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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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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6일 10시 21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신영복 /돌베게

< 저자에 대하여 >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 출생으로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던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의 옥중생활을 해온 그는 20여년의 복역을 마치고 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해 17년간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6년말에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이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길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신영복 선생을 생각하면 달과 손가락의 비유를 맨 먼저 떠올리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언어의 관념성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는 비유는 불교 경전에 이론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깨달음의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뜻이다. 그렇듯이 그도 실천과 무관한 논리적 언어의 관념성을 경계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적으로 검증된 품성과 사상을 중시한다.

신영복 선생은 한학과 서예에도 조예가 높기로 유명하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천상 선비가 되었을 것. 그의 붓글씨는 획의 굵기와 리듬에 변화가 많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른바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협동체', 혹은 '연대체'라 불리는 이 글씨들은 마치 서로 의지해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모습과 똑 닮아 있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권 (1998년 6월), 더불어 숲 2권 (1998년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년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년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년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년 12월),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년 1월),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년 7월),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년 8월)

*참고자료

1. 신영복 함께 읽기 - 강준만 외 / 돌베게
2. 신영복이 묻는다…"손가락 아닌 달을 보고 있습니까" - 이병수 기자 / 프레시안
3. 더불어숲 홈페이지 www.shinyoungbok.pe.kr

☞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책을 스윽 읽어보면서 작가가 책에서 주장하는 관계론이 허공속의 뜬 이론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 행동하여 얻은 실천적 철학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신영복이란 인간자체에 반한 지인들이 '신영복 선생을 거울로 삼고 닮아가려는 사람들이 만든 문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에 이러한 모든 스승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1장 서론

*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p15. 내가 동양고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어요. 6학년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그때의 붓글씨나 한문 공부란 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p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 국어사전 290쪽

p18.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p20.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p21.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p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1 먼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談論이 주류를 이룹니다.

p22.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p22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文明論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p23. 또 한 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 천지현황과 I am a dog

p25. 욕심입니다만 고전 예시 문안을 여러분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자나 한문 공부는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문 공부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른 어학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습니다.

p27. 이 책에는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한자나 한문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그 뜻을 재조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p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p32.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p33. 서구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entry point)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p34.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p34.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着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着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p38.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p38.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p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도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p40. 일반적으로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성人性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 아래에 인간적 가치를 배치하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p40.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42.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 모순의 조화와 균형

p43.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勘天役物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事前에 견제하고 사후事後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p45.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p46.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장 오래된 시詩와 언言

*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p52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p52 어쨌든 국풍의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광범하게 불려지고 또 오래도록 전승된 노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민요民謠로 보아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노래가 계속 불려지고 전승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4. 별리別離를 노래한 시인 정지상의 「송인」送人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 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이별의 아픔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읊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가 우리나라 한시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면 부벽루에 걸려 있는 한시 현판을 모두 내리지만 이 시 현판만은 그대로 걸어두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시의 자존심인 셈이지요. 시인도 매우 훌륭한 사람임은 물론입니다.

*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p56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社會詩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p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p62. 물론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수집하는 까닭은 이러한 진실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민심을 읽고 민심을 다스려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채시관들이 조직적으로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여정통’樂與政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오늘의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고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p64.『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p70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p74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p75.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p76.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히기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p76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 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p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 『초사』의 낭만과 자유

p78『시경』이 북방 중원의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 운문韻文인 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의 남방 문학입니다. 남방 국가인 초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詩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초사』는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 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시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굴원이 중국 시인의 대표인 것도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p8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82.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p82. 사실 『초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영원한 삶의 고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장 주역의 관계론

* 바닷물을 뜨는 그릇

p87.『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p89.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p89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p89『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 경經과 전傳

p91.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經)를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가 해설한(傳)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卜筮迷信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p91『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4장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 춘추전국시대

137.『논어』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자어록孔子語錄입니다. 『노자』에는 노자老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여러 제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매우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공자 당시에 『논어』라는 책이 존재했을 리가 없습니다.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학단學團 차원의 사업으로 편찬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 당시의 정황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공자의 시대는 기원전 500년 춘추전국시대입니다. 5천 년 중국 역사에서 꼭 중간으로, 중국 사상의 황금기인 소위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입니다.

