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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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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2일 11시 03분 등록

. 저자 소개

 

강신주.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노장사상을 전공한 동양철학자이면서 서양철학의 흐름에도 해박한 그는 쉽게 읽히는 인문학을 지향하며 2007년에 출범한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에 무위자연과 절대자유를 주창한 노자가 사실은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 사상가의 원조라는 주장을 담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을 출간해 주목받았다. 이 밖에도 철학을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연결시켜 풀어 간 《철학, 삶을 만나다》, 전공 분야인 장자의 철학을 현실참여적인 실천철학으로 재해석한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서양철학자와 문학가를 짝지어 자본주의 비판을 시도한 《상처받지 않을 권리》, 김수영, 황지우 등 우리에게 친숙한 현대 시인의 시를 통해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과 현대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를 고찰한《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56개의 주제에 대해 동서양 철학자들의 담론을 비교한 《철학 VS 철학》등을 저술하였다.

장자 ( 莊子 ; BC 369~BC 289? ).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로서  성은 장()이며 이름은 주()이다. ()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했는데 정확한 생몰연대 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 33(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 내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시작하며

 

『장자』에는 노자사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매우 혁명적인 사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망각과 연대의 실천 철학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아주 근본적인 사유이지요. 망각과 연대는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소통(疏通)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통이라는 개념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용어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커뮤니케이션은 어원 그대로 어떤 공적인(communis)영역의 권위를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자유로운 혹은 야생적인 개체를 주어진 공동체의 규칙으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달리 소통은 글자 그대로 막힌 것을 터 버린다는 뜻의 소()새로운 연결을 뜻하는 통()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념입니다. 6

 

장자의 정신은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짧은 구절에 잘 응축되어 있습니다. 노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상가들에게 도는 우리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지고한 대상이었습니다…….그러나 이 대목에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어두운 정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리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진정한 자유는 종교, 국가, 자본 등 초월적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우리의 삶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것으로서 폄하해 왔습니다. 그만큼 종교, 국가, 자본 등의 초월적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들은 바로 우리의 불행과 우울을 먹고 증식되는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자신의 고유한 삶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들은 자유를 되찾을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 삶에 기생해 왔던 초월적 가치들을 단호하게 끊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7

 

자유로운 개체들의 연대는 타자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이나 민중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부터 모색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연대,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운동으로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그 자체로서 우리 삶의 전체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

 

프롤로그_겨울산의 차가운 바람소리

 

어떤 바람과도 마주치치 못하는 구멍 혹은 공허하게 허공만을 가로지르는 바람, 그들 사이에 마주침이란 사건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공백과도 같았을 것이다. 18

 

능선에서부터 정상에 도달하기까지는 대략 세 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 첫째 봉우리는 장자와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장자가 타자 그리고 소통의 문제를 집요하게 고민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해체와 망각의 논리라는 이름이 붙은 봉우리이다. 이 봉우리에서 우리는 장자가 말한 해체와 망각이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타자와 만나는 삶의 세계로 새롭게 출발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셋째 봉우리는 삶의 강령과 연대의 모색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장자가 던지는 최종적인 전언,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는 강령이 어떤 사회적ㆍ정치적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1

 

1부.        장자와 철학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25

 

이런 점에서 나는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 철학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낯섦과 차이를 제공하는 학문이라고. 26

 

여행에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장소가 있듯이, 철학에도 삶을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공간이 존재한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 공간을 초월론적 자리’(transcendental position)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서 초월론적 자리란 삶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지만 여전히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갖는 정신적 지평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임시적 지평이, 삶을 조망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지평으로 간주될 때, 이제 초월론적 자리는 곧 초월적 자리’(transcendent position)로 변질되고 만다. 27

 

초월론적 자리가 절대화된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노자의 ’(), 플라톤(Platon, BC 427?~BC347?)이데아혹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God)을 떠올려볼 수 있다. 27

 

세계를 영원의 모습 아래에서 포착하는 데에는 예술가의 작업 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다. 내가 믿기로는, 그것은 사유의 길이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29

 

첫째, 이 이야기 속에서 대붕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변형(self transformation)’의 상징이다. 변형의 테마. 대붕의 출생 비밀은 그가 원래부터 새였던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물고기였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대붕은 한때 메추라기보다도 더 낮은 지위에 속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건 물고기가 메추라기보다는 바닥에, 지면에 더 많이 속박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붕의 비행은 지유롭다기보다는 오히려 의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의존성의 테마. 물고기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대붕은 자기 마음대로 비행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오직 바다가 움직일정도의 커다란 바람이 불 경우에만, 그럴 때에만 이 대붕이란 거대한 새는 남쪽으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32

 

