는 교회를 강조하고 개신교는 개인의 영혼을 강조했으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속에서는 두 분야가 동등하게 조화롭게 공존한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 미리 구원하기로 정해둔 자들이다. 이로써 영혼은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계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로써 교회는 영혼과 신을 중개하는 매개자가 된다.

-->개인의 영혼은 이해가 가는데, 교회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교회에 다니는 개인의 영혼의 모음 아닌가?


죄가 영혼과 신이 맺는 직접적인 관계에 본질적 요소가 되는 까닭은, 자비로운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일 수 있는지, 죄를 지은 영혼이 어떻게 창조된 세계의 만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지 죄가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의조난 신학은 당연히 죄의식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느끼는 사람에게서 ㅂ롯된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


여기까지가 배를 훔친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고백록]에서 말한 다른 주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라틴어를 얼마나 쉽게 배웠는지, 교사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려 애썼던 그리스어는  '가혹한 위협과 체벌로 강요 받았기'때문에 얼마나 싫어했는지 이야기한다. 말년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그리스어 실력은 일천했다. 누군가는 방금 말한 대조적인 두 가지 교육 방법에서 상냥한 교육 방법의 교훈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리라 추측할지도 모른다. 458.


세계는 왜 더 빨리 창조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더 빠른'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창조되는 순간에 시간도 창조되었다.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영원한다. 신 안에서는 이전과 이후가 없기 때문에 현재만 영원히 존재할 따름이다. 신의 영원성은 시간 관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신에게 모든 시간은 동시에 존재한다. 신이 자신의 시간 창조에 앞서 존재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간 창조에 앞서 존재할 경우 신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일 텐데, 사실 신은 시간 흐름 밖에서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정말 감탄이 나올 만큼 상대적인 시간 이론으로 이끌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아무도 물어보지 ㅇ낳으면 알지만, 묻는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모르게 되고 만다' 그는 여러 가지 난점에 부딪혀 당혹스러웠다. 오로지 현재를 제외하고는 과거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는 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시간은 오로지 지나가는 동안 측정될 따름이다. 그런데도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은 실재한다. 여기서 모순에 이르게 디ㅗ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 생각될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과 동일시하고, '미래'는 기대와 동일시할 수밖에 없으며, 기억과 기대는 둘 다 틀림업시 현재에 속한 사실들이다. 그는 세 가지 시간, 곧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현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렁날 일들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현재는 기억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현재는 눈앞에 펼쳐지는 일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의 현재는 기대이다.' 세 가지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한다는 말은 부정확한 어법이다.467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약탈이란 재난을 그리스도교의 탓으로 돌리는 이교도 가운데서도, 로마가 약탈을 당하는 동안 고트족이 그리스도교도이기 때문에 경의를 표하고 침범하지 않는 이곳저곳의 교회로 피신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트로이가 약탈을 당하는 동안, 유노의 신전은 아무도 아무도 보호해주지 못했으며, 이교도의 신들은 도시의 파괴를 막지도 못했다. 로마인들은 정복한 도시 어느 곳에서도 신전을 그대로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에서 로마의 약탈은 다른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약탈보다 참혹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약탈의 정도가 완화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영향 덕분이었다.


약탈로 고통을 당한 그리스도교도 역시 몇 가지 이유로 불평할 권리가 없다. 고트족 가운데 사악한 몇몇 사람은 그리스도교를 희생시킨 대가로 번성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내세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만약 모든 죗값을 지상에서 치르게 되어 있다면, 최후의 심판도 필요 없으리라. 그리스도교가 견디어낸 고난을 통해 유덕한 사람들의 경우 오히려 덕성을 기르게 되는 까닭은 성인들이 세속적인 것을 잃어도 값진 것은 하나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더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까닭은 굶주린 짐승이 육체의 부활을 훼방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로마의 약탈 기간에 능욕당한 독실한 처녀들의 문제를 다룬다. 이 숙녀들은 아무 잘못 없이 처녀성의 왕관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던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인은 아주 지각 있는 태도로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다.'쳇, 다른 사람의 육욕이 당신을 더럽힐 수 있단 말인가' 정결은 마음의 덕이므로 능욕을 당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 비록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있으면 잃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금욕을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해서 신이 능욕을 당하도록 허용했다는 암시를 준다. 능욕을 피하려 자살하는 행위는 사악하다. 이로써 자살이란 언제나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았어야 했던 루크레티아에 대해 길게 논의한다. 470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들이 존재하지만, 악한 천사도 신과 반대되는 본질을 지니지 못한다. 신의 적대자들은 본성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신을 적대하게 된다.악한 의지는 결과를 낳는 원인이 아니라 결핍을 일으키는 원인일 뿐이다. 다시 말해 악한 의지는 결과를 산출하는 힘이 아니라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나이는 6천 살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는 몇몇 철학자들이 가정하듯 주기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예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던 한 번 죽으셨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테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손들도 모두 죽게 된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자연에 따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 곧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천국의 성인들에게 몸이 없다는 포르피리오스의 주장은 틀렸다. 성인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지녔던 몸보다 더 나은 몸을 갖게 마련이다. 성인의 육체는 영적인 특징으 갖지만 영혼은 아니며, 무게도 나가지 않는다. 남자는 남성의 몸을, 여자는 여성의 몸을, 어려서 죽은 아이는 어른의 몸을 갖게 마련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인류가 영원한 죽음(곧 파멸)에 이르고 말았겠지만, 신의 은총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죽음을 면했다. 죄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 학파 철학자들과 마니교도들은 둘 다 죄를 육신의 본성으로 돌리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플라톤 학파 철학자들느 마니교도들만큼 해롭지 않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받은 형벌은 옳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가 영적인 특성을 지닐 수도 있었는데,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이 육체 속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474


29)그래서 그는 305년경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와 은수자의 삶을 장려했다. 그는 극도의 금욕 생활을 실행하기 위해 음식과 음료와 잠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까지 줄였다. 항상 악마가 나타나 육욕의 환영으로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담대하게 사탄의 사악한 농간을 이겨냈다. 성 아토니우스가 생애 말년을 보낸 테바이드Thebaid는 그가 보여준 은수자의 삶과 그가 가르친 교휸에 감명받아 찾아온 은수자들로 붐볐다.

-->육체를 통제함을써, 정신을 콘트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몇 년 후 315년이나 320년경, 또 다른 이집트 사람 파코미우스Pachomius, 290경 ~ 346가 최초로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곳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유재산이 없었으며 밥도 함께 먹고 종교 의식도 함께 거행했다. 그리스도교 세계를 압도한 수도 생활은 성 안토니우스식이 아니라 바로 공동생활을 하는 형태였다. 파코미우스에서 비롯된 수도원들에 사는 수도자들느 육신의 유혹에 저항하는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로 농사일을 더 많이 했다.


이 무렵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엗도 수도원이 출현했다. 그롯 수도원의 금욕주의적인 고행의 정도는 이집트 수도원보다 훨씬 더 심했다. 주상柱上 고행자 성 시메오 St Simeon을 비롯하여 중심 인물로 활동한 은수자들느 시리아 태생이었다. 수도원 제도는 주로 성 바실리우스의 덕택으로 동방에서 그리스어를 쓰는 나라들로 전해졌다(360경). 성 바실리우스가 세운 수도원들은 금욕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았으며, 고아원과 소년들을 위한 학교가 딸려 있었다(고아원과 학교는 단지 수도자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 생활monasticism은 처음에는 교회 조직과 거의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성직자들과 수도원 생활을연결해 융화를 꾀한 인물은 성 아타나시우스 St Athanasius, 293년경 ~ 373년 였다. 일부분은 아타나시우스가 영향을 미친 결과, 수도자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다. 339년 로마에 머물면서 서로마에 수도원 운동을 소개한 사람도 역시 아타나시우스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원 운동을 촉진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에 수도원 생활을 도입했다. 497


30)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궁긍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원인은 동방 교회가 교황의 지배권에 저항한 사건이다. 비잔틴인들이 롬바르드족과 싸워 패배한 이후, 교황들은 억센 야만족에게 정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교황들은 샤를마뉴의 영도 아래 이탈리아와 독일을 정복한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다. 이 동맹의 결과 신성 로마 제국이 출현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과 황제가 조화롭게 공존을 추구할 정치제도를 갖추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처음에 교황은 이러한 쇠퇴를 이용해 이득을 얻었으며, 9세기 후반 니콜라우스 1세는 지금껏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교황 체제를 강력한 수준ㄲ자지 확립했다. 그렇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무정부 상태로 말미암아 10세기 로마 귀족 계급이 실질적으로 독립하면서 교황 체제를 조종하는 비참한 파국에 이르렀다. 교황 체제와 교회 전체가 일대 개혁 운동을 통해 변화함으로써 봉건 귀족 계급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이어질 장에서 다룰 주제이다.

-->안정된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31)7세기에도 황제들의 군사력은 로마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들은 복종의 길을 선택하거나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호노리우스처럼 심지어 이단에 빠지는 지점까지 황제에게 복종한 교황도 있었고, 마르티누스 1세철검 황제에게 저항하다 감옥에 갇히 교황도 있었다. 685년부터 752년까지, 교황들은 대부분 시리아인이거나 그리스인이었다. 그러나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점령함에 따라 비잔틴의 권력은 점차 쇠퇴했다. 이사우리아 왕조의 레오 황제는 726년 성상 파괴 법령을 포고했는데, 서로마 제국 전역은 물론 동로마 제국의 태반에 이르기까지 이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교황들은 성상 파괴 법령에 강력하게 저항해 성공을 거두어싸. 마침내, 처음에는 섭정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레네 여제가 통치하던 787년, 동로마 제국은 성상 파괴를 명한 이단 법령을 폐기했다. 하지만 그 사이 서로마 제국에서 전개된 일련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황직을 통제하는 비잔틴 제국의 역할은 영원히 종식되고 말았다. 513


학자들은 자주 유목민처럼 어쩔 수 없는 유랑 생활로 내몰리곤 했다. 그리스 철학을 시작한 초기 철학자들은 대부분 페르시아를 떠나온 망명자들이었다. 그리스 철학 말기, 즉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그들은 다시 페르시아로 되돌아가는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5세기 무렵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위협을 피해 갈리아 지방을 떠나 서방의 섬들로 피난을 떠났다. 9세기로 접어들자, 그들은 다시 스칸디나비아인들을 피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돌아왔다. 우리 시대에 독일의 철학자들은 동포의 핍박을 피해 훨씬 더 먼 서쪽으로 피신을 떠났다. 예전처럼 다시 피신하기 위해 귀향길에 오르는 날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야하지 않을까.


유럽을 대신해 고전 문화의 전통을 보존하려 애쓰던 당시의 아일랜드 학자들에 대한 정보는 너무 적다. 이렇나 고전 문화의 학습은 수도원들과 연결되어 있어, 고해성사처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전 문화 학습이 신학적 정확성과 더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학습은 주교 관구가 아니라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이후 대륙 성직자들의 특징이던 행정적인 면모도 드러내지 않았다. 로마와 아일랜드 간에 영향을 줄 만한 접촉은 대체로 끊긴 상태였으므로, 교황에 대해 성 암브롯시우스 시대에 누리던 정도의 지위만 인정할 뿐, 후대에 누리게 된 지위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았다. 펠라기우스는 브리튼 사람일 개연성이 높지만 어떤 이는 아일랜드 사람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의 이단 사상은 갈리아 지방에서 탄압을 받았으나, 아일랜드에서는 교회 당국이 이단 사상을 억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사색이 유달리 자유롭고 참신한 까닭에 대해 설명해준다. 529


 샤를마뉴 왕은 877년에 죽었고, 이후 요한네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어떤 이는 같은 해에 스콧도 죽었다고 생각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알프레드 대왕의 초청을 받아 잉글랜드로 갔고, 맘즈베리나 에설니Athelney의 대수도원 원장으로 지내다 수도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불행을 당한 사람은 동명이인의 다른 존(요한네스)이었던 것 같다.


 요한네스의 다음 작품은 위僞디오니시오스의 그리스어 저술을 라틴어로 옮긴 번역서였다. 이 책은 중세 초기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품이었다. 성 바울로가 아테네에서 설교할 때, '몇몇 사람이 그릉 충심으로 대하며 믿게 되었고, 그들 가운데 아레오파고스의 재판관 디오니시오스도 있더라'([사도행전], 17장 34절)라는 말이 전해진다. 디오니시오스에 대해 더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중세 시대에 더욱 널리 알려졌다. 디오니시오스는 프랑스를 여행하다 생 드니 대수도원the abbey of St Denis을 설립했다. 적어도 요한네스가 프랑스에 도착하기 직전 수도원장이었던 힐두인Hilduin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게다가 디오니시오스는 신플라톤 학파와 그리스도교의 화해를 꾀한 중요한 작품의 저자로 유명했다. 이 작품이 언제 쓰여 세상에 나왔는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분명히 500년 이전, 플로티노스 이후 저술되었을 것이다. 이 저작은 동방에 널리 알려져 찬양받았으나, 서방에서는 그리스 황제 미카일이 827년 경건와 루드비히에게 필사본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졌으며, 그 필사본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수도원의 원장 힐두인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요한네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번역을 마쳤는데, 그 까닭은 자신의 견해가 당대 이후 서방의 가톨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디오니시오스의 견해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531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비정통성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범신론은 피조물의 실체적 실재성을 부인하며, 그리스도 교리와 정반대되는 학설이다. '무'로부터 일어난 창조에 대한 해석은 신중하고 분별 있는 신학자라면 누구나 수용해도 좋을 만한 견해가 아니다. 플로티노스의 견해와 흡사한 성 삼위에 대한 견해는 세 위격의 동등한 특성을 지키려 노력하기는 했으나 보존하지 못했다. 그의 독립적인 정신은 이런 이단 사상을 통해 드러나며, 9세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플라톤 학파의 성향을 띠는 그의 사고방식은 아마 4, 5세기에 그리스 교부들 사이에서 나타났던 사고방식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5세기에서 9세기까지 이르는 시기의 아일랜드 그리스도교에 관해 더 많이 알았더라면 그가 그렇게 놀라운 인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 그에게 나타난 이단 사상의 대부분은 위디오니시오스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위디오니시오스는 성바울로와 친교를 맺었다고 가정한 탓에 정통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퍼져 있던 인물이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의 무시간적인 창조관도 물론 이단으로 기울어 있으므로, 그는 [창세기]의 설명이 비유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낙원과 타락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는 다른 모든 범신론자와 마찬가지로 죄에 관한 난점에 봉착한다. 그는 인간은 원래 죄가 없었으며, 인간이 죄가 없었을 대는 성의 구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물론 '하느님이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창조하셨더라'라는 성경 구절과 모순을 일으킨다. 여자는 남자의 감각저이고 타락한 본성을 구현한다. 결국 성의 구별은 다시 사라질 테고, 우리는 순수하게 영적인 육체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죄는 의지가 방향을 잘못 잡아, 사실은 어ㄸ너 것이 선하지 않은데 그것을 선한 것으로 가정하는 잘못을 범하여 짓게 된다. 죄에 대한 벌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534


그러나 나는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행동하더라도 금을 되찬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사제 서품의 대가로 금을 받으며, 부제를 임명하고 은을 한 무더기 받는다. 보라! 내가 지불한 금은 내 지갑 속에서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다' 밀라노의 페트루스 다미아누스 Petrus Damianus, Peter Damian는 1059년 밀라노 시의 모든 성직자가 대주교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성직매매의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태는 결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성직매매Simony는 죄였지만, 죄라는 점이 성직매매에 반대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성직매매는 공로가 아니라 돈의 힘으로 교회의 직위를 차지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말하잠녀 성직매매는 주교를 임명하는 세속 군주의 권위를 굳건히 받쳐줌으로써 주교 관구를 세속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복속시켰다. 더욱이 교회의 직위를 산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대가로 지불한 돈을 메우기 위해 노심초사한 나머지 영적 수양보다 세속적인 일에 더욱 큰 관시을 갖게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성직매매 반대 운동은 교회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 필요한 요소였다.