p141.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관을 이유로 들어 그를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상가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p141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시 문안을 읽어가면서 필요한 대목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 배움과 벗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學而」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 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p143-144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습’習에 관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습’을 복습復習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습’의 뜻은 그 글자의 모양이 나타내고 있듯이 ‘실천’實踐의 의미입니다. 부리가 하얀(白) 어린 새가 날갯짓(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논어』에는 이곳 이외에도 ‘습’을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할 곳이 더러 있습니다. 같은 「학이」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도 매우 잘 알려진 것입니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 不忠乎

與朋友交而 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 가지(또는 여러 번)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145. 우리가 『논어』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사회 변동기에 광범하게 제기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입니다. 앞으로 여러 가지 문안을 통해 다시 확인되겠지만 『논어』는 인간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 관계에 관하여 깊이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회의 본질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만은 여러분과 합의해두고 싶은 것이지요.

p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 공존과 평화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子路」

162.『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p162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p191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實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191.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宥和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2. 나도 오랜만에 읽어보는 셈입니다. 『논어』의 이 대화가 양극단을 좋지 않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인으로부터 호감을 받는 경우와 만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 둘 다 좋지 않다는 것이지요. 양극단은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위선僞善 또는 위악僞惡인 경우에만 상정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최소한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 학습과 놀이의 통일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p199.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p200.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p200. 세계 인식이 정보 형태의 파편적 분석지分析知에 머물거나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낙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p200 지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 산과 강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雍也」

p201. 지자는 눈빛도 총명하고 사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며 특히 사물의 변화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자는 일단 앉아 있는 사람으로 형상화됩니다. 지자가 서 있거나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임에 비하여 인자는 한곳에 앉아서 지긋이 눈 감고 있을 듯합니다. 수고롭지 않은 나날을 보낼 것 같은 인상이지요. 이러한 비유가 너무 문학적인 설명입니까? 인자는 한마디로 세상의 무궁한 관계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지자는 개별적인 사물들 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p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天網恢恢 疎而不漏).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자의 모습

p203.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자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자子는 학자를 뜻하고 가家는 학파를 뜻합니다만, 그 수많은 제자諸子 중에서 공자만큼 인간적 이미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논어』라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자의 이미지가 미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곽말약郭沫若 같은 대학자도 동의하는 것이지요.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묘비명이나 예찬문禮讚文을 읽을 것이 아니라 그의 반대자의 견해를 통하여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p203 나는 물론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자 사상은 하나의 사회사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 개인의 사상도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마오어록』이 마오쩌둥 개인의 어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집단적 사상이듯이 『논어』라는 책은 공자 사후에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공동으로 집필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5장 맹자의 의

*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p213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에서는 『맹자』로써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의 문학적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p217.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p244. ‘난위수’難爲水와 ‘난위언’難爲言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물이기 어렵다, 물이라 여기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문법적으로 무리가 없고 그 뜻도 좋습니다.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p244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난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老子의 ‘지자불박知者不博 박자부지博者不知’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p245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p245.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 역시 ‘불영과불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章은 수많은 무늬(文)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治人의 장場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치인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6장 노자의 도와 자연

* 도道는 자연을 본받습니다

p253.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老莊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拮抗 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유가와 노장이라는 두 축은 중국 사상사의 오래된 심층 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노자』老子는 그 두 개의 축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통하여 확인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論語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53.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進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귀歸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p254. 제도와 문화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생성과 변화 발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언어와 인식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자는 철저하리만큼 근본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인간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종래의 통념을 깨트리고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25장)의 논리가 그것이지요. 여기서 법法은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체계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p261.『노자』는 산문散文이라기보다는 운문韻文입니다. 5천여 자에 불과한 매우 함축적인 글이며 서술 내용 역시 담현談玄입니다. 더욱이 노자 사상은 상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고도의 철학적 주제입니다. 그 위에 간결한 수사법은 여타 철학적 논술에 비하여 월등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독법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제8장