()이라는 물고기에서 붕()이라는 새로운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붕이라는 새가 가지는 상승과 비약에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35

 

알바트로스와 선원 사이의 차이, 그리고 대붕과 매추라기 사이의 차이! 이것은 우리를 일종의 결단으로 내몰고 간다.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초월론적 자리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일상의 삶에 매몰되어 무반성적으로 살 것인가?’ 물론 보들레르는 선원으로부터 조롱받는 알바트로스가 되고자 하며, 장자는 메추라기로부터 조롱받는 대붕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초월론적 자리에 서려는 비약은, 일상에 매몰된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을 뚫고 끈덕지게 사유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은 보들레르나 장자 같은 시인 그리고 철학자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축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륻레르나 장자가 초월론적 자리에 서 있는 상당히 비범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일 수 있기 때문이다. 41

 

2_낯섦과 차이에 머물기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는 것은 여행하고, 번역하며, 교환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자의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고, 질서 파과적이라기보다는 횡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담보로서 보증된 상품을 서로 매매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헤르메스, 즉 네거리의 신, 메시지와 상인의 신이 있는 것이다. – 세르, 『헤르메스Ⅰ: 커뮤니케이션』 43

 

결국 장자의 대붕은 평지에 서 있음낭떠리지 가장자리에 서 있음”, 즉 평지와 낭떠러지 사이의 차이에서 휑하게 날고 있었던 셈이다. 평지에 서 있는 경험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낯선 경험이 될 수 없다. 오직 낭떠러지의 경험으로부터 반추되었을 때에만, 평지에서의 경험이 생소한 무엇으로 우리에게 부각될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장자의 스타일이다. 47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부각시킨 것은, 낭떠러지의 경험을 일종의 차이의 경험으로서 도입했다는 점이다. 차이를 도입하기! 그리고 낯섦을 발생시키기! 바로 이 점이 장자의 땅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47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 「소요유」 48

 

장자에게 있어 송나라 사람이라는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장자』에 송나라 사람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더욱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장자의 치열한 자기 비판의식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49

 

진정한 여행은 차이를 가로질러야만 한다. 곤이라는 물고기와 대붕이라는 새 사이의 차이, 친숙하고 안정적인 평지와 아찔한 구만리 창공 사이의 차이, 그리고 대붕이 탄생했던 북쪽과 대붕이 날아가려는 남쪽 사이의 멀고 먼 차이!

  차이를 가로지르는 운동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가라티니 고진(谷行人, 1941~ ) 이라면, 바로 이런 운동을 가리켜 자신의 말대로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53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즉 의심하는 주체는 시스템과 시스템, 또는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나타난다. 사이’(interstice)는 단지 차이’(DIFFERENCE)로서 존재하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긍정적으로 말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해진 순간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초월론적인 장소(transcendental topos), 즉 트랜스크리틱을 허용하는 공간이다.-고진, 『트랜스크리틱』 53

 

고진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차이에서, 즉 프랑스와 암스테르담 사이의 차이에서 의심하는 주체인 코기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경우 낯섦을 경험하고 있던 데카르트는 자신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다. 코기토와 차이의 문제를 함축하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암스테르담 사이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정황이 된다. 고진에게 있어 코기토는 “”시스템과 시스템, 혹은 공동체와 공동체의 차이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는차이의 주체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트랜스크리틱이란 결국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차이에 서서, 두 공동체를 성찰할 수 있는 철학적 운동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54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이런 점이다. 무명을 빨던 송나라 사람이 특정한 시스템 안에 매몰되어 있던 존재라면, 비법을 사들인 이방인은 시스템과 시스템 사이를 횡단하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비법을 팔라는 이방인의 제안을 받고 송나라 사람은 기족을 모두 불러 놓고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한다. 그러나 사실 송나라 사람은 자신의 가족들과 의논할 필요가 애초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동일한 시스템 안에 속해 있고, 따라서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고 있는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이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와 토론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와 토론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집단적으로 재확인하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57

 

고진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송나라 사람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는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은 특정한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차이의 주체, 즉 코기토가 결코 발생할 수 없다. 이 점은 송나라 사람이 자신이 속한 시스템을 바깥에서부터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반면 이방인은 송나라와 오나라의 사이, 혹은 월나라와 오나라의 사이에 서 있던 존재이다. 그는 바로 이 경계 지점에서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이 이방인이 진이 말한 차이의 주체, 혹은 코기토를 대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조망의 능력 때문이다. 57

 

 

3_가장 심각한 철학적 문제, 타자

 

사실 타자라는 범주는 차이라는 범주보다 우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독한 자아 혹은 유아론적 자아에게는 차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고, 단지 공허한 동일성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침으로써만 우리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타자를 낯설게 경험하는 만큼 자신도 낯선 무엇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장자가 차이와 낯섦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타자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60

