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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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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8일 11시 44분 등록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범우사, 2009)

 (원제 : Antigone by Sophocles, 기원전 468년(추정))


* 저자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중의 한 사람인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6~406년)는 그리스 아테네 근처의 콜로노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상류계급에 속해 있었고 뛰어난 용모와 재주를 겸비하고 있어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는 28세 때(기원전 468년) 비극 경연대회에서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우승한 이후로, 비극 작가로서의 왕좌를 만년까지 지켰다. 그가 죽은 다음 아테네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알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전부 123편, 또는 130편의 작품을 썼다고 전하지만 현재 완전히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이아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엘렉트라>, <트라키스의 여인들>, <필로크테테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등 일곱 편뿐이다. 제일 먼저 쓴 작품은 <안티고네>이고 마지막 작품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쓰여진 연대는 각기 다르지만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는 거의 완벽한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하나하나는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완벽한 모티브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삼대 비극이라고 이야기되는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는 테베의 저주받은 한 왕가의 운명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인간의 힘을 초월해 있는 운명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의 양친,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낳자마자 버린다. 그가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저주받은 인간이라는 신탁에 놀라서 라이오스 왕과 왕비는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림으로써 이 저주받을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목자의 손에 구원되어 코린토스 왕가에서 자란다.

  세월이 흐른 다음 오이디푸스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라이오스 왕을 만나 아버지인 줄 모르고 그를 죽인다. 그리고 테베로 들어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위에 올라 이오카스테(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다. 이오카스테의 몸에서 자녀 4명을 낳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테베에는 전염병이 창궐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맹세에 속박되어 두 눈을 찔러서 장님이 되고 나라를 잃는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임을 까맣게 모르고 살인범을 저주한다. 그러나 그 저주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저주였다는 비극적인, 어쩌면 희극적이기도 한 아이러니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나라를 잃고 방랑하는 오이디푸스의 최후를 그리고 있다. 딸 안티고네의 손에 끌려 각처를 유랑하던 오이디푸스는 약속된 죽음의 땅, 콜로노스에 이르러 최후를 장식하지만 운명의 손은 아직도 그를 풀어주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고 두 아들을 저주하고 친구들을 저주하며 신에게로 돌아간다. 이 무서운 저주는 낱낱이 실현된다. 이 저주는 오이디푸스의 저주가 아니라 바로 ‘운명’의 저주이기 때문이다.


*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와 아들 폴류네이케스의 비참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형제끼리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두 형제는 모두 쓰러진다. 그러나 새로 왕위를 차지한 크레온 왕은 고집을 부려 폴류네이케스 시체의 매장을 막는다. 안티고네는 주변의 만류와 처벌을 무릅쓰고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버지인 왕을 만류하던 왕자 하이몸은 약혼자인 안티고네의 죽음에 상실하여 자살하고 이 소식을 들은 왕비도 자살한다. 이렇게 라이오스 왕가에 깃든 저주는 막을 내린다.


“비극적인 것은 현실 존재의, 그것도 인간의 현실 존재의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을 인간 존재라는 포괄적인 존재를 근원으로 하는 무서운 갈등을 통해 나타낸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을 볼 때에는 그것을 봄으로써 비극적인 것으로부터 풀려나 일종의 카타르시스, 니르바나를 이루게 된다.”

 - 20세기 철학자 칼 야스퍼스, <비극론>에서 -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나는 젊었을 때 열심히 학자와 성인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은 이론을 배웠네.

그러나 언제나 되돌아 나왔네.

내가 들어간 그 문으로.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에 나오는 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읽으면 나는 언제나 이 시를 연상한다. [7]


성인도, 위대한 학자도 인생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인생은 그만큼 광막하고 인간은 그만큼 무한하다. 대우주가 넓은 것이 아니라 ‘육척 단구’로 표현되는 우리 인간의 삶이 넓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천, 수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이 살았으면서도 ‘삶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만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이 수수께끼를 인간은 즐겨 ‘운명’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행복도, 불행도,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거대한 힘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 삶의 신기함에 현혹되어 인생의 비밀을 풀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온갖 위대한 학설을 다 익혀도 결국 인생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하는 오마르 카이얌의 체념은 결코 소극적인 단념이 아니라 광대한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승화일지도 모른다. [8]


본문

안티고네: 누구든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돌로 때려 죽인다는 거야. 이젠 알아들었겠지? 네가 고귀하게 자라났는지, 또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났지만 비천한 여자인지 보여줄 때가 왔다. 