p284. 노자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도무수유道無水有라고 했지요.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써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매우 유명한 장입니다. 특히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道입니다. 물은 물론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도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286. 춘추전국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부국강병의 방법론을 두고 수많은 이론이 속출하게 됩니다. 직접 일하지 않고 패자覇者에게 기생하여 지식을 팔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사사로운 이해를 도모하는 지식인 계층이 사회적으로 확대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노자는 패권 경쟁을 반대하고 그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도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사회학과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 철학적 논리로 승화시킵니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합니다. 여기에 시대를 초월하고 있는 『노자』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논리로 패권 경쟁을 둘러싼 일체의 행위를 반자연의 무도無道한 작위로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p287. 물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뜻이며, 또 가장 약한 존재임을 뜻합니다. 가장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민초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이 없지만 강한 것을 공격하기에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며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제78장). 이 78장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물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유약柔弱이 사직社稷의 주인이 되고 천하의 왕이 되는 까닭, 연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이유를 읽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한 힘이 약한 것에 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p288.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강자가 지배하는 구도에 있어서 약자의 수가 항상 다수라는 사실입니다. 강자가 다수일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핵심입니다.

p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제66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이기선하지以其善下之’. 바다(江海)가 모든 강(百谷)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선善은 well이 아니라 more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노자』가 민초의 전략 전술이며 정치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p289.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인 것이지요.

p290. 그리고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 연대下放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노동·교육·농민·환경·의료·시민 등 각 부문 운동이 각자의 존재성을 키우려는 존재론적 의지 대신에 보다 약하고 뒤처진 부문과 연대해 나가는 하방 연대 방식이 역량의 진정한 결집 방법이라고 생각하지요. 중소 기업, 하청 기업, 비정규직, 여성, 해고자, 농민, 빈민 등 노자의 물처럼 낮은 곳을 지향하는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 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이러한 연대 담론에 있어서 노자의 생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p291. 이상에서 제시한 실천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이란 싸우지 않는 것(不爭)이며 따라서 오류가 없는 것(無尤)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부쟁唯不爭 고무우故無尤’, “오직 다투지 않음으로써 허물이 없다.”

* 빔이 쓰임이 됩니다

p294.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몇 년째 화두처럼 걸어놓고 있는 나의 ‘데미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인간상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없는 듯이 존재하는 분입니다. 모임에서도 발언하는 일조차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후에 누구 한 사람 그분이 참석했는지 참석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분이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그가 참석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통할 정도입니다.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無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p301.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예에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이란 글씨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 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p302.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화자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청자와 화자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 진보란 단순화입니다

p304.『노자』 강독을 끝내자니 미진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유가 측에서도 『노자』를 계속 읽고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노자 사상은 중국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p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제25장)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7장 장자의 소요

*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p309. “우물 안 개구리(井底쿳)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입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장자가 당시의 제자백가들을 일컫는 비유입니다. 교조敎條에 묶인(束於敎) 굽은 선비(曲士)들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갈一喝합니다.

p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사상적 혼란기였습니다. 사이비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횡행하는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음은 물론이고 겨우 패권 경쟁을 위한 정책 대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한 개구리에 지나지 않으며 여름을 넘기지 못하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p311.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p311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규범 밖에서 자유를 추구하던 일민逸民들의 경물중생輕物重生, 즉 개인주의적인 생명 존중론이 양주학파楊朱學派에서 크게 고조되었는데 이 양주학파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장자』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생명의 물리적 보존이나 생물학적 보존뿐만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무한한 소요유의 추구를 표방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라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장자의 철학과 사회학의 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높이 나는 새가 먼 곳을 바라봅니다

p317. 내편內篇 「소요유」에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초월이 바로 장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는 초월의 경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p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無待),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無碍)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p319.『장자』가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안이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가 우리들에게 펼쳐 보이는 드넓은 스케일과 드높은 관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한 스케일과 관점은 바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깨달음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창조적 공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바라보는 것이지요.