성직자의 독신생활celibacy도 흡사한 방식으로 고찰해볼 수 있다. 11세기 교회 개혁가들은 종종 결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경우에도 '축첩concubinage'에 대해 말하곤 했다. 수도자들은 물론 정결의 서약을 했으므로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수도원에 소속되지 않은 교구 성직자 계급의 경우 결혼이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 동방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교구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고 잇다. 11세기 서방 교회의 교구 사제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다. 주교들은 그들을 편들기 위해 성 바울로의 다음과 같은 선언에 호소했다. '그러면 주교는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거기에 성직매매 문제와 같은 명백한 도덕적 쟁점은 없었으나,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주장하는 경우 성직매매에 반대하는 운동과 흡사한 정치적 동기는 있었다. 540


아랍인은 이렇게 변모하고 싶은 유혹을 대부분의 북방 야만족보다 더 잘견뎌냈다. 아랍인이 격전을 많이 치르지 않고서도 제국을 손에 넎었기 때문에 파괴된 것은 거의 없었으며, 시의 행정 역시 거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 양국의 민간 행정조직은 높은 수준까지 정비되어 있었다. 아랍 부족장들은 처음에는 복잡한 행정조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각부서에 훈련받은 기존의 담당자들이 근무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주인 밑에서 근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세금 부담이 오히려 상당히 줄었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는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게다가 주민들의 태반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아랍 제국은 전제군주국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후계자로서 신성한 성품을 대부분 물려받았다. 칼리프의 지위에 오르려면 명목상 선출의 절차를 밟아야 했으나 곧 세습제로 바뀌었다. 750년까지 존속한 제1대 우마이야 왕조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무하마드를 믿었던 사람들이 창건했는데 광신적인 신자들의 반대에 끊임없이 부딪히곤 했다. 아랍인은 새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지만 종교심이 깊은 종족이 아니었다. 아랍인이 정복을 시작한 동기는 종교가 아니라 약탈과 재물이었다. 소수 이슬람교 전사가 큰 어려움 없이 고도의 문명과 낯선 종교를 겸비한 다수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광신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페르시아인은 아주 일찍부터 종교심이 깊고 사색의 수준이 높았다. 페르시아인은 개종한 다음 이슬람교로부터 예언자 무하마드와 그의 동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더욱 종교적이고 더욱 철학적인 종교를 만들어냈다. 661년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가 죽은 뒤 이슬람교도는 두 종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었다. 수니파가 더 큰 종파이고, 시아파는 알리를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칼리프 직위 찬탈자로 여긴다. 페르시아인은 오랫동안 시아파에 속했다. 554


그레고리우스 7세 시대부터 13세기 중엽까지 유럽의 역사는 교회와 세속 군주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일차적으로 황제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들과도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 임기는 겉으로 보기에 재앙으로 끝난 듯했으나, 우르바누스 2세는 다소 완화된 형태로 그레고리우스의 정책을 다시 펼치기 시작하여 세속 군주의 성직 수여에 반대하는 교령을 다시 선포함으로써 성직자와 평민이 자유롭게 주교들을 선출하게 되기를 바랐다. (평민의 역할이 순전히 형식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러나 실제로 우르바누스 2세는 주교가 휼륭한 인물이라면 세속 군주에 의한 성직 임명으르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처음에 우르바누스는 노르만족의 영토 내에서만 안전을 보장바았다. 그러나 1093년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는 부친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교황과 동맹을 맺어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했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 즉 말라노를 수장으로 여러 도시가 맺은 동맹은 교황 지지를 선언했다. 1094년 우르바누스는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통과하여 승리의 행진을 했다. 우르바누스는 프랑스의 왕 필리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필리프 왕은 이혼을 원했기 때문에 우르바누스 교황에게 파문당한 끝에 복종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는 1차 십자군 원정을 선포함으로써 교황 권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잔혹학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진 종교적 광신의 물결을 일으켰다. 우르바누스는 교황들이 좀처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던 로마에서 안전하게 생애의 말년을 보냈다.


다음 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우르바누스와 마찬가지로 클뤼니 대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는 성직임명권을 두고 투쟁을 계속했으며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106년 하인리히 4세가 사망한 이후 다음 황제 하인리히 5세는 더 나은 꾀로 파스칼리스 교황을 이겼는데, 교황은 속세를 떠난 소박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자다운 성품이 정치적 감각을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564


십자군 전쟁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지만, 십자군은 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황이 당연히 십자군 창설의 선두에 섰던 까닭은 그 목적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종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십자군 전쟁의 선동으로 자극받아 종교적 열의가 커짐에 따라 교황들의 권력은 증대되었다. 전쟁 선동의 또 다른 효과는 수많은 유대인의 학살이었다. 학살을 모면한 유대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1차 십자군 소집 당시 독일의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사자심왕 리처드 Richard Coeur de Lion의 즉위와 동시에 소지된 3차 십자군 당시에는 잉글랜드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황제가 통치한 요크는 유대인들에 대한 가장 끔찍한 대규모 잔혹 행위가 벌어진 무대였다. 십자군 운동 이전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동방 물품의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십자구 운동 이후 유대인 박해의 결과로 동방 물품의 무역은 대부분 그리스도교도가 장악했다.


위에서 언급한 결과와 전혀 다른, 십자군 운동의 또 다른 결과는 콘스탄티노플과 문학적 교류를 자극했다는 점이다. 12세기와 13세기 초반, 이와 같은 교류의 성과로서 그리스어 문학 작품을 라틴어로 옮긴 번역서들이 많이 나왔다. 콘스탄티노플과 언제나 교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베네치아 상인들이 여기에 종사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상인들은 그리스의 고전을 배우려 노력하지 않았는데, 상하이의 영국 상인이나 미국 상인이 중국의 고전을 배우려 수고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고전에 대한 유럽인의 지식은 주로 선교사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569


그는 신앙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기질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용한 의미의 아카데미 학파(아카에메이아 학파)로 자처했다. 그는 왕들에 대해 제한을 두고 존경하며 이렇게 말했다.'읽고 쓸 줄도 모르는 교양 없는 왕은 왕관을 쓴 당나귀에 불과하다' 존은 성 베르나르두스를 존경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조화시켜려던 베르나르두스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벨라르도 숭배했지만 그의 보편자 이론에 대해 코웃음을 쳤으며, 로스켈리누스의 보편자 이론도 마찬가지로 비웃었다. 존은 논리학이 학문에 이르는 훌륭한 서론 역할을 하지만, 존리학 자체는 무미건조해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도 개량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까닭은 고대 저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비판적인 이성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플라톤은 여전히 '모든 철학자의 왕'이었다. 존은 당대의 학자들과 대부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며, 스콜라 철학의 여러 논쟁에 호의를 갖고 참여한다. 30년 후 철학 학원 한 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여전히 토론을 벌이는 모습에 미소를 짓는다. 그가 자주 출입한 모임의 분위기는 30년 전 옥스퍼드 대학교 휴게실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그의 생에 말년, 대성당에 속한 여러 학원은 대학으로 지위가 바뀌고, 적어도 잉글랜드의 대학들은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존속되어 이목을 끈다.


12세기에 번역가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서방의 학생들이 그리스 서적을 더 많이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번역서를 낸 주요 공급원 세 곳이 콘스탄티노플, 팔레르모, 톨레도였다. 이 가운데 톨레도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나 그리스어를 직접 번연하지 않고 아랍어로 번역된 책을 중역하는 일이 흔했다. 12세기 중엽 톨레도의 대주교 레몽은 번역가 양성 대학을 설립했고, 대학의 업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1128년 베네치아의 자코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변증법], [소피스트의 논박]을 번역했다. 그중 [분석론 후서]는 서방 철학자들에게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카타니아의 엔리코 아리스티포 Enrico Artistippo는 [파이돈]과 [메논]을 번역했으나 그의 번역서는 곧바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576


교황들의 죽음은 권력 투쟁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새로 즉위한 교황은 누구나 전임 교황의 정책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1241년 그레고리우스 9세가 죽고, 프리드리히의 지독한 적수가 된 인노케타우스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결점이 없는 정통 그리스도교도였고 그레고리우스와 인노켄타우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으나, 특히 인노켄티우스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모든 교섭 제안을 거절하고 황제에게 맞서기 위해 온갖 치사한 편법을 동원하여 모든 노력을 헛되게 만들었다.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황제의 파문을 선언하고, 그에게 대항할 십자군의 결성을 주창하면서 황제를 지지한 자는 모두 파문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황제에게 반대하는 설교를 했으며, 이슬람교도가 증가했고, 황제를 지지하는 이름뿐인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나 일련의 사건으로 프리드리히는 점점 더 잔혹해졌다. 폭동의 주동자들은 잔혹하게 처벌했으며, 게다가 죄수들에게 오른 눈을 뽑고 오른손을 잘라내는 형벌을 가했다.


강력한 투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프리드리히는 한때 새로운 종교를 세우려는 생각까지 했는데, 자신은 메시아(구세주)가 되고 총리인 피에트로는 성 베드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계획을 공표하지는 않았으나, 피에르토에게 새로운 종교에 대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옳든 그르든 피에트로가 자신에게 반대하여 모반을 꾀한다고 확신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피에트로의 눈을 빼 장님이 되게 하고 우리에 가두어 대중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피에트로는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능력이 출중했는데도 프리드리히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당시 존재하던 교황 반대 세력은 신앙심이 깊고 민주주의적 경향을 나타났던 반면, 그의 목표는 이교도 로마 제국의 재건과 비슷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583


토마스 아퀴나스Thoams Aquinas, 1225 또는 1226 ~ 1274는 스콜라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철학을 가르치는 모든 가톨릭 교육 기관에서는 단 하나뿐인 옳은 체계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1879년 레오 13세가 내린 교서 rescript 이후 규칙이 되었다. 그러므로 토스마 아퀴나스는 단지 역사 속 인물로서 관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과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 철학자이며, 사실 뒤의 두 철학자보다 영향력이 더 큰 인물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많은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 스타케이로스 사람이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거의 교부의 한 사람으로서 권위를 가질 정도였다. 순수 철학에 관한 한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는 행동은 거의 불경죄를 저지르는 일이라 생각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언제나 사실은 아니었다. 아퀴나스 시대에도 플라톤에 반대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하기 위한 싸움은 여전히 일어났다. 아퀴나스의 영향력은 르네상스가지 승리를 보장했다. 591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전반적으로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들보다는 덜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켰다. 두 수도회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성 토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은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이다. 성 보나벤투라와 아콰스파르타의 마태오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32)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4경 ~ 1294경은 당대에는 대단한 칭송을 듣지 못했으나 근대에 이르러 공적에 비해 과분한 칭찬을 받았다. 그는 좁은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라 수학과 과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만물박사였다. 당시의 과학은 연금술과 뒤섞였고 암흑 마법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베이컨은 이단이나 마법과 관련되 의혹으로 끊임없이 말썽을 빚었다. 1257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성 보나벤투라는 베이컨을 파리로 보내 감시 아래 두고, 출판도 금지시켰다. 금지 명령이 아직 유효했는데도 잉글랜드의 로마 교황청 특사, 기 드 풀크 Guy de Foulques는 교황을 위해 철학책을 쓰라는 정반대 명령을 그에게 내렸다. 이리하여 그는 아주 짧은 기간에 책 세 권, [대저작], [소저작], [제3저작]을 창작했다. 605

-->연금술은 과학 발달에 공헌했다. 베이컨은 만물박사다. 스페셜리스트만이 성과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로저 베이컨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실험을 논증보다 훨씬 더 중시했기 때문에 찬사를 받았다. 분명히 베이컨의 관심 영역이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자들과 아주 달랐다. 베이컨의 백과사전적 취향은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보다 아무래도 그에게 더욱 깊은 영향을 주었던 아랍인 저술가들의 취향과 흡사하다. 아랍인 저술가들은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과학에 흥미를 느끼고 마법과 마법과 점성술을 믿었으나, 그리스도교도는 마법이란 사악한 것이고 점성술은 망상이라 생각했다. 그는 중세의 다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놀라운 인물이지만, 당대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내 생각으로는 이따금 생각되는 만큼 과학적인 철학자도 아니었다. 영국인 저술가들은 로저 베이컨이 화약을 발명했다고 말하곤 하지만, 물론 사실이 아니다.


