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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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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6일 06시 33분 등록
 

북리뷰34-강의:나의 동양 고전 독법-20101116


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1941년 8월 23일)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육사에서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전주 교도소에서 20년 20일을  복역하였다.

1988년 8.14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중국고전강독 등을 강의했다.

1998년 3월, 출소 10년 만에 사면 복권되었다.

1998년 5월 1일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정식 임용되어

2007년 정년퇴임을 하고

현재 석좌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9), 딸들아 일어나라 노래하라(1990.6), 손잡고 더불어(1995.3), 나무야 나무야(1996.9), 신영복의 엽서(2003.12), 신영복(2003.11), 강의(2003.12), 신영복 함께 읽기(2006.8), 처음처럼(2007.2), 여럿이 함께(2007.5)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루쉰전-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공역, 1992)

중국역대시가선집 전 4권 (공역, 1994.4), 사람아 아, 사람아!(1991년 초판, 2005 재출간)

등이 있다.


1988년도에 출간된 대표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휴지와 봉함엽서 등에 깨알같이 써 계수, 형수, 어머니, 아버지등 자신의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묶은 에세이집이다. 무기수라는 절망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이 그 절망 속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한 탓인지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저서로 알려져 있다.


출판사가 날개부분에 뽑아놓아 많이 소개되는 대표적인 본문인 다음 문장은 1985년 8월 28일 대전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 문장은 교도소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그가 느낀 가장 기초적인 절망을 말하고 있는데, 늘 그렇듯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가장 큰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 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스무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케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으로 만듭니다.”

가석방 이후 많은 저술활동과 강의를 하는 신영복 교수는 그때와는 매우 대조적인 정신적, 신체적 자유로움 속에서 학문적인 자유를 극치로 누리듯 젊은이에게 동양고전 강의를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 “강의”인듯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장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P. 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P. 17]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 290쪽

[P. 18] 나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입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박사와 동학 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한학漢學의 대가입니다. 이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같은 감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함께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함께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였고,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가 KBS의 <인물현대사>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P. 19]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사회, 일제 식민지 사회,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P. 19]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던 의병 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서 번역 일을 도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같이 공부하고자 하는 예시 문안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P. 20]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P. 21]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P. 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P. 22]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P. 23] 또 한 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P. 23]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P. 23] ‘관계론’에 대해서는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 『경주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의 논문집』)라는 글에서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해두기도 했습니다. 이 서론 부분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 失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P. 24]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24]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oxymoron)입니다. 작은 거인(little giant)이나 점보 새우(jumbo shrimp)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천지현황과 I am a dog

[P. 25] 고전 강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P. 27]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P. 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P. 30]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P. 32]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P. 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P. 34]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P. 35] 동양 사상이 비록 윤리적 자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러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P. 37]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결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P. 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P. 38]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集合과 장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P. 39]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P. 39]  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P. 41]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P. 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P. 42-43] 이처럼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 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P. 43-44]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勘天役物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事前에 견제하고 사후事後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P. 44]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고 지구과학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P. 44]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P. 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P. 46]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와 지양에 의하여 과연 새로운 문명이 모색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근대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성 원리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P. 46] 그리고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사적 과제와 직결되는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민족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명사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분단과 냉전 질서의 청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극복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P. 47]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P. 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

[P. 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P. 62]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P. 67] 『서경』은 2제(요堯·순舜) 3왕(우왕禹王·탕왕湯王과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주고받은 언言,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書 또는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P. 68]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 민족은 무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p. 70]『서경』에서는 단 한 편만 골라서 읽기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가장 신뢰성이 있는 주공 편에서 골랐습니다.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周書, 「無逸」

이 글은 주공이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 창건 초기의 어려움을 도맡아 다스리던 주공의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p. 70]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P. 71]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 사상은 주나라 시대라는 고대사회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 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P. 72] 여기서 주공周公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이름이 희단姬旦이지요. 주공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를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逆取)에 의하여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때의 일입니다.

[P. 73] 이 여상이 바로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74]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P. 75]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P. 76]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 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P. 77]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P.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P. 78] 『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17편입니다.