*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다

厲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唯恐其似己也 ―「天地」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p334. 저는 한참 만에야 이 구절의 진의를 알아냈어요. 다름 아닌 각성覺醒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p335.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까닭은 문명론도 문명론이지만 자기반성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迷惑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 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p334 자기의 문화, 자기의 생산물, 자기의 언어, 자기의 신神을 강요하는 제국帝國과 패권覇權의 논리가 반성되지 않는 한 참다운 문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나비 꿈

p345. 장자의 ‘나비 꿈’은 두 개의 사실과 두 개의 꿈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매우 함축적인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장자가 꾸는 꿈이며 둘째는 나비가 꾸는 꿈입니다. 이 두 개의 꿈은 나비와 장자의 실재實在가 서로 침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長空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커다란 전체의 미미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요. 개별적 사물과 그 개별적 상相을 하나로 아우르는 깨달음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입니다.

p346. 꽃과 나비가 비록 제물齊物의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꽃은 꽃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입니다. 이 사실을 장자는 물화, 즉 변화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靜態的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物,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緣이라 한다면, 즉 친인소연親因疎緣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 혼돈과 일곱 구멍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儵與忽 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渾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應帝王」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p349.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와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 고기는 잊더라도 그물은 남겨야

끝으로 잡편 「외물」外物의 끝 구절을 소개하고 마치기로 하지요.

이 구절은 여러분도 잘 아는 ‘득어망전得魚忘筌 득토망제得兎忘蹄’의 출전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리고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는 뜻이지요.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言者所以在意 得意而忘言

吾安得夫忘言之人 而與之言哉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p356.『노자』나 『장자』의 원전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노장’老莊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노장 사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득어망전’으로 끝내려는 것이지요. ‘득어망전’으로 끝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론의 관점에서 부언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p356 ‘득어망전’의 전筌은 통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통발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이 통발(筌)을 그물(網)로 바꾸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전筌을 망網으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관계망關係網을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한 천망(天網恢恢 疎而不淚)이나 제석천帝釋天에 있다는 인드라망網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든 ‘득어망망’得魚忘網이든 고기를 잡고 나면 그 고기를 잡는 데 소용되었던 기구를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반대로 고기는 잊어버리고 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어득망’忘魚得網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356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장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됩니다

362.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墨家는 유가儒家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顯學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입니다. 천하 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가 중국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 2천 년 만에 복권된 『묵자』

p367.『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해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시문을 함께 읽어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도 부각되리라 생각합니다.

*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마라

p381.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國家失本 而百姓易務也).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天下之害厚矣). 전쟁의 폐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王公大人樂而行之 則此樂賊滅天下之萬民也).

p382 “거울에 비추지 마라”는 묵자의 금언은 비단 반전의 메시지로만이 아니라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물신주의적 문화와 의식을 반성하는 귀중한 금언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9장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 하늘은 하늘일 뿐

p404-405.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는 공자의 예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 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覇者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 예禮란 기르는 것이다

p418.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 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경우의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이 됩니다.

p418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는 공자의 주례周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순자의 예는 전국시대의 예이며,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 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신 지주층과 상인 계층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사활적인 패권 경쟁을 치르고 있는 패자들에게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은 고매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p420.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순자의 이러한 현실론에 대해 유가의 발전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맹자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 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 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서 한비와 이사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 사상은 현실 인식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p420 순자의 냉정함은 그의 문장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순자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뜻의 창달暢達에 주안을 두었으며, 논설 기능을 가일층 발전시켜 논리가 정연하고 주장이 분명한 위에 전체적인 구성에도 짜임새가 있는 것으로 정평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천론」天論, 「성악」性惡 두 편은 고대 논설문의 규범이 되어 이후의 논설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p420 순자의 예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 곧 법과 제도의 의미로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순자의 인문 철학이 이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굳이 이 글의 뜻을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의 내용을 물질적 욕망의 충족과 규제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자는 법학적·경제학적 의미만으로 예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욕구가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탁월한 인문 철학입니다. 순자가 단순한 법치주의자나 제도주의자가 아니라 뛰어난 인문 철학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가 예론과 함께 교육론을 개진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인문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무는 먹줄을 받아 바르게 됩니다

p422-423. 이 문장은 여러분에게도 매우 귀에 익은 것입니다. 『순자』 「권학」편勸學篇의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p423.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문화적 소산은 사회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회 조직이 바로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예가 곧 제도와 법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법을 준수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러한 제도와 법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요. 더 푸르게 만들기도 하고, 둥글게 만들거나 곧게 만들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리기도 하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p423. 순자가 교육론을 전개하는 것은 첫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욕구 충족이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된다는 성악적 측면이 순자의 교육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으며, 성인이나 폭군이나 군자나 소인이나 그 본성은 같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간관이 되고 있습니다(凡人之性 堯舜之與桀? 其性一也 君子之與小人 其性一也 塗之人可以爲禹: 「性惡」).