성 보나벤투라St.Bonaventura, 1221 ~ 1274 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장으로서 베이컨 저술의 출판을 금지한 적이 있으며, 베이컨과 철두철미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성 안셀무스의 전통에 속한 그는 존재론적 논증을 지지했다. 그는 새로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대립하는 요소를 발견했다. 또 그는 신만이 완벽하게 인식하는, 플라톤의 이상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우수스티누스의 글은 성 보나벤투라가 저술 속에서 끊임없이 인용하지만, 아랍인들의 글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으며, 이교도 고대인의 글을 인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아콰스파르타의 마태오 Matthew of Aquasparta, 1235경 ~ 1302는 보나벤투라의 지지자였으나 새로운 철학을 더 많이 언급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였고, 나중에 추기경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아우수스티누스의 관점에서 성 토마스와 대립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태오에게도 '그 철학자'가 되었고, 끊임없이 인용한다. 아비세나도 자주 언급한다. 성 안셀무스는 위僞디오니시오스만큼 존경심을 표하며 인용한다. 그러나 권위자의 으뜸은 역시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마태오는 우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있는 중간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608


오컴이 황제의 보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오컴의 순수하게 철학적인 학설로 돌아가 보자. 오컴의 순수 철학을 다룬 대단히 훌륭한 책은 무디Ernest A.Moody[오컴의 논리학]이다. 내가 말하게 딜 내용은 대부분 이 책에 근거하고 있으며, 다소 흔치 않은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맞는다고 생각한다. 철학사를 쓰는 저술가들에게는 철학자들을 후계자들에 비추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취향은 대체로 잘못이다. 오컴은 스콜라 철학을 와해시킨 인물, 데카르트의 선구자나 칸트의 선구자, 또는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 특정한 주석가가 좋아하는 철학자라면 누가 되었든 그 철학자의 선구자로 평가되었다. 무디에 따르면 이렇나 평가는 모두 잘못이며 나도 동의한다. 그는 오컴이 주로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복원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오컴의 관심사는 상당한 정도로 성 토마스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자들은 오컴에 비해 성 토마스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계속 휠씬 더 열심히 추종했다. 무디에 따르면, 근대 역사가들의 오컴 해석은 스콜라 철학에서 근대 철학으로 넘어가는 점진적 과도기를 찾아내려는 갈망으로 얼룩졌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사실상 단지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한 오컴을 근대의 학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컴은 정작 그의 자작에서 발견되지 않지만,'오컴의 면도날'이란 이름을 얻은 결률로 유명하다. 격률에 따르면, '존재들은 필요 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오컴은 이격률을 말하지 않았지만 똑같은 효과를 내는 말을 했다. '더 작은 수로 할 수 있는 일을 더 큰 수로 하는 짓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만약 어떤 과학 안에 포함된 무엇이든 가설로 도입한 이런 존재나 저런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정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컴의 격률이 논리적 분석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15


33)13세기로 접어들면서 철학, 신학, 정치, 사회 모든 측면을 아우른 위대한 종합에 이르렀는데,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 천천히 이루어졌다. 첫째 요소는 순수한 그리스 철학, 특히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들이었다. 다음 요소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결과로 대량 유입된 동양의 종교들이었다. 오르페우스교와 신비 조교의 장점을 받아들인 이러한 동양의 종교들은 그리스어 문화권 세계의 사고방식을 변모시켰으며, 결국 라틴어 문화권 세계의 사고방식도 바꾸었다. 죽었으나 부활한 신, 그 신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을 먹는 성찬 의식, 세례식과 유사한 어떤 의식을 통해 새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는 제2의 탄생은 이교 로마 세계의 대다수 종파들에게 신학의 일부로 수용되었다. 이와 같은 동양 종교적 요소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 금욕저긴 육체에서 벗어난 해방의 윤리와 결합했다 .속인들과 분리되어 있으며 마법의 힘을 많든 적든 소유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적지 않게 발휘하는 사제제도가 시리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서 들어왔다. 620

--> 학문의 종합을 거쳐서,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오늘날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가톨릭 철학자들 사이에서 최고 권위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플라톤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아리스토텔레스로 대체한 조처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실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의 기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질보다 더욱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으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거의 플라톤에서 유래할 뿐만 아니라 플라톤 사상에 순응하거나 적응했다. 플라톤은 지식이란 지각이 아니라 일종의 상기에 의한 통찰reminiscent vision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주의자에 훨씬 더 가까웠다. 성 토마스는 조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의 몽상으로부터 과학적 관찰로 돌아가는 길을 준비했다.


가톨릭교의 종합은 14세기에 붕괴되기 시작했는데, 철학보다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더 관련이 깊었다. 비잔틴 제국은 1204년 라틴족에게 정복당해 1261년까지 그들의 수중에 붙잡힌 신세였다. 이 시기에 비잔틴 제국의 국교는 그리스 종교가 아니라 가톨릭교였다. 1261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교황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1438년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교황은 동방 교회와 페라라에서 연합을 선포했는데도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지 못했다. 서방 제국이 교황 체제와 갈등을 빚다가 당한 패배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국민군주둑들이 출현함으로써 교회에서는 아무 이득도 되지 못했다. 14세기 대부분에 걸쳐 교황은 정치 측면에서 프랑스 왕의 수중에 붙잡혀 이용당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원인들보다 한층 더 중요한 원인은 부유한 상인 계급의 출현과 속인 계급의 지식증대였다. 두 가지 현상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16세기 중엽까지 서방의 다른 지역보다 이탈리아에서 더 앞서나갔다. 14세기에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북방의 어느 도시보다 더 부유했다. 게다가 법학과 의학 분야에서 세속 학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 독립 정신을 품은 도시들은 이제 황제가 더는 위협요인이 아니게 되자 교황에게 저항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정도는 덜 하지만 같은 운동이 어느 곳에서나 일어낫다. 플랑드르가 번성함으로서 한자 동맹에 속한 여러 도시들도 번성했다. 623


미국 독립전쟁와 프랑스 혁명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민주주의가 중요한 정치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사유재산제에 근거한 민주주의와 대립하는 사회주의는 1917년에 이르러 최초로 정권을 획득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정권이 퍼지게 되면 형태가 새로운 문화가 함께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화 형태는 주로 '자유주의적인', 즉 상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문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다룰 예외적인 인물들은 독일에서 등장한다. 피히테와 헤겔이 바로 예외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상업과 전혀 상관없는 정신적 전망을 보여주며, 근대의 전형에 속하지 않는다.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경향은 근대를 구분하는 소극적 특징으로 과학의 권위를 수용하는 적극적 특징보다 앞서 나타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에서 과학의 역할은 아주 미미했다 .교회에 반발한 사람들은 고대와 연결되는 고리를 마음속으로 찾아낸 데 이어 과거로, 초기 교회나 중세가 아닌 더욱 먼 과거로 시선을 돌렸다. 과학의 갑작스런 등장을 진지하게 논의 하게 된 최초의 사건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담은 서적의 출간이엇다. 그러나 코페르니ㅜ스의 이론은 17세기에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수용해 발전시키기 전까지 위세를 떨치지 못햇다. 아후 과학과 교리를 사이에 두고 기나긴 투쟁이 벌어졌는데, 교리를 고수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새로운 지식에 저항해 싸웠으나 언제나 패배했다.


근대 철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한 과학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와 전혀 다른 지적인 권위이며 정치적 권위가 아니었다. 과학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며, 귄위를 수용한 사람에게 신중하고 분별 있는 논증은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과학의 권위는 고유한 이성에 호소함으로서 효력을 나타내며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권위이다. 과학의 권위는 가톨릭 교리 체계와 달리 인간의 도덕과 희망을 비롯해 우주 역사의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완결된 체계를 제안하지 않는다. 단지 특정한 시기에 과학적으로 확인된 면만 드러내 선포하는데, 확인된 사항은 무지와 불가지론으로 가득한 망망대해 어딘가에 위치한 작은 섬과 같다. 그 밖에도 차이점이 하나 더 있다. 교회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반면, 과학의 선언은 개연성이나 확률에 근거한 잠정적인 주장이어서 수정되기도 한다. 639


베네치아는 불행한 사태를 극복하고 예전의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잡기도 했지만,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통하는 희망봉 항로를 발견한 사건(1497 ~ 1498)으로 그 기회는 무산되엇다. 투르크인들의 세력 증대와 희망봉 항로의 발견으로 베네치아는 황폐해졋는데, 폐허가 되어가는 과정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독립을 빼앗는 날까지 지난하게 이어졌다.


베네치아의 정치체계는 원래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확립되었으나, 점차 민주적 특성이 퇴색하여 1297년 이후에는 거의 과두정치에 가갑게 변형되엇다. 정치 권력의 기반은 시의회엿는데, 시의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은 한 번 얻으면 세습되었고 유력한 가문에만 주어졌다 행정권은 10인 의회에 일임되고, 10인을 선출하는 기관이 바로 시의회였다. 공화국의 총독은 의전상 국가수반으로서 종신직으로 선출되엇다. 총독에게 주어진 명목상의 권력은 매우 제한되엇으나, 실제 정치 상황에서 총독은 흔히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네치아의 외교활동은 극도의 치밀성을 갖추어 빈틈이 없었으며, 베네치아 외교관의 보고서는 견식이 높은 데다 사태를 꿰뚤는 통찰력이 있었다. 랑케Leopold von Ranke, 1795 ~ 1886 이후, 베네치아의 외교 보고서는  역사가가 다루는 사건에 대한 자료와 지식을 제공하는 믿을 만한 사료로 활용되었다.


피렌체는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앞선 도시로 르네상스 운동의 중요한 원천이자 본거지였다. 문학사에 자취를 남긴 거의 모든 위대한 이름, 예술사 초창기의 위대한 이름과 휙의 몇몇 이름은 피렌체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문화보다 정지적인 면에 관심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려 한다. 13세기, 피렌체에는 갈등을 빚은 세 계급, 세 귀족 계급, 부유한 상인 계급, 평민 계급이 존재했다. 귀족 계급은 대체로 황제당원이고, 다른 두 계급은 교황당원이었다. 1266년 황제 당원이 결국 정치적으로 패배하면서, 14세기 동안 평민당은 부유한 상인 계급봐 나은 정치적 지위를 누렸다. 세 계급 간의 갈등은 안정된 민주주의로 이행되지 않고, 그리스인들이 '참주정치'라 불렀을 만한 정치 형태로 차츰 타락했다. 645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출신이었고, 그의 부친은 법률가로서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가 20대였을 때, 사보나롤라가 피렌체를 통치했다. 사보나롤라의 비참한 최후는 그에게 깊고 분명한 인상을 남겨서, 마키아벨리는 '무장한 예언자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논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패한 에언자의 부류에 속한 인물로서 사보나롤라를 꼽으며, 다른 쪽 부류에는 모세, 키루스, 테세우스, 로물루스를 꼽았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관례는 르네상스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처형 직후 피렌체 정부의 말단 관리직을 맡았다.(1498). 그는 이따금 중요한 외교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면서 1512년 메디치 가문이 정치 일선에 복귀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메디치 가문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면서 체포되엇으나, 석방되어 피렌체 근처 지방에 은거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다른 직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술가의 일을 선택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술인 [군주론]은 1513년에 집필하여 로렌초 2세에게 바쳤는데, 메디치 가문의 호의를 얻으려는 희망(헛된 희망으로 드러났다)을 품었기 때문이다.[군주론]에 흐르는 논조의 일부는 아마 이런 실제 목적에서 비롯된 듯하다. 같은 시기에 쓴 더 방대한 저술, [로마사 논고]에는 공화제와 자유주의에 더 비중을 두고 지지한 면이 두드러진다. 그는 [군주론]의 첫머리에서 공화국에 대해서는 다른 저술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논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군주론]만 읽고 [로마사 논고]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의 학설에 편견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호의를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저술가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은거 생활을 계속했는데, 임종 때는 바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여 약탈하던 때였다. 그해는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이한 해로 보기도 한다. 655


[군주론]의 [교회의 공국들에 대하여]라는 흥미로운 장에서는 [로마사 논고]에서 주장한 견해에 포함되 사상의 일부르 ㄹ분명히 숨겨둔 채 논의를 전개한다. 숨긴 까닭은 [군주론]이 메디치 가문이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술할 당시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 바로 교황(레오 10세)이 된 상황이었다. 그는 [군주론]에서 교회의 공국들에 관련된 유일한 난점은 공국의 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일단 공국의 정권을 획득하고 나면 오랜 종교적 관습에 따라 보호를 받는데, 종교적 관습은 공국의 군주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권좌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각 공국의 군주는 '인간의 정신이 감히 도달하기 어려운 차원 높은 대의에 근거해 인정받은 존재이기'때문에 군대가 필요 없다.(그는 그렇게 말한다)군주의 '권력을 높이고 유지하는 존재는 바로 신'이며, '군주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논쟁은 주제넘고 어리석은 인간의 헛수고에 불과할 터이다'그런데도 마키아벨리는 이어 알렉산데르 6세가 어떤 수단을 동원해 교황의 지상권을 증대시켰는지 탐구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로마사 논고]에서는 교황권에 대해 더 길고 더 진지하게 논의한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인물들을 윤리적 계층 구조 속에 배치하며 시작한다. 여러 종교의 창시자들이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군주국이나 공화국의 창건자들이 다음 자리를 차지하며, 그다음 지위를 문인들이 차지한다. 이들은 선한 계층을 이루지만, 종교를 파괴한 자, 공화국이나 왕국을 전복시킨 자, 덕이나 문학과 학문에 적대적인 자들은 악한 계층을 이룬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비롯해 참주정치 체제를 수립한 자들은 사악한 자들이며, 다른 한편 부루투스는 선량한 사람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견해와 단테의 견해 사이에 대조적으로 나타난 차이는 고전 문학이 미치는 효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가 국가 안에서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까닭은 종교가 곧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결속감 유대감 형성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점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점을 경시한 자들을 처벌한 처사는 옳았다는 말이다. 그가 당시 교회에 가한 비판의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교회가 악행으로 말미암아 종교적 신앙을 훼손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의 지상권이 거기서 비롯된 책과 맞물려 이탈리아의 통일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658


[군주론]은 통치자의 행동과 관련된 기존의 도덕을 명백히 거부한다. 통치자가 늘 선하게 행동한다면 비명횡사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군주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맹위를 떨쳐야 한다. '군주는 어떤 식으로 신앙을 지켜야 하는가?란 제목이 붙은 장(18장)을 보자. 군주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면 신앙을 지키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을 지켜서는 안 된다. 때때로 군주는 신앙을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교묘하게 위장하는 뛰어난 기만이자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란 너무 단순해서 당장 필요하면 순종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자는 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낸다. 나는 그저 최근 일어난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알렉산데를 6세는 사람을 속이는 일 이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그 밖에 어떤 일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때에 맞춰 속일 기회도 잘 찾아내고는 했다. 누구도 그보다 더 보증을 잘하고 더 강하게 서약하고 맹세하며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도 보증과 확언을 지키는 일을 본적이 없었다. 그는 사태를 잘 파악했기 때문에 늘 남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군주는 위에서 말한 자질(관습상의 덕)을 전부 갖출 필요는 없지만, 실제로 다 갖춘 듯이 행동해야 한다.'