이스메네: 가엾은 언니, 일이 그렇게 됐다면 나는 아무 소용도 없겠지? [18]


이스메네: 우리가 법을 어기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을 훼손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게 죽을 거예요. 우선 우리는 남자들과 싸워서는 안 되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둘째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일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쓰라린 명령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의 망령들에게 용서를 빌면서, 강한 힘이 나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의 말에 복종하겠어요.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안티고네: 강요하진 않겠다. 아니, 네가 도와줄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네 도움은 반갑지 않다. 자 네 맘대로 해라. 그러나 나는 오빠를 묻어 줄 테다. 그 일로 해서 죽는다면 얼마나 좋으냐? 죄 없는 죄를 짓고 사랑하는 오빠와 함께 잠들겠어. 산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게 더 착실히 도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야. 저 세상에서 영원히 살 테야. 신께서 정해 놓은 숭고한 법을 어기기 싶거든 네 맘대로 해라.

이스메네: 언니, 신께서 정해 놓은 법을 어기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나라에 대항할 힘은 없어요.

안티고네: 핑계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나는 가서 사랑하는 오빠를 묻어주겠다. [20-21]


이스메네: 끔찍한 일 때문에 언니는 흥분하셨어요.

안티고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나는 가장 즐겁단다.

이스메네: 물론 그렇지요. 가능한 일이라면. 그러나 언니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해요.

안티고네: 어쩔 수 없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라도 해봐야지.

이스메네: 안 될 일에는 처음부터 손을 대지 말아야 해요.

안티고네: 그렇게 말하면 나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오빠도 너를 증오하는 마음을 갖게 될 거야. 그러니 날 내버려 둬. 무서운 짓을 저질러서 바보가 되는 것은 나 혼자뿐이니까. 천하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어.

이스메네: 꼭 그렇게 하셔야겠다면 가세요. 이것만은 확실해요. 언니가 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언니가 사랑하는 분은 참으로 언니를 아낄 거예요. [21]


크레온: 그가 어떻게 다스리고 어떠한 입법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그의 영혼과 정신과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기 어려운 법입니다. 나라를 이끄는 최고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최선의 정책을 실시하지 않고 두려움이 앞서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가장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또 전에도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또한 조국보다도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고려할 여지도 없는 자입니다. 언제나 만사를 꿰뚫어 보시는 제우스신은 알고 계시거니와, 나는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본다면, 결코 침묵을 지키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나라의 적을 내 친구로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와 같아서 이 배가 순탄한 항해를 할 때에만 우리는 참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이 위대한 나라를 지켜 나가려는 원칙입니다. [26-27]


파수병: 제 이야기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것일지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타고난 운명만큼 당할 뿐이라는, 한 가지 희망만은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29]


크레온: 그런 자들이 한 짓이야. 나는 잘 알고 있어. 파수병들을 속여서 매수해 놓고 이런 일을 저질렀어. 이 세상에 퍼져 있는 것 중에서 돈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돈은 나라를 더럽히고 돈은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돈은 정직한 사람들을 꾀어내서 부끄러운 짓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돈은 백성들에게 나쁜 짓과 불경스러운 온갖 짓을 가르친다.

그러나 돈에 팔려서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은 조만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32-33]


경이로운 것이 허다하지만,

인간보다 경이로운 것은 없구나.

강한 남풍에 밀리며

삼켜 버릴 듯 사나운 물결을 헤치고

흰 빛 바다를 건너가는 그 힘.