p423-424.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인仁·의義·법法·정正을 알 수 있는 지知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까닭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p424 다음 예시문은 순자의 교육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勸學」

쑥이 삼 속에서 자라면 부축하지 않아도 곧게 되고 흰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 어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환경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이 구절은 일반적인 교육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도와 규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자가 맹자에 비하여 인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禮, 즉 제도의 의미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오히려 맹자에 비하여 문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인문 사상이며 발전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p425. 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도人道와 인심人心입니다. 천도天道와 천심天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天地之道)가 아니라 사람의 도(人之所道)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聖人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주의가 감상적으로 피력되지 않고 냉정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장 법가와 천하통일

*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

p431. 우리가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p431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p432.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世事變 而行道異也)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 옥중에서 사약을 받은 한비자

p437.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국인 진秦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 「오두」 같은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했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한비자와 동문수학한 이사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시황에게 참언讒言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한비자는 이사와 순자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는 듯합니다.

p437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눌변訥辯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했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비자를 위로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의 사상과는 반대로 매우 우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인 순자는 그 성정이 강퍅불손强愎不遜하고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지요.

p437-438. 한비자는 엄정한 형벌을 주장하고 유가와 묵가의 인의仁義와 겸애兼愛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절대 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術數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유가의 이단인 순자와 인의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한비자에 대하여 부정적 평가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비자』를 읽어가는 동안에 그러한 선입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p438.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병역兵役·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음은 물론입니다. 군제 개혁, 성문법成文法 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 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군주 권력을 강화하는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의 내용이란 실상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을 거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탁과 발, 책과 현실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及反市罷 遂不得履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自信

也 ―「外儲說左 上」

정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 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은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p452. 이 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나로서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뜻으로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웃지 않았어요.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p452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이나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장 강의를 마치며

p471.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 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에 대한 성찰적 접근에 있어서도 탁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관심만 있다면 이 부분의 연구 성과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

p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 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p474. ‘불’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를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연꽃을 들어 보이는 것이지요.

p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475.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 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p475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 자체”(ding an sich)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p476.『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조주趙州 스님은 사람들(衆)에게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로지 간택揀擇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경우 간택이 바로 분별지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자가 슬퍼했듯이 ‘국역유염’國亦有染, 나라 전체가 물들어 있기 때문에 국가와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477.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영상이 다중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p477-478.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상생相生의 개념이라고합니다. 연緣하여(pratitya) 일어나는(samutpada)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보는 것이 바로 법法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 두 개를 마찰하면 연기煙氣가 일어납니다. 이 경우 연기는 나무에 의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지면 연기도 사라집니다. 연기는 나무와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체론적 존재가 아니며 관계론적 생성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목상마’二木相摩의 비유입니다.

p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果)이며 나무는 원인(因)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果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相摩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그것을 불이무이不二無異라 합니다.

p478. 그런 점에서 불교 사상은 해체 철학의 진보성과 무책임성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책임성이란 모든 존재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의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언어가 어떤 지시적 개념이듯이 삼라만상이 어떤 지시적 표지標識로 공동화空洞化됨으로써 가장 철저한 관념론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꾸로 모든 것을 해체해버리는 거대한 역설입니다.

* 가슴에 두 손

p508. 시와 산문을 묶어서 이야기하자니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와 산문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감성과 정서의 영역으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중에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기억되지만 한 사람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가슴(heart)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사상을 결정하는 부분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이 머리(head)가 아니라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라고 해왔던 것이지요.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논리보다는 관계를 우위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p509-510.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나란히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언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p511.『시경』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시적 정서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공간적으로 상하좌우의 여러 지점地點을 갖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춘하추동의 여러 시점時點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시적 정서와 마찬가지로 서書와 화畵의 영역 역시 풍부한 관계론의 담론을 보여줍니다. “서書는 여如”라고 합니다. 서의 의미는 ‘같다’는 것이지요. 우선 글자와 그 글자가 지시하는 대상이 같다는 뜻입니다. 지시 기호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경우 서書가 상형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새 을乙’ 자는 모양이 백조입니다. 그러나 같다는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같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가 오히려 서도書道의 본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미적 정서, 나아가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인격이 서書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뜻이지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과 서의 관계론입니다.

p511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만 그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은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p512 다음은 유명한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입니다. 전문全文은 너무 길기 때문에 앞부분만 소개합니다. 해석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함의含意는 여러분이 읽어내기 바랍니다.