그는 이어서 무엇보다 군주는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로마사 논고]는 명목상 리비우스Livius에 대한 주석서인데, 논조는 [군주론]과 전혀 다르다. [로마사 논고]의 모든 장은 대부분 마치 몽테스키외가 쓴 듯이 보일 정도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18세기 자유주의자가 읽고 동의할 만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학설을 분명하게 제안한다. 군주, 귀족, 평민은 모두 헌법상 제각기 맡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 세 계급의 세력은 호혜적으로 서로 견제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법은 리큐르고스가 확립한 최선의 법이넫, 가장 완벽나 균형을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솔론의 법은 지나치게 민주적인 조항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의 참주정치를 초래했다. 로마의 공화정치를 지탱한 법도 훌륭한데, 원로회의와 평민 간의 갈등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659


결국 핵심은 바로 권력이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떤 종류든 권력이 필요하다. 이런 평범하고 분명한 사실은 '정의가 이긴다', 다시 말하면 '악은 승리해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표어에 묻혀버린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긴다해도, 그것은 그쪽의 힘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흔히 여론에 좌우되고, 여론은 선전선동에 좌우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당신의 적수보다 당신이 정치적 기량과 덕이 더 뛰어난 듯이 보이게 하는 데 선전선동이 유리하며,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춘 듯이 보이게 하는 방법은 바로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추는 방법이라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권력이론이 11, 12, 13세기에 걸쳐 교회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성공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 권력을 잡은 자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자기들이 속한 당파가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춘 양 조작하기도 한다는 한계를 지적해야 한다. 예컨대 어는 누구도 뉴욕이나 보스턴의 공립학교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죄악을 낱낱이 말하기는어렵다. 둘째, 역사적으로 명명백백한 협잡과 부정행위가 빈번하게 성공하는 정국이 혼란한 시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기가 바로 정국 혼란의 시기엿다. 혼란한 시대에는 냉소주의가 급속히 번지게 마련인데, 냉소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익을 준다면 무엇이든 용서하고 용납하게 한다. 마키아벨리가 스스로 말하듯이 혼란한 시기일수록 무지한 대중 앞에서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춘 외양을 보여주는 태도가 더욱 바람직하다.


이러한 문제의 수정을 한 단계 더 진행하여 논의해도 된다. 마키아벨리는 문명인이 비도덕적인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늘날 공화국의 수립을 소망한다며, 그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과 협력하여 세우면 더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이다. 662


플라톤의 국가처럼,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 그 까닭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면 공공의 선을 증진하기 어려우며 공산제 없이는 평등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어는 책 속의 대화에서 공산주의가 인간을 게으름뱅이가 되게 하며 고위 관직에 대한 존경심을 파괴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이에 대해 라파엘은 유토피아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유토피아에 세워진 54개 도시들은 하나가 수도라는 것만 빼고는 모두 같은 계획안에 따라 설계되었다. 모든 도로는, 폭이 20피트이고, 모든 개인 주택은 꼭 닮은 모양인데, 문 하나는 도로 쪽으로, 다른 문은 정원 쪽으로 나 있다. 문에는 자물쇠를 설치하지 않으며, 누구든 아무 집에나 들어가도 된다. 지붕은 평평하다. 사람들은 10년마다 집을 바꾸는데, 소유권에 대한 의식을 아예 없애려는 것으로 보인다. 시골의 각 농장은 노예 두 사람을 포함해서 40명 이상으로 구성된다. 또 각 농장은 나이가 지긋하고 현명한 남성 지도자 한 사람과 여성 지도자 한 사람의 지도 아래 운영된다. 병아리들은 암탉의 품이 아니라 부화기(모어가 살았던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에서 부화한다. 모든 사람의 옷차림은 비슷하고, 남자 옷과 여자 옷의 차이, 기혼자의 옷과 미혼자의 옷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옷의 유행은 결코 변하는 일이 없고, 여름 복장과 겨울 복장에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일을 할 때 가죽이나 모피 옷이 닳게 되지만, 옷 한 벌로 7년을 입게 된다. 일을 다 끝마치면 작업복 위에 모직 망토를 걸친다. 모직 망토도 역시 양모의 자연색을 띠고 있다. 각 가족 단위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모든 사람은 남자와 여자 모두 비슷하게 하루에 여섯 시간, 점심시간 전후에 세 시간씩 일한다. 모두 8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여덟 시간 잠을 잔다. 이른 아침에 다수가 참여하는 강의가 있지만, 강제성을 띤 의무사항은 아니다.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은 놀이를 즐기낟. 여섯 시간만 일하면 충분한데, 게으름뱅이가 없고 쓸모없는 노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서는 여자, 성직자, 부유한 사람, 하인, 거지 등은 대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한다. 부자들 때문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없는 사치품 생산에 낭비된다. 유토피아에서는 이런 일을 전부 피한다. 673


위대한 과학자 네 사람,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은 과학을 창조한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코페르니쿠스는 16세기에 살았으나 당대에 미친 영향력은 전무했다.


34)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는 폴란드 태생으로 흠잡을 데 없는 정통 가톨릭교 신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운동의 분위기를 몸에 익혔으며, 1500년에는 로마에서 수학 강사직과 교수직을 맡아 활동하다 1503년 모국으로 돌아와 프리우엔부르크Frauenburg의 대성당 참사회원이 되었다. 그는 독일에 맞선 투쟁과 시대 조류의 개혁에 자기 생의 대부분을 받쳤으나, 나머지 시간은 천문학 연구에 몰두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다. 철학도 수학의 하위에 있다. 러셀도 수학을 좋아했다. 


일찍이 그는 태양이 지구의 중심이며 지구는 두 가지 운동, 즉 하루 한 번의 자전 운동과 1년 주기의 태양 주의 공전 운동을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유포되어도 구태여 막지는 않았으나, 교회의 검열을 두려워한 나머지 출판하는 일만은 뒤로 미루었다. 그가 죽은 1543년에 비로소 출판된 주요 저작인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 친구 오지안더는 태양 중심설이 가설로서 제창되었을 뿐이라는 서언을 달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오지안더의 말을 어느 정도 시인했을지 알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까닭은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책 본문에서 비슷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교황에게 바친 덕분에 갈리레오의 시대가 올 때까지 가톨리교의 공공연한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당시의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된 후나 예수회 성직자들이 활동하던 때, 그리고 종교재판소의 활동이 재개되었던 때보다 더 관대하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술과 연구의 분위기는 근대와는 거리가 먼데, 오히려 피타고라스 학파와 유사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하며 일정한 궤도로 움직인다는 공리를 받아들였고, 그리스인들처럼 심미적 동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천문학 체계에는 여전히 주전원周轉圓, epicycle이 있는데, 다만 주전원들의 중심이 태양이거나 태양 근처로 말할 뿐이다. 682


뒤를 이은 중요한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 ~ 1601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태양과 달은 지구 주의를 돌지만 다른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물론 그의 독창적인 이론은 아니었지만, 달보다 먼 곳에 자리한 천체는 모두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반대할 최상의 이유를 두 가지 제시했다. 하나는 1572년에 출현한 새로운 별이 일일 시차視差, parallax가 없는 듯했기 때문에 달보다 더 먼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혜성을 관측함으로써 찾아낸 다른 이유는 혜성은 운동하는데도 달보다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변화와 소멸은 달 아래 영역에 국한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기억할 터이다. 이 학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의 여러 주제에 대해 제시한 다른 모든 주장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진보를 막는 장애물이었다.


티코 브라헤는 이론가가 아니라 관측가로서 천문학사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처음에는 덴마크 왕의 후원을 받다가 이후 루돌프 2세의 보호 아래 천체 관측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별의 분류 기록표를 만들어 여러 해에 걸쳐 행성들의 위치를 기록했다. 티코 브라헤의 말년에 청년 케플러가 조수로 일했는데, 브라해의 관측 결과는 케플러에게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도 남았다.


35)케플러Johannes Kepler, 1571 ~ 1630는 천부의 재능을 갖춘 천재가 아니면서도 끈질긴 노력 끝에 과학자로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모범 사례로 꼽힌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최초로 지동설을 채택한 중요한 천문학자였는데,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들에 비추어보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설명이 다소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피타고라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태양 숭배에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진 선량한 개신교도였다. 그래서 지동설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은연중 편견이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피타고라스 사상의 영향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견해를 추종하게 되었고, 우주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 모든 존재는 다섯 가지로 정해진 고체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가정으로 바탕으로 가설을 여러 개 세우다가 마침내 행운의 여신이 도와서 가설 가운데 하나가 효력을 발휘했다. 686


운동 속도의 변화이든 운동 방향의 변화이든 모두 어떤 '힘'의 작용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뉴턴은 이 원리를 '운동의 제 1법칙'으로 선포했는데, 관성 법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요지에 대해선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 갈릴레오가 발견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갈릴레오는 최초로 낙하 물체의 법칙을 입증했는데, '가속도' 개념을 추가하면 가장 단순한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자유 낙하하는 물체의 가속도는 공기의 저항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항상 일정하고, 가속도는 무겁거나 가볍거나 크거나 작거나 모든 물체에서 같다. 하지만 1654년 무렵 공기 펌프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이 낙하 물체의 법칙을 완변하게 증명하지 못했다. 공기 펌프가 발명된 후 실제 진공상태에서 떨어지는 물체를 관찰하게 되면서 깃털이나 납이 둘 다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36)갈릴레오는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의 속도 측정값 사이에 차이가 없단느 사실을 증명했다. 갈리레오 이전에는 큰 납덩어리가 작은 납덩어리보다 훨씬 빠르게 떨어진다는 견해가 지배했으나, 갈릴레오는 실험을 통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측정법은 이후 발전된 측정법과는 달리 정확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한 치 오차도 없는 낙하 물체의 법칙에 도달했다. 만약 한 물체가 진공 상태에서 자유 낙하한다면, 물체의 속도는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 1초 후에 물체의 속도는 초속 32피트, 2초 후에는 초속 64피트, 3초 후에는 초속 96피트로 증가한다는 말이다. 가속도, 즉 속도가 증가하는 비율은 언제나 같으며, 초마다 속도의 증가 폭은 대략 32피트이다.


갈릴레오는 또 자신을 후원한 토스카나 공작의 중대한 관심사였던 탄환 같은 발사체에 관해 연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수평으로 발사된 총알은 하동안 수평으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수직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갈릴레오는 공기의 저항과는 별개로 수평 속도가 관성 법칙에 따라 항상 일정한 반면, 수직 속도는 낙하 물체의 법칙에 따라 커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탄환이 잠시 날아간 후에 짧은 기간, 즉 1초 동안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내려면, 다음과 같이 따라가보면 된다. 첫째, 만약 총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총알은 발사 직후 1초 동안 이동한 거리만큼 일정한 수평 거리를 날아간 셈이다. 둘째, 만약 총알이 수평으로 이동하지 않고 떨어지기만 한다면, 날아가기 시작한 다음 경과한 시간에 비례하는 속도로 수직 낙하하게 된다. 690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은 이탈리아 과학 발전의 종언을 의미했으며,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 과학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종교재판으로는 과학자들이 지동설을 수용하는 대세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어리석은 행각으로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개신교 국가들에서 목사들은 과학의 업적을 깍아내리려 혈안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국가 정책을 통제할 만한 힘을 얻지는 못한 처지였다.


뉴턴Sir Isaac Newton, 1642 ~ 1727은 코페르니쿠서, 케플러, 갈릴레오가 닦아 놓은 길 위로 걸어가서는 그들의 과학적 작업을 완성하고 최후에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출발점으로 삼는데, 제1법칙과 제2법칙은 갈릴레오의 업적으로 돌려야 한다. 어쨌든 세 법칙을 근거로 뉴턴은 케플러의 세 법칙이, 각 행성이 매 순간에 태양 쪽을 향한 가속도는 행성과 태양 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변한다는 명제와 동일한 주장임을 증명했다. 그는 이 공식을 이용하여 지구와 태양을 향한 가속도가 달의 운동을 설명하고, 지상 위 낙하 물체들의 가속도는 다시 역제곱 법칙에 따르는 달의 가속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그는 '힘'을 운동의 변화, 즉 가속도의 원인으로 규정함에 따라 자신의 만유인력 법칙을 다음과 같이 선포할 수 있었다. '각각의 물체는 다른 물체를 끌어당길 때,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정비례하고 둘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 힘으로 끌어당긴다' 이 공식에서 그는 행성 이론에 들어 있어야 할 모든 내용, 즉 행성들과 행성들 주위를 도는 위성들의 운동, 혜성의 궤도, 밀물과 썰물의 흐름들을 연역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행성들이 타원 궤도에서 약간 이탈한 현상도 뉴턴의 법칙에서 연역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뉴턴의 승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결국 과학의 진보를 저해하는, 넘어서기 힘든 장애가 될 위험도 안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뉴턴이 죽은 다음에도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과학자들이 뉴턴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가 다룬 과학의 주제들에 관한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했다. 692


그는 이 목록을 이용해 뜨거운 물체에서 항상 발견되지만 차가운 물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그리고 열의 정도가 다양한 물체에서는 발견되는, 어떤 특징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첫 사례에서는 일반성이 가장 낮은 법칙들을 세우고, 이 법칙들로부터 다음 단계로 일반성을 갖는 법칙들을, 그다음에는 단계가 더 높은 일반 법칙들을 찾아내리라 기대했다. 제안된 법칙은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여 시험하는데, 상황에 잘 맞으면 확증된다. 몇몇 사례는 이전에 관찰한 결과들에 관해서 가능한 두 이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기 때문에 특히 가치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례들을 '특권을 갖는'사례라 한다.


37)베이컨은 삼단논법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학의 가치도 실험정신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대한 증오에 찬 적개심을 드러낸 반면, 데코크리토스는 높이 평가했다. 베이컨은 비록 자연의 과정이 신성한 목적을 예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어도,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탐구할 경우엔느 목적론적 설명의 개입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일은 작용인의 필연적 결과로 설명해야 한다.


그는 귀납법이란 과학이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될 관찰 자료들의 배열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실을 뽑아 거미줄을 치는 거미나 단지 모으기만 하는 개미가 아니라 꽃술을 모아 꿀을 만드는 벌과 비슷해져야 한다. 이런 말은 개미에게는 다소 불공정하지만, 베이컨의 의도를 잘 드러내준다.  


38)베이컨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우상의 목록표인데, 우상은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도록 만드는 원인인 정신의 나쁜 습관을 의미한다. 그는 네 가지 우상을 제시한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며, 특히 자연 현상 가운데 실제로 발견되는 질서 이상을 기대하는 습관을 지적한다. '동굴의 우상'은 개별 탐구자의 특징인 개인적 편견이다. '시장의 우상'은 말의 횡포와 관련된다. '극장의 우상'은 수용되는 사유 체계와 관련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스콜라 철학이 언급할 만한 가장 좋은 사례였다. 702

-->선입견, 질투, 시기, 물질만능은 오늘날의 우상이다. 