 

월나라 사람들이 진정 송나라 상인에게 타자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송나라 상인이 속한 공동체 혹은 시스템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자로서 월나라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란 우선 나와는 다른 공동체 혹은 나와는 다른 시스템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60

 

제가 당신과 논쟁을 했다고 합시다. 당신이 저를 이기고 제가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당신은 정말 옳고 저는 정말 그른 것일까요? 반대로 제가 당신을 이기고 당신이 저를 이기지 못한다면, 저는 정말 옳고 당신은 정말 그른 것일까요? 또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린 것일까요? 아니면 두 쪽이 모두 옳거나 두 쪽이 모두 그른 경우는 없을까요? 당신이나 저 모두 알 수가 없다면, 이 논쟁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도 헷갈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런 당혹스런 사태를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해 보라고 한다면, 이미 저와 의견이 같은데 그가 어떻게 올바로 판정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과도 다르고 저의 생각과도 다른 사람에게 판정해 보라고 한다면, 이미 당신이나 저와 생각이 다른데 그가 어떻게 올바로 판정할 수 있겠습니까? – 「제물론」61

 

장자는 우리에게 타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란 어떤 합리적 수단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애초에 논쟁의 해결과 타자와의 만남이란 사건은 양립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타자와 마주쳤을 때 우리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낯섦과 차이는 끝내 해소될 수 없다는 말인가? 장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대붕이 될 수 있고, 마침내 타자와 소통할 수도 있다는 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입장이었기 떄문이다. 64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과제를 자신의 철학적인 문제로 끌어안고 집요하게 사유했던 사람이다. 65

 

비트겐슈타인도 근본적으로 낯섦과 차이를 도입함으로써 타자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선교사들과 원주민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양자 사이의 마주침! 선교사와 원주민은 각각 다른 공동체에 속해 있고 따라서 그들이 따르고 있던 규칙 또한 상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6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선교사는 기독교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들을 원주민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그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가겠는가?” 결국 마지막에는 논증이 아닌 정서적인 설득의 과정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타자로 남아 있는 한 설득이란 것 역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양자는 결국 서로 싸울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매번 타자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타자 앞에 서면 그와는 어떤 소통의 가능성도 모두 차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타자에 대한 레비나스의 생각이 빛을 발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레비나스, 『시간과 타자』67

 

나와 타자는 관계를 맺지만 동시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와 마추쳤다는 점에서 나는 타자와 관계를 맺은 것이지만, 한편 타자는 나에 대해 전적으로 외재적이므로 나는 결국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은 타자와의 관계가 역설적이게도 관계 아닌 관계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68

 

어느 경우든 타자의 발견이란 사건은, 나 자신이 나만의 규칙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이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이나 레비나스를 넘어서는 어떤 측면이 있었다. 장자는 우리가 타자와 적절히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사유했기 때문이다. 68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不得已에 의존해 중()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인간세」69

 

장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규칙을 수레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장자는 타자를 수레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자신이 익숙하게 타던 수레를 버리고 새로운 수레를 탄다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설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우리에게 수행하라고, 그리고 그 위험을 감당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69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새로운 자동차의 속도에 맞추어서 새로운 균형 감각, 즉 중()을 기르는 것뿐이다. 만약 새로운 자동차에서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자동차와 소통하는 데 이른 것이다. 70

 

우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신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무의식적으로 따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힘들다. 오직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특정한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따랐던 삶의 규칙은 이제 대상화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71

 

투르니에와 마찬가지로 장자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던 삶의 규칙에 대해 전혀 반성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또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겠는가? 로빈슨이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까지 자그마치 28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79

 

인터메조1 장자에 대한 오해 그리고 진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노자의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는 『노자』라는 책에 최초로 주석을 붙인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법가사상가 한비자라는 사실이다. 83

 

직접 『노자』를 읽어보면 우리는 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했다는 노자와는 전혀 다른 노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국가주의(statism)을 지향하고 있는 정치철학자로서의 노자이다. 그가 권하고 있는 무위(無爲)나 무사(無事)는 단순히 인간의 인위적 욕심을 버리고 자연과 합일되는 생활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위와 무사는 천하(天下),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려는 황제에게 권고되는 분명한 통치의 방법이었다. 바로 이 점이 한비자가 주목했던 부분인 것이다. 84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국가가 중시하는 어떤 가치보다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장자가 주는 답은 분명하다. 그는 국가가 제공하는 일체의 안락보다는 개체의 고유한 삶이 주는 경쾌함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장자가 자연과의 황홀한 합일을 도모했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면서, 국가주의에 의해 포획되는 삶을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신비한 합일을 꿈꾸는 자에게는 국가와 정치의 문제가 심각한 고민의 대상으로 부각조차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 그리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꿈꾸는 실존적 고민으로부터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85