해마다 쟁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을 부려 땅을 파헤치니

최고의 신, 불멸의 지칠 줄 모르는 대지의 신조차

인간에게는 지쳐 버린다.  [35]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교활하고 풍부한 재주 때문에

인간은 방금 선인이었다가도 곧 악인이 되누나.  [37]


파수병: 오, 왕이시여, 사람은 무슨 일에 대해서든 함부로 맹세할 것은 못 됩니다. 나중 생각이 처음의 결심을 뒤집어 놓기 때문입니다. 저는 채찍질하는 듯한 왕의 위협이 무서워서 다시는 쉽사리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즐거운, 뜻밖의 기쁨을 안고 비록 맹세를 어기는 일이긴 하지만 이 아가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아가씨는 시체에 자비를 베풀다가 붙잡혔습니다. 이번에는 제비를 뽑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행운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제것입니다. [38]


안티고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명령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크레온: 그렇다면 네가 정녕 그 법을 감히 위반했단 말이지?

안티고네: 네, 그 법은 제우스신께서 만든 법이 아니니까요. 하계의 신들과 함께 계신 정의의 신도 이런 법을 세상에 반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글로 씌어지지는 않았으나 영원한 하늘의 법을 어길 수가 있을까요? 저는 왕께서 정하신 법이 하늘의 법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 법이 언제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인간의 자존심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신 앞에서 하늘의 법을 어겼노라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왕의 포고가 아니더라도 저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제 명을 다 살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온갖 불행을 겪으며 산 사람이라면 죽음은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운명을 맞이한 것도 저에게는 보잘 것 없는 슬픔입니다. 어머님의 아들을 묻지도 못하고 땅위에 놓여있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왕께서 보시기에는 이번의 제 행동이 어리석겠지만 어리석은 재판관만이 저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있을 거예요. [40-41]


크레온: 지나친 고집은 가장 초라한 것임을 가르쳐 주마. 불에 달궈 다진 가장 단단한 쇠가 잘 부러지고 잘 휘는 것을 너도 자주 보았겠지. 사나운 말도 작은 재갈 하나로 순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이웃집 노예라면 자존심은 허락되지 않는다. 공포된 법을 위반했을 때 이 계집애는 이미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보라. 또다시 무례한 말을 하는구나. 이렇게 자랑을 하며 자기의 행동에 기뻐 날뛰다니. [42]


안티고네: 친오빠의 장례보다 더 고귀한 영광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누구보다도 축복을 받은 분이시니까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크레온: 테베 사람 중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를 제외하고는.

안티고네: 이분들도 제 생각과 같습니다. 다만 왕을 생각해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을 뿐이지요.

크레온: 너는 동떨어진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럽지 않느냐?

안티고네: 오빠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43]


크레온: 그러나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과 똑같이 대접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안티고네: 저승에서는 다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크레온: 원수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죽은 다음에도......

안티고네: 증오는 제 천성에 맞지 않아요. 오직 사랑만이 제 천성이에요.

크레온: 그러면 저 세상으로 가거라. 꼭 사랑해야 한다면 죽은 자들이나 사랑해라. 나에게 목숨이 있는 한 여자가 나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44-45]


이스메네: 이렇게 말하면 언니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저도 그 일을 저질렀습니다. 저도 처벌을 받겠습니다.

안티고네: 아니다. 네가 그런 일을 하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너는 처음부터 찬성하지 않았고 또 나도 너를 가담시키지 않았다.

이스메네: 지금 언니에게는 재난이 닥치고 있어요. 언니와 함께 고난의 바다를 헤쳐나간다면 저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안티고네: 누가 이 일을 했는지 하이데스와 고인은 아신다. 말로만 친구라고 하는 자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는 아니다.

이스메네: 아, 언니,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함께 죽게 해 주세요. 저도 고인을 추모해야 합니다.

안티고네: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손도 대지 않을 일을 했다고 주장하지도 말아라. 나 한 몸의 죽음으로 충분하다.

이스메네: 언니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안티고네: 크레온 왕께 여쭈어 봐라. 너는 그분 걱정만 하고 있으니.