[P. 80]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유배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함과 정치적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81] 이러한 굴원의 이유에 대하여 어부는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를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깊은 생각과 고결한 행동)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P. 81]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P. 81]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어부는 노를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P. 81]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P. 8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P. 83]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현재의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물론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3장 주역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P. 87]『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87]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P. 88]『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동양사상의 이해에 메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P. 88].『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P. 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P. 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90]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경經과 전傳

[P. 90]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P. 91]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P. 91-92]『주역』의 경은 8괘,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8괘를 소성괘小成卦라 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大成卦라고 합니다.

[P. 92] 여러분이 혹시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P. 92]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P. 95] 『주역』에는 8개의 소성괘와 64개의 대성괘가 있습니다. 이 64개의 대성괘마다 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마다 효사가 붙어 있습니다. 『주역』의 경經은 8괘, 64괘, 괘사, 효사의 네 가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경의 양만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입니다.

[P. 95] 그러나 우리는 『주역』을 64개의 대성괘를 중심으로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판단 형식이 바로 이 대성괘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대성괘에는 그 괘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고 괘 전체의 의미를 나타내는 괘사가 달려 있으며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효와 그 효를 설명하는 효사가 달려 있습니다. 이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 범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적 범주로 이해하는 경우 우리는 칸트나 헤겔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주들과는 그 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범주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 형식의 단순함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읽기의 기초 개념

[P. 96] 양효()는 하늘(天) 또는 남자(男)를 나타내고 음효()는 땅(地) 또는 여자(女)를 나타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세 개의 효로 한 개의 괘를 만듭니다. 세 개의 효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세 개의 효로 이루어진 괘를 소성괘라 하고, 소성괘 두 개가 대성괘가 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집니다. 효의 명칭은 아래에서부터 초효初爻, 이효二爻, 삼효三爻, 사효四爻, 오효五爻, 상효上爻로 읽습니다. 양효를 구九, 음효를 육六으로 씁니다. 그래서 초효가 양효인 경우에는 그것을 초양初陽이라 읽지 않고 초구初九라 읽습니다. 그리고 이효가 음효인 경우에는 이음二陰이라 읽지 않고 이륙二六이라 읽습니다

[P. 96]  양을 구라고 하고 음을 육이라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9가 홀수이고 6이 짝수여서 각각 양과 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정도 이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제1효를 초효라 하고 제6효를 상효라 합니다. 그래서 초륙初六, 상구上九 등으로 씁니다.
[P. 97] 8괘의 모양·이름·작용·형상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8괘의 이름과 성격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역』 독법의 기본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P. 98]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효 중에서 양효가 홀수이면 양괘, 음효가 홀수이면 음괘가 됩니다.

[P. 98] 대성괘는 상하 두 개의 소성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괘를 상괘上卦 또는 외괘外卦라 하고 아래 괘를 하괘下卦 또는 내괘內卦라 합니다.
   대성괘는 두 소성괘의 성질, 위치에 따라 그 성격과 명칭이 정해지기도 하고 두 소성괘가 이루어내는 모양에서 명칭과 뜻을 취하기도 합니다.

[P. 99] 예를 하나 더 들어보지요. 진괘晉卦는 곤괘坤卦() 위에 이괘离卦()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진괘의 모양은 입니다. 곤은 땅(地)을 의미하고 이는 불(火)을 뜻합니다. 땅 위에 불이 있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이 진괘는 지평선에 해가 뜨는 형상으로 풀이하여 이름을 진晉으로 하고 그 뜻을 나아갈 진進으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역』에는 대단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位와 응應

[P. 100]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初), 2, 3, 4, 5, 6(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 중에서 1, 3, 5는 양효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의 자리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失位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거나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가 실위입니다.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P. 107]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 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P. 107] 『주역』周易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와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하였습니다.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P. 130]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32]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 132-133]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4장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춘추전국시대