 

노자와 장자는 모두 춘추전국시대가 던져 준 문제, 즉 어떻게 하면 갈등과 살육의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절실하게 고민했던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의식과 해법은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살육과 분쟁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서 노자가 철저한 국가주의를 선택했다면, 장자는 국가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개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제공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상을 묶는 데 사용되는 도가사상이나 노장사상이란 범주는 실제거인 것이 아니라 단지 사후에 구성된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87

 

장자의 철학을 노자의 사유로 읽어내려는 것, 즉 아나키즘을 국가주의로 독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데서부터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나키즘은 철학적으로 초월주의가 아닌 내재주의라는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87

 

우리는 그 대답의 실마리를 사마천 본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장자사상의 요점이 노자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마천은 『장자』의 외ㆍ잡편만이 노자철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역으로 보면, 사마천이 이미 『장자』의 내편은 노자철학과 연결되기 어려운 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91

 

장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유는 모두 개체의 삶보다는 초월적 이념을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삶의 유쾌함을 부정하고 죽음의 우울함 혹은 초월적인 가치를 숭상하는 철학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초월적 이념을 표방하는 모든 태도를 이라고 비유하면서, 반드시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93

 

장자는 무엇보다도 개체의 삶을 위해서 국가주의를 거부했던 사상사골 기억될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는 모든 초월적 이념들의 최종적인 안식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가 자신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초월적 이념들을 선택하고 그 속에 자신을 숨기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최종적인 꿈으로 정치적인 위계질서, 즉 국가주의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가 모색한 삶의 철학이 노자의 국가주의 철학과 섞이게 된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94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제, 『임제어록』

 

임제에게 있어 해탈이란 거짓된 이념들을 벗어던지는 것, 즉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깨달은 자, 즉 부처를 만나면 우리 자신은 깨닫지 못한 자라는 자리〔位〕에 서게 된다. 스승을 만나면 우리는 제자라는 우리에 서게 된다. 부모를 만나면 자식이라는 자리에 서게 되고, 삼촌을 만나면 조카라는 자리에 서게 된다. 이렇게 선택된 우리의 자리는 모두 열등한 자리,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자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만난 것들을 탁월한 것,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로부터 우리의 삶은 부족한 것으로, 태생적으로 결핍되어 있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98

 

 

2부 해체와 망각의 논리

4_성심(成心), 그 가능성과 한계

 

바닷새 이야기는 우리를 장자철학의 핵심으로 이끌어 준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쟁점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하나는 타자라는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선입견이라는 쟁점이다. 그러나 두 쟁점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타자의 발견은 항상 자신의 선입견이 좌절되는 경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신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타자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존재이다. 이 말은 결국 타자가 자신의 선입견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타자와 소통할 때 자기 삶의 규칙에 따라 관계하려고 한다면, ‘바닷새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다. 아무리 새를 사랑한다고 자신하더라도 이런 확고한 자신의 판단과 애정이 오히려 새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나라 임금은 새 역시 사람을 양육하듯이 키우면 잘 자라겠지라고 믿는 자기 선입견의 노예였던 셈이다. 105

 

장자는 우리의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를 따지는 마음 자체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것을 유명한 성심’(成心)의 논의로 명료화했다. 글자 그대로 구성된〔成〕 마음〔心〕을 의미하는 성심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살도록 내던져졌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기존 공동체의 흔적이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06

 

가령 부르디외의 경우라면 장자가 말한 성심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을 것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공동체에 살고 있는 개체들은 아비투스라는 무의식적인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개체의 판단, 선택, 취향 등은 표면적으론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109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배치를 의미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란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장자의 성심이 타자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흔적 혹은 주름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112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é)이다. 112

 

 

5_꿈의 세계에서 삶의 세계로

 

직접적으로 성심 이야기를 통해서 장자는 두 가지 문제를 숙고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성심으로 불릴 수 있는 아비투스를 가진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에 무수히 많은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가 분명하게 지적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통찰로부터 초월을 지향하는 일체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비판할 수 있었다. 122

 

유아론이란 타자가 배제된 담론 일반을 가리킨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유아론적 사유에서도 타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아론  속에서의 타자란 진정한 타자, 즉 타자성을 가진 우연한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 때 타자란 주체의 생각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에게서 이란 자신이 특정한 시스템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그 시스템을 모든 것에 적용시키려는 환상을 의미한다. 그에게 꿈은 하나의  성심을 통해 모든 타자와 관계하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착각을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125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타자를 관조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자는 결연한 의지, 따라서 어떤 타자와도 직대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125