그 후 1640년 장기의회가 열리면서 로드와 스트래퍼드가 런던탑에 갇히자, 홉스는 공포에 질려 프랑스로 도피했다. 1641년에 저술한 [시민론]은 1647년까지 출간되지 않았는데, 핵심 이론은 [리바이어던]과 동일했다. 홉스의 정치적 견해를 자극한 원인은 실제로 일어난 내란이 아니라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었다. 하짐나 공포심이 증폭되면서 자연히 신념도 더 확고해졌다.


홉스는 파리에서 유력한 수학자, 과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데카르트의 [성찰]을 출판하기 전에 읽어보고 반론을 적어 보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데카릍트는 홉스의 반론에 답변을 달아 출판한 적도 있었다. 그는 곧장 자신과 뜻이 맞는 영국 왕당과 망명자들로 구성도니 대규모 단체를 결성했다. 또 1646년부터 1648년 까지 미래의 찰스 2세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1651년 [리바이어던]을 출간했을 때, 좋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책에 담긴 합리주의적 성향은 망명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신랄한 공격은 프랑스 정부 관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자 홉스는 비밀리에 런던으로 피신하여 크롬웰 치하에서 정치 활동은 일절 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래도 그는 긴 생애 동안 당시에나 다른 시기에나 게으른 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추기경 브램홀과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 자신은 엄격한 결정론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또 기하학자로서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원을 정사각형으로 만든느 방법을 찾았다고 상상하기에 이르러서는 어리석게도 옥스퍼드 대학교의 기하학 교수 월리스와 그 주제를 다룬 논쟁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월리스교수는 홉스를 바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왕정복고 시대에 왕의 측근들이 홉스를 환영하지 않았으나 왕은 그를 총애하여 벽에 홉스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을 뿐 아니라 해마다 연금을 100파운드 하사한다고 약속했지만, 국왕은 연금 지급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대법관 클래런던 경은 무신론자로 의심받는 홉스에게 쏠린 국왕의 총애가 비위가 상했으며, 의회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흑사병과 대화재 이후 민중 사이에 미신적인 공포심이 만연하자, 하원은 위원회를 만들어 특히 홉스의 저술을 거론하면서 무신론 서적을 조사하라고 명했다. 707


39)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 1596 ~ 1650는 흔히 근대 철학의 창시자로서 알려져 있는데, 내 생각에도 옳은 평가이다. 그는 고도의 철학적 능력을 갖춘 최초의 인물로서, 그의 철학관은 새로 등장한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스콜라 철학의 잔재가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해도, 데카르트는 선대 철학자들이 닦아 놓은 기초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완전한 철학 체계를 새롭게 구성하려 노력했다. 새로운 철학 체계의 구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일어난 적이 없던 일로, 과학의 진보로 생겨난 새로운 자기 확신의 표시이다. 그의 철학 저술에는 플라톤 이후 저명한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선한 면이 드러났다. 중간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철학자라는 직업에 종사한, 전문능력을 갖춘 우수한 교사들이었을 따름이다. 데카르트는 교사가 아니라 찾아낸 진리를 전달하려는 열망을 품은 발견자이자 지적인 탐험가로서 저술에 임했다. 그의 문체는 쉬운면서도 현학적인 티가 나지 않아서, 학생보다 오히려 세계의 지성인에게 말을 건다. 더구나 문체가 유별나게 탁월하다. 근대 철학의 선구자가 격찬을 받아 마땅한 문학적 감각을 소유했으니 대단한 행운이다. 719

-->철학이 어떻게 물리학까지 영향을 줄까? 반대로, 물리학자는 어떻게 철학자가 될까?


40)기하학 분야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체계와 다소 차이가 나지만 좌표 기하학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는 어떤 문제를 풀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장의 논리적 귀결을 검토하는 해석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대수학을 기하학에 응용했다. 수학의 두 분과에는 선행 연구자들이 있는데, 대수학은 고대의 학자들 가운데 선행 연구자가 있었다. 데카르트 수학의 독창성은 좌표를 사용한 점인데, 좌표란 평면 위에서 차지하는 점의 위치를 고정된 두 선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결정하는 표이다. 데카르트 혼자서 이 방법의 효과를 전부 발견하지는 않았으나, 뒤이은 좌표 기하학의 진보가 더욱 쉬워지도록 하는 데 충분히 기여했다. 이러한 기여는 그가 수학에서 공헌한 유일한 분야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다.

-->좌표를 만든 것은, 오늘날 웹2.0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과학 이론 대부분을 진술한 책은 1644년에 출간된 [철학 원리]이며, 이 밖에 중요한 책이 몇 권 더 있는데, [방법서설](1637)은 기하학과 광학 문제를 다루며, 또 [태아발생론]이란 책도 썼다. 그는 하비의 혈액 순환의 발견을 환영했으며, 자신도 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고 싶다는 희망(결국 헛된 희망이 되어버렸지만)을 항상 품고 살았다. 인간의 육체와 동물을 기계로 생각한 그는 특히 동물은 오직 물리버칙의 지배를 받는, 느낌과 의식이 결여된 자동기계로 간주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송과선松果腺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 영혼이 송과선에서 생명혼과 접촉함으로써 영혼과 육체 간에 상호 작용이 일어난다. 우주 안에서 운동의 총량은 일정불변하므로 영혼도 운동량에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영혼은 생명혼의 운동 방향을 바꾸어, 간접적으로 육체의 다른 부분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한다.


데카르트 이론에 포함된 이러한 견해는 데카르트 학파에 속한 제자 횔링크스가 처음 포기한 다음, 뒤이어 말브랑슈와 스피노자도 포기했다.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운동량 보존 법칙에 따르면 세계 안에서 운동의 총량은 주어진 방향에서도 일정불변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상상한 방식으로 정신이 물체에 작용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데카르트 학파에 속한 이라면 누구나 대부분 가정했듯이, 모든 물리 작용이 충돌의 자연력에 의해 일어난다면, 역학 법칙만으로도 물체의 운동을 충분히 결정해서 정신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없어진다. 723


인간이 더 큰 전체에 반항하는 일부라며, 그는 구속받아서 부자유스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지성을 발휘하여 우주 전체의 유일한 실재를 파악하면 드디어 자유로워진다. 이런 학설에 암시된 내용은 [윤리학]의 마지막 권에 나타난다.


41)스피노자는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모든 감정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지 않고, 다만 외부의 힘이 우리를 장악해서 수동적으로 생긴 '정념들'만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정념이던 감정은 우리가 바로 그 정념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하자마자 정념이 아니게 된다' 만물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정신은 감정들을 조절할 능력도 획득하게 된다. '명석하고 판명하게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한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마련이다' 이 명제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이끄는데,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이끄는데, 신에 대한 지적 사랑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사유와 감정이 통일된 상태로, 진리를 파악할 때 느낀 기쁨이 모두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의 일부인 까닭은, 이런 기쁨이 부정적인 면을 전혀 포함하지 않아서 우주 전체인 신의 진정한 일부이고, 조각조각 흩어진 사물들이 사유 활동 속에서 분리되어 악하게 보이듯이 겉으로 보기에만 전체의 일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전에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기쁨을 포함하낟고 했지만, 어쩌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신이 쾌락이나 고통 같은 어떤 감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또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지적 사랑'에는 단순한 지성에는 없는 무엇이 깃들여 있는데, 어쩌면 참된 사유와 지적 사랑에 포함된 기쁨을 쾌락보다 우월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스피노자는 '신을 향한 사랑은 정신의 영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껏 스피노자의 증명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그림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740


라이프니츠는 30년 전쟁이 끝나기 2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도덕 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666년에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뒤이어 같은 대학이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대학 측과 '사상이 맞지 않는다' 이유로 거절했다. 이듬해인 1667년에 그는 마인츠의 대주교 보좌관이 되었는데, 대주교는 서부 독일의 다른 군주들처럼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두려한 나머지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았다. 라이프니츠는 주교의 승인을 얻어 루이 14세가 독일이 아니라 이집트를 침략하도록 설득했으나, 성 루이 왕 이후 이교도에 대한 성전聖戰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정중한 조언을 들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이런 계획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4년 후인 1803년 하노버를 점령했을 때 비로소 알려졌다. 1672년에 라이프니츠는 그 계획과 연루되어 파리로 가서 4년간 훨씬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그는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중요한 지적 발전을 이룩했다. 바로 이 시기에 파리는 철학과 수학 두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다. 그는 1675년부터 1676년 사이에 바로 파리에서 미적분을 고안했는데, 같은 주제를 먼저 연구했으나 미발표한 뉴턴의 저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라이프니츠의 저술이 1684년에 먼저 출판되었고, 뉴턴의 저술은 1687년에 출간되었다. 그로 인해 미적분을 누가 먼저 고안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양측 모두에게 불행하고 망신스러운 일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금전 문제에서 약간 인색한 편이었다. 젊은 새신부가 하노버 법정에서 결혼실을 올릴 때, 그는 이른바 '결혼 선물'을 주곤했다. 그 안에는 결혼 생활에 유익한 격언이 담겨 있었는데, 남편을 얻었으니 이제 씻고 빨래하는 이을 맘추지 말라는 조언으로 끝났다. 결혼하는 신부가 고맙게 여겼는지에 대해 역사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748


1683년 사프츠버리가 실각하자, 로크는 그와 함께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명예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머물렀다. 명예혁명 이후 상무부에 고용되어 일했던 몇 년을 제외하면, 그는 저술을 하거나 출간한 책들이 촉발한 수많은 논쟁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전 몇 해 동안, 로크는 심각한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론을 통해서는 실천을 통해서든 영국 정치 상황에 관여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사이 그는 [인간 오성론]을 집필했다. 이것은 로크의 가장 중요한 저술이며, 바로 이 책으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정치철학에 미친 영향도 커서 후대에 이어졌기 때문에, 로크는 마땅히 경험주의 인식론자뿐만 아니라 철학적 자유주의자로도 다루어야 한다.


로크는 철학자들을 통틀어 최고 행운아라고 말해도 좋다. 이론 철학 분야에서 작업을 완성한 시기에 그와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던 정치인들이 영국의 정계를 장악했다. 로크가 이론적인 명과 실천적인 면에서 주장한 견해는 이후 여러 해동안 정치활동이 활발한 유력한 정치가와 철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로크의 정치 학설은 몽테스키외C. Montesquieu, 1689 ~ 1755가 발전시킨 정치적 견해와 함께 미국 헌법에 구현되며, 대통령과 의회가 심가간 갈등을 빚을 때마다 쓸모 있는 역할을 했다. 영국 헌법은 대략 50년 전까지만 해도 로크의 학설에 기반을 두었으며, 프랑스가 1871년 채택한 헌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크가 18세기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는데, 중심에 볼테르Voltaire, 1694 ~ 1778가 있었다. 볼테르는 젊은 시절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면서 [철학 서한]을 통해 동포에게 영국 사상을 전해주었다. 철학자나 온건한 개혁가들은 로크를 추종하고, 극단적인 혁명가들은 루소를 추종했다. 프랑스의 로크 추종자들은 옳든 그르든 간에 로크의 인식론과 정치 학설이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775


로크는 도덕성이 증명될 수 있다고 거듭 말하지만, 바라던 만큼 충분하게 확장시키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도덕성은 증명할 수 있다.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가 의존해 있는, 전지하고 전능하고 선 자체인 최고 존재의 관념에 대해 충분히 고찰하고 연구를 계속하면, 도덕성을 증명가능한 과학들 가운데 두어도 될만한 기초를 찾을 것이라고 나는 생가간다. 나는 분명히 수학이 자명한 명제들로부터 논쟁의 여지없이 명백한 필연적 결론을 이끌어내듯, 스스로 다른 과학 분야에 적용하는 냉정한 태도로 대처하면 옳고 그름의 척도를 알아낼수 있을 것이다. 다른 양태들의 관계도 수와 외연의 양태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지각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만약 예정된 방법이 그 양태들의 일치와 불일치를 검토하거나 추적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양태들이 증명될 수 없다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유재산이 없는 것에 정의도 없다'는 명제는 에우클레이데스 체계 안의 모든 증명만큼이나 확실하다.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은 무엇이든 소유할 권리이고, '불의'라 명명된 관념은 사유재산권 침범이나 침해이기 때문에, 이 관념들의 의미가 확립되고 명명되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나는 이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을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진술만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또 '어떠한 정부도 절대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일정한 규칙이나 법률에 근거해 사회를 수립한 정부의 관념은 규칙이나 법률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절대적 자유의 관념은 어느 누구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자유이다. 나는 이러한 명제가 수학의 어떤 명제만큼이나 참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위의 구절을 읽으면 어리둥절해지는 까닭은, 처음에는 도덕률이 신의 계율God's decrees에 의존하는 듯하지만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도덕률은 분석적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787

그런데 입법자는 어떤 법적 권리를 만들지를 결정해야 하며 자연스럽게 자연권의 개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법률이란 바로 이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나는 가능한 한 신학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 가급적 있는 그대로 로크의 이론을 설명하려 한다. 만약 윤리학 및 옳은 행동과 그른 행동을 분류하는 문제가 현행 실정법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면, 신화적인 역사에 의존하지 않는 용어들로 고쳐 말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자연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재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법도 정부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  A가 B에게 한 어떤 행동이 B가 A에게 한 보복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며, 어떤 종류의 보복이 다른 경우에도 정당할 수 있는가? 어느 누구도 살해하려 공격한 자에게 대항하여 자기 자신을 방어했다 해서 비난받지 않는다. 심지어 급박한 경우에 살해하려 한 자를 죽인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동시에 개인은 자기 아내와 자녀들이나 일반 대중에 속한 어느 누구든 그들을 위해 방어 행동을 할 수 있다. 흔히 일어나는 일로, 만약 습격을 당한 사람이 경찰의 도움을 받기 전에 죽게 될 경우에 살인자 처벌법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된다. 그런 경우에는 '자연적'권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또한 개인은 자기 재산을 방어할 권리도 가지는데, 개인이 도둑에게 정당하게 가할 수 있는 상해의 정도를 두고 의견들이 구구하다.


로크가 지적했듯이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는 자연법이 지배한다.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전쟁이 정당한 것인가? 국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순전히 윤리와 관련된, 법과는 상관없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개인이 무정부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게 될 방식과 동일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42)로크의 법 이론은 개인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견해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자연법이 원리에 따른 보복 행동을 정당화할 만한 상해를 개인이 당한 경우, 국가가 대신 보복을 하도록 규정한 실정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형제를 살해하려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당신의 형제를 구할 다른 방도가 없을 경우 살해하려는 자를 죽일 권리가 있다. 801

-->올바른 법이다. 