이스메네: 아무 도움도 안 될 텐데 왜 저를 괴롭힙니까?

안티고네: 옳은 말이다. 비웃어 봤자 비웃는 내가 괴로울 뿐이다.

이스메네: 말씀해 주세요. 지금이라도 언니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

안티고네: 네 일이나 걱정해라. 네가 모면하더라도 시기하지 않겠다.

이스메네: 아, 불쌍한 이 몸! 저는 언니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나요?

안티고네: 너는 삶은, 나는 죽음을 택했다.

이스메네: 적어도 저는 언니의 선택에 찬성하지 않았어요.

안티고네: 너를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스메네: 어쨌든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어요.

안티고네: 기운을 내라. 너는 살 테니까. 그러나 나는 고인을 받들기 위해 오래 전에 목숨을 내던졌다. [46-47]


크레온: 얘야, 네 약혼녀의 확정된 운명을 듣고 이 아비에게 화를 내러 오는 길이냐? 아니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너는 나를 계속 좋아하겠느냐?

하이몬: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아버님은 지혜로우시니, 제가 가야 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아무리 결혼식이 인륜의 대사라 하더라도 아버님의 훌륭한 가르침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크레온: 그렇다. 얘야, 매사를 아비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평생 명심해라. 사람들은 충실한 애들이 집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게 소원이다. 아비의 원수에게는 악으로 갚고, 아비의 친구는 아비와 마찬가지로 존중하는 그런 애들을 보는 게 소원이다. [51]

   

크레온: 내가 내 집안에서 반역자를 기르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반역도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집안에서 의무를 다하는 자는 나라 일에서도 올바를 것이다. [52]


하이몬: 아버님, 신들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성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아버님의 말씀이 옳지 않다고 말할 만한 슬기는 없습니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쓸 만한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아버님을 위해서 남들이 말하고 행하고 비난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는 것이 저의 당연한 직분입니다. 백성들은 아버님이 낯을 찡그리실까 두려워서 아버님의 귀에 거슬리는 말은 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몰래 불평하는 소리, 이 아가씨를 위해 백성들이 한탄하는 시를 저는 듣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아가씨가 하신 일은 훌륭한 일인데도 부끄럽게 죽어야 하다니 얄궂은 운명이구나. 저 아가씨는 친오빠가 피투성이의 싸움에서 쓰러졌을 때,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개나 새가 뜯어먹지 못하도록 오빠의 시체를 묻어주지 않았는가. 저 아가씨는 마땅히 빛나는 명예를 차지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몰래 퍼져 나가고 있는 은밀한 소문입니다. 아버님, 저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은 아버님의 행복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행복한 아버님의 훌륭한 명성만큼 고귀한 자랑도 없으며, 아버님에게도 자식의 훌륭한 명성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님의 기분에만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아버님의 말씀만이, 아버님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말이나 정신에서 자기만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알고 보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더라도 많은 일을 배우고 때에 따라 뜻을 굽히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겨울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곳에서, 바람에 굽히는 나무는 잔가지 하나 상하지 않지만, 뻣뻣이 서 있는 나무는 뿌리도 가지도 다 쓰러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배의 돛을 팽팽하게 펼 줄만 알지, 늦출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배가 뒤집히고 기껏해야 용골을 타고 항해를 마치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면 그보다도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면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53-55]


크레온: 그렇다면 내 나이가 되어 아들한테서 배워야 한단 말이냐?

하이몬: 옳지 못한 말까지 들으셔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리기는 하지만, 저에게서 취할 것이 있다면 제 나이를 따지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6]


크레온: 내 판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이 나라를 다스려야 할까?

하이몬: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크레온: 나라는 통치자의 소유물이 아니냐?

하이몬: 사막에서는 훌륭한 군주가 되시겠군요.

크레온: 이놈! 너는 그 계집애를 두둔하는구나.

하이몬: 아버님이 여자라면...... 정말로 제가 걱정하는 것은 아버님입니다.