 

이런 임계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는 자신의 생각을 타자에게 그대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꿈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타자가 속한 시스템의 규칙을 배우면서 새로운 주체로 변형되는 삶의 길이다. 여기에서 장자의 선택은 명확하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꿈의 길, 다시 말해 형이상의 길을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든가 아나면 타자의 삶을 파괴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이다. 132

 

처벌만으로는 개체들을 공동체의 규칙에 완벽하게 편입시킬 수 없다. 오히려 개체들로 하여금 목숨을 건 투쟁을 유발하도록 만들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벌에 대한 공포는 상에 대한 강력한 욕망에 의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상에 대한 욕망은 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리고 벌에 대한 공포는 악에 대한 죄의식으로 내면화된다. 니체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내면화의 과정이 완성되면서 우리는 죄의식을 가진 도덕적 주최로 탄생하게 된다. 마침내 이런 방식으로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인 가치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삶과 유사한 어떤 것을 영위하게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135

 

 

6_새로움의 계기, 망각

 

성심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로 자의식이다. 우리의 자의식은 타자와 조우하면 동요되고 와해되는 경험을 겪는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성심을 우리가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39

 

타자와 마주쳐야 비로소 판단중지가 발생하고, 판단중지가 일어나야 우리는 비로소 타자가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것을 양행(양행)’이란 개념으로 명료화한다. 다시 말해 타자성 그리고 판단중지와 관련된 두 가지 원리〔兩〕는 함께 적용될 〔行〕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양행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이다. 140

 

이렇게 조삼모사 이야기후반부에서 장자가 강조한 양행의 실천 원리는 “’옳고 그름으로써 대립을 조화시키고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편안해 한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간명하게 표현된다. 옳고 그름에 관한 타자의 판단에 근거함으로써 우리는 타자와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수있다. 이것이 바로 인시(因是)’의 의미이며 결국 타자성의 원리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옳고 그름의 특정한 사태는 타자의 결에 따라 언제든 민감히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장자는 이런 마음이 자신의 판단을 비워 두는 것, 즉 부단한 판단중지의 사태로부터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리, 즉 타자의 시비 판단에 따르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마음을 비워 두는 것은 상호 필수불가결한 원리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장자는 두 가지 원리의 병행인 양행을 강조했던 것이다. 144

 

장자의 도추라는 개념에서는 회전하는 문을, 그리고 천균이란 개념에서는 회전하는 물레의 이미지를 비유로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경우에서 모두 중요한 것은 회전이라는 이미지이다. 회전한다는 특성은 도추천균이 가리키는 판단중지의 상태가 매우 역동적이고 부단한 상태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148

 

장자는 이런 판단중지의 상태를 비움〔虛〕이나 망각〔忘〕이란 개념으로도 이야기한다. 149

 

니체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망각이란 것을 일종의 백치 상태 혹은 단순한 기억력 저하의 상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망각이란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힘, 기억을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49

 

이제 우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장자의 양행이란 것이 결국 사자의 원리인 동시에 아이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양행은 사자처럼 기존의 모든 사유를 판단중지하고, 아이처럼 언제든 타자와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천균도추개념에서 드러난 망각과 회전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순진무구함과 망각그리고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라는 니체의 어린아이 이미지를 보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151

 

우리는 대개의 경우 타자성의 경험 단계로부터 판단중지 상태에 이르기보다, 오히려 판단중지의 상태를 미리 확보함으로써 타자성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151

 

탈중심적인 존재로서 단독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망각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이 점에서 망각은 우리의 삶에 일종의 공백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망각이란 항상 비움〔虛〕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공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157

 

 

인터메조2 장자를 만든 사유흐름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은 적고 얕은 것이다’, 정욕과천(정욕과천)’이란 주장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이 주장은 단순히 우리의 기본적인 욕망이 적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 욕망이 결코 본질적인 욕망〔情欲〕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는 데 있다. 165

 

송견에 따르면 이런 자기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비본질적이고 허구적인 욕망을 마치 자신이 처음부터 타고난 본질적인 욕망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서로를 파괴하는 다툼과 전쟁에 휘말려 들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나 사회가 더욱 강화시키고 조장하는 비본적인 욕망들, 즉 허구적 욕망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상호파괴적인 전쟁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본질적인 사회적 욕망을 본질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선입견〔宥〕 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으로부터 결별〔別〕을 촉구했던 것이다. 166

 

사회에서 성공하자고 하는 욕망,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이 우리에게 있는 본질적인 욕망이 결코 아니라, 사회에서 증폭시킨 허구적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66

 