재산을 둘러싼 로크의 견해에 관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보면, 그는 마치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들 전부와 대적하며 위대한 자본가들을 위해 싸우는 투사처럼 보일지는 모른다. 이는 절반의 진리만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로크의 사상에서 나란히 병행하지만 조화될 수 없는 두 가지 학설을 발견한다. 하나는 발저난 자본주의를 예견한 학설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사회주의에 가까운 전망을 보여준 학설이다. 다른 주제들도 마찬가지인데, 재산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학설에 대한 인용만으로는 로크의 철하글 부정확하게 묘사하기 쉽다.


이제 재산 문제에 관한 로크의 주요 의견을, 저서에 나타난 순서에 따라 써 내려갈 것이다.


우선 누구나 자기 노동의 결과로 얻은 사유재산을 가지거나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시대에 제안한 이런 금언은 이후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도시의 생산은 주로 수공업자들이 담당했는데, 이들은 도구를 손수 만들어 썼으며 생산품을 내다 팔았다. 로크가 속한 학파에서는 농업 생산에 대해 소규모 자작농 제도가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한 사람은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농지만 소유할 수 있고 그 이상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계획이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 곳에서나 귀족들은 대규모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농민들에게 고정된 비율의 생산물(종종 절반에 해당)이나 시기별로 변동이 가능한 소작료를 징수했다. 전자의 방식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후자의 방식은 영국에 보급되었다. 더 먼 동부 유럽에 속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노동자들은 농노들로서 지주를 위해 일할 뿐 실질적인 권리는 전혀 보유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이런 낡은 제도는 프랑스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북부 이탈리아와 서부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혁명군대에게 정복당함으로써 사라졌자. 프로이센에선 나폴레옹의 군대에 패한 결과로, 러시아에선 크림 전쟁에서 패한면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 두 나라의 귀족들은 부동산 소유권을 그대로 보유했다. 808


이후 그는 논문을 쓰는 일에 열중하여 1741년에 첫 논문집을 출판했다. 1744년 에든버러에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나서, 한때는 어떤 광인이 개인 교사로, 다음엔 어느 장군의 비서로 일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무장한 흄은 다시 한 번 철학적 모험을 감행했다. 그는 [인간 본성론]에 숨겨진 중요한 부분과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지지해줄 대부분의 근거를 간추려[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인간 본성론]보다 훨씬 더 유명세를 탔다. 칸트를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도 바로 이 책이었는데, 당시 칸트는 [인간 본성론]에 대해서는 몰랐던 듯하다.


흄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도 저술했으나, 생전에 미발표로 보관되었다가 그의 지시에 따라 1779년에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기적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유명해졌는데, 기적의 사건들을 증명할 만한 역사상의 증거는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그의 [영국사]는 1755년과 이듬해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에서 휘그당에 비해 토리당이, 스코틀랜드인보다 잉글랜드인이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 그는 역사를 철학의 초연함이나 공평함에 알맞은 분야로 생각하지 않았다. 1763년에 그가 파리를 방문하자 당대의 계몽철학자들은 그를 환대했다. 운수가 나빴는지 루소와 우정을 맺으면서 유명한 언쟁에 휘말렸다. 흄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자제력을 발휘하며 처신했으나, 피행망상에 사로잡힌 루소는 격분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흄은 직접 쓴 사망 기사, 다시 말하면 '장례식사'에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온순한 사람으로, 기분을 조절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사교적이며 쾌활한 유머도 구사하고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만큼 정감이 풍부하다. 다만 적대감을 견디기 힘드러하기는 하나, 모든 정념을 기막히게 조절할 줄 아는 온건한 성품을 갖추었다. 839


역설적이게도 흄은 자아를 지각하기도 하는 철학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몇몇 형이상학자들을 제쳐둔 채, 나느 감히 인류에 속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다양한 지각들의 다발이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지각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서로 잇달아 일어나고, 영속하는 흐름과 운동 속에 있다'


자아 관념에 대한 이러한 평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무엇을 주장하며 어느 정도 타당한지 정확하게 알아보자. 우선 자아에서 시작하는데, 만약 자아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지각되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관념은 결코 가질 수 없다. 설령 이 논증을 수용한다 해도, 주의 깊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아무도 자신의 두뇌를 지각하지 못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뇌에 대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 지각에서 추론한 '관념'은 논리적으로 기본 관념에 속하지 않는, 복합 관념으로서 기술하는 관념이다. 만약 흄이 제안한 모든 단순 관념이 인상에서 비롯된다는 원리가 옳다면, 앞의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흄의 원리가 거부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본유'의 관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현대의 용어법을 사용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지각되지 않은 사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관념들은 언제나 지각된 사물이나 사건들에 의해 정의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정의를 정의된 항으로 대체함으로써 언제나 지각되지 않은 사물이나 사건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경험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당면 문제에 관한 모든 심리적인 지식은 '자아'를 도입하지 않고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의도니 '자아'는 지각의 다발에 불과할 뿐 새로 등장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엔 철두철미한 경험론자라면 누구나 흄의 철학적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자아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단지 자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지각의 '다발'을 제외한 '자아'가 지식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될 따름이다. 이러한 흄의 결론은 마지막으로 잔존한 '실체'라는 용어의 쓰임을 형이상학에서 제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신학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랒는데, '영혼'에 대해 가정된 모든 지식을 철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842


흄은 보통 지나치게 원자주의적인 관점에서 지각을 설명했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몇몇 관계는 지각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성, 시간이나 장소의 관계에 대한 관찰을 추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마음은 감각에 직접 주어진 것을 넘어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과관계란 우리의 감각들에 주어진 인상들을 넘어 지각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색다르며 독특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논증으로 보면, 이것은 부당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각할 수 없는, 시간이나 장소와 연결된 많은 관계들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시간은 전후로, 공간은 우리 방의 벽을 지나서 연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흄의 실제 논증은 이렇게 표현된다. 우리는 때때로 시간이나 공간의 관계를 지각할 수 있는 관계들로부터 추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는 경험적인 사실의 문제로 정리된다. 우리는 때때로 인과적인 것이라 명명할 수 있는 어떤 관계를 지각하는가, 못하는가? 흄은 지각하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그의 반대자들은 지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어느 측에서든 증거를 찾아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내 생각에 흄 측으로 기운 가장 강력한 논증은 물리학의 인과 법칙이 갖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기 단계의 조야한 제안들을 제외하면, 'A는 B의 원인이다'라는 형식의 단순 규칙들이 과학의 영역에서 승인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듯하다. 세련도니 형태로 발전한 과학에서 단순한 규칙은 인과 법칙으로 대체되는데, 인과 법칙은 분명히 관찰된 자연 과정에서 정교하게 추론된 결과이다. 이러한 결론을 강화해줄 현대 양자 이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물리학에 관한한, 흄은 전적으로 옳다. 'A는 B의 원인이다'와 같은 명제는 결코 수용되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명제를 수용하려는 경향은 습관과 연상의 법칙들로 설명해야 마땅하다. 849


 그는 긴 생애 동안 기껏해야 자신보다 덜 곤궁할 뿐인 자인들의 호의에 의존한 채 가난한 유랑자로 살았다. 그는 자주 그들의 호의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감정에 따른 그런 반응이야말로 감수성의 열렬한 신봉자에게 바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방랑자의 취미를 가졌기에 파리 사회의 구속을 지루하고 지겹게 여겼다. 낭만주의자들은 루소에게서 우선, 의복이나 예절 속의 인습과 미뉴에트나 영웅을 그린 2행 서사시의 관례에 따른 구속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사랑 속의 관습을 경멸하고, 마침내 전통적인 도덕 전체를 경멸하는 태도를 배웠다.


낭만주의자들에게 도덕이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도덕 판단은 예리하면서 열렬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의 도덕 판단은 선대 사상가들이 좋게 여겼던 원리와는 퍽 거리감이 느껴지는 원리에 근거한다. 1660년부터 루소에 이르는 시기, 사람들은 종교 전쟁과 프랑스, 영국, 독일의 내란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혼란의 위험, 강한 열정의 소유자들에게 나타나는 무정부주의적 경향, 안전의 가치와 의의, 안전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희생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다. 사려prudence는 최고의 덕으로 간주되고, 지성은 파괴적인 동시에 타락한 광신에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평가되었으며, 세련된 예절과 태도는 야만주의에 맞서는 방책으로 칭송되었다. 뉴턴의 질서정연한 우주, 행성들이 변함없이 법칙에 따라 정해진 궤도로 태양을 회전하는 우주는 상상 속에 그려진 좋은 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격정 표출을 억제하는 능력은 교육의 주된 목표였으며 고상함의 확실한 기준이었다. 프랑스 혁명기에 낭만주의 이전 귀족들은 조용히 사라져갔다. 롤랑 부인과 당통 같은 낭만주의자들은 수사학적인 의미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루소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점점 안전과 평안에 염증을 느끼면서 흥분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은 그들의 갈망을 충족시켜준 셈이었다. 1815년 정계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을 때, 평온은 죽은 듯이 경직되어 모든 활기찬 삶을 억압했고 공포심에 사로 잡힌 보수주의자들만이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었다. 860


스위스 출신의 루소는 자연스레 알프스를 찬미했다. 그의 제자들의 소설과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야생의 급류, 아찔한 절벽, 전인미답의 숲, 뇌우, 바다의 폭풍우처럼 일반적으로 유용하지 않지만 파괴적이며 격렬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취미는 변화는 크든 작든 영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사람이 향기 그윽한 푸른 초원이나 오곡이 무르익은 들판 보다 나이애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니언 골짜기를 더 좋아한다. 관광호텔이 이러한 풍경 취미를 보여주는 통계를 증거로 제공한다.


낭만주의자들의 독특한 기질은 허구의 세계를 그린 소설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기이한 것, 예컨대 유령이나 퇴락한 고성, 한때 번성했던 가문의 우울한 후손, 숙련된 최면술사, 신비학, 몰락한 폭군, 레반트의 해적들을 좋아햇다. 필딩과 스몰릿은 충분히 일어날 법한 상황 속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썼는데,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사실주의자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주제들은 낭만주의자들에겐 너무 단조로웠다. 그들은 오직 장엄한 것, 멀고 먼 곳, 공포를 자아내는 것에서만 감동을 느끼고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어느 정도 의심의 눈총을 받던 과학도 깜짝 놀랄 만한 소재를 이끌어낸다면 멋진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은 주로 중세와 현재에 속한 중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들은 너무 자주 과거나 현재를 모두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서 유리시켰다. [늙은 선원의 노래]은 이러한 면을 보여주는 전형에 속하며, 콜리지의 [쿠빌라이 칸]을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역사 속의 군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낭만주의자들의 지리적 관심은 더욱 흥미로운데, 제너두에서 적막한 코라스미아 해변에 이르는 장소들은 머나 먼 아시아나 고대에 있는 곳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기원의 측면에서 루소의 덕을 입었지만 초창기에는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862


 루소의 전기는 [고백록]에 아주 상세하게, 그것도 비굴하게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대 죄인으로 비하하는 일을 즐겼으며, 때로는 이 점을 과장하기도 했다. 그가 일상의 덕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그렇지만 그는 기본적인 행도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향한 따뜻한 가슴이 있다고 언제나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곤 했다. 이제 그의 사상과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그의 생애를 알아보자.


루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나 정통 칼뱅교도의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가난했으며 시계 제작자와 댄스 교사를 겸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루소가 어렸을 적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친척 아주머니가 그를 양육했다. 그는 12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소매상을 전전하며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모든 일에 염증을 느끼고 16세에 제네바에서 사부아로 건너갔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가톨릭교 사제를 찾아가 개종하겠다고 말했다. 격식에 따른 개종 절차는 토리노에 있는 세계 지원자 학원에서 거행되었는데 무려 9일이 걸렸다. 그는 오로지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개종했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받은 세례가 사실은 도적 행위였음을 자신에게 숨기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개신교로 되돌아간 후에 쓴 것이므로, 그가 몇 년간 진지하게 가톨릭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할 근거는 남아있다. 1742년, 그는 자신이 1730년에 살았던 집이 주교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화재를 모면했다고 증언한 적도 있다.


그는 주머니에 단돈 20프랑만 지닌 채 토리노의 세례 학원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자, 베르첼리 부인의 하인이 되었는데 그 부인은 석 달 후에 죽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베르첼리 부인의 리본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은 훔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했던 어떤 소녀가 주었다고 주장했으며, 어이없게도 그의 주장을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되면서 소녀는 벌을 받았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면 상식 밖의 이상야릇한 궤변이다.'이 잔인한 순간에 저지른 것보다 사악한 짓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 가련한 소녀를 고발한 것은 모순된 행동이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871


논증이 부당하다면 논점을 입증하려는 모든 비판자의 열린 비판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심정 신학은 논증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논점을 입증한다고 선언하지 않기 때문에 반박할 수도 없다. 사실 심정 신학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달콤한 꿈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가치 없는 이유이며, 만약 내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성 토마스를 선택할 것이다.


루소의 정치 이론은 1762년에 출간된 [사회계약론]에서 제시된다. 이 책은 그의 저술들 대부분과 아주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사회계약론]은 감상적인 면은 거의 드러내지 않고 지적인 추리에 훨씬 근접한 내용을 포함한다. 민주주의에 대해 말로만 호의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그 책에 등장한 학설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이바지한다. 루소는 제네바와 고대로 기운 취향으로 인해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대제국들보다 도시국가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 책의 속표지에 자신을 '제네바의 시민'이라 밝히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나는 자유 국가의 시민이자 군주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공적인 일들에 미치는 내 목소리의 영향이 미약하더라도 투표권이 있기에 공적인 일들을 연구하는 것이 나의 의무에 속한다'


43)또한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의 리쿠르고스의 생애 편에 나타난 스파르타를 찬미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루소에 따르면 민주정치는 작은 국가에 가장 적합하고, 귀족정치는 중간 정도 규모의 국가에 가장 적합하며, 군주정치는 큰 국가에 최선인 정치체계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작은 국가가 더욱 바람직한데, 규모가 작은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더 수월하게 실천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그리스인들이 의미하던 각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이며, 그는 대의정치를 '선거 귀족정치'라 부른다. 이는 대규모 국가에서는 실행 불가능하므로, 민주정치에 대한 루소의 칭송은 언제나 도시국가에 대한 찬양을 의미했다. 도시국가에 대한 애정과 찬양은 루소의 정치철학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882

-->less is more. 작은 조직이 완전하다. 