郭?駝不知何始名 病?隆然伏行 有類?駝者 故鄕人號曰駝

駝聞之曰 甚善 名我固當 因捨其名 亦自謂?駝云

其鄕曰 豊樂 鄕在長安西

駝業種樹 凡長安豪家富人爲觀游 及賣果者 皆爭迎取養視

駝所種樹 或遷徙無不活且碩茂 蚤實而蕃

他植木者 雖窺伺?慕 莫能如也

有問之對曰 ?駝非能使木壽且?也 以能順木之天 以致其性焉爾

凡植木之性 其本欲敍 其培欲平 其土欲故 其築欲密

旣然已勿動勿慮 去不復顧

其蒔也若子 其置也若棄 則其天者全 而其性得矣

故吾不害其長而已 非有能碩而茂之也

不抑耗其實而已 非有能蚤而蕃之也

他植木者不然 根拳而土易 其培之也 若不過焉 則不及焉

苟有能反是者 則又愛之太恩 憂之太勤

旦視而暮撫 已去而復顧

而甚者爪其膚以驗其生枯 搖其本以觀其疎密

而木之性日以離矣

雖曰愛之 其實害之 雖曰憂之 其實讐之

故不我若也 吾又何能爲哉

p514-515. 곽탁타의 본 이름이 무언지 알지 못한다.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그 모습이 낙타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탁타’라 불렀다. 탁타가 그 별명을 듣고 매우 좋은 이름이다, 내게 꼭 맞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도 탁타라 하였다. 그의 고향은 풍악으로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내가 저자라면 >

<강의>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사회변혁기의 춘추전국시대 사상을 중심으로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등 기본 고전에서 가려 뽑은 원문을 예시한 뒤 `관계론'을 화두로 삼아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풀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사상가들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을 모두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그 사상이 결국 현재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자신의 삶속 에피소드와 연결시키고 사회적 현상과 연결시켜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 작가의 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할 수 있었다.

고전읽기에 대해 전공자이면서도 게을리 해왔다는 점을 깊이 반성하면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10년전 대학교때 이후로 교과서에 나오는 한자, 고사성어, 단문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공서적을 읽지 않고 지낸 나에게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세상의 모든 진리는 하나로 관통한다는(一以貫之) 말이 이 책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와 닿았다. 다양한 사상을 이야기하고 소개하지만 결국 관계론으로 꿰어 낼 수 있다. 어떤 이는 “그의 관계론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적 근대 문명 전체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근대 극복의 문명론적 비전이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에 동의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서양중심의 존재론적 사고에서 관계론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함을 말한다. 관계론이라는 것이 새로운 대안이 아닌 이미 수천년 전부터 우리의 사상을 지배했던 과거의 사상에서 충분이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과거의 자산이 미래의 대안으로 적극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전읽기의 핵심이며 溫故知新의 실천적 사례이다.

한문을 가르치면서도 그 당위성에 대해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미 사회적인 풍조와 사상이 서구의 자본주의와 사상에 물들어있어 더 이상 학생과 학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의 교육정책도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인지 더 이상 한문교사로 설자리가 없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한문과목을 축소하고 있고 한 학교에 1명의 교사가 있기도 힘든 실정인 곳이 많아졌다. 책을 읽으면서 전공자로서의 자부심을 다시금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특히 마지막부분에 실려있는 대학교 때 좋아했던 문장중의 하나인「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을 읽으면서 교육의 본질과 나의 교육적 입장에 대해 재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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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1.16 18:05:06 *.236.3.241
 「종수곽탁타전」의 글자 한자한자를 또박또박 적어 놓은 것에서
연주 샘의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

 자신의 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줄만한 책을 쓴다는 거,  쉽지
않지만 참 가슴 뿌듯한 일이다.

몇십년 만에 한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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