송견은 타자와 갈등하고 대립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으로 모욕을 받아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준칙을 제안하엿다. 모욕을 당한 수치감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품으면서,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보통 우리는 남이 모욕을 하면 수치심을 느끼고 남이 칭찬을 하면 흥분하고 기뻐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수치심과 명예욕이라는 욕망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잇다고 추론하기 쉽다. 그러나 송견에게 있어 이것은 위계적 사회에 살면서 불가피하게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 구조에 불과한 것이다. 167

 

이제 송견이 정욕과천이란 주장과 별유를 강조했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사회적으로 증폭된 욕망과 선입견으로부터 결별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송견의 이런 생각은 국가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심지어는 국가주의의 핵심 치부를 건드리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주의는 부족한 재화에 비해 인간의 욕망이 너무도 크다고, 그래서 갈등이 불가피하다고 선전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불가피한 갈등의 논리가 국가의 개입을 매번 정당화해 준다는 점이다. 168

 

세 명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타자라는 문제 설정으로 종합했던 것, 그것이 바로 장자철학의 고유함이다. 장자의 사유가 다음 세 가지 층위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양주와 관련된 테마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만 긍정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둘째는 송견과 관련된 테마로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화하여 갖게 된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셋째는 헤시와 관련된 테마로서, 내면화된 선입견을 제거하기 위해서 논리적 해체 방법을 적절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175

 

 

3부 삶의 강령과 연대의 모색

7_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장자에 따르면 우리가 타자를 지각하는 데는 세 가지 형태의 방법이 있다. 첫째는 귀로 상징되는 감각적인 인식이다. 둘째는 마음으로 상징되는 일상적인 의식 작용이다. 마지막 셋째는 기()로 상징되는, 감각과 사변을 넘어서는 인식의 형태이다. 184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자신에게 부합되는 것만을 알뿐이지만 기는 비어서 타자와 마주치는 것” 184

 

미세지각 이론을 설명하면서 라이프니츠는 폭포 떨어지는 소리를 비유로 든다. 사실 폭포 떨어지는 소리는 무수히 많은 물들이 떨어지면서 내는 미세한 소리들이 합쳐서 나는 소리가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미세지각 차원의 소리들이 결합된 전체 교향곡을 듣고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185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물론 개체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증진시킬 수 잇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사실 매우 자명한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동시에 혁명적인 생각을 함축한 주장이기도 하다. 한 개체의 존재를 유지시킬 수 없는 관계는 지속될 이유도 없고, 또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는 강한 전제를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0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꿈이라고 조롱했을 때, 장자가 의도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만약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아비투스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꿈이라고 조롱받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존의 모든 공동체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자는 항상 새로운 관계, 즉 자유로운 연대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

 

이제 우리는 심재 이야기를 통해서 장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셈이다. 그는 우리게 간결하지만 심오한 삶의 강령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바로 이 때문에 장자의 슬로건은 소통(疏通)이라는 한 개념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개념은 막힌 것을 터버린다’() 개념과 타자와 연결한다’()이란 개념의 합성어다. ‘트임이라는 타자로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개념은 결국 비움이라는 망각의 수양론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비워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잇는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비움은 타자에게로 비약할 수 있는 가벼움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195

 

 

8_소통의 흔적, ()

 

성인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동시대의 타자들과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삶의 달인들이었다. 결국 성인이란 존재는 초월보다도 포월의 결과였던 셈이다. 여기에 성인의 진정한 심오함이 있다. 이것은 김진석의 말을 따른다면 수평적 움직임과 함께 일어나는”, 타자와 소통하므로써 발생하는 심오함이다. 소통에서 발생하는 심오함에서 타자와 마주쳤다는 사실이 간과될 때, 포월의 심오함은 곧 초월의 심오함으로 변질된다. 경전을 보편적인 진리로 확신했던 환공이 빠졌던 오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성인의 지혜가 타자와 소통한 결과로 발생한 것일 뿐임을 모르고서, 성인의 지혜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비화했기 때문이다. 205

 

전통 형이상학자들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근거, 의미, 필연성, 목표를 마치 신처럼 절대화해 버렸다.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만들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에 부여된 이런 의미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오직 이런 공백을 가지게 될 때에만 우리는 새로운 마주침을 끈덕지게 지속시키면서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7

 

그렇지만 매번 근육과 뼈가 닿은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라는 포정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그는 타자의 미세한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자성에 다시 한번 온몸을 내던지려고 시도한다. 외부가 없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자가 없을 때, 우리의 소통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215

 

9_자유로운 연대를 꿈꾸며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이 인상적인 강령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쟁점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역사성(historicity)이란 쟁점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community)와 관련된 것이다. 기존 시스템의 규칙을 망각하고 타자와 새롭게 연결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삶에 새로움을 도입하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새로움의 도입,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러나 역사성이라는 테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대라는 문제, 다시 말해 장자가 꿈꾸었던 새로운 공동체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18