로크의 경우는 이론에 일관되지 않은 면이 있다. 이전 장에서 로크가 한편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마음은 판단하고 추리할 때 자신의 관념들 이외에는 직접적인 대상을 갖지 못한다. 마음은 관념들에 관해 사고하거나 사고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의 지식이 관념들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가 실재하는 존재에 대한 세 가지의 지식, 즉 우리 자신에 대한 직관적 지식, 선에 대한 논증적 지식, 감관에 주어진 대상들에 대한 감각적 지식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단순 관념은 '자연적인 방식으로 마음에 작용한 대상들의 산물'이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아는지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데, 설명하려면 분명히 '관념들의 일치와 불일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버클리는 로크의 일관되지 않은 면의 끝을 보여준 중요한 단계를 밟아 나갔다. 그에게는 마음과 관념들만 존재하므로 물리적인 외부 세계는 철폐된다. 그래도 그는 로크에게서 물려받은 인식론적 원리의 귀결을 전부 파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만약 그가 완전히 일관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마음 이외에 신이나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을 부정했어야 한다. 그는 성직자이자 사회적 존재로서 갖게 된 느낌으로 인해 부정하기를 주저하거나 자제했다.


흄은 이론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던 반면, 실제 삶을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충동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흄은 자아를 부정하고 귀납법과 인과성에 의문을 던졌다. 그는 물질을 철폐한 버클리의 의견을 수용했으나, 버클리가 신의 관념들이라는 형태로 제공한 대체 방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흄은 선행된 인상이 없는 단순 관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의심할 것도 없이 '인상'을 마음 밖에 있는 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야기된 마음의 상태로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원인'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것을 '인상'에 대한 정의로서 승인할 수 없을 것이다. 흄이나 그의 제자들이 인상에 대한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분명한 사실은 흄의 견해에 비추어볼 때, '인상'은 '관념'과 구별되는 어떤 고유한 특징을 가진 것으로서 규정해야 했다는 점인데, 인상은 인과적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892


 그의 바깥 생활은 대학교 교수의 삶이 전부였고, 7년 전쟁(러시아가 동프로이센을 점령했던 시기), 프랑스 혁명, 초기 나폴레옹 시기를 거쳐 살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별다른 사건이 없는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볼프가 해석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교육받았으나, 루소와 흄 두 사상가의 영향으로 그것을 포기했다. 칸트는 적어도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흄의 인과성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선잠에서 깨어난 것도 잠시일 뿐 그는 곧 자신을 다시 잠에 빠뜨릴 최면제를 발명했다. 칸트에게 흄은 논박해야 할 적이었던 반면, 루소의 영향은 더욱 깊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칸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면서 문 앞을 지나갈 때 시간을 맞출 정도였다. 그런데 언젠가 7일 동안 그가 시간표를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에밀]을 읽고 있던 때였다. 그는 루소의 책을 몇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했다고 말했는데, 처음 읽을 때 문제가 무엇인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루소의 문체가 수려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경건주의자로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성향이나 신학의 측면에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공감했으며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그의 철학은 이론 이성의 냉철한 명령에 반하여 심정에 호소하는 것도 허용했다. 이것은 조금 과정해서 말하자면 루소의 [에밀]에 등장한 사부아 보좌신부가 고백한 현학적인 주장의 재판이라 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그 자체 목적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는 그의 원리는 인권을 주장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자유를 사랑하고 열망한 그의 심정은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 관해서도 '한 인간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경우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일은 없다'고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칸트의 초기 저작들 가운데 철학보다 과학에 관한 글이 더 많다. 리스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진을 다룬 글을 쓰기도 했다. 바람에 관한 논문과 유럽에 부는 서풍이 대서양을 건너오기 때문에 습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다룬 짤막한 논문을 남겼다. 자연지리학은 그가 대단히 흥미를 느낀 주제였다. 894


우리의 정신 구조가 경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범주들을 적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물들 자체에 범주들을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렇다 해도 원인의 범주에 대해서는 일관되지 않은 면이 있다. 왜냐하면 칸트는 사물들 자체를 감각의 원인으로 간주하며, 자유로운 의욕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우연한 착오가 아니라 그의 체계에 포함도니 핵심적인 부분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대부분은 공간과 시간, 또는 범주들을 경험되지 않는 사물들 자체에 적용학으로써 발생한 오류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나 범주들을 사물들 자체에 적용하면,'이율배반'이 발생하여 지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즉 겉보기에는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상호 모순된 명제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말이다. 칸트는 네 가지 이율배반을 제시하는데, 각각은 정립 명제와 반정립 명제로 구성된다.


첫째, 이율배반에서 정립은 다음과 같다. '세계에는 시간상 시초가 있으며, 또한 공간상 한계가 있다.' 반정립은 다음과 같다. '세계에는 시간상 시초가 없으며, 공간상 한계가 없다. 즉 세계는 시간과 공간에 관한 한 무한하다'


둘째, 이율배반에서는 모든 각 합성 실체가 단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사에 단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셋째, 이율배반의 정립은 두 가지 인과성, 즉 자연의 법칙에 따른 인과성과 자유의 법칙에 따른 인과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정립은 오직 자연의 법칙에 따른 인과성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넷째, 이율배반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존재가 없다고 주장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이 부분은 헤겔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변증법은 전적으로 이율배반이 방식으로 진행된다.


칸트는 한 유명한 구절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순수하게 지성적인 증명들을 파괴하는 일에 착수한다. 898


헤겔G.W.F. Hegel, 1770 ~ 1831은 칸트와 더불어 시작된 독일 철학 사조의 정점에 위치한 철학자이다. 헤겔은 자주 칸트를 비판했지만, 칸트가 없었던들 자신의 철학 체계를 결코 세울 수 없었을 터이다. 오늘날 권위를 잃기는 했어도, 헤겔의 영향력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나 주로 독일 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이어졌다. 19세기 말엽, 지도적인 위치에 오른 철학자들은 미국과 영국을 막론하고 대개 헤겔 철학의 신봉자들이었다. 순수철학 영역 밖에서 활동하는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도 헤겔의 학설을 채택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으며, 그의 역사철학은 정치절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는 청년기에 헤겔철학을 공부했으며, 그가 완성한 체계 속에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나타나 있다.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설령 헤겔의 학설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거짓이라 해도, 그는 역사적인 면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는 정합성과 포괄성이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철학 체계를 세운 자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일생 동안 몇몇 중대한 사걸들에 휘말려들기도 했다. 청년 시절 그는 신비주의에 매혹되었는데, 이후 그의 사상은 처음에 신비적 통찰로 떠올랐던 내용을 지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내용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는 예나에서 대학 강사로서 처음 철학을 가르쳤는데, 바로 거기서 예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 [정신 현상학]을 탈고했다고 한다. 그 후 뉘른베르크에서, 다음에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에 종사하고, 마직막으로 베를린에서 1818년부터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철학을 강의했다. 그는 말년에 애국심이 강한 프로이센 사람이자 국가에 충성하는 종복으로서, 이미 인정받은 자신의 철학적 성공을 편안히 즐겼다. 그러나 젊은 시절 헤겔은 프랑스가 예나 전투에서 승리한 사건을 기뻐할 정도로 프로이센을 경멸하고 나폴레옹을 찬미했다.924


이러한 전체는 누덕누덕한 가장자리도 없고 독립된 부분도 없지만, 인간의 신체와 유사하거나 이성적인 정신과 훨씬 유사하게 하나의 유기체로 통일되어, 부분들이 서로 의존하며 모두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전체는 또한 윤리적 완벽성을 이룩한다. 헤겔의 이론은 설명하는 몇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념은 영혼의 지도자 머큐리 신처럼 사실 민족들과 세계의 지도자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정신, 즉 이성적이고 필연적인 의지가 세계 역사의 사건들을 인도하며 또 인도해왔다. 이렇게 안내하는 임무에 충실한 정신의 활동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 현재 떠맡은 일의 목표이다.


'철학이 역사를 응시하도록 이끈 유일한 사유는 바로 이성의 순수한 개념 활동이다. 이성이 세계의 지배자이므로 세계 역사는 우리에게 이성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확신과 직관은 역사 영역 자체에 나타나기도 하는 가설이다. 그러나 철학의 영역에서는 가설이 아니다. 이성이 무한한 힘일 뿐만 아니라 실체라는 사실은 사변적인 인식을 거쳐 입증되는데, 이성이라는 용어는 우주가 신성한 존재와 맺는 관계에 대한 탐구를 배제하면서도 우리를 만족시킬 것이다. 이성 자신의 무한한 질료는 이성에서 유래한 모든 자연적인 생명과 정신적인 생명의 바탕에 놓여 있으며, 이성은 또한 질료를 운동하게 하는, 즉 무한한 형상이기도 하다. 이성은 우주의 실체이다'


44)'이념' 즉 '이성'은 진리이며, 영원한 존재이고, 절대적 힘을 가진 본질이다. 이성은 세계 속에 자신을 드러내며, 세계에 이성과 이성의 명예와 영광 이외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말했듯이 철학에서 입증되었으며, 여기서 증명되었다고 생각된 논제이다. '


'지성과 의식적인 의욕의 세계는 우연에 맡겨지지 않고 자기인식의 관념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것이 '전체 영역을 가로질러왔기 때문에 나에게 인식되어 일어난 결과이다'앞의 인용문은 전부 [역사철학]서문에서 발췌했다. 930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는 어느 면에서 보든 철학자들 가운데서 눈에 띄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염세주의자의 길을 택했지만, 다른 철학자들은 대부분 어떤 의미로든 낙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칸트나 헤겔과는 달리 철저한 학구파는 아니었지만 대학의 학술 전통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으며, 그리스도교를 싫어한 반면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를 좋아했다. 광범위하게 문화를 흡수한 쇼펜하우어는 윤리학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유독 국가주의에서 자유로웠던 만큼 자기 나라 독일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저술가들의 사상에도 정통했다. 그는 늘 전문적인 철학자보다는 자신이 믿는 철학을 탐구한 예술가와 문인들에게 호소했다. 쇼펜하우어는 19, 20세기에 유행한 철학의 큰 특징인 의지를 강조하고 철학적으로 부각시켰는데, 그에게 의지는 형이상학의 근본이지만 운리적인 측면에서는 악이다. 이러한 대비는 염세주의자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에 속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게 된 세 원천이 칸트, 플라톤, 우파니샤드Upanishad(고대 인도의 철학서)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스스로 생각한 만큼 플라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몇 가지 특별한 점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사고방식과 기질이 유사하다. 세상에 대해 염증을 느낀 허약 체질인 쇼펜하우어는 걱정으로 가득 차서는 승리보다 평화에, 개혁 시도보다 정적주의quietism에 더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개혁이란 아무래도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953


쇼펜하우어의 철학 체계는 칸트 체계를 각색하고 개작한 것이지만 피히테와 헤겔이 강조한 면과 매우 다른 [순수이성비판]의 국면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물 자체를 제거함에 따라 인식을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사물 자체를 존속시키면서 사물 자체를 의지와 동일시했다. 그는 나의 몸처럼 지각에 나타난 현상이 실제로는 의지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사상을 발전시킨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칸트주의자들이 대부분 기꺼이 인정하려던 수준보다 논의할 사항이 더 많았다. 칸트는 도덕 법칙에 대한 연구가 우리를 현상의 배후로 이끌며 감각지각이 주지 못하는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도덕 법칙이란 본질적으로 의지와 관계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의 차이는 사물 자체의 세계에서 생긴 차이일뿐만 아니라 의욕의 세계에서 생긴 차이이다. 여기에서 칸트의 실천철학에 등장하는 의욕은 현상계가 아닌 실재 세계에 속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의 의욕에 상응하는 현상은 하나의 신체 운동이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신체는 실재에 속하는 의지를 드러낸 현상이다.


하지만 현상의 배후에 놓인 의지는 갖가지 수많은 의욕들로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둘 다 현상의 일부일 뿐인데,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의지는 실재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실재 속에 나타나지 않으며 따로따로 분리된 개별적인 의지적 행동들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공간과 시간은 다수성의 근원이고, 쇼펜하우어가 선호한 현학적인 어구로 표현하면 '개별화의 원리principle of individucation'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의지는 하나이고 무시간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더 크게 보면 의지는 전 우주의 의지와 동일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개별성은 나의 주관적인 시간, 공간적 지각 능력에서 귀결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마찬가지로 자연의 전체 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의 거대한 의지이다. 955


45)니체 F. Nietzsche, 1844 ~ 1900는 당연히 자신을 쇼펜하우어의 후계자로 여기지만, 여러 면에서, 특히 학설의 일관성과 정합성의 측면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뛰어났다. 쇼펜하우어가 수용한 동양적인 체념의 윤리는 의지의 전능을 주장한 형이상학과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니체는 대학 교수였으나 전통에 얽매여 학문에만 몰두한 철학자가 아니라 문학적 성향이 짙은 철학자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존재론이나 인식론 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선 윤리학의 측면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다음으로 예리한 역사 비평가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대부분의 논의를 니체의 윤리학과 종교 비판에 국한하는데, 그가 이 방면의 저술에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러셀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46)니체의 생애는 단순하다. 그는 개신교 목사인 부친의 영향으로 대단히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 다닐 때 이미 뛰어난 고전 연구자이자 문헌학 연구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학위를 받기 전 1869년에 바젤 대학의 문헌학 교수직을 제의받고 수락했다. 하지만 건강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는 병이 호전되기를 기대하며 휴가를 떠나기도 했지만 1879년에 결국 은퇴했다. 그후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요양하며 살다가 1888년에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낫지 않았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어 열렬히 찬양했으나 바그너와 말다툼을 벌였다. 962

-->니체의 생애는 단순하지만, 험난했다. 