크레온: 뻔뻔스러운 놈, 공공연하게 제 아비를 적대하는구나!

하이몬: 아닙니다. 아버님은 정의를 어기고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크레온: 내 왕권을 존중하는 것도 잘못이냐?

하이몬: 신들의 영광을 짓밟는 것은 왕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레온: 오, 비겁한 놈, 계집애만도 못한 놈!

하이몬: 저는 비열한 일 때문에 몸을 굽히지는 않습니다.

크레온: 적어도 네가 하는 말은 모두 저 계집애를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아.

하이몬: 또한 아버지와 저와 하계의 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56-57]


안티고네: 아, 이 나라의 백성들이여, 나는 마지막 길을 갑니다. 나를 위해서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햇빛을 마지막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을 잠재우는 하이데스 신께서 나를 산 채로 아케론 강기슭으로 끌고 갑니다. 나는 신부를 데려가며 부르는 노래도 듣지 못했고 나를 위해 결혼 축가를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호수의 주인이 이런 나와 혼인을 하겠답니다.

코러스: 그러기 때문에 아가씨는 영광스럽게 찬양을 받으며 죽은 자들이 있는 아득한 곳으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가씨는 지루한 병을 앓지도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칼날 밑에 쓰러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여 하이데스로 가는 것입니다. 살아서 하이데스로 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61-62]


코러스: 경건한 행동은 찬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지키려는 사람은 권력에 대한 모욕을 참지 못합니다. 아가씨의 고집 센 성격은 결국 아가씨를 파멸시켰습니다.

안티고네: 울어주는 사람도, 친구도, 결혼 축가도 없이 나는 슬픔을 안고 더 지체할 수 없는 이 길을 가는구나. 아, 불쌍한 몸, 다시는 저 낮별의 거룩한 눈을 볼 수 없겠구나. 그러나 내 운명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한탄하는 친구도 없구나. [64]


안티고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가 오빠를 돌본 것은 잘한 일이었어요. 나는 어린애의 어머니였다 하더라도 또 남편이 죽었다 하더라도 결코 이 나라의 경멸을 받아가면서 그런 일을 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내 말을 보증하는 법칙이 무엇이냐고 물으시겠지요. 남편을 잃으면 다른 남편을 맞이할 수 있고 먼저 난 애가 죽으면 다른 남편의 애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과 어머님은 하이데스 땅에 숨어 계시니 나는 오빠를 우선적으로 돌보았던 거예요. 그러나 오빠, 크레온 왕은 이런 일이 잘못이고 법을 어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를 사로잡아서 이렇게 끌고 갑니다. 신방도, 결혼의 노래도 저와는 인연이 멀어요. 결혼의 기쁨도 애들을 키우는 재미도......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게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66]


안티고네: 테베의 왕자님, 당신이 섬기던 왕의 마지막 남은 딸이, 하늘을 저버리지 않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누구한테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잘 보아 두세요. [67]


테이레시아스: 누구든 잘못은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사람은 이미 어리석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을.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죽은 이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이미 쓰러진 자를 다시 찌르진 마십시오.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것이 자랑스러운 무용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왕을 염려해서, 왕을 위해서 좋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훌륭한 충고자가 왕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권고를 듣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지 않습니까? [72]


테이레시아스: 좋은 충고는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크레온: 어리석음이 최대의 재앙인 것처럼.

테이레시아스: 왕께서도 그 병에 걸리셨습니다.  [74]