 

그가 망각을 사유했던 것도 새로운 연결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장자의 사유는 표면적인 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정치적이며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218

 

루소에 따르면 권력 관계, 즉 주종 관계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이에 근거한 결핍의 발생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결핍된 자들 스스로 이런 결핍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 있다. 마치 자신은 본성상 결핍된 존재인데, 이런 결핍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잇 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이 바로 결핍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221

 

노력과 힘을 의미하는 코나투스는 스피노자의 용어이다. 『에티카』에는 다음과 같은 정리가 등장한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덕지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 사물의 현실적인 본질이다.” 바로 이 노력이 코나투스를 의미한다. 224

 

알튀세르의 코나투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것은 개체가 자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기 앞을 비워 두려는 힘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는 개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개체는 자신을 규정하는 기존의 공동체적 형식을 비워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25

 

장자에 따르면 자발적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 , 아름다움 등의 초월적 가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결국 그가 국가주의를 자발적 연대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의 하나로 인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흥미롭게도 장자의 이런 통찰은 군주제의 비밀을 폭로하려는 스피노자의 정신 속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228

 

국가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진단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228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도한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타자와 마주쳐서 마음에 봄이라는 때를 생성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덕충부」233

 

장자가 권하고 있는 소통의 원리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즐거움과 동시에 연대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비움이라는 망각의 수양론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포함한 일체의 꿈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되찾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바로 이 지점으로붙 우리의 삶은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연결이라는 실천적 강령을 통해서 타자로 하여금 삶을 되찾도록 하고, 나 또한 그와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의즐거움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與物爲春〕는 장자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 표현에는 장자철학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234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개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우발적인 마주침에는 이론상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코나투스가 억제되는 마주침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우리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마주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에서 슬픔, 그리고 후자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장자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도 기쁨이란 마주침으로부터 유래하는 삶의 고양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235

 

 

에필로그_겨울바람을 뒤로 하고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소음일 뿐이다. 241

 

비워짐은 열림과 동의어이다. 비워질 때에만 나는 마주치는 타자를 내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법이다. 내 마음의 피리는 오직 그 경우에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오직 이럴 때에만 나는 진정한 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소통해서 만들어지는 연결과 연대의 아름다고 흥겨운 하모니! 242

 

장자가 비우거나 망각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소음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소음들이 우리 자신이 가진 삶의 힘으로부터 표현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이념의 지배를 받을 때 발생한 신음소리라는 점이다. 243

 

비움이나 망각에서 우리는 허무주의적인 비관론을 읽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비워야 하고 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하도록 만드는 일체의 초월적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244

 

비움이나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긍정성을 되찾도록 해 준다. 그러나 긍정적인 삶은 고독 속에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개체들의 새로운 연결이나 연대를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 244

 

 

보론 1. 『장자』읽기의 어려움

 

서양의 연구 경향은 주로 인식론적 맥락에서 장자에 접근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연구 경향에 따르면 장자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그리고 진짜와 허구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서양 연구자들은 장자의 철학을 회의주의(skepticism)나 상대주의(relativism)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253

 

절충주의자들은 하나의 근원적인 메타포를 가지고 제자백가 사상사, 즉 고대 중국 철학사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체의 메타포이다. 하나의 전체로서 신체에는 귀와 눈과 같은 다양한 기관들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관들의 다양성과 신체의 전체성 사이에 놓인 분명한 대립이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는 다자(多者)와 일자(一者) 사이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이다. 263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사항실천해야만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을 일종의 판단중지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런 마음 상태로 타자의 소리에 민감하고 역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273

 

 

보론 2. 노자와 장자가 다른 이유

 

그들이 처음 도가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인 것은 『사기』『회남자』가 구성된 시기이다. 이 작품들은 지방분권적 세력(혹은 공신ㆍ기득권세력)과 중앙집권적 세력이 생사를 걸고 싸우던 시대, 즉 한나라 초기에 쓰인 저술들이다. 당시 지방분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노자의 사상으로 정당화했고, 반면 중앙집권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자의 유학사상으로 정당화했다. 275

 

『노자』는 81장으로 구성된 철학시(philosophical poem)라고 할 수 있지만,『장자』라는 텍스트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야기책이다. 두 책의 이런 문체상의 차이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두 텍스트의 문체적 특징을 통해서 우리는 두 권의 책이 누구를 위하여 쓰인 것인지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운문의 성격도 그렇고 난해한 형이상학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노자』의 독자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층, 즉 통치자나 통치계층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장자』는 흥미로운 이야기 형식,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강렬한 소설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백정, 불구자, 나무꾼, 목수, 뱃사공, 농부 등 일반 민중들이 대다수이다. 장자는 오히려 못나고 가진 것 없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회에서 흔히 비난받을 만한 사람들을 중요한 등장인물로 삼았던 셈이다. 278