[P. 137]『논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노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P. 138] 춘추 전국시대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는 철기鐵器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원전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 특유의 광범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P. 138] 둘째,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함께 구舊사회질서가 붕괴되는 사회 변동기입니다. 천자天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諸侯(특정국 제후가 공公)―대부大夫(상위 대부가 경卿)―사士(가신家臣)―서인庶人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P. 139] 셋째,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화제방의 시기입니다. 주 왕실이 무너지면서 왕실 관학을 담당하던 관료들이 민간으로 분산되어 지식인(士君子) 계층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계층은 민간인 신분으로 강학講學 활동을 하거나 학파의 출현을 주도하게 됩니다. 공자학파 역시 춘추 말엽에 활동하던 여러 민간 학파 중의 한 갈래로 분류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기에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정책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쟁적으로 경주되는 시기입니다. 패권 경쟁을 위한 정치 기구의 확충과 전문적 지식에 대한 요구가 커짐에 따라 정신노동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입니다. 이른바 제자백가의 시대이고 백화제방의 시대입니다. 공자의 사설私設 학숙學塾은 이러한 수요에 부응한 관리 소개소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140] 중국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온 사상이 바로 유가 사상이고 그 중심이 공자이고 『논어』입니다.

[P. 141]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배움과 벗


[P. 14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P.142] 학습이 그 자체가 기쁨일수도 있지만 대체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것입니다.

[P. 143-144]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P. 145]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

[P. 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그릇이 되지 말아야

[P. 150]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군자의 품성에 관한 것이며 유가 사상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합니다.

[P. 156]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지요.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바탕이 아름다움입니다.

[P. 158]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윽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공존과 평화

[P. 160]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 다.”

[P. 160] 동양학에서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경우 그 개념 자체를 상술詳述하거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개념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뜻이 드러나게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P. 163]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임자 없는 시체가 되지 마라

[P. 166] “무쇠방에 갇혀 죽어가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중국인의 각성을 위하여 치열한 일생을 살아갑니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

[P. 179] 일반적으로 학은 배움(learning)이나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런데 사를 생각(thought) 또는 사색思索으로 읽을 경우 사가 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P. 183] 그가 주장하는 바는 요컨대 이론은 주관적이고 실천은 결코 주관적일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P. 188]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P. 189] 대중은 결코 속일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P. 190]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 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P. 191]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광고 카피의 약속

[P. 195] 문은 형식을 의미하고 질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핵심은 내용과 형식의 통일에 관한것입니다.

[P. 197]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들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학습과 놀이의 통일

[P. 199]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 199-200]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P. 201]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雍也」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 靜的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P. 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 맹자의 의義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P. 212]  맹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P. 212]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P. 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P. 233]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잇습니다. 그런 경우 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P. 237] 우리 주변에서 ‘차마 있을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P. 242]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에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책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P. 244]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P. 244]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P. 245]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도道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P. 253]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老莊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拮抗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유가와 노장이라는 두 축은 중국 사상사의 오래된 심층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노자』老子는 그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통하여 확인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論語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 253]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P. 254]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P. 254]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제자 사상은 보자를 한편으로 하고 여타의 모든 학파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lee.

[P. 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258]『노자』는 81장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上篇은 도道로 시작하고, 하편下篇은 덕德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주周나라가 쇠망하자 노자는 주나라를 떠납니다. 이때 관윤關尹이라는 사람이 노자를 알아보고 글을 청하자 노자가 이 『도덕경』 5천 언言을 지어줌으로써 후세에 남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설파한 노자가 언言을 책으로 남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P. 261]『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P. 277]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그렇게 할때만이 그 성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P. 282]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P. 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P. 284]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로雨露가 되어 만물을 생육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생명의 근원입니다.

[P. 285]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 287-288]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P. 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P. 288-289] 약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수 그 자체가 곧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수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흐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 까닭은 물은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낙수落水가 댓돌을 뚫는 이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다수여야 합니다. 양적으로 우세해야 합니다.

둘째, 다수는 곧 정의正義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불벌중책不罰衆責, 많은 사람이 범한 잘못은 벌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신호는 신호 위반자를 처벌하기보다는 신호등을 철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소수의 선동가에 의해서 다수의 의견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언론 권력에 의해서 여론이 조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수라고 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약한 사람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수이기 때문이며 다수가 바로 현실이며 정의라는 것이지요.


빔이 쓰임이 됩니다

[P. 292]  노자 철학의 주제인 무無와 유有의 관계입니다. 수레의 곡은 바퀴살이 모이는 통(hub)입니다. 이 곡에 축軸을 끼웁니다. 곡에 축을 끼움으로써 수레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곡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기고, 방의 빈 공간이 방으로서의 쓰임이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P. 299]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제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 이다.

[P. 300]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다.

[P. 301]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P. 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P. 304]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됩니다.