테이레시아스: 왕께서는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것을 보며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곧 왕에게서 태어난 자가 왕 때문에 시체에는 시체로 갚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햇빛 속에서 살아야 할 애들을 그늘로 몰아내고 잔인하게도 산 목숨을 무덤 속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옥의 신에게 속하는 자는 묻지도 않고 욕을 보이며 더럽혀진 채로 이 세상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 일은 왕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며 상천의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께서는 신들을 모독한 것입니다. 따라서 노한 파괴자들, 하이데스와 다른 신들의 분노가 왕을 똑같은 재앙에 빠뜨리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돈에 팔려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머지않아 집안의 남녀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개나 들짐승이나 또는 날개달린 새에게 죽은 아들의 장례를 맡겨 놓았던 모든 나라 안의 사람들이 왕의 지독하게도 불쾌한 악취를 맡고는 왕을 증오하며 난동을 부리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저의 화를 돋우었기 때문에 노한 나머지 저는 왕의 심장을 겨냥하고 궁수처럼 화살을, 그 아픔을 피할 길 없는 빗나가지 않는 화살을 쏘았습니다. 얘야, 날 데려가 다오. 왕께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다가 더 신중하게 말씀하실 줄 알게 되고 지금보다는 더 좋은 마음씨를 가슴 속에 간직하시게 될 것입니다. [75-76]


코러스: 오, 왕이시여, 그 사람은 무서운 예언을 남기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검은 머리가 흰 머리로 변한 다음부터, 저는 저 예언자가 우리나라에 거짓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크레온: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내 마음도 괴롭소. 굽히기도 싫지만 반항하다가 자존심을 상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구료.

코러스: 메토케우스의 아드님, 현명한 권고는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크레온: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말하시오. 나는 그대들의 말을 따르겠소.

코러스: 아가씨한테 가셔서 동굴에서 풀어주고 아지도 묻히지 못한 고인에게는 무덤을 마련해 주십시오.

크레온: 그것이 그대들의 충고인가? 내가 굽히기를 바라고 있소?

코러스: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서두르셔야 합니다. 신들의 재빠른 재앙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앞지릅니다.

크레온: 아, 어려운 일이구나. 그러나 내 굳은 결심을 굽히기로 하자. 그대들의 말을 따르겠소. 운명과 공연한 싸움을 벌여서는 안 되지. [76-77]


크레온: 우리들의 판결이 이렇게 뒤집혔으니 내가 그 애를 가뒀던 것처럼 내 손으로 풀어 주겠소. 내 마음은 어지럽기만 하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제정한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인데......  [77]  


사자1: 카드모스와 암피온의 왕궁 옆에 사는 사람들이요, 저는 인간의 인생을 자로 잰 듯이찬양하거나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운명의 신은 매일같이 행복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므로 이 일에 관한한 아무도 기정사실을 예언할 수 없습니다. 크레온 왕은 한때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축복받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카드모스의 땅을 적의 손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나라의 유일한 지배권을 장악하셨습니다. 왕자다운 애들의 자랑스러운 아버지로서 그분은 군림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즐거움을 빼앗겼을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숨쉬는 시체에 지나지 않지요. 원하시거든 댁에다 재산을 쌓아 놓으십시오, 왕처럼 살아 보십시오. 그러나 아무런 기쁨도 없다면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80-81]

사자1: “아, 가엾기도 하구나. 내 예감이 맞았단 말인가? 나는 지금 가장 슬픈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저건 분명히 내 아들의 목소리다. 얘들아, 빨리 가 봐라. 저 무덤에 닿거든 돌들을 비켜 놓은 틈으로 들어가서 동굴 속의 저 소리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하이몬의 목소린지 혹은 내 귀가 신들게 속고 있는지를 알아 보아아.” [83]

  

사자1: 시체가 시체를 안고 쓰러졌습니다. 불쌍한 젊은이는 이 세상이 아니라 죽음의 신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인간에게 붙어 다니는 온갖 저주 중에서 어리석음이 가장 무서운 저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85]


사자1: 지나친 침묵에도 위험한 뜻이 숨어 있습니다. [86]


크레온: 아, 우둔한 영혼이 저지른 죄여! 죽음을 부르는 고집이 저지른 죄여!

아, 우리들을 보아다오. 아들을 죽인 아비와 아비 때문에 죽은 아들을!

아, 내 분별력은 불쌍하게도 눈 먼 장님이었구나!

아, 내 아들아, 너는 젊은 나이에 비명에 쓰러졌구나.

불쌍한 이 몸! 너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아비의 어리석음이 너를 죽였구나!