 

()에는 영원히 이름이 없고 소박해서 비록 작아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히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통치자들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와서 복종할 것이고, 하늘고 땅은 서로 부합되어 단비를 내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민중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가지런해질 것이다. -『노자』(백서본) 279

 

여기서 우리는 노자의 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겠다. 도란 민중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일관된 통치의 방법 혹은 원리를 의미한다고.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노자가 통치자와 민중이라는 위계질서를 자명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그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장자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279

 

도를 하는 자는 날마다 덜어낸다. 덜고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장차 천하를 취하려고 한다면 항상 무사(無事)로서 해야 한다. -『노자』(백서본) 284

 

 

덜고 덜어냄이란 초월’(transcendence)의 움직임이자 내성’(introspection)의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는 가지들로부터 보이지 않은 뿌리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초월적인 운동이 된다. 가지의 가지됨을 덜어내면서 가지의 내면에 함축되어 있는 뿌리를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내성적인 운동이 된다. 만약 이런 전망 하에서라면 우리는 타자를 눈여겨 볼 필요가 전혀 없다. 타자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극복되어야 할 가지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자의 사유가 운동하는 방식인 초월내성에서 일종의 유아론(solipsism)을 직감할 수밖에 없다. 하긴 모든 형이상학과 종교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유아론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달리 장자의 사유는 유아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잇는 사유이다. 그는 타자 그리고 소통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핵심으로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84

 

 

. 내가 저자라면

 

노자와 장자, 줄여서 노장사상이라고들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장자를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후계자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작년 이맘 때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읽지 않았더라면, 『강의』에 이끌려 연이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읽지 않았더라면 장자의 사상 안에 인생의 화두로 삼을 만한 소통의 키워드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책의 구성

고전을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는 리라이팅 클래식시리즈(그린비 출판사)로 출간된 이 책은 장자를 현실참여적인 실천철학가로 재해석한다. 1장자와 철학에서는 타자와 나의 관계를 분석하고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불가능한 듯 보이는 과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2해체와 망각의 논리에서는 바닷새 이야기조삼모사 이야기를 통해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거쳐야 할 타자성과 판단중지의 원리를 설명한다. 3삶의 강령과 연대의 모색에서는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는 강령에서 보듯이 기존 시스템의 규칙을 망각하고 타자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노력이 타자와 나에게 개인적인 즐거움과 연대의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전망한다. 보론1 2에서는 텍스트로서 장자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철학 경향들과 노자와 장자의 구조적 차이점을 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른 장자 관련 책과의 차별성

 

책의 주제를 타자와 나의 소통(疏通)으로 구체화하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을 활용하여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 ’장자 사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거나, 장자의 오리지널 서적을 주해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대중의 관심과는 괴리된 학술서적으로 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장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었고 이를 대중이 알아들을 만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커다란 장점으로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는 장자의 사상과 관련된 동서양의 철학을 폭넓게 다루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철학 VS 철학』에서 보여준 바 있는 동서양에 걸친 방대한 철학적 탐구 작업을 바탕으로 장자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의 안내를 통하여 나는 장자와 유가, 장자와 노자는 물론이고, 장자와 니체, 장자와 스피노자, 장자와 들뢰즈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이 책의 강점은 장자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노자의 후계자 혹은 호접몽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사상가로 알려진 장자를 현대사회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인 소통과 연계하여 연대의 실천철학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한 것은 참신한 시도였고 그 내용 또한 만족스러웠다. 다만, 장자에 대한 지식이 미천하여 저자의 시각을 객관화하여 고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부분은 장자와 나의 소통 채널을 지속적으로 넓혀 가며 해소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IP *.23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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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2 11:36:57 *.230.26.16
전혀 접하지 못했던 영역을 읽는 즐거움을 주셨네요. 감사 ^^
너무 멀게만 느껴지던 장자를 읽고 싶은 이로 바꾸어 주셨으니 또한 감사 ^^
나와 다른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기회가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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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1.23 09:04:52 *.123.110.13
한페이지 단편소설 사이트입니다. 

형의 소설을 이곳에 기고해 보심이.
 http://www.1page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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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1.23 18:40:22 *.42.252.67
장자를 읽고 싶었는데 일단 여기서 맛을 좀 보고 간을 봐야겠어.
시간이 없어서서리.....
좋았던 것 같군. 나중에 나도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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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1.23 10:04:02 *.236.3.241
고맙다. 잘 참고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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