노자 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 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P.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7장 장자의 소요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P. 309] “우물 안 개구리(井底쿳)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

[P. 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P. 313]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寧生曳尾塗中)는 것이 바로 장자입니다. 부정적이기는 커녕 대단히 낙천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P. 318] 첫째 단계는 극히 현실적인 상식인常識人이며 메추라기와 같이 국량局量이 좁은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단계는 송영자宋榮子 같은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송영자는 송나라 사상가로서 반전 평화주의자이며 특히 칭찬이나 모욕에 개의치 않고 초연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칭찬받으려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초월하지 못한 단계에 있습니다. 세번째 단계로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열자도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유유소대자’猶有所待者, 즉 아직도 의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지요. 넷째 단계가 장자가 절대 자유의 단계로 상정하고 있는, 도와 함께 노니는 소요유의 단계입니다. 소요유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인聖人·신인神人·지인至人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신인·지인은 『장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기無己·무공無功·무명無名의 경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단계가 장자의 이른바 ‘절대 자유’의 경지입니다.

[P. 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P. 321] 현재 우리가 읽는 『장자』는 4세기 서진西晉 때의 곽상郭象이 그때까지 전해오던 여러 『장자』본들을 정리하여 6만 5천여 자 33편으로 편집하고 주를 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아마 다른 『장자』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금본今本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雜篇 11편 모두 33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자 사상의 정수입니다.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등 일곱 편입니다. 이 일곱 편은 장자 자신의 저술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편과 잡편은 내편에 대한 해석으로 후인들에 의한 2차 저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P. 335]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다운 지식

[P. 353] 감추어긴 것을 알아내는 것이 성 聖입니다.

남보다 먼 들어가는 것이 勇입니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늦게 나오는 것이 의 義며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 地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도르게 나누는 것이 인 仁입니다.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P. 355]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P. 367]『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함께 읽어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도 부각되리라 생각합니다.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P. 380] 이제 만승의 나라가 수천의 빈 성을 빼앗았다면 그 수천 개의 성 모두에 입성하기 어렵고, 수만 리에 달하는 넓은 땅을 빼앗았다면 그 넓은 땅을 모두 다스리기가 어렵다. 이처럼 땅은 남아돌고 백성은 부족하다. 이제 백성들의 생명을 바치고 모든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 하는 일이 고작 빈 성을 뺏는 것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아도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치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P.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꾼 사람을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 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P. 396] “양성군과 나는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만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어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도 묵자학파는 제외될 것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가 제외될 것이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하늘은 하늘일 뿐

[P. 404]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P. 408]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한다. 天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악설의 이해와 오해

[P. 412] 선과 악은 사회적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과 선악을 조합하는 개념구성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P. 418-419]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P. 419]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420]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냉정함은 그의 문장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P. 421]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P. 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P. 423]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P. 423]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仁·의義·법法·정正을 알 수 있는 지知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P. 424] 다음 예시문은 순자의 교육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勸學」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 어진다.




10장 법가와 천하통일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P. 432]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世事變 而行道異也)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P. 433]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P. 436]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한韓나라는 지금의 호남성 서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한비자는 한왕韓王 안安의 서공자庶公子라고 합니다. 서공자라는 것은 모계의 신분이 낮은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한비자는 55편 10만 자字의 『한비자』를 남겼는데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왕에게 간하는 글들입니다.

[P. 437]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국인 진秦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 「오두」 같은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한비자와 동문수학한 이사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황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한비자는 이사와 순자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는 듯합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P. 471] 이지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P. 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 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불교 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 사상입니다.

[P. 475]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P. 475]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P. 477]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P. 477]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相生의 개념이라고합니다. 연緣하여(pratitya) 일어나는(samutpada)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 두 개를 마찰하면 연기煙氣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는 나무와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목상마’二木相摩의 비유입니다.