코러스: 아, 안타깝구나! 이렇게 늦게야 깨달으시다니!

크레온: 아, 나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소. 그러나 그렇다면, 오, 그렇다면, 어떤 신께서 하늘 위에서 나를 짓눌러 잔인한 길로 몰아놓은 다음 내 기쁨을 뒤집어엎고 짓밟은 것이로구나! 아! 아! 인간의 어지러운 업보여! [87]


크레온: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애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

코러스: 고통을 잘 참으시면, 그것은 왕의 분별력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괴로움이 닥쳤을 때에는 그 괴로움의 시간이 짧을수록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89]


크레온: 내 운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나의 최후의 날이여! 오라, 어서 오라! 그렇다, 그것이 최상의 운명이다! 오, 어서 오라, 내가 내일 다시 빛을 보지 않도록!

코러스: 그것은 앞날의 일입니다. 지금은 저희들을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미래의 일은 신들의 손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크레온: 적어도 내 모든 소망은 아까 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코러스: 더 이상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정해진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크레온: 제발 나를 데려가 다오. 이 경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아, 내 아들아, 내가 부지중에 너를 죽였구나! 아들과 아내를. 불쌍한 이 몸!

나는 눈 둘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구나. 내 손에 있는 것은 다 잘못되고, 보라! 절박한 운명이 내 머리 위로 덮쳐 온다. [90]


코러스: 지혜야말로 최고의 행복. 신들에 대한 존경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오만한 자의 호언장담은 언제든 큰 타격을 받고, 벌 받은 자는 늙어서야 현명해진다. [90]



* 내가 저자라면


** 전체적인 뼈대 & 보완점


  이 비극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이다. 그리스 전통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전파를 이야기하면서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더 중대한 명령’이라는 명제를 읽었다. 한 번도 신앙을 가져보지 못한 나는 신에 대한 의무가 참 궁금했다.

  어떤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일까? 이 궁금함 때문에 나는 이 사상이 나타나 있다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읽기로 정했다.


  비극<안티고네>의 가장 큰 갈등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무리한 명령을 내린 국왕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는 안티고네 사이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안티고네의 대사, ‘인간의 글로 씌어지지는 않았으나 영원한 하늘의 법을 어길 수가 있을까요? 저는 왕께서 정하신 법이 하늘의 법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 법이 언제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인간의 자존심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신 앞에서 하늘의 법을 어겼노라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이 문장이 바로 이 유명한 비극의 핵심 문장이다. 안티고네는 단순히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이 정한 자신의 의무라고 믿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친오빠의 시체를 매장한다. 그것은 자신의 남편이나 아이에게는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랑으로 친다면 (아직은 없지만) 남편이나 아이에 대한 사랑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부모가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빠의 시체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신이 정한 의무를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항변이다.

  

  안티고네의 비극에서 나타난 이러한 신에 대한 외경과 의무감이 현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세시대에는 신에 대한 의무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앞섰기에 종교가 정치에 앞서 인간을 지배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신에 대한 의무를 이야기하는 종교가 결국 정치권력과의 투쟁에서 밀리면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고 종교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왔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으로 신에 대한 의무는 종교지도자에 대한 의무와 분리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도 신에 대한 의무가 바로 종교에 대한 의무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안티고네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국가라는 인간이 만든 제도에 의해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우스신을 비롯한 천상의 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 인간이 만든 법을 이긴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천부로부터 받은 고유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생사여탈권을 지닌 왕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인격에 대한 존중과 함께 인간이라면 지켜야할 타인에 대한 예의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오래된 비극이 지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또한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왕과 민심의 이야기를 전하며 명령을 거두어 줄 것을 탄원하는 왕자와의 갈등, 왕의 명령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대신들의 모습, 언니인 안티고네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행동을 함께 하지 않는 동생의 모습 등 수 천 년 전의 이야기가 조금도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의 모습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 앞에서도 죽음을 불사하며 자신의 신념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인간의 약하면서도 강한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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