이런 방향으로 이끈 유혹자는 여성을 흥미로운 존재로 만든 루소이고, 이어 해리엇 비처 스토와 노예 근성을 가진 자가 유혹자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노동자와 가난한 자의 투사로 자처한 사회주의자가 등장한다. 고귀한 자는 이런 유혹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47)니체의 윤리는 보통 쓰는 의미인 방종의 윤리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스파르타식 훈련과,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는 고통을 짊어질 뿐만 아니라 인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보다 의지의 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지의 저항 능력과 의지가 고통과 고뇌를 견디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할 줄 아는 정도에 따러서 의지의 힘을 가늠한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악과 고통을 손가락질하며 비난하지 않고, 차라리 삶이 언젠가 이전의 삶보다 더 악해지고 고통스러워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니체는 동정심compassion을 맞서 싸워야 하는 나약한 기질로 여긴다. '엄청나게 위대한 힘, 즉 강해지려 훈련하고 수백만의 섣부른 자들의 무리도 무시함으로써 미래의 초인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전에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던 고통을 보고도 좌절하지 않게 되는 위대한 힘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그는 일종의 환희를 느끼며 대전쟁 시대를 예언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자신이 예언한 전쟁을 겪었더라도 행복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국가 숭배자는 아니며, 국가 숭배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는 열정적인 개인주의자요, 영웅 신봉자이다. 그는 민족 전체가 겪는 고난이 위대한 개인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작은 민족들 전부가 당하는 불행을 다 합쳐도 의지가 강한 자들 mighty men이 느끼는 불행의 총량에 미치지 못한다'


니체는 국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독일을 지나치게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지상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국제적인 지배 인종이 출현하기를 바란다.' 위대한 신新귀족 계급은 혹독한 자기 훈련을 거쳐야 했는데, 자기 훈련 과정에서 힘을 지지한 철학자들과 예술가. 폭군들의 의지는 수천년 동안 짓밟혔다.' 965


무엇이든 욕구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피학성 변태성욕자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욕구하기도 한다. 피학성 변태성욕자는 틀림없이 자신이 욕구했던 고통에서 쾌락을 얻어내지만, 쾌락은 욕구 때문에 생기며 반대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욕구한다는 점만 빼면 자신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무엇, 예컨대 자기 나라가 중립을 선언한 전쟁에서 한쪽의 승리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는 일반의 행복이 증가하거나 일반의 고통이 감소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는 칼라일처럼 정반대를 바랄지도 모른다. 욕구가 변하면 쾌락도 따라서 변한다.


윤리학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갈등의 첫째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 성향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의 복지보다 자기 자신의 복지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갈등은 이기적 성향이 없어도 똑같이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가톨릭교도가 되기를 소망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모든 사람이 칼뱅교도가 되기를 소망할지도 모른다. 이기적 성향과 거리가 먼 욕망들도 사회 갈등으로 비화되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윤리학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는데, 첫째는 선한 욕구와 악한 욕구를 구분하는 규준을 찾는 일이고, 둘째는 칭찬과 비난을 통해 선한 욕구를 증진하고 약한 욕구를 단념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심리학 부분과 논리적으로 독립된, 공리주의 학설의 윤리적인 부분은 이렇게 표현된다. 사실상 일반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욕구와 행위는 선하다. 그런데 일반의 행복 증진은 행위의 의도일 필요가 없으며,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공리주의 윤리 학설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어떤 타당한 논증이 있을까? 우리는 니체 사상을 다루면서 유사한 질문을 제기한 바 있다. 니체의 윤리가 공리주의 윤리와 다른 까닭은, 인간 종족의 소수만이 윤리적 가치를 지니며 나머지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은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니체의 윤리와 공리주의 윤리의 차이를 과학의 문제를 해결할 때 사용해도 좋은 이론적 논증을 통해 다룰 수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니체의 귀족 윤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반대 입장을 취할 테니, 쟁점은 이론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공리주의 윤리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반낭만주의 경향을 나타낸다. 민주주의자는 공리주의 윤리를 수용할 개연성이 높지만, 내 의견으로는 바이런식 세계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욕구와 대립되는 사실에 호소하는 고찰이 아니라 실천적으로만 논박당할 수 있다. 985


48)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1818 ~ 1883는 보통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운동을 이끌어낸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가 이끌어낸 강력한 운동은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최근 유럽의 역사를 지배했다. 그의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고찰하는 논의는 몇 가지 일반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현재 철학사를 쓰는 작업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마르크스를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그가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만을 다루려 한다. 이 점에서도 그는 분류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어떤 면에서 호지스킨처럼 철학적 급진파의 영향으로 성장한 철학자로서 급진파의 합리적 성향과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이어받는다. 다른 면에서 보면, 그는 유물론을 부활시킨 학자로서 유물론을 새롭게 해석해서 인간의 역사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련시킨다. 한편 마르크스는 위대한 체계를 구성한 마지막 철학자이자 헤겔의 후계자로서, 헤겔처럼 인간성의 진화를 종합하는 이성의 정칙定則, forumla이 있다고 믿었다. 앞서 안급한 다양함 면들 가운데 한 가지 면을 강조하고 다른 면을 희생시킨 다면, 그의 철학을 왜곡하여 그릇된 견해가 생겨난다. 987

-->러셀은 마르크스를 철학자로 분류했다. 


 앞서 말한 신념들이 마르크스의 삶을 지배했어야 하지만 대체로 그의 저술에 관한 한, 배경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그는 이따금 차분한 예언을 포기하고 저항하라고 강력히 권고하기도 하는데, 겉보기로는 과학적 예측에 숨은 감정적 편견은 그의 모든 저술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순수하게 철학자로서 고찰하면 마르크스에게는 심각한 결점이 있다. 그는 지나치게 실천에 치우치고 당대 문제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휘둘리고 말았다. 그의 시야는 지구라는 이 행성에, 그것도 지구 안의 인간에게 국한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인간은 이전에 스스로 부당하게 부여했던 중요한 자리를 우주 안에서 더는 차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이 명백한 과학적 사실을 소화해서 이해하지 못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철학을 '과학적인'철학이라 부를 권리는 없다.


이렇게 지상에서 일어나는 정세에 한정됨으로써 진보가 보편적인 법칙이라고 기꺼이 믿으려는 성향이 출현한다. 진보를 기꺼이 믿으려는 성향은 19세기의 특징이기 때문에 같은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에게도 나타났다. 마르크스가 윤리적 고찰을 하지 않아도 진보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진보의 불가피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주의 체제가 도래한다면, 어떤 면에서든 반드시 진보해야 한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도래가 지주나 자본가들에게는 진보로 보이지 않으리라는 점을 기꺼이 인정했을 테지만, 그것은 그들이 사회주의가 도래할 시대의 변증법적 운동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마르크스는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공언했지만, 유신론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만한 보편적 낙관주의 입장을 고수했다.


대체로 말하면 마르크스 철학 가운데 헤겔에게서 유래한 모든 요소가 참이라고 가정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모두 비과학적인 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마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회주의를 철학적응로 단장한 측면은 실제로는 자기 견해의 근거와는 별 관계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말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은 변증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서도 쉽게 바꿔 말할 수 있다. 994


윌리엄 제임스는 따뜻한 마음씨와 밝은 기질을 지녀서 만나는 사람마다 거의 모두 그를 사랑했다. 내가 아는 한 그에게 전혀 애정을 느끼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은 산타야니인데, 제임스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거가 불충분한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수를 써도 극복하기 힘든 기질상의 차이가 있었다. 산타야나도 종교를 좋아했지만, 제임스와는 아주 다른 방식이었다. 산타야나는 도덕적인 삶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심미적 차원과 역사적인 차원에서 종교를 좋아했다. 당연히 그는 개신교보다 가톨릭교를 훨씬 좋아했다. 그는 지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혀 수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교리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표현했으며 , 자신은 스스로 그리스도교의 신화적 측면을 높이 평가했다. 제임스에게 산타야나의 태도는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는 산타야나의 태도는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는 청교도 조상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선한 행동이라 뿌리 깊은 신념을 물려받았고, 민주적인 감정은 철학자들을 위한 진리  개념과 세속의 사람들 위한 또 다른 진리 개념을 둘 다 묵인하게 했다. 개신교와 가톨릭교 간의 기질적 대립은 비정통 신도들 사이에 잔존했다. 산타야나가 가톨릭 자유 사상가였다면 윌리엄 제이슴는 개신교 자유 사상가였고, 양측 모두 이단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제임스의 근본 경험주의 학설은 1904년에 ['의식'은 존재하는가?]라는 논문에서 최초로 공표되었다. 이 논문의 주요 목적은 주체와 객체 관계가 근본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자들은 '인식활동 knowing'이라는 일종의 사건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한 존재, 즉 인식하는 자혹은 주체가 다른 존재, 즉 인식되는 사물 혹은 객체를 의식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인식하는 자는 정신 혹은 영혼으로 생각되었고, 인식되는 객체는 물체, 영원한 본질, 타인의 정신이고 자기의식의 경우에는 인식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은 철학에 포함된 내용은 거의 대부분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 관조적 이상, 그리고 전통적인 '진리'개념은 모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기본적인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으로 재고해보아야 한다. 1010


듀이에 따르면 '진리'는 '탐구'에 의해 정의되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는 퍼스의 진리에 대한 정의를 승인하면서 인용한다. '진리'는 탐구하는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어 있는 의견이다' 이 정의가 주어져도 탐궂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게 되는 까닭은, 순환에 빠지 않고서는 탐구자들이 진리를 확정하려 노력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듀이 박사의 이론을 이렇게 진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유기체가 환경과 맺는 관계들은 때로는 유기체에게 만족스럽고 때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유기체가 환경과 맺는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운 상황은 상호 조정을 통해 개선되기도 한다.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개선되도록 바꾸는 변경이 주로 유기체 쪽에서 일어나면 그 과정을 '탐구'라고 부르지만, 변경은 결코 양쪽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전투 중에 당신은 주로 환경, 즉 적군을 제거하기를 바라지만, 전투에 앞선 정찰 중에는 주로 당신의 부대가 적군의 작전 계획에 적응해서 융통성 있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전투에 앞서 정찰 시기가  '탐구'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내 생각으로는, 위의 이론의 난점은 믿음과 흔히 믿음을 '검증한다고' 말하게 되는 사실 혹은 사실들 간의 관계를 떼어 놓은 데 있다. 계속해서 전투 계획을 짜는 장군의 사레를 고찰해보자. 정찰 비행기가 적군의 특정한 전투태세를 보고하면, 검토한 다음 장군은 특정한 대항 전투태세를 명령한다. 상식 수준에서는 장군이 행동을 하게 한 보고는 사실 적군이 보고에 따라 이동했다면 '참'이고, 그러한 경우에 보고는 장군이 명령의 결과로 전투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참이라고 말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듀이 박사는 거부한다.  그는 믿음을 '참' 믿음과 '거짓'믿음으로 나누지 않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두 종류의 믿음, 장군이 승리하면 '만족스러운' 믿음과 그가 패배하면 '불만족스러운' 믿음이 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그는 정찰병의 보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할 수 없다.


개괄해서 말하면, 듀이 박사는 누구나 그렇듯이 믿음을 두 가지 부류, 하나는 좋은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믿음으로 나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믿음이 한때는 좋은 믿음이 되기도 하고 다른 때는 나쁜 믿음이 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1026


49)철학은 역사를 관통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혼합된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한 부분은 세계의 본성에 대한 이론이고, 다른 한 부분은 최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윤리 혹은 정치 학설이다. 두 부분을 충분히 명료하게 분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사고방식이 많이 생겨났다. 플라톤부터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교화edification에 대한 갈망 속에서 우주의 구조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그들은 인간을 유덕하게 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안다고 가정하면서, 이러한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논증을 대단히 정교한 형태로 창안해내는 이이 흔했다. 나로서는 이러한 종류의 편견을 도덕적인 근거와 지적인 근거 둘 다에 입각해서 거부한다. 도덕의 측면에서 보면, 사심 없는 진리 탐구 이외에 다른 일에 자신의 전문 능력을 사용한 철학자는 일종의 변절행위를 한 셈이다. 또 그가 탐구에 앞서서 참이든 거짓이든 특정한 믿음이 예컨대 선한 행동을 증진한다고 가정하면, 철학적 사색의 범위를 제한해서 철학은 진부해지고 만다. 진정한 철학자는 모든 선입견을 검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진리 추구에 어떤 제한을 받게 되면, 철학은 공포심으로 마비되어 '위험 사상'을 퍼뜨리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검열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상 진리 추구에 제한을 둔 철학자는 이미 자신의 탐구 활동에 검열 장치를 마련해둔 셈이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내용


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철학은 잘못된 도덕적 고찰의 결과로는 비범한 정도까지 진보하지 못했다. 나 자신은 철학이 종교 교리의 진실성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플라토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명들'을 제시하는 일이 자기들 직무의 일부라 생각했다. 그들은 선배 철학자들의 증명 들에서 결점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 토마스는 성 안셀무스의 증명을 거부했고 칸트는 데카르트의 증명을 거부했지만, 새로운 증명을 제안했다. 그들은 증명이 타당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논리를 날조하고 수학을 신비주의로 물들이고 고질적 편견을 천부의 직관인양 꾸며야 했다. 1037


논리적 분석을 철학의 주된 직무로 삼은 철학자들은 위에서 말한 모든 증명을 거부했다. 그들은 솔직하게 인간 지성이 인류에게 의미심장한 가치가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과학과 지성에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진리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고상한 인식 방법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체념하는 태도 덕분에, 이전에는 형이상학의 오리무중에서 모호한 채 남아 있던 많은 문제에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해하려는 갈망을 제외하면 철학자의 어떤 기질도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로 들어보자. 수란 무엇인가? 공간과 시간은 무엇인가? 정신은 무엇이고, 물질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지금 당장 앞서 말한, 예부터 이어진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과학에서처럼  진리에 계속 접근할 수 있고, 각각의 새로운 단계가 전에 지나간 일의 거부가 아니라 개선이 되게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50)광신 행위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갈등을 빚는 혼란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어 내는 소수의 힘들 가운데 하나가 과학적 진실성으로서, 이는 우리의 믿음을 가능한 한 지역적 편견이나 기질적 편견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관찰과 추론에 바탕을 두게 하는 습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덕을 철학에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철학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의 고안은 내가 속한 분석철학 학파의 주요한 장점이다. 객관적인 철학 방법을 실천에 옮기면서 획득한, 주의 깊게 진실을 말하는 습관은 인간 활동의 전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어느 곳에서나 광신 행위는 감소하고 공감 능력과 서로 이해하는 능력은 증가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독단적인 일부 주장을 포기한다고 해서,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 일까지 멈추지는 않는다. 1038

--> 철학은 새로운 시선이며, 디자인이다. '광신 행위'는 생각없는 행동이다. 철학은 생각하고 올바르게 행동한다.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야할 것을 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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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file 에움길~ 2014.06.30 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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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독서42] 경영의 역사를 읽는다/스튜어트 크레이너 지음 [1] 素田최영훈 2008.01.27 3845
817 서양의 지혜 - 버트런드 러셀 file [2] 콩두 2012.10.29 3845
816 No 45 색의 힘 file [1] 미스테리 2014.03.10 3846
815 역사 속의 영웅들 // 03. 28. ~ 04. 04. 읽음 강미영 2005.03.29 3847
814 [19] 호모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 자크 아탈리 최지환 2008.08.31 3847
813 북 No.37 - 울리히 슈나벨 '행복의 중심, 휴식' file 재키 제동 2012.01.08 3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