[P. 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P. 509]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P. 513-514]

郭?駝不知何始名 病?隆然伏行 有類?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曰 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駝非能使木壽且?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P. 514]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3. 내가 저자라면


지금부터 약 20여년전 1990년도 쯤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다. 그때 나는 신영복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사학전공하는 친구의 선물을 받아 그책을 읽었는데,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치 큰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내 느낌은 ‘너무 너무 좋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여러번 이사를 다녔고 많은 책을 버렸다. 심지어 내가 H대를 사직할 당시는 연구실의 책장 4개 정도 가득했던 나의 모든 책을 학교도서관에 기증하고 나왔었다. 내가 버린 책 중에 가장 후회되는 것은 법정의 무소유이다. 그의 입적이후 무소유를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는 기사를 보면서 내가 버리거나 기증한 많은 책들이 다시 나를 애닳게 했다.  그런데 내가 버리지 않았던 몇 권의 책 중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있다. 이 책 만큼은 버릴 수도 기증할 수도 없었다. 늘 다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권했던 책이었지만, 정작 나는 그 이후로 다시 읽지 못했다. 시간에 늘 쪼들렸고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있어서 다시 읽지는 못했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누런색 표지의 햇빛출판사 책을 볼 때면 웬지 다시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래서 신영복의 이름은 잊을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성공회대학교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저서를 내신 것도 알았다. 

이 책 『나의 동양 고전 독법 : 강의』는 성공회대학교에서 고전 강독이라는 강좌 명으로 진행한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감옥속의 죄수들은 당연하겠지만 자유를 가장 그리워 할 것인데, 지식인 신영복은 복역 중 독서와 사색으로 자유가 절박한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했다. 자유로움에 대한 절절한 청년 지식인이 선택한 감옥에서의 도양고전 공부는 육체는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있었으나, 그의 정신만큼은 그가 읽었던 많은 동양고전과 함께 의식 최상층을 자유롭게 비상했을 것 이다. 그런 과정을 통과했기에 경제학 전공자가 동양고전 독법에 대한 강의를 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동양학 공부 방법에 대한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신영복은 많은 고전을 소개하고 있다. 1장은 서론으로 자신이 동양고전과 어떤 과정을 통해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감옥에서 동양고전을 공부할 때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의 기본적인 철학에 대한 말들이 조금 나온다.  『시경』『서경』『초사』에 대한 소개와 강의 내용인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에서는 거짓 없는 삶의 진정성을 표현한 것이 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3장은 주역에 대한 소개인데 그는 주역을 철저히 관계론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4장 논어편에서도 그는 논어를 인간관계의 보고라고 말하고 있을 만치 관계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5장의 맹자편에서는 맹자의 의義라는 말로 유교의 핵심인 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6장 노자 편에서는 노자의 도와 자연을 설명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7장 장자의 소요에서는 장자특유의 에피소드 등을 통한 가르침을 재현하고 있다. 8장 묵자에서는 겸애와 반전 평화를 말하고 있다. 9장 순자는 유가와 법가 사이라는 제목으로 ‘ 예와 악’이 함께 있는 인간 사회에서의 유가, 법가의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10장은 한비자에 대해 말하며 법가와 천하통일을 논하는데 지략이 뛰어났으나 친구의 지략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한비자의 예를 통해 돌고 도는 인생사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치며’ 라는 11장에서는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등을 다루고 있다. 아마 본문의 장으로는 소개하지 못했으나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동양학문이라고 여긴 것을 정리한 듯하다. 어쩌면 11장에 소개된 것을 중심으로 두 번째 강의 저서가 출간될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점 :

다만 좀 아쉬웠던 점은 이 책이 신영복교수가 강의한 것을 그대로 출판해서 인지 가독성이 조금 떨어졌다. 또한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이 훨씬 귀에 장 들어왔을 듯한 구어체라는  이 조금 아쉬웠다. 또한 각 고전별로 간단한 소개와 중요성을 먼저 정리하고 그의 강의가 시작되었더라면 책으로 읽는 우리에게 더 전달이 잘되었을 듯 하다. 또한 각 동양고전들의 변천과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동양고전의 문외한인 비전공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작업은 동양철학 전공자들이 하고 있겠으나, 이 책의 서문이나 각 장의 초반부에 요약과 관계성에 대한 도표정도가 들어있었더라면 전체 구도를 잡는데 가이드가 되었을 듯해 조금 아쉽다. 또한 각 동양고전들의 유래와 배경등도 본문 속이 아닌 분리된 형태의 박스처리 등을 했더라면 독자에게 훨씬 도움이 되었을듯하다. 이것은 편집의 묘인데 애정 있는 편집